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은 패야 말을 잘 듣는다

 

1. 개요
2. 한국의 체벌
3. 외국의 경우
4. 한계
5. 현실
6. 부작용
7. 대응책
8. 관련 문서


1. 개요


박도원: 너 지도 갖고 있지?

윤태구: ...너 누구냐?

박도원: 그렇다, 아니다, 있다, 없다, 네 가지 안에서 대답해.

윤태구: 뭣...! 너도 지도찾냐? 아유, 인간들 진짜... 그래, 그렇다! 하지만 지금은 없다! 됐냐?

박도원: 어디 있는데?

윤태구: 아유, 참. 너도 보기보다 머리 안 쓰신다. 내가 이놈의 지도 때문에 이 생고생을 하는데, 내가 그렇게 쉽게 얘기해줄 것 같애?

박도원: 내가 찾는 게 아니고 독립군들이 찾아.

윤태구: (비웃으며)독립군 같은 소리하고 있네. 내가 속을 줄 알았냐?

박도원: (멱살을 잡아올리며)'''역시 조선놈들은 말로 하면 안 듣는구만.'''

윤태구: 알았어, 알았어, 잠깐잠깐, 미안해.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中에서.

이 얼마나 한심한 일본 민족이더냐, 폭력이 없으면 제어하지 못하는 건가.

-어느 하급장교가 바라본 일본제국의 육군, 야마모토 시치헤이

한국에서 전근대 이전에는 공식적인 형벌로 태형 등의 신체형이 있었으며 , 양반노비를 사적으로 패는 등의 사적제재까지 있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인이 한국인에게 휘두르는 폭력을 정당화시키기 위해서 "조선인은 때려야 말을 잘 듣는다"는 일종의 언론플레이편견이 만들어졌다.[1][2]따라서 이 편견을 식민사관의 일종으로 보기도 한다. 사실 복잡하게 따질 필요 없이 '''의도 자체가 불순한 표현이다'''.

2. 한국의 체벌


그나마 제대로 배운 조선시대 사람들은 체벌할 때는 규칙을 엄격히 정했다. 절차를 통해서 체벌을 함으로써 함부로 감정이 실리지 않도록 했던 것이다. 또 그리고 '''과중한 체벌은 스승의 부덕(!)으로 여겼다.''' 유교 문화권은 덕치를 중시했기 때문에 형벌에 대해 나름대로 합리적인 통제를 하려 노력한 감은 있었다.

3. 외국의 경우


학생의 귀는 등에 있다. 두들겨서 귀를 열어주어야 한다.[3]

- '''고대 이집트 중왕국 시기'''의 격언

Spare the rod, spoil the children. 매를 아끼면 애를 망친다

- 영미권에 흔히 퍼져 있는 속담

역설적이게도 그 시절의 일본인들에게도 이런 식으로 폭력을 수용할 것을 강요하는 경향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대표적인 경우로 '''일본군'''에 만연하던 똥군기 및 폭력으로 악명 높던 일본경찰이 있다. 애초에 '패야 말을 듣는다'는 감성 자체가 선각자 엘리트로 선민의식에 사로잡혀 있다 자신들이 추구하는 사회, 제도적 개혁의 흡수가 더딜고 느렸던 일본 내의 평민들에게 메이지 유신 시절 엘리트들이 느꼈던 좌절감, 답답함을 표현하면서 먼저 사용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사실이라면 메이지 시기 일본부터 20세기 후반 한국까지 곧게 이어지는 아시아적 개발주의 독재의 권위주의적, 엘리트주의적 성향의 계승을 그대로 보여주는 셈이다. 그래서인지 1947년 일본 학교교육법에서 체벌 금지를 명문화했다.[4]
세계로 눈을 돌려보면 사람을 몽둥이 등으로 치는 형벌은 물론이요, 사적 체벌이 없는 국가는 거의 없었다. 채찍으로 패고, 몽둥이로 패고, 공공장소에서 대중들이 패고... 고대 이집트 중왕국시기의 문학 작품 중에도 위와 같은 격언이 실려있었으며, 고대 로마에서는 공립학교의 선생은 존경받지도 못하고 돈을 많이 못 버는 직업이었는지라 아동 학대로 자주 화풀이했으며[5], 로마 군대에서는 백부장[6]이 병사들을 매로 체벌하는 게 흔한 일이었다. 고대에 이런 분야로 전설을 쓴 스파르타는... 스파르타식 교육 문서 참조. 대항해시대 때 유럽의 선원들은 배 안에서 잘못한 선원을 묶어 놓고 채찍으로 등짝을 치는 형벌을 수시로 내렸다. 라인배틀 시대 때 군기를 유지한답시고 병사들을 무지막지하게 폭행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근대 유럽 교육계에서도 구타는 있었다.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학문적으로는 굇수[7]이지만 캠브리지를 그만두고 작은 초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시절, 수업용 칠판 자를 가지고 애들을 하도 두들겨 패서 문제가 된 적이 있다. 20세기만 하더라도 그런데, 19세기 이전에는 어떻게 대했을지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8]
심지어는 현대에 들어와서도 전세계적으로 구타 및 체벌 사례가 끊이지 않는다. 미국만 해도 몇십 년 전엔 선생이 학생을 Cane 등의 회초리로 체벌하는 게 일반적인 일이었고, 미시시피, 텍사스 등 일부 남부지역에선 학교 체벌이 합법화된 데다 남부 지방의 보수적인 백인들의 전통적인 아이 체벌법은 '''입고 있던 가죽 허리띠를 풀어서 그걸로 애를 후려치거나, 전용의 도구[9]를 이용해 엉덩이를 빡빡 쳐 버리는 것이었다.''' 심지어는 아이를 패는 게 불법이 된 현재에 이르러서도 체벌로 아이를 다스릴 때가 있다. 선진국 경찰 시스템을 지닌 미국조차도 범죄 혐의자를 검거할 시 경찰봉으로 때리는 경우도 있다. 프랑스에서도 나폴레옹 1세 때인 19세기 초부터 법적으로 징계권이 명시되면서 오랫동안 체벌이 관습으로 남다가 2019년에야 체벌 금지법이 통과됐다.
태형 문서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아직도 이 제도를 시행하는 국가들이 있다. 그러니까 어떤 의미로 굉장히 범 세계적이며 역사적인 편견 및 고정관념이다. 이 제도와 문화가 남아있다는 것은 말하자면 '''"인간은 패야 말을 잘 듣는다."'''라는 사고방식이 의외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널리 존재한다는 증거가 된다. 아니, 엄밀하게 말하자면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이 자식, 학생, 부하, 직원이든 뭐든지 간에 하여튼 아랫사람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강압적으로 구는 것을 정당화해 줄 변명이나 방어기제는 안 좋은 면에서 거의 인류 보편적이라 할 수 있다.
애초에 '''도덕적으로 잘못된 말'''이지만 그중에서도 '한국인은 패야 말을 잘 듣는다'는 말이 '''실질적으로도 헛소리인 이유는 "한국인"이라는 집단에 "패야 말을 잘 듣는다"는 사실을 한정시켰다는 것'''이다. 즉, 굳이 한국인이 아니라더라도 대다수 사람은 일단 패서 굴복시키면 말을 듣는다. 상황이 저럴진대 '한국인은 패야 말을 잘 듣는다'는 말은 '''"다른 민족은 안 그런데 오직 한국인만이 말을 잘 안 듣는 못난 민족이라 패야만 말을 잘 듣는다." 라는 식으로 해석될 소지가 대단히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봐왔듯이 폭력으로만 다스린다면 그곳은 일견 잘 되는 것처럼 보여도 순식간에 무너지기 십상이다. 그것은 역사적으로 이미 긴 시간 동안 증명된 것이다.

4. 한계


구타와 체벌을 가하는 이유는 잘못을 했을 때 거기에 대한 처벌 용도가 강하다. 아무리 미화를 하더라도, 잘못을 인식하고 반성하는 것은 처벌을 받는 해당 인물의 몫으로, 아무리 심각한 구타와 체벌을 가하더라도 본인이 스스로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면 소용 없다. 만약 구타와 체벌 그 후로 통제가 된다해도 그때뿐이지 되려, 집단 내의 반감과 불신만 키우는 발판이 되기에 통제에 대한 어려움을 심화시키는 꼴이다. 즉, 폭력을 매개로 처벌의 궁극적 목적인 재발 방지, 기강 재정립은 이루어 질 수 없다. 게다가 도리어 '''"아랫사람이 잘못하면 그때는 폭력 써도 된다"''' 는 엉뚱한 학습작용이 일어나서 계속하여 재생산된다.
다른 의견으로는 '''상급자가 통솔에 자신없을 때 만병통치약을 사용하는 식으로 구타를 사용'''한다. 결국 사소한 것도 구타나 체벌로만 일관하는 지도자는, '''내가 가지고 있는 지도력으로는 폭력 없이는 효과적인 통제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물론 지도자 개인적 취향에 따라서 폭력을 선호하는 것도 있을 법한 얘기지만, 보통은 '''리더십 부재 인증에 가깝다'''. 폭력을 이용한 통제는 상당히 쉽고 효율적이긴 하지만, 소위 선진국이라 불리는 나라들에서 폭력이 그리 권장받지 않는 것은 시민들의 잠재능력을 어느 정도 이상으로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별로 효과가 좋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윗사람들은 '''"내가 권위를 유지하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내 권위는 어디에서 나오는가?"'''와 같은 것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 더 세련된 방법론이라 할 수 있다. 그러한 생각을 안하기 때문에 일단 패고 보는 것이다. 때문에 이렇게 윗사람에게 습관적으로 구타를 당하는 아랫사람들 중에 머리가 돌아가는 아랫사람이라면 속된 말로 '''"저 놈이 우리를 통제할 능력이 없나?"'''라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 다만 아랫사람들이 뒤통수 치거나 뒤엎을 생각을 하는 경우를 이르자면, 굳이 폭력 쓰지 않고 있더라도 통수 칠 놈은 친다. 폭력의 경우는 아예 공포로서 이를 억누르거나 비교적 짧은 시기 동안을 대강 무마하고자 하는 시도에 가깝다. 하지만 폭력이 덜 세련된 방법인 것은, 윗사람이 항상 내 권위의 출처와 유지방법에 주의를 기울인다면 뒤통수 시도가 성공할 확률은 폭력에 기댈 때와는 비교불가능하게 내려가며 뒤통수를 당하더라도 그 이후 상황이 훨씬 편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영문도 모르고 당하는 거라면''' 말할 필요도 없을 뿐더러, 설령 자기 잘못을 알고 있다 하더라도 이러한 가혹행위는 오히려 당사자에게 있어 '정도를 넘는 부당한 벌'로 받아들여 자기합리화를 시키는데 일조한다. 반성을 하라고 패는 건데 '''당하는 사람은 오히려 죄의식이 사라지고 체벌을 가하는 사람에 대한 대항 의식을 키우는 것이다'''. 또한 머리가 돌아가는 사람이 이런 경우 '''저놈은 나를 통제할 능력이 이거밖에 안 되나?'라고 생각하게 되고 그 결과는 윗사람이 가장 원치 않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다. 관련된 명언으로 "야만인들은 무례하게 대하면 도끼질에 머리가 날아가기 때문에 문명인보다 훨씬 신사적이다."라는 말이 있다.
즉, '나는 이정도 벌이면 충분히 반성하고 다시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을 용의가 있는데 왜 아직도 멈추지 않는가? 가혹하다!'는 식의 생각을 당사자가 품도록 만드는 것이 구타와 체벌의 한계이다. 범죄자 처벌에 있어 지나치게 가혹한 벌을 내리는 것은 범죄자를 갱생시키기는 커녕 오히려 역효과를 낸다는 주장과도 일맥상통한다. 극단적인 경우에는 정도를 넘는 구타와 체벌에 지쳐 '''"못 살겠다! 엎어보자!"'''도 일어난다. 당장 군대 내에서 종종 일어나는 프래깅이 바로 그것이고 반란, 내전, 쿠데타의 원인 역시 이것이다. 이순신 장군의 예를 들어 이런 폭력을 정당화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는데 멍청한 소리다. 삼권분립이 된 현대로 따지면 이순신은 군사재판정에 선 판검사의 권한으로 규정에 이미 있던 군법을 집행했을 뿐이다.
패봤자 말 안 듣는 사람도 가끔 나오는데, 이 경우 자칫 심하게 치다간 심한 상해를 입히거나 정말 재수없으면 상해치사가 되어 법정에서 패가망신할 수 있으므로 일반적으로는 좀 하다가 포기하고 물러나게 된다.

5. 현실


설득력과 통솔력이 부족한데 직급은 높은 낙하산 인사가 '''자신의 부족한 설득력과 통솔력을 폭력으로 꾸역꾸역 채워나가는 짓거리'''를 하면서 "패야 말을 잘듣는다"고 하는 것은 이에 대한 변명이자 핑계일 뿐이다. 일찌기 거스 히딩크 축구감독은 자신의 통솔력에 자신감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홍명보부터 이천수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모든 선수들에게 조직 내부에 존재하는 가부장적인 위계서열을 금지시켰다. 그렇게 서열보다 친목을, 웃어른 대우보다 팀웍을 더 중요시한 결과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은 본인들조차 상상도 못했던 4강이라는 성적을 달성했다. 보통 FIFA 월드컵에서는 유럽이나 남미가 아닌 이상 8강만 해도 엄청 잘했다는 소리를 듣는데 4강이면 그보다도 급이 높은 성적이다.[10] 히딩크는 자신의 뛰어난 통솔력으로 이런 4강 신화를 이룩했다. 통솔력이 뛰어나면 폭력이 필요없는 것이다.
그런데 통솔력도 부족하고 그렇다고 해서 사람이 선량한 것도 아니라서 사람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폭력을 선택하는 똥별들이 자신들이 통솔하는 방식을 정당화시키기 위해서 저렇게 패야 말을 잘 듣는다고 우기는 것이다. 실제로 똑같은 인원으로 똑같은 일을 하기 위해 통제를 한다고 할 때 패면서 통솔하면 휘하 사람들은 '''당장 눈에 보이는 복종만 한다.''' 당연히 불만은 쌓이게 되고 언제 하극상이 일어날지 알 수 없는 상황이 된다. 반면 폭력 없이 휘하 사람들을 존중하고 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빨리 간파하고 정해진 일을 해야 하는 이유를 휘하 사람들에게 제대로 설득하고 그들에게도 주어진 일을 하면 그들 본인에게 어떠한 이득이 돌아오는지 제대로 어필한다면 굳이 폭력이 필요없다. 하다 못해 휘하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대우해주고 나서 자신을 봐서라도 주어진 일을 해달라고 호소하는 것이 되려 폭력을 휘두르면서 통솔하는 것보다 억만배는 낫다.
결국 통솔력 없는 무능아들이 자신의 부족한 통솔력을 커버하고 눈에 보이는 부분에서만이라도 휘하 사람들이 잘 따르는 것처럼 만들게 하기 위해 억지로 폭력을 휘두르고 그렇게 휘두르는 폭력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패야 말을 잘듣는다는 개소리를 논리라고 내세우는 것일 뿐이다.

6. 부작용


그나마도 그 반성이 좋은 방향으로 간다면 모르겠으나, '''"그래, 난 못났으니 그냥 패라!"''' 정도로 막 나가는 사람이 나오기도 한다. 실제로 90년대에 선생 → 학생으로의 폭력이 일상이던 실업계 고등학교 교육현장에는 엉덩이 빳따 100번쯤은 버티는 독종(!)들도 수두룩 했다. 물론, 이것들이 무슨 의지가 있어서 버티는 게 아니라 인간의 적응 능력 발현이다. 애초에 체벌같은 방식으로 성적을 올릴 수 있었으면 모든 교사는 학생을 폭행했을거다. 그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교사가 순전히 자신의 성과를 보여주기 위해, 또는 어차피 성적을 올리지도 못하고 자신의 통제도 따르지 않는 열등한 학생들에게 '''자신이 힘의 우위에 있음을 확인하는 기제로 폭력을 활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걸 뒤집을 수 없다면, 그냥 무식하게 몸으로 때우는 거다. 이렇게 버틴 경우 훗날 늙어서 후유증이 나타날 수도 있다. 심하게는 근육이 녹아내리기도 하며 그렇게까지는 아니더라도 골병이라는 단어가 괜히 생겨난게 아니다.
국내에서 중고등학교 시절을 보낸 사람이라면 공감할 수 있겠지만, '''그것도 적응되면 나름 편하다.''' 늙은 뒤 근육 손상이니 신경 손상이니 이런 건 한창 얻어 터질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생각도 안 드는 주제고, 사람 몸이란 게 신기한 것이 계속 그렇게 하다보면 적응돼서 순간만 고통이 느껴진 뒤로는 별로 통증도 안 느껴지는 경우가 있다. 이런 수준까지 오면 오히려 '''뭔가 잘못했을 때 처벌 방식으로 그냥 속편하게 몸으로 때우자'''는 생각이 들게 되고, 선생 입장에서도 어쨌든 시원하게 애들 팼으면 자기 머릿속에선 교육자로서 처벌을 다 한 거니 '''학생은 학생 대로 눈 앞의 체벌만 이 꽉 물고 버티면 아무런 교훈도 없이 또 잘못하고 몸으로 때워버리고, 교사는 또 이게 자기 할 몫 다 했다고 넘겨 버리는 악순환이 생겨버린다.''' 이러다가 학생의 잘못을 더이상 무식하게 매가 아니라 방과 후 강제 자습, 부모와 상담, 여기서 한발짝 조금만 더 나가면 바로 정학, 퇴학, 공권력 소환 같은 장기적으로 감당해야 하는 형태의 처벌이 떨어진 경험이 있는 사람들 입장에선 역설적으로 오히려 '''몸으로 때워버려 시원하게 끝내버리는 상황'''이 부러운 경우도 가끔 있다. 물론 교육적 효과는 안드로메다로 날려버리는 형태의 적응이고, 이렇게 '''폭력마저도 게으르게 느껴지게 만드는 인간의 놀라운 적응 능력''' 때문에 체벌을 기반으로 한 교육은 그 끝이 안 좋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가정폭력의 경우는 더더욱 심각해서, 많은 범죄자가 어린 시절에 가정폭력에 시달린 경험이 있는 등 가해자가 된 피해자를 만들 가능성이 '''매우''' 높다.

7. 대응책


이 글을 읽게 될 선배, 혹은 선임, 지도자들을 위하여 기고한다. 본문은 어디까지나 교육학개론에서 '''거의 발췌'''한 것이나 다름 없다. 그러나 수정의 여지는 남겨두고 있다.
폭력의 장점은 단 한가지다. '''빠른 시간내에 효율적인 생산 및 활동을 이끌어 낼 수 있다'''는 것이 바로 그것. 하지만 이것은 '''물리적인 것'''에 국한되는 경우가 많으며, 장기적으로 봤을때는 오히려 효과가 없고 기회만 있으면 역으로 배신당해서 불이익만 보고 하야될 가능성만 높여주는것이다. 게다가 폭력의 가장 큰 결함은 '''눈에 보이는 생산 및 활동만 이끌어내고 눈에 보이는 복종만 한다'''는 점이다. 인간이 생존을 확보하기 위해 고통이나 위협에 뇌가 즉각적으로 대응하는 방식은 크게 3가지(3F) 방식인데, 첫 번째는 정지(Freeze)이다.(가장 대표적인 반응은 죽은척하기) 그리고 두 번째 반응은 도망(Flight)이고, 세 번째가 반응이 바로 투쟁(Fight)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위협이 클수록 반응이 단계가 더 빨리 올라간다. 폭력과 공포는 절대적인 통제수단이 될 수 없는 게, 적응하는 동물인 인간이 여기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면 무감각해지고 만성이 된다. 결국 통제를 위해서 보다 더 잔혹한 폭력이 필요하게 되고, 그 심해진 폭력에도 무뎌지게 되면 결국 극단적인 결과밖에는 미래가 없다. 학문의 경우 공부하는 학생에게는 대체적으로 역효과만 낸다. 지식을 쌓는게 목적이 아니라, 점수를 내는게 우선적인 목표달성 과제가 되어버리기 때문에 당장에 점수야 나올지 몰라도 지식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형태의 공부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수능 때까지 객관식 문제푸는 기계가 되었다가 정작 대학교에 들어가면 장장 20년의 세월 동안 줄기차게 풀어오기만 했던 객관식 문제는 온데간데 없고, 자신이 직접 판단하고 생각해서 작성해야 하는 에세이나 레포트의 등장에 신입 대학생들이 멘붕하는 것은 이에 정확히 부합하는 아주 좋은 예시다.
과거 맞으면서 자란 시대에조차도 훌륭하게 자란 이들의 선생님들은 결코 폭력만 쓰지 않았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조선시대만 해도 과도한 선생의 체벌은 부덕으로 여겨졌으며, 진정으로 애정이 바탕이 되어있다면 폭력 범주에 드는 체벌[11]도 때론 이해되기도 하며, 그런 폭력이 긍정적인 결과를 낳았던 경우도 분명히 있긴 있었다. 무능력한 교사들이 자신의 무능함을 숨기기 위하여 쓰는 폭력과는 차원부터 다른 얘기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는 것이다.[12]
그러니 만약 당신에게 어떤 단체의 주도권이 있고, 그 단체를 이끌어 나아가거나 가르칠 입장이라면 다음을 명심하자.
  • 먼저 상황을 파악하라. 폭력을 쓸 때는 주로 상대방이 잘못되었을 때보다도 자신이 화가 났을 때 더 자연스럽게 나오는 법이다. 후배, 혹은 학생들의 모범이 되기 위해서라도 당신이 인내하고 상황 판단을 해야 하는 것이다.
  • 침착하고 상대 의도를 분명하게 파악하라. 도덕적인 잘못이라고 해도 그 잘못이 타의에 의해 자행된 건지, 실수로 의해 행해진 건지, 장난삼아 그냥 양심의 가책없이 잘못을 했는데 거짓말을 하는 건지 분명하게 파악해 두는게 좋다. 대체적으로 무슨 의도로 그랬는지만 알아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길이 보이는 법이다. "왜 그랬느냐?" 고 먼저 물어보는 것은 정말 중요하다.
  • 조직 내의 분위기를 통일시키고자 부하직원이나 후배의 꼬투리를 잡아서 쓸데없는 위압을 행하는 행위는 피하라. 팀원 분위기가 당신에게 사근사근해질지 몰라도, 조직이 목적으로 하는 목표에 집중하지 못하고 개개인의 일과에 더 집중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부하 직원들이 당신 아래에 있는 이유는 당신이 권력을 휘두르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공통의 조직 목표를 이루기 위함이다.
  • 이해되기 힘든 훈육 및 처벌 규칙을 절대 만들지 말라. 이는 어떻게 처벌할지 결정하지 말란 말이 아니라, 처벌하지 않아도 될 상황에 이해되기 힘든 논리를 개입해서 처벌하지 말란 뜻이다. 이 경우 자신이 원하는 목적을 상대가 이루지 못해서(분명 열심히 했음에도 성적이나 목표를 이루지 못했을 경우.), 혹은 잘못이 아님에도 자신의 사상으로서 용납이 안될 때 체벌하는 경우[13]를 뜻하는데, 아이의 경우 아직 식견이 좁기 때문에 어떻게 세상을 살아가야 할지 아직 모르기 때문에 학습 기준을 체벌자의 사상에 초점을 두게 되고, 이 사상이 사회와 괴리감이 심할경우 이런 행동은 아이의 정신적인 성장에 상당한 방해를 하게된다. 반대로 성인의 경우. 즉, 단순히 후배나 후임이라면 당신과 단체의 사상을 이해하지 못함과 동시에 자신의 의견이나 상황이 반영되지 않는걸 알게되고 결과적으로 당신과 단체 둘 다 신뢰하지 못하게 된다. 겉으로는 동의해도 속으로는 무시하거나 욕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리고 그런 방법으로 훈육받던 아이가 성장해도 결과는 마찬가지다. 스승 혹은 부모를 무시하게 되고 원망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나라는 대체적으로 많은 단체들이 이런 불신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을 기억하자.
  • 위 상황에 부가설명을 덧붙이자면, 의미없는 예절악습 경우에는 거의 의미없이 형태만 남아있는 경우가 태반이다. 전적으로 동의하고 따르더라도 "다들 그러니까 나도 할 수밖에 없지"라고 생각하거나 "나도 당했으니, 당연히 내 밑도 그래야지"라는 발상으로밖에 행하지 않는다. 거의 극소만 진심으로 예절을 다 해서 따를 뿐이다. 결과적으로 의미는 없고 악습이라는 행위만 남는 것. 특히 주관에 따라서 달라지는 예의범절의 경우 개인적인 혼란만 가중된다.[14]
  • 당신의 단체 앞에서 공포분위기를 쉽게, 자주 조성하지 말라. 간혹 실수가 용납되지 않는 병원등의 대민지원 기관이나, 업무중에 통제가 필요함에도 통제가 필요 이상으로 되지 않는 상황이라면 아랫사람들도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분위기를 이해할 수 있지만, 전혀 그런 분위기가 필요없는 대학 활동이나 일반적인 사업 상황 등에선 일절 금해야 할 것이다. 쓸모없는 위압과 공포감은 당신 스스로의 만족을 위해서 행하는 행동이다. 이것은 리더십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오히려 이런 분위기에서 시너지 효과를 바라기는 무척 어려우며 당신과 그들 사이를 가로막는 소통의 벽은 더욱 두꺼워질 것이다. 특히 술자리 등지에서 이 짓 하다간 앞으로 혼자서 술 마실 각오해라.
  • 폭력과 폭언 이외의 불이익성 처벌을 마련하라. 가령 어린아이의 경우 벽보고 오래 서있게 하는 경우도 훌륭한 훈육 방법으로 통한다. 이 외에 외출 금지, 용돈 삭감, 게임 압수 등. 학교에선 점수제도를 운영해 일정 점수가 쌓이면 퇴학시키거나 그런 애들끼리만 모아놓은 대안학교에 강제로 전학시키는 방법을 사용할 수 있고, 외국에서는 이런 처벌들을 잘 이용하고 있다.[15] 도저히 이런 간접적인 불이익 체벌이 안 통한다 싶으면 체력단련도 좋은 처벌이 된다. 현대의 군대와 해외 청소년 교도소 경우 이러한 체력단련 처벌을 잘 이용한다. 물론 이것도 상대방 체력을 고려하지 않고 무턱대고 시행하면 그냥 똥군기. 폭력과 다를 바 없으니 체력단련 체벌은 반드시 보호자가 동행할 필요가 있고, 동시에 체력훈련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 대학의 경우라면 할 생각 말고 동등한 입장에서 따져라.
  • 화를 내더라도 상대를 인격적으로 대해라. 상대가 당신을 인격적으로 대하지 않는다고 한들 상관없다. 그것은 상대의 문제지, 당신의 문제가 아니다. 당신이 최선을 다해서 대화를 시도하고 노력한다면 당신을 비웃거나 무시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 당신을 의지하게 만들어라. 사람은 누구나 다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어하며, 자신이 의지하는 사람일 수록 더욱 믿고 따르게 된다. 무엇보다도 자신이 의지하는 사람이 싫은 말을 한두마디 하는 것과 정말로 싫어하는 사람이 한 두마디 하는 것은 효과부터 다르다. 전자는 스트레스로 다가오게 되지만, 스스로를 고치게 만들수도 있게하는 반면, 후자는 그런거 없다. 오히려 더욱 효과를 보기 위해서 싫은 소리에서 훈계, 훈계에서 폭력으로 이어지고, 시간이 흐를수록 효과를 보기 위하여 더 거센 폭력을 행해야 할 때가 올 것이고, 결국엔 파탄으로 이를 것이다.
  • 모범을 보여라. 모범이야 말로 타인에게 영향을 미치는 유일한 방법이란 말이 있다. 실제로 군대나 사회생활 할 때도 일 잘하고 자신에게도 엄격한 사람이 똥군기를 잡아도 평이 좋은 경우가 많다. 물론 똥군기 잡는 건 옳지 않은 문제이긴 하지만 근본적으로 후배들에게 대하는 잣대를 자신에게 그대로 엄격히 적용하는 점 때문에 존경을 받을 수 있는 것. 실제로 후대 스님들에게서 존경받고 있는 성철 스님의 생전 이야기 하나를 말하면, 어느 날은 탁발한 시물을 함부로 흘린 일이 발생하자 성철스님은 벌로 더러운 구정물을 다 같이 마셔야 한다고 했고,[16] 다른 스님들이 망설였을 때 제일 먼저 한 주박 담아 마셔버렸다. 자신에게도 남들과 차별 없이 엄정했던 모습의 표본. 모범을 보이는 사람은 후임이나 후배를 폭력으로 다스리지 않아도 근본적으로 사람을 이끄는 비료가 되는 존경을 받기 때문에 무리를 무난하게 이끌 수 있다. 그러므로 정말로 단체를 이끌려거든 똥군기 잡기 전에 모범부터 보여라. 당신의 후임과 후배가 당신의 말을 안 듣는 것은 군기가 풀려서가 아니라 십중팔구 당신이 제대로 된 모범을 보여주지 않기 때문이다. 손자병법부터 "진정한 지도자는 힘이 아닌 모범으로 다스린다."라고 하였다.
  • 상대에게 그 상대가 무엇을 잘못했고 왜 잘못되었는지 확실히 알려줘라. 그리고 그 행동을 지적하는 것이 왜 정당한 것인지를 알려줘라. 자신의 행동이 왜 잘못인지 모르는 상태로 체벌을 받으면 뉘우침 말고 반항심이 생긴다.
  • 상대가 말하도록 하라. 당신이 말이 많을수록 상대는 듣지 않는다. 반대로 당신은 끊임없이 질문하고, 상대방 입에서 말이 나오도록 해라. 그리고 그것을 인내를 갖고 들어야 하고 이해해야 한다. 상대방에게 당신을 의지시키고, 관계를 개선시키는 데 도움이 되며, 당신에게 어떻게 도움을 줄지 파악할 수 있게 된다. 당신이 선배거나 선생님이면 그래라. 그 두 호칭은 밑에 있는 사람에게 도움이 되라고 만든 호칭이지. 사람 위에서 서서 호령이나 하라고 만든 호칭이 아니다. 이 호칭들은 군대의 '부사관'과 '장교' 같은 급의 호칭이 절대 아니다.

8. 관련 문서



[1] 당시 타성적인 폭력에 젖어있던 일본군이나 그 영향을 받은 일본사회를 보면 그 당시 일본은 구조화된 폭력에 무감각했다.[2] 한국인 비하조가 강한 말이기 때문에 일본의 넷 우익들이 좋아하는 말이기도 하다. 물론 조선인이 일본인의 말을 잘 안들었던 이유는 조선인은 이전 왕조만 500년간 유지해온 독립적인 성향의 민족이고, 무엇보다 당시 일본이 식민지 중 조선을 제일 가혹하게 쥐어짜서 그랬던거라는 점은 절대로 언급 안한다.[3] 두들겨 패지 않으면 말을 듣지 않는다로 번역되기도 한다.[4] 이긴 했지만 70-90년대 당시 전체주의 교육이 일부 부활하기도 했으며, 현재에도 사회 곳곳에서 폭력적인 이지메가 나타나기도 한다.[5] 이때도 이미 귀족 집안은 따로 학식있는 가정교사를 두었다. 그런데 그 가정 교사들 중 상당수가 노예 출신이었다.[6] 현재 군대의 중대장과 비슷한 포지션이었다. 100인의 병사를 통솔하는 간부이며 백인대장이라고도 불린다.[7] 현대 철학을 한번 뒤집었다가 자신의 이론이 부정확하다며 또 한번(!) 뒤집었다.[8] 현대 아동학이 정립되기 이전 유럽 사회는 어린아이를 말 그대로 어린아이가 아닌, 어른의 축소형이라고 봤다. 아동 노역도 그런 차원에서 허용됐던 것이다. 그리고 가톨릭의 원죄론까지 합쳐져서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죄를 짓고 악하게 태어나며 이걸 교육으로 선하게 해야 한다'는 성악설까지 겹쳐졌으니...[9] 노처럼 생겨서 Paddle이라고 불린다.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도 교장이 이것으로 학생을 체벌하는 장면이 나온다.[10] 첫 월드컵 당시 미국이 4강에 진출 한 것이 그 이전까지 유럽과 남미 이외의 대륙에서 4강에 진출한 유일한 기록이었다. 터줏대감 멕시코도, 아프리카의 맹수들인 가나, 코트디부아르, 나이지리아, 카메룬도, 아시아의 또다른 다크호스인 일본도 최대 기록이 8강이나 16강 정도에 불과하다.[11] 대표적으로 회초리 등이 있다. 정확한 기준을 바탕으로 정말로 필요한 상황을 엄별해서 사용하는 경우.[12] 야구빠따나 하키스틱으로 학생들 죽도록 팬다 할지라도 훌륭한 교사로 인정받고 회자되는 경우도 분명 꽤 있었다. 물론 이건 한 반에 100명 가까이 우겨넣고 학생들도 시대도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터프하고 본격적인 탈선이 지금보다 훨씬 쉽고 가까이 있던 시절 얘기다. 다시 말하자면 때리는 시늉만 해도 겁을 먹는 학생들과는 달리 100대쯤 맞더라도 그러려니 하던 학생들 대상의 얘기다. 지금은 그럴 필요가 전혀 없다.[13] 가령 보수적인 어른의 아이들에게 버릇 나빠진다고 예절을 가르친답시고 체벌하는 경우. 예절은 상대를 배려할 때 나와야 하는 행동이므로 자연스럽게 배우는 게 좋은데, 예를 지키지 않는다고 체벌을 받는다면 그냥 형태적인 예절만 남게 되므로 사실상 제대로 된 예우를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이게 바로 똥군기다.[14] 예를 들어 군대의 경우 "수고하십시오"와 "고생하십시오" 이 둘에 부여하는 의미가 다르다는 이유로 부대에 따라 통용되는 쪽이 달라지기도 한다. 간단하게 말해 어떤 부대는 "수고하십시오"라고 말하면 혼나고, 어떤 부대는 "고생하십시오"라고 말하면 혼나는 것. 결과적으로 누가 들어도 상대방에게 예를 다하는 모습인데도 주관적으로 달라질 수 밖에 없는 부분을 윗사람 기준에만 철저하게 맞춰서 예의를 정립한다. 이것이야 말로 의미없는 예절 악습의 좋은 예일 것이다.[15] 그러나 이와 같은 처벌은 교사나 부모를 감시자로 인식하게 되는 위험소지가 있다.[16] 다만 이건 똥군기라고 할 수 없다. 종교적 해설이 필요한 문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