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용
[clearfix]
1. 개요
일제강점기의 조선귀족.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형 흥완군 이정응의 양손자이고, 완순군 이재완의 장남이다.
원래 이달용의 가계는 '''선조의 9남 경창군의 후손'''이다. 이달용이 태어난 시기는 조선 왕실 직계와 갈라진 지 2 ~ 300년이 지난 때였기에 이달용은 원칙적으로 종친이 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달용의 아버지 이재완이 1864년(고종 1년)에 흥선대원군의 형 흥완군의 양자로 입적했기 때문에 이달용은 태어날 때부터 왕실과 가까운 친척이었다.
그러나 작호는 받지 못했다. 왜냐하면 족보 상 이달용의 가계에서 마지막으로 왕[2] 이었던 사람은 5대조 장조(사도세자)인데[3] , 법적으로 임금의 4대손까지만 황족으로 인정했기 때문이다.
2. 생애
한성부 가회방 맹현(현재 가회동)에서 완순군 이재완의 큰아들로 태어났다.
음서로 관직에 올라 1899년(광무 3년) 시강원 시종관 직을 맡았다. 그리고 명성황후의 친족 민영기가 세운 근대교육기관 종교의숙에 입학해 신학문을 배웠으며 1904년(광무 8년)에 졸업했다. 그해 1월에 훙서한 명헌태후의 장례를 시작으로, 일제강점기 때까지 황실의 장례 때마다 종척집사로 활동했다. 이후 비서원승을 지냈고 같은해 9월에는 한성학교[4] 교장 직을 맡아 이듬해 4월까지 재직했다.
1905년(광무 9년)에는 시찰단 일원으로 일본에 가서 궁내성을 시찰했고 일본 정부에게서 훈3등 서보장을 받았다. 1907년(광무 11년)에 규장각 부제학을 거쳐 종부사장으로 임명받았고, 그해 11월에는 대한제국 보빙사절단 수행원으로 일본에 다녀와 일본 정부에게서 훈3등 욱일장을 수여받았다. 12월에는 대한제국 정부에게서 팔괘장을 수여받았고 흥선대원군의 묘를 공덕동에서 파주로 옮기는 일을 서사관으로서 맡았다. 그리고 규장각 부제학 겸 칙임관 3등이 되었다.
2.1. 일제강점기 이후
1910년(융희 4년)에 일어난 경술국치 이후 이달용의 아버지 이재완은 일본 정부에게서 조선귀족 후작 작위와 은사공채 336,000엔를 받았고, 4년 뒤 이달용은 이재완의 법적 상속자라 해서 종5위를 받았다.# 한동안은 왕실 행사 및 병든 고종을 간호하는 등 이왕가[5] 내의 크고 작은 일들을 주로 맡아했다. 1920년 4월에는 일본 도쿄에 가서 영친왕과 이방자의 결혼식에 참석했고, 이듬해 8월에 영친왕 부부의 장남 이진이 태어나자 종친 대표로 다시 도쿄로 가 이진의 탄생을 축하했다. 그해 10월에는 한상룡과 함께 그가 주주로 있던 조선생명보험주식회사 부사장이 되었다.
1922년 8월에 아버지 이재완이 사망했고 2달 뒤에 후작 작위와 은사공채를 물려받았다.
이후 한성은행 대주주, 양강척림철도주식회사 감사, 여주광산주식회사 이사를 역임했다.# 그리고 동민회[6] 의 회장과 이사장, 고문을 지냈고 중일전쟁 이후 동요회[7] 회원 자격으로 국방 헌금을 기부했다. 1939년 11월에는 조선지장주식회사의 취체역이 되었고, 1941년 9월에는 조선임전보국단[8] 의 발기인 중 한 명으로 참여했다.#
3. 사망과 이후
8.15 광복 이후인 1948년 1월 27일에 서울 종로구 가회동 자택에서 사망했다. 향년 64세. 묘소는 경기도 양주군 와부면 도곡리 안골[9] 흥완군과 완순군 묘소 근처에 있다.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광복회와 함께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 중 조선귀족 부문에 이름이 올랐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의 습작/수작 부문 및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들어갔다.#
4. 여담
- 양할아버지 흥완군과 아버지 이재완 묘소 근처에 그의 저택이 있었다. 그 주변에는 우물 하나가 있었다. 승지였던 그가 사용했다해서 마을 사람들은 승지물이라 불렀고, 그 일대 별칭도 승지물 마을이 되었다고 한다.#
5. 가족
안동 김씨 부인 사이에서 4남 3녀를 낳았다.
장남 이해선(李海善)은 1905년(광무 9년) 생으로, 사진 작가로 활동하여 한국 사진 역사의 큰 획을 그었으며 1983년에 사망했다. 이해선은 민영환의 딸 민계식과 결혼해 2남 1녀를 두었는데 민계식은 요절했고, 이후 김의수와 재혼해# 아들 1명을 더 낳아 총 3남 1녀를 두었다.
이해선의 장남이자 이달용의 장손 이철주(李鐵柱)는 1922년 12월 생으로,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 재학 중이던 1940년 11월에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비밀 결사 MH회를 조직하고 관련 활동을 하다 1941년 2월에 일본 경찰에 체포당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당했고 그해 11월에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해방 이후에는 연세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다 1988년 8월에 사망했다. 사후 독립운동의 공으로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고 2005년 건국 포장을 추서받았다.# 2남 이계주는 1927년 생으로, 숙명여자대학교 교수를 지냈다. 3남 이길주(李吉柱)는 1958년 생으로 이해선이 53세에 낳은 늦둥이이다. 부동산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2014년에는 후술할 사촌누나 이남주와 함께 최봉림 한국사진문화연구소 소장을 만나 아버지 이해선의 생애 및 사진활동에 대해 인터뷰하기도 했다.
차남 이해명(李海明)은 1911년 생으로, 흥친왕 이희의 차남 이문용의 양자로 입양갔으며 6.25 전쟁 때 납북당했다.#
3남 이해상은 1913년 생으로, 특별한 행적이 알려져있지 않으며 1985년에 사망했다. 슬하에 6녀를 두었는데# 그 중 한 명이 이남주(李男柱) 전 성심여자대학교[10] 음악과 교수이다. 영친왕의 아들 이구의 전 부인 줄리아 리가 이혼 후 사망 직전까지 유일하게 왕래했었던 이씨 친족이었다고 하며 줄리아 리의 사망 소식을 전한 것도 그이다.#
큰딸 이길영은 1916년에 태어났으며 행적은 알려져있지 않다. 둘째딸 이우영(李又英)은 1920년 생으로, 18세이던 1938년에 요절했다.
4남 이해영(李海英)은 1925년 생으로, 저명한 인구학자, 통계학자였다. 서울대학교 사회과학연구소장을 역임하다 1979년에 사망했다.
[1] 남연군의 증손자 항렬 대에서는 이름에 '흙 토(土)'가 들어간 글자를 공유한다. 고종황제의 아들들의 이름도 각각 선(墡), 척(坧), 강(堈), 은(垠), 육(堉), 우(堣)이다. 흥완군의 손자인 이달용(李'''達'''鎔)도 마찬가지이다. 이외에도 흥녕군의 손자 이기용(李'''埼'''鎔)과, 이달용의 동생 이규용(李'''逵'''鎔), 흥인군의 손자 이지용(李'''址'''鎔), 흥선대원군의 손자 이준용(李'''埈'''鎔)과 이문용(李'''(土 + 汶)'''鎔), 그리고 이관용(李'''土+灌'''鎔)의 이름까지 이 규칙이 적용된다.[2] 추존 왕 포함.[3] 이달용의 양고조부 은신군은 영조의 동생인 연령군의 봉사손이다. 그런데 어떻게 사도세자의 후손이 되냐고 할 수 있다. 사실, 은신군은 사도세자의 친아들인데 죽은 후에 연령군의 봉사손으로 지명받은 것이었다. 그러나 명확하게 연령군가로 입적한 게 아니라서 당시 은신군 후손들은 '우리는 연령군의 제사를 챙길 뿐, 엄연히 사도세자의 자손'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후 20세기 중반에 들어서야 확실하게 자신들을 연령군의 법적 후손으로 인식했다. 자세한 것은 은신군 항목 참조.[4] 현재 경기고등학교.[5] 경술국치 이후 격하당한 대한제국 황실.[6] 독립운동에 대항하기 위해 만든 친일 단체. 중일전쟁 이후 국민총력조선연맹과 합쳐졌다.[7] 조선귀족들의 전쟁협력단체.[8] 일제 침략 전쟁 지원을 위해 여러 단체들이 합쳐져 조직된 연합단체.[9] 현재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도곡1리 97-1 안골.[10] 1995년 가톨릭대학교와 합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