조선왕조실록/내용

 




1. 개요


조선왕조실록 중 흥미로운 일화 등을 모은 문서. 왕이나 신하, 혹은 사관 등 발언주체를 가리지 않고 정리하였다.

2. 태종실록


친히 활과 화살을 가지고 말을 달려 노루를 쏘다가 말이 거꾸러짐으로 인하여 말에서 떨어졌으나 상하지는 않았다. 좌우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사관(史官)이 알게 하지 말라." 하였다.

태종 4년(1404) 2월 8일 4번째 기사

즉 태종이 사냥을 갔다가 말에서 떨어진 이야기와, 그 떨어진 이야기를 하지 말라고 한 이야기까지 모두 사관이 기록을 했다는 의미이다. 실록을 집필한 사관이 얼마나 꼼꼼하게 집필에 임했는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일화이다.
특히 사관 민인생은 태종을 스토커마냥 집요하게 따라다녀 태종실록에 여러번 기록되었는데,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 조준(趙浚)·좌정승 이거이(李居易)·우정승 하윤(河崙) 등이 들에 설치한 악차(幄次)에서 연향을 베풀었다. 임금이 무신(武臣) 10여 인을 거느리고 강 연안에서 매를 놓고, 날이 저물어서 환궁하였다. 사관(史官) 민인생(閔麟生)이 뒤 따라 이르니, 임금이 보고 내수(內竪)에게 눈짓으로 무엇하러 왔느냐고 물었다. 대답하기를,

"신(臣)이 사관으로서 감히 직사(職事)를 폐할 수 없기 때문에 온 것입니다. "

하였다. 총제(摠制) 이숙번(李叔蕃)이 아뢰기를,

"사관의 직책이 매우 중하오니, 원컨대 묻지 마옵소서."

하였다.

태종 1년(1401) 3월 18일 2번째 기사

편전(便殿)에서 정사(政事)를 들었다. 사관(史官) 민인생(閔麟生)이 들어오려고 하므로, 박석명(朴錫命)이 말리면서 말하기를,

"어제 홍여강(洪汝剛)이 섬돌 아래[階下] 들어왔었는데, 주상께서 말씀하시기를, ‘무일전(無逸殿) 같은 곳이면 사관이 마땅히 좌우에 들어와야 하지마는, 편전에는 들어오지 말라.’고 하시었다."

하였다. 인생이 일찍이 전지(傳旨)가 없었으므로 마침내 뜰[庭]로 들어왔다. 임금이 그를 보고 말하기를,

"사관이 어찌 들어왔는가?"

하니, 인생이 대답하기를,

"전일에 문하부(門下府)에서 사관이 좌우에 입시하기를 청하여 윤허하시었습니다. 신이 그 때문에 들어왔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편전에는 들어오지 말라."

하니, 인생이 말하기를,

"비록 편전이라 하더라도, 대신이 일을 아뢰는 것과 경연(經筵)에서 강론하는 것을 신 등이 만일 들어오지 못한다면 어떻게 갖추어 기록하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웃으며 말하기를,

"이곳은 내가 편안히 쉬는 곳이니, 들어오지 않는 것이 가하다."

하고, 또 인생에게 말하기를,

"사필(史筆)은 곧게 써야 한다. 비록 대궐[殿] 밖에 있더라도 어찌 내 말을 듣지 못하겠는가?"

하니, 인생이 대답하였다.

"신이 만일 곧게 쓰지 않는다면 위에 하늘이 있습니다."

태종 1년(1401) 4월 29일 1번째 기사

사관(史官)이 6아일(六衙日)의 시조(視朝) 때에 입시(入侍)하라고 명령하였다. 처음에 임금이 편전(便殿)에 좌기(坐起)하였는데, 민인생(閔麟生)이 호외(戶外)에서 엿보았다. 임금이 이를 보고 좌우(左右)에게 묻기를,

"저게 어떤 사람인가?"

하니, 좌우가 대답하기를,

"사관 민인생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노하여 박석명(朴錫命)을 시켜 전명(傳命)하게 하였다.

"이제부터 사관이 날마다 예궐(詣闕)하지 말라."

태종 1년(1401) 7월 8일 2번째 기사

민인생(閔麟生)을 변방에 귀양보내었다. 문하부(門下府) 낭사(郞舍)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러하였다.

"예전에 열국(列國)이 각각 사관(史官)이 있어, 항상 임금의 좌우에서 언행과 정사를 갖추 기록하지 않음이 없어 후대의 권계(勸戒)를 삼았습니다. 지난번에 신 등이 이것을 직접 계달하여 곧 유윤(兪允)을 받아 사관으로 하여금 날마다 좌우에 입시(入侍)케 하였는데, 가만히 듣건대, 사관은 아일(衙日)의 정사를 듣는 때 이외에는 입시하지 말도록 하시었다 하오니, 이것이 어찌 전하의 본심(本心)이겠습니까? 이것은 사관이 적임자가 아니어서, 나아가고 물러감[進退]에 예(禮)를 잃어서 성념(聖念)을 움직인 소치입니다. 한 사관이 실례한 까닭으로 하여 마침내 만세의 좋은 법을 폐하시니, 신 등은 전하를 위하여 애석히 여깁니다. 원컨대 사관으로 하여금 매일 일을 아뢸[啓事] 때마다 따라 나오고 따라 물러가게 하여 모범을 만세에 남기소서. 사관 민인생은 입시할 때를 당하여 여러 번 예(禮)를 잃어서 휘장을 걷고 엿보기까지 하였으니, 불경하기 심합니다. 원컨대 유사(攸司)로 하여금 그 직첩(職牒)을 거두고 외방에 귀양보내게 하소서."

태종 1년(1401) 7월 11일 1번째 기사

결국 민인생은 임금의 개인 사무실인 편전을 도청하듯 엿들어 예를 갖추지 못 했다는 죄목으로 귀양당했다.

사헌부 대사헌 정역(鄭易)이 사관(史官)을 조계(朝啓)에 입시(入侍)하기를 허락하도록 청하였다. 계문(啓聞)은 이러하였다.

"매양 조계 때마다 사관이 직필(直筆)을 잡고도 유독 참여하지 못하오니, 신은 전하의 가언(嘉言)·선정(善政)이 혹시 후세에 다 전해지지 못할까 염려됩니다."

임금이 대답하지 아니하였다. 조회에서 물러나, 임금이 김여지(金汝知) 등에게 일렀다.

"예전에 사관(史官) 민인생(閔麟生)이 경연 때 병풍 뒤에서 엿듣고, 곧장 내연(內宴)으로 들어왔었다. 또 내가 들에 나가 매사냥을 할 때 얼굴을 가리우고 따라왔으니, 이런 것은 모두 음흉한 짓이다. 지난해에 또 한 사관(史官)이 곧장 내전으로 들어오므로 그 뒤로는 들어오지 못하게 한 것인데, 지금 정역의 말이 어찌 주무(綢繆)하다 하겠느냐? 만약 기사(記事)로써 말한다면, 대언(代言) 등이 모두 춘추(春秋)의 직임을 맡았으니, 이렇다면 대언이 기사(記事)하기 싫어서 정역을 사주하여 나에게 고하게 한 것이다."

김여지 등이 대답하였다.

"신 등이 어찌 감히 말하겠습니까? 신이 저번에 청한 바 있었고, 사간(司諫) 이육(李稑)도 일찍이 그런 말을 하였은즉, 정역이 듣고 이 같은 청이 있었는가 합니다."

태종 12년(1412) 11월 20일 2번째 기사

귀양시키고 11년이나 지나고, 업무 보고 시간인 조계에 사관을 들이자는 말에 반대하며 민인생이 사관으로 있을 때 했던 행동들을 다시 언급했다. 민인생 때문에 어지간히 스트레스를 받은게 아닌가 보다.

3. 세종실록


(전략) "너희들이 이르기를, ‘음(音)을 사용하고 글자를 합한 것이 모두 옛 글에 위반된다.’ 하였는데, 설총(薛聰)의 이두(吏讀)도 역시 음이 다르지 않으냐. 또 이두를 제작한 본뜻이 백성을 편리하게 하려 함이 아니하겠느냐. 만일 그것이 백성을 편리하게 한 것이라면 이제의 언문은 백성을 편리하게 하려 한 것이다. 너희들이 설총은 옳다 하면서 군상(君上)의 하는 일은 그르다 하는 것은 무엇이냐. 또 네가 운서(韻書)를 아느냐. 사성 칠음(四聲七音)에 자모(字母)가 몇이나 있느냐. 만일 내가 그 운서를 바로잡지 아니하면 누가 이를 바로잡을 것이냐. 또 소(疏)에 이르기를, ‘새롭고 기이한 하나의 기예(技藝)라.’ 하였으니, 내 늘그막에 날[日]을 보내기 어려워서 서적으로 벗을 삼을 뿐인데, 어찌 옛것을 싫어하고 새 것을 좋아하여 하는 것이겠느냐. 또는 전렵(田獵)으로 매사냥을 하는 예도 아닌데 너희들의 말은 너무 지나침이 있다. 그리고 내가 나이 늙어서 국가의 서무(庶務)를 세자에게 오로지 맡겼으니, 비록 세미(細微)한 일일지라도 참예하여 결정함이 마땅하거든, 하물며 언문이겠느냐. 만약 세자로 하여금 항상 동궁(東宮)에만 있게 한다면 환관(宦官)에게 일을 맡길 것이냐. 너희들이 시종(侍從)하는 신하로서 내 뜻을 밝게 알면서도 이러한 말을 하는 것은 옳지 않다."

(중략)

"정창손(鄭昌孫)은 말하기를, ‘삼강행실(三綱行實)을 반포한 후에 충신·효자·열녀의 무리가 나옴을 볼 수 없는 것은, 사람이 행하고 행하지 않는 것이 사람의 자질(資質) 여하(如何)에 있기 때문입니다. 어찌 꼭 언문으로 번역한 후에야 사람이 모두 본받을 것입니까.’ 하였으니, 이따위 말이 어찌 선비의 이치를 아는 말이겠느냐.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용속(庸俗)한 선비이다."

하였다. 먼젓번에 임금이 정창손에게 하교하기를,

"내가 만일 언문으로 삼강행실(三綱行實)을 번역하여 민간에 반포하면 어리석은 남녀가 모두 쉽게 깨달아서 충신·효자·열녀가 반드시 무리로 나올 것이다."

세종 26년(1444) 2월 20일 1번째 기사

최만리를 필두로 훈민정음 창제에 대한 반대 상소를 올리자, 이에 대해 강하게 반론하는 세종대왕의 모습이다.
앞 내용은 최만리의 주장을 반박하는 부분이다. 본래 세종대왕은 평상시엔 방대한 기반 지식을 바탕으로 논리적인 논박을 행하였다. 그런데 이 때만큼은 논점을 살짝 회피하며 의견을 묵살하고 권위로 찍어누르는 매우 고압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다. 최만리의 훈민정음 창제 반대 상소에 대한 세종대왕의 반박인만큼, 해당 상소 내용을 같이 봐야 이해가 편하며 해당 부분은 최만리 문서를 참조할 것.
  • 설총의 이두: 세종대왕이 반박의 예시로 언급한 설총의 이두는 최만리가 미리 언급했다. 최만리는 상소문에서 이두와 한문이 겹치는 부분에 대해 충분히 설명했고, 이두는 한자를 기반으로 한 일종의 확장팩 내지는 MOD에 가까운 추가 개념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따라서 최만리는 이두를 단순히 '백성을 편리하게 함'이라는 목적만을 가지고 두둔하지는 않았다. 세종이 '목적'이 같다는 이유로 이두도 되니 훈민정음도 된다고 주장한 것은 논점을 빗겨간 것.

여기서 세종이 제대로 반박하려면 '이두가 한자를 기반으로 한 것이 아니다'라고 하거나 '훈민정음도 한자를 기반으로 했다'거나 혹은 '문자는 한자 자체를 근간으로 할 이유가 없다'고 주장했어야 했다. 하지만 첫째와 둘째는 완벽히 틀린 사실이며, 셋째는 아무리 세종대왕이었어도 당시의 한자 문화와 유교 기반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어물쩍 넘어간 것이다.
  • 운서(韻書)를 아느냐: 전형적인 '권위에 기대는 오류'다. 세종대왕이 최만리보다 음성학에 대해 더 잘아니까 새 문자를 만드는 자신의 행동은 정당하다는 것. 하지만 최만리의 상소를 보면 최만리는 훈민정음의 구조에 대해서는 완벽하다고 평가를 내렸다. 다만, 최만리는 훈민정음이 가져올 파장과 이로인해 찾아올 한문 교육의 붕괴, 나아가 유교 학문 연구의 단절을 우려한 것이다. 즉 '음성학 구조적 측면'이 아닌 '사회적 측면'을 가지고 비판한 것이기 때문에 이 부분은 필요 없는 논점이다.
  • 어찌 옛것을 싫어하고 새 것을 좋아하여 하는 것이겠느냐: 이 지적은 최만리가 "학문에 있어 새로운 것을 시도해 성공한 역사가 없습니다." 하는 지적에서 나온 반론인데 일단 훈민정음은 명백히 새로운 물건이다. 하지만 세종대왕은 훈민정음이 새로운 것이라는 지적에 자신이 옛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말을 내놓는다. 평소에 옛것을 좋아할 지언정 새로운 것을 시도할 수는 있으며, 설령 세종대왕이 매우 보수적이고 옛것만 옳다고 여기는 사람이라 해도 어쨌듯 훈민정음이란 것을 새롭게 내놓은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다.

결국 세종의 답은 완전히 논점을 이탈한 답변으로, 세종이 제대로 반박하고 싶었으면 '학문에 있어 새로운 시도를 해서 성공한 사례'를 들어 반드시 실패했다는 최만리의 주장이 틀렸음을 보임과 함께 나아가 훈민정음의 성공 가능성을 논해야 했다. 토론을 좋아하는 평소의 세종대왕이었으면 결코 하지 않는 답변 방식으로 그만큼 세종대왕이 최만리의 상소에 적잖게 흥분하였음을 보여준다.
이런 식의 논법은 세종대왕이 추구하던 토론과 논박을 통한 국정운영 방식과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자세고, 오히려 세종대왕의 아버지인 태종이 아주 잘 써먹었던 방법이다. 비논리적인 논박이 많다는 점에서 내심 세종대왕 본인 스스로도 최만리의 논점을 완벽하게 논리적으로 반박하기는 어렵다고 여겼음을 이 일화를 통해 엿볼 수 있다.
뒷 내용은 인터넷에 흔히 돌아다니는 '세종대왕이 대노한 일화'로 널리 알려져 있는 내용이다. 위의 최만리의 반대 상소에 대한 반응과 같은 날의 기사이다. 정창손이 훈민정음의 창제 의도는 물론이고, 공자자로로 대표되는 '''유교의 기본적인 교화 사상과 반하는 막말'''을 늘어놓자 세종대왕이 이를 인용하면서 한마디 하는 부분이다. 세종대왕으로선 오히려 최만리의 주장보다 이 정창손의 주장을 더욱 부정적으로 여길 수 밖에 없었다. 최만리 등 다른 신하들이 한 발언은 '반대 의견' 정도로 치부할 수 있고, 나름대로 논리를 갖춘 이성적인 주장이어서 함부로 반박하기 힘들어 일부러 권위로 찍어누르는 화법을 써야 했다. 하지만 정창손의 주장은 '''사람의 자질은 태어날 때부터 등급이 매겨져 있다'''는 내용으로, 유교를 국시로 하는 국가에서는 절대 해서는 안될 발언이었다. 현대로 치환하자면 '국민은 개돼지다'급의 민주주의를 무시하는 막말로, 내용 자체가 도저히 말이 안되는 주장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자료들과는 다르게 실록 원전에는 다소 정제된 언어로 적혀있지만,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용속한' 같은 수식어로 적혀있는걸 봐선 실제로도 세종대왕이 정창손을 꽤나 험악하게 깐듯하다. 그리고 최만리를 비롯한 다른 신하들은 간단히 벌주는 선에서 끝났지만 정창손은 끝내 파직당하고 만다.

의정부(議政府)의 영의정(領議政) 하연(河演)·좌의정(左議政) 황보인(皇甫仁)·좌찬성(左贊成) 박종우(朴從愚)·좌참찬(左參贊) 정분(鄭苯)·우참찬(右參贊) 정갑손(鄭甲孫)·예조 판서 허후(許詡)가 동궁(東宮)의 병이 나은 것을 하례하였는데, 임금이 연(演) 등에게 이르기를,

"홍희(洪熙) 원년(元年)에 칙서(勅書)를 영접할 때, 내가 병이 있어서 세자(世子)로 하여금 대신하게 하였고, 경술(庚戌)·신해 연간(辛亥年間)에 창성(昌盛)이 왔을 때와 연전(年前)에 왕무(王武)가 왔을 때에도 역시 세자로 하여금 대신하게 하였다. 내가 이미 병들고 세자도 또한 평복(平復)되지 못하였으므로, 세손(世孫)으로 하여금 조서(詔書)를 맞이하게 하려는 것은 명분(名分)이 이미 정해진 것이고, 또 나이가 어리므로 행례(行禮)할 때에 비록 잘못 실수가 있을지라도 저들이 반드시 허물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길고 넓은 의복을 입고 높은 계단을 오르내릴 때 만(萬)에 하나라도 잘못됨이 있다면 후회됨이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중국에서는 종친(宗親)을 대우함이 매우 박해서, 그 사는 집이 담장을 높게 쌓아서 죄수를 가두는 옥과 같은데, 그러나, 황제가 유고(有故)하면 반드시 종친(宗親)으로 하여금 섭정(攝政)하게 하여 천지(天地)·종묘(宗廟)·사직(社稷)에 제사지내기까지 섭행(攝行)하지 않는 것이 없다. 이제 세상이 돌아가기를 점점 옛날과 같지 아니하여 임금이나 세자가 연고가 있어도 대신(大臣)이 섭정(攝政)할 수 없고 반드시 왕자로 하여금 섭정하게 하는데, 섭정하는 것도 오히려 그러하거든 하물며 조칙(詔勅)을 대신하여 맞이하는 것이겠는가.

대저 비록 좋은 법일지라도 만약에 한 사람이 잘못 의심을 내게 되면 여러 사람이 모두 현혹되는데, 나와 동궁이 함께 병이 있고 장손(長孫)도 또한 어리니, 경들은 잘 제도를 의논하여 정해서 더벅머리 선비들에게 기롱을 받지 않게 하라. 근일에 동궁이 나를 보러 왔을 때 평지(平地)는 행보(行步)가 편이(便易)하나 섬돌을 오를 때에는 다리와 무릎에 힘이 없었으니, 사신(使臣)이 만약 내월(來月)에 입경(入京)하게 되고 동궁의 몸이 평강(平康)하다면, 전정(前庭)에 나가서 조칙(詔勅)만을 받게 하고, 문밖에서 명령을 맞이하는 것과 사신에게 잔치를 베푸는 것은 왕자로 하여금 대신하게 하는 것이 어떠할까. 이제 예조 낭청(禮曹郞廳)으로 하여금 사신에게 묻기를, ‘전하(殿下)와 세자(世子)가 병이 있으니 장차 어느 사람으로 하여금 조칙(詔勅)을 대신 맞이하게 함이 옳겠는가.’ 하려 한다. 그러나, 예로부터 조선은 예의의 나라라고 칭하였는데, 먼저 사신에게 의식을 물어서 정하지 아니하면 웃음거리가 되지 않을까."

하니, 연(演)과 인(仁)이 아뢰기를,

"동궁의 병환이 이제 비록 나아가지만 조복(朝服)을 입고 조서를 맞이하기는 어려울 것이오니, 마땅히 왕자로 하여금 대행(代行)하게 하고, 후일에 태평관(太平館)으로 사신을 가 보게 하는 것이 편할 듯하옵니다."

하고, 종우(從愚)·분(苯)·갑손(甲孫)·후(詡)는 아뢰기를,

"동궁이 조서를 맞이할 수 없다는 뜻을 미리 사신에게 알리고, 만약에 사신이 내월(來月)에 입경(入京)하게 되면 동궁께서 전정(殿庭)에 나가 조서를 받게 하고, 문밖에서 명령을 맞이하는 것과 연향(宴享)하는 것은 왕자(王子)로 하여금 대행(代行)하게 함도 역시 가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조서를 맞이하는 의식은 전에 만든 의주(儀注)로써 하되, 사신이 압록강을 건너기를 기다려 다시 아뢰게 하라."

하였다. 전번에 강서원(講書院)에서 왕세손(王世孫)으로 하여금 조칙(詔勅)을 대신 받게 하도록 청하였었는데, 더벅머리 선비[竪儒]란 말은 이를 가리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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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 127권, 세종 32년 1월 18일 갑오 1번째기사 (1450년) 임금과 동궁이 몸이 불편하여 조서를 맞이하는 방법에 대해 대신들과 의논하다

세종대왕의 욕설 2탄(...).
명나라에서 황제의 즉위를 알리는 사신이 와서 이를 영접하는 일이 있었는데, 당시 세종은 병이 깊어서 영접 행사를 주최하기 곤란했다. 실제로 세종은 이후 약 1달 뒤인 1450년 2월 17일에 사망했다.
원래대로라면 당시 대리청정을 하던 왕세자인 문종이 맡으면 되는 일이었지만, 하필이면 문종 역시 건강이 매우 나쁜 상태였다. 그런데 이 때 강서원의 관료들은 '왕세손에게 일을 맡기면 된다'라고 주장했다. 문제는, 당시 왕세손인 단종은 나이가 겨우 9살이었다. 평상시에도 무리한 일이지만, 이 때는 명나라와 조선의 상황이 심각하게 돌아가던 때였다. 이 사신이 오기 바로 전에 토목의 변이 일어나서 정통제가 포로로 잡히고, 북경이 오이라트에게 포위되자 병부상서 우겸이 경태제를 옹립하고 북경 방어에 총력을 기울여서 겨우 물리쳤었다. 당시 명나라에서 온 사신은 바로 이 경태제의 즉위를 알리고 이후 조선과 명나라의 관계 문제를 정리하기 위한 중요한 임무를 띄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9살 어린이에게 외교를 맡긴다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그래서 세종은 이게 말이 되는 소리이냐며 '더벅머리 선비놈'들이라고 욕을 한 것. 물론 이 역시 위의 내용과 비슷하게, 실제로는 더욱 과격하고 걸쭉한 욕설을 하였고 실록에서 적당히 윤색했을 가능성도 있다.
결국 사신을 영접하는 공식 행사는 문종이 참석을 강행하였고, 그외의 실무적인 접대 부분은 수양대군이 맡아서 처리하였다. 아니나다를까, 명나라 사신도 이 문제를 지적하면서 '왕자(수양대군)가 세자와 동모제(同母弟, 친형제) 지간이 맞긴 합니까? 주상 전하와 세자가 모두 병환이 깊어서 조서를 받지 못한다면 우리도 (본국의)조정에 어떻게 말해야 할지 곤란해집니다. 차라리 세자께서 병환이 다 나을 때까지 1년이라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라며 싸늘한 반응을 보였다. 이 때문에 조선 측에서는 사신에게 정말로 병이 심해서 곤란하다는 부분을 납득시키고 조서를 받는 공식 행사만이라도 세자 문종이 부축을 받아 참석하겠다고 말해서 간신히 달랠 수 있었다.세종실록 127권, 세종 32년 1월 26일 임인 4번째기사

4. 성종실록


특진관 예조판서(禮曹判書) 유지(柳輊)가 아뢰기를,

"성안에 요귀(妖鬼)가 많습니다. 영의정(領議政) 정창손(鄭昌孫)의 집에는 귀신이 있어 능히 집안의 기물(器物)을 옮기고, 호조 좌랑(戶曹佐郞) 이두(李杜)의 집에도 여귀(女鬼)가 있어 매우 요사스럽습니다. 대낮에 모양을 나타내고 말을 하며 음식까지 먹는다고 하니, 청컨대 기양(祈禳)하게 하소서."

하자, 임금이 좌우에 물었다. 홍응이 대답하기를,

"예전에 유문충(劉文忠)의 집에 쥐가 나와 절을 하고 서서 있었는데, 집 사람이 괴이하게 여겨 유문충에게 고하니, 유문충이 말하기를, ‘이는 굶주려서 먹을 것을 구하는 것이다. 쌀을 퍼뜨려 주라.’고 하였고, 부엉이가 집에 들어왔을 때도 역시 괴이하게 여기지 아니하였는데, 마침내 집에 재앙이 없었습니다. 귀신을 보아도 괴이하게 여기지 아니하면 저절로 재앙이 없을 것입니다. 정창손의 집에 괴이함이 있으므로 집 사람이 옮겨 피하기를 청하였으나, 정창손이 말하기를, ‘나는 늙었으니, 비록 죽을지라도 어찌 요귀로 인하여 피하겠느냐?’고 하였는데, 집에 마침내 재앙이 없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부엉이는 세상에서 싫어하는 것이나 항상 궁중의 나무에서 우니, 무엇이 족히 괴이하겠는가? 물괴(物怪)는 오래되면 저절로 없어진다."

하였다. 유지가 아뢰기를,

"청컨대 화포(火砲)로써 이를 물리치소서."

하니, 임금이 응하지 아니하였다.

성종 17년(1486) 11월 10일 2번째 기사

대신들의 집에 귀신이 있다는 소문이 돌자 퇴마의식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장면. 대신들이 여러 썰을 풀고 성종은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오래 끌고 싶지 않았는지 "귀신 같은건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없어진다"로 이야기를 적당히 마무리 하려는 찰나, 맨 처음 화제를 꺼냈던 예조판서 유지가 '까짓거 대포로 쏴보죠' 라는 안건을 내놓는다.
유지가 정말로 그게 퇴마작용을 할거라 믿었던 것인지, 귀신이 대포에도 안죽고 배기겠냐는 의미로 말한 것인지는 미지수. 개드립으로는 이 때 아니면 언제 서울 한복판에서 대포를 쏴보겠냐는 마인드로 권유를 한 것이라는 화력덕후다운 해석을 내놓는 경우도 있다. #


5. 중종실록


(전략) 상이 상참(常參)을 받고, 이어 최임을 불러 보고 들어가 싸운 절차를 자세히 진달하라고 명하니, 최임이 대답하기를,

"19일 진시(辰時)에 교전하여 신시(申時)에 싸움이 끝났는데, 우리 군사는 한 사람의 사상자도 없었습니다. 강윤희는 적장 성친(盛親)의 말을 빼앗아 탔고, 좌·우도 병선 합계 30여 척이 바다로 들어가고, 황형·김석철·유담년은 세 길로 나누어 육지로 쫓아 들어가 쳤는데, 맞아 싸운 자는 모조리 잡히고 달아나서 배를 타다가 화살에 맞아 죽은 자가 얼마인지도 알지 못할 정도입니다. 적선 3척이 침몰되고 배를 타려는 자가 있으면 왜구가 저희끼리 칼을 뽑아 팔뚝을 쳤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왜적이 모두 제포에 모이고 다른 데는 둔취한 곳이 없었는가."

하자 최임이 대답하기를,

"제포뿐이었습니다. 제장들이 처음에 생각하기를 ‘적이 험한 곳에 웅거하여 나오지 않으면 우리들이 무력을 쓰기가 어렵겠다.’ 하였었는데, 마침 적이 제포 동문(東門) 바깥 작은 산에 결진하여 혹은 차일을 치고 혹은 방패를 설치하였으므로, 이들과 싸워 이 공을 이룬 것입이다. 또 교전하는 처음에 선봉군에게 각각 녹각목(鹿角木)을 가지고 적병을 향하여 왜적이 가까이 오면 이것을 설치하여 막게 하니 적이 앞으로 나오지 못하였습니다. 또 돌을 던지는 군사로 한 전봉(前鋒)을 삼았는데, 적의 방패가 모조리 돌팔매에 파괴되었습니다. 【안동(安東) 사람들은 풍속이 돌을 던져 유희하는 것을 숭상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이것을 써서 적을 깨뜨렸다.】 전일에 제포·웅천의 관사가 다 적병에게 분탕(焚蕩)되었다고 들었는데, 적이 물러간 뒤에 보니 관사는 그대로 있고 불탄 것은 웅천의 동문뿐이었습니다."

하였다.

중종 5년(1510) 4월 22일 1번째 기사

석전짱돌 문서에서도 언급되는, 돌팔매로 왜구를 격퇴한 내용.

(전략) 남곤이 아뢰기를,

"왜인도 활을 잘 쏘던가?"

하니, 나사항이 말하기를,

"비록 쏘는 자가 있었으나 활이 강하지 못하여, 맞은 자가 다치지 않았습니다."[1]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각궁(角弓)을 사용하여 쏘던가?"

하매, 나사항이 아뢰기를,

"왜인들이 방패 안에서 활을 쏘았으므로 무슨 활을 썼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남곤이 말하기를,

"방패 안에 있었다면 너희들이 어떻게 쏘아 맞혔는가?"

하니, 나사항이 말하기를,

"그 방패 위에 두 귀[耳]가 있었는데, 왜인들이 반드시 이를 통하여 엿보았으므로 쏘아 맞힐 수 있었습니다."

하였다. (후략)

중종 18년(1523) 7월 6일 2번째 기사

전라도에 왜구들이 나타나자 이들과 교전하면서 얻은 전과에 대해 보고하는 내용. 왜인들이 화살을 막기 위해 방패를 들었지만, '''시야 확보용으로 뚫어놓은 구멍 사이로 화살을 쏘아 맞췄다'''는 신들린듯한 활솜씨를 보여주고 있다.

6. 인종실록


우부승지(右副承旨) 송세형(宋世珩)이 고문(誥文)[2]

을 읽다가 중종(中宗)의 성휘(姓諱)를 읽지 않았는데, 부사(副使)가 알고 불러서 묻기를,

"아버지 앞에서는 아들의 이름을 부르고 임금 앞에서는 신하의 이름을 부르는데 그대의 임금을 위하여 사사로이 휘(諱)하니, 이것도 예(禮)입니까?"

하니, 송세형이 말하기를,

"경근(敬謹)이 지극하여 숨이 가쁘고 목소리가 작아서 분명하지 못하였을 뿐이지, 감히 휘하였겠습니까. 나는 그런 일이 없습니다."

하니, 부사가 웃으며 말하기를,

"그렇습니까? 어찌 그랬겠습니까."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선왕의 휘(諱)를 차마 범하여 읽지 못하는 것은 신하의 정으로서는 마땅히 그래야 할 것인데도 임금 앞에서는 신하의 이름을 부른다라는 말로 반드시 힐문하려 한 것은 예(禮)를 안다고 할 수 없다.

인종 1년(1545) 5월 2일 3번째 기사

중종이 죽고난 이후 명나라에서 조문단을 파견했는데, 중국의 사신 앞에서 황제가 보내준 조문에 적힌 중종의 이름을 피휘했다고 해서 생긴 일화. 왕조 국가에서 신하된 도리로 왕이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문제는 명나라에서 보낸 사신이 참석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원칙상 사신은 황제의 대리자나 마찬가지 였기 때문에 황제의 앞에서 행동하듯이 행동해야 했다. 조선의 왕은 명목상 중국의 신하였으므로 황제에게 보내는 서신이나 황제가 보내오는 문서에는 일종의 압존법적 용법을 적용하여 피휘를 하지 않았는데, 사신이 자기 앞에서도 그래야 하는거 아니냐고 시비를 건 것.
다행히 '말소리가 작았을 뿐이지 피휘한게 아니다'로 어물쩍 넘어가긴 했지만 사관은 슬픈 일로 모인 이마당에 꼭 그걸 따져야겠냐는 투로, '중국 사신이 무례하다'고 논평하며 깠다. 특히 녹취기록물의 성격을 띠기도 하는 실록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누구누구가 말하기를(○○曰)'같이 건조하게 적어놓는게 일반적인데 이 부분에는 사관이 '부사는 웃으며 말했다(副使笑曰)'고 '''웃었다는 점을 강조'''하여 적어놓았다. 명나라 사신은 조문단 자격으로 왔으니 장례식에 조문온 사람이나 마찬가지인데 꼬투리를 잡고 슬며시 웃은 모습을 아주 아니꼽게 본 모양.

7. 선조실록


상이 이르기를,

"지난해 한산(閑山) 싸움의 패배에 있어 수군(水軍) 제장들에 대하여 즉시 공(功)과 죄(罪)를 가려내어 법대로 처리했어야 했는데도, 아직까지 고식적인 습관에만 젖어 위엄을 밝히는 교훈을 보여줄 생각을 않고 있다. 지금까지 한 사람의 죄도 바로잡지 않고 한 사람의 공도 포상을 하지 않고서 그들로 하여금 죄를 진 채 공을 세워 속죄하도록 하자는 것에 불과한데, 이에 대하여 비변사는 어떠한 소견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지만 그렇게 하다가는 비록 한백(韓白)058) 이 장수가 되더라도 싸움을 승리로 이끌지는 못할 것이다. 도원수마저도 대수롭잖은 일로 보아 한 명의 교위(校尉)라도 목을 베어 군율(軍律)을 크게 진기시키지 않고 있으니, 어떻게 일을 성사시킬 수 있겠는가. 옛사람이 삼군(三軍)으로 하여금 죽음을 영광으로 삶을 치욕으로 생각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권징(勸懲)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지금 한산 싸움에 대하여 실시한 권징은 과연 어떠한가. 이 일은 여느 심상한 일이 아니니 서둘러 권징을 시행해야 할 것이다. 세월이 점점 오래되고 나면 사실을 밝히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하였는데, 비변사가 아뢰기를,

"원균(元均)이 주장(主將)으로서 절제(節制)를 제대로 하지 못하여 적들로 하여금 불의에 기습을 감행하도록 하여 전군(全軍)이 함몰되게 하였으니 죄는 모두 주장에게 있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그 아래 각 장사들의 공죄(功罪)에 대해서도 신상 필벌을 행하여 군기(軍紀)를 바로잡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원균 한 사람에게만 핑계대지 말라."

하였다. 【이산해(李山海)와 윤두수(尹斗壽)가 그렇게 아뢰게 한 것이다. 】

사신은 논한다. 한산의 패배에 대하여 원균은 책형(磔刑)을 받아야 하고 다른 장졸(將卒)들은 모두 죄가 없다. 왜냐하면 원균이라는 사람은 원래 거칠고 사나운 하나의 무지한 위인으로서 당초 이순신(李舜臣)과 공로 다툼을 하면서 백방으로 상대를 모함하여 결국 이순신을 몰아내고 자신이 그 자리에 앉았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일격에 적을 섬멸할 듯 큰소리를 쳤으나, 지혜가 고갈되어 군사가 패하자 배를 버리고 뭍으로 올라와 사졸들이 모두 어육(魚肉)이 되게 만들었으니, 그때 그 죄를 누가 책임져야 할 것인가. 한산에서 한 번 패하자 뒤이어 호남(湖南)이 함몰되었고, 호남이 함몰되고서는 나랏일이 다시 어찌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시사를 목도하건대 가슴이 찢어지고 뼈가 녹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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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 99권, 선조 31년 4월 2일 병진 2번째기사, 한산 전투에서 패배한 장수들을 징계하도록 하니, 비변사가 원균의 징계를 청하다

한산의 패배란 칠천량 해전을 의미한다. 칠천량에서 참패한 뒤, 선조는 장수들 중 공과를 엄히 물어 기강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비변사에선 '다른 장수들도 공과 죄가 있는 건 맞지만 최고 지휘관인 원균이 가장 책임이 큽니다.'라고 주장했다. 그러자 선조는 '원균만 잘못한게 아닌데?'라고 우긴 것.
왕이 인지부조화에 빠지자 그나마 사건의 진상을 제대로 알고 있던 사관은 이 참극을 보며 '오직 원균 한 사람 때문에 이런 참패가 벌어졌으니 가슴이 찢어지고 뼈가 녹으려 한다'라며 크게 분노하고 있다. 글 자체가 완전히 절망에 빠져 있는 문체인데 그만큼 당시 원균의 행적과 그 결과는 참담한 수준이었다.

상이 별전(別殿)에 나아가 《주역(周易)》을 강하였다. 영사 유영경(柳永慶)이 아뢰기를,

"지난번 가미이진탕(加味二陳湯)을 지어 올렸는데 진어(進御)하신 후에 기후(氣候)가 어떠하신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금 복용하는 중이다. 내 병은 일조일석에 얻어진 것이 아니어서 언제 나을지 기약이 없다. 매번 경이 와서 애써 문안하니 그 때문에 병이 중해진다."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삼가 주상(主上)을 살피건대 춘추가 아직 높지 않은데 질병이 계속되어 약이(藥餌)가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듣건대 작년 가을 전교에 ‘천하에 어찌 어미 없는 나라가 있겠는가.’ 하면서 군신(群臣)들을 협박하여 급급하게 나이 어린 비(妃)를 맞아들였다. 주부(主婦)가 없는 예(禮)로 논한다면 맞아들인 후에는 알묘(謁廟)의 의식과 증상(蒸嘗)의 제사를 한결같이 예제(禮制)에 따라야 할 터인데, 옥당(玉堂)의 차자(箚子)에 대해 윤허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재취(再娶)하지 않는 예(禮)로 말한다면, 1후(后) 3부인(夫人) 9빈(嬪) 27세부(世婦) 81어처(御妻)가 이미 등극하던 초기에 갖추어졌으니, 1후가 훙(薨)하였어도 궁(宮)을 대신 다스릴 사람이 있는데 재취하는 데 급급한 것은 어째서인가. 옛날 송 태조(宋太祖)를 보건대 잠자리에서 늦게 일어났다는 것으로 궁녀를 죽였으니 이는 좀 지나친 듯하지만 그가 여색(女色)에 연연하지 않은 뜻을 상상할 수 있다. 제갈양(諸葛亮)은 추녀인 부인을 두었었다. 선유(先儒)들은 이에 대해 흥망(興亡)을 자기의 책임으로 삼은 자로서는 행동을 당연히 이와 같이 해야 한다고 했다. 국가가 한번 패란된 후로 기세가 쇠약해져서 위망(危亡)의 조짐이 한둘이 아니었다. 중훙(中興)에 대한 계책 가운데 급박한 것이 많은데도 먼저 백성에게 국모(國母)가 없는 것을 걱정하였으니, 질병의 발생이 아마도 여기에서 말미암았을 것이다. 치료하는 데의 묘방(妙方)은, 마땅히 마음을 깨끗이 가지고 욕심을 적게 하여 홀로 거처하며 잡념을 줄이면 병을 낫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질병 때문에 한두 달이 지나도록 경연에 나아가지 않으니, 옛날 한 고조(漢高祖)는 천하를 다투다가 상처가 극신해졌어도 함양궁(咸陽宮)으로 돌아가 척희(戚姬)를 대하지 않았었다. 지금 이 천리의 나라는 바로 자기 한 사람의 물건인데도 병 때문에 일을 폐하니, 기미를 아는 군자라면 반드시 미리 근심하였을 것이다.

선조 36년(1603) 3월 17일 1번째 기사

사관이 대놓고 '''"어휴 이 로리콘 자식"'''하면서 선조를 까고 있다. 배경을 설명하자면, 선조의 첫번째 왕비인 의인왕후는 1600년에 사망하였고, 1602년에 51세였던 선조는 '나라의 안주인이 없어서야 되겠냐'면서 새 장가를 든다. 문제는 두번째 왕비인 인목왕후가 당시 '''19살이었다는 것'''.
현대적인 관점에 봐서도 나이 차이가 심각하게 많이 날 뿐더러 결혼을 일찍했던 조선시대에는 딸뻘을 넘어서 거의 손녀뻘이었다. 위 실록 내용은 선조가 새 장가를 가고 난 뒤 1년이 지나고 나서 쓴 기사인데 이때 선조는 기사에 나오다시피 젊은 왕비와 재미를 보느라 정력에 좋은 탕약을 지어다먹고 경연도 대충 나갔다.
사관은 이를 비판하면서 왕이 어린 왕비와 노느라 체력적으로 힘들어 병이 나고, 굳이 국모의 자리가 비어있다면 있는 후궁 중에 한명을 중전으로 올리면 되는데 왜 새로 장가를 가느냐면서 줄기차게 까고 있다. '군신들을 협박하였다'느니 '위망의 조짐이 한둘이 아니다'라느니 등의 말을 대면서 꽤나 강도 높게 비판하고 있는데 실제로 이 시기는 '''임진왜란이 끝난지 고작 2~3년 남짓한 시기에 지나지 않았다'''. 전후 피폐해진 국토를 복구하기 위해 해야할 일이 산더미 같은데 왕은 외롭다고 징징댄 끝에 나이 어린 여자와 재혼이나 하고, 그러더니 몸이 허하다, 피곤하다 이런 소리나 늘어놓고 있으니 사관이 이런 말을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호조가 아뢰기를,

"대저 북도에서 온 사람은 모두들 ‘본군(本郡)은 채은(採銀)하는 까닭에 다른 고을에 없는 역(役)을 담당해야 한다. 이 때문에 기를 쓰고 은맥을 숨기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본조(本曹)가 대신들에게 의논하여 모든 공물은 다과(多寡)를 막론하고 일체 견감하여 다른 고을에 이정(移定)함으로써 조금도 침탈함이 없이 은을 캐는 데 전력을 기울일 수 있게 하도록 약조(約條)를 분명히 세우고 후한 상을 줄 것이라고 효유하라고 본도에 이문(移文)하였습니다. 한번 신혈(新穴)을 지시하여 3천 냥 이상을 캘 수 있는 경우에는 당초에 지시한 사람이 공사천이면 면천하고, 군보(軍保)면 면역한 후에 6품 영직(影職)034) 을 제수하고, 서얼(庶孽)이면 허통(許通)하고, 양반이면 【우리 나라에서는 사족(士族)을 양반이라 한다. 】 동반 6품직에 제수하고, 60세 이상자면 노직 당상(老職堂上)을 제수할 것이며, 5천 냥 이상을 캘 수 있으면 등급을 더하여 논상하소서."

하니, 비망기로 이르기를,

"윤허한다. 서얼을 허통하는 것에 대한 것은 금석(金石) 같은 법전을 가벼이 훼손할 수 없다. 은혈(銀穴)을 보고했다는 이유로 동반직을 제수하며 정옥(頂玉)의 품계로 올리는 것은 더욱 불합리하니, 거행하지 말라."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면천·면역의 영(令)이 백성들에게 불신을 받은 지 오래 되었다. 신의를 잃는 일은 상앙(商鞅)도 하지 않던 일인데 지금의 조정은 감사·수령과 함께 차마 하고 있으니 국가가 지금까지 보전된 것이 다행이다. 조정에서는 일이 급하면 호령을 내어 백성을 꾀고, 꾀고 나서는 감사·수령이 고을에 원역(員役)이 없다고 핑계대며 강제로 부리니, 백성들이 국가에 속은 것이 적지 않다. 통탄스럽기 그지없다.

선조 36년(1603) 3월 19일 2번째 기사

을 캐느라, 해야할 일이 많은 북쪽 지방 백성들이 고생이 많고 은맥을 감추려드니 이를 대비해 혜택을 주어야 한다는 말. 왕과 대신들이 열심히 논의하고 있는 와중에 사관은 '조정에서 혜택을 준다고 약속만 하고 지키질 않으니 쓸데없는 탁상공론이다'라고 신나게 까고 있다. 여기서 사관은 상앙을 언급하는데, 상앙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이는 '이목지신(移木之信)'의 일화를 말하는 것이다. 즉, 사관은 어떤 제도를 시행할 때에는 국가와 백성 간의 확실한 신뢰를 바탕으로 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여담으로, 취소선 드립 마냥 사관이 말을 적어놓은게 있는데 양반(兩班)이라고 적고 그 옆에 깨알같이 '우리 나라에서는 사족을 양반이라 한다(東方稱士族爲兩班)'고 적어 놓은 것. 번역하는 과정에서 첨가된 것이 아니고 실제로 실록에 저렇게 적혀 있다! 아무래도 당시 사초를 적던 사관이 후세 사람들이 '양반'이 무슨 의미인지 모를수도 있다고 적어놓은 듯. 재밌는 점은 양반을 설명하면서 '사족'을 부르는 명칭이라고 적어놓았는데 현대에는 '사족(士族)'이 '양반(兩班)'보다 더 이해하기 어려운 단어라는 점이다.

8. 인조실록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엄한 분부를 누차 내렸는데도 심로 등은 털끝 하나 까딱하지 않고 더욱 새로운 말을 만들어서 위를 모욕하는데, 이는 무슨 의도인가. 승지는 살펴서 아뢰어라."

하니, 우승지 정치화(鄭致和)가 회계하기를,

"신들이 삼가 어제 간원(諫院)에서 올린 계사를 보니, 그 말에 과연 타당하지 못한 곳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위를 모욕했다.’는 하교에 이르러서는 실로 대간(臺諫)의 본 마음이 아닌데 하교가 이처럼 엄하시니, 몹시 온당치 못하기에 감히 아룁니다."

하니, 답하기를,

"'''개새끼(狗雛)''' 같은 것을 억지로 임금의 자식이라고 칭하니, 이것이 모욕이 아니고 무엇인가."

하였다.

인조 24년(1646) 2월 9일 1번째 기사

조선왕조실록에 담긴 '임금의 욕설'. 여기서 말하는 '개새끼'는 왕의 며느리였던 민회빈 강씨를 말하는 것이다. 의도가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서 지금도 분분하지만, 인조는 자신의 아들 소현세자와 그 며느리 민회빈 강씨를 철저하게 탄압하여 자신의 가계에서 아예 지워버리려고 했다. 민회빈 강씨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그 과정은 '''순 어거지로 인조 혼자 떼쓴 것'''에 지나지 않았다. 주변 신하들도 이것이 왕의 억지임을 알고 있었기에 '그래도 며느리면 전하의 자식 아닙니까' 하고 좋게 말을 꺼내자 인조는 민회빈 강씨를 개새끼에 비유하며 그녀를 자신의 자식이라고 칭하는 건 자신에 대한 모욕이라고까지 말했다.
실록에서 필터링없이 직접적으로 이러한 욕설을 적어놓은 것은 거의 드문데 여기에서는 직접적으로 욕설을 실어놓았다. 이렇게 기록한데에는 당대 사관도 이를 억지로 여겼으며, 인조에 대한 반동으로 사초에 그대로 필터링없이 적어놓은 것 아니냐는 말이 있다. 즉, 후손들에게 두고두고 까여보라는 의도에서 적은게 아니냐는 추측.

9. 숙종실록


(전략) 이날 새벽에 임금이 하련대(下輦臺)에 나아가 먼저 비망기(備忘記)를 나려 여러 선비들에게 게시하게 하였는데, 이르기를,

"학교(學校)를 설치하여 사방의 선비를 기르는 것은 대개 바른 학문을 연구하여 착한 것을 가리고 몸을 닦아서 인륜에 근본하고 물리에 밝게 하기 위한 것이니, 어찌 글을 짓고 녹(祿)을 구하기만 하는 것일 뿐이겠는가? 예전에 전손사(顓孫師)가 녹을 구하는 법을 묻자,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많이 들어서 의심스러운 것을 줄이고 그 나머지를 삼가서 말하면 허물이 적을 것이고, 많이 보아서 위태롭게 여기는 것을 줄이고 그 나머지를 삼가서 행하면 뉘우침이 적을 것이다.’ 하였다. 참으로 배우는 것이 넓고 가리는 것이 정하고 지키는 것이 요긴한 것일 수 있다면, 녹은 구하지 않아도 절로 올 것이니, 이것이 어찌 만세의 격언(格言)이 아니겠는가? 요즈음 가만히 살펴보건대, 세상이 갈수록 풍속이 쇠퇴해져서 '''선비의 버릇이 예전만 못하여''' 경학(經學)에 밝고 행실을 닦아 치체(治體)를 잘 아는 자는 적고, 문사(文辭)를 숭상하여 경학을 버리고 녹리(祿利)를 좇는 자가 많으니, 어찌 우리 조종(祖宗)께서 학교를 일으켜 인재를 양성하는 본의이겠는가? 이에 나는 일찍이 세도(世道)를 위해 개탄하지 않은 바 없다.

(중략)

사신(史臣)은 논한다. 당습(黨習)이 점점 고질이 되고 요행의 문이 크게 열려서 과거(科擧)가 공정하지 못하니 선비가 따라서 이 때문에 바른 것을 잃고, 용사(用捨)를 사정(私情)에 따르니, 관(官)이 이 때문에 날로 어지러워지므로, 경학을 버리고 이록(利祿)을 좇는 것은 또한 괴이할 것도 없다. 만약 대공 지정(大公至正)한 방도로 크게 경동(警動)하고 크게 진작(振作)하는 거조(擧措)가 있지 않고, 한갓 말로 가르치는 말단의 일에 구구하기만 한다면, 날마다 열 줄의 가르침을 내리더라도 마침내 무익한 것이 될 것이니, 개탄스럽다.

이때 과거는 사정(私情)에 따르는 것이 많으므로, 민암(閔黯)의 아들 민장도(閔章道)가 글을 못하는 사람으로서 다만 세력에 의지하여 외람되게 급제하니, 온 세상이 놀랐다. '''사관(史官)도 민가(閔家)에 아첨하지 않는 자는 아니나,''' 눈으로 그 일을 보고서 적은 것이 이러하였으니, 공론을 알 수 있다.

숙종 17년(1691) 8월 10일 1번째 기사

숙종이 '요즘 젊은 것들은 버릇이 없다'를 시전하는 장면. 다만 여기서 말하는 '버릇'은 일반적인 의미의 버릇이 아닌 '습성'내지는 '행태'에 가까운 뜻으로 쓰였다. 다시 말해 예전 선비들과 다르게 요즘 선비들은 학문에 힘쓰지 않고 돈버는 것에만 눈독을 들인다며 까는 내용. 물론 '예전 선비'나 '요즘 선비'나 탐관오리 혹은 뇌물 문제는 항상 있어왔다는 점에 의미적으로는 일치한다.
재밌는 점은 사관도 이를 맞장구치면서 실제 사례를 열거하면서 깨알같이 자아비판을 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민암(閔黯)의 아들 민장도(閔章道)가 특혜로 과거에 급제했다고 고발하면서도 자신 또한 이런 아첨을 하긴 했다고 후세 사람들 앞에 솔직하게 고해성사를 늘어놓고 있다.

10. 영조실록


황해 수사(黃海水使) 박문수(朴文秀)가 아뢰기를,

"당선(唐船)[3]

이 어채(漁採)하는 것을 이롭게 여겨 여름이 되면 오지 않는 해가 없는데 이를 인하여 연해의 백성들과 물건을 교역(交易)하는 등 그들이 법을 무시하고 멋대로 하는 습관이 더욱 조장되고 있습니다. 그들을 추포(追捕)하기 위해 온갖 계책을 다 썼지만 힘을 얻을 길이 없습니다. 지금에 있어 최상의 계책은 비선(飛船)을 많이 만들어 밤낮으로 바다 위에 띄워 놓고 당선의 어채의 이익을 빼앗는 것이 제일이기 때문에 먼저 비선 20척을 만들려 하고 있습니다만 본영(本營)의 재력으로는 실로 착수하기가 어렵습니다. 감영의 유고전(留庫錢)과 병영의 별비전(別備錢) 각 2백 민(緡), 상정미(詳定米) 50곡(斛)을 특별히 획급해 주도록 허락하면 제때에 배를 만들어 쓸 수 있겠습니다."

하였다. 좌의정 송인명이 그 말을 따를 것을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은 간과(干戈)가 극렬한 가운데에서도 능히 전선(戰般)을 만들었었는데 옹진(瓮津)이 아무리 피폐되었다고 해도 돈 4백 냥을 마련하지 못하여 이런 청을 한단 말인가? 수신(帥臣)은 추고하고 스스로 마련하여 배를 만들게 하라."

하였다. 형조 참판 이주진(李周鎭)이 말하기를,

"황해 수사가 새로 부임했기 때문에 이런 요청이 있는 것입니다만 1년에 거두어 들이는 어리(漁利)가 4, 5천 냥에 가까워서 그 재력이 호곤(湖閫)에 견줄 바가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임금에게 어떻게 영곤(營閫)에 있는 물력(物力)의 풍박(豐薄)에 대해 비교하여 진달할 수 있는가?"

하고, 이주진을 추고하라고 명하였다.

영조 20년(1744) 2월 27일 2번째 기사

18세기에도 중국의 해외 불법 조업이 극심했음을 알려주는 내용. 박문수가 황해도 지역의 수군절도사를 맡고 있을 당시, 중국 어선을 막으려고 배를 건조하는데 돈이 없다고 하자 영조이순신을 언급하면서 '이순신은 돈없어도 잘만 배를 만들었는데 왜 너는 못하냐'고 깐다.
한편, 옆에서 듣고 있던 이주진은 왕 앞에서 '황해도 지역은 세금이 별로 안걷히잖아요' 하면서 말을 하다가 영조에게 '어딜 감히 임금 앞에서 아는 척을 하냐면서 죄를 반성하라'고 핀잔을 받는다.
여기서 '곤(閫)', 또는 '영곤(營閫)'은 각 지방의 군에서 세금을 거둬들여 관리하는 재원을, '호곤'은 호남지방의 영곤을 의미한다. 전통적으로 전라도 지방은 평야가 넓게 펼쳐있고 인구와 생산이 많았으므로 조선시대에는 물자의 중심지였다. 즉 이주진은 황해도는 전라도보다 가난하니 돈이 없는 게 당연하고,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였던 이순신과 황해도 수군절도사인 박문수를 단순히 비교하기엔 어렵다고 말한 것. 헌데 영조의 말을 보면 알겠지만 영조도 황해도가 상대적으로 돈없는 지역인 줄 잘 알았다.[4] 그런데도 '4백 냥도 확보를 못해서 그걸 왕 앞에까지 끌고 오느냐.'고 타박한 것인데 이주진은 논점을 이탈해서 잘못 지적을 한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영조는 박문수가 이 일을 조정까지 끌고온 것을 가지고 지적하는 것이다. 박문수는 젊은 나이에 병조판서라는 요직에 오르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내직과 외직을 두루 겸하면서 나름 커리어를 쌓을대로 쌓은 인물이었다. 보통 이 정도의 일은 조정까지 끌고 올 필요 없이 황해도 관찰사와 이야기하는 것이 보편적이다. 그 정도로 액수가 그리 중대한 정도는 아닌데, 박문수는 수군절도사 부임 초기에[5] 얼굴도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게 손벌리는 것이 껄끄러웠는지 황해도 관찰사에게 말도 안하고 임금한테 대뜸 찾아와 예산을 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영조는 박문수가 생판 신참도 아니고 알만한 사람이 이렇게 절차를 생략한 채 요청하는 방식이 잘못되었다고 까는 것.
애초에 황해도가 피폐하다고 하나 막상 그렇게 척박한 지역도 아니었다. 함경도 같이 정말 척박한 곳과 비교하면 현재 북한에서도 농업생산량 톱을 달리는 지역이 바로 황해도다. 조선시대에도 상황은 비슷했으며 박문수가 이 요청을 하게된 이유가 중국 선박들의 황해도 지역 불법 조업 때문임을 생각해본다면 황해도의 어업 생산량도 꽤 나온다는 것을 쉽게 간파할 수 있다. 황해도가 척박한 지역이었다면 불법 조업이 이뤄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즉, 4백 냥은 아무리 황해도라도 충분히 감당 가능한 예산이었다. 다만 그게 박문수가 담당하는 영곤, 즉 지금으로 따지면 군 예산에 배정이 안되어 있었을 뿐이었다.
또한 여기서 이순신을 들먹이는 것은 전혀 특별한 일이 아니다. 국가의 중차대한 위기 상황 속에서 조정의 도움 없이 혼자 전투선을 만들고 반드시 승리를 쟁취한 이순신은 임진왜란 이후 조선 왕조 내내 무인들의 가장 모범적인 표본이 되었다. 그 때문에 이후 무인을 평가할 때마다 이순신과 비교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고, 군대에서 돈이 없다고 하소연을 하면 이 사례처럼 '너는 왜 이순신처럼 못하고 돈이 없다고 징징대느냐.'는 말을 하면서 예산을 주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이날 일성위(日城尉) 정치달(鄭致達)이 졸(卒)하였다. 예단(禮單)이 먼저 들어오고 조금 있다가 중궁전(中宮殿)이 승하하였으므로, 여러 신하들이 장차 곡반(哭班)에 나가려 하는데, 갑자기 좌의정과 우의정을 입시하도록 명하여 임금이 손을 잡고 말하기를,

"경들은 이 가슴속의 슬픔을 이해하여 한 번 덜 수 있게 하라."

하자, 좌의정 김상로(金尙魯)·우의정 신만(申晩) 등이 감히 한마디 말도 꺼내지 못하고, 다만 곧바로 나아갔다가 일찍 환궁하라는 뜻을 아뢰고 물러났다. 이때 승정원과 삼사의 신하 및 영의정 이천보(李天輔)가 서로 잇달아 청대(請對)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이미 좌의정과 우의정에게 하교하였는데 어찌 이런 일을 하는가?"

하고, 인하여 승지를 입시하도록 명하였다. 승지 이최중(李最中)이 빨리 앞으로 나아가 머리를 조아리며 말하기를,

"이렇게 망극(罔極)한 시기를 당하여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이런 망극한 일을 하시려 합니까?"

하니, 임금이 잇달아 엄중한 하교를 내렸으나, 이최중이 눈물을 흘리며 더욱 힘껏 간쟁하였다. 임금이 진노(震怒)하여 이최중에게 물러나도록 명하였는데, 이최중이 말하기를,

"신은 청하는 바를 이루지 못하면 감히 물러날 수 없습니다."

하자, 임금이 이최중의 직임을 체차하도록 명하고, 인해서 합문(閤門)을 닫고 마침내 보련(步輦)으로 연영문(延英門)을 나갔다. 대간(臺諫)과 옥당(玉堂)에서 앞으로 나와 다투어 고집하자, 임금이 또 모두 체임하도록 명하였다. 대사간 이득종(李得宗)이 말하기를,

"신의 관직을 체임하더라도 전하의 이번 행차는 결단코 할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삼사의 신하를 중도 부처(中途付處) 하도록 명하였다가, 조금 뒤에 단지 체차하도록 명하였다. 밤 4경(四更)에야 비로소 궁궐로 돌아와 영의정 이천보(李天輔)를 총호사(摠護使)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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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실록 89권, 영조 33년 2월 15일 정축 3번째기사

딸인 화완옹주의 남편, 즉 영조의 부마인 정치달이 병으로 사망하자 영조가 친히 조문을 가겠다며 행차를 강행하는 모습이다. 왕이 부마의 장례에 참석하는 것 자체도 파격적인 행동이지만, 진짜 문제는 이 날이 '''중전인 정성왕후가 사망한 날'''이었다. 일국의 왕비가 사망했으니 당연히 국상을 준비하느라 온 조정이 분주한데, 영조는 자신의 아내의 장례 준비는 신경도 쓰지 않고 딸을 위로하겠다고 떠나려 한 것. 당연히 신하들은 이건 해도 너무한 행동이라며 영조를 뜯어 말렸고, 이득종 등은 차라리 자신의 벼슬이 날아가도 이건 안된다고 할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조는 끝끝내 행차를 가버렸고, 한밤중인 4경(대략 새벽 2~4시 무렵)에야 돌아왔다. 가족들에 대한 영조의 심각한 편애를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승정원에서 계사(啓辭)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24자의 휘호의 선양은 만백성들의 똑같은 심정일 뿐만이 아니라, 사실 주위에 오르내리는 영령(英靈)께서 주신 것입니다. 지금 위에 고하고 아래에 반포한 뒤인데, 어떻게 이것을 논의할 수 있단 말입니까? 삼가 바라건대 빨리 윤허를 내리시어 사람들의 심정을 위로하소서."

하였다. 재계(再啓)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부교리 서호수(徐浩修)가 소를 올리고, 교리 신광집(申光緝)·수찬 조재준(趙載俊)도 차자를 올렸는데,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이에 앞서 김약행(金若行)이 올린 상소에 이르기를,

"숭정 갑신년의 뒤로는 천하에 임금다운 임금이 없었고, 예악 문물(禮樂文物)이 모두 우리 동방에 있으니, 청컨대 교체(郊禘)의 예를 행하고 태묘에는 구헌(九獻)과 팔일(八佾)의 의절을 행하소서. 그리고 인조(仁祖) 이하 오묘(五廟)에 휘호(徽號)를 소급해 올리소서."

하였는데, 임금이 크게 놀랐다.

이때부터 올린 올린 장주(章奏)를 보지 않고, 여러 신하들이 말한 일에 대해 임금이 승지에게 물으면 승지가 어떤 일을 논하였다고 대답하였는데, 이는 대체로 임금의 마음에 24자의 휘호를 보지 않고 싶어서였다. 전후로 대신과 여러 신하들이 극력 청하였으나 윤허를 받지 못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승정원이 먼저 계사를 올린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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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44년 6월 11일 정묘 1번째기사

김약행이 주장한 교체의 예, 구헌과 팔일의 의절, 휘호의 소급은 모두 천자의 의식이다. 즉, '''칭제건원'''을 하자는 것. 숭정 갑신년이란 1644년 이자성의 난으로 인해 숭정제가 자결하고 명나라가 멸망한 해를 의미한다.
이는 명나라가 멸망하고 중화 문명의 정통성은 이제 조선에게 있으니, 조선이야말로 황제국이 될 자격이 있다는 매우 과격한 논리이다. 당시 소중화 사상의 일면을 보여준다.
구절에 대한 해석
실록의 이 구절을 만화로 표현한 포스팅

11. 정조실록


성균관 제술(製述) 시험에서 합격한 유생을 희정당(熙政堂)에서 불러 보고 술과 음식을 내려주고는 연구(聯句)로 기쁨을 기록하라고 명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옛사람의 말에 술로 취하게 하고 그의 덕을 살펴본다고 하였으니, 너희들은 모름지기 취하지 않으면 돌아가지 않는다는 뜻을 생각하고 각자 양껏 마셔라. 우부승지 신기(申耆)는 술좌석에 익숙하니, 잔 돌리는 일을 맡길 만하다. 내각과 정원과 호조로 하여금 술을 많이 가져오게 하고, 노인은 작은 잔을, 젊은이는 큰 잔을 사용하되, 잔은 내각(內閣)의 팔환은배(八環銀盃)를 사용토록 하라. 승지 민태혁(閔台爀)과 각신 서영보(徐榮輔)가 함께 술잔 돌리는 것을 감독하라."

하였다. 각신 이만수(李晩秀)가 아뢰기를,

"오태증(吳泰曾)은 고 대제학 오도일(吳道一)의 후손입니다. 집안 대대로 술을 잘 마셨는데, 태증이 지금 이미 다섯 잔을 마셨는데도 아직까지 취하지 않았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희정당은 바로 오도일이 취해 넘어졌던 곳이다. 태증(泰曾)이 만약 그 할아버지를 생각한다면 어찌 감히 술잔을 사양하겠는가. 다시 큰 잔으로 다섯 순배를 주어라."

하였다. 식사가 끝난 뒤에 영보(榮輔)가 아뢰기를,

"태증(泰曾)이 술을 이기지 못하니 물러가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취하여 누워 있은들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옛날 숙종조에 고 판서가 경연의 신하로서 총애를 받아 임금 앞에서 술을 하사받아 마시고서 취해 쓰러져 일어나지 못하였던 일이 지금까지 미담(美談)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런데 지금 그 후손이 또 이 희정당에서 취해 누웠으니 참으로 우연이 아니다."

하고, 별감(別監)에게 명하여 업고 나가게 하였다. 그때 가랑비가 보슬보슬 내리니, ‘봄비에 선비들과 경림(瓊林)에서 잔치했다.’는 것으로 제목을 삼아 연구(聯句)를 짓도록 하였다. 상이 먼저 춘(春) 자로 압운하고 여러 신하와 여러 생도들에게 각자 시를 짓는 대로 써서 올리게 하였다. 그리고 취하여 짓지 못하는 자가 있으면 내일 추후로 올리라고 하였다.

정조 16년(1792) 3월 2일 1번째 기사

제술 시험에 합격한 자들을 축하하는 잔치에서 정조가 '''"너희들은 에 취하기 전에는 집에 못간다"'''라는 '''어명'''을 내리는 모습이다. 술버릇 중에서도 특히 곤란한 유형이 이런 술 강요인데 하물며 '어명'이라면 두말할 것도 없다. 게다가 이 자리에는 오태증이라는, 집안 대대로 주당으로 이름난 유생이 있어서 술에 취하지 않았는데, 정조는 그의 할아버지 오도일이 숙종 대에 여기 희정당에서 술에 취해 넘어졌다면서, 술 5잔을 더 먹여 결국 취하게 했다. 그래놓고는 "오도일이 여기서 술에 취해 쓰러진 것이 미담으로 전해지고 있다"며 "지금 그의 후손이 같은 장소에서 취해 쓰러진 것이 우연이 아니다"라며 흐뭇해했다. 정조가 얼마나 술을 좋아하는지, 그리고 얼마나 심각한 꼰대(?)였는지를 잘 나타내 주는 일화.

훈련 도감이 아뢰기를,

"지난밤에 흰옷을 입은 어떤 사람이 궁궐의 담장 아래에서 술에 취하여 누워 있기에 호패(號牌)를 상고해 보니 진사 이정용(李正容)이었습니다. 자초지종을 물으니, 마침 성균관에 들어갔다가 술을 마시고 나서 야금시간에 걸린 줄을 몰랐다고 하였는데, 법에 따라 형조로 넘겼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성균관 근처의 민가는 집춘영(集春營) 건물과 지붕이 서로 잇닿아 있으니 야금시간을 범하였다고 논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근래에 조정의 관료나 유생들을 물론하고 주량이 너무 적어서 술의 풍류가 있다는 것을 듣지 못하였다. 이 유생은 술의 멋을 알고 있으니 매우 가상스럽다. 군향(軍餉)을 맡은 고을에서 주채미(洒債米) 한 포대를 주어, 술을 주어 취하게 하고 취한 중에서 덕을 관찰하는 뜻을 보여주라."

하였다.

정조 20년(1796) 4월 12일 1번째 기사

그리고 아예 한걸음 더 나아가, 만취하여 '''궁궐 담장 밑에서 자고 있던 유생'''에게 "요즘 선비들은 주량이 너무 적은데 뭘 좀 아는 친구구만"하면서 포상까지 한다(...).

12. 순조실록


"속칭 이른바 '''남초(南草)'''는 언제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는데, 혹은 위(胃)를 조양(調養)하는 데 이롭다고 하고 혹은 담(痰)을 치료하는 데 긴요하다고 하나, 과연 그런지 모르겠다. 근래에 이르러서는 속습(俗習)이 이미 고질이 되어 남녀 노소를 논할 것 없이 즐기지 않는 사람이 없어서 겨우 젖먹이를 면하면 으레 횡죽(橫竹)으로 피우고 있는데, 세상에서 더러 ‘팔진미(八珍味)는 폐지할 수 있어도 남초는 폐지할 수 없다.’[6]

고 하니, 비록 금하고자 하나 이유가 없을 따름이다. 옛날에 듣건대, 금한(金汗)이 군중(軍中)에 거듭 금하였으나 오히려 그치지 않는다고 하니, 금한(金汗)의 위세로써도 오히려 금지시킬 수 없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중략)

임금이 말하기를,

"남초가 폐해가 되는 것은 술과 일반이겠으나, 술은 그래도 제사에 쓰고 성인(聖人)도 또한 말하기를, ‘술은 양(量)을 제한하지 않되 난잡한 데 미치지는 않는다.’ 하였는데, 남초에 이르러서는 마땅한 것이 없고 해로움만 막심한 것이다. 속습(俗習)이 이에 이르렀으니, 끝내 금지할 수 없겠는가?"

하니, 박종훈이 말하기를,

"남초는 금지할 수 있음을 사람들은 모두 말하지만, 신은 일찍이 가만히 생각하건대, 주금(洒禁)이 어려운 것은 대개 술을 좋아하여 깊이 빠진 자가 많기 때문이며, 남초에 이르러서는 이미 몸에 이익이 없는데도 드러나게 좋아하는 것이 이에 이르렀으니, 만약 법을 엄하게 하여 금지한다면, 죄를 무릅쓰고 금법을 범하는 것이 반드시 주정(洒政)보다 심함이 있을 것입니다."

순조 8년(1808) 11월 19일 1번째 기사

아버지 정조와는 정반대의 일화. 지독한 골초주당이었던 정조와는 달리, 순조는 '''혐연가'''였다. 순조가 남초, 즉 담배의 해악을 언급하면서 첫마디 운을 떼는 말을 잘 보면 '위장에도 좋고, 담에도 특효라는데 진짜 맞아?' 라는 식으로 까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사실 이 내용은 아버지 정조가 했던 말이다. 1796년 11월 18일, 정조가 과거시험의 책문으로 '남령초(담배)의 효능에 대해 논하고, 어떻게 하면 온 백성이 담배를 피울 수 있겠는가?'를 냈는데 여기에서 담배의 효능으로 위와 같은 내용이 언급된다. 아버지 정조는 담배를 '남쪽에서 온 영험한 풀'이라는 뜻에서 남령초라고 높여 부르고, 담배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아들 순조는 평범하게 남초라고 부르는 것도 깨알같은 포인트.
물론 순조가 아버지 정조를 디스할 의도로 이런 말을 꺼낸 것은 아니었겠지만, 당시 조선의 애연가들 사이에서 이러한 논리로 담배를 옹호하곤 했음은 확실해 보인다.
이 당시에는 담배의 중독성을 불러일으키는 원인물질인 니코틴의 존재가 알려져있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왜 담배를 못끊지?'라는 순조의 질문에 신하들도 명쾌한 답을 내놓지 못한다. 다만 술과 비슷한 물건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법으로 금지시킬 수 있는 물건은 아니라는 것은 바로 언급한다.[7]
좀 다른 얘기지만, 청 황제 숭덕제를 금한(金汗), 즉 금나라 칸이라고 부른 것도 포인트. 조선은 과거 여진족이 세운 금을 계승한다는 의미의 '후금'이라는 국명 및 조선과의 관계를 형제지간으로 두는 것은 인정했으나, 칭제건원하며 새로이 정한 '청'이라는 국명 및 양국 관계를 군신지간으로 두는 것에는 큰 거부감을 보였다. (관련 실록 기사) 병자호란의 패전으로 인해 억지로 받아들이긴 했다만 항복(1637) 이후 171년이 지난 순조조(1808)에도 여전히 '청 황제'가 아니라 '금한'으로 칭하고 있다는 것은, 마음으로는 여전히 청나라를 인정할 수 없었다는 당대 인식을 보여 준다.

[1] 실제로 일본의 활은 기후문제로 인한 합성궁 사용의 어려움과 탄력있는 활을 만들만한 목재질의 부족으로 활 만드는 기술과 재주가 썩 좋지 못했다. 활의 일본 문단 참조.[2] 중종이 죽은 이후, 명나라에서 내려준 일종의 위로문. 실록에서도 해당 내용이 이렇게 각주처럼 적혀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황제는 사례감 태감(司禮監太監) 곽방(郭)과 행인사 행인(行人司行人) 장승헌(張承憲)을 보내어 조선 국왕 성휘(姓諱)에게 유제(諭祭)한다. 왕은 하방(遐邦)을 사수(嗣守)하여 나라의 번병(藩屛)이 되어 예(禮)를 지키고 의(義)를 따라 신직(臣職)을 공경히 하여 온 40년동안 시종 변하지 않고 동토(東土)를 보안(保安)하기에 짐(朕)이 포가(褒嘉)하는 바이었는데 부음(訃音)이 들리니 슬프다. 그래서 특별히 공희(恭僖)라 시(諡)하고 관원을 보내어 유제하여 휼은(恤恩)을 보이니 영(靈)이 어둡지 않거든 받기를 바란다." 여기서 '성휘'라고 적힌 부분은 사관이 실록에 기록하는 과정에서 피휘를 한 것이고 실제로는 중종의 본명인 '이역(李懌)'이 적혀있었을 것이다.[3] 당나라의 배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중국배를 의미한다. 당면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당나라 멸망 이후에도 오랫동안 '당(唐)'이란 단어는 중국 그 자체를 의미하는 말로 쓰였다.[4] 또한 영조 본인이 '간과가 극렬한 가운데'라고 운을 뗀 것에서 알 수 있지만 이순신이 활약하던 시기는 한창 전쟁 중인 때였다. 아무리 물자가 풍부한 전라도라고 해도 임진왜란 당시는 피폐했으며 아사자가 발생할 정도였다. 즉, 영조는 전라도의 풍요로움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남에게 손 안벌리고 알아서 해결하는 이순신의 솔선수범함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다.[5] 영조가 박문수를 황해도 수군절도사에 제수한 것은 1744년 1월이다. 전근대시기에 명령이 전해지고 채비하여 황해도까지 가야하는 일련의 과정을 생각해본다면 거의 부임 직후라고 봐도 무방하다.[6] 팔진미란, 아주 맛있고 성대한 음식을 비유적으로 표현하는 말로 쉽게 말해서 '''맛있는 음식을 못먹고 살순 있어도 담배는 못끊는다'''라는 뜻이다(...).[7] 니코틴은 20여년 후인 1828년 독일 과학자 포셀트(Wilhelm Heinrich Posselt)와 라이만(Karl Ludwig Reimann)에 의해 발견되며, 역학작용이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843년의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