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치코 상황후/결혼 전

 


1. 친정 집안
2. 유년시절
3. 아키히토 황태자와의 만남
4. 약혼과 험난한 결혼 과정
5. 밋치 붐(ミッチーㆍブーム)
6. 황태자비가 되다
7. 결혼 과정의 진실
8. 평민 출신 황태자비에 대한 반발


1. 친정 집안


미치코 상황후의 친가인 쇼다(正田) 가문은 '''그 당시 일본 재계 20위 안에 들던 아시아 최대 제분 회사, 닛신(日淸) 제분을 사업체로 운영하는 굴지의 재벌가이며, 외가인 소에지마(副島) 가문은 백작 가문으로 옛 화족이다.'''
미치코의 할아버지인 데이이치로(貞一郞)는 귀족원 칙선의원을 지냈고, 닛신제분 계열뿐만 아니라 현재의 도부 철도 경영에도 참여하여 사장을 역임한 바 있다. 아버지는 히데사부로(英三郞), 어머니는 후미코(富美子), 형제로는 오빠 이와오(巌), 여동생 에미코(恵美子), 남동생 오사무(修)가 있다. 재벌가 자녀들이자 황후를 누이로 둔 만큼 미치코의 형제들도 대단한 혼사를 치렀는데, 이와오는 제27대 일본 총리 하마구치 오사치의 손녀와, 에미코는 일본체육협회 회장이자 쇼와전공주식회사의 전무이사를 역임한 안자이 타카유키[1]와, 오사무는 일본 5대 정밀화학기업 중 하나인 쿠라레(Kuraray)의 차녀이자 후작의 손녀와 결혼했다.
쇼다 가문이 경영하는 닛신제분의 창업주는 미치코의 할아버지 데이이치로이며, 이후 경영은 아버지 히데사부로를 거쳐 지금은 남동생 오사무가 맡고 있다. 안도 모모후쿠가 설립한 라면회사 닛신식품(日淸食品)과는 이름만 같은 별개 기업이다.
[image]
[image]
결혼 전, 친정 가족들과 함께.

2. 유년시절


1934년 10월 20일, 쇼다 히데사부로와 후미코 부부의 2남 2녀 중 둘째이자 장녀로 태어났다.
[image]
아버지 히데사부로, 어머니 후미코, 오빠 이와오와 함께 찍은 가족사진.
[image]
1935년, 1살 무렵의 쇼다 미치코. 곰인형 루미쨩(ルミちゃん)과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다. 그녀가 어린 시절부터 좋아했던 동물이 곰이라고 하며, 실제 공개된 어린 시절 방의 사진에도 침대 옆에 곰인형이 놓여있다.
[image]
1937년, 이시키 해변에서 사촌과 함께 놀고 있는 미치코(왼쪽).
[image]
[image]
1940년, 6살 무렵의 쇼다 미치코. 어린시절 사진 중 가장 대표적인 사진으로, 2번째 사진은 모교인 덴엔쵸후 후타바(田園調布雙葉) 여학원의 교장실에 걸려있다.
[image]
시치고산을 맞이한 미치코. 후리소데를 착용하고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1934년에 태어나 1959년 일본 황실로 시집가기 전까지, 쇼다 미치코는 그야말로 남부럽지 않은 환경에서 부족함 없이 최고만을 경험하며 어마어마한 금수저 아가씨로 자라났다.[2] 독일 유학을 다녀온 바 있는 아버지 히데사부로는 그 옛날에 벽난로피아노 등을 갖춘 서양식 저택을 짓고 살았다. 쇼다 일족은 골프, 스키, 테니스 등의 다양한 스포츠를 즐겼고, 가족들의 모습을 담은 홈 비디오를 찍었으며,[3] 미국유럽으로 해외여행도 다녔다. 다시 말하지만 1930~1950년대에.
가톨릭 집안이어서인지, 미치코는 가톨릭계 미션스쿨을 다녔다. 생 모르 수녀회(아기 예수의 애덕 교육 수녀회)[4]에서 운영하는 덴엔쵸후 후타바 여학원[5] 유치원과 초등학교[6]를 졸업한 후, 성심수녀회[7]에서 운영하는 세이신 여학원[8] 중등과와 고등과를 거쳐, 1953년 4월 동(同) 학원의 세이신여자대학 영문과입학했다.
[image]
[image]
[image]
덴엔쵸후 후타바 여학원 초등부 시절의 쇼다 미치코.
[image]
1947년 3월, 초등부 졸업식에서. 뒷줄 맨 가운데가 미치코.
[image]
세이신 여학원 중등부 시절의 미치코. 젖살 때문에 다소 통통한 모습이다.
[image]
1950년, 세이신 여학원 고등부 1학년 시절의 미치코(가운데). 급우들과 함께.
[image]
1951년, 고등부 2학년 시절의 미치코(맨 오른쪽). 수학여행에서 급우들과 함께 가와구치 호수에서 점심을 먹는 모습.
쇼다 미치코는 미모가 빼어났고, 공부, 음악, 요리, 미술, 체육 등등 다방면에서 뛰어났으며, 대학 시절에는 학생회장까지 역임하면서, 사람들로부터 사랑과 동경을 한몸에 받는 그야말로 엄친딸이었다. 취미 중 하나가 칸다헌책방 거리를 드나들며 책을 보는 것일 정도로, 책을 좋아하고 지성적인 여학생이었다. 1957년 3월에는 세이신여자대학 영어영문학과수석으로 졸업하였고, 졸업식에서는 졸업생 대표로 연설도 했다.
졸업 후 미치코는 대학원에도 진학하고 싶었으나, 부모의 뜻에 따라 신부수업을 받기 시작했다. 1950년대 당시는 여성이 사회에 진출하여 직업을 가지는 일이 많지 않았고, 여성은 결혼하여 주부로서 가정에 머무르며 현모양처가 되는 것을 이상적으로 생각하던 시대였기 때문이다.[9]
이렇게 쇼다 미치코는 상류층들 사이에서 일등 신붓감으로 거론되던 규수였다.

3. 아키히토 황태자와의 만남


[image]
연애하던 당시의 미치코와 아키히토 황태자
세이신여자대학을 졸업한 해인 1957년 8월 19일, 쇼다 미치코는 가루이자와(軽井沢)에서 열린 테니스 시합에 참가했다가 아키히토 황태자를 만났다. 두 사람은 혼성복식경기를 치르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아키히토 황태자 팀이 유리하게 돌아갔으나 미치코는 같은 팀인 상대에게 힘내자며 의욕을 북돋아주며 점차 점수를 내갔고, 경기는 아키히토 황태자 팀의 패배로 끝났다. 아키히토 황태자의 친구이자 황태자와 같은 팀을 이루었던 오다 카즈오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그때 폐하께서 수건으로 땀을 닦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저렇게 정확하고 끈덕지게 되받아치니, 못 당하겠어. 대단해” 라고. 그 표정엔 아쉬움은 조금도 없고, 따가운 여름 햇살 아래 오히려 시원시원하게만 느껴졌습니다.

오다 카즈오

이후 아키히토 황태자는 쇼다 미치코에게 호감을 보이기 시작했고, 두 사람은 점차 연인 사이로 발전하기 시작한다.
아키히토는 미치코의 사진을 <여자친구>라는 제목으로 궁내청 직원의 문화제에 출품했지만,[10] 그 누구도 미치코를 황태자비 후보라고 생각지 않았다. 미치코가 재벌가의 영애이긴 했어도 그동안 황실은 신붓감을 황족 내지는 화족에서만 뽑았다. 특히 미래의 황후인 황태자비가 될 여성은 황족이나 화족 중에서도 오직 5개의 공작 가문(고셋케)에서만 나올 수 있었다. 게다가 쇼다 가문에서는 이미 미치코의 신랑감으로 어느 법조계 청년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고 한다.
1958년, 아키히토 황태자는 대신들에게 "나는 쇼다 미치코를 황태자비로 맞이하고 싶다"는 의중을 밝혔고, 이 사실은 대신들을 통해 쇼다 가문에 은밀하게 전해진다.

4. 약혼과 험난한 결혼 과정


[image]
1958년, 미국유럽으로 몇 달 동안의 해외여행을 떠나는 미치코. 비행기에 오르기 전 취재진들을 향해 인사하고 있다.
미치코를 황태자비로 삼고 싶다는 전언에 쇼다 가문은 비상이 걸렸다. 히데사부로와 후미코 부부는 아키히토 황태자의 청혼을 정중하게 거절하고, 몇 달 동안 미치코를 미국유럽으로 여행보냈다. 1958년 10월 20일, 미국 여행 도중에 만 24세의 생일을 맞이한 미치코는 나이아가라 폭포를 바라보며 '''"여기에 빠지면 어떻게 될까?"'''라는 생각을 했다고.[11]
미치코가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후, 아키히토 황태자는 전화를 통해 미치코와 연락을 주고받는다. 아키히토는 미치코와 통화한 날이면 통화에 대한 내용을 노트에 기록했다고 하며, 미치코가 피곤해서 전화를 받지 못한 날에는 상심했다고 한다. 11월에 들어서면서 아키히토는 전화로 "나와 혼인해줄 수 있겠느냐"라고 묻고, 미치코는 이를 승낙한다.
1958년 11월 27일, 아키히토 황태자와 쇼다 미치코의 결혼이 황실의회에 따라 만장일치로 가결되었고, 이 사실은 일본 전역에 대서특필 된다. 같은 날 기자회견에서 기자로부터 아키히토 황태자의 매력에 대해 질문받자 미치코는 "매우 성실하고, 멋져서, 마음으로부터 신뢰와 존경을 바칠 만한 분이라는 점에서 매력을 느꼈습니다"고 대답했고, 이 발언은 유행어가 되었다. 또 첫인상에 대해서는 "청결한 분"이라고 했다.
[image]
결혼을 앞두고, 친정어머니 후미코와 함께. 후미코의 근심스러운 표정이 미치코의 앞날을 예고하는 것 같다. 화족 가문 출신인 후미코는 '그들'의 세계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을 테니까.
미치코는 몇 달 동안 황실의 일원이 되는 데 필요한 교육[12]을 받았다. 그리고 "결혼 비용을 여행하는데 다 써버렸어요. 가방 하나만 들고 가더라도 저를 받아주실 수 있다면…"이라는 미치코의 말에 아키히토 황태자가 "OK"라고 한 것과 달리, 쇼다 가문은 황실로 시집가는 큰딸을 위해 '''6톤 트럭 3대 분량의 어마어마한 혼수'''를 준비했다. 당시 금액으로 약 3,000만 엔이며 현재 시세로는 약 3억 엔. 만약 쇼다 가문이 재벌가가 아니었다면, 기둥 뿌리를 뽑아도 모자랐을 것이다.
[image]
1959년 1월 14일, 결혼을 앞두고 황실에 인사를 드리러 황궁(고쿄)을 방문한 미치코. 아버지 히데사부로, 어머니 후미코와 함께. 소매가 땅에 닿을 듯 치렁치렁한 후리소데(미혼 여성복)를 입은 미치코와, 짧은 소매의 토메소데(기혼 여성복)를 입은 후미코가 대조된다. 미치코의 키는 161cm로 당시 일본 여성치고는 굉장히 큰 키였으나,[13] 미치코보다 옛날 사람인 히데사부로와 후미코의 키가 더 컸음을 알 수 있다. 덕분에 미치코뿐 아니라 그녀의 형제자매들도 모두 키가 크며, 다들 인물도 좋다.
[image]
1959년 4월 10일 아침, 친정을 떠나 결혼식을 올리러 가기 직전에 촬영한 마지막 가족사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어머니 후미코, 여동생 에미코, 오빠 이와오, 남동생 오사무, 아버지 히데사부로.

5. 밋치 붐(ミッチーㆍブーム)


'''일본의 대스타, 영화배우라도 그정도로 사람이 많이 모이지는 않습니다.'''

[image]
1959년 쇼다 미치코아키히토 황태자와 약혼하고 결혼한 것으로 인하여 일본에 생긴 사회 현상이다.
"테니스 코트 위의 로맨스"라고 불리는 미치코와 황태자의 러브스토리는 당시 대다수 국민들을 흥분시켰다. 미래의 황후로 선택된 미치코가 평민 출신이라는 점도 한 몫했다. 이를 계기로 황태자 부부의 결혼식과 퍼레이드를 보기 위해 텔레비전을 구입하는 사람들이 어마어마해 텔레비전 판매량이 2배나 급증하는 등,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의 경제, 패션, 미디어 등등 일본 사회의 다양한 영역에 큰 영향을 주었다.
청초하고 지적인 미치코의 미모가 절대적인 인기를 모아, 여성들이 미치코를 동경하고 따라하는 유행이 생겼다. 이로 인해 미치코가 아키히토 황태자와 처음 만난 테니스 코트에서 입고 있던 V 넥 스웨터, 헤어밴드, 11월 15일 기자회견 당시 입고 있던 흰 드레스, 스톨, 긴 흰색 장갑 등 소위 밋치 스타일(ミッチーㆍスタイル)이라는 패션이 대유행했다.
미치코의 트레이드 마크라 할 수 있는 헤어밴드는 일명 밋치 밴드(ミッチーㆍバンド)라고 명명되었으며, 그녀의 모습이 그려진 종이인형과 기자회견 당시 모습을 본딴 인형이 불티나게 팔렸다. 기자회견 패션은 미치코의 트레이드 패션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유명했다. 당시 국민들이 미치코라 하면 바로 떠올리는 패션이었을 정도. 이 패션은 특히 상류층 여성들 사이에서 인기가 대단했다고 한다.

6. 황태자비가 되다


[image]
시집가는 날 아침, 배웅하러 나온 가족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는 미치코. 좌측부터 아버지 히데사부로, 어머니 후미코, 오빠 이와오, 여동생 에미코, 남동생 오사무. 부모님은 물론이고 오빠와 동생들까지 표정이 밝지 않다.
[image]
작별 인사를 마친 후, 가족들을 뒤로 한 채 황궁으로 가는 자동차에 오르는 미치코. 여전히 주위 가족들은 표정이 어둡고, 좌측의 어머니 후미코는 결국 눈물을 훔치고 있다.
[image]
마침내 1959년 4월 10일, 전 일본 국민의 환호와 축복속에 세기의 결혼식을 올렸다. 황궁에서 시부야의 동궁 임시 황궁까지 8.18km의 거리를 4쌍두의 마차가 달리는 일명 '성혼 퍼레이드'가 열리는 길가에는 53만명의 인파가 몰려들었으며, 사람들은 광장에 모여 조화 등으로 장식한 황태자 부부의 사진을 내걸고 만세를 부르는 등, '세기의 성혼'이라 칭해지며 일본 역사상 이런 결혼식은 없을 정도로 나라 전체가 축제 분위기였다. 그 당시의 분위기를 체감하고 싶다면 아래 영상 참조.
황태자 부부의 결혼식 영상. 결혼식이 끝난 직후 동궁에서의 황태자 부부 모습과, 결혼 첫날밤 불이 꺼진 동궁어소 아래에서 만세를 부르는 사람들. 수많은 인파가 모인 국립경기장에서 봉화를 피우고, 마치 서양의 궁정 무도회를 연상시키는 축하 퍼레이드를 벌이는 등, 결혼식의 열기는 밤늦도록 가라앉을줄 몰랐다. 또한 당시 컬러 텔레비전도 함께 보급되던 시기라, 컬러버전에 소리도 녹음되었다.
미치 붐(ミッチーㆍブーム) 관련영상

7. 결혼 과정의 진실


세간에는 아키히토 황태자와 쇼다 미치코가 그저 '우연히' 테니스 코트에서 만나 사랑에 빠져 연애 끝에 결혼하게 되었다는 식으로만, 그저 아름답고 낭만적인 로맨스 이야기이기만 한 것처럼 알려졌다. 그러나 두 사람의 결혼 과정에는 '''좀 더 복잡한 사정과 치밀한 계획'''이 뒷이야기로 숨어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후 일본은 많은 변화와 혼란을 겪었고, 이는 일본 황실도 마찬가지였다. 다이쇼 덴노의 직계들을 제외한 수많은 방계 황족들과 화족들이 신적강하로 인해 평민으로 전락했고, 신으로 숭배되어 오던 천황 일가는 인간선언을 했으며, 황실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잃고 '상징'으로 전락했다. 따라서 황실이 폐지되지 않고 계속 유지되기 위해서는, 그동안 살아오던 방식들을 버리고 새로운 모습으로 바뀌어야만 했다.[14]
[image]
쇼다 미치코가 등장하기 이전에 아키히토 황태자의 신붓감 후보로 거론되던 기타시라카와 하츠코. 1939년 출생한 직후부터 장래의 황태자비 후보로 유력하게 거론되어 왔다.
하츠코의 아버지는 방계 황족 기타시라카와노미야 나가히사(北白川宮永久) 왕[15], 어머니는 화족 출신인 도쿠가와 사치코(德川祥子), 할머니는 메이지 덴노와 측실 소노 사치코의 7녀인 카네노미야 후사코(周宮房子) 내친왕[16]이다. 즉 하츠코는 철저하게 황족&화족의 혈통으로 태어나 전통적인 분위기에서 자라난 구시대적인 규수였다. 새롭게 바뀌어야 할 황실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규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개혁파 인사들은 일류 여자대학교의 우등생들을 중심으로, 하츠코와 반대되는 유형의 규수들을 은밀하게 물색했다. 그 가운데 쇼다 미치코도 있었던 것이다. 개혁파 인사들은 부유한 평민 가문 출신이며, 서구적이고 현대적이며, 아름답고 총명한 미치코를 새로운 시대의 황태자비에 적합한 인물로 꼽았고, '우연한 만남'을 가장하여 극비리에 황실 휴양지인 가루이자와의 테니스 코트에서 아키히토 황태자와 미치코가 만나 가까워지도록 만들었다.[17] 이후 이어진 두 사람의 연애결혼과, 황실 입성 후 미치코가 보여 준 파격적인 면모들을 생각하면, 개혁파 인사들의 작전은 대성공한 셈이다.
여담으로 황태자비 후보에서 탈락한 하츠코는 고준 황후(나가코)의 외가인 시마즈 가문으로 시집갔다.[18]

8. 평민 출신 황태자비에 대한 반발


[image]
1959년 4월 10일, 아키히토 황태자와 쇼다 미치코의 결혼식.
일본 황실에서 특정한 출신에 따라 황태자비를 결정하는 일은 케이타이 천황 이래 1500년이나 되는 전통이었다. 막부 정권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헤이안 시대에 황실이 직접 통치를 하는 대신 후지와라 씨가 권력을 독점하고 나라를 통치했다. 1300년 동안 황후는 후지와라 씨 출신의 여성이 독점하였다.
이후 황후의 자격은 후지와라 씨의 후손인 5개 가문(고셋케)이나 황족 출신 여성으로 굳어졌다. 메이지 시대에 이르러 고셋케는 화족으로 편입되어 공작 가문이 되었다. 그래서 방계 황족의 신붓감은 같은 황족이거나 화족이기만 해도 조건을 충족했지만, 미래의 황후인 황태자비는 천 년 동안 이어진 전통에 따라 황족이거나 화족 중에서도 고셋케 출신이어야 했다.[19] 그러나 앞서 서술된 이유 때문에 최초의 평민 출신 황태자비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미치 붐(ミッチーㆍブーム)이라고 불리며 세간의 화제가 되고 결혼식 후 퍼레이드에서는 길가에 53만명이나 되는 시민이 모여 아키히토 황태자와 미치코 황태자비를 열렬히 축복한 것과 달리, 평민 출신의 신붓감에 대한 옛 황족들과 화족들의 반발은 대단했다. 하긴 자신들은 신적강하로 인해 수백 년간 이어내려져 오던 높디높은 신분을 잃고 하루아침에 평민으로 전락했는데, 반대로 자신들의 아래로 여기던 평민이 황족, 그것도 장래의 국모가 된다니, 당연한 반응이었을지도 모른다.[20]
시아버지 쇼와 덴노는 "이제 황실에도 새로운 피가 필요하다."며 평민 출신의 미치코를 감쌌지만 시어머니 고준 황후는 미치코를 몹시 미워하여, 두 아랫동서 지치부노미야 세츠코 비, 다카마츠노미야 키쿠코 비와 함께 반대운동을 펼쳤다. 또한 다이쇼 덴노의 외사촌 여동생 야나기하라 뱌쿠렌, 이방자 비의 친정어머니 나시모토 이츠코(梨本伊都子)[21], 이츠코의 여동생이며 세츠코 비의 친정어머니인 마츠다이라 노부코(松平信子)[22] 등등, 옛 황족들과 화족들이 똘똘 뭉쳐 결혼을 반대했다.
결국 미치코는 무사히 황실로 시집을 왔지만, 그 후로도 그들은 미치코 황태자비에게 '''집요한 학대'''를 가하였다. 하츠코는 결국 미치코에게 밀려 황태자비가 되지 못했지만, 고준 황후는 하츠코의 고모할머니 호시나 다케코(保科武子)[23]를 자신의 시녀장(侍女長)으로 두었다. 다케코의 후임은 하츠코의 어머니 사치코였다. 고준 황후가 누구를 자신의 며느리로 두고 싶었는지, 여실히 드러나는 부분이다. 또한 미치코 황태자비의 시녀장은 마키노 스미코(牧野純子)였는데, 스미코는 미치코 황태자비를 반대하는 운동에 앞장섰던 노부코가 손수 추천한 인물이었다. 그러니 스미코가 어떤 인물이었을지는 뻔하다.
그나마 첫째 시누이 히가시쿠니 시게코는 남동생 부부에게 보내는 응원의 메시지를 신문에 게재하기도 하고, 올케인 미치코 황태자비를 친정 가족들과 함께 자신의 집으로 초대해 파티를 열어주는 등 관대한 태도를 보였다고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시게코는 미치코가 황실로 시집온 지 2년 뒤인 1961년, 불과 만 35세의 젊은 나이에 어린 3남 2녀를 두고서 병으로 죽고 말았다. 이때 시게코가 젊은 나이에 병으로 죽은 것을 두고도, "여자가 잘못 들어와서 그렇다!!"라며 미치코 황태자비를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한다.
[image]
결혼식 날. 남편 아키히토 황태자, 시아버지 쇼와 덴노, 시어머니 고준 황후와 함께.
[image]
참고로 컬러 버전도 존재한다.


[1] 안자이 가문은 일본의 3대 재벌 중 하나인 스미토모 일족과도 혼인 관계였던 일족이다.[2] 체감이 안된다면 미치코가 유년시절을 보낸 시대이자 패전 전후 시대였던 193-40년대의 모습이 담겨있는 사진이나 작품들을 보면 된다. 미치코와 동시대 사람이라는 사실에 놀랄것이다.[3] 막 아장아장 걷기 시작한 쇼다 미치코와 아버지 히데사부로, 오빠 이와오가 함께 등장하며, 정원에서 꽃을 구경하다 엉덩방아를 찧는 장면도 나온다.[4] 아직 한국에는 진출하지 않은 수도회이다.[5] 큰며느리 마사코 황후도 초등학교 3학년부터 고등학교 1학년까지 덴엔쵸후 후타바 여학원을 다녔고, 마사코 황후의 친정어머니 오와다 유미코(小和田優美子)도 덴엔쵸후 후타바 여학원을 졸업했다.[6] 초등학교 시절에는 전쟁 때문에 피난하느라 전학을 몇 번씩 다녔다.[7] 1956년 한국에 진출, 한국에서도 성심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자세한 것은 성심수녀회 항목 참조.[8] 옛 구니노미야(久邇宮) 저택 부지에 세워졌다. 즉 시어머니 고준 황후가 어린 시절을 보낸 터에서, 며느리 미치코 상황후가 학창시절을 보낸 것. 이 이야기만 들으면 '고부 간의 아름다운 인연'이라는 착각에 빠지지만…[9] 사실 대학은커녕 그 시대에는 여자가 중학교, 고등학교까지 졸업한 것도 엄청난 고학력이었다.[10] 연인을 칭할 때 쓰는 ‘여자친구’의 의미가 아닌, 여사친을 이르는 말이였다고 한다.[11] 사실 말이 '청혼'이지 강요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황실의 청혼을 감히 끝까지 거부할 수 없었다. 미치코 상황후의 아버지 쇼다 히데사부로는 대기업을 운영하는 기업가이며, 마사코 황후의 아버지 오와다 히사시(小和田恒)는 고위 외교관이어서, 청혼을 계속 거절하기에도 난처한 입장이었다. 실제로 청혼을 연이어 거절했을 때 쇼다 가문과 오와다 가문에는, 감히 황족의 청혼을 거절하느냐며 편지전화 등으로 우익들의 괴롭힘이 연달아 이어졌다. 억지로 시집온 후의 삶은 고통의 연속이었다. 반면 키코 비는 시어머니와 형님과는 달리, 자신이 원하여 황실로 시집왔다고 한다. 각오하고 시집왔을지는 모르지만, 키코 비 역시 각종 시집살이를 피할 수 없었으니, 후회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12] 일본 황실의 비(妃)가 되는 여성들이 받는 교육. 역대 황실 신붓감들 중에서 이 교육을 제일 어려워한 사람은 마사코 황후였다. 오랜 기간 외국, 그것도 다신교가 아닌 서양 그리스도교(=유일신교) 문화권에서 성장한 오와다 마사코신토 등 일본의 전통을 잘 이해하지 못하여, 영어로 된 책으로 수업을 받기도 했다. 교육과정 및 과목은 이전보다 훨씬 단축된 것이었는데, 1993년 당시로서는 노처녀였던 마사코를 한시라도 빨리 결혼시켜 후손을 보기 위함이었다고 한다.[13] 당시 유럽 여성들도 160중반을 웃돌면 큰 키로 쳐주던 시대였다.[14] 패전과 신적강하 이후로, 쇼와 덴노는 일본의 민심을 잡기 위해 꾸준히 지방순회를 했다. 이는 일본 만화 맨발의 겐에서도 다뤄지는 장면이다. 주인공 나카오카 겐은 "천황이 왔다!!"며 감탄하는 친구들과는 달리, "나라 꼴이 이 모양이 됐는데, 천황이 오는 게 무슨 소용이야?!"라며 울분을 터뜨린다. 이와 같이 그 당시 천황의 지방순회를 아니꼽게 보는 일본인들도 상당했을 것이다.[15] 일본 황실에서 천황의 아들과 손자까지는 친왕, 증손자부터는 왕이라 한다. 단 1947년 이전에는 4대손까지를 친왕, 5대손부터를 왕이라 했다.[16] 일본 황실에서 천황의 딸과 손녀까지는 내친왕, 증손녀부터는 여왕이라 한다. 단 1947년 이전에는 4대손까지를 내친왕, 5대손부터를 여왕이라 했다.[17] '''"황태자 전하, 이쪽은 이번에 명문 세이신여자대학 영문과를 수석 졸업한 쇼다 미치코 양입니다. 미치코 양, 이분은 황태자 전하이신데 아직 나이에 맞는 여자친구가 없으시니 가끔 함께 테니스라도 쳐 주세요."'''라는 식으로 말이다.[18] 하츠코와 동갑이며 고준 황후의 막내(5녀)인 스가노미야 타카코 공주도, 1960년에 시마즈 가문으로 시집갔다.[19] 고메이 덴노의 정실 에이쇼 황후, 메이지 덴노의 정실 쇼켄 황후, 다이쇼 덴노의 아내 데이메이 황후는 모두 고셋케 출신이었고, 쇼와 덴노의 아내 고준 황후는 방계 황족 구니노미야 가문 출신이었다.[20] 사실 이렇듯 왕의 사랑을 받던 여성들이 출신 때문에 반감을 산 경우는, 굳이 일본이 아니라도 다른 왕조국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 유명한 희빈 장씨만 하더라도 양반가의 규수는 아니라도 역관 출신 거부의 딸이었는데, 당시 대재벌의 딸인데다가 어디서도 빠지지 않는 규수임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황족 혹은 화족 출신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배척받은 미치코 상황후의 출신과 비슷한 면이 있었다. 심지어 미치코 상황후는 어머니 후미코가 화족 출신이라, 친가는 평민이지만 외가로부터 화족의 피도 이어받고 있었다. 다만 아키히토 상황은 미치코 상황후를 끝까지 지켜내었지만, 희빈 장씨는 숙종에게 버림받았다는 차이도 있다. [21] 당시 일기에 "이제 일본도 다 끝났구나!!"라고 썼을 정도였다.[22]이방자 비에게는 이모가 된다. 노부코는 황실의 사돈이라는 배경으로 궁정 내에서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고, 가쿠슈인 동창회장을 지내며 옛 황족들과 화족들의 우두머리로 군림했으며, 반대운동의 선봉에 섰다. 진짜 이유는 평민이 황후가 된다는 위기감도 물론 있었겠지만, 쇼다 미치코의 외가인 소에지마 가문이 무진전쟁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23] 기타시라카와노미야 요시히사(北白川宮能久) 친왕의 3녀. 오빠인 다케다노미야 츠네히사(竹田宮恒久) 왕은 메이지 덴노와 측실 소노 사치코의 6녀인 츠네노미야 마사코(常宮昌子) 내친왕과 결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