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 아메리칸 항공/역사

 


1. 개요
2. 창설
3. 세계 최초 환태평양 횡단 정기 노선 운항
4. 세계 최초 대서양 횡단 정기 노선 운항
5. 세계 최초 세계일주 정기 노선 운항
6. 제트기 도입
6.1. 초기 제트기(협동체) 도입
6.2. 세계 최초 광동체 도입
6.3. 세계 최초 남북극 민항기 세계일주
6.4. 세계 최초로 초음속 기체(SST) 도입하려 했던 계획
7. 세계 최초 컴퓨터 예약 시스템 도입
8. 팬암 본사
9. JFK 제3터미널 (Worldport)
10. 절정기
11. 몰락
11.1. 부실 경영의 내막
11.1.1. B747 방만 경영 건
11.1.2. L-1011 선정 건
11.1.3. 1984년 신도색 결정 건
11.2. 노선 확충을 위한 시도
11.2.1. 내셔널 항공의 인수와 위기
11.3. 위기 극복을 위한 조치
11.4. 파산과 분해


1. 개요



1977년 제작된 팬암 미니 다큐멘터리. 마지막에 나오는 "The best chapters are yet to come!!!" [1]이 인상깊다.
일명 '''보잉 707로 떠서 보잉 747로 망한 회사'''. 성장 초기에 장거리 대규모 수송이 가능한 보잉 707을 적극 도입하여 미국발 국제선에서 거의 독점이나 다름없었던 지위와 결합하여 폭발적인 성장에 성공하였으나, 이에 너무 자신감을 얻은 나머지 보잉 747의 개발 후 보잉 707보다 더 큰 규모의 보잉 747을 무리하게 도입.[2] 굳이 보잉 747까지 투입할 필요가 없는 노선에도 보잉 747을 투입하여 위용을 과시하려다[3], 지미 카터 정권기에 항공산업이 자유화[4]되면서 항공사 간의 항공권 인하 경쟁이 촉발, 거의 절반은 공기 수송이었던 보잉 747의 운용에 의해 수익이 급격히 악화되면서 회사가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1970년대 오일 쇼크로 인한 재정난은 새 CEO가 허리띠를 졸라매서 어느 정도 해결되었고 1977년부터는 다시 흑자를 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CEO는 1980년 치명적인 결정을 하고 말았는데, 바로 미국 내 국내선을 확장하려는 의도로 내셔널 항공을 인수한 것이다. 내셔널 항공은 당시 플로리다마이애미를 중심으로 운항하던 회사였는데, 이 마이애미를 중심으로 한 국내 노선은 합병 이후 팬암의 수익성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적자만 엄청 냈고, 게다가 두 회사 간의 기종의 차이와 합병 비용으로 팬암은 다시 재정난에 시달리게 되었다. 그리고 이 위기는 끝내 극복하지 못했다.
여기에 1980년대 중후반 두 차례에 걸친 팬암 항공기에 대한 테러 사건[5]으로 이미지가 급격히 실추, 급기야는 그동안 팬암의 자존심이던 대서양과 태평양 항공노선을 각각 델타 항공유나이티드 항공에 매각하면서,[6] 미국 국내선 규모의 항공사로 쪼그라들었다.
그래도 미국의 날개였다는 자존심을 지켜보려고 발버둥쳤지만, 결국 쌓여가는 부채를 견디지 못하고 1991년 12월 4일 최후의 운항을 끝으로 결국 망했다. 1990년대 후반 팬암의 부활을 자처하면서 지역 항공사로 다시 재출발하려는 시도를 한 회사도 있었으나, 이미 항공업계가 정글에 가까운 무한경쟁체제로 돌변한지 오래라 얼마 못 가서 망했다.

2. 창설


창설은 군사적 목적에 의해 탄생했다. 1927년 독일의 자본이 들어간 여객기 회사인 SCADTA가 미국-콜롬비아 간의 우편 배달 계약을 따내게 되는데 이 회사를 통해 독일은 미국의 상황을 손쉽게 얻을수 있다는 판단을 한 헨리 아놀드육군 항공대 대장[7]과, 그의 부관 칼 스패츠[8]이 이를 막기 위해 미 정부의 지원을 받아 설립한 것이 이 회사의 시작이었다. 다만 헨리 아놀드와 칼 스패츠는 설립자이긴 했지만 회사 경영에는 관여하지 않았다. 이후 1940년 초반 나치즘의 등장과 국제 정세에 대비해 미국정부와 콜롬비아 정부는 SCADTA의 오스트리아 기업인 지분을 팬암으로 매각하도록 압력을 가하여 팬암은 이 지분을 인수한다.

3. 세계 최초 환태평양 횡단 정기 노선 운항


록히드 마틴팬암의 사양을 맞춰 주문제작해준 여객기를 이용했다. 대당 가격은 $417,000이다. 이 노선에 투입된 마틴 M-130은 1934년 12월 30일 초도 비행을 했으며 1935년 11월 22일 역사적인 팬암의 '''세계최초로 환태평양 정기 노선'''[9]을 운영했다. 제작된 3기는 모두 이 노선에 투입됐다.

첫 환태평양 서비스를 하는 China Clipper

4. 세계 최초 대서양 횡단 정기 노선 운항


팬암이 환태평양 횡단 노선을 최초로 운항한 마틴 M-130에 이은 대서양 횡단 노선을 최초로 운항 및 M-130의 대체를 위해 보잉에 주문 제작한 폭격기 프로토타입 XB-15를 바탕으로 개발된 보잉 314를 인도 받는다. 도밀 기종으로 1939년 1월 23일 팬암의 홍콩-샌프란시스코간 환태평양 횡단 노선에서 길들이기를 한 후 Yankee Clipper가 1939년 1월 24일 영국 사우샘프턴-뉴욕간 '''세계 최초 대서양 정기 횡단 노선'''을 개척 했다.

양키 클리퍼의 첫 대서양 횡단 당일 촬영된 필름

5. 세계 최초 세계일주 정기 노선 운항


세계 2차 대전이후 TWA, 아메리칸 항공의 미 내부 경쟁자와 BOAC 등의 미 외부 경쟁자가 생겨나자 팬암은 독보적 위치 확보를 위해 세계 일주 노선을 개척한다. DC-4는 PA001로 서쪽으로 샌프란시스코를 출발해 호놀룰루, 미드웨이 환초, 웨이크 섬, 괌, 마닐라, 방콕 거쳐 콜카타에서 PA002편으로 록히드 컨스텔레이션 시리즈[10]로 비행기가 바뀌어 카라치, 이스탄불, 런던, 샤논, 간더을 거쳐 뉴욕 라과디아 공항에 도착하게 된다 이후 B707B747이 계승하며 1974년 뉴욕-뉴욕 간 노선이 완전히 개통된다.

6. 제트기 도입



6.1. 초기 제트기(협동체) 도입


팬암은 B707의 런치 커스터머이다. 1955년 10월 2억 6900만달러 상당의 B707 20대와 DC-8 25대를 구매한다. 1958년 10월 26일 Clipper America(N711PA, B707-121B)을 이용하여 111명이 탑승하여 JFK에서 파리의 Le Bourget 공항행 PA160편으로 팬암 및 미국 항공사의 최초 제트 서비스를 시작한다.
1960년대말까지 팬암은 137기의 B707[11]과 25대의 B727 그리고 20대의 DC-8을 운용하였다. B707과 DC-8은 주로 환태평양과 대서양 및 세계일주 노선에 B720, B727은 주로 남아메리카 노선, 서베를린 노선(IGS)[12]이나 극 소수의 국내선에서 사용되었다.

1959년 팬암의 B707 프로모션 필름

6.2. 세계 최초 광동체 도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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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암은 1967년 모든 주문한 기체들이 연구 개발 단계에 들어서자 대대적으로 B747과 SST 기체들에 대해 홍보를 시작한다. 참고로 가장 위에는 콩코드, 가운데는 보잉 747-100이고, 아래는 B2707이다. 그러나 B2707이 취소되면서 팬암은 B747과 B707로 먹고 살게 된다.
팬암은 회장 주안 테리 트립이 보잉 회장인 윌리엄 M. 알렌과 1965년 여름휴가를 알래스카낚시 휴가를 함께 보내며 미리 선약된 계약으로 이때 처음 B747이 언급된다. 이후 1966년 보잉의 50주년 선물로 팬암은 5.25억 달러치 당시 역사상 최대 단일 주문이었던 [13] 25대의 B747을 주문한다. 팬암은 항공계의 VVIP로서 B747의 기본 외형부터 사양까지 모두 결정하였다. 그리고 한때 조. 셔터와 잡음[14]이 있어 월리엄에게 최고 기술자 교체를 요구한 적도 있다. 이후 항공 및 보잉 역사학자들이 이를 역사상 최대 단일 항공사가 한 항공기 설계에 관여한 사건이라 하였고 이전에도 이후에도 보잉 및 항공업계에 없을 일이라고 칭송하였다. [15]
팬암은 1970년 1월 공항 호환성과 대중들에게 투어를 시켜주기 위해 미국 내부의 공항에 시범운항을 한다. 닉슨 대통령의 부인인 패트리샤 라이언 닉슨이 1970년 1월 15일 팬암 B747의 워싱턴 덜레스 국제공항에 시범운항 중 주안 테디 트립 회장이 은퇴 후의 팬암의 3번째 회장이 된 나집. E회장과의 만남에서 그곳에 있던 N735PA에게 Clipper Young American이라는 이름을 부여하고 첫 상업운항에 투입하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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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암 첫 보잉 747 취항 직후 촬영된 기념사진

보잉 747 기념 첫 상업운항 기념영상
최초 상업운항은 N736PA (cn 19643/11, Clipper Victor → Clipper Young American → Clipper Victor)가 운항한 1970년 1월 22일 뉴욕-런던간 노선이었다. 뉴욕에서 런던까지 원래 첫 상업운항을 하려던 기체는 당시 닉슨 대통령의 퍼스트 레이디께서 이름까지 부여한 N735PA (cn 19642/10 Clipper Young American → Clipper Victor → Clipper Spark of the Ocean)이 이륙전 활주로에서 초기 JT9D-3A[16] 의 고질적인 엔진 파이핑 문제가 발견되어 이륙하지 못하고 되돌아온다. 그래서 팬암은 보잉과 팬암의 이미지를 위해 N736PA를 구원투수로 등판하여 이름과 테일 넘버를 모두 N735PA의 것으로 변경해 상업운항을 한다. [17] [18] 참 운이 없게도 그해 8월에 쿠바에 납치를 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19] 그래도 그 이후 별 탈 없이 순조롭게 잘 날아다니다가 여객 항공 역사상 최악의 참사의 주인공이 되어 항공기로서 유명을 달리하게 된다. 이 끔찍한 참사는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은 것 뿐만 아니라, 박물관으로 모셔져야 했을 정말 역사적인 기체였던 이 N736PA도 잿더미가 되어 버렸기에 두고두고 잊혀질 수 없는 항공기 참사로 기록된다.
팬암은 1970년 B747을 통해 첫 광동체를 투입한 항공사로 '''전세계의 항공 산업을 혁신'''하게 되었다.
팬암은 1976년 다시한번 B747SP로 세계 첫 장거리 직항 노선이 가능한 시대를 열었다. 기존 항공기들로는 태평양 노선도 벅찼는데 1973년 팬암은 이란이란항공과 함께 미국에서 대척점에 가까운 테헤란이나 도쿄, 시드니, 웰링턴, 홍콩 등에 취항 가능한 기체를 보잉, 맥도넬 더글라스, 록히드에게 설계를 요구한다. 그러자 3개 회사는 B747, DC-10, L-1011을 기반으로 장거리 기체를 제안하지만 보잉에게 개발하도록 요구하고 마침 중형기가 없었던 보잉은 1960년대 말부터 나왔던 중형 광동체 기종 설계도 할겸 수락했으나 팬암과 이란 항공이 더 빠른 속도를 원했고 당시 기술로는 쌍발기로는 이 항속거리가 불가능 했기에 B747의 동체 길이를 줄여 B747'''SB'''[20] 모델을 특수모델로 따로 내고 B747 첫 비행을 한 시점부터 당시 설계중이던 A300B와 경쟁하기 위해 프로젝트가 논의되기 시작한 B767[21]을 메인 중형기로 내놓았다. 팬암은 B747SP를 1976년 3월5일 Clipper Freedom(N531PA)를 인도받음으로서 또다시 런치커스터머가 된다.

6.3. 세계 최초 남북극 민항기 세계일주


비정기 운항편으로 팬암 설립 50주년을 기념해 기획됐다.

이후 단 한편의 여객편이 운항된적 없으나 최근 기획되고 있다.##[22]

6.4. 세계 최초로 초음속 기체(SST) 도입하려''' 했던''' 계획


팬암은 1963년 6월 3일 콩코드를 BOAC[23]에어 프랑스와 함께 2대의 옵션을 포함해 총 8대의 콩코드를 각각 주문한다. 이는 브라질의 Panair do Brasil[24]의 1961년 [25] 이후 첫 주문으로 팬에어가 도산 [26] 으로 인해 1965년 취소가 되면서 팬암이 실질적으로 콩코드를 첫 주문한 회사가 되었다. 이후 컨티넨탈 항공, 아메리칸 항공, 콴타스, 에어 인디아, 일본항공 등 우루르 주문하지만... 1972년 에어 캐나다유나이티드 항공이 주문을 취소하고 1973년 오일 쇼크로 인해 팬암과 TWA가 2월 31일에 동시에 취소하며 또다시 우르르르 영국 항공과 에어 프랑스를 제외하고 모두 취소해버린다. 그리고 팬암은 콩코드와는 전혀 다른 가축수송 보잉 747에 맛 들린다. 한편, 이미 완성되었던 한 대는 DC-10만행에...
팬암은 B2707도 처음으로 주문을 하는데 이는 팬암이 또한 B2707의 런치 커스터머가 되기로 하였다. 사실 팬암은 B2707에 대한 관심을 먼저 보였지만 B2707의 프로젝트가 지연되자 항공사들이 SST사업에 관심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콩코드를 추가로 주문한 것, 실제로는 팬암이 콩코드보다 B2707를 먼저 주문했고 B2707이 나오면 콩코드 주문을 취소한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7. 세계 최초 컴퓨터 예약 시스템 도입


팬암은 1964년 IBM과 함께 PANAMAC이라는 예약 시스템을 도입하였다. 이 예약시스템은 세계 첫 컴퓨터기반 예약 시스템이었으며 이 시스템의 서버는 팬암 본사 4층에 설치되었다. 또한 이 시스템은 취항 도시에 관한 도시 정보, 국가 정보, 공항, 운항 기종, 호텔 및 식당에 관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으며 세계 처음으로 민간에서 구축된 GIS 시스템이기도 하다.

8. 팬암 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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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암 사옥은 완공 당시 전세계에서 가장 넓은 사무실 면적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큰 규모의 건물이었고, 지금도 마천루의 도시인 뉴욕 맨하탄에서도 눈에 띄지만, 파산 후 메트라이프(METlife[27])에 매각되었다. 지금도 유명한 그랜드 센트럴 역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다.[28]
이곳의 옥상에는 헬리포트가 있었는데, 이곳은 팬암이 외부입찰 업체인 뉴욕 항공(New York Airways)에 운영권을 주어 1965년에 서비스를 개시하였다. 팬암은 40분전에 팬암 본사에서 체크인을 하면 10분만에 JFK 국제공항에 보내어 자사 운항편에 탑승시켰다. 1966년당시 JFK 월드포트에 하루 23회 운항하였으며, 이외에도 하루 13회의 뉴어크 리버티 국제공항과, 5회의 JFK 제5 터미널인 TWA터미널 그리고 12회의 라과디아 공항에 취항하였으나 주말에는 운항하지 않았다. 또한 영국항공에어프랑스콩코드 탑승객들은 팬암과 이들 항공사의 협약을 통해 팬암 본사에서 체크인하거나 JFK 착륙 직후 바로 뉴욕 맨해튼으로 이동했다고 한다. 그러나 1977년 5월 헬리포트에서 일어난 S-61L의 착륙 후 탑승대기 중[29] 오른쪽 앞 랜딩기어가 부러지면서 회전중이던 로터가 사람을 덮쳐 4명이 사망한 사고에 의해 즉시 폐쇄되었다.
더이상 팬암 이름이 붙은 채로 나오기는 어렵게 됐지만 뉴욕 배경의 영상물에서는 운좋으면 뒷배경으로나마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 작품들 중 가장 특이한 사례는 단연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라 할 수 있는데, 이 빌딩이 맞긴 맞는데 이 빌딩을 깎아 쌓은 전혀 다른 느낌의 건물로 재탄생해 등장했다.

9. JFK 제3터미널 (Worldpo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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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암은 1950년대에 1960년 제트 시대를 맞이하여 마침 한참 건설 중인 JFK에 새 터미널을 짓는다고 계획한다. 1960년에 월드포트는 'Pan Am Terminal', 'Unit Terminal Building (UTB)'라는 이름으로 개장하였다. 이 건물은 Saucer Roof라고 불리우는 32개의 강철 와이어가 중앙 기둥에 연결되어 지지하는 1.6 헥타르짜리 지붕을 가지고 있는데 이 지붕은 비행기의 대부분을 덮어 눈이 오든 비가 오든 편히 탑승할 수 있도록 고안된 것으로 이 점을 매우 잘 살리기 위해 B747 도입으로 인한 새 보딩 브릿지가 들어올 때까지 보딩 브릿지에 천장이 없었다. 그리고 제트 시대에 걸맞는 편의시설 을 갖춘 터미널이라고 팬암은 홍보에 잘 써먹는다... 미국 설계자 협회에서 뉴욕 여행 가이드에 쓰기로는 언제든지 편하게 비행기를 탈 수 있도록 잘 설계한 건물이라고 칭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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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면에는 Milton Hebald의 황도대를 조각한 조형물이 있었으나 1991년 팬암 도산 이후 철거되었다. 내부에는 'Clipper Hall'이라는 팬암 역사 박물관과 중앙 상부에 'Panorama Room이라는 터미널 내부가 다보이는 식당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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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B747 수용을 위해 확장을 하며 '''Worldport'''라는 새 이름을 부여받는다. 확장 이후 몇 년간 전세계 최대 터미널이라는 타이틀을 부여 받게 되고 철거 직전까지 JFK 최대 터미널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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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팬암이 챕터11을 신청하면서 델타 항공이 팬암에 구호 자금을 투자하면서 월드포트와 유럽 루트를 모두 빼앗아온다. 이후 델타 항공은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등의 장거리 루트를 월드포트에 다 이관시켜 버린다.
2006년 제2터미널과 월드포트의 리모델링을 위해 1000만 달러를 투자한다. 2007년 리모델링이 끝나자 델타 항공 부사장 Joanne Smith는 새 바닥과 조명과 전광판이 '''지붕'''을 더 돋보이게 해 '''역사적인 공항'''의 모습을 보여준다고 하였다.
2010년 8월 델타 항공은 제4터미널 슬롯 확보와 주기장 확보를 위해 제3터미널을 11월부터 철거해 2013년에는 확장을 완료하기로 하였으나 시민단체가 나서 2001년이후 다시 미 근현대 문화유산 등재를 추진하여 결격된 2013년에야 철거를 시작한다. 결격 사유로는 2001년과 같은 1971년 확장으로 인한 지붕의 무의미성과 가치 훼손 때문이라며 델타 항공의 손을 들어준다. 그리고 '''2013년 사라진 10대 역사적 공간'''에 등재시켜 버린다. 철거가 집행된 이후에도 이 시민 단체는 지속적으로 철거 중단 및 복구를 요구했는데 철거가 시작된 날 언론 보도가 되자 더 힘을 얻었다고 한다. 그 사건이 일어난 지 정확히 50년 되는 날인 2013년 11월 22일 화제의 지붕의 철거가 완료되었고 2014년 여름에는 터미널 철거가 완료되었다.

10. 절정기



11. 몰락


팬암항공의 몰락에 관한 동영상이다. 특히 4분 37초부터 나오는 팬암 항공사의 마지막 순간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착잡한 마음까지 들게한다.Death of an American Dream

11.1. 부실 경영의 내막



11.1.1. B747 방만 경영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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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사진은 1976년 B747SP 투입 이후의 신문 광고다. 팬암은 개척자 정신으로 태평양 노선과 북대서양 노선에 B747만 투입한다고 대대적으로 홍보한다. 심지어 개인 수하물 무게가 기준을 초과할 시에도 추가 요금이 없다고 했다.
팬암이 이렇게 했던 이유는, 전성기 시절 B707 같은 대형기를 노선에 투입하면 수요가 자동으로 증가하는 것을 보았으며 이에 따른 믿음이었다. 유나이티드 항공, 아메리칸 항공에서 오일쇼크 이후 팔아버리거나 소형기로 교환한 B747까지 가져와 투입하여 수요 증가를 도모하였지만 200명 남짓이 한계였다. 즉 좌석의 '''절반'''이 빈 채로 운행했다. 예나 지금이나 미국에서의 국제선은 유럽이 압도적이고 그중에서도 영국과 프랑스 같은 나라에 한정되어 있다. 게다가 아시아는 일본을 제외하면(미국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다지 갈 만한 곳이 없었고, 따라서 그다지 수요가 많지 않았던 것은 당연했다. 이러한 만용 끝에 노선의 수익성이 악화되기에 이른다.
사실 위용을 자랑하려고 했으면 DC-10, L-1011이나 뒷날 B777, A330으로 했어도 될 일이었다. DC-10, L-1011은 400명 정도의 수용 인원을 가져서 B747보다 한 체급이 낮았기 때문이다.

11.1.2. L-1011 선정 건


팬암은 운영비용 절감을 위해 1980년에 들어서 운영비도 절약할 겸 중대형 기종을 투입해 연료를 절약하겠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선택한 기종은 L-1011-500. 당시 경영진들에 의하면 DC-10의 카고 도어 결함이 수정된 점도 고려하지 않았다고 한다. 언론이 선호하고 ETOPS 제약을 받지않는 삼발기라는 옵션에서 다른 검증절차 없이 즉흥적으로 트라이스타[30]를 선택한 것이다.
이 시점이 내셔널 항공이 인수된 직후의 시점인데 이미 내셔널 항공 소속 DC-10이 팬암기로 트랜스퍼되는 시점에서 매우 성급한 선택이라고 할 수 있었다. 덕분에 팬암에는 당시에 취항하던 미국의 모든 광동체 기체들[31]이 혼비했으며[32] 유지비는 하늘을 치솟았다.
이후 DC-10은 1984년부터 순차적으로 매각되었다. 그러다 경영난이 심화되고 ETOPS 기준이 바뀐다는 이야기가 돌자, 5년도 안된 L-1011은 ETOPS 때문에 록히드에서 1985년 생산 중단을 선언한 시점을 기하여 델타 항공이나 영국 공군에 헐값에 매각한다. 여기에 1986년 태평양 운항 이원권을 모두 매각할 때 B747SP와 함께 남아있는 L-1011과 DC-10을 유나이티드 항공에 전량 매각한다.

11.1.3. 1984년 신도색 결정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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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740PA Billboard
N735PA Hybrid Strips
N748PA Low Strips

팬암은 1984년 이미지 쇄신을 위해 새 도색을 결정하여 채택하기로 한다. 이 도색을 결정하는데 팬암은 내부에 이 줄을 버리는데 잡음이 생겨 실제 평가를 위해 경영 상태가 좋지 않았던 시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B747에 3개안의 도색을 칠해버린다. 그리고 팬암은 B707시절부터 이어온 "Racing Strip"이라는 파란색 줄을 버리고 빌보드식 도색을 채택하고 하루종일 영상만 찍는다.

11.2. 노선 확충을 위한 시도


팬암은 1930년대부터 국내선 확충에 눈독을 들였다. 그러나 여러 이유로 개설이 지연되었고, 1950년대에서 1970년대 중반까지 알레스카나 하와이 같은 일부 노선을 제외하면 어떠한 국내선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 기간 동안, 국내선의 4대 항공사였던 아메리칸 항공, 이스턴 항공, TWA, 유나이티드 항공의 인수가 거론되어 왔다.[33] 팬암의 마지막 항공사 인수는 1978년 내셔널 항공이었다. 팬암은 이 때까지 30년 가까이 루트 개설과 국내선 업체 인수를 꾸준히 제한당해왔다. 상부에 첨부된 동영상에 등장하는 전직 팬암 기장의 증언에 따르면 팬암은 1980년까지 국내선 운행이 금지되었었다고 한다.
특히 세계 2차 대전이 끝난 이후 있던 17개의 국내선 항공사가 국회에 로비를 해 법령을 얻어냈는데 1항은 17개의 국내선 항공사가 점진적으로 해외 운항이 가능하도록 허가해주는 것이고 2항은 팬암이 점진적으로 국내선 운항이 가능하도록 허가해주는 것이다. 국회를 통과한 시점부터 1항은 효력을 발휘하였으나, 2항은 1978년 카터 정부의 '항공노선 개설 자율화'가 되기 전까지 발휘되지 못하였다. 이는 당시 항공사들이 '팬암에게 국내선 운영권까지 줬다간 독과점이 발생하게 된다'는 논리로 팬암의 국내선 운영권을 방해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몇 건의 신규 개설 루트를 빼앗기는 사건이 있었다. 이 중 세 건이 팬암 도산 직후에 알려졌다. 당시에는 항공노선 개설이 자유롭지 못했던 시기였기에 CAB가 노선의 수익성을 검토하여 정부에 개설 요청을 하는 방식이었다.
  • 뉴욕 ~ 멕시코시티 노선 : CAB는 항속거리 문제로 유럽~남미 직항 노선을 운항할 수 없었기에 팬암의 유럽에서 오는 노선을 연장하여 운항하면 좋겠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 노선이 백악관에 들어가자 이스턴 항공에서 12만 달러의 정치 기부금을 대통령에게 냈고 이를 뺏어왔다.
  • 마이애미 ~ 런던 노선 : 해당 노선에는 이번에도 팬암이 추천받았지만 이 노선이 대통령 비서실에 들어가자 대통령 선거에 당선된 후보의 지지금으로 20만 달러룰 냈던 내셔널 항공에 빼앗겼다. 장거리를 위한 서비스 인프라, 기체나 크루들이 없어 결격 사유가 명백히 존재했음에도 말이다.
  • 댈러스 ~ 파리 노선 : 이 또한 라틴 아메리카에서 오는 팬암의 노선을 연장하여 개설해야 한다는 요청서가 접수되었다. 그러나 이 노선이 백악관에 들어가자 백악관은 델타 항공에 이 노선을 부여하였다. 델타 항공의 CEO와 당시 대통령같은 조지아 주 출신이었다. 이후 팬암의 임원진들이 백악관에 가서 따지자 당시 대통령은 "We know when, We know what, We know how much."라고만 답했다. 팬암은 이후 후임 대통령에게도 이 노선을 요청하였으나 기부금 문제로 거절당했다.
정부 제한이 풀리던 1978년에는 이미 일부 공사는 팬암과 경쟁이 가능할 정도로 성장하였고 팬암은 국내선 확충에 더 다급해졌다. 이들 항공사들은 이미 국내선이 탄탄했기 때문에 유럽에서 미국의 주요 도시를 가려고 하면 환승을 하지 않고 간편하게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으나, 팬암은 국내선이 아예 없었기 때문에 JFK 국제공항으로 도착해 거기서 환승을 해야 하는 불편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11.2.1. 내셔널 항공의 인수와 위기


결국 1980년 팬암은 마이애미를 기반으로 동해안 위주 국제선과 유럽 노선을 운항하던 내셔널 항공을 인수한다. 그러나 후대의 많은 이들에게 이 인수는 B747의 무리한 운용보다도 팬암이 망하는 데 훨씬 크게 기여한 실책으로 평가받는다.
  • 노선과 기종을 조정할 틈도 없이 바로 흡수한 탓에 안 그래도 재정적으로 여유롭지 못한 상태였다.
  • 국내선도 약한 가운데, 체급이 같은 DC-10L-1011이 공존하는 등 효율성이 막장이 되었다.
  • 설상가상으로 어렵게 얻은 국내선들이 1980년대 내내 적자를 냈다.

11.3. 위기 극복을 위한 조치


팬암의 재무 상황이 갈수록 악화되자, 팬암의 4대 회장이었던 윌리엄 시웰(William T. Seawell)은 팬암의 비주요 자산을 매각하기 시작한다. 팬암의 첫 매각 자산은 팰컨 항공의 전체 지분의 50% 정도의 주식이었다. 이어서 팬암 빌딩을 4억 달러에 판매한다.[34]
이후 에어 플로리다 창업자이자 브래니프 항공의 외항부문 총책임자로 있었던 에드워드 애커(C. Edward Acker)[35]가 새 회장으로 취임하여 1981년 9월에는 팬암의 호텔 부문이던 인터컨티넨탈 호텔 체인을 매각한다. 팬암은 3건의 매각을 통해 9억 달러의 현금을 확보했다.
1982년에는 전세계 최초이자 가장 유명했던 팬암의 세계 일주 노선을 단항시켜버리고 델리, 방콕, 홍콩 노선을 폐지했다. 1983년에는 성수기 수송인원을 늘리기 위해 팬암의 B747-100SF 4대와 플라잉 타이거[36]B747-200 3대의 상호 교환이 이루어졌다.

11.4. 파산과 분해


1984년 팬암은 연비가 떨어지는 구형 여객기를 대체하기 위해 에어버스에서 A300, A310, A320을 주문했지만 경영난으로 A300A310만 들여온다. 그리고 1985년 중형기들의 에어버스 계열 통일과 국내선 확충 자금 조달을 위해 B747SP, DC-10, L-1011과 '''태평양 노선'''을 자신들을 추월한 당대 최대의 항공사 유나이티드 항공에 매각한다. 하지만 현재까지도 이 결정 또한 실책으로 평가받는데, 당시 팬암에서 가장 수익성이 높은 노선이 한창 수요가 증가하던 아시아/태평양 노선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2001년 9.11 테러 이후 엄청난 적자와 과징금 그리고 유족 보상금으로 파산할 지경에 내몰린 유나이티드 항공이 그나마 수익을 계속 거둔 게 이 아태 노선이었다.
1986년 2월 유나이티드 항공은 팬암 항공에서 넘겨받은 B747들과 승무원들로 태평양 노선 운항을 시작했다. 이로써 팬암은 미국의 국제 항공사 지위에 금이 갔다. 이는 1989년 노스웨스트 항공의 인수 추진으로 이어지는데, NWA의 인수는 마이에미와 뉴욕발 국내선 강화와 수익성이 좋았던 태평양 횡단 노선 재진출로 이어질 수 있었다. 그러나 주주 중 한 사람이 NWA의 더 좋은 조건 제시로 팬암 대신 NWA의 지분에 바로 투자하면서 실패한다.
1986년부터 팬암은 A310을 대서양 노선에 투입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팬암은 다른 회사들과의 경쟁에서 고전을 면치 못했고, 미국의 날개라는 옛 이미지 때문에 테러에도 시달렸다. 1986년에는 파키스탄 카라치에서 팬암 73편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37]들에 납치된 뒤 총격전이 벌어져 20명 이상이 숨졌고, 1988년 12월 21일에는 팬암에게 최후의 일격을 날린 로커비 테러가 터졌다. 이 사건으로 탑승자 259명 전원과 로커비 주민 11명이 사망했고, 연락편에서 오는 수하물 검사를 소홀히 한 사실이 발견되어 벌금을 물었을 뿐만 아니라 이미지도 추락하게 된다.
1990년 걸프 전쟁으로 유가가 상승하고 대서양 노선 승객이 급감해 항공업계 전반이 적자를 기록했을 때, 가장 재정이 나빴던 팬암은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되어 그 해 유나이티드 항공에 런던 히드로 국제공항 노선을 매각했다. 상황이 나아지지 않으면서 1991년 1월 8일 '''파산 보호 신청'''을 하게 되고, 델타 항공에 마이애미-파리 노선을 제외한 전 대서양 노선과 유럽 간 노선[38], 팬암 셔틀[39]을 매각하고 그나마 수익성이 있던 남미와 카리브 해 노선만 남은 채로 10월부터 새 출발을 하려 했다.
팬암의 자산 매각 조건은 델타에게 투자 비용을 지원받는 조건이었다. 그러나 팬암의 상태는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지경이었고, 따라서 델타 항공은 팬암에 큰 투자를 해주지 않았다. 물론 회사가 너무 기운 상태였다. 당시 델타 경영진은 '팬암은 하루에 300만 달러의 손해를 보고 있다'는 말까지 남겼을 정도다. 그리고 1991년 12월 4일, 바베이도스발 마이애미행 보잉 727의 착륙을 마지막으로 항공 산업의 선구자 팬암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바로 전날까지 팬암 이사진들은 TWA의 최대 주주였던 칼 아이칸에게 투자를 받아내려 애썼다. 팬암이 망한 직후 전 이사진들과 직원들이 델타를 고소하는 사태까지 벌어졌지만, 법원은 델타의 책임이 없다는 판결을 내렸다.
결국 팬암은 1986년 태평양 노선을 유나이티드 항공으로 매각을 시작으로 1990년 IGS를 루프트한자로, 1991년 마이애미에서의 새 시작과 파산때 대서양 노선과 월드포트, 프랑크푸르트 암마인 국제공항의 미니 허브와 셔틀 노선들은 델타 항공으로, 마이애미 허브와 노선은 1992년 유나이티드와 아메리칸 항공으로 매각되었으며, 리지널 서비스를 담당하는 자회사인 '팬암 익스프레스'는 TWA로 매각되었다. 가장 마지막으로는 팬암에 남아있던 시뮬레이터를 이용해 파산 때부터 운영해온 항공교육기관인 팬암 아카데미는 2014년 전일본공수로 인수되었다.


[1] 직역하면 "아직 최고의 장이 오지 않았어요!!!" 이다.[2] 팬암은 보잉 747의 런칭 커스터머다. 게다가 애초에 군 수송기로 개발되었다가 탈락한 747에 민간 여객기로의 전환을 권유했던 장본인이 바로 팬암 사장이었던 후안 트리페였다.[3] 만약 대서양 노선에 보잉 767을 도입하고 ETOPS에 걸려 4발기가 필요한 구간은 707, DC-10 등으로 버티다가 1990년대 들어 A330/A340을 도입, 747은 대량수송이 필요한 구간에만 최소한으로 투입하고 A330과 A340으로 위용을 자랑했었으면 망작의 길을 걷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767은 대서양 횡단 정도는 가능하고, A330은 미국 서부에서 태평양 횡단 정도는 가능하며, A340은 747과 같은 4발기이나 747보다 한 체급 작다. 그리고 이렇게라도 했더라면 1995년까지는 망할 일도 었었으니 A330의 항속거리 문제는 충분히 보잉 777의 도입으로 해결할 수 있었을 것이고, A340과 767은 2010년대에 A350이나 보잉 787로 교체하면 되었을 것이다. [4] Airline Deregulation Act of 1978. 미국 항덕들에게 안 좋은 취급받고 있는 법인데 그 이유는 이 법이 생겨난 이후 치열해진 가격 경쟁으로 팬암을 비롯하여 트랜스 월드 항공(TWA), 이스턴 항공 등의 여러 메이저 항공사가 역사 속으로 사라졌기 때문이다. 거기에 살아남은 유나이티드 항공, 델타 항공, 아메리칸 항공 등도 가격 경쟁으로 인해 서비스의 질이 형편없는 수준으로 떨어졌다. 이놈의 가격 경쟁으로 인해 옛날에는 DC-10, L-1011이 날아다니던 구간에 지금은 보잉 757, 보잉 767은 고사하고 보잉 737, A320, 심지어는 CRJ 시리즈가 날아다니고 있다. 물론 보잉 737, A320 등의 협동체가 들어가게 된 것은 이들의 항속거리가 나름 길다는 것도 있지만 A320 정도면 미국캐나다 전체는 물론이고, 미국발 중미 전체와 남미 북단까지 갈 수 있긴 하다.[5] 팬암 103편 폭파 사건(로커비 테러), 팬암 73편 납치 사건[6] 그래서 1986년에 유나이티드 항공이 팬암을 대신하여 서울에 취항했다.[7] 미 공군 역사상 유일한 원수 계급을 단 인물이기도 하다.[8] 이후 미육군항공대가 공군으로 분리되면서, 초대 공군참모총장이 된다.[9] 실질적인 정기 운항은 기재가 확보된 1936년부터[10] 팬암은 이후에도 세계 일주 노선에서 무조건 항공기 1회 환승을 한다[11] 9대의 B720 포함[12] Internal German Service의 약자[13] 에미레이트 항공B777X을 주문하며 이 기록을 깨버린다[14] 동체 설계를 2층 협동체냐 광동체로 제작하냐 였는데 셔터는 비상시 안전 문제 때문에 광동체를 원했다. 셔터는 팬암에게 광동체 설계를 밀어 붙이기 위해 자신보다 타협을 잘한다는 최고 내부 디자이너를 동체의 너비와 같은 길이의 실과 함께 팬암 본사에 보내어 허락을 받고 목업으로 고 사인을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나중에는 화물기 설계가 편하도록 화물을 기수부로 선적할 수 있게 콕핏이 있는 기수부만 2층 설계를 하였고 여객용 버전 뒤쪽은 라운지로 설계했다. 그런데 나중에 탈출 문제가 없어 이곳도 창문수를 3개에서 10개로 늘려 비지니스석을 보통 배치하게 됐다.[15] 에미레이트 항공이 VVIP지만 이 수준으로 B777X에 관여하지는 않는다[16] JT9D-3A는 7A형이 출시된 이후로 모두 7A형으로 개조된다[17] BBC의 The Plane Changed the World (2/3) - Jumbo Jet (2014)에서 보면 당시 팬암의 수석 정비사가 이야기하였고 이미 첫 상업운항이 끝난 후 일간지에 보도되었다 [18] 당시 미국의 플래그쉽 캐리어였던 보잉과 제트 여객기의 최강자였던 보잉의 이미지를 위해 FAA가 허가한듯 하다. [19] 이 시점에 원래 이름으로 돌아오고 N735PA를 롤스 로이스 엔진 문제로 인해 L-1011의 도입을 못하던 이스턴 항공에 임차를 보내버린다.[20] 'Short Body'라는 이름으로 출시하기로 했는데 길이에 비해 뚱뚱한 불균형한 모습과 최고 기술자였던 셔터의 이름을 따 ''''Sutter's Ballon''''으로 직원들에게 놀림받는 바람에 '''S'''pecial '''P'''erformance로 출시[21] 1969년부터 B767 프로젝트라고 불렀다[22] LATAM 항공의 시드니 ~ 오클랜드 ~ 산티아고 데 칠레, 산티아고 ~ 멜버른, 콴타스의 시드니 ~ 산티아고 데 칠레 노선만이 남극 쪽으로 운항하고 있다.[23] British Overseas Airways Corporation, 영국해외항공. 현재 영국항공의 전신.[24] 원래는 NYRBA(New York, Rio and Buenos Aires Line)이라는 남미에서 뉴욕을 운항하는 항공사였는데 팬암이 1930년에 동남미 노선을 확충하기 위해 이들 노선을 사버리면서 생긴 나머지를 자회사로 묶어 Panair do Brasil이라는 항공사로 묶어버린다. 그래서인지 팬암의 블루 미트볼 이전 로고인 하프 윙 로고위에 팬에어를 써서 사용했다. 그리고 1961년에 브라질 정부에 매각한다.[25] 팬암에서 막 떨어져 나온 지라 팬에어의 브랜딩을 위해 한 주문이다.[26] 브라질 군부의 사정 으로 인해... [27] 메트로폴리탄 생명보험 회사; Metropolitan Life Insurance Company[28] 그랜드 센트럴 역 항목의 상단 사진 배경에 보이는 건물, 그랜드 센트럴 역과 파크 가 도로를 원웨이로 두르고 있어 더 커보인다.[29] 랜딩하면서 랜딩기어가 부러진 것이 아니다 [A] 비슷한 대체 유튜브 영상임[30] 게다가 트라이스타는 당시에도 판매가 부진하고 여러모로 유지비용이 많이 들어갔는데, 안그래도 DC-10과 L-1011은 표준 이코노미 좌석 배열이 9열로서 거의 같은 체급의 기종이다. 심지어 L-1011-500과 DC-10-30은 항속거리 마저도 서로 비슷하다.....[31] B747, DC-10, L-1011, 그리고 나중에 들어오는 A300과 A310까지. B767 빼고는 다 있었다.(...)[32] 이는 일본항공 역시 똑같았다. 심지어 여기는 국내선 전용 747을 특별주문하면서까지 굴렸다. 물론 이는 당시 일본의 교통체계와 관련해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한 것이지만, 그야말로 747에 환장하며 운영을 했고 결국 유지비 문제까지 겹쳐 버틸수가 없다로 까지 되었다.[33] 이 외에도 당시 화려한 도색을 이용한 마케팅과 효율적인 기재 운영으로 성공가도를 달리던 브래니프 항공도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규제 해제 이후 국내선 콩코드 같은 뻘짓으로 몇 년 안 되어 망했지만, 만약 둘이 합병했으면 미국의 항공산업이 완전히 달라졌을지도 모른다.[34] 메트라이프가 인수하고 빌딩명을 메트라이프 빌딩으로 바꿨다. 지금은 빌딩 꼭대기에 'Metlife' 글자가 있다.[35] 처음에는 팬암이 수익을 낼 때까지 자기 월급을 올리지 않겠다고 해 직원들의 지지를 얻었으나, 1985년에는 대규모 파업까지 있었다. 게다가 자기가 거주하는 버뮤다에서 뉴욕으로 가는 회사 노선을 공짜로 타는 등 이래저래 행실이 좋지 않았고, 1988년 팬암을 떠났다. 공교롭게도 그가 몸담은 에어 플로리다, 브래니프, 팬암 모두 사라졌다.[36] 1980년 전세계 최대의 화물 운송업체이기도 했던 팬암의 수송량을 눌러버렸다.[37] 여담으로 이 사건을 주도했던 사람은 몇 일 뒤 김포국제공항 폭탄 테러 사건을 사주한 것으로도 의심되었다.[38] 도쿄 나리타 국제공항을 이원지 삼아 아시아 노선을 굴렸던 것처럼, 팬암은 런던 히드로 국제공항프랑크푸르트 암마인 국제공항에서도 유럽 각지로 가는 환승편을 운항했다. 이 때문에 1997년까지는 프랑크푸르트 암마인 국제공항이 델타 허브로, 동유럽과 인도 노선까지 운항했다.[39] 뉴욕 라과디아 공항과 보스턴, 워싱턴 내셔널 공항을 예약 없이 집중적으로 운항하는 항공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