헹가래 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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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O리그 최초의 헹가래 투수인 박철순(가장 왼쪽 무릎을 꿇고 만세를 하고 있는 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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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한국시리즈 6차전에서 우승을 확정짓고 세레모니를 하는 원종현과 NC 선수들.
야구에서, 팀의 우승을 확정지었을 때 마운드에 있던 투수를 일컫는 말. 일본야구에서 사용되는 용어인 胴上げ投手를 한국어로 번역한 것이다.[1]
'''당연히''' 팀에서 절대적인 위상을 가진 1선발 또는 마무리 투수가 헹가래 투수로 등판하는 경우가 99% 이상이다. 해당 이닝만 끝나면 우승을 확정지으니 팀 입장에서는 최강의 카드라고 할 수 있는 선수를 아낄 필요 없이 출격시키는 것이 당연한 것이고, 우승 확정 장면은 '''100%'''의 확률로 해당 연도 우승의 자료화면으로 등장하니 해당 투수에게는 더없는 영광일 수밖에 없는 만큼 팀의 상징적인 투수를 등판시키는 것이 일반적. 예외적인 상황이라고 해 봐야 상기된 1선발 및 마무리를 이미 소진되거나 다음 경기를 위해서 등판을 아껴야 할 때 등 극단적인 상황, 예를 들자면 에이스가 해당 경기 선발 투수로 등판한 상황에서 마무리가 연투로 인해 지쳐서 등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거나 아니면 작가질이나 연장 승부 등으로 인해 마운드에서 이미 강판되었을 때 정도가 아니고서야 팀내 최고 투수가 등판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며, 이러한 극단적인 예외상황에서도 남은 선수들 중 최고의 기량을 가진 선수(2선발 또는 셋업맨 등)가 등판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헹가래 '''투수'''인 만큼 우승을 확정지은 경기가 홈 팀의 '''끝내기 득점'''으로 끝날 경우[2] 존재할 수가 없다.
상술했듯이 우승 확정 장면은 두고두고 자료화면으로 우려먹을 예정인 만큼 헹가래 투수(및 포수)가 된다는 것은 해당 선수에게는 큰 영광이자 팀의 상징적인 선수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최근에는 우승을 확정지은 투수가 헹가래가 아닌 (주로 포수와) 포옹하는 세레머니를 하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이름과 실제가 다른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미국은 그런게 없다. 애초에 헹가래도 거의 하지도 않으며 꼭 우승 순간에 그 장면에 나오려고 1선발, 마무리가 자원등판하는 경우도 흔치 않다. 2017년 휴스턴 애스트로스의 헹가래 투수는 마무리 켄 자일스가 부진으로 강등되면서 대신 나왔던 팀의 5선발 찰리 모튼이었다. 우승 장면 보기
2013년 월드 시리즈에서는 아시아인 최초로 우에하라 고지가 6대1로 리드하던 상황에서 9회초에 등판, 1이닝을 틀어막으며 헹가레 투수가 되었다.
2015년 월드 시리즈에서는 로열스불펜 3대장 의 마무리인 웨이드 데이비스 팀의 우승을 확정지었다.
2016년 월드 시리즈에서는 시카고 컵스의 추격조였던 마이크 몽고메리가 염소의 저주를 꺠고 108년 만의 팀의 우승을 확정지었다.[3]
2018년 월드 시리즈에서는 보스턴 레드삭스의 1선발인 크리스 세일이 헹가래 투수로 올라와 2018 시즌을 끝맺었다.
2019년 월드 시리즈에서는 션 두리틀의 부상으로 대신 포스트시즌 마무리를 맡은 다니엘 허드슨이 경기를 끝맺었다.
2020년 LA 다저스의 헹가래 투수는 남은 2.1이닝을 책임졌던 3선발 훌리오 유리아스였다.
그나마 한국과 가장 유사한 예로는 2006년 월드 시리즈에서의 마지막 경기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당시의 젊은 선수들이자, 팀의 전설이 될 애덤 웨인라이트와 야디어 몰리나의 등판 정도.[4]
KBO 리그에서 헹가래 투수가 존재하지 않는 시즌은 2002년과 2009년으로 두 해 모두 시리즈 최종전이 '''끝내기 홈런'''으로 끝났기 때문[5] 이다. 1985년도 한국시리즈가 취소되었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견도 있으나, '''우승 확정'''이지 '''한국시리즈 우승 확정'''이 아니므로 통합 우승을 확정지은 구덕 롯데전[6] 의 마지막 투수였던 김시진을 행가레 투수로 보기도 한다.[7]
헹가래 투수 뿐만 아니라 헹가래 포수, 마지막 타자, 마지막 타구의 결과를 기록한다. 상술하였듯이 2002년과 2009년은 헹가래 '''투수'''가 없지만 해당 시즌 우승을 확정짓는 장면에 등장하는 선수라는 점에서 헹가래 '''타자''' 및 상대팀 배터리 역시 기록한다.
KBO리그 최초의 헹가래 투수인 박철순(가장 왼쪽 무릎을 꿇고 만세를 하고 있는 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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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한국시리즈 6차전에서 우승을 확정짓고 세레모니를 하는 원종현과 NC 선수들.
1. 개요
야구에서, 팀의 우승을 확정지었을 때 마운드에 있던 투수를 일컫는 말. 일본야구에서 사용되는 용어인 胴上げ投手를 한국어로 번역한 것이다.[1]
2. 상세
'''당연히''' 팀에서 절대적인 위상을 가진 1선발 또는 마무리 투수가 헹가래 투수로 등판하는 경우가 99% 이상이다. 해당 이닝만 끝나면 우승을 확정지으니 팀 입장에서는 최강의 카드라고 할 수 있는 선수를 아낄 필요 없이 출격시키는 것이 당연한 것이고, 우승 확정 장면은 '''100%'''의 확률로 해당 연도 우승의 자료화면으로 등장하니 해당 투수에게는 더없는 영광일 수밖에 없는 만큼 팀의 상징적인 투수를 등판시키는 것이 일반적. 예외적인 상황이라고 해 봐야 상기된 1선발 및 마무리를 이미 소진되거나 다음 경기를 위해서 등판을 아껴야 할 때 등 극단적인 상황, 예를 들자면 에이스가 해당 경기 선발 투수로 등판한 상황에서 마무리가 연투로 인해 지쳐서 등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거나 아니면 작가질이나 연장 승부 등으로 인해 마운드에서 이미 강판되었을 때 정도가 아니고서야 팀내 최고 투수가 등판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며, 이러한 극단적인 예외상황에서도 남은 선수들 중 최고의 기량을 가진 선수(2선발 또는 셋업맨 등)가 등판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헹가래 '''투수'''인 만큼 우승을 확정지은 경기가 홈 팀의 '''끝내기 득점'''으로 끝날 경우[2] 존재할 수가 없다.
상술했듯이 우승 확정 장면은 두고두고 자료화면으로 우려먹을 예정인 만큼 헹가래 투수(및 포수)가 된다는 것은 해당 선수에게는 큰 영광이자 팀의 상징적인 선수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최근에는 우승을 확정지은 투수가 헹가래가 아닌 (주로 포수와) 포옹하는 세레머니를 하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이름과 실제가 다른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미국은 그런게 없다. 애초에 헹가래도 거의 하지도 않으며 꼭 우승 순간에 그 장면에 나오려고 1선발, 마무리가 자원등판하는 경우도 흔치 않다. 2017년 휴스턴 애스트로스의 헹가래 투수는 마무리 켄 자일스가 부진으로 강등되면서 대신 나왔던 팀의 5선발 찰리 모튼이었다. 우승 장면 보기
2013년 월드 시리즈에서는 아시아인 최초로 우에하라 고지가 6대1로 리드하던 상황에서 9회초에 등판, 1이닝을 틀어막으며 헹가레 투수가 되었다.
2015년 월드 시리즈에서는 로열스불펜 3대장 의 마무리인 웨이드 데이비스 팀의 우승을 확정지었다.
2016년 월드 시리즈에서는 시카고 컵스의 추격조였던 마이크 몽고메리가 염소의 저주를 꺠고 108년 만의 팀의 우승을 확정지었다.[3]
2018년 월드 시리즈에서는 보스턴 레드삭스의 1선발인 크리스 세일이 헹가래 투수로 올라와 2018 시즌을 끝맺었다.
2019년 월드 시리즈에서는 션 두리틀의 부상으로 대신 포스트시즌 마무리를 맡은 다니엘 허드슨이 경기를 끝맺었다.
2020년 LA 다저스의 헹가래 투수는 남은 2.1이닝을 책임졌던 3선발 훌리오 유리아스였다.
그나마 한국과 가장 유사한 예로는 2006년 월드 시리즈에서의 마지막 경기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당시의 젊은 선수들이자, 팀의 전설이 될 애덤 웨인라이트와 야디어 몰리나의 등판 정도.[4]
3. 각 리그의 헹가래 투수
3.1. KBO 리그
KBO 리그에서 헹가래 투수가 존재하지 않는 시즌은 2002년과 2009년으로 두 해 모두 시리즈 최종전이 '''끝내기 홈런'''으로 끝났기 때문[5] 이다. 1985년도 한국시리즈가 취소되었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견도 있으나, '''우승 확정'''이지 '''한국시리즈 우승 확정'''이 아니므로 통합 우승을 확정지은 구덕 롯데전[6] 의 마지막 투수였던 김시진을 행가레 투수로 보기도 한다.[7]
3.1.1. 역대 한국시리즈 헹가래 투수 목록
헹가래 투수 뿐만 아니라 헹가래 포수, 마지막 타자, 마지막 타구의 결과를 기록한다. 상술하였듯이 2002년과 2009년은 헹가래 '''투수'''가 없지만 해당 시즌 우승을 확정짓는 장면에 등장하는 선수라는 점에서 헹가래 '''타자''' 및 상대팀 배터리 역시 기록한다.
3.1.2. KBO 리그 헹가래 투수 관련 이야깃거리
- KBO 리그 헹가래 투수 최다 경험자는 오승환의 5회(2005, 2006, 2011, 2012, 2013)이며, 그 다음이 선동열의 4회(1986, 1989, 1991, 1993), 정민태(1998, 2003)와 김광현(2010, 2018)의 2회이다. 채병용은 2008년과 2009년에 마지막 투수로 마운드에 있었으나 2009년에는 헹가래 투수가 아닌 끝내기 홈런을 맞은 허용투수(...)였다. 그 외에는 모두 1번씩밖에 경험하지 못하였다.
- 헹가래 포수 최다 경험자는 진갑용의 6회(2005, 2006, 2011, 2012, 2013, 2014)이며, 그 다음이 박경완의 5회(1998, 2000, 2007, 2008, 2010), 김무종(1983, 1986, 1987)과 장채근(1988, 1989, 1991), 김동수(1994, 2003, 2004), 양의지(2015, 2016, 2020)가 각각 3회씩을 경험하였다.
- 헹가래 배터리 최다 경험 조합 역시 오승환-진갑용 배터리의 5회(2005, 2006, 2011, 2012, 2013)이며, 그 다음이 선동열-장채근 배터리가 2회(1989, 1991) 경험하였다.
- 준우승팀 선수 입장에서는 다행스럽게도(...), 2회 이상 우승 허용타자가 되는 경우는 없었다. 다만 마지막 타자는 마해영이 2회를 기록하였고[15] 허용선수는 정상호가 2회를 기록하였다[16] (...).
- 전문 선발투수[17] 가 한국시리즈의 마무리의 상징성을 위해 등판해서 세이브를 따낸 사례는 김광현이 2010년, 2018년 두번[18] 기록하였고, 권명철(1995), 정민태(1998), 임선동(2000), 채병용(2008), 양현종(2017)이 각각 1회씩 기록하였다. 이중 마지막 1이닝만 막아낸 것은 채병용(2008), 양현종(2017), 김광현(2018)만 있다.
- 2개 이상의 서로 다른 구단 소속으로 헹가래 투수를 경험한 선수는 없으며, 포수는 김동수[19] 와 박경완[20] 과 양의지[21] 가 있다.[22]
- 우승 당시 타구[23] 는 삼진이 11회(헛스윙 삼진 7회, 루킹 삼진 4회), 뜬공이 12회(중견수 5회, 우익수 3회, 포수, 2루수, 3루수, 좌익수가 각각 1회씩), 땅볼이 13회(투수 5회, 유격수 4회, 2루수 2회, 1루수와 3루수가 각각 1회씩), 끝내기 홈런이 2회였다. 이 중 병살타로 우승을 확정지은 경우는 2회[24] 이며, 번트 타구 아웃(...)[25] 으로 우승을 확정지은 경우도 1회있다.
- 삼진 아웃을 제외하고 우승 확정 타구를 가장 많이 처리한 야수[26] 는 이숭용[27] 과 박한이[28] 의 2회이다.
- 우승 당시 요일은 월요일 5회[29] , 화요일 7회[30] , 수요일, 토요일이 6회[31] , 금요일 4회[32] , 가장 적은 목요일이 2회[33] , 가장 많은 일요일이 8회[34] 로 기록되고 있다.
- 우승을 확정한 경기에서 선발 등판하여 완투를 함으로써 헹가래 투수가 된 선수는 5명으로 1982년 박철순, 1984년 최동원, 1988년 문희수, 1997년 김상진, 2003년의 정민태이다.
- 헹가래 투수가 해당 연도 한국시리즈에서 MVP를 수상한 적은 2018년까지 10회 있었다[35] . 반대로 한국시리즈 MVP를 타고도 헹가래 투수가 되지 못한 적은 1986년 김정수, 1990년 김용수, 1996년 이강철의 3명이다.[36]
- 한편 포수가 한국시리즈 MVP에 등극한 것은 1991년의 장채근과 2016년, 2020년의 양의지로 2명인데, 이 두 선수 모두 해당 한국시리즈 헹가래 포수가 되었다. 투수와 포수를 제외한 나머지 야수들 중 한국시리즈 MVP를 수상하고 동시에 한국시리즈 마지막 아웃카운트도 처리한 행운을 경험한 선수는 1993년의 이종범이 유일. 동시에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한국시리즈 마지막 아웃카운트 처리 경험과 MVP 수상 경험이 모두 있는 선수는 추가적으로 박진만[37] 과 박한이[38] 가 있다.
- 1982년 한국시리즈에서 OB의 박철순이 삼성 배대웅의 크게 바운드된 타구를 처리하기 위해 점프를 하다가 땅바닥에 허리부터 떨어지며(!!!)[39] 큰 부상을 당하였으나, 유지훤이 날렵하게 처리하며 박철순은 그나마 불행 중 다행으로 한국시리즈 최초의 헹가래 투수가 되는 영예를 얻게 되었다.
- 2004년 한국시리즈 9차전 9회 말 2사 1,2루 8대 6으로 앞서고 있는 상황에서 삼성의 신동주가 평범한 내야 플라이를 쳤다. 타구를 처리하러 내려온 야수가 수비 좋기로 유명한 명품 유격수 박진만이기 때문에 이대로 우승을 확정짓나 싶었지만...박진만이 히 드랍 더 볼을 시전하며[40][41] 1점을 내 주게 되었다. 다행히도 다음 타자인 강동우를 1루수 땅볼로 처리하며 우승을 확정지었다. 야구에 만약은 없다지만 만약 박진만이 뜬공을 정상적으로 포구하였다면 박진만은 2년 연속으로 우승 확정 타구를 처리하게 되는 것이었고, 상술했던 최다 우승 확정 타구 처리 기록 역시 이숭용에서 박진만으로 바뀌었을 것이다.[42]
- 2017년 한국시리즈와 2018년 한국시리즈는 모두 각 팀을 대표하자 리그를 대표하는 선수들이 나와서 두산을 상대로 마지막 1이닝을 잡고 세이브를 올렸다. 상술했듯 전문 선발투수가 올라와서 세이브를 올리는 상황은 의외로 매우 드물었는데, 2017년 이전까진 4번밖에 없었고, 마지막 1이닝만을 책임진 것은 2008년의 채병용이 유일했다. 그렇지만 2017년과 2018년은 모두 팀의 1선발이 나와서 마지막 1이닝만을 마무리짓고 세이브를 올림과 동시에 행가레 투수가 되었다.[43]
- 2018년 한국시리즈에선 행가레 투수는 아니지만 경기를 마무리짓기 위해 두산이 1점차로 앞선 9회초에 1선발 조쉬 린드블럼을 등판시켜 1이닝을 책임지고 세이브를 올리려 하였다. 그러나 2사에서 최정에게 홈런을 맞으며 블론세이브를 기록하였고, 연장으로 접어든 경기에서 SK가 득점을 하자 이번엔 SK의 1선발인 김광현이 세이브를 위해 등판했고, 삼자범퇴로 이닝을 끝냄과 동시에 행가레 투수가 되었다. 즉, 한 경기에서 1점차 상황에서 세이브를 위해 각 팀의 1선발이 모두 등판하는 진기록이 나왔다. 참고로 두 선수는 각각 해당시즌 투수중 용병 WAR 1위[44] , 토종 WAR 1위를 기록한, 말 그대로 리그를 대표하는 에이스였다.
- 2019년 한국시리즈 4차전 9회 말 9대 8로 앞서 있던 상황에서 마무리 투수 이용찬[45] 이 등판해 1사 만루 위기까지 몰리는 상황까지 몰리기도 했지만 다음 타자인 김규민을 투수 앞 땅볼로 아웃시켜 한숨을 돌리고 이어지는 타자인 서건창을 상대로 3루 땅볼을 유도하였다. 이렇게 무난히 헹가래 투수가 될 수 있었지만 그만 3루수 허경민이 실책을 하며 동점을 내 주고 말았다. 어찌저찌 다음 타자인 김하성을 잡아내며 끝내기 위기를 넘기고 이어지는 10회 초 공격에서 두산 타선이 2점을 뽑아내면서 다시 헹가래 투수가 될 기회가 생겼지만... 선두타자 이정후를 중견수 뜬공으로 돌려세운 후 김태형감독이 마운드를 방문하면서 마운드 방문 횟수 초과로 인해 자동 교체되는 해프닝이 발생하였다.[46] 이로 인해 투수가 배영수로 교체되었고,[47] 배영수가 박병호를 삼진으로, 샌즈를 투수 땅볼로 돌려세우며 헹가래 투수가 되는 영예를 거머쥐었다. 허경민의 실책과 김태형 감독의 미스가 2019년 한국시리즈의 헹가래 투수를 바꾼 사건이었다.[48][49] 혹자는 이를 두고 배영수가 2004년 한국시리즈 4차전에서 10이닝 노히트노런을 달성함[50] 에도 승리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 그 아쉬운 마무리를 15년이 지나서야 매조지었다는 평을 내리기도 했다.
- 2020년 한국시리즈의 헹가래 투수 원종현은 사실 5년 전, 선수가 아닌 경기 시구자로 나온 적이 있었다. 원종현 항목 보면 알겠지만 대장암 발병으로 인해 사실상 재활이냐 은퇴냐의 선수생활 기로에 놓여 있던 상황이었고, NC 구단이 시구자로서의 영예를 챙겨 준 것에 가까웠다. 그 이후 원종현은 항암치료와 재활에 성공하여 NC 다이노스의 든든한 마무리로, 결국은 한국시리즈 우승 순간의 영광을 마운드에서 누리게 되었다. 인간승리의 한 예.[51]
3.2.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3.2.1. 역대 월드 시리즈 헹가래 투수 목록
3.2.2.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헹가래 투수 관련 이야깃거리
3.3. 일본프로야구
3.3.1. 역대 일본시리즈 헹가래 투수 목록
3.3.2. 일본프로야구 헹가래 투수 관련 이야깃거리
[1] 胴上げ라는 단어가 일본어로 헹가래라는 뜻이다.[2] 대표적으로 '''끝내기 홈런'''으로 우승을 확정지은 2002, 2009년 한국시리즈 등[3] 당시 팀의 마무리였던 채프먼은 혹사 때문인지 8회에 적시타와 홈런을 맞은 후 10회에칼 에드워즈 주니어 와 교체되었다.[4] 다만 이 당시에도 애덤 웨인라이트는 기존 마무리 투수였던 제이슨 이슬링하우젠의 이탈로 인해 임시 마무리 투수로 활약하던 시기이긴 했다.[5] 단 2002년 한국시리즈는 7차전이 아닌 6차전에서 끝난 홈팀의 끝내기[6] 공교롭게도 1985년 롯데는 통합 및 후기리그 2위를 달성하여 준우승을 했다.[7] 실제로 김시진은 삼성 라이온즈 소속에 1985년 통합우승 이외에 우승은 고사하고 3번의 준우승만 맛을 보았다. 결국, 롯데 자이언츠로 이적을 했지만 92년도 롯데가 한국시리즈 우승을 했을 땐 오히려 성적이 폭망이라 은퇴를 했다. 그가 첫 우승을 맛본건 투수코치로 뛴 1998년 한국시리즈 였다.[8] 통합우승을 확정지은 구덕 삼성-롯데전의 마지막 선수들[9] 당시 영상을 보면 체크스윙을 하는 모습이 보여 헛스윙 삼진이 아니냐는 말도 있는데, 심판의 삼진콜을 보면 루킹삼진임을 알 수 있다(체크스윙으로 헛스윙 삼진 아웃당한 1984년의 장태수와 비교해 보자.)[10] 1루로 송구하지 않고 직접 2루 베이스를 터치하여 아웃하였다. 당시 1루에 주자가 있었던 상태.[11] 김상진은 '''20세 최연소 완투승''' 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하지만 그는 다음 해를 끝으로 더이상 마운드에 설 수 없게 되었다...[12] 이 때 좌익수를 맡았던 선수를 전준호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 아마 마지막 아웃카운트 당시 캐스터가 전준호의 이름을 자꾸 언급한데다, 전준호가 현대 이적 이후에는 주로 좌익수 출전이 많았기 때문에 이러한 착각을 한 듯.[13] 2루 베이스를 직접 밟고 6-3 병살타를 이끌어냈다. 역대 유일하게 최종전을 완봉승으로 장식한 경기.[14] 1사 만루 상황에서 '''1-2-3 병살'''을 이끌어냈다.[15] 2001년 마지막 타자로 나와 삼진을 당하며 우승 허용타자가 되었으나(...) 그 상대는 진필중인데 2006년 이 둘은 LG에서 나란히 만나게 된다. 이듬해인 2002년에 우승을 확정짓는 끝내기 홈런을 쳤다![16] 2009년 나지완에게 끝내기 홈런을 맞으며 허용포수를 기록하였고, 2년 뒤인 2011년에 마지막 타자로 나와 3루수 땅볼로 아웃되며 허용타자를 기록하였다(...)[17] 선동열, 구대성같이 선발과 마무리를 왔다갔다한 선수 제외[18] 김광현이 KBO 커리어에서 세이브를 기록한건 이 두경기가 전부이며, 정규시즌에서의 세이브는 2020시즌 MLB 데뷔전에서 처음 기록하였다.[19] 1994년에는 LG 소속, 2003년과 2004년에는 현대 소속으로 헹가래 포수 경험[20] 1998년과 2000년에 현대 소속으로, 2007, 2008, 2010년에 SK 소속으로 헹가래 포수 경험[21] 2015, 2016년에 두산 소속으로, 2020년에 NC 소속으로 헹가래 포수 경험[22] 김동수와 박경완은 우승시즌에 한번씩은 골든글러브 수상을 했었다. [23] 편의상 삼진도 포함한다.[24] 2003년 6-3 병살, 2008년 1-2-3 병살[25] 1985년 통합우승 확정 당시 롯데의 한영준이 기습번트를 시도했으나 그대로 아웃되고 말았다.[26] 편의상 타구를 직접 받은 야수만 기록. 예를 들면 6-4-3 병살타에서 유격수-2루수-1루수가 모두 수비에 관여하지만 해당 상황에서는 최초로 타구를 처리한 유격수만 카운트한다.[27] 1998년에 중견수 플라이 아웃, 2004년에 1루수 땅볼 아웃을 처리함.[28] 2012년과 2014년에 각각 우익수 플라이 아웃 처리.[29] 2004, 2007, 2011, 2017, 2018[30] 1982, 1984, 1993, 2000, 2010, 2014, 2020[31] 수 : 1988, 1989, 1992, 1996, 2005, 2016/토: 1986, 1997, 2003, 2009, 2015, 2019[32] 1998, 1999, 2008, 2013[33] 1983, 2012[34] 1987, 1990, 1991, 1994, 1995, 2001, 2002, 2006[35] 1988년 문희수, 1992년 박동희, 1994년 김용수, 1998년 정민태, 1999년 구대성, 2003년 정민태, 2004년 조용준, 2005년 오승환, 2011년 오승환, 2017년 양현종[36] 이 3명의 선수들이 모두 공통점이 있는데, 우승을 확정한 경기에서 선발로 등판한 것. 즉, 한국시리즈 MVP를 받은 투수들은 모두 우승을 확정짓는 경기에 등판한 것이다![37] 2003년 유격수 앞 병살타 처리를 하여 우승을 확정지었고 2006년에 한국시리즈 MVP를 수상하였다.[38] 2012년에 우승확정 포구, 2013년에 한국시리즈 MVP 수상(우승확정 포구는 옆에 있던 중견수 정형식이 기록), 2014년에 다시 우승확정 포구를 하며 아쉽게 기록을 놓쳤다.[39] 당시 박철순은 진통제를 맞아가며 허리 부상을 참고 투구를 하고 있었다.[40] 사실 이것은 박진만 혼자만을 탓하기는 어려운 것이, 그 당시 폭우 중에 경기를 강행하고 있던 중이라 공이 제대로 보일 리가 없었다.[41] 공교롭게도 이는 박진만이 현대 유니폼을 입고 보여준 마지막 플레이였다.[42] 이숭용의 우승 확정 타구 처리 기록 2번 중 1번이 2004년에 강동우의 1루수 땅볼 처리였다. 박진만이 타구를 잘 처리했으면 이숭용이 타구를 처리할 기회도 없었을 것이다.[43] 이 두명의 투수는 모두 시리즈가 끝나지 않는다면 다음 경기 선발이 유력했지만 1점차에서 과감하게 투입하여 승리를 지켜냈다.[44] 투수 전체 WAR 1위[45] 정규시즌에는 5선발이었지만, 한국시리즈에서는 마무리 투수로 낙점되었다. 이미 1차전 9회 동점 상황에서 등판해 구원승을, 3차전 7회에 등판하여 3이닝 세이브를 기록하였다.[46] KBO리그 규칙 상 투수 교체를 제외한 단순한 코칭스태프의 마운드 방문은 1경기 2회로 제한된다. 이후에는 무조건 자동 교체다. 이 날 경기에서 두산은 이미 2회와 9회에 코칭스태프의 마운드 방문이 있었다. 2013년 한국시리즈 당시에도 두산이 그 규정을 놓쳐 준우승을 한 이력 때문인지 그 충격으로 마운드에 웬만하면 코치들이 적당히 올라가도록 하는 바람이 있었는데 2019년 역시 두산팬들도 이용찬이 갑자기 바뀌면서 갸우뚱 했다고 한다.[47] 당시 두산이 교체 가능했던 투수는 배영수, 권혁, 조쉬 린드블럼 3명 뿐이었는데, 권혁은 우타자 상대로 심각하게 부진하기 때문에 우타 거포인 박병호와 제리 샌즈를 상대하는 것은 무리였고, 린드블럼은 로테이션상 5차전 선발이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등판 자체가 무리수였다. 참고로 린드블럼이 출장 가능 선수로 등록된 것은 코칭스태프의 커뮤니케이션 오류였다고 한다. 김태형 감독은 이영하를 출장 가능 선수에 넣고 린드블럼을 미출장 선수에 넣는 것을 생각했다고. 만약 실제로 그렇게 되었으면 추격조이자 노장 투수인 배영수 대신 강속구 투수이자 영건 에이스인 이영하가 등판했을 가능성이 높았을 것이다.[48] 참고로 이용찬은 이미 2016년 한국시리즈에서 헹가래 투수가 된 적이 있었다. 2019년에도 헹가래 투수가 되었다면 선동열, 정민태, 오승환, 김광현에 이어 KBO리그 역대 5번째로 2번 이상 헹가래 투수가 되는 영광을 얻을 수 있었지만 아쉽게도 무산되었다.[49] 이와는 별개로 허경민의 실책은 또 다른 나비효과를 가져왔는데, 기존에 한국시리즈 MVP를 투표하였을 당시에는 박세혁이 MVP로 선정되었으나, 이 실책으로 인해 경기가 연장으로 가면서 MVP를 재투표하게 되었고 그 결과 MVP가 박세혁에서 오재일로 바뀌게 되었다.헹가래 투수와 한국시리즈 MVP를 바꿔버린 의외로 중요했던 사건이었다. 게다가 최초의 부자 MVP 탄생도 무산시킨 셈이다.[50] 이날 경기는 아쉽게도 무승부로 끝났었다. 배영수 다음으로 올라온 투수는 권오준이였다.[51] 게다가 원종현은 암 투병 이전에도 팔꿈치 부상과 부진으로 은퇴 기로에 놓여있던 적도 있었다. NC 다이노스 창단 시 입단테스트에 자원하여 창단멤버로 들어올 당시 원종현은 "1군에서 단 한 번이라도 공을 던지고 은퇴하고 싶다."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원종현 개인으로 보면 두 번이나 야구인생 부활에 성공한 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