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군이 되어보세!/등장인물

 




1. 개요
2. 현대인
2.1. 이재석[1]
2.3. 기타 현대 인물
3. 천녀
5. 1, 2부 사이
5.1. 경성군 이윤(빙의 전)
7. 2, 3부 사이
7.1. 성친왕 이현(빙의 전)


1. 개요


슈타인호프 작가의 웹소설, 명군이 되어보세!의 등장인물들을 소개하는 문서.
실존 인물


2. 현대인



2.1. 이재석[2]




2.2. 김상희




2.3. 기타 현대 인물


  • 이재석의 할아버지
한학자 겸 농사꾼. 작품 시작 시점보다 조금 전에 병사했다. 천녀가 깃들었다고 알려진 연적을 재석에게 유품으로 남겨줘 재석이 천녀와 만나 왕이 되도록 하는 계기를 제공한 인물. 재석이에게 한문, 성리학, 농사를 가르쳐줘 조선에서 적응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해줬으며 이에 주인공도 자주 할아버지에게 감사해한다. 유학자라면 자기 입에 들어가는 건 스스로 지을 줄 알아야 한다는 실학적인 생각을 지녔기 때문에, 재석의 아버지와 특히 재석은 밭에서 살다시피 한 적도 있었다. 재석의 큰아버지를 키울 때는 잠깐 생각을 바꿔먹었기에 큰아버지와 그 자식들은 농사를 지을 줄 몰랐는데 이에 크게 후회했다고 한다.
  • 진성, 현승, 현수
이재석의 고시생 선배와 대학 동기들. 공무원 시험에서 떨어진 것에 대한 속풀이로 같이 술을 마시다 이들이 문득 꺼낸 조선 시대 이야기를 시작으로 왕에 대한 생각까지 대화가 이어지고, 이것이 머릿속에 남은 상태로 술에 취해 돌아온 이재석이 술김에 천녀가 깃든 연적에다 왕이 되고 싶다는 소원을 비는 계기가 된다.
  • 상희의 친구
상희가 중학생 때부터 사귀던 10년지기 절친이었다. 의사인데, 한의사인 친구 앞에서 대놓고 한의학을 팩트폭력을 섞어 유사과학 취급해 대판 싸우고[3] 절교했으며 상희가 만취해서 교수의 사무실에 쳐들어가는 원인을 제공한다.
  • 상희의 학과 교수들과 지도교수
학부생들 앞에서는 교양 있는 척하면서 레지던트가 된 상희를 막 대하며 욕설, 폭행, 금전 거출, 논문 대필, 성추행 등을 일삼은 위선적이고 못돼먹은 인간 말종들. 상희가 조선에 보내지기 1년 전에는 오키나와로마로 외유성 학술대회에 가서 여비로 흥청망청 놀기까지 했다.[4] 이중 학과장이 정작 서예는 하지도 않으면서 교양 있어 보이려고 골동품 상점에서 천녀가 깃든 벼루를 구입해 소장하고 있었는데 울분에 찬 상희가 홧김에 그걸 깨 먹으며 천녀와 만나게 하는 계기를 제공한다. 얼마나 악질들이었는지 당시 상희가 "내 위에 있는 빌어먹을 새끼들이 모두 사라진 세상에서 살고 싶다"는 소원을 빌 정도였고, 2부 시점에 와서도 한이 깊이 사무쳐 있어 상희는 이 작자들을 생각만 해도 욕이 자동으로 튀어나온다. 하지만 3번이나 환생한 3부 시점에 와서는 이 세계에서는 태어나지도 않을 사람들에게 원한을 가져서 뭐하냐며 앙금을 풀어버린 듯한 모습을 보인다.
  • 이재석의 군대시절 중대장
이재석이 군대 시절 경계에 실패한 보초는 용서해도 배식 실패하는 취사병은 용서 못한다고 짬탱이를 갈구었던 인물. 그래서 재석이 역사를 바꾼 뒤에 이 양반은 어떻게 될 지 혹은 태어나긴 할지 궁금해한다.

3. 천녀


재석의 가보인 육각 연적과, 상희네 교수 연구실에 있던 벼루에 깃들어 있는 존재. 재석의 조부 말로는, 재석의 조상의 효심에 감동한 옥황상제가 내린 연적이며 연적에 소원을 빌면 천녀가 나타나 소원을 들어준다고. 하지만 재석은 우물 속 귀신이 주고 간 거라고 기억하고 있었다.
주인공과 상희가 재밌는 소원을 빌었기에[5] 이를 이루어주는데 아주 뭐 같은 방법으로 이루어주었다.
새롭게 빙의할 때 빼고는 본편 내에서 등장은 없다. 1부에선 재석이 또 다시 왕으로 환생할거란 생각을 미처 못해서 천녀 생각도 잘 안 하지만, 1부 끝 2부 시작 때 천녀와 다시 만나고 재환생 시켜주자 두고두고 천녀 욕을 하게 된다. 1부에서 호되게 엿을 먹은 재석과 상희 입장에서는 성질 고약한 천녀라고 욕을 하지만, 의외로 이것저것 서비스(?)를 많이 붙여줬다. 이 둘의 기억력에 버프를 걸어줘 현대에서 익힌 지식들을 아무리 오래 지나도 절대 잊지 않도록 해줬고[6] 중세 한국어도 구사하도록 해줬다.[7]
어찌 보면 상당히 무시무시한 존재인데 주인공이 빙의하는 왕들의 영혼을 거두고 거기 주인공의 영혼을 대신 집어넣는 식으로 빙의가 된다고 한다[8]. 다만, 주인공이 빙의되는 왕들이 막장 폭군, 암군이라서 전혀 불쌍하다는 생각은 안 든다.[9] 상희가 빙의하는 인물들은 큰 병이 들어 다 죽어가다 갑자기 회복했다는 묘사로 볼 때 원래 수명이 그날까지여서 그들의 영혼을 거두고 대신 상희의 영혼을 집어넣는 것으로 보인다. 하계의 일에 물리적인 개입은 전혀 하지 않는다고 하지만[10] 재석과 상희의 일거수일투족을 전부 지켜보고 있는 것은 물론 머릿속의 생각 내용까지 들여다보는 것으로 보인다.
본래는 1부에서 주인공이 종성순에게 죽은 것이 ‘실제 연산군의 생애가 거기까지여서’라는 수명드립을 쳐서[11] 독자들이 비난을 받았으나, 2019년 7월 초 작가가 이 부분을 수정하여 수명드립을 삭제하고, 주인공이 1부에서 쌓은 업보 때문에 죽게 된 것으로 수정하였다.[12]
2부 종료 이후 역시 주인공과 재회했으며, 빙의 초마다 바보가 되는 건 싫으니 이미 알던 사람의 얼굴을 보면 누구인지 떠오르는 능력을 달라는 요청을 받아들여 재석은 빙의 전 인물의 기억 일부를 물려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 대신 또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식의 소원성취를 해준다. 황제국이 된 대한의 황위계승권자, 즉 친왕으로 환생시켜준다. 덕분에 3부에서 재석은 군주는 아니다.
주인공이 2부 당시 미래지식을 둘러대느라 팔아먹은 적이 있다.[13]
얼굴이 잘 안보이고 묘하게 밀당하는 걸 두고 일부 독자들 사이에서 '''상희 천녀설'''이 나오고 있다(...). <고종, 군밤의 왕>작가이기도 한 '까다로프스키' 작가가 쓴 상희 천녀설 팬픽 재석이네 13대조 할아버지가 소원으로 한번 하자고 했다는 걸 봐서 보통 미인이 아닌 것 같긴 한데, 얼굴이 안 보이니 다들 얼굴을 궁금해하고 있다.
3부에서 건복제가 붕어하기 전 재석이 마지막으로 한 대화에서 자신의 비밀을 고백하는데,[14] 건복제는 '재석의 13대 조가 얼토당토않은 소원을 빌어서 천계를 모욕했는데 당연히 상부에 알려서 징벌하고 연적을 회수했어야 했던거 아니냐'며 태만한 관리라고 디스했다.
독자들 사이에선 만악의 근원으로 꼽히고 있으며, 일부에선 반 농담삼아 카오스 신코른(Warhammer)이라는 드립이 나오기도 한다. 주인공인 재석이 군주로 활동하면서 잔혹한 형벌과 대외 정벌을 행하면서 등장한 드립.

4. 1부




5. 1, 2부 사이


원역사 연산군이 폐위되지 않음에 따라 중전 신씨도 폐비되지 않았다. 남편 사후 성렬왕대비(원 역사 문정왕후 존호)가 되어 아들 효도받으면서 대접받으며 살았다고한다. 능은 남편과 같이 무릉에 있다.
원역사와 달리 왕위에 오르지 않 고, 대군으로 생을 마감한다.[15] 대신 종친의 웃어른인데다가 왕위를 양보한 것 때문에 후한 대접을 받아서 인종 명종에게 받은 집안 재산도 상당하고 자손들도 왕실과 매우 우호적으로 지낸다. 증손자인 경성군이 왕위에 오른다. 2부에서 주인공의 활약에 따라 후대에 추존될 가능성도 높다. 주인공이 원역사를 알아 껄끄러워하면서도 얌전한 개념인인 데다가 원역사의 중종이 고생을 많이 한 왕임을 생각해서인지 유일하게 진짜 동생으로 생각하고 제법 친하게 지냈다. 아들 창녕군을 낳았다.
원역사에선 중종반정 주도세력에 의해 폐비되지만, 진성대군이 왕위에 오르지 않게 되면서 이혼당하지 않고 아들을 낳았으니, 원역사보다는 행복하게 생을 마감했을듯하다. 진성대군과의 사이에서 아들 창녕군을 낳았다.
'''대한 황실 4대조'''
'''인조 | 仁祖'''

'''조선 제11대 국왕'''
'''인종 | 仁宗'''

'''인종영정헌문의무장숙흠효대왕
仁宗榮靖獻文懿武章肅欽孝大王'''
[A]
'''인조헌문의무장숙흠효태황
仁祖獻文懿武章肅欽孝太皇'''
[A]
<colbgcolor=#bf1400><colcolor=#ffd400> '''묘호'''
인종(仁宗) → '''인조(仁祖)'''
'''시호'''
'''조선'''
헌문의무장숙흠효대왕
(獻文懿武章肅欽孝大王)[A]
'''대한'''
헌문의무장숙흠효태황
(獻文懿武章肅欽孝太皇)[A]
''''''
[A][B]
'''출생'''
1501년
조선 한성부 경복궁 교태전
'''즉위'''
1506년 11월 21일 (음력 11월 9일)
조선 한성부 경복궁 근정전
'''사망'''
1553년
조선 한성부 경복궁 청연루[A]
'''능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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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위'''
'''조선 국왕'''
1506년 11월 21일 ~ 155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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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부왕 무종, 모후 성렬왕대비
'''부인'''
황후 유씨[73]

  • 인종 → 인조 이황 [17][18]
주인공이 연산군(무종) 시절 중전 신씨와의 사이에서 낳은 세자. 1501년생. 무종이 비명횡사한 후 자순대비의 도움으로 만 5세의 나이에 즉위했다. 주인공과 신씨가 사랑으로 애지중지하며 키워 성품이 선했다고 하며 철권통치를 펼친 무종과 달리 무종 대에 귀양간 이들을 많이 사면해주는 등 덕으로 나라를 다스렸다. 그렇다고 성종처럼 사림이 날뛰도록 용인한 것은 아니어서 수렴청정이 끝나자마자 삼사의 특권이자 폐단인 풍문거핵과 불문언근을 폐지해 아버지의 뒤를 이어 성리학 교조화를 막는 업적도 세운다. 주인공은 이황이 자신과 달리 성군이 되기를 바랐으니 부모의 바람대로 잘 큰 것. 그러나 기술 유출이 우려된다며 기껏 아버지가 개발한 강선조총의 사용을 금지하고 다시 활강조총만 사용하게 한 실책도 저질렀다.[19][20] 1553년 53세의 나이로 사망. 아버지가 미래에서 준 정보[21] 등도 없었음을 감안하면 나라를 잘 다스렸다볼 수 있다. 아버지를 닮아서 첩을 별로 들이지 않았고 아들 복이 없었다고 한다. 유일한 아들 명종 이환이 태어났을 때 대대적인 사면을 한다.
정철의 큰 누나. 인종의 후궁이었다.
  • 양평군 이인
주인공이 무종 시절 숙의 이씨와의 사이에서 낳은 둘째 아들, 서자. 주인공이 원자인 이황만큼 이뻐해주지 못한 것을 아쉬워한다. 자손을 남기지 못하고 젊은 나이에 죽었다고 한다.
  • 창녕군
진성대군의 아들. 은성군의 아버지.
진성대군의 서자로 성격이 개차반이라 숙부를 우대하던 인종과 명종이 덕흥군만은 싫어하여 왕위계승에서 덕흥군 가계만은 아예 배제하였다. 하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고 아버지 빽에 기대어 놀고먹고 살았고 그 덕에 하성군은 왕이 아닌 종친으로 놀고먹게 되었다.
무종 시절 무오사화에 걸린 사림들을 유배 보낸 무릉도(울릉도)에 밀항을 해서 김굉필 아래에서 공부를 한 뒤 관직에 오른다.[22] 인종에게 무묘를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다가 이장곤에게 처발린 뒤[23][24] 부여주로 유배를 가서 야인 아이들을 가르치며 지낸다. 부여주에서 돌아온 뒤로는 현실을 겪어보고 좀 깨달은 것이 있는지 별로 나대지 않고 살았다고 한다. 실제 역사에서 소격소 문제로 중종에게 찍혀 사약 먹고 죽은 것을 생각하면 이쪽도 수혜자.
이 세계에서는 인종의 통치가 안정적이었기 때문에 그냥 평범한 대신으로 이조판서를 지냈으나 개고기 매니아였고 결국 개고기를 뇌물로 받은 것 때문에[25] 정승까지 오르지는 못했다. 퇴직한 후 개고기 요리책을 썼는데 140년이 지난 3부 시점에서도 개고기를 좋아하는 사람을 김안로 같은 사람이라고 놀린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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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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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황 인조, 모후 유씨[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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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순황후 등

  • 명종 → 명조 이환[27]
인종의 유일한 아들이자 무종의 손자. 1528년생. 몽골인들에게 판매하기 위해 전라도 일대에 대규모의 차밭을 조성해서 중국보다는 못하지만 차 무역을 활성화시켰고 일본의 류조지가에서 원군을 요청하자 일본에 여진기병 2000명을 파병을 해서 쇼니 가 멸망에 일조하기도 했다. 집권 말기 서양인들의 존재를 알게 되어 이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던 중 1567년 40세의 나이로 사망. 유일한 아들이 세자로 책봉되고 1년 후 8세의 어린 나이에 죽고 아들을 보지 못해 경성군을 양자로 들인다. 인종과 유사하게 큰 실정 없이 무난한 통치를 펼쳤지만 재위 말년에 조선 입장에서는 암군 그 자체였던 경성군을 후계자로 지목한 큰 실수를 했다. 경성군을 세자로 책봉한 후 39세라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사망하며 경성군이 일찍 왕위를 물려받게 되었는데 어릴 적의 경성군은 얌전히 책만 읽는 녀석이었기에 명종이 본성을 파악할 시간이 없었다. 다행히 할아버지인 무종이 경성군에 빙의하는 기적이 일어나면서 최악을 피하게 되었지만 만약 무종의 재림이 아니었다면 본인은 나라를 잘 다스렸음에도 후계자를 잘못 골라 나라를 망하게 만든 원흉으로 기록되었을 것이다.
  • □□세자 → □□태자
명종의 고명아들이자 적자. 명종이 보위에 오르고 2년후에 인순황후에게서 얻은 아들로 7세에 세자에 책봉되었으나 1년 후 병으로 8세에 죽는다. 이로서 무종과 성렬왕후의 직계 남자 후손은 끊기고 여자 후손만 남는다.
  • 은성군 → 은성대원군 → 은성대원왕
창녕군의 아들. 재석이 빙의하게 되는 경성군(장조)의 아버지. 아들이 없던 명종에게 아들 경성군을 입양보낸다. 재석이 빙의하는 2부 시작 시점에는 이미 고인이어서 등장은 없다.
우리에게 문정왕후로 알려진 사람. 해서정벌이 끝나고 주인공에 의해 뒤늦게 언급이 된다. 어떻게 되었을까 행보가 궁금해서 알아보니, 역사가 바뀌어 진성대군과 맺어지지 못하니 그냥 적당히 명망 있는 집안 며느리가 되었다고. 그 때문에 실제 역사에서 누이버프로 권세를 누린 윤원형이나 정난정도 패악을 부리지 못한 체 평범하게 살았을 듯. 아니면 땅 모으고 재산 불리는 능력을 상공업이 발달한 세계에서 십분 발휘하여 떵떵 거리며 살았거나.[28]
  • 정일한의 아버지
무종과 상희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 상희가 사망한 뒤 정호찬이 자신의 얼자로 위장하여 키웠다. 얼자이지만 무종이 서얼금고법을 폐지했기에 벼슬을 지낼 수 있었다. 명종 대에 승지를 지냈으며 경성군 집권 초기에 사망했다. 주인공과 상희는 아들의 얼굴도 못 본 것을 슬퍼한다. 주인공은 상희의 마음에 상처가 될 것을 우려해 상희에게는 아들의 존재를 숨긴다.
  • 고니시의 스승
무릉도 출신의 선비로 고니시에게 유학을 가르친 인물. 자기도 모르게 일본사를 바꾼 장본인이기도 하다. 이 인간 덕분에 고니시가 원역사보다 훨씬 유능한 인물이 되어 조선 입장에서 성가신 적장이 되었기에 주인공은 누군지 알면 당장 연해주 서당에 쳐 박아버릴 생각을 하며 이를 갈고 있다.[29]
죽기 전 오이치에게 쿠노이치 유키를 맡겼다. 이후 유키는 오이치의 명령으로 차차를 따라 조선으로 가게 된다.
오우치 요시오키의 아들. 반란을 일으킨 부하에게 살해당하고 오우치 세력은 망했다. 이후 오우치 세력은 류조지에 합류했다.

5.1. 경성군 이윤(빙의 전)


2부에서 주인공이 빙의하게 된 인물. 진성대군과 부인 신씨[30]의 증손자로 1551년생이며 아들을 보지 못한 명종 이환의 양자가 되어 원역사의 선조와 비슷하게 1567년 즉위한다. 빙의 시점은 즉위 15년째인 1582년. 무종, 인종, 명종과 다르게 전형적인 성리학적인 조선 임금...인 정도가 아니라 이후 언급되는 행적들을 보면 전형적인 걸 넘어 그냥 무능하고 무식한 암군임이었음이 드러나고 있으며 무능한 암군이라는 것은 작가 공인이다.[31] 주인공은 경성군이 통치하는 채로 이후 한 대만 더 지났으면 무종의 개혁은 다 사라지고 조선은 다시 유교가 지배하는 나라가 되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현재 전개를 보면 주인공이 빙의하지 않은 상태로 경성군이 계속 왕위에 있었다면 조선의 유교 국가화는 물론이고 충분히 조선이라는 나라를 멸망시키고도 남았을 가능성이 높다. [32] 이는 작중 주인공도, 경성군을 어려서부터 지켜본 세자도 마지막에 인정한 것이다.
요약하면 그냥 성격 나쁘고 무능한 암군이다. 작중 밝혀진 무능한 면모와 악행들만 봐도,
  • 무종 대에 얻은 영토의 개척과 관리 소홀.
  • 예산 절감한답시고 돈이 들어가는 정책들은 죄다 취소, 축소. 국방도 소홀히 하여 대일, 대여진족 대비를 전혀 하지 않았음.
  • 그나마 남아있던 재정 관리도 소홀히 해 내수사 관리들의 횡령과 부패가 만연하게 만듬.
  • 그렇게 돈을 아낀다면서 정작 여색은 밝혀 전국의 미녀들을 뽑는 일에는 돈을 쏟아붓고 그렇게 생긴 후궁과 자녀들에게는 가장 노릇 한 번도 안 함.
  • 과도하게 권력에 집착하여 후계자인 세자까지 견제하고 의심함.
  • 성리학적 사고방식에 사로잡혀 상공업을 억누르고 농업을 장려해 조선의 경제 발전을 강제로 틀어막음.
  • 성리학밖에 모르는 골수 사림파들을 중용하여 가까이 하고, 서원 특혜와 같은 사림들이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해 조선을 성리학이 지배하는 나라로 만들려고 함.
  • 외국인 선교사들이 일본에게 무기를 팔았다는 이유로 입국을 막고 쇄국으로 일관.
  • 소수민족인 백정들을 관노로 만들고 북방으로 강제 이주시키며 탄압.
  • 임해군이 온갖 악행을 저지를 때 친한 종친이란 이유로 처벌하지 않고 묵인.
  • 성리학 타령을 하면서 선대왕인 무종을 모욕하는 패륜 발언을 하는 위선적인 행보.
이 정도면 당시 제대로 된 성리학자들이 볼 때 당장 왕 자리에서 끌어내야할 수준이었다.[33] 그나마 현실의 대표 폭군인 연산군과 비교하면 주도적으로 커다란 전횡을 저질렀다거나 무익한 토목공사나 전쟁을 일으키는 짓은 하지 않았지만, 명군이 되어보세 세계관에서는 사실상 연산군이라는 폭군이 없고, 상당한 업적이 있는 무종이라는 군주만 있으며 무종의 뒤를 이어 조선을 발전시킨 인종과 명종이 있다 보니 이쪽 세계관의 조선 왕 중에서는 최고의 암군 스타일. 원 역사의 선조와 비교해서도 여러모로 왕으로서의 자질과 능력이 뒤떨어져 주인공이 빙의하지 않았으면 최악의 암군으로 기록되었을 인물이다.[34]
원래 경성군의 영혼은 본래의 경성군이 저지른 악행과 적폐들이 표면상으로 드러나고 터지기 전 주인공이 빙의하면서 그가 본격적으로 죄를 짓기도 전에 죽은 것이 되어 극락으로 보내졌다는 것이 천녀를 통해 밝혀졌다. 재위 초기 15년간의 경성군과 그 이후의 성향, 개인적 품행 등이 너무나도 다르기에 후대 역사학자들에게 미스터리로 남을 듯하다. 스스로 깨달은 바가 있어 방향을 바꿨다거나 원래 이중인격자였다거나 다양한 이야기가 나올 듯. 3부에서 나오기로는 황실 내에서도 '무종대왕께서 장조대제에게 빙의했다.'라는 전설이 전해진다고 하니 주류 학계에서 인정받지는 못하겠지만 서프라이즈에 단골 소재로 무종 빙의설 같은 것이 자주 언급될 듯.
후대에는 한반도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왕이 될 것이다. 북로남왜라는 한반도의 고질적인 병폐를 뿌리 뽑고, 외교관계의 세계적 확장과 경제력의 성장, 학문과 사상을 다양화시키고 국난을 훌륭하게 극복하여 자국의 군사력을 당대 세계최강 급으로 끌어올렸고[35], 최후까지도 아픈 몸을 이끌고 몸소 한겨울 칼바람을 맞아가며 기우제를 지내 비를 내리게 하고 죽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니 후세에는 '광개토대왕, 세종대왕과 함께 한민족 3대 성군'으로 기록될 것이다. [36]
첫 15년의 무능도 초장왕과 마찬가지로 장조의 큰그림으로 여겨질 가능성이 높다. 애시당초 묘호도 초장왕의 시호에서 따왔고, 결국 장조의 각성과 위업은 북방전쟁에서 첫승리와 함께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북방의 빠른 안정화를 위한 여진족 정리와 왕권강화 및 군사력 강화와 총신의 승진을 위한 당위성을 획득하기 위해 고의적으로 전쟁이 벌어지도록 계획했다고 여겨질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자신의 딸 둘을 각각 황후와 카툰으로 만들기까지 했으니 16세기와 17세기 대아주의 판도를 계획하고 실현시킨 지략가로 묘사될 가능성도 있다.

6. 2부




7. 2, 3부 사이


  • 의성왕대비 김씨 (의인왕후 → 의인황후) (생몰년도: 1554~1619) (조선 왕비 1567~1608) (조선 왕대비 1608~1619)
아들의 재위를 보며 평화롭게 살다가 만 65세에 자연사한다. 시대를 생각하면 꽤나 장수했다. 가장 오래 재위한 남편을 따라 장장 41년이나 중전으로 재위했으며 이후 아들의 치세 11년 동안 왕대비로 재위한다.
광해군은 교황 우르바누스 8세에 의해 추기경으로 서임되었다고 한다. 말년에 루벤스에게 의뢰하여 도포를 입은 모습을 초상화로 남겼고 이 그림이 한복 입은 남자가 된다.[37] 죽을 때까지 유럽에서 살았으며 사망한 후 로마에 묻혔다. 대한에서는 여전히 광해군의 출가를 나쁘게 보고 있으며 법왕 바로 아래의 추기경이 되었음에도 그래봤자 교회 벼슬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보고 있다.
'''대한 황실 1대조'''
'''경조 | 景祖'''

'''조선 제14대 국왕'''
'''경종 | 景宗'''

'''경종□□□□□□□□□효대왕
景宗□□□□□□□□□孝大王'''

'''경조□□□□□□□효태황
景祖□□□□□□□孝太皇'''

<colbgcolor=#bf1400><colcolor=#ffd400> '''묘호'''
경종(景宗) → '''경조(景祖)'''
'''시호'''
'''조선'''
□□□□□□□효대왕
(□□□□□□□孝大王)
'''대한'''
□□□□□□□효태황
(□□□□□□□孝太皇)
''''''
[B]
'''출생'''
1572년
조선 한성부 경복궁 교태전
'''즉위'''
1608년
조선 한성부 경복궁 근정전
'''사망'''
1626년
조선 한성부 경복궁 강녕전[D]
'''능묘'''
□릉(□陵)
'''재위'''
'''조선 왕세자'''
??[38] ~ 1608년
'''조선 국왕'''
1608년 ~ 162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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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1400><colcolor=#FFD400> '''본관'''
전주(全州)
''''''
성(𤁑)
'''전호'''
□□전(□□殿)
'''부모'''
부황 장조, 모후 의인황후
'''부인'''
황후 김씨,[75] 소훈 박씨 등

  • 경종 → 경조 이성[39]
세자였던 이성은 평화로운 시기에 무난하게 재위하다가 1626년 54세로 사망했다. 7년 주기 견서사 파견을 유지하고 증기기관 사용을 철저히 비밀로 하는 등 전반적으로 장조의 유지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 정책을 유지한다. 장조 대에 확장된 영토들의 내실을 다지고 장조가 내린 행정권력과 사법권력의 분리조치를 더 체계화하여 전문 법률가인 율관과 대송인 제도를 창설하고, 노비 소유주에게 노비세를 물리는 등 작지만 의미있는 개혁 조치들을 지속했다.
그렇지만 혼자서 영토를 2배 가까이 뻥튀기한 장조, 칭제건원을 한 선조에 비해 화끈한 업적은 없어서 후대에는 일반인들에겐 명군 아버지와 명군 아들 사이의 범군으로 여겨지고, 역사학자들에게는 높은 평가를 받는 군주가 될 가능성이 높다.[40] 특이한 점은, 말라리아의 원인에 대한 논란에 관심을 갖고 죄수들로 실험을 해서 모기가 원인임을 밝혀냈다는 것이다.
  • 진안군 → 진왕 이욱
조용히 책을 쓰다 1652년 67세로 사망. 경조의 동생들 중 유일하게 선조의 칭제건원 시점까지 살았고 칭제건원 후 군왕에 봉해져 진왕이 된다.[41] 평생 집필한 소설이 40권이나 된다고 한다.[42]
못생긴 정실 부인은 한양 본가에 내버려두고 중국인 첩과 함께 지방 별장들을 떠돌아 어머니 상빈이 일부러 정실부인을 더 챙겨주었다고 한다. 중국인 첩 외에도 첩을 여럿 두었고 서자도 많이 낳았는데, 어찌나 많이 들였는지 어머니인 상빈도 첩의 숫자를 모를 정도. 하지만 재산은 유일한 적자인 성도공 이창에게만 물려주었다고 한다.
  • 군부인 → 진왕비 심씨
진안군(진왕)의 정실부인. 청송 심씨 심영권의 딸. 못생겨서 사실상 소박을 맞은거나 다름없었다. 남편은 정월과 제사지내는 달에만 돌아오고 다른 달은 중국인 첩을 끼고 밖으로 싸돌아다녀서 마음고생이 심했다고 한다. 다행히도 어머니 눈치를 본 진안군이 본가에 있을 때에는 부부관계를 가져서 외동아들이자 유일한 적자 성도공 이창을 낳는다.
1621년에 76세로 사망했다. 당연히 사망 직후 무묘에 배향되었고 1632년 선조가 칭제건원한 직후 충무대왕에 봉해져 이 세계에선 김유신에 이어 2번째로 신하에서 왕으로 추존되었다. 또한 장남 이회의 손녀가 열조의 황후가 되는 등 신하로써 최고의 영광을 받았다. 이순신 가문은 현재도 대한 최고의 무가라고 한다.
6차 견서사의 정사. 1625년 대유주에 도착한다.[43]
미주에서 저지른 학살에 대한 문책으로 북방에 처박혔다가 도적을 상대로 공을 세워 복권되고 경조의 눈에 들어 6차 견서사에 발탁되었다. 당시 진행중이던 유주대란에 관전무관으로 부하 3명[44]과 함께 참전 없이 참관만 한 뒤 8년 후 귀국했다고 알려져 있었는데 실은 북독일에서 신나게 약탈을 벌여 한 탕 챙기고 왔다는 것이 뒤늦게 밝혀진다. 현실역사를 반영해서인지 군관이라기 보다는 도적 같은 모습을 보이긴 했지만, 조국을 절체절명의 위기에 몰아넣은 반역자가 되진 않았으니 대체역사의 수혜자.
장조 사후 조선의 2세대 장수로써 도원수까지 올라 유럽에서 배운 전술을 전파하여 조선군을 발전시켰다.
  • 롤리타 히메네스 (1577?~?)
조선에 온 유럽인들 중 가장 신분이 높은 사람이 되었다. 원래부터 카디스의 백작 영애였고 이덕형의 아내로 장조 시절 백작부인급 정3품 숙부인을 받았고, 경조 때 종2품 정부인으로 올랐다. 마지막 건원제 시기에는 정2품으로 올랐다. 이덕형이 한원부원군 작위를 받았고, 본처 이산해의 딸 정경부인 이씨가 공작부인으로 취급받았던 걸 보면 바로 아래 단계인 정부인이면 후작부인 정도는 되는 지위를 가진 셈이다.
'''조선 제15대 국왕
선조 | 宣祖'''
'''대한 초대 태황'''
'''선조 건원제 | 宣祖 建元帝'''

'''선조□□□□□□□효태황
宣祖□□□□□□□孝太皇'''

'''묘호'''
'''선조(宣祖)'''
'''시호'''
□□□□□□□효태황
(□□□□□□□孝太皇)
'''출생'''
1595년
조선 한성부 경복궁 자선당
'''즉위'''
1626년
조선 한성부 경복궁 근정전[D]
'''사망'''
1650년
대한 한성부 경복궁 강녕전[D]
'''능묘'''
□릉(□陵)
'''절일'''
□□절(□□節)
'''재위'''
'''조선 왕세손'''
??[45] ~ 1608년
'''조선 왕세자'''
1608년 ~ 1626년
'''조선 국왕'''
1626년 ~ 1632년
'''대한 태황'''
1632년 ~ 1650년
'''연호'''
건원(建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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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전주(全州)
''''''
연(瑌)
'''전호'''
□□전(□□殿)
'''부모'''
부황 경조, 모후 김씨
'''부인'''
황후, 원빈 등

  • 선조 건원제[46] 이연
원손이었던 이연은 명이 망해가는 시절에 즉위하여 경조의 사망과 가뭄을 핑계로 명을 돕기 위해 출병하지 않았고 명이 망하도록 방치했다. 그리고 명이 멸망한 후 1632년 국명을 '대한(大韓)'으로, 황제의 칭호는 태황으로 칭제건원했다. 처음 제정한 연호는 건원(建元)[47].
내달인 후궁 원빈을 들였으나 사이에서 자식을 보지는 않았다고 한다. 쓸 수 있는 기술이라면 뭐든지 써서 돈을 벌어들여 백성들을 먹여살려야 한다는 실용주의적 애민정신을 바탕으로 증기기관 사용을 활성화하고 수출주도형 경제를 만들고 노비제를 축소하는 등 대한의 경제를 크게 발전시킨 업적이 있다.
옥좌에 흑백곰 가죽을 깔고 앉았다고 한다. 1650년 55세로 사망했다. 작중 이재석이 빙의하지 않은 왕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업적을 남겼으며 그 행보 또한 꽤나 파격적이다.[48]
명을 구하지 않았고, 노비제를 유명무실한 수준으로 축소시켰고, 견서사 파견을 중단하고 증기기관 비밀유지 원칙을 깨고, 노산군을 단종으로 복권시켰으며, 무종이 배향한 박지, 안우, 김득배, 이방실을 무묘에서 제외하고 박위, 이지란[49], 배극렴, 최무선을 배향했다.
중전에게서 3명의 적자를 보았으나, 장남과 차남은 요절하고 40세가 되어서야 3남 연가제 이전을 얻었다.
  • 태황태후
건원제의 황후. 작중에선 이미 고인으로, 3부 20화의 언급으로 보아 1682년 시점에서 10여년 전인 1670년대 초반에 붕어한 것으로 보인다.
  • 원빈
선조가 들였던 내달인 후궁. 낳은 자식은 없다. 원빈을 위해 궁궐 내 최초의 내달식 주택인 양화당이 지어진다.
  • 성도공 이창
진왕 이욱이 정실에게서 낳은 적자. 정실 부인을 내팽개치고 거들떠도 보지 않던 진왕이었지만 반대로 자식들 중에는 정실 소생의 이창을 가장 총애했으며, 재산도 모두 이창에게만 물려주고 서자들은 키워만 주었다. 정실에 대한 애정 여부와 별개로 가문을 중시하는 성리학적 사고방식 때문이었던 듯.
명이 멸망한 후 주씨 황족들이 몰살당하는 와중에 혼자 살아남아 조선으로 탈출하여 대구에 살던 명 유민(2부에서 유정과 진양옥 휘하 명나라 패잔병들의 후손) 5천호의 정신적 지주가 된다. 조선이 대한으로 칭제건원한 후 대명공이라는 봉작을 받고 직접 목수 일을 해가며 대명묘를 짓는다. 명 유민 5천 호를 식읍으로 받았으며, 3부 시점에서 그 후손이 3대 대명공으로 재위하고 있다. 원역사에서 목수 일이 딱 어울리는 사람이 분수에 안 맞는 황제에 올라 암군이 되었던 것과 달리 적성에 맞는 목수 일을 원없이 하게 되었고 후손들도 잘 살게 된 대체역사의 수혜자.
명이 멸망하고 건주가 입관하는 혼란기에 요동을 조선의 영토로 편입하는 어려운 일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이후 의주후 작위를 받았다. 원역사의 김자점이 유능했음에도 권력욕에 집착하다가 몰락한 것과 달리 제 능력을 잘 펼쳐서 사후에도 명신으로 평가받았으며 손자인 김세룡은 내각승상이 되는 등 가문도 번창[50]한다.
  • 이여수
이덕형과 롤리타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선조 대에 문관으로 조정에서 많은 공로를 세워 유주후에 봉해지고 새로 유주 이씨라는 본을 창설해 시조가 되었다. 같은 스페인계인 2부에서 조선에 정착한 스페인 군사고문 로드리고의 딸과 결혼했다. 2부에서 장조가 상상만 했던 백인계 명문가가 실제로 이뤄진 셈이다. 스페인계이지만 대한의 사대부인지라 천주교는 믿지 않았다고 한다.
  • 정영훈
정준석의 장남. 아버지의 뒤를 이어 제2대 대남도 대중성주가 되었다. 선조 이연이 대남도의 호족으로 위세가 지나치게 강력해진 정준석을 견제하기 위해 대중성주 직책을 회수하자 재산과 토지는 보장해 준다 하기에 순순히 받아들이고 권세가 정도로 남기로 한다. 동생 정종훈이 이에 반발해서 자기 세력을 이끌고 뛰쳐나가 이름을 정지룡으로 바꾸고 동남아를 휩쓰는 해적왕이 되었지만 정씨 가문이 대남도에 가진 세력이 워낙 커서 연좌제를 걸면 반란이 일어날까봐 조정에서 처벌하지 않아, 정씨가는 여전히 대남도의 대 토호 가문으로 남아있다.
'''조선 제16대 국왕'''
'''대한 제2대 태황'''
'''열조 연가제 | 烈祖 延嘉帝'''

'''열조□□□□□□□효태황
烈祖□□□□□□□孝太皇'''

'''묘호'''
'''열조(烈祖)'''
'''시호'''
□□□□□□□효태황
(□□□□□□□孝太皇)
'''출생'''
1634년
대한 한성부 경복궁 교태전[D]
'''즉위'''
1650년
대한 한성부 경복궁 근정전[D]
'''사망'''
1678년
대한 한성부 경복궁 강녕전[D]
'''능묘'''
정릉(□陵)
'''절일'''
□□절(□□節)
'''재위'''
'''대한 황태자'''
?? ~ 1650년
'''대한 태황'''
1650년 ~ 1678년
'''연호'''
연가(延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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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전주(全州)
''''''
전(壥)
'''전호'''
□□전(□□殿)
'''부모'''
부황 선조, 모후
'''부인'''
진성황후, 혜비 진씨 등

  • 열조 연가제[51] 이전
3부의 건복제 태황과 성친왕 이현의 아버지. 1634년생, 선조 이연의 삼남. 선조 때부터 북변을 침범하던 루스국에 7차 견서사를 보내 바이칼 호레나 강으로 양국의 국경을 확정지었다고 한다. 재위했던 28년간 40만명이 아사한 경신대기근을 포함하여 거의 내내 지속된 가뭄과만 싸우다가 1678년 44세의 비교적 젊은 나이로 사망한다. 경신대기근을 이겨낸 공으로 열조 묘호를 받았다. 연호는 연가. 이순신의 증손녀를 황후로 맞았다. 선조가 쓰던 흑백곰 가죽은 낡았고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창고로 보냈다. 건물의 다층화에 찬성하며 '3층으로 집을 지으면, 토지가 3배로 넓어지는 셈'이라는 말을 남겼다. 본인은 부황의 하나뿐인 적자였는데 그 자신은 황후 이씨에게서 4명의 적자를 얻었는데 장남과 차남은 요절하고 3남이 건복제 이윤, 4남이 성친왕 이현이다.
  • 김인황
세계 최초의 미생물 발견자. 인천에서 의원을 하던 인물로 원래 천리경으로 멀리 있는 배를 보는 취미를 가지고 있다가 스스로 광학과 렌즈 제작술을 배워(갈릴레이의 책까지 구해서 배웠다고 한다.) 1656년 내달국제 유리로 세치경(현미경)을 발명하여 적혈구 관찰에 성공한다. 이후 1663년 건강한 사람과 달리 역리 환자의 변에서만 병균(시겔라)이 발견된다는 것과 이 균을 먹으면 역리에 걸린다는 것을 발견하여 병균의 존재를 입증한다. 그러나 모든 병에서 균이 발견되지는 않기에 병균학에 반대하는 의원들도 있다. 하지만 병균 논쟁을 통해 최초의 학술정기간행물인 대한의보가 창간되어 대한의 의학 발전의 원동력이 되는 등 무척이나 드라마틱한 삶을 살았다.[52]
  • 김의진
열조 시기의 의원. 골초 흡연자 6명과 담배를 피워본 적 없는 사람 6명의 시신을 부검해본 뒤 흡연자들의 폐가 검은 것을 발견하고 담배가 폐에 좋지 않다는 것을 증명한다. 담뱃진이 병균을 죽이는 효과가 있어 병균학 지지자들은 약제로 사용했는데, 그런 담배 자체가 병을 일으킨다는 사실이 병균학 반대자들의 주요 근거 중 하나가 된다.
2부 외전 시점에 주상락이 의문사한 후[53] 만력제의 뒤를 이어 황제에 올라 만력제와 똑같은 암군의 행보를 이어간다. 원역사에서 형 주상락의 연호였던 태창제를 여기서는 주상순이 썼다. 고영상의 반란군이 모문룡을 통해 뇌물을 바치려 하자 웅정필이 모문룡을 처형했고 고영상의 뇌물을 탐내던 중에 뇌물을 받을 길이 막혔다고 웅정필을 냅다 처형해버린다. 그 결과로 명군이 붕괴하였고 주상순은 조선으로 탈출하려다가 고영상에게 붙잡힌다. [54] 잡힌 뒤 산 채로 살이 저며졌고, 부황인 만력제의 무덤인 장제전을 땔감으로 하여 고깃국이 되어 반란군들에게 그대로 잡아먹히면서 명은 멸망한다. 이 때가 1630년. 묘호인 '영종'도 시법에서 암군들에게 주는 영(靈)자를 써서 영종이다.
명말에 산해관 수비대장으로 있었는데, 태창제가 고영상에게 살해당하며 명이 멸망하고 건주군이 남하할 때는 반란 진압 때문에 수비군도 약체화되었고 근황을 명분으로 내세운 건주에 저항할 이유도 없어서 귀순한다. 이후 건주의 신하가 되어 명군 패잔병들을 건주로 흡수하고 건주가 화북을 장악하도록 도왔으니, 원역사와 180도 다르게 오삼계 포지션이 되어버렸다. 명을 지키지 못한 자괴감에 일찍 벼슬을 내려놓고, 고향인 광동은 다른 나라가 되어버려서 못 가고 산동에서 은거했다고 한다.
명나라가 원역사보다 훨씬 빨리 무너져서인지 산해관 수비대장이었던 원숭환 밑의 하급 군관으로 있었다. 한군팔기에 편입되어서 건주의 입관 과정에서 막대한 전공을 세우고 그 대가로 대대로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다. 원역사보다 후손들이 훨씬 잘 풀렸다.
농민반군 지도자 고영상에게서 태창제에게 바치겠다는 뇌물을 받아 태창제에게 상납하는데, 웅정필이 이를 알고 적과 내통했다며 처형한다.
망해가던 명의 마지막 희망으로, 섬서성의 농민반란을 진압하고 지도자 왕가윤을 붙잡아 처형한다. 그리고 모문룡이 왕가윤의 후계자 고영상에게 뇌물을 받는 것을 알고 모문룡을 처형한다. 그러나 태창제는 고영상의 뇌물을 모문룡을 통해 상납받고 있었고 나라의 운명보다 뇌물이 더 탐났던 태창제에게 처형당해 원역사보다 훨씬 어이없는 최후를 맞는다. 웅정필이 사망하자 그나마 남아있던 명군은 붕괴하고 명은 순식간에 멸망한다.
명이 멸망한 후 강남에 건국된 후송의 초대 황제.[55] 생몰년도는 1589~1668, 재위기간은 1633~1668. 본인은 송 공종의 후손이라 주장한다.[56][57] 젊을 적에는 소금장수 일을 했다. 건주군이 화북에서 고영상 계열 반군들을 토벌하는 사이 강남의 농민반군 세력을 모두 규합하여 후송을 건국한다. 3면에 적국을 두고 여러차례 패전했지만 기적적으로 세력을 회복해 후송을 반석 위에 다져놓고 80세인 1668년 사망한다. 송의 후계임을 주장하면서도 이미 조광윤의 묘호로 사용된 태조를 다시 사용했는데, 이를 해명하는 명분으로 북위에서 이미 같은 묘호를 중복해서 사용한 적이 있다는 것을 근거로 내세웠다. 하지만 대한 측에서는 조승복이 무식한 소금장수 출신이라서 그런다고 비난한다.[58]
후송의 2대 황제. 재위 기간은 1668~1680.
후송의 3대 황제. 즉위한지 4년만에 요절한다. 재위 기간은 1680~1684. 작중 영종의 한자 표기는 나온 적이 없지만 북송-남송에서 英宗, 寧宗이라는 묘호를 쓰는 황제가 둘 모두 있었다. 다른 사례가 없긴 하지만 이 둘과 겹치지 않는 다른 영 자를 넣어서 썼거나[59], 그렇지 않다면 태조 조승복에 이어서 두 번이나 묘호를 중복 사용한 것이 되니 후송은 말로만 송나라를 계승하는 것이고 사실은 송나라를 계승한다는 의식 따위 전혀 없다는 말이 된다.
명의 충신으로 명말 혼란기에 반군으로부터 복건을 지켜내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으나, 위치가 멀어 태창제가 고영상에게 살해당하고 명이 멸망할 때는 손쓰지 못한다. 백성들에 의해 주씨 황족이 대부분 몰살당했고 조승복군의 세력이 너무 강했기에 어쩔 수 없이 조승복의 휘하로 들어간다. 이후 청과 서를 상대로 큰 공을 세워서 세습 가능한 위국[60]에 봉해진다. 이후로 홍씨 가문은 후송 제일의 무가이다.
  • 고영상[61]
섬서에서 일어난 왕가윤의 농민반군 장수였다가 왕가윤이 웅정필에게 처형당하자 그 세력을 물려받는다. 모문룡을 통해 태창제에게 뇌물을 바치려 하는 이간계가 대성공하여 웅정필이 태창제에게 처형당하며 명군이 와해되었고 이 틈을 타 부장 장헌충, 이자성과 함께 북경을 함락시킨다. 이후 만력제의 무덤을 파헤쳐 도굴하고, 조선으로 도망치려던 태창제 주상순을 잡아 산채로 살을 발라내 고깃국으로 만들어 백성들에게 나눠준다.[62] 그러나 근황을 명분으로 건주군이 내려오자 평원에서 결전을 벌여[63] 패배하자 자결했고 고영상의 세력은 장헌충과 이자성이 물려받는다. 건주군을 격파한 후 칭제할 생각이었기에 자금성을 불태우지 않았다.
서의 초대 황제. 생몰년도는 1606~1656, 재위기간은 1635~1656. 농민반군 지도자 고영상의 부장으로 고영상과 함께 북경을 함락해 명을 멸망시킨다. 이후 고영상이 건주군에게 토벌당해 자결하자 다른 부장 이자성과 함께 세력을 나눠서 물려받고 파촉으로 가서 1635년 서나라를 건국한다. 원역사와 달리 궁지에 몰려 살인마가 되지 않았고 정상적인 황제 노릇을 했다. 강남일통과 강남일통을 기반으로 한 중원일통을 꿈꾸며 후송과 여러 차례 싸웠으며, 1656년 친정에 나서 동정호 전투에서 대승했으나 그 직후 급병으로 사망한다. 50세라는 비교적 젊은 나이라서 후계 구도를 준비해두지 않았고 때문에 장헌충의 4황자 장형운이 쿠데타를 일으키게 된다. 태조라는 묘호를 받은 것을 보면 작중의 장헌충은 현실에서와 다르게 장아자를 서 태조로 추존하지 않은 듯 하다.
고영상의 부장으로 고영상이 자결한 뒤 그 잔당 세력을 장헌충과 나눠받고 강남으로 내려간다. 그리고 강남을 장악한 조승복과 결전을 벌였으나 패배해 사망한다.
오이라트와 협력하여 할하부를 공격하여 무너뜨린다. 그리고 할하부가 무너진 직후에 오이라트와 싸움을 벌이지는 않는데, 그 이유가 64세의 나이로 누르하치가 사망했기 때문. 생전에 흡연을 즐겼고 구토와 객혈이 동반되었다는 말로 볼 때 폐암으로 죽은 것으로 추정되는데 원역사보다 1년 덜 살고 죽었으니 수명이 크게 줄어든 것은 아니다. 손자 요토와 호오거가 각각 칭제를 하면서 청과 후금 모두에서 태조 황제로 추존했다.
누르하치의 뒤를 이어 건주국왕이 된다. 명나라가 반란군으로 고생하고 있을 때 명나라의 원군 요청을 무시하고 고영상이 태창제를 살해하고 명을 멸망시킨 뒤에야 근황을 명분으로 화북의 고영상 반군을 공격하여 2년에 걸쳐 화북을 장악한다. 그 뒤 여력이 없어 강남의 후송과 서는 토벌하지 않았다. 화북 장악 과정에서 저항하는 4개 도시의 거주민 2백만명을 학살한다.[64] 1635년 대한에게 2부에서의 밀약대로 요동을 할양했고 건주를 분할하여 홍타이지에게 몽골 지역을 넘긴다. 아들 요토가 칭제한 후 청 태종으로 추존된다.
여담이지만 아무리 건주의 인구가 적어서 화북을 지배하기에는 무리가 있다지만, 그가 만든 청나라는 실제나 작중 역사에서나 오래 가지 못한 원나라와 비슷한 국가가 된 것을 보면, 2부에서 다이샨은 조선에 있는 동안 조선의 군사와 군략에 대한 것은 많이 배웠지만, 그 외의 것에서는 별로 배우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65]
  • 세종 아이신기오로 요토
다이샨과 희정옹주 사이의 아들. 다이샨 사후 화북을 물려받고 1648년 국호를 청으로 하여 칭제한다. 치세 내내 중원일통을 위해 후송, 서와 피터지게 싸웠다. 1663년 사망했고 그 뒤 청은 요토 시절의 확장 정책을 중단한다.
인권을 존중하는 현대인의 감성을 여전히 간직한 상희의 손자임에도, 사촌인 대한의 건원제가 뛰어난 업적을 많이 이뤘고, 유럽 선교사들에게 교육받은 영향으로 노비들에 대해서도 전향적인 정책을 펼친 것으로 추정되는 것과 다르게, 청나라의 한족 억압 정책을 그대로 계승했고 남정을 지속하기 위해 백성들을 쥐어짠게 이채롭다.
  • 청 정종 아이신기오로 낙명
요토의 장남으로 재위한지 8년만에 사망하여 아들 나락혼이 제위를 물려받는다. 전쟁으로 인해 소모된 국력을 회복하기 위해 내실을 다지는 정책을 세웠고 아들 나락혼이 23년간 재위하며 그 정책을 이어받아 청을 안정시켰다.
다이샨과 후계자 자리를 놓고 경쟁하지 않고 건주과 입관할 때까지는 기다린 듯 하다. 명이 멸망하고 건주가 화북과 몽골을 모두 장악한 후 형 다이샨에게 몽골을 분할받아 몽골의 칸으로 통치한다. 천주교 신자였기 때문에 공식적으론 희연옹주 외의 첩은 없었지만 비공식적 정부와 사생아는 여럿 두었다고 한다. 아들 호오거가 대칸이 된 후 성종으로 추존된다. 작중 '성종'이라는 묘호의 한자 표기는 나온 적이 없지만 시법상 成 또는 聖 둘 중 하나일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중에서도 시법상 더 높은 묘호인 聖자일 확률이 일단 높은것으로 보인다. 시법의 등급상 태(太)에 버금가는 한자가 바로 聖이기 때문.
  • 후금 무종 아이신기오로 호오거
홍타이지와 희연옹주 사이의 아들. 홍타이지 사후 몽골 지역을 물려받고 1648년 국호를 후금으로 하여 대칸을 칭한다.
  • 후금 현종 아이신기오로 석새
호오거의 아들, 육촌인 청 황제 낙명과 서로의 딸을 태자비로 들이는 혼인동맹을 맺었다.
  • 희정옹주 이혜원, 희연옹주 이혜연
1632년 조카의 칭제건원 시점까지 생존하고 있었다.
  • 도쿠가와 이에미츠[66]
차차와 함께 형 도쿠가와 나가마루가 쫓겨나 승려가 된 후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후계자가 되었고 아버지의 뒤를 이어 에도 막부 3대 정이대장군이 된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친손자이자 노부나가의 외손자라는 최고의 정통성을 무기로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 1644년 대한이 불안한 중원 정세와 가뭄으로 개입할 여력이 없는 틈을 타서 진서대장군부를 압박해 귀부하게 하여 대한 직할령을 제외한 일본 전역을 통일한다. 이후 천주교도를 박해하여 대학살을 벌이고 천주교도 다이묘들의 영지를 뺏었으며 규슈의 개항장들을 폐쇄하고 오사카를 개항하여 유럽과 교역한다.
  • 아소 고레유키
진서대장군 아소 고레미츠의 아들. 아버지의 뒤를 이어 일본국왕이자 진서대장군이 된다. 고레유키 사후 그의 아들이 진서대장군부를 스스로 폐위한다.
마포 대성당 공사 노역 중 벽돌이 쌓인 지게를 메고 올라가다 발을 헛디뎌 공사장에 떨어져 죽고 만다.
을미동정 이후로도 꾸준히 무역업에 힘을 쏟아 자체적으로 갈레온을 건조하여 해외 무역에 나선다. 다테 가문의 첫 갈레온이 대미주 조선 식민지에 나타났을때 조선인들은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도쿠가와 막부의 눈치를 보느라 무역선 소유권은 막부에 바쳤지만 실질적인 운영은 다테 가문이 독점하고 있다.
선조가 칭제건원을 하자 축하선물로 코끼리를 선물했다고 언급되었다.
  • 바셴카의 아버지
보로네시 지방의 보야르. 모스크바에 14살의 고명딸 바셴카를 데려갔다가 34살의 견서사 말단 서기 이형준이 바셴카와 동침 중인 것을 목격해버린다. 이형준에게 바셴카를 정처로 삼고 자식들을 세례하라고 요구했으나 이형준이 대답하지 않자 4대 두들겨 패고 쫓아낸다. 이후 1676년 사망한다.

7.1. 성친왕 이현(빙의 전)


주인공 이재석이 3부에서 빙의한 인물. 1665년생으로 3부 시작인 1682년 시점에 만 17세. 선황 열조 연가제의 적차자이자 숙조 건복제의 동복동생, 충무대왕 이순신의 외현손으로 '성친왕'이며 대유주에서는 대공으로 대우받고 있다. 3부 시작 시점에는 대한을 떠난 지 2년째로 15살 때 견서사 정사라는 명목으로 대한을 떠나서 서반아, 법왕청 등을 방문한 뒤 불랑국에 막 도착한 상태, 정확히는 도착 후 폴수국왕 얀 3세 소비에스키의 사생아 올렝카를 꼬셔서 동침한 직후였다.
처음에는 나잇값 못하는 철부지 황자 정도인 줄 알았으나, 3부가 진행되면서 드러난 바로는 양녕대군, 임해군의 재림이라 불릴 정도의 막장 황자였다.
성친왕이 만 17년의 인생동안 저지른 만행들은 아래와 같다. 그나마 나이가 어려서 그런지 살인, 강간은 안 했다고 한다.
  • 10살 때부터 궁궐 밖으로 나가 낄 곳 안 낄 곳 구분 못하고 난동을 부려 많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끼침.
  • 서열이 낮더라도 엄연히 형이자 연장자인 3살, 12살 위의 이복형들에게 반말을 하며 막 대함.
  • 이형준, 정호찬을 비롯해 누구에게나 거짓말을 밥 먹듯이 했음.[67]
  • 17살이나 되었는데 겨우 동몽선습을 떼었을 뿐 소학은 손도 대지 않았을 정도로 공부와 담을 쌓음[68]
  • 사냥을 연습한답시고 황실 동물원인 응방에 활을 가져가서 전시 중이던 사슴과 여우들에게 화살 수십 발을 쏴서 고통스럽게 죽임[69]
  • 물 길으러 온 아낙네들이 머리에 인 항아리를 활로 쏴서 깨뜨림.성친왕의 활 솜씨가 그렇게 좋은 평을 듣지 못했던거 보면 이건 정말 천운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70]
  • 견서사 추방 소식에 아내와 동침은 커녕 대화도 안하고 한달 내내 술독에만 절어 삼. 성친왕이 후사도 못 남기고 출국한 것에 재석은 예왕이 수작을 부렸나 생각했는데 사실은 그냥 성친왕이 멘탈붕괴한 것이었다.
  • 2부에서 이항복이 바쳤던 3잔밖에 없는 베네치아 유리잔 하나를 깨버림.
이따위 식으로 사는데도 모후 이씨가 오냐오냐하며 감싸고돌아서 연가제 시절에는 어떤 처벌도 받지 않았다. 그러나 예전부터 성친왕의 만행에 분노해 단단히 벼르고 있던 형 건복제가 재위 2년 만에 형식적으로 강씨와 혼인만 시켜서[71] 견서사라는 명목으로 대유주로 영구 추방해버린다. 추방당한 뒤엔 실의에 빠져서 처음 만난 처자와 동침한 뒤 보석 한 알 던져주고 모른척하는 난봉질까지 시작했다. 본인은 몰랐으나 그 과정에서 사생아 디에고가 태어났으며, 어쩌면 사생아는 디에고 하나뿐이 아닐지도 모른다.
외모가 볼품없었던 2부의 경성군과 달리 키 175cm, 체중 72kg의 균형잡힌 몸에 얼굴도 잘생긴 편이다. 덕분에 올렝카를 비롯한 유주 처자들을 꼬실 수 있었고 남색가인 오를레앙 공작의 묘한 시선을 받기도 한다. 머리카락이 검은 것만 빼면 거의 유럽인처럼 생겼다고 하며 때문에 조선인 백인설을 낳거나 폴란드가 내세운 가짜 왕자라는 의심을 받기도 한다. 빙의 전에도 천방지축일 뿐이지 멍청하다는 평은 안 받았는데, 이는 예왕 측에서도 인정하고 있다.
1, 2부에서 재석에게 몸을 뺏긴 싸이코 살인마 암군 연산군, 원역사의 선조를 뛰어넘는 찌질이 유교 광신자 암군 경성군과 다르게 성친왕은 군주가 되진 않았지만, 태황이 되었으면 저 둘보다 못하지 않은 막장 암군이 되었을 듯 하다. 하지만 임금이 된 다음에 몸을 뺏겨서 재석의 빙의 덕에 조선을 말아먹는 일을 피한 저 둘과 달리, 성친왕은 재석이 빙의하지 않았으면 태황은커녕 귀국조차 못하고 죽었을 가능성이 높다. 예왕이 심어둔 두 암살자가 성친왕을 죽이려 하고 있었으며 대유주에서 패악질을 계속 부리다가 외교적 문제를 일으켰다면[72] 참다 못한 건복제가 사약을 내릴 수도 있었다. 죽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예왕의 바람대로 양매창에 걸렸다면 거세당해 건복제의 후계자 경쟁에서 언급조차 되지 않았을 것이다.
3부가 시작되며 재석이 빙의하고 개과천선한지 오래 지났음에도 성친왕이던 시절을 기억하는 이들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받거나 성친왕의 만행에 피해를 본 이들에게 재석이 대신 사과를 하는 등 그 악명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아이러니하게도 성친왕의 예전 성품만 생각하던 예왕 일파가 오판을 하고 자멸을 하는 등 정치적으로 이득이 되기도 한다. 재석이 태황에 즉위한 후에야 간신히 성친왕 시절 행적이 잊혀지는 듯 싶었으나, 성친왕이 싸질러둔 사생아 디에고가 대한 땅에 나타나며 다시 한 번 재석이 뒷목을 잡게 만든다.

8. 3부



[1] 1부 1장 5화에 이재석이라고 풀네임이 처음 언급된다. 상희도 본명을 알지만 더 이상 연산군이 아닌 2부 이후에도 연산이라고 부른다. 이는 '재석'이란 이름은 이 세상에 동명이인이 있을 수도 있지만 연산군이라는 명칭는 이 세상에서 무종이라는 묘호를 받은 이융이 반정으로 폐위된 뒤 붙은 군호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주인공과 상희 단 둘만 아는 이름이기 때문이다. 독자들에게는 1부 진행중에는 '빙의된 연산'이라는 뜻으로 빙산이라고 불렸으나 연산군이 아니게 된 2부부터는 한동안 빙성군(빙의 경성군)이라고 부르다가 주로 재석이(변형으로 재서기, 재슥이, 재스기 등이 있다.)라고 부르는 것으로 정착되었다.[2] 1부 1장 5화에 이재석이라고 풀네임이 처음 언급된다. 상희도 본명을 알지만 더 이상 연산군이 아닌 2부 이후에도 연산이라고 부른다. 이는 '재석'이란 이름은 이 세상에 동명이인이 있을 수도 있지만 연산군이라는 명칭는 이 세상에서 무종이라는 묘호를 받은 이융이 반정으로 폐위된 뒤 붙은 군호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주인공과 상희 단 둘만 아는 이름이기 때문이다. 독자들에게는 1부 진행중에는 '빙의된 연산'이라는 뜻으로 빙산이라고 불렸으나 연산군이 아니게 된 2부부터는 한동안 빙성군(빙의 경성군)이라고 부르다가 주로 재석이(변형으로 재서기, 재슥이, 재스기 등이 있다.)라고 부르는 것으로 정착되었다.[3] 상희도 딱히 사명감을 가지고 한의대에 간 것이 아니라 재수를 뒷바라지 해 줄 수 없는 집안 사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한의대에 진학한 것이기 때문에 한의학의 한계를 잘 알고 있다.[4] 상희가 이 일을 언급하며 떠올리기도 싫다는 듯 질색하는 묘사가 나왔고, 상희가 현대에서 성 경험은 있지만 연애 경험은 없다고 언급해서 상희가 외국에서 지도교수에게 강간당했다는 추측이 있었으나, 작가가 직접 강간까지는 당하지 않았다고 언급했다.[5] 그동안 소원을 빌던 놈들은 다들 같잖은 소원만 빌어서 무시했지만 왕이 되겠다는 놈은 처음이었다고 한다. 상희는 천녀가 깃든 담당교수의 벼루를 부숴버렸기에 천녀가 '대체 어떤 놈이 벼루를 부쉈는지 한 번 보자'하고 소원을 들어줬고 '마침 방금 재밌는 소원을 빈 놈이 있는데 너도 같이 보내면 되겠네'하고 조선으로 보내버린다.[6] 타임슬립 대체역사물에서 항상 지적되는 몇 년이나 복습을 못 했으면서 어떻게 현대 지식들을 잊지 않느냐는 문제에 대한 해명. 단 현대에서 빙의하던 시점에 알던 지식에만 한정하며 조선으로 온 뒤의 기억들은 시간에 따라 정상적으로 잊는다. 또한 원래부터 부정확하게 알거나 잘못 알던 부분도 그대로 유지된다. 상희는 1부 시점에는 자기가 머릿 속으로 열심히 복습한 덕이라고 생각했으나 2부에선 천녀 말을 듣고 실망했다는 볼멘소리를 하기도 한다.[7] 이는 원래 할 줄 알던 언어라면 모두 해당되는 버프인 듯. 현대에 일본어를 할 줄 알던 상희는 중세 일본어까지 알아들을 수 있었다. 나중에 영국인과 접촉했을 때엔 영어도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8] 예전 작가의 언급으로 연산군과 경성군의 영혼은 삭제되었다고 말했으나, 2부 종료 시점 작중에서 천녀가 직접 밝힌 바로는 연산군과 경성군의 영혼은 극락에서 즐겁게 지내고 있다고 한다.[9] 일부러 당장 죽여도 미안하지 않을 암군이 나올 때마다 빙의시키는 것일 수도 있다.[10] 2부 엔딩에서 주인공이 진짜 기우제를 들어준 것이냐고 질문하자 그냥 비는 내릴 때가 되면 내리는 것이고 하계의 기우제 따위 들어줄만큼 한가하지 않다고 밝혔다.[11] 원래 폭군이어야 할 연산군이 너무 대단한 명군이니 하늘의 뜻을 어겼다는 이유로 뭔가 그 전부터 시름시름 앓아가는 전개였다면 대충 납득이라도 했겠으나, 갑자기 비명횡사를 해버렸으니...[12] 하계에 직접 개입하지 않는다는 천녀의 말대로면 종성순의 기분을 좀 더 신경쓰거나 호위라도 제대로 갖췄으면 그날 죽을 운명이 아니었다는 말이 된다. [13] 여담으로, 천녀에 대한 이야기를 이덕형에게 전해 들은 이 세계에서는 신부가 된 광해군은 천녀를 천사일 것이라고 생각한다.[14] 현대인처럼 합리적이고 회의적인 성격의 건복제는 이를 아우가 자신을 편하게 해주게 하기 위한 재담으로 받아들였다.[15] 진성대군이 이황 대신 왕위에 올랐다면, 눈이 돌아간 무종의 총신들과 군부에 의해 어머니 자순대비와 함께 초고속으로 역적으로 몰려 능지형으로 생을 마감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왕위를 양보한건 자순대비가 내란을 막고자 적당히 배려한것[A] A B C D E F 작중 묘사 없음. 원 역사 인종에 대응해서 추정.[B] A B C 황제 추존과 동시에 폐지 추정.[16] 원 역사 인종의 능호.[17] 연산군의 실제 아들인 이황(폐세자)와는 이름은 같지만 출생 연도가 다르고 행적도 다르기에 실존인물이 아닌 동명의 가상인물로 봐야한다. 유전적으로 동일할지는 모르겠지만...[18] 2, 3부 사이에 선조 이연이 칭제건원하면서 4대조인 인종 이황을 태황으로 추존하며 묘호를 '조'로 올림.[19] 하지만 2부 시점에서 이미 군에서 쓰던 활강조총이 유출된 뒤 복제되어 민간에 활강조총이 10만 정이나 돌아다니고 있던 걸 생각하면 강선조총을 76년간 계속 사용했을 경우 실제로 강선이 명이나 일본으로 유출되었을 가능성도 상당하다. 그리고 제조기술은 실전되지 않은 걸 보면 정말로 기밀유출 방지가 목적이고, 중요성은 잘 알고 있었으니 만약에 통치 중 큰 전쟁이 있었다면 다시 사용했을 것 같다. 거기다 당시는 활강조총만으로도 여진, 일본보다 조선의 군사력이 우위에 총기제조기술도 명보다 한수 앞서있는 상태였다. 북방개척을 계속하고 남한산성을 완공하는 등 군사력 발전을 게을리 한 인물은 아니다.[20] 조선은 실제로 애기살의 유출을 우려해 국경에서의 사용도 함부로 하지 않았다.[21] 자신이 원역사대로 요절할 줄 몰랐던 주인공은 죽기 전에 이황에게 자신이 미래인이라는 것과 미래 정보들을 알려줄 생각을 했었다.[22] 1부에서 주인공이 조광조는 이제 김굉필 제자가 될 수 없을 텐데 뭘 하고 있을까 생각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진짜 제자가 되어버렸다. 2부에서 주인공은 내가 알았으면 참수했을 거라 생각하지만 인종은 품계를 두 단계 깎는 약한 처벌을 한다.[23] 아이러니한 건 원 역사에서 이 때 이장곤과 조광조는 사이가 좋았다. 이 세계에서는 본인을 좋게 대우해주고 사랑하는 아내도 만나게 해 준 선왕의 업적 대다수를 비난, 축소하려했을 조광조는 이장곤에게 친구는커녕 최악의 정적이었을 것이다. 이는 남곤 역시 마찬가지.[24] 사실 무묘는 현재 왕의 부왕이 만들고, 현재 왕의 처조부인 유순정이 배향된 곳이다. 그걸 폐지하자고 주장한 것은 보기에 따라선 제대로 왕의 심기를 건드려 이 세계에서도 기묘사화가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이다. 인종이 정말 인자한 왕이라서 부여주에서 야인 자제를 교육하는 정도로 끝난 것이다.[25] 실제 역사에서도 이런 일이 있었다.[C] A B C D E F G 작중 묘사 없음. 원 역사 명종에 대응해서 추정.[D] A B C D E F G 작중 묘사 없음. 추정.[26] 원 역사 명종의 능호.[27] 2, 3부 사이에 선조 이연이 칭제건원하면서 3대조인 명종 이환을 태황으로 추존하며 묘호를 '조'로 올림.[28] 다만 윤원형은 정난정과 짜고 조강지처 김씨를 죽인 적이 있는데, 바뀐 역사에서도 그 악행을 저질렀다면 용서 받지 못하고 처벌 받았을 것이다. 무종 시절 초반에 전 초계군수 유인홍의 첩이 본처의 딸을 죽인 일이 있는데, 이를 은폐한 유인홍과 첩이 모두 처벌당했기 때문(실제 역사에서도 연산군 때 벌어진 실제 사건이다).[29] 가상인물로 작가는 이 인물을 직접 등장시킬 생각이 없다 하며 작중 고니시도 스승이 누구인지 끝까지 밝히지 않는다.[30] 원역사의 '단경왕후 신씨'[31] 원역사의 성리학적인 조선에서도 뛰어난 명군들은 분명 존재했다. 당장, 한국사 최고의 명군인 세종대왕만 해도 당대 최고의 성리학자였다.[32] 만약 주인공이 빙의하지 않았더라면, 군사에 별로 관심을 두지 않은 경성군 특성상 니탕개의 난과 무자호란으로 부여주와 연해주 통솔력을 잃어버리고 명나라에 반환해야 했을 수도 있다. 그러면 조선의 대외 이미지는 추락할 수 밖에 없고, 유럽의 국가들도 조선에 관심을 갖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경성군을 비롯한 당대의 인물들은 금위사도 축소된 형편이라 일본의 침략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보다 더 유능한 오다 노부나가에 의해 일어난 임진왜란을 아득히 능가하는 규모의 전쟁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경성군은 선조처럼 피란을 갔거나 조선은 정말로 멸망했을 수도 있다.[33] 위에서도 설명했듯이 무종의 증손자로 입적되어서 왕이 된 것이고, 무종 쪽의 종통을 계승했으니 경성군의 법적 조상은 진성대군이 아니라 무종이 된다. 당장 작중에서도 무종의 종통을 계승해서 왕이 되어놓고 정작 선대의 유산만 누리려 하고 무종을 부정하는 미친 짓거리를 한다며 비판한다.[34] 그나마 경성군이 선조보다 나은 점은 세자를 포함한 자녀들이 정상인에 개념인들이란 점 정도인데, 이것도 다지의 외손녀인 중전을 비롯해 모친 쪽 혈통을 강하게 물려받은 덕이라고 작가가 밝힌 바 있다.[35] 스페인과 비교해 설령 이웃국가여도 전투력은 약간 떨어질지 몰라도 전쟁에선 이길 수 있는 수준이고, 중국과 비교해서 정복은 무리일지라도 방어전은 충분히 해내고도 남는 수준이라고 자신할만한 수준이다. 스페인의 경우 창병들의 전투력이 약해서 전투력이 약간 떨어지는 것이지 화력과 기병은 스페인보다 우월하므로 오히려 스페인보다 낫다고 할 수 있으며 떨어지는 창병들의 능력도 말기에는 임꺽정의 검술에서 비롯된 신형검술을 도입함으로서 모든 병사들이 근접전에 돌입 할 수 있게 함으로서 커버를 넘어 우위를 차지 할 수 있게 해준다. 즉, 중국과 오스만을 제외하면 당대에 군사적으로 열세에 처할 만한 나라가 없다.[36] 단순히 정치만 잘한 게 아니라 기술 개발에도 뛰어남을 보여줬다. 기중기, 지뢰, 열기구를 개발하고 거북선과 유귀차 석조다리의 설계까지 스스로 해냈다.[37] 실존 그림 한복 입은 남자는 네덜란드를 방문한 흥포라는 명나라 상인이 한푸를 입은 모습을 루벤스가 그린 그림을 현대에 와서 조선 한복으로 오해하여 그런 제목이 붙은 것인데, 작중의 한복 입은 남자는 진짜로 한복 입은 남자 그림이 되었다.[38] 재석 빙의 시점인 1582년 이전.[39] 2, 3부 사이에 선조 이연이 칭제건원하면서 부왕인 경종 이성을 태황으로 추존하며 묘호를 '조'로 올림.[40] 장조 시절에 이미 당장 확장할만한 곳은 다 차지한 상황이고, 지나치게 빠른 확장을 했기에 경조 시기는 추가 확장보다는 새로 확보한 영토의 내실을 다지는 것에 주력할 시기였다. 장조에게서 물려받은 아시아 역사상 최강의 군대를 손에 쥐고 있었기에 무리한 영토확장 욕심을 냈을 법도 한데 그걸 참고 내치에 집중했다는 것이 오히려 대단한 부분이다.[41] 의도한 복선인지는 알 수 없으나, 2부에서 만력제가 진안군에게 '왕이 되보지 않겠냐'는 망언을 해서 진안군의 입장이 곤란해진 적이 있는데 결국 진안군은 진짜로 왕이 되었다.[42] 이 때문에 독자들 사이에서는 수학을 가르쳐 이과생들의 원수가 될 모친 상빈이씨(=상희), 국어 문학 영역에서 문과생들의 원수가 될 정철과 함께 수험생들의 원수가 될 거 같다는 드립이 많다(...)[43] 원역사에서는 1623년 인조반정으로 처형당했는데 인조는 커녕 광해군조차 왕이 되지 못한 세상이라서 수명이 연장되었다.[44] 이 부하들 중 하나는 대유주에서 병사했다고 알려졌는데 실은 전사한 것이었거나 이괄의 성품을 생각해보면 용병일이나 약탈행위에 반대하다가 이괄에게 살해당했을 가능성도 높다.[45] 1605년 이전.[46] 신라 법흥왕~진흥왕 재위 초반의 연호[47] 신라의 연호다. 작중 연호들은 삼국시대 연호에서 따온다. 연가제는 고구려, 건복제는 신라.[48] 물론 그중 몇개는 장조의 유훈을 따른 거지만 그렇지 않은 것들도 꽤 된다.[49] 그런데 태조의 측근 이지란이 별다른 이유 언급도 없이 무종이 처음 무묘를 만들었을 때 배향되지 않은 것은 매우 어색하다. 작가가 실수로 넣지 않았다가 뒤늦게 이지란을 떠올린 듯 하다. 아니면 이미 종묘에 태조의 배향공신으로 배향되어 있어 무묘 초기에는 중복해서 배향하지 않았다고 설정했을 수도 있다.[50] 김세룡이 예왕파에 붙으면서 시기만 미뤄졌을 뿐 결국 가문이 몰살당할 뻔 했지만, 김세룡이 빠른 판단으로 예왕을 손절하면서 가문은 살아남고 오히려 평난공신이 되었다.[51] 고구려의 연호. 안원왕 때 쓰인 연호로 추정되고 있다.[52] 의사이자 과학자로써 뛰어난 업적을 남겼고, 의원들의 연합세력과 병균학 토론을 벌이는 등 이야깃거리가 많은 삶이어서 후대에 연극이나 책으로 많이 이야기가 전해질만한 인물이다. 이 세계에선 동의보감이 유럽에도 전파되어 허준의 명성이 실제보다 국제적으로도 알려졌지만, 김인황은 병리학의 시조격으로 훗날 그의 이름을 딴 의대나 상이 만들어져도 이상할 게 없어 허준보다 더 높은 위상을 차지할만하다.[53] 정황상 주상순 일당에게 독살당한 것이 거의 확실하다.[54] 만약 조선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면 조선 입장에서 엄청난 민폐가 되었을 것이다. 자신에게 뇌물이 바쳐지는 것을 막았다고 웅정필을 처형시킬 정도이니 조선을 상대로도 뇌물을 요구하는 건 기본에 황제라는 신분을 앞세워 오만방자하게 굴었을 것이고, 대국의 황제라는 명분 때문에 조선 사람들은 절대로 함부로 대하지 못했을 것이다. 고영상군한테 잡혀 죽은 것이 조선에게는 다행인 셈.[55] 어지간해서는 가상인물 대신 실존인물을 활약시키는 슈타인호프 작가가 이름이 널리 알려진 이자성이 아닌 가상인물을 등장시킨 이유는, 후송이 처한 조건이 너무 열악하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방어하기도 좋지 않은 강남 땅을 기반으로 했고 주변에 우호국이 단 하나도 없는 사면초가의 상황에서 나라를 세우고, 지키고, 반격까지 하려면 주원장 이상의 능력자가 필요한데, 역사를 통해 그 능력이 어떤 수준인지 알려져있는 이자성을 시조로 내세워서는 답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56] 작가의 설정은 알 수 없지만 실제 역사에서 송 공종의 유일한 아들인 조완보는 출가하여 승려가 된 후 사사되었고 송 공종의 직계 후손은 단절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므로 조승복이 진짜 송 공종의 후손은 아닐 가능성이 높다.[57] 원역사에서는 1721년에 대만에서 자신이 남명 영력제의 후손이라며 농민반란을 일으켰던 주일귀의 사례가 있다. 물론 결과는 실패해 다음해에 사망. [58] 시법에 맞추어서 올바르게 묘호를 받았다면 망해버린 왕조를 새로 되살려서 다시 세웠다는 의미로 세조 또는 송나라에서 사용된 적 없으면서도 건국 시조에게 주로 추존되던 고조가 가장 적절했다.[59] 암군이라는 묘사는 없으니 靈宗은 아닐 것이다.[60] 대한에서는 화북을 영지로 내린 것은 후송이 절대 중원일통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상징으로 보고 있다.[61] 원역사에서 이자성은 본래 고영상의 부관이었다가 고영상의 세력을 물려받는다.[62] 땔감으로 만력제의 무덤인 장제전을 허물어 나온 목재를 썼다.[63] 수성이 아닌 야전을 택한 이유는 주상순을 죽여서 사기가 최고조에 달한 상황에서 전투를 미루면 사기가 감소한다는 점, 민심을 얻기 위해 북경의 창고를 개방해서 농성을 벌일 군량이 없었다는 점, 건주군에 비해 수적으로 우세해서 질적인 차이를 극복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는 점 등이다.[64] 강남 없이 화북의 인구를 먹여살릴 방법이 없기에 의도적으로 인구수를 줄이기 위해 벌인 짓으로 추정된다.[65] 사실 배우지 못했다기 보다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현실 역사나 작중이나 한인들은 만주족보다 인구수가 훨씬 많고, 오랜 역사와 문화를 지녔으니 아무리 민족 정체성을 지키려고 노력해도 한족에게 휩쓸려갈 수 밖에 없고, 이는 실제 역사에서도 증명되었다. 어차피 배후를 지켜줄 형제국 후금과, 큰형님 나라 조선이 있으니 한족들을 억압하는 정책을 채택해도 버틸 수 있을거란 계산으로 이런 정책을 택했을 수도 있다.[66] 원역사의 도쿠가와 이에미츠와는 다른 인물이다.[67] 그러나 의외로 친형인 건복제에게는 단 한 번도 거짓말을 한 적이 없다고 한다. 때문에 건복제는 재석이 빙의한 성친왕이 개과천선했지만 자신에게도 숨기는 사실이 생겼다는 것을 알게 되자 통치자에 어울리는 성품이 되었다고 여기면서도 안타까워한다.[68] 그러나 이렇게 무식한 이미지를 쌓아놓은 덕에(?) 재석이 2, 3부 사이의 74년간의 역사에 대해 아무리 모르고 헛소리를 해도 의심받지 않았다.[69] 원역사의 연산군이 이와 비슷한 짓거리를 했었다. 어린 시절 잔혹한 동물 학대를 하는 것은 많은 연쇄살인범에게서 나타나는 전조 증상이다.[70] 항아리를 깰 정도면 촉이 달린 화살일 텐데 이게 빗나가 사람에게 맞았다면 태후가 감싸고 말고 할 게 없다. 사람 상대로 이 짓을 했으니 30대가 된 지금도 사람들이 진절머리 내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71] 건복제는 성친왕이 늙어 죽을 때까지 귀국을 허락할 생각이 없었다. 공식적으로 죄를 짓지도 않은 동생을 타향에서 노총각으로 늙어죽게 한다면 자신이 욕을 먹을 것이므로 명목상으로만 혼인시킨 것이다. 성친왕이 외국에서 죽는다면 적당한 아무 종친이나 하나 양자로 들여서 제사는 지낼 수 있도록.[72] 실제로 재석의 빙의가 단 하루만 늦었어도 일어날 뻔 했다. 올렝카가 성친왕에게 먹버를 당했다면 사생아지만 올렝카를 아끼던 얀 3세 소비에스키가 자기 딸의 첫 상대인데 큰 상처를 준 성친왕에게 앙심을 품고 대한에게 악감정을 품었을 것이다. 게다가 스페인에서도 명장 빌라다리아스 후작의 딸을 건드리고 나몰라라 해서 사생아 디에고가 생겼는데 연락도 못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