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제계

 



'''이인제계'''
<colbgcolor=#336C77> '''형성'''
<colbgcolor=#ffffff>1997년
'''해체'''
2012년[1]
'''수장'''
'''이인제'''
'''정치적 이념'''
자유보수주의
보수자유주의
'''경제적 이념'''
경제적 자유주의
'''주요 정치인'''
서석재
박상천
김효석
1. 개요
2. 활동
3. 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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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한국당, 국민신당, 새천년민주당, 민주당(2005년), 중도통합민주당, 민주당(2007년), 자유선진당, 선진통일당에서 이인제를 따랐던 정치세력을 일컫는다.

2. 활동


민주계 출신 당시 현직 경기도지사 이인제제15대 대통령 선거 신한국당 경선에서 이회창에게 밀려 2위로 낙선한다. 2위를 차지한 것도 놀라운 것이었지만, 대세를 뒤집진 못했다. 민주계 출신 이회창김영삼과 갈등을 빚고 김윤환을 중심으로 한 민정계, 잔류 공화계가 단합하여 지지를 받았지만 민주계이인제, 김덕룡, 이수성 지지파로 나뉜게 문제였다. 그러나 선출된 이회창은 아들들의 병역 문제로 지지율이 10%대로 떨어지고, 자신의 여론조사 상에서도 지지율이 높은 편이자 이인제는 다른 생각을 하게 된다.[2]
이인제는 지지율과 미약하나마 존재하는 당내 기반을 바탕으로 독자 정당 국민신당을 창당한다. 서석재, 황명수 등을 포함한 민주계 일부와 박범진 등 민정계 일부 정치인들로 총 8명의 국회의원과 원외 인사들이 입당하였다. 이들이 이인제계로 불릴 수 있다. 또한 창당하면서 이만섭국회의장총재, 이인제를 대통령 후보로 하였다.
처음에는 이회창의 병역 문제, 박정희 전 대통령을 빼닮은 외모, 젊은층 사이에서 지지로 높은 지지율을 올렸다. 그러나 얼마 안 되어 창당 과정에 김영삼 당시 대통령과 측근들의 지지가 있었다는 의혹이 이회창, 김대중 모두로부터 제기되었고, 그 해 초 국정 비리로 구속되었던 김현철까지 거론되기에 이르렀다. 그 결과 국민신당과 이인제 후보의 지지율은 허무하게 떨어지기 시작했고 실제 대선에서는 중장년층 지지율이 이회창으로 쏠리면서 선거를 말아먹었다. 그러나 젊은층 사이에서 높은 인기로 19%라는 득표율을 올렸다.
객관적으로 보면 19%라는 높은 득표율을 올렸으니 국민신당과 이인제계의 미래는 어둡진 않았다. 그러나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DJP연합한나라당의 구도 속에 전일순 논산시장 1명만 당선시키며 존재감이 희석되었다. 1998년 재보궐선거에서도 후보들이 평균 7~8%의 득표율을 올리며 모두 낙선했다. 국민신당은 새정치국민회의로 흡수 합당되고, 일부는 한나라당 복당과 자유민주연합 입당을 택하며 뿔뿔이 흩어졌다.
썩어도 준치라는 말이 있듯이 합당 때 들어온 7명의 의원들은 바탕으로 당내 중도파를 포섭하며 당내 저변을 넓혀가고, 본인이 최고위원으로도 당선되며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 기반을 중심으로 새천년민주당 제16대 대통령 선거 후보 경선에 나가 1위를 차지하였으나, 노풍이 불고 대세를 뒤집을 수 없었다고 판단한 모양인지 경선 후보직을 사퇴했다. 그러나 대선의 꿈을 접지 않고 결국 탈당한다. 그러나 한나라당이회창이 당권을 잡고 있는 상황. 결국 지역정당 자유민주연합을 택한다.
갈수록 인재가 떨어지던 자민련에겐 지역 기반이 강한 이인제는 괜찮은 인재였으나, 이 탈당으로 이인제는 자계파를 모두 잃게 된다. 그나마 후에 복당한 민주당에서 후보로 선출되긴 하지만, 자계파의 힘은 거의 없었다. 통합 자유선진당 입당과 선진통일당으로의 당명 개정 후 계파가 소수 생기긴 했지만 그마저도 새누리당 합당 이후로 거의 없어졌다. 일례로, 제19대 대통령 선거 자유한국당 대선 후보 경선 국민 여론조사에선 24.6%로 홍준표에 뒤이은 압도적 2위를 차지했지만, 전당대회에선 김관용에게도 밀린 4위를 기록했다.

3. 구성



[1] 선진통일당 해체.[2] 후보 교체를 주장했으나 받아들이지 않아졌다.[3] #[탈당] 새천년민주당을 탈당했다.[동교동계] 동교동계로도 분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