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나라 이웃나라/문제점/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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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판 - (03)
전면개정판 - (12)
업그레이드판 - (18)
1. 그림체
그림체가 앞에 있는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웨일스의 차이를 설명하는 파트를 제외하고 전부 옛날 그림체를 그대로 썼다. 앞에 있는 파트를 제외하고 그림체가 바뀐 게 없다.
2. 역사
2.1. 고대
- 옛날 유럽 사람들이 영국 너머 서쪽 바다로 진출할 생각을 못했던 것은 지구가 평평하다고 생각해서였다.
- 배움의 기회가 적었던 평민들이야 그랬을 지 몰라도 지식인이나 뱃사람들은 이미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1] 미국 역사편에서는 유럽 사람들이 함부로 서쪽 바다로 가지 못한 이유에 대하여 좀 더 자세하게 설명이 되어있는 편이다. 플랫 에러 참조. 미국편 11권에서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지구는 둥글다는 사실을 주변 사람들한테 듣는다.
- 그렇지는 않았다. 그가 저술한 갈리아 전기에 따르면 브리튼족의 가장 강력한 세력의 부족장인 카시벨라우누스를 필두로 강력한 전차병과 뛰어난 용병술로 카이사르와 훈련이 잘된 로마 정예군도 몇 번 패배할 정도였다. 단지 카시벨라우누스에게 원한을 가진 부족장을 포섭하여 그의 약점을 간파하여 카시벨라우누스가 연속으로 패하자 어쩔 수 없이 카이사르에게 항복하였다. 또한 먼나라 이웃나라에서는 여기서 브리튼족이 완전히 정복당한 걸로 나오지만 실제로는 카이사르 때는 항복만 받고 물러갔으며 완전히 정복한 것은 한 세기 뒤였다. 만화 아스테릭스에서 카이사르가 영국을 1개 마을 빼고 완전히 정복한 모습에서 영향을 받은 듯.
2.2. 중세
- 잉글랜드인의 조상인 앵글과 색슨족은 살인과 전쟁을 밥먹듯 하는 야만족이었으며 스코트 족의 침략을 받은 브리튼 인들의 구원 요청으로 잉글랜드에 건너왔다 배신하고 잉글랜드를 점령했다.
- 앵글과 색슨족은 흔한 게르만족의 일파 중 하나였으며 특별히 이들이 다른 게르만족에 비해 야만적이거나 폭력적이지는 않았다. 물론 현대인이나 비슷한 시기 문명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럴 수 있겠지만, 자신들이 처한 환경 때문에 상무적이고 힘을 중시하는 여타 게르만족의 습성을 따른 것일 뿐 이들만 특별히 미개한 것은 아니다.
또한 이들이 브리튼 족의 구원요청을 받고 왔다 배신때리고 잉글랜드를 점령했다는 것도 역사를 너무 간추려서 서술한 것으로, 앵글로색슨 족이 용병으로 잉글랜드에 건너왔다 토착 세력화하여 결국 지배 민족이 된 수백 년의 과정을 이 모양으로 서술하면 당연히 이들 입장에선 억울할 수밖에 없다.
또한 이들이 브리튼 족의 구원요청을 받고 왔다 배신때리고 잉글랜드를 점령했다는 것도 역사를 너무 간추려서 서술한 것으로, 앵글로색슨 족이 용병으로 잉글랜드에 건너왔다 토착 세력화하여 결국 지배 민족이 된 수백 년의 과정을 이 모양으로 서술하면 당연히 이들 입장에선 억울할 수밖에 없다.
- 그렇게 쉽게 이기지는 않았다. 당시 잉글랜드 왕 해롤드의 주력 군대는 예전 알프레드 대왕이 육성한, 당대 유럽 최강의 중장보병이라 불렸던 허스칼이었다. 또 이들은 언덕과 같은 유리한 위치에서 상당수의 노르만 기사들을 쓰러뜨렸다. 그들이 패배한 진짜 이유는 노르만 군대의 상륙 지점을 예상했는데도 상륙을 못 막고 정부(情婦)에게 깃발 바치느라 시간 낭비한 해롤드의 온갖 삽질 때문이다. 그나마도 삽질을 한건 오히려 약탈에 눈이 멀어있던 노르만군이고 잉글랜드군은 노르만군의 예상보다 일찍 도착했다는 주장도 있다. 실제로 잉글랜드군은 북쪽에서 맹장 하랄 3세 하르드라다가 이끄는 바이킹을 격퇴하고 다시 급히 남부 잉글랜드까지 내려온 거다. 그나마도 거의 이길 수 있었는데 사실상 노르만의 마지막 공세에서 눈먼 화살에 해럴드가 맞으면서 전세가 급반전되었다. 그 외의 패배 원인으로는 노르망디 공 월리엄이 공격하기 전에 노르웨이 왕 하랄 3세 하르드라다가 자기가 잉글랜드 왕 하겠다고 먼저 쳐들어왔던 탓도 있다. 문제는 이를 격퇴하는데 성공했지만, 곧바로 노르망디 공 월리엄이 쳐들어 왔다. (버나드 로 몽고메리 저, 《전쟁의 역사》 등 출처)
- 왕좌에 앉은 존 왕에게 칼을 들고 협박해서 대헌장을 서명받았다?
- 대헌장에 대해 설명할 때 왕좌에 앉은 존 왕을 귀족들이 칼을 들고 협박하는 장면이 있는데, 실제로는 런던 교외로 존 왕이 행차해 대헌장에 서명했다. 그리고 대헌장으로 영국 왕의 권력이 크게 줄어들었다고 서술되 있지만 당시 사상 최강의 교황권을 행사하던 인노첸시오 3세가 대헌장을 무효로 판결했고 이윽고 일어난 내전에서 윌리엄 마셜이 이끄는 왕당파가 반란군을 박살내면서 귀족들은 존 왕에게 감히 대헌장을 지키라고 말할 형편이 되지 않았다. 잉글랜드 왕의 권한이 실질적으로 줄어들었다고 말하기는 어려웠다. 심지어 대헌장도 존 이후에도 한동안 사문화된 수준으로 남아있다가 17세기, 왕과 의회가 충돌하자 재발굴되었다.
- 존이 자신의 조카 아서를 죽인 것에 대해 필리프에게 고발당하고 영토를 빼앗겼다?
- 존이 실제로 아서를 죽였는지에 대해서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최소한 그 사건으로 고발당하지는 않았다. 실제로 존이 필리프 2세에게 법정출두를 거부한 사건은 위그 드 뤼지냥의 약혼녀인 이사벨라 드 앙굴렘의 신부 가로채기와 과도한 로리콘질로 고발된 것이다. 당시 이사벨라 드 앙굴렘은 12살이었으며, 존은 이 왕비에게 하루 종일 매달려 살았다 한다. 그리고 주변 인물들은 존을 "이 로리콘 자식!"이라는 눈빛으로 보았다고 한다.
- 에드워드 1세는 분명하게 헨리 3세의 장남이며 절대로 조카가 아니다. 아들이 없을 경우가 아닌 이상 잉글랜드는 조카가 왕위를 물려받는 경우가 드문 데다가, 애초에 헨리 3세는 에드워드 1세 말고도 랭카스터 가의 에드먼드 크라우치백 같은 유명한 아들도 있었다. 원래 뜻은 크로스드백(crossed-back)으로 이 별명은 그가 제 9차 십자군 원정에 참여할 당시 등에 십자가가 그려진 갑옷을 입었기 때문에 생긴 별명이다. 명백한 오류이다.
-오류계의 전설. 임진왜란으로 비유하자면 일본이 국궁을 앞세워 쳐들어왔으나 조선이 조총으로 반격해서 물리쳤다, 혹은 일본이 거북선을 몰고 쳐들어왔으나 이순신 장군이 안택선을 타고 물리쳤다고 쓴 격이다. 잉글랜드군은 장궁을 썼다. 오히려 프랑스군이 제노바 석궁수를 고용했으나, 크레시 전투와 아쟁쿠르 전투에서 대패했다. 그 원인도 잉글랜드군이 장궁을 사용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아쟁쿠르 전투의 경우, 갑옷을 거의 뚫지 못하는 장궁에 안심한 프랑스의 기사들이 수적 우세를 믿고 공명심에 빠졌다. 이들은 태생적으로 서로 라이벌인 귀족이었기 때문에 팀워크를 갖추기 힘들었다. 때문에 전공을 위해 돌격하다 진창으로 인해 발이 묶여 기동력을 상실하고 살아있는 과녁이 되어버렸고, 잉글랜드군은 아주 쉽게 그들을 화살꽂이로 만들어 버렸다. 그리고 이 오류는 최근 나온 수정판까지 석궁으로 표시되고 있다.
전쟁은, 특히 화약 무기 이전의 전쟁은 무조건 무기 성능에 좌우될 만큼 단순하지 않다. 그리고 해당 페이지의 다음 페이지에는 크레시 전투를 그린 그림이 실려 있는데, 설명과 달리 그림에서는 프랑스군(제노바인 용병이 석궁을 썼는데 그 뒤로 프랑스 기사들이 돌격해 개발살)이 석궁을 쓰고 있고, 영국군은 장궁을 쓰고 있다. 그림과 설명이 앞뒤가 안 맞는다. 개정판에는 '초기엔 잉글랜드군만 석궁을 주로 사용했으나 차츰 프랑스군도 사용함.'이라는 말이 나왔다. 정작 잉글랜드군은 장궁을 들고 있지만... 정말로 석궁 이야기를 하겠다면 "프랑스군으로부터 일부 노획한 석궁을 잘 활용하였음" 이런 식으로 서술하는 게 나을 뻔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렇게나 석궁이 강하면 도대체 잔 다르크는 어떻게 이긴 걸까? 잔 다르크도 인간인 이상 다른 사람들처럼 화살이 꽂히면 죽고 칼에 베이면 죽을 사람인데, 그렇게나 석궁이 강하다면 잔 다르크가 석궁에 맞아 전사해야 했지 않았을까? 실제로 작중에선 잔 다르크가 등장해 이겼다는 말만 나올 뿐 도대체 어떻게 이겼는지에 대해선 전혀 알려주지 않는다. 다만 특이하게도, 작가는 30년전 계몽사의 학습 만화세계사의 감수를 맡기도 했는데, 여기에서는 잉글랜드군이 사용한 것이 장궁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글과 그림으로 담아놨으나, 먼나라 이웃나라만 수없이 개정판이 나오는데도 끝끝네 수정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전쟁은, 특히 화약 무기 이전의 전쟁은 무조건 무기 성능에 좌우될 만큼 단순하지 않다. 그리고 해당 페이지의 다음 페이지에는 크레시 전투를 그린 그림이 실려 있는데, 설명과 달리 그림에서는 프랑스군(제노바인 용병이 석궁을 썼는데 그 뒤로 프랑스 기사들이 돌격해 개발살)이 석궁을 쓰고 있고, 영국군은 장궁을 쓰고 있다. 그림과 설명이 앞뒤가 안 맞는다. 개정판에는 '초기엔 잉글랜드군만 석궁을 주로 사용했으나 차츰 프랑스군도 사용함.'이라는 말이 나왔다. 정작 잉글랜드군은 장궁을 들고 있지만... 정말로 석궁 이야기를 하겠다면 "프랑스군으로부터 일부 노획한 석궁을 잘 활용하였음" 이런 식으로 서술하는 게 나을 뻔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렇게나 석궁이 강하면 도대체 잔 다르크는 어떻게 이긴 걸까? 잔 다르크도 인간인 이상 다른 사람들처럼 화살이 꽂히면 죽고 칼에 베이면 죽을 사람인데, 그렇게나 석궁이 강하다면 잔 다르크가 석궁에 맞아 전사해야 했지 않았을까? 실제로 작중에선 잔 다르크가 등장해 이겼다는 말만 나올 뿐 도대체 어떻게 이겼는지에 대해선 전혀 알려주지 않는다. 다만 특이하게도, 작가는 30년전 계몽사의 학습 만화세계사의 감수를 맡기도 했는데, 여기에서는 잉글랜드군이 사용한 것이 장궁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글과 그림으로 담아놨으나, 먼나라 이웃나라만 수없이 개정판이 나오는데도 끝끝네 수정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2.3. 근세
- 스페인 국왕이 캐서린 왕후를 자신의 딸이라고 표현한다.
- 헨리 8세가 이혼을 신청했을 때, 당시 스페인 왕이 '뭐야? 내 딸을 몰아내려고 해? 고~얀지고! 로마 교황에게 압력을 넣어서 이 이혼을 절대로 인정하지 못하게 하라!'라고 말한다. 당시 스페인이 교황에게 압력을 넣은 것은 사실이다. 당시 로마 교황은 사코 디 로마를 겪은 후인지라 스페인의 눈치를 엄청나게 봐야 했다. 그러나 캐서린 왕후의 부친인 페르난도 2세는 이미 그 시점으로부터 10년도 더 전에 사망했으며, 당시 스페인 왕은 캐서린 왕후의 언니 후아나 1세 여왕의 장남이자, 스페인의 가톨릭 부부왕의 장외손인 카를로스 1세였다. 고로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뭐야? 내 이모님을 몰아내려고 해? 고~얀지고!' 라고 해야 맞다. 그리고 헨리 8세가 캐서린과 결혼하는 것을 마뜩잖아 하는 듯 그려놓았는데 오히려 먼저 청혼한 쪽은 바로 헨리 8세 쪽이다. 처음엔 본인이 반해서 청혼했으나 결혼 생활을 하다보니 앤 불린과 눈이 맞아 이혼해버린 것.[2] 자세한 것은 아라곤의 캐서린 문서을 보자. 이후 먼나라 이웃나라 에스파냐편에서 캐서린은 후아나의 딸로 나와 있다.
- 헨리 8세가 성공회를 창설할 때 가톨릭에 루터회 양념을 치는 걸로 묘사했으나, 실제로 성공회는 칼뱅주의의 영향을 훨씬 더 많이 받았다. 뿐만 아니라 실제 역사에서 헨리 8세와 마르틴 루터는 상당히 험악한 관계였을 뿐만 아니라, 헨리 8세나 성공회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헨리 8세는 로마 교황이 수위권만 부정한 가톨릭 교도라고 봐도 좋을 정도로 신학적으로는 개신교와는 거리가 멀었고, 로마 교회로부터 영국의 교회를 '분리'시키는 역할 정도를 했다고 보는 게 적절할 것이다. 즉, 후에 칼뱅주의의 영향을 받아 성공회가 개신교적인 성격을 띄게 되는 것도 엄밀히 말하면 헨리 8세의 의도라고 보기는 힘들다.
- 클레페의 앤과 이혼한 이유로 그녀가 못생기고 무뚝뚝해서 헨리가 실망했기 때문이라고 나오는데, 실제로는 더 복잡한 정치적 이유가 있다. 앤과의 결혼은 먼나라 이웃나라에서도 잠시 언급한 독일 개신교 계열 제후들과의 문제로 인한 정략결혼이었기 때문이다. 이 부분이 결혼 후 어긋나면서 더 이상의 결혼 생활을 포기하게 된 것. 게다가 앤의 외모는 실제로는 그다지 못생기지 않았고 무난한 수준이라는 평가가 많다. 성품도 무작정 무뚝뚝해서가 아니라 예술이나 학문과 같은 지식이 부족하고 정숙하고 얌전하기만 한 편이어서 헨리 8세가 따분하게 여기고 실망한 것에 가깝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를 참조.
- 캐서린 파는 헨리 8세보다 오래 살았고 사별한 후 세 번이나 더 재혼했다고 되어 있으나, 실제 캐서린 파는 헨리 8세가 죽은 지 2년을 채 못 넘기고 사망하였고, 헨리 8세가 죽은 후 재혼한 것은 맞으나 한 번 뿐이었다.
- 블러디 메리 부분 관련
- 메리 1세가 신교도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던 건 사실이지만 신교도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하고 초법적인 수단들을 남용한 것은 아니라고 한다. 즉, 논란의 여지가 있다. 자세한 것은 메리 1세 문서 참고.
- 114페이지에서 펠리페 2세를 펠레페라고 썼고 118페이지에서 엘리자베스1세를 엘리자베드 1세라고 썼다.117페이지에서는 메리 1세가 구교 복구 정책을 편 것을 1547년이라고 잘못 썼다.
- 메리 1세가 펠리페 2세를 부군으로 맞이하려 할 때 영국인들이 국제결혼 반대니 영국 남자는 다 죽었냐느니 등 시위를 벌이는데 실제로는 유럽 왕가들은 거의 다 외국의 왕족들과 결혼을 했고 당장에 메리 1세의 어머니는 에스파냐 공주였다. 후에 나오는 찰스 1세의 아내도 프랑스 공주였고 때문에 "에스파냐인 반대!" 라고 외쳤다면 모를까 외국인과 결혼하지 말라는 말은 시대적인 사정상 나오기 어려운 말이다.
- 당시 잉글랜드 연합해군의 지휘자는 찰스 하워드였고, 드레이크는 부사령관이었을 뿐이다. 더욱이 드레이크는 약탈에 눈이 먼 나머지 영국 함대 전체를 위험에 빠뜨리거나 명령에 불복종하는 등의 이유로 전투 중에 해임당한다. 또한 당시 양측이 사용한 화약 무기의 질은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당시 대포는 독일이나 이탈리아 지방 외에는 신뢰할 만한 수준의 무기를 만들 기술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부존 자원의 문제도 있다. 당시 가장 신뢰성이 높은 포는 청동제였는데, 독일이나 이탈리아는 구리 자원이 풍부하거나 수입처가 많고 종(교회 종도 청동으로 만듦)만드는 장인이 많아서, 이들 국가는 종 만드는 장인들을 금방 대포 장인으로 전환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외의 국가들은 상대적으로 질이 떨어지는 연철제 포를 주로 운용했다.
그런데 잉글랜드, 스웨덴, 네덜란드 등이 주조제 대포를 양산하면서 선박의 대포 보유 수가 점점 늘어나게 되었다. 문제는 스페인은 자체적으로 청동 대포를 만드는 기술도 부족하고, 구리나 철강 자원도 많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게다가 원래 스페인의 주철 대포 수입처는 당면한 적국인 잉글랜드와 한참 독립 전쟁으로 싸우고 있던 네덜란드였다! 이러니 스페인이 잉글랜드에 비해 화력이 열세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절대적인 열세는 아니었기 때문에 위와 같은 서술은 문제가 있다. 실제로 가장 중요한 문제는 대포의 운용 방식이었다. 스페인은 화력 중시, 잉글랜드는 사거리 중시 경향을 보였다. 게다가 스페인은 여전히 지중해식 근접전을 선호해서 병사 수는 상대적으로 더 많고 대포 수는 더 적었다.
결정적으로 당시 기록을 검토하면 양측에서 포격전으로 완파되거나 반파된 함정은 6척을 넘지 못한다. 그것도 모두 낡은 선박들이었다. 왜냐하면, 파열탄이 개발되기 전까지 상태 양호한 목선을 단순히 돌 or 쇳덩이를 발사하는 대포로 격침시키는 건 힘든 일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스페인은 잉글랜드 함대와의 결전을 최대한 회피하면서 네덜란드로 가서 거기 육군을 실어 오는 게 목적이었고, 잉글랜드 측도 스페인 아르마다와 제대로 붙을 엄두를 내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또 아르마다가 괴멸적 타격을 입은 직접적인 이유는 잉글랜드군의 화공이 아니다. 칼레 전투에서 화공으로 스페인군의 공격이 실패하자, 해류와 바람의 방향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스코틀랜드를 돌아 귀환하다가 함대의 대부분이 폭풍우로 박살났다. 이 점이 신판에서 언급되어 있기는 하다.
이 부분은 부존 자원의 문제도 있다. 당시 가장 신뢰성이 높은 포는 청동제였는데, 독일이나 이탈리아는 구리 자원이 풍부하거나 수입처가 많고 종(교회 종도 청동으로 만듦)만드는 장인이 많아서, 이들 국가는 종 만드는 장인들을 금방 대포 장인으로 전환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외의 국가들은 상대적으로 질이 떨어지는 연철제 포를 주로 운용했다.
그런데 잉글랜드, 스웨덴, 네덜란드 등이 주조제 대포를 양산하면서 선박의 대포 보유 수가 점점 늘어나게 되었다. 문제는 스페인은 자체적으로 청동 대포를 만드는 기술도 부족하고, 구리나 철강 자원도 많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게다가 원래 스페인의 주철 대포 수입처는 당면한 적국인 잉글랜드와 한참 독립 전쟁으로 싸우고 있던 네덜란드였다! 이러니 스페인이 잉글랜드에 비해 화력이 열세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절대적인 열세는 아니었기 때문에 위와 같은 서술은 문제가 있다. 실제로 가장 중요한 문제는 대포의 운용 방식이었다. 스페인은 화력 중시, 잉글랜드는 사거리 중시 경향을 보였다. 게다가 스페인은 여전히 지중해식 근접전을 선호해서 병사 수는 상대적으로 더 많고 대포 수는 더 적었다.
결정적으로 당시 기록을 검토하면 양측에서 포격전으로 완파되거나 반파된 함정은 6척을 넘지 못한다. 그것도 모두 낡은 선박들이었다. 왜냐하면, 파열탄이 개발되기 전까지 상태 양호한 목선을 단순히 돌 or 쇳덩이를 발사하는 대포로 격침시키는 건 힘든 일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스페인은 잉글랜드 함대와의 결전을 최대한 회피하면서 네덜란드로 가서 거기 육군을 실어 오는 게 목적이었고, 잉글랜드 측도 스페인 아르마다와 제대로 붙을 엄두를 내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또 아르마다가 괴멸적 타격을 입은 직접적인 이유는 잉글랜드군의 화공이 아니다. 칼레 전투에서 화공으로 스페인군의 공격이 실패하자, 해류와 바람의 방향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스코틀랜드를 돌아 귀환하다가 함대의 대부분이 폭풍우로 박살났다. 이 점이 신판에서 언급되어 있기는 하다.
- 진실은 당시 감자가 수입되고 난 직후에는 일반 채소처럼 이파리만 먹는 줄 알아서 저렇게 감자 들고 의문을 품는 평민은 없었다. 게다가 왕과 귀족들이 감자 구이 파티를 열며 극찬했다고 써있는데, 애초 감자는 널리 퍼지지도 않았다가 롤리라는 귀족이 처음 먹기 시작하며 귀족들 사이에서 퍼진 것이며, 그마저도 먹는 사람은 드물었다. 그리고 도중에 감자 파티에서 "달콤한 게 입에 착착 붙네!" 라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당시 감자는 그냥 직수입한 생감자라서 당분은 없고 크기도 작아서 저런 말이 나올래야 나올 수가 없다. 오히려 엘리자베스 1세는 감자를 먹어 보란 말에 어떻게 그런 걸 먹냐며 질색했다.[3] 명백한 고증 오류. 다만, 감자 도입 당시 평민들이 감자에 대해 큰 거부감을 가진 것은 사실이고, 감자의 식용이 지식인이나 귀족의 주도로 보급된 것은 사실이니 이 부분은 그냥 농담이나 드립 정도로 해석해도 상관없는 부분이지, 딱 잘라 틀렸다고 말하기는 좀 모자라다.
- 제임스 1세는 어머니, 메리 여왕의 사형에 찬성했다?
- 속내는 그랬을 것이라 생각되지만 공식적으로는 반대 입장을 내었다.
- 철기대에 대한 묘사
기병대인 철기대를 보병으로 묘사했다. 그나마 업그레이드판에서는 기병대로 고증한 삽화가 들어가기는 했다. (18)
제임스 1세가 왕권신수설을 주장하여 의회와 갈등한 건 사실이지만 돈쓰기를 좋아하여 재정을 파탄시킨 건 낭설이다.[4] 전임 엘리자베스 1세보다 못해도 통치는 무난했으며, 제임스 1세가 스코틀랜드 동군연합 군주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때문에 전임 군주인 엘리자베스 1세보다 통치 난이도가 높았다. 왜냐면 잉글랜드보다 스코틀랜드의 정치가 더 개판이었고 두 나라 사이도 개판이었다.[5] 사실 외교로 스페인과 관계를 회복시키고 프랑스와의 정략결혼으로 동맹을 맺어 잉글랜드의 국제적 정세를 안정시켰고 전쟁이 안 일어나게 하였다. 그래서 명군은 아니지만 자신들에게 평화를 가져다 준 제임스 1세가 죽을 때 백성들은 그의 죽음을 슬퍼하였다고 한다. 오히려 찰스 1세가 암군이면 암군이지. 더욱이 제임스 1세는 킹 제임스 성경을 편찬하기도 했다.
- 제임스 1세는 가톨릭 국가인 스코틀랜드 출신 왕이었음에도 가톨릭을 탄압했다
이 시점의 스코틀랜드는 이미 개신교로 전향한 나라였으며, 제임스 1세 역시 이미 개신교도였다. 따라서 잉글랜드의 가톨릭 교도들이 제임스 1세에게 기대를 품었다가 배신당했다는 서술은 명백히 틀린 것이다. 다만 제임스 1세의 어머니인 메리 여왕은 가톨릭과 연이 깊기는 했다.
- 실제로는 찰스 2세도 왕이 되자마자 크롬웰을 지지하며 부왕 찰스 1세의 처형에 데 앞장선 크롬웰의 추종자 26명을 사형시켰다. 그러나 의회파 인사들과 크롬웰 치하에서 권력이 약했던 크롬웰 정권 시대의 인사들은 대부분 살아남았거나 사형이 아닌 징역형과 귀족 작위 박탈과 같은 낮은 처벌을 받았다. 사실 이 대목도 찰스 2세가 크롬웰을 부관참시했고, 크롬웰의 열렬한 추종자들을 처형했다는 것을 크롬웰과 추종자들을 부관참시했다고 뭉뚱그려 표현한 것에 가까워서 딱 잘라 틀렸다고 하기에는 좀 애매하다.
- 찰스 2세는 크롬웰의 독재에 질린 백성들의 지지를 등에 업고 독재 정치를 했다.
- 찰스 2세가 크롬웰의 독재정치에 질린 백성들의 지지를 받아 왕위에 올랐고, 의회와 어느 정도는 대립한 것까지는 사실이지만, 찰스 2세는 부친인 찰스 1세와는 달리 의회와 협력해서 정치를 했다.
앞선 제임스 1세처럼 전통적인 역사관을 그대로 반영한 먼나라 이웃나라의 한계점으로, 오늘날의 사관에 따르면 제임스 2세는 폭군이 아니라 매우 유능하고 근면한 군인이요 행정가였으나 정치가로서는 한계가 있었던 인물 정도로 평가받고 있다. 분명 좋은 의도를 가지고 합리적으로 나라를 운영하였지만 이를 위해 반대파를 설득할 정치적 능력은 모자랐기 때문에 의회와의 대립이 심해져 몰락했다는 것. 가톨릭을 부활시키려는 시도도 본인이 가톨릭 교도였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가톨릭을 합법화하여 성공회와의 공존을 꾀했기 때문이었다. 만약 가톨릭만 고집했다면 토리당의 지지도 못받고 왕위도 못 물려 받았을 것이다. [6]
- 윌리엄 3세가 단순히 여왕의 남편이라서 잉글랜드 왕이 된 것처럼 되어 있는데, 사실 윌리엄 본인도 잉글랜드 왕위 계승권을 갖고 있었다. 윌리엄 본인이 찰스 1세의 외손자로, 모친인 프린세스 로열 메리가 찰스 1세의 장녀이다.[7] 참고로 프린세스 로열 메리는 찰스 2세의 여동생이자, 제임스 2세에게는 누나로, 제임스 2세는 자신의 외조카를 사위로 맞이한 셈. 더욱이 윌리엄이 제임스 2세는 나의 장인이자 내 아내의 아버지라고 하는데, 거기에 나의 외삼촌이라는 말이 추가가 되어야 하는 것. 제임스 2세 역시 감히 조카가 삼촌을, 사위가 장인을 노리고 침임해?라는 식으로 말했어야 한다. 애초에 유럽에서는 단순히 왕의 사위이거나 남편이라고 왕이 될 수 있지도 않았다. 유럽에서는 대체적으로 여계계승도 가능했지만[8] 반면에 동아시아의 '서양자 제도' 같은건 없었기 때문
- 왕 꾸어가기 챔피언?
조지 1세 즉위 부분에서 사람 두 명이 "저 나라는 왕 꾸어 가는데 챔피언이야!", "네덜란드 사람에 이어 이번엔 도이치 사람... 쯧쯧쯧" 하는 장면이 있는데 이는 유럽의 왕위계승에 대해서 잘 모르고 나오는 얘기다. 동아시아에서는 자국의 왕위가 타국에게 상속으로 넘어가는 일은 없지만 서양에서는 그런 일이 흔했다. 결혼을 타국의 왕족끼리 하고 대체로 왕비에게서 나온 자식에게만 왕위계승권을 주다보니 왕위계승권을 쥔 사람의 상당수는 타국 혈통이 섞인 경우가 많았다. 당장에 스페인 왕위계승전쟁만 해도 합스부르크 왕가, 부르봉 왕가가 스페인의 왕위를 놓고 충돌한 전쟁이며 비록 이 전쟁 터지기 전에 죽었지만 바이에른 왕가 출신의 계승자도 있었다. 때문에 자국의 왕위가 남에게 넘어가는건 흔한 일이었다. 단 예외적으로 프랑스 같은 경우에는 살리카 법으로 부계계승만 인정되고 또 그게 안정적으로 이어져서 왕조의 혈통이 끊기면 그 왕조의 방계가문이 잇는게 보편적이었다.
- 조지 1세가 독일어만 하고 영어를 못해서 영국의 국정을 내팽겨쳤다
당시 유럽의 공용어가 프랑스어임을 부연 설명하지 않고 농담으로 넘어간 것으로, 신하들과 의사 소통에는 아무 지장이 없었다. 또 신하들과는 라틴어로 겨우 소통했다고 하는데, 라틴어보단 앞서 말했다시피 프랑스어로 소통이 가능했기 때문에[9] 의사소통에는 전혀 지장이 없었다. 오히려 조지 1세는 반백 평생을 하노버 선제후로 살아왔기 때문에 신하들이 궁전에 들어와서 알현하는 독일식 궁정 통치에 익숙해서 '감히 무엄하게' 왕이 신하들 만나러 출근하러 가는 영국의 의회 시스템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왕의 대리인 겸 연락책 신하를 보낸 것. 태생부터가 독일 출신이었기 때문에 영국보다는 독일 내 하노버 영토에 관심을 더 많이 기울였다.[10] 조지 1세는 하노버 선제후령의 군주로서는 여러 전쟁에 직접 참전하여 공을 세우는 등 하노버의 국력을 신장시킨 명군이었다. 다만 명예 혁명 이후 국왕의 권력이 제한되었던 영국에 비해 하노버에서는 좀 더 군주의 직접적인 권한이 강했고, 직접적인 통치권이 강했던 하노버에서의 통치에 더 큰 흥미를 느낀 것으로 보인다.
- 말도 안 되는 소리.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웨일스는 이때부터 모두 영국 단일 정부와 의회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스코틀랜드와 웨일스, 북아일랜드에 독자적인 자치정부와 의회의 설립이 허용된 시기는 영국이 만들어진 후 292년 뒤인 1999년이다. 이마저도 영국 중앙정부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취소할 수 있다. 정치 자체가 이미 통합되어 있기 때문에 간섭을 안 한다는 말은 성립 자체가 불가능하다. 이는 미국의 연방제와 확연하게 다른 점이다. 개정판에선 다리엔 사건[13] 으로 두 나라가 통합하게 됐다고 앞에서 설명하고 이 부분은 앞에서 얘기했지? 라고 삭제됐다.(12)
- 어머니처럼 인자한 빅토리아 여왕?
- 실제로는 인자한 성격은 아니었다. 오히려 (사정이 있긴 했지만) 완고하고 고집이 세고 독단적인 성격이었다. 이런 성격은 오히려 남편 앨버트 공 쪽이 더 가까웠다.
3. 기타
- 구판에선 잉글랜드 왕국을 영국이라고 했지만, 개정판에선 영국은 네 지방이 통합하여 생긴 나라라는 내용이 들어간 이후 잉글랜드 왕국으로 바뀌었다.
- 개정판에선 영국이라는 명칭은 잉글랜드에서 따왔기에 영국인에게 영국인이라고 하면 잉글랜드 사람으로 알아듣고 브리튼 섬 사람은 맞지만 영국인은 아니라며 화를 낸다고 썼다. 사실 영국은 한국어로 United Kingdom을 의미하기에 영국인이라는 단어는 브리튼 섬 사람이라는 뜻이다. 영국인을 잉글랜드인이러고 했어야 자연스럽다. 그러면서 위에 서술했듯 영국이라고 쓰던 잉글랜드 왕국은 잉글랜드 왕국으로 바뀌었다(...).
- 개정판에서는 영국 사람에게 잉글랜드라고 하면 안 된다고 해 놓고선[14] 정작 책 표지 등에는 잉글랜드(England)라고 적혀 있다. 업그레이드판에는 United Kingdom으로 수정.(18)
- 2003년 편 까지 있었던 북아일랜드 파트에서 북아일랜드 200만명중 "중립"은 500만명 밖에 안 된다고 써놨다!? 21세기판은 5백명으로 수정됐고 신판에선 삭제.(03,12)
- 25페이지에 대영제국에 대해 설명하는 파트에서 영국 국기랍시고 파란색도 없는 전범기 비스무리한걸 그려놨다. 대충 유니언 잭 항목의 맨 마지막에 있는 이렇게 생긴 유니언 잭이 정사각형 모양으로 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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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점을 인식했는지 업그레이드판에는 잉글랜드 깃발로 나왔다만... 대영제국과는 영 안어울린다. 덤으로 여기 나오는 프랜시스 드레이크는 실제 모습으로 나온 역사 파트와 모습이 다르다.
문제점을 인식했는지 업그레이드판에는 잉글랜드 깃발로 나왔다만... 대영제국과는 영 안어울린다. 덤으로 여기 나오는 프랜시스 드레이크는 실제 모습으로 나온 역사 파트와 모습이 다르다.
- 영연방을 설명할 때 영국과 영연방이 사용하는 '영어'는 미국에서만 쓰는 '미국어'보다 영향력이 크다고 나왔다. '영국식 영어'와 '미국식 영어'로 해야 자연스럽다. (12)[15]
- 영국은 축구경기와 럭비경기 땐 네지방이 따로 나간다는 장면에서 영국의 정식 국명을 'The United Kingdom of the Great Britain and Northen Ireland'가 아니라 북아일랜드를 뜻하는 and Northen Ireland를 빼먹었다. G를 소문자 g로 쓴건 덤.(12)
- 게르만족의 침략 당시 프랑스의 켈트족은 브르타뉴지방으로 갔다는데, 사실 갈리아인이 사용하는 갈리아어가 속한 대륙켈트어군은 사멸했고 영국 제도에서 쓰는 도서켈트어군만 살아남았는데 브르타뉴 지방은 도서켈트어군에 속하는 브르타뉴어를 쓰는 영국 브리튼인들이 앵글로색슨 침략 때 정착한 곳으로 브르타뉴라는 이름도 브리튼에서 따온 것이다. 아스테릭스에 등장하는 프랑스의 갈리아인(극중에선 골족)은 현재 사멸한 대륙켈트인이고, 특이한 말투를 쓰는 영국의 브리타니아인(극중에선 브르통족)은 현재도 남아있는 도서켈트인이다.(12)
- 용인발음을 "상류층이 사용하는 옥스퍼드 영어"라 서술했다. 물론 옥스퍼드 영어라 불리기도 한다. 그러나 용인발음(Received Pronunciation; 줄여서 RP)이라 지칭하는 것이 보통이며, 아니면 "Standard British", "BBC English", "Upper-class British", "Queen's English"혹은 속어로 "posh accent"라 하는 정도가 올바른 명칭이다. 그리고 귀족이나 왕족같은 상류층뿐 아니라 평민 출신 정치인들과 BBC 방송국의 앵커들도 RP를 사용하며 (물론 그들간에도 차이가 은근히 있다), 굳이 옥스퍼드같은 퍼블릭 스쿨이 아니더라도 각종 서적이나 오디오북 등등으로 RP 억양을 배울 수 있는 방법은 대중화되어 있다 (물론 이런 경향은 디지털 매체가 발달한 현대에 와서 높아진 감이 적잖아 있다)
- 럭비를 두고 도이칠란트 등 북쪽 촌사람들은 럭비가 뭔지도 모르고 럭비는 문화인이나 하는 경기 라고 하는데 틀린 말이다. 애초에 럭비를 한다고 문화인이라는 것도 아니고 독일 역시도 현 상황에서는 유럽 최대 강국 중 하나라는걸 생각해 보면 독일인을 두고 촌사람이라 하기도 뭣하다. 결정적으로 럭비는 이런저런 요소로 인해서 타국으로 퍼져나가기 어려웠을 뿐이었다. 자세한건 럭비 문서 참조
- 영국의 밀크티 문화를 소개하면서 만약 중국인들이 밀크티를 본다면 기겁을 할 것이라는 투로 써놨는데 오히려 밀크티는 중국에서 여러 개의 밀크티 체인이 생겨날 정도로 큰 인기를 끌고 있다. 게다가 이걸 단순히 이 책이 나온 1980년대엔 중국인들에게 밀크티 문화가 익숙하지 않아서 그렇게 썼다고 하기에도 뭐한 것이 이미 1980년대 이전부터 중화권인 홍콩이나 대만, 싱가폴등에서는 밀크티 문화가 자리잡혀 있었고, 버블 밀크티 같은 것들도 1990년대부터 이미 중국에서 인기를 끌었다 그리고 끓인 차에다 우유를 쳐서 먹는다는데 틀렸다. 밀크티는 홍찻잎에다 우유를 섞어 우려낸 것이지 차에다 우유를 섞어 먹는게 아니다.
[1] 콜럼버스의 항해가 처음 실행 전에 사람들의 의심을 받아다는 것도 사람들이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몰라서가 아닌 콜럼버스의 계획이 너무나 엉망이었기 때문이었다. 콜럼버스는 지구의 둘레를 현실보다 더 적게 계산했는데 사람들은 지구가 콜럼버스가 계산한 것보다 크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만약 아메리카 대륙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콜럼버스는 망망대해에서 선상반란으로 죽든 굶어죽든 하여 완전히 실패했을 것이다.[2] 이것도 있고 책에서 나온대로 아들 문제도 있었다.[3] 뭐, 바로 다음 컷에 남성 귀족이 "떽! 짐더러 그런 저질 음식을 먹으란 말이냐?"라고 말하긴 한다만... 복장을 보면 현대의 양복이며 이원복의 대사도 "요즘 시대엔 보기 어려운 정말 옛날 얘기지...."이다.[4] 실제로는 제임스 1세 시기의 난감했던 재정상태는 먼나라 이웃나라에서 나온 것과는 달리 엘리자베스 1세의 탓이 컸다. 책에서는 엘리자베스 1세가 검소한 군주로 묘사되나 반만 맞는 얘기로 엘리자베스 1세는 분명 많은 부분에서 검소하기는 했지만 보석이나 드레스 등에는 엄청난 돈을 쏟아부었다(...) 이 때문에 책에서 제임스 1세를 두고 보석을 좋아하는 군주라고 말했지만 실은 엘리자베스 1세에게 해야 맞는 말이다.[5] 하지만 적어도 제임스 1세는 이로 인한 문제는 일으키지 않았는데 예시로 스코틀랜드에 비교적 자주자주 찾아갔고 자신이 어릴 적 자신을 놓고 싸움을 벌이던 귀족들과도 잘 지냈다. 반면 아들인 찰스 1세는 왕이 된지 9년 뒤에야 스코틀랜드를 방문했고 그것도 모자라 스코틀랜드를 폄하했다. 게다가 나중에는 스코틀랜드에 영국 국교회를 강요했다가 잉글랜드 내전발발을 맞았고 여기서 패배하고 스코틀랜드로 망명했다가 스코틀랜드에 의해서 잉글랜드로 팔아넘겨진다(...) [6] 윌리엄 3세가 침공했을 때 제임스 2세가 군대를 보내 콩가루로 만들라고 하자 신하가 "군대가 있어야 콩가루건 미숫사루건 만들죠..."라는 대사가 있고, 후자는 다급해진 제임스 2세가 앤 공주를 달래자 앤이 퉁명스럽게 한 대답이다 [7] 즉, 윌리엄과 메리는 내외종 사촌지간.[8] 프랑스 등 살리카 법 채택 국가들은 예외[9] 왜 하필 프랑스어냐고 하겠지만 당시에는 유럽 상류층에서는 프랑스어가 공용어다시피 했다.[10] 반면 제임스 1세는 본디 스코틀랜드 군주였음에도 잉글랜드 왕이 된 후 잉글랜드로 옮겨 살았고 잉글랜드식 통치도 좀 받아들였다. 대신 고향인 스코틀랜드에 자주 방문하기는 했다.[11] 현재 가치로 776억원이나 되는 돈을 퍼부었다.[12] 실패의 원인은 애초 다리엔 지역은 스페인 땅이었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전염병까지 돌았다. 결국 이주민들이 떼몰살을 당해 실패 애초 다리엔 지역은 지금도 오지로 남아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성공할 리 없는 계획이었겠지만[13] 스코틀랜드가 7년동안 흉년을 맞는 등 경제가 위태위태하자 이를 타개하기 위해 다리엔 갭을 식민지화하려다가 쫄딱 망한 사건으로 당시 스코틀랜드는 불경기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어마어마한 액수의 돈을 퍼부었음에도[11] 실패하자[12] 결국 잉글랜드가 스코틀랜드가 진 빛 등을 모두 감당해주는 대가로 잉글랜드와의 통합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14] 영국은 네 지방이 통합하여 생겼기 때문.[15] 미국편 11권에서 "아니, 미국어라고 해야 할까?"라는 대사가 나왔지만 이건 미국의 국제 영향력이 커서 그런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