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형광
1. 개요
前 롯데 자이언츠의 야구선수이자 現 롯데 자이언츠의 투수코치. 90년대 중후반 롯데 자이언츠의 에이스이자 1990년대 롯데 자이언츠의 명승부에서 항상 빠지지 않는 투수며[3] 걸출한 좌완 투수가 많이 없는 롯데 팬들에게는 아직도 안타깝게 단명한 선수로 기억되고 있다. 3월 1일생이지만, 1년 일찍 학교를 다닌 덕에 투수 부문의 최연소 기록들을 대부분 그가 보유하고 있다. 최연소 승리, 최연소 완투승[4] , 최연소 완봉승, 최연소 세이브 등등.
그가 쓰던 등번호 28번은 현역 마지막 해였던 2007년 부산고 후배 좌완 투수 장원준에게 물려 주었다.(그 해 주형광은 37번을 달았다.)[5]
2. 선수 경력
2.1. 아마추어 시절
부산고에 입학해 뛰어난 활약을 선보였다. 입학 당시 3학년 염종석, 2학년 손민한, 1학년 주형광은 부산고 역대 최강의 트로이카로 꼽힌다.[6] 손민한이 3학년 시절[7] 부상으로 인해서 실질적으로 2학년때부터 에이스 역할을 하게 되는데, 이 때 혹사 때문에 팔꿈치 이상이 빨리 온 것으로 추정된다. 부산고 재학 시절 당대 경북고 좌완 에이스였던 이승엽을 상대로 홈런을 치기도 하였다. 뛰어난 이닝소화 능력과 더불어, 고등학교 선수 기준으로는 수준급의 완급 조절능력도 있어서 꾀돌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1992년 대통령배우승, 황금사자기 준우승, 1993년 봉황대기 우승을 이끌어 내며 당대 최고의 고교 좌완으로 손꼽혔으며 이러한 실력 때문에 프로와 대학에서 스카웃 경쟁이 일어났다. 그 와중에 동국대학교 측에서 입학하면 고교 동기들도 같이 입학시켜주겠다고 제안, 결국 동국대학교 입학을 선택하고 가등록까지 마쳤다. 그런데 이때 롯데가 당대 신인 최다금액을 주겠다며 나섰고 주형광은 이 제안을 받아들인다. 이 사건 당시, 이미 대학에 가등록을 해놓은 선수에게 스카웃 제안을 한 롯데와 이를 받아들인 주형광에게 비난의 목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당시 롯데에서는 고졸 신인 역대 최대 금액을 제시하기 위해 LG와 입단계약을 맺은 김재현의 계약금 발표시기보다 늦게 발표하려고 했는데 LG측에서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어서 신인 계약 발표가 늦어지는 헤프닝이 있기도 했다. 결국 주형광이 계약금 9,200만원과 연봉 1,200만원을 합쳐서 1억 400만원을 받아 계약금 9,100만원으로 총액 1억 300만원을 받은 김재현을 100만원 차이로 따돌리고 당대 고졸 신인 최고 몸값을 기록하게 되었다.[8][9]
2.2. 프로 시절
2.3. 데뷔와 함께 찾아온 전성기(1994~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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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에 데뷔했으며 당시 고졸신인 역대 최고 몸값인 1억 4백만원의 몸값을 받고 입단했다. 정확히는 계약금이 9천 2백만원이었고 연봉 1,200만원을 합쳐 1억을 돌파한 것이긴 했지만 저 9천 2백만원의 계약금도 당시로서 고졸신인 역사상 최고액이었다.[10] 데뷔전은 4월 13일 사직구장에서 OB 베어스와의 경기에 선발 등판, 그러나 이 경기에서 3이닝동안 5피안타 3볼넷 5실점으로 난타를 당해[11] 역시 프로의 벽은 높은건가 라는 인식도 있었으나, 다음 경기인 LG전에서 4:0으로 앞서다가 4:3에 무사 2,3루까지 추격을 허용한 강상수의 구원 투수로 구원등판해 무사만루에서 김재현을 홈병살시키고 깔끔하게 세이브를 따내며 우려를 불식시켰다.
뒤이은 세 번째 등판이자 프로 두 번째 선발등판인 한화전에서 9이닝 2피안타 9탈삼진 1실점(비자책)이라는 엄청난 피칭으로 완투승을 따내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신인 시즌은 11승 5패 1세이브 3.04의 평균자책점으로 고졸 신인으로서는 엄청난 호성적을 올렸지만, 신인왕은 아쉽게도 유지현이 차지한다.[12]
2년차인 1995년에는 200이닝을 넘게 소화하며 10승 7패 평균자책점 3.05를 기록했다. 저 엄청난 투구이닝과 준수한 평균자책점에도 불구하고 노디시전 경기가 많아 10승에 그치긴 했지만, 한풀이를 하듯이 포스트시즌에서 맹활약. 특히 LG와의 플레이오프에서 맹활약하며 롯데를 한국시리즈로 이끌었다. 시리즈를 끝낸 6차전의 1피안타 무사사구 1:0 완봉승은 그 백미.[13]
덤으로 루키 시즌 데뷔 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당시로선 꿈의 기록으로 여겨졌던 통산 200승을 목표로 뛰겠다고 밝힌 적이 있다. 본인 표현으론 나이가 어린만큼 매년 10승씩 20년간 뛰면 달성할 수 있지 않겠냐는 것이었는데, 정말 본인의 다짐대로 2년차까지 매년 10승 이상을 거두었다. 이렇게 말 뿐만 아닌 행동으로 증명하자 하일성 해설위원 또한 주형광은 이미 200승을 예약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말로 극찬했을 정도였다. 심지어 2년차 시즌을 마친 1995년 11월 한 언론사에서 뽑은 각계 유망인 50인 가운데 스포츠선수 가운데선 농구의 현주엽, 골프의 박세리와 함께 야구선수로는 유일하게 선정될 정도로 주목을 받기도 했다. 주형광의 앞날은 그야말로 꽃길만 남은 것처럼 보였다.
2.4. 20살에 리그를 평정(1996)
3년차인 1996년에는 무려 216과 2/3이닝을 던지며 18승 7패 1세이브 3.36의 평균자책점과 221개의 탈삼진이라는 압도적인 성적을 올렸으며, 다승왕과 탈삼진왕에 올라 2관왕을 차지했다. 216과 2/3이닝을 던지면서도 볼넷 38개/탈삼진 221개라는 압도적인 볼삼비를 뽐냈으며[14] 한 시즌 221 탈삼진은 대선배 최동원(1984년, 223K)에 이은 역대 2위 기록이다. 그러나 MVP는 아쉽게도 다승왕과 구원왕을 동시에 차지한 구대성이 가져갔다.[15][16]
보다시피 고작 3년차에 그야말로 리그를 정복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압도적인 성적을 거뒀다. 더 무서운 것은 이게 겨우 만 20세에 거둔 성과였다는 것이다. 이 당시 주형광의 포스가 어느 정도인지 감이 안온다면, 데뷔 이후 3년차까지 이 정도로 압도적인 포스를 보여준 투수는 주형광 이후로 류현진을 제외하면 비교 대상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로 정리가 가능하다.
2.5. 의병 제대와 부진(1997)
그러나 저 압도적인 1996년 시즌이 본인의 신체가 감당할 수 있는 그 이상으로 무리였던 듯, 시즌을 마친 후 주형광은 피로 누적으로 인한 신장 기능 약화와 무리한 어깨 근육 사용으로 인한 골절로 병원에 입원을 했을 정도였다. 설상가상으로 당시 한화의 구대성이나 OB의 김민호 등이 잇달아 신체검사에서 군 면제 판정을 받아 프로야구 선수들의 병역 문제가 여론의 도마에 오르자, 주형광 또한 병원을 핑계로 입대를 미룰 수가 없었고 결국 재검 끝에 현역으로 입대를 했다. 리그의 역사를 바꿔나갈 것으로 기대를 모았던 주형광의 현역 입대는 사람들에게 진한 아쉬움을 남겼다. 당시만 해도 군 복무 기간이 26개월이었기 때문에, 3년의 공백은 주형광의 커리어에 치명적인 악영향을 끼칠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애당초 여론의 시선 때문에 무리를 해서 입대를 한 주형광은 어깨와 신장 이상으로 도저히 훈련을 소화할 몸이 아니라는 이유로 훈련에서 열외된 채 군 병원에만 머무르다가 결국 의병 제대 판정을 받았다. 모두가 에이스의 귀환을 환영했지만 역설적으로 주형광의 야구인생에 치명타를 안긴 일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아마 때의 혹사와 더불어 지난 3년간 600이닝을 넘게 던지며 기록한 총 9,464개의 투구, 심지어 의병 제대까지 받을 정도로 만신창이였던 몸 상태임을 감안하면 지금 같으면 당연히 쉬게 하며 선수를 보호했겠지만, 분업 야구가 조금씩 정착되어가던 1990년대 후반까지도 프로야구에 있어서 선수 보호에 관한 의식은 지금보다 현저히 낮았다는게 주형광으로서는 크나큰 불운이었다.[17]
설상가상으로 1997년 롯데는 시즌 초반부터 순위가 꼴찌로 추락해 거기서 헤어나오질 못했고, 당초 현역 입대로 인해 이 시즌은 전력 외로 분류된 주형광이었지만 이런 팀 사정 때문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제대하자마자 바로 1군 엔트리에 투입되었다. 심지어 퇴소 후 부산에 도착하자마자 마운드에 올라 세이브를 기록했을 정도. 몸이 좋지 않아 조기 전역을 했을 정도로 몸상태가 나쁜 선수가 동계훈련도 없이 마운드에서 온전히 공을 던진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롯데구단은 그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라고 한 셈. 당시 지금과는 비교조차 안 될 정도로 후진적이었던 리그 환경은 그렇게 롯데구단과 주형광을 내몰았다.
주형광은 꼴찌로 추락한 팀을 구하기 위해 젊은 혈기로 선발·구원을 가리지 않고 마운드에 올랐으며, 심지어 면도삭발까지 불사하면서 투혼을 불살랐다. 그러나 32경기에 등판해 131과 2/3이닝을 던지며 6승 13패 3세이브 평균자책점 5.88이라는 처참한 성적[18] 을 기록했고, 팀을 꼴찌에서 구해내지도 못했다. 애시당초 만신창이가 된 몸 상태로 동계훈련조차 치르지 못하고 공을 던진 만큼 어쩔 수가 없었다. 그 와중에도 3번의 완투를 기록해 에이스의 자존심만은 지켰다.
그리고 이 시즌의 휴식 대신 무리한 출장은 결국 몇 년 뒤에 탈이 나면서 커리어를 좀먹게 된다. 만약 이 시즌에 관리를 했었다면 이후의 부상도 없었을지 모른다.[19]
2.6. 마지막 불꽃(1998~2000)
이듬해 절치부심하며 1998년과 1999년 2년 연속으로 200이닝 가까운 투구에 두자리 승수를 올렸고, 특히 1999년 플레이오프와 한국시리즈에서 고군분투하며 맹활약을 펼쳤다. 2000년 시즌에는 8승 6패 3.49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며 10승 달성에는 실패했지만 그 때가 고작 만 24세. 그때까지 그가 쌓아놓은 누적스탯은 무려 77승에 1200이닝 '''1천탈삼진''' 돌파로 만 24세 투수로서는 역대급의 누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주형광 이후 24세 시즌까지 그 정도의 누적스탯을 쌓은 선수는 류현진외에는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2000시즌 종료 후 '''일본 진출'''을 꾀했으며 구단에서도 적극적으로 밀어줬고, 자매구단인 '''치바 롯데 마린스'''로 2년 임대료 1억엔에 연봉 7천만엔의 구체적인 조건 이야기까지 나오며 이적이 확정되나 싶었지만... 막판에 협상이 틀어지는 바람에 일본프로야구 진출에 실패했다.[20]
2.7. 부상과 재활, 그리고 중간계투(2001~2003)
결국, 2001년에 팔꿈치가 탈이 나고 말았다. 그것도 시즌 개막하고 열흘도 안된 시점에서 2경기 등판하고 팔꿈치 통증으로 재활군으로 내려갔다. 휴식과 재활을 병행하며 8월부터 다시 공을 던지기 시작하면서 복귀를 타진했으나 이 과정에서 인대가 '''완전히 파열'''되어 결국 시즌 아웃.[21][22] 시즌 후 토미 존 서저리를 받게 된다. 안타깝게도 수술은 결과적으로 실패였고 이는 최악의 토미 존 서저리 실패사례 중 하나로 꼽힌다. 이 시기부터 주형광은 길고긴 내리막길을 타게된다.[23]
1년 가까운 재활 끝에 2002년 시즌 막바지에 한타자씩만 상대하는 원 포인트 릴리프로 7경기를 시범 등판했지만 이미 그는 예전의 주형광이 아니었다. 2003년부터는 다시 풀시즌을 소화하게 되었지만 그는 더 이상 선발투수가 아닌 짧은 이닝을 던지는 중간계투가 되어 있었다. 62경기에 등판해 74와 2/3이닝을 소화하며 13홀드를 기록했지만 승리 없이 9패만 떠안으며 결국 3년 간 단 1승도 추가하지 못했다.[24]
2.8. 마지막 불꽃(2004)
2004년은 주형광이 마지막으로 불꽃을 태웠던 시기. 겨울동안 착실히 준비해 4년만에 다시 선발 로테이션에 복귀했으며 전성기 못지 않은 활약으로 시즌 초 마무리를 맡았던 손민한[25] 을 대신해 팀의 선발 에이스로 활약했다. 무엇보다 구위가 다시 전성기 시절과 비슷한 수준으로 돌아왔으며 신임 양상문 감독도 주형광의 부상 전력을 고려해 등판간격과 투구수를 철저하게 관리해주면서 재기에 성공하나 싶었지만... 6월 1일 대구구장에서 벌어진 삼성전에서 배영수와 맞대결을 펼치며 7과 2/3이닝동안 6피안타 2실점(1자책)으로 호투하던 와중 다시 팔꿈치 부상을 입게 되고,[26] 그렇게 선발 투수로서의 주형광은 끝이 나고 말았다. 주형광 본인도 훗날 회고하길 "내 공은 그 때 죽었습니다." 라고 했을 정도. 바로 시즌 아웃되어 잔여시즌을 출장하지 못했으며, 토미 존 서저리를 다시 한 번 받는 게 좋겠다는 진단을 받았지만 결국 주형광은 수술 대신 재활을 택했다.[27]
2.9. 결국 실패한 재기, 부진, 그리고 은퇴(2005~2007)
이듬해인 2005년 6경기에 선발 등판하며 마지막 몸부림을 쳤지만 전술했듯이 이후 다시는 선발 투수로 재기하지 못했다. 재부상의 원인은 다양하지만, 흔히 하지 않는 방식이라는 힘줄을 쇠못으로 고정하는 형태의 수술을 받은 것도 큰 원인으로 꼽는다. 재활이 충분히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조급한 마음에 서둘러 복귀한 것도 부상 재발의 큰 원인.[28] 선발로서의 재기가 실패한 이후 그 뒤로 3년간 좌완 중간계투 및 원 포인트 릴리프 등으로만 뛰었고 불만 질렀다. 그 와중에 FA 권리를 획득했지만 부진한 성적 때문에 FA를 행사하지도 못하고 포기해야만 했던 아픔도 있었다.
2007년은 자신의 상징과도 같았던 등번호 28번을 직계 후배인 장원준에게 물려주고 중간계투로만 활약했다. 33경기에 등판해 21과 2/3이닝을 던져 2패 1홀드 4.15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했다. 그리고 그 시즌을 마치고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은퇴 시점의 나이는 불과 32세.'''
커리어 초창기 200승 달성이 유력했던 선수가 200승은 고사하고 100승도 채우지 못하고 겨우 32세에 은퇴했다는 것은 롯데 자이언츠가 주형광을 얼마나 막 굴렸는지 알 수 있는 대목. 2015년까지 현역으로 활약한 '''손민한보다 1살 적고, 2017년 까지 현역에 있던 이승엽, 2018년까지 현역이었던 임창용과 동갑이다.'''[29][30] 24세 시즌(2000년)까지 거둔 승수는 77승.[31] 만약 제대로 된 팀에서 제대로 된 대우를 받았다면 기복 등을 고려해도 200승 까지는 아니더라도 150승쯤 달성했거나 더 나아가서 정민철의 161승을 넘어섰을지도 모른다고 아쉬워할 정도.[32][33]
3. 투구 스타일
투구 스타일은 정교한 제구력을 가지고 승부하는 피네스 피처에 가까웠다. 포심 패스트볼과 슬라이더 두 구종만을 주로 던지는 투피쳐였으며,[34][35] 특히 슬라이더가 일품이었는데 직구와 슬라이더의 구속차가 크지 않았고, 우타자를 상대한 프론트도어 슬라이더가 절묘했다.
다만 공이 가벼워서 피홈런이 많다는 약점이 있었다. 하지만 그걸 충분히 메우고 남을만한 칼날같은 제구력과 날카로운 볼끝을 자랑했는데, 만화에나 나올법한 3분할 투구를 했던 투수였다. 이 투구스타일 때문에 삼진을 굉장히 잘 잡아내는 타입. 신인 첫 해부터 7년차까지 정상적으로 시즌을 소화했을 때 늘 탈삼진 부문 순위권에 있었으며 특히 1996년에는 221개의 탈삼진으로 현재까지도 최동원의 223개에 이은 역대 단일시즌 탈삼진 랭킹 2위 기록을 보유중이다.
전성기 시절 같이 경쟁했던 특급 좌완인 LG의 이상훈이나 한화의 구대성에 비해 위압감은 떨어졌지만, 영리한 투구스타일로 하나하나 타자를 돌려세웠던 굉장히 실리적인 타입의 투구를 했다. 그래서 그에게 아마시절부터 붙어있던 별명도 심지어 '꾀돌이'였을 정도.[36]
4. 지도자 경력
일본으로 건너가 치바 롯데 마린즈에서 연수를 받고 귀국한 그는 롯데 자이언츠의 재활코치를 담당하다가 2011년에 롯데의 감독진과 코치진이 전부 물갈이되면서 투수코치가 되었다.[37][38] 초기에는 일단 별로 좋은 소리를 못 들었는데, 부상 이후 재활 훈련에 매진하지 않았고 선수 말년에 미니홈피 관리에 매진하며 상당히 게을렀던 데다 코치 선임도 겨우 9개월 연수를 받고 바로 시행된 것이라 믿음직한 인상이 들지 않았던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주형광과 가득염이 투수코치로 부임한 후 롯데 투수진이 점차 안정세로 접어들면서 조금씩 평가가 나아지고 있는 편. 주형광이 투수코치를 맡게 된 이후로 불펜은 투수 영입 등을 감안하더라도 정상 수준을 넘어 리그 탑급이 되었으며, 특히 2012년 포스트시즌에서는 (포시 한정)원수같았던 두산을 불펜의 힘으로 꺾자 팬덤 내에서 지지여론은 더더욱 굳건해졌다. 2012 시즌 후 김시진 감독이 부임하면서 정민태 때문에 2군 투수코치로 보직 이동되자, 팬들이 난리쳤을 정도.
게다가 그렇게 할 수 없이 2군으로 밀려나 처음 맞이하게 된 첫 시즌인 2013년에는 남부리그 팀자책 1위를 만드는 등, 뚜렷한 성과를 하나 둘 계속해서 만들어 내면서 다시 한번 자신의 능력을 입증했다.[39]
근데 희한한 것은 주형광 코치의 성과, 능력에 대해 자세하게 취재해 놓은 기사는 거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팬들 사이에선 '도대체 뭘 어떻게 가르치는지 모르겠지만, 능력은 확실히 있는 코치'(...)의 이미지이다.
김시진 2년차부터는 1군 불펜 투수코치가 되었다. 그러다가 2014년 8월 21일 팀 분위기 쇄신 차원에서 육성군으로 내려간 정민태의 후임으로 1군 메인 투수코치가 되었다. 2014 시즌 후 이종운이 감독이 되자, 다시 육성군으로 내려갔다. 새 1군 투코인 염종석이 철밥통 소리를 듣는 반면 주형광의 능력이 좋은 편이라 팬들의 반발이 어느 정도 있는 편.
결국 전반기를 마치고 1군으로 다시 올라왔다. 염종석은 육성군행.....
그리고 주형광이 1군으로 합류하자 마자 귀신같이 선발진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9월에는 팀 ERA가 2점대, 특히 불펜ERA가 1점대를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2015년 9월 22일에 '''드디어''' 그의 업적을 다룬 기사가 났다. 요약하면 누구랑은 달리 경기 상황과 이닝마다 올릴 투수를 세분화 시킨 덕이라고 한다.
2016년에는 외야수 출신 감독인 조원우감독에게 투수교체 권한을 일임받았는데... 어째 전과는 다르게 좌우놀이와 한박자 어긋나는 투수교체, 김성배, 정대현같은 퇴물 투수들을 필승조로 쓰는등, 욕을 엄청나게 얻어먹고 있다. 더군다나 5월 27~29일에 한화에게 3연패를 당하면서 더욱 장종훈 타격코치와 더불어 대차게 까이고 있다. 그냥 3연패도 아니고, '''02롯데 수준의 한화'''에게 진게 컸다. 이닝을 쪼개며 하는 좌우놀이에, 툭하면 투수진 출석체크등 다방면에서 롯데팬들에게 까이고 있다. 당장에 선발에서 체력부담으로 내려왔다고 한 박진형을 3연투를 포함 왕창 부려먹는 모습을 보이며 언행불일치의 완벽한 모습을 보였다. 또한 크게 지는 상황이나 이기는 상황에서 투수진을 이닝을 나눠가며 쓰는 장면은 정말.. 심지어, 좌완 핵폭탄을 '''좌타자 상대''' 원포인트 투수로 기용하는 모습은 이해할 수 없을 것 같다.
8월 16일 고척 넥센과의 경기에서는 선발이었던 린드블럼이 5이닝동안 111개의 많은 투구수를 기록하고, 3실점(2자책점)을 기록하고 올라온 투수는 홍성민 그 이후에는 이명우-이정민-김성재[40] 미칠듯한 좌우놀이를 보여줬고, 이 투수들 중에 실점을 하지 않은 투수는 이명우였다. 특히 8회말에 김성재가 데뷔 첫번째 등판을 치루고 있을때, 서건창에게 어려운 승부를 하며 카운트가 몰리는 상황이 왔을때 덕아웃을 잡아준 장면에서 한숨을 쉬었다. 많이 갑갑하다는 의미에서 한건지는 모르겠지만, 데뷔 첫번째 등판이었고, 3명의 타자에게 삼진 2개와 볼넷 1개를 허용했을뿐 나쁜 투구를 하지는 않고 있는 중이었다. 김하성에게 홈런을 허용하기는 했지만. 8월 17일 고척 넥센과의 경기에서 선발이었던 박진형이 4 1/3이닝 6실점으로 강판당한 이후 올라온 투수는 홍성민[41] 그 이후 고질적인 문제인 이닝 쪼개기와 좌우놀이를 시전했다. 다행이라 해야할지 팀은 7실점 이후 더 이상 실점을 하지는 않았지만, 김유영-박시영-이정민을 등판시켰다. 이렇게 마구잡이식으로 등판시키는 모습을 보면, 패전조-승리조라는 구별은 있는 것인지도 궁금해지고 있다.[42]
승부처를 사랑하는 감독에게 투수쪽을 일임받은 이후, 정말 갈피를 못잡고 엉망진창의 투수기용을 보이고 있다. 작년에 염종석이 있을땐 이 사람을 찾게 됐었는데, 오히려 1군을 제대로 맡기고 보니, 더하면 더했지 덜한 모습은 아닌거 같다. 특히 정민태 코치와 김시진 감독이 미친듯이 하던 좌우놀이를 자기가 하고 있으니 더더욱. 차라리 크리스 옥스프링 2군 투수코치나, 현재 3군에 있는 진필중코치를 올려서 하는게 현재 투수를 기용하는 장면보다 훨씬 나은 장면이 나오지 않을까 궁금해지기도 한다. [43] 더더구나 한 번 굴리기 시작한 투수인 홍성민이나 다른 젊은 좌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을 던질때 경기마저 던질 기세인 이명우를 아직도 기용하는 모습은 왜인지 아직도 의문부호가 붙는다(결국 이명우는 8월 17일자로 2군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8월 18일 자로 드림팀(3군)으로 내려갔다! 그 대신 올라온 코치가 옥병장 2군 투수코치이다. 현재 2군 코치인 크리스 옥스프링, 진필중과 협력하여 젊은 투수들을 키워내고, 부진한 1군 투수들을 고쳐서 다시 올려보내는 데 기여하고 있다.
이후 2018년 7월 21일 김원형 코치에게 1군 투수코치를 넘겨받고 1군에 콜업되었다. 김원형은 수석코치만 담당한다. 그리고 8월 달 들어 갑자기 롯데가 정상적인 투수교체 타이밍을 보여주고 팀도 성적이 조금씩 올라가면서 주형광 코치의 평가는 2016년 전 형광매직 수준까지 회복되었다. 9월 30일 수원 원정경기에서는 5회말 박세웅이 제구난조로 볼질을 하자 교체하려고 조석두에게 물어보았지만 거절당하는 장면이 카메라에 잡히면서 투수교체 권한은 온전히 석두의 권한이라는 것이 밝혀졌다(보기).
양상문 감독이 부임한 19시즌에도 메인 투수코치로 남게되었으나 양상문 감독 스타일상 투수교체는 직접 관여하는게 유력해서 투수 코칭에만 머무를 것으로 보인다.
2019년 7월 23일 양상문이 사퇴하고 공필성 대행이 취임하자 2군으로 내려갔다. 새 1군 메인 투코는 임경완.
이후 2019년 10월 7일 성민규 단장 체제하에 재계약을 하지 않기로 했다
2020년 1월 고려대학교 야구부 코치로 부임하게 된다.
5. 여담
- 프로 입단 전까지 부산 토박이였던 삼성 라이온즈의 투수 윤성환이 가장 좋아했던 롯데 선수였다고 한다.[44]
- 기억에 제일 남는 시즌은 1995 시즌이라고 한다. 팀도 한국시리즈에 진출했고, 인기도 많았고, 사직 잠실을 오가면서 큰 대회를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 코치 시절 제일 기억에 남았던 선수는 박진형이라고 한다.
6. 연도별 성적
- 진한 글씨는 리그 5위내 기록이고, 붉은 글씨는 1위 기록이다.
[1] 실제 생일은 3월 1일생이지만 음력 생일인 1976년 2월 1일로 호적에 오르는 바람에 빠른생일로 19세인 1994년에 프로에 입단했다. 그 해 해태에 입단한 이호준도 이런 케이스이다.[2] 손민한보다도 어리다![3] 1995년 플레이오프 6차전 1피안타 완봉승, 1999년 플레이오프 마지막 3타자 연속삼진 등등. 사실 1999년 플레이오프에서 주형광은 좋은 편이 아니었다. 그나마 제일 잘막은 게 저 플레이오프 7차전.[4] 첫 승리가 완투승이었다.[5] 하지만, 현재는 두산 베어스 선수이기 때문에 장원준 이후 김원중, 고원준, 김유영(야구선수), 정대현, 안태경 등이 사용하였고 돌고 돌아 현재 2021년 기준으로 해당 등번호는 신인 '''손성빈'''이 쓰고 있다.[6] 그리고 포수는 진갑용 [7] 그 당시 손민한은 몸쪽 볼을 잘 못던져서 주형광을 실질적인 에이스로 보는 시각이 꽤 있었다.[8] 당시 롯데는 신인들에게는 후하게 쳐줬다. 주형광 이전 대졸신인인 김경환에게는 1억원을 지불하기도 했고1996년 차명주, 1997년 문동환, 손민한이 입단했을때 5억을 주면서 특급대우를 해줬다. 돈이 급해서 울며겨자먹기로 총액 2500만원을 받은 염종석이 운이 없었던 수준.[9] 이 때 신인들 몸값이 억원이상 받아가자 몸값 거품이라는 목소리가 야구계 안팎에서 나왔다.[10] 다만 최초의 고졸신인 1억 이상 몸값 기록은 LG의 신윤호가 가지고 있다. 계약금 8,800만원 연봉 1,200만원[11] 다만 5회에 롯데가 동점을 만들며 패전투수는 면했다.[12] 신인최초 20-20을 했던 김재현이 묻힐 정도였으니.....(김재현은 0.289-21HR-21SB 이었지만 유지현은 0.305-15HR-51SB을 찍으며 확실히 신인왕에 부족함이 없는 활약을 보였다) 거짓말 하지 않고 92년도 부터 98년도 까지 리그 내에서 걸출한 신인들이 많이 나왔던 시기였다. 다만 이 시즌 신인왕은 신인 최초 20-20을 기록한 김재현쪽에 무게가 쏠리는 분위기였으나 정작 투표는 유지현 쪽으로 몰려 김재현이 당시 투표권을 가진 기자들에게 밉보인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도 있었다.[13] 그 피안타조차도 정타가 아닌 빗맞은 안타였고, 바로 다음타자를 병살로 잡아내며 정확히 27타자를 상대했다.[14] 심지어 그 류현진조차도 200이닝 이상 투구 시즌은 볼넷이 50개가 넘는다.[15] 이해 구대성 말고도 최초의 30-30인 박재홍도 MVP후보에 올랐으나, 당시 분위기는 "신인왕,MVP 동시석권은 안된다" 였던지라 MVP는 구대성이 받는다. [16] 주형광이 이 시기에 순수 선발로 뛰었다면, 구대성은 '''강병철에게 선발,구원 안가리고''' 굴려졌다.[17] 92년 우승의 주역이던 염종석의 재활을 주장했던 강병철 감독의 의견을 묵살해 염종석이 그 사단이 났음에도, 역시 말 안 듣는 구단 답게 주형광도 이렇게 무너질지 누가 알았을까?[18] 심지어 WAR조차도 -0.09로 음수를 기록했다. 투혼을 불사른 것과 별개로 팀에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다는 의미이다.[19] 사실 이 시즌은 결과적으로 시작부터 꼬였던 게 시즌 개막을 불과 나흘(!) 앞둔 시점에서 팀내 프랜차이즈가 확실했던 발빠른 전준호를 현대 피닉스의 문동환을 데려오는 조건으로 현대 유니콘스에게 현금 5억에 트레이드시켜버렸다. 김대익의 성장 가능성을 믿고 실행한 트레이드였지만 기대만큼 성정하지 못한 탓에 리드오프 문제가 부각되고 실상 이 때 부터 롯데의 시즌이 꼬이기 시작했다. 게다가 팀 내 선수들이 단체로 금전 사기를 당하는 일이 벌어져 팀 분위기조차도 뒤숭숭했고, 결국 시즌 초반부터 꼴지로 추락한 뒤 한 번도 반등하지 못하고 48승 77패 1무승부로 그 시즌을 꼴찌로 마감했다.[20] 동년도에 구대성은 오릭스 블루웨이브로 진출한다.[21] 주형광의 이탈로 김명성 감독이 마음 고생이 심했고 이것을 주변 지인들에게 털어놓았다고 한다. 그래서 김명성 감독 장례식장에 주형광이 갔을때 한 지인이 "너 때문에 감독님 돌아가셨다" 란 말을 듣고 죄책감에 많이 시달렸다고 한다[22] 야만없이지만 만일 주형광이 시즌 초반에 부상당하지 않았더라면 2001 시즌에 최하위를 안 했을수도 있다. 뭐... 2001 시즌은 감독의 급사와 4번타자가 경기 중 타팀 투수를 죽빵을 때려그 해 남은 잔여경기 '''출전정지를 먹는'''악재가 겹친것도 한몫했지만.... 그리고, 두 사람은 2006년 함께 팀 타선을 이끄지만, 투수들과 나머지 타자들이 노답이라 망했다.[23] 수술 사례 중에 배영수 정도가 성공했다 볼 수 있지만, 배영수는 2년 재활 중 1년 쉬고 1년 뒤에 개폭망 하더니 그 다음 해 조금씩 부활을 하고 결국, 2년 뒤에서야 10승 투수로 돌아와 어느정도 조짐을 보여줬다. 비슷한 실폐 사례는 '''전병두'''가 있다. 전병두 항목 참고.[24] 여담으로 03시즌 10선발-52구원등판으로 10-40 클럽에 들어가있다.[25] 손민한이 당시 시즌 초 마무리 투수로 잠시 알바를 하고 있던 시기였다.[26] 팔꿈치에 박힌 쇠못이 탈이나서 팔꿈치에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던 상황이었다고 한다.[27] 토미 존 서저리를 3번씩이나 받은 권오준이 여러번 재기하는데 성공하는 걸 생각하면 수술을 하는 게 나았을 것이다. 다만 말년에 자포자기하고 재활을 포기한 걸 보면 또 모르겠다. 2019년 권오준은 아직 현역으로도 뛰고 있다.[28] 본인은 이 점을 가장 아쉬워한다고.[29] 다만 주형광의 경우는 빠른생일이라 학번으로 따지면 94학번이다. 그걸 감안해 한 살 올려 33세라고 쳐도 너무 일찍 은퇴한 건 확실하다.[30] 동기인 박지철이 그보다 롱런했으며(2009년 완전 은퇴), 또 다른 동기인 임경완이 40세까지 현역(2015년 까지 한화 이글스)으로 활동하는 걸 생각해보면 아쉬울 따름.[31] 류현진이 2012년 25세 시즌까지 달성한 승수가 98승이다.[32] 사실 몸이 안 좋을 시기에 군에 입대를 했는데 하필 군에서도 면제 판정이 나와서 휴식 기간이 없이 바로 투구를 시작했다. 투수에 따라 군 복무 기간은 휴식, 재활 기간(예로 SK의 채병용)이 될 수도 있는데 그럴 기회가 전혀 없었다. 정말 안 될 놈은 뭘 해도 안 된다.[33] 손민한은 물론이요 6년(프로 입단은 2년) 선배인 '''가득염'''보다도 빨리 은퇴할 줄 아무도 몰랐으니. 거기에 혹사로 인해 주형광보다도 더 많은 재활, 수술을 거친 '''염종석'''마저도 주형광보다 1년 더 뛰었다. 허나, 염종석마저 가득염보다 일찍 은퇴했다. 다만 염종석은 2019년 전까지 롯데 최장기간 소속 선수였다.[34] 이는 메이저리그의 투수인 톰 글래빈과 비슷하다.[35] 커브나 포크같은 종방향 변화구가 없었다. 그런데도 탈삼진 개수가 무시무시하다.[36] 프로 초창기 때는 아직 20살도 안된 시기라 얼굴에 여드름이 많이 남아있어 '딸기'라는 별명도 있었다.[37] 로이스터 감독이 잘리면서 박영태, 양상문, 한문연같은 무능한 코치들이 이 때 다 잘렸다. [38] 전 버전에는 이강돈, 양용모도 해임됐다고 기술했으나, 정작 이 둘은 2012 시즌 끝나고 윤학길, 조원우 등과 같이 손잡고 나갔다.[39] 뭐 진지하게 따지자면 2군 방어율은 큰 의미는 없다. 삼성같은 구단이 매년 1군감 투수가 한두명이라도 계속해서 나오는 것은 2군에서도 팀 방어율이 좋기 때문은 아니다.[40] 데뷔 첫번째 등판이었다. 데뷔전이었다는 이야기.[41] 이 근래에 홍성민이 계속 2번째 내지 3번째 투수로 올라와서 많이 구르고 있는 중이다. 작년에 어떤 분에 의해서 부상에서 돌아온 이후 릴리스 포인트도 높히면서 부활을 하려고 노력을 하고 있으나, 아직까지 작년만큼의 위력적인 모습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작년에 비해서 더 안 좋은 상태인 것 같아 보인다.[42] 윤길현 - 손승락이 7-8월들어 많이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면서 승리조라고 하더라도 크게 믿음이 안 가는 부분이 있는것만은 사실이다.[43] 실제로 양승호 감독 재임기간(2011~2012) 선발진의 상황은 불펜진에 비해 안습 그 자체였다.[44] 윤성환은 부산상고 재학 시절 1999년 플레이오프 7차전의 주형광을 직관으로 보며 '저렇게 멋진 롯데 자이언츠의 에이스가 되겠다'는 꿈을 키웠다고 한다. 그런데 정작 본인이 입단한 팀은 그 해 맞붙은 상대 팀이라는 것....[45] 단일시즌 탈삼진 2위 기록, 1위는 최동원의 223개, 좌완투수 한정으론 1위기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