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한국프로야구 미스터리
1. 개요
2007년 시즌 KBO 리그에서 일어난 지금 생각하면 미스터리한 일들의 일람.
2. 상세
2.1. 이현곤의 타격왕
2002년 입단 후 2006년까지는 잦은 부상과 부진 등으로 인해 타격과는 거리가 멀었으나, 이 해에 타신이 들렸는지[1] '''양준혁'''과의 타격왕 경쟁에서 1리 차이, 정확하게는 0.3378과 0.3371의 '''7모 차이로''' 반올림에 성공하면서 타격왕 + 최다 안타왕에 등극했다. 거기에 '''전 경기 출장'''은 덤. 그러나 2007년을 제외한 모든 시즌에서 3할은커녕 그 근처도 가지 못하고 매년 고질적인 부상으로 골골대며 별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 KIA에서 자리를 잃은 뒤 2013년부터 NC 다이노스로 이적했으나 NC에서도 처참한 성적을 보여준 뒤 얼마 못 가 은퇴했다.
이후 세이버메트릭스의 스탯 중 하나인 BABIP를 계산해본 결과 이현곤의 2007년 BABIP는 '''0.379'''로, 개인 커리어 평균이었던 0.308, 리그 평균 0.311에 비해 터무니없이 높았다. 쉽게 말해서 세이버메트리션들의 입장은 '''천운을 타고난 시즌.'''
2.2. 이승화, 이대형의 3할
타율 3할과는 거리가 멀었던 그들이지만 이 해 들어 이승화[2] 는 비록 중간에 부상으로 인해 규정 타석은 채우지 못했지만 0.301의 타율을 기록했고, 올스타전에도 출장했다. 이대형은 0.308의 타율을 기록했을 뿐만 아니라 '''KBO 골든글러브'''까지 수상했다. 그런데 2007년 이후에는 3할은커녕 2할도 힘든 이우민과 도루말고는 깝깝한 이대형으로 돌아왔다.
이에 대한 분석으로 가장 유력한 것은 내야안타의 비율이 비정상적으로 높았고[3] 다음해부터 상대팀들이 이에 대비해서 극단적인 전진 수비 시프트를 사용하면서 BABIP수치가 하락해서 성적이 안 나오고 있다는 것이다. 두 명 모두 실질적으로는 2007년이 첫 풀타임 시즌이었기 때문이다.
타고투저 시즌이었지만 이대형은 2013시즌 후 FA를 통해 KIA로 옮긴 뒤 2014시즌에 타율 0.323을 기록하였다. 역대급 타고투저 시즌임을 감안해서 타율에서 2푼을 빼도 3할이다.
2014 시즌부터 정착한 안정적인 3단분리 타법으로 2015년에도 3할2리를 기록하며 2년 연속 3할타자가 되었고 2016년에도 3할을 기록하며 3년 연속 3할 타율을 달성했다. 이대형의 장기인 치고 달리기에 타격시 앞발이 고정되어 타구질이 좋아져 BABIP 수치가 상승한 것이 영향을 준 것으로 분석된다. 따라서 주루 스탯이 무너지지 않는 한 한동안은 안정적인 타율이 예상됐으나, 2017년 후반 주루툴에 치명이 갈 수 있는 무릎 십자인대 파열 부상으로 인해 커리어 자체가 불투명해졌다.
이우민은 2017시즌 초반에 좋은 활약을 해주었으나 결국 내려갈 타율은 내려간다고 3할과는 좀 거리가 있는 타율을 기록했지만, 그래도 다른 시즌에 비해서는 좋은 활약을 하며 일명 '''10년 주기설'''이 돌았다. 2007년 이후 정확히 10년 뒤인 2017년에 좋은 활약을 보였으므로 이우민은 10년마다 한 시즌 잘한다는 의미.
2.3. 현대 유니콘스의 팀 타율 1위
KBO의 위탁 관리를 받을 정도로 멸망한 현대 유니콘스는 .271의 팀 타율을 기록하며 2위 롯데 자이언츠와 1리 차이로 팀 타율 1위를 기록했다. 하지만 팀 평균자책점은 4.41로 7위를 기록하면서 밸런스가 완전히 무너졌고, 결국 시즌 6위를 기록하면서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했다. 7위 롯데와는 승차 없이 1리 차이로 승률이 아슬아슬하게 갈렸다. 결국 더 이상의 지원을 받지 못하던 현대 유니콘스는 이 시즌을 마지막으로 해체되었고, 이후 현대의 선수들을 바탕으로 우리 히어로즈가 창단된다..
2.4. 김동주 두 자릿수 도루 + 최준석과의 더블스틸
도루와는 거의 관계가 없는 김동주였으나 이 해에만 11개를 기록했다. 참고로 11개는 전준호(타자), 이우민(당시 이름은 이승화)과 동률이었으며 1번 타자였던 '''정수근, 박한이'''보다 1개 많은 수치였다. 역대 커리어 상에서도 이 해를 제외하면 두 자릿수 도루를 한 적이 없다. 그런데 김동주도 고등학교땐 '''호타준족'''이었다! 비록 프로 입단 후 벌크업을 하는 바람에 체중이 증가하면서 발이 느려졌고 부상 위험으로 인해 도루 자체를 시도하지 않는 편이었지만 그래도 주루센스만큼은 뛰어난 편이었다.[4][5] 근데 20대에도 도루 5개 언저리 하던 선수가 30대에 들어서 11개나 성공시켰다는 것은 충격.
사실 그보다 더 충격적인 것은 2007년 6월 9일 잠실 삼성전에서는 최준석과 '''더블스틸에 성공'''했다는 것이었다.24초부터[6] 최준석도 고교때는 발이 빠르고 마른 포수였다. 입단 당시엔 100m를 12초에 끊는 호타준족형의 포수였다고 한다. 그러나 입단하고 나서 같이 동거하던 이대호와 야식을 즐겨먹다보니 살이 쪄 도루능력을 상실했다. 그리고 롯데 시절과 달리 두산 시절은 최준석이 다이어트도 해서 비교적 마른 편이였다. 어디까지나 이후에 비하면.
2.5. 투수 20승 및 200이닝
'''두산의 다니엘 리오스가 '''234⅔이닝''' 투구에 22승을 거두었고, 류현진이 211이닝을 투구'''했다. 이후로 20승 및 200이닝은 나오지 않다가 2012년에 넥센 히어로즈의 브랜든 나이트가 208⅔이닝 던지면서 5년 만에 200이닝을 넘긴 투수가 나왔다. 그리고 2013년은 레다메스 리즈가 202⅔ 이닝을 투구하면서 또다시 200이닝 투수가 나왔다. 그리고 2014년에 넥센의 앤디 밴 헤켄이 187이닝을 투구해 20승을 거두면서 7년 만에 20승을 달성한 투수가 되었다. 2015년에는 롯데 자이언츠의 조쉬 린드블럼과 NC 다이노스의 에릭 해커가 200이닝을 돌파했다. 그리고 2016년 두산 베어스의 더스틴 니퍼트가 20승을 기록했다. 같은 해 KIA 타이거즈 헥터 노에시와 양현종[7] SK 와이번스의 메릴 켈리는 200이닝을 달성하기는 했는데 메릴 켈리는 승수가 고작 9승이다(...). 2017시즌에는 양현종과 헥터 노에시가 1985년 이후 최초로 동반 20승, 선발승 20승 듀오로는 최초의 기록을 세웠으며 헥터는 200이닝 역시 돌파하며 리오스 이후 11년만에 200이닝+20승 고지를 밟았다.
한가지 씁쓸한 부분은, 200이닝+20승을 달성한 리오스와 헥터 모두 금지 약물 복용 전과가 있다는 점. 차이점은 리오스는 달성 후 타 리그에서 걸렸다는 점, 헥터는 이미.전력이 있었다는 점이다.
2.6. 우규민 30세이브
후반기 체력이 떨어지면서 13블론세이브를 기록하긴 했지만[8] 우규민은 2007년 30세이브로 오승환과 중반기까지만 해도 팽팽한 경쟁을 하였고 오승환의 뒤를 이은 세이브 2위자리를 찍으며 LG의 새 수호신으로 우뚝 서는 듯했다. LG팬들은 김용수, 이상훈의 뒤를 잇는 철벽 마무리 투수의 계보에 이름을 올리길 바랐지만…. 다행히도 이후 경찰청 야구단에서 선발 투수로서 준수한 성적을 냈고, 2013시즌 이후 우규민은 선발 투수로 뛰면서 '''완봉승도 거두고''' 두 자릿수 승수도 올리며 FA대박까지 터뜨린다.
2.7. 양준혁의 20-20
양준혁이 이전에 20-20을 달성했던 적은 3번 있었을 정도로 준족이긴 했지만 가장 최근이 1999년, 2002년 이후로는 두 자릿수 도루는커녕 5개 이하의 도루 개수를 기록하다가, 2005년에 10개를 하고 2006년에 12개를 하더니 2007년에는 20개를 해서 '''만 38세'''의 나이로 덜컥 20-20을 달성해버렸다. 이로써 역대 최고령 20-20 달성. 발 빠르던 선수들도 나이를 많이 먹으면 도루 개수가 점점 주는데 마흔이 다 되던 나이에 20도루를 했으니….
그런데 양준혁의 19, 20호 도루는 강민호가 대놓고 도루를 허용했다. 나름대로 대선배에게 예우한 듯. 물론 팀을 위해 도루를 막아야 할지 또는 대기록 수립을 위해서 허용해야 할지는 다각적으로 판단해볼 듯하다. 그리고 강민호는 이 일로 갈매기 마당 꼴리건 아재들에게 가루가 되도록 까였다.
2.8. 이호준의 3할
1998년 해태 시절 때 0.303의 타율을 기록한 것을 제외하고 평생 3할 타율과는 인연이 없을 것 같던 이호준은, 공익근무요원으로 이탈했다가 부상으로 1년만에 돌아온 후 복귀한 2007년에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391 타석으로 규정 타석(390타석)을 아슬아슬하게 채우며 타율 0.313을 달성했다. 103경기를 뛰면서 당시 팀내 타점 1위, 타율은 정근우에 이어 팀내 2위이자 전체 8위, 홈런은 팀내에서 4위를 기록하며 2007년 SK의 통합 우승에 큰 이바지를 하였다.
2007년 시즌 후 이호준이 FA가 되었고 팬들은 프랜차이즈라 할 수 있는 그를 꼭 잡아야 한다고 하며 FA 릴레이까지 펼쳤다. 그리고 결국 4년 34억 원에 FA 계약을 체결했고 팬들의 기대는 컸다. 하지만 계약 첫 해인 2008년 무릎 부상으로 인해 달랑 '''8게임''' 뛰고 시즌을 접고 말았고 2009년에는 타율 0.298을 기록하면서부터 다시 반등세(?)를 타는 듯 했지만 스탯관리만을 하며 돈값 못한다고 까였고 2010년과 2011년에는 기대에 못 미치고 말았다. 그리고 2012년 시즌, 504타석에 0.300의 타율과 18홈런, 78타점으로 괜찮은 성적을 기록했지만, 이호준이 이렇게 괜찮은 성적을 낸 이유가 다음 해가 FA라 FA로이드를 빨았기 때문이라는 것이 팬들의 의견이었다. 하지만 2013년 NC 이적 후의 활약으로 이것이 뽀록이 아님을 증명했다.
3. 애매한 경우
3.1. 한기주
고교 시절부터 혹사가 심했고, 입단 후 당시 감독인 서정환과 그 후임인 조범현이 엄청 굴렸다. 결국 수술과 기나긴 재활 끝에 과거의 준수한 구위를 잃고 그저 그런 투수로 전락했다. 즉 실력 문제보다 지나친 혹사와 관리 실패의 문제였다.
3.2. 임경완
임작가, 임천사, 사직불바다라는 악평을 들었지만 롯데에 저만한 불펜도 감지덕지였다. 2004년에 홀드왕을 딸 정도의 실력도 있었다. 그러나 양상문의 혹사로 허리가 망가지면서 기존의 구위와 각좋은 슬라이더를 상실했고, 결정구였던 싱커에 의존했으나 심판 성향에 영향을 많이 받는 구종이라 마무리에는 부적합했다. 여기에 포수는 직구 사랑 강민호. 게다가 유순한 성격상 긴박한 상황에 올라오는 마무리보다 중간계투가 더 어울렸는데 제리 로이스터 감독의 무리한 기용 탓이 크다. 마인드에 문제가 있다는 게 드러났는 데도 계속 기용한 로이스터의 잘못도 크다. 덕분에 임경완은 임경완대로 욕먹고 강영식이 모든 부담을 뒤집어 썼다. 그리고 2009년 준수한 불펜으로 돌아왔다.
3.3. 강영식
본인의 새가슴 성격과 좌상바 기질이 문제였지만 제대로 된 좌완 불펜이 없는 롯데에 귀중한 자원이였다. 실제로 다음 해 커리어하이를 찍었고, 양승호 감독 때 소위 '양떼불펜'의 일원으로 활약한다. 그러나 유일하다시피 한 좌완이라 엄청 굴려졌고 08시즌 언터처블이었으나 불펜 붕괴로 이후 시즌에는 다소 불가피하게 혹사당한 감이 있다.
3.4. 정민철
2005년에 팔꿈치 부상을 당하고 인대가 손상됐으나 재활을 선택했다. 늦깎이 나이에 재활이였지만 2007년 10년 만에 방어율 2점대를 기록했다. 내용상으로도 썩 좋았던 편. 무엇보다도 이닝을 많이 먹은 덕분에 한화 마운드 사정에 큰 보탬이 되었다. 사사구 숫자와 피홈런 숫자도 작았다. 덕분에 시즌 초반 부상으로 전력 이탈된 문동환의 빈 자리가 훌륭하게 메워졌다. 때문에 언론이나 팬들 모두가 에이스 부활을 외쳤으며 일구상 재기 선수상을 차지했다. 올드 팬들은 류현진과 원투 펀치를 형성한 정민철을 보며 신구 에이스가 동시에 활약한다며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다만 삼진이 적고 피안타가 많았고 방어율에 비해 FIP이 높았다.
그리고 다음 해 귀신같이 부진. 부진의 이유는 '''딱 봐도 노쇠화.''' 정민철의 나이도 어언 37세였으니. 특히 이닝 소화력이 크게 떨어져 25경기 127⅓이닝, 평균 5이닝을 간신히 채웠으며 후반기에는 5회도 못 채우고 강판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 해 160승 고지를 돌파하긴 했지만 결국 류현진의 등장과 나이를 이기지 못하고 은퇴했다.
3.5. 박명환
도핑 경력이 있고 본인의 갑상선 질환으로 하락세가 보이던 시점이였다. 이 시절부터 부상이 잦은 게 문제였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200이닝을 넘겨 본 적이 없으며, 특히 두산에서 보낸 마지막 두 시즌 역시 피안타율 2할대 초반, 이닝당 1개 이상의 탈삼진율 등 비율 성적은 매우 좋았지만, 부상으로 두 시즌 합쳐 234.2이닝 투구에 그쳤다. 구위로 먹고 사는 투 피치 파워 피처에게 유리몸은 최대의 약점이었으니, 결국 내구성 부족으로 FA 먹튀의 조짐이 보였다. 그럼에도 당시 FA 선수 수집에 돈을 아끼지 않던 LG 트윈스가 4년 40억 원이라는 거액에 그를 낚아챘다. 하지만 LG는 예전부터 FA 시장의 큰 손으로 불려오며 여러 명의 거액 FA를 영입했으나, 줄곧 실패한 사례가 많아 우려하는 반응이 많았다.[9]
박명환의 LG에서의 첫 시즌인 2007년에는 10승 6패 평균자책점 3.19, 155.1이닝 동안 117삼진이라는 나름대로 괜찮은 기록을 내며 전년도 꼴찌였던 LG를 5위로 끌어올리는 데 일익을 담당했으나 연봉 10억짜리 선수에게 기대할 만한 기록은 아니었다. 그 뒤 2008년부터 2010년까지 부상에 시달렸다. 2008년 부상과 수술 이후에는 구속, 구위 모두 수준 이하의 투수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3년 동안''' 던진 투구 이닝이 115이닝, 올린 승수가 단 '''4'''승이며, 이마저도 2010년 한 해 올린 승수이다. 그렇게 먹튀가 돼 방출됐으나 공백기를 거쳐 NC 다이노스가 나름의 유종의 미를 거두긴 했다.
3.6. 심정수
오버 트레이닝으로 인한 무릎 부상과 라섹수술 후유증의 피해자. 과거 우동수 트리오이자 이승엽과 불꽃튀는 홈런왕 경쟁을 할 정도로 파워 하나는 알아주었던 선수였다. 현대 시절 라섹 수술을 받은 후 시력 저하의 후유증을 겪고 있었던 심정수는 시력 검사로 인한 메디컬 테스트 탈락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 때문에 '''눈을 문제 삼는 구단과는 얘기 안한다'''는 선언을 했고, 우타 거포에 대한 갈증이 있었던 삼성 라이온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4년 최대 60억 원'''이라는 엄청난 돈을 들이며 심정수를 영입한다.
첫 해인 2005년은 부상 악화로 부진이 심해져 먹튀 소리를 들었다. 물론 파워툴은 살아 있어 7번 타자로 내려가는 등 수모를 겪었지만 .275, 28홈런 87타점 OPS .903으로 시즌을 마무리했다. '''망한 시즌이라는 게 OPS 9할이다.''' 게다가 시즌 홈런도 2위[10] 를 기록. 그리고 2006년 초 수술을 결심하여 왼쪽 무릎과 오른쪽 어깨를 독일에서 수술하고 그 해를 통째로 재활에 날리게 되었지만 다음 해인 2007년 안경을 뿔테로 바꾸고 타석에 등장, 31홈런과 101타점을 기록하며 53홈런을 칠 때도 해보지 못했던 타점왕과 홈런왕 타이틀을 함께 거머쥐었다. 하지만 타율은 많이 떨어져서 1995년 OB 베어스의 김상호가 세운 25홈런, .272를 뛰어넘는 .258라는 '''최저 타율 홈런왕''' 기록을 수립하였다. 당해 시즌 초반에 극심한 타격 슬럼프가 원인이기도 했지만 이 시즌에 심정수는 단 한번도 3안타 이상을 기록한 경기가 없었다. 즉, 시즌 초 부진이 그 시즌 전체 타율을 깎아먹게 된 셈. 그러나 세이버스탯을 보면 WAR 5.15에 wRC+ 153.8이라는 대단한 스탯을 기록한다. 타율은 .258이지만 출루율이 .381로 자기 타율보다 무려 1할 이상이 높아 OPS .896을 기록했으며, 더구나 이 시즌은 06에 이어서 투고타저 시즌이라 wRC+가 더욱 높게 나올 수 밖에 없었다. 즉 07시즌은 낮은 타율 때문에 저평가된 케이스로, 세이버 관점에서 본다면 심정수의 07시즌은 매우 뛰어난 성적을 기록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팬들은 심정수의 정확도 하락에 대단히 아쉬워 하면서도 여전히 장타력은 살아 있음을 확인했다.
불행하게도 2008년이 돌아오자 왼쪽 무릎 부상이 재발했다. 결국 시즌 아웃. 역시 한 시즌을 통째로 날리며 재기와 명예 회복을 노렸지만, 무릎이 더 이상 좋아지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을 내리고[11] 결국 33세의 젊은 나이에 갑작스러운 '''은퇴'''를 선택했다. 다음 시즌에 부활하리라는 보장이 어려운 상황에서 현명한 판단일 수도 있겠지만, 삼성 팬들에게는 안 좋은 기억이 될 수밖에 없었다. 팬들 입장에서도 여러 모로 아쉬움이 많이 남는 선수.
3.7. 고영민
전성기인 07, 08년에는 2할7푼 가까운 타율을 때려내며 활약을 했지만, 그 이후로 폭망 행진이 계속 이어지면서 07, 08년이 플루크 아니었냐는 평가가 대세. 사실 큰 문제는 '''극악의 컨택'''능력. 선구안이 그닥 좋지 않은데다 뻥스윙이라서 타율이 그렇게 높게 올라갈 수가 없다. 그나마 타율에 비해 출루율은 1할 가량 높고 볼넷도 많지만 이는 고영민의 선구안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못 칠 것으로 보이는 공은 그냥 아예 포기해버렸기 때문이고, 이 때문에 삼진도 많고 루킹 삼진 비율도 높은 편이다. 말하자면 추신수의 극 하위호환. 그래도 수비와 주루 능력은 KBO 내에서도 손꼽히는 수준이었고, 쓸만한 출루율에 뻥스윙+강한 손목힘으로 만들어내는 뜬금포도 갖췄기에 타율이 너무 떨어지지만 않는다면 주전으로 자리잡을 수 있었으나, 그 타율이 점점 추락하고 2010년 이후 오재원의 대두로 인해 백업 신세로 전락했다. 그리고 2017년에 은퇴했다.
4. 그 밖에
- 6월 13일에 그 나오기도 어렵다는 무보살 삼중살이 나왔다. 2020년 현재 한국 프로야구를 통틀어서 유일무이한 기록. 자세한 내용은 무보살 삼중살 문서 참고.
- 8월 29일에는 이종열이 한 이닝에 양 타석에서 안타를 치는 기록을 달성했다. 이 또한 2017년 현재까지 유일무이한 기록이다.
- 8개 구단 중 한화 이글스가 이상하리만치 우천연기 경기가 많았다.[12] 특히 한여름이었던 6월~8월 중에 우천취소된 경기가 많았고, 당연히 9월 이후 우천연기 경기 추가편성 기간에 그 많은 경기를 소화해야 했다. 그런데 9월 중에도 계속 우천연기가 걸리는 바람에 잔여경기가 계속 미뤄지고 말았고, 심지어 KIA 타이거즈와의 원정 경기 1경기는 준플레이오프 2일 전인 10월 7일에 열리도록 되어 있었다. 하지만 10월 7일마저 광주에 비가 내리면서 우천취소. 결국 포스트시즌 예정일 전까지 정규리그 경기를 소화하지 못하는 사태가 일어나자, KBO는 "한화의 포스트시즌 일정이 끝나면 차후 연기된 경기를 개최한다" 라는 정책을 내놓았다. 결국 그 남은 1경기는 한화가 플레이오프에서 두산 베어스에게 3전 전패로 탈락이 확정된 다음에야 치러졌다. KBO 슈퍼 한국시리즈 문서 참고.
- 이와 비슷한 시즌으로 2009년이 있다. 주전-백업의 경계에 있던 수준의 선수에서 역대급 플루크 시즌을 보내며 MVP를 차지한 KIA 타이거즈의 김상현[13] 이나 CK포로 같이 활약한 최희섭, 역대급으로 운이 따라주면서 BABIP과 FIP에 비해 0.53이라는 터무니없이 낮은 평균자책점을 기록한 유동훈, 준수한 성적과는 거리가 멀던 삼성 라이온즈의 강봉규와 신명철이 동반으로 20-20 클럽에 가입하기도 하였고, 부상이 잦아 풀타임 출장이 힘들었던 SK 와이번스의 박재상이 2번 타자로 전 경기 선발출장에 성공하고 타율 0.295, 15홈런, 81타점, 33도루의 기록을 찍는 등 커리어에 길이 남을 플루크 시즌을 보낸 이들이 많았다.[14] 원래 이 명단에 .372라는 역대급 타율로 타격왕을 수상한 LG 트윈스의 박용택[15] 도 추가될 예정이었으나 평소에 2할대 후반을 치던 실력에서 이 시즌 이후 각성한 것인지 2018년 현재까지 신들린 타격을 보여주고 2000안타 레전드의 반열에 올라서며 스스로 이 시즌이 플루크가 아니었음을 증명하고 이 명단에서 빠지게 되었다. 여기에 엘롯기의 일원으로 있던 KIA 타이거즈가 앞서 서술한대로 최희섭과 김상현의 대활약으로 2009년 한국시리즈를 제패하는데 이후 KIA의 성적은 신통치 않았다.
- 또 타고투저의 광풍으로 2014시즌 이후 타격 지표에서 커리어하이를 찍는 선수들이 많아졌다. 물론 대다수가 다음 해 전만한 성적을 못내고 본래의 모습으로 회귀하는 중.
[1] 당시 서정환 감독으로부터 망치 타법을 전수받았다고 한다.[2] 이우민의 개명 전 이름[3] 두 명 모두 2007년 안타 중에 내야안타 비율이 30%에 육박한다.[4] 현역 중 이와 비슷한 성향을 보이는 선수는 나지완이 있다.[5] 베이징 올림픽 득점 때 손바닥 터치 장면만 봐도 주루센스를 엿볼 수 있다.[6] 게다가 이 날은 양준혁의 통산 2,000안타도 달성된 날이다.[7] 토종 선수로서는 2007년 이후 최초 200이닝 투구다.[8] 페넌트레이스 최종 순위 때 5위 LG가 4위 삼성과의 경기차가 얼마나지 않아 우규민의 블론세이브 수에서 몇 세이브만 더 챙겼으면 LG를 10년동안 괴롭힌 비밀번호가 탄생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9] 2001년 홍현우를 4년 18억으로 영입했으나 해태 시절 과도한 웨이트 트레이닝의 여파로 인해 그 후유증으로 부상과 부진이 연달아 찾아오며 퇴물로 전락, 2004년 진필중을 4년 총 30억으로 영입했으나, 두산 시절부터 김인식의 혹사로 망가진 그는 FA 직전 해인 2003년 이미 하락세를 보였고, 결국 진필패로 전락해서 2007년 방출, 마해영은 사실 계약은 2004년 KIA와 4년 총 28억에 했으나, 계약기간을 채우지 못하고 LG로 트레이드되면서 LG가 잔여 연봉을 대신 내줘야 했었다. 그렇게 해서 LG가 마해영에게 쓴 돈이 8억 남짓. LG의 FA 잔혹사는 이진영과 정성훈을 영입한 후인 2009년에야 끝난다.[10] 1위는 래리 서튼.[11] 라고는 하지만 라섹수술 후유증이 더 컸다고 한다.[12] 하지만 어찌보면 이는 한화가 이득을 본 것도 있는데, 시즌 중 우천연기가 계속되는 상황을 써먹으며 선발 로테이션을 '류현진-정민철-비-비-비-류현진 혹은 류현진-정민철-세드릭-비-비-류현진' 으로 주축 선발투수 3명을 적절히 돌려쓰는 희대의(?) 전략을 구축하기도 했다.[13] 그나마 kt wiz에서 한 시즌 부활하면서 이 시즌이 순도 100% 플루크는 아님이 드러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09시즌의 성적은 플루크가 많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기록할 수 없었을 괴물급 성적이었다.[14] 박재상과 비슷하게 김원섭도 이해 100경기를 턱걸이로 뛰며 커리어하이를 찍으며 날아다녔다. 그러나 원래 간염 보균자였고, 그 전해와 12년에도 100경기 100안타를 치고 타선에서 깨알같이 활약해 단순히 플루크라 보기 어폐가 있다.[15] 졸렬택이라는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된 그 해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