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성씨)
扶餘氏
1. 개요
백제의 국성.
이름의 유래는 시조 온조왕이 부여 왕족에서 나온 것을 따서 지은 것으로 여겨진다. 온조의 아버지는 부여의 왕족 우태 혹은 고구려를 건국한 동명성왕이라고 서로 다른 기록이 같이 이어지는데 전자라면 부여의 직접적 후손이고, 후자라 해도 동명성왕이 고구려 건국 설화에 따르면 부여에서 나왔기 때문에 결국 백제는 부여 계승의식을 드러낸 것이다. 경쟁자인 고구려보다 더 정통성있는 부여의 적통임을 주장한 것이고 성왕이 남부여로 나라 이름을 바꾼 것도 그런 맥락이다.
2. 역사
삼국사기에 의하면 부여씨라는 성씨는 온조왕 시기부터 사용되고 있는데, 중국이나 일본 측 기록과 교차되는 최초의 부여씨는 4세기에 재위한 근초고왕(? ~ 375년)이다. 《진서》(晉書)에 의하면 '''여구(餘句)'''로 등장하는데, 이는 부여씨를 여씨로 축약한 말이다. 이후로도 중국 측 기록에서는 축약해서 여(餘)로 칭하는 경우가 종종 나온다. 정작 진짜 부여는 근초고왕이 즉위하는 346년에 모용선비에게 멸망당한다는 것이 아이러니.
백제멸망전과 백제부흥운동을 거치면서 백제 부여씨들은 당나라로 끌려가거나,[1] 일부는 일본으로 망명하게 되었다. 신라가 일통한 한반도에 부여씨가 얼마나 남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며 이후로 '부여씨'라는 성씨를 그대로 쓰는 사람은 더 이상 한중일 3국의 기록에서 찾아볼 수 없다. 다만 대한민국에서는 부여 서씨[2] , 의령 여씨[3] 가 부여씨의 후예를 자처하고 있는데, 보다시피 부여씨에서 서씨, 여씨로 글자를 바꾸었다고 족보에서 전하고 있다.
3. 백제 부여씨의 분파
백제의 왕성에서 갈라져 나온 것이 확실한 성씨들은 다음과 같다. 흑치씨를 제외하면 백제 멸망 이후 부여씨였다가 일본 조정에서 성을 하사받은 경우거나, 신찬성씨록에서 성씨의 근원이 백제 왕실에서 갈라져 나온 것으로 기록된 경우가 많다.
- 귀실씨(鬼室氏) - 일본 측 기록인 신찬성씨록에 따르면 본래 문주왕의 후손이었지만 귀신의 감화를 받아 귀실씨가 되었다고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 백제부흥운동에 참여했던 무왕의 조카 귀실복신, 귀실집사, 귀실집신이 있다.
- 쿠다라노기미씨(百濟公氏) - 761년 본래 귀실씨였던 여민선녀(餘民善女) 등 4명이 성씨를 하사받았다.
- 흑치씨(黑齒氏) - 본래 부여씨였으나 흑치(黑齒: 예산군 덕산면 추정)에 봉해져 성씨가 흑치씨가 되었다고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 흑치상지, 흑치준 부자가 있다. 대성팔족 중 연씨와의 관계가 보이는 것 때문에 부여곤지의 아들들 중 왕위에 오르지 못한 3~5남 중 한 명을 선계로 둘 것이라고 추측되기도 한다. 삼국사기 동성왕조에 따르면 사약사 → 백가 → 연돌 순으로 등용되고, 관등이 사약사 > 백가 > 연돌 순으로 높기 때문에 때문에 5남의 후손으로 추정된다.
- 쿠다라노코니키시씨(百濟王氏) - 의자왕 아들인 부여선광이 시조로 백제 멸망 후 일본에 망명하여 지토 천황 시기에 하사받은 성씨. 현재는 미마쓰, 스가노, 야마토 씨가 후예로 전해진다.
- 쿠다라노아손씨(百濟朝臣氏) - 758년 여증인(餘益人), 여동인(餘東人) 등 4명이 성씨를 하사받았다.
- 타카노노미야츠코(高野造) - 663년 백제부흥운동 실패 이후 일본으로 망명한 부여자신을 조상으로 한다.
- 오우치 씨 - 백제 왕자 임성태자의 후손. 현재는 오우치, 도요타, 스에 씨가 후예로 전해진다.
- 억례씨(憶禮氏) - 억뢰씨(憶頼氏)라고도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 백제부흥운동 이후 일본에 망명한 억례복류(憶禮福留)가 있다. 신찬성씨록에 의하면 억례복류는 근초고왕으로 추정되는 인물[4] 의 손자라고 기록되어있다.[5]
- 문휴씨(汶休氏) - 일본서기에서 문휴마나(汶休麻那), 문휴대산(汶休帶山)이 확인되며, 신찬성씨록에서 이 성씨는 초고왕의 손자인 비류왕/문휴해(汶休奚)라는 인물을 선조로 떠받든다고 한다. 이외에 같은 가문에서 분적된 문사씨(汶斯氏)는 일본서기에서 문사간노(汶斯干奴)라는 인물이 확인된다.
- 고이씨(古爾氏) - 대표적인 인물로 고이만년, 고이해가 있다. 백제 고이왕(古爾王)의 후손이라서 이름에서 따왔을 것이라는 설이 제기되었다.[6] 이외에도 음운적으로 구이신왕 및 부여곤지와의 연관성이 보인다. 다만 고이해의 경우 해(解)가 이름이 아닌 존칭접사라는 주장이 있어 고이(古爾)가 성인지 이름인지 의견이 엇갈린다.
- 동성씨(東城氏) - 대표적인 인물로 성왕(백제) 시기 인물인 동성도천, 동성자언, 동성자막고가 있다. 이는 백제 24대 국왕인 동성왕(東城王)에게 따온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일단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왕력편에 따르면 무령왕은 동성왕의 2남이기 때문에 동성왕의 맏아들은 분명 따로 존재했다. 다만 무령왕릉 발굴 이후 무령왕이 동성왕보다 나이가 많음이 밝혀지면서 무령왕이 동성왕의 아들일 가능성은 낮은 편이고, 실제로는 부여곤지의 아들일 가능성을 높게 보는 편이다. 한편 동성자언과 동성자막고는 동성도천과 다르게 동성자(東城子) 부분이 성씨가 아닌 "동성왕의 아들"이라는 수식어로 해석될 수 있는 여지도 있다.
- 계백씨(階伯氏)? - 1860년 김정호가 제작한 대동지지의 기록을 근거로 계백이 이 이름이 아닌 성씨이며 이름이 승(㐼)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19세기 중반에서야 나오는 기록이기 때문에 반론도 만만치 않다.
3.1. 부여씨 이외의 백제 왕성(?)
다만 왕비족이자 대성팔족으로 남은 해씨와 달리, 우씨와 진씨, 모씨의 경우 설이 제기된 정도라 실존했는지부터가 불분명하다.
- 해씨(解氏) -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부여씨와 연관이 있는 기록이 나온다.[7]
- 우씨(優氏)(?) - 고이왕의 동생인 내신좌평 우수(優壽), 내두좌평 우두(優豆), 비류왕 대 내신좌평 우복(優福) 등 이름에 우(優)가 연달아 사용되는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이것이 고이왕계의 성씨로 사용했을 것이라는 설이 제기되었다.[8]
- 진씨(辰氏) - 직계 선조-후손 관계인 진사왕, 진손왕, 진이왕이 모두 이름에 辰을 포함하여 제기되었다. 여기에 일본 도래계 성씨 중 하나인 하타(秦) 또한 동계로 추정되기도 한다.
- 모씨(牟氏)(?) - 남제서와 양서에 따르면 문주왕의 이름이 모도(牟都)로 기록되어 있고, 동성왕 역시 이름이 모대(牟大)여서 제기된 설. 다만 일본서기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생긴 오류로 나왔기에 현재는 사장된 가설이다.[9] 신라 법흥왕도 성씨가 모(牟)인 것으로 추측되기도 하였으나, 현재는 모도, 모대, 모즉은 고유어인 모두 맏이를 음차한 것으로 본다.
4. 부여 부여씨의 인물
부여가 전연에 의해 멸망한 뒤에 주로 모용선비 세력 휘하에서 활동하는 인물들. 여(餘)씨로 표기되어 있는데 중국의 백제 기록에서 나온 백제왕들의 성씨처럼 부여씨의 약칭일 가능성이 크다. 여호규, 강종훈 교수는 이들을 부여 유민으로 보았다.[10] 다만 부여울과 달리 확실하게 부여인으로 나오지 않았다.다만 부여왕의 아들로 기록된 여울, 동이로 표현된 여화를 제외한 여씨 인물들은 부여계로 볼 수 있다는 견해가 있는 정도일 뿐이다.
- 여현
- 여울
- 여화(餘和): 생몰년도 미상. 모용농이 한단 일대에서 군사를 모았을 때 호응했다. 칙륵과 함께 동이라고 언급한 점이 있어 선비족이 아닌 부여인으로 볼 여지가 있다.
- 여암(餘巖) 형제: ? ~ 385년. 여암은 후연에서 건절장군 벼슬을 지냈다. 385년 7월 무읍에서 반란을 일으킨 뒤 요서로 넘어가 요서의 하구인 영지 일대에 거점을 잡았다. 이후 4개월만인 385년 11월 모용농에게 패배하고 동생과 함께 참수당했다.[11]
- 여숭(餘嵩): ? ~ 396년. 396년 후연에서 평규가 반란을 일으키자 진압하기 위해 파견되었지만 싸움에서 패배하고 사망한다.
- 여숭(餘崇): ? ~ 398년. 위의 여숭의 아들. 후연의 외척이었던 난한에게 암살당한다.
- 여초(餘超): ? ~ 399년. 후연의 산기상시. 모용성에게 역모죄로 399년에 처형당했다.
- 여울(餘鬱): ? ~ 406년. 남연의 서중랑장, 북위로 달아났던 봉연의 공격을 받고 사망한다.
- 여치(餘熾): 생몰년도 미상. 남연의 인물. 지위는 수강공에 이르렀으며 단풍의 과부인 모용씨를 아내로 맞이했는데 두 남편을 섬길 수 없던 모용씨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5. 백제 부여씨의 인물
백제의 왕들에 대해서는 백제/왕사 참조.
- 부여성충(夫餘成忠): 백제의 좌평(佐平).
- 부여질(夫餘質): 고이왕의 숙부.
- 우복
- 주군(酒君) - 신찬성씨록에서는 주왕(酒王)이라고 한다.
- 부여홍(扶餘洪) - 침류왕의 서자.
- 아신왕의 아우(이름미상) - 광개토대왕릉비에 의하면 396년 고구려에 볼모로 끌려갔다. 부여홍과 동일인이라고 보기도 한다.
- 부여훈해 - 침류왕의 차남.
- 부여설례 - 침류왕의 삼남.
- 부여신(扶餘信) - 아신왕의 서자. 407년에 전지왕 시기에 처음으로 상좌평에 임명되어 428년에 사망했다.
- 진손왕 - 일본 측 기록에서만 확인되는 인물로, 진사왕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
- 태아랑왕 - 진손왕의 아들. 진이왕의 증조부.
- 부여기
- 부여례 - 개로왕의 사위.
- 부여고(夫餘古)
- 부여력(夫餘歷)
- 부여고(夫餘固)
- 개로왕의 아들- 이름 미상. 일본서기 기록에 의하면 475년 한성 함락 때 개로왕, 왕후와 함께 사망했다고 한다.
- 부여곤지 - 비유왕의 아들로, 개로왕의 형제.
- 순타태자 - 무령왕의 아들.
- 마나군 - 문휴마나와 목리마나 두 명이 있는데, 일반적으로 문휴마나로 본다.
- 사아군 - 순타태자와 동일인물?
- 임성태자 - 아좌태자와 동일인물?
- 소비 부여씨 - 553년에 신라 진흥왕과 혼인한 백제 성왕의 딸.
- 왕흥사지 사리장엄구에 등장하는 왕자(가칭) - 이름 미상. 위덕왕의 아들로 577년에 사망했다.
- 아좌태자 - 위덕왕의 아들.
- 진이왕 - 진손왕의 현손.
- 부여교기 - 무왕의 아들이자 의자왕의 동생.
- 부여효 - 의자왕의 차남. 백제가 멸망한 뒤 당으로 압송된다.
- 부여태 - 의자왕의 3남. 백제가 멸망한 뒤 당으로 압송된다.
- 부여연(扶餘演) - 의자왕의 아들. 백제가 멸망한 뒤 당으로 압송된다.
- 부여궁 - 의자왕의 서자. 해석에 따라서 궁이 인명이 아니라고 보기도 한다.
- 부여용 - 부여융의 동생. 백제부흥운동 당시 일본에서 활동하였다. 부여선광과 동일인이 아니냐는 설이 있지만 확인되지는 않았다.
- 여자신 - 백제 왕족출신의 부흥운동가이자 백제계 도래인.
- 부여충승(扶餘忠勝) - 백강구 전투 이후 당나라에 투항.
- 부여충지(扶餘忠志) - 백강구 전투 이후 당나라에 투항.
- 부여선광 - 부여용과 관련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백제 왕족.
- 부여문사 - 부여융의 아들. 부여효의 아들이라는 설도 있다.
- 부여문선 - 부여융의 아들.
- 부여덕장(扶餘德章) - 부여융의 아들. 딸 부여태비 묘지명에서 언급된다.
- 부여태비 - 부여덕장의 딸.
- 길온의 부인 부여씨 - 부여덕장의 딸로 부여태비의 언니.
- 일문낭장[13] 의 부인 부여씨 - 낙양 용문석굴 877호의 부조에서 언급된 인물.
- 부여경 - 의자왕의 증손자.
- 부여준(扶餘準) - 백제 유민 출신의 당나라 무장.
- 헌왕태자(獻王太子) - 이름 미상. 성주사 비문에서는 백제국 헌왕태자가 절을 창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헌왕이 혜왕의 시호이기 때문에 그 아들인 법왕과 동일인이라는 설이 있다.
- 부여사(扶餘絲) - 일본 비목대명신록기[14] 에 기록된 부여풍의 아들. 백제부흥운동이 실패하고 일본으로 망명했다고 한다. 비록대명신록기에 전설상의 백제 왕족인 정가왕이 등장하기 때문에, 이와 연관있는게 아니냐는 설이 있다.
- 부여창성 - 부여선광의 아들.
- 부여양유 - 부여선광의 2남.
5.1. 전설상의 인물
- 정가왕: 일본 규슈 미와자키 현의 미카도신사의 제신으로 모셔진 인물. 역사적인 인물인지는 불분명하나, 정가왕이 나온 기록의 말미에 부여풍의 아들인 부여사가 일본으로 도피했다는 기록이 실려있어 백제 왕족과 연관있는 것이 아니냐는 설이 존재한다. 다만 정가왕이 백제 왕족이라면, 왜 일본육국사에는 정가왕에 대한 언급이 없는지가 불명.
- 복지왕: 정가왕의 아들. 정가왕을 추격한 적군을 무찔렀으나, 아버지인 정가왕은 적군과 싸움에서 전사했다는 전승이 전해온다.
[1] 의자왕, 부여융, 부여효, 부여창 등.[2] 의자왕의 아들 부여융을 시조로 삼는다.[3] 의자왕의 아들 부여풍을 시조로 삼는다[4] 다만 실제 근초고왕과 동일인물일 가능성은 낮은데, 해당 단락에서 등장하는 근속왕(近速王)이라는 인물은 왕이 아닌 국인, 즉 신하로 나와있고 시기적으로 많이 차이가 나서 할아버지-손자 관계로 보기는 어렵기 때문.[5] 신찬성씨록에는 고조선의 준왕의 후예를 자처하는 가문도 기록되어 있다. 준왕은 얼마 지나지 않아 마한왕 직위를 박탈당했지만 그의 후예는 남아서 계속 제사지냈다고 하는 기록은 후한서, 삼국지 등을 통해서 나오는데 해당 가문으로 추정.[6] 출처는 노중국 교수의 <백제의 성씨와 귀족가문의 출자>, <<대구사학>> 89, 2007.[7] '백제의 세계(世系)는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부여에서 나왔으므로 해(解)를 성씨로 삼았다.' - 삼국유사 권2 기이 남부여 전백제 북부여 조[8] 문안식, <백제의 시조전승에 반영된 왕실 교대와 성장과정 추론> , <<동국사학>>40 한국교육학술정보원, 2004.[9] 일본서기는 삼국사기와 달리 문주왕을 개로왕의 왕모제(王母弟), 즉 동복아우로 표현하고 있다. 모씨 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왕모자를 동복아우가 아닌 왕의 어머니 형제인 외삼촌으로 해석하고 남조 측 사서에서 문주왕과 동성왕을 여씨 + 이름의 축약형이 아닌 모도, 모대로 표현하고 있어 모씨 설을 주장했었다. 다만 왕모제는 주로 동복아우를 뜻하는 말인데다가 동성왕 역시 출자가 문주왕이 아닌 부여곤지로 기록되어 있어서 설득력을 잃었다.[10] 출처는 여호규, 백제의 요서진출설 재검토: 4세기 후반 부여계 인물의 동향에 관련하여(2001), 강총훈, 4세기 백제의 요서 지역 진출과 그 배경.[11] 모용농은 여암의 난을 진압한 뒤 요동과 현도를 장악한 고구려를 공격하여 요동과 현도를 재탈환하게 된다. 단, 고구려가 요동을 완전히 상실하지 않고 지역 일부를 점거하고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12] 출처: 위진남북조시기 중국의 코리안 디아스포라-고조선・고구려・부여계 이주민 집단 연구.[13] 인명이 아니라 관직명이다.[14] 공식 기록이 아닌 신사 측의 기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