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역사/목록/야구

 






1. 등재 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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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국내



2.1. 팀



2.1.1. 두산 베어스


  • 1982년 한국시리즈 도중 민간인과의 난투극: 당시 박철순이 심각한 허리 부상으로 출장이 불투명한 상황에서 삼성 라이온즈와 한국시리즈 에서 맞대결에 임했다. 그리고 1차전은 3대 3 무승부, 2차전은 0대 9로 대패하며 팀 분위기는 더욱 악화된 마당에 엎친데 덮친다고 3차전을 위해 서울로 올라가기 직전 술자리를 가진 윤동균, 김우열, 계형철, 김유동 등 고참 선수들이 대구의 호텔 나이트클럽 에서 민간인과 시비가 붙어, 호텔 앞마당에서 한바탕 난투극을 벌인 적이 있었다. 이 일은 OB 프런트가(특히 언론인 출신이던 박용민 단장이) 백방으로 뛰어다닌 덕분에 언론 보도는 타지 않았지만 당시 현장에 있었던 이광환 코치와 선수들은 시리즈 내내 사직서를 품고 경기에 나섰다고 한다.
다행히 OB가 극적으로 원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덕에 당시에는 완전히 묻혀버린 사건이 되었다.
  • 1984년 시즌 삼성 라이온즈 와의 전쟁같은 신경전: 1983년 시즌 종료 후 김영덕 감독이 OB에 사표를 던진 지 3일 만에 삼성 라이온즈 감독으로 옮겨간 것이 사건의 발단이었다. 개막 후 첫 맞대결 때 OB의 신인포수 배원영이 김영덕 감독이 가장 싫어하는 별명인 변태를 외쳤다가 김감독에게 뺨을 맞은 것을 계기로 양 구단 간의 감정이 확 상하며 전기리그 내내 세 차례에 걸쳐 경기 중 난투극이 벌어졌다. 그 과정에서 삼성 내야수 오대석이 병살 플레이 처리 도중 OB 이홍범의 스파이크에 허벅지를 찍히는 치명적인 부상을 입었고, OB의 관리이사로 임명된 서영무 전 삼성 감독이 양 팀의 신경전으로 골머리를 앓다 결국 뇌졸중으로 쓰러져 3년 뒤 세상을 떠나는 비극이 벌어졌다.
  • 1984년 통합 승률 1위를 하고 가을야구 실패: 당시 가을야구는 전기리그 1위/후기리그 1위가 한국시리즈에 직행하는 제도였다. 이 해 OB는 전체 승률 1위를 했지만 리그 1위를 한번도 못해서 가을야구 진출에 실패했다. 참고로 이 제도는 1985년에 한국시리즈 자체가 생략되는 등 맹점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뒤 수정을 거쳐[1] 1989년부터 지금과 같은 제도로 변경되었다.
  • 1999년 통합 승률 1위를 하고 한국시리즈 진출 실패: 이 시즌에 KBO에서 양대리그 제도가 신설이 되었는데 두산은 전반기 시점까지 선두 롯데에 6게임차 뒤쳐져 있었으나 시즌 막판까지 선두였던 롯데를 추격하여 시즌 마지막 한 경기 남겨두고 기어이 롯데와 공동 1위를 기록하고 마지막 경기인 롯데전을 끝내기 안타로 승리하여 무려 6게임차를 뒤집은 1위를 기록하였으나, 정작 플레이오프에서 한화에게 0:4라는 스코어로 스윕당하며 한국시리즈 직행에 실패하였다. 반면에 정작 2위로 내려갔던 롯데는 삼성과 7차전까지 가는 혈전끝에 한국시리즈에 올라갔기 때문에 99년하면 대부분 팬들이 롯데의 플레이오프 혈전이나 한화의 우승을 말하는 반면에 이쪽은 어떠한 언급도 되지도 않고 완전히 뭍혀버렸다...
  • 1988~94년 암흑기: 1993년의 3위 기록을 제외하고 7년동안 여섯 시즌이나 가을야구를 못했다. 1990~91년에 당시까지는 삼청태 밖에 기록한 적이 없는 2년 연속 꼴찌를 기록하는가 하면, 한국프로야구 최초의 시즌 80패 기록도 달성하는 등 안습의 연속. 그 동안의 성적은 5578537이다.[2] 557은 7개 구단 체제에서 찍은 것. 즉, 뒤에서 3311462이다. 이 시기에 모기업도 낙동강에 페놀을 풀어놓는 바람에 이미지가 급격히 나빠지고 말았다.
  • 1994년 항명 파동 사건
  • 2009년 퀸즈데이 유니폼: 나름대로 괜찮은 디자인이었으나 상대팀에 위압감을 주지 못한데다 이 유니폼을 입고 이기는 날은 한 번도 없었다. 2010년에도 핑크데이 유니폼을 입는 줄 알았는데 그저 선수들이 모델로 등장했었으며 시즌 중에는 입지 않았고 팬서비스 마케팅이었다.
  • 2011 시즌: 당시에는 우승 후보로 손색이 없었으나 막상 뚜껑을 열자마자 선발진 붕괴, 임태훈 - 송지선 사건, 김경문#s-1 감독의 중도 사퇴 등의 여러 가지 악재로 인해 5위에 그치며 2007년부터 이어온 포스트시즌 5년 연속 진출에 실패했다.
그나마 15승 투수를 2명이나 배출했기도 하고, 김광수 감독대행이 남은 시즌을 수습하였다.
  • 김경문 감독 시절 포스트시즌 연패 징크스: 2004년, 2009년 플레이오프 3연패, 2005년, 2007년, 2008년 한국시리즈 4연패. 특히 김성근 감독 시절의 SK 와이번스와 맞붙은 2007~2009년의 3년 연속 선승 후 역스윕은 '호구 오능가'란 유행어로 탄생하고 말았다.
  • 10점차까지 벌려놓은 경기를 대역전패
  • 한 투수가 2경기 연속 끝내기 홈런
  • 같은 투수가 포스트시즌에서 고의사구 상황에서 폭투 및 1이닝 3폭투
  • 한국시리즈 초반 2연승준우승 2회
  • 2014 시즌: 준우승한 감독을 내치고 을 잡지 않아서 전력 유출이 생기는 등 안 좋은 의미로 시즌을 시끄럽게 시작했을 뿐더러 초반에는 별탈없이 순항하고 오월두산을 이번엔 비껴갔지만 투타 밸런스가 붕괴된 6월에 부진하면서 급추락하면서 4강권에 급격하게 멀어졌다. 이후 롯데, LG, SK와 힘겹게 4강 싸움을 했지만 결국 3년만에 광탈 확정. 설상가상 영원한 앙숙이자 라이벌인 LG 트윈스에게 11년만에 밀리면서[4] 이래저래 두산팬 입장에서는 잊고싶은 최악의 한 해가 되고 말았다.
    • 투수진이 경기 3이닝 연속 타자일순
    • 크보 역대 한 경기 최다 안타 허용[3]
  • 타선이 경기 6이닝 연속 더블 플레이 및 번트 삼중살: 거기에 이 날 kt의 선발이었던 엄상백 단 한명에게 당한 거라 더욱 놀라울 따름이다.
  • 한국프로야구/2013년 포스트시즌: KBO 리그 심판 최규순 금전요구 사건.
  • KBO 최초 한만두 허용[5]
  • 2018년 한국시리즈: 정규시즌은 그야말로 압도적인 페이스로 2위 SK 와이번스와 14.5게임 차로 우승하면서 한국시리즈에 직행했다. 하지만 정작 한국시리즈에서는 플옵에서 넥센 히어로즈와 5차전까지 혈전을 벌이고 올라온 SK에게 2승 4패로 무력하게 업셋당하며 준우승을 당했다. 2017년 한국시리즈는 무기력했지만 그래도 대부분 납득은 하는 편이지만 이 한국시리즈는 두산팬들 입장에서 최악의 금지어 한국시리즈가 되고 말았다.
  • 2020년 6월 14일
2020년 6월 13일 한화 이글스와의 대전 원정경기 도중 우천으로 인해 서스펜디드 게임이 선언되어 다음 날인 14일 속개되었는데, 전경기까지 18연패를 당하고 있던 팀에게 투수는 사사구와 폭투를, 타자는 찬스에서 삼진을 연발하다가 결국 9회말 투아웃에서 무명 노태형에게 끝내기안타를 내주어 한화의 19연패를 저지(?)하고 말았다. 두산은 이 패배의 충격을 떨쳐내지 못하고 14일 본경기에서도 2대3으로 패배하여 2020 시즌 첫 연패의 수모를 당했다. 뿐만 아니라 추석연휴인 9월 30일과 10월 1일 대전 한화전에서도 2경기 연속으로 10점 이상 내주며 대패하는 등 2020 시즌 대전구장 2승6패를 당해 한화에게 최고의 영양간식으로 전락하는 수모를 당했다. 그나마 관중이 오랜만에 찾아올 수 있던 10월 13일부터 15일까지의 3연전에서 관중들 앞에서 스윕을 거두면서 최소한의 자존심은 회복했다. 더욱이 이 기록(?)이 각별한 점은 35년 전(1985년 KBO 리그), 그 유명한 삼미 슈퍼스타즈의 18연패 기록을 끊어준 팀이 MBC 청룡이라는 것.
  • 감독
    • 윤동균 전 감독: 선수로서는 프랜차이즈 스타였지만 위의 항명사건이 일어나는데 선수들에게 원인을 제공한 인물이며 동시에 자신의 등번호인 10번이 영구결번에서 해지되는 안습한 일이 벌어졌다.
    • 김경문 전 감독: 8년[6]간의 감독 시절 성적은 3위 3번에 2위 3번으로 괜찮아보였지만, 그 과정은 수많은 투수들을 불펜으로 때려박는 혹사였고 코시 전적은 에 3승 12패에 잠실에서는 8전 8패를 하는 등 정말 중요한 순간에 무기력한 모습을 보였다. 이 결과 두산의 불펜진은 상당히 빈약해졌고 결정적으로 2011년에 도망가다시피 사퇴 해버려서 팬들에게 이미지가 급격히 추락, 2015년에 두산이 우승을 한 뒤에는 그냥 우승의 기운을 막은 3명중 대표[7]라고 더더욱 까이고 있다.
    • 김광수 감독대행: 위의 윤동균과 마찬가지로 프랜차이즈 스타. 김경문 사퇴 이후 남은 시즌 동안 팀 수습을 했지만 팀을 4위로 올려놓지 못하고 시즌이 끝나자마자 김진욱에게 정식 감독을 넘겨야 했다.
    • 김진욱 감독의 잇단 트레이드 및 이적: 용덕한, 이성열, 김승회 등 잇단 트레이드 및 이적으로 인해 팬들로부터 비난을 받았다.[8] 그래도 운이 좋았는지 일단 2012년의 성적은 괜찮았었고, 2013년 시즌의 5월부터 6월 중순까지는 처참했지만 그나마 선발 로테이션을 재정비하면서 7월달부터 안정적인 4강권에서 자리잡았고, 비록 준우승했지만 결국 2013년 한국시리즈에 진출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결국 프런트에 의해 감독직에서 경질되었다.
    • 송일수 전 감독: 김진욱 경질 후 2014년 새로운 두산 감독으로 임명됐지만 여러모로 막장 운영을 하며 팀은 가을야구 진출에 실패. 결국 1년만에 경질. 그리고 후임 감독이 팀을 추스리면서 2년 연속 우승 및 3년 연속 한국시리즈를 이끌었던 터라 더더욱 비교가 된다.
  • 김태룡 현 단장: 한국시리즈 준우승 후 잇단 트레이드 및 베테랑 선수들의 내부 FA 포기 등으로 팀의 주요 전력을 박살낸 원흉. 하지만 아직 2014 시즌도 시작되지 않았는데 선수 이동만 보고 섣부른 평가를 하는 것은 무리라는 의견도 없지 않다. 그렇게 시작한 2014 시즌은 전임 감독인 김진욱이 만든 투수진이 니퍼트를 제외하고 모조리 박살났고 두산도 한 때 2위였지만 후반기에 추락하면서 송일수 감독과 함께 까이고 있다.
  • 코치
    • 박철순: 코치 첫 시즌인 1997시즌은 음주운전으로 면허정지를 먹었으며, 얼마 못가서 2군에서 구타사건이 터지자, 선배라는 이유로 폭력을 행사한 소상영을 두둔하다가 사임했다. 물론 선수로는 영구결번에 레전드 대우를 잘 받고있다.
  • 선수
    • 김명제: 음주운전 사고로 인해 10시간 동안 대수술 받고, 하반신 마비로 인한 장애 4급 판정을 받아 은퇴했으며 현재는 휠체어 테니스 선수로 활동중이다.
    • 김동주: 사생활 문제. 선수로서는 역대급 3루수였으나 인간으로서는 전혀 존중받지 못할 인물이다. 항목 참조.
    • 문동환: 롯데로 FA이적한 정수근의 보상선수로 지명, 두산 입단 3시간만에 채상병과 맞트레이드 됐다.
    • 윤승균: 강간 사건을 일으켜 집행유예를 선고받았고 이후 1군 복귀 시도를 계속했지만 팬들의 반발로 무산되었다. 그러나 KBO가 아무런 징계를 내리지 않았고 2008년까지 두산에 붙어있었다. 뒤에 KIA에서 입단 테스트를 받았지만 이 일이 알려지면서 다시는 야구판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 다니엘 리오스: 해외 진출이후 약물을 복용한 것이 걸렸다.
    • 이종민: 뺑소니 사고를 저질렀다. 그것도 맨정신무면허로 차를 몰다가 신호위반을 하고 단속하던 의경을 차에 매단채로 질주해서 결국 사망에 이르게 했다. 한국프로야구 역사상 유일하게 현역선수로서 살인 용의로 체포되어 형을 치렀다. 그러고도 팀은 그가 형을 마치자마자 복귀시켜서 2002년까지 선수생활을 하게 했다.
    • 임태훈: KILL 라인의 일원으로 혹사로 인해 피해를 봤던 선수였으나, 송지선 사건 이후로 김경문 전 감독의 실책 중 하나이자 안일한 선수 관리가 어떤 결과를 일으키는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되었다.
    • 정재호: 신인이었던 1990년 8월 25일 OB 대 빙그레전 8회말 대타 진상봉의 타석에서 투수 김진규가 던진 초구 가운데 높은 공에 미트를 빼면서 박찬황 구심의 마스크에 정통으로 날아가게 하여 퇴장당했고 10경기 출장정지와 벌금 20만원을 부과받았다. 구단에서는 무기한 출장정지 및 연봉지급 정지라는 중징계를 내렸다.
    • 용덕한: 양의지가 대활약하기 전까지는 그럴듯하게 활약했으나 2011년 5월 27일 경기와 그 다음날 경기를 크게 날려먹고, 결국 다음 해 롯데 자이언츠로 트레이드 되었는데 자기 역할을 충실하게 해내더니 준플레이오프의 맹활약으로 친정팀에게 비수를 꽂았다.
    • 이용찬: 2010년 음주뺑소니 사고를 저질렀고 2014년 약물복용으로 적발되었다. 그나마 약물문제는 피부과 치료목적인게 드러나서 어느정도는 쉴드가 가능하지만[9], 음주뺑소니는 그런거 없다.
    • 라몬 라미레즈: 두산판 매니 아이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 이규환: 2012년 드래프트로 지명된 좌타 유망주였으나 2012년 1월 10일 신인 선수 교육장에서 6층에서 추락해 실족사했다.
    • 노경은: 2009년 팬들과의 카트라이더 시비로 논란이 되었고, 이후 각성하여 팀의 에이스급 선발로 자리매김했으나 부진이 길어지더니[10] 2016년 임의탈퇴 번복으로 팀 분위기를 제대로 망쳤다. 멘탈이 좋지 않은것도 여실히 드러나 팬들에게 단단히 찍힌 상태. 결국 사실상 롯데로 쫓겨나다시피 트레이드 되었다.
    • 트로이 닐 - 두산 베어스, 아니 KBO 역사상 최악의 외국인 선수. 돈보다 야구를 사랑해서 한국에 왔다라는 희대의 개드립을 펼쳤고 거기다 덕아웃에서 나 정도 선수는 해도된다라는 말을 남기며 덕아웃에서 담배를 피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성적으로 퇴출되어도 시원찮을 판에 희대의 막장 사건을 터뜨리고 만다. 당시 두산의 용병투수였던 마이크 파머가 퇴출되자 송별식으로 둘이서 술집에 술을 먹으러 갔는데 거기서 한국인들과 시비가 붙어서 싸우게 된다. 한 한국인 여성이 닐의 엉덩이를 만지자 이에 닐의 부인은 여성에게 술병을 던졌고 그것이 싸움으로 번지게 된것이다. 닐은 당구큐대를 휘둘렀으며 결국 경찰서로 가게된다. 그리고 이건 용병 최초 1호 사건으로 기록에 남는다.
    • 잭 루츠: 2015년 시즌을 앞두고 당시 약점으로 꼽히턴 1, 3루 코너를 책임질 선수로 기대를 받았으나, 30타석에 들어서면서 wRC+가 -8.2라는 어마어마한 성적을 기록하고 퇴출당했다. 참고로 -8.2의 wRC+는 30타석 이상 들어선 외국인 타자들 중 최하. 그 뿐만 아니라 멘탈 역시 심히 좋지 않아서 김태형 감독이 루츠의 방출 이후 인터뷰에서 루츠의 멘탈을 디스했고, 김현수는 루츠에 대해 이름만 들어도 짜증날 정도라고 말했다.
    • 지미 파레디스: 2018시즌 KBO리그 최악의 타자. 장타 포텐셜과 수비 유틸리티라는 점을 높게 사 데려왔으나 애초에 영입 시점부터 고질병인 선구안 때문에 치바 롯데 마린스에서 폭망한 것을 보고 비관적으로 보는 팬들이 많았으며, 아니나 다를까 71타석에서 wRC+ -1.0을 기록하는 최악의 타격을 보여줬다. 참고로 이 wRC+는 50타석 이상 들어선 외국인 타자들 중 최하. 그렇다고 유틸리티가 된다는 수비가 좋냐 하면 그것도 아니라서 2루와 3루 자리는 1경기도 출전하지 못했고 우익수 자리에서의 조정 RAA는 15경기 뛰면서 -1.62를 기록할 정도로 안 좋았다. 결국 방출을 코앞에 두고서는 1루수랑 지명타자 자리에서 주로 기용되었는데 1루랑 DH는 수비 부담이 적은 만큼 타격이 중요한데 파레디스의 타격은 그말싫 수준이니... 더 웃긴건 그러고도 루츠보다 한 달 가까이 더 기회를 받았고, 꾸준히 삽질하며 1위를 질주하던 두산의 자체 밸런스 패치(...)라는 웃지 못 할 이야기까지 나왔다.
    • 스캇 반 슬라이크: KBO 역사상 최악의 대체선수. 파레디스를 웨이버 공시 한 뒤 두산 베어스에서 새로 영입한 외국인 타자로 LA다저스에서 류현진과 한솥밥을 먹었다는 사실로 두산베어스 팬들에게 기대감을 심어 주었으나... 현실은 파레디스 백인버전. 7월 8일부터 8월 15일까지 반 슬라이크가 12게임에 나와 세운 기록은 39타수 5안타에 타율 0.128 5안타 1홈런 4타점으로 파레디스보다도 못한(...) 성적을 거둔 채 9월 20일에 웨이버 공시되었다. 그리고 두산은 2019년에 호미페를 데려옴으로써 외인타자에 대한 아쉬움을 풀 수 있었다.
    • 김재환: 세계 최초도핑 징계 전력자로써 시즌 MVP를 수상한 선수.

2.1.2. 롯데 자이언츠


  • 2001~2007년 암흑기, 8888577: 2001년의 최하위는 온갖 악재가 겹친 가운데 맞은 불운이라고 할 수 있지만(4위와 단 2게임 차) 그 이후는...
    • 우용득 전 감독: 2001 시즌 중반 김명성 감독의 갑작스런 별세로 인해 감독대행을 맡아 8위, 2002 시즌에는 정식 감독이 되나, 투자에 소극적인 구단과 타선을 이끌었던 펠릭스 호세의 이중 계약 파문 등 어수선한 팀 분위기로 인해 최하위를 전전하고 16연패를 당한 뒤 6월에 해임당한다. 하지만 다음 감독이었던 백인천의 임팩트에 묻혀버리게 되어 말 그대로 잊힌 감독이 되었다. 한 가지 의의가 있다면 당시 무명선수인 이대호를 투수에서 타자로 전향시켰다는 것.
    • 백인천 전 감독: 재임 기간인 2002~3년 연속 최하위. 이해하기 힘든 기행을 보이며 팀 선수층을 끝장내버리면서 후임 감독들에게도 수습하기 힘든 피해를 주어 팀이 4년 연속 최하위를 찍는 데 가장 큰 영향력을 주었다. 이로 인해 LG이순철, 한화김성근과 함께 감독도 아닌 금지어로 등극되었고, 그 후 롯데에는 꼴데란 별명이 붙였다.
    • 2005년 1위에서 5위로 추락.: 초반에 상위권에서 놀다가 9연패를 찍고 추락했다. 재미있는 것은 같은 기간동안 9연승한 팀도 있었다. 9연승한 팀은 한화로, 결국 PO까지 올라갔다.
  • 이종운 전 감독: 시작부터가 프런트의 낙하산 감독이라는 추측이 있었다. 더군다나, 이해할 수 없는 투수 기용과 좌우놀이, 손목이 부러진선수를 수비에 내보내는등 덕분에 제 2의 백인천이라고 까인다. 결국 2015년 시즌을 8위로 마감하고 10월 8일 전격 경질. 다만 이 때 프런트에서 해고 통보를 전화로 했던 것은 비판받고 있다.
  • 페넌트레이스 1위 경험 전무: 1984년 전,후기 리그 시절에 후기리그 우승을 일구었으나 통합리그 우승이 없다고 까인다.
  • 2009년 5월 사직구장 꼴리검 난입 사건.
  • 롯데표 마스코트 소주 처음처럼: 롯데가 두산의 주류 부문을 인수한 후 처음처럼을 모티브로 만들었는데, 소주를 마스코트로 삼은 건 뭐 했는지 같은 마스코트인 갈매기 3총사(누리, 아라, 피니)에 밀려 존재감이 없었으며 1년만 쓰고 짤렸다. 그 이후 넥슨크레이지 아케이드 캐릭터들이 대신 자리를 차지하면서 완전히 묻혔다.
  • 단일 시즌 특정 팀 상대 최다 패: 2003년 대 KIA17패(1승 1무).
  • 특정 팀 상대 최다 연패: 2002~03년 대 KIA전 18연패.
  • 특정 투수 상대 최다 연패: 1988~95년 해태 선동열 상대로 8년간 20연패. 그 마저도 선동열 상대로 이겨서 최다 연패가 끊어진 게 아니라 선동열의 일본 진출 후 은퇴로 기록이 더 이어지지 않게 되었다.
  • 역대 한 경기 최소 관중 2위: 2002년 10월 19일 한화69명. 이 날 롯데 모자나 유니폼 등을 입고 오면 무료 입장이었지만, 그 69명 중 롯데 모자나 유니폼 등을 입고 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이 날 경기에서도 패하여 97패를 달성, 99년 쌍방울 레이더스에 이어 역대 한 시즌 최다 패 타이를 기록했다.
  • 버스 뒤집기: 김용희 감독 시절 연패할 시에는 화가 난 관중들이 버스를 뒤집는 경우가 많았다. 스코어 8:1로 앞서가다 8:9로 역전패한 게 예.
  • 감독 청문회 사건
  • 1985년 전후기 통합 준우승: 삼성의 통합 우승으로 인해 상대적으로 묻혔다. 더 안습한 것은 많은 이들이 삼성의 통합 우승을 알고도 롯데의 전후기 통합 준우승은 모른다.
  • 1988년 트레이드 사건: 선수협 결성에 대한 보복으로 롯데의 최동원-오명록-김성현과 삼성의 김시진-전용권-오대석-허규옥, 뒤이은 김용철-이문한장효조-장태수(투수)의 징계성 트레이드. 5:6 트레이드로 알려져 있지만 엄연히 시차를 두고 진행된 트레이드다.
  • 투수진이 한 이닝에 사이클링 피홈런.
  • 한 경기 번트 실패 병살타 두 번 기록.
  • 선수
    • 고효준: 금지어 前 감독 이 '넌 선수도 아니야'라고 하면서 독설을 퍼부었고, 구단에서 실시한 메디컬 테스트에서 심장 이상이란 진단을 받아 방출당했다. 이후 SK에서 전천후로 활약했고, 2011 시즌 후 정상적인 몸으로 공익 근무로 떠났다가 복귀했다. 이후 트레이드로 KIA 타이거즈에 갔다가 2018시즌 2차 드래프트를 통해 16년만에 롯데로 돌아왔지만 망했다.
    • 스캇 리치몬드: 롯데판 매니 아이바. 스프링캠프 도중 무릎 부상으로 인해 시즌 전에 퇴출당하고 말았다. 그를 대신하여 영입한 게 크리스 옥스프링. 어찌 보면 전화위복이 되었다.
    • 손민한(2010년 이후): 8888577 때는 레전드 그 자체. 하지만 2010년 이후 한 경기도 출장하지 않으면서 12억 원을 제대로 먹고 튀었다. 선수협 회장으로 재직하면서도 거하게 해먹었다는 혐의로 고소 크리까지 당했으나 선수협에 관련해서는 무혐의로 끝났다. 그러나 이로 인해 이미지가 완전히 추락하였다. 다행히 NC에서 부활하는 데 성공했지만 워낙 팀과 모양새가 좋지 않게 결별한지라…
    • 정수근: 40억 먹튀. 거기에 음주 관련 사고를 여러번 치면서 팀 분위기를 망쳤다.
    • 이상목: 4년간 겨우 22승을 올리며 거하게 말아먹었다. 그 중 12승은 2006년 1시즌에 몰아서 올린 것이었다.
    • 차명주: 계약금 5억 주고 데려왔더니, 고질적인 부상덕분에 3년간 3승 8세이브라는 초라한 성적을 올렸다.
    • 나승현: 이른바 류거나. 수술 전력이 있던 류현진 대신 영입했고, 첫 시즌에는 16세이브를 기록하며 마무리로 나름대로 괜찮은 모습을 보였으나 이후 완벽하게 망했다. 무엇보다도 그 나름대로 괜찮았다는 성적도 류현진에 비할 바는 절대 아니었다.
    • 김수화: 10억 받고 입단한 특급 신인이었지만, 7시즌 동안 한 것도 없이 허송세월만 보내다가 넥센으로 이적했다.
    • 임훈: 2011 시즌 후 FASK에 이적한 임경완의 보상 선수로 지명해놨더니 롯데가 정대현을 FA로 영입하면서 20일만에 정대현의 보상 선수로 다시 돌아갔다. 규약상 이런 경우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이 전혀 없는지라 잘못된 일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황당한 경우. 결국 규약이 개정되어 이미 보상 선수로 지목되어 이적한 선수는 자동 보호가 되도록 바뀌면서 더 이상 이런 경우는 발생하지 않게 됐다.
  • 박정태: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 강민호삼성 라이온즈 이적: 부산과 롯데 자이언츠에서 강민호라는 상징성이 최동원, 이대호박정태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상징성과 존재감 인기가 매우매우 큰선수다. 그런선수를 프런트의 삽질로 놓쳤다. 예를 들어, LG 트윈스로 치면 박용택, KIA 타이거즈로 치면 양현종, 한화 이글스로 치면 김태균, SK 와이번스로 치면 최정, 키움 히어로즈로 치면 박병호 정도의 영결급 선수를 놓친것이다. 결과적으로 롯데팬들의 뒷통수에 대못을 박았다.
  • 선수의 등번호 관련
    • 손아섭의 68번: 68번을 달았던 2009년에 매우 부진했고, 결국 31번으로 등번호를 바꿔서 지금도 활약하고 있다.
    • 이정민의 11번: 최동원11번이 영구결번이 되면서 등번호를 바꾸어야 했다. 결국 현재는 45번을 달고 있다.
  • 코칭 스태프
    • 장명부: 1990 시즌 중 팬을 폭행하여 구설수를 빚음.
    • 양상문: 코치 시절 한정. 2019년부터는 감독직을 맡게 되었으나 성적부진으로 단장과 함께 자진사퇴했다.
  • 2010년 후반기 사직 야구장의 잔디 상태.
  • 2013년 시즌: 최고 승률 포스트 시즌 탈락 기록 경신(0.532). 이는 두산 베어스가 2001년에 3위 우승하면서 기록한 승률보다 무려 2푼이 높다. 게다가 5년 연속 경신하던 100만 관중 달성 실패는 물론이고 사직 참사.가 발생. 이는 김응용, 선동열, 이만수 급은 아니지만 막장 경기 운영에서는 두각을 나타낸 것, 타자들이 단체로 부진한 일, 작년의 반토막 난 관중 수 와 계속되는 매진 실패 등....
  • 2014 시즌: 2년 연속 흑역사. 롯데는 어떻게 7년만에 7위가 되었나 하지만 순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 특정 요일 최저 승률: 2014시즌 화요일 경기 전적이 1승 1무 18패 즉, 승률 5푼에 불과하였다. 게다가 2014 시즌의 유일한 화요일 승리는 두산과의 506 대첩. 게다가 더욱 비참한 것은 2014년 마지막 화요일 경기는 넥센전이었는데, 앤디 밴 헤켄의 20승을 조공하였다. 서건창프로야구 최초 시즌 200안타, 강정호유격수 최초 시즌 40홈런까지 이 경기에서 조공할 뻔한 것은 안자랑.[11] 게다가 화요일을 뺀 승률은 5.24에 이르고 화요일 승률만 아니었어도 4위는 손쉽게 가져갔을 것이다.
    • 롯데 자이언츠 선수단 CCTV 사찰 사건: 롯데의 2014 시즌이 흑역사가 된 가장 큰 이유. 위의 OB 베어스 항명파동을 뛰어넘는 KBO 역사상 최악의 흑역사.
  • 롯데 자이언츠/2015년: 25홈런 이상 4[12]과 제대로 된 을 가지고도 롯데시네마를 찍는 추태를 보이고, 마지막으로 주어진 포스트시즌 진출 기회마저 대놓고 걷어차며 8위. 이종운 재신임 언급 기사가 뜬 날부터 유일하게 상대전적이 동률이던 포스트 시즌 진출 확정 팀 상대로 4전 4패가 포함된 1승 8패로 대차게 말아먹으며 5강권으로 언급된 4팀 중 가장 먼저 탈락했다. 이후로도 2패를 추가 적립하며 8위로 순위 고정. 거기에 골든글러브 획득이 당연시되던 두 명의 후보압도적인 표 차이로 수상 실패했다.
  • 손아섭황재균의 역대 최초 한 팀에서 한 해 포스팅 2명 연속 무응찰.
  • 2016시즌 옆 동네 동생 팀 NC 다이노스를 상대로 상대전적 1승 15패
  • 2019시즌: 4월 7일 사직 한화전 3회초 20타석 16실점 13피안타.[13] 그것도 모자라 지성준에겐 KBO 첫 1이닝 3출루까지 헌납[14] KBO 통산 최다 기록들을 4가지나 갈아치운 그야말로 짧고 굵은 레전드 경기. 하지만 이 경기는 시작에 불과했고 이후 롯데는 무서운 속도로 추락하면서 KBO 역사상 최초의 끝내기 낫아웃, 세계 프로 스포츠 역사상 최초의 연봉 1위팀의 꼴찌, 신임 감독의 1년만의 사퇴, 80, 90, 00, 10년대에 모두 꼴찌를 경험한 팀, 세계 프로야구 역사상 최초의 100폭투 달성 쓰레기장으로 변해가던 최동원 상의 실태 등 온갖 막장을 보인 끝에 멸망했다. 여기에 주축 선수 들의 팬 서비스 논란까지 터지면서 더더욱 욕을 먹었고 2007 시즌 이후 최초로 1경기 평균관중 1만명대까지 붕괴된 2002년을 뛰어넘는 흑역사가 되었다.
  • 2020시즌 : 역대 한팀 최다 병살타 기록(148개)을 갈아치웠고, KBO리그 역대 최초 전 구단 상대 끝내기 패배라는 불명예 기록을 썼다.

2.1.3. 삼성 라이온즈


  • 1991~92년 3-4위: 이른바 성큰 강점기로서 20세기버전 멍게강점기. 아래의 556보다도 팬들에게 인기없던 시대이자 556의 서막을 알린 시대. 이 무렵 야구계 최고의 명장중 한명으로 추앙받았던 김성근에 전년도 준우승팀이라는 어찌됐건 리그 최상위권 전력의 선수들, 거기에 원하는 트레이드는 다 해주는 일단 돈질로는 리그 최고의 프런트가 하나로 뭉쳤지만 결과는 그야말로 참혹했다. 자기주장이 엄청나게 강한 김성근이 한국시리즈 우승만 못해봤을뿐 이미 이기는 팀컬러가 정착된 팀을 자기스타일에 맞춰보겠다고 하나부터 끝까지 바꾸겠다고 나섰다가 가장 기본인 선수단 장악부터 완전히 실패한 시대이다. 우선은 트레이드 해온 나이많은 자기 제자들을 중용하며 이에 출전수 문제로 이만수, 강기웅 같은 프랜차이즈 스타들과 싸우면서 팀캐미를 죽여놨고, 트레이드 해온 제자들은 당연히 저 스타들보다 못했으며 김성근 특유의 작전야구로 전통적으로 강타선을 가진 삼성이라는 팀이 어중간한 타격을 하게 되었다. 투수진은 후에 임창용 저리가라 할 정도로 굴려진 혹사의 대명사 김성길이 선중마를 다 뛰는 등 혹사가 심했으며 팀 캐미는 앞의 이유들로 당연히 망했고 팬들도 응원하는 스타들이 안나오고 성적도 시원찮으므로 발길을 완전히 돌렸다. 이 시기는 작전야구부터 선수 대접까지 멍게 강점기와 유사한 부분이 많은데 이 시기 성적은 그래도 3, 4등이지만 뚜껑을 열면 턱걸이에 가을야구는 광속 탈락이었으며 일부[15]는 이 시기 삼성 전력이 좋지 않았다고는 하나 김성근이 쫓겨난 뒷 시즌인 93년 다시 준우승으로 돌아간걸 보면 전력에 대한 말은 그다지 옳은 변호라 보기 힘들다. 이 93년 이후엔 김성근이 성적도 못내면서 그렇다고 리빌딩을 한것도 아니어서 강제로 리빌딩시기가 되며 아래의 556이 시작된다.
  • 1994~96년 정규시즌 5-5-6위: 2016년이 오기 전까지는 삼성의 나름대로 암흑기(?)였으나, 그래도 이 시기에 관중동원은 좋았다.
  • 2007~2009년(혹은 +2010년) 4-4-5위(+2위): 이른바 멍게강점기라 부르며 일부 선동열 옹호자를 제외한 거의 모든 삼성팬들이 암흑기로 보는 시기. 김한수, 양준혁 등의 고참은 여지없이 은퇴당했으며 선동열의 혹사로 배영수, 임창용, 권오준, 안지만, 권혁, 정현욱, 오승환 등등 이름만 들어도 쟁쟁한 투수들이 모조리 부상과 수술을 경험해야 했으며 그 와중에 임창용은 선동열과 크게 감정이 상해 일본으로 진출 한 뒤 "삼성으로 다시는 돌아가지 않겠다[16]"라는 말까지 했었다. 한마디로 삼성 시절 김성근 감독의 마이너버젼. 거기에 팀 컬러를 번트야구와 선발 불신야구, 1점만 지고 있어도 포기하는 야구로 바꿔버리는 바람에 삼성팬들은 치를 간다. 그 선동렬 옹호자들 조차도 리빌딩에 대해서 옹호할 뿐 이 비판에 대해선 반박조차 제대로 하지 못할 정도. 삼성팬들에게는 제 2 암흑기 혹은 전술한 멍게 강점기라는 별명을 부르며 흑역사 취급하고 있으며, 좀 더 심한 경우에는 2005년, 2006년 우승마저도 돈으로 했다면서 흑역사 취급하는 경우도 있다.
  • 2016년~현재 99688: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더 큰 문제는 미래도 장담을 못한다는 것. 그리고 이 후폭풍으로 인해 감독단장이 교체되었다. 그렇게 시즌이 2017년으로 넘어갔으나 초반에는 정말이지 너무 심각했다. 특히 4월달에는 한달에 4승을 기록했는가 하면 위닝 시리즈를 단 한번도 못 가져갈 정도. 다행히 6월 이후부터 서서히 나아지기 시작했으며 6월 29일에 KIA에 대패를 당하는 등 문제점은 여전하지만 일단 탈꼴찌에 성공하였으나 8월부터 다시 추락하며 구단 역사상 최악의 승률인 3할 9푼대로 9위를 기록했다. 2018년에는 오를 뻔 했으나 0경기차로 아쉽게 떨어졌고, 2019년에는 구자욱 등의 간판스타들이 부진하고 감독도 정신을 못차리며 제대로 말아먹었다. 2020년도 반짝 잘나가나 했지만 김재박 박사의 이론이 완벽히 적중하며 몰락.
  • 유니폼
    • 1982년 시즌에 입었던 빨간색 계통 유니폼: 모 기업인 삼성그룹 - 삼성전자를 대표해 이 색을 잠시 사용하기도 했다.
    • 2016~ 유니폼: 2015년까지 흑역사로 간주했던 빨간색을 다시 넣었으며, 팀의 황금기의 상징이었던 줄무늬 디자인을 버리고 민무늬 디자인으로 회귀하였다. 디자인은 호불호가 분분한 편이지만 하필 출시와 함께 전례 없던 암흑기에 빠지는 바람에 유니폼 가치도 떨어지고 있다. 아예 1983과 같이 포스트시즌을 단 한 번도 못 간 유니폼이 되어가고 있다.
  • 1984년 시즌 OB 베어스 와의 전쟁 같았던 신경전: 상세 내용은 위의 OB 베어스 내용 참조바람. 이를 계기로 삼성은 한국시리즈 파트너로 OB를 피하기 위해 바로 밑의 져주기 게임이란 추태를 벌였다.
  • 1988년 5:6 트레이드 사건: 롯데의 항목과 상동.
  • 사상 초유 코칭 스태프 벤치 클리어링: 1997년 어린이날 대첩 때 엄청난 점수차로 LG가 참패하자 천보성 감독이 미즈노 압축배트 사용 의혹을 제기하며 감정이 악화되어 있던 차에 LG의 조 알바레스 코치가 삼성 벤치를 향해 욕설을 하자 백인천 감독이 달려나가 몸싸움을 벌였다.
  • 경기는 삼성쪽으로 기울고로 대표되는 1999년 플레이오프 롯데-삼성 7차전: 1999년 10월 20일 경기. 경기자체는 명승부로 남았지만 도중에 펠릭스 호세의 홈런으로 삼성 관중들이 라면국물 등의 오물 투척을 시전했고 승부에 큰 오점을 남았다. 게다가 경기도 패배해 버렸다. 경기에 패한 것도 패한 것이지만, 일부 삼리건의 이런 막장 행각에 개념 삼성팬들마저 치를 떨 정도로 그야말로 삼성팬 입장에서는 잊고 싶은 악몽의 경기였다. 특히 이 날 경기 삼성팬들의 난동사건은 CNN에 보도되어 전 세계적으로 망신을 샀으니 삼성팬들에게 더더욱 잊고 싶은 기억.
  • 2004년 연고지 이전 시도: 야구판 잠패. 지방에서는 흥행이 힘들고 야구 활성화를 위해 서울로 이전해야 한다며 대구를 떠나려 했다. 이 때 대구는 진짜 말이 아니었다.
  • 2008년 프로야구 도박 사건: 사실 15~16명이라는 것은 루머로 판명되었고 채태인만 사건에 연루됐지만 큰 파장을 일으킨 것은 사실이다.
  • 2015년 삼성 라이온즈 원정 도박 사건: 삼성 간판급 선수들이 마카오에서 억대 원정도박을 했으며, 김인 당시 구단 사장은 기자 회견을 통해 의혹을 받고 있는 선수를 한국시리즈 엔트리에 제외시키기로 결정했다. 결국 두산에게 한국시리즈를 내주게 되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으며, 박석민을 놓치는데도 간접적인 원인 중 하나 된다. ...
  • 3일 연속 끝내기 패배로 스윕 허용: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고. 이 경기 이후 삼성은 끝도 없는 추락을 맛보게 된다.
  • 강민호 첫 응원가: 쌍두 독수리 깃발 아래서를 개사하였으나 본인이 쓰지 말라 하는 바람에 단명. 이후 만들어진 새 응원가가 좋은 반응을 얻으며 쌍두 독수리 응원가는 흑역사로 남게 되었다.
  • KBO 한국시리즈 관련
    • 2002년 이전까지 한국시리즈에 7번 진출했으나 전부 패배
    • 1986년 한국시리즈에서 있었던 해태 버스방화 사건
    • 1987년 한국시리즈: 전후기 통합 1위로 한국시리즈에 직행했지만, 플레이오프에서 OB를 힘겹게 꺾고 올라온 해태에게 4전 전패로 어이없는 스윕패를 당하고 말았다. 크보 코시 최초의 스윕 기록이며, 더불에 전무후무한 전패준 사례라 더욱 흠좀무.
    • 한국시리즈 12연패(敗)(1986년 3차전~1993년 1차전): 1986년에는 3차전~5차전까지 3연패, 1987년과 1990년에는 모두 4전 전패, 1993년 1차전 패.
    • 2001년 한국시리즈/4차전: 한국시리즈 한 이닝 최다 실점 허용
    • 2010년 한국시리즈: 일찌감치 2위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하여 준플레이오프에서 롯데와 5차전까지 박터지게 싸우고 간신히 플옵에 진출한 두산 상대로 쉽게 3연승으로 끝나지 않겠나 예상되었지만, 의외로 두산의 타격이 대폭발하여 삼성이 크게 고전했다. 3승 2패로 두산을 겨우 따돌리고 한국시리즈에 진출했지만, 오래 기다리고 있던 SK에게 4대0 스윕으로 떡실신, 크게 무력한 모습을 보이면서 삼성 팬들에게 크나큰 실망감을 안겼다. 거기다 하필 마지막 경기도 홈팬들이 있는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에서 패배하여 남의 집 잔치를 열어주자 삼성 라이온즈 갤러리, 대구아재를 비롯한 골수 삼빠들은 2010 한국시리즈는 취소되었다는 드립을 치기도 하였다. 그 후 선동열 감독이 사퇴하고 류중일 감독이 부임한 이후 4년 연속 정규시즌-한국시리즈 통합 우승을 달성하면서 이 한국시리즈는 삼성팬들에게 완전한 흑역사가 되어버렸다.
    • 2013년 한국시리즈: KBO 리그 심판 최규순 금전요구 사건으로 흑역사가 되었다.
    • 2015년 한국시리즈: 정확하게는 2차전부터 5차전까지. 4경기 걸처 7득점 할 동안 28실점, 삼성판 33-4. 도박은 투수가 하고 자숙은 이 했다.[17] 대구구장에서의 마지막 경기가 니퍼트의 승리로 끝나고[18] 4차전에서 선발을 땅겨썼다가[19] 1점차로 패하고, 다음날은 예상대로[20] 원사이드하게 밀리는 등 경기 외적이나 내적이나 지워버리고 싶을 정도로 최악의 시즌 마무리를 했다. 오죽하면 2010년 준우승이 낫다고 할 정도. 하지만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고, 다음 시즌에 구단 역사상 최악의 시즌을 겪고야 마는데...
  • 선수
    • 한국시리즈 통산 최다패: 7패, 최다패전: 3패, 통산 최다피홈런: 6개, 한국시리즈 통산 최다실점: 26점, 한국시리즈 한 경기 최다실점: 12점
    • 한 경기 최다 볼넷: 1984년 9월 4일 해태전 11개, 롯데 이적 후 1989년 4월 14일 OB전 11개.
    • 이만수
      • 강제 은퇴 사건: 한국시리즈 우승을 갈망하던 구단과 많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더 뛰고 싶던, 그리고 마찬가지로 한국시리즈 우승을 갈망하던 선수와의 갈등으로 생긴 비극이다. 그때의 아저씨 팬들은 이만수 강제 은퇴를 생각하면 아직도 치를 떤다고 한다.
      • 본인 보유 한국시리즈 한정 0회 우승, 6회 준우승: 1985년도 통합우승이 있긴 하지만 그 해에는 한국시리즈가 열리지 않았다. 이만수가 없던 삼성이 2002년에 한국시리즈 첫 우승! 그리고 그가SK 감독이 되자…. 삼성이 그를 지도자나 코치, 감독 자리에 앉히지 못했던 것은 다 이유가 있을 지도 모른다.
      • 2003년 국내 복귀 코치 내정 과정: 삼성이 2002년 한국시리즈 우승 후 당초에는 김응용-선동열-이만수 체제로 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당시 시카고 화이트삭스에서 맡고 있던 코치직을 사임한 상태였는데 이게 결국 삼성의 병크로 없던 일이 되면서 본의 아니게 실업자가 되었다. 다행히 화이트삭스 측에서 다시 계약을 하며 이만수는 2005년 월드시리즈 우승반지를 득템했기 때문에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었다.
      • 캔 투척 사건: 1990년 해태와의 3연전 중 2패를 하고 병살타를 친 뒤에 관중석에 날아온 맥주캔을 맞았는데 분에 못이겨 이것을 다시 던졌던 것. 그러다가 1:12,000(!)의 대치상황이 되어 결국 마이크 들고 직접 사죄하고 한달 동안 경기에 출장도 하지 못했고 이미지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21]
    • 김진웅
      • 우완 강속구 에이스로 기대받을 만큼 재능은 뛰어났으나 자기관리 실패로 몰락한 대표적인 사례로 선동렬 감독이 공익에서 전역한 김진웅을 보고 저건 웬 스모선수냐며 디스한건 유명하다. 물론 갈베스의 이탈로 인해 보직이 이동되는 등 이유가 없지야 않지만, 비슷하게 우완 강속구 에이스로 기대받은 배영수의 사례[22] 만 봐도 야만없, 비슷하게 재능은 뛰어났으나 사생활이 별로라는 평가를 받은 노장진과 오상민과 달리 혼자 우승반지도 없는 등[23] 본인에게나 팀에게나 모두 흑역사다.
    • 2015년 삼성 라이온즈 원정 도박 사건 관련
      • 임창용: 전성기시절 애니콜로 불리며 삼성 투수진에서도 독보적인 활약을 보여줬으며, 해외 생활을 하다 복귀한 이후 2015년 정규시즌 최고의 마무리로 활약했으나, 도박사건에 연루되며 징계를 받고 결국 방출되었다.
      • 안지만: KBO 통산 홀드 1위이자 삼성의 프랜차이즈 스타였지만 도박사건으로 한차례 팀에 피해를 주고 한국시리즈 우승을 날려먹은것으로도 모자라서 2016년에는 실력도 퇴보하여 불만 질러대면서 팀을 10위로 꼴아박더니 7월 20일 도박사이트 개설에 연루되면서 21일자로 계약해지 당했고, 지금까지 자신이 쌓아온 모든것을 걷어차버리는 동시에 삼성의 흑역사이자 희대의 먹튀로 전락했다.
    • FA 흑역사
      • 이강철: 삼성의 FA 먹튀 1호. 삼성에서 최악의 성적을 기록하면서 선수 생명이 끝났다고 판단한 김응용 당시 감독이 KIA로 돌려보냈는데 KIA에서 불펜투수로 부활, 몇 년 더 활약했다. 삼성이 배 아팠을 선수.
      • 김동수: 삼성의 FA 먹튀 2호. SK를 거치면서 부활, 현대에서 팀 우승시켰다.
      • 우규민: 65억 먹튀. 불펜으로 나오면 그나마 낫지만 우규민을 불펜으로 쓰겠다고 65억이나 쓴게 아니다.[24]
    • 김승관: 친구를 잘못 둔 탓에 듣보잡이 되었다.
    • 김영진: 삼성 암흑기를 상징할 만한 포수. 이만수 은퇴 뒤로 주전 마스크를 썼으나, 타격은 물론이고 수비마저 신통치 않았다. 1997년 8월 23일에 펼쳐진 쌍방울 레이더스와의 더블헤더 1차전에서 범한 낫아웃 사건은 유명하다. 자세한 건 항목 참조.
    • 김주찬: 관중석 송구를 시전하는 등 기대에 못 미치며 일찌감치 트레이드되었는데 롯데에서 포텐이 터지면서 펄펄 날고 FA대박으로 KIA에 이적했다.[25]
    • 문남열: 등번호 때문에 본의 아니게 까였다. 게다가실력도 영 신통찮았고, 결국 별 활약도 없다가 방출되었다. 그리고 선수 본인 자체도 이미 묻혔다.
    • : 일본에서 여성강간한 죄로 체포되었는데, 문제는 삼성에서 활동한 적도 없는데 일본 언론 실수로 삼성 출신 선수로 잘못 알려져 있단 거다.
    • 박한이: 2001년 삼성 라이온즈 입단 후 19년 동안 삼성에서만 뛴 프랜차이즈 선수로 16년 연속 100안타 기록 및 2016년 2000안타를 기록하여 성구회에 가입하였다. 2018년 FA를 신청하지 않고 삼성과 연장계약을 맺어 은퇴식 및 영구결번이 확정되었으나 2019년 5월 27일 딸의 등교를 도와주고 귀가 하던 도중 접촉사고가 났고 음주운전이 적발되면서 은퇴를 선언하였고 은퇴식과 영구결번은 물건너가버렸다.
    • 신동수: 선수로서 기본이 안된 인성으로 인스타에 막말을 서슴없이 하다 1년만에 방출 당했다. 신동수 SNS 막말 파문 항목 참조.
    • 이상훈: 진갑용 트레이드로 본의 아니게 피해를 본 사례.
    • 이정호: 삼성 신인 중 역대 최고계약금을 받고 입단, 그리고 삼성에서 기록한 승리는 겨우 1승.
    • 이희성, 최광훈: 강기웅의 트레이드 상대. 거기다 트레이드에 반발한 강기웅은 이적을 거부하고 1달 뒤 은퇴했다.
    • 장태수(투수): 이정훈 거르고 장태수. 정작 그렇게 뽑아놓고도 실력이 신통치 않았기 때문에 1년만에 장효조와 함께 롯데와 5:6 트레이드로 롯데로 가버렸다.
    • 정성룡: 입단 때부터 제2의 장효조라는 평가와 함께 기대를 받았지만, 그의 통산 타율은 0.228.
    • 정형식: 2014년 8월 18일 음주운전으로 적발되었다. 이를 구단에게 숨기고 1군에 올라온 것이 걸려서 결국 9월 4일 임의탈퇴 조치되었다.
    • 진갑용: 금지약물 복용
    • 조원수박차: 멍게강점기의 폐단을 나타내는 대표적 사례로 자주 언급된다. 자세한 건 항목 참조.
    • 최창양: 영입 과정부터 말이 많았으며 이적료 포함 7억원을 들였으나, 정작 5년 동안 17승만 올리고 은퇴했다.
    • 외국인 선수 실패:삼성 라이온즈 팀 최악의 수치. 2010년대 암흑기 시절 외국인들 중 러프 빼고 죄다 망했다. 다만 2020년에는 뷰캐넌이 나름 잘하고, 라이블리와 살라디노도 유리몸이긴 했지만 성적 자체는 좋았다.
      • 라이언 가코: 카도쿠라 켄은 그래도 초반엔 잘 했다. 하지만 감독이 기대했던(나믿가믿) 가코는 1홈런 24병살(1, 2군 합쳐서)! 결국 2011년 7월 14일자로 방출되었다.
      • 발비노 갈베스: 2001년 5월 대체용병 자격으로 삼성 라이온즈에 입단한 뒤 전반기에만 10승을 올리는 특급용병의 역할을 제대로 한다. 이런 갈베스의 활약에 당시 우승에 목말라 있던 삼성은 창단 첫 한국시리즈 우승을 꿈꾸나 했는데 2001년 8월 20일 모친의 병환을 이유로 고국에 돌아간 뒤 부상 등 갖가지 핑계를 대가며 7번씩이나 귀국을 미루기도 하였으며, 겨우겨우 돌아왔지만 2001년 한국시리즈 1, 4차전에서 도합 6이닝 10실점(평균 자책점 15.00)이라는 최악의 피칭을 보여 이것이 빌미가 되어 결국 방출되고 말았다. 특히나 그 유명한 한국시리즈 4차전 11:18의 대패가 너무나 컸다. 게다가 일본프로야구 시절부터 더러운 성질머리로 유명한 선수였는데, 그 성질머리가 삼성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된 것. 당시 감독이자 역시 한 성질했던 코사장님이 발발 뛴 건 말할 것도 없고…. 어쨌든 그 당시 한국시리즈의 악몽 때문에 삼성팬들에게도 양치기XX이자 천하의 개쌍놈 수준으로 낙인찍혔다. 이후 삼성은 인적성검사를 보고 왔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성격이 순진한 용병들을 뽑기도 했는데 하단의 에스마일린 카리대에 의해 다시 겪고 말았다. 안습.
      • 톰 션: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그래도 하단의 카리대에 비한다면 낫다.
      • 에스마일린 카리대: 삼성판 브라이언 배스이자 선수도 아닌 사기꾼. 톰 션보다 더 한 희대의 먹튀였고 심지어 2013 시즌 우승 이후 보너스 지급까지 요구(...)했다.
      • 아롬 발디리스: 삼성판 루크 스캇. 라이언 가코를 가볍게 뛰어넘는 최악의 타자용병. 성적은 가코와 비슷한데 돈은 3배나 더 받았고 그것도 모자라 한국야구와는 맞지 않는다고 입까지 털었다.
      • 아놀드 레온: 삼성판 매니 아이바, 카리대를 가볍게 뛰어넘는 최악의 먹튀. 1위팀에 갑자기 들어온 먹튀였던 카리대의 임팩트에는 다소 못미칠지언정 카리대보다 비싼 몸이었으니 카리대를 넘어서는 먹튀다.
      • 앤서니 레나도: 사기는 치지 않았고 관광객 모드도 아니었으나, 꼴랑 2승밖에 못 해놓고 10억이 넘는 초고액을 먹튀하였다. 본인의 행실에 큰 문제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먹튀한 액수가 워낙 많아서 카리대급으로 까인다. 심지어 ERA도 6점대였다. 본인이 받은 액수의 40% 정도를 받고 뛰는 재크 페트릭이 똑같이 2승에 ERA는 5점대이고[26] 뛴 경기와 퀄리티스타트 횟수가 압도적으로 많았던 것을 비교하면 더욱 더 기가 차는 먹튀.
  • 선수의 등번호 관련
    • 이동수의 3번(1996~1997년): 이동수가 1995년도에 신인왕을 탄 후 등번호를 3번으로 바꾸게 된다. 그러나 1996년도에 본인과 팀의 성적이 부진하는 바람에 이는 이동수가 저니맨이 되는 결과를 만들어 낸다. 정작 3번은 트레이드 상대였던 김종훈이 이 등번호를 오랫동안 달게 된다.
    • 문남열의 14번(2002~2003년): 등번호가 너무 아까운 사례라고 볼 수 있다. 더군다나 최고의 인터벌 좌완 투수였던 성준과 노장 용병타자였던 훌리오 프랑코를 생각하면, 그리고 신명철이 이 등번호를 달고 맹활약하기 전까지는 14번은 존재감이 없는 등번호가 되었다.[27]
    • 임익준의 64번(2007년): 상무에 추가 입대자로 뽑혀 시즌 개막 하루 후 상무로 입대했다. 등번호는 임익준이 입대한 지 하루 후에 정식 입단한 채태인이 가져간다.
    • 안지만의 11번(2012년): 안지만이 2012 시즌을 앞두고 1번을 좋아해서 1번을 달고 싶었지만 이미 윤성환이 달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등번호를 11번으로 바뀌었지만 성적이 시원치 않자 오치아이 투수코치와 김태균 수비코치로부터 넌 28번이 더 어울려, 11번은 네 이미지에 맞지 않는다라는 말을 듣고 다시 등번호를 바꿨다. 안지만 본인 역시 1번을 달 때 까지는 철인28호처럼 달겠다며 다시 28번을 단 것. 덧불어 조현근의 28번도 지못미! 공교롭게도 28번을 다시 달고 난 뒤부터 2013년 수술 전까지는 원래의 위력을 보이며 활약했다. 그리고 이제는 1번은 물론이고 28번의 등번호조차 영원히 달 수 없다.
    • 조현근의 28번(2012년)
  • 초창기 그림판 마스코트: 흰색 사자인데 세이부 라이온즈 짝퉁 삘이다.
  • 단장
    • 안현호: FA 선수들을 모조리 빼앗겨 삼성의 암흑기를 활짝 열어버렸다.
    • 홍준학: 누가 와도 안현호보다는 낫겠다 싶었지만 안현호는 차라리 나을정도로 최악의 언론플레이, 외인농사 실패, 정치질로 단장 경쟁자 제거, 프런트 입맛에 맞는 코치 선임 등... 야구단 단장으로서 할 수 있는 악행이란 악행은 다 하고 감독이 갈려나가는 와중에 자신은 유임되는 기가막힌 정치실력을 보여주고 삼성 역사상 최악의 암흑기를 보여주고 있다.
  • 감독
    • 김성근 전 감독: 556의 가장 큰 원인제공자 김성길 혹사와 일부 선수와 코치간의 트러블이 있었다.
    • 서정환 전 감독: 성적과 관중몰이는 평타쳤으나 2군 코치시절부터 이어진 최익성 관련 병크. 마무리 임창용의 지나친 혹사, 1999년 플레이오프 패배 등의 흑역사가 있다.
    • 선동열 전 감독: 불펜혹사, 이승엽 삼성 와도 자리 없다, 푸대접 등 2년 연속 우승이라는 업적을 다 묻어버리고 남을 병크를 저질렀다.
    • 김한수: 코치나 선수로써는 레전드이지만 감독 하나만으로 삼성 라이온즈 대표적 금지어가 되버렸다... 기아의 선동렬과 비슷한 예시. 삼성 라이온즈 역대 최악의 감독을 손꼽자면 거의 1순위로 꼽히고, 크보 역사적으로 봐도 김한수 수준의 감독은 찾기 힘들다.[29] 특히나 2010년대 최악의 감독을 꼽자면 거의 김성근, 송일수[30] 다음가는 수준.
  • 코치


2.1.4. SK 와이번스


  • 2000년 창단(전반기) 유니폼: 삼성 라이온즈의 1995~2007 유니폼을 따라하다가 어쩡쩡하게 했다. 얼마 되지 않아 유니폼 교체.
  • 2000년 최하위 및 홈경기 총 관중 수 84,563명(경기 평균 관중수 1,270명)[31]
  • 2002년, 2003년 주유소 유니폼: 모자와 유니폼 상의 앞부분에 SK 글자를 크게 박아버린 유니폼으로 최초 공개시 엄청난 비난이 쏟아졌으며 결국 2002년 시즌 중에는 유니폼 상의 SK 글자를 70% 정도 줄인 미봉책으로, 2003년에는 모자를 2001년 쓰던 W마크로 교체하였다. 이는 SK가 주유소라는 별명을 얻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 2004년 틸슨 브리또의 삼성 덕아웃 습격사건: 삼성 호지스와 빈볼 시비를 벌인 브리또가 교체된 후 복도를 통해 삼성 덕아웃에서 난동을 부렸다. 이 사건으로 브리또는 20경기 출장정지 중징계를 받았고, 중심타자가 없어진 SK는 이후 순위싸움에서 순식간에 밀려나며 가을야구 레이스에서 탈락했다.
  • 2007년 팬사랑 유니폼: 선수이름 대신 '팬사랑' 문구를 마킹. 정작 유니폼 디자인은 2003년이나 2005년처럼 연고지 '인천'을 영문으로 표기한 것 등의 요소 덕에 얼트 유니폼의 성격으로는 꽤 괜찮은 편이었다. 그런데 이 유니폼을 입고 성적은 신통찮았는데다 롯데벤치 클리어링을 벌여 더더욱 흑역사.
  • 2007년 한국시리즈에서 두산벤치 클리어링을 비롯한 신경전: SK 입장에서는 오히려 이것을 계기로 2패후 4연승이란 유례없는 사례로 우승하여 좋은 기억으로 남았겠지만, 빈볼 시비동업자 정신[32]이 없는 플레이로 양 팀간의 악감정만 남은, 한마디로 스포츠맨쉽이 부족했던 아쉬운 시리즈가 아닐 수 없다.
  • 윤길현 욕설 사건
  • 2010년 녹색성장 유니폼의 프로토 타입
  • 2011년~2012년 원정 유니폼 한국시리즈 6연패: 2006년에 현재의 유니폼으로 바뀌고 6연속 한국시리즈 진출의 시발점인 2007년부터 2010년 까지만 하더라도 한국시리즈 한정 원정 유니폼 착용시 승률은 8승 4패로 꽤나 좋은 편이었다(2007년 3승, 2008년 3승, 2009년 4패, 2010년 2승). 하지만 2011년부터 2012년까지 원정 유니폼 착용시 6연패(2011년 3패, 2012년 3패)를 기록하고 있다(…). 준플레이오프, 플레이오프까지 포함한 포스트시즌까지 따지면 원정 유니폼 입으면 더욱 성적이 좋은 SK이지만 유독 한국시리즈에서 이런 연패[33]를 기록한 점은 더욱 미스터리. 그리고 2013년~2014년에는 2년 연속 가을야구 광탈, 2015년에는 유니폼이 변경되면서 결국 연패로 끝나고 말았다.
  • 삼미 슈퍼스타즈태평양 돌핀스 유니폼 데이: 2002년에는 삼미 유니폼을 복각하려다 현대 측의 강한 반발로 로고만 살짝 수정해서 착용했으며, 2008년에는 현대가 해체되고 히어로즈로 재창단된 상황이었기 때문인지 1994~1995년에 입었던 태평양 돌핀스의 유니폼을 그대로 복각해서 착용한 뒤 경기를 치렀다. 하지만 태평양 유니폼을 입고 나간 경기가 하필 우리 히어로즈와의 경기였기 때문에 현대의 '정신적인 후신'이자 상대팀이었던 히어로즈 팬들에게 많은 비난을 받았고, 태평양 시절부터 쭉 뛰어온 선수들인 이숭용, 전준호도 SK의 이러한 이벤트를 비판했을 정도였다. 오죽하면 당일 해설을 맡은 박동희마저 중국의 동북공정과 흡사하다고 비판했을 정도. 거기에다 이 유니폼을 입고 히어로즈와 벌인 경기에서는 패배하면서 비아냥만 더해졌다. 이는 과거에 같은 한 팀을 응원했던 히어로즈와 SK 팬들 사이에서 더욱 깊은 갈등과 대립을 만들었다.
  • 민경삼 단장 체제
    • 2대 와이번스 걸 이채영: 들어오기 전에 두산 베어스 팬임을 공공연히 밝혀 왔던 연예인을 데려와서 계약을 한 SK 프런트에 대한 팬들의 비판이 끊이질 않았다. 전대 와이번스 걸이었던 이현지와는 대조적으로 대외 활동이 비교적 저조했던데다 2009년부터 맺은 2년 계약기간이 종료되기가 무섭게 2011년 두산 베어스의 잠실 개막전을 관전하는 모습이 중계 카메라에 잡히면서 SK 팬들을 허탈하게 했다.
    • 문학구장 소요 사태
    • SK 와이번스 프런트 퇴진운동
    • 이만수 감독: 감독 대행 시절인 2011년과 정식 감독 부임 첫 해인 2012년에는 그래도 2년 연속 준우승을 거뒀으나, 2013년에 대한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2014년에도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하면서 결국 재계약에 실패하고 교체되었다. 다만 파헤쳐보면 손을 쓸 수 없는 부분도 있었기 때문에 엄청 큰 흑역사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 2013 시즌: SK 왕조의 몰락과 동시에 7년만의 가을야구 광탈을 한 치욕의 시즌.
    • 2014년 인천 SK 행복드림구장 시설 관리권 입찰 관련 유착비리 의혹 사건
    • 2014 시즌 종료 후 김광현 메이저리그 진출 기자회견: 기자회견에서 김광현이 언행을 잘못한 것은 아니고, 2014 시즌 후 메이저리그 진출을 도모하려고 포스팅 발표를 위해 기자회견을 크게 열었는데, 정작 뚜껑을 열어보니 200만 달러의 적은 금액으로 한 팀이 입찰한 것이었고 그마저도 몸값 차이로 인해 결렬이 되어 SK에 잔류하게 되며 설레발이 됐다. 결국 기자회견까지 열면서 가장 요란을 떨며 거드름 피운 구단의 삽질이 되었고, 이 기자회견은 온갖 비웃음을 사게 되었다.[34] 하지만 5년 후 2019년 설레발이 아닌 진짜로 메이저리그에 진출하였다!
    • 가을 DNA 유니폼: 가을야구를 위해 야심차게 선보였으나 이 유니폼을 입고 경기를 하자 충격의 9연패에 빠지고 결국 6위로 시즌을 마감,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하고 말았다. 액땜을 위해 모아서 불태워야 한다는 과격한 주장까지 나올 만큼 악몽 같은 유니폼으로 팬들 기억에 남았다.
  • 2017 와일드카드전: 졸전 끝에 1경기로 가을야구가 끝났다.
  • 한 경기 최다 실책
  • 투수진이 경기 상대 선발 타자 전원에게 2루타 이상의 장타 허용: 더 충격적인 건 그 경기 상대팀이 LG인데 LG는 본래 장타와는 거리가 먼 팀이다.[35]
  • 한 이닝 11실점
  • 손차훈 단장 체제 - 성적은 물론이고 팬도 잃어버린 최악의 암흑기. 민경삼 체제는 그나마 반론거리라도 있었다.
    • 염경엽 감독 체제: 넥센 시절 염갈량이라는 평을 들으며 좋은 모습을 보였지만 이후 실체가 드러나자 마자, 결국 좋은 모습을 보였던 것은 감독 본인이 아니라 손혁 코치와 선수단 빨이었다는 것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 2019 시즌 : 19시즌 최장기간 1위를 유지하면서 8월까지 9년만의 정규시즌 우승이 무난해 보였지만 막판 DTD를 시전하면서 두산에 정규시즌 우승을 내주고 플레이오프에서 키움에 스윕패를 당하며 광탈했다.
    • 2020 시즌: 구단 역사상 최악의 시즌. 못해도 중하위권으로 예상했던 여론과는 다르게 18연패를 기록했던 한화와 꼴찌 경쟁을 하고 있다. 이만수나 김용희는 최소한 반론거리라도 있다고 하지만 염경엽은...
      • 한 시즌 두자리수 연패 두번 : 이 기록은 886899 시절 한화 이글스조차 없었던 기록이기에 충격이 더욱 크다.
      • 24실점 패배 : 2020년 SK의 몰락이 어떤 모습인지, 그리고 7월 잠깐 반짝하던 성적 이후 더더욱 추락하여 한화와의 꼴찌 경쟁을 하는 이유가 된 경기.
      • 100경기 연속 10득점 미만 : 2019년 8월 3일 경기부터 2020년 7월 13일 경기까지 모두 10득점 이상을 기록하지 못했다.
      • SK 와이번스 2군 기합 및 구단 은폐 의혹 사건 : 안 그래도 강승호로 손상되었던 클린팀 이미지를 완전히 박살낸 사건.
      • 강승호 복귀 논란 : 다행히도 두산이 최주환의 보상 선수로 영입되면서 해당 논란은 종식되었다.
  • 선수
    • 강승호
    • 김동건: 이대호거르고 2차지명 1라운드에서 지명했으나 완전히 실패한 픽이 되었다.
    • 김대유: 항목에서 설명하는 김대유와는 다른 투수다. 재일교포 우완 투수로, 일본 이름은 가네무라 다이유(金村大裕). 2011 시즌을 맞아 영입했지만 2군에서도 출전하지 못하고 다시 방출되었다.
    • 위대한: 지명 후 뻑치기 전과가 알려지면서 임의탈퇴 처리. 그리고 뒤에 진짜로 조폭이 되었다!
    • : 그래도 이호준은 초기에 김기태와 같이 중심타자로서의 제 몫을 하며 팀 타격에 어느 정도 도움이 되었다. 그걸 감안해도 2008 ~ 2010년은 반박의 여지가 없는 반 먹튀이기는 하지만.
    • 2008~2009년 초까지의 외국인 투수들: 다윈 쿠비얀, 케니 레이, 에스테반 얀 등의 외국인 선수들이 제대로 활약을 하지 못하고 순식간에 퇴출. 2007 시즌 17승을 거둔 외국인 에이스 케니 레이번도 이 해 5승밖에 거두지 못하고 시즌 후 재계약에 실패했다.[36] 이 상황은 2009년 초까지 이어져 크리스 니코스키마이크 존슨이 모두 실패했고, 이후 카도쿠라 켄게리 글로버와 계약 후 2년 연속으로 활약하면서 나아지게 된다.
    • 짐 매그레인: 초반 몇 경기 이후 배팅볼 기계로 전락. 구속도 제춘모와 거기서 거기였다보니 매춘모(...)라는 멸칭까지 붙었다.
    • 김상현: 프랜차이즈 선수인 송은범과 트레이드한 대상이기 때문에 대활약을 벌여도 모자랄 판에 찬스 때마다 병살머신이 되어 미운털이 박혔다. 그것도 모자라 선수 본인이 싸인 문제로 자기 무덤을 파면서 SK 팬들에게 완전히 버림받았고 결국 2014시즌 종료 후 20인 보호선수에서 제외되어 kt wiz로 가게 됐다. kt에서 회춘하면서 이래저래 SK만 안습이 되나 했지만, 1년 반만에 역대급 대형 사건을 터뜨리며 kt의 흑역사가 됨에 따라 상황은 다시 반전(…).
    • 루크 스캇: 2006년 캘빈 피커링 이후 8년만에 거액을 들여 영입한 역대 최강의 MLB 커리어를 가진 외국인 타자. 처음엔 2014 용병 타자 1호 홈런을 기록하는 등 괜찮은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4월 22일 부상으로 2군에 내려갔고, 5월 13일 복귀 후 28일에도 부상이 생겼으며, 7월 1일에 복귀했으나 4일만에 폼이 떨어져서 2군으로 내려갔다(...) 거기다가 7월 15일엔 감독인 이만수와 대놓고 언쟁을 벌이며 팀 분위기를 완전히 무너뜨렸다. 그 다음 날 바로 웨이버 공시되었다. SK 팬들에겐 의료관광객, 백리대, 캇리대등으로 까였으며 심지어 에스마일린 카리대는 연봉도 적고 최소한 감독과 대놓고 싸우지는 않았다며 재평가(...)를 받기까지 했다.
    • 대니 워스: 수비를 잘 한다는 이유만으로 홈런도 많이 치고 주루도 좋았으나 수비가 안좋았던 헥터 고메즈를 방출하고 데려온 선수. 그러나 부상으로 지명타자 몇 경기 나오다가 1안타 치고 방출당해서 팬들이 고메즈를 그리워하게 만들었다. 그나마 대체 용병이 제이미 로맥이었어서 전화위복이 되긴 했지만.
    • 황건주: SK의 1차지명 잔혹사를 제대로 보여주는 선수 1. 1군에 올라오지도 못하고 방출. 현재 독립 리그에서 뛰고 있다.
    • 박권수: SK의 1차지명 잔혹사를 제대로 보여주는 선수 2. 역시 1군에 올라오지도 못하고 방출. 현재 야구학원을 차렸다.
    • 서상준: 인천의 전설이 되겠다더니 음주운전 사건으로 말 그대로 인천의 전설이 되어버렸다.
    • : 이른바 웨시퍼. 세 명 다 최상위픽으로 뽑혔던 초고교급 유망주였다.[37] 그러나 김태훈과 서진용은 SK의 1차지명 잔혹사만 이어갔고[38], 박종훈 역시 2015년을 제외하면 정상적인 선발 투수라고 할 성적을 보이지 못했다. 하지만 2018년 현재 박종훈은 빼놓을 수 없는 주축 선발투수로 성장했고, 김태훈 역시 불펜에서 상당한 힘을 보태고 있다. 2017년에 좋아지나 싶다가 2018년 다시 망해버린 서진용만 좀 아쉬운 상황. 하지만 서진용이 2019년 평균자책점 2.38에 33홀드를 찍는 엄청난 활약을 보여주며 웨시퍼가 모두 터지게 됐다.

2.1.5. KIA 타이거즈


  • 7월 5일: 달력에서 날짜를 지울 수 있다면 가장 지우고 싶은 날일 것이다. 자신들의 역사에 길이 남을 뼈아픈 대역전패를 이나 당한 치욕의 날이다.
  • 9회 5점차 이상 역전패 통산 3회: 이 3 모두 원정경기에서 9회초에 멀찍이 달아나는 점수를 내고도 공수교대 후 9회말 수비에서 답 없는 방화로 대량실점하여 뼈아픈 대역전패를 당한 것과, 이들 경기에서 주축 선수들이 부상으로 교체되었다는 것되풀이되고 있다.
  • 1982년 당시의 선수 숫자: 해태 타이거즈 시절 창단 당시의 선수 숫자가 겨우 14명이었다. 위의 부족한 선수 인원으로 인해 김성한투수타자를 겸업하며 10승-3할 타율(+10홈런, 타점왕) 동시 기록이라는 영원히 깨지지 않을 기록을 남기며 활약했다. 그래도 김응룡 감독의 말에 따르면 창단식때만 14명이였고 그해 시즌은 22~23명 정도로 치렀다고. 다른 팀 인원수와 큰 차이가 없었다고 한다.
  • 1985년 이순철이 신인왕을 수상한 것이 타이거즈 역사상 유일한 수상이다.
  • 1990년 잠실구장 패싸움 사건: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 1995년 4위: 페넌트레이스에서 4위를 하고도 3위 롯데와의 승차가 4.5게임으로 벌어진 탓에 포스트시즌 진출에는 실패했다.
  • 1996년 해태 타이거즈 항명사건
  • 1997년 잠실 LG 트윈스전 8회 이후 역전패 5번
  • 1998년부터 2001년까지의 비밀번호: 5765. 1997년 한국시리즈 우승 직후 모기업 해태제과의 부도에 따른 운영자금 상실과 이종범의 일본 진출, 차기 에이스로 꼽히던 김상진의 요절이란 악재가 겹치며 이후 기아자동차에 인수되는 2001년까지 4년 연속 가을야구에 실패한 타이거즈 역사상 최장 암흑기. 9회 우승에서 아홉수에 심하게 걸렸다.
  • 무등야구장 물방개 사건
  • 이종범의 3대 흑역사: 기쎈비타 TV광고, 금종범, 선동열과의 듀엣 음반.
  • 조창수,유남호 코치 잠적사건
  • 2002년과 2003년 6할승률 거두고 3위: 기아는 이 시즌동안 6할을 찍고도 1위 못한것도 모자라 2002년에는 LG에게 2003년에는 SK에게 업셋을 당했다. 6할을 찍고도 플옵에서 업셋을 당해 3위로 내려 앉은것은 95시즌 LG가 있기야 하지만 기아는 무려 2번 연속으로 당했다.
  • 2004년 원정 유니폼: 기아가 인수한 후 회색을 바탕으로 한 원정 유니폼에서 회색만 조금 더 진하게 했던 유니폼이다. 2009년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의 원정 유니폼과 동급일 정도로 안습이라 결국 1년만 입고 교체 결정. 타이거즈의 역대 최악의 유니폼이라 해도 할 말이 없을 정도.
  • 2005~09 원정 유니폼 포스트시즌 0승 5패(준플레이오프 0승 2패, 한국시리즈 0승 3패)
  • 2005년, 2007년 8위: 이것 때문에 LG 트윈스, 롯데 자이언츠와 엮여서 엘롯기가 탄생한 것은 물론, KIA는 꼴아라는 오명을 듣게 되었다. 통산 KS 최다 우승(10회)에 빛나는 해태-KIA 타이거즈의 엄청난 수치이자 최악의 흑역사.
  • 2002~2006 포스트시즌 8연패: 2002년 플레이오프 4, 5차전+2003년 플레이오프 3연전 스윕+2004년 준플레이오프 2연전 스윕+2006년 준플레이오프 1차전 패배.
  • 2008년 홈런#s-148개: 당시 홈런왕 김태균보다 딱 17개 많은 홈런 개수. 두 자릿수 홈런을 기록한 선수가 이재주 한 명 밖에 없을 정도로 심각한 장타력 부재에 시달렸던 시즌이었으며 이로 인해 김기아라는 별명이 생겼다. 말 그대로 X같은 화력을 마운드로 상쇄했던 시즌. 그나마 꼴찌가 아닌 6위를 기록했고 다음해 통합 우승을 했다는 점이 위안.
  • 2010 시즌: 2009년의 챔피언의 자존심이 제대로 구겨진 시즌이다. 2000년 9연패 이후 최장기간 연패이자 역대 팀 최다연패 3위에 해당하는 16연패로 팀이 걷잡을 수 없이 무너져 갔으며 실망한 일부 팬들은 잠실 기아팬의 난까지 일으켜 팬들과 코칭스태프와의 마찰까지 일으키고(유튜브에까지 소개되었다!) 윤석민 사구 사건까지 일어나는 등 팀 전체적으로 바람 잘날 없던 시즌이었다. 그래도 하단의 2013 시즌에 비한다면 그나마 낫다.
  • 2010~2011 유니폼: 팀 로고 CI 교체와 함께 유니폼에 대한 밸런스는 맟췄으나 V넥 스타일인데다 상대적으로 영 아니다라는 평을 받았다. 특히 상기 된 2010시즌과 2011 후반기 추락이 컸을 듯. 그나마 윤석민이 투수 4관왕과 MVP를 딴 것은 위안거리.
  • 2011 시즌 후반기: 전반기에는 삼성과 선두 다툼을 할 정도로 매우 잘 나갔으나 후반기가 시작되자마자 주축 선수들의 악몽같은 부상 릴레이 크리로 결국 DTD하고 말았다. 어찌어찌해서 4위는 지켰지만 DTD의 달인인 이 팀이 아니었거나 두산 베어스가 후반기에 더 약진했다면 4위 이하까지 추락할 수 있었다.
  • : 기존의 2010~2011 유니폼에서 붉은색을 짙은 붉은색으로 진하게 만들었으며 V넥에서 단추형으로 바꾸었으며, 남색 컬러를 채용했으나 2012년의 부진과 2013시즌의 타어강으로 인한 대부진, 2014년 이후의 암흑기로 인해 흑역사 유니폼의 반열에 오르는 듯 했으나 마지막인 2016 시즌에 가을야구를 했으므로 취소선 처리.
  • 2012 시즌: 2008 시즌의 데자뷰이자 선동열 감독이 부임 한 첫 해에 팀의 레전드이자 프랜차이즈 스타인 이종범을 은퇴시키며 이종범의 팬들로부터 비난을 받았었고, 기대를 모았던 타선도 김기아 시절로 돌아갔으며(...) 선수들의 줄부상에 팀 홈런 꼴찌, 희생번트 1위에 각종 OME 경기력으로 인해 팬들로부터 까임을 받아 결국 5위로 시즌을 마치게 된다.(여기에 이건열이 까이는 건 덤) 선수시절의 친정팀으로 돌아와 감독 생활을 하던 선동열과 KIA 입장에서는 여러모로 불운이 잇따랐던 시즌이었다. (특히 선동열은 선수시절에서 뛰었던 친정팀에서 감독 부임 첫 해에서 이런 일들이 발생해서 잇따랐으니 더더욱!) 그나마 9월 23일부터 10월 1일까지 선발투수들이 호투를 펼치며, 이준호, 윤완주, 황정립, 홍재호, 박지훈의 발견과 김진우의 부활, 용병 투수 2명의 선전이 위안거리.
  • 2013 시즌: 함부로 설레발을 쳤다가 한번 무너지면 어디까지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지는지 잘 보여준 사례. 최하위인 9위를 제외하고는 1위부터 8위까지 해 본 드라마틱한 시즌으로 평가 된다. 시즌 시작전부터 우승후보로 꼽히며 시범경기에서 1위에 등극했으며, 개막전부터 시즌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1위를 달리는 듯 했지만 모 기자문제의 칼럼을 쓰고 SK와 2대2 트레이드를 감행한 뒤 기어이 귀신같이 DTD 테크를 타고야 말았다. 특히 트레이드로 건너온 송은범이 갑작스럽게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지고 초반에 반짝이던 신승현마저 하락세를 보이던 찰나에 트레이드 상대였던 진해수가 SK에서 펄펄 날아 달았으며, 양현종, 김선빈, 이용규, 김주찬, 최희섭 등등 부상 병동이 겹친데다 선동열이 앤서니를 마무리로 돌려 세우다가 실패를 하고 윤석민마저 마무리로 돌려세우지만 신통치 않는데다 결국 투수쪽의 붕괴가 심해졌으며 후반기의 대부진과 선수들의 무기력한 플레이에 한 몫을 했으며, 상대팀에게 특정팀 최다 연패, 수비쪽에서도 실책을 연달아 기록해 하위권을 달리는 등등 연이은 여러가지 악재가 발생하고 말았고 결국 신생팀인 NC보다 못한 성적을 거두고 말았다.[39] 특히 투수 조련사이자 삼성에서 2회 우승을 기록한 선동열 감독의 능력도 의심을 품게 되어 도마 위에 오르게 되었고 결국 여러가지 무리수를 두다가 실패로 돌아가면서 선동열 감독의 커리어에 큰 오점으로 남기게 생겼다.[40] 설상가상으로 2군쪽에서도 다를바가 없는데다 팀내 불화설도 돌아다니고 있는 실정이다. 시즌 종료 후 FA인 이용규를 놓치고 이대형을 영입하고 이대형의 보상선수 과정에서 신승현을 LG로 보내면서 다시 한 번 KIA팬들의 멘붕과 뒷목을 잡게 만들었다. 그나마 신종길, 나지완의 고군분투와 이홍구라는 신예 발견이 위안거리다.
  • 2016년 잠실 야구장 폭력 사태: 2010년대에 일어난 폭력사태라는 점이 눈에 띄며, 그 원인이 입장권 돌려쓰기였던 탓에 제값주고 들어오는 야구팬들을 엿먹인 역대급 사례.
  • 나윤승: 2015년부터 KIA 타이거즈의 응원단장이 되었으나, 응원유도나 응원가 등으로 팬들에게 많이 까였으며, 심지어 자기의 권력을 이용해서 지인들을 편법으로 무료입장 시킨 탓에 위에 있는 폭력사태의 결정적인 원인제공을 하면서 사실상 흑역사 확정.
  • 4차례의 준플레이오프에서 모두 플레이오프 진출 실패.
  • KBO 리그 심판 최규순 금전요구 사건 연루: 부정 거래에 대한 자진 신고를 위해 보낸 공문에 "자체 조사를 실시한 결과 확인된 사실이 없음을 통보"라고 하며 숨겨왔다가 터졌다. 어찌보면 두산보다 악질이다. 게다가 연루 보도 후 구단은 "직원 차원에서 돈을 건넸기 때문에 구단에서는 사실을 이야기해주지 않아서 몰랐다"는 전형적인 꼬리자르기 변명을 해명이랍시고 내놓아서 논란이 되는 중이다.
  • 선수
    • 김상훈: 항목 1번의 포수와는 동명이인으로 미스터 청룡 - 미스터 LG로 불렸던 선수다. 좌타자 부족으로 인해 한대화와 트레이드되어 오게 된다.
    • 손혁: 양신의 트레이드 상대였는데 선수단에 합류 안한다고 땡깡부리며 1년을 공쳤으며 돌아왔으나 운동을 쉰 탓에 완전히 폭망했다. 결국 2002년 말에 두산으로 갔고 2004년 시즌 초에 그대로 은퇴.
    • 박재홍: 현대 유니콘스, SK 와이번스의 프랜차이즈 스타이지만 사실은 해태에서 1992년에 1차지명으로 뽑은 선수이다. 그러나 해태가기 싫다고, 연세대에 진학 후 현대에 입단해서 지역팬들의 반감을 샀다. 2003년에 정성훈+10억을 상대로 기아로 오나, 2004년에 유남호 감독대행, 프런트와 FA관련으로 문제를 일으키기도 했다. 결국 김희걸과 트레이드로 SK이적, 그 결과 타이거즈 팬들에게 박재홍은 천하의 개쌍놈으로 낙인 찍혔다.
    • 진필중: 위의 손혁+김창희+8억을 주고 두산에서 사왔었다, 그러나.... 서울에서 뛰고싶다 라는 어처구니 없는 이유를 들어가며 태업을 했으며, 심지어 수원 현대전에서는 이기던 경기를 대량실점하며 블론세이브를 하기도... 결국 2003 시즌 종료후 LG 트윈스에 FA선언하고 이적한다. 보상선수는 손지환 인데 아이러니한건 보상선수가 FA선수보다 더 좋은 활약을 보이며 무보살 삼중살까지 해낸다.
    • 마해영: 2002년에는 삼성에 첫 우승을 안겨준 영웅이였으나, 삼성에 연봉조정신청을 낸 경험때문에 FA 재계약을 안하고 시장에 나온다. 결국 기아에서 FA 28억+보상금 17억+ 보상선수 신동주 까지 줘가면서 데려오나, 성적은 삼성 시절 말기부터 보이던 하락세가 가속화되어 먹튀가 되었고, 팀 분위기에 적응도 못하는가 하면, 다들 우는데 후배선수를 시켜서 덕아웃에서 빵도 드셨다, 그것 말고도 서정환 감독대행과도 사이가 나빠서 2005시즌 끝나자마자, 정리대상이 되어, LG 트윈스로 이적한다.
    • 손영민: 사생활 논란[41]을 일으키면서 팀에서 임의탈퇴로 방출되었다.
    • 송은범: 김상현과의 트레이드로 야심차게 준비했으나 2013년의 대부진과 2014년의 부진과 부상으로 결과적으로 안 좋게 되었다. 결국 2014 시즌 종료 뒤 FA로 한화로 이적. 그리고 한화에서도 탈탈 털리며 FA먹튀이자 한화의 흑역사 선수 타이틀을 챙겼다.
    • 숀 헤어: '3할을 원하는가? 30 홈런을 원하는가?'라는 설레발만 남기고 떠났다고 전해지지만 실제로는 당시 막장으로 흘러가던 해태 구단의 피해자에 가깝다.
    • 안영명: 장성호와의 트레이드로 KIA에 왔지만 몇 경기만에 뛰지 못했었고 항상 중요한 순간에 방화를 일으키는 등 영 좋지 않은 모습을 보였고 결국 1년도 안돼서 이범호의 보상 선수로 친정팀인 한화로 돌아갔다.
    • : 이 문서의 알파고,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 제레미 해즐베이커: 로저 버나디나를 버리고서 데리고 온 선수였으나, 최악의 활약을 보인 끝에 방출되었다.
  • 조영훈: 좌타를 보강한답시고 김희걸과 맞바꿨더니 오히려 폭망하고 말았다. 공격에서는 활약을 했지만, 수비에서 완전 망했다. 그리고 2012 시즌 후 NC에 특별 지명되어 팀을 옮겼다. 다만 NC에서는 중장거리 타자로 나름 괜찮게 활약.
  • 채종범: 전병두, 김연훈의 트레이드 상대. 한싸홈의 임팩트가 있지만 딱 거기까지 였고. 재활만 하다가 결국 2011년 12월 1일자로 방출되었다.
  • 트레비스 블랙클리: 하필 중요한 순간에 부진했고, 게다가 벤치 클리어링 번이나 일으켰다. 결국 한 시즌만에 방출.
  • 호라시오 라미레즈: 선발은 커녕 불펜에서조차 만족스러운 성적을 내지 못하고 방출. 대체용병은 헨리 소사이다.
  • : 입단 테스트를 받았을 뿐이지, 들어가진 않았다.
  • 유창식: 한화 시절 저지른 승부조작을 기아에 있을 때 자백했다. 이적후에도 나름대로 기회(특히 선발 등판도 여러 차례 했었다.)를 받았기 때문에 기아 구단과 선수단, 그리고 팬들에게도 빅엿을 먹인 셈. 여기에 불법베팅까지 한게 추가로 밝혀졌으며 이후에는 전 여자친구 성폭행 건까지 드러나 징역을 선고받고 법정 구속되었다.
  • 선수의 등번호 관련
  • 12번: 원년 해태 타이거즈때부터 KIA 인수 전까지는 그럭저럭한 선수들이 달았었기 때문에 존재감이 없었던 등번호였다.[42][43] 이후 김상훈이 해태 시절에 달기도 했지만 김상훈은 KIA로 바뀌면서 2년뒤에 장채근-최해식의 등번호였던 22번행. 차일목이 2003년부터 이 등번호를 달고 있었는데 문제는 이 선수가 2008년에 반짝하던 해를 제외하고는 수비 문제 때문에 욕을 많이 얻어 먹는 선수인지라 그 절정은 2013년 이 경기에서 제대로 침대야구를 선보이면서 팬들에게 가루가 되도록 까였다. 이후 12번은 투수인 임창용이 달았고 2016, 2017년에는 못미더운 모습을 보였으나 2018시즌 팀을 위해 헌신하다가 감독의 사적인 감정으로 인해 방출당한다. 여러모로 비운의 번호가 될 듯 하다. 이후 2019년부터는 포수인 백용환이 달고있다.
  • 27번: 이래저래 잔혹사가 많은 번호. 김봉연의 경우 남해고속도로에서 전복사고를 당한 이후 한동안 부진했었고 이호성호타준족의 상징에서 타이거즈 최악의 흑역사로 전락했으며, 강철민은 LG로 가서 사이버 투수가 되었고 호세 리마는 심장마비로 죽었고 그나마 김상현이 2009 시즌 도중 트레이드 후 27번을 달고 홈런왕, 타점왕, 골든글러브, 팀 우승을 차지했지만 그 이후는 유리몸으로 고생이 많다(…). 그래도 어느 정도 활약은 해 주었으나 2013년 SK로 트레이드 되었고 망했다. 이후에 kt로 팀을 한 번 더 옮겨 부활하나 싶더니 대형사고를 쳐서 결국 임의탈퇴를 당했다. 그리고 2013 시즌 도중 5월 6일 김상현이 트레이드 되고 투수인 신승현이 달았는데 초반에는 반짝 활약하다가 그 이후로는 쳐지면서... 거기다 시즌 후 이대형을 FA로 영입하면서 보상선수로 신승현을 내주게 되어 27번은 2차드래프트로 가져온 김태영[44]이 가져갔으나 이후 방출, 이홍구가 달았다가 이홍구 반대급부로 들어온 이명기가 썼으나 이명기는 2019년부터 61번을 사용하다가 시즌 도중 NC로 트레이드 되었다. 그리고 2019년에는 금지어 2호의 양아들이자 똥행야구의 잔재 문선재가 달고있다.
  • 김성한 이후의 11번: 김상진이 물려받았으나 위암으로 사망하면서 비극이 시작되었고 이대진#s-1이 물려받고는 곧바로 부진에 빠졌다.[45] 한 마디로 김상진 이후 저주에 걸렸다. 2012년부터 임준섭이 달고 있는데 임준섭은 첫 시즌을 수술 및 재활로 날렸지만 이후 선발진에 합류해 그런대로 활약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이후 2016년에 달았던 은 승부조작에 연루되면서 11번의 저주는 계속 이어나가고 있다.
  • 송은범의 14번 - 46번(2013년): 트레이드 직후 이 2개의 등번호를 받고는 엄청 부진했다. 그래서 추가 된 별명이 송은Bomb, 송은방화범, 결국 시즌 중에 SK 시절의 원래 등번호인 46번으로 바꿨지만 여전히 신통치 않았고 결국 2013 시즌을 최악의 시즌으로 보내고 말았다. 결국 2013 시즌 종료 후 윤석민이 달던 21번으로 변경.
  • 윤석민의 28번(2010년): 윤석민이 국가대표팀에서 달고 있는 번호인데, 원래 소속팀 KIA에서는 20번을 달고 있다가 근육통 계열의 여러가지 잔부상이 겹치고 피칭시 운이 따르지 않아 2010시즌을 앞두고 국가대표팀에서의 좋은 기억을 살리기 위해 28번으로 바꿨지만 오히려 2010시즌 들어 084, 락커룸 주먹질 사건과 조성환, 홍성흔 사구 사건에 의한 우울증 등 험한 꼴을 계속 당하자 다시 바꾸기로 했다. 21번으로 바꾼 뒤에는 투수 4관왕을 기록하면서 이 등번호는 흑역사 확정.
  • 이강철 이후의 19번: 타이거즈의 대표적인 언더 투수인 이강철의 대표적인 번호. 이강철 이후로는 영 좋지 못하는 행보를 보이고 있다. 신용운은 신용운 - 한기주 카드로 활약하다가 혹사에 시달리며 이후 드래프트로 삼성에 이적했고 손영민은 뜻 하지 않은 사생활 논란과 음주운전 뺑소니 사고로 인해 임의탈퇴를 했으며. 손동욱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이후에는 신고선수로 들어온 최영필이 가져간 상태였지만 그 최영필도 2017 시즌 중에 은퇴했고 지금은 이민우가 달고 있는 중.
  • 감독: 밑에 나열된 감독들 모두 타이거즈의 영광과 전성기를 이끈 코치/선수거나 현역시절 어마어마한 선수였다. 하지만...
  • 김성한 전 감독: 김성한 구타 사건과 프런트와의 알력다툼 문제 등으로 2004년 시즌 도중 경질되었다. 사실 2년 연속 6할 승률을 달성하는 등 성적은 나쁘지 않았고 감독으로서의 평가도 괜찮았지만, 감독의 직감에 따라 경기 운용을 하는 스타일 때문이었는지 큰 경기에서 상대에게 집요하게 분석당하며 계속 털리는 문제도 있었다.
  • 유남호 전 감독: 2005년 시즌, 타이거즈 역사상 최저 승률과 첫 꼴찌를 선사했다. 하지만 서정환이나 선동열과의 논쟁 아니면 그다지 언급이 잘 안되어 있는데다 존재감이 없어 상대적으로 묻힌 감이 없지 않아 있다. 어찌보면 롯데 자이언츠우용득 전 감독과 비슷한 케이스.
  • 서정환 전 감독: 2007년 시즌, 타이거즈 역사상 두번째 꼴찌를 선사했다. 게다가 신용운한기주를 필두로 한 투수진 혹사로 인해, KIA는 이후로 불펜 불안이라는 고질병에 시달리게 되었다.
  • 선동열 전 감독: 2012년 시즌에 레전드인 이종범을 은퇴시키고 2013년 시즌 타어강의 원흉. 이로 인해 선동열에 우호적인 편이었던 친정팀 팬들마저 거의 다 나가떨어졌다. 특히 3년동안 성적은 바닥을 찍었는데 그러고도 2년 재계약을 받아내고 거기에 안치홍 임의탈퇴 논란까지 겹쳐서 팬들이 제대로 폭발했다. 결국에는 자진사퇴했으며 후임감독인 김기태가 부임 이후 2년차에 팀을 포스트시즌에 진출한 것은 물론이요. 부임 3년차에 팀을 한국시리즈 직행까지 했으니 더더욱 안습할 수 밖에 없다.
  • 김기태 전 감독: 2017년 기아타이거즈 우승과 3년 연속 포스트시즌을 진출시킨 공로가 분명 존재하지만 임창용과의 파문부터 2019시즌 구단 최초 10위라는 성적과 .302라는 충격적인 승률, 투수가 마운드에서 주저앉을 정도로 굴리고, 재활을 마치고 돌아온 투수를 갈아마시고,[46] 관중 수가 전년대비 20%이상 감소하는 등 실적차원의 문제로 여러모로 굉장히 나쁘게 이별하였다. 특히 2018시즌에는 멀쩡한 팀[47]을 이상하게 운영하면서 명장이 아니라 운장#s-2이라는 사실을 온천하세계만방에 알렸다. 더군다나 이번이 두번째 시즌 중 자진사퇴이기도 하고, 자진사퇴 후 감독대행이 몇경기 하지도 않고 자신이 2019시즌에 쌓은 승수를 추월하는것도 모자라 임창용의 인터뷰에서 어마어마한 일이 폭로되면서 사실상 감독 커리어가 요절났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쯤되면 김성근보다 더 악랄한 감독이다.
  • 이선호: 말이 필요없는 현대차그룹 최고의 언론플레이어.
  • 박동희 칼럼 - 타이거즈는 어떻게 강팀이 되었나
  • 조계현 단장: 선수로서는 이루 말할 수 없는 타이거즈를 대표하는 선수임이 분명하나, 코치로서나 프런트 수장으로서나 심각하게 무능하다. 코치로서는 선수보는 눈 없다는게 밝혀진 것이 대표적으로 배힘찬을 뽑아놓고 좋아했다라는 전설적인 일화부터 해서 뽑아온 용병이 2019년 최악의 타자용병부터 메이저 1라운더 출신 한승혁을 2년을 지켜보고 데려왔으며 언제 터질지 모르는 부상 달고 있는 투수까지, 완벽하게 흑역사화가 진행되고 있다. 더군다나 임창용 방출과정에서 자신도 똑같은 입장을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말도 안되는 명분으로 내보내는 등 바지사장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 이대진 투수코치: 말할 필요가 없는 KBO리그 역사상 최악의 투수코치. 5년동안 기른 투수가 없고 매년 2군 투수코치들이 살려서 보내면 투구폼을 개박살을 내서 선수를 망가뜨렸다. 대표적으로 박정수, 이민우가 있다. 뿐만 아니라 언플조차도 역겨운 수준으로 하는데 김진우 보증사건부터 해서 143번째 경기 끝나고 이야기하자 등 주옥같은 어록들을 남겼다.
  • 527 수원대참사: 2003년 5월 27일 현대 유니콘스와의 수원 원정경기에서 당대 최고의 선발투수이던 정민태를 두들겨 그를 1회에 강판시키며 2회까지 10대1로 앞서고도 그 9점차를 지키지 못하여 대역전패를 당한 대사건. 9회말 3점차 리드를 지키기 위하여 당대 최고의 마무리 진필중을 투입하고도 진필중이 아웃카운트 하나밖에 못잡고 두산 베어스 시절 동료였던 심정수에게 역전 끝내기 3점포를 얻어맞았다. 이 527 참사의 망령은 그 후 현대가 2007 시즌을 마지막으로 해체되고 2015년부터 kt wiz가 수원에 터를 잡은 이후로도 계속 이어져 KIA는 수원 케이티 위즈 파크만 가면 상당히 고전하고 있다.
  • 수원 징크스: 2015년 kt wiz가 1군 리그에 첫선을 보인 이후 kt의 창단 첫 홈경기 스윕의 희생양이 바로 KIA였다. 2017 시즌 막판 KIA가 시즌 막판까지 두산 베어스와 치열한 선두다툼을 벌이던 10월 1일 수원경기에서 kt는 KIA를 상대로 20점이나 쏟아내서 KIA에 고춧가루를 팍팍 뿌렸고,[48] 2019년에는 kt가 KIA 양현종을 상대로 시즌 첫 승을 따냈다. 그리고 527 참사 17주년인 2020년 5월 27일, kt는 수원 홈경기에서 KIA를 상대로 시즌 첫 영봉승을 거두고 다음 날 양현종을 철저하게 두들겨 고졸 루키 소형준에게 시즌 3승째를 안겨주는 등 KIA의 수원구장 징크스는 2020 시즌에도 현재진행형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2.1.6. 한화 이글스


  • 전신 빙그레 이글스의 준우승 징크스: 1980년대 후반부터 팀명이 바뀌는 1993년까지 강팀의 면모를 보여줬으나 한국시리즈에서 매번 준우승하면서 콩라인 등극, 세 번은 선동열의 해태에게(1988년, 1989년, 1991년), 한 번은 염종석을 앞세운 롯데에게(1992년) 당했다. 결국 첫 우승은 팀명이 바뀐 뒤인 1999년에 가서야 이루었다.
  • 1994~1998 유니폼: 삼성 라이온즈의 원년 빨강색 계통 유니폼과 함께 붉은색으로만 이루어진데다 급조하게 만든 감도 없지 않다. 단추없이 달랑 가슴에 구단 이름만 써 있는 특징 없는 디자인이라 인기가 없었다.[49] 공교롭게도 강병철 감독의 재임기간 시기와 꽤 겹쳤다. 그나마 포스트시즌 진출은 1994년과 1996년 두 번 뿐이며, 1996년 구대성의 MVP와 정민철의 노히트노런으로 기억해야 할 듯.
  • 1999년 우승 전후 7-7-1-7-4-7-5-7.: 이 기간 동안 정규시즌 3위 이상으로 절대 못 올라갔다. 사실 우승하기 전 한화 이글스로 개편된 이후에도 3위 이상은 못하긴 했지만(...) 우승했던 1999년 시즌의 경우 양대리그제가 실시되면서 승률 4위로도 우승을 할 수 있었으며(물론 99시즌이 가장 강했던 시기 중 하나긴 하지만) 4위를 했던 2001년 시즌도 사실 4위부터 꼴찌까지 2경기 이내에 몰려 있는 도토리 키재기였으며 승률은 겨우 .473. 그렇게 가까스로 준플레이오프에 진출했지만 준플레이오프에서 3위 두산에게 바로 광탈. 그런데 이 기간 동안 7위는 5번이나 기록했다.
  • KBO 한국시리즈 승률: 6번 한국시리즈에 올라서 1회 우승, 5회 준우승으로 제일 좋지 않다. 승률은 16.7%. 여담으로 한화 다음으로 한국시리즈 승률이 안 좋은 팀은 LG 트윈스로 33.3%의 승률이다(2회 우승, 4회 준우승).
  • 한 투수가 공 2개 던지고 5실점: 그나마 포스트시즌 진출이 확정된 상태에서의 의미없는 경기라 그나마 충격은 덜한 편.
  • 2008년 올림픽 브레이크 및 그 이후의 류현진-패-패-패-패: 어찌보면 이 때가 한화 암흑기의 전주곡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결국 이 해부터 한화 이글스는 비밀번호를 찍기 시작한다.
  • 2003년~2004년 유니폼: KIA 타이거즈의 홈 유니폼이나 SK 와이번스의 홈 유니폼과 비슷한 디자인을 취하였다. 하지만 세련되게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허전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가 없었으며, 하필이면 유승안 감독 시기에 맞물려서 비슷한 성적을 냈다. 결국 유승안이 감독직에서 사퇴하자마자 무섭게 유니폼 변경.
  • 2007~2014 유니폼: 유니폼 디자인은 역대 가장 무난하고 깔끔하나 성적은 2007년 빼고 시궁창에서 헤어나오질 못했다. 3-5-8-8-6-8-9-9를 기록. 이전까지는 창단 첫 최하위 빼고는 최하위는 기록하지 않았으나 이 유니폼을 입고 나서는 최근 6년간 최하위만 5번 기록했다. 빼도박도 못하는 한화 암흑기의 상징 유니폼으로 확정. 결국 팀 분위기 쇄신을 위해 2014년에는 모자 색이 검은색으로 바뀌었지만 또다시 꼴찌를 기록했고, 결국 2015년부터 새로 디자인 한 유니폼을 입게 되면서 완전히 흑역사 확정.
    • 2009년 영문표기 유니폼: 선수 이름을 한국프로야구 역사 최초로 영문으로 박아 넣었으나 최하위를 기록했다. 결국 2010 시즌부터 다시 한글표기로 원상복구했으나 또 꼴찌. 그 이후 하위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상태. 어찌보면 이 유니폼이 한화 암흑기의 장기화의 서막을 알렸던 것이기도 하다.
  • 5886899678로 대변되는 2008년 이후의 암흑기: 5-8-8-6-8-9-9-6-7-8이란 비밀번호를 작성했다. 2012시즌도 기대를 모았으나 초반부터 밑바닥에서 헤매다가 결국 비밀번호 8을 작성. 그리고 2013시즌에도 초반의 대부진을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비밀번호 한 자리와 비밀번호 항목을 추가하게 되었다. 2014년에도 화끈하게 이용규정근우 질러놓고 사상 두 번째로 3연속 꼴찌를 했다. 2015년에 탈꼴찌에 성공은 했지만... 감독이해할 수 없는 투수 운용에 팀이 완전히 퍼지면서 이제 롯데의 비밀번호와 자리수를 넘었으며 그리고 2017년에는 LG의 비밀번호 자리수까지 같아졌다 이후 2018년 한용덕감독부임 첫 해인 11년만에 가을야구에 진출하면서 비밀번호를 끊긴 했으나 2020년극악의 초반 페이스로 다시한번 비밀번호를 쓰지 않을까 불안한 팬들의 마음이다...
  • 삼미와 타이를 이루는 18연패
  • 26실점 패배
  • 감독
    • 강병철 전 감독: 김영덕 감독 시절 같은 팀에서 1988년~1990년 시즌 동안 수석코치로 있었는데 1990년 시즌 후 종신감독 파문으로 인해 팀을 나왔다. 문제는 이게 팀내 분란으로 이어졌단 거며, 강병철 본인은 롯데 감독으로 돌아와 1992년 정규시즌 우승을 한 빙그레를 한국시리즈에서 이겨버리는데 그 여파로 이듬해 해태 타이거즈만 아니면 리그 최강이라는 평가를 듣던 이글스는 무너지기 시작했고 김영덕 감독도 1993년 시즌을 끝으로 감독직을 사퇴했다. 1993년 시즌 후 한화 이글스의 감독으로 왔는데 감독기간 5년 동안의 결과물은 그저 그런 팀으로의 추락이었다.[50] 결정적으로 그가 팀을 떠난 다음해 바로 우승...덕분에 이글스의 역사를 아는 팬들에게 강병철은 금지어 그 자체다.
    • 유승안 전 감독: 빙그레 이글스 초창기의 레전드이자[51] 2003년, 2004년 한화 감독 역임. 허나 이 당시 팀 성적은 5위-7위를 기록.
특히 2004시즌 중반 유승안 수비 시프트 사건은 유명하다. 그렇지만 무엇보다 이 감독의 평가가 박한 것은 다름아닌 아들내미의 한화 시절 먹튀짓 때문이다. 오죽하면 아들내미가 당시 팀 신인 최다계약금 5억 5,000만 원으로 입단했을때 아버지의 퇴직금이 아니냐고 할 정도. 그 아들내미는 2012 시즌 LG의 필승조로 대활약하여 3회 WBC 국가대표로 선발되었다. 이후 다시 부진했지만 2014년 아시안게임 대표로 선발되어 병역특례를 받는데에 성공.
그리고 권준헌송지만의 트레이드건도 있었다. 결과는 보시는대로.
  • 김인식 전 감독: 2005년~2009년까지 한화 감독 역임. 초창기(2005~2007)에는 4(플레이오프 진출)-2(정규시즌은 3위, 한국시리즈 진출)-3으로 성적이 좋았다. 하지만 타 팀에서 퇴물로 전락한 한물간 노장선수를 재활공장장이랍시고 불러내어 엄청나게 굴렸고, 정작 팀의 신인선수나 유망주들은 제대로 키워내지도 않으면서 2군으로 한없이 썩게 만들었다. 거기다 그 신인들 중 몇몇을 노예마냥 엄청난 혹사를 시켜 버로우 타게 만들고[52] 무엇보다도 쓰지도 않을 유망주들을 군입대 연기라는 최악의 병크를 터뜨려 2012년까지 팀 뎁스에 심각한 문제를 야기했다.
결국 팀의 당면 과제인 세대 교체를 너무나 등한시한 결과 말년(2008년~2009년)에는 5-8로 최악의 성적을 거둬 사퇴하고 말았다. 위에 나열한 갖가지 삽질과 병크로 인해 현재까지 한화 이글스 최악의 암흑기를 제공한 인물로 지목되고 있다. 다만 프런트의 잇단 삽질과 후임 감독들이 영 좋지 못하면서 성적에 대한 재평가도 일어나고 있다. [53]
  • 한대화 전 감독: 김인식 감독에 이어 2010년~2012년 8월 27일까지 감독직 역임. 김인식 체제로부터 시작된 한화의 암흑기 기간 동안 리빌딩이란 목적으로 취임을 했으나 제대로 육성된 선수들은 거의 없다시피 하며[54]2010년에 다시 한 번 최하위를 기록하지만 2011년에는 초반에 죽쑤다 5월 중순부터 갑자기 선발진이 제대로 자리잡히고 카림 가르시아가 오면서 팀의 전력이 상승하기 시작해서 야왕#s-3(野王)돌풍을 기록하는 등 많은 팬들의 지지를 이끌었으나, 박찬호, 김태균, 송신영야심차게 전력을 강화시킨 2012년에 그만 팀이 완전 시망해 버렸다.
도저히 눈을 뜨고 볼 수 없는 수비에 허접한 기본기, 수많은 삽질로 인해 시즌 초반부터 완전히 최하위에 머물렀으며, 팀 리빌딩은 커녕 도저히 회생할 기미가 보이지 않자 결국 8월 27일자로 불명예 중도해임되고 말았다. 2012년 남은 시즌은 한용덕 수석코치가 대행을 맡기로 했지만 수석코치도 전혀 이 사실을 몰랐을 정도로 시즌이 거의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서 급작스레 경질된 상황은 타팀 팬들 뿐만 아니라 감독 경질을 외치던 한화팬들마저 프론트를 향한 비판의 목소리가 높았다.
그나마 없던 전력속에서도 김응용보단 나았다며 재평가를 받고있다.
  • 김응용 전 감독: 한국프로야구 최초의 9위와 2003년 롯데가 세운 개막 12연패를 경신하며 개막 13연패 기록, 개인 기록인 10연패를 넘은 13연패마저 경신하며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그에 대한 비판론까지 나오고 말았다. 팀 뿐만 아니라 김응용 감독 커리어에 오점으로 남겼다는 불명예를 얻게 되었다. 이후 간당간당 승을 쌓게 되지만 선발 투수 로테이션 파괴, 송창식의 혹사, 위장선발 등 쌍팔년도식 투수운영, 성공률이 극단적으로 낮은 얼척없는 작전 구사, 공개적인 선수 디스 에 이어 그날 경기를 복기해도 모자른 시간에 자팀 경기가 부끄러워서 드라마나 본다는 인터뷰로 빈축을 샀다.
그나마 후반기에 들어서는 막장이었던 전반기보다는 나은 비교적 무난한 경기 운영을 보였고, 송창현 등 신예들의 활약으로 리빌딩을 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으며 FA 2명(이용규, 정근우)를 영입하기도 했으나 2014년에도 환승 없는 8->9위, 즉 2년 연속 최하위를 하면서 5886899라는 비밀번호를 만들었다. 거기에 인터뷰에서 2년간 병이 안나서 다행이다.라는 발언이 더해져 백인천/이순철의 뒤를 이은 감독 취급 자체를 해주지 않는 사례를 만들어버렸다.
하지만 그 아래에 있는 감독에 비한다면 다른 감독들은 아무것도 아니었으니...
  • 2014년 5월 27~29일, 역대 한 시리즈 3연전 최다실점(51점, 대 NC전) 기록
  • 5월 29일, 12연속 출루허용으로 역대 최다 연속 출루허용 기록
  • 투수진이 한 경기 3루타 5개 및 한 경기 두 타자 연속 3루타 2번 허용 그래놓고도 그 경기를 15-16으로 이겼다!
  • 김성근 전 감독: 지금까지의 감독들이 커피였다면 김성근은 T.O.P이다.
  • 한용덕 전 감독: 2018시즌 얻어걸린 가을야구 성공에 감춰졌던 문제점들이 2019 시즌에 곧바로 드러났으며, 2020 시즌에는 그 삼미 슈퍼스타즈와 타이 기록인 18연패에 커다란 지분을 제공하며 중도 사퇴했다.[55] 게다가 정대훈에게 아직도 야구 안 그만뒀냐고 말하는 등 선수들에게 지나치게 직설적인 언행을 즐겨하며 여러 번 논란을 일으키거나 5~7점대 찍는 고참 투수들이나 부진한 베테랑 야수들이 대놓고 뒷담화깠다는 말이 기자들 사이에서 나오는 등 선수단 장악에도 실패한 증거들이 계속 드러났다. 한다던 리빌딩은커녕 성적도 못냈고 10년만의 가을야구조차 폄하되게 만들 정도로 팀에 치욕적인 기록만 남긴 이후론 그냥 그 전 감독보단 낫고, 팀에 애정은 없었지만 리빌딩은 하고 갔으나 9호선만 타다 나가버린 감독보다도 못한 사람 취급받는 중.
  • 선수
  • 권근한: 1995년에 구단의 차별 및 2군 생활을 비관해 제초제를 마시고 음독자살.
  • 김강: 거포 유망주였으나 1군에서는 몇 경기 못 뛰고 두산 베어스로 이적. 그러나 두산에서도 1루, 지명타자 요원이 포화상태라 전혀 기회를 얻지 못하고 있다. 결국 두산 베어스의 코치가 되었다. 이후 KT 위즈로 가서 팀의 타격을 개안시키는 업적을 남겼다.
  • 김광수: LG에서 부진하던것을 그대로 데려왔으나, 김광숯이라는 별명만 남기고 기아로 트레이드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기아 가더니 꾸역꾸역 투구를 이어가며 필승조로 활약해주었다.
  • 김원석: 팬과 치어리더, 동료 선수와 감독 및 코칭스태프, 전태일 열사까지 모욕한, 그야말로 트위터는 인생의 낭비라는 것을 보여준 흑역사 인물.
  • 마일영: 한화이글스의 얇은 불펜진에서 그나마 선전하는 편이었던 마정길과 3억[56]을 주고 영입해왔다. 2009년 타고투저와 구위하락으로 부진한 성적이었지만 얇은 한화 선발진에 힘이 되줄수 있다는 평가를 당시에 받았으나... 이후 마일영은 그냥 폭망한 성적을 기록했다. 그나마 2011년과 2012년은 어느정도 스윙맨 역할을 하며 FA계약도 얻어냈지만, FA계약 이후 3년간 34게임 출장했다. 2013~14년은 한화이글스 투수진이 완전히 무너진 해임에도 기회를 못 받은것을 보면... 게다가 넥센간 마정길은 꾸준히 넥센 투수진에서 추격조 역할을 해주다 은퇴했다. 명실상부한 한화 최악의 트레이드 중 하나.
  • 브라이언 배스: 2012시즌에 잠시 뛰었던 용병으로 한화 외국인 관광객이라 해도 손색이 없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
  • 션 헨: 브라이언 배스의 대체 용병으로 영입되었으나 역시 부진. 결국 7월 24일자로 퇴출되었다. 최소한 이 둘만 아니었어도 한대화가 중도 경질되진 않았을 것이다.
  • 송신영: FA로 2011 시즌 후 LG에서 이적했지만 2012시즌에 불쇼만 저지르며 분식왕으로 등극하고 먹튀로 전락하더니 2012 시즌 후 특별지명으로 인해 NC로 이적했다. 그리고 NC에서도 반년도 안돼서 트레이드로 다시 넥센으로 복귀했다. 결과적으로 보면 송신영은 2년사이에 유니폼을 4번씩이나 갈아입었다(...),
  • 호세 카페얀: 방어율 9.15, 0승 11패... 2015년에 세상을 떠났다.
  • 유원상: 2006년 입단 당시 팀 신인 최다계약금(5억 5,000만 원)에 입단하여 기대를 받았으나 이후 희망고문 및 먹튀짓 제대로 활약을 한 적이 없었고 결국 2011시즌 LG로 트레이드 되었다. 공교롭게도 2012년에 LG에서 필승조로 날아 다니더니 3회 WBC 국가대표로 선발되었다(…). 여러모로 한화팬들에게는 먹튀XX로 기억될 선수.
  • 유창식: 계약금 7억에 구대성의 번호를 부여받는 등 미래의 좌완 에이스라는 엄청난 기대를 받았으나, 야구를 제대로 하고 싶은지 의문스러운 태도[57]와 수많은 볼질로 팬들을 실망시켰다. 거기에 구대성의 등번호를 달고 승부조작까지 벌여 그의 등번호 15번을 더럽혔으며[58] 전 여자친구를 성폭행까지 하면서 응원하던 팬들에게 빅엿을 먹였다. 이제는 한화 소속이 아닌게 다행일 지경[59] 오죽하면 올드 한화 팬들이 정말 싫어하는 김성근의 업적으로 6이닝 117구 벌투와 고향팀으로의 트레이드 가 꼽힐 정도다.
  • 장명부: 빙그레의 창단 멤버로 영입되었으나 1승 18패의 처참한 성적을 남겼다. 당시 노진호 단장의 말이 참 가관.[60]
  • 조효상: 2013년 프로농구 승부조작 사건에 브로커로 가담하였다.
  • 김도윤: 1999년 우승멤버인 외야수. 은퇴하고 병역비리 브로커가 되었고, 결국 구속되었다.
  • 최진행: 금지약물 복용.
  • 최진호: 뺑소니 사망사고를 낸 후 도주, 재판에서 징역 7년형을 선고받았다.
  • 나이저 모건: 펠릭스 피에와의 재계약 실패 후 새로 영입했으나 요란한 T-세리머니만 남기고 퇴출. 다만 성적 자체가 나쁜 편은 아니었기에 김성근에게 찍혀서 쫓겨났다는 이야기도 많다. 모건이 멀쩡하게 뛰었다면 가을야구는 갔을 것이라는 게 팬들의 소견.
  • 엄태용: 2군에서 괜찮은 성적을 기록하며 유망주 포수로 나름 기대받았으나 폭행+미성년자 성폭행 혐의로 방출되었다.
  • : FA 먹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FA 미아신세를 면하게 해주었으나 구단에 트레이드를 요구하는 등 명분 없는 항명과 팀 무단 이탈 사태를 일으키다 무기한 선수 활동정지라는 결말을 맞이할 뻔했으나 19시즌 말엽 감독에게 사죄하고 돌아오더니 2020시즌엔 "선수단 투표로" 주장으로 선출되어 1군으로 복귀했다! 이는 선술했듯 한용덕이 감독으로서 선수단 장악 측면에서 얼마나 무능했는지를 증명하는 사례로 거론된다.
  • 선수의 등번호 관련
  • 김태균의 10번: 원래 52번이었으나 2년차를 맞아 10번으로 변경했지만 망했어요. 2003년부터 2009년까지 다시 52번으로 원상복귀해 사용. 국내 복귀 후부터는 다시 52번을 착용하였다. 이로써 10번은 완벽한 흑역사화.
  • 이여상의 7번: 22번을 달았을 때에는 2011년에 커리어 하이를 찍은 뒤에 7번을 달았는데 실책성 플레이에 의해 초반부에는 폭ㅋ망ㅋ하고 후반부에는 약간이나마 나아지기라도 했지만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백업 수준에 그쳤다. 2013시즌에는 전 시즌보다 아예 제대로 폭망하고 말었다. 결국 2차 드래프트때 롯데 자이언츠로 이적하면서 이 등번호는 빼도 박도 못하게 흑역사화.
  • 장성호의 31번: 트레이드 직후 딱 이틀 동안 달았지만 이후 등번호를 1번으로 바꾸면서 묻혔다.(...)
  • 하주석의 1번: 2019 사즌 초반 무릎 십자인대 파열로 시즌 아웃되며 흑역사화.
  • 코칭스태프
  • 이상군: 선수로서는 더 없이 훌륭했다. 이글스의 초대 에이스#s-2.2. 하지만 코치와 스카우트로서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단 감독대행시절에는 관리야구를 보여주며 전 감독의 저주를 이겨내고 이듬해 포스트시즌 진출의 기반을 닦았다고 평가받는다.
  • 조경택: 선수협 5적에 버금가는 활약과 더불어 10년동안 코치하면서 제대로 육성한 포수가 없었던 것으로 까였다. 그런데 두산 가서는 우승(...).
  • 강석천: 수비코치 시절, 뇌수비의 주역. 두산에서는 수석코치까지 올라간 것이 아이러니.
  • 김민재: 이 사람이 코치를 하던 시절 뇌주루, 뇌수비를 선수들이 보여주었다. 결국 잘려서 두산으로 갔다가 두산에서 사퇴 후 kt wiz행.
  • 송진우: 한화 이글스 코칭 1기 한정. 2기는 그야말로 송골매직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 장종훈: 2018시즌 타격코치 시절 한정. 선수로는 더할 나위 없지만 타격코칭에는 그야말로 재주가 없다. 오죽하면 전 야구 커뮤니티를 통틀어서 경질 1순위로 꼽은 사람이 장종훈 코치이다 덕아웃 VVIP 시즌권 끊었다는 비아냥은 덤. 한용덕 감독이 사실상 타격에 대해 장종훈에게 일임을 하고 있다보니. 더욱 더 까이는데 기어이 11년만에 간 가을야구에서 1승 3패로 광탈하게한 원흉이다. 하지만 이것은 당시 타격코치를 영입하려 했지만 마땅한 인물을 구하지 못해서 생긴 일이다. 2019시즌 부터는 수석코치 업무에만 전념하게 되었다. 2020시즌 팀이 12연패에 빠지자 1군에서 여러 코치들과 함께 말소되었고,[61] 이 조치 이후 14연패까지 찍자 한용덕 감독은 사퇴하고 말았다. 이에 대해 구단이 감독에 압박하기 위해 직접 개입했다는 썰과 감독이 홧김에 내렸다는 썰이 양립하고 있다.

2.1.7. LG 트윈스


  • MBC 청룡의 안습성적: 3-2-4-5-3-5-6-6: 중간에 3과 4가 보이지만 이때는 전기리그 우승팀과 후기리그 우승팀끼리 한국시리즈를 치렀기 때문에 별 의미가 없다(…). 한국시리즈에 단 한 번 진출해서 그것도 패배. 거기다 LG 트윈스로 바뀌기 이전에는 당시 7개팀 중 포스트시즌에서 1승조차 올리지도 못했다.
  • 1995년 시즌 6할승률 거두고 3위: OB와 시즌 초반부터 선두 싸움을 펼쳤고 9월초까지는 OB와 무려 6게임차로 1위를 달리고 있었지만 이광환 감독의 잘못된 운용과[62] 막판 OB가 사기적인 승률(27전 20승7패)로 맹추격한 끝에 0.5게임차로 OB에게 1위를 내줌으로써 6할 승률 거두고도 우승 실패한 첫번째 팀이 되었다. 근데 왜 2위가 아니라 3위냐면 플레이오프에서 롯데에게 2승4패로 패하였기 때문...
  • 1996년 시즌: OB만큼은 아니지만 2년전 챔피언의 위용이 사라졌다. 이상훈의 부상으로 인한 공백과 전년도 1위를 놓친 후유증으로 인해 꼴찌까지 떨어졌다. OB의 DTD가 아니었으면 10년 후에나 한 꼴찌를 먼저 겪었을지도 모른다. 도저히 올라갈 기미가 안보이자 어느 포수를 놓고 전년 챔피언 OB와 꼴찌 경쟁을 했다 카더라. 신바람 야구의 선봉이었던 이광환 감독은 올스타전 직후 짤렸고 천보성 감독 대행으로 시즌을 7위로 마무리. 그나마 그 이듬해부터 2연속 한국시리즈 진출을 해서 강팀의 면모를 빠르게 되찾았다.
  • 1997년 어린이날 3연전 대참사: 5월 3일부터 5일까지 대구에서 치른 3연전 동안 삼성에 스코어 3:9, 5:27, 1:13으로 전부 대패했다. 3연전 동안 무려 49실점을 기록했으며 허용한 피홈런은 무려 17개. 엘린이들을 그야말로 충공깽에 빠트렸다. 이는 2014년 5월 한화가 경신하기 전까지 17년 동안 한 시리즈 3연전 최다실점 기록으로 남아 있었다.
  • 1999년 시즌: 외국인 선수 스카우트 실패[63]와 신인 육성의 실패가 겹쳐 매직리그 3위, 종합 6위에 그쳤다. LG 밑에 있던 팀이 자금난을 겪던 해태와 쌍방울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충격. 게다가 20승에 선착하고도 4강 진출에 실패한 첫 사례가 되었다.
  • 2001년 시즌: 5월 중순까지 9승 1무 25패라는 처참한 성적을 기록하였다. 결국 이광은 감독이 짤리고 김성근 수석코치를 감독대행으로 승격해서 겨우 수습하여 6위를 기록. 사실 이것도 대단한게 2001년이 유례없던 4위 경쟁이라서 4위에 1경기 차로 뒤진 것이었다. 이러한 성과로 인해 시즌 후 김성근을 감독으로 승격시키고 이듬해 2013년 이전까지 마지막 가을 야구였던 2002년 한국시리즈까지 진출하는 성과를 거뒀지만...
    • 이광은 전 감독: 2000년 플레이오프때 이해할 수 없는 경기 운영으로 말아먹은 것도 모자라 2001년 초반 압도적인 최하위로 꼴아박아서 시즌 도중에 경질되었다. 그를 이은 후임이 바로 위에서 언급한 김성근.
  • LG 트윈스/2015년: 시작부터 상대팀 팬들을 즐겁게 하는 영화제흥행을 주도하더니, 5월에 열심히 공들여 쌓아온 순위를 대차게 말아먹고 9위로 엎어진 뒤 단 하루를 빼고[64] 시즌 종료까지 그 순위를 유지,[65] 거기에 운도 안따르고[66] 다른팀들 모두가 치열한 승부를 벌인 시즌에 혼자 경기도 재미없어서[67] 흑역사 확정.
  • LG 트윈스/2017년: 한마디로 2007 시즌의 재림. 초반에는 기세등등하게 상위권을 유지했지만, 여름에 들어서면서 타선 침묵, 삽질 연속의 불펜 운용, 중요선수 부상, 사건사고 등 이런저런 악재들이 터지면서도 간신히 중위권을 유지했지만, 8월에 들어서며 잇따른 역전패와 신규 용병의 임의 탈퇴, 그리고 중위권 팀들의 강세로 인해 결국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한다.
  • LG 트윈스/2018년: 2011 시즌의 재림. 초반에는 눈에 띄게 향상된 타선과 준수한 투수진의 힘을 바탕으로 상위권에 위치했으나 시간이 지나며 투수 혹사 문제가 수면 위로 올라오기 시작했고, 결국 7월 21일 경기에서 마운드가 대폭발한 것을 기점으로 완벽하게 DTD를 타버리며 시즌을 8위로 마무리했다.
  • 2006~2007년 핫핑크 유니폼: 유니폼 좌측에 있던 로고 대신 영문 팀명로고를 가운데에 박았으나 대충 바꾸어서였는지 결국 로고를 제외하면 유니폼 디자인은 그대로 두었고. 결국 이 유니폼을 입고 2006시즌에 구단 사상 최초로 처음 꼴찌를 기록했다[68]. 이듬해인 2007년에는 3단계로 올린 5위로 올라왔지만 삼성에 밀려 가을야구에 진출하지 못했다. 선수들이 조사한 유니폼에서 1위를 기록했지만 색채를 빨간색으로 교체한 2008 유니폼에 의해 재빨리 잊혀졌다. 지못미. 전자는 유니폼 디자인, 후자는 모자 로고와 가슴 로고에 가깝기 때문에 사실상 쓰레기 유니폼이라 평 할 정도.
2008 유니폼도 처음에는 꼴찌를 기록했지만 그나마 오래 버티기를 하고 있다. 그 대신 원정은 검정색에서 회색으로 바뀌었지만. 그런데 비밀번호만 점점 늘어나가고 있다! 결국 원정을 검정색에서 회색으로 바꾸고 2013년이 되어서야 비밀번호를 끊어냈다. 결과적으로 변경 전의 검정색 원정 유니폼(2008~2011.6) 입장에서는 더욱 안습한 격.
  • 2010 마스코트 공모전: 아직 마스코트가 바뀔 때가 아니었음에도 공모전을 강행한 LG 구단 프런트의 또 다른 삽질. 결국….
  • 어윤태 전 사장: 현재 영도구청장 역임 중. 이 양반이 저지른 삽질로 인해 LG의 암흑기가 도래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최고의 리즈시절이었던 1994년 LG 트윈스의 당시 단장이었으며 마지막 가을야구를 한 2002년 LG 트윈스 당시 사장이었다. 1994년 시절의 신바람 야구에 너무 맛이 들렸는지 당시 무너진 팀을 수습하여 한국시리즈 준우승이란 돌풍을 일으킨 김성근 감독에게 "이건 김성근 야구지 LG 야구가 아니다"라는 희대의 망언(?)으로 해임시킨 일화는 유명하다. 그리고 1994년 LG 감독을 맡은 감독이자 신바람 야구의 주역이었던 이광환 감독(어윤태와는 고려대 선후배 관계)을 앉히지만 결과는….
그것도 모자라서 이광환 감독까지 쫓아내고 당시 코치로 재직중이던 금지어를 감독으로 내세워 강제 리빌딩을 시키려다 LG의 프랜차이즈 고참들을 다음과 같이 몰아내는 막장 행각을 펼쳤다.
  • 이상훈 트레이드, 유지현 반 강제은퇴, 김재현 각서 파동 등등.
  • 6668587667으로 대표되는 2003년부터 2012년까지의 암흑기: 2003년부터 2012년, 두 자리 수이자 무려 10년 기간의 암흑기다. 암흑기도 이런 암흑기가! 2013년 9월 22일 NC 다이노스를 꺾고 포스트시즌 매직넘버를 0으로 만들면서 이 비밀번호가 드디어 종결되었다.
  • 668587667 을 찍은 3명의 감독들: 첫 6을 찍게 한 이광환 감독은 그나마 예전에 우승이라도 했다.
  • 이순철 전 감독: 한국프로야구 사상 금지어 감독을 꼽으려면 이 감독이다. 엘지 팬으로썬 다신 보기 싫은 인물. 유지현, 김재현, 이상훈을 반 강제 은퇴시키거나 이적시켜[69] 프랜차이즈 스타를 숙청했었고 특히 이상훈과의 사건은 LG팬들로부터 이를 갈게한 원인을 제공하고 말았다. 성적 역시 66을 찍고 2006시즌에도 하위권에서 논 끝에 사퇴. 양승호 감독대행이 고군분투했으나 꼴찌를 기록했다.
  • 김재박 전 감독: 587을 찍었다. 프랜차이즈 스타 출신인 감독으로[70] 첫 시즌에는 포스트시즌에 탈락했음에도 5위라는 희망적인 성적을 냈지만[71] 이후에는 시원치 않은 성적을 기록하면서 감독 역량의 한계를 드러냈다. 그 과정에서 그걸로 인해 DTD가 재조명되었다. 현대시절의 4회 우승과 대조적인 성적으로 그의 커리어 말년을 말아먹고 만 시기.
  • 박종훈 전 감독: 66을 찍었다. 그것도 2011년 4강을 노리다가 1위에서 7위까지 수직추락하여 DTD를 입증.
  • 김기태 전 감독(2012, 2014시즌): 2012시즌에 주축선수 5명이 떨어져 나가고 없는 전력속에서도 초반 상승세를 이끌어 돌파구를 찾을려고 안간힘을 쓰는 듯 했었지만 팀의 내팀내 모드. 도중에 벌어진 투수를 타자로 황당하게 데뷔전을 치른 선수로 경기포기 논란까져 겹쳐 까였었고 감독 능력의 한계까지 겹쳐 팀의 두 자리 수 암흑기 및 10번째 가을야구 실패를 맛본 감독이 되는 희생양이 되었다. 하지만 감독으로서의 첫 시즌을 치뤘기 때문에 동정심도 있었고 선수들을 친화력으로 이끌기도 했었으며 이후 2013시즌에는 비록 플레이오프에서 두산 베어스에 패배했지만 5월 말부터 9월 중순까지 승승장구를 하고 결국 6668587667의 비밀번호를 끝냈...지만, 2014 시즌에 팀 상황이 어려워지면서 단 18경기만 치르고 전격 사퇴해버렸다.[72] 이에 대해 처음에는 프런트와의 불화로 알려져서 프런트를 대차게 까는 수준이었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팀은 점점 더 바닥에 치달았고, 그로 인해 김 감독은 팀을 버리고 도망간 선장으로 비판받게 되었다. 때마침 시기도 겹쳤는지라... 2014년 5월 들어서는 작년 비밀번호 끊은 업적이고 머고 런기태, 도망기태로 대차게 욕 잡수시는 중. 그나마 후임 감독이 팀을 조금씩 추스려서 2년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에 성공했다.
  • 2004년 제2창단 선언: 이 해 금지어 이순철이 감독이 되면서 내세운 선언이었지만 결국엔 암흑기의 시작을 알리는 선언이 되었다.
  • 108경기 연속 10득점 미만 : 2005년 7월 22일 잠실 두산전부터 2006년 7월 1일 SK전까지 10득점 이상을 기록하지 못했다.
  • 2008년 슬로건: 다시 부는 신바람! 팬과 함께 V3! 이었다. 하지만 이는 현실은 시궁창의 대표적인 예로 전락했고 꼴찌를 기록했다.
  • 2011년 7월 31일 넥센과의 트레이드: 송신영은 19경기밖에 못 썼고, 김성현은 승부조작으로 구속되었다. 반면 심수창은 개인 최다 연패기록을 넥센에 가서 깼고 박병호는 넥센에서 대폭발했다.
  • 627 대첩: 어떻게 이런경기를... 직접 들어가서 보자
  • 두엘롯, 엘롯기, 엘넥한모두 소속: 이렇게 된 것은 6668587667의 영향이 크다.
  • 소속 선수사이클링 히트를 친 경기에서 패배
  • 2018시즌 두산전 1승 15패: 마지막 16차전 경기에서 차우찬이 130구 넘는 투구수로 완봉을 하여 한 시즌 특정 한구단에 전패기록은 세우지 못했다.
  • 2020시즌 페넌트레이스 마지막 2경기 : 페넌트레이스 142경기를 치른 시점까지 2위였으나 마지막 2경기에서 최하위 두 팀인 한화와 SK를 상대로 2패를 기록하며 4위로 주저앉았다. 특히 한화전에서 6:0으로 앞서있었음에도 선발투수 임찬규가 얻어맞는데도 4실점할 때까지 방치하는 총력전 선언이 무색한 안일한 경기운영으로 결국 대역전패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재계약이 유력해보였던 류중일이 일부 LG팬들의 신뢰까지 완전히 잃어버린 결정적 경기이다. 그리고 당시 수석코치였던 류지현 신임 감독도 감독 부임 후 인터뷰에서 이 일을 흑역사로 인식하고 있다.
  • KBO 준플레이오프/2020년 : 와일드카드는 통과했으나 라이벌 두산을 상대로 2전 2패로 탈락했는데 이는 LG 역사상 유일한 포스트시즌 시리즈 전패 탈락이다. 2차전은 타격이 터졌으나 류중일이 타선폭발 직전 진해수가 8실점하는데 방치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추격만 하고 패배하고 말았다.
  • 선수
    • 김재현: 음주운전 적발 2회에 1회는 측정 거부로 입건된 사례가 있다.
    • 김성현: 2012년 프로야구 승부조작 사건에 가담하였다. 이로 인해 2012년 2월 29일 검찰에 구속 크리.
    • 매니 아이바
    • 방화신기로 대표되었던 불펜
    • 박현준: 2011년에는 선발진에 안착하며 13승으로 포텐이 터졌지만 2012년 3월 3일자로 과 마찬가지로 승부조작 사건에 가담을 시인했다.
    • 서승화: LG 트윈스의 암흑기를 상징하는 선수. 결국 2011시즌 끝나고 방출되고 말았다. LG트윈스 투수 서승화 선수가 사기 행각으로 1심에서 유죄 판정을 받았다. 서승화가 발을 걸면서 윤재국선수의 선수생명이 끝났다.
    • 오상민: 삼성 라이온즈 시절 2004년에는 병역비리에 연루되어 구속, 2009년 시즌 전에는 도박혐의에 연루, 2009년 사기죄로 대구지방법원에서 법정 구속되었다가 보석으로 풀려난후 LG 트윈스에 복귀, 2011년 내연녀가 자살하는 사건이 터지며 은퇴하였다.
    • 송신영: 빌리장석에게 제대로 놀아나면서 단 19경기 만에 한화로 내줘야 했다. 그러나 송신영은 2012 시즌이 끝나고 NC로 이적했다가 2013 시즌 초중반에 다시 친정팀 넥센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2015년이 끝나고 다시 한화로 갔다.(?)
    • 이정길: 국내 프로야구계의 첫 먹튀.
    • 홍현우, 마해영, 진필중, 박명환#s-1을 필두로 했던 FA 먹튀들: 엄연히 따지면 마해영은 LG에서 FA영입한 선수가 아니라 기아와의 3:3트레이드로 받아온 선수.
    • 트레이드했다가 탈쥐효과로 타 팀에서 포텐 터진 선수들: 이용규, 타자 김상현, 박병호 등.
    • 김유선: 원조 사이버투수. 2007년 1차지명을 받고 입단했으나 고교 3년 내내 제대로 등판한 적이 거의 없었으며 입단 이후에도 1군 기록은 전혀 없고 2군에서도 거의 나오지 않았다.[73] 결국 2012년 시즌 종료 후 방출.
    • 정찬헌: 2015년 음주운전으로 적발되어 시즌 잔여경기 출장정지의 중징계를 받았다.
    • 윤지웅: 2017년 7월 10일 아침에 음주운전으로 사고를 냈는데, 음주운전 자체도 문제지만 사고를 낸 게 이병규의 은퇴 영구결번식 바로 다음날 아침이었다. "후배들에게 너무 큰 짐을 지워서 미안하다. 더 큰 책임감을 가지고 야구를 해주기 바란다"며 이병규가 눈물로 마지막 인사를 전한지 10시간도 안지나서 이런 대형사고를 쳐버린지라 완전히 흑역사화 되었다. 거기다 체포된 이후에 이병규랑 같이 술을 먹었다라는 거짓말까지 해버리는 등 금지어가 되었다. 결국 벌금 1000만원에 상술한 정찬헌처럼 잔여경기 출장정지 중징계를 받았으며, 2018시즌 이후 방출되었다.
    • 제임스 로니: 2017년 7월 18일 대체선수로 입단한 이후 화려한 커리어에 비해 제 역할을 못해주면서 적응차 8월 26일 2군으로 보냈는데 문제는 다음날 27일 2군행에 불만을 품고 미국으로 출국해 버린것이다.[74] 결국 29일 이 사실이 임의탈퇴 소식과 함께언론에 알려지면서 LG 트윈스 사상 역대 최악의 외국인 선수로 기록되게 되었다.
    • 오배강(오상엽, 강승호, 배재준) - 멘탈이 안좋고 불성실한 모습과 지나친 SNS질로 LG팬들의 지탄을 받았던 13드랩 트리오. 오상엽은 기량미달로 2017년 방출되었고, 강승호는 2018년 여름 트레이드 된 이후 이듬해 음주운전으로 임의탈퇴되었으며, 마지막 남은 배재준마저 2019년 말 폭행 사건으로 선수생활이 끝장날 위기에 놓였다.
      • 류제국 - 불륜 사건이 원인이 되어 시즌 중 은퇴했으며 그 과정에서 주장이면서도 뒤에서 팀 동료를 디스하는 메시지들이 밝혀지며 검찰 송치되었다.#
      • 임정우 - 여친 폭행사건으로 흑역사화. 합의를 해서 법적 책임은 없다.
      • 윤대영 - 2차 스프링캠프 참가가 불발되자 음주운전을 저질러 임의탈퇴되었지만 윤형준으로 개명후 팀에 복귀하였다.
      • 배재준 - 한 시민의 얼굴을 때린 혐의로 2020년 1월 2일 입건, 당시 만취 상태였다.
  • 코칭스태프
    • 강상수: 명실상부 2018시즌 10개구단 최악의 투수코치. 관리도 육성도 투수 운용도 무엇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 결국 차명석 단장 부임과 함께 잘렸다.
    • 김영직: 1997년부터 코치를 했으나, 키운선수도 없고, 한 일이 없다.
    • 김용국: 2002년 한국시리즈에서 번트 사인을 놓쳤고, 패배에 일조했다.
    • 정삼흠: 심재학을 투수로 만드는 삽질을 했었다. 이순철이 감독이 되면서 잘렸고, 부천고 감독시절 뇌물을 받아 복역했었다.
    • 김용수
    • 김용달: 스위치 타자 전형 성애자
    • 서효인: LG버전 조경택
    • 이상군: 이순철 시기의 1군 투코
    • 이건열: 이순철 시기의 1군 타코
    • 양승호: 전 감독대행, 고려대 감독 시절에 뇌물을 받은게 걸려서 복역함.
    • 정진호: 전 수석코치, 연세대 감독 시절에 뇌물을 받은게 걸려서 복역함
    • 염경엽: 전 수비코치, 타격능력이 떨어져 펑고도 못쳐줬다는 말이 있고, 파벌설에 휘말리기도 했다. 다만 파벌설은 악성루머였다.
    • 송구홍: 운영팀장. 2014년부터 계속되는 외국인선수 선발 삽질하고도 단장 자리까지 올랐다.
    • 서용빈: 타격코치로 시대에 맞지 않는 타격이론으로 LG 트윈스의 타격을 말아먹은 주범이다.
  • 뚝섬 돔 경기장

2.1.8. NC 다이노스


  • NC 아구스 작명 시도: 한국아구데이위원회와 마산아구데이위원회라는 참으로 이름에서부터 속이 보이는 곳에서 9구단 명칭을 아구스로 하자고 창원시와 엔씨 소프트에 공식 제안했다. 해당 기사 당연히 야구팬들의 반응은 이게 뭥미라는 반응과 함께 폭풍 같이 깠다. 애초에 아귀라는 것 자체가 통합 이전 마산만의 상징이었을 뿐 다른 진해나 창원과는 그다지 연관도 없다.[75] 이러한 점에서 구 마산만을 생각하는[76] 핌피식 이름 짓기라면서 까이고 있다.
  • 신축 야구장 부지 선정 논란: 창원시에서 창단 조건으로 약속한 신축 야구장의 입지를 정치적인 이유로 접근성이 좋지 못하고 기일 내에 정상적으로 완공하기조차 불가능한 진해 육군대학 부지로 선정하여 큰 논란이 되었다. 이로써 창원시와 NC 다이노스 구단간의 관계가 악화되어 연고지 이전 논란이 일어나는 등 신생구단의 원만한 정책을 위협받기도 했지만 2014년 9월 신임 안상수 시장이 구단의 요구와 시민 여론에 따라 마산으로 입지를 변경하여 일단락되었다. 자세한 사정은 NC 다이노스 홈구장 부지 선정 논란 참조.
  • 고성군과의 2군구장 건설 MOU: 애초에 구단명도 고성군이 공룡화석으로 유명한데서 지은 것이었고 이후 2군구장 건설을 위해 고성군과 협약을 맺었으나 창원시가 왜 창원에 2군구장을 건설하지 않냐는 식으로 딴지를 계속 걸었고 견디다 못해 결국 NC가 위약금을 물어주며 건설계획을 전면 백지화했다. 진해에 있는 구장은 공식경기 불가판정을 받은지라[77] 14시즌부터는 어쩔수 없이 포항 야구장에서 경기를 치루기로 했다.
  • 선수
    • 아담 윌크: 성적 부진으로 2군으로 내려가 있던 도중 트위터에 김경문 감독에 대한 항명으로 보일 수 있는 글을 올려 물의를 빚은 끝에 전격 퇴출되었다. 그리고 2014년 3월 인터뷰에서 한국 생활에 대해 발언했는데 삭막한 주변환경, 낯선 선후배 문화 등은 둘째치고 일본으로 도망갈 궁리를 했다는 발언으로 가루가 되도록 까였다. 동료였던 에릭 해커, 찰리 쉬렉은 물론 다른 구단의 외국인 선수들까지 졸지에 바보 멍청이로 만든, 카리대 못지 않은 최악의 외국인 선수로 기록될 듯.
    • 찰리 쉬렉의 스트라이크-볼 판정에 대한 항의와 욕설 사건
    • 이태양: 제 2의 프로야구 승부조작 사건의 승부조작범 중 한명. 이로 인해 6월말에 검찰수사를 받고 7월 20일부로 구단에서 방출됐다.
    • 이성민: 제 2의 프로야구 승부조작 사건의 승부조작범 중 한명. 본인은 현재 불구속 기소상태로 재판 중이고, 당시 NC 다이노스 구단이 승부조작을 인지한 다음, 은폐하여 KT가 20인 외 특별지명으로 이성민을 뽑도록 만들었다는 의혹이 있었다. 허나 구단의 은폐 의혹은 검찰 조사 결과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 2016년 한국시리즈: 20-2, 역대 한국시리즈 팀 최소 득점 및 최소 장타
  • 배석현: NC 다이노스 前 단장. 2016년 후반기 에릭 테임즈의 음주운전 당시 김경문 감독에게 사실을 은폐한 건으로 큰 비난을 받았다. 그 외에도 이성민이 승부조작을 했을 당시, 이를 은폐하여 KT가 20인 외 특별지명으로 이성민을 뽑도록 만들었다는 혐의로 특수사기 입건되었다. 허나 이 역시 검찰 조사 결과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 2018 시즌: 선수단의 부진, 프런트와 현장 간의 갈등으로 인한 김경문의 자진사퇴 형식으로 인한 해고, 줄줄이 이어지는 주전들의 부상 등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이 한꺼번에 터지면서 팀의 성적은 창단 첫 최하위로 곤두박질쳤다. 정말 장점이라고는 1도 찾아볼 수 없었던 아주 총체적 난국이었던 최악의 금지어 시즌.

2.1.9. 키움 히어로즈


  • 이장석의 막장 행각: 그러나 2011시즌 종료 후 돌택돌을 기점으로 달라졌다. 아직 불안한 시선은 남아 있지만. 그리고 2016년 재미교포 사업가와의 구단 지분 지급 문제와 횡령 등으로 고소당하여 구단과 본인 인생 최대의 위기를 맞게 되었다. 해당 문서 참조.
  • 창단 이후 2012년까지의 안습성적: 7-6-7-8-6으로 포스트시즌 진출이 한 번도 없다. 하지만 2013년에는 9월 28일 마지막 매직넘버를 지우고 포스트시즌에 진출했다. 아쉽게도 준플레이오프에서 두산에 리버스 스윕을 당하면서 4위로 마무리했다.[78]
  • 김민우, 신현철 음주운전 사건: 한창 잘 나가던 6월 터진 음주운전 사건.[79] 결국 그 주범인 김민우신현철은 결국 2013년 11월 22일에 열린 2차 드래프트에서 40인 보호명단에 묶이지 못하고 넥센 히어로즈를 떠나 KIA 타이거즈, SK 와이번스로 각각 이적하게 되었다. 음주 사건만 제외하면 1군에서 그럭저럭 쓸만 한 선수들이기에 징계성의 의미가 있지 않나 하는 기사가 나오기도 했다.
  • 1판정 8타점
  • 24실점: 그것도 6회 강우콜드로 이루어낸 기록이다. 그리고 이때를 기점으로 넥센은 NC의 완벽한 밥이 되고 말았다.(...)[80]
  • 김영민 SNS 성매수 및 룸살롱 출입 자백 파문: 해당항목 참조
  • 이숭용 약물: 해당항목 참조
  • 길민세
  • 넥센 히어로즈 특정 팬덤 지원 논란
  • 문우람: 승부조작을 직접 설계하여 이태양과 같이 연루된 혐의를 받고 있다.
  • 염경엽: 여러 공로는 있었다지만, 투수혹사,큰 경기 울렁증 등 과오도 많았다. 게다가 2016년 준플레이오프 패배 직후 마치 짜고 온듯이 사퇴 발표를 해 모두에게 충격을 주었다. 그 직후 교묘한 언플로 곧 SK 단장으로 부임하면서 팬덤과 완전히 척을 지고 말았다.
  • 영웅신화, 히어로즈 사랑 영원히: 악질 팬덤. 상대팀을 배려하지않는 온갖 비매너 응원으로 성숙치 못한 팬문화를 보여준다. 심지어 구단과 유착해 여러 특권을 누리며 갖은 횡포를 저질렀다.
  • 강정호: 음주운전 삼진아웃. 언론에 공개된 것은 2016년이지만 사실 넥센에 있을때부터 음주운전 경력이 있다. 먼저 2009년 8월에 음주단속에 처음으로 적발되었고, 이어 2011년 5월에는 음주운전으로 물적 피해가 발생한 사고를 냈는데도, 이 사실은 앞의 음주단속 적발 사실과 더불어 언론에 단 한 차례도 알려지지 않았었다고 한다. 그리고 2016년에는 음주운전 후 도주+운전자 바꿔치기+거짓 진술까지 줄줄이 걸렸다.
  • 션 오설리반: 넥센 구단 역사상 최고액인 110만 달러를 받고 계약했는데 선발 2경기에서 심하게 부진해서 불펜전향을 시키자 거기서도 불을 지르며 1군에서 선발로 2경기, 불펜으로 1경기만 뛰고 3경기 2패 8이닝 14실점, 평균자책점 15.75라는 답없는 모습을 보이고 방출.
  • 안우진: 넥센 구단 사상 최대 계약금인 6억원[81]을 받고 입단했으나. 2017년 후배를 폭행했다는 사실이 알려졌고, 결국 50경기 출장 정지와 국가대표 영구 제명이라는 징계까지 받게 되었다.
  • 이택근 : 야구방망이로 후배선수를 폭행하는 범죄 행위를 저질렀고 2019시즌 36경기 출장정지 처분을 받았다. 이래놓고 본인은 심각한 폭행은 아니었다라고 말도 안 되는 변명을 하였다.
  • 2020 시즌 : 차라리 꼴찌였던 2011년은 단순히 팀 전력이 좋지 못했다고 변명이나 하지, 이 시즌은 특정 주범들로 인해 망가졌다.
    • 허민 : 후술할 주범들에 묻혀서 그렇지, 이 기량 미달의 두 명을 뽑은 진정한 주범이며, 이장석과 달리 지분도 없는 사외이사인 주제에 팀의 질서를 어지럽히고 리그까지 무시하는 작태를 보였다.
    • 손혁 : 전술한 염경엽보단 똑똑하게 런하고 돌아와선 전 시즌 준우승 전력 중 요키시, 조상우, 김하성, 이정후 제외 전원을 박살내버렸다. 염경엽 처럼 쓸데없는 입 털기는 덤이다.
    • 김치현 단장
    • 테일러 모터: 성적도 개차반인데 여자친구가 한국 입국 후 코로나 19로 인한 자기격리 기간 중 격리자에 주는 식품을 폄하하고 안 먹은 걸 씨부린 글을 리트윗하고 대사관과도 접촉하는 등 소속 구단 및 KBO리그는 기본에 심지어 그나마 국제적으로 대처가 좋은 대한민국 정부까지 싸잡아 우롱한 격이 되면서, 팬들에게 실력도 없는데 싸가지도 없고 한국을 무시한 선수라며 자가격리 기간+실전 공백으로 인한 적응기간을 감수하고서라도 대체 외국인 선수를 구하면서 당장 방출해야한다고 보답하는 중이다. 그리고 2020년 5월 30일에 2020 시즌 첫 웨이버 공시가 되었다.
    • 에디슨 러셀 : 메이저 올스타 주제에 실책이 10개가 넘고 타격에서도 형편없는 모습을 보이면서 흑터 라는 별명을 얻으면서 평가가 좋지 않다. 그나마 코로나 창궐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마이너리그가 아예 취소되어 실전감각이 전무한 상태에서 대체로 온 데다가 로니, 반슬라이크와 달리 구단과 트러블이 없다는게 위안.

2.1.10. kt wiz


  • 육성선수 무단 계약 해지 사건: 2013년 육성선수들과의 계약을 해지하였고 규정 상 지급해야 하는 계약금도 KBO의 유권해석을 내세워( KBO는 그런 해석 한 적 없다고 부인했다.) 지급하지 않았다.. 이 사건은 SNS에 확산되는 것으로 잊혀지지 않았고, 결국 지급했다.
  • 김진훈 전 단장: 어쩌면 성민규 이전의 롯런트와 비슷한 케이스. 구색 갖추기 형태로 모기업 인사를 단장으로 앉혔는데 이마저도 야구에 큰 관심이 없었던 사람이었던지라 어쩌면 예고된 결과였다고 할 수 있다. 결국 2016년 시즌 종료 후 kt 링커스 대표이사로 인사 이동을 하면서 단장 자리에서 물러났다.
  • 장성우: 최고급 유망주 박세웅을 트레이드시키면서까지 데려왔으나 정규시즌 종료후 장성우 사생활 폭로 사건이라는 큰 파문을 일으켰고, 재판과 함께 다음해 50경기 정지 처분을 받았다. 당해 성적은 박세웅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좋았지만 이것은 그냥 잊혀졌고 이 때문에 한동안 양쪽 팬덤의 사이가 험악해졌다.
  • 장시환: 위의 장성우 사생활 폭로 사건에 연루되었다.
  • 오정복: 음주운전으로 10경기 출장 정지 징계를 받았다.
  • 김상현: 공연음란행위를 저질러 임의탈퇴되었다.
  • 3년 연속 꼴찌 및 창단 이후 5년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 실패: 1군 첫 시즌이었던 2015 시즌부터 2017 시즌까지 3년 연속 꼴찌. 2018년에야 4년 연속 탈꼴찌에서 겨우 벗어났지만 그마저도 9위였고, 2019년에는 NC와 5위 경쟁을 하다 미끄러져 6위로 마감하였다. 2020년에 포스트시즌 진출을 확정하면서 넥센 히어로즈의 2008~2012년간의 5년 연속 진출 실패와 타이를 기록했다.
  • LG 팬 전력분석원

2.1.11. 그 외


  • 1982~1985년까지의 포스트시즌 제도: 당시 제도는 전기리그 1위/후기리그 1위가 한국시리즈 직행이었고 한 팀이 두번 다 1위를 하면 아예 한국시리즈를 생략하고 그 팀이 통합 우승을 한 것으로 간주했다. 당시 구단수가 적어서라고는 하지만 프로야구 출범 다음해인 1983년부터 피해를 보는 팀이 3년 연속으로 나오는 등 매우 얼척없는 제도였고[82], 1985년에는 아예 한국시리즈가 생략되어버리는 등 흥행에 방해만 된다는 점이 여실히 드러났고, 결국 다음해 한번의 수정을 거쳐 1989년에 지금과 같은 제도로 변경되었다.
  • 현대 유니콘스: 98년, 00년, 03~04년엔 우승을 해서 왕조를 이룩하는 영광을 이뤘지만, 시절에는 성적이 몹시 처참했다. 우선 삼미 시절에는 6366을 찍었고, 그것도 끝자리 6을 찍던 시즌 중에 팀명이 청보 핀토스로 바뀌었다. 어쨌든 삼미는 82시즌에 역대급 임팩트를 주어 다른 의미의 전설로 남게 되었고, 청보 시절에는 팀이 있었는지조차도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가을야구 한 번도 못 가고 667이라는 안습의 팀 성적을 냈으니 그럴 수밖에. 태평양 돌핀스로 팀명을 또다시 바꾼 뒤에도 하위권에 맴돈 데다 꼴찌도 98년, 93년에 두 번이나 했지만 가을 야구도 89년, 94년에 두 번이나 하고 특히 94년엔 준우승까지 했으니 그래도 삼미, 청보 시절에 비하면 낫다. 이후 96년에 현대 유니콘스라는 이름으로 팀명이 바뀌었지만 현대 시절에는 인천 연고가 있었을 때에 4년밖에 불과했고(96~98년) 현대가 인천을 떠난 뒤에는 일부 올드 팬들은 현대 강점기라 부르기도. 현대가 인천을 떠난 이후 임시 연고지인 수원에서의 생활이 그리 좋을 리가 없었고 하이닉스의 지원으로 간간히 버티다가 하이닉스까지 현대에서 손을 뗀 이후 결국 07년 시즌 종료 이후 망했어요. 그래도 98년, 00년, 03~04년 한국시리즈에서 우승을 했지만 그중 98년만 인천 연고였을 때에 우승했고 나머지 3번은 수원 연고였을 때 우승했다는 것이다.(...)
    • 감독
      • 허구연 감독: 청보 시절이었던 1986년 당시 35세로 최연소 감독으로 지냈으나[83] 성적 부진에, 삼성과의 잇단 패배로 인해 짤리게 된다.
    • 선수
      • 강기웅: 삼성에서 트레이드 되었으나 자신이 푸대접받았다는 자책감에 얼마되지 않아 은퇴하였다.
      • 박기범: 원래 배명고의 에이스였으나 1999년도 고졸 우선 지명 후보가 마땅치 않았던 현대가 동산고로 그를 전학시켜서 지명했다. 이를 계기로 타 지역 전학생(중3 이후)의 1차지명 금지 규정이 추가되었다. 정작 박기범은 프로에서 별 활약을 못하고 2004시즌 후 방출되었다. 연고지 문제를 제외하면 이종욱 방출과 함께 현대 유니콘스의 양대 뻘짓 중 하나.
  • 쌍방울 레이더스
    • 1996년 김성근 감독 부임 이전 성적: 6-8-7-8-8. 그것도 첫 6은 공동 6위.
    • 플레이오프 첫 리버스 스윕 헌납.
    • 1999년: 쌍방울에게는 1999년 자체가 흑역사. 하지만 프로야구 매니저에서는 가장 유명한 쌍방울 덱이 99쌍방울이다. 그래서 더욱 안습.
      • 팀 해체 직전 성적: 28승 7무 97패, 역대 팀 최다패 공동 1위
      • 역대 최소관중 1위: 1999년 10월 7일 현대전 54명
      • 역대 한 시즌 한 팀 최소관중 기록: 49,956명. 절대 숫자 하나가 빠진 게 아니다! 그 시즌 LG나 롯데의 관중수는 70만 명대였다.
      • 8개 구단 체제에서의 한 시즌 최소승률: 0.224. 역대 전체로 돌아보면 안습의 82삼미가 있지만 99쌍방울은 전체로도 2위이다.
    • 현금 트레이드로 팔려간 선수들.
  • 프로야구 승부조작 사건
  • 하이오잉크
  • 현대 피닉스: 뒤늦게 프로야구 구단의 가치를 깨닫은 정주영 회장이 프로야구 구단 창단이 여의치 않자 대신 창단한 실업팀. 현대그룹의 막강한 자금력으로 국가대표출신 아마추어 선수들을 싹쓸이해서 선수 몸값 상승의 원인이 되었고 그 와중에 재계 라이벌인 삼성 라이온즈와 선수 영입을 둘러싸고 감정싸움을 벌이기도 했다[84]. 현대가 태평양을 인수하면서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었다가 1999년 해체되었고 그 사이 있었던 수많은 병크들은 검색 요망.
  • 프로스테이트 홀딩 컴퍼니: 2007년 초 현대 유니콘스를 인수하겠다고 나섰던 미국의 부동산 투자회사. 그러나 전주 연고를 거론하며 현대 팬들의 분노를 유발하더니 실체가 불분명한(인터넷 웹사이트조차 존재하지 않는) 페이퍼컴퍼니라는 의혹이 일자 다른 핑계를 대고 인수 의사를 철회했다. 게다가 프로스테이트(prostate)는 전립선이라는 뜻이기 때문에 더욱 웃음거리가 됐다.
  • 부산 시민구단 추진: 롯데 자이언츠 선수단 CCTV 사찰 사건 등 롯데 구단의 뻘짓을 계기로 일기 시작한 움직임. 그러나 실체가 하나 둘 드러나면서 시작하자마자 흑역사화되었다. 롯데 팬들은 물론 다수 프로야구 팬들의 공감을 얻지 못하는데다가 롯데가 구단을 안 판다면 팔도록 만들겠다, 회원이 아니면 홈 경기 입장권을 못 살 것이다 등등 조폭이나 다름없는 행보를 보였다. 1차 공청회는 결국 썰렁한 분위기에서 진행되었으며 바로 열겠다던 2차 공정회는 기약조차 없고 관심에서도 이미 멀어진 지 오래다.
  • KBO 리그 심판 최규순 금전요구 사건: 무려 4개 구단이 심판에게 금품을 전달한 사건이다. 한때는 KBO 리그 자체의 존폐를 위협했으나 시간이 지난 뒤 결국 솜방망이 징계로 넘어가고 말았다. 그리고 이를 보도한 엠스플뉴스거한 뻘짓을 저지르면서 더욱 빛이 바랬다.
    • 2013년 포스트시즌: 특히 두산과 삼성의 경우 이 포스트시즌 직전에 금전을 전달한 것이 밝혀진 데다, 진출 4팀 중 LG를 제외한 3팀이 연루되었고, 아예 2013년 한국시리즈는 매수 더비가 되어버리는 등 빼도박도 못할 흑역사가 확정되었다.
  • KBO 트레이드 이면 계약 파문

2.2. 국가대표


  • 야구계 6대 참사
    • 삿포로 참사
    • 도하 참사
      • 김재박 감독: 위의 삿포로 참사와 도하 참사의 주요 인물. 특히 도하에서는 최강 전력을 갖추고도 일본 사회인, 준프로에게 패하는 어이없는 결과가 나왔다.
    • 타이중 쇼크
      • 류중일 감독: 타이중 참사의 알파이자 오메가. 정규리그 및 코리언시리즈 2년 연속 우승으로 빛을 보는 듯 했으나, 국제 경기에서 빈약한 선수단을 이끌었는데...(이번 2013 WBC는 전력자체가 최약체였던 상황이었다.) 허술한 선수단 운용으로 욕을 엄청나게 얻어먹었다. 놀랍게도 위의 김재박 감독과 비슷한 모습이다. 이것으로 인해 이미지가 완전히 한방에 훅 가버렸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1번 나도 문제인데 2번 시전했단 거다. 그 뒤 고개를 숙이고 사과한 뒤 의 페넌트레이스 & 한국시리즈 통합 3연패로 명예회복을 했으며 인천 아시안 게임에서 금메달 수상, 팀의 통합 4연패를 이끌면서 그때의 굴욕을 씻었다.
    • 고척돔 참사
    •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 게임/야구/B조 2경기: 쉽게 설명하자면 삿포로 참사 + 도하 참사 + 고척돔 참사.[86]
    • 도쿄돔 대참사
    • 2019 WBSC 프리미어 12/슈퍼 라운드/5경기: 또 대만에게 패배했는데 무려 7-0 영봉패.

2.3. 그 외


  • 박석윤: 1923년 휘문고보 야구부를 이끌고 유일하게 제 9회 고시엔에 진출[87], 고시엔 8강을 이끈 감독. 이것만 보면 왜 흑역사 인지 의아해 할 수 있는데...바로 친일반민족행위자이기 때문이다.
  • 1985년 한국 프로야구 리그 우승: 삼성이 전-후기리그를 모두 우승함으로써 한국시리즈 없이 통합우승. 통합우승의 주인공인 삼성은 즐거운 비명을 지른 반면 KBO는 한국시리즈가 날아가 버린 것에 관련된 흥행참패로 진짜 비명을 질렀다.
  • 1991 프로야구 병역비리 사건: 11월 26일에 태평양 돌핀스 선수가 브로커에게 돈을 건네고 허위진단서를 발급받는 식의 병역비리 사건 관련조사를 받게 된 사건이다. 2004년 프로야구 병역비리 사건보다 규모는 작은 편.
  • 1999년~2000년의 양대리그제(드림·매직리그): 경기 횟수로 봤을 때 양대리그로서의 의미가 없었으며[88] 특히 2000년은 양 리그간 전력 불균형 현상이 절정을 이루어 드림리그 3위인 삼성이 매직리그 2위인 롯데는 물론 1위인 LG보다도 승률이 더 높게 나오는 바람에 억지로 준플레이오프에 진출하는 병크가 연출됐다. 그래서 2001년부터는 다시 단일리그로 돌아갔다. 만약 양대리그제가 부활한다면 이같은 전철을 또 밟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 2003년 한국시리즈: 주인공은 인천에서 야반도주한 현대와 그들을 대신한 창단 4년차의 SK, 결국 7차전까지 가는 접전에도 불구하고 만원 관중을 기록하는데 실패하며 흥행 실패. 그 이전 해의 한국시리즈그 다음해의 한국시리즈가 명승부였던 탓에 비운의 한국시리즈가 되었다.
  • 2004년 프로야구 병역비리 사건.
  • 2008년 프로야구 도박 사건
  • 20000번째 홈런: 홈런볼을 잡기위해 관중 간의 난투극 발생으로 9시뉴스 사건사고 코너를 화려하게 장식했다.
  • 1억번째 관중사건
  • 프로야구 30주년 감사 영상: 30주년을 맞아 당시 KBO에선 늘어난 여성팬들과 젊은팬을 겨냥하여 각 팀의 젊고 인기있는 선수들을 모아 30주년 감사 동영상을 만들고, 이 영상을 경기장, 그리고 케이블 스포츠 전문 채널에서 상영하고, 네이버와 KBO 홈페이지에 업로드했으나, 2012년 3월 LG 트윈스 대표로 나간 박현준2012년 프로야구 승부조작 사건에 연관되자 아예 동영상을 통삭제했다.
  • 고졸 선수의 MLB 진출 잔혹사:2006년 신일고 남윤성(개명 전 남윤희)부터 시작해 2012년까지 KBO 신인 드래프트를 거치지 않고(남윤성은 두산의 1차지명을 받았지만 본인이 계약 거부. 이듬해 정영일도 KIA의 1차지명을 받았으나 계약을 거부했다.) 무려 23명이 미국으로 갔으나 이들 중 MLB 문턱을 밟은 선수는 단 1명(최지만)이며 트리플A까지 제대로 올라간 선수도 전부 합쳐 5명(최지만, 이학주, 이대은, 하재훈, 문찬종)에 불과하다.[89] 닛폰햄 파이터즈오타니 쇼헤이를 붙잡으려고 이런 현실을 반영한 자료를 만들어서 보여줬다고 한다. 2016년 최지만, 이학주가 25인 로스터 진출을 노렸으나... 최지만 혼자 승격 후 1안타만 치고 지명할당 처리되어 트리플A로 내려갔다가 재승격과 강등을 반복했고 그나마 2018시즌 도중 탬파베이로 트레이드된 뒤에는 플래툰 1루수로 기용되고 있다. 이학주는 콜업이 되지 않자 옵트아웃을 선언한 뒤 기회를 노렸으나 더 이상은 무리라고 판단했는지 귀국을 결정했다. 이대은은 2015년, 하재훈은 2016년 일본 프로야구로 옮겼다가 나란히 2019년도 KBO 신인 드래프트에서 지명을 받았으며, 문찬종은 2016년 더블A에서 출발했다가 한 차례 임시승격되었고 8월에 다시 트리플A로 올라갔으나 시즌 종료 후 마이너리그 FA가 된 뒤 새 팀을 찾지 못하다가 뒤늦게 2020년도 KBO 신인 드래프트에 참가해 지명을 받게 된다.
  • 약쟁이들: 금지약물복용한 선수라도 잘하면 소속팀에서 덜 까이게 된다.
    • 2018년 김재환 MVP 수상: 도핑전과자가 시즌 MVP를 수상한 것은 김재환이 전세계 전우주 최초이자 전무후무 유일무이한 흑역사다. 김재환 MVP 스캔들로 인해 대한민국은 범국가적인 도핑을 범해 전세계의 비난을 받은 러시아를 욕할 자격을 스스로 걷어차 버렸다. [90] 그리고 김재환 MVP 스캔들은 2019년 7월 기사화된 이여상 강제 도핑 사건의 씨앗이 되었다.

3. 해외



3.1. 미국


  • 2005년 내셔널리그 챔피언십 시리즈에서의 브래드 릿지: 이전까지 철벽 마무리로 승승장구하던 릿지는 NLCS 5차전 9회초 2아웃 상황에서 알버트 푸홀스에게 역전 3점 홈런을 맞아 버렸다. 이 상태에서 월드시리즈에서 한 시즌에 홈런 2개 치면 많이 친다는 소리를 듣던 스캇 포세드닉에게까지 홈런을 맞아버린 것은 결정타. 이후 마무리로서의 자신감을 상실한 릿지는 2년간 어둠 속을 헤매다 2008년 잠깐 부활했지만 2009년에는 7점대의 평균자책점을 찍고야 만다. 그것도 마무리가.
  • 레이 채프먼빈볼 사망 사건: 현재 시점에서 경기 중 투수의 투구로 발생한 유일한 사망사고다.
  • 메이저리거들의 약물 야구.
  • 메이저리그 미래의 유니폼.
  • 메이저리그 통산안타왕 피트 로즈의 승부 도박 파문.
  • 밤비노의 저주 시절 보스턴 레드삭스 (1918~2004년)
  • 블랙삭스 스캔들 이후 2005년 우승까지의 시카고 화이트삭스. 1917년 이후 88년만의 우승이다.
  • 1918년~1948년 필라델피아 필리스: 전 세계 프로야구 역사를 뒤져봐도 이에 근접한 암흑기조차 없다. 어느 정도나면 31년 중 최고 승률이 0.506이고 (평균 승률이 아니다!) 메이저리그 역사상 유일한 5년 연속 세자리수 패배를 기록하기도 했다. 물론 지금이야 80년도 더 된 일이라 승점자판기 시절은 팬덤에서도 자조적으로 다뤄질 뿐이지만, 이 기간동안의 진정한 흑역사는 1947년에 재키 로빈슨을 상대로 일어난 인종차별(일명 방망이 악수) 사건이다. 필라델피아가 인종 차별 철폐에 상징적인 도시인데 인종차별 사건이 나왔으니...
  • 염소의 저주 시절 시카고 컵스 (1908~2016년)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 시카고 컵스의 38년 연속 가을야구 실패. 1908년 이후 108년 동안 월드시리즈 우승을 하지 못했다.
  • 시카고 화이트삭스블랙삭스 스캔들.
  • 1982년~1994년의 뉴욕 양키스: 이 시기에 고군분투한 선수가 돈 매팅리였다(...)
  • 피츠버그 파이리츠의 피츠버그 마약재판
  • 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미국 대표팀 호화 멤버와 예선 탈락.
  • 1972년, 1981년, 1994년의 파업 사태 [91][92]
  • 2011년 보스턴 레드삭스: 초반에 치고 나가다 시즌 말미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지며 가을야구가 좌절되었다.
  • 휴스턴 애스트로스의 2014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드래프트.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
  • 로스앤젤레스 다저스텍사스 레인저스다르빗슈 유 트레이드 레이스와 그 이후 시카고 컵스의 다르빗슈 FA 영입 과정과 그 이후에 일어난 2019 MLB 사인 훔치기 스캔들[93]
  • 마이애미 말린스29실점. 91년만의 내셔널 리그의 최다 실점 신기록이라고 한다. #

3.2. 일본


  • 2000 시드니 올림픽 일본 야구 대표팀의 '목메달'.
  • 2004 아테네 올림픽 일본 야구 대표팀의 호주전.
  • 2008 베이징 올림픽 미국 동메달, 일본 목메달.
  • 검은 안개 사건.
  •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 2009~2014년 원정 유니폼: 홈 유니폼은 약간 무난하나 원정이 심하게 후진다고 까이고 있다. 특히 색 배열을 회색으로 한 자체가 최대의 실수.[94] 문제는 클라이막스 시리즈에 진출하고도 계속 탈락을 했고 2014년 시즌은 4년만에 포스트시즌에 나가지 못하고 탈락하는 수모를 당했다. 구단도 실패작이라는 것을 인지했는지 결국 2015년부터 서드 유니폼을 원정 유니폼으로 승격하면서 사실상 확정되었다. 참고로 이 디자인은 2015년 홈 유니폼에게도 이어진다.
    • G.G.사토: 성적이나 행실을 보면 그렇게 흑역사 수준의 선수는 아니지만, 세이부 구단은 물론이고 NPB 전체에서 그를 역대 최악의 흑역사 선수로 취급한다.[95] 이유는 바로 베이징 올림픽에서의 실책으로 한국의 우승에 매우 큰 기여를 한 것. 이것 때문에 일본에서는 한 때 실수하는 사람을 사토같은 사람이라고 불렀을 정도로 망신을 당했다고 한다. 본인은 자살 생각까지 했을 정도. 다행히도 그 해인 2008년과 그 다음 해인 2009년에는 잘해서 아무 일 없었으나, 그 다음 해인 2011년 한 해 부진하자 칼같이 방출당하고 말았다. 34세라는 아직 몇 년 더 뛸 수 있는 나이에, 1시즌 20홈런 이상 칠 수 있는 슬러거였음에도 불구하고 올림픽에서의 실책으로 인하여 일본야구의 수치라는 이미지가 덧씌워져서 12구단 모두의 블랙리스트에 오르는 바람에 아무 팀에서도 그를 찾지 않았고, 결국 그는 쓸쓸히 이탈리아 야구리그로 떠나갔다. 1년 뒤에 치바 롯데 마린즈에서 그를 받아줘서 2년 더 선수생활을 하긴 했지만... 참고로 NPB에서 암묵적으로 합의된 사토를 야구계에서 영구추방하자는 불문율을 깨고 그에게 손을 내민 유일한 사람이 이토 쓰토무. 이 사람은 메이저리그에 도전했다가 실패하고 일본으로 돌아온 사토를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로 데려오기도 했다. 그야말로 인생의 은인.
  • 쇼치쿠 로빈스: 1950년 양대리그 시작 이후 센트럴리그 최초 우승팀이자 퍼시픽리그마이니치 오리온즈와 더불어 일본시리즈 최초 진출팀이었으나[96] 1952년 시즌 3할 승률 이하에 그치는 바람에 당시 짝수로 팀을 맞추기 위해 승률 3할 이하 팀을 타 구단에 합병하는 정책 대상에 걸려 팀의 말소가 확정, 포경회사 다이요가 운영중이던 다이요 훼일즈(現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에 합병되어 다이요쇼치쿠 로빈스가 되었다.[97][98]
  • 요미우리 자이언츠
    • 호리우치 츠네오 감독(2004~2005시즌)
    • 2002~2004 시즌 원정 유니폼: TOKYO를 떼고 YOMIURI를 유니폼 앞면에 박았는데 자이언츠 팬들이 기업명 부착을 엄청나게 싫어하는지라[99] 아주 큰 반발을 일으켰고, 결국 2004 시즌 끝나고 YOMIURI를 앞에 박는 일은 없게 되었다.
    • 2005년 유니폼: 가슴에 모자 로고만 부착했을 뿐인데 성적은... 결국 1년도 안되어 또 바뀌게 된다.
    • 2006~2008 시즌 초반 원정 유니폼(일명 검정색 유니폼): 요미우리에 큰 재앙을 내리게 한 유니폼으로 센트럴리그 1위로 진출하고도 클라이맥스 시리즈에서 주니치 드래곤즈에 0대3 떡실신을 당한데다 상품마저 파산, 2008시즌 초반에는 삽질을 해 버리는 바람에 망했어요 인증을 받았다. 2008 시즌 도중에 바뀐 회색 유니폼의 경우 한신 타이거즈를 제치고 센트럴리그 1위로 역전 우승을 거두었고, 2009시즌에 우승을 거머쥐게 된다. 그 이후 프런트에선 이 유니폼을 입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그나마 이승엽의 일본시절 팬들에게는 친숙했던 유니폼이기도.
    • 10.8 결전: 항목을 들어가서 배경과 과정을 보면 왜 이 문단에 있는지 매우 의문이 들 수 있다. 참패한 것도 아니고, 희대의 역전으로 리그 우승 뺏긴 것도 아니다. 그 시즌 전체로 봐도 일본시리즈도 우승했다. 그러나 요미우리 구단 입장에서 여유 있게 우승할 걸 최종전까지 가서야 겨우 이겨서 식겁했는지 구단 차원에서는 이 경기를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흑역사로 간주하고 있다.
    • 2015년 도박 스캔들: 45년만에 다시 터진 검은 안개 사건. 후쿠다 사토시, 가사하라 쇼키, 마쓰모토 류야가 야구 관련 불법 도박 혐의로 계약이 해지되었으며 NPB는 세 선수에게 무기한 실격 처분, 구단에게도 1000만엔의 벌금을 부과했다. 다카기 쿄스케는 1년간 자격정지.
    • 야구장비 절도 사건:가키자와 다카히로는 생활고에 시달리다가 동료 선수들의 장비를 훔쳐 팔아치운것이 적발되어 2018년 방출되었다.
    • 2019, 2020 시즌: 유례 없는 일본시리즈 2연속 피스윕. 게다가 경기 내용도 매우 형편없었다.
  • 치바 롯데 마린즈
    • 1970년대의 떠돌이 생활: 집시 롯데.
    • 1986~2004년까지의 암흑기.
    • 1998년 일본기록인 18연패.(이 해 결국 팀은 꼴찌)
    • 멜 홀: 성적은 좋았으나 인성이 좋지 않았고 은퇴 이후 아동 성추행으로 45년 형을 받았다.
    • 오가와 히로시: 일본판 이호성. 은퇴 후인 2004년 강도살인을 저질러 체포. 현재까지 수감중이다.
    • 2011년 시즌: 전 해 일본시리즈 우승팀이 꼴찌로 추락.
    • 2017년 시즌: 전 시즌에 3위로 클라이맥스 시리즈에 진출한 팀이 4월까지의 팀타율이 1할8푼6리였고 승률 3할 3푼을 겨우 찍으면서 압도적인 꼴찌...
    • 야마이코 나바로: 한국에서는 에릭 테임즈에 버금가는 수준으로 리그를 폭격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엄청난 기대를 받고 일본으로 왔으나 실탄 적발 등의 문제로 제대로 뛰지도 못해서 80경기 좀 넘게 나와서 2할 1푼에 10홈런 치고 방출당했다.
    • 지미 파레디스: 알프레도 데스파이네의 대체자로 모셔 왔는데, 2할 1푼에 꼴랑 7홈런 치고 2군으로 강등당했다. 이것도 그나마 나아진거지, 5월까지만 해도 출루율이 1할 대였다.
    • 오오미네 쇼타: 과도한 빚으로 인하여 구단 사무실까지 빚쟁이가 찾아오게 만드는 대형사고를 치고 은퇴. 은퇴 이후 공갈죄로 구속 수감되기까지 하였다.
    • 제이 잭슨: 히로시마에서 3년간 수준급 셋업맨으로 활약하고 메이저리그에 진출하여 밀워키에서 1년을 뛰고 2020년에 롯데와 계약하며 일본에 복귀했는데 개막 3주만에 마약 소지로 체포되었다(...) 체포 전날 이유를 밝히지 않고 스스로 계약해지를 요구하면서 무슨 일인가 했는데 바로 다음날 체포되면서 흑역사화. 110만 달러나 줬는데 롯데에서는 7경기 등판이 전부.
  •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
    • 1988년~2003년 도쿄돔 홈구장 시절: 말그대로 인기와 관객이 거의 없었다(...) 그야말로 비인기구단의 극치(...)
    • 인플루엔자 A 집단 감염 사태: 2009년 8월 19일경 외국인 타자 터멜 슬레지, 투수 미야니시 나오키 등이 인플루엔자 A(신종플루)에 감염된 사건. 이로 인해 리그 일정이 중단될 하였으나 그대로 강행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퍼시픽리그 정규리그 우승을 확정지었다. 몰라 뭐야 그거 무서워
  •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 전신 난카이~다이에의 20년 연속 B클래스(4~6위, 6565655664546546456[100])
    • 긴키 그레이트링: 어떤 의미에서는 진정한 흑역사. 그레이트링이 차륜(車輪)을 뜻하기도 하지만 속어로 여자의 음문을 뜻하기도 한다.
    • 다이아몬드의 매: 구단 역사상 최악의 응원가. 어느 정도냐면 아예 선수단에서까지 틀지 말라 했을 정도다. 결국 시민 공모를 하게 되었고 현재 응원가인 나아가라 보라매 군단으로 정착되었다.
    • 2004년부터 2010년까지의 가을야구 잔혹사: 2004년에 파리그에 플레이오프가 생긴 시점부터 이 기간 동안에는 호크스가 정규시즌에 비해 이상하게도 무기력한 모습을 보였는데 2006년을 제외하면 다음 라운드에 진출 하지도 못했다.[101] 특히 2004년, 2005년[102], 2010년에는 1위를 하고도 파이널 스테이지에서 탈락했었다. 하지만 2011년부터 리그 우승도 하고 일본시리즈를 재패하면서 징크스를 탈출했다.
  • 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이치로의 망언과 데드볼 굴욕.
  • 오사카 돔: 오릭스 버팔로즈의 홈구장이자 일본의 잘못 지은 야구장. 도쿄에 돔구장 있으니 우리도 있어야 한다고 교통 시망에 지반도 병맛인 곳에 크지만 지붕만 엄청 높고 전혀 아름답지 않은 돔구장을 놓았다. 그 댓가로 수입은 적고, 관리비만 잔뜩 들어가는 탓에 원래 주인이었던 긴테츠 버팔로즈오릭스 블루웨이브(즉 지금의 오릭스 버팔로즈)에게 흡수합병되고 말았다. 그리고 오릭스는 일본 최악의 비인기 야구단으로(...)
  • 한신 타이거스
    • 1987~2002년까지의 암흑기.
    • 하얀 안개 사건(33-4) - 이건 승부조작은 아니고, 순전히 팀의 경기력이 안습해서 벌어진 참사이다. 한신 타이거스 팬들 가슴에 비수를 꽂은 사건이다.
    • 오승환: 선수로서의 성적은 훌륭했지만, 구단이 신뢰를 하고 가장 기대를 거는 선수만이 물려받는 등번호인 22번을 물려받아 그 등번호에 [[2015년 삼성 라이온즈 원정 도박 사건|도박 사건으로 먹칠]을 했다. 도박 사건 이후 한신이 22번을 가지고 고민하는 것이 한국에도 기사로 알려질 정도.
  • 선수단 단체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확진
  •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 2014년 시즌: 2011년 시즌의 치바 롯데 마린즈와 마찬가지로 전 해 일본시리즈 우승팀이 꼴찌로 추락. 결국 이것 때문에 당시 감독직을 맡고 있던 호시노 센이치는 사임.[103]
    • 닉 에반스, 잭 루츠: 2014년에 대체 용병으로 들어와서 둘이 각각 5경기, 15경기 뛰었다. 에반스는 1경기당 한국돈으로 7천만원을, 안타 하나당 1억 7천 500만원을 받고 뛴 셈이었다.[104] 루츠는 조금 더 나았으나, 역시 1경기당 몇천만원을 받고 뛴 셈.
  • 오사카 긴테쓰 버팔로즈(2004년 오릭스 블루웨이브한테 흡수합병되어 해산됨)[110]
    • 1949년 창단부터 2004년 오릭스 블루웨이브한테 흡수합병될 때까지 55년의 역사 동안 한 번도 일본시리즈 우승을 못함.
    • NPB가 1리그당 6구단씩 총 12구단 체제로 굳어진 이후 꼴찌로 리그 첫 우승(1979년)[105][106]
    • 긴테츠 버팔로즈 시절인 1989년 일본시리즈: 요미우리 자이언츠한테 3연승 했는데 그 뒤 4연패로 우승 실패.
    • 치바 시게루 체제의 1961년 시즌: 일본프로야구 사상 최악이자 현재로서는 마지막인[107] 유일한 100패 이상의 전적을 기록.[108] 결국 이것 때문에 치바 시게루는 긴테츠 감독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자기 별명 따서 팀 이름까지 바꾼 사람이었건만...[109]
  • 히로시마 도요 카프
    • 1986년 일본시리즈: 히로시마 야구판 마라카낭의 비극 세이부 라이온즈를 상대로 3승 1무로 리드하고 있었고(1차전은 무승부, 2차전부터 4차전까지는 히로시마가 가져갔다.) 우승을 눈앞에 두는 듯 했으나 내리 4연패를 당해서 우승컵을 내줬다. 특히 홈 경기인 히로시마 구장에서 내리 3연패를 당한 게 치명적. 이후 히로시마는 1991년 리그 우승 이후 일본시리즈에서 1991년 퍼시픽리그 우승팀인 세이부와 다시 한번 더 만나서 복수를 노렸으나 역시 3승 4패로 패퇴한 이후 2016년 이전까지 25년 동안 일본시리즈에 올라가지 못했다.
    • 1991년 리그 우승 및 일본시리즈 준우승 이후의 암흑기: 1998년 이후 15년 연속 B클래스를 기록. 그 과정에서 가네모토 도모아키 등 주축 선수들을 팔았으니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 2016년 일본시리즈: 히로시마 야구판 미네이랑의 비극이자 스코어상으로는 2007년 한국시리즈의 재판. 25년만의 리그 우승 25년만의 일본시리즈 진출로 이 기세를 몰아서 1984년 이후 32년만의 일본시리즈 우승을 노리고 있었고 홈경기인 1차전과 2차전을 가져가기까지만 하더라도 히로시마의 25년만의 일본시리즈 우승을 의심치 않았으나 삿포로 원정 경기 3경기를 내준 이후 내리 4연패를 당하고 말았다. 그 과정에서는 더더욱 압권이었는데 히로시마 감독인 오가타 고이치 감독이 이마무라 타케루와 제이 잭슨을 한 경기 쉴 틈도 없이 계속 등판시켰고 끝내기를 2번 당한것은 물론이고 만루홈런도 2번이나 맞았는데 5차전에서의 그 만루홈런이 끝내기 만루홈런이었다는 점에서 더욱 치명적이었다. 더군다나 히로시마 홈에서 2연승 한 이후에 그 상승세를 이어가지 못하고 삿포로 돔에서 내리 3연패를 당한 게 치명적인 결함이라 할 수 있다. 더군다나 일본프로야구의 큰 형님으로 칭송받은 구로다 히로키가 일본시리즈 이후 은퇴를 선언했고 히로시마팬들은 구로다가 일본시리즈를 우승하고 은퇴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기에 히로시마팬들 입장에서는 그 안타까움이 더더욱 컸다.[111] 히로시마 구장에서 상대팀한테 우승 패권을 내준 건 리버스 스윕을 당한 1986년 이후 30년만이다.
    • 2017 시즌: 2016년 다음 최다승을 거두고도 3위 팀인 요코하마한테 업셋을 당했다!
  • 2015 WBSC 프리미어 12: 대회를 개최한 일본은 우승하기 위해, 경기일정을 예고없이 변경 하는 등의.꼼수를 부렸으나..! 한국에게 막판 역전으로 패배.
  •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
    • 제이미 로맥: 아롬 발디리스의 대체 선수로 야심차게 데려왔으나, 외국인 선수였음에도 불구하고 주로 2군을 들락거리면서 간간이 대타 요원으로 나온 것이 전부였다. 시즌 성적은 30경기에서 타율은 .113 OPS는 .374 2타점. 참고로 같은 팀이었던 투수 재크 페트릭이 그 시즌에 타자로 나와서 2타점 기록했다...
  • 주니치 드래곤즈
    • 주니치 스타디움 전소: 경기장 뿐만이 아니라 인근 건물까지 화마에 삼켜진 대형 화재. 사상자가 속출한 참사였으며, 홈구장을 잃은 주니치는 경기장이 재건될 때까지 인근 구장을 떠돌아다니며 경기했다.
    • 44565...: 전통 강호와 투수 왕국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무너져내린 시기.

3.3. 대만


  • 대만프로야구 리그의 두 차례 승부조작 사건 일명 검은 독수리 사건.
  • 대만메이저리그(Taiwan Major League). 이 역시도 승부조작 및 도박으로 해체.
  • 궈시우옌(郭修延) - 학교를 졸업하고 실업야구 쪽으로 갔다가 야구를 포기하고 몇 년 간 회사원으로 뛰다가 야구에 대한 열정을 잊지 못해 뒤늦게 야구에 복귀하고 28살에 뒤늦게 프로야구[112]에 지명된 구구절절한 사연을 지닌 선수였다. 그리고 2013년에 바로 신인왕을 수상하면서 미담으로 남을 뻔 했으나, 2017년 시즌 직전에 술에 취해 여성을 강간하는 바람에 체포되었고 그대로 방출당했다. 사실 첫 해가 커리어하이고 그 후로는 대타 요원으로 간간히 1군에 나오는 데 그쳐서 망한 신인왕 테크를 타고 있었기도 하지만 대타로 1군에선 3할 안팎의 타율을 보여줬고 방출당할 때가 한국 나이로 32살이었으니 아직 재기할 기회도 많이 있었다. 자기 복을 자기가 차 버린 선수.

3.4. 이스라엘


  • 프로야구 리그 그 자체 - 2007년 야심만만하게 중동 지역 최초로 프로야구 리그를 열면서 메이저리거 샌디 쿠팩스같은 여러 미국 국적 유태인 선수들이 자발적으로 가서 열심히 도왔으나 평균관중 230명대라는 굴욕 속에 1시즌만에 해산해버렸다. 그나마 승부치기가 바로 여기서 나왔다는 점으로 야구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어째서 이리도 부진했냐면, 이스라엘은 축구농구가 인기많은 나라였기 때문이다. 쿠팩스는 아쉬워하면서 겨우 더 두고봐야 한다고 열심히 도왔지만 투자자들이나 스폰서들이 빠지면서 결국 1시즌으로 막을 내릴 수 밖에 없었다.
[1] 전기/후기리그 모두 2위 이내이면 한국시리즈 직행, 한번만일 경우는 플레이오프를 치름[2] 사실 1993년의 3위도 막판 8월말까지 3위권에 크게 뒤쳐진 4위여서 4위를 하고도 준플레이오프를 못할뻔했는데(그랬으면 '5578547'로 비밀번호 확정이었다) LG의 막판 부진 덕분에 겨우 따라잡아서 준플레이오프 성사 시킨것이다.[3] 동시에 크보 역대 한 경기 최다 점수차(22점) 타이기록이다. 97년 삼성 vs LG의 27-5로 삼성이 대승한 경기로 부정배트 논란까지 일으킨 그 경기. 여담이지만 위의 3이닝 연속 타자일순과 이 기록을 모두 한 팀에게 내줬다. [4] 2013년에 정규시즌에서는 LG가 2위, 두산이 4위이긴 했지만 그 두산이 2013년 한국시리즈 준우승하면서 최종 순위는 두산이 2위, LG가 3위로 밀렸다.[5] 원조아성에는 못 미치지만 KBO에서는 원조에 가장 근접한 사례다.[6] 2011년은 중도 사퇴[7] 다른 2명은 이종욱, 손시헌[8] 다만 오재일-이성열 트레이드는 프런트에 의해 단행된 것으로 밝혀졌다. 물론 오재일은 두산으로 이적 후 주전으로 자리잡은지라 결과적으로 좋게 남았지만.[9] 물론 이것도 본인이 해당 약품에 금지약물 성분이 함유될 가능성을 인지하지 못한 잘못도 있다. 약물을 사용하기 직전 구단 측에 먼저 알리거나, 임석진처럼 명백하게 의사에게 금지약물 성분을 빼달라고 했다는 이야기도 없고.[10] 이건 노경은 본인의 멘탈문제도 있지만 프런트와의 충돌도 한 몫했다.[11] 강정호와 서건창의 기록이 이루어진 것은 다음 경기인 SK와의 마지막 페넌트레이스 경기에서였다.[12] 이 중 강민호와 최준석이 35/31홈런 달성[13] KBO 한 이닝 최다 실점(이전 기록 13점)과 한 이닝 최다 피안타, 한 이닝 최다 타석. 이렇게 3가지 기록을 모두 갈아치운 경기였다. [14] 역시나 KBO 기록이다. 여담이지만 지성준은 그 해 시즌 끝나고 트레이드로 롯데에 왔다.[15] 일부라고 해봤자 김성근 본인과 노리타들뿐이다.[16] 그러나 선동열이 경질되고 류중일 감독이 취임한 지 3년이 지난 2014년, 임창용은 그 말을 번복하고 삼성에 돌아왔다. [17] 특히 최형우는 타순이 돌아오면 두산팬들이 환호를 하는 수준까지 추락했다.[18] 이 경기를 시작으로 3경기를 연속해서 지자 삼성팬들은 설령 준우승하더라도 마무리는 대구구장에서 하길 바랬지만 이 바람조차 이루어지지 못했다.[19] 선발 땅겨쓰기의 가능성은 두산이 좀 더 높았다. 하지만 정작 두산은 4선발로 이현호를 냈다. 그리고 이 경기는 통상적으로 볼 때 삼성이 승리할 가능성이 가장 높았었다.[20] 5차전 선발인 장원삼은 2차전에서 무난하게 패전투수가 되었고 땅겨쓰기의 여파까지 겹쳐서 컨디션이 좋지 못했다. 그리고 결과는 2와 2/3이닝 7실점(전부 2사후 실점했다.) 강판.[21] 그날이 하필이면 큰아들의 담임선생님을 모셔놓은 자리에서 벌어진 일이었다.[22] 2006년의 오버 피칭으로 인해 인대가 끊어지고 성급한 복귀로 인해 구속이 10km 추락하는 등 혹독한 시련을 겪었다. 그럼에도 그는 제 역할을 하고자 필사적으로 노력했으며 이후 우승반지 4개를 싹쓸이해가는 등 거기에 대한 보답도 받았다.(이전의 3개와 합쳐서 배영수의 우승반지 숫자는 총 7개)[23] 노장진은 2002년, 오상민은 2002, 2005, 2006년[24] 안지만이 불펜으로 65억을 받 긴 했지만, 우규민보단 훨씬 잘했다. 그러나 그놈의 도박 때문에 계약 해지당하고 이미 받은 계약금 중 21억원을 도로 뺏겼다.[25] 단 김주찬을 보내면서 데리고 온 마해영을 잘 써먹었고 마해영이 21년만의 팀 우승에 큰 공을 세웠으니 삼성 입장에서는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거기에 롯데에서 김주찬의 포텐이 터지기에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26] 사실 그놈의 KIA전 벌투만 없었어도 4점대 중반은 나왔을 성적이다.[27] 그래서인지 이후 14번은 듣도 보도 못했던 선수들이 달기도 했다.(다른 번호도 마찬가지.) [28] 물론 이 둘을 김한수에 비교하기엔 이 둘은 삽질이 너무 크다. 백인천은 태업에 가까운 모습을 보였고, 이순철은 팀 베테랑들을 모두 강제은퇴시켜서 엘지팬들에게 단단히 미움박혔다.[29] 김한수와 비슷한 수준이었던 이종운이나 송일수는 1년만에 나갔고, 위의 선동열은 기아에서는 빼박 금지어지만 삼성 시절 우승을 맛보게 하는 등 타 팀에서의 감독 성적이 좋았다. 3년동안 계속 팀에 머무르며 이종운, 송일수 수준의 성적을 보인 감독은 거의 리그에서 유례없는 수준. 그 이순철조차 3년을 채우지 않았으며, 백인천 또한 너무 못하자 결국 롯데가 경질해버렸다.[28] 김성근도 경질되긴 했지만, 김한수보다 오래 한화에 남았기에 제외.[30] 김한수가 있었던 시절 삼성은 명백한 약팀이었다. 김한수의 역량이 부족하긴 했지만, 적어도 타코로써는 훌륭했고, 팀 자체가 절대 가을야구를 갈 수준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나마 쉴드를 쳐줄만하다. 그러나 두산의 송일수는 팀 자체가 강팀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을야구 진출을 못했다.[31] 이 시즌 최다관중이 홈개막전서 나왔는데 4500명도 못넘었다. [32] 특히 1차전에서 이종욱의 2루 도루때 2루 커버 들어간 정근우가 송구를 빠뜨리고 3루로 진루하려는 이종욱의 다리를 잡은 행위는 더더욱 실드의 여지가 없는 악질 플레이다. 후에 정근우는 큰 경기 경험이 부족해서 그런 실수가 나왔다라고 변명을 했지만... 그래도 그렇지, 서승화가 윤재국의 다리를 걸어 큰 부상을 입힌 행위와 다를게 뭐있나?[33] 사실 2007년부터 우승 시즌에는 한국시리즈 원정 유니폼 전승, 준우승 시즌에는 한국시리즈 원정 유니폼 전패이다.[34] 관점에 따라서는 오히려 고도의 이미지 마케팅이라는 의견도 있다. 구단의 이미지에 다소 손해를 보더라도 팀의 에이스이자 프랜차이즈가 원한다면 최대한 지원을 해주겠다는 의도였을 거라는 내용.[35] 여담이지만 이 기록은 KBO 통산 2번째로 나왔는데 재미있게도 처음 이 기록을 허용한 팀이 다름아닌 LG다.[36] 2008 시즌은 사상 최악의 외국인 선수 흉작인 해였다. 특히 외국인 투수들이 정말 심각했는데, 비단 SK 뿐만 아니라 두산의 저스틴 레이어, 삼성의 톰 션웨스 오버뮬러, 롯데의 마티 매클레리, LG의 제이미 브라운 등 외국인 투수들이 유독 죽을 쒔던 해였기도 하다. 그나마 사상 최악의 외국인 흉년 속에 뛰어난 활약을 했던 용병은 롯데의 카림 가르시아와 LG의 크리스 옥스프링, 로베르토 페타지니 밖에 없었다. [37] 김태훈과 서진용은 1차지명, 박종훈은 2차 1라운드[38] 특히 서진용은 입단 직후 육성선수로 강등되면서 1차지명자의 육성선수 계약이라는 황당한 일을 겪게 되었다. 보통 1차지명자가 안 터져서 육성으로 강등되는 경우는 있지만 입단 직후 육성선수 계약을 맺었다는 것은...[39] 2013년 NC 다이노스의 성적은 7위다.[40] 특히 오죽했으면 선동열이 삼성을 우승한게 아니라 삼성이 선동열을 우승시켰다는 농담이 있을 정도였다. [41] 불륜#s-2 건은 진실이 밝혀지기 전까지는 보류 상태지만 음주운전은 빼도박도 못하는 흑역사.[42] 해태 타이거즈의 전성기 시절에는 10번은 김준환, 11번은 김성한, 13번은 송유석, 14번은 이순철, 15번은 신동수(32번도 달았었다.), 16번은 이상윤 - 문희수(16번을 달기 이전에는 20번이었다.), 17번은 조계현, 18번은 선동열, 19번은 이강철이었다.[43] 그나마 유승안도 이 등번호를 달은 적이 있지만 빙그레에 가서 포텐 터졌다.[44] 개명 전에는 김상현[45] 사실 김응용 감독이 99시즌을 재활로 다 날린 이대진을 투수가 없다고, 재활이 미처 끝나지 못한걸 복귀시킨게 화근이였다. 그 후 07년까지 몇 경기 등판하지 못하고, 그 와중에 타자 전향도 시도해봤지만 부진하여 계속 재활병동에만 머물렀다.[46] 투수 혹사 부분은 대표적인 두명만 나열한다. 다 거론하기엔 끝도 없이 많다. 한승혁, 임기준, 홍건희, 92억 등.[47] 피타고리안 승률 3위다. 불펜을 갈아마시면서 불펜운영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게 하여 말아먹은 경기가 한두번이 아니다. 당장 임창용만 안내쳤어도 최소 4위는 찍었을 것이다. 임창용 내치고 윤석민, 김세현 등을 쓰려다가 결국 팀을 말아먹었다.[48] 하지만 KIA는 kt와의 마지막 2경기를 모두 이겨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비로소 정규시즌 우승을 확정지어 수원 징크스를 떨쳐내는 듯했다. 그러나......[49] 한글 로고는 1994년부터 1996년까지, 영문 로고는 1997년부터 1998년까지 사용되었다.[50] 3-6-4-7-7(중도 경질)에 승률 .447, 참고로 김영덕 감독 시기 빙그레 이글스의 성적은 2-2-3-2-2-5, 승률 .572에 가장 못한 5위때도 5할이었다. 감독 시절 무모한 수준의 투수 혹사는 덤(투수관리에 대한 개념이 지금보다 덜 잡힌 시절이라 넘어간 거지 지금 이랬으면 팀이 작살 났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1994년 시즌 후 이정훈(장정순)과 정경훈(정영규)의 트레이드건도 있었다. 결과는 보시는대로.[51] 데뷔는 MBC 청룡에서 했지만 실질적인 전성기는 빙그레 시절이었다.[52] 대표적으로 황재규, 양훈, 허유강 [53] 사실 김인식 감독은 두산 시절 신인들을 적극 기용하는 편이었으며 한화에서도 확실한 검증을 받지 못한 상태의 류현진을 적극적으로 기용했다. 결정적으로 구단 자체에서 신인 키우기를 소홀히 한 점은 이때부터 드러나고 있었다.[54] 아주 없지는 않았다. 최진행, 오선진, 안승민 등이 팀의 주전급으로 성장했으며, 박정진송창식의 재발견과 부활도 있었다. 하지만 이 선수 이외에 나머지 유망주들이 크게 성장하지 못한 것이 문제.[55] 18연패 중 14연패는 한용덕이, 4연패는 최원호 감독대행이 기록했다.[56] 사실은 이면에 뒷돈이 있어서 12.5억이었지만...[57] 신경현의 저서를 비롯해 한화 코칭스태프들 중 이쪽 부분에서 좋은 점수를 준 사람이 없다. 김응용 못지 않게 좌완을 선호한다는 김성근이 여러차례 시도를 해봤지만 실패했고, 결국 인터뷰로 야구가 아닌 다른 곳에 마음이 가 있는 것 같다. 여러 차례 고쳐보려고 했지만 나는 더 이상 못하겠다.라고 포기 선언을 했다.[58] 이건 기아도 마찬가지다. 자진 신고 당시 유창식은 김성한김상진의 등번호 11번을 달고 있었다.[59] 2015년 이후 김성근의 선수를 대하는 태도 등에 재평가가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지만 유창식의 경우는 그런거 없다. 애초에 승부조작 빼고도 한화팬들에게 남긴 실망감이 워낙 큰지라 재평가의 ㅈ자도 못꺼낸다. [60] "장명부가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아무리 한 물 간 투수라 해도 최소한 10승쯤은 올리지 않을까? 크게 기대를 했었다. 그런데 1승이라니…, 내가 창피해서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61] 말소 당시에 2군에서 아무런 대체자가 올라오지 않아 감독이 직접 털리는 투수를 교체하기 위해 올라오고, 정우람이 일일 불펜 코치(...)까지 도맡다가 0.1이닝 4실점으로 팀 연패에 쐐기를 박는 안습한 사태가 터졌다.[62] 대다수 경기에 주전 선수들을 거의 빼다싶이 했고 1.5군 선수들을 기용했다. 그것도 정규리그 우승을 앞둔 상황에서...[63] 특히 1998시즌 후반기의 활약을 바탕으로 재계약했던 주니어 펠릭스가 1999시즌 전 몸 관리가 제대로 안 된 상태에서 합류한 뒤 희망고문을 반복한 것이 컸다. 케빈 대톨라는 말할 것도 없고.[64] 그나마도 승차없는 순위역전이었다.[65] 최종 순위는 142경기째에서 확정되었지만 5위 경쟁팀들이 꾸준히 삽질해서 순위 역전 직전까지 갈때마다 LG가 스스로 말아먹어서 순위가 전혀 올라가지 않았다.[66] 주력 선수인 정찬헌과 정성훈이 음주운전으로 인한 잔여경기 출장 정지=시즌 아웃을 당하면서 팀의 추진력에 제동이 걸렸다.[67] 그래도 100만 관중을 돌파하긴 했다.[68] MBC 청룡 시절에는 하위권에 있었지 적어도 꼴찌는 하지 않았다. 2005년까지 최저성적은 1992년과 1996년 7위를 기록한게 최저 성적이다.[69] 이 과정에서 김재현의 보상 선수를 안재만으로 고른 것은 최대의 실책이었다.[70] 최초는 이광은이다.[71] 없는 전력속에서도 우규민, 이대형 등을 발굴하기도 했다.[72] LG 구단은 정식으로 사퇴를 수리하지 않은 채 조계현 수석코치에게 사실상 감독대행 역할을 맡겼고 이런 상황은 양상문 감독이 부임하기 직전까지 이어졌다.[73] 단, 미니홈피에 "놀러가고 싶다" 라는 실언을 써서 욕을 먹은건 곧바로 사과하고 미니홈피도 폭파시키고 해서 문제될건 없었다. 단지 같은 팀 동료가 거하게 어그로를 끌어서 문제가 된 것. 여기에 김회권과 이승우도 같이 어그로를 끌었지만 이 둘은 상황이 심상찮음을 감지하고 미니홈피를 터뜨렸다.[74] 그것도 코칭스텝이 그러지 말라고 말렸는데도 불구하고.[75] 창원시가 9구단 창단에 의욕적인 이유 중 하나 지자체 통합의 상징으로서 추진하는 사업이다.[76] 구 마산시민들도 이 이름에는 실소를 금치 못했다. 정확히는 아구찜 상인과 그 관계자들만의 주장이다.[77] 웃긴 건 창원시가 보강공사를 약속해놓고 흐지부지 시켰단 거다. 기존 구장은 손을 대지도 않으면서 다른 곳에 자리를 잡으려 하니 딴지를 거는 그야말로 인지부조화를 보여주고 있는 거다.[78] 두산이 플레이오프에서 패배하면 3등이었다.[79] 신현철은 4월에 음주운전을 했으나 기사로 뜬 것은 6월이었다.[80] 게다가 이닝당 평균 실점이4점이다! [81] 이 액수는 KBO 리그 역대 신인 계약금 중 공동 5위에 해당한다.[82] 1983년 삼미 슈퍼스타즈 전/후기리그 2위, 1984년 OB 베어스 전/후기리그 2위+통합 승률 1위, 롯데 자이언츠 통합 2위, 이 3팀은 해당 년도에 모두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했다. 더더욱 어이없는 점은 86년 수정된 제도를 기준으로 보면 셋 다 가뿐히 한국시리즈 직행이 가능했다. 그나마 1982년에도 편법으로 한국시리즈가 열렸지 그게 아니었으면 OB가 한국시리즈 없이 통합 우승을 했다.[83] 그때나 지금이나 본인이 이 기록을 가지고 있다.[84] 대표적인 예가 김재걸.[85] 2013년에는 대만서 그런 거지만 이건 서울에서 했다. 또한 2013년은 득실차에서 밀렸지만, 이번엔 아예 승산도 없었다.[86] 그나마 금메달을 따서 체면치레는 하긴 했지만, 오지환 병역 논란으로 인해 20년 만에 결승에서 한일전을 이기고도 가루가 되도록 까였다.[87] 이전, 이후에도 고시엔 진출팀은 있었지만 순수 조선인 야구부는 1923년 휘문고보가 유일하다.[88] 같은 리그끼리는 20경기씩 총 60경기이지만 다른 리그끼리는 18경기씩 총 72경기를 치렀다.[89] 나경민이 잠시 트리플A 로스터에 들어간 적이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임시 승격이었다.[90] 취소선을 쳤지만 아주 틀린 얘기는 아니다. 김재환은 나쁜 약쟁이, 최지만은 착한 약쟁이라는 고정 관념이 은근히 깊게 뿌리박힌데다가 최지만은 MLB에서 뛰고 있는 터라 상대적으로 관심이 덜한 점도 있기 때문.[91] 처음으로 파업이 일어난 1972년의 경우 몇 경기만 취소되었을 뿐이지만, 1981년에는 시즌의 4분의 1을 날리며 이 시기에 한해 전기-후기리그로 나뉘어 플레이오프를 치뤘고, 1994년은 8월 이후의 시즌이 취소되어 1904년 이후 90년만에 월드시리즈가 무산되고 말았다. 그리고 94년의 파업은 반년 가까이 끌어오다가 95년 시즌 개막직전에 끝났고 144경기의 단축시즌을 치렀다.[92] 하지만 선수노조와 선수들의 권익 향상이라는 입장, 즉 선수노조의 입장에서 바라보자면 역사상 가장 통쾌한 순간이라 할 수도 있다. 위대한 선수노조위원장 마빈 밀러를 흑역사의 주동자라고 무작정 폄하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93] 사실상 이 사건의 직접적인 최대 피해자가 다르빗슈 유였기 때문이다.[94] 회색을 사용했다는 자체는 미국 구단도 많이 하기에 애매하지만, 사이타마 연고이전 이후 2008년까지 원정 유니폼엔 파란색이 주 색으로 들어가 있었는데 그 전통을 깨부쉈기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95] NPB에서의 그의 취급을 보면 거의 승부조작으로 제명당한 사람 바로 밑 수준이다![96] 그러나 일본시리즈에선 2승4패로 우승에 실패했다.[97] 그 뒤 1954년 양측 회사의 이름을 따서 요쇼 로빈스로 이름을 바꿨으나, 이듬해인 1955년 쇼치쿠가 야구단 사업을 때려치면서 다시 다이요 훼일즈로 이름을 바꿨다.[98] 여담이지만 이때 쇼치쿠 로빈스 꼴이 날 뻔한 구단이 하나 더 있었다. 바로 히로시마 카프(現 히로시마 도요 카프). 시민구단이라는 사정 탓에 재정부족 등의 이유로 인해(이것 때문에 1951년 다이요 훼일즈에 합병까지 논의될 정도로 심각한 상황에까지 빠졌으나 히로시마 시민들이 모은 성금으로 합병만은 면했다.) 늘 하위권 신세를 면치 못했고 이로 인해 1952년 3할 미만 승률팀 타구단 합병정책에 걸릴 뻔했으나 당시 팀의 에이스인 하세가와 료헤이 등의 분전으로 인해 극적으로 3할 승률에 안착, 살아남을 수 있었다. 정작 세리그 우승까지 한 쇼치쿠는 히로시마가 합병논의한 다이요와 합병하고 말았지만..[99] 아예 팀을 '요미우리'라고 줄여 부르는 것 자체가 자이언츠를 비하할 목적으로 하는 말에 가깝다. 비하할 뜻이 없다면 '교진'으로 부른다.[100] 한국에서 이 성적이어도 앞의 9자리가 비밀번호 (656565566)이다![101] 2006년에는 퍼스트 스테이지에서 세이부를 눌렀으나 파이널 스테이지에서 닛혼햄에게 패했다.[102] 2005년에 소프트뱅크가 1위를 하고도 플레이오프에서 떨어지자 1위팀에게 주는 1승 어드밴티지가 생겼었고 그 규정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2007년에는 순수 5전 3선승제라 제외)[103] 그리고 2015년에도 꼴찌를 하고 말았다(...)[104] 반시즌동안 뛰었는데 그동안 2안타 쳤다(...)[105] 일단 그렇게 우승해서 일본시리즈 진출했지만... 히로시마 도요 카프한테 에나츠의 21구 등의 명장면을 만들어내며 패배하고 말았다. [106] 참고로 꼴찌 2위는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1978년). 3위는 히로시마 도요 카프(1975년).[107]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요코하마 디엔에이 베이스타즈가 이 기록을 넘을락 말락 하지만 아직까진 넘지 못했다.[108] 당시 전적: 36승 1무 103패 승률 .259[109] 긴테츠의 창단 당시 이름은 긴테츠 펄즈 였는데 치바 시게루의 부임 이후 그의 별명인 "성난 황소"를 따 팀 이름을 긴테츠 버팔로→긴테츠 버팔로즈로 바꿨다.[110] 지금의 오릭스 버팔로즈는 블루웨이브가 버팔로즈를 합병한 뒤 새로 바꾼 이름이다.[111] 더군다나 구로다가 일본시리즈에 등판한 건 원정경기인 3차전밖에 없었다.[112] 라미고 몽키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