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어유해
[image]
蒙語類解
조선 영조 44년, 1768년에 이억성(李億成)이 개정하여 간행한 몽골어 단어 사전. 총 2권 2책이며, 서울대학교 규장각, 일본 도쿄대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내몽골의 흥성을 걱정하며 몽골어 교육에 매진해왔다. 이는 역사적으로 이전 왕조였던 고려가 몽골족 원나라에게 여몽전쟁패배로 나라를 거의 내주다시피 한 것에 대한 방어기제였다.
사실 조선 초중기 내몽골에서는 이 지역으로 밀려난 북원도 부이르 호 전투에서 카라코룸이 털리면서 멸망 테크를 탔고, 이후 차하르 칸국으로 쪼글어들어 있었으나 외몽골의 알타이 일대에서 기원해 외몽골을 평정한 오이라트가 문제였다. 오이라트의 에센 타이시는 명나라를 상대로 대승을 거두는 토목의 변을 일으키기도 했고, 이후 칸을 자칭한 에센 타이시가 내몽골인들에 의해 살해당했으나, 그 다음에는 차하르 칸국에서 다시금 다얀 칸이라는 인물이 등장해 '''대원제국의 황제'''를 선포하고, 그의 뒤를 이은 알탄 칸은 경술의 변을 일으켜 산시 성과 허베이 성 북부 일대를 수복하고 베이징까지 포위했으며 이렇게 커지는 몽골 세력을 조선이 신경쓸수 밖에 없었다.
물론 조선 중기는 잘 알다시피 함경도 지방에 맞닿은 여진족, 그리고 영호남 지역을 약탈하던 왜구가 더 큰 문제라 몽골은 명나라에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명이 요동을 확실히 장악한지라 내몽골에서 조선을 직접 위협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임진왜란으로 전 국토가 잿더미가 되면서 몽골 문제는 자연스레 잊혔다. 그런데 명나라에서 이여송을 따라 온 북병들은 대게 내몽골 부족들인 차하르나 투메드, 우랑카이, 칼간 등으로 구성된 몽고병으로 평양성 전투 이후 이 명군 소속 몽고병들이 성을 약탈하고 부녀자를 희롱하며 저항할 힘이 없던 왜군 포로들을 마구잡이로 학살하기도 했다. 성을 전리품으로 여긴 것이다. 그 외에 명나라 북병 소속 몽고병들의 행패는 왜군 못지않게 극심했기에, 평안도 사람들은 '''달자(몽골족)들이 왜구들보다 무섭다!!!'''며 질색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몽골인의 친척 뻘 민족 퉁구스인들이 세운 청나라가 들어서고, 청나라가 내몽골을 장악해 혼인 동맹으로 만주-몽골을 일체화시켜 사실 상 몽골이 부활하자 몽골에 대한 걱정은 더욱 커져갔다. 더구나 병자호란 때는 내몽골 팔기군인 몽고병들이 대규모로 쳐들어와 약탈과 도륙을 감행했다. [1] . 특히 몽고병과 야인여진 청병의 약탈은 아주 계산된 약탈로 항복을 받아내고 귀환 시 일부러 피해가 없던 함경도로 돌아가서 함경도 각 고을을 무자비하게 약탈해 사람들이 울부짖기도 했고, 많은 사람들이 이 몽고병에 의해 심양의 노예시장에 끌려가 내몽골 왕공이나 만주 귀족들 그리고 한족 영주들의 노예가 되었다.
병자호란이 끝이 난 그 다음날인 인조 15년 즉 1637년 2월 1일자 기사를 보면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이들 몽골인들은 청나라 팔기군의 일원인 내몽골 팔기군으로 당시 조선을 침공한 병사들이었다. 전술한 것처럼 팔기군은 요동 출신 한족들이 한병, 여진족들이 청병, 내몽골 각 부족들이 몽고병을 구성했고 이 중 주력은 기병이 막강한 내몽골 팔기였고 이들은 성을 전리품으로 여겨 약탈을 당연시하곤 했다. 약탈피해가 없을 수 없었다.
이처럼 퉁구스 즉 여진족/만주족들과 몽골인을 비롯한 몽골계 제족들은 뚜렷한 구분이 없이 서로 형제처럼 지냈던 것이었다. 거란의 후손으로 알려진 몽골계 민족인 다우르족 등도 명대에는 북원에 복속되어 몽골을 도울 때도 있었고, 훗날 청대에는 팔기군에 들어갔었다.
퉁구스 종족 자체가 원래 튀르크와 함께 인종적으로서는 몽골계에 해당되는 종족으로 튀르크는 서쪽 알타이, 퉁구스는 북부 시베리아 일대에서 기원한 차이가 있었다. 그들 중 연해주와 함경도, 만주 북동부에 살던 종족들이 한반도 주민들이 부르던 소위 말갈이나 여진족, 만주족이었다. 퉁구스족 중 몽골 지역과 가까웠던 곳에서는 일부 퉁구스 제족들이 몽골계 민족들과 같이 지내면서 몽골계에 동화되어 동호, 선비족, 오환족, 거란이 되었고 이들은 다우르족을 제외하면, 대부분 몽골에 동화되었고 일부는 여진족에 동화되어 금, 동하 멸망 이후의 후기 여진족에 흡수되었다. 그리고 튀르크는 우리가 잘 아는 돌궐, 위구르, 타타르, 케레이트, 나이만 등 몽골 고원의 각 세력들이었으며 나중에 칭기즈 칸에 의해 죄다 '''몽골 제국'''으로 싸잡혀 묶이게 되고, 서돌궐에 복속되 있던 투르크멘 부족은 간쑤 성과 신강에 남은 살라르족을 제외하고는 모두 서진해서 셀주크 제국, 오스만 제국을 세우며 오늘날 터키로, 몽골 제국의 일원이 되어 서역 원정 등에 동원되어 신강 같은 중앙아시아에 자리잡은 각 튀르크 부족들은 오늘 날 스탄자 돌림나라인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키르키스스탄, 투르크메니스탄과 캅카스 동부 카스피 해 호수의 아제르바이잔, 그리고 러시아의 타타르스탄, 우크라이나 크림 칸국 등이 되었다.[3]
즉 몽골족이 융성하여 원나라를 세웠을땐 당시 고려의 북방에 있던 여진족이 거란족처럼 몽골족에 협조하여 고려를 침공했었고, 이번에는 여진족이 융성하여 청나라를 세우자 몽골족이 협조하여 혼인동맹으로 일체화되기까지 하고 같이 조선을 침공하였던 것이다. 애초 만주족 자체가 대부분의 건주여진+ 과반수 해서여진 및 일부 야인여진 부족, 내몽골 동부의 우랑카이족이 서로 융합되어 형성된 종족이었으며 이들 다양한 부족들의 종주권을 건주여진이 갖게된 일종의 부족연맹이었고, 여기에 합류하지 않은 해서여진[4] 일부가 시버족으로, 야인여진 대부분은 에벤키나 나나이족, 우데게족, 오로촌족 등으로 갈려 나온 것이었다.
이처럼 몽골족과 만주족 그리고 그들의 전신인 여진족은 서로 국경의 경계가 없었고 한쪽에서 들고 일어나면 다른 한쪽에서 협조를 하여 같이 들고 일어나는 식이었다.
몽골족과 여진족은 비록 문화와 민족은 달랐어도 국가적으로는 서로 말타고 오고가는 친족 관계의 민족들이었던 것이다. 다만 오이라트나 내몽골은 좀더 조선에서 떨어져 있었고[5] 여진족은 바로 조선 인근인 길림이나 연해주에서 국경선을 맞대고 있었던 민족이었을 뿐이다.
더구나 상국 청나라의 외척이 바로 이 내몽골 보르지기트 씨족인 차하르 세력이었다. 이들은 청 황실의 일원으로서 위세가 대단했으며 병자호란때 지휘관들 상당수도 이 차하르 인들이었다.
이런 관계로 조선은 청나라의 주류인 만주족만큼이나 왕공족이자 황실 외척인 몽골족도 무시를 할 수가 없었다. 더구나 건륭제 때는 준가르를 멸망시켜 외몽골 할하 부족들까지 조공국 형태로 영향력 아래 두었다.
영조 때 청나라가 준가르를 갈아 엎어버리고, 이때 준가르 정벌 주역이었던 내몽골 왕공들도 기세가 올라가 몽골인들이 다시한번 기세를 떨쳤다. 게다가 전술한 것처럼 내몽골 왕공들의 경우 황실 외척으로서 청 황제는 실제 혈통상으로도 모계로 보르지기트 혈통을 잇고, 이를 근거로 유목세계의 '''대칸'''을 자처했었다. 이러한 청을 등에 업은 몽골족의 발흥은 불과 얼마 전 호란을 두 차례나 겪은 조선으로선 위협적인 일이었다. 더군다나 청나라 시대 몽골어는 이미 원나라 때와 크게 달라져 있어서 고려시대 교재로 몽골어를 배운 조선의 역관들과 제대로 말이 통하지 않아 조선인들은 몽골인과 한문으로 필담을 하거나, 차라리 만주어를 익혀 쓰는 실정이었다.[6]
1737년 5월 14일에는 좌의정 김재로가 상소문으로 몽골족의 발흥과 관련 역관들의 몽골어 구사력이 떨어진다는 것을 지적하였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물론 영조 및 정조 시대에는 단순히 언어만 익힌 게 아니라 실제로도 북방을 방비할 준비를 하여 조총의 사거리를 1000보 내로 늘린 천보총이 영조 때 개발되기도 하여 몽골족 및 만주족의 기마궁수와 일본의 조총에 모두 대응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리고 네덜란드인 벨테브레가 소개한 유럽 캘버린 대포인 홍이포도 곳곳에 이미 보급한 상태였다.
이렇게 북방에 신경쓰며 몽골어 및 만주어를 익히는 노력은 청일전쟁으로 청이 약체화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내용 부분은 네이버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사전을 참고하였습니다.
정확한 편찬 연대는 불분명하나 기록상으로 1768년에 이억성(李億成)이 개정하여 간행하였다고 한다. 같은 외국어 단어 암기책이었던 역어유해(譯語類解), 동문유해(同文類解), 왜어유해와 비슷한 시기에 편찬된 것으로 보고 있다.
크게 상권, 하권, 보편, 어록해로 구성되어 있다. 상권에 「천문(天文)」·「시령(時令)」·「지리(地理)」등 27문(門) 1,916항(項), 하권에 「전농(田農)」·「미곡(米穀)」·「채소(菜蔬)」 등 27문 1,926항, 보편에 「천문보(天文補)」·「시령보(時令補)」 등 48문 1,475항이 실려 있어 도합 5,317항이 수록되어 있다.
몽어노걸대, 첩해몽어와 함께 몽학삼서(蒙學三書)로 꼽히며, 한자, 몽골어, 한국어가 같이 실려 있어 몽골어뿐 아니라 국어와 중국어를 연구하는 데도 중요한 자료이다.
1. 개요
蒙語類解
조선 영조 44년, 1768년에 이억성(李億成)이 개정하여 간행한 몽골어 단어 사전. 총 2권 2책이며, 서울대학교 규장각, 일본 도쿄대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2. 편찬 배경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내몽골의 흥성을 걱정하며 몽골어 교육에 매진해왔다. 이는 역사적으로 이전 왕조였던 고려가 몽골족 원나라에게 여몽전쟁패배로 나라를 거의 내주다시피 한 것에 대한 방어기제였다.
사실 조선 초중기 내몽골에서는 이 지역으로 밀려난 북원도 부이르 호 전투에서 카라코룸이 털리면서 멸망 테크를 탔고, 이후 차하르 칸국으로 쪼글어들어 있었으나 외몽골의 알타이 일대에서 기원해 외몽골을 평정한 오이라트가 문제였다. 오이라트의 에센 타이시는 명나라를 상대로 대승을 거두는 토목의 변을 일으키기도 했고, 이후 칸을 자칭한 에센 타이시가 내몽골인들에 의해 살해당했으나, 그 다음에는 차하르 칸국에서 다시금 다얀 칸이라는 인물이 등장해 '''대원제국의 황제'''를 선포하고, 그의 뒤를 이은 알탄 칸은 경술의 변을 일으켜 산시 성과 허베이 성 북부 일대를 수복하고 베이징까지 포위했으며 이렇게 커지는 몽골 세력을 조선이 신경쓸수 밖에 없었다.
물론 조선 중기는 잘 알다시피 함경도 지방에 맞닿은 여진족, 그리고 영호남 지역을 약탈하던 왜구가 더 큰 문제라 몽골은 명나라에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명이 요동을 확실히 장악한지라 내몽골에서 조선을 직접 위협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임진왜란으로 전 국토가 잿더미가 되면서 몽골 문제는 자연스레 잊혔다. 그런데 명나라에서 이여송을 따라 온 북병들은 대게 내몽골 부족들인 차하르나 투메드, 우랑카이, 칼간 등으로 구성된 몽고병으로 평양성 전투 이후 이 명군 소속 몽고병들이 성을 약탈하고 부녀자를 희롱하며 저항할 힘이 없던 왜군 포로들을 마구잡이로 학살하기도 했다. 성을 전리품으로 여긴 것이다. 그 외에 명나라 북병 소속 몽고병들의 행패는 왜군 못지않게 극심했기에, 평안도 사람들은 '''달자(몽골족)들이 왜구들보다 무섭다!!!'''며 질색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몽골인의 친척 뻘 민족 퉁구스인들이 세운 청나라가 들어서고, 청나라가 내몽골을 장악해 혼인 동맹으로 만주-몽골을 일체화시켜 사실 상 몽골이 부활하자 몽골에 대한 걱정은 더욱 커져갔다. 더구나 병자호란 때는 내몽골 팔기군인 몽고병들이 대규모로 쳐들어와 약탈과 도륙을 감행했다. [1] . 특히 몽고병과 야인여진 청병의 약탈은 아주 계산된 약탈로 항복을 받아내고 귀환 시 일부러 피해가 없던 함경도로 돌아가서 함경도 각 고을을 무자비하게 약탈해 사람들이 울부짖기도 했고, 많은 사람들이 이 몽고병에 의해 심양의 노예시장에 끌려가 내몽골 왕공이나 만주 귀족들 그리고 한족 영주들의 노예가 되었다.
병자호란이 끝이 난 그 다음날인 인조 15년 즉 1637년 2월 1일자 기사를 보면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이 때 내몽골 왕공들이 지휘하는 내몽골 팔기군, 즉 몽고병들의 경우 자기네 '''대칸'''인 청나라 태종 숭덕제의 약탈금지 명령조차 씹고 평안도와 함경도 일대에서 마구잡이 약탈과 도륙, 납치를 일삼아 남자는 모두 죽여버리고 여자들은 청으로 끌고 가곤 했다. 노예로 팔아버리기 위해서였다. 그러자 보다못한 용골대나 아이신기오로 도르곤 등 만주족 지휘관들이 진압부대를 보내 이들을 모두 성 밖으로 내쫓아 버려 약탈이 비로소 멎었다.[2]"몽골인들이 아직도 도성에 있으면서 사람을 해치고 물건을 약탈한다고 말하니 청나라의 장수 용골대는 즉시 부하로 하여금 몽골 군사들을 도성 밖으로 몰아내게 하였다."
이들 몽골인들은 청나라 팔기군의 일원인 내몽골 팔기군으로 당시 조선을 침공한 병사들이었다. 전술한 것처럼 팔기군은 요동 출신 한족들이 한병, 여진족들이 청병, 내몽골 각 부족들이 몽고병을 구성했고 이 중 주력은 기병이 막강한 내몽골 팔기였고 이들은 성을 전리품으로 여겨 약탈을 당연시하곤 했다. 약탈피해가 없을 수 없었다.
이처럼 퉁구스 즉 여진족/만주족들과 몽골인을 비롯한 몽골계 제족들은 뚜렷한 구분이 없이 서로 형제처럼 지냈던 것이었다. 거란의 후손으로 알려진 몽골계 민족인 다우르족 등도 명대에는 북원에 복속되어 몽골을 도울 때도 있었고, 훗날 청대에는 팔기군에 들어갔었다.
퉁구스 종족 자체가 원래 튀르크와 함께 인종적으로서는 몽골계에 해당되는 종족으로 튀르크는 서쪽 알타이, 퉁구스는 북부 시베리아 일대에서 기원한 차이가 있었다. 그들 중 연해주와 함경도, 만주 북동부에 살던 종족들이 한반도 주민들이 부르던 소위 말갈이나 여진족, 만주족이었다. 퉁구스족 중 몽골 지역과 가까웠던 곳에서는 일부 퉁구스 제족들이 몽골계 민족들과 같이 지내면서 몽골계에 동화되어 동호, 선비족, 오환족, 거란이 되었고 이들은 다우르족을 제외하면, 대부분 몽골에 동화되었고 일부는 여진족에 동화되어 금, 동하 멸망 이후의 후기 여진족에 흡수되었다. 그리고 튀르크는 우리가 잘 아는 돌궐, 위구르, 타타르, 케레이트, 나이만 등 몽골 고원의 각 세력들이었으며 나중에 칭기즈 칸에 의해 죄다 '''몽골 제국'''으로 싸잡혀 묶이게 되고, 서돌궐에 복속되 있던 투르크멘 부족은 간쑤 성과 신강에 남은 살라르족을 제외하고는 모두 서진해서 셀주크 제국, 오스만 제국을 세우며 오늘날 터키로, 몽골 제국의 일원이 되어 서역 원정 등에 동원되어 신강 같은 중앙아시아에 자리잡은 각 튀르크 부족들은 오늘 날 스탄자 돌림나라인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키르키스스탄, 투르크메니스탄과 캅카스 동부 카스피 해 호수의 아제르바이잔, 그리고 러시아의 타타르스탄, 우크라이나 크림 칸국 등이 되었다.[3]
즉 몽골족이 융성하여 원나라를 세웠을땐 당시 고려의 북방에 있던 여진족이 거란족처럼 몽골족에 협조하여 고려를 침공했었고, 이번에는 여진족이 융성하여 청나라를 세우자 몽골족이 협조하여 혼인동맹으로 일체화되기까지 하고 같이 조선을 침공하였던 것이다. 애초 만주족 자체가 대부분의 건주여진+ 과반수 해서여진 및 일부 야인여진 부족, 내몽골 동부의 우랑카이족이 서로 융합되어 형성된 종족이었으며 이들 다양한 부족들의 종주권을 건주여진이 갖게된 일종의 부족연맹이었고, 여기에 합류하지 않은 해서여진[4] 일부가 시버족으로, 야인여진 대부분은 에벤키나 나나이족, 우데게족, 오로촌족 등으로 갈려 나온 것이었다.
이처럼 몽골족과 만주족 그리고 그들의 전신인 여진족은 서로 국경의 경계가 없었고 한쪽에서 들고 일어나면 다른 한쪽에서 협조를 하여 같이 들고 일어나는 식이었다.
몽골족과 여진족은 비록 문화와 민족은 달랐어도 국가적으로는 서로 말타고 오고가는 친족 관계의 민족들이었던 것이다. 다만 오이라트나 내몽골은 좀더 조선에서 떨어져 있었고[5] 여진족은 바로 조선 인근인 길림이나 연해주에서 국경선을 맞대고 있었던 민족이었을 뿐이다.
더구나 상국 청나라의 외척이 바로 이 내몽골 보르지기트 씨족인 차하르 세력이었다. 이들은 청 황실의 일원으로서 위세가 대단했으며 병자호란때 지휘관들 상당수도 이 차하르 인들이었다.
이런 관계로 조선은 청나라의 주류인 만주족만큼이나 왕공족이자 황실 외척인 몽골족도 무시를 할 수가 없었다. 더구나 건륭제 때는 준가르를 멸망시켜 외몽골 할하 부족들까지 조공국 형태로 영향력 아래 두었다.
영조 때 청나라가 준가르를 갈아 엎어버리고, 이때 준가르 정벌 주역이었던 내몽골 왕공들도 기세가 올라가 몽골인들이 다시한번 기세를 떨쳤다. 게다가 전술한 것처럼 내몽골 왕공들의 경우 황실 외척으로서 청 황제는 실제 혈통상으로도 모계로 보르지기트 혈통을 잇고, 이를 근거로 유목세계의 '''대칸'''을 자처했었다. 이러한 청을 등에 업은 몽골족의 발흥은 불과 얼마 전 호란을 두 차례나 겪은 조선으로선 위협적인 일이었다. 더군다나 청나라 시대 몽골어는 이미 원나라 때와 크게 달라져 있어서 고려시대 교재로 몽골어를 배운 조선의 역관들과 제대로 말이 통하지 않아 조선인들은 몽골인과 한문으로 필담을 하거나, 차라리 만주어를 익혀 쓰는 실정이었다.[6]
1737년 5월 14일에는 좌의정 김재로가 상소문으로 몽골족의 발흥과 관련 역관들의 몽골어 구사력이 떨어진다는 것을 지적하였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또한 영조 33년, 1757년 11월 3일에 영조가 몽골족에 대한 걱정을 표시한 기록이 있다."몽골은 종류가 가장 강성하여 실로 다른 날의 깊은 우려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말이 옛날과 지금이 다르기 때문에 통역관이 몽골의 글을 읽어 익힌 자도 몽골 사람을 만나면 전혀 언어가 통하지 못합니다. 지난해 역관 이창경이 연경에 갔을 적에 몽골 사람과 서로 언어를 질정하여 책을 만들어 가지고 왔고, 요즈음 다시 청문문감을 얻어 왔으니 이제부터는 몽골어를 통달하여 해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청컨대 사역원 제학의 예에 의거하여 몽학총민청을 설치하고 권과하여 강습하고 잡과에서 시험하여 뽑도록 하소서."
이렇게 몽골족에 대한 경각심을 가지고 조선은 끊임없이 청나라에 사신을 보낼 때 청나라 치하 내몽골에 역관과 사신을 보내고 몽골어 교육에 매진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나온 책 중 하나가 몽어유해다. 애초 두 차례나 호란을 겪었고 그 때 주력이 몽고병이었으며, 더구나 내몽골 왕공들은 숭덕제 때부터 청의 외척으로 황실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어서 신경을 안 쓸 수 없었다. 위의 영조의 언급처럼 한족들은 중원을 회복할 건덕지도 보이지 않았다."중원은 회복할 기약도 없고 몽골인들의 세력이 점점 번성하여 가니 나는 진실로 그것을 근심하는 바이다. 어찌하여 경들은 목전의 계획만 생각하고 후일을 염려하지 않는단 말인가?"
물론 영조 및 정조 시대에는 단순히 언어만 익힌 게 아니라 실제로도 북방을 방비할 준비를 하여 조총의 사거리를 1000보 내로 늘린 천보총이 영조 때 개발되기도 하여 몽골족 및 만주족의 기마궁수와 일본의 조총에 모두 대응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리고 네덜란드인 벨테브레가 소개한 유럽 캘버린 대포인 홍이포도 곳곳에 이미 보급한 상태였다.
이렇게 북방에 신경쓰며 몽골어 및 만주어를 익히는 노력은 청일전쟁으로 청이 약체화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3. 내용
내용 부분은 네이버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사전을 참고하였습니다.
정확한 편찬 연대는 불분명하나 기록상으로 1768년에 이억성(李億成)이 개정하여 간행하였다고 한다. 같은 외국어 단어 암기책이었던 역어유해(譯語類解), 동문유해(同文類解), 왜어유해와 비슷한 시기에 편찬된 것으로 보고 있다.
크게 상권, 하권, 보편, 어록해로 구성되어 있다. 상권에 「천문(天文)」·「시령(時令)」·「지리(地理)」등 27문(門) 1,916항(項), 하권에 「전농(田農)」·「미곡(米穀)」·「채소(菜蔬)」 등 27문 1,926항, 보편에 「천문보(天文補)」·「시령보(時令補)」 등 48문 1,475항이 실려 있어 도합 5,317항이 수록되어 있다.
몽어노걸대, 첩해몽어와 함께 몽학삼서(蒙學三書)로 꼽히며, 한자, 몽골어, 한국어가 같이 실려 있어 몽골어뿐 아니라 국어와 중국어를 연구하는 데도 중요한 자료이다.
[1] 병자호란 당시 여진족은 청병, 몽골인은 몽고병, 그리고 한족은 한병으로 구분했으며 한병은 수군이나 홍이포, 조총, 승자총통 등 총기 및 화포류를 맡았고 통역도 담당했다. 악명높은 매국노 정명수 같은 청에 빌붙은 조선인들도 한병으로 분류되어 통역을 담당해 인조의 항복을 받아냈다. 내몽골 부족들인 차하르, 투메드, 우랑카이, 칼간 등의 왕공들이 지휘하던 몽고병은 전원 기병으로 쌍령 전투 등 조선의 참패에 기여했다. 마지막은 주력부대인 여진족들의 청병으로 이 쪽은 농경문화 영향을 받은 건주부 출신들은 기강이 좀 잡혀 있어 약탈은 안했으나 완전히 유목민이었던 북만주의 야인여진(나나이족, 우데게족, 시버족, 에벤키족 등)은 몽고병 못지않게 약탈을 하고 통제가 되지 않았다.[2] 이 때 몽고병 말고 청병 중 야인여진 출신들도 약탈이 극심해 역시 용골대 등이 진압대를 보내 쫓아냈다. 특히 야인여진의 경우 함경도와 바로 맞닿아 있는 연해주와 길림 일대에 본거지를 두고 있어 함경도 일대에 궤멸적인 피해를 주었다.[3] 여기서 다시 크림 칸국은 오스만 제국에 충성을 맹세하며 자발적으로 복종해 오스만의 번국이 되고, 더 나아가 술탄 제위 계승권까지 갖는다. 만주족 청나라의 내몽골과 같다.[4] 해서여진은 기원이 내몽골 동부로 거란과 일부 몽골부족이 융합되어 만들어졌으며, 해서여진 예허부 1대 칸인 싱언 다르한도 내몽골 투메드부 출신이다. 이들 해서여진 중 만주에 합류하지 않은 자들은 자신들의 기원을 같은 대흥안령에 있던 선비 내진 실위로 두고 시버족이라 자칭해 갈려 나왔다.[5] 임진왜란때 가토 기요마사 역시 함경도에서 명나라로 가는 길을 조사하던 중, 베이징에 갈려면 여진족 부족들, 그리고 내몽골을 거쳐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명을 정복하려면 여진과 내몽골부터 쓰러뜨려야 한다는 것.[6] 그러나 조선 정부가 보유한 만주어 데이터베이스 역시 몇백 년 묵은 고릿적 여진어를 기반으로 한 것이었던지라 제대로 통하진 못했고 한족 관리들에 재통역을 요청하거나 한문 필담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