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향곡 제8번(말러)
사이먼 래틀 지휘, 그레이트 브리튼 국립 청소년 오케스트라
'''"오소서 창조주 성령이시여'''
'''믿는 이들의 마음 속에 드시어'''
'''당신께서 창조하신 우리 가슴에'''
'''천국의 은총을 채워주소서"'''[1]
1. 개요
구스타프 말러의 8번째 교향곡. 초연 당시 1000명이 넘는 연주자가 동원되어 '천인 교향곡(Sinfonie der Tausend)'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천인 교향곡'이라는 별명은 말하자면 초연 당시 공연 기획자 에밀 구트만의 광고 문구로, 말러는 그러한 별명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2. 작곡 과정
이 곡의 작곡이 시작된 시점은 1906년인듯 하다. 그 해에도 말러는 여름 휴가로 마이에르니히에 와서 창작의 고민을 하고 있던 와중에 송가 '오소서 창조주 성령이시여'에 대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래서 말러는 9세기에 마인츠의 가톨릭 대주교였던 라바누스 마우루스(Rabanus Maurus)가 집필한 강림절 송가 '오소서 창조주 성령이시여(Veni creator spiritus)'를 첫악장에 놓고 스케르초-아다지오에 이어 마지막에 '에로스의 탄생'이라는 제목의 송가를 붙인 4악장의 교향곡을 구상했다.
2.1. 1부의 작곡
같은 날, 말러는 '에로스의 탄생'을 '에로스의 창조'로 제목을 바꾸고 주제를 스케치했다. 그런데 이 스케치한 주제가 오히려 1부로 생각한 송가 '오소서 창조주 성령이여'에 더 걸맞았다. 그런데 문제는 이 1부의 작곡과정에 대한 알마의 회고와 말러의 언급이 서로 달라서 상당히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알마에 의하면, 말러는 반쯤은 잊어버리고 있던 이 강림절 송가를 가지고 1부의 합창을 구상했다고 한다. 그런데, 샘솟는 음악의 영감에 비해 가사가 충분하지 않아서 음악과 가사가 잘 맞지 않았다. 결국 말러는 빈에 전보를 쳐서 이 라틴어 가사의 완전판을 받아서 작곡한 음악과 맞춰보니 완벽하게 들어맞았다는 것이다.
말러 본인의 언급은 이와는 좀 다르다. 말러는 슈페흐트와 나눈 대화에서 우연히 어디서 고서를 접하게 되어 그 고서를 펼쳤더니 1부의 가사가 나왔다는 것이다.
에른스트 덱세이는 양자를 절충한 주장을 한다. 말러는 어디선가 찾아온 찬송가의 가사를 바탕으로 작곡을 하고 있었는데, 작곡과정에서 샘솟듯 흘러나온 음악이 그만 가사를 넘어가버렸다는 것이다. 말러는 이 문제의 해결방안을 절친한 문헌학자에게 구했는데 이 문헌학자 친구는 이 송가의 하나 반 정도의 연이 부족하다는걸 알아내서 말러에게 일러주었다고 한다. 말러는 빈의 궁정 음악감독 루체에게 연락하여 전체 가사를 받아냈고, 이 가사가 도착했을 때 음악과 부족함 없이 들어맞는 것을 발견하고 말러는 크게 놀랐다는 이야기다.
그 후 말러는 친구인 프리츠 뢰르에게 편지를 보내 송가의 운율이 잘 맞지 않는다는 불평을 늘어놓으며 아름다운 해석이 어디에 있는지 물었다. 즉, 적어도 이전부터 말러가 이 텍스트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뢰르에게 보낸 7월 18일의 편지에서는 결국 이 송가를 따온 '빌어먹을 구닥다리 교회 서적(말러의 표현에 의하면)'에 몇 가지 오류가 있음을 발견하고 이 송가의 권위 있는 새로운 텍스트를 요청하고 있다.
2.2. 2부의 작곡
말러는 찬가 ‘오소서, 창조주 성령이시여’와 ‘에로스의 탄생’에 의한 가사의 결합을 포기하고 괴테의 파우스트의 종막 장면 ‘심산유곡’ 장(章) 오페라를 연결시키기로 결정했다. 말러가 왜 그랬는지 알려면 파우스트를 읽었던 것을 알면 알 것이다. 말러가 언제 파우스트를 읽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30대 초,중반에 읽었으리고 추정한다. 파우스트를 읽은 말러는 그 철학적인 심오한 내용에 매료됐다. 또한 자신은 파우스트적 인간이었고 그렇게 인생을 산 인물이었다.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차별당해 방황을 했고, 모친에 대한 마음과 동생들의 죽음이 부인 알마를 사랑에서 갈망까지 갔다. 말러는 파우스트를 오페라로 만들 계획을 세웠으나 바쁜 상황이라 일단 미루고, 나중에 전체 내용을 다루는 것에 무리가 있어 계획을 바꿔 환의와 구원의 내용이 있는 심산유곡(파우스트의 구원) 장면을 바탕으로 단막 오페라를 작곡하려 했다. 8번 교향곡을 구상하여 1부를 완성한 말러는 환희와 긍정의 내용을 다루는데 있어서 2부로 ‘에로스의 탄생’보다 ‘파우스트 종막 오페라’가 옳다고 판단한 것으로 본다. 2부의 음악 작곡을 하면서 대본도 자기가 직접 작성할 정도로 작곡에 열을 올렸다.(천사와 닮은 신부와 승천한 소년들이 대화하는 내용을 뺐고 성모 마리아를 찬양하는 박사의 장황한 독백을 합창과 나눠먹게 만들긴[2] 했지만 어느 정도 원작에 가깝게 썼다.) 그해에 말러는 잘츠부르크 음악제에 초청되어 16일부터 사흘간 잘츠부르크에 있었다는 걸 생각해보면 적어도 8월 15일 이전에 전곡의 스케치가 끝났을것으로 보인다. 잘츠부르크에서 돌아온 뒤에 말러는 8월 말까지 마무리 작업에 몰두했고 결국 여름 휴가내내를 꼬박 소비해 이 방대한 스케일의 작품을 완성했다.
3. 초연
3.1. 초연의 준비
초연때 신통한 반응을 얻지 못했던 이전과는 달리 8번 교향곡은 그야말로 초연에서 뜨거운 찬사를 받은 말러 생전의 유일한 작품이었다. 이 곡을 초연한 1910년은 말러가 태어난지 50년이 되는 해였다. 그때까지 격렬한 비판의 대상이 되어왔던 말러의 음악은 재조명을 받을 분위기가 감지되고 있었다. 이 8번이 '천인의 교향곡'이라는 타이틀을 달게 된 건 공연 기획자 에밀 구트만의 덕분인데, 에밀 구트만은 뮌헨 초연을 준비하면서 천여명에 달하는 합창단과 관현악단을 동원했기 때문이다. 이런 엄청난 규모는 베를리오즈의 레퀴엠 공연을 능가하는 것이었다. 물론 말러와 말러의 음악을 사랑하는 친구들의 전폭적인 지원도 있었다. 하지만 합창인원의 규모가 너무 큰 나머지 한 자리에 모여서 준비한다는건 불가능했다. 그래서 말러의 친구와 지인들은 각각 임무를 분담했다.
브루노 발터는 독창자들을 선별하는 작업을 했으며, 빈에서 프란츠 샬크의 지휘로 빈 음악동우회 소속 성악 협회가, 라이프치히에서는 게오르크 괼러 지휘하에 리델 코랄 연합이 맹렬히 연습하였다. 말러는 이들의 리허설에 참여하면서 뮌헨으로 돌아와 오케스트라로 선택된 카임 관현악단(현 뮌헨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리허설을 지휘했다.
3.2. 아내의 외도
하지만 말러 인생에 가장 찬란한 순간을 준비하던 그때에 말러에게 위기가 닥친다. 그것은 바로 아내 알마의 외도였다. 건강이 악화되어 토블라흐에서 요양중이었던 알마는 4살 연하의 젊고 재능있는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3] 와 사랑에 빠진 것이다. 사실 알마는 말러의 카리스마에 빠져 결혼하긴 했지만 말러의 지나치게 가부장적인 태도와 끝없는 어두움에 질려버렸던게 아닌가 싶다. 알마는 그로피우스를 구세주로 여겼고, 그로피우스도 알마에게 헌신적인 사랑을 약속했다.
그런데 이 그로피우스는 멍청한건지, 의도적이었던건지는 모르겠지만 알마에게 보내는 절절한 러브레터가 말러에게 배달되었다.[4]
이 편지를 받아본 말러는 충격에 휩싸였다. 말러는 피아노에 앉아 그 편지를 알마에게 보여주고 어찌된 것인지 물었다. 알마는 그동안 그녀가 얼마나 사랑에 목말라 했는지 그리고 말러가 자신을 간과했는지 하소연하며 응수하였다. 그로부터 며칠 후, 발터 그로피우스는 토블라흐까지 나타났다. 알마에게 보낸 편지의 답을 직접 들으러 온것이었다. 하지만 의외스럽게도 알마는 그런 그로피우스를 보고 반가운 마음이 든게 아니라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고 한다. 말러는 그를 데리고 와서 한참을 말없이 걸었다. 밤이 되자 말러는 그로피우스를 데리고 알마에게 두 사람중 하나를 택하라고 요구했다. 알마는 자비롭게도 결국 말러를 선택하였고 이 사건은 일단 마무리된 것처럼 보였다.[5]
3.3. 초연 참석자
- 음악가: 아르놀트 쇤베르크, 브루노 발터, 빌럼 멩엘베르흐, 클라우스 프링스하임[6] , 오토 클렘페러, 오스카 프리트, 안톤 베베른, 알반 베르크,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막스 레거, 프란츠 슈미트, 지크프리트 바그너, 랠프 본 윌리엄스,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 카미유 생상스, 릴리 레만
- 문학인: 아르투어 슈니츨러, 후고 폰 호프만스탈, 슈테판 츠바이크, 토마스 만, 조르주 클레망소
- 기타 저명 인사: 알베르 1세 (벨기에 국왕), 루트비히 3세 (당시에는), 헨리 포드[7]
3.4. 대성공한 초연
이런 고통 속에서도 초연 날짜는 시시각각 다가왔다. 1910년 9월, 예정대로 8번 교향곡의 초연이 뮌헨 국제 박람회장의 부속 시설이었던 신음악 축전홀(Neue Musik-Festhalle)[8] 에서 개최되는 것으로 정해졌다. 이 홀은 공연장이라기 보다는 실내체육관에 가까운 대형 시설이었고, 약 3,200명의 관객들을 수용할 수 있었다. 공연 기획자 에밀 구트만의 적극적인 홍보로 뮌헨시 곳곳에는 연주회를 알리는 포스터와 사진이 붙어있었다. 또한 합창의 리허설이 진행중이던 빈과 라이프치히에서도 이 연주회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이 곡의 준비를 위해 여러 합창단과 독창진이 빈, 프랑크푸르트, 함부르크, 베를린에서부터 왔으며 각지에서 많은 이들이 구름처럼 몰려 들었다. ‘모든 민족의 선물’이란 말러의 말대로 초연 준비는 범세계적인 일이었다.
무대조명의 귀재 알프레드 롤러가 빈에서 왔으며, 8번의 완성을 맨 처음 알린 빌럼 멩엘베르흐, 그와 이젠 실과 바늘처럼 당연하게 있어야 할 것 같은 브루노 발터, 오토 클렘페러, 오스카 프리트, 아르놀트 쇤베르크, 말러의 젊은 추종자들이었던 안톤 베베른과 알반 베르크도 속속 도착하였다. 그는 리허설을 준비하면서 아내에 대해 어느 정도 사랑과 신뢰를 회복한 것처럼 보였다. 덕분에 8번 교향곡은 말러의 교향곡 중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헌정자를 지니게 되었다. 헌정을 받은 축복의 주인공은 바로 알마였던 것이다.[9]
드디어 9월 12일, 8번 교향곡이 말러의 지휘로 858명의 가수 (8명의 독창자 포함)와 171명의 단원 (말러 포함)의 위용을 거느리며 초연되었다. 이날 연주회에는 왕족을 비롯하여 앞서 언급한 지인들과 함께 당대의 유명한 극장 감독 막스 라인하르트, 지크프리트 바그너[10] , 소프라노 릴리 레만,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막스 레거, 카미유 생상스, 지휘자 스토코프스키, 문필가 토마스 만 등 유명인사가 대거 참석하였다.
연주가 끝난 후 폭풍 같은 박수가 30분 넘게 이어졌으며 사람들은 모두 층계를 내려와 위대한 예술가에게 몰려들었다고 한다. 연주회가 완전히 끝난 후에도 밖에서 많은 사람들이 말러를 기다리고 있어서 말러는 이 사람들을 뚫고 지나가야만 했다. 릴리 레만은 제2부에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감명을 받았다고 고백하였으며 토마스 만은 말러에게 얼마나 많은 빚을 지게 되었는지 형언할 수 없다며 찬사를 보냈다. 하지만 이 연주회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말러가 몹시 마르고 창백했다고 전하고 있다. 그도 그럴것이 딸을 잃고, 빈을 쫓겨나듯 떠나 뉴욕과 유럽을 오가는 신세가 된데다, 심장병 진단을 받았고, 거기에 알마가 결정타를 날렸으니까.
어쨌든 뮌헨에서 개최된 초연은 대성공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말러는 8번을 초연한것이 자신의 작품을 초연한 마지막이었다. 그 다음 해에 말러는 결국 세상을 떠난다. 8번의 성공은 죽음의 그림자가 다가오는 말러에 대한 신의 마지막 축복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말러는 이듬해의 9번 교향곡 초연 요청은 거절했지만, 대지의 노래의 지휘는 수락했다. 하지만 결국 이듬해에 말러의 사망으로 이 약속은 지켜지지 못했다.
4. 특징
4.1. 거대한 오케스트라의 사용
말러는 이 교향곡에서 유례가 없는 엄청난 규모의 오케스트라를 사용했는데, 초연 당시에는 지휘자까지 총 1030명을 동원하였고 이것이 이 곡의 별칭인 '천인의 교향곡'의 유래가 되었다. 또 이후 쇤베르크의 초기 대작 오라토리오 '구레의 노래', 영국 작곡가 해버걸 브라이언의 교향곡 제1번 '고딕' 등에도 영향을 주었다.[11] 다만, 이 교향곡을 끝으로 더 이상 이렇게 큰 규모로 작곡되는 경우가 거의 드물며, 이 곡도 보통 4~5백명 정도만 동원해 공연하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물론 이 인원도 모으기 쉽지는 않지만.
편성만 보자면 변칙 5관 편성인데, 피콜로/플루트 4/오보에 4/코랑글레/피콜로클라리넷/클라리넷 3/베이스클라리넷/바순 4/콘트라바순/호른 8/트럼펫 4/트롬본 4/튜바 1/팀파니/심벌즈 3(서스펜디드 심벌도 별도 필요)/베이스드럼/탐탐/트라이앵글/저음 종(흔히 튜블러 벨 사용)/글로켄슈필/오르간/피아노/첼레스타/하모늄[12] /하프 2/만돌린/현 5부(제1바이올린-제2바이올린-비올라-첼로-콘트라베이스)라는 덩치를 자랑한다. 여기에 무대 뒤나 옆 혹은 2층 객석에서 연주하는 트럼펫 네 대와 트롬본 세 대도 필요하다.
물론 말러는 그 자신이 지휘자이기도 했기 때문에 꼼꼼하게 가변 편성에 대한 가능성도 주석으로 달아 놓았다. 합창단이나 공연장의 규모가 클 경우 각 관악 파트의 수석(1번) 주자는 두 명으로 복수 편성(더블링)하는 것을 추천했고, 팀파니도 주자 두 명을, 음량이 상대적으로 약한 하프와 만돌린도 더블링해 각각 네 대와 두 대(혹은 그 이상)를 쓰도록 권하고 있다. 현악 주자들도 마찬가지로 가감이 가능하도록 했는데, 초연 때의 편성에 따르면 제1바이올린과 제2바이올린 각 25명, 비올라 20명, 첼로 20명, 콘트라베이스 18명이라는 정신나간(...) 규모였다. 또 콘트라베이스는 통상 4현 악기 대신 가급적이면 저음 C현이 추가된 5현 악기를 쓰도록 하고 있다. 글로켄슈필의 경우 원래 없었다가 최종 리허설 때 급하게 추가했다.
다만 어느 공연이든 초연 때처럼 무대에 1000명을 채우거나 혹은 초과해서 공연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예산 상의 문제가 크고, 또 아무리 큰 공연장이라도 무대에 1000여 명이 오를 것을 상정하고 설계하는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야외 공연장이나 특설 무대, 실내체육관 등에서 공연하는 경우도 많다. 만약 콘서트홀에 1000명 이상을 세우려면 무대 바로 앞의 객석 몇 줄을 들어내고 그 자리에 가설 무대까지 만들어 본 무대와 연결하고 기존 무대도 무너지지 않도록 보강 공사까지 해야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 때문에 초연 이후로도 이 곡의 연주에 1000명 이상을 동원한 예는 손에 꼽을 만큼 적다. 몇 가지 사례로 1916년 3월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의 지휘로 행해진 미국 초연에서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110명, 합창단 400+400=800명, 어린이 합창단 150명과 독창자 여덟 명까지 1068명을 동원[13] 한 것, 1972년 6월 아사히나 다카시의 지휘로 행해진 오사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제100회 정기연주회 때 관현악단 119명, 합창단 330+290=629명, 어린이 합창단 260명과 독창자 여덟 명까지 1016명을 동원한 것, 2011년 7월에 슬로베니아의 류블랴나와 크로아티아의 자그레브에서 번갈아 가며 열린 말러 서거 100주년 대공연에서 발레리 게르기예프가 지휘한 슬로베니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자그레브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양 국가의 연합합창단까지 총 1083명이 모여 연주한 것, 2012년 2월에 구스타보 두다멜의 지휘로 시몬 볼리바르 교향악단과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 베네수엘라 각지에서 집결한 청소년 합창단과 어린이 합창단, 독창자까지 1400여 명(...)이 모여 연주한 것이 있다. 이 중 아사히나와 두다멜의 공연은 각각 LP와 CD, DVD와 블루레이로 발매되어 있다.
4.2. ‘칸타타’ 혹은 ‘오페라’ 같은 교향곡
말러의 이전 교향곡인 5,6,7번이 기악으로만 작곡된 반면에, 이 교향곡은 성악과 합창을 동원하고 가사를 중심으로 작곡하면서 2,3,4번 시절의 칸타타풍의 교향곡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곡을 천천히 뜯어보면 고전 4악장 형식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1부는 소나타 형식으로 되어있고, 2부는 3부분으로 나누어져 각각 전주곡, 아다지오, 스케르초, 종곡으로 나누어지므로 4악장 형식으로 봐도 되는 것이다. ‘천인교향곡’의 1부가 성령찬미가를 가사로 하고 있는 일종의 종교 칸타타라면, 〈파우스트〉 2부 5막 마지막 부분의 줄거리를 따르고 있는 2부는 오페라와 같다. 2부에선 독창자들이 마치 오페라의 배역을 맡듯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에 좀 더 자세한 해설이 필요할 것 같다.
4.3. 제2부 줄거리
2부: 심산유곡
막이 오르면 관현악의 전주곡과 숲과 바위, 황무지만 있는 장소가 나오고 신비로운 합창이 들려온다. 거룩한 은둔자들이 산 위에 흩어져 바위들 사이에 자리잡는다. 이윽고 황홀경에 빠진 법열의 신부가 신과의 합일의 기쁨을 열정적으로 노래하고, 명상하는 신부는 광포한 자연과도 같은 그의 번뇌에 괴로워하며 그의 모든 고통을 이겨낼 전능한 사랑을 구한다. 그러자 천사들과 승천한 소년들이 나타나 '''‘언제나 갈망하며 애쓰는 자는 그를 우리는 구원할 수 있습니다.’'''라는 ‘파우스트’의 핵심 사상을 노래하지만, 성숙한 천사들은 ‘지상의 찌꺼기’를 나르는 일이 결코 쉽지 않음을 경고하며 인간의 불완전함을 노래한다. 이윽고 젊은 천사들과 승천한 소년들이 파우스트를 보살펴 좀 더 높은 완성의 경지에 오르도록 도와주고, 마리아를 공경하는 박사는 파우스트를 구원할 수 있는 영원한 여성, 즉 영광의 성모(광명의 여신)를 믿는다. 이때 멀리서 영광의 성모가 떠 오는 사이 관현악의 바이올린 연주자들이 지극히 아름답고 서정적인 주제를 연주하며 성모의 자비로움을 표현한다.
영광의 성모 앞에 3명의 죄 많은 여인이 등장하는데, 그들은 예수의 발에 향유를 부은 여인(마리아 막달레나)과 사마리아 여인, 그리고 이집트의 마리아로서 모두 지난날의 죄를 참회하여 파우스트를 용서해줄 것을 청한다. 그리고 2부의 프리마돈나라 할 수 있는 그레트헨(텍스트에는 ‘속죄의 여인’이라 표시됨)이 성모께 매달리며 그녀의 옛 연인이었던 파우스트의 구원을 간절히 청하자, 영광의 성모는 마침내 파우스트를 용서하고 하늘로 이끌어 올린다. 이때 영광의 성모가 부르는 대사는 단지 두 줄밖에 안 되지만 그녀는 이 교향곡에서 가장 핵심적인 인물로서 파우스트를 구원하는 영원한 여성상이다. 용서를 받은 파우스트는 다시 부활하여 그레트헨의 인도로 천국으로 갈 준비를 한다. 이윽고 마리아를 공경하는 박사가 엎드려 경배(기도)하며 '''“동정녀, 어머니, 여왕”'''이라 외치며 영광의 성모를 찬양하고, 파우스트가 첼레스타와 피아노, 하프가 만들에내는 영롱한 간주음악에 맞추어 승천하자 어디선가 아주 고요하게 시작된 신비의 합창이 점차 벅찬 환희로 상승하고 법열의 신부의 주제와 영광의 성모 주제가 결국 이 교향곡 1부 도입부에서 울려 퍼졌단 ‘오소서, 창조주 성령이여’의 동기로 통합되면서, 결국 창조의 성령만이 남아 이 거대한 교향곡의 대미를 장식한다.
4.4. 등장인물
- 파우스트(Faust): 여기서 파우스트는 대사가 없다. 다만 지시행동만 있다.
- 그레트헨(Gretchen): 속죄하는 여인(소프라노), 성모에게 파우스트의 구원을 요청한다.
- 법열의 신부(Pater Ecstaticus)(바리톤)
- 명상하는 신부(Pater Profundus)(베이스)
- 마리아를 공경하는 박사(Doctor Marianus)(테너)
- 큰 죄를 지은 여인(Magna Peccatrix)(소프라노)
- 사마리아의 여인(Mulier Samaritana) (알토)
- 이집트의 마리아(Maria Aegyptiaca) (메조소프라노)
- 영광의 성모(Mater Gloriosa) (소프라노)
- 천사들(Engel)
- 성숙한 천사들(Die Vollendeteren Engel)
- 어린 천사들(Die Jüngeren Engel)
- 승천한 소년들(Selige Knaben) (어린이 합창단)
5. 가사
위에서 이미 설명이 된 것처럼 1부는 Veni, creator spiritus, 2부는 괴테의 파우스트 마지막 부분을 사용하였다.
5.1. 1부
5.2. 2부
6. 한국 공연 기록
클래식 본고장인 유럽에서도 무지막지한 편성 때문에 자주 공연되지 못하는 곡인 만큼 한국에서 말러 8번의 연주는 실로 가뭄에 콩나듯 개최되고 있고, 서울 이외의 지역에서 공연된 기록은 2016년 현재까지 없는 실정이다. 한국 초연은 1978년 8월 13일에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열린 광복 33주년+대한민국 정부 수립 30주년 기념 연주회였다. 이 공연은 1949년 12월 8~9일에 일본 도쿄의 히비야 공회당에서 야마다 카즈오 지휘의 일본교향악단과 연합합창단이 개최한 일본/아시아 초연 이래 두 번째 아시아 초연 무대로 기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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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초연 무대에서는 홍연택이 지휘한 국립교향악단과 나영수가 합창 지도를 맡아 국립합창단, 서울대, 연세대, 한양대, 경희대 네 개 대학교 음대 성악과 학생들과 예원학교 음악 전공 학생들로 구성한 연합합창단, 독창자들인 이규도, 김은경, 김희정(이상 소프라노), 이정희, 정영자(이상 알토), 홍춘선(테너), 김성길(바리톤), 오현명(베이스)까지 650명이 동원되어 연주했다고 한다. 이 공연 때는 라틴어/독일어 원어가 아닌 한국어로 번안한 가사로 연주되었고, 1부에서 일부 대목이 생략되었다. 1부 가사는 가톨릭대 허창덕 교수가, 2부는 나영수가 번역했다. 공연 실황 녹음 기록
이후 1988년 3월 31일에 예술의 전당 음악당(콘서트홀) 개관 기념으로 전국 관현악단들이 모여 연주한 개관 기념 음악제의 마지막 공연에서 정재동 지휘의 서울시립교향악단이 두 번째로 공연했다. 합창단으로는 서울시립합창단, 대우합창단, 인천시립합창단, 수원시립합창단, 연세대학교 콘서트콰이어와 서울시립소년소녀합창단이, 독창자로는 곽신형, 이병렬, 정은숙(이상 소프라노), 강화자, 정영자(이상 알토), 박성원(테너), 김성길(바리톤), 오현명(베이스)이 출연했다. 초연 때와 달리 이 공연에서는 원어로 공연되었고, 생략 없이 전곡을 그대로 공연했다. 이후 공연들에서도 마찬가지로 원어+무삭제 공연이 이루어지고 있다.
하지만 이 70년대와 80년대 후반의 두 공연 이후 이 곡이 다시 연주되기까지는 10년 이상의 시간이 걸렸다. 물론 이 두 공연은 당시에도 각계에 회자된 대공연이었지만, 당시 말러 음악에 대한 일반인 뿐 아니라 클래식 애호가들의 인지도가 그리 높은 편이 아니었고, 또 관현악단이나 합창단이나 여전히 기술적인 문제를 안고 있었기 때문에 재정적인 문제와 더불어 이 곡의 재연을 많은 이들이 꺼리는 원인이 되었다. 게다가 1990년대 후반 터진 외환 위기로 인해 문화예술계에도 대대적인 구조 조정이 시작되면서 계획 조차 못잡는 현시창이 이어졌다.
결국 이 곡이 다시금 한국 무대에 오르게 된 것은 세기가 바뀐 2000년대 초반이었다. 1999년부터 당시 음악 감독 임헌정의 지휘로 말러 교향곡 전곡 연주를 한국 최초로 시도한 부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세 번째 공연 기회를 갖게 됐는데, 원래 2002년 한일 월드컵의 기념 공연을 겸해 무대에 올리려 했지만 여러 제반 사정으로 인해 무산되어 1년 뒤인 2003년 5월 31일에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에서 통산 세 번째 공연이 열렸다. 합창단으로는 부천시립합창단, 수원시립합창단, 안양시립합창단, 성남시립합창단과 월드비전 어린이합창단이, 독창자로는 신지화, 나경혜, 박정원(이상 소프라노), 이현정, 장현주(이상 알토), 박현재(테너), 전기홍(바리톤), 유형광(베이스)이 출연했다. 이 공연은 400~600명 규모로 열린 이전의 두 공연과 달리 예산 등 여러 문제로 350명 규모로 간소하게(?) 개최되었다.
임헌정은 이 공연 후 3년 반 뒤인 2006년 12월 17일에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에서 개최된 서울대학교 개교 60주년 기념 연주회에서 이 곡을 재차 무대에 올렸는데, 대학 오케스트라와 합창단 위주로 진행한 첫 공연이었다. 재학생들 외에 졸업생들까지 불러서 보강한 서울대 교향악단과 합창단, 평화방송 어린이 합창단이 출연했고, 독창자로는 서울대 음대 성악과 교수들이었던 박미혜, 서혜연, 김인혜(이상 소프라노), 윤현주, 양송미(이상 알토), 박현재(테너), 김성길(바리톤), 양희준(베이스)이 출연했다.
2007년 8월 23일에는 금호아시아나그룹의 기획으로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린 시리즈 공연인 '월드 오케스트라 시리즈'의 일곱 번째 순서로 중국의 상하이 교향악단이 초청되어 당시 악단 음악 감독이었던 천셰양의 지휘로 이 곡을 무대에 올렸는데, 해외 오케스트라가 내한해 이 곡을 공연한 최초 사례가 되었다. 합창단으로는 부천시립합창단, 의정부시립합창단, 서울대학교 음대 합창단과 평화방송 어린이 합창단이, 독창자로는 박지현, 김은주, 이명주(이상 소프라노), 이아경, 양송미(이상 알토), 이영화(테너), 김동원(바리톤), 양희준(베이스)이 섭외되었다.
2011년에는 이 곡을 한국에서 처음 무대에 올린 KBS 교향악단(초연 당시에는 국립교향악단)과 서울시향이 거의 같은 시기에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에서 재연 무대를 개최해 화제가 되었다. 우선 12월 16일에 KBS 교향악단이 당시 상임 지휘자 함신익의 지휘로 교향곡 2번, 4번, 5번과 이 8번으로 구성한 말러 시리즈 공연의 마지막 무대에서 공연했다. 서울모테트합창단, 수원시립합창단, 안산시립합창단, 안양시립합창단, 의정부시립합창단, 고양시립소년소녀합창단과 광명시립소년소녀합창단이 팀을 이룬 연합합창단과 조경화, 이지연, 한경미(이상 소프라노), 이아경, 양송미(이상 알토), 박현재(테너), 김동섭(바리톤), 함석헌(베이스)이 협연했다.
닷새 뒤인 12월 21일에는 말러 교향곡 전곡 연주를 진행하고 있던 서울시립교향악단이 당시 예술 감독 정명훈의 지휘로 공연했다. 합창단으로 국립합창단, 서울시합창단, 수원시립합창단, 안양시립합창단, 서울모테트합창단, 나라오페라합창단, 고양시립소년소녀합창단과 평화방송 어린이 합창단이, 독창자들로 트와일라 로빈슨, 이명주, 캐슬린 킴(이상 소프라노), 백재은, 양송미(이상 알토), 강요셉(테너), 김주택(바리톤), 전승현(베이스)이 출연했다.
2016년 8월 25일과 27일에는 롯데월드몰 상층부에 건립된 롯데콘서트홀의 개관 공연 시리즈 중 이 곡의 공연이 역대 최대 규모의 편성으로 개최되었는데, 임헌정이 지휘한 코리안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이상훈이 합창 지도를 맡은 서울/수도권 연합합창단[16] , 독창자로 박현주, 손지혜, 이현(이상 소프라노), 이아경, 김정미(이상 알토), 정호윤(테너), 김동섭(바리톤), 전승현(베이스)이 출연했다. 관현악단은 오르가니스트를 포함한 엑스트라 단원을 보강해 141명으로 맞췄고, 합창단은 성인 혼성 합창단 492명, 어린이 합창단 358명이 출연했다. 여기에 독창자들과 지휘자까지 더하면 딱 1000명이 되었다.[17] 워낙 합창단 규모가 컸기 때문에, 홀의 무대 뒷편과 파이프오르간 사이에 설치된 합창석 뿐 아니라 무대의 좌우를 둘러싼 모든 객석을 합창석으로 사용했다. 최종 무대 리허설 편집 영상
이렇게 1978년 초연 이래 2016년 현재까지 38년 동안 한국에서 이 곡이 공연된 횟수가 불과 10회도 채 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 곡의 공연 난이도가 예술적으로나 재정적으로나 얼마나 흉악한지(...) 알 수 있다. 그나마 2003년 공연 이후로는 각 공연 사이의 텀이 10년 까지는 가지 않는다는 게 위안으로 보일 정도다.
7. 여담
오덕들에게는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 1기 애니메이션 마지막화에서 1부 클라이맥스 부분이 스즈미야 하루히와 쿈의 키스 신에 삽입된 것으로 유명하다.
[1] 1부 송가 'Veni Creator Spiritus' 中[2] 심지어 첫 8줄은 파우스트를 기다리는 승천한 소년들의 수다와 겹친다.[3] 바우하우스 창립 발기인 중 한 사람이었고, 이후 미국에서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하버드에서 교수직을 겸하면서 현대 건축의 한 중심축이라고 불리는 그 발터 그로피우스가 맞다. 재밌는 사실은 말러와 그로피우스를 제외하더라도 발이 넓던 알마가 알고 지내던 예술가 유명인이 한둘이 아니다. 알마를 기준으로 뻗어 나가다 보면 독일, 미국의 예술계, 사교계가 어느 정도 이해될 정도.[4] 그로피우스가 멍청한 실수를 한 것이라는 분석도 있긴 하지만 의도적인 행동일 가능성도 다분하다. 왜냐하면 봉투에는 '지휘자 말러 선생에게'라고 적혀있었던 탓이다. 아마 의도적이었다면 그로피우스는 말러에게 '알마의 마음이 떠났으니 선생도 그만 정리하시죠'라고 암시하려고 했던 것일까?[5] 하지만 이건 일시적인 봉합일 뿐이었다.[6] 지휘자로 토마스 만의 사위[7] 반유대주의자인 헨리 포드가 천인교향곡 초연에 참석한 것은 상당히 이례적이였다.[8] 현재 독일 박물관(Deutsches Museum) 부속 교통 전시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2010년 10월에 이 곡의 초연 100주년 기념 공연도 이 곳에서 개최하려고 했지만, 내부 전시물의 이동과 공연 용도 개조에 막대한 예산이 든다는 이유 때문에 다른 곳에서 열렸다.[9] 알마는 말러가 초연 준비로 한창 바쁠 때도 그로피우스와 만났다. 여러가지 정황으로 봤을때 알마가 그로피우스에게 이별을 통보하기 위한 마지막 만남 같지만, 이후 발견된 여러가지 편지와 증거로 보아 그 둘은 확실히 잠자리까지 가진것 같다. 이후 50-60년에 말러 전기 작가가 이 사실을 당시 생존해 있던 말러의 딸에게 알렸을때, 그녀는 자기 어머니인 알마 말러가 말러에게 이럴 줄 까지는 몰랐다며 실망을 많이 했다.[10] 바그너의 아들[11] 이 때는 아직 쇤베르크와 같은 작곡가들이 아직 후기 낭만주의를 따르고 있었고 무조 음악등에는 손을 안 대고 있었다.[12] 초등학교 음악 시간에 흔히 쓰이던 풍금이다.[13] 아카데미 오브 뮤직의 공간이 부족해 공간을 확장하였다.[14] 한국 천주교에서 성령강림 대축일 시간전례에 쓰이는 최민순 신부의 번역본을 참고하였다.[15] Paraclitus. 가톨릭 번역 기준. 개신교에서는 '보혜사'로 번역[16] 성인 합창단들로 광명시립합창단, 구리시립합창단, 국립합창단, 그란데오페라합창단, 서울모테트합창단, 성남시립합창단, 수원시립합창단, 시흥시립합창단, 안양시립합창단, 원주시립합창단, 의정부시립합창단, 인천시립합창단이, 어린이 합창단들로 과천시립소년소녀합창단, 대교어린이TV합창단, 성남시립소년소녀합창단, 송파구립소년소녀합창단, 의정부시립소년소녀합창단, 포천시립소년소녀합창단, CBS소년소녀합창단이 참가했다.[17] 원래는 관현악단을 좀 더 크게 맞추려 했지만, 홀 관리 담당자들이 용적 초과로 줄여달라는 부탁 때문에 몇 명 감원한 것이라고 한다. 이 때문인지 합창이 조금만 커져도 관현악이 점점 묻히는 안타까운 현상도 벌어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