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사코 황후/결혼 전
1. 어린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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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와다 마사코는 1963년 오와다 히사시와 오와다 유미코의 3녀 중 장녀로 도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오와다 히사시(小和田恆)'''는 도쿄대학 출신의 법조인 및 외교관[1] 이며, '''어머니 오와다 유미코(小和田優美子)'''는 게이오기주쿠대학에서 프랑스어를 전공한 후 에어 프랑스에서 근무한 이력의 소유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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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사시와 유미코의 결혼사진
할아버지 오와다 다케오(小和田毅夫)는 교사였으며, 고등학교 교장을 지냈다. 할머니도 교사였다고 한다.
외할아버지 에가시라 유타카(江頭豊)는 미나마타병으로 물의를 일으킨 칫소 사의 회장을 역임했다. (단, 유타카는 사건이 일어난 후에 부임) 유타카의 아버지이자 마사코의 외증조할아버지 에가시라 야스타로(江頭安太郞)는 일본 해군의 중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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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살 무렵의 마사코.
마사코가 2살 때 아버지는 소련 모스크바 대사로 발령을 받았다. 마사코는 현지에서 유치원을 다니며 '''러시아어'''를 자연스럽게 배우게 되었다. 스위스 제네바에 살던 1966년 7월에는, '''쌍둥이 여동생'''들이 태어났다. 아직 어린 아기였던 마사코에게 한꺼번에 동생이 2명이나 생긴 것. 마사코는 맏언니 역할을 훌륭하게 해내면서 일찌감치 강한 책임감을 가지게 되었으며, 자신의 고민을 내색하지 않고 스스로 다스리는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
5살 때부터는 뉴욕에서 살면서 영어를 배웠다. 히사시와 유미코는 외국 생활을 하는 중에도 딸들이 일본을 잊지 않게 하려고 나름대로 애썼다. 일본어와 일본 문화를 가르치고, 집에서는 일본어로 대화했으며, 일본 요리를 먹이고, 기모노를 입히고, 일본의 전래동화를 읽어주는 등등. 그럼에도 마사코는 귀국한 후 '''문화충격'''으로 다소 혼란을 느꼈다고 한다.[2]
8살 때 귀국한 마사코는 공립 초등학교 2군데를 거쳐 덴엔쵸후 후타바(田園調布雙葉) 여학원 초등학교 3학년에 편입학했다. 덴엔쵸후 후타바 여학원은 생 모르 수녀회(아기 예수의 애덕 교육 수녀회)[3] 에서 운영하는 가톨릭 미션스쿨로, 마사코의 친정어머니 유미코와 시어머니 미치코 황후(유치원, 초등학교)도 이 학교를 다녔다.
마사코는 '''우수한 성적에 활달하고 적극적인 성격으로 인기'''가 많았으며, 수예부ㆍ생물부ㆍ소프트볼 팀 등에서 활약했다. 중3 때는 소프트볼 팀을 조직하여 열심히 연습, 대회에 나가 우승까지 하는 등 뛰어난 체육 실력과 리더십을 보였다. 또한 이과 과목에서도 뛰어난 성적을 거둬서, 고1 때 담임교사는 마사코에게 의대 진학을 권유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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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4월, 덴엔조후 후타바 여학원 중학교에 입학한 마사코. 아버지 히사시, 어머니 유미코, 같은 학원의 초등학교 4학년이 된 쌍둥이 여동생 레이코(礼子), 세츠코(節子)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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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코는 UN 난민고등판무관 사무소에서 근무했으며, 세츠코는 번역가이자 문화인류학자이다. 레이코는 2000년에 도쿄대학 법학부와 하버드 대학 로스쿨 출신 변호사 이케다 마사히사(池田祐久)와 결혼했고, 세츠코는 1999년에 도쿄대학 출신의 의사 시부야 켄지(渋谷健司)와 결혼했다가 2017년 이혼했다.[image]
1986년 이후로 추정되는 가족사진. 앞줄 오른쪽이 마사코.
2. 하버드 대학교 졸업 및 외무고시 합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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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고생 시절의 사진이다.
마사코가 고1이던 1979년, 아버지는 다시 미국으로 발령을 받아, 오와다 일가는 미국으로 이주했다. 마사코는 매사추세츠 주의 벨몬트(Belmont) 고등학교 1학년에 편입학했다. 고등학교에서도 합창ㆍ수학ㆍ소프트볼 등 여러 동아리 활동을 활발하게 했으며, 미국인 학생들을 따라잡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여 여러 명문 대학에 합격했다. 마사코는 그 중에서 '''하버드 대학교'''에 진학하여 경제학을 전공했다.
마사코는 대학 기숙사에 살며 학업과 여러 활동들을 열심히 하였으며, 국제 무대에서 일할 꿈을 가지고 프랑스어, 독일어, 스페인어 등 외국어도 공부했다. 그리고 1985년 6월, 우수한 성적으로 하버드 대학교를 졸업하였다. 마사코의 졸업 논문의 제목은 <수입 가격 쇼크에 대비한 국제 간 조정>이었는데, 이 논문은 나중에 일본 외무성의 참고자료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미국에서 좋은 기회가 많았지만, 어린 시절의 많은 기간을 외국에서 자라난 마사코는 그 기회들을 다 뿌리치고, '''일본을 더 잘 알아 정체성을 찾고 싶어서 귀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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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드 대학교 졸업식에서.[4]
도쿄대학 법학부에 편입학하여 다니던 마사코는 '''외무고시를 준비, 1986년 10월 단 한 번만에 당당히 합격'''해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외무성에 입성하게 되었다. 당시 단 3명뿐이던 여성 외교관들[5] 중 한 명이자 '''부녀(父女) 외교관'''의 탄생으로, 일본 내에서 큰 화제가 되었다.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마사코는 "외교관을 지망한 이유"에 대해 딱 부러지게 대답하였다.
또한 해당 인터뷰에서 마사코는 "결혼 후에도 외교관으로 활동하고 싶다", "가정과 일을 양립하고 싶지만, 그게 어렵다면 일을 택하고 싶다"고 밝혔다.'''외교관이 된 이유는, 일본에서도 남녀가 차별을 받지 않고 동등하게 일할 수 있는 분야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일본을 남녀 차별이 없는 나라로 만들고 싶습니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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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관으로 활동하던 당시.
입사 직후 마사코는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로 연수를 떠나 국제관계학을 1년간 공부[7] 했다. 이때 1988년 제16차 G7 서밋에 반도체 시장 관련 통역으로 참여하였다.
1990년 연수를 마치고 귀국한 이후에는 북미국에 소속되어 OECD 담당[8] 으로 1년 4개월, 북미국 북미2과에서 2년 8개월간 근무하였다. 입사 3년차이던 1991년에는 미일무역회의[9] 에 통역으로 참여했다. 이때 마사코가 상당히 활약하여서, 당시 일본측 고위 담당자가 마사코에 대해 여러가지로 물어보는 장면이 방송되기까지 했다.
또한 1991년 3월 스웨덴 총리 국빈방문 당시 만찬회 통역 담당, 1991년 3월 11일 일본에서 열린 미 국무장관과의 회담에도 통역으로 참여하는 등, 마사코는 외무성에서 가장 촉망받는 외교관이었다. 일본 외무성에서도 마사코의 능력은 높이 평가받았다. 마사코는 영어를 비롯하여 러시아어, 프랑스어, 독일어, 중국어, 스페인어(즉, 모국어 포함 무려 7개국어!)를 수준급 이상으로 구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어려서부터 외교관 아버지를 보고 자라서, 신참임에도 외교관으로서의 행동양식도 능숙했다. 그 덕분에 마사코에 대해 '아버지의 후광을 힘입은 무능한 사람'이라는 악평은 단 한 번도 나온 적 없었다고 한다. 즉 만약 아버지가 외교관이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마사코는 충분히 훌륭한 외교관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걸, 다른 외교관 선배들이 인정한 것이나 다름없다. 마사코의 성공을 그 어느 누구도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3. 나루히토 친왕과의 만남과 결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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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망받는 유능한 여성 외교관이었던 오와다 마사코의 삶은 나루히토 친왕과의 결혼으로 인해 지옥으로 떨어지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책임감과 소신이 있는 성실한 남자가 지덕체를 겸비한 아름다운 여자에게 순수한 사랑을 바쳤는데 그 결과가 비극이 될 수도 있다는 걸 보여주는 아이러니한 사례이다.
1986년 10월 스페인 엘레나 공주[10] 의 영접식에 참석한 신입 외교관 마사코는 그 자리에서 한 남자를 만나게 된다. 바로 그는 쇼와 덴노의 장손 '''히로노미야 나루히토 친왕'''이었다.[11] 나루히토 친왕은 그 자리에서 마사코를 보고 호감을 느끼게 된다.
나루히토 친왕은 마사코에게 연락을 지속하였고, 그녀에게 청혼하였다. 그러나 마사코는 외교관으로서 커리어우먼의 인생을 살고 싶었기에 청혼을 계속해서 거절한다. 게다가 마사코의 '''외할아버지 에가시라 유타카'''가 미나마타병 추문을 일으킨 칫소 사(社)의 회장이었기 때문에, 마사코는 신붓감 후보 목록에서도 사라지게 된다. 에가시라 유타카는 미나마타병 사태가 터진 이후에 칫소 사의 회장이 되었기 때문에 사태 자체와는 관련이 없지만 이미지 자체가 나빠진 건 사실이다. 그 외에 나루히토 친왕보다 키가 크다는 점, 그녀의 집안이 딸만 그것도 쌍둥이를 낳은 가정 출신이라는 점도 흠이 되었다.
오와다 집안에서도 반대하였다. 일본 황실에 시집가면 엄청 빡센 시월드의 왕따에 혼수[12] 로 집안 기둥뿌리가 뽑히고, 현대 일본 안의 1천년 전 세상이 그놈의 황실이니[13] 누가 그런 시월드에 가는 짓을 하고 싶겠는가? 오와다 본인도 외교관 생활을 하면서 황실의 습성을 옆에서 보아온 인물이다보니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당장 위 문단에 있는 말을 보라. 일본 황실은 남편감보다 키가 크다거나, 딸만 낳은 가정이라거나, 쌍둥이를 낳은 가정 출신이라는 게 '결혼하기 곤란한 흠'으로 취급받는 집구석이다! '''20세기 말에!''' 게다가 오와다 마사코는 성향으로 보나 직업으로 보나, 황실의 보수적인 분위기와는 정말 극단적으로 맞지 않는 사람이었다.
나루히토 황태자는 단념하고 새로운 신붓감을 물색하였으나 결국 마사코를 잊지 못했고, '''"오와다 마사코가 아니면 결혼하지 않겠습니다!!"'''라고 선언한다. 이에 일본 황실은 발칵뒤집어졌으나, 결국 나루히토 황태자의 고집에 항복하고, 마사코는 주변의 엄청난 직간접적 압력에 시달리게 되었다.[14] 나루히토 황태자는 몇 번이나 더 청혼하였고 결국 마사코는 청혼을 받아들이게 된다. 약 7년간 청혼하고 거절당하고 청혼하고를 반복했다고 하니 어찌보면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참고로 나루히토 황태자가 마지막으로 프로포즈할 때 했던 말이 "전력을 다해 당신을 지키겠습니다!" 였다고. 이 말이 언론에 알려지면서 엄청난 유행을 불러왔고, 1990년대 일본 남자들이 프로포즈할 때 가장 많이 쓰는 말이 되었다. (요즘도 쓰는 사람이 있다!!)[15]
1993년 1월 19일 일본 황실이 두 사람의 약혼을 공식적으로 언급하였고, 같은 해 6월 9일 결혼식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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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 기자회견 당시 모습. 마사코는 본래 개성 넘치는 멋쟁이였으나,[16] 이때부터 일본 황실 특유의 촌스러운 패션을 따라야만 했다. 그러나 옷은 바뀌었어도 알맹이는 당장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여자가 감히 자기 주장과 의견을 이야기하였다고, 게다가 신랑감인 나루히토 황태자보다 (불과 19초) 길게 말했다고 비난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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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을 앞두고 있을 무렵, 미혼 여성의 예복인 후리소데를 입은 마사코. 아버지 히사시, 어머니 유미코와 함께.
황태자비가 되면서 외교관을 그만둬야 했다. 외무성 건물에서 곧 황태자비가 될 직장 동료의 성대한 환송식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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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 날 아침, 정든 친정을 떠나는 마사코. 친정에서 기르던 강아지 쇼콜라와 작별인사를 나누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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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에서. 보시다시피 마사코 황태자비가 '''나루히토 황태자보다 키가 더 크다.'''[17] 우익들은 애써 "나루히토 황태자가 2cm 가량 더 크다"고 주장한다는데, 소가 웃을 일이다. 또한 마사코 황태자비의 웨딩드레스는 목 부분이 장미 꽃잎 모양으로 되어 있는데, '''신부가 한 송이 꽃처럼 보이게 하려는 디자인'''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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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 날의 마사코 황태자비.
[1] 2009년 2월 6일 국제사법재판소장으로 선출되었다.[2] 부모의 노력이 있었지만 사실상 교포 내지는 외국인이나 마찬가지였다.[3] 아직 한국에는 진출하지 않은 수도회이다.[4] 이때는 살을 빼기 전으로, 외무고시를 합격한 뒤 살을 빼면서 본격적으로 미모가 드러났다.[5] 참고로 이때가 일본 첫 여성 외교관의 탄생.[6] 하지만 정작 본인이 그러한 일본 내에서의 남녀차별에 따른 피해를 제일 심하게 받았다.[7] 이때도 "오와다 마사코가 나루히토 친왕의 유력한 신붓감 후보라더라"라는 소문이 퍼져, 일본 기자들이 취재하러 옥스퍼드 대학교까지 쳐들어오기도 했다고 한다. 이때 마사코는 정중하게 "나루히토 친왕과 결혼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밝히며 기자들을 돌려보냈다고 한다.[8] 이때 아버지 히사시는 OECD 담당 대사였다.[9] 당시 반도체를 두고 미국과 일본 사이에 상당한 마찰이 있었다.[10] 후안 카를로스 1세의 장녀, 펠리페 6세의 큰누나.[11] 만 31세가 되던 1991년 2월 23일에 황태자로 책봉되었다.[12] 재벌 가문의 딸인 시어머니 미치코 황후는 6t 트럭 3대 분량, 요즘 시세로 3억엔 어치의 혼수를 들고 시집왔다. 가쿠슈인 대학 교수의 딸인 아랫동서 키코 비도 혼수깨나 들고 시집왔는데, 대학 교직원용의 작은 아파트에 살았던지라 혼수품을 보관해 둘 공간이 없어 애먹었다고 한다. 그렇게 바리바리 싸들고 와서도 그녀들은 호된 시집살이를 면치 못했다.[13] 일본 황실에 조금이라도 관심 있는 사람들은 다 알겠지만, 이 말은 절대로 과장이 아니다. 실제로 황족 남자와의 결혼 대상으로 거론되는 상류층 여자들은, 외국으로 도망가거나 서둘러 다른 사람과 결혼해버리는 일이 수두룩하다. (공개적으로는 하지 않지만) 일반인들이 황족들의 좋지 못한 소문을 뒷담화하면서 낄낄거리므로 평생 사생활이 거의 없이 남의 입방아에 오르내려야 하고, 남존여비 의식은 또 어찌나 심한지 현대 한국의 고질적인 성차별도 일본 황실 앞에선 한 수 접어 줘야 한다.[14] 황실의 끈질긴 청혼에 못 이겨 시집와서 모진 시집살이를 겪은 점은, 시어머니 미치코 황후와 비슷하다. 반대로 아랫동서 키코 비는 스스로 원해서 황실로 시집왔다고 하나, 그녀 역시 시집살이를 피할 수 없었다.[15] 언뜻 듣기엔 로맨스한 말로 보이지만 실제론 보수적인 일본 황실과 궁내청을 향한 나루히토 황태자의 선전포고나 다름없는 말이었다.[16] 이 부분은 시어머니 미치코 황후도 마찬가지이긴 했다.[17] 실제로 現 일본 황실에서는 시동생 후미히토 친왕 다음으로 키가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