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턴 1세

 

'''Norton I'''
'''Joshua Abraham Norton
조슈아 에이브러햄 노턴'''

'''제호'''
노턴 1세, 미국의 황제, 멕시코의 보호자
(Norton I, Emperor of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Protector of Mexico)
'''출생'''
1818년 2월 4일
[image] 영국 런던
'''사망'''
1880년 1월 8일 (향년 61세)
[image] 미국 샌프란시스코
''' '''

1. 소개
2. 자칭 황제의 이모저모
3. 대단한 인기
4. 사후 평가 & 어째서 이런 일이 가능했는가
5. 대중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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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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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상인이던 시절

한 방울의 피도 흘리게 만들지 않았으며, 누구도 약탈하지 않았고, 그 어떤 나라에게도 손해를 입히지 않은 점. 그 점에서 그와 같은 부류(다른 군주)들에 비해 훨씬 나은 인물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that he had shed no blood; robbed no one; and despoiled no country; which is more than can be said of his fellows in that line."). - 데일리 알타 캘리포니아 #

'''Norton I, Emperor of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Protector of Mexico'''[1]
본명 조슈아 에이브러햄 노턴(Joshua Abraham Norton)으로, 미국황제를 자처했다.
영국 런던 출신으로, 그가 어릴 때 가족이 남아프리카 공화국 케이프타운으로 이주했다. 그의 아버지는 일찍이 상업에 종사해서 돈을 제법 벌었고, 노턴 또한 그의 아버지의 항해 용품 사업에 동참했다. 1848년에 노턴은 끔찍한 일을 당했는데, 그의 일가족(아버지, 어머니, 2명의 형제)이 사망하는 참사를 겪었다. 그는 돌아가신 아버지의 가산을 처분하고 남은 4만 달러[2]를 가지고 브라질로 이주했다.
1849년 노턴은 골드 러시가 터진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했다. 노턴은 금보다는 다른 사업에 관심이 많았고 부동산에 투자하고 잡화점을 여러 개 내어 1853년에는 25만 달러나 모았다. 실제로 이 당시에는 금을 캐러 온 광부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는 편이 직접 금을 캐는 것보다 훨씬 짭짤했다. 계란 한 개가 1달러나 할 정도였으니까.[3]
당시 캘리포니아중국 청나라로부터 을 수입하고 있었는데[4], 하필 태평천국의 난이 일어나고 기근이 들어 쌀 수출금지령이 떨어지고 본래 4센트였던 쌀값이 9배인 36센트까지 폭등한다. 노턴은 쌀 수입업자에게 2천 달러 선금을 주고 나머지 2만 5천 달러는 30일 후에 주겠다는 계약을 하고 쌀을 매입하기 시작했다. 쌀값은 계속 올라 1파운드당 5센트 하다가 50센트까지 폭등하게 됐는데 이때 팔았더라면 노턴은 떼돈 벌고 대성공을 했겠지만 더 큰 욕심 때문인지 묵혀두었다. 그런데 아무 예고도 없이 페루 쌀이 들어오자 쌀값은 순식간에 50센트에서 3센트로 떨어지게 되었다. 노턴은 본전도 못 건질 위기에 처하자 급히 계약을 취소하지만 법정에서 패했고 2년 후 파산하게 된다. 이 때 그는 몇 년 동안 샌프란시스코를 떠나게 되는데 이 몇 년 동안의 행적은 전혀 알려진 것이 없다. 이 당시 샌프란시스코는 골드 러쉬 붐이 식어가며 경제가 불황에 빠졌는데, 일설에 의하면 노턴은 이 시기부터 주변인들에게 만약 본인에게 권력이 있었다면 상황이 지금보다 나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전했다고 한다.
1859년 9월 17일 노턴은 어느 군인에게서 받은 허름한 미합중국 육군 군복의 차림을 하고 정신이 약간 불안정한 상태로 다시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왔다. 노턴은 샌프란시스코 지역 신문인 샌프란시스코 데일리 이브닝 불레틴에 찾아가 편집장에게 자신을 미국의 황제 노턴 1세라고 선언했다.
속으로는 기가 찼지만 편집장은 그에게 흥미를 느끼고 신문 판매 부수를 늘리려는 목적으로 그의 선언에 동의하며 신문 1면에 노턴의 황제 즉위 선언문을 싣게 된다. 그리고 즉위 선언에 뒤이어 1주일 뒤 2차 선언에서, 노턴은 버지니아 주지사 등 고위 관리들의 부패를 이유로 미국 정부의 해산을 명령하고 제임스 뷰캐넌 미합중국 대통령의 파면과 더불어 의회를 해산한 뒤, 황제인 본인이 친히 정사를 돌본다는 내용을 발표했다. 물론 노턴은 본인이 해임한 버지니아 주지사의 공석 때문에 버지니아 주가 혼란에 빠지는 것을 막기 위해 당시 부통령이던 켄터키의 존 C. 브레켄리지를 신임 버지니아 주지사로 임명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러나 당연히 워싱턴 D.C.의 행정부는 이를 무시했고 노턴은 미합중국 육군참모총장에게 "필요한 병력으로 의사당에 진격하여 국회를 해산시키라"고 명령했다.[5] 또한, 연방 각 주에 샌프란시스코의 음악홀에 대표단을 파견하여 "황제에게 경의를 표하고 법적으로 필요한 수정조치를 취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뒤이어 노턴은 프랑스멕시코를 침략했을 때 자신이 멕시코의 보호자가 되겠다고 선포했다.
그는 자기가 가진 낡은 육군 대령 군복 한 벌만을 입었고, 특별한 직업은 없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빅토리아 여왕의 초상화가 걸린 낡은 하숙집에서 살았다. 그는 매일 시민들을 만나거나, 하수구버스의 시간표를 점검하고 매주 종교적 화합을 위해 각 교단의 종파를 바꿔가며 예배하는 활동을 했다. 샌프란시스코의 유명한 개들이었던 '버머와 래저러스'의 주인이라는 말이 있지만 실제로는 아닌 듯 하다. 아마도 한 때 잡종개를 길렀던 부분이 와전된 것으로 보인다. 동시기에 존재했지만, 정작 본인은 왜 자신과 개들을 한 그림에 그려넣냐고 역정을 낸 적도 있다.
실상은 그저 망상장애 환자일 뿐이나, 이 자칭 "황제"는 샌프란시스코 시민들에게서 대단한 인기를 누리는 유명인사였다. 여기에는 비록 정신질환을 앓고 있지만 인품 자체는 아주 훌륭한 사람인데다가, 이전부터 그를 알고 있던 이웃이나 동업자들이 "원래는 멀쩡했던 사람인데 사업 실패로 인해 미쳐버렸다."라고 사정을 알려주어 많은 사람들에게 동정을 산 점도 한 몫 했다.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2006년 3월 5일과 2013년 10월 6일에 노턴의 일생을 다룬 프로그램을 방영하였다.

2. 자칭 황제의 이모저모


과대망상증에 빠진 인물치고는 의외로 진보적인 생각을 보여주기도 했다. 모든 사람들이 믿을 수 있는 만국 종교의 필요성을 주장했고 19세기에 벌써 비행기의 연구[6]를 위해 기금을 조성했으며 국제연맹, 즉 UN 같은 범세계적 정부가 만들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당시 아프리카에서만 사용하던 현수교 공법으로 샌프란시스코 만에 다리를 지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훗날 그 자리에 지어진 현수교가 그 유명한 '베이 브릿지(San Francisco–Oakland Bay Bridge)'다.
본인은 유대인이었으나 모든 종교, 모든 인종을 공평하게 대우했으며, 모든 종교의 집회에 출석했다. 모든 인종에게 공평했기 때문에 백인이 아닌 사람들에게도 인기가 좋았다고 한다. 이때는 아직 미국 남부에서 흑인들이 노예로 살고 있었고[7] 황인(주로 "쿨리"라고 불렸던 중국 화교들)에 대한 차별도 심했으며, 또 그게 당연했던 시절이란 걸 생각한다면 정말로 대단한 사람이다. 심지어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아시아인(황인, 아랍인 등)을 혐오하는 이들의 폭동이 발발하자 홀로 폭도들을 가로막고 그들이 해산할 때까지 주기도문을 외웠다고 한다. 남북전쟁이 터졌을 때는 전쟁을 그만두라면서 당시 미국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과 남부연맹 대통령 제퍼슨 데이비스를 소환했다. 물론 그 두 사람은 본인이 황제라 주장하는 이 양반의 소환 명령에 응하지는 않았다.
또 그는 자신의 빚을 갚거나 식당에서 식사를 하기 위하여 국채를 발행하기도 했다. 이 채권은 당대에 인기가 있었던 건 물론이고 오늘날도 화폐 수집가들 사이에서는 구하지 못해 안달인 희귀한 아이템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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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 물건이다. 위 예제에서 명기된 액수는 10달러. 일찍이 노턴은 국채를 발행하면서 이 국채를 가지고 있으면 언젠가 큰 돈을 벌게 될 것이라고 말했는데, 오늘날 이 국채는 전술한 바와 같이 화폐 수집가들에게 액면가에 이자율을 그대로 적용한 것보다 훨씬 큰 액수를 받고 팔 수 있다. 예를 들어서 50센트 국채에는 매년 7%의 이자가 붙을 것이라 명시되어있는데, 50센트 국채 중에서 상태가 가장 좋은 물품은 명시된 2012년 액면가[8]의 무려 5배인 18,400달러에 팔렸다. 본인 말이 어느 정도 실현된 셈이다.[9]

3. 대단한 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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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프란시스코 시민들은 그에게 열렬한 지지를 보냈다. 노턴은 본인이 샌프란시스코의 모든 교통수단을 무료로 사용할 수 있다고 주장했으나, 센트럴 퍼시픽 열차회사에서 그의 무임승차를 거부하자 이 자칭 황제는 해당 열차 회사에 영업 정지 칙명을 내린다고 밝혔고 이에 시민들까지 동조하자[10] 센트럴 퍼시픽 열차회사에서는 사죄하며 황제에게 종신 무료 탑승권을 바쳤다고 한다. 본인 제복이 낡자 포고령을 내려 자신의 예복이 국가적인 수치라고 했으며 이에 시 위원회에서도 황제께서 낡은 옷을 입고 돌아다니시는 광경을 볼 수 없어 '황실 예복비용'을 마련해 그에게 최고급 맞춤옷을 지어 바쳤고, 이에 노턴은 매우 흡족해하며 감사를 표하는 친서와 함께 위원 전원에게 귀족 작위를 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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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 옷 사진.
샌프란시스코의 최고급 식당들이 그에게 무료로 식사를 제공했고, 노턴의 허락을 받아 식당 입구에 "황실 인증 식당"이라는 금속 기념패를 설치했다. 식사 비용은 위와 같은 국채로 받았다.[11] 심지어 샌프란시스코의 모든 극장들은 노턴의 전용 특석을 마련해두었다고 한다.
그를 위한 세금도 있었다. 상점은 주당 25~50센트, 은행은 매주 3달러. 이 세금은 당연히 강제 징수가 아니었지만,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세금을 냈다고 한다. 한 아만드 바비어라는 경관이 원칙주의에 입각하여 그를 정신질환 치료를 받게할 목적으로 체포하자 격분한 시민들과 언론의 항의가 빗발쳤고 샌프란시스코 경찰서장이 직접 그를 풀어주고 공개 사죄했으며 시 의회에서 노턴에게 사절단을 보내 사죄했다. 이에 노턴은 짐은 그 일을 잊어버리기로 했다면서 자신을 체포한 경관을 사면한다고 선언하였다. 샌프란시스코 경찰서장 패트릭 크롤리는 시의 경관들에게 길에서 노턴 1세를 마주칠 경우 경례로 예를 갖출 것을 명령했고, 이후 샌프란시스코의 경찰들은 노턴이 지나갈 때마다 경례를 바쳤다고 한다.
황제 폐하께서는 내정뿐만 아니라 외국 통치자들과의 교류에도 관심이 있으셨다. 브라질의 페드루 2세가 샌프란시스코를 방문하자, 샌프란시스코 시민들은 페드루 2세와 노턴 1세의 만남을 고대했다. 일설에 의하면 샌프란시스코 시민들이 노턴 1세를 모시고 페드루 2세에게 행진해갔다고 하며, 잠시 얘기를 나누고 차 까지 마셨다는 이야기도 있긴 하지만 사실일 확률은 적을 것이다.출처 황제 폐하께서는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에게 자신과 결혼해줄 것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하셨는데, 불행히도 답장은 오지 않았다.출처 폐하의 은총은 본토 너머 하와이에까지 미쳤는데, 하와이 왕국의 카메하메하 5세는 편지로 몇 차례 노턴 1세와 교류했다고 하며, 재위 말년에는 미국 연방 정부에 대한 신뢰를 잃고 노턴 1세만을 미국의 적법한 통치자로 여겼다고 한다.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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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에는 이러고 돌아다녔다.
1876년 영국빅토리아 여왕과 만나기도 했다는 설이 있으나 이는 확실하지 않은 이야기로 보인다. 그는 1880년 1월 8일, 강연하러 가는 도중 길거리에서 쓰러진 후 사망했는데 모든 상점들이 이 자칭 황제의 사망 소식을 듣고 문을 닫아 조의를 표했으며, 무려 1만 명의 조문객이 샌프란시스코의 거리를 가득 메웠는데 부자부터 거지까지 신분과 빈부격차를 가리지 않았다.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 신문사에서는 "폐하(노턴 1세)께서 붕어#s-2(崩御)하시다"라는 대서특필과 함께 호외가 전 도시에 뿌려졌다. 이게 좀 대단한 게, 이때 샌프란시스코 인구는 고작 23만 명이었다. 거기에 이 양반의 장례식 때는 일식까지 일어났다. 1880년 1월 10일이 장례식이었는데 10일과 11일 연속으로 일식이 발생했다고 한다. 10일에는 부분일식이었지만 11일에는 개기일식이었다.[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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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턴 1세. 미합중국의 황제이자 멕시코의 보호자

노턴의 무덤. 우드론 묘지에 안장되었으며 묘비는 1934년 세워진 것이다. 그의 장례는 샌프란시스코 시 의회장으로 치러졌고 그의 장미빛 목관은 샌프란시스코 사업가협회에서 특별마련한 것이다. 하지만 그는 평생 아내도, 자식도 전혀 없었던 독신자였기에 후손은 없다.

4. 사후 평가 & 어째서 이런 일이 가능했는가


[14]
오랫동안 노턴의 삶은 영감의 원천이 되어왔으며, 1974년 이후 샌프란시스코 외곽에 있는 그의 무덤에서는 매년 기념 예배가 열리고 있다. 비록 그의 삶의 구체적인 이야기들은 잊혀졌을지 모르지만, 그의 이야기는 문학작품을 통해 여전히 남아있다. 노턴의 '재위 기간' 동안 샌프란시스코에 함께 살았던 소설가 마크 트웨인은 노턴을 모델로 한 왕 캐릭터를 허클베리 핀의 모험에 등장시킨다. 다만 이 인물은 사기꾼 악당이다. 실제 둘의 친분 관계는 꽤나 각별했다고 한다.[15]
또다른 소설가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은 그의 1892년 저작인 The Wrecker에서 노턴의 캐릭터를 등장시킨다. 스티븐슨의 수양딸인 이소벨 오스본은 자신의 자서전에서 노턴은 "신사적이고 친절한 남자였고, 다행스럽게도 세상에서 가장 우호적이고 감수성이 짙은 도시, '그가 황제가 되고 싶다면 황제가 되게 하라'는 생각을 지닌 도시에서 살았다. 샌프란시스코 전체가 그와 함께 게임을 한 셈이다."라고 평했다. 노턴이라는 존재는 그의 과대망상증 뿐 아니라 그것을 받아준 샌프란시스코 시민들의 위트와 여유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다.
1980년 1월에는 이 "미합중국의 유일무이한 황제"의 사망 100주년을 기념하는 기념식이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리기도 했다.
PAUSE, TRAVELER
AND BE GRATEFUL TO
NORTON 1ST

EMPEROR OF THE UNITED STATES
PROTECTOR OF MEXICO, 1859-’80,
WHOSE PROPHETIC WISDOM
CONCEIVED AND DECREED THE
BRIDGING OF SAN FRANCISCO BAY
AUGUST 18 1869

DEDICATED BY E CLAMPUS VITUS, FEB. 25, 1939
여행자여, 잠시 걸음을 멈추고
1859년부터 1880년까지 미국의 황제이자 멕시코의 보호자이시며
예언적인 지혜로 착상하여
샌프란시스코 만에 다리를 놓으라 칙명하신
노턴 1세께 감사하라.
1869년 8월 18일

1939년 2월 25일 E Clampus Vitus가 헌정
한동안 베이 브리지 주변에 "황제 노턴 1세 폐하의 칙명으로 건설하다"라는 기념비가 서있있다.
샌프란시스코 시에서는 그를 기리는 의미에서 샌프란시스코와 바다 건너 오클랜드를 잇는 베이 브리지의 이름을 노턴 1세 다리로 바꾸려고 했으나, 오클랜드 시의회에서 부결시켰다. 이유는 아무도 노턴 1세에 대해 몰랐기 때문이라나. 그 후, 샌프란시스코 시민 존 루미아는 베이 브리지를 "노턴 황제 베이 브리지"로 개명할 것을 공식 청원했지만 안 받아들여졌다. 존 루미아는 현재에도 The Emperor Norton Trust[16]라는 비영리 단체를 결성하여 베이 브릿지의 이름을 바꿀 것을 청원하고 있으며, 단체는 노턴 황제 즉위 150주년이 되는 2022년에는 다리명이 바뀌기를 희망하고 있다.
이 "자칭 황제"가 얻은 인기에서 미국인들이 당시에 자신들의 민주주의에 대해서 가지고 있던 자부심을 알 수 있다. '아무도 죽이지 않고, 아무도 추방하지 않고, 아무것도 빼앗지 않는, 조금 정신은 이상하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았고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은' "자칭 황제"가 '함부로 사람을 죽이고, 추방하고, 재산을 빼앗는'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유럽의 군주들보다 못할 것이 없다고 여기고, 이런 풍자를 유쾌하게 즐긴 것이다. 정말 시 단위로 대인배가 아닐 수 없다.
이 사람이 워낙 좋은 대접을 받은지라, 노턴 2세를 자칭하는 과대망상자들이 이따금씩 나타난다고 한다. 하지만 워낙 자질들이 떨어져 노턴 1세의 행적에 따르지를 못하다 보니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고 한다.

샌프란시스코에서는 매년 2월 14일을 '노턴 1세의 날'이라고 하여 축제를 개최하고 있으며 이 날에는 샌프란시스코 관광 안내를 전담하는 여행 가이드는 노턴 1세의 코스프레를 하고 있다.

5. 대중매체


닐 게이먼DC 코믹스 명작 만화 샌드맨 시리즈의 6권 <우화들>에서 등장한다.[17] 절망해서 자살하려고 하는 그를 본 절망에게 "오빠의 꿈이 저 남자에게 할 수 있는 건 뭐가 있지?"라는 내기를 걸었고, 은 "꿈이 없이는 절망도 없다"면서 그에게 꿈을 줘 자신이 황제가 되었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잃어버렸던 꿈을 되찾은 노튼은 분열의 광기에 휘말리지 않고 욕망의 유혹을 이겨냈으며 죽기 전까지 절망에게로 돌아가지 않았다. 즉, 죽는 순간까지 절망하지 않았다. 모든 인종을 평등하게 대한 마음가짐은 남들에게 차별받는 중국인 상인을 총리로 두고 진지하게 조언을 구하는 것으로 표현했다. 사후에는 죽음로부터 '''자신이 만난 모든 왕 중 가장 훌륭한 왕'''[18]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리고 그가 라미드우프닉스 중 하나였다는 말을 듣는데, 노턴 본인은 전혀 모르는 일이라고 답하면서 진짜로 라미드우프닉스였음을 보여준다.
황제를 위하여의 황제와 비교된다. 차이라면 황제를 위하여의 황제는 미치광이로 모두에게 외면받은 데 반해 이 사람은 오히려 모두에게 사랑(?)받았다는 점, 그리고 정감록과 같은 구태의연한 예언사상에 기대에 살아온 황제와는 달리 노턴 1세는 시대를 앞선 혁신적인 행적을 보여주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한국의 라이트 노벨 GGG의 소재는 이 인물이 모티브라고 작가가 1권 후기에서 밝혔다.
미국의 고전 드라마 <보난자>는 아예 이 인물을 다룬 에피소드가 있다. # 시즌 7의 에피소드로 방영되었다. 이 이야기에서는 현수교의 설치에 대한 노턴 1세의 탁견을 다루고 있으며 부분적으로는 다른 민족의 사람들과도 스스럼없이 어울리는 모습도 보여주고 있다.
크리스토퍼 무어의 더티잡이란 소설에서 황제라는 인물이 등장하는데 묘사가 이 분과 똑같다. 노숙을 하지만 주변 인물들에게 황제 폐하라고 불린다는 점, 개 두 마리를 데리고 다닌다는 점, 그리고 훌륭한 인품을 지녔다는 점까지 같다.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소설 "수용소 군도"에서도 자칭 짜르(러시아 황제)라는 소리를 하다가 잡혀들어온 수인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다행하게도 피도 눈물도 없는 악의 조직 NKVD(KGB의 전신) 검사관들조차도 미친놈 취급하면서 재미있어 했다고. "폐하께서는 새로운 황궁을 어디에 지으실거죠? 여기 멋진 루비안카(악명높은 러시아 감옥)는 어떠신가요? 한 번 관람해보시겠습니까?"라면서...
TRPG 캐슬 폴켄슈타인(Castle Falkenstien)에서는 워싱턴주-오레건-캘리포니아-바하 캘리포니아에 걸치는 곰 깃발의 제국(Bear flag Empire of California)의 진짜 황제로 군림하고 있다. 마크 트웨인캘리포니아 공화국의 대통령 선거에 출마시켜 당선된 뒤 4년간 훌륭한 정치를 펼쳐 전 국민들의 만장일치로 황제로 등극하게 되었다. 중국인도, 인디언들도, 백인들도, 초자연체들도 함께 공존하는 효율적이며 부유한 제국을 일구어낸 명군으로 칭송받고 있다.
샌프란시스코를 배경으로 하는 게임 와치독 2에선 노튼 1세 분장을 하고 관광객들에게 명소를 설명하고 있는 NPC를 찾을 수 있다.

[1] 엄밀히 말하자면 노턴 ‘1세’는 틀린 호칭이다. 왜냐 하면 같은 나라에서 후대에 노턴이라는 이름을 칭한 군주가 있어야 전임자의 이름에 1세가 붙을 수 있는 것이라, 후계자가 없던 노턴 1세는 ‘노턴 황제’라고 불리는 게 맞기 때문. 이를 감안한 것인지 위키백과에는 정확하게 노턴 황제(Emperor Norton)가 표제어로 되어 있다. 다만 오늘날 노턴 2세(?)을 자칭하는 사람들이 있기는 하다.[2] 2021년 현재 달러 가치로 환산하면 약 110만 달러[3] 그리고 실제로도 골드 러쉬를 꿈꾸며 온 광부들보다는 그 광부들을 상대로 장사하는 사람들이 더 돈을 잘 벌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청바지.[4] 당시 미국도 동부 해안지대에서 쌀농사를 짓긴 했다. 하지만 그걸 캘리포니아로 가져오려면 혼 곶을 돌아야 했다.[5] 노턴이 진격 명령을 내린 사람은 약 15년 전 육군 최고 사령관이던 윈필드 스콧 장군이었는데 이 시기에 그는 이미 74살의 노인으로, 당시 미래에 워싱턴 주가 되는 워싱턴 준주에 머물고 있었다.[6] 라이트 형제가 비행기를 발명한 해는 세기를 넘긴 1903년이었다.[7] 단, 당시 샌프란시스코가 속한 캘리포니아 주는 남북전쟁 당시 자유주에 속했다.[8] 0.5*1.07^(132) = 약 3800 달러[9] 국채는 일반적으로 발행 국가의 신용도에 따라 그 가치가 결정되는데, 노턴 1세의 국채는 국채의 액면가와는 관계없이 노턴이 발행한 국채라는 사실만으로 가치를 얻은 것이다. 즉 이는 정상적인 국채의 가치라기보단 당대 유명인사였던 개인과 관련된 물건이란 점에서 수집용품으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뜻이다.[10] 한낱 과대망상증 환자의 말에 시민들이 응했다는 사실이 이상할 수도 있지만, 노턴은 시민들에게 인기가 많았기 때문에 열차 회사에서도 시민들의 항의를 무시할 수 없었다.[11] 현대에는 노턴의 국채가 수집품으로서의 가치가 있다.[12] 출처: Forbes, David. Emperor Norton & Hawaii.[13] 언제부터 이러한 말이 전해졌는지는 모르지만 과학을 조금만 안다면 이틀 연속 일식이 일어난다는 것이 얼마나 헛소리인지 알 것이다. 실제 천문시뮬레이션 프로그램을 돌려보면 1880년 1월 11일 해질 무렵 센프란시스코 일대에서는 부분일식을 관찰할 수 있었다.[14] 아래에 나오듯이 어느 정도는 사실이다. 여유가 부족한 동네에서 노턴과 같은 정신질환자가 이렇게 좋은 대접을 받았을 가능성은 낮다. 실존인물이 아니라 가상인물이긴 하지만, 비슷하게 자신이 황제라는 망상 속에 일평생을 살았던 소설 황제를 위하여의 주인공의 경우엔 주변 환경이 온갖 격동과 파란으로 들썩이던 근현대 한국이라 일생도 안습했던 것을 생각하면 알 수 있다. 그리고 샌프란시스코가 원래 기행이 많이 일어나는 편이긴 하다. 이보다 백수십년 뒤인 버락 오바마 재임기에는 백혈병 걸린 아이의 꿈이 배트맨이 되는 거라고 하자 수만명이 모여서 자원봉사해줬을 정도[15] 그 예로, 1865년에 버머(Bummer)라는 노턴 1세의 애견이 죽었을 때, 마크 트웨인 본인이 직접 비문을 쓴 이야기가 있다. 버머와 래저러스(Bummer and Lazarus)는 원래 배척받는 유기견 출신이었지만 당시 들끓던 쥐를 고양이보다 더 잘 잡아주었기에 도시의 마스코트가 되었다. 노턴은 종종 둘에게 식사를 나눠줬는데, 이 때문에 종종 셋이 만평에 같이 묘사되기도 하였다. 서로 코드도 맞을 듯한데 마크 트웨인은 제국주의, 인종차별, 기독교 근본주의에 부정적이었으니 최소한 두 개나 코드가 맞는다.[16] 노턴 황제 협회[17] 해당 단행본에 수록된 이슈 31에서 등장한다.[18] 이는 죽음의 상징성을 생각하면 '''전 우주에서 가장 훌륭한 왕'''이라는 찬사와 다름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