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일랜드/역사
1. 개요
짧게 보는 아일랜드의 역사.
2. 구석기
12,500년 전 ~ 10,000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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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 빙기 시절 빙하의 이동과 인간의 유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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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석기 시대 아일랜드식 움막집.
구석기 시대(Palaeolithic)인 약 12,500년 전부터 브리튼 제도와 아일랜드 섬에 인류가 거주한 흔적이 발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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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은 칼 자국이 새겨진 곰의 뼈. 오른쪽은 아일랜드, 클레어의 그웬돌린 동굴.
상당한 양의 구석기 시대의 구석기들이 발견되어져 온 반면에 아일랜드에서 구석기 시대의 정착지를 확실하게 찾은 것은 전무하다. 하지만 1903년에 앨리스(Alice)와 클레어(Clare)의 그웬돌린 동굴(Gwendoline Cave)에서 곰의 뼈가 발견되었는데 그 뼈는 석기들과 더불어 절단 표식의 깨끗한 흔적들이 보이고 방사성 탄소 연대(Radiocarbon dated)가 약 12,500년 전 무렵으로 나왔다.[1]
3. 중석기
10,000년 전 ~ 6,000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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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렵 채집인들의 움막집.
중석기 시대(Mesolithic) 이후 북극 만년설들의 후퇴에 따라 기후가 더욱 혹독하게 변화했던 때가 중석기 수렵 채집인들이 아일랜드에 퍼진 가장 이른 시기라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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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은 킬그레니 동굴. 오른쪽은 내부 모습.
하지만 아일랜드 남서부에 있는 먼스터(Munster) 지역의 킬그레니 동굴(Kilgreany Cave)에서 발견되어 온 흔적들이 약 11,000년 전일 여지가 있다.[2] 일부 학자들은 그 시기에 아일랜드와 브리튼 섬이 연결되어 육로가 존재했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는 반면에 더 최근의 연구들은 일부 지역들에서 기후가 아직 춥고 그 지역 빙하들이 있었을 때인 약 16,000년 전 무렵에 브리튼 섬 본토로부터 아일랜드 섬이 분리되었을 것이라 보고 있다.
4. 신석기
6,000년 전 ~ 4,500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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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식 고인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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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3200년 전후 아일랜드 미스 주(County Meath) 브루 나 보이네(Brú na Bóinne) 지역 보인 강 북쪽으로 1km 떨어진 곳에 건설된(지어진) 유명한 신석기 시대 아일랜드식 통로 돌무덤(Irish Passage Stone Tomb) 유적인 뉴그랜지(Newgrange).[3]
신석기 시대(Neolithic)인 약 6000년 전까지 아일랜드에는 수렵 채집하는 사람들이 남아 있었다. 현존하고 있는 신석기 유적들의 흔적을 보면 이들은 이베리아 반도에서 갈라져 나와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한 이베리아인의 한 분파인 것으로 추정된다.
코노트 시드 평원(Ceide Fields in Connacht)의 탐험으로 높은 신석기 시대의 문화와 도기류의 등장에 의한 특징, 정교한 석기들, 직사각형의 나무 집들, 공동 거석 무덤들(Communal Megalithic Tombs)에 이르는 다양한 생활 흔적들이 발견되었고 크노스(Knowth)와 도스(Dowth)에서의 무덤들 중 일부는 거대한 돌 기념물들과 통로 무덤들(Passage Tombs of Newgrange)이 발굴되었다. 고인돌과 코트 케언, 통로 무덤들, 쐐기 모방의 갱도 묘들로 식별되어 온 아일랜드 거석 무덤들(Irish Megalithic Tombs)의 4개의 주된 양식들이다. 렌스터와 먼스터 지방에서 각각의 성인 남성들이 흙 제방들 아래에 조각들이라 불리는 작은 돌 구조물들 안에 매장되어 있었고 독특한 장식이 된 도기류도 첨가되어 있었다. 이 시기에 섬은 인구 밀도가 더욱 높아지게 되었고 신석기 시대 말엽에 가까워질 무렵 원형의 제방 울타리들과 원형의 제방 목재, 돌, 배치되고 움푹 들어간 원들과 같은 새로운 형식의 기념물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5. 청동기
기원전 2500년 ~ 기원전 500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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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기 시대 초기 아일랜드식 스톤헨지.
청동기 시대(Bronze Age)인 약 2000년 전 무렵 아일랜드에서 정교한 금, 청동 장식, 무기, 도구들의 생산물이 보인다. 공동 거석 무덤들의 건설에서 묘지들, 원형의 대지 또는 석조로 지어진 흙 무덤들, 케언으로 알려진 매장지에 위치 할 수 있는 작은 돌 조각들, 단순한 구덩이들로 죽은 자의 매장에 이르기까지의 움직임이 있었다. 시대의 경과에 따라 흡착 매장은 화장으로 이어졌고 청동기 시대 중기에 유물들은 자주 대형 매장 유골 단지 아래에 놓여지게 되었다.
민족적 구별이라고 부를 만한 인류 정착이 시작되었고 현 아일랜드의 원주민인 켈트족의 게일인들이 이때 유입되었다. 신화에서는 밀레시안의 상륙으로 묘사되고 아일랜드 신화 대계(Mythological cycle)의 주 배경이 되는 시대다. 이 당시를 설명하는 후세의 문헌들은 미신적 화소가 대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에 실제 역사적 사건이 어디까지인가 하는 논쟁이 있다.
일반적으로 신족인 투아하 데 다난은 기독교 상륙 이전 아일랜드의 애니미즘 토속 신앙을 인격화한 것이라고 추정된다. 포보르 역시 허구의 존재거나 비문명화된 야만 부족을 상징한다. 반면에 피르 볼그와 밀레시안은 당시 청동기 부족을 이끌었던 실존하는 연맹 국가와 군장들의 이야기가 다수 포함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6. 철기
기원전 500년경 ~ 기원후 500년경
아일랜드의 철기시대는 대략 기원전 500년경에 시작되었다. 기원전 6세기경 여러 켈트 왕국들의 흔적들이 문헌 기록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근처 브리튼 섬이나 지중해 지역과 교류를 하거나 약탈을 하였다. 철기 후기까지도 아일랜드 역사는 신화사가 큰 비중을 차지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아일랜드 신화의 4대 대계 중 얼스터 대계(Ulster Cycle)와 피니언 대계(Fenian Cycle)가 이 시대를 다루고 있다. 대표적으로 쿠 훌린 같은 영웅들의 활약이 유명하다.
7. 고대 시대
8세기 무렵 아일랜드 섬의 왕국들을 지배하는 부계 왕조들(Patrilineal Dynasties)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로마 제국이 지금의 영국 잉글랜드 지역에 해당하는 브리타니아를 점령했을 때도 아일랜드에는 미치지 않아 켈트족의 고유 문화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당시 로마 제국에서는 아일랜드 섬을 '히베르니아(Hibernia)'[4] 라고 불렀다. 다만 아일랜드인들은 로마 제국의 용병으로 고용되기도 했다.
게일인 시대의 아일랜드는 5개 ~ 9개[5] 의 왕국들로 이루어졌다. 이 왕국들을 쿠어거(Cuaighe)라고 한다. 아일랜드의 다섯 지방으로 알려진 울라(얼스터), 무운(먼스터), 라긴(렌스터), 코나크타(코노트), 미데(미스)들이 이런 쿠어거들이었다. 각 쿠어거들은 투어허(Tuatha)[6] 라는 수많은 소왕국들로 나뉘었다. 쿠어거의 왕을 리(Rí)라고 했다. 또한 아일랜드 섬 전체에 대한 군주로서 쿠어거의 리들 위에 아르드리(Ard Rí, High king)가 있었다. 아일랜드 신화에서는 아르드리가 기원전 190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그건 말이 안 되고 적게 잡으면 846년, 최대한 높여도 459년에야 아르드리가 출현했다. 아르드리의 왕위는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각 쿠어거의 리들 중 힘센 자가 아르드리를 겸했다. 그래서 쿠어거들은 국력이 좀 강해졌다 싶으면 군사를 일으켜 아르드리에게 도전했다. 아르드리의 권한은 강하지 않았고 지극히 형식적인 왕위였다. 미데의 플란 너 시나너, 무운의 브리안 보루마 등의 아르드리가 통일을 시도했으나 모두 실패했고 아일랜드는 중세 내내 통일 국가를 이루지 못한다.
4세기 로마 제국이 쇠퇴하던 시기에 아일랜드의 켈트족들은 오히려 브리튼 섬의 웨일스(Wales), 콘월(Cornwall) 지역까지 진출하기도 했었다.[7] 이들이 그 땅에 세운 왕국들 중에서 단명하지 않은 유명한 국가로는 웨일스 남서부 지역의 더버드(Dyfed) 왕국과 남부 지역의 브레콘(Brycheiniog) 왕국이 있고 둘 다 500년 이상 유지되었다.
5세기에 아일랜드에 가톨릭을 전파했다고 알려진 성 파트리치오(St Padraig, Saint Patrick)도 노예로 잡혀갔다가 가톨릭에 귀의하여 일련의 선교사들과 함께 켈트족들에게 가톨릭을 전파했다. 아일랜드는 기존의 켈트 다신교인 드루이드 신앙 체제가 소멸하고 600년경에 거의 완전히 가톨릭화한 것으로 추정된다.
8. 중세 시대
8.1. 바이킹의 침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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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킹의 아일랜드 침략을 묘사한 그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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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킹이 아일랜드 섬에 침입한 경로.
8세기 말 바이킹들이 본격적으로 활약하기 시작할 무렵에 아일랜드 섬도 약 2세기에 걸친 기간 동안 그들의 침공을 받았는데 당시 아일랜드 섬에 있던 여러 왕국들은 바이킹에 맞서 싸우기엔 역부족이었다. 795년에 처음 아일랜드를 공격한 이래 여러 지역에 걸쳐서 그들이 점령한 거점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852년 현대 아일랜드의 수도인 더블린도 그들이 이 땅의 원주민인 켈트족들을 쫓아내고 건설한 거점들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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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맨 섬에 위치한 라운드 타워.
아일랜드 동부 지역에 분포하고 있는 원통형의 석탑인 라운드 타워[8] 는 중세 시대에 망을 보거나 바이킹의 침략에 대비하고 피하기 위해 지어진 토착민들의 방어 시설이었다. 서로마 제국의 멸망과 더불어 게르만족의 이동으로 많은 성직자와 학자들이 아일랜드로 망명하여 중세 아일랜드는 문예의 부흥기였다. 하지만 바이킹의 침략과 약탈로 아일랜드의 학문적 전통이 끊어지고 방대한 기록 유산들이 멸실된다. 노르드인은 곧 토착 아일랜드인과 통혼하면서 혼혈 집단을 이루었고 이들의 후예는 갤로우글라스라고 불리는 무력 집단이 되기도 하였다.
8.2. 잉글랜드의 침략
1167년에 아일랜드에 대한 잉글랜드의 침략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1169년에는 노르만 왕조의 제2대 펨브로크 백작이었던 리저드 드 클레어가 아일랜드를 침공한 후 아일랜드는 노르만 왕조의 직할령이 되었고 이후 약 700년간 잉글랜드의 통치를 받게 된다. 당시 아일랜드 섬도 유럽 각지의 소국들과 마찬가지로 여러 왕국들로 나뉘어 있었는데 서부 지역의 코노트 왕국(Kingdom of Connacht)이 힘을 얻어 동남부 지역의 렌스터 왕국(Kingdom of Leinster)[9] 국왕을 추방시켜버리자 렌스터 왕국의 국왕이 잉글랜드 왕국의 국왕인 헨리 2세[10] 에게 지원병을 요청해 벌어진 일이었다.
1171년 헨리 2세는 손수 군대를 이끌고 아일랜드 섬을 침공하여 일부 지역을 정복했지만 이 당시 잉글랜드 국왕의 지배력은 더블린을 비롯한 일부 지방 거점들로 한정된 것이었고 켈트족의 소왕국들은 여전히 건재했다. 이후 아일랜드의 영지를 갖고 있는 노르만계 잉글랜드인 귀족들은 잉글랜드 국왕의 묵인하에 켈트족 소왕국들과 크고 작은 전쟁을 벌여 결국 대부분 동화되어 사라지게 만들었다.[11]
9. 근세 시대
1542년에 잉글랜드 왕국의 국왕인 헨리 8세는 아일랜드를 완전히 정복하고 아일랜드 왕국(Ríocht na hÉireann, Kingdom of Ireland)을 세워 아일랜드 왕국의 국왕으로 즉위했다. 잉글랜드 왕실은 아일랜드에 개신교 성공회를 내세워 종교 탄압을 시도했으나 그 정도가 극단적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1652년 청교도 정권이 들어선 후 아일랜드인에게 이주민 3천명이 학살당하자 올리버 크롬웰은 반란 처단과 탄압을 하였다.[12] 아일랜드 본토 켈트족들과 대립시키기 위해 청교도 스코틀랜드계 켈트족들을 데리고 온 것도 이때다. 이 시기 원래 그 땅에 살던 가톨릭 교도들을 대거 내쫓으면서 크롬웰은 '지옥이나 코노트로 가라'라는 말을 했다고 하는데 코노트는 아일랜드 서부의 척박한 지대고 게일어 거주 구역이 이곳에 분포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이때 크롬웰이 이주시킨 스코틀랜드계 청교도 켈트족들은 스코틀랜드에서 가까운 북동부 얼스터 지방에 모여 살면서 완전히 정착하게 되는데 이들이 토착민들보다 점점 머릿수가 많아지면서 현재의 북아일랜드 지역을 장악했다. 1694년에는 잉글랜드 왕국의 국왕인 윌리엄 3세의 원정으로 인해 아일랜드 왕국에 대한 압제는 더욱 심해지게 된다.[13]
10. 근대 시대
1798년에 영국의 지배에 시달리던 아일랜드인들은 프랑스 혁명의 영향을 받아 대규모의 독립 운동을 일으켰지만 실패했고 그 후로 더욱 혹독한 탄압에 시달리게 되었다.[14] 이 시기에는 가톨릭, 개신교 할 것 없이 투쟁에 참여했는데 당시 영국의 출신 지역 차별 정책에 대한 반발 때문이었다.[15] 그러나 이것을 감지한 영국이 지역 차별 정책을 철폐해 투쟁의 정치적인 면은 서서히 약해지고 종교적인 면이 강해졌다. 그 이유는 영국이 아일랜드 개신교도 차별을 철폐하고 아일랜드 민족 진영이 가톨릭교도들의 해방을 요구했는데 아일랜드 개신교도들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얼스터 거주민들이 이에 반대하여 친영 진영으로 갈아탔기 때문이며,[16] 이 변화는 훗날 아일랜드의 독립 투쟁을 영국이 가톨릭 vs 개신교의 종교 분쟁으로 아일랜드가 식민 vs 반식민의 이념 분쟁으로 보게된 원인이 되었다. 실제로 19세기와 20세기 당시 민족 진영의 구성원들은 대다수 가톨릭교도[17] +소수 개신교도[18] , 친영 진영은 소수 가톨릭교도+대다수 개신교도[19] 였다.
10.1. 영국 병합
1801년 이전까지는 형식상의 동군연합이었지만 연합법에 따라 잉글랜드 왕국과 스코틀랜드 왕국이 합병하여 형성한 그레이트 브리튼 왕국(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과 아일랜드 왕국은 그레이트 브리튼 아일랜드 연합 왕국(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Ireland)으로 병합되어 공식적으로 한 국가가 되었다.
10.2. 아일랜드 대기근
아일랜드인의 반영 감정을 결정적으로 자극하게 된 감자 대기근은 19세기 중반에 일어났다. 감자가 전래된 후로 아일랜드인은 감자를 주식으로 삼았는데[20] 상품상의 이유로 럼퍼[21] 라는 이름의 한 가지 품종의 감자만 키우다가 이 품종을 숙주로 하는 전염병이 생겨 1848년에 아일랜드 대기근이 벌어졌다. 1840년대의 아일랜드 인구는 절정을 이루고 있었는데 이때 수백만명이 병사/아사하고 수백만명이 이민을 가서 인구가 계속 줄어든 이후로 아일랜드 전체의 인구도 아직까지 그때 수준으로 회복하지 못했다.
감자 대기근이 벌어지는 와중에도 아일랜드에는 밀과 고기 등이 넘쳤기에 그것들만 풀면 대기근이 그렇게 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영국은 아일랜드에서 재배한 모든 곡식들을 배에 실어서 브리튼 섬으로 운반했고 영국의 반대로 영국 상인들은 밀을 구호품으로 쓰지 않았다. 이때 다수의 아일랜드인이 굶어죽는 것을 피하기 위해 배에 타고 대부분 미국으로 건너갔고 미국뿐만이 아니라 전세계에 퍼져서 많은 지역에 아일랜드인 공동체 생기는 계기가 되었다.
미국으로 이주한 아일랜드인도 순탄한 삶을 산 건 아니었다. 당시 아일랜드계 미국인은 '''하얀 흑인'''이라 불릴 정도로 매우 낮은 대우와 더불어 차별을 당했다. 미국이 아니더라도 아일랜드 이주자라면 고장을 불문하고 핍박받는 것이 예사였다. 1970~80년대까지만 해도 "No Irish, No Blacks, No Dogs"라는 구호를 보기 힘들지 않을 정도였다. 아일랜드인은 '패디'(Paddy)라고도 불렸는데 '패디 왜건'(Paddy Wagon)은 속어로 경찰차를 뜻하는 말이다. 기근을 피해 피난 온 빈곤층 출신이기도 했고 영국계의 WASP들이 유난히 아일랜드인만을 천시했기 때문이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주연의 영화 <갱스 오브 뉴욕>(Gangs of New York)에도 이러한 영국계 미국인들이 아일랜드계 미국인들을 멸시한 부끄러운 역사들의 그림자가 잘 드러나 있고 영화 '타이타닉'에서도 주인공 잭 도슨이 아일랜드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칼 헉슬리에 의해 천대받고 로즈와의 교제를 금지당하는 것이나 그 외 모든 아일랜드인은 3등석에서만 탑승하도록 격리 조치를 취한 설정 등이 나온다. 그러나 그 아일랜드계 이민자들도 수십년 후에 집중적으로 오기 시작한 이탈리아인에게 엄청 텃세부리고 차별했다. 사실 아일랜드계 뿐만 아니라 미국에서 이미 자리잡은 사람들이 나중에 오는 사람한테 텃세부리는 건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오랜 전통이었다.
아무튼 이런 이유로 아일랜드인의 반영 감정은 심각해졌다. 이 과정에서 입헌 투쟁을 벌였던 19세기 민족주의자 대니얼 오코넬(Daniel O'Connell)[22] 의 운동이나 아일랜드어를 살리기 위한 아일랜드 문예 부흥 운동이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William Butler Yeats)와 존 밀링턴 싱(John Millington Synge) 등의 주도로 일어나기도 했다.
11. 현대 시대
11.1. 자치 운동
내셔널리즘 열풍이 거세게 불자 아일랜드인들의 독립 의지는 점점 강해져갔고 19세기에서 20세기에 걸쳐 수많은 무장 봉기가 일어났으나 번번히 진압되어 독립은 좌절되었다. 그래도 아일랜드는 영국 영토인만큼 영국 본토처럼 지역에서 선거를 통해 의회에 진출한 사람들이 있었고 이들을 중심으로 아일랜드인들의 들끓는 여론이 중앙 정치계에 전달될 수 있었다. 이에 영국 자유당을 중심으로 19세기 중반부터 아일랜드에 자치를 허용하는 방안이 제안되었다. 오늘날의 스코틀랜드, 웨일스처럼 현지에서 양원제 의회를 구성하고 아일랜드에 관련된 입법 권한의 많은 부분을 영국 중앙 정부 의회에서 새로 생길 아일랜드 자치 의회에 넘기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영국 본토에서는 영국 보수당을 중심으로 이 방안에 대해 연합 왕국을 해체할 것이라며 격렬한 반발이 일었고 아일랜드 내에서도 가톨릭이 대다수인 아일랜드 대부분의 지역과는 다르게 신교도가 주류였던 얼스터 지역은 자치 방안에 대해 결사 반대했다. 결국 자치 논의는 더 진전되지 못했다.
1910년대에는 총선에서 보수당과 자유당이 하원에서 비슷한 의석을 점하고 아일랜드 자치를 주장하는 아일랜드 의회당(Irish Parliamentary Party)이 약간의 의석을 가져 캐스팅 보터가 되었다. 그리고 자유당이 아일랜드 의회당과 연립 정부를 꾸리면서 자유당 정부가 아일랜드 의회당의 요구를 반영해 1911년에 아일랜드 자치 법안을 하원에 상정했다. 이 때에도 격렬한 논쟁이 일어 아일랜드 자치 법안은 하원에서 가결되었지만 보수당이 다수인 상원에서 거부되기를 3번이나 반복했다. 결국 하원에서 상원의 거부권을 무력화하고[23] 바로 국왕 조지 5세에게 법안을 넘겼다. 그러나 이 법안이 결국 의회를 통과하자 얼스터에서는 난리가 나서 얼스터 연합주의자(친영 진영)와 아일랜드 민족주의자가 민병대를 구성해 폭력 사태를 벌이는 등 혼란에 빠졌고 결국 조지 5세는 법안 재가를 연기했다. 그리고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영국 의회는 자치 법안을 보류하는 법안을 통과시켰고 조지 5세가 이 법안을 아일랜드 자치 법안과 함께 재가하여 아일랜드 자치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로 미뤄졌다.
11.2. 독립 운동
이렇게 '합법적' 자치 운동이 지체되자 1916년에는 독립 전쟁의 서막으로 불리는 '부활절 봉기'가 일어나기도 했고 결국 아일랜드 공화국군(IRA)이 조직되어 영국에 대한 무장 독립 운동을 벌이기에 이르렀다. 제1차 세계 대전 무렵에는 일부 아일랜드 출신 군인들이 독일군에 협조하여 영국을 뒤에서 치는 계획이 시도되기도 했다.[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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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1918년에 영국에서 총선이 치러졌다. 여기서는 신페인이 북아일랜드를 제외한 아일랜드 거의 전역의 의석을 석권했다. 그리고 아일랜드 지역구에서 당선된 신페인 국회 의원 73명은 당선되자마자 따로 아일랜드 의회(Dáil Éireann)를 차려 아일랜드 공화국(영어: Irish Republic, 아일랜드어: Poblacht na hÉireann 또는 Saorstát Éireann)의 독립을 선언하고 영국 의회 등원을 거부했고[25] 이들과 영국 정부 사이에서 아일랜드 독립 전쟁이 일어났다.
아일랜드 독립 진영은 규모로 영국에 대적할 수 없는 수준이었으므로, 이들은 영국의 공공 기관을 공격하고 후퇴하는 식의 게릴라 전술을 사용했다. 영국은 독립 진영의 군사 조직 IRA가 공격에 나서지 않는 한 이들을 민간인과 구분할 수 없으므로 아일랜드에 계엄령을 발동해 아일랜드 민간인들을 수색하고 통제하는 정책을 취했다. 그 과정에서 영국군이 민간인의 집을 불태우고 그들을 죽이는 일도 있어 아일랜드 민중의 영국에 대한 반감을 높였다. 그리고 이렇게 아일랜드 민간인들이 피해를 보면 IRA는 더 강경한 공격을 하게 되고 다시 영국군이 강경한 대응을 하는 등 폭력이 끝없이 이어졌다.
아일랜드 독립 진영은 더 나아가 투쟁 전선을 잉글랜드로 확대하여 잉글랜드에서도 요인 습격, 공공 기관 습격 등의 군사 행동을 하였다. 영국 정부는 영국 본토에도 계엄령을 발동하는 것을 고려했지만 영국 국민들이 1차대전에 지쳐 반대하는 바람에 달성되지 못했다.
한편 영국의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내각은 1920년에 친영 세력이 많은 북아일랜드와 남아일랜드 각각 따로 자치 의회를 만들기로 했다. 그러나 남아일랜드의 자치 의회는 128명의 의원 중 친영 진영에 속한 4명을 뺀 124명이 신페인 당원이었고[26] 이들은 자치 의회의 의정 활동을 거부했다.
11.3. 자유국과 내전
결국 영국은 1921년에 아일랜드를 '아일랜드 자유국'이라는 이름으로 당시 캐나다, 호주와 같은 자치령으로 지정할 것을 약속했다. 하지만 아일랜드 독립 세력에게 자치령 지정은 못미더운 것이었다. 자치령은 비록 폭넓은 자치를 누리지만 군사권과 외교권을 영국 본국이 갖고 영국 국왕을 국가 원수로 섬겨 아일랜드에 그를 대리하는 총독을 두어야 하는데 그들은 완전한 독립국 아일랜드의 건설을 바랐기 때문이다. 또한 자치령 지정을 약조한 영국-아일랜드 조약에서 신교도가 다수인 얼스터 지역 6주를 영국의 직접 통치 지역으로 남길 것을 규정하자[27] 아일랜드 독립 세력은 조약 찬성파와 조약 반대파로 분열했다. 조약 찬성파는 조약이 못미더웠지만 이것을 발판으로 완전한 독립을 이룰 수 있으리라 보아 조약에 동의했고 조약 반대파는 완전한 독립과 아일랜드 분단을 이유로 반대했다. 아일랜드 의회에서 조약 비준안이 근소한 차로 통과하자 에이먼 데 벌레라 등의 조약 반대파는 아일랜드 자유국 정부의 모든 지위에서 사퇴하고 별도의 무장 세력을 꾸려 아일랜드 내전을 치르게 된다. 이 와중에서 독립 영웅 중 하나인 마이클 콜린스가 조약 반대파에 의해 살해당하기도 했다.
결국 내전은 조약 찬성파의 승리로 끝나게 되었다.
한편 이 내전은 아일랜드 역사학을 비롯한 아일랜드 향토를 다루는 학문 분야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내전은 앞서 말한 조약 반대파가 더블린의 아일랜드 대법원인 포 코츠(Four Courts)를 점거하고, 자유국 정부군이 이를 진압하면서 시작하였다. 이 과정에서 포 코츠 바로 뒤에 있던 문서 보관소가 포격에 피해를 입으면서 수백년에 걸쳐 쌓인 아일랜드 관련 기록물이 대규모로 손실되었다. 이 때문에 아일랜드 향토를 다루는 학문 분야는 심각한 자료 부족에 시달리고 있다.
11.4. 독립
내전이 끝난 후 데 발레라를 비롯한 많은 조약 반대파측 인물들이 체포되었으나, 내전이 끝난 직후 유화정책을 취한 자유국 정부에 의해 대부분이 짧은 기간 안에 풀려났다. 1926년 반조약파의 거두였던 에이먼 데 벌레라가 무장 투쟁을 포기하고 합법 투쟁을 주장하며 자유국의 정계에 참가할 것을 선언하였고, 피어너 팔(공화당)을 창당하여 이듬해 의원에 당선되었다.
피어너 팔이 집권하면서 아일랜드 독립은 더욱 가속화된다. 피어너 팔이 집권한 1932년부터 아일랜드 자유국 정부는 영국의 흔적을 최대한 배제하는 방향의 정책을 취하게 되는데, 1937년 신헌법을 선포하면서 국명을 에이레(영어명 아일랜드)로 변경했고, 공화국임을 선언하면서 대통령직을 신설하고 영국 국왕이 임명하는 총독 집무실을 폐쇄했으며, 더 이상 영연방에 속하지 않는다 선언했다. 1937년 조치와 함께 아일랜드는 '''사실상''' 영연방 활동을 중단하고 ''"사실상''' 영국 국왕의 아일랜드 국가원수 대우를 폐지한다. 어차피 자유국 성립 시기부터 영국 국왕과 그가 임명하는 총독에게는 실질적 권한이 거의 없는 상황이었지만, 1937년 조치로 총독에 대한 예우 일체가 사실상 폐지되면서 영국 국왕에 대한 국가원수로서의 예우도 사실상 폐지된다.
아일랜드는 제2차 세계대전 참전을 거부하고 중립 입장을 취했다. 아일랜드 국내는 독일 편에 참전해야 한다는 여론도 있었고, 영국의 윈스턴 처칠은 아일랜드를 연합군 편으로 참전시키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음에도 아일랜드는 중립에 머물렀다.
11.5. 2차대전 이후
1948년 제2차 세계대전 후 아일랜드 공화국 법을 제정해 영국 국왕에 대한 국가원수로서의 예우를 완전히 폐지한다.
1949년 영국은 인정하길 거부하던 아일랜드의 영연방 탈퇴를 마침내 승인한다.
독립과 전후 시기 아일랜드 인구는 조금씩 증가하기도 했지만 오랜 정체를 겪고 있었다. 서유럽에서는 상대적으로 빈국으로 남아있던 아일랜드는 상당 기간 인구 성장에도 불구하고 1980년대 후반 들어서 다시 일부 사람들이 이민을 떠났다[28] . 하지만 1990년대 후반부터 시장 개방을 통해 이민을 많이 받고 외국의 투자를 유치해 산업을 빠르게 성장시키면서 서유럽에서도 가장 부유한 국가 중 하나가 된다. 이 과정에서 2008년 금융 위기 당시 구제 금융을 받을 정도로 타격을 꽤나 심하게 받았으나 현재는 꾸준한 회복세를 보이는 중이다.
[1] 출처:BBC_2, Earliest evidence of humans in Ireland.#[2] 출처:Prehistoric-Waterford, Kilgreany Cave.#[3] 아일랜드어로 시 안 브루(Sí an Bhrú)라고도 불리는 이 유적 안에는 석실들이 있는데 동짇날 석실 내부로 햇빛이 들어오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일종의 종교적 중요성을 지닌 것으로 추측된다.[4]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에서는 클라우디우스 황제와 도미티아누스 황제 때 정복하려는 시도는 있었지만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다고 언급하고 있다.[5] 수를 확정할 수 없다는 뜻이 아니라 시대에 따라 멸망하기도 하고 분열되기도 했다는 뜻이다.[6] 투어허 데 다넌의 투어허다. 투어허는 원래 민족, 족속이라는 뜻이었다가 이 시기에 소왕국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고 오늘날에는 시골 지역을 가리키는 말이다. 여러모로 영어의 country 와 비슷하다.[7] 그래서 켈트 나루 문자라고도 불리는 아일랜드의 전통 문자인 '오감 문자'(Ogham script)가 이 지역들의 해안가에 걸쳐 곳곳에서 발견된다.[8] 아일랜드 본토뿐만 아니라 스코틀랜드와 맨 섬에도 각각 2개와 1개씩 있다.[9] 버틀러 가문이 통치했다. 여담이지만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서 말버러의 해임 이후 영국군 총사령관을 맡은 오몬데 공작이 이 가문의 가주다.[10] 사자심왕으로 유명한 플랜태저넷 왕조의 명군인 리처드 1세가 그의 3남이다.[11] 후에 이들 잉글랜드계 대다수가 아일랜드 독립 운동을 이끌게 된다.[12] 17세기 크롬웰이 아일랜드 연맹의 독립 운동을 진압할 때 죽은 아일랜드인은 수십만명 가량으로 지금도 아일랜드인들은 크롬웰을 극도로 부정적으로 본다.[13] 이때 실시한 잉글랜드의 대아일랜드 정책은 종교 탄압과 출신 지역 차별이었다. 아일랜드의 가톨릭교도들은 공직 진출이 완전히 봉쇄되었고 개신교도들도 아일랜드 출신이란 이유로 고위직 진출이 사실상 금지되었다.[14] 영국은 아일랜드인들의 이러한 저항을 탄압할 목적으로 왕립 아일랜드 경찰대(Royal Irish Constabulary)를 조직했는데, 자세한 건 여기를 참조[15] 아일랜드 국기의 구성(녹색, 흰색, 주황색)도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반영한 것이다.[16] 중남미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있었다. 당시 독립을 주도한 사람들은 원주민-메스티조가 아닌 스페인계 백인이었는데, 이들의 대부분이 원주민-메스티조의 인권 신장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으며, 이것이 중남미 국가들의 빈부격차와 독재의 근본 원인이었다.[17] 대표적 인물은 대니얼 오코넬[18] 민족 진영 지도자들의 상당수가 이들 개신교계였으며, 주로 고교회파(가톨릭적 특성 강조) 성공회에 속해 있었다. 대표적 인물은 찰스 스튜어트 파넬[19] 대부분 얼스터 거주자들이었고, 주로 저교회파(개신교적 특성 강조) 성공회와 장로회 등에 속해 있었다. 대표적 인물은 에드워드 카슨[20] 영국인들이 감자를 제외하고 상당수를 가져갔다.[21] 생산량이 매우 많다.[22] 가톨릭계 민족주의자였으며, 현재 더블린의 중심부에 그의 이름을 딴 오코넬 거리(O'Connell Street)가 있다. 원래 명칭은 17세기에는 드로게다 거리(Drogheda Street), 18세기에는 새크빌 거리(Sackville Street)였으나 1924년 그를 기리기 위해 그의 동상을 거리에 세우고 명칭을 변경하였다.[23] 1911년에 통과된 의회법에 따라 하원은 제한적인 상황에서 상원의 거부권을 무력화하고 바로 국왕의 재가로 넘길 수 있게 되었다.[24] 이후 독일이 나치 치하에 들어갔을 때 아예 독일군에 블루 셔츠라고 불리는 아일랜드인으로 구성된 부대가 설립되기도 했다. 이들은 스페인 내전에도 파쇼 세력으로 참여했다. 스페인 공화 정부군의 반가톨릭적 성향에 대해 보수 가톨릭이 지배적이었던 이들이 프란시스코 프랑코를 지지했기 때문이었다. 반대로 공화 정부군에 참여한 아일랜드인들도 있었는데 이들은 IRA 소속으로 공화 정부를 지지했기 때문이었다.[25] 이 전략은 abstentionism이라 하여 신페인 당원들이 자주 써먹는 것이다. 오늘날 북아일랜드에서도 신페인은 영국 의회 총선에 출마하는데 당선자들은 영국 의회 의원으로서의 의정 활동을 하지 않는다. 북아일랜드 자치 의회에는 참석한다.[26] 친영 성향 4명은 더블린 대학교 선거구에서 당선된 의원들이었다. 당시 대학 진학률을 볼 때 일반 아일랜드 민중들은 절대 다수가 신페인을 밀어줬다는 뜻도 된다.[27] 아일랜드의 각 주(county)에 아일랜드 자유국에서 탈퇴할 권한을 줬다. 이때 아일랜드 자유국의 정식 성립과 함께 얼스터 지역 6주가 탈퇴해 영국의 직할 통치 지역이 되었다.[28] 이때 며칠 정도 버틸 짐과 돈을 가지고 가까운 영국으로 페리를 타고 일자리를 찾아 무작정 떠나는 아일랜드 젊은이들이 많았다. 관련된 영화 싱 스트리트의 초반부 BBC 뉴스는 당시 실제 보도된 것을 따온 것이다. 영화에서 여주인공 라피나도 그렇게 영국으로 떠나지만 실패하고 결국 돌아오는 장면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