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너만 힘든 줄 아냐
1. 개요
상대방이 제기한 불만사항을 심적으로 납득하지 못하겠다는 것을 표현하는 완곡한 관용어. 집단 내에서 서열이 높은 사람이 아랫사람에게 하는 발화이며, 불만 제기에 대한 불쾌감을 에둘러 표현하는 효과가 있다. 사실, 비단 한국뿐더러 세계적으로도 이와 비슷한 표현과 개념을 찾아볼 수 있다. 아래 문단 참고.
2. 상세
이 발화 뒤에 '지금 여기 있는 사람 전부 다 힘들어'가 따라오면 1:1 상황에서 발화하는 건지 또는 대화를 듣는 제3의 구성원들이 있는지에 따라 해석이 달라질 수 있다. 1:1 상황이면 단순히 민원 해소를 거절하는 성격을 크게 띠는 반면, 제3의 구성원들이 듣고 있으면 사건의 확대를 막고 모두의 고통을 인정함을 널리 보여 문제를 조기에 봉합하려는 기술적 발화에 가까운 성격을 띤다. 제3의 구성원들이 듣는 가운데 행해지는 이러한 발화는 공동체주의의 기치 아래에 개인의 인내를 요구하는 것이 골자로, 같은 조건을 모두가 인내하는 와중에 불만을 제기하는 첫 번째 사람인 '튀어나온 못'을 개중 가장 나약한 사람으로 몰아세워 심리적으로 위축시키는 효과가 있다. 민원인이 평소의 집단 내에서 퍼포먼스가 좋지 않거나 동료들 사이에서의 평이 나쁘면 이 발화의 효과가 더욱 커지는데, 반면에 민원인이 평균을 상회하는 퍼포먼스를 가진 인재거나 구성원을 대표하여 문제를 제기하면 이러한 발화로 승부를 보는 것이 역효과를 불러온다.
주로 군대 등 단체행동이 잦은 환경에서 이러한 완곡어법이 자주 사용되는데, 예외적인 시혜조치는 다른 구성원들이 동요할 여지를 주어 집단의 사기에 나쁜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듣는 입장에서는 벽과 대화하는 듯한 갑갑함을 느끼게 되지만, 정말로 부조리한 일부 상황을 제외하면 상급자의 입장에서도 어쩔 수 없는 것이, 원래 조직의 단체행동은 혼자서는 안 할, 하기 싫어할 것을 시키고자 수많은 사람들을 서로의 페이스메이커로 쓰는 것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구성원의 자율을 제약할 필요가 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아래 문단도 참고.
유사한 표현으로 '다 자기(의 일, 출신 부대, 직무 환경 등등)가 제일 힘들다고 한다'가 있다. 민원 내용을 완전히 깔아뭉개면서 똑같은 민원을 온사방에서 듣는 자기자신에게의 신세한탄을 겸하는 표현으로, '지금 너만 힘든 줄 아냐'보다 조금 더 직설적인 표현이며, 민원인을 힐난하는 목적도 가지고 있다.
앞의 사례와 달리 '지금 너만 힘든 줄 아냐' 뒤에 '나도 힘들어'가 따라 붙으면 발화의 의도가 달라지는데, '나도 힘들다'라는 표현은 별다른 전략이 없는 회피성 발언으로, '각자 제 코가 석자인데 나한테 와서 징징거리지 마라', 내지는 '난 너보다 힘든 걸 하는데 니가 하는 게 뭐 있다고 징징대나?'의 동의어가 된다. 이 경우는 완곡어법보다는 직접적으로 하급자를 권위로 찍어누르며 향후의 불만에 원천적으로 소통하지 않으려는 화법에 가깝다.
3. 표현의 문제점
진짜 IMF 외환 위기로 눈물 고생한 '''00학번들이''' 중간관리자인 세상이 왔다(2020년).
이 화법을 비판하는 명언으로는 유병재의 페이스북 발언이 있다.
"너만 힘든 거 아니다."라는 표현은 '''획일화'''를 상징하는 말이다. 암묵적으로 '''모든 사람의 인내력이나 처한 환경이 동일하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처벌의 의미로 감옥이나 포로수용소에서 강제노동을 시키고 있는 상황, 노동자들에게 '''노동집약적 산업'''의 일을 맡길 때만 성과에 도움이 된다.'''"나만 힘든 건 아니지만, 니가 더 힘든 걸 안다고 내가 안 힘든 것도 아니다."'''
인재를 공장제품 찍어내듯 모조리 획일화하는 것은 장기적 사회발전 시나리오로 볼 때나 문화 및 문명적으로 볼 때 정말로 답이 없는 책(策)이다. 이를 증명하는 것도 많이 찾아볼 수 있는데, 캄보디아의 정체기를 불러온 크메르 루주 사태와 소련의 공산주의 실패, 북한의 협동농장도 정확한 예시이다. 2010년대 조별 과제 관련 유행물도 있다.
사람의 본질 및 성향은 똑같은 환경에서 지냈어도 극과 극인 사례가 많다. 하물며 유전적으로 부모의 피를 이어받은 자식이나 심지어 유전 형질이 같은 쌍둥이 사이에서도 성격이나 행동이 똑같지 않은 아이들이 태어나는 마당이다. 결국, 이런 병폐를 사회범위로 늘리면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다 보면 동일한 환경에 대비해 분명히 '''상대적''' 약자가 생기고, 이를 보호해 줄 '''상대적''' 강자 또한 생긴다.
예를 들어, 군대에서 굉장히 힘든 훈련을 하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지쳐서 비틀거리는 병사에게 선임병이 "지금 너만 힘든 줄 아냐?"라고 물어보는 일은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징병제 특성상으로 선별해서 들어온 병사들이 아닌 만큼 개중에는 분명히 체력이 좋은 사람이나 저질체력도 반드시 있고, 체력 관리에 익숙하지 않은 병사가 있을 수 있으며, 지구력이 낮은 병사가 있을 수도 있다(체격과 체력은 다르다). 위 표현은 그러한 개인차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표현이다. 우물 안 개구리의 사례로도 볼 수 있다. 설령 사람의 본질 및 성향이 모두 같아도 이 말은 폭언일 뿐이다.
'''그리고 정작 이런 말을 하는 병사들은 이런 개소리를 하기 전에 이미 후임들에게 지나친 일과와 책임을 부여한 일이 많다.''' 또한, 상관이랍시고 이러한 짓거리를 일삼는 것은 자신의 능력이 한참 뒤떨어져 있음을 공공연히 광고하는 꼴이다. 이는 일본군의 사례로도 아주 잘 드러난다. 스타크래프트 게임만 해도 유닛 간 상성 관계를 따지지 않고 전투하는 것은 정말로 효율적 전략전술이 아니다. 예를 들어, 초반 러시나 기지가 위급한 상황이 아닌 이상은 일꾼을 직접 전투에 동원하면 겜알못으로 여겨질 텐데, 이 사례가 바로 이에 맞먹는 멍청한 행동인 것이다.
상관의 능력이 좋으면 후임에게 과도한 일과와 책임을 부여하지 않아도 되는 데다가 그래서는 안 됨을 알고 있기에 굳이 시키지도 않고, 후임에게 올바르게 가르치거나 직접 시범하는 것이 상관의 책임감이자 능력이다. 손자병법부터 "진정한 지도자는 힘이 아닌 모범으로 다스린다."라고 하였다.
이러는 상황에서 진정으로 각성할 사람은 오히려 무능한 상관이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개개인의 능력에서 벗어나는 무리한 명령까지도 '상명하복'이라는 이름으로 암암리에 벌어지고 있는데, '''\'상명하복'은 애초에 합리적인 명령임을 전제해야 되는 것이다.''' 수행할 수 없는 무리한 명령으로 인해 하급자를 다치게 하거나 부상, 사망으로 이르게 하는 것은 명백한 상관의 권리남용이자 징계를 받아야 할 잘못이다. '''그리고 그 잘못에 대하는 책임은 당연히 상급자가 져야 하며, 책임지는 것을 거부하면 응당 직무유기가 된다.''' 심하게는 후임을 방관자로 만들 수도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물론 이러는 인간들은 KCTC로 다 걸러진다. 인성문제있는 간부들의 전역을 위해서 휘하 병사들이 몰래 이적행위를 하는 썰도 있을정도.
위에도 언급되어 있듯이 자신과 상대방을 동일시하는 성향이 있을 때 이 표현은 매우 논리적(?)이 된다. 위 예시에서 '''"나는 힘들지 않은데, 왜 이 녀석은 힘들다고 불평하지?"''' 같은 생각이 드는 것은 기본적으로 잔꾀가 아니라는 가정 아래에 자신이 해당 환경에서 상대적 강자이기 때문인데, 그걸 자기 자신이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상대적 강자가 상대적 약자 코스프레를 하는 것이다. 다른 상황을 더 추가해 보면 아래처럼 된다. 아래의 말들이 '''재수 없다고 느껴지면 어째서 위의 표현이 잘못된 것인지를 이해한 것이다.'''
-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지, 뭘 그렇게 불평이 많은 건지.[1]
- 뚱뚱한 놈들은 자기관리가 안 되는 한심한 놈들이지. 머릿속에 먹을 거 생각밖에 없고 살 뺄 노력도 안 했다는 거잖아? 까짓거 한 끼 굶고 운동하면 되는데! 난 별 거 안해도 보기 좋고 말랐는데???[2]
- 이런 쉬운 것도 못해? 더 연습해 오든가, 아니면 그만두든가?
- 그래서 취직이나 하겠냐? 나 때는 너처럼 하지 않았어. 취직 못 할 거 같으면 그냥 때려쳐.
고통은 누구에게는 없고 자기한테만 항상 고통과 시련이 온다고 갖가지 푸념을 하는 인간한테는 누구에게나 고통이 있음을 알려주는 건 좋다. 다만 딱 거기일 뿐이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자기 말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고통이 있음을 알아도 특히 자기가 제일 힘들다고 생각하는데, 이게 매우 당연한 거다.
애초에 다른 사람의 고통을 아는 거로도 대단한 진전을 한 것이다. 그리고 "너만 힘든 줄 아냐?"는 오히려 그 영광의 순간을 깡그리 밣아버리는 퇴보를 초래한다. 자기가 제일 힘들다는 생각까지 고치려고 하는 건 억지이다.
푸념하는 이 밖의 사람에게 이런 단어는 민폐에 불과하다. 푸념하는 사람도 대화로써 해결해야지, 이런 단어로는 못 해결한다.
이 문서의 위아래에 적혀 있는 여러 표현들은 논리 쪽에서 힘든 상황이 정당하다는 뜻이면 논리적 오류이다. 그 가운데에 "지금 너만 힘든 줄 아냐?"는 피장파장의 오류이자 원천봉쇄의 오류이다.
논리학 말고도 심리학적으로도 이런 비교가 위로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연구가 있다. 한 예로, 암이나 당뇨와 같은 만성 질환 환자들의 행동을 연구한 결과, 자기보다 상태가 안 좋은 사람을 볼 때 오히려 '''자신도 저렇게 될 수 있다는 불안과 두려움'''을 가지게 되고, 자신보다 상태가 좋은 사람을 볼 때 '''역시 자신도 좋아질 수 있다는 희망'''을 품기 쉬운 것. 이를 설명한 포스팅.[3]
4. 적용 사례
- 정작 다른 사람들의 의견은 물어보지도 않고 자신 혼자만의 의견을 서열관계에서 하급자에게 강요할 때 이런 표현을 즐겨 쓰는데, 실제로 익명 설문조사를 해보면 상대만 힘든 줄 아는 것이 아니라 상대만 힘든 줄 모르는 결과가 나오기에 십상이다. 이런 표현을 쓰는 놈들이 익명 설문조사를 시행하지 않는 이유는 설문조사 했을 때 발릴 것이 분명하므로 권력으로 찍어누르는 것이다. 또한, 위에도 언급돼있듯 상명하복이란 합리적인 명령이라는 것이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다. 명령이 분명히 잘못되었고, 개선이 필요하지만 자신의 체면 때문에 다수의 고통을 가중하는 것은 벌 받아 마땅한 행위이다. 무엇보다 이런 부조리들은 일본군에게서 자주 나타났던 부조리로, 한국인이라면 당연히 부끄러워하고 분노할 추태다.
- 2010년대 이후 한국 온라인에 팽배한 무임승차 혐오의 논리와 결합하면, 호소력까지 생겨서 부적절한 표현이라고 지적하기도 힘들다. 즉, "다들 묵묵히 참으며 희생하고 있는데 너 혼자만 희생하기 싫고 달콤한 이득만 누리겠다고? 우리가 뭐 안 힘들어서 내색을 안 하는 줄 알아?"와 같이 희생 vs. 꾀병 논리로 접근하는 사람들을 의외로 많이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그 관행에는 외국에서는 안 한다든지, 업계 상위 회사에서는 안 한다든지 하는 식의 반례도 매우 많다. 당장에 "지금 너만 힘든 줄을 모른다."라고 말해줄 상황이다. 무엇보다 저 관행이라는 핑계로 벌어지는 부조리와 악습 감추기/합리화는 자연주의의 오류다. 저렇게 따지면 세계적으로 비난받는 아프리카의 여성할례, 중동권의 명예살인도 오랜 버릇이나 괜찮다는 식으로 어물쩍 넘어가도 된다는 식이 되는데, 그릇된 건 끄집어내고 고쳐야지, 묵인하고 계승할 것이 아니다. 더구나 현대에는 사회구조도, 산업구조도, 인식도 많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 인간극장, 성공시대#s-1 같은 부류의 TV 프로그램들도 이러한 맥락으로 기획됐다는 설이 있다. 상황별로는 격려에 사용될 수 있는 말이기에 적절한 타이밍에 사용하면 되레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자기계발서 가운데에서도 이런 것을 노리고 하는 조언을 담은 불쏘시개와 냄비받침 같은 것이 은근히 많은 건 넘겨두자.
5. 유사 표현
자매품으로는 '''"아프리카 난민들과 비교하면 넌 행복한 줄 알아라."'''가 있다. 참고로 케이블TV에서 국제구호단체의 광고를 방송하는 것도 물론 후원금을 내라는 의미도 있겠지만, 그보다도 국민들로 하여금 이러한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하는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이같이 아프리카 난민 어쩌고 하면서 전혀 상관없는 '''주관적인''' 격이 낮은 대상을 끌어오는 것은 학문적으로는 '''하향적 사회비교'''다. 여기서 진정으로 깨달을 것은 '''현실에 감사하는 마음일지는 몰라도, 현실에 안주하는 마음은 아니다.''' 무엇보다 저들이 저런 망언을 꺼내는 원인은 바로 아프리카 난민처럼 살아가지 않고 성장했기 때문이다. 저들이 말한 대로는 아프리카 난민보다 조금 더 잘 사는 수준으로만 유지하고 혁신없이 살아가면서 경제발전, 복지정책, 국방정책 등으로 현실사회의 문제점을 개선하면서 더욱 발전시킬 필요성이 전혀 없다.
결정적으로 "'''그런 말을 하면서 왜 그리 뼈빠지게 고생해서 문명 수준과 이 사회를 발전시켰나?'''" 하는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면서 살기 좋은 세상에서 태어난 아이들에게 "'''본인들이 겪었던 고생을 겪지 않게 해줘야지.'''" 하는 생각이 훨씬 정상적인 것이 아닌가? 즉, 아귀가 안 맞는 소리다. 저런 생각대로는 6.25 전쟁 이후로 언급되는 아프리카 난민처럼 판자촌에서 살아야지, 아파트 같은 거 짓고서 산업화의 업적이라느니 한강의 기적이라느니 씨부리는 것에는 논리적 일관성이 전혀 없다.
애초에 비교 대상부터 잘못 잡았는데, 저러한 논리를 펼치는 작자들이 데리고 온 대조군들이 무슨 '국가'라고 하기도 뭐한 무법지대 유사국가들이기 때문이다(...). '국가'란(적어도 현대적 기준으론) 사회계약론에 근거하여 인권보장, 의사 표현의 자유와 이를 반영하고 실현하려 정진하는 태도, 분배정의가 갖춰진 집단들을 의미한다. 이 가운데에 하나도 제대로 못 지켜지면 문제가 있거나 꼴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상태라는 뜻이다. 얼마나 잘 살든지 이게 못 지켜지면 오십보백보가 된다.
이런 논리를 펼치는 작자들의 마음이 '국가가 잘산다=개인이 잘산다'이지만 미국이나 중국만 봐도 연관성이 없음을 알 수 있다.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와 비슷하기도 하다.
미국, 중국이나 러시아, 인도, 브라질, 멕시코, 인도네시아 등의 사례만 봐도 답을 찾을 수 있다. 잘 분배돼야 삶의 질이 올라가지... 무엇보다 경제학의 정의는 '''한정된 자원을 효율적, 합리적으로 분배하는 것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이쯤 되면 저런 논리를 주장하시는 사람들은 경제학을 무슨 정의로 받아들이는지 궁금할 지경이다. '''즉, GDP와 삶의 질은 상관관계는 있어도 인과관계는 없다. 아니, 경제는 원래 나라의 수준이나 가치를 판단하는 한 요소일 뿐이지, 절대적 판단 기준이 될 수가 없다.'''
또한, 빈곤과 가난은 경제계급적 시각으로 분류하는 것이며, GDP와 같은 것으로 구분하는 것이 아니다. 선진국이래도 판자촌에서 사는 사람은 있으며, 빈곤에 시달리는 나라라고 선진국 국민 수준의 경제력을 보유한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국민들이 빈곤하게 사는 와중에 짐바브웨의 독재자 로버트 무가베는 수십억이 넘은 재산을 갖고 있는 부자였다. 물론, 부패정치로 인해 국민들은 굶어 죽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베네수엘라의 크레이지버스 사례와 VA-11 HALL-A: Cyberpunk Bartender Action 사례도 이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겠다. '''즉, 전제부터가 잘못된 것이다.'''
또한, 이런 논리는 극단적 경제결정론 시각이고, 한 요소인 인간의 존재를 무시하고 있는 것도 큰 오류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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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사망자 수가 세 자릿수를 넘긴 가습기 살균제 사망사건을 두고 "불매운동을 왜 하느냐?" 같은 망언까지 했다. 이런데도 '''"어쨌든 간에 대한민국은 잘살지 않느냐?"'''같이 말하면 '''"그럼 내가 돈 몇 푼 던져주고 가습기 틀어서 네 가족을 죽여도 되겠네?"''' 같은 반발이 나온다. <XX하면 어떠냐 경제만 살리면 그만이지> 문서도 참고.
그러기에 이러한 말을 하는 사람들은 명심할 것. '''상황이 어찌 되든 가장 소중한 것은 개인의 존재임을 말이다. 그리고 이것은 협상하거나 양도할 대상이 아니다.'''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이 인간이 중심이 되는 위치에 없으면 그 어떤 경제적인 업적이든지 모두 무의미한 것이다. '''인간은 돈만 벌거나 밥만 먹고 살지 않는다.''' 결국에는 경제도 사람을 위하는 것인데 그러지 못하고 주객전도가 된 것이니까 말이다.
무엇보다 아프리카에서 못살면 잘살도록 도와줘야 한다. 저러는 모습을 보고 깔보고 차별하면서 정당한 비판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은 당연히 잘못된 것이다. 게다가 저런 말들을 자주 써먹은 집단은 바로 수구 세력이다. 물론 국제관계가 단순히 지원해주는 짓은 안 하고 굉장히 냉정함은 유의할 것. 대한민국도 미국의 원조 받고 미국의 요청 때문에 베트남 전쟁터에 끌려갔음을 알면 세상에 공짜 지원은 없음도 알 수 있다.
이들은 대개 (마르크스주의 용어 차용)계급투쟁을 매도하는 소재로서 저런 문구들을 단골로 써먹었다. 계급투쟁적 표어에 맞서는 표어로서 이른바 '''수혜론'''을 내세운 것이다.[4] 하지만 역사의 전개 과정에는 경제적 분배와 사회문화적 변화의 이면에는 항상 계급투쟁이 있는 명백한 사실이 있는데, 그런 사실 때문에 저 말은 그저 뻔뻔한 유체이탈 화법에 불과하다.
'''수혜는 무슨 수혜? 언제 거저 준 적 있나?''' 저런 세력들은 애초에 자신의 기득권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았기에 저런 말을 하는 작자들은 당연히 이런 쓴소리를 듣는 것이다. 결국은 전부 계급투쟁의 산물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저러한 비교는 초점에서 어긋나 있는데, 정당한 대가를 요구하는 주장(분배 논의)에 아프리카니 난민이니 하는 선천적, 환경적 요인(GDP나 인프라)을 대입했기 때문이다. '''도대체 국가의 사회정의를 논하는 자리에서 GDP나 사회인프라 비교가 왜 나오는가?''''''아프리카보다 대한민국이 잘 살고 행복하다고? 너네들이 정당한 대가를 스스로 준 적이 있나? 우리가 너네들 같은 놈들하고 싸워서 얻어낸 거지! 우리가 이러지 않았으면 너희들은 아프리카보다도 열악했잖아, 미친놈들아!'''
이러는 식의 논리대로는 아프리카 지역에서 공공연하게 벌어지는 인권침해와 범죄들[5] 도 <적용 사례> 문단에도 적혀 있듯이 '''"나라가 못살아서 당연하다."''' 같은 식으로 자기합리화된다. 여러모로 정신나간 소리이다. 본래 논점과는 백만광년에서 넘어서 억만 광년도 넘게 떨어져 있으니 저런 논리는 그저 속물 근성에 비루하고 전형적인 물타기에 불과하다.
또한, 저들이 느끼지 못하고 있지만 저러한 표현은 '''인종, 민족, 지역차별적 요소가 매우 다분한 것이다.''' 차별을 의도한 발언이 아닐 수도 있지만 실제로 아프리카가 한국보다 경제상황이 훨씬 안 좋은 것은 객관적으로 봐도 사실이 되니까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런 용례는 충분히 차별적인 언사이고, 아프리카 사람보다 행복한 줄 알라는 말로서 아프리카에서 사는 사람들은 당연히 행복하게 살지 못하는, 상대적으로 하등한 인간 군상으로 타자화되는 용례이다. 뜬금없는 1:1 비교 자체가 대단히 무례한 일이며, 인종차별적임은 제쳐두고도 이것이 부조리와 악습을 정당화할 근거는 아니다. '''그야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보지 못하고 그저 GDP나 경제동물에 빗대어서 바라보는, 물신적이자 속물적인 관점이라고 할 수 있다.'''
애초부터 역사적으로 저러한 말들을 국가 단위로 써먹은 사례가 바로 제국주의 국가들인데, 제국주의의 피해자라고 할 수 있는 한국인들이 저러한 식민사관스러운 주장을 펼치는 것부터가 그냥 자폭이다. 봉건적 왕조나 구시대의 악폐습을 무너뜨리고 자신들이 지배자가 된 입장이다 보니 지배 정통성을 어필하고자 쓴 말들이다.
예를 들어, '''"무능하고 부정부패한 조선왕조를 무너뜨리고 고통받던 조선 백성을 대일본제국의 신민으로 받아들여주신 천황 폐하의 은혜에 우리 모두 감사하자!"'''라든가, 이런 소리를 옹호하는 논리로는 눈 하나 깜짝하지 못할 인간들이다. 그러니 저런 소리를 들으면 '''"그럼 아프리카는 저대로 평생 남으라는 얘기냐?"'''같이 일갈하거나, 이 문서를 보여주고 "식민사관이 그렇게 좋으면 일본에 가서 지배해 달라 해." 식으로 반박해주자.
이 단어가 한층 더 심하게 발전한 사례로는 바로 그 악명높은 "'''꼬우면 북한으로 이민가라.'''"가 있다. 위의 아프리카 드립보다 훨씬 더한 개소리 가운데 개소리다. 더 자세한 건 해당 문서를 찾아보자.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도 비슷한 예라 할 수 있다.
비슷한 또 다른 경우로는 중학생용 국정 도덕 교과서에 놀지 말고 열심히 일하라는 교훈의 예시로, 스페인이 공휴일이 무려 280일인 데다가 놀기만 좋아해서 서유럽에서 뒤쳐졌다고 기술된 적이 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국정교과서 `스페인사' 오류 논란>. 19세기와 20세기의 스페인은 나폴레옹의 침공으로 인해 국토가 황폐화된 이후로 정치적으로 혼란을 겪고 왕정 붕괴와 공화정 수립, 스페인 내전이 벌어진 등으로 문제의 교과서에서 얘기한 것과 달리 스페인 국민들이 흥청망청 놀 만한 여유가 그다지 없었다. 스페인 역사에 무지한 것일 수도 있지만 무지하다고 하기엔 자기 입맛대로 쓴 거라 의도적인 왜곡으로 보인다. 아니 애초에 '''교과서'''를 쓰는사람이 잘 알지도 못하는 걸 써놓는 게 말이 되는가? 이에 대한 반성의 의미인지 고등학교 사회 교과서에는 이런 시각을 "문화 상대주의를 고려하지 않은 잘못된 예시"로 기재했다.
애초에 비교된 영국, 독일, 프랑스 같은 국가들이 나중에 차차 나아지긴 했지만 산업 혁명 당시에 어린이들까지 포함한 노동자들의 장시간 노동 문제가 있었다는 것과 제국주의 열강으로 식민지를 착취해왔다는 사실은 무시하였다.[6] 문제가 제기되고 스페인 대사관 관계자까지 알자 외교문제로 번질까 우려했는지[7] 문제의 내용을 학기 중에 급하게 삭제했다. '스페인사 왜곡' 도덕 교과서 삭제키로
또, 사실 도덕 교과서를 읽어보면 교훈이랍시고 "시금치는 거친 땅에서 자란 식물인데 온실에서 자라서 맛이 없어졌다. 요즘 아이들도 온실에서 자라서 약해졌다."나 "잠은 무덤 속에서도 잘 수 있다." 같은 말들을 찾을 수 있는데, '''과연 이게 교훈적으로 옳은 말인가?''' 의문할 수 있는 표현을 당당하게 써 놓기도 한다.
그 유명한 '''"내가 니 나이 때에는..."'''이라고 말하는 꼰대들도 많다. 한 마디로 "나는 너와 같은 나이 때 더 고생하고 더 노력했다. 너는 그 정도도 못 하면서 말만 많냐?"라는 이른바 노오오오오오오력, 의지 드립으로 이어진다. 이것도 한낱 언어도단이다. 현재는 1960~80년대가 아닌 2020년대이다. 똑같이 나전칠기를 만들어 팔았어도 1970~80년대에는 그럭저럭 먹고 살았지만, 2000년 이후로는 다 파산해서 기술이 사라질 마당이다. 나전칠기 장인은 그대로여도 세상이 바뀌었기 때문에 상황도 바뀌었다. 아니, 애초에 저거 본 문서에서 수도 없이 언급되는 자연주의의 오류이다. 그야말로 정신나간 과거로 되돌아가자는 정신나간 소리일 뿐이다.[8] 이는 보상심리와 유관해 보인다. 저때는 이렇게 반박할 수도 있다. '''"이제는 그런 거 안 통합니다. 세상이 달라졌어요."''' 비교는 본인과 다른 존재에게서 발전이나 성찰할 계기와 교훈을 얻으려는 행동이다.
무엇보다 인류 문명은 발전하려는 진취적인 자세가 있어야 발전할 수 있는 것이며, 그게 없어진 문명들은 로마 제국처럼 사라지면서 몰락했다. 그리고 이런 나쁜 상황을 좋은 상황으로 우기면서 문제 해결을 거부하고 상태만 더 악화하는 정신승리일 뿐이다.
6. 관련 문서
해당 문서에도 발전, 이권 따위 관련 내용이 있다.
- 군중심리
- 꼬북이(꼬우면 북한가라 이기야)
- 꼰대
- 논리적 오류
- 문화 지체
- 미안할 짓을 왜 하냐
- 보상심리
- 사람은 고쳐 쓰는게 아니다
- 세대 갈등
- 수인의무: 본래 헌법상으로도 보장되는 의무이지만 실생활에서 종종 꼰대 및 라떼 논리로 악용되고 있다. 특히, 상사가 하급 직원에게 비합리적인 관행에 대해서 참으라고 요구할 때에 수인의무 논리가 악용되곤 한다.
- 어른들은 말이 안 통한다
- 요즘 젊은 것들은 버릇이 없다
- 오십보백보
- 완곡어법
- 우물 안 개구리
- 우월의식
- 원칙주의
- 전체주의
-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
- 좋았던 옛날 편향
- 프로불편러
- 한국인은 패야 말을 잘 듣는다
- 헬리콥터 부모
[1] 다만 이건 루머이며, 실제로 한 말이 아니다.[2] 보통 이런 말을 하는 인간 가운데 제대로 운동해본 사람은 거의 없다. 당연히 제대로 몸을 굴리는 사람들은 일단 그 과정이 얼마나 힘든지도 알고, 사람마다 차이(심리, 육체 모두)가 심한 것도 잘 알기 때문. 기본적인 골격과 체형은 물론이고 똑같은 운동을 해도 근육의 형성 정도와 모양, 똑같은 것을 먹어도 지방이 얼마나 축적되는지, 관절 상태는 어떤지 등등 개인별 차이는 아주 크다. 대표적으로 턱걸이는 그냥 마르기만 한 사람이 중량급 보디빌더보다 훨씬 유리하다.[3] 출처 Arigo, D., Suls, J. M., & Smyth, J. M. (2014). Social comparisons and chronic illness: research synthesis and clinical implications. Health Psychology Review, 8, 154-214.[4] 현재 학술계에서 (최소 한국에선)논란의 아이콘인 식민지 근대화론에 대하며 일부 측에서 이러한 주장도 한다. 그리고 그것이 논란을 불렀다. 자세한 건 해당 문서로.[5] 학살, 강간, 여성할례, 성소수자 탄압 등등.[6] 스페인도 사실 식민지를 지배하고 착취한 식민제국이긴 했지만, 교과서에서 얘기하는 19세기와 20세기 당시에는 영국, 프랑스가 압도적인 식민제국이었으며, 스페인의 대다수 남미 식민지들이 이미 독립했다. 남아 있던 쿠바와 필리핀마저도 미국과의 전쟁으로 잃어버렸다.[7] 새역모의 사례처럼 자유발행 교과서에서 특정 국가의 내용을 왜곡해서 가르치는 것도 당사국이나 그 나라 국민들이 민간 차원으로나마 불편함을 제기할 수 있는데, 이건 심지어 국정 교과서에 악의가 담겼다고 할 수도 있는 내용으로 왜곡해서 쓴 것이니까 그냥 있었으면 스페인 대사관이 공식적으로 문제를 제기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8] 물론 다정하고 사이좋은 시절이면 나쁘지 않다. 복고도 비슷한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