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군이 되어보세!/개변된 역사/1부

 




1. 개요
2. 조선
2.1. 주요 사건


1. 개요


슈타인호프 작가의 웹소설, 명군이 되어보세!의 1부에서 작중 세상에 생긴 변화들을 소개하는 문서.

2. 조선


'''조선
朝鮮
'''
[image]
[image]
'''국기'''
'''어기'''
'''위치'''
한반도, 부여주, 연해주,
대마도, 일기도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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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한성부(漢城府)
'''민족'''
한민족, 여진족 등 퉁구스인,
한족, 일본인
'''언어'''
중세 한국어
'''문자'''
한자, 국문
'''종교'''
유교(성리학, 국교),
불교, 미륵 신앙, 무속 신앙
'''정치체제'''
전제군주정
'''국가원수'''
대왕(大王)(제후)
'''국성'''
전주 이씨(李)
'''통화'''
저화
세종 때 학문 연구를 위해 설치했던 집현전은 세조 때 폐지되었다가 성종 때 부활했지만, 세종 때에 비해 수준이 낮아졌다. 실제 역사에서는 연산군 때 폐지되고 기생과 악사들이 설치는 흥청으로 바뀌어버린다. 소설에서는 행정근무를 위한 연수원 비슷한 역할을 하면서 지도 제작이나 대동법이나 저화와 같은 조세와 경제제도를 연구하는 실무기관을 겸하도록 바꾸었다. 이렇게 재건한 집현전 덕분에 2부에도 빙산의 유지가 이어졌고, 관학파가 무너지지 않을 수 있었다.[1] 주인공 입장에선 가장 중요한 한 수였던 셈. 2부에서 서양인들은 집현전을 조선의 국립대학이라고 생각한다.
조선군이 여진족, 일본군에 비해 확실한 우위를 갖게 된 결정적 요인.[2] 주인공은 원래 볼트액션 소총 정도를 개발하기를 원했으나 총기의 내부 구조를 모르고 겉모양만 아는 수준에서는 조총 개발이 한계였다.[3] 다행히도 대학 시절 임진왜란 관련 레포트를 썼기에 조총의 내부 구조는 알아서 조총을 개발할 수 있었고, 여기에 현대에서 배웠던 지식들을 응용하여 원 역사 속의 조총과 달리 더 길쭉한 총열과 개머리판·강선·미니에 탄을 도입해 현 시점 세계최강 수준의 개인화기가 되었다.[4] 더불어 주인공에게 정치적 힘도 실어 주었다. 개발 당시부터 조정 대신들은 '왕이 성리학의 도를 따르지 않고 기물 만드는 천한 일에 관심을 쏟는다.'며 공격했고 우여곡절 끝에 완성된 이후에는 명군과의 접촉을 최대한 피하며 비밀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여진 정벌 당시 포로로 잡혔다 구출된 한인 농민들을 통해 조총의 존재를 안 명이 칙사를 파견해 북원 세력 잡는데 쓴다며 조총의 견본과 숙련된 포수를 요구했고[5] 기술 유출과 더불어 조총제작부터 반대하던 조정 대신들의 공격을 받으며 위기를 겪는다. 그러나 유자광의 의견에 따라 강선이 없는 활강식 조총 3정을 바치고,[6] 사신단 휘하 무사들을 훈련시켜서 기술 유출을 최소화한데다 그렇게 받은 조총으로 큰 성과를 거둔 명이 다시 사신을 파견, 이를 치하하며 포상하는 것도 모자라 자신들이 복제한 조총 성능 문제 때문에 조선에서 조총을 대량으로 바칠 시 다른 공물들의 개수를 줄이거나 빼 주며 생산 비용도 지불하겠다고 한다. 덕분에 조총에 대한 국내의 공론은 쏙 들어가고 주인공도 명분과 실리를 모두 챙긴다.
강선은 일급기밀 기술로 취급되어 1부부터 2부까지 평시 사용이 쭉 금지되어 있지만, 강선 없는 활강조총은 명으로 수출될 뿐 아니라 민간 포수들에게도 널리 퍼져 2부 시점 조선 전체에 퍼진 조총의 수가 10만 정으로 추산된다고 한다.[7] 당연히 몽골 같은 이민족들도 명에서 수출되었던 활강조총 일부를 빼돌려 무장하고 있으며, 2부에서는 후장식 조총과 플린트락 권총도 개발되었다. 문종화차처럼 강선조총은 무종총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2부에서도 조선인들이 애용하고 있으며 외국의 총기성능과 총포술이 형편없다며 디스하는 장면도 있다. 왜란 발발에도 일본의 조총을 전혀 무서워하지 않고 왜총은 잘 맞지도 않는다, 총연습도 제대로 안했다며 디스하기까지 하며 곽재우는 자기 부대를 총으로 무장시킨다. 조총으로 인해, 스나이퍼 캐릭터가 하나씩 등장한다.[8]
강선총에 대한 기밀을 잘 지켰는지 아니면 제조 관리상의 문제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는지 알 수 없지만 약 200년이나 지난 3부 시점의 프랑스에서도 강선을 쓰지 않는다. 한국과 교류도 활발하고 유지비 걱정할 필요 없는 왕실의 사냥인데도 활강총을 사용 중.
불랑기포. 원 역사에서는 임진왜란 때 명나라를 통해 전파되었지만 여기서는 수차를 이용한 수력천공기로 보다 견고하게 제작해 '자모포'란 이름을 붙여 일찍 실전 배치한다. 주로 적군이 근접해서 닥돌 해 올 때 조란탄을 퍼붓는 용도로 쏠쏠히 쓰고 있다. 북병들은 수레에 얹어서 사용하는데, 적이 도주할 때는 전진해 가면서 포격을 가할 수도 있다.[9]
원역사에서는 임진왜란 시기에나 도입되었지만 다루기도 만들기도 쉬운 무기이기에 주인공이 일찍 도입했다. 기병들의 부무장으로 쏠쏠히 써먹는 중.
원역사에서는 임진왜란 중에나 개발되었지만 딱히 오버 테크놀로지까지는 아니라 생각한 주인공이 개발해서 써먹는다. 주로 대완구에 얹어 발사하며 쇼니를 정벌하러 원정하는 과정에서 2차례의 포화 정도로 잇키의 성을 함락시키거나 쇼니의 대군을 쓸어먹는 등의 원 역사다운 활약[10]을 선보였다. 보통 짧게 진천뢰라고 부른다.
원역사에서는 1550년대에 건조되었으나 일찍 건조되며 대맹선(승원 80명), 중맹선(승원 60명), 소맹선(승원 30명)으로 분류되는 조선 수군 함선 체계에서 대맹선을 제외하고 도입되었다. 원역사의 판옥선보다 훨씬 크다. 도입 여부를 두고 실제 역사처럼 소함주의자와 대함주의자들의 논쟁이 있었지만 주인공은 소함주의자들의 의견을 반박해가면서 건조했다. 대마도 정벌에서 왜 수군과 전투를 벌여 한 척의 피해도 없이 57척을 격침하는 일방적 전투를 벌인다. 2부에서 왜란 개전 시점에 조선의 판옥선 보유량은 약 300척이며 철갑은 없지만 거북선 크기인 대형 판옥선(대전선)도 몇 척 있다. 을미동정 이후로는 양선을 늘리는 대신 판옥선 보유를 줄이며 남는 배들은 민간에 불하했다. 3부에서는 조선인들의 대양 활동이 늘어났기 때문에 연안용 판옥선의 숫자가 상당히 줄어들었을 듯 하다.
자전거. 타이어나 체인은 만들 수 없어서 나무바퀴를 가진 초기 자전거(드라이지네)와 유사하다. 타지 않더라도 무거운 짐을 훨씬 쉽게 옮길 수 있으며 짐이 없으면 타고 갈 수도 있어 보부상들이 유용하게 쓰고 있다. 신하들은 제갈량목우유마에서 유래한 장치라고 여긴다.
연필. 경기도에서 흑연 광산을 발견한 뒤 만들었다[11]. 붓과 다르게 먹과 벼루가 필요없고 벽이나 천장에 대고도 쓸 수 있어 매우 실용적이며 급히 메모해야 할 때 먹물과 붓과는 비교도 안 되게 편해서 금방 전국에 널리 보급되었다. 단 한지에 쓰는 것이므로 굳기는 4B 정도로 약하다. 초기에는 나무판 사이에 석묵을 넣고 끈으로 묶은 원시적 형태였으나 2부 시점에서는 현대 연필과 유사한 형태가 된 듯. 금위사에서는 누가 시작했는지 모를 석묵필 돌리기 놀이가 유행한다고 한다.
주인공이 손이 시려서 장갑을 찾았는데 그런 게 없다는 걸 듣고 만들어서 쓴다. 1부 시점에서는 왕이 쓰는 걸 쓰기 부담되는지 주인공만 쓰지만 2부에서 정일한이 사슴가죽 장갑을 쓰는 묘사가 나오는 걸 보면 그동안 널리 퍼진 듯.
비누. 참기름으로 만든 고급 비누는 주인공을 비롯한 고위층들이 사용한다.[12] 고래 기름으로 만든 비누는 비린내가 난다는 단점이 있지만 저렴해서 백성들에게 유통된다. 명에도 수출되는 조선의 특산품인 듯. 본래 그렇게 많이 유통되지는 않았지만 2부 시점에서 생겨난 제모 풍습 때문에 민간에 널리 유통되었고, 경인왜란을 거치면서 위생 유지에 비누가 도움이 된다는 사실이 퍼져 엄청난 수가 유통된다.
원래 국내 천일염 생산은 일제강점기에나 시작되었으나 훨씬 일찍 시작되었다. 자염에 비해 써서 평가가 나쁘나 단가가 매우 낮다. 나중에는 간수 빼는 방법을 발견해[13] 개선됐다고. 그래도 자염이 더 맛있으니 사람들은 자염을 주로 먹고 여진족들이 가축들에게 먹이는 소금으로 많이 쓰인다. 단 고무판은 만들 수 없고 타일로 대체하게 했더니 타일 값이 너무 비싸서 자연적으로 염전이 가능한 서해 북쪽 갯벌에서만 한다.
시대를 앞서나간 사기템이지만 산업혁명의 여건이 갖추어지지 못해 널리 쓰이지 않고 있다.[14] 선박에 탑재하여 증기선을 만드는 것이 목표이지만 소형화를 계속 실패하여 광산 등에서만 제한적으로 쓰이고 있다. 이 또한 국가기밀로 취급된다. 2부에서 세스페데스가 포구에서 기중기를 돌리는 데 사용되는 증기기관을 보고 솔로몬의 악마로 착각해 주인공을 프래스터 존의 후예로 착각하는 원인 중 하나가 된다. 세스페데스 때문에 조선의 증기기관에 대한 소문은 유럽 전역에 퍼져버렸고, 별 대수롭지 않은 장난감으로 치부하는 것으로 방침을 바꾼다.
조선의 하천환경 상 효율성이 아주 높진 않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낫다고 판단하여 보급한다. 또한 무기를 제조하는 군기시에 대형 수차를 설치하여 수력을 이용해 대포의 포신을 일정하게 파내는 수력천공기를 개발한다. 포신 내부까지 주물로 떠내는 조선의 전통 대포에 비해 서양에서 16세기 이후 개발된 수력천공기로 포신을 일정하게 파내는 근대 대포는 더 튼튼하고 포의 구경이 일정하여 전장에서의 운용에 휠씬 위력적이고 효율적이라는 이점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 낸 것. 그 덕분에 조선군의 대포는 실제 역사보다 훨씬 강하다.
우박이나 낙뢰 등 천재지변들이 자꾸 임금의 부덕함 탓이라는 신하들의 말에 빡친 주인공이 설치하도록 한다. 이후 별 언급이 없었으나 자꾸 궁궐에 낙뢰가 내리자 백성들이 이상하게 생각하여 철거했다고.[15][16]
일본에서 포경 기술자들을 초빙해서 시작했으며, 주인공이 주워들은 일본 전통식, 그러나 아직 일본에선 시작되지도 않은 포경법을 도입했다. 초창기 기준 매년 40마리가 잡힌다고 한다. 고기·기름·수염·힘줄·뼈·가죽 등 버릴 것이 하나도 없는 귀중한 자원. 고래국밥이란 음식도 생겨났으며 고기를 먹기 힘든 가난한 백성들의 별미인 듯.[17] 원래는 내수사에서 독점했으나 딱히 법적으로 독점을 명시하진 않았다. 무종 사후 박원종이 이 허점을 파고들어 일본 기술자들을 보조하며 포경 기술을 익힌 조선인들을 빼돌려 해삼위에서 포경을 시작한다. 그러나 박원종이 죽은 후 비리가 밝혀져 내수사에서 몰수해서 2부 시점에서도 여전히 포경업은 내수사 독점 상태. 2부 시점에서는 연해주에서 해삼위보다 한참 북상해서 포경하는 어부들이 있을 정도로 활성화된다. 고래가 현대에는 남획으로 멸종 위기가 된다는 것을 아는 주인공이 1부 당시 매년 300마리까지만[18]잡도록 명령했고, 이는 무종의 유훈이라며 유지되고 있으나 상인들은 이를 가격을 높게 유지하기 위한 술수라고 생각하고 있다. 2부 후반에는 돌고래 제한도 없어지고, 수염고래 제한선도 많이 올라가게 된다.
장작으로 사용되는 목재를 줄여서 전국의 산림을 보호함과 동시에 군선의 원자재인 목재를 확보하기 위해 내수사를 시켜서 장작의 대체재인 석탄 광산을 개발했다. 우선 노천탄광에서 채굴이 시작되었으며, 명나라에서 탄광 기술자를 초빙한 뒤에는 연해주의 탄광도 개발하는 등 전국 각지의 탄광에서 석탄을 캐내고 있다. 값은 비싸지만 금벌령이 전국적으로 강화되면서 장작 값이 올라서 비슷해지자 백성들의 상당수는 석탄을 쓰고, 내수사는 독점적 지위를 이용해 석탄으로 많은 이득을 올리고 있다. 한편 1·2부 사이에 석탄 연소 시 발생하는 일산화탄소로 인해 중독사고가 발생하자 석탄을 사용할 시 '독기'가 나와 사람을 죽인다는 이유로 석탄 사용을 금지하자는 목소리도 있었으나 석탄을 금지하는 대신 틈새로 독기가 새어들지 않도록 조심해서 쓰라는 지시만 내려졌다.
프라이드 치킨. 현대 식성을 잊지 못한 주인공이 즐겨먹는 닭튀김. 식용유가 없는 조선에서 귀한 참기름으로 튀긴 닭고기는 당연히 임금만 먹을 수 있다. 주인공 특유의 식성으로 각인된 건지 2부에선 ‘무종께서 즐겨 드셨다던 튀긴 닭고기’라며 무종계라는 이름이 붙었다. 다만 조선의 경제발전으로 닭 사육이 늘어서 튀김은 아니어도 닭고기 자체는 일반 백성들도 비교적 쉽게 먹을 수 있게 된 듯.[19] 1부에서는 참기름으로 튀겼으나 2부에서 중국 기술자들의 영향으로 돼지 사육이 늘어나며 돼지기름으로 튀긴다. 작가에 의하면 재석이 취향에 따라 조각내지 않고 가마솥에 통째로 튀겨 먹는다고 한다. 치킨이라는 매우 대중적인 음식이란 성격도 있고 해서 연재처의 댓글이나 대체역사 마이너 갤러리에선 이 무종계를 소재로 한 드립이나 팬픽들이 자주 올라온다.
망원경. 중국 렌즈 기술자를 초빙한 뒤 경주에서 진상한 백수정[20][21]으로 만들었다. 쇼니 가와의 전쟁에서 사용되며 유용함을 입증한다. 2부에서는 이순신이 오다 노부나가에게 슬쩍 보여주며 조선의 기술력을 과시하는 용도로도 쓰인다. 이후에는 상희가 알려준 수학으로 정밀하게 깎아 만든 렌즈로 성능을 개선시키고 천체망원경에 사용하려 한다. 주인공은 이를 통해 유럽에서 기계식 시계가 들어오면 목성의 위성을 관찰해서 경도를 측정, 정확한 지도를 제작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 부역
부역 자체는 이전에도 하던 것이지만 이전에는 임금을 주지 않았고 식사도 백성의 부담이었다. 주인공이 이를 고쳐서 적게나마 저화로 임금을 반드시 지급하고 부역 중 식사도 관에서 제공하도록 했다. 이미 1부에서도 흉년이 든 지역의 백성들에게 구휼을 할 때 저수지나 수로 공사 등을 시키고 그 임금을 지급하는 형태로 했는데, 이 때문에 2부 시점에서는 농한기에 성을 증축하는 정도는 백성들에게 부담을 지우는 게 아니고 구휼의 일환으로 생각하는 풍조가 생겼다. 이것이 전반적인 부역의 형태로 정착한 것. 부역이 공공근로사업과 세금의 성격을 동시에 가지게 된 셈이다.
  • 금위사
의금부 내에 설치된 정보부서로 조선시대의 중앙정보부/안기부. 미륵당 저격미수 사건으로 역모를 미연에 방지할 필요성을 절감한 주인공이 창설했다. 의금부 경력 1명이 각각 휘하에 두는 나장 10여명과 관원들이 지휘하는 정보원들[22]로 구성되어 있고 시장의 쌀값, 고관들이 사석에서 나눈 대화 내용, 종친들의 동향 등 다양한 정보를 수집, 취합한 뒤 주인공에게 보고한다. 비밀경찰 역할을 해 주인공이 역모를 통해 공안정국을 조성할 때 대활약을 해서 왕의 신임이 두터운 자들이 금위사장이 된다. 1부에서는 정호찬, 2부에서는 정여립→이항복이 총책임자다. 참고로 시대에 비해 굉장히 뛰어난 고문 및 취조 노하우를 지니고 있다. 국내 정치공작 외에도 정보기관 본연의 역할을 수행하여 해서부 정벌을 할 때에는 몽골의 동원 가능한 병력을 알아오는 등 해외정보수집도 하고 있다. 첩보력으로는 일본의 닌자들조차 압도하며 왜란이 코앞으로 다가온 시점에서는 금위사에서 귀순 항왜들에게 첩보원 교육을 이수하게 하여 일본에 공작원으로 파견하는 방안도 실행된다. [23] 현대에서는 국정원의 조상으로 여겨질 듯하며 금위사를 소재로 한 사극이 상당히 많이 나올 듯하다.
  • 저화
쌀 본위제를 기반으로 발행하는 지폐. 쌀 본위제라 그런지 단위는 되, 말, 섬. 현실에서는 성종 대에 이미 쓰이지 않을 정도로 쇠락하고 중종 대에 거의 폐지되나, 소설에서는 주인공의 재개혁으로 되살아난다. 대동법과 병행하고 각 관청에서 태환 업무를 맡고 다양한 급여를 저화로 지급하는 등 강한 개혁을 밀어 붙이지만, 현실 조선이 화폐 정책이 계속 망한 것처럼 현실은 시궁창인지라 1부 끝나는 시점에서도 도성 부근에서나 그럭저럭 정착하고 지방에서는 가치를 무시 당하거나 수가 적어 통용되지 못했다. 수령들이 태환을 거부하고 백성들도 현물을 더 믿는 등 2부까지도 두고두고 주인공을 괴롭힌다. 2부에서는 전국적으로 확대되긴 했는데, 여전히 실제 쌀값보다 못하게 거래되는 상태다. 주인공은 각 관청에서 태환을 병행하게 했지만, 지방 관아는 태환미가 부족해서 쌀 반에 겨와 모래를 반 섞어 주는 실정이라(...) 최소한 조창은 가야 FM대로 바꿔주는데, 그 교환 과정에 상인들이 개입해서 수수료를 떼먹는다고 한다. 사실 조선의 화폐 개혁이 계속 망한걸 생각하면 이것도 주인공이 1부에서 강하게 개혁을 밀어붙인데다 1~2부 사이의 왕들이 저화 정책을 유지한 덕에 운 좋게 성공한 셈이다. 고구마게이트 당시 주인공이 사건 연루자들에게 벌금으로 구휼미 10섬씩을 내라고 지시하는데, 흉년이라 저화 14~15섬을 내야 쌀 10섬을 살 수 있다는 언급이 나온다. 하지만 겨나 모래가 섞인 쌀을 현물로 받느니 저화로 받는 게 낫다고 볼 정도로 백성들 사이에서 나름 신용이 쌓였다. 그러나 경인왜란 등 전쟁으로 쌀값이 폭등하고 태환이 중지되자 그 가치가 떨어지는 등, 나라의 보증 외에는 가치가 없는 종이쪼가리에 불과하다는 것이 근본적인 한계. 그나마 경인왜란 도중에도 저화로 일부 세금을 받는 정책을 유지해서 폐지가 되지는 않았고, 태환이 정상화되자 저화를 미리 매입해놓은 상인들이 이익을 취하는 해프닝도 나온다. 금속 화폐에 비해 모자라는 점이 많기에 주인공은 무역으로 은이 충분히 쌓이면 은화를 통용시킬 계획이다. 1부 부터 주인공이 벼린 저 은화 계획은 2부 시점에야 겨우 실현되며, 은화가 좀 돌기 시작하자 많은 사람이 저화보다는 은화를 선호하는 모습을 보인다. 저화의 발행 일련번호를 주인공이 아라비아 숫자로 매기게 하는데 신하들과 백성들은 임금이 발명한 새로운 기호 정도로 여긴다. 그리고 사람들은 아라비아 숫자를 무종수라고 부른다.
  • 신작로
주인공이 교통과 상업의 발전을 위해 길을 닦을 필요성을 느끼지만, 백성들을 공사에 동원해 힘들게 만들고 길을 닦으면 외적들이 그 길로 침투하기 쉬워진다느니 같은 이유로 대신들이 반대해서 지지부진하던 중에 남쪽으로 원행 나간다는 핑계로 만들어졌다. 이는 과거에 태국 왕이 비슷하게 했던 일을 주인공이 기억하고 행한 것. 2부에서는 이 신작로 덕분에 상업이 발전하고 한양의 시장이 상상 이상으로 커졌다는 언급이 나타난다. 서울-개성 간에는 아예 로마식 도로를 깔기 시작했고 영남대로와 같은 주요 간선은 이미 닦을 대로 닦아서 송상현의 말을 빌리자면 하루에 만여 명의 사람과 천 승의 수레가 지나갈 정도라고. 게다가 사람과 물자의 이동이 활발해지자 간선에 이어지는 지선도 알아서 정비되고 심지어 개인이 알아서 길을 정비하거나 다리를 놓아 돈을 받아먹을 정도라고 한다.[24] 다만 주요 간선이 지나는 곳의 수령은 이런 간선도로를 관리할 책임이 있어서 기피된다고.
북해도를 발견한 뒤 북해도 아이누인들과 무역을 시작했으며 아이누인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기도 하고 아이누어 역관도 생긴다. 그러나 일본인 무역상들과 충돌해 사상자가 나는 일도 많고 위험도에 비해 이득이 너무 적어서 제2부 경성군 시기에 이르러서는 거의 폐지 직전 상태였다. 북해도에서 일본의 영향력을 견제하기 위한 정치적 목적의 무역이라서 억지로 지속하고는 있다. 오다 노부나가는 북해도로 영역을 넓힐 생각을 하지만 조선이 교역을 해오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탐탁치 않아하고 있다. 그걸 넘어서 이쪽 방향에 조선으로 가는 항로만 알려주는 꼴이 되었다. 이게 나름 중요한 게 오다 노부나가는 이 항로로 동쪽 다이묘들을 동원 가능한 거 아닐까 정도로 생각하는 장면도 나오고 주인공이 전쟁은 무조건 원래 보다 작고 남쪽에서 끝난다고 호언장담하는 장면도 나온다. 결국 이쪽 항로는 매우 거칠고 연해주에서 북경까지 진군도 만만치 않기에 오다도 단순한 양동작전용 침공부대만 보내기로 했다. 그게 독안룡 다테 마사무네.
  • 영토 확장
여진족을 토벌한 뒤 명과 담판을 벌여 얻어낸 부여주와 연해주, 대마도 토벌과 쇼니 가와의 전쟁 후 얻어낸 대마도, 일기도[25] 등이 영토가 되었다. 부여주와 연해주는 한반도 전체보다도 넓지만 농사를 짓기 어렵고 인구가 너무 적어 제대로 통제되지 못하고 있었으며 대마도와 일기도는 공식적으로 조선 고유 영토로 선언했다가는 일본에서 반 조선 연합군이 생길 것을 우려해 형식적으로는 조선과 일본 양쪽 모두에 속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 상태.
  • 서얼 허통, 과부 재가 허용, 노비종부법 시행
주인공이 홍길동 사건을 겪은 후 현대인일 때부터 악법이라고 생각해온 서얼금고법, 과부 재가 금지, 노비종모법 문제를 조정에서 토론하도록 한다. 다행히 과부 재가 금지·노비종모법은 조선이 세워진 후 만들어진 법이라 아직 뿌리가 깊지 않아서 반대도 극심하지 않았다.[26] 특히 과부 재가 금지법은 처음 생길 때부터 반대여론이 만만찮았기에 꽤 쉽게 고칠 수 있었다. 그러나 서얼 금고법은 사대부들 상당수가 반대했기에 주인공이 강행해서 밀어붙이고 나서도 숙청쇼를 한바탕 해서 시선을 돌려야 했다. 워낙 반대가 심해 주인공이 인내심을 잃고 "서얼 보다 서얼들 싸지르는 네놈들 좆대가리가 더 더럽다."라고 욕지거리를 날리고[27] 본인도 당황해서 분위기를 무마시킬 정도. 어쨌든 그렇게 서얼이어도 군복무를 3년간 하면 문과에 응시하여 관직에 나갈 수 있게 되었고, 과부의 개가는 3번까지는 후손의 벼슬길에 지장을 주지 않으며 네 번째부터도 청요직에만 등용이 금지되도록 했다. 노비는 아비의 신분을 따르는 노비종부법으로 절충안을 만들어 법제화했다. 또한 대마도 정벌 때 첫 출전한 서얼 부대가 용감히 싸워 공을 세운 덕분에 이 제도들은 확실히 자리를 잡게 되어 묻힐 뻔했던 많은 인재들이 등용된다. 그래도 서얼의 출사를 열어줄 뿐 집안 문제까지 개입할 순 없어서 서자가 대단히 유능해 영의정까지 된다 하더라도 대를 잇는 건 여전히 양자를 들여서라도 적자의 몫이다.[28] 2부에서는 노비종부법의 영향으로 정충신이 천민이 아닌 양인으로 태어났다. 다만 2부 시점에서도 과부들이 시집가기는 여전히 어려워서 일본인들은 조선인들이 처녀만 밝히는 게 미개하다고 까기도 한다.
  • 무묘
무신 판 문묘 겸 국립묘지. 문신만 우대받고 무신들이 소외되는 현실을 개선하고, 국가를 위해 싸우다 전사한 이들을 기릴 국립묘지도 필요하다는 판단, 문관들의 엄청난 반발 속에서 임사홍의 지휘 하에 훈련원 일대의 주민들과 지주들에게 시가에 따라 보상을 주고 토지를 매입해서 세웠다. 무성왕,[29] 관우[30] 등 인물들과 한국사의 유능한 장수들을 무묘에 배향한다.[31] 1·2부 사이에 조광조가 무묘를 없애자고 주장했다가 이장곤에게 논파당한 뒤 부여주로 유배 갔다. 유순정·이장곤·김지 등이 무묘에 배향되었고 전쟁 중 전사한 무명용사들도 이곳에 배향된다. 조선시대에 수군 복무에 대한 기피가 심했던 이유 중에 해전 중 익사하면 시신도 수습할 수 없어서 제사도 제대로 지내지 못한다는 점이 있었는데, 국가에서 제사를 지내 주어 수군 기피를 조금이라도 줄이겠다는 의도도 있었다. 경인왜란 시점에서는 죽은 뒤 무묘에 배향되는 것이 무관들에게 크나큰 영광으로 여겨지고 있다.
원래 역사에서는 삼포왜란을 계기로 명종이 설치했지만 주인공은 각종 대외원정을 계획하고자 비공식 모임이었던 평락사를 해체하고 일종의 국가안전보장회의의 개념으로 임시기구로서 설치했다. 상설화되면서 붕당 및 세도정치의 핵심이 될 것을 걱정하고는 임시기구로만 남기리라 다짐한다. 다만, 2부 시점에서는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 공신 세습 4대로 제한
주인공이 원래 역사에서 세조가 키워 놓은 훈구 공신 세력이 계속 부와 관직을 세습하며 나라를 좀먹은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공신의 세습은 4대까지로 제한하고 5대째가 되면 국가에서 받은 공신전을 다시 국가에 반납하도록 법도를 정한다. 개국공신만 예외로 4대 이후 세습을 인정했다. 기존 공신 세력의 반발은 '지금 당장이 아니라 먼 훗날에 반납하는 것이니 그 사이에 재산을 스스로 불려놓던가 후손들이 분발하여 다시 공을 세워 새로 공신이 되면 되는 거 아니냐, 그대들은 설마 후손들이 국가에 공을 세워 새로 공신이 될 거라는 자신감이 없는가? 조상이 아름다운 이름을 남긴 걸로 만족할 것이지 어디서 감히 재산 운운인가'[32]하며 돌파해나간다. 2부 시점에서는 현상유지를 중시하는 경성군이 굳이 반발을[33] 누르고 회수하기 귀찮아서 놔두고 있었는데 주인공이 빙의한 뒤 죄다 회수한다. 설마 자기가 만든 이 법으로 자기가 회수하게 될 줄은 몰랐다고.
  • 현대식 고문과 심문법
손발톱 뽑기는 주인공이 남방 순행 중 마침 잡혀온 왜구들을 심문할 때 처음 사용한 고문법. 곤장 치기와 달리 아프지만 맞다 죽을 염려가 없는 좋은 고문이기에 2부에서 정여립도 사용한다.[34] 이외에 주인공이 알고 있는 현대 국가들의 정보조직(KGB, CIA 등등)이 사용하는 심문법[35]이 정호찬을 통해 전파되었다. 주인공이 잘은 모르고 주워들은 지식으로 '이런 심문법을 쓰는 나라가 있다더라' 하고 힌트를 주자 정호찬이 직접 금위사 죄수들에게 실습을 해보며 익혔다.
원래 무위를 높게 치지 않던 조선에서는 승전을 해도 개선식 같은 것 없이[36] 현지에서 노비와 전리품을 분배하고 끝냈다. 그러나 주인공이 개선식을 시작하면서 도성의 백성들에게 포로와 전리품을 보여주게 되어 승전이란 것이 멀리 북방에서 들려오는 소문이 아닌 직접 눈앞에서 느낄 수 있는 영광으로 다가오게 된다. 무종 사후 무종이 백성들에게 대대로 회자되며 존경받던 주요 이유 중 하나. 이후 인종과 명종은 한 번도 개선식을 하지 않았으나[37] 주인공이 경성군에 빙의하며 다시 시작한다. 무자호란 때 수레바퀴의 네 귀퉁이에 야인 대장 넷의 수급을 매달고 행진해서 세자가 부왕의 괴팍한 취향은 닮지 밀아야겠다고 생각한다. 경인왜란 이후엔 수급 수레는 사라진 대신 죽인 왜장들의 수급에 이름을 적어 장대에 높이 매달고 그 아래에 그 왜장의 갑옷을 입은 허수아비를 행진하도록 한다. 임금이 친정했을 때에는 종묘와 무묘를 들른 뒤 도성 백성들에게 직접 연설을 하는 순서가 있다.
'훈민정음'을 가리키던 기존의 언문이란 호칭을 국문(國文)으로 바꾸고 백성들에 대한 보급을 더욱 활발히 했다. 본래는 주인공이 빙의한 후 초기부터 세종대왕의 위업을 강조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시행하려 했으나 대간을 비롯한 사림의 반발이 너무 거세서 미루다가 무오사화 등으로 사림 세력을 정리한 뒤 강행한다. 공문서 등을 한글전용으로 완전히 바꾸진 못했으나 한글 자체의 전파는 더욱 넓은 편이다. 참고로 '국문'은 구한말 때 실제로 한글을 지칭하던 명칭이다.
  • 군제개편과 작계 교범
기존의 오(5명)-대(25명)-여(125명)-통(4개 여)-부(4개 통)-위(5개 부)[38]통하던 조선시대 군제를 소대-중대-대대-연대[39] 방식으로 편제되는 현대식으로 바꿨고 지휘관도 현대식인 ○○장으로 호칭을 바꿨다. 이건 조선시대 군제에 익숙하지 않은 주인공이 귀차니즘 때문에 고집 부려서 고친 것. 물론 반발은 있었지만, 임금이 고집을 부리는 데다 구분하기도 더 쉬워서인지[40] 일선에서 바뀐 편제로 문제가 일어나진 않았다. 그리고 16세기 말인 2부 시대까지 쭉 이어져서 사용된다. 하지만 이런 편제는 육군에만 적용되었고, 해군은 전통적인 조선 수군 군제가 유지되었다.
군제개편과 함께, 주인공은 전란시 부작용을 줄이도록 작계 교범 분야에도 손을 대는데, 1부에서 미완성으로 끝난 것을 2부에 거의 완성시켰다. 그리고 이것은 왜란이 터지고 크게 기여하게 된다. 왜군 1진의 발포 기습 상륙으로 혼란한 상황임에도 발포 만호는 서둘러 침공을 알리는 한편, 120여 명의 병사로 1만이 넘는 적과 싸우면서 300여명의 왜군을 저승길 동무로 데려갔다. 또 여도나 사도첨사진, 녹도진은 왜군이 들이닥쳤을 때 민간인을 다 대피시키고 노획될 군량과 화약을 파기, 병력과 함선들은 전부 다 빼돌려 탈출했다. 실전 경험이 떨어지는 삼남의 장수와 군사들이 이 정도 활약을 할 수 있는 이유는 여기 있다고밖에 할 수 없다. 게다가 조정에서도 배 놔라 감 놔라 하는 신료들보다 일선에 있는 장수들의 판단을 더 존중해준다. 심지어 소집만 되어도 용할 속오군(예비군) 수준의 병사들이 왜군을 상대로 싸우기 전에 참호를 파고 토벽을 세우며 대응하는 모습을 보인다. 결국 쪽수와 화력에서 밀려 격파되긴 했지만. 사실 속오군이 왜군 상대로 전면전을 벌인 것도 경험 부족 탓이었고, 몇 차례 깨져 본 뒤에는 작계대로 기습이나 후방 수송대 습격 등의 게릴라 활동에 전념하고 있다. 이 때문에 전라도에 상륙한 왜군은 전주성까지 가기 전에 상당한 인명손실을 입었고, 보급과 지원도 끊어지는 위기에 처했다.
군기시 등을 설치하며 북한산에 지은 천혜의 요새로, 부지도 넓어 15만의 도성 주민들이 수년간 버틸 정도의 식량을 저장할 수 있고 공성병기를 끌고 오는 것도 불가능해 내응만 없다면 백만 대군도 함락시킬 수 없다. 그래서 이는 미래에 한양이 위험해지더라도 훌륭한 피난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것 같다.[41]
작중에서 계속 항복이나 교섭의 의미로 백기를 처음 사용하게 한 것이 무종 때라고 언급된다. 다만 이 부분은 고증오류로, 실제 역사속의 백기는 고대부터 항복의사로 잘 사용되어왔다. 서양에서는 로마 시절부터 사용되었고, 중국에서는 한나라 시절에 사용되었고, 한국에서는 삼국시대 때 신라에서 항복하라는 의미로 백기를 내걸었으나 왜국이 무슨 의미인지를 몰랐다는 내용이 삼국사기에 기록되어있다. 때문에 백기가 처음으로 언급되는 1부 여진정벌 파트는, 중국에서 전례가 있어 그것을 활용한 것이라고 수정되었다. 주인공이 항복이나 교섭을 하려면 백기를 올리게 하라고 지시하였는데, 2부에 오면 조선과 접경한 곳에서는 이 관습이 널리 퍼져서 항복이나 교섭을 청할 경우 당연하다는 듯이 백기를 든다.
  • 제설도구[42]
현대 한국군에서 제설작업에 사용하던 눈삽(넉가래)과 싸리비를 본 따서 만들었다. 원래 조선에서 사용하던 농사용 넉가래와는 다르게 생겼다. 2부에서 원균이 북변 유배 시절에 제설하며 고생하던 것에 한이 맺혔는지 왜장이 된 후 자신의 가몬 문양으로 사용한다.
  • 비융사
갑옷을 전문으로 만드는 관청. 2부에서 무종 시절 만들어졌다고 언급된다. 경성군 4년에 폐지되었다가 경인왜란을 계기로 부활한다.

2.1. 주요 사건


원래 역사처럼 유자광이 조의제문을 빌미삼아 일으킨 사건. 그러나 김종직, 김일손을 비롯한 주요 인물들만 부관참시나 능치처참을 받았고 이하 연루된 사림 세력은 무릉도(울릉도)로 전가사변을 당한다. 주인공이 정호찬을 만나 중용하게 된 계기가 된다.
  • 배목인의 난
무오사화 직후 일어난 이례 없는 역모사건. 1차는 암살자가 주인공이 주로 다니는 경마로 근처에서 말을 탄 주인공에게 화살을 쏘지만 미수에 그치고 박원종에게 사살 당한다. 2차는 2인조가 궁 안으로 들어와 궁녀를 협박해 죽인 뒤 교태전으로 가려 했으나 도중에 들켜 하나는 화살에 맞아 사망, 남은 한명은 자살한다. 역모의 원인은 말기 당뇨로 인해 혈뇨가 나온 것을 보고 상서로운 징조라며 지금 임금을 죽이면 자신이 임금이 될 것이라고 배목인이 망상한 것이다. 그러나 상희의 증언으로 배목인 일당은 잡혀 처형된다.
  • 4차 대마도 정벌[43]
주인공에 의해 정벌이 이루어진다. 전선사령관은 우의정 이극균, 이후 사실상 조선의 영토화 된다.
  • 계해사화 - 1503년
주인공이 군비를 증강하고 공신들의 힘을 억제하자 윤필상을 중심으로 한 훈구세력 일부, 주인공에게 탄압당한 성종의 후궁 소생 왕자들 세력이 모여 반정을 논했으나 금위사에 탐지되고, 주인공은 일당 중 심지가 약한 이세좌를 실제 연산군이 갑자사화때 했던 것처럼 술자리 실수를 핑계 삼아 체포한 후 다른 일당들까지 잡아들인다. 이세좌는 자살형, 윤필상과 왕자들은 사형을 당한다. 그러나 실제 갑자사화 때 처럼 훈구세력 모두를 연루시키지는 않아서 실제 갑자사화 때 사형당한 성준과 이극균 등은 계속 조정에서 요직을 맡는다. 주인공이 이장곤을 만나는 계기가 된다.
  • 규슈 정벌
조선의 정벌을 받아 복속되었던 대마도를 규슈의 패권을 놓고 다투던 두 세력 오우치 가문과 쇼니 가문 중 쇼니 가문이 급습하여 대마도주를 죽이고 대마도를 점령하자 이를 징벌하기 위해 다시 일본 원정군을 보내어 대마도와 이키 섬을 점령하고 규슈 본토에 상륙, 오우치와 동맹하여 쇼니를 쳐서 괴멸시킨 사건. 이때 포로로 잡혀온 쇼니 군 왜병들이 북방에 정착해 왜인여진이 된다. 본래 규슈에 좀 더 머물며 이득을 보고 상황을 봐서 영구적 거점까지 만들 계획이었으나 오우치가에서 몰래 화약에 방화하여 비축된 화약 대부분을 상실하면서 8000여명의 포로와 대량의 은을 받는 것으로 만족하고 돌아온다. 2부 시점에서 일본에는 오우치 방화사건이 널리 알려져 있으나 조선에서는 증거도 없고 책임을 물을 오우치가도 이미 멸망했고 경계가 소홀했던 당시 지휘관들도 모두 사망해서 이를 인정해봤자 조선의 위신만 떨어질 뿐이니 계속 원인불명의 화재라는 입장이다.
  • 동만주 공략
주인공은 지금은 척박한 땅이어도 감자와 고구마가 도입되면 농사도 가능하고 근대가 되면 지하자원이 대량으로 발굴되어 알짜배기 땅이 될 만주를 정복할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워낙 현실이 막장이고 재정이 취약하다 보니 엄두를 못 냈다. 그러다가 실효적인 지배를 위해 조선에 적대적인 야인들을 토벌하고, 북방 해로 탐색에도 나선다. 이 원정으로 동만주가 명나라에 의해 조선의 영토로 인정이 되어 부여주, 연해주라는 지명으로 불리게 된다.[44] 한편으로 우데게 족의 증언을 바탕으로 북해도에 상륙하여 아이누족과 접선하는 데도 성공했다.

3.


명군 또한 원역사보다 훨씬 이른 시기에 조총으로 무장하게 된다. 사실 그 이전까지 조선의 기밀유지로 그 존재를 몰랐다가 조선의 여진정벌 당시 여진족에게 잡혔다가 구출된 한인 농민들이 조선군의 조총 사용을 목격하면서 그 존재를 알게 된다. 신형 화통 정도로 파악된 조선의 신무기에 대한 농민들의 증언을 통해 높은 성능을 가진 것으로 파악하여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이에 따라 칙사를 조선으로 파견하여 조총의 견본과 숙련된 포수를 요구하게 된다. 물론, 조선에서 명에 진상하는 조총은 강선이 없고 미니에 탄이 아닌 구형탄을 사용하는 다운그레이드 버전을 바치고 사신단 휘하 무사들을 훈련시키는 것으로 기술유출을 최소화하였다. 하지만 이렇게 받은 견본을 황궁 뜰에서 시연을 한 명의 입장에서는 대만족하였고 즉시 조총 복제를 실시하여 1,500여정을 성능실험을 위해 북원과의 전쟁에 배치된 부대에 보급한다. 그러나 일선 고위 장수들이 조총의 성능에 의구심을 표하였고 이에 따라 조총 전량은 치중대를 지휘하던 참장 장위덕 부대에게 전부 지급된다. 그리고 북원부대의 공격을 받은 장위덕 부대가 장위덕의 지휘[45]와 북원부대의 실책[46] 그리고 자연환경의 유리함[47]으로 십여 명의 사상자만 내고 100여명의 북원 병력을 사살, 군마 30여필 노획, 포로 17명을 얻은 대전과를 세운다.
이렇게 성과를 보이자 더욱 적극적으로 생산을 하고 있다.[48] 다만 제작 경험 부족으로 인해 단조 생산을 채택하여 약 300발 정도의 사격이 가능한 조선제 조총과는 달리 주조 생산 방식을 채택하는 바람에 5~10발 사격 이후 폭발하는 등 내구성이 떨어지는 상황이다. 이에 따라 공을 치하하고 조총 견본에 대한 포상[49]을 하고자 김보(金輔)와 이진(李珍)을 각각 정사와 부사로 임명한 칙사들을 파견하면서 조선으로부터 매년 1,000정의 조총을 조공으로 바치는 대가로 다른 조공을 모두 폐지한다.
조선의 여진 토벌 이후 조선에게 부여주와 연해주를 양도한다. 명 입장에서는 직접통치하는 영토도 아니고 조선이 통제하기에는 너무 방대한 영토여서 감당할 수 없어 오히려 조선이 약해질 것이라 판단하고 양도한 것.

4. 일본


대마도일기도가 조선의 영토로 넘어갔다. 대마도는 조선에서 직접 통치하고, 일기도는 종씨 일가가 통치하며 조선의 봉신으로 있는 간접통치 형태. 또한 일본에서 반 조선 연합군이 생기는 것을 막기 위해 형식적으로는 양국 모두에게 속한 영토로 되어 있다.
규슈 원정에서 쇼니군이 조총과 화포를 사용하는 조선군에게 말 그대로 무참히 박살나는 모습을 많은 사람이 목격했고 이를 보고 지옥에서 올라온 귀신들이라 생각한 이들도 있었다.[50] 조총의 위력을 목격한 일본 영주들은 조총을 손에 넣기를 간절히 원하지만 포르투갈 상인들이 도착할 때까지는 손에 넣지 못하였다.
규슈 원정과 이후 명종 때의 원정에서 야인 기병대가 규슈의 많은 민간인 마을을 무참하게 약탈하여 큰 피해를 입힌다. 기병 위주로 구성된 유목민의 약탈은 일본인들은 경험해보지 못한 일이었기에 이는 일본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주인공은 규슈 일대에 조선왕이 지옥에서 악귀들을 보내는 마왕 정도로 인식되고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리고 2부 시점에서 밝혀진 바로는 규슈 약탈로 삶의 터전을 잃은 일본인들이 고토 열도 해적단에 가담하면서 실제 역사보다 고토 해적들의 세력이 커져 경인왜란 때 왜군이 전남을 바로 공격하게 하는 길잡이가 되었다. 여진족들은 규슈 약탈의 경험으로 일본에 대해 바다 건너의 약탈물이 가득하고 방비는 취약한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정도로 인식하게 되었다. 왜군과 직접 충돌해본 적이 없고 방어가 취약한 촌락만 골라서 약탈했기에 왜군을 약해빠진 군대로 생각하고 있다.
[1] 이 때문에 유성룡은 성균관이 아니라 집현전으로 바로 들어갔다고.[2] 그런데 강선 있는 총이라도 당시 기술로 만든 화약으로는 높은 위력을 낼 수 없다. 현재 총기가 확고하게 자리잡은 것은 위력도 약하고 사거리도 짧고 유지비용은 또 더럽게 많이 드는무능한 지휘부가 퇴역시키지 않아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3] 볼트액션 방식의 소총을 제작하려면 단순히 총만 만들면 되는 것이 아니라 탄피를 이용한 일정 규격의 탄환도 양산해내야 하는데 이건 구조를 알아도 당시 기술 상황상 실현하기 어려운 부분이다.[4] 2부에서 스페인 용병들이 조선 강선조총의 성능을 목격하고 조선군과 싸웠다간 사거리 밖에서 일방적으로 총알세례만 받겠다고 평한다. 즉 19세기 수준의 라이플에서 발사만 플린트락이 아니라 화승식이라고 생각하면 된다.[5] 이 때문에 명 사신단은 조총입수를 위해 빠르게 한양으로 향하고 조총을 확보하자마자 빠르게 귀국했다.[6] 물론 황제에게 바치는 진상품이기에 개머리판과 총열 그리고 총몸에 금과 은으로 용을 새겼다.[7] 강선의 위엄도 잘 퍼져 있어서 함부로 못 쓰게 한 지 2세대나 지난 2부 시점에서도 임꺽정이나 원전 등이 강선총이 없는 걸 아쉬워하는 장면이 나온다.[8] 1부의 다지와 2부의 서림. 다지는 여자의 몸임에도, 남자 다섯 명을 쏴죽이고 호랑이까지 일격에 잡으며, 서림은 노부나가에게 스카웃제의를 받고 예의 환생이라 불린다.[9] 주인공은 이 수레 탑재 자모포에 대해 자주포란 호칭을 내린다.[10] 실제 역사에서는 한 방으로 경주성을 함락시키는(...)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모습을 보여준다.[11] 실제로 가평에 추정 매장량 1억톤 규모의 흑연광산이 있다. 다만 품위가 높지는 않은 듯.# 경기도와 가까운 황해도에도 정촌광산 등 흑연산지가 여럿 있다.[12] 참기름은 매우 비싸지만 주인공은 만인지상의 임금 아니던가. 그 비싼 참기름으로 치킨을 튀겨먹는 몸인고로 그냥 치킨 좀 덜 먹는다고 생각한다.[13] 창고에 오래 쌓아 놓은 천일염에서 간수가 밑으로 빠져나가면서 쓴맛이 줄어드는 것을 보고 깨달았다고 한다.[14] 실제 역사에서도 이미 고대에 그리스 과학자 헤론이 초기적인 증기기관을 발명했지만 신전 문 여는 용도로나 쓰였고, 중세에서도 로마 제국이 외국 사신에게 보여줄 진귀한 볼거리 용도로 만든 바 있다.[15] 조선시대에는 고층건물이 없고 집들이 죄다 단층인지라 지면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 바로 궁궐이다. 그런데 거기에 피뢰침까지 달아 놨으니 한양 번개는 궁궐로 다 끌어들이는 꼴(...)[16] 사실은 임진왜란 직전까지만 해도 한양에서 복층 건물을 보기 힘들지는 않았다. 소설이 집필될 때는 밝혀지지 않은 부분으로 시대착오적 오류. 물론 그래도 궁궐 전각만큼 높은 민간건물이 존재할 수는 없었다.[17] 이 고래국밥의 주재료는 기름을 짜고 남은 고래의 비계 찌꺼기이다. 1부에서는 고기가 부족한 조선 백성들에게 이 비계를 넣은 국밥이 좋은 별미가 되었지만, 2부에서는 부역을 하는 백성들에게 새참으로 제공될 정도로 흔한 음식이 되었다. 이 때문에 백성들 중에서도 "난 너무 기름진 건 싫어."라고 꺼리는 사람도 있다.[18] 돌고래도 포함. 수염고래만 이만큼 잡는 건 아니다.[19] 다만 현재 한국에서 사육하는 닭과 당시 조선에서 사육하던 재래닭은 품종이 달라, 기름기 없는 재래닭을 튀기면 고소해지기는커녕 질기고 딱딱해서 못 먹을 게 된다. 아무래도 역사중심의 학문 연구를 한 작가가 진짜로 재래닭을 사다가 튀겨보지는 않았을 테니(...) 어쩔 수 없는, 개인 창작물의 한계. 하지만 정히 먹고 싶으면 뭔들 못하랴. 실제로도 토종닭 튀겨내는 닭집들도 존재한다.[20] 실제로 경주 인근에서는 '남석'이라 불리는 수정이 채굴되어 오랫동안 이를 이용해 고급 안경을 만들었다. 현재는 채굴이 중단되었다.[21] 당시에도 유리는 있었으나 투명도가 높지 못했다.[22] 주로 노비들처럼 유력자들 밑에서 일하는 이들이며 의금부 관원들이 공작금으로 매수하여 이용한다.[23] 그리고 정말로 금위사의 항왜 첩보공작은 2506 여단 못지않게 처참하게 망했다.[24] 실제 역사의 영국에서도 전통적으로는 도로 건설이 교구나 장원의 몫이어서 부역을 통해 조잡한 수준의 도로들이 건설되었던 것이 전부였지만, 18세기 중엽부터는 사기업들이 통행징수권을 조건으로 하는 유료 도로들을 대거 건설했다.[25] 이키 섬.[26] 다만 노비종부법이 과연 노비종모법에 비해 양법(良法)인지는 논란이 있다. 자세한 사항은 노비종부법 항목 참조.[27] 보통 왕이 이런 쌍욕을 하면 실록에는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말 정도로 기록되나 승정원일기에는 그대로 기록되니 이 일화는 후대에도 전해질 것이다. 그렇다면 현대에 무종 시대 배경의 사극에도 이 장면이 나올 듯. [28] 사실 이걸 시행한 무종부터 "대군과 군은 다르다."라며 종친의 특권을 회수할 때도 제안대군과 진성대군은 예외로 해줬으니, 일반 사대부들도 집안의 대만큼은 양보할 수 없을 것이다.[29] 하필 무성왕, 즉 강태공인 이유는 강태공이 주무왕의 군사 역할을 하고 병법서 육도삼략을 썼다고 알려지는 등 무(武)와 관계가 깊다고 여겼기 때문이다.[30] 주인공이 한때 관우를 메인으로 할까 했다가 역사책에 X종이 유교를 견제하기 위해 관우 신앙을 들여왔다고 기록되는 것은 쪽팔리다고 생각해서 그만둔다.[31] 그러나 얼마나 충심이 깊고 유능했어도 패장은 배향되지 않는다. 무묘 건립 때 계백을 배향하면 어떠냐의 의견에 주인공은 계백은 황산벌 전투에 패했다는 이유로 기각했다. 다만 척준경을 못올리는 것을 아쉽게 생각한다. 반면 최영은 조선 건국에 적대했지만 고려의 충신이라 해서 무묘에 배향됐다.# [32] 주인공은 이런 노력드립을 싫어하지만 조선 사회에서 제일 먹히는 논리라 어쩔 수 없었다고 한다. 사실 노력드립은 환경이나 제도 탓을 하지 말고 노력으로 돌파하라는 게 핵심인데 이들은 조선 사회에서 가장 축복받은 환경에서 시작하니 노력드립 들어도 할 말 없는 이들이긴 하다.[33] 사실 세조기에 직전법을 실시해 현직 관리들에게만 땅을 주고 일을 그만두면 곧바로 땅을 돌려받는 방식이 존재하긴 했지만, 알다시피 세조 기에 대신들의 98%를 공신으로 책봉해버렸는지라...[34] 다만 주인공은 딱 한 번 썼을 뿐인데 이게 고문방법으로 유행됐다고 질색한다. 웃긴 건 정여립은 반대로 이걸 사용하면서 역시 무종대왕은 위대하시다며 찬양한다는 사실.[35] 마구잡이로 고문하는 게 아니라 심리적인 압박을 가해 실토하게 만드는 방식.[36] 지방의 장수들은 얘기가 달랐다. 남쪽에서 왜구의 침략을 막아낸 장수는 제멋대로 개선을 하기도 했다. 이순신의 경우 한 번 출정하고 돌아올 때마다 개선식을 했는데, 이것은 수군의 대승을 강조하여 민심을 수습하기 위한 작전의 일환이었다.[37] 인종 초기에 쇼니 씨가 일기도와 대마도로 쳐들어온 양도왜란은 성공적으로 적을 격퇴했지만 방어전이라고 개선식이 열리지 않았다. 명종 때의 류조지 지원 파병은 여진족만 보내 후방 약탈을 한 거라서 역시 누구도 개선식 열어줄 생각은 안 했을 것이다. 인종과 명종이 무종보다 온화한 성향인 점도 있을 듯하다.[38] 후에 오-대-여-기-초-사-부-영으로 변환.[39] 이는 일본 한자표기로 중국군은 각각 배-연-영-단-사로 불렀다.[40] 아무리 무지한이라도 대중소는 알 것이므로.[41] 지금 있는 북한산성은 숙종 대에 축조한 것인데, 이 북한산성과 동일한 북한산성인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숙종 시대의 북한산성은 쌓고 나서 보니 무용지물이라는 평가를 들었기 때문.[42] 1부에서는 주인공을 경호하는 금군이 눈을 치울 때 묘사된 바 있고, 2부에서 무종 때 만들었다고 언급되었다.[43] 1~3차는 문서 참고.[44] 명나라는 어차피 조선이 그 넓은 땅을 잘 관리할 수도 없을 것이고, 자신들이 가지고 있어도 아무 이득이 없으며, 여진도 토벌하게 하기 위해 조선에게 이 땅을 넘긴다. 조선이 이 땅 관리를 잘 못해서 국력이 약해지는 것도 바랬다. 실제로 주인공이 빙의하지 않았으면 부여주와 연해주에 의해 조선의 국력이 약해졌을 수도 있다.[45] 당시 소수의 기병을 전부 척후로 보내는 등 분리한 상황에서도 보고를 듣자마자 차분하게 보급 수레들과 방패병들로 방벽을 완성시키고는 송나라 병서 속 노궁부대 배치를 원용하여 조총병들을 3열로 배치시켰다.[46] 해를 등진 상황에서 말이 일으킨 먼지를 더해 시야를 가리고자 서쪽으로만 진격하였는데 도리어 명군이 화력을 집중시키는 요소가 되었다.[47] 서풍이 불면서 조총 발사 시 발생한 매연을 금방 없애버렸다.[48] 실로 대국다운 생산력을 보이는데, 조선에서 간신히 300정 정도를 만들 때 3만 정이나 생산하는 중이다.[49] 각종 비단 3천 필, 은자 3천 냥, 산호와 비취 및 진주와 같은 보석 3상자[50] 화포와 조총을 쓰는 조선군을 보며 염왕군(炎王軍)이라며 두려워하면서 도망쳐 온 쇼니 군을, 쇼니와 틈만 나면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이던 그 오우치 군 마저도 같은 인간으로써 불쌍하다며 사가 성 안으로 들여보내 준다. 그리고 지옥에서 온 염왕군이 자신들도 공격할까봐 두려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