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불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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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英佛關係. France–United Kingdom relations(영어). Relations entre la France et le Royaume-Uni(프랑스어) 영어판 위키백과에선 프랑스를 앞에 두고 있는데, 영어는 영국만이 쓰는 언어가 아니며 영어판 위키백과는 영어로 된 위키백과일 뿐 영국의 위키백과가 아니기 때문에 단순히 알파벳 순서대로 해서 프랑스가 앞에 나온 것이다.
아무래도 잉글랜드가 프랑스와 주요 관계를 맺었고 스코틀랜드는 결혼동맹 등 프랑스와 한통속이었던 적이 많아서 Anglo-French relations란 용어도 쓰인다.
오늘날에 35만명의 프랑스인이 영국에서 살며 프랑스에도 약 40만명 정도의 영국인이 산다. 통혼도 빈번하게 일어났고 인구 이동도 잦았던 탓에 조상 중에 영국인의 피가 섞여 있는 프랑스인이나 프랑스인의 피가 섞여 있는 영국인은 수두룩하다
위키백과 한국어판의 영국-프랑스 관계
위키백과 영어판의 영불관계
위키백과 불어판의 불영관계
2. 단순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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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토 면적을 제외하면 인구, 경제력, 군사력 등등 거의 대부분의 스펙에서 신기할 정도로 비등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니 서로가 라이벌일 수 밖에 없다.
3. 역사
3.1. 로마 시대와 1000년까지
옛날에 로마 제국이 유럽의 패자였던 시절에 갈리아나 브리타니아나 다 켈트족들의 땅이었다. 그러다가 패권을 확장하던 로마에게 패배하며 두 지역 모두 로마의 속주가 되었다. 다만 이 시절의 켈트는 편의상 후대의 사람들이 묶어서 켈트라는 것이지, 서로 동족 의식은 전혀 없었다.
이후에 게르만 족이 쳐들어오면서 프랑스에는 라틴계나 켈트계 말고도 게르만계가 포함됐고 게르만족 가운데 색슨(작센)족이나 앵글(앙겔른)족들이 영국으로 가서 켈트계를 스코틀랜드와 웨일스로 밀어내며 영국에도 게르만계들이 꽤 들어왔다. 프랑스가 프랑크 왕국을 거치면서 자체적인 정체성을 쌓는 동안 잉글랜드는 소왕국들이 권역 내에서 군림하고 있었다.
3.2. 노르망디 공 시대
그러다가 롤로가 이끄는 북유럽의 노르만인들이 내려와 프랑크 왕국 서쪽 지역인 네우스트리아를 대대적으로 약탈했다. 파리까지 약탈당하자 골치가 아파진 당시의 프랑크 왕 카롤루스 3세는 충성을 대가로 네우스트리아 서북부 땅을 노르만인들에게 주면서 노르만인들의 땅이라는 뜻으로 노르망디라 부르게 된다. 이렇게 노르망디의 공작이 된 노르만인의 후손인 정복왕 윌리엄이 잉글랜드를 정복하여 잉글랜드의 왕이 됐다.
먼나라 이웃나라의 폐해로 잉글랜드 왕이 프랑스왕의 신하였다고 아는 사람도 있는데, 잉글랜드 왕국(정확히는 원래 웨식스 왕국)은 프랑크 왕국 만큼이나 역사가 오래되었으며 윌리엄 1세가 잉글랜드의 왕이 되면서 잉글랜드 왕위와 노르망디 공작위는 분리되어 운영되었는데 프랑스는 노르망디 공작령에 한해서만 명목상 주군이었을 뿐이다. 프랑스 왕은 잉글랜드와 잉글랜드 왕위에 대해서는 전혀 아무런 권한도 갖고 있지 않았다. 즉, 잉글랜드 왕이 프랑스 국토에 들어가면 노르망디 공으로써 프랑스 왕의 신하 노릇을 해야하지만, 프랑스 밖에선 동등한 왕이라는 것.
1350년경 잉글랜드의 추정인구는 300만 정도였고 1801년에 770만 정도였다. 그러다가 1821년에 1천만을 넘겼고 1871년엔 2천만, 1901년엔 3천만을 넘기는 등 파죽지세로 성장했다. [3] 그에 비해 프랑스는 120년에 이미 7백만이었고 그후 감소하다가 850년경에 다시 700만을 회복했다. 그리고 1226년에 1,600만이었고 1345년에 2,020만 정도로 추정한다.[4] 1000년 경에 중국의 인구가 약 8,700만이었고[5] 15세기까지 그리 큰 변화가 없던 걸 생각하면 당시 프랑스의 인구는 잉글랜드와는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굉장히 많았다. 추세가 유지됐다면 현재 프랑스의 인구는 3억은 됐을 것이다.
3.3. 12세기의 전쟁
자세한 항목은 리처드 1세, 존 왕, 필리프 2세 항목 참조.
이 시점을 기준으로 영국은 프랑스내 영토를 급격한 속도로 상실하기 시작한다.
3.4. 백년전쟁과 전쟁 이후
그러나 왕위계승 문제, 프랑스 국내의 잉글랜드 영토 문제로 인해 백년전쟁이 터지면서 조그마한 잉글랜드는 농민 장궁병 위주로 귀족 기사군 위주의 프랑스를 대규모 전투에서 여러번 박살내며 급기야 후반기에 접어들 무렵에는 프랑스 영토의 절반 수준을 집어삼킬 정도로 우세를 점했다. 궁지에 몰리던 프랑스는 잔 다르크의 등장으로 간신히 그 위기를 막아내고 그녀의 희생 이후에 잉글랜드군에게 승리하여 완전히 몰아내긴 했지만 워낙 길고도 살벌했던 전쟁탓에 프랑스도 꽤 타격을 입었다.
노르망디 공 시기에 프랑스어가 영어에 영향을 주었다는 설이 있는데 그건 왕실이나 귀족이 쓰는 고급 언어 차원이고, 대중 언어적인 측면으로 보자면 프랑스어에 영향을 미친 라틴어가 영어에도 마찬가지 영향을 줬다고 보는 게 더 적절할 것이다. 프랑스어 같은 경우엔 지금도 사전에서 라틴어 어원이 뭔지 찾는 게 가능할 정도다.[6] 아주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게르만족 언어를 베이스로 야매 라틴어를 섞어 쓰던 잉글랜드가 원조에서 많이 변질되긴 했지만[7] 직접 라틴어를 구사하던 프랑스를 베꼈다는 게 정확할 것이다. 그렇게 사이가 안좋은 나라였지만 국익에 따라 협력하는데 중세 시대 프랑스가 제일 두려웠던 주적은 잉글랜드가 아닌 신성 로마 제국으로 대표되던 합스부르크였다. 잉글랜드가 합스부르크와 동맹을 체결하거나 아니면 프랑스가 스코틀랜드와 동맹을 체결하여 합동 공격을 가한다면 위기가 오기 때문에 잉글랜드의 제임스 1세와 프랑스의 앙리 4세가 사돈을 맺은 것도 후방을 안정시키고 합스부르크를 치기위해서였던 것
그 후 두 나라는 이웃한 중세 국가로 살았다. 그러다가 17세기에 30년 전쟁이 일어나자 프랑스는 구교임에도 신교 편으로 투입돼 싸웠고, 그 와중에 프랑스와 인구가 엇비슷하던 독일 지방은 1700년에야 1,960만 수준으로 많이 회복했을 정도로 거하게 박살났다[8] .
17세기가 지나면서 잉글랜드는 해군력을 발전시켜 당시 먼저 대항해 시대에 진출하여 패권을 부리던 스페인, 포르투갈, 네덜란드와 비슷한 위치로 올라섰으며, 북아메리카쪽에 식민지를 개척했다. 프랑스나 스코틀랜드도 한 몫 해보려고 했는데 이들의 식민지 개척은 실패했고 7년 전쟁 등을 거치면서 영국이 북미에서 식민지 우선권을 얻었다.
3.5. 나폴레옹 시대
영국이 한참 북아메리카에서 재미를 봤다가 미국의 독립으로 북미 영토의 상당수를 잃어버렸고 미국 독립전쟁을 돕던 프랑스는 재정 파탄으로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 왕의 목이 날아가고 적잖은 기간동안 정치적 혼란을 겪다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등장했다. 유럽 대륙을 완전히 사로잡은 나폴레옹은 대륙봉쇄령으로 영국도 공격하려 했지만 실패하고 유배된다.
늘 유럽 대륙 언저리에서 프로이센, 프랑스, 그리고 러시아를 견제하는 등, 유럽의 조정자 역할을 자처한 영국은 여러 이득을 잘 빼먹으며 식민지를 확장해가며 국력을 쌓았다.
3.6. 19세기
살벌하게 전쟁을 벌였던 나폴레옹 시대 이후에는 두 국가끼리 딱히 싸우진 않았다.[9] 크림전쟁 등에선 힘을 합쳐서 러시아를 견제하고 둘 다 독일을 견제했다. 이후 독일의 통일이 이뤄지면서 유럽엔 독일이 새로운 강국으로 떠올랐고 보불전쟁에서 프랑스가 패배하고 만다. 먼저 식민지를 확장한 영국과 프랑스가 유럽의 전통적인 강국이었지만 신생국인 독일은 새로운 강국의 지위를 원했다. 다만 그 외엔 그렇게 큰 전쟁 없이 흘러갔다. 산업혁명으로 영국과 프랑스는 군사대국이었고 식민지 경영에 몰두하느라 자기들끼린 그냥 비즈니스적인 관계로 남았다.
당시 부르주아계급이 발달하면서 소설이나 연극 등이 유행하던 건 두 나라 다 비슷했다. 프랑스어는 당시 유럽에서 교양 있는 언어로서 정치권과 사교계에서 공용어로 사용되었으며 영어는 상업에서 많이 쓰였다.
3.7. 20세기
벨 에포크를 지나 유럽의 팽창은 내부적인 한계에 부딪치고 범슬라브주의와 범게르만주의가 충돌하면서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난다. 1904년 영불 협상을 맺었던 영국과 프랑스는 동맹국으로 독일과 싸운다. 그러면서 패배한 나라들의 식민지를 나눠 가진다. 게다가 프랑스는 영국과 비밀협정을 체결해서 아랍권국가들을 식민지배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19세기부터 쌓여온 제국주의의 모순과 사회진화론, 제노포비아 등이 결합되면서 1차 대전이 끝난지 불과 20여년 밖에 지나지 않은 시기에 독일에서 나치가 등장하며 제2차 세계 대전이 다시 일어난다. 이 전쟁에서도 프랑스와 영국은 승리했다.
그러나, 전쟁으로 인해 독일군에게 순식간에 털린 프랑스는 산업 기반이 많이 파괴되었으며 영국도 폭격과 군비 증강으로 경제적으로 피폐해졌다. 이미 19세기 말부터 저력을 쌓아온 미국이 그들을 옛적에 추월해버렸고 농업국가인 줄 알았던 러시아가 소련을 거치면서 막대한 공업생산량으로 초강대국이 되었으며, 동양의 국가인 일본이 경제대국으로 성장하면서 이 둘의 국제적 위상은 점점 색이 바랜다.
게다가 제2차 세계대전 전후에 양국은 식민지를 안 놓으려고 베트남, 케냐, 알제리 등 식민지에서의 독립운동을 억압하며 식민지 통치를 유지하려고 하였지만, 결국 국제사회의 비난 여론과 거세지는 식민지들의 독립운동에 버티지 못해 대부분의 식민지들을 다 독립시키고 경제/정치적으로 위축되었다. 그래서 핵 개발에 집착하게 된다. 영국과 프랑스의 핵개발 참고.
3.7.1. 프랑스-영국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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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프랑스가 나치 독일에 의해 6주 만에 항복하고, 비시 프랑스 괴뢰 정권이 들어선다. 프랑스-영국 연합은 이런 상황에서 제안되었다. 영국의 왕과 프랑스 대통령이 공동 국가원수를 맡고 군사와 외교는 영국이, 재정은 프랑스가 담당하기로 했다. 샤를 드골을 비롯한 프랑스 군부 지도자들이 자유 프랑스 망명 정부를 설립함으로써 이 제안은 실현되지 않았다. 영국과 프랑스의 지도부는 진지하게 고려했지만, 구체적인 실행 방안의 부족과 양국의 국민감정 때문에 실패했다. 식민제국의 대명사였던 대영제국과 프랑스 제국의 완전 연합 정부였기에 그 특이성 때문에 대체 역사물에서 상당 수 언급된다.[10]
1956년 수에즈 위기로 영국과 프랑스의 국력이 약해진게 명확해지자 프랑스-영국 연합이 다시 고려되었다. 프랑스 측은 프랑스가 영연방에 가입하거나, 더 나아가서 엘리자베스 2세를 공동 국가원수로 하고 양국의 군사력을 합치는 방안을 제안했다. 프랑스는 양국 연합이 냉전에서 제 3세력으로 세력을 유지하기를 원했지만 영국이 거절했다.
3.8. 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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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이동이 잦고 통혼이 잦았고 언어 교류도 잦았던 탓에 영국과 프랑스는 이웃나라로 관계가 깊다. 사실 관계가 엄청나게 깊으면서도 서로 엎치락뒤치락했던 역사가 하도 오래되어 이제는 양국민들이 서로를 지겨우면서도 필요로 하는 애증이 가득한 눈으로 바라본다. 다만, 그만큼 서로 좀 싫어하는 것도 있다. 대표적으로 콘돔을 부르는 속어로 영국은 '프랑스식 편지(French letter)'라고 부르고 프랑스에서는 '영국산 외투(Capote Anglaise)'라고 부른다. 그리고 근대까지 불치병이었던 매독의 경우 영국에선 "프랑스에서 온 천연두(french pox)"라고 부르기도 했다.[11]
그리고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해서 항복하고 본토까지 빼앗겼던 프랑스의 최대 흑역사는 언제나 영국인들이 프랑스인들을 놀려먹기 좋은 주요 까임거리다.
영국과 프랑스간에 언어교류가 많다보니 영국은 프랑스어 수업이 이뤄지고 있어서 프랑스어를 할 줄 아는 영국인들도 많이 있고, 프랑스도 영어 수업이 이뤄지고 있다.
영국에서는 프랑스인들을 비하할 때 개구리(frog)라고 부르며[12] 프랑스에서도 맛대가리 하나도 없는 거나 쳐먹는 놈들, 로스비프 등으로 영국인들을 부르며 받아친다.
현재는 많이 우호적이지만[13] , 그래도 국제 스포츠대회라도 열리면 '''"딴 놈들은 몰라도 저 놈들은 우리가 무조건 이겨야 된다!"'''라고 기본적인 마인드가 박혀있다.[14]
두 나라는 채널 터널로 이어져 있으며 지리적인 거리도 가까운 편이다. 그 때문에 프랑스를 정복한 정복자들은 늘 영국을 털려고 했다. 로마 제국이나 노르만이나 나폴레옹이나 히틀러나.
다만 유럽연합에 관해서는 두 나라의 견해가 갈리는 편이다. 영국은 파운드 스털링을 유지하고 있으며 유럽에서 악재가 터지자 약간 꼬시는 느낌이고. 유로화로 들어간 프랑스는 독일과 함께 남유럽이 싸지른 똥을 어떻게 처리할까 고민 중이다. 과거와는 달리 영국이나 프랑스 대신에 독일이 유럽의 선두국가 느낌이 강해졌고 영국은 미국한테 의존하는 경향이 강해져 샤를 드골이 별로 안 좋아했다.[15] 애초에 유럽 연합의 창설 자체도 영국과 프랑스 두 나라의 입장 차이가 영향을 줬다. 프랑스는 프랑스가 주도하는 유럽 중심 체제를 주장한 반면 영국은 유럽보다는 미국과의 연계를 더 선호했다. 하지만 프랑스로선 국력의 한계 때문에 혼자서 유럽을 이끌 상태는 되지 못했다. 영국을 대신할 파트너가 필요했고, 그 파트너가 바로 독일이었다. 프랑스와 독일 양국의 합작으로 유럽 중심 체제를 구축한 결과가 바로 유럽 연합이다. 따라서 유럽 연합에서 영국과 프랑스의 위치 및 견해는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특히 21세기 들어서 이라크 전쟁에서 영국이 미국과 공조체계를 유지한데 비해 프랑스나 독일은 반대 의사를 표시하기도 했다. 영불관계가 부침이 있긴 하지만 최근엔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서로 멀어지는 경향이 있다. 다만 문화 교류는 여전히 많다.
프랑스의 법인세가 영국보다 비교적 높기에, 프랑스의 대기업들이 종종 영국으로 도망가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에 프랑스 신문은 '꺼져라 배신자여' 라고 제목을 싣기도 하였는데, 당시 영국 총리인 카메론 총리가 '신께선 영국을 부유하게 만들기 위해 프랑스를 만들었다'라는 식의 대놓고 어그로를 끌어서 프랑스 정치가들이 '그 주둥이 닥쳐'라는 험악한 언사를 내뱉었고, 양국관계가 험악해졌던 적이 있다.
2018년에 양국간 어민들이 가리비 갈등으로 육탄전까지 벌이는 상황이 오기도 했다.# 양국의 정부들은 중재를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이와 별개로 현재 영국 정부와 프랑스 정부 사이에서는 브렉시트 이후의 영국과 유럽연합의 관계를 설정하는 협상을 앞두고 팽팽한 기싸움이 오가고 있는 중이다.
2019년 7월 26일에 마크롱 대통령과 존슨 총리는 전화통화를 했지만, 브렉시트의 입장차만 확인했다.# 2020년 1월 브렉시트가 공식적으로 시행되는 날 마크롱 대통령은 영국이 EU에 다시 들어갈 수없다고 밝혔다.#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2020년내에 영국과 EU 간 미래관계 합의를 장담하기 어려울 것으로 내다봤다.#
4. 관련 문서
- 영국/외교
- 프랑스/외교
- 영독관계
- 프랑스-독일 관계
- 브렉시트
- 백년전쟁
- 영프독
- 주요 7개국 정상회담
- 상임이사국
- 영국/역사
- 프랑스/역사
- 영국/문화
- 프랑스/문화
- 영국/경제
- 프랑스/경제
- 프랑스계 영국인
- 영국인 / 프랑스인
- 영어(영국식 영어) / 프랑스어
- 대국관계일람/유럽 국가/서유럽 국가
[1] 사진에서 남극은 영유권 주장만 할 뿐 실질적인 영유권을 인정받지 못한다.[2] 2019년 7월 기준[3] 출처: 영국의 인구통계(영어)[4] 출처: 프랑스의 인구통계(영어)[5] 출처: 중국의 인구통계(영어)[6] 불어가 라틴어 후손인 만큼 라틴어에서 온 단어들이 아주 많다. 프랑스어 좀 배운 사람이라면 간단한 라틴어를 읽거나 천천히 말했다면 알아들을 수도 있다. 예) 나는 한국에 산다. J'habite en corée/ (ego) habito in corea[7] 프랑스도 로망스어군 중에서는 발음이 꽤나 튀는 축에 속한다.[8] 출처: 독일 전 국토의 역사적 인구자료(영어)[9] 사실 파쇼다 사건처럼 아프리카나 인도 등지에서 충돌하기는 했는데, 대체로 프랑스가 양보하면서 전면전으로 가지는 않았다. 이미 프랑스의 주적은 프로이센, 그리고 독일 제국으로 옮겨갔고, 이에 대항하려면 영국의 협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10] 호이4에서도 프랑스가 독일에게 항복하면 디시전으로 나온다.[11] 프랑스는 나폴리병이라고 불렀다. 1494년 샤를 8세의 이탈리아 원정 당시 프랑스군 사이에서 퍼졌으며 이들이 조국으로 돌아온 후 번졌기 때문.[12] 프랑스인들이 개구리 요리를 즐겨먹는 데서 나온 멸칭이다. 미국, 캐나다, 뉴질랜드, 호주 등 다른 영미권 국가들도 프랑스인들을 개구리로 비하한다. [13] 2014년 bbc 투표에서 영국은 프랑스를 긍정적으로 본다는 의견이 61%였으며 부정적으로 보는 의견은 32%였다. 프랑스에서도 영국을 긍정적으로 바라본다는 의견이 72%였고, 부정적으로 본다는 의견은 20%였다.[14] 오죽하면 먼나라 이웃나라에도 영국인 캐릭터와 프랑스인 캐릭터가 이런 말을 할 정도다. 영국인 캐릭터: "딴 나라에겐 져도 돼. 하지만 프랑스만은 꺾어야 해!" 프랑스인 캐릭터: "난 꼭 그 반대로다!"[15] 드골은 아예 영국을 "미국이 유럽에 보낸 트로이의 목마"라 불렀고, 유럽경제공동체(EEC)에서도 영국을 배제시켰다. 결국 영국은 드골의 퇴임 이후인 1973년에야 EEC에 합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