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오쩌둥/평가
1. 개요
마오쩌둥에 대한 평가를 서술한 문서.
마오쩌둥은 블라디미르 레닌, 이오시프 스탈린과 함께 '''공산주의 역사는 물론 ''''''현대 중국과 현대 동북아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마오쩌둥의 이름을 딴 마오주의는 마르크스주의, 레닌주의, 스탈린주의와 함께 공산주의의 대표적인 분파를 형성하였으며, 중화인민공화국은 소비에트 연방을 제외하면 외세의 개입 없이 내부 혁명을 통해서 공산화에 성공했던 유일무이한 강대국이었다. 또한 게릴라 지도자로서도''' 샤를 드 골이나 요시프 브로즈 티토, 체 게바라 등을 넘어서는 절대적으로 불리한 조건을 이겨내고 최종적인 승리를 거머쥐는 유능함을 보였으며, 독재자나 학살자로서도 그 방면에서 20세기를 대표하는 아돌프 히틀러, 이오시프 스탈린에 전혀 뒤지지 않는 잔혹성을 보이기도 했다.'''
마오쩌둥의 존재는 중화인민공화국과 한국전쟁으로 이어졌고, 이는 초기 냉전에서 미소 양국의 대전략을 완전히 뒤흔들었다. 중화민국이 국공내전에서 살아남았거나 적어도 중국을 반분하는 선에서 버텼더라면, 혹은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공산권의 위협이 가시화되지 않았더라면, 냉전은 우리가 아는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그는 세계사적으로 역사를 뒤바꿔놓았다고 평가되기도 하는 몇 안 되는 인물이며[1] , 그만큼 지금까지도 모택동에 대해 많은 연구와 평가가 이루어지고 있기도 하다.
2. 긍정적인 평가
'''마오쩌둥은 중국 공산당이 굉장히 불리한 여건에서 국공내전을 승리하고 살아남는데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코민테른의 지시를 따랐던 초기 중국 공산당의 투쟁 노선이 실패로 끝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물론 중국 공산당에 인재가 마오쩌둥밖에 없었던 건 아니지만, 대장정과 같은 절망적인 상황을 이겨내고, 중일전쟁을 전략적으로 이용할 만큼의 대국적인 시각을 가졌으며 그 와중에 내부반발을 제압할 만한 정치력을 가졌던 인물은 '''마오쩌둥이 유일'''했다.
또 중국 대륙을 통일해 새 국가를 개국했다는 점에 있어서 유방과 주원장에 비교하는 사람들도 있다. 특히 건국 과정은 주원장과 놀라울 정도로 비슷한데 유방도 나름 능력 좋았지만 장량, 한신, 소하 등 인물들을 다루는 능력이 컸는데 비해 마오쩌둥 같은 경우 본인의 군사적 수완으로 주원장과 같이 리더 스스로의 역량이 대업에 크게 작용했다. 유방과 군사적 재능은 그시대 3~4위정도 되지만 하필 무력이든 군재든 전부 최강급인 전세계에서 손꼽히는 인간흉기와 중국 명장의 대명사가 같은 시대에 있었기에 군사적 능력은 진 말기 대업을 일으킬 때는 몰라도 초한전쟁에 들어서선 항우를 상대로 버티는 정도였지 항우에게 이기는데 크게 작용하진 않았다. 그리고 주원장과 마찬가지로 공신들을 대량으로 숙청해 마오쩌둥이 죽기 전 전혀 피해를 안입고 멀쩡히 넘어간 중공 수립 이후 요직에 있던 개국 멤버는 저우언라이와 조용했던 둥비우 정도 뿐이다.[2] 하지만 마오쩌둥이 유방과 주원장과는 달리 자기가 세운 나라를 자신이 파탄내버려 그 후유증이 현재에까지 영향을 끼쳤다는 역사를 감안하면 아무래도 유방 및 주원장에 비하면 수성의 인물로써는 크게 처진다 평할 수 있다.[4]
중일전쟁에서 일본 제국과 싸우지 않고 사보타주만 일삼았다는 비판도 있지만, 역설적으로 말하자면 삼국지 구도[5] 에서 '''전력상 가장 열세이던 공산당으로서는 기회를 도모하는 것이 합리적인 선택'''이기도 했다. 그리고 휘하 장수들조차 민족적 분노에 휩싸여 일본 제국과 싸우려 들 때, 마오쩌둥은 자신들의 현재 전력을 냉철하게 파악하고 종전 후의 판도를 생각해 교전을 제한하며 국공내전 승리의 포석을 깔았다. '''이처럼 중국 혁명사에서 그의 기여와 영향력은 러시아 혁명에서의 레닌보다도 훨씬 컸으며, 그렇기에 현대 중화인민공화국에서 건국영웅을 부정하기란 어려울 것이다.'''
중화민국을 타도하고 소련으로부터 신장 지역과 만주 지역을 인수인계 받고 티베트를 합병시키면서 20세기 분열되었던 청나라의 영토를 상당수 복구하여 '''현재의 중화인민공화국의 영토를 완성하였다'''.[6]
간체자를 고안하여[7] 쓰기 어려운 정체자를 대체함으로써 문해율을 상당히 높였고, 막장 수준이던 중국 대륙의 참담한 문맹율을 개선시켜 사회개혁에 성공적으로 해내었다.
기나긴 내전 끝에 간신히 오랜 군벌시대를 종식시킨 불안정하고 혼돈스러운 정국에서, 더 이상의 '''대규모 반란이나 내전 없이 군과 관을 중국 공산당 중화인민공화국 중앙정부의 통제 아래 통합시킨 것'''은 굉장히 높게 평가할 수 있는 업적이다. 오늘날까지도 국가통합에 편집증적인 수준으로 목을 매는 중화인민공화국과 중국 공산당 정부를 생각한다면 더더욱.
그리고 그의 군사적 재능은 '''게릴라 전사를 새로 쓰게 만들 수준으로 탁월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수준이었다. 압도적인 경제력과 군사력을 바탕으로 장제스가 공격할 때 마오쩌둥이 없었다면 공산당이 그날로 멸망했으리란 것은 반론의 여지가 없다. '''마오쩌둥의 게릴라 전술에 대해서는 적군이던 한국군도 크게 고평가한 바 있으며,''' 채명신 장군이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의 기본 전략인 중대 전술 기지 개념을 만들 때 마오쩌둥의 게릴라 병법을 참고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3. 부정적인 평가
공과로 따지면 자신이 존경했던 시황제와 비슷하다. (군벌과 열강에 의해) 분열되었던 중국을 통일시키고 강력한 행정력을 갖춘 정부를 건설했으나, 집권 후 과대 망상 정책을 강행했다가 국가와 민생을 파탄에 빠뜨린 폭군 겸 암군이라 할 수 있다. '''한마디로 대단한 전쟁영웅이지만 내치에 있어서는 수천년 역사에 손꼽히는 막장 트롤러'''.
자신이 강대한 국가의 기틀을 세워놓고 스스로 이를 파탄낸 역사적 사례로 손권이나 양 무제, 부견과도 심하게 많이 닮았고 실책의 스케일은 더욱 심했다. 대약진 운동 이전가지만 해도 마오는 흠은 있지만 옥의 티인 위대한 정치가로 기억될 터이지만,[8] '''말년의 실책이 다 말아먹었다.''' 그나마 저우언라이가 그나마 뒷수습은 해주었고, 후에 덩샤오핑이 최고 권력자가 되었고 이때부터의 중공 체제가 북한같은 완전 막장이 아니라 나라꼴을 수습할 수 있어서 나라가 망하질 않았을 뿐.
3.1. 정책의 대실패
중국 공산당 중앙 위원회는 "중화인민공화국 건국부터 당이 걸어온 역사에 대한 몇 가지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모였다. 회의실 문이 닫히고 비공개 회의가 시작되기 직전 천윈[9]
이 이런 고백을 했다."만약 마오 주석이 1956년(대약진 운동 이전)에 서거했다면[10]
그는 틀림없이 중국 인민의 위대한 지도자로 남았을 겁니다. 그가 1966년(문화대혁명 이전)에만 서거했어도 뛰어난 공이 조금 퇴색될지언정 대체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수 있었겠지요. '''하지만 그는 1976년에 서거했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세계 인구의 4분의 1을 차지하는 중국 인민을 수십년 동안 절대적으로 지배해왔고, 평화시에 야기된 7천만명이 넘는 사람들의 죽음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하는 인물'''
―마오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 장융
마오쩌둥은 친화력과 카리스마를 바탕으로 인재 모으는 능력 자체는 매우 좋았고 저우언라이, 덩샤오핑, 류사오치, 펑더화이, 주더, 린뱌오, 천윈 같은 유능한 인재들을 휘하에 두고 있었지만[12] 국공내전으로 국민당 정권을 격파하고 중화인민공화국 정권을 수립한 이후로는 이들의 능력을 제대로 써먹지 못한다. 집권후에 조급증과 함께 독선적인 면모를 크게 드러내며 주변인들의 충고를 무시하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스탈린이 살아있을때는 그래도 눈치를 보는 모습을 보이며 일단 평균 이상의 경제적 성적을 거두며 1936년도의 경제력을 웃도는 성과를 보였지만 흐루쇼프대 들어서면서 외교적 고립 우려와 함께 조급한 모습을 보이며 천윈 등 경제관료들이 주도하던 안정성장 노선을 뒤엎고[13] 대약진 운동을 펼쳤는데[14] 경제정책이 잘못되어가고 있다는것을 느끼면서도 경제정책을 조기에 수정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고 그 결과 3000만명 이상의 아사자가 발생하는 최악의 결과를 초래했다.'''마오쩌둥이 1949년 이후 유일하게 잘한 일은 죽은 것 뿐이었다.'''
-원등비(袁騰飛)
대약진운동의 실패로 물러난 뒤에는 권력에 대한 노욕에 휩싸여 문화대혁명을 일으켰고, 홍위병들이 사회 인프라와 문화재를 파괴하고 사회전반적으로 광기가 휩싸이는 과정을 조장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학자나 지식인들, 동료나 후배 당원들이 홍위병들에게 모욕당하고 한직으로 끌려나갔으며[15] 심한 경우에는 살해당하기까지 했다. 총리인 저우언라이가 마오쩌둥의 실책을 수습하고자 나름대로 노력은 했다지만 애초에 문화대혁명 당시 국정을 농단하던 4인방에게 권력을 쥐어준 인물이 마오쩌둥이었기 때문에 불가능한 꿈이었고, 결국 중국은 마오쩌둥이 죽는 그 순간까지 문화대혁명의 후유증을 완전히 수습하지 못했다. 또한 경제적으로도 중국 전체를 20년 가까운 기간 동안 침체기에 빠트리면서 일본, 서독, 이탈리아, 캐나다, 브라질, 멕시코. 스페인에게 하나하나 추월당했으며, 1980년대 들어서는 인구수로 1/40 이하인 대만에게 국가'''총'''생산의 40% 가량을, '''1/20 정도인 한국에게는 70%(!)'''까지, 심지여 영국의 식민지이자 도시인 홍콩에게 '''27%'''까지 따라잡히는 충격적인 결과를 불러왔다.[16] 사실 중국/경제성장률을 보면 마오쩌둥 집권기간 내내 중국의 경제가 쭈욱 침체였던것은 아니었는데 1950년~1957년의 기간 동안 고성장세를 기록하여서 한국보다 잘살았기도 했고, 류샤오치 집권기간인 1963년부터 1966년까지 기저영향이 있기는 해도 4년 연속 10% 경제성장을 기록하기도 했으며 홍위병이 하방되면서 문화대혁명의 혼란이 일정부분 수습된 1969년과 1970년에는 각각 19%, 16%의 고성장을 기록한적도 있다. 그러나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으로 두차례씩이나 경제성장의 성과를 완전히 잠식해먹었고, 1969년과 1970년에 경제가 문혁의 후폭풍에서 회복된 이후로도 1970년대 초중반에 경제성장률이 침체된 영향으로 결국 중국이 마오 생전에 경제성장의 포텐션이 제대로 터지지 못한것이었다. 해당 기간 동안 대만과 홍콩이 비교적 안정적인 성장세를 유지하며 1인당 국민소득을 수십배 이상 성장시키는 동안 중국은 고작 몇배의 성장을 거두는데 그쳤다. 1980년 기준으로 홍콩이 1인당 국민소득 5000달러, 대만이 2000달러를 달성하는 동안 중국은 194달러에 그쳤는데 1950년대에 대만과 홍콩과의 1인당 국민소득 차이가 크게 나지 않았음을 감안하면 이 기간 동안 경제성장을 중간중간에 리셋시켜서 성장을 늦추게 만들고 타 국가에 크게 뒤쳐지게 만든 책임은 마오쩌둥의 몫이다. 또한 1980년대에 중국이 본격적인 고성장세에 접어들었을때가 대만, 홍콩 경제의 전성기였을 시점이다보니 대만과 홍콩의 경제성장률이 조금씩 둔화되기 시작하는 1990년대가 되어서야 이 누적된 차이를 좁히기 시작한것이었다
한편으로는 급속한 인구 증가 정책을 고집하여 범죄율 증가와 환경 파괴, 도시화 문제를 낳았다.[17] 물론 인구에 적정선의 기준은 없고, 당장 대한민국만 해도 계획생육정책의 타이밍 조절을 실패하면서 극단적인 고령화와 인구감소를 겪고 있기는 하다. 그렇지만 마오쩌둥이 이런 정책을 고집했던 건 인구 증가로 내수시장 내지는 생산력을 활성화시킨다는 따위의 인민의 삶의 질을 도모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었고, 인구가 곧 국력이니 '''많은 인구를 소모품으로 사용'''하려는 전체주의적 사고방식이었다.[18] 물론 그냥 있었어도 어차피 당시 분위기상 인구는 증가했을 것이지만, 갑자기 확 늘거나 확 줄면 사회에 독이 되는데 너무 빨리 늘어났고, 이들이 지금 중국 고령화에 일조하고 있음을 생각해보면 비판받을 건덕지는 충분하다.
마오쩌둥에 대한 평가가 후한 중국 내부에서도, "마오는 분명 성공적으로 혁명을 일으켰지만 집권 중에 저지른 실책은 상당히 많다"라면서 어느 정도 혹평에 수긍하는 분위기다.
3.2. 무자비한 숙청
마오쩌둥은 정권을 장악한 이래 지속적인 숙청을 벌였으며, 대약진 운동과 문화대혁명을 배제하더라도 1949년에서 1997년까지 48년동안 강제노동수용소에서만 '''1500만명''' 정도가 희생되었다고 추측된다. 출처. 그리고 이 출처에서는 여러 2차 자료들을 종합한 결과 마오쩌둥 집권기에 총 '''7500만명이''' 죽었다고 추측한다. 이정도면 과거 독일이 나치정권때 학살한 유대인 600만명을 넘어 우리나라 인구보다 '''2000만명이나''' 많은 숫자이다.
네덜란드 출신의 역사학 교수 프랑크 디쾨터가 쓴 "해방의 비극: 중국 혁명의 역사"에 따르면, 마오쩌둥 집권 초기 10년 동안 최소 500만명 이상의 민간인이 무고하게 지주로 몰리거나, 공산당의 정책에 반발했다는 등 여러가지 이유로 목숨을 잃거나 박해를 받았고, 외국인도 예외는 아니었다. 장융의 '마오' 하권에도 이 때의 온갖 학살 및 고문, 인권 탄압 사례들이 수두룩하게 나올 정도다. 특히 마오쩌둥이 토지개혁을 하면서 지주, 유산가에 대한 대량학살을 저질렀던 예도 있다. 위키피디아
3.3. 항일전쟁에서의 실언
모택동이 일본 인사들에게 듣고 싶었던 것은 결코 사죄 따위가 아니었다.
장개석이 이끄는 국민당군이 최전선에서 싸우던 시절이었던 과거 이야기를 언급하는 것 자체가 몹시 달갑지 않았기에 방중하는 일본 인사들이 계속해서 과거에 대해 사죄하는 것에 대놓고 진절머리를 내고 있었던 것이다.
1961년 1월 24일, 일본 사회당 의원 구로다 히사오와의 대담에서도 모택동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출처 : "마오쩌둥 외교문선" 460~461쪽]
"난고 사부로 씨와 만났을 때, 그는 만나자마자 다짜고짜 "일본은 중국을 침략했습니다. 사죄하지 않을 도리가 없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당신네들은 그런 견해를 가지면 안 됩니다. 일본의 군벌이 중국의 대부분을 점령한 것이야말로 중국 인민을 교육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중국 인민은 각오를 품고 단결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됐더라면 나는 지금도 옌안의 동굴에 틀어박힌 신세가 되어서, 지금처럼 베이징에서 경극을 관람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만약 '감사'라는 단어를 사용한다면, 나는 차라리 일본의 군벌에 감사하고 싶습니다."'''
1964년 7월 10일, 일본 사회당 사사키 코조와 구로다 히사오 등 사회당 방중 대표단과 만났을 때의 대화가 '마오쩌둥사상 만세(도쿄대학 근대중국사연구회 역)'에 실려 있는데, 흥미로운 점은 일본어 번역에서 "침략"으로 번역된 모택동의 말들이 원문에서는 '진공' '점령' 등의 단어로 에둘러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일본 측이 사용하는 '침략'이란 단어 자체에 속죄의식이 담겨 있기에, 모택동은 이를 극구 피했던 것이다. 사사키 코조도 계속 사죄를 거듭하는 통에, 마침내 모택동은 대장정 시절의 일까지 언급한다.
'''"우리에게 남은 병력이 얼마나 됐겠습니까? 30만에서 2만 5천으로 줄어 버렸습니다. 우리가 왜 일본 황군에 감사하지 않으면 안 되는지 명확하지 않습니까? 황군의 진공으로 우리가 황군과 싸울 수 있었고, 그 덕분에 운 좋게 다시 장개석과 합작하게 됐기 때문입니다. 2만 5천의 군대가 8년간 싸우면서 120만 대군이 되어 인구 1억의 근거지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이런데도 황군에 감사하지 않아도 좋다고 생각합니까?"'''
이 정도까지 실토해 버린 것이다. '더 듣기 민망하니 제발 말하지 좀 말라'는 모택동의 전전긍긍하는 모습이 눈에 떠오르는 듯하다.
- 엔도 호마레(遠藤譽), 모택동 : 인민의 배신자
또한 국민혁명군이 목숨 걸고 싸울 동안 대일 항전에 소극적이고 기회주의적인 자세로 그저 자기 세력 불리기에 급급했다.[19] '''심지어 일본의 중국 침공에 감사한다는 개드립을 쳤다.''' 진짜로 일본에 감격해서가 아닌, 단순한 외교적 립서비스를[20] 진지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는 의견도 있지만, 위의 엔도 호마레가 인용한 사료들을 보면[21] 마오쩌둥이 실제로 일본의 침략을 거리낌없이 여겼다는 것과 '''중화민국의''' 대일항쟁기를 자신에게 그닥 좋은 시기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을 부정하긴 힘들어 보인다. 엔도는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서 중국이 소위 '공산당의 대일항쟁'이라는 선전을 본격적으로 하기 시작한 것이 장쩌민 때임을 지적하는데, 어쩌면 마오쩌둥은 단순히 일본에 감사만 하는 수준도 아니고 중화민국이 싸우고 자신들은 세력이나 불리며 장제스의 세력을 갉아먹던 그 시대 자체의 언급을 금기시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22]중국공산당 인민일보에 난징대학살이 언급된 횟수
1946년~1960년 5월 : 21회
1960년 5월 ~ 1982년 6월 : 0회
1982년 6월 ~ 현재 : 835회
'''인민일보가 처음으로 난징대학살에 대해 언급한 것은 1951년 4월 8일인데 매우 단편적으로 언급했을 뿐더러, 그 후 오히려 전국적인 "입단속"이 벌어졌다. 1957년 중학 교과서에 처음 언급된 난징대학살이 60년판에는 오히려 없어지는가 하면 문혁 당시에는 "일본군에 의한 난징대학살"을 언급한 학자들이 반혁명 우파로 몰려 홍위병에게 조리돌림을 당하면서 난징 시민들조차 난징대학살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고 둘러댈 지경이 되었다.'''
- 엔도 호마레(遠藤譽), 모택동 : 인민의 배신자
4. 각국의 입장
4.1. 중화인민공화국
일단 중국 공산당의 공식적인 입장은 덩샤오핑의 '''공칠과삼(功七過三)'''[23] , 즉 공이 7할이요 과가 3할이라는 쪽이다.
학술적인 공과에 대한 객관적 평가라기보다는, 헌법보다 당장(黨章)이 위에 있는 중국 정치 체재상 당의 창건자를 격하하면 당의 권위가 떨어지기 때문이라는 정략적 이유였다. 흐루쇼프가 스탈린을 격하하면서 스탈린주의를 추종하던 타 공산국가들에 대한 주도권에 도전을 받았던 것이나 1980년대 소련을 비롯한 동유럽 공산국가들이 과거와의 섣부른 단절을 택하다가 붕괴했던 것을 감안하면 이는 현명한 선택이였다. 실제로도 덩샤오핑은 마오의 권위를 이어받아 강력한 독재 권력으로 개혁개방을 이끌어내며 현대 중국의 기반을 안정적으로 구축하였다.[24]
최근 중국 경제성장의 과실이 공산당을 비롯한 상류층 내지 해안 도시에 편중되며 빈부격차가 크게 늘어나자, 엄격한 평등주의 를 견지하던 문화대혁명에 대한 긍정적 평가도 늘어나고 있다. 개방 후 중국은 급격한 경제 성장의 대가로 어지간한 개발도상국이나 선진국을 능가하는 빈부격차와 부정부패를 겪고 있고, 이에 대한 반감으로 2010년대 들어 신좌파(뉴레프트)나 극빈층에서는 '''차라리 공평하게 가난하기라도 했던 문화대혁명 시절이 나았다'''고 주장하는 것. 최근 마윈이 코로나 사태와 관련해서 기부하겠다고 올린 동영상에 "부자의 것을 빼앗아 빈자에게!" 따위의 구호를 외치는 세대가 바로 이들이다. 물론 아직은 어디까지나 인터넷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소수의 목소리고, 대놓고 주장하면 우리나라에서 저런 구호를 외칠 때 주변 사람들이 바라볼 시선과 비슷한 정도의 취급을 감수해야 한다.
아무튼 이런 복합적인 정서 때문에 후난성에 위치한 마오쩌둥의 생가에는 중국인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으며, 중국에는 마오쩌둥과 다른 건국 영웅들을 신으로 모시고 있는 사당도 존재하고 있다. 왼쪽은 주더 원수, 오른쪽은 저우언라이 초대 총리.
[image]
허나 마오쩌둥은 동렬에서 비교되는 다른 독재자들과는 달리 '''거시적인 국가 운영에는 초지일관 영 꽝인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이는 민관을 막론하고 중국 내에서도 실질적으로 인정하는 부분이다.
예컨대 히틀러는 집권 이후 3~4년간은 독일을 세계 대공황의 여파에서 건져냈고, 인프라를 크게 확충시켰으며, 폴란드 등 인접국과의 무역분쟁을 종결짓고 올림픽을 치르는 등 짧게나마 꽤 훌륭한 국가 경영 능력을 보여주었다. 스탈린의 경우 이오시프 스탈린/평가에도 나오듯 전통적으로 유럽의 후진국으로 취급받던 소련을 짧은 시간 안에 세계적인 중공업 강국으로 탈바꿈시킨 업적이 있으며, 세계대전을 치를 만한 체력을 확보하기도 했다. 즉, 이들은 학살자였고 (히틀러의 경우) 국제정세를 오판해 불가능한 전쟁을 일으키며 파멸하긴 했을지언정, 적어도 평시 상황에서 국가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확고한 비전은 가지고 있었다.
반면 '''마오쩌둥이 권좌에 있던 기간 동안 중국은''' 수천만 인민을 굶겨 죽이는 등 '''여타 독재국가들 이상으로 인민의 희생을 강요했지만, 경제적으로는 심각한 퇴보 일변도를 걸었다''' 게다가 정반대의 길을 걸었던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이 대성공을 거두며 경제적 풍요를 가져다준 면도 있다. 중국은 자본주의를 받아들임으로써 부강해졌고, 그 과실을 누리는 지금의 중국인들은 마오쩌둥이나 마오주의를 찬양한다고 해도 과거의 가난하고 후진적인 빈국으로 되돌아가고 싶어하지 않는다. 오늘날 중국에서 역사적 인물로서의 마오쩌둥은 인정해도 그의 정책들은 거의 대부분 부정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여기에 정치적으로는 중국의 현 주석인 시진핑도 마오쩌둥 시절 시골로 하방되어 '''(사전적 의미의) 삽질'''을 거하게 했고, 그의 아버지 시중쉰도 문화대혁명 당시 홍위병에게 구타당하고 정치적으로 몰락한 적이 있다. 지금의 절대권력을 쥐고 있는 시진핑 입장에서는 마오쩌둥이 아무리 국부라고 해도 별로 띄워줄 마음이 없을 것이고, 실제로도 시진핑의 집권을 기점으로 중국 정부의 마오주의 탄압이 더욱 강해졌다.
이처럼 중국에서 마오쩌둥에 대한 평가는 여전히 매우 민감한 문제이다. 중국 정부는 겉으로는 마오쩌둥을 국부로 대우하면서도 그가 이슈화되는 것을 극도로 꺼린다. 또한 중국 커뮤니티 사이트들을 뒤져봐도 마오를 욕하거나 비방하는 리플들이 많으며, 오히려 마오쩌둥을 추종하는 중국 마오쩌둥주의 공산당이 중국 정부에게 탄압의 대상이 되기까지 한다.
2016년 1월에는 허난성 카이펑에서 한 사업가의 주도로 36m짜리 마오쩌둥 금박 동상이 건설되었으나, 마오쩌둥이 주도한 대약진 운동에서 수많은 인명이 아사한 허난성에서 이에 대한 비난 여론이 증가하자 중국 정부는 철거를 명령, 건립되자마자 철거되었다. 기사. 아래는 철거된 마오쩌둥 동상.
[image]
마오쩌둥 탄생 기념 행사를 주도했던 베이징대 학생이 잡혀가기도 할 정도이다#. 심지어 삼국지연의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실린 책을 내놓았던 위안텅페이라는 학자는 2010년에 "마오쩌둥 주석은 독재자다. '''1949년 이후[25] 그가 유일하게 잘한 일은 죽은 것'''"이라고 혹평하기도 했고#, 그러고도 중국 정부로부터 별 신변의 위협 없이 잘 지내고 있다.
결론짓자면, 중국 정부의 공식적인 평가는 공칠과삼이지만, 민관에서의 실질적인 평가는 점점 하락하고 있으며, 긍정하는 부분도 어디까지나 '''젊은 시절의 혁명가이자 투사, 기껏해야 건국 국부이자 집권 초기 개혁가로서의 모습일 뿐'''이지 일국의 주석으로서 남긴 정책의 방향이나 행적들에 대해서는 비판이 압도적이다.
4.2. 아시아 주변 국가들
중국 내부에서도 날이 갈수록 나쁜 평가를 받고있는 인물인 마당에 주변국에서의 평가는 중국보다 더 박하다. 특히 대한민국만 봐도 마오쩌둥을 우호적으로 평가하는 사람은 일본 제국을 좋게 보는 일빠, 친일파들보다도 더 찾아보기 힘들다. 공산주의자, 독재자나 학살자라는 것은 외국의 사정이라 쳐도 결정적으로 한국전쟁에 불법 개입하여 한국의 멸공통일을 가로막고 지금까지도 북한 문제로 한국의 암적 존재를 만든 장본인이기 때문에 악평을 듣고 있다.[26] 심지어 공산주의를 추종하는 극좌진영에서도 트로츠키주의는 있을지언정 마오주의는 사멸했다. NLPDR만 간간히 호평하는 정도이다. 그나마 페미니즘계열에서는 마오쩌둥의 "여성은 하늘을 받치는 나머지 반이다."라는 발언 때문에 그를 옹호하는 경우도 종종 있으나 이마저도 마오쩌둥의 악명높은 여색 행각으로 반론이 크다.https://brunch.co.kr/@vicotorlee/48[27]
가끔 농담삼아 마오쩌둥의 잉여짓 덕분에 한국이 중국을 이긴 사실을 가지고 마오쩌둥을 놀리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국공내전 종결 후 중국이 오랜 기간 표류하면서 일제에게 수탈당하고 6.25 전쟁으로 그나마 있는 살림마저 모조리 박살난 후진국인 대한민국에게 경제적으로 추월당하는 일도 겪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에 "한국 경제의 은인"이라는 식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실제로 중국이 개방된 이후 급속도로 강대국으로 성장하여 현재 소련에 이어 벌써 미국이랑 적대하고 있는 걸 보면 만약 마오쩌둥이 조금만 더 상식적이었어도 한국과 일본에게는 정말 암울한 시나리오가 펼쳐졌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사실 그럴만도 했던것이 마오쩌둥이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으로 중국의 국력침체를 이끌지 않고(...) 안정성장 노선을 내세우던 집권 초반기의 모습 그대로 중국의 공업화를 이끌었으면 일본은 아시아 1위 경제대국이자 세계 2위 경제대국으로 올라설수 없었을것이고, 한국도 1990년대 이후로 중국에 물건팔아먹을 일이 줄어들기 때문이기도 하며 안보적으로 북한의 국력이 크게 쇠퇴하지도 못했을것이기도 했다(...).
직접적인 이해 당사자인 대만 역시 통일파와 독립파를 막론하고 긍정적인 평가가 나올 리 없다. 중국 국민당을 위시한 통일파 입장에서는 자신들을 대만으로 쫓아내고 대륙 본토를 점거한 장본인이고, 독립파의 입장에서는 우리 나라를 자기네 땅이라 우기며 호시탐탐 노리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초대 지도자이니. 장제스 집권 시기에는 모비(毛匪), 모적(毛賊), 주모한간(朱毛漢奸) 등 온갖 멸칭을 갖다 붙이기도 했다.
하지만 감정적인 반감과는 별개로 민주화가 이루어지고 시간이 많이 흐르면서 대만인들도 마오쩌둥이라는 인물이 갖는 역사적 의의는 인정하기도 한다. 2014년 대만의 한 웹사이트에서 "20세기 가장 위대한 중국인은 누구냐"라는 설문 조사에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 덩샤오핑이 1, 2, 3위를 차지'''하자 황급히 설문 조사를 중지하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28]
일본에서의 평가도 한국, 대만과 별로 다를 것이 없다. 한때는 극좌 과격주의자들이 주체사상과 함께 마오주의를 추종했던 전적이 있지만 지금은 완전히 소멸한 상태이며, 극우쪽에서도 마오쩌둥은 일본 제국을 미화하는 용도로 가져다 쓰기 위해 그와 중공의 만행을 집중 조명하며 마구 깐다.[29]
중국과 역사적으로 앙숙인 베트남 역시 마오쩌둥에 대해 비판적이다. 인도차이나 전쟁, 베트남 전쟁 당시 중공의 지원을 받으며 프랑스, 미국과 싸우긴 했지만 베트남의 국부인 호찌민 역시 중국 공산당과 마오쩌둥을 경계했을 정도였으며, 마오쩌둥 사후에 중국과도 전쟁을 벌였으니, 오죽하면 베트남 국민들이나 역사학자들조차 중국에서 마오쩌둥이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으로 중국 국민들 수천만명을 죽이던 것에 비하면 차라리 호찌민이라도 국가를 제대로 다스리고 간 게 천운이었다고 평가할 정도이며 오늘날 베트남의 국민들도 중국 국민들의 앞에서 '그래도 호아저씨는 우리나라의 국민들을 굶겨죽이거나 집단광기를 일으켜서 국가를 망치는 짓은 안 했는데, 너네 나라 국부라는 사람은 뭐했냐?'라는 식으로 말하기도 할 정도로 마오쩌둥을 모국의 호찌민과 비교하며 마구마구 비난한다.[30]
인도 역시도 마오쩌둥에 대해서 적대적이다. 당장에 마오쩌둥 시기에 일어난 중인전쟁에서 악사이친 등 자국 영토의 절반을 중국에게 강탈당했으니. 다만 아이러니하게도 인도에도 낙살라이트 등 마오주의를 추종하는 반정부군 단체 세력들이 존재한다.
북한에서는 다른 동네보다는 평가가 괜찮다. 그러나 이는 자기네들을 도와준 은인이기에 북중관계의 기틀을 도모했다는 점에서 좋게 보는 것이지 사상쪽에서는 한수 쳐지게 본다. 이미 죽은 우방국 지도자를 비판해서 북중관계를 악화시킬 이유도 없고. 현재는 시진핑이 마오쩌둥 격하 작업에 들어가는 중인데 이 역시 굳이 태클걸어서 중국의 심기를 건드릴 필요가 없으니 신경쓰지 않는다.
4.3. 기타 외국
한때 서구권 좌파 진영에서는 마오의 정책을 높게 평가하기도 했지만[31][32] , 80년대 이후 죽의 장막이 열리면서 그의 정책이 벌여놓은 실정이 온 천하에 드러나 이런 평가는 종말을 고하게 되고 해외 에서는 독재자이자 학살자로 보는 시각이 우세해졌다.
(주로 서구권 좌파의) 인권과 민주, 사회 화합을 중시하는 관점에서는 수천만을 굶겨죽인 정책 실패, 그리고 개인의 권력욕을 위해 무질서한 포퓰리즘을 선동하며 문화 파괴행위를 저질렀다는 점에서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동시에 (서구권 우파나 권위주의 국가들의) 국가 대전략을 중시하는 입장에서도 공산주의 특유의 주의주의[33] 를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중국의 경제성장을 30년 가량 늦추고, 불필요한 전쟁 개입과 사상대립으로 자국의 외교적 입지를 악화시켰던 점을 어리석었다고 본다.
반면 제3세계 공산주의 운동에서는 상당한 영향을 미쳤는데, 이는 마오쩌둥이 혁명가이던 시절 중국의 농경사회적 배경이나 "농민으로 도시를 포위한다"는 게릴라 전술이 해당 혁명가들의 처지와도 부합했기 때문이다.
5. 결론
요약하자면 공산주의 혁명가이자 건국에 일조한 인물 중 최고의 인물이며 군사적 능력도 겸비하여 정권을 획득하는 데도 천재였다. 많은 중국인은 '마오쩌둥이 중화인민공화국 설립 이후 1950년대 초반에 사망하였다면 오늘날에도 말 그대로 신성불가침적인 완벽한 존재가 되었을 것'이라고 말하기까지 했다.[34] 그러나 대약진운동의 실패와 문화대혁명의 사례를 보듯이 일국을 운영하는 수성 지도자로서는 결코 좋은 평가를 받기 힘들다.
현재는 집권 이전의 혁명가, 투사로서의 마오쩌둥이라면 몰라도 집권 이후 중화인민공화국의 국가 주석으로서의 마오쩌둥을 긍정적으로 평하는 여론은 전세계적으로 거의 사멸했으며, 중국 내부에서나 겨우 명맥이나마 유지하는 중화인민공화국 정부의 창건자로서의 대접 정도라고 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