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역사

 




1. 개요
3. 켈트 시대
5. 중세 시대
6. 근세 시대
7. 근대 시대
8. 현대 시대
9. 관련 문서


1. 개요



우리는 대륙과 이웃하기는 하지만 대륙의 일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항상 잊어서는 안 된다.

-볼링브룩 경-

영국은 유럽이지만 대륙과 바다를 사이에 두고있는 섬나라이다. 그래서 다른 국가의 침공에도 상대적으로는 자유로운 편이었고[1] 유럽의 서쪽 끝에 위치해 있어 바다를 통해 나아가기에 지리적으로 유리했다. 동시에 섬이기는 하지만 유럽 대륙과 거의 붙어있어서 문화적으로 유럽의 영향을 많이 받을 수 있었다.[2] 영국은 마그나카르타명예 혁명 등의 많은 과정을 거치면서 입헌 군주제의 기틀을 다졌고 시민 혁명이 일어나서 민주주의를 발전시키기도 했고 산업 혁명이 본격적으로 일어나는 등 대표적인 강대국으로서 세계적으로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2. 선사 시대


크로마뇽인들이 BC 4만~3만 년 전부터 살고 있었지만 이들은 빙하기 때 종적을 감추었다. 중석기 시대 말까지도 브리튼 섬유럽 대륙과 이어져 있어 떠돌이 사냥꾼들이 가끔 드나들었는데 BC 1만 1천년경 빙하기가 끝나면서 기후가 점점 더 따뜻해지자 툰드라가 삼림으로 바뀌고 매머드 사냥 대신 붉은 사슴과 노루 사냥이 널리 행해졌다. 해빙기 이후 빙하가 녹아 해수면이 점점 높아지면서 BC 6천~5천 년경에, 브리튼이 대륙으로부터 분리되었다. 그 후에는 유럽의 서쪽과 북쪽 해안 지대에서 건너온 이주민들이 BC 4천 년 무렵 농업을 들여왔다. BC 2천 년대 초에 현재의 네덜란드 지방과 라인 강 중류 지방에서 건너온 비커족(Beaker Folk)이 나타났는데 이들이 인도유럽어를 들여왔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브리튼 섬을 장악한 것은 웨식스의 족장들이었는데 이들의 호화스러운 무덤 등이 남아 있고 스톤헨지로 알려진 선돌 기념물을 세울 수 있었다. 스톤헨지는 그 당시 대표적인 순례지로 그 치유력을 믿고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이후에는 콘월아일랜드에서 중부 유럽과 발트 해에 이르는 지역이 서로 연결되었다.

3. 켈트 시대


BC 8세기 무렵부터 켈트족이 등장해 구릉 지대에 성채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BC 2세기에 이르면서 브리튼에는 켈트 고유의 섬 국가 문화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돼지 고기와 맥주를 주로 먹고 드루이디즘 의식이 발달했고 켈트족 특유의 토조 성채를 쌓는 등의 기술이 발전했다. 카이사르가 쓴 갈리아 전기에도 이 내용이 자세히 담겨 있다. 명목상의 왕들[3]도 존재했고 사람에 따라 계급도 나뉘는 등 자신들만의 사회에서 살아갔다. 이후 갈리아의 가까운 지역에서 더 많은 부족들이 이주해 오면서부터 로마의 역사가들에게 이름이 알려진 브리튼의 여러 부족들이 나타났지만 통일된 왕조를 이루지는 못했다.

4. 로만 브리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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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튼인들이 살고 있던 브리튼 남부는 수백 년 동안 로마의 공격을 받아 점령당하게 된다. 브리튼이 로마의 침공을 받은 것이 나오는 첫 번째 기록은 율리우스 카이사르갈리아 전쟁에서다. 카이사르는 갈리아 전쟁 도중 브리튼인들이 갈리아인들을 도와주었다는 구실로 2만 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브리튼을 침공해 명목상의 복속 약속과 인질을 받고 떠난다. 이후 약속대로 공물을 바치지 않자 한 번 더 침공하게 되지만 역시 큰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
기원전 55년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침공 이후 1세기 동안이나 브리튼은 로마 제국과는 무관하게 있었다. 그러나 클라우디우스 황제 때에 여러 귀족들이 새로운 땅을 지배하기를 갈망하게 되면서 브리튼은 다시 공격받게 되었다. 기원후 43년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5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침공해 잉글랜드의 비옥한 평원을 정복했다.[4] 이후에 도미티아누스를 비롯한 여러 황제들이 잉글랜드 북부와 웨일즈를 정복해 잉글랜드의 브리튼인들은 로마인들에게 완전히 복속되었다. 로마 제국에게 점령된 브리튼은 거의 300년 동안 통치를 받으면서 하드리아누스 때는 스코틀랜드와의 접경에 장벽을 세워졌고 안토니누스 피우스 때는 칼레도니아(스코틀랜드)까지 공격받았다. 그러나 칼레도니아 정복은 끝내 실패했다. 하드리아누스 장벽 북부는 스코틀랜드가 되고 남부는 잉글랜드, 웨일스가 된다.
로마가 점령한 브리튼은 로만 브리튼이라는 이름으로 통치되는데 현지 브리튼인들은 로마의 문화를 빠르게 받아들여 로만-브리튼 문화가 만들어졌다. 로만-브리튼 문화는 영국의 지명[5]이나 영어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후 로마 제국이 훈족의 침략과 내전으로 혼란해지면서 410년에는 로마 군단이 철수했다.

5. 중세 시대



브리튼인들은 로마군이 떠난 뒤로 스코틀랜드, 웨일스, 콘월 방면에서 계속 픽트족, 스코트족의 침략을 받았다. 브리튼인만으로 버티는 것이 힘들어지자 유럽 본토에서 대규모로 앵글로색슨족 용병이나 이민자들을 받아들여 게르만족이 잉글랜드로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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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브리튼인과 앵글로색슨은 땅을 두고 전쟁을 벌였고 잠시나마 브리튼인이 앵글로색슨을 저지하는 데 성공하나[6] 결국 바다를 건너 계속 들어오는 앵글로색슨족을 견디다 못한 브리튼인들이 복속되어 7세기경까지 잉글랜드의 지배층은 게르만족이 되었다. 브리튼인 일부는 웨일즈, 콘월 지방으로 대피하였고 대륙으로 건너가 브르타뉴 공국을 건설하기도 했다. 앵글로색슨 국가들 사이의 전쟁 끝에 칠왕국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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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8년 데인족과 웨식스의 영토
이렇게 브리튼족을 웨일즈, 스코틀랜드로 쫒아내고 잉글랜드를 차지한 앵글로색슨족은 8~9세기에 바이킹들의 침략, 이른바 이교도 대군세를 맞이하게 된다. 이때 칠왕국 대부분이 바이킹에게 정복 당하는 등 큰 피해를 입었지만 앵글로색슨족은 과거 브리튼족과 달리 역사의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고 버텨내는 데 성공한다. 칠왕국 중 유일하게 건재했던 웨식스의 국왕 알프레드 대왕이 가열찬 바이킹의 군세를 저지하는데 성공하여 앵글로색슨 왕국들은 간신히 영토를 지켰다. 그러다 마침내, 10세기 초에 웨섹스의 국왕 애설스탠이 아직도 잉글랜드에 남아있던 바이킹 세력을 싹 몰아내고 칠왕국을 통일해 합쳐진 잉글랜드의 왕이 되었다. 에드거 1세에 이르러서는 통일이 확고해졌다. 그러나 11세기에 또 다시 바이킹 군세가 몰려와 덴마크의 왕자 크누트 대왕이 잉글랜드를 정복, 덴마크-노르웨이-스웨덴-잉글랜드에 이르는 강력한 북해제국을 건설한다. 하지만 크누트의 북해제국은 확고하게 융합되지는 못한 채 크누트 사후엔 흐지부지 분열되었고 잉글랜드 역시 참회왕 에드워드의 등극으로 다시 앵글로색슨족의 웨식스 왕국이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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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7년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 1세가 지배한 영토
바이킹이 또또 왔다. 정확히는 노르만족[7]의 수장인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 1세가 잉글랜드 왕위계승권을 주장하여 잉글랜드를 침략한 것이다. 잉글랜드의 왕 해럴드 2세는 1066년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패배해 고작 재위 9개월 만에 전사하고 월리엄 1세를 왕으로 하는 노르만 왕조가 들어섰다. 이후 앵글로색슨 왕조와 영주들을 몰아내고 노르만 왕족과 영주들이 잉글랜드의 지배계급을 차지한다. 공작, 백작, 자작 등으로 이어지는 작위가 있었던 대륙과는 달리 브리튼 섬에서는 전통적으로 여러 앵글로색슨 왕국이 서로 동등한 자격으로 대치하고 있었고 통일 이후에도 세력이 비슷한 영주들이 서로 동등한 위치에 있어서 영주들을 모두 통제하기가 어려웠던 데다가[8] 노르만 정복 왕조 이후에는 프랑스와 영국 양쪽에 넓은 영토를 가진 강력한 노르만 영주들이 등장하면서 이들의 영향력이 컸다.
그러나 앵글로색슨족은 이번에도 살아나는데 성공하는데, 노르만 왕조가 스티븐 왕을 끝으로 단절되고 헨리 2세(헨리 플랜태저넷)가 잉글랜드 왕으로 즉위하면서 프랑스의 절반과 잉글랜드, 잉글랜드 등을 모두 지배하는 앙주 제국이 성립되었다. 리처드 1세 시기에는 3차 십자군 원정에 참여해 맹활약을 했으나 결국 성지 탈환에 실패했고 내정도 파탄을 맞았고 다음 왕인 존 왕은 프랑스 왕국 내의 플랜태저넷의 영지를 대부분 상실해 결지왕, 실지왕, 무영토왕이라고까지 불렸다.[9] 이런 존 왕의 실정에 귀족들과 국민들이 존 왕을 협박해 받아낸 것이 마그나카르타(대헌장)이다. 로빈 후드가 활동한 것도 이 시기다. 이후 국왕과 귀족들의 다툼으로 헨리 3세가 반란군에 패해 포로로 잡히기도 했으나 이내 국왕이 반격하여 강력한 왕권을 확보한다. 그 아들 에드워드 1세는 의회를 최초로 소집했고 웨일스를 복속시키고[10] 스코틀랜드를 잔인하게 정복해 잉글랜드 왕이 스코틀랜드 왕까지 겸하게 되어 스코트인들의 망치라고 불렸다. 그러나 이로 인해 스코틀랜드인들의 독립 운동이 시작되었고 결국 에드워드 2세로버트 1세에게 패배하면서 잉글랜드는 스코틀랜드에서 쫓겨났다. 이후 에드워드 3세 시기가 되면 플랜태저넷이 가진 프랑스 내의 잔존 영토에 대한 지배권과 양털을 보유할 수 있는 플랑드르 확보에 더해서 프랑스의 왕위 계승 문제와 스코틀랜드의 프랑스와의 연대 등이 겹치며 백년 전쟁이 일어났다. 백년 전쟁이 끝나고 1455년에는 랭케스터와 요크의 대결이었던 장미전쟁이 30년간 벌어져 헨리 튜더가 승리를 차지했다.

6. 근세 시대


잉글랜드는 헨리 8세엘리자베스 1세 시기를 거치면서 스페인의 무적 함대를 격파했고 셰익스피어가 활동하기도 했다. 엘리자베스 1세는 후계자가 없어서 잉글랜드의 왕위는 스코틀랜드의 스튜어트 왕가에게 넘어갔고 숙적인 두 국가는 제임스 6세 아래에서 동군 연합을 이루었다. 이후 찰스 1세 시기에는 잉글랜드 내전이 일어나서 올리버 크롬웰잉글랜드 연방이 들어섰고 명예혁명이 일어나서 의회의 승리로 권리 장전을 발표해 왕권을 크게 제약했다. 이 시기에 영국의 인구는 주변 국가에 비해서 많지는 않았고 그나마 잉글랜드, 웨일스 지역이 가장 많았지만 스코틀랜드 지역과 아일랜드 지역도 어느 정도는 보유하고 있었고 모든 지역에서 인구가 계속 증가하고 있었다.

7. 근대 시대



7.1. 그레이트브리튼 왕국


1707년에는 연합법으로 잉글랜드 왕국이 스코틀랜드 왕국과 연합 왕국을 이루어 그레이트 브리튼 왕국이 되었다. 이 시기는 조지라는 왕호의 국왕들이 연달아 즉위해서 조지 시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산업 혁명의 시작되었다고 여겨지는 시대였고 7년 전쟁에서 프랑스의 식민지들을 점령해 세력을 넓히기도 했다. 18세기 후반에는 미국 독립전쟁이 일어나 13개 식민지들이 독립해 나가기도 했다. 영국의 인구는 이 시기부터 다른 지역과 비교해도 빠르게 증가했고 모든 지역에서 그랬지만 특히 잉글랜드, 웨일스 지역과 스코틀랜드 지역에 비해 아일랜드 지역의 인구가 빠르게 증가했다.

7.2.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


1801년에는 명목상의 아일랜드의 왕 직위를 없애고 아일랜드도 연합 왕국의 일원으로 편입시켜 국호를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 왕국으로 고쳤다. 19세기의 대부분을 차지한 빅토리아 시대에는 산업혁명이 가장 활발하게 일어났고 막강한 해군력과 식민지를 바탕으로 전세계에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 시기에 영국의 인구는 어떤 시기보다도 가장 빠르게 증가했던 시기였지만 인구가 계속 증가했던 잉글랜드, 웨일스 지역과 스코틀랜드 지역과는 다르게 아일랜드 지역은 오히려 인구가 크게 감소해서 많은 차이를 보였다. 해당 시기까지 영국의 수도였던 런던의 인구는 수백 년 동안 끝도 없이 성장해서 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위상을 가진 도시로 번성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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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대영제국의 최대 강역
영국은 정치, 산업 등이 발전했고 문화적 성취도 세계 최선진에 있었던 국가다. 유럽 본토의 주류 문화가 귀족 문화에 뿌리를 두고 있었던 것과 달리 영국의 문화는 시민 계급이 주체가 되었다. 당시 귀족들이 즐겨왔던 것과 차별화된 새로운 문화가 나타나서 대중 소설이 나오기도 했다.
이 시기의 영국은 대영 제국이라고 불렸지만 영국 국왕은 한번도 황제를 칭해본 적이 없었다.[11] 대영 제국이라고 불리는 것은 제국주의 시절의 식민지 제국(colonial empire)으로서의 의미가 강했고[12] 영국 국왕의 칭호 중 하나에 황제가 생긴 것은 무굴 제국의 멸망 이후에 인도의 황제를 겸하면서부터다.[13]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정복했던 국가로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고 불리기도 했다.[14] 대영 제국도 식민지에 큰 피해를 남겼는데 표면적으로는 모든 인종이 법 앞에 평등하다고 간주하기도 했지만 현실에서는 열등한 유색 인종들에게는 아직, 어쩌면 영원히 스스로를 다스릴 자격이 없다는 원칙이 적용되기도 했다. 아메리카 인디언 학살, 오스트레일리아의 원주민 학살, 중동/아프리카 지역의 내전 등의 분쟁과 인종주의적인 문제도 일으켰다.

7.3. 전간기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과거 오스만 제국과 사실상 터키를 비롯한 중동 지역의 영토, 독일의 식민지 등을 추가로 얻으면서 영토가 역사상 최대로 넓어졌다. 그러나 과거와는 다르게 19세기 후반부터 엄청난 속도로 산업이 성장했던 미국과 독일이 산업 규모를 따라잡기 시작했고 영국의 여러 산업들의 기술 격차도 이런 국가들에게 추월당하기 시작했다. 전후에는 1921년에 독립을 요구하던 아일랜드 남부를 아일랜드 자유국이라는 이름의 자치령으로 지정해 사실상 독립을 허용하고 1922년에 국호를 그레이트브리튼 북아일랜드 연합 왕국으로 고쳤다. 다른 식민지들도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영국에 인력과 물자를 동원해준 대가를 요구하거나 민족 자결주의의 영향을 받아 점차 차별 대우에 대한 불만이 커지기 시작했다. 이들을 달래기 위해 1931년에는 자치령의 권한을 대폭 확대한 웨스트민스터 헌장을 제정해 자치령에 군사권과 외교권까지 주었지만 이 정도로 각 식민지의 독립 열기를 잠재우기는 어려웠다.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고 나서부터는 세계를 미국소련이 주도하기 시작했고 영국은 상대적으로 영향력이 줄어들었다.

8. 현대 시대


종전 이후 처칠을 몰아내고 권력을 잡은 노동당 정부는 식민 제국의 시기는 지나갔다고 생각하고 제국의 보석이라 불리던 인도의 독립을 약속했던 1948년보다 이르게 승인했다. 1951년에 와서는 보수당조차 후에 '변화의 바람'이라 불리게 되는 식민지 정책을 수용하기에 이르렀고 최대한 평화롭게 식민지의 권력을 현지의 민주 정부에게 주려고 했다.[15] 결국 영국 본토 외의 제국의 국민은 크게 줄어들게 되었고 남은 국민의 절반 이상은 홍콩인들이었다. 중동전쟁에서는 사실상 영국의 위장 식민지였던 이집트를 독립시킨 나세르가 영국의 소유였던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하자 프랑스, 이스라엘과 협공을 펼쳤으나 미국과 소련의 입김에 발을 뺄 수밖에 없었다. 이 사건을 비롯한 여러 가지 이유로 전후 미국(을 주축으로 한 서방)과 소련(을 주축으로 한 공산 국가)의 대결이 국제 사회의 가장 큰 축이었지만 그래도 미국보다 약간 아래로 취급해주기도 했고 자유 진영에서 미국 다음의 강대국으로 생각되었던 영국은 전 세계적으로 미국과 소련에게 대들 수 없을 정도로 약해져버린 국가로 여겨지기까지 했다. 어쨌거나 이를 통해 네덜란드나 프랑스와는 달리 그다지 추악한 신세는 (설사 상대적일지라도) 겪지 않게 되었다.
전후에는 노동당 정부가 앞세운 요람에서 무덤까지(from the cradle to the grave)로 널리 알려진 복지 정책을 펼쳐 영국 국민들의 삶의 질은 세계 최상위였고 1948년부터 전 국민을 상대로 무상의료가 시작되었다. 영국은 당시 산업이 발전하던 다른 유럽 국가들에 비해 느리기는 했지만 큰 위기는 겪지 않고 있었다. 그렇지만 스털링 지역을 유지하려고 파운드화를 지나치게 고평가해 수출 경쟁력이 크게 약화되었고 이런 상황에서 오일 쇼크가 일어나 1970년대 후반부터 IMF의 지원을 받았다. 1970년대에 오면서 대영 제국은 본격적으로 소멸하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식민지들이 독립해나간 것도 있지만 영국이 유럽 경제 공동체(EEC)에 가입하면서 대영 제국 국가들 사이에 있던 관계가 변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 이전에는 영국과 영국에 법적[16]으로 종속된 국가들인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등의 국가와의 무역이나 인적 자원 이동에 상대적으로 큰 제한이 없었다. 이 국가들은 프랑스의 주요 수출품과 겹치는 농산물이나 축산 제품들을 영국에 주로 판매했는데 일단 규모가 다르고 관세도 없으니 가격이 상대적으로 프랑스산에 비해 저렴했다. 그래서 자국의 농업이 위축되는 것을 바라지 않던 프랑스는 영국이 유럽 경제 공동체에 가입하는 것을 반대했고 영국은 과거 대영 제국에 속했던 국가들과 유럽 중 하나를 택해야 했는데 결국 유럽을 선택하기로 결정하고 1973년에 유럽 경제 공동체에 가입했다. 이 영연방 소속의 국가들은 대양을 건너야 있는 영국 경제에 상당수 의존해서 후폭풍은 엄청났다.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는 영국과 법적 종속 관계를 청산하기로 결정하고 캐나다는 1982년, 호주와 뉴질랜드는 1986년에 법 제정을 통해 윈저 왕조 치하의 (영국과 동등한) 입헌군주제 주권국들이 되었다.
1982년에는 포클랜드 전쟁에서 승전했지만 그걸로 대영 제국의 위세를 다시 드높이기에는 무리였다. 비슷한 시기에 영국은 식민지들의 주민이 식민지 주민이라는 자격만으로 영국 시민권을 쉽게 받을 수 없게 법을 제정하고 난 뒤에 중국덩샤오핑홍콩 반환 교섭을 진행했다. 1982년부터 시작된 교섭은 1984년 홍콩 반환과 관련된 중영공동성명을 통해 덩샤오핑이 구상한 일국양제 원칙이 관철되어 사회주의 체제를 홍콩에 적용하지 않고 기존 자본주의 시스템을 그대로 유지하는 내용의 협정이 체결되어 홍콩이라는 영국의 마지막 식민지는 이렇게 해체되었다. 반환식은 영국의 통치력이 미치는 마지막 날인 1997년 6월 30일 홍콩 컨벤션센터에서 열렸고 찰스 왕세자와 당시 영국 총리였던 토니 블레어를 비롯한 영국의 최고위 인사들이 참여했다. 밤 11시 58분에 조용히 영국의 국가인 God Save the Queen이 연주되는 사이에 유니언 플래그가 홍콩에서 내려지기 시작해서 유니언 잭과 식민지 기가 완전히 내려진 7월 1일 0시에 오성홍기와 새로 만들어진 홍콩 특별 행정구 기가 중국의 국가와 함께 울려퍼지면서 홍콩에 올라가면서 영국의 식민지 경영, 이른바 대영제국의 시대는 공식적으로 막을 내린다.
이후 21세기가 개막되면서 영국은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1973년 유럽 연합(EU) 가입이래 제한적이나마 유럽 대륙과 발걸음을 맞춰가고 있었지만 내부적으로는 탈퇴를 주장하는 목소리가 지속적으로 있어 왔고, 2016년에 실시된 국민투표 결과 51.9%의 유권자가 탈퇴에 찬성함으로써 공식적으로 브렉시트를 선언하고, 2020년 1월 31일자로 유럽 연합에서 탈퇴하게 된다. 이에 따라 유럽연합 잔류시 더 이익을 보는 스코틀랜드 지역이 투표결과에 반발하면서 2014년에 부결되었던 독립투표를 재추진하게 되는 등 영국사회 전반이 급격한 변화를 맞고 있는 중이다.

9. 관련 문서



[1] 게르만의 침공, 바이킹의 침공, 프랑스 지역의 노르만의 침공, 명예 혁명으로 인한 네덜란드의 지배 등 침입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2] 영어도 게르만 문화와 로망스 문화의 영향으로 발전했고 프랑스에서 들어온 예의 중시 문화 같은 개념이 생겨났다. 영국과 가장 가까운 유럽 대륙 부분이 프랑스-로망스 문화권과 독일-게르만 문화권을 나누는 라인 강 하구의 저지대 플랑드르 지방이어서 프랑스와 독일 양쪽에서 문화와 언어를 받아들일 수 있다는 이점을 누렸다.[3] 왕이라는 칭호만 있지 사실은 부족장에 가까웠다.[4] 부디카의 반란을 제외하면 브리튼인들이 별 저항없이 항복해서 로마가 쉽게 정복할 수 있었다.[5] 예를 들어 영국의 지명 중 맨체스터나 윈체스터같이 뒤에 체스터가 붙는 도시는 과거 로마군의 야영지나 성채였던 곳이 도시로 발전한 것이다.[6] 이때 활약한 것이 아서 왕 등이다.[7] 프랑스 노르망디에 정착한 바이킹, 즉 바이킹계 프랑스인이다[8] 프랑스와 같이 친족들을 영주들의 우두머리인 공작 등으로 봉하는 것이 불가능했다.[9] 다행히 가스코뉴를 비롯한 일부 영지는 지켜냈다.[10] 명목상의 복속은 되어 있었지만 실질적인 지배를 하기 위해서 전쟁을 벌인다.[11] 유럽에서의 황제(Emperor)란 로마의 지배자라는 의미와 통하는 경우가 많아서 비잔티움 제국과 그 정통성을 계승한(혹은 그렇다고 주장하는) 라틴 제국, 트레비존드 제국, 니케아 제국, 러시아 제국, 오스만 제국 등과 가톨릭의 권위로 서로마를 계승한 신성 로마 제국 등이 황제를 썼다.[12] 프랑스는 왕국, 공화국, 제국 등의 본국의 정치 형태와 상관없이 모든 시기를 통틀어서 프랑스(식민)제국이라 불렸다.[13] 영국은 19세기부터 인도를 거의 완전히 통치하고 있었지만 세포이 항쟁을 거쳐 1872년 빅토리아 여왕이 인도 여제 칭호를 사용하기 전에는 이미 세력이 약해진 무굴 제국의 황제가 명목상 인도의 황제였고 영국은 동인도회사를 통해 간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14] 뉴질랜드와 영국 사이의 시간차는 12시간으로 정반대에 있어서 대영 제국에서 완벽히 해가 지는 것을 보는 것은 일반적으로 불가능했다.[15] 이 정책에 대해 이미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을 펴면서 흑인들은 미개해 자치할 능력이 없다고 본 남아프리카 연방의 지배층들은 크게 반발했고 결국 1961년 영연방을 탈퇴해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되었다.[16] 영국의 의회에서 저 국가들의 법을 제정하거나 그 국가들의 의회에서 만든 법안을 부결시키는 것도 가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