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소로스
1. 개요
헝가리 부다페스트 출신. 헝가리어로는 Soros György(쇼로시 죄르지)라고 한다. 홈페이지[3] 런던 정경대를 졸업했다. 20세기 최고의 펀드매니저이자 현대 금융사의 신화적 존재 [4] 인 소로스 펀드 매니지먼트 회장. 지금은 오픈소사이어티재단의 회장만 맡고 투자 현업에서는 완전히 은퇴했다.
2019년 9월 기준으로 70억달러, 한화로 약 8조 5000억원의 재산을 보유 중이다.
2011년 7월 25일 81세의 나이로 펀드매니저 은퇴를 발표했다. 물론 그가 투자에서 완전히 손을 뗀 것은 아니다. 투자금을 모두 투자자들에게 돌려준 후 가족 펀드(개인 재산)의 형태로 여전히 자금을 운용 중이다. 2015년 중국 버블 붕괴로 소로스의 가족펀드(개인재산)에서 대규모 손실을 봤다는 기사가 난 적이 있다.
워렌 버핏과 동갑이며, 미국의 정치권을 등에 업고 태국 홍콩은 물론이고 영국이나 일본, 한국 등 동맹국들에게까지 환투기 공격으로 국가를 휘청거리게 하는 방식으로 치부하며 경제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면서도, 제3세계 국가의 빈민이나 민주화 운동가들을 돕는 방식으로 이용해 정치적 수단으로 삼는 양면적 행보 때문에 '''사악한 구세주'''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1997년 IMF 사태 당시에는, 동남아시아 각국에서 '''통화 폭락의 주범'''으로 공공의 적 취급을 받던 것과 대조적으로 우리나라의 경우는 대통령 당선자 신분의 DJ가 지난날 민주화 투쟁에 앞장섰던 일에 호감을 보이며 투자 요청을 승낙, 1999년부터 본격적인 한국 투자 행보를 시작해 약속을 지키기도 하였다.[5] 아무튼 헐값에 나온 한국의 증권사나 일부 기업을 인수해[6] 사옥을 매각하고 고배당과 유증으로 돈을 챙긴 후 매각하고 철수해 1천억여원의 수익을 거뒀다고 한다. 다만, 이 무렵 우리 국민들의 금모으기 운동 여파로 국제 금값이 하락해, 환율시장에서는 기대치보다 큰 수익을 올리지는 못했다는 후문.
2. 펀드매니저가 되기까지
1930년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났다. 유대인 변호사[7] 였던 아버지 슬하에서 유복하게 자랐지만 나치가 유럽을 장악하자 죽음의 위협 속에 살았다. 이후 1947년 동구가 공산화 되면서 런던으로 이주. 런던 정경대(LSE)에서 <열린사회와 그 적들>로 유명한 칼 포퍼 밑에서 철학을 공부[8] 한 뒤, 51년에 학부를 졸업하고 54년에 석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소로스는 평생 자기를 포퍼의 추종자이자 제자라고 소개했고 실제 포퍼가 만든 '오픈 소사이어티 재단'에 엄청난 돈을 기부하기도 했다. 당연히 포퍼는 갑부가 돈을 대 주니 좋아했지만 실제 소로스가 돈을 번 방법 자체가 자유 경제 체제의 헛점을 파고 들어 자유민주주의를 옹호하는 포퍼를 난감하게 하는 방법들이었기에 애써 좋아하는 티를 내지는 않았다. 소로스는 대학을 다니면서도 철도역의 짐꾼, 여행 세일즈맨, 은행의 수습 사원으로 어려운 생활을 꾸려 나갔다.
그리고 지금이야 손꼽히는 갑부이고 악마같은 헤지펀드계의 대부로 알려져 있지만 소로스 본인이 돈을 벌기 위해 펀드매니저계에 뛰어든 것은 순전히 런던 정경대에서 심취해 버린 철학을 공부하는 데 경제적 제한을 받지 않기 위해서였다. 스스로 나중에 포장을 위해서 한 말일지도 모르지만 소로스가 펀드 매니저로 뛰어들 때 그가 목표했던 액수는 50만 달러로 이 정도면 철학 공부하는 데 밥걱정 안 하고 할 수 있다고 생각했으나 실제 이 업계에 뛰어 들고는 그 모든 것이 바뀌었다.
졸업 후 몇 년 간 고생을 하다가 런던에 있는 한 투자은행[9] 에 견습 사원으로 취직하면서 금융업계에 발을 디디게 된다. 1956년 미국으로 이민 간 소로스는 월가에서 트레이더로 시작하여 뛰어난 주식 종목 선정 능력을 바탕으로 리서치 헤드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후 투자은행 내에서 자기자본계정을 운용하다가, 이 것이 고객 이익와 상충되는 것이 문제가 되자 투자은행에서 이 부분을 분사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소로스도 함께 독립하면서 1969년 4백만 불 규모의 작은 헤지펀드를 만들어 운용하면서 펀드매니저로서 첫 발을 내디뎠다.[10]
알프레드 윈슬로우 존스[11] 스타일의 롱숏 전략을 사용하며 소로스는 탁월한 투자 감각과 재귀성 이론을 바탕으로 한 통찰력으로 훌륭한 성과를 냈다.[12]
1973년, 소로스는 짐 로저스[13] 와 함께 그의 역사적인 헤지펀드인 퀀텀 펀드(Quantum Fund)를 설립하면서 자신의 투자 인생의 본격적인 막을 올리게 된다. 퀀텀펀드의 공동 창업자인 짐 로저스에 따르면 초창기 퀀텀 펀드(Quantum Fund)는 많은 어려움을 겪었으며 특히 닉슨 대통령의 사임 등으로 인해 주식시장이 폭락했었던 1974년 수익률 부진으로 인하여 매우 힘든 시기를 보내기도 했으나 이후 불사조처럼 회생했다고 한다.
퀀텀펀드는 1970년부터 1980년까지 S&P 500 지수가 47% 상승하는데 그치는 동안 4,200%의 경이적인 수익률을 거두었다. 레버리지를 동반한 당시 니프티-피프티로 불렸던 고평가 종목들에 대한 공매도, 상기에 언급했던 REIT 투자, 방위산업주 투자 등이 큰 수익률을 가져와주었다고 한다. 소로스가 저술한 책 중 하나인 '금융의 연금술'이란 책에서 이 부분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14]
3. 파운드화 공매도
1990년, 영국은 유럽 내 단일통화권 구축을 위해 만들어진 과도기적인 체제인 ERM(환율조정메커니즘)에 가입한다. 이에 따라 파운드화는 독일 마르크화 대비 상하 6% 밴드 내에서만 움직이도록 고정이 되었고[15] 밴드에서 벗어날 정도의 변동성이 발생할 경우 영란은행이 즉각적으로 개입해서 파운드화 가치를 안정시킬 의무가 생겨났다.
같은 해 독일 통일 이후, 독일은 동독 발전을 위해 천문학적인 투자를 단행하게 되고 막대한 화폐가 풀리면서 인플레이션을 방어하기 위해 분데스방크(독일 연방은행)는 '''2년 동안 10차례나 금리를 인상'''하는 초강수를 두게 되었다.[16] 자연히 마르크화는 강세를 나타냈고[17] 파운드화의 가치를 밴드 내로 유지하기 위해 영란은행 역시 금리를 인상할 수 밖에 없었다.[18] 그러자 독일만큼 튼튼하지 못했던 영국경제로 인해 실업률은 두자릿수까지 치솟았고 경기는 얼어붙었다. 하지만 자존심 강한 영국은 ERM 탈퇴 대신 영란은행이 열심히 파운드화를 매수하며 파운드화 하락[19] 을 방어했다.
바로 여기서 문제가 발생했다. 소로스와 스탠리 드러켄밀러[20] 를 비롯한 영민한 헤지펀드 매니저들은 가능한 모든 자금을 동원해 파운드화의 공매도에 나섰다. 이번에도 자존심 강한 영국은 단기금리를 10%로 인상하며 파운드화 방어에 나섰으나 시장의 공격을 막아내지 못하고 항복, 1992년 9월 16일 ERM을 나가게 된다. 그리고 파운드화는 수직으로 고꾸라지기 시작했고 소로스를 비롯한 헤지펀드 매니저들은 천문학적인 수익을 올렸다.[21][22] 결국 패배한 영국 정부는 유로화로의 전환을 포기했다. 이러한 공격방법이 왜 위험한지 간단하게 설명하면 일단 이 방법의 핵심은 공매도라는 방식의 위험성 때문이다. 간단하게 말해 공매도를 통해 2000원으로 1파운드화를 사는 과정 없이 미리 빌렸다치고 팔아놓고 나중에 파운드화가 1000원으로 떨어졌으니 차익에 해당하는 천원을 지불하라는 방법인데 문제는 파운드화가 천원으로 떨어지려고 하면 당하는 쪽에서 눈앞에서 엄청난 손해를 보는게 뻔히 보이기 때문에 가치 하락을 막기 위해 죽자사자 달려든다. 비록 영국 정부의 상황을 꿰뚫고 있었기에 가능한 방법이었지만 엥간한 곳에서는 씨알도 안먹히고 손해만 보다 끝나는 경우가 많다.
사실 정확하게 말해서 이 영란은행을 공격하는 작전의 입안자는 드러켄밀러였으며 그가 입안한 계획을 검토하고 허가를 내준 이가 소로스였다[23] . 영란은행에서 소로스의 펀드는 엄청난 수익률을 올렸지만 이후 드러켄밀러의 투자 실패로 인한 막대한 손실 (특히 1998년 롱텀캐피탈의 파산이 직격탄이였다)이 계속되자 결국 드러켄밀러는 소로스를 떠나게 된다.
1998년 롱텀캐피탈 파산 사태와 2000년 IT버블 붕괴로 퀀텀펀드는 돌이킬 수 없는 큰 손실(LTCM때 15억 달러, IT버블 때 70억 달러)을 냈고 결국 퀀텀펀드 내에서 공격적인 투자전략만을 고집하던 스탠리 드러켄밀러(Stanley Druckenmiller)는 결국 퀀텀펀드를 떠난게 된다[24] .
4. 영향력
1993년 소로스가 금광을 개발하는 미국의 광산업체의 주식을 매수했다는 소문이 나자 월스트리트의 펀드매니저들이 앞다퉈 관련주식을 매수해 전세계적으로 금이 폭등했다.
1996년 1월 도쿄의 세미나장에 나타난 그가 "일본 주가가 비싸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라고 한마디 하자 닛케이 주가는 폐장을 앞둔 막판 10분동안 270포인트 이상 급등했다.
하지만 2000년 4월 퀀텀펀드가 기술주(IT버블)에 묶여 50억달러를 순식간에 날리자 그는 "헤지펀드의 시대는 갔다"고 선언했다. 이후에는 안전한 투자를 하겠다고 밝혔다. 실제로 이 이후에는 파생상품이나 통화투자는 하지 않고 주식이나 채권에만 투자하는 면모를 보이고 있다. 2010년 퀀텀펀드를 해체하고 개인재산만을 운용하기 시작한 이후로는 중국 증시를 중시하여 중국 주식(특히 공상은행과 상하이자동차)에 엄청난 투자를 했지만 2015년 중국 증시 폭락으로 엄청난 손실을 보고 2016년의 포브스 발표에서 갑부순위 100위 밖으로 밀려나는 굴욕을 겪은 바 있다.
중국에 대해서 매우 긍정적으로 보고, 중국 공산당과의 꽌시가 탄탄하다는 평이 많다. 중국 주식에 투자했던 이유. 그러나 2019년, 조지 소로스가 다보스포럼에서 이례적으로 시진핑을 비판했다. 시진핑은 중국의 시장 개방을 반대하고, 팽창주의 정책을 벌리고 있다. 그런데 이 정책이 미중관계가 냉전이 아닌 '열전', 즉 진짜 전쟁으로 벌어질 수도 있다며 시진핑의 태도 변화를 촉구한 것이다.
물론 소로스에 대한 영향력에 대한 이야기는 과장된 면도 없지 않다. 과거 그가 헤지펀드의 거물이었던건 사실이지만, 마치 그가 독단적으로 영국 파운드화를 공격하고, 홀로 아시아의 수많은 나라를 금융위기(1997년 태국, 인도네시아, 그리고 대한민국의 외환위기)로 몰아넣은 것처럼 전해지는 이야기가 많은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그 당시 아시아 국가들과 영국에는 헤지펀드들이 노릴 만한 경제 분야의 문제(금융)와 거품이 있었던것이 사실이고 소로스는 그 약점을 노려 공격을 감행한 것이다. 이때 헤지펀드의 공격을 버텨낸 곳이 홍콩이고,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한 나라가 태국,인도네시아,그리고 한국인 것이다.
의외로 외환위기 당시 한국에서는 큰 수익을 올리지 못했다고 한다.[25] 태국 바트를 공격하여 큰 수익을 올렸기에 비슷한 전략으로 대한민국 원도 공격해 봤지만 때마침 한국인들이 어마어마한 양의 금을 쏟아내서 포기했다고....[26]
금융위기 때 그가 헤지 펀드계의 스타 매니저여서 특별히 부각된 점은 주의해야 할 사실이다. 실상 돈이 될 것 같다고 판단한 각국의 거대 은행, 여타 헤지펀드들도 마찬가지였다. 당연히 이들이 더 큰 혼란을 불러왔다.소로스가 하는 행동은 수많은 사람들이 따라하기 때문이다.위에 서술된대로 소로스도 인간인지라 당연히 투자에 있어서 많은 실수를 맛보았고, 기술주 거품 때는 정말 골로 갈 뻔한 적도 있었다.
그 영향력 때문에 각종 창작물에서도 캐릭터를 차용하기도 한다.
김진명의 소설 "하늘이여 땅이여"에서는 한국에서 주식투기[27] 를 하려는 헤지펀드 매니저 딕슨의 배후자인 아서라는 인물이 있는데 사전에 그의 계획을 돕는 조지라는 캐릭터가 바로 이사람에서 따온 듯. 그사람의 이력[28] 이나 대화내용[29] 을 보면 100%다.
신이라 불리운 사나이 만화책에선 조지 솔라스라는 이름을 가진 유대인 금융재벌이 나오는데 누가 봐도 조지 소로스 이름에서 따온 듯. 이 작품에선 악의 축같이 나오지만 정작 신디케이트라는 비밀 세계 조직의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는 인물로 나온다.
5. 기부 활동
소로스는 2010년도 포브스의 발표에서 미국부자순위 14위를 차지했다. 동시에 2002년 비즈니스위크의 발표에 따르면 5억 3600만달러를 기부금으로 내놓아서 6위의 기부가로 선정되었다.
소로스는 1989년에 민주주의·인권 운동을 목표로 하는 '오픈소사이어티재단(Open Society Foundations, OSF)'을 만들고, 매년 꾸준히 수억달러를 기부하였다. 그런데, 2017년에는 한방에 '''180억 달러 (약 20조원)'''을 기부했다. 2017년 소로스의 재산 추정치는 약 27조원인데 자기 재산의 70%를 기부한 것이다. 이번 기부를 포함해 지금까지 이 재단에 320억달러(약 35조원)을 기부했다고 한다. 이 통큰 기부로 인해서 이 재단은 빌&멀린다 게이츠 재단에 이은 두번째 큰 규모의 재단이 되었다. 관련기사
6. 개인적인 면들
소로스는 검소한 생활을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1979년 자선단체 오픈소사이어티펀드를 설립해서 옛 동구권의 체제전환을 위해 매년 3억달러를 지원하기도 했다. 취미는 테니스이며 오랫동안 뉴욕 맨해튼의 조그만 원룸 아파트에서 살았고 재혼후에 아내가 임신했을 때 비로소 뉴욕 5번가의 2층 맨션으로 옮겼다. 하지만 최근의 여러 구설수에 오른 행동을 보면 이런 자선활동이나 검소한 생활은 다 자기 이미지 관리를 위한 언플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자기보다 52세나 어린 브라질 탤런트 출신의 옛 애인한테 소송을 당했는데, 옛 애인의 주장은 소로스가 뉴욕 맨해튼의 190만 달러 아파트를 자기 대신 새로운 여자친구에게 줬다고 하며, 아파트를 놓고 말싸움을 벌이던 중 소로스가 침대에서 자기 얼굴을 때리고 목을 졸라 질식시키려 했다고 폭로하기도 했다.기사
물론 저 옛 애인이란 사람도 단순히 애인이었던 이유로 소로스에게 거액을 뜯어내려 하는 속물적인 목적이 보이는지라 저 아파트를 준다는 약속이나 소로스의 폭행 및 협박 등의 주장은 액면 그대로 믿긴 어렵지만, 적어도 80이 넘은 소로스의 나이에 20대의 연예인 미녀를 애인으로 두고 있었다는 것은 서양 기준으로도 별로 보기좋은 모습은 아니고, 더구나 저런 연예인 미녀를 애인으로 데리고 다니면서 애인을 만족시켜 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선 상당히 사치스런 생활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이 당연하기에 평소의 검소한 생활이란 것도 언플로 꾸민 거짓 이미지일 가능성이 크다. 링크 실제로도 이런 일들이 발생했다.
미국 민주당에 막대한 정치자금을 대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원래는 공화당을 지지했으나 부시의 삽질을 보다못해 오바마와 민주당을 지지하고 있다. 2016년 미국 대선에서도 반이민정책을 주요 정책골자로 내세운 도널드 트럼프에 반대하여(소로스 본인이 이민자니까) 힐러리 클린턴을 지지한 바 있다. 힐러리 클린턴을 지지하면서 조지 소로스가 자신의 홈페이지에 올린 주장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는 모두 이민자다. 지구에 잠시 머물고 있을 뿐인. 그러므로 누가 누구를 막거나 받아들이는 것을 자의적으로 통제할 권리는 누구한테도 없다."'''
의외로 환경운동에도 꽤나 앞장서고 있다. 온실가스 감축, 대체에너지 개발 등에 대해 1980년대부터 지속적으로 관심을 보여왔다. 오픈소사이어티재단에 기부한 이유도 오픈소사이어티재단이 민주주의 인권 운동 이외에 환경운동에도 나서고 있기 때문이다. 2010년대 가족펀드로 전환 후에 개인 자산들 역시 중국 투자 자산 이외에 미국이나 유럽 국가들 투자분은 대부분 친환경 기업들에 투자해왔다. 로열 더치 쉘이 멕시코만에서 대규모 오염물질 누출사고를 치자 소로스는 즉시 손절매를 하고 쉘을 비판했다.
조지 소로스는 환경운동에도 지속적으로 나서고 있지만 그린피스나 그레타 툰베리 식의 극단적 환경운동에는 비판적이다. 환경운동이 극단주의로 치닫게 되면 오히려 '''환경을 파괴하려는 세력한테 명분을 안겨줄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앞서 설명한 IMF 외환위기의 영향으로 최규선 게이트의 주인공인 최규선씨의 주선으로 김대중과 자주 만남을 가졌으며 대표적인 거부로 알려진 알 왈리드 사우디아라비아 왕자, 마이클 잭슨과 함께 화상회의도 했다. 김대중 대통령 취임식에도 참석한 바 있다.
헝가리 출신인 만큼 헝가리 정재계와도 깊은 친분관계를 맺고있고, 헝가리가 민주화 된 이후로 중부유럽대학을 설립하면서 꽤 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특히 오르반 빅토르와 친분이 깊었다. 하지만 2010년대 재집권 이후로는 오르반 빅토르가 1기 집권때와는 다른 노선을 띄고 권위주의적인 행보를 보이면서 조지 소로스와는 매우 험악한 사이가 되었다.
정치적으로는 리버럴 성향이다. 전세계의 인권단체나 반극우/극좌, 민주주의, 자유주의, 반포퓰리즘 정치세력에 후한 기부를 한다고 한다. 그래서 스티브 배넌과는 엄청난 상극이다. 또한 '''초부유층임에도 부유세를 지지'''한다.
6.1. 반중 성향
처음에는 소로스와 중국 공산당과의 관계가 매우 좋았다. 그러나 시진핑 집권 이후 강력한 반중 성향으로 돌아섰다.
소로스는 오픈소사이어티재단 회장으로 옮기면서, 중국의 독재를 비판하고 중국에는 투자하지 않고 중국에서 사업하지 않았다. 이는 2015년 중국증시 버블 붕괴가 큰 영향을 끼쳤다. 2015년 중국증시 버블 붕괴 전까지는 중국 증시에 투자를 많이 했으나, 2015년 중국 증시 버블 붕괴[30] 로 30억 달러의 손실을 보자 중국 투자를 전부 손절하고 반중 성향으로 돌아섰다.
소로스는 2018년 다보스포럼에서 중국 경제 붕괴론을 주장해 중국 정부가 반발하기도 했다. 트럼프를 극혐하면서도 대중 무역전쟁 등 대중 강경 정책은 트럼프가 유일하게 잘했다고 칭찬했다. 그러면서 트럼프가 중국과 타협해서 화웨이를 허용하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7. 재귀성 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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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로스에 의하면 주식시장은 과매도와 과매수를 거쳐서 결국은 평균에 근접해나간다고 한다. 이를 소로스의 재귀성 이론 혹은 자기암시 이론이라고 부른다. 그래프를 보면 알겠지만 초기 급락장에서 수익이 극대화되며, 데이트레이더들의 기본 이론도 대부분 여기에서 기인한다.
이 이론은 평균분산그래프같은 경제학적 측면과 군중심리와 같은 인문학적 측면이 같이 있는데, 조지 소로스가 젊은 시절에 철학을 전공한 것과 관계가 있다고 보는게 일반적인 견해다. 재귀성 이론은 두가지 요소가 전제되어 있는데, 하나는 특정물에 대해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에 대한 인식(understanding)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들이 특정물을 어떻게 다루려는지에 대한 조작(participation)이다. 소로스는 인식과 조작이 서로에게 영향을 주어 사람들의 편향성이 더욱 강해진다고 보았다. 이러한 편향성을 소로스는 '자기암시'라고 정의내렸는데 이렇게 강해진 자기암시는 현실과 자기암시의 간극이 더이상 지속될 수 없을 때 반전되어 사라진다고 한다.
소로스는 파운드공매도 이후 많은 주목을 받았으며, 주식, 상품, 환율시장 등에서 몇 차례 성공을 거두기도 했지만 반면에 일본 엔 투자 실패 등의 곤란을 겪은 적도 다수 있다. 이에 대해 시골의사 박경철은 소로스의 성공은 성공이 확실한 차익거래에서 레버리지를 일으켜 큰 수익을 낸 데 있지, 재귀이론을 바탕으로 한 것은 아니라고 평한 바 있다.
[1] 조지 소로스의 형으로, 이 분도 어마어마한 투자자이다.[2] 전성기 기준, 가장 부유했던 펀드매니저였다. 무려 40조원의 재산가였다. 현재, 대부분의 자산을 오픈 소사이어티 재단에 기부했기때문에 개인 재산은 많이 쪼그라든 편.[3] 사실 부모님이 모두 에스페란토를 적극 사용해 에스페란토가 모국어(!)인 사람인데, 이 경우는 게오르게 소로스, 만약 g에 발음 표기를 한다면 줴오르줴 소로스라고 읽을 것이다(에스페란토에는 y가 없다). 사실 소로스는 원래 성이 아니다. '''나치 시절 유대인 탄압을 피해 슈바르츠라는 이름을 소로스로 바꾼 것'''이므로 발음 자체는 크게 의미는 없다. 본인이 직접 참여한 자서전(본인이 쓰지는 않은)에서 밝힌 바가 있다. [4] 농담이 아니다. 이 사람이 몇몇 나라의 통화를 공격해서 무너뜨린 끝에 수많은 사람이 자살했고 그 부인들은 전부 과부가 되었다. 대표적인 것이 '''고베 대지진''' 당시 일본이었고, 이 때 화끈하게 데인 일본이 그 다음 공격에 반응한 것이 바로 일은포이다.[5] 대통령 당선자가 대선 후보 시절부터 소로스와 화상 대화를 나누고, 자택에 소로스를 초청해 식사 대접을 하며 얘기를 들어주는 서구식 귀빈 예우로, 초청 손님의 체면을 세워 주기도 하였다. 즉, 소로스는 국제적으로 명망이 있는 민주화 운동가를 돕는다는 명분과 투자 수익을, 1달러가 아쉬운 형편인 DJ는 파급 효과가 기대되는 투자 유치로 외환을 확보할 수 있다는 점에서 서로 도움을 주고 받았던 것.[6] 인수기업들은 소로스의 투자사실을 널리 홍보하며 판촉활동을 재개하기도 하였다.[7] 당시 부다페스트는 '''유다페스트'''라고 불릴 정도로 유대인이 많이 살던 지역이었다.[8] 잘 안 알려졌지만 소로스는 인문학 예찬론자이다. 어느 정도냐면 자기가 '''펀드매니저가 안 됐으면 철학자가 됐을 거'''라고 인터뷰에서 말했고, 자신의 투자 이론인 재귀성 이론을 정립하는 데 철학이 큰 역할을 했다고 말할 정도다.[9] 헝가리 이민자가 설립한 회사였다고 한다. 다만, 투자 은행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이것만 해도 요즘 한국에서 4대 대기업 들어간 것보다 더 어려운 취업을 해낸 것으로 봐도 된다.[10] 이 때는 펀드 이름이 소로스 펀드였다. 1973년 퀀텀 펀드(Quantum Fund)로 개명.[11] 1949년 세계 최초로 헤지펀드를 설립한 사람이다.[12] 대표적인 예로 1970년대 초반의 부동산 투자 신탁(REIT) 투자를 들 수 있다. 소로스는 REIT의 붐과 버블 붕괴를 정확히 예측하며 막대한 수익을 올렸다.[13] 상품 투자의 귀재라 불리는 유명한 매니저이다. 한국에서는 유튜브에 올라온 일본 몰락과 한국 도약 등을 예고한 걸로 유명해졌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말이 많은 편.[14] 소로스가 유명해진 영국 파운드화 공매도는 1990년이다. 글로벌 매크로로 유명해진 소로스이지만 파운드화 공매도 이전에는 주식, 주식선물, 채권, 외환 등 다양한 곳에 투자하였다.[15] 경제 규모에 따라서 달랐는데 작은 국가의 경우 2.5%였고 영국은 큰 경제력을 지닌 국가였기 때문에 6%로 비교적 밴드의 범위가 컸다.[16] 현재 연준의 금리결정을 위한 회의는 일년에 8차례이다. 2년이면 16차례인데 그 가운데 10번의 금리인상이라면... 후덜덜한거다.[17] 금리 인상 → 자금 유입 → 해당국 통화 강세[18] 금본위제에서도 각국의 금리 변화의 동조화 현상이 나타난다. 물론 이러한 금리 변화는 각국의 경제 사정과는 무관하게 가는 경우가 빈번했다.[19] 실업률 치솟고 경기가 나빠지니 당연히 파운드화는 떨어지는 게 정상이다.[20] 이 당시 소로스의 펀드를 위탁운용하던 매니저, 이 사람도 장난아니다. 소위 천재. 소로스가 쓴 '금융의 연금술'을 읽고 토론을 하고 싶다고 찾아오자 소로스가 채용을 제의했다.[21] 그 해 소로스의 수익률은 무려 68%. 파운드화 매도를 통해서만 무려 11억 달러(약 1.2조원)의 수익을 올린 것이다.[22] 참고로 요샌 이렇게 베팅하는 헤지펀드는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러한 스타일은 언뜻 보면 상당히 멋있고 화려해보이지만 리스크가 너무 크다. 예를 들어 소로스의 경우 1987년 블랙 먼데이 당시 한 주간 8억 4천만 달러(9200억원)의 손실을 봤으며 1998년 러시아 모라토리움, IT버블 붕괴 때에도 역시 천문학적인 손실을 맛보았다. 2000년대 들어서 대형 기관투자자들의 헤지펀드 투자가 늘어나면서 자연히 헤지펀드들의 투자 스타일 역시 (안정형으로) 바뀌고 있다.[23] 초반에 드러켄밀러는 15억 달러 (한화 약 1조 6000억 원)를 공매도 할 것을 제안했지만, 소로스가 기회는 확실히 잡아야 한다며 '''미친''' 레버리지를 사용해 100억 달러 (한화 약 11조 원)를 공매도했다. 만약 드러켄밀러의 통찰력과 소로스의 대범함 중 하나라도 없었다면 이 세기의 거래는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24] 1981년 헤지펀드 시장에 처음 들어온 드러켄밀러는 독자 펀드를 이끌다가 1990년 퀀텀펀드에 합류, 1992년 9월 4일의 파운드화 공매도 작전을 주도적으로 입안했다. 조지 소로스는 드러켄밀러가 입안한 이 작전에 동참하여 영국을 골로 보내버리고 엄청난 수익을 챙겼다. 그러나 1998년 LTCM, 2000년 IT버블로 인해 퀀텀펀드가 엄청난 손실을 보자 책임을 지고 작전 입안자인 드러켄밀러는 퀀텀펀드를 떠났다. 이후 드러켄밀러는 퀀텀펀드에서 은퇴(2001년)했고, 마이크로소프트, 메리어트호텔 등 미국 유력 대기업들의 사외이사를 맡다가 2016년 자기 재산(약 44억 달러)을 기반으로 기존 운용하던 듀케인 캐피탈 (Duquense Capital)을 운용하다가 2017년 완전히 현업에서 은퇴했다. 이후 퀀텀펀드는 보수적인 운용을 하여 안정적인 수익 전략으로 돌아선다.[25] 어디까지나 의외로다. 소로스는 당시 한국에 거의 투자를 하지 못했다. 1998년 LTCM 파산으로 조지 소로스 퀀텀펀드의 자산 중 20%가 유치되있어서 한국에 투자 접근 자체를 못했다고.이후 한국 부동산에 약간 투자했으나 2001년 9.11 테러 직후 전부 매각해서 2002년 이후 한국 부동산 상승기를 놓치기도 했다.소로스가 1998-2002 4년 동안 한국에서 벌어들인 수익은 약 1억 달러(1200억 원)로, 소로스 입장에서는 한 끼 식사 수준도 안 되는 푼돈이다. 4년동안 1억 달러니 연간 2,500만 달러(300억 원)씩 벌어들인 정도인데, 수익률로 따지면 연 3% 수준이다. 퀀텀펀드가 투자자들한테 한 약정 수익률(매년 18%)에 훨씬 미달해서 당시 한국 투자를 담당했던 아시아 담당 이사를 소로스가 해임했다고 전해진다.[26] 소로스와는 관계가 없지만 헤지펀드들이 원화를 공격할 기회가 다시 한 번 찾아왔는데, 그때는 왕의 남자의 점심시간 도시락 폭탄 사건으로 포기했다. 이 이후로 미국은 한국을 환율조작 감시대상국으로 보고 정부의 환율방어 정책에 주의를 주고 있다.[27] 여담으로 이 주식투기는 한국인 여대생의 증권사 해킹과 일본인 대학교수의 주식자동매입 프로그램, 그리고 큰손급 개인주식투자가의 투매에 의해 역관광당한다.[28] 위에서 설명된 태국 바트화 공격 이야기가 등장한다.[29] IMF때 한국에서 벌기는 커녕 한국인들이 도와달라고 하는 바람에 명성도 유지해야 했기에 곤란했다고 한다. IMF위기 당시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가 조지 소로스 등과의 친분을 언급한 내용과 연결된다.[30] 아베노믹스가 한동안 효과적으로 보였던 가장 큰 이유다. 닛케이가 반대로 미친듯이 쳐올라서 20000선을 넘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