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선

 





'''역임한 직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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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회의원 (서울 구로구 을)'''
제17대
김한길

'''제18~20대
박영선'''

제21대
윤건영

'''대한민국 국회 법제사법위원장'''
제18대 후반기
우윤근

'''제19대 전반기
박영선'''

제19대 후반기
이상민
'''대한민국 국회 사법개혁특별위원장'''
제20대 전반기
정성호

'''제20대 후반기
박영선'''

제20대 후반기
이상민



'''민주통합당 정책위원회 의장'''
''창당''

'''초대
박영선'''·홍종학

제2대
주승용·홍종학






김은주

'''박영선'''

최율미


-

<colbgcolor=#3634b3> '''박영선''' (1985)

정혜정
오은실

'''박영선''' (1993-1994)

황선숙
'''토요일 여성 앵커'''
-

'''박영선''' (1993~1995)

이주연
정혜정

'''박영선''' (2000~2001)

김수진




'''대한민국 제2대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박영선
朴映宣 | Park Young-sun
'''
<colbgcolor=#003764><colcolor=#ffffff> '''출생'''
1960년 1월 22일 (65세)
경상남도 창녕군 남지읍 신전리#
'''거주지'''
서울특별시 구로구 신도림동 신도림삼성쉐르빌[1]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연희동 연희로 27나길[2]
일본 도쿄 미나토구 아카사카[3]
'''본관'''
반남 박씨
'''현직'''
세계경제포럼 선진제조 및 생산 이사회 이사
'''재임기간'''
제2대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2019년 4월 8일 ~ 2021년 1월 20일
'''서명'''
[image]
'''외부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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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3764><colcolor=#ffffff> '''형제자매'''
2남 1녀 중 첫째
'''배우자'''
이원조
'''자녀'''
슬하 1남 (1998년생)
'''학력'''
수도여자고등학교 (졸업)
경희대학교 (지리학 / 학사)[37]
서강대학교 (언론학 / 석사)
'''종교'''
개신교천주교 (세례명: 에스테르)[38]
'''신체'''
170cm , O형
'''소속 정당'''

'''의원 선수'''
'''4'''
'''의원 대수'''
'''17''', '''18''', '''19''', '''20'''
'''경력'''
MBC 기자
열린우리당 선거대책위원회 대변인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위원장[39]
새정치민주연합 원내대표
새정치민주연합 국민공감혁신위원장
더불어민주당 재벌개혁특위원장
국회 사법개혁특별위원장
중소벤처기업부장관
대통령직속 국가균형발전위원회 당연직위원

1. 개요
2. 생애
2.1. 학창 시절
2.2. MBC 시절
2.3. 국회의원 시절
2.3.1. 초 재선 시절
2.3.2. 3선 이후
2.3.2.1. 최고위원직 사퇴
2.3.2.2. 문재인과의 갈등
2.4.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4. 여담
5. 소속 정당
6. 선거 이력
7. 저서
8.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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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기자 출신 정치인.
언론인 출신 정치인 중 가장 인지도가 높은 인물 중 한 명으로, 민주당에서 가장 인지도가 높은 여성 정치인 중 한 명이다. 대한민국의 제17~20대 국회의원이며, 지역구는 서울 구로구 을이었다.
본래 MBC 기자출신이며, 학사는 지리학이지만 1999년 서강대학교에서 언론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기성 세대에게는 언론인 출신 이미지가 강한 정치인 중 하나이다.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열린우리당 비례대표)으로 당선된 이후 민주당 정책위의장과 최고위원, 제19대 국회 법사위원장, 더불어민주당 재벌개혁특위 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지난 대선에서는 문재인 캠프 선거대책위원회 공동선대위원장으로 활약했다.
특히, 지난 2013년 법사위원장 시절 징벌적 손해배상 확대, 일감 몰아주기 규제 등 경제민주화 관련 법안을 통과시키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등 중소기업계와도 인연을 갖고 있다. 또 지역구인 구로구 을의 경우 서울 최대 중소기업벤처기업들이 밀집해 있는 디지털단지가 있어 중소 및 벤처 업계에 대한 이해도가 나름 높은 편이고 2011년 중소기업과 골목 상권을 지키는 의원 모임에서도 활동한 경력이 있어 중소벤처기업부의 초대 장관으로 하마평에 오르기도 했던 인물이다.
비록 문재인 정부의 첫번째이자 초대 중기부 장관 자리는 홍종학에게 내주었지만 그 이후에도 국회 사법개혁특별위원회 위원장직을 맡으며 굵직한 역할을 이어갔고, 2019년 4월 제2대 중소벤처기업부장관으로 임명되었다.

2. 생애



2.1. 학창 시절


1960년, 경상남도 창녕군 남지읍 신전리에서 학교 교사이신 부모님의 슬하 2남 1녀 중 첫째로 출생했다. 열 살 무렵 혹은 세 살 무렵 서울로 상경했고, 당시 학비가 비싸서 부자들이 다니기로 유명했던 사립 예일초등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덕성여자중학교수도여자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박영선은 본인의 학창 시절에 대해 "학창 시절 놀기도 많이 했고 공부도 잘 못했지만 결국 역전 드라마를 쓰고 있는 게 내 인생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한 바 있다.
1978년 3월 상명여자대학교 불어교육학과에 입학하여 1년간 다니다가 1979년 3월 경희대학교 지리학과(78학번)[4]에 편입하여 1982년 2월 졸업했다. 1979년 4중창단으로 대학가요제에 나온 적이 있다고 한다.
박영선은 대학 시절 명문대에 입학하지 못했다는 사실로 큰 좌절감에 싸여 지낸 시기였다고 말한 바 있다. 아버지는 "그런 학교 다녀서 뭐하냐"며 입학금만 내주고 등록금도 내주지 않았다고 한다. 훗날 정계에 진출했을 때, 대학 시절 학생운동을 하지 않은 원죄(?)에 대해서 아버지가 반대해서 하지 못했고, 그 빚을 갚기 위해 정계에 투신했다고 말한 바 있다.
문재인이 대통령에 당선되고 나서는 대통령과 동문임을 유독 강조하고 있다. 서울특별시장 선거를 준비하면서는 자신의 전공분야인 도시인문지리학도 부각하고 있다.

2.2. MBC 시절


'''△ 박영선과 손석희가 MBC 뉴스를 함께 진행할 때 사진'''
1983년에 MBC에 아나운서로 입사했으나 곧 보도국으로 발령이 나서 기자로 전직했고 입사 5개월 만인 1983년부터 MBC 뉴스데이트를 맡았다. 1984년 10월부터 1985년까지 여기는 MBC의 진행을 맡았다. 1985년에 결혼을 하고 나서는 미국으로 잠깐 유학을 갔다가[5] 1987년부터는 귀국해서[6] 기자로 일했고, 90년대 초반에 MBC 마감뉴스의 앵커직을 맡았다.
그리고 1993년부터 1995년까지 MBC 뉴스와이드의 앵커직을 맡았다가 미국 LA 특파원으로 발령이 났고, 1997년에 다시 귀국하여 MBC 뉴스센터 500의 진행을 맡았다가, 1998년 9월 19일부터 1999년 12월 26일까지 MBC 뉴스데스크의 주말 앵커직을 맡았으며, 2000년에 피자의 아침 - MBC 아침 뉴스 앵커 직을 맡았다. 2000년대 초에는 '경제매거진'의 진행을 맡으면서 MBC 보도국 경제부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LA특파원 시절에는 미국 영화인협회 등록 외신기자로 아카데미상 시상식을 취재한 적이 있었는데 뉴스데스크 40주년 특집 방송에서 배우와 유명 감독들을 대면하면서 알게 된 그 이면을 소개했다.
증권시황을 보도하는 모습[7]
1999년에는 방송장비 고장으로 방송사고를 겪기도 했다. 옆의 남성 앵커는 권재홍MBC플러스 사장이다.

2.3. 국회의원 시절


헌정사상 첫 여성 대한민국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위원장과 첫 여성 국회 교섭단체 원내대표를 맡았다는 기록이 있다.[8]

2.3.1. 초 재선 시절


2004년 초에 MBC에서 퇴사하고 열린우리당에 입당하였고 그해에 공천을 받고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열린우리당 비례대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통합민주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구로구 을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본래 박영선은 비례대표였고 16~17대 국회 당시에는 김한길의 지역구였던 것이 김한길이 대선을 앞두고 벌인 탈당 후 신당창당 등을 겪고 정계은퇴를 하면서 박영선이 이 지역구를 받게 된 것이다. 또한 18대 총선은 이명박 정부 초기에 치뤄진 선거로 한나라당에 상당히 유리한 선거였지만, 그럼에도 승리한 것으로 보아 지역 관리를 상당히 잘한다는 평가가 일각에서 나오기도 했다.
2011년 하반기 재보궐선거에서 서울특별시장 후보로 출마하려 하였으나 무소속 박원순 후보와의 단일화를 위한 경선에서 박원순 변호사에게 패했다.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민주당 지지자들에게 평판은 괜찮았고 의정 활동도 우수했기에 촉망받는 정치인으로 꼽히기도 했다.
특히 이명박 전 대통령이 청와대에 입성하기 전에 그에게 대놓고 "저 똑바로 못 보시겠죠? 부끄러운 줄 아세요"라고 노골적으로 신경전을 벌이기도 하고#[9] 김태호가 이명박 정부 시절 국무총리 후보자로 지명되었을 때 인사청문회에서 그를 낙마시킨 일등 공신이기도 해 보수 진영에서 박영선은 초강경파로 분류되는 인물이었다.[10] 이때 박영선의 행적을 보면 반대 진영에 있었던 전여옥과 행적이 상당히 비슷하다.[11] 전직 언론인인 것까지. 사실 다른 점도 적지는 않은 게, 박영선은 지역구 관리는 기막힐 정도로 잘해서 나름대로 정치인으로서 장수할 수 있었던 것이다.

2.3.2. 3선 이후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통합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61.9%라는 압도적인 득표율을 얻어 당선되었다. 그리고 19대 국회 전반기 법제사법위원장을 맡았고 이후에는 새정치민주연합의 첫 여성 원내대표로 선출되면서 초강경파에서 온건파로 성향이 바뀌기 시작했다. 김한길 & 안철수 공동대표 체제가 2014년 7.30 재보선 참패로 무너지면서 '국민공감혁신위원회'라고 이름 붙인 비상대책위원회의 위원장이 되어 당대표 권한 대행을 맡게 됐다.
그러나 이 와중에 새누리당이 제시했던 세월호 특별법 법안을 수용하기로 결정하면서 야권 지지자들에게 촉망받던 정치인에서 공공의 적으로 한순간에 이미지가 떨어져 버렸고 그 이미지는 20대 국회가 열린 뒤에도 계속되고 있다. 결국 박 위원장은 비대위원 한 명도 인선해보지 못하고 원내대표직과 비대위원장직에서 내려와야 했다.

그 때 자신의 뒤를 이어 비대위원장직을 맡을 후임으로 보수적인 성향의 이상돈 교수와 진보적인 성향의 안경환 교수를 공동위원장으로 하는 계획을 발표했다가 또 당내에서 큰 반발에 부딪히기도 했다.[12] 정계에 입문한 이래 가장 큰 위기를 맞이한 박영선은 대외적인 연락을 모두 끊고 칩거하며 탈당을 고심하다가 결국 당에 잔류하기로 하고 당권에서 내려왔다.
그 후 2015년 2.8 전당대회에서 당시 대구 입성에 다시 도전장을 내밀었던 김부겸에게 당대표 선거에 출마하라고 권유하기도 했었지만 이렇다 할 특별한 활동 없이 화제의 바깥으로 비켜나 있었다. 더불어민주당의 구 비주류 인사들[13]이 당을 박차고 나와 국민의당을 만들고 있을 무렵 박영선도 국민의당 쪽으로 갈 것이라는 이야기가 힘을 얻고 있었다.
그러나 문재인 대표가 절벽 끝까지 몰려 있었던 당을 되살려놓고 나아가 합리적 보수 인사로 통하던 김종인새누리당 국민행복추진위원장을 선거대책위원장 겸 비상대책위원장으로 데려와 전권을 이양하면서 더불어민주당에 남겠다고 선언했다. 그 이후 김종인 비상대책위원회의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이 과정에서 꽤 많은 논란거리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그리고 비례대표 공천 문제로 당이 한 번 큰 위기에 휩싸이고, 이것이 비대위의 책임인 것이 드러나자 다른 비대위원들과 함께 책임을 지고 일괄 사퇴했다. 20대 국회가 개원한 다음에는 기획재정부 등을 관장하는 기획재정위원회 소속으로 배정받아 재벌 개혁 문제를 다루고 있다.
제19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안희정 충남도지사를 지지하고 캠프에 합류했다. 그러나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문재인 후보가 승리한 이후 4월 16일, 안희정 지사를 도왔던 인사들과 함께 문재인 캠프에 합류하여 공동선대위원장을 맡았고 당내부 통합의 상징으로서 꽤 활약했다. 본래 박영선은 문재인 대통령과는 꽤 오랫동안 불편한 관계여서 대표적인 비문 내지는 반문 정치인으로 손꼽혔다.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 때도 안희정 캠프에 들어가 활동했었고 문재인 대통령이 민주당의 대선 후보로 최종 선출된 뒤에는 이언주처럼 탈당할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기도 했다. 그러나 문재인 대통령이 박영선과 직접 만나 도움을 요청하였고 박영선이 문재인이 내민 손을 잡은 뒤에는 친문 지지층 사이에서조차 '대표 비문이 이젠 친문 좌장이 됐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로 문 대통령을 열성적으로 도왔다.[14] 이에 친문 지지층은 '열심히 뛰어줬으니 고맙긴 한데 사람이 갑자기 저렇게 변하니 좀 어안이 벙벙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좋게 보면 문재인이라는 인물을 꾸준히 지켜보며 이전에 가졌던 생각이나 입장이 바뀐 것일 수 있다. 반면 계산적으로 해석한다면 문 대통령의 굳건한 지지층을 인정하고 허리를 숙인 정치적 판단일 가능성도 적지 않다.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직후에 에콰도르의 레닌 모레노 대통령 취임식에 특사로 파견되었다. 일부 친문 지지층은 문재인 대통령이 당선되자마자 박영선을 에콰도르로 보낸 것을 일종의 토사구팽처럼 여기며 통쾌해 하는 반응을 보이기도 하는데, 전혀 그렇게 볼 것이 아니다. 박영선은 에콰도르의 새 대통령 취임을 축하해 주려고 '''문재인 대통령의 대리인으로''' 에콰도르에 간 것이기 때문이다. 참여정부 시절에도 2007년 1월 노무현 대통령은 자기를 대리하여 문재인 당시 정무특보를 특사 자격으로 보내서 에콰도르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하게 한 바 있다. 문재인으로선 박영선에게 상당한 명예를 안겨다 준 셈인 것이다.
여기에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후보군에 박영선의 이름이 자주 언급되는 등 박영선의 입지가 상당히 좋아지자, '박영선이 친문 좌장처럼 행동한 이유를 알겠다'라며 쓴웃음을 짓는 사람들도 있다. 위에 언급한 '정치적 판단'이 열매로 돌아온 것이다. 게다가 이런 모습들은 마침 국민의당으로 갔다가 이미지가 악화되고 향후 정치 진로에도 사실상 먹구름이 끼었다고 평가를 받는 이언주와 참 비교되는 모습이라 박영선과 이언주를 비교하는 언주야 패러디도 많이 나오고 있다. 또한 박영선이 공식 행사에 참석해서 후한 대접을 받거나 긍정적인 방향으로 여론의 주목을 받는 기사나, 이언주가 정치적으로 어려워지는 일을 다룬 기사를 보면 높은 확률로 '언주야'/'언니는'/'행복하단다' 식의 댓글 놀이가 주르륵 뜬다.
한창 논란이 되고 있는 이명박 정부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등으로 관심을 받고 있는 이명박에 대해 공격할 준비를 갖추고 있다는 주장도 있다. 여기엔 여당 의원으로서의 역할 문제도 있지만 박영선 본인의 경험도 작용한다. 이명박의 '역린'으로 꼽히는 BBK 사건을 MBC 기자 시절부터 집중적으로 조사하고 공격한 사람이 바로 박영선이기 때문이다.
한편 2018년 6.13 지방선거 때 박영선이 서울시장 경선에 나올 거라는 설이 돌고 있다. 시사IN과의 인터뷰를 보면 스스로도 서울시장 출마에 관심이 있음을 숨기지 않고 있다. 그러나 최근 박원순 시장이 서울시장 3선 출마에 마음을 굳혔다는 이야기가 있으므로 어찌될지는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 보통 현역 자치단체장이 연임을 천명한다면 당에서도 경선을 진행하지 않고 해당 자치단체장을 추대하기 때문이다. 다만 박원순은 만약 서울시장 경선이 치뤄진다면 마다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시사IN 인터뷰에 따르면 박 시장 스스로도 박영선과 로마에서 함께 차를 마시던 중 대뜸 "페어 플레이를 하자"는 말을 건넸다고 한다. #
그 후 박원순 시장도 3선 도전으로 노선을 결정했고, 박영선도 공식 출마 선언만 안 했을 뿐, '영선아 시장가자' 등의 민생 행보를 보여주는 등 본격적인 서울시장 선거 출마를 위한 활동에 발을 내딛었다. 그리고 박영선은 영등포구에 있는 '꿈이룸학교'에서 프레젠테이션 형식으로 2018년 3월 18일 서울시장 선거에 출마하겠다고 공식 선언했다. 이후 당내 경선에서 박원순 시장, 우상호와 경쟁을 하였는데 결과는 박원순 시장의 승리였다. 경선 결과가 나온 후 이를 승복하고, 이후에는 지방선거의 각 지역 후보들을 지원하였다. 여기서 극한의 줄타기 능력을 선보였다. 문재인 대통령이 낙향한 후 경남 양산으로 돌아올 것이니 도지사와 시장을 민주당으로 해야 한다든가, 그리고 바로 자기 지역구로 올라가 유세를 펼친다든가. 이러한 면모 때문에 친문 지지층에서는 이전부터 불려온 조롱 반 경외반의 의미인 '친문좌장'이라는 별명이 더 유행했다.
2018년 8월 25일 열릴 예정인 8.25 전당대회에 불출마하겠다고 7월 18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밝혔다.
20대 국회 사법개혁특별위원회 위원장직을 맡았다.
2019년 1월, 손금주, 이용호의 입당을 불허한다는 더불어민주당의 결정의 대해 "순혈주의는 역사적으로 보면 개방과 포용에 늘 무릎을 꿇었다"며 "로마가 천년동안 지속될 수 있었던 힘도 곧 개방과 포용 그리고 공정이었다"라고 비판하였다. 앞서 우상호 또한 비슷한 주장을 한 바 있다. 송영길은 신한울 3, 4호기 건설 재개를 주장했고, 우상호, 박영선은 손금주, 이용호의 입당 허용을 주장하는 등 당내 비문계 의원들이 잇따라 당의 방침에 반대되는 목소리를 내는지라, 친문비문 간의 갈등이 심해지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온다. #

2.3.2.1. 최고위원직 사퇴

박영선 최고위원은 민주통합당 공천 과정에서 자신을 지지한 김낙순 후보가 낙천되자 최고위원직을 사퇴한다. # 김낙순과 박영선은 구 정동영계 멤버로 오랜 친분을 과시했다. 김낙순과 대결한 후보는 문재인, 이해찬, 박원순, 등이 입당한 시민통합당 공동대표 이용선으로, 시민단체들은 김낙순이 '지방의원 공천헌금을 받은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은 비리정치인' 이라며 '공천을 받을 자격이 없음'을 주장했다.# 안규백·전현희 등 기자회견 열고 반대 표명을 했다. 지역시민단체 공천 관련 항의방문도 경선에서는 이용선이 승리했으나 본선에서 낙선한다. 박영선은 최고위원 사퇴 이후 김낙순이 2016 민주통합당 불공정 공천의 최대 피해자라고 주장한다. # 유종일, 김낙순은 정동영계와 가까운 사이로 민주당의 최대 문제점인 계파싸움과 무관하지 않은 셈이다.
당시 민주통합당은 기존 민주당 계파 빅 3인 정동영, 손학규, 정세균에 더해 공천과정에서 홀대를 받아왔던 친노 출신들, 혁신과 통합에 가담했던 시민단체 출신들까지 공천 힘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친노출신의 당내 합류를 반대한 구민주계는 지분이 없던 혁신과 통합이 5:5의 지분을 차지하는게 말이 되냐고 주장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당대표였던 이용선 조차 경선을 통과해야 했을 정도고 혁신과 통합 출신 출마자들은 신인 가산점 없이 지역위원장들과 경선해 수도권에서 전멸에 가까운 성적표를 받았다. 박용진도 시민통합당에 입당해 경선하고 낙선했을 정도이다. 애초에 박영선의 주장과 달리 출마자들이 너무 많은게 문제였고 민주당내 내분은 문재인에 반대하는 출마자 다수를 끌고 나간 안철수의 탈당으로 정리된다.

2.3.2.2. 문재인과의 갈등

15년에 당대표가 된 문재인은 당시 새누리당 당대표인 김무성과 선거법 협상을 시작한다.# '선거 룰' 핑퐁게임…"내꺼부터 받아줘" 박영선은 오래전부터 자신의 공천개혁방안으로 오픈프라이머리를 주장했다. 문재인은 절충된 입장으로 대선 경선은 '국민이 뽑은 대선후보'에 찬성하는 입장이었으나 총선 등은 현역 의원의 인지도와 선거활동의 유리함이 지나치게 보장된다는 이유로 비판적이었다. 김무성은 박영선과 비슷한 입장으로 모든 선거에 오픈프라이머리를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을 편다. 오픈프라이머리 반대자들은 경선시 반대 지지층의 역선택을 부작용의 예로 들었는데 이에 대해 박영선과 나경원은 동시 오픈프라이머리를 제시한다. # 김무성은 총선에서도 동시 오픈프라이머리를 주장하나 민주당 혁신위와 문재인이 조건부 협상 의사를 밝히고 이를 김무성이 거부하면서 협상은 결렬된다.
오픈프라이머리는 정치고관여층인 당원과 저관여층인 일반시민이 같은 투표권을 행사하기에 정치적 관심이 떨어지는 경선일 수록 인지도 위주 경쟁으로 변질된다. # 그러나 당원 중심 경선도 민심을 잃어가는 정당에서 당내 핵심세력만의 공천 잔치로 변질될 수 있고, 전략공천 역시 당권을 가진 지도부의 내사람 꽃기로 변질될 가능성이 있다. 일장일단이 있는 셈인데 민주당 혁신위는 정치신인이 오세훈 선거법에서 여러 혜택을 더 누리는 현역의원과 경쟁할 기회를 보장해주고 싶어했다. # 반대로 김무성은 친박세력들의 공천권 요구에 시달리고 있었고 이를 버텨낼 명분으로 오픈프라이머리 도입이 필요했다. 박영선은 협상이 결렬되자 문재인과의 갈등이 가속화된다. 계파정치 청산을 위해 도입이 필요하다는 주장은 들어볼 필요가 있다. 하지만 박영선 스스로 정동영계의 핵심중 하나로 한때 80석이 넘는 역사상 최대계파가 축소되는 과정에서 현역의원이 누리는 기득권이 필요했다는 부분은 문제점이다.
이 기간동안 박영선은 자신의 저서를 통해 문재인의 리더십을 비판하기도 한다. #

2.4.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3월로 예정된 문재인 정부의 개각에서 법무부장관 후보로 유력시 되었다. 그런 점에서 사법개혁특별위원회 위원장 자리를 일종의 복선으로 볼 수 있다. 법무부장관에 취임한다면 사개특위 위원장 자리는 사퇴할 것으로 보인다. #
2019년 3월 8일 대규모 개각에서 중소벤처기업부장관에 내정되었다. 마침 지역구인 구로구와도 관계가 밀접한 부서이기도 하다. 재미있게도 위에 언급한 이언주가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 간사로 있다. 즉 이언주가 산자중기위 위원으로서 중기부장관 후보자 박영선에 대한 청문회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야당 시절 청문회에서 국무위원 후보자들에게 강도높은 발언들을 한 만큼 박영선에 대한 청문회도 강도가 높았다. 청문회 과정에서는 후보자인가 청문위원인가 싶을 정도의 공격력을 보여줘 화제가 됐다. # 여당 지지층에서는 사이다라는 평가를 받았고, 야당 지지층에서는 오만불손하다는 지적도 있었다. 특히 화제가 된 건 법사위원장 시절 황교안 당시 법무부 장관에게 김학의 사건 관련 CD를 보여주면서 경고했다고 주장하면서 통상적인 야당 공격-여당 방어 구도를 뒤집어버렸다. # 박영선은 황교안을 따로 만나 CD의 존재에 대해 알렸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황교안 본인은 왜곡이라고 해명했다. # 박영선이 이 건을 들고 나온 것이 장관 후보자들의 자질 논란으로 인한 지지율 하락을 상당히 상쇄시키는 혁혁한 공을 세웠다는 의견과 박영선이 진술을 번복한바, 이로 인해 불거진 선거법 논란 역시 일고 있다. #이 외에도 전통시장에 갔다왔다는 증거로 영수증을 요구하자 박영선 장관은 "할머니 현금영수증 끊어주세요~" 하지는 않는다고 한 답변과 자신의 유방암 수술과 관련된 질문에선 의원님이 전립선암수술을 받았다고 자신이 물어보진 않는다며 쓸데없는 질문들을 차단했다.
한편 중소기업, 소상공인 연합회 등에서는 조속한 임명을 촉구했다. 중소기업중앙회 # #2 #3 #4 #5
결국 현직 국회의원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청문보고서가 채택되지 않았지만, 문재인 대통령에 의해 2019년 4월 8일 장관 직에 공식 임명되었다. 당시 여론조사 결과 임명 찬성 45.8% vs 반대 43.3%로 찬성 여론이 오차범위 내에서 앞섰다.]#
2019년 9월 13일 쇼호스트로 깜짝 등장해 완판의 과업을 달성했다. 이날 주문금액은 당초 목표인 3000만원을 훌쩍 넘은 5151만 1124원을 찍었다. 시청률도 평소의 3배 가까이 올랐다.
장관으로서 평가가 상당히 좋다. 안건준 벤처기업협회장은 “정치인 출신이 얼마나 산업에 대한 이해도가 높을지 우려했던게 사실인데 정말 놀랐다. 흡수력이 이렇게 차이가 날 수 있구나. 생각하는 방향, 수준, 깊이, 관심 등은 여야나 진보, 보수를 떠나 굉장히 만족한다."라고 극찬했다. 그간 이런 정치인 경제 부처 장관은 그냥 잠시 경력 관리 하고 민원 좀 해결해주는 수준이었다. 이번엔 강력한 장관이 나서서 예산도 많이 끌어다 주고[15] 문재인 대통령도 박영선 장관을 해외 순방에 자주 참여시키며 해외로도 커넥션을 만들어 주는 점이 호평을 이끌어 내었다. #
박원순 서울시장의 사망으로 공석이 된 서울특별시장 재보궐선거의 민주당 후보로 최근 자주 거론되고 있다.# 박원순 시장이 성추문 의혹을 받고 있는 상황이라 민주당 내에서 이번엔 여성 후보를 출마시켜야 한다는 중론이 있는데다가, 2011년·2018년 이미 두번이나 서울시장 경선에 도전했을만큼 서울시장직을 향한 본인의 의지도 강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출마하게 된다면 4선의 풍부한 의정 경험과 국무위원 직을 수행하면서 쌓은 행정 실무 경험이 강점으로 꼽힌다.##
8월 4일 중기부에서 발표된 2020년 상반기 벤처기업 및 벤처투자 받은 기업의 일자리 동향에서 코로나19로 인한 최악의 경제 상황 속에서도 벤처·스타트업 일자리가 오히려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총 73만명의 일자리가 창출됐는데 같은 기간 4대 기업이 창출한 69만개 일자리보다도 그 수가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12월 8일, 서울시장 후보로 거론되는 가운데 중소벤처기업부 공무원들에게 실시한 여론조사가 공개되었다. 중기부 공무원의 70% 이상이 계속 중기부에서 같이 일하고 싶다는 결과가 나왔다. 그만큼 장관들 중에서도 가장 일을 잘하고 있다는 증거.#
한동안 서울시장 보궐선거 출마 관련해서는 말을 아끼다가 2021년 1월 19일, 박영선 장관이 4월에 열릴 서울시장 보궐선거 출마를 최종 결심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당 중진들의 설득으로 출마를 결심하게 됐고 경선 일정을 고려해 20일까지 업무를 보고 사의를 표명했다. 후임으로는 권칠승 의원이 내정되었다. 문재인 대통령도 사임 표명 당일 박 장관의 면직안을 재가했다.#
박영선 장관은 1월 20일 오전 스테판 방셀 모더나 CEO와 화상회의를 했다. 이날 화상회의에서 정부와 모더나는 국내에 호흡기전염 질환 백신 생산공장을 공동 설립하고, 백신 연구개발(R&D) 공동 투자를 진행하는 방안을 논의했다.# 이후 인터뷰에서 박 전 장관은 "모더나 공장이 창동에 세워질 수 있는데 이 같은 바이오기업 유치는 일자리를 늘리고 해당 지역을 세계적 바이오클러스터로 도약시키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기대감을 표했다.#

2.5. 서울시장 보궐선거 출마


2021년 1월 26일, 서울시장 보궐선거 출마를 공식 선언하며 "21분에 모든 것이 해결되는 21분 컴팩트 도시로 서울을 재구성하는 도시공간의 대전환을 이루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이 과정에서 창동기지 개발 방향을 지역민들이 바라는 일자리 대신 토지임대부 주택으로 개발한다고 하여 논란이 되었다. 슬로건은 '''서울시 대전환''', '''합니다 박영선'''!.
2021년 2월 현재, 박영선 전 장관이 각종 여론조사에서 더불어민주당 내부 당원 지지층 여론조사에서 50%대 중후반대 지지율을 보여주며 20%대 후반 지지율을 보이는 우상호 의원을 압살하고 있는 형국이다.[17] 언론에서는 박영선 전 장관과 안철수 대표와의 양자대결에 주목하는 경향이 있어 다소 묻히는 감은 있지만, 애당초 치열한 경선전이 예상되었던 것과는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18] 더불어민주당을 지원하는 리버럴 성향의 시사 유튜버들 사이에서도 박영선 전 장관에 대해 호의적인 내용의 동영상을 적극 홍보하고 있는 점이 특기할 만 하다.[20][21]
더불어민주당 더좋은미래 소속 의원 및 원외위원장, 시의원들의 우상호 조직세에 대항하기 위한 현역 의원 영입 및 조직세 규합[22]도 현재까지 나쁘지 않다는 평이 많다. 친문의 복심이라 불리는 윤건영 의원, 고민정 의원을 필두로 이수진[23] 의원, 박성준 의원, 강병원 의원, 정청래 의원, 노웅래 의원, 김병기 의원, 박용진 의원, 임종성 의원, 신현영 의원, 이수진[24] 의원, 김경만 의원, 변재일 의원, 정춘숙 의원, 강선우 의원, 유정주 의원 등이 물밑에서 박영선 전 장관을 지원해주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25]
즉, 경선에서 친문 초재선 그룹과 97세대[26] 의원의 표심을 잡는데 다소 성공한 셈이다.[28]
2021년 2월 중반 현재, 야권 후보와의 양자 및 다자대결에서 선전하는 여론조사가 속출하고 맞상대를 펼치고 있는 우상호 의원이 2월 10일 박원순 전 시장과 관련한 2차 가해 논란으로 자책골을 넣으면서 점차 경선레이스의 승기를 굳혀가고 있다.#
만일 2021년 3월 1일 더불어민주당 서울시장 후보로 선출된다면, 강금실법무부장관, 한명숙총리, 나경원 전 국회의원에 이어 역대 네 번째 주요 정당 여성 광역자치단체장 후보가 된다. 결선에서 승리하게 되면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광역자치단체장이라는 타이틀을 거머쥐게 된다.[29][30] [31]
최종적으로 서울시장에 당선된다면, 2021년 재보궐선거를 사실상 민주당의 승리로 이끈 성과로 향후 민주당에서의 입지가 로 커질 수 있게 된다. 더 나아가 2022년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의 서울시장 선거에 별 어려움 없이 재차 도전할 개연성이 크며 서울시장으로서 차차기에는 대권주자 반열에도 오를 수 있다. 그러나 만약 낙선할 경우 전통적으로 서울시장 선거에서 낙선했던 정치인들은 정치적 입지가 꺾여 긴 슬럼프를 겪으며 주류정치에서 멀어졌다가 간신히 복귀한 사례가 많은 만큼 이번 선거에 박영선의 정치적 명운이 걸렸다고도 볼 수 있다.

3. 사건사고 및 논란




4. 여담



  • 박영선은 2016년 2월 29일 나라와 교회를 바로 세우기 위한 3당 대표 초청 국회 기도회에 참석했다. 박영선의 연설이 끝나자 사회를 맡은 전광훈 목사는 '박영선을 야당대표로 세우자'면서 '야당 부대표가 항복선언을 한 것'이라고 말했다. 박영선 의원은 2013년 김한길 전 민주통합당 대표가 발의한 '차별금지법'에 공동발의자로 이름을 올렸다. '차별금지법 반대' 발언을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차별금지법을 동성애법으로 거론하며 자연의 섭리와 하나님의 섭리에 어긋나는 법이라고 주장했다. 2021년 시점에서는 생각이 바뀌었는지, 이때의 일을 스스로 잘못된것이었다고 회고하고 정체성을 이유로 차별받는 것에 반대하는 입장을 밝혔다. 한편 박영선은 청중으로부터 북한 인권법을 제정해야 한다는 요청이 나오자 '찬성합니다 할렐루야'라고 발언하는데, 일반적인 민주당의 정체성과 다르다는 지적이 있었다. 하지만 북한인권법 제정은 새정치민주연합 대표 시절 문재인도 찬성한 것이고 2016년 3월 여야합의로 통과됐다.#
  • 구글 딥마인드 챌린지 매치 첫 대국 전 이세돌 9단을 찾아가 사진을 찍은 것을 공개하여 빈축을 산 적이 있다. 각종 스포츠 경기 직전에는 선수들의 긴장감이 최고조이거나 경기를 대비하여 최종 컨디션을 조절할 만큼 민감한 상태다. 실제로도 경기 직전에는 코치나 감독을 비롯한 관계자를 빼면, 인터뷰와 고위 인사를 무조건 배격할 정도로 선수에게 신경을 쓴다. 일부 매체에서는 경기 직전 선수에게 부담을 주는 인터뷰나 과도한 사진 촬영을 엄금한다. 본인만 찾아갔다고 해도 공인이라는 지위를 이용했다는 비난을 피하기 어려운 행동이다. # 다만 이후 2021년 서울시장 재보궐 선거에서 이세돌 9단이 박영선을 지지하며 19년전 MBC 인터뷰 이후로 인연이 생겼다고 한 걸 보아 지위를 이용했다기 보단 개인적 인연을 통한것으로 보인다.
  • 지역구 공약 이행률은 96%에 달해 여·야를 막론하고 지역구 의원들 중에선 톱 랭커로 꼽힌다. 박 의원 본인이 굉장히 일을 잘하는 데다가 또 열심히 한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19대 총선에서는 60%대에 달하는 득표율을 기록했고, 온라인 지지층 민심이 안 좋은 상태에서 선거를 치렀던 20대 총선에서도 무난하게 4선(지역구에서는 3선)에 성공했다. 덕분에 의원실 보좌진들이 고생한다고 하는데, 어쩌다 어른에서 확인사살되었다.
  • 손석희 JTBC 대표이사 사장보다 네 살 연하이지만, 경력으로만 따지만 손 사장보다 MBC 1년 선배라고 한다. JTBC 뉴스룸에서 박근혜 대통령 탄핵과 관련해서 박영선 의원을 연결해 인터뷰를 했는데 언뜻 보면 둘이서 뉴스 진행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 #
  • 2018년 들어서 서울특별시장 출마를 준비했을 때에는 매스컴에 얼굴을 자주 드러내며 홍보활동을 많이 했었다. 어쩌다 어른에 나와서 의원실 보좌진들을 엄청나게 굴리는 것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등 대중매체 노출 빈도를 높이고 있다. 위의 윤성빈 선수 인증샷 논란 역시 자기 홍보의 일환으로 벌였다가 실패한 사례이다. 덕분에 많은 사람들에게 지지도 상승은커녕 비호감으로 낙인 찍히며 역효과를 맛보기도 했다.
  • 영부인 김정숙을 닮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독일의 메르켈 총리와도 닮았다고. 세 명 다 수사자 상이라고 한다. 박영선 본인도 닮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고 말했다. 다만, 인상차이는 크다. 김정숙은 온화한 인상이지만, 박영선은 대부분의 정치인 특성상[32] 김정숙에 비하면 좀 더 선이 굵고 날카로운 이미지다. 오히려 메르켈 총리와 인상이 비슷한 격이다. 미국 전 국무장관이자 민주당 대선 후보였던 힐러리 클린턴과도 인상이 비슷하다는 말도 있다.
  • 윤성빈 선수 인증샷 논란에서 많이 욕을 먹었지만 다음 날 이 사건은 어느 역대급 사건에 의해 비난 여론이 사그러들었다. 물론 화살이 다른 방향으로 갔을 뿐, 관련 기사만 나오면 여지없이 까인다. 본인 스스로도 이 이야기가 나오면 "그 일로 많이 배웠다"며 사과의 뜻을 표한다.
  • 지역구의 이름을 따서 '구로박'이라는 별명이 유명하다. 바리에이션으로 '구로마검'이라는 별명도 있다. 상대 정당을 향해 상당히 강한 공격과 반박을 서슴치 않지만 상술한 각종 논란 때문에 더민주 정당 이미지에 흠집을 낸 적도 있기 때문에 이런 별명이 붙었다.
  • 마리끌레르 사진도 찍었다.
  • 중기부에서 광고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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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상공인 가치삽시다 캠페인 관련 중기부 광고 (박영선 출연)'''
언주야 시리즈가 사실이었다는 것이 이언주의 낙선 후 인터뷰에서 밝혀졌다. "대선 직전 민주당 탈당 나만 할 줄 몰랐다"라고 발언한 걸 볼때, 이종걸과 박영선 의원에게 속닥거리는 사진이 진짜 국민의당으로의 영입제의였던 것이다.
  • 2015년 박지원더불어민주당에서 탈당하면서 많이 잊혀진 사실이지만, 민주당이 야당이었던 시절 박지원과 역대급 케미를 선보이면서 청문회에서 정부 인사들을 대거 낙마시키는 등 맹활약을 해서 박지원과 세트로 박남매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시절이 있었다. 게다가 이 둘은 민주당 내에서도 대표적인 비문(非文) 정치인이기도 했다. 이 때문에 박영선 또한 박지원처럼 국민의당으로 탈당할 거라고 점쳐지기까지 했을 정도면... 하지만 박지원만 탈당하고 박영선 본인은 더불어민주당에 잔류하면서 박남매는 갈라서는 듯 했으나, 결국엔 돌고 돌아 이 둘은 각각 문재인 정부중소벤처기업부 장관과 국정원장이 되었다!
  • 문재인 정부에서 규제하고 있는 3주택자였다. 이 중 1채는 일본에 있다. 서대문구 연희동 단독주택, 종로구 교북동 경희궁자이 4단지 오피스텔을 보유하고 했으며, 일본 도쿄도 미나토구에도 아파트가 있다. 본인 말로는 도쿄 아파트는 이명박 때문에 샀다고 한다. # #
    • 2020년 8월 18일 91살의 시어머니가 사는 종로구 교북동 오피스텔을 매도하면서 한국에서는 1주택자가 됐다. 시어머니는 연희동 주택에서 모실 예정이라는 듯. #
  • 페미나치들은 박 장관을 강경화 외교부 장관과 함께 흉자라고 깐다. 여성 장관이면서 딱히 페미니즘 지지선언같은 걸 하지 않고, 차별금지법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 2021년 1월 TV조선 아내의 맛 131회에 출연했다. 나경원 전 의원도 130회에 출연했다. # 두 사람은 지난 2018년 3월 tvN 인생술집 61화에 함께 출연하기도 했다.
  • 2021년 2월 음성 채팅 플랫폼 Clubhouse를 통해 수백명 유권자들과 이색적인 소통을 했다.

5. 소속 정당


'''소속'''
'''기간'''
'''비고'''

2004 - 2007
정계 입문

2007 - 2008
합당[33]

2008
합당[34]

2008 - 2011
당명 변경

2011 - 2013
합당[35]

2013 - 2014
당명 변경

2014 - 2015
합당[36]

2015 -
당명 변경

6. 선거 이력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2004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비례대표

'''8,145,814 (38.26%)'''
'''당선 (9번)'''
'''초선'''
2008
제18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구로 을

'''34,783 (47.30%)'''
'''당선 (1위)'''
'''재선'''
2012
제19대 국회의원 선거

'''54,902 (61.95%)'''
'''3선'''
2016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50,526 (54.14%)'''
'''4선'''
'''역대 선거 벽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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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저서


  • 박영선의 인터뷰 - 사람 향기 (나무와숲, 2002)
  • 자신만의 역사를 만들어라 (마음의숲, 2012)
  • 누가 지도자인가 (마음의숲, 2015)
  • 박영선, 서울을 걷다 (가나출판사,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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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피스텔이며, 전세로 거주 중이다.[2] 단독주택이다.[3] 배우자 명의로 보유하고 있다. 변호사로 일하는 남편이 이명박 정부 때 BBK와 관련해서 사찰을 받아 다니던 로펌을 그만두고 일본으로 이직해서 4년간 살았는데 몇 년을 근무하게 될지 몰라 처음 몇 개월간은 렌트비를 내고 살다가 낭비라고 생각해서 아파트를 구입했다고 한다. # [4] 배구선수 경력으로 경희대에 입학했다는 주장도 있는데 이는 중소벤처기업부장관 인사청문회에서도 거론된 바 있다. 이에 대해 박영선은 "저는 배구를 한 적이 없고 운동을 그렇게 잘하는 편도 아니다"라며 부인했다.[5] 이때 미국의 소리에서 일했다고 한다.[6] 이때 이혼과 별거로 루머가 많이 돌아다니기도 했다.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이혼에 대해서 보수적인 풍토가 강했던 시기였다.[7] 1991년부터 1993년까지 뉴스데스크 증권뉴스 코너를 맡았다.[8] 원내대표 시절에는 권한대행이었지만 당 대표직도 겸임하기도 했다. 다만 최초의 여성 대표 기록은 박순천이 가지고 있다.[9] 이 말을 듣고 이명박은 박영선에게 즉석에서 '''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하면서 맞받아쳤는데, 노무현 前 대통령의 대사와 뉘앙스만 다르고 완전히 똑같은지라 재조명받기도 했다.'''[10] 다만, 예전 일과 이명박에게 이런 말을 대놓고 한 걸 봤을 때, 이명박과 예전부터 원래 알고 있었던 사이일 확률이 높다. 박영선 본인도 이명박 BBK 때부터 이명박을 알고 있었다고 하기도 했다.[11] 전여옥은, 유시민과 토론을 하면서 노무현이 미숙아라는 주제로 변하자, "미숙아는 '''인큐베이터로 들어가서 성장하고 다시 나와야''' 된다"고 독설을 퍼부었다.[12] 이상돈 교수는 민주당원들의 정신적 지주로 여겨지는 김대중, 노무현 두 전직 대통령을 강도 높게 비판한 인물이기 때문에 민주당에서 싫어하는 사람이 많다.[13] 호남계 상당수 + 안철수계 + 김한길계 + 정동영계 + 천정배계 등.[14] 나중에 1월 1일 신년인터뷰에서 비문은 아니었다고 한다. 2012년 대선 당시에도 총괄선대본부장을 했기 때문이다.[15] 중소기업 관련 예산은 31% 상승했다.[16] 권리당원 50% + 일반여론조사 50% 반영[17] 최대한 보수적으로 봐서 산술상 박영선 전 장관이 47.8% 득표로 우상호 의원의 52.2% 득표에 밀렸을 경우를 상정해도[16] 여성후보 가점 10%를 얻으면 52.58% 득표로 바뀌어 52.2%의 우상호 의원을 꺾을 수 있게 된다.[18] 심지어 우상호를 간접 지원하는 입장을 보이는 열린민주당 지지층에서도 밀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19] 대표적으로 클리앙[20] 트위터에서는 박영선 전 장관이 강세고, 유튜브 및 온라인 커뮤니티[19]에서는 우상호 의원이 강세다.[21] 서울의 소리, 새날, 시사타파TV 등이다. 특히 팟캐스트 방송 월말 김어준의 박영선 후보와의 대담본 방송이 박 전 장관의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재직 시절 전의 잔존 비토 정서를 매우 중화시키는 효과를 줬다.[22] 주로 서울시 소속 더불어민주당 소속 국회의원[23] 지역구[24] 비례대표 [25] 서울시장 불출마를 선언한 박주민계의 경우 의원 및 조직이 박영선 지지와 우상호 지지로 나뉘었다는 전언이다. 그렇지만 일단 박주민 의원은 2월 10일 은평구 대림시장 유세 당시 밀착해서 동행하며 사실상 우상호 의원 지지 의사를 밝혔다. [26] 90년대 학번, 70년대생 정치인을 일컫는 말[27] 보통 광역자치단체장선거 및 전국 단위 선거에 출마하는 자당 후보가 오면 행정부에 입직해있지 않는 한 해당 후보의 본인 지역구 동선에 동참하는 것이 예의지만, 박영선 전 장관의 강동구 지역 행사 및 시찰에 참여하지 않았다. 최소 자기가 지지하는 후보가 아니더라도 눈도장이라도 찍은 윤건영 의원, 박용진 의원, 이용선 의원, 진성준 의원, 이용선 의원, 기동민 의원, 이해식 의원과는 대비되는 모양새다.[28] 반대로 박홍근 의원, 천준호 의원, 기동민 의원, 남인순 의원, 양경숙 의원, 김성환 의원, 우원식 의원, 진선미 의원[27], 김영배 의원, 양기대 의원, 박정 의원, 정성호 의원, 송영길 의원, 이해식 의원, 김영호 의원, 한준호 의원, 서영교 의원, 김영주 의원, 이용선 의원, 박주민 의원, 유동수 의원의 경우 우상호 후보를 지원한다.[29] 현재까지 한국 최초의 여성시장(관선)은 전재희 전 의원이고 최초의 민선 지방자치단체장은 김영순송파구청장이다.[30] 한국이 유독 지방자치 및 지방정치 영역에서 여성 공직자 활약이 미약한 편이다. 당장 세계 GDP 1위~9위 국가들을 살펴보면 두드러진다. 미국의 경우 넬리 테일러 로스(Nellie Tayloe Ross)가 1925년 와이오밍에서 최초의 여성 주지사로 활약했고 현재 워싱턴 D.C 시장 또한 여성으로서 뮤리엘 바우저가 시장이다. 중국의 경우 민선은 아니지만 1983년 장쑤성에서 최초의 여성 당장 구시우렌(顾秀莲)이 배출되었고, 당서기로 보면 더 이른 1977년리위란(呂玉蘭)이 허베이성 여성 당서기로 활약했다. 일본의 경우 2000년, 오사카부에서 최초의 여성 도지사 오타 후사(潮谷義子)가 배출되었으며, 도쿄도에서는 고이케 유리코(小池百合子) 도지사가 최초의 여성 도쿄도지사다. 독일의 경우 1947년 루이즈 슈뢰더(Louise Schroeder)가 베를린 시장을 역임했으며, 최초의 여성 주총리는 1993년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총리였던 하이데 시모니스(Heide Simonis)였다. 영국의 경우 에블린 로우(Eveline Lowe)가 1939년 런던 의회 의장으로서 최초의 여성 수도 당국자 역할을 수행했으며, 최초의 여성 자치단체장은 1908년 엘리자베스 가렛 앤더슨(Elizabeth Garrett Anderson) 올드버러 시장이다. 프랑스의 경우 1970년 에블린 바이레(Evelyne Baylet) 타른에가론 주지사가 프랑스 최초의 여성 주지사였으며, 파리의 경우 1972년 니콜 드 오트클로크(Nicole de Hauteclocque)가 최초의 여성 파리 의회 의장이었으며, 현직 파리 시장 또한 여성정치인 안 이달고(Anne Hidalgo)이다. 인도의 경우 최초의 여성 주지사는 인도 최고의 여류 시인인 사로지니 나이두(Sarojini Naidu)이며 1947년부터 1949년까지 우타르프라데시 주지사를 역임했다. 인도 최초의 여성 주총리는 1963년부터 1967년까지 재임한 우타르프라데시 주총리인 수체타 크리팔라니(Sucheta Kripalani)총리다. 이탈리아의 경우 1981년안나 넨나 단토니오(Anna Nenna D'Antonio) 아브루초 주지사로서 최초의 여성 주지사를 역임했고, 로마 현직 시장 또한 여성변호사인 비르지니아 라지(Virginia Raggi)로 여성 시장이다. 캐나다의 경우, 1991년, 브리티시콜롬비아에서 최초의 여성 주총리 리타 존스톤(Rita Johnston)이 탄생했으며, 수도 오타와는 40년전인 1951년부터 1956년까지 샬롯 휘튼(Charlotte Whitton)이 최초의 여성 시장으로 활약했다.[31] 당선시 미국 워싱턴 D.C뮤리엘 바우저시장, 일본 도쿄도지사 고이케 유리코, 프랑스 파리안 이달고 시장, 이탈리아 로마비르지니아 라지 시장과 더불어 세계 상위 GDP 10위 국가의 여성 수도 단체장 목록에 이름을 올리게 된다. 세계 GDP TOP 10 국가의 딱 절반에 해당하는 국가의 수도 수장이 여성이 되는 것이다.[32] 정치인 특성상 당 안팎으로 정치 싸움을 자주 하기 때문에 늘 스트레스를 받아 인상이 좋지 않는 경우가 많다. 위의 박영선의 MBC 시절과 현재 정치인 시절을 비교해보면 노화를 감안하더라도 인상이 미묘하게 다르다. 이 분야의 대표적 인물은 자유한국당 한선교가 꼽힌다.[33] 대통합민주신당에 흡수 합당[34] 민주당과 신설 통합[35] 시민통합당과 신설 합당[36] 새정치민주연합에 흡수 합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