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준혁/선수 경력

 

1. 아마추어 시절
2. 프로 시절
2.1.1. 데뷔 후 ~ 1998년
2.2. 짧았던 해태 타이거즈 시절
2.2.1. 1999년
2.3.1. 2000년 ~ 2001년
2.4.1. 2002년 ~ 2008년
2.4.2. 2008 시즌
2.4.3. 2009 시즌
2.4.4. 2010 시즌
2.4.5. 은퇴
2.4.5.1. 2010년 9월 19일 은퇴전 (對 SK전)
3. 기록의 사나이


1. 아마추어 시절


[image]
[image]
양준혁은 남도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야구를 시작했다. 경운중 시절엔 주로 투수로 뛰었다. 그러나 팔꿈치 부상으로 야수로 전향했다. 경운중 3학년이던 1984년엔 체육부장관기에서 1루수로 타격상 0.714 을 받으며 미래의 강타자로 이름을 날렸다. 대구상고 시절엔 1학년 때부터 4번 타자로 활약했다. 고교 3학년이던 1987년엔 삼성 입단을 희망했지만 박영길 당시 감독의 만류로 대학 진학을 택했다.
당시에는 연고지 선수 세명을 1차 지명으로 뽑을 수 있었으며 2차지명은 무제한이었다. 그리고 고졸선수가 드물었다. 당시 삼성은 1,2차 지명에서 모두 6명을 뽑았는데 이들은 모두 대학생 선수였다. 삼성은 쟁쟁한 야수가 즐비한 팀이었으며 유망주가 뛸 2군 리그도 없었다. 영남대에 진학한 양준혁은 1학년때부터 두각을 드러냈다. 1988년 제43회 전국대학야구선수권대회에서 11타수 6안타로 타격상을 따냈다. 이듬해엔 제15회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 국가대표로 발탁됐고 봄철리그에선 12타석 연속 출루를 기록하기도 했다. 4학년이던 1991년에는 대학야구 최강타자로 입지를 굳혔다.
데뷔하기 전 쌍방울 레이더스의 2차 1순위 지명을 받았으나, 지명을 피하면서 상무에 입대해 논란이 되었다. 제대 후 쌍방울이 아닌 삼성 라이온즈에 입단하여 다시 한번 파문이 일었다. 훗날 양준혁의 군복무 기간 동안 삼성은 양준혁에게 용돈 명목으로 매월 100만원이라는 거액을 지급한 사실도 밝혀졌다.
논란거리 정도가 아니라 이는 KBO 신인 드래프트 제도의 근간을 뿌리째 뒤흔들었던 사건으로, 오늘날이면 프로 선수로 활동이 불가능했을 정도의 역대 최악의 입단 파문이었다. 그러나 당시 프로야구 규정/단속이 미비했던데다가 신생 구단 쌍방울의 발언권이 취약했고, 삼성그룹의 파워 등으로 유야무야 넘어가게 되었다. 특히 당시 인터넷이 없던 시절이었던 것은 천운이었다. 당시 논란의 여파로 신인선수 지명권 보유기간이 1년에서 3년으로 연장되어 규정이 보완되었다.
데뷔 시즌에 신인왕[1]과 타격왕을 동시에 석권하였으며 아직도 양준혁 이후로 이 두 타이틀을 동시에 가져간 선수는 없다.[2][3] 그러다 1998년 시즌이 끝나고 임창용 - 곽채진, 황두성, 양준혁, 의 3대1 트레이드로 해태 타이거즈트레이드 되고, 2000년 LG 트윈스로 다시 넘겨졌다가 2001 시즌 종료 뒤에 FA 자격을 얻은 후 삼성 라이온즈로 돌아와 2010년 시즌까지 계속 삼성 라이온즈에서 활약했다. 그야말로 꾸준함을 대표하는 선수로 남았으며 아직까지도 전설로 남아있다.
홈런 2위만 3번 기록했는데(93,96,97) 그 해 전부 해태 타이거즈가 우승했다..


2. 프로 시절



2.1. 삼성 라이온즈 1기 시절



2.1.1. 데뷔 후 ~ 1998년


[image]
프로 입단 첫해인 1993년 사직에서 열린 올스타전에서, 김기태와 함께.[4] 둘다 1969년생 동갑이지만, 프로 입단은 김기태가 2년 일찍 했다.
1993년 삼성 라이온즈 데뷔 첫 해 신인왕과 타격왕을 차지했으며,[5][6] 90년대 삼성 라이온즈의 중심 타선의 한 축으로 활약했다.
1993년 23홈런-90타점-타율 0.341을 기록,[7] 괴물 신인이란 평가를 받으며 데뷔 첫해부터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이 해에 이종범, 박충식, 이대진, 구대성, 이상훈 등등 뛰어난 선수들이 많이 데뷔했는데, 양준혁은 이들을 모두 제치고 당당히 신인왕을 차지했다.[8][9] 이어 1994년에는 소포모어 징크스에 시달렸는지 겨우 3할 턱걸이에 홈런이 1개 부족해서 20홈런 달성에도 실패, 그나마 첫 한 시즌 두 자릿수 도루를 기록하고 타점왕도 차지했다. 1995년에는 신인왕 이동수의 훌륭한 조력자로 활동. 뛰어나면서도 꾸준하게 성적을 올렸지만, 이 때의 삼성이 포스트시즌에 계속 나가지 못하는 부진을 겪고 있었고, 프로 데뷔 동기인 이종범이 천하무적의 맹활약을 펼쳐 상대적으로 주목을 덜 받았다.
그러다가 1996년에는 뛰어난 활약을 펼친다. 0.346의 타율에 28홈런 87타점 23도루를 기록, 생애 첫 20-20 클럽에도 가입했다. 특히 이 해가 일시적으로 백인천감독이 대구구장의 펜스를 현재처럼 99-120-99로 늘렸던 시기라는 점에서[10] 의미가 있다. 신인 박재홍에 밀려 홈런왕을 놓쳤을 뿐 타자로서는 이종범을 능가하는 최고의 활약을 펼쳤고 이 해 싸이클링 히트까지 쳐내는 데 성공한다. 그 활약은 97~98년에도 이어간다. 하지만 97년부터 혜성처럼 등장한 팀 후배 이승엽에 밀려 2인자의 자리를 구축하게 된다.
한편 프로 입단 동기생이자 프로시절 내내 라이벌로 회자되는 이종범이 맹활약한 93년~97년에 유일하게 이종범보다 많은 홈런을 친 선수가 바로 양준혁이며, 93년 데뷔 후 부터 97년까지 OPS 1.004 wRC+ 186.6, wOBA .443를 기록하면서 같은 기간동안 이종범과 비교했을 때, 홈런과 타점, 타격부분 세이버 스탯에서 우위를 점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11] 즉 같은 기간 '''타석에서 이종범을 능가하는 유일한 선수였다.'''

2.2. 짧았던 해태 타이거즈 시절



2.2.1. 1999년


[image]
그러나 1998년 시즌 후 강력한 마무리 투수 임창용[12]을 원하던 구단에 의해 곽채진, 황두성[13], 현금 '''20억'''과 함께 해태 타이거즈로 트레이드되었다. 당시 해태는 IMF 외환위기로 인해 모기업이 부도나 버려서 야구단을 운영할 여유조차 없었고, 이러한 상황에서 그나마 일본 주니치에 이적시킨 선동열과 이종범의 임대료를 운영비로 보태쓸 정도로 재정난이 심각했다. 반면 당시 투수진이 부족했던 삼성은 우승을 위해서는 마무리 투수가 필요하다고 판단, 마침 해태 김응용 감독이 원하는 좌타자 보강도 할 겸 트레이드를 논의하여 카드를 맞췄고, 결국 엄청난 현금에 간판타자 양준혁까지 얹어 임창용을 영입하는 데 성공한다.
처음에는 트레이드를 거부하고 메이저리그 진출 의사를 밝혔고 그 다음에는 재트레이드 요청을 했으나, 이것들이 다 실패하고 해태로 트레이드되자 아예 은퇴할 생각까지 했다 한다. 그러나 좌완에 피지컬이 좋은 선수를 굉장히 선호했던 김응용 감독의 간곡한 설득과 1년 뒤 다른 팀으로 이적시켜 주겠다는 약속을 받고 승낙했다고 한다. 초반에는 급작스러운 트레이드와 유독 타팀보다 특이한 성격[14]을 지녔던 해태였던만큼 시즌 개막 직후에는 팀 적응의 문제로 그 이름값에 어울리지 않게 부진했으나, 자리를 잡은 5월부터 본격적으로 몰아치기 시작해 결국 3할 타율에 30홈런과 100타점, 20도루를 찍으며 건재함을 과시해 유난히 타고투저였던 99년의 KBO에서도 강력했던 해태 타이거즈의 타선의 한 축을 담당했다. 이때의 활약으로 99년 한일슈퍼게임에도 출전하면서 급작스러운 이적임에도 훌륭한 시즌을 보냈다. 이 시즌 이후에 선수협의 창단 멤버로 활동하였다.
성적과는 별개로 이 시즌에 양준혁은 여타 이적생들이 느꼈던 해태 특유의 엄격한 군기문화에 굉장한 인상을 받은 모양이었다.양준혁이 말하는 해태 시절 해태로 이적 후 마련한 광주의 아파트에 이삿짐 트럭을 타고 도착했을 당시, 팀 후배이자 영남대 후배인 오철민과 곽현희가 대기하고 있었으며 이삿짐 정리까지 다 했다고 한다. 강태원 딸의 돌잔치 때 일부러 양준혁이 늦게 갔으나 해태 선수들 모두 기다리고 있었고, 경기장에서 후배들이 선배들의 간식거리를 준비해 놓지 않으면 혼났다고 한다. 다만 당시 양준혁은 어느정도 고참급 연배였으며, 그보다 고참인 성골 해태선수는 김정수, 이강철, 그 분 정도에 나머지 고참은 친정인 삼성에서 이적해왔고 양준혁과 같은 시기에 뛰어봤던 오봉옥, 김태룡 정도였기에 야구 외적으로 크게 시달림 받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2.3. LG 트윈스 시절



2.3.1. 2000년 ~ 2001년


[image]
2000년 3월 약속대로 LG 트윈스로 이적했다. 현대 유니콘스, SK 와이번스 이적 가능성도 있었지만 막판에 LG가 손혁을 제시하면서 트레이드가 성사된다.[15]
2001년 타격왕과 지명타자 골든글러브를 수상하는 등 괜찮은 활약을 하긴 했으나 2001년 시즌 종료 후 FA 자격을 얻었을 때 선수협 사태등의 문제로 FA 미아설, 해외진출설, 은퇴설 등으로 말이 많았다. 당시 기준으로 2002년 시즌을 마치고 나서 FA가 되어야 했지만 연차가 9년으로 줄면서 2001년 시즌 종료 후 FA 자격을 획득하고, LG 트윈스에서 FA로 재계약 하려고 했으나 본인이 4년 36억을 불렀고 선수협 활동을 열심히 한 전력 덕에 구단 입장에서는 조금 껄끄러운 존재였기 때문에 LG는 양준혁과 협상 포기를 선언해버린다. 양준혁 본인의 말로는 처음부터 36억을 불렀더니 협상 테이블에도 못 앉았다고. 그리고 LG는 선수 대신 현금으로 보상을 받고 직전 삼성에서 뛰던 매니 마르티네스를 양준혁의 대체자로 데려온다.
이런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양준혁에 대한 LG 팬들의 인식과, 양준혁 본인의 LG에 대한 인식은 매우 좋은 편이다. 엘지에서 커리어하이급 성적을 찍은데다가[16] 선수단에 좋은 영향을 줬기에 좋아할 수 밖에 없고, 본인 역시 서울이었다는 점과 해태와 비교해서 구단 대우 등이 마음에 들었는지 상당히 호의적이다. 해설할때도 엘지에 대해서 우호적인 편. 게다가 양준혁은 선수로서의 명성에도 불구하고 은퇴후 10년이 지나도록 현장에 복귀에 대한 의욕을 보이지는 않았는데, 2019년 서경석 TV에서 대놓고 '''LG 트윈스를 사랑했고 LG에 남고 싶었다'''고 밝혔다. 그리고 코치직 제안 오면 수락할거냐는 서경석의 질문에 "불러만 주면 좋지ㅎㅎ"라며 우호적인 반응을 보였다. 실제로 단장 차명석과 양준혁은 사적으로도 친한 사이고, 선수단에서도 류중일, 이병규 등 양준혁과 인연이 깊은 사람들이 많다. 이러다보니 양준혁은 타팀 출신에 비교적 짧은 시기만 뛰었음에도 불구하고 LG 팬들에게 많은 지지를 받고 있다.

2.4. 삼성 라이온즈 2기 시절


FA시장에 나서 강력한 좌타자를 원하던 당시 삼성 감독 김응용이 양준혁을 거둬주면서 4년 총 23억 2000만원에 계약에 성공했다. 여기에는 매년 100경기 이상 출장, 타율 0.305 이상, 80타점 이상을 모두 충족할 경우 매년 1억씩 추가로 받는 플러스 옵션이, 반대로 규정타석 미달, 90경기 아래로 출장, 타율 0.270 미만, 60타점 미만 중 하나라도 충족될 경우 연봉 중 1억을 반납하는 마이너스 옵션이 있었다고 한다.

2.4.1. 2002년 ~ 2008년


2002년과 2005년은 조건 미달로 인한 마이너스 옵션 발동으로 1억을 반납해야 할 상황에 놓였으나[17] 이 두 해 모두 삼성이 우승하는 바람에 프런트에서 마이너스 옵션을 실행하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FA 최고액 기록을 세우며[18]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고,[19] 2002년 이승엽, 마해영 등과 공포의 '''이마양 트리오'''를 이루며 우승 멤버가 되었다. 이후에도 삼성 타선과 선수들의 중심축을 이루며 꾸준히 팀을 이끌어주었다.[20] 첫 우승 시즌인 2002년과 2번째 우승 시즌인 2005년에 상당한 부진을 겪었지만, 그 이외의 시즌에는 A급의 활약을 해 주었다. 2003년에는 개인 최다 홈런을 경신했고 2004년에는 이승엽과 마해영의 공백을 메꾸기 위해 1루수로 전향하여 팀을 한국시리즈로 이끌었다.[21] 1루수 골든글러브는 덤. 이 골든글러브로 양준혁은 KBO의 유일한 외야수-내야수-지명타자 골든글러브를 같이 가진 선수가 되었다.
2003년 4월 15일 수원 현대전에서는 지난 1996년에 이어 개인 통산 두 번째로 싸이클링 히트를 기록했으며, 이는 역대 최고령 기록이기도 하였다. [22]
2006년 재계약 이후 극악의 투고타저 속에서 3할에 두자릿수 홈런-도루를 기록하며 부활에 성공, 2007년에는 역사상 최초로 2000안타를 달성했으며, 22홈런 20도루를 기록하며 최고령 20-20을 달성하기도 했는데, 아마 후반에 페이스가 꺾이지 않았다면 30홈런도 가능했을 2007년이었다. 2008년에는 살짝 부진했지만 2009년에는 감독인 선동열에게 탄압을 받으면서 규정타석을 채우진 못했으나 자신의 몫을 충분히 해 주었다.
[image]
2009년에 결성된 성구회에 2000안타로 가입하여 두 번째 멤버가 되었다. 2000안타를 달성한 날은 잠실 원정 경기였음에도 불구하고, 2000번째 안타를 얻어맞은 두산 베어스 측에서도 전광판에 축하 메시지를 띄웠다.
올스타전 14회 출장 기록도 갖고 있다.

2.4.2. 2008 시즌


2008년 2100안타 기록을 돌파했으나 전체적으로 부진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 2군으로 잠시 강등, 5월 30일 SK전에 다시 등장했다. 복귀 후에는 '역시 양신'이란 소리가 나올 만큼의 활약을 보여주어 시즌 초엔 1할대로 떨어진 타율이 2할 7푼 8리로 마무리되었다. 통산 안타 역시 2200안타를 넘었다. 이 과정에서 삼성을 포스트시즌에 진출시켰다.
16년 연속 세자리수 안타는 성공했지만 16년 연속 두자리수 홈런은 이루지 못하여 홈런은 15년 연속 두자리로 끝나게 되었다.

2.4.3. 2009 시즌


초반 타격 슬럼프를 겪었지만 중반 이후 부활. 삼성의 든든한 4번타자 역할을 맡았으나 LG전 내야안타를 치고 1루로 달리다가 부상. 하필 그때가 양준혁의 출루율 1위 달성일 이었다..덕분에 삼성의 타격이 약화되고 잉여 최형우가 4번을 맡게되면서 중량감 부족. 이 부상으로 17년 연속 100안타가 좌절되었다.
2009년 4월 16일 드디어 홈런성 타구를 때려 새로운 기록이 탄생하는 듯 했으나… '''비디오 판독'''후 홈런은 무효처리되고, 2루타가 되었다. 한국 프로 야구 역사상 첫번째 비디오 판독의 희생자(?)였다.
그리고 중계권료 싸움 때문에 중계가 끊겼던 어느 날, 박석민에게 TV중계가 안되니까 홈런은 가급적 치지 말라고 충고(?)를 받기도….
그리고 동년 5월 9일 결국 341호 홈런을 때려 신기록을 수립했다. # 그리고 정말로 '''문워크'''[23][24]를 했다. 그 기록의 영향 때문인지 한정판 모자가 출시되기도 했다.
7월 2일 통산 450 2루타 기록
7월 14일 KBO 최초 350홈런 기록.

2.4.4. 2010 시즌


개막 라인업에 포함되었으나 점차 성적이 떨어지면서 주전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4월 30일 최초로 2300안타를 기록했다.
5월 21일 롯데전 이후부터는 주로 우투수 상대 플래툰이나 대타로 출장하는 중. 나이와 부상이 겹치면서 파워, 스윙스피드 등의 신체능력 자체가 떨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출루율이 .387에 이를 정도로 선구안은 여전하지만 타율은 .252, 장타율은 무려 .319까지 급락했다. 이 장타율은 이종범(7월 29일 현재 장타율 .336)보다도 낮다.
6월부터 주전에서 물러난 뒤 불규칙적인 출장이 이어지면서 타격감까지 흐트러지고 있는 듯. 꾸준히 출장하면 감을 되찾을 수도 있었겠지만 젊은 선수들이 양준혁의 부진 즈음에 맹활약하고 삼성이 연승행진을 거듭하면서 별다른 기회를 잡지 못했다. 실제로 삼성이 쾌조의 12연승을 달리는 와중에도 선동열과 삼성 골수팬들의 사이는 좋지 못했다. 양준혁이 그다지 기용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6월 1일 2112경기를 출장하면서 최다 출장 기록 경신.
6월에는 드문드문 출장했지만 7월에는 5타석 대타 출장에 그쳤다. (5타석 4타수 1볼넷 1안타 2타점.) 7월 29일 현재 7월 21일 기아전에서 범타로 물러난 것이 가장 최근의 기록이다.
2010년 7월 24일 올스타전에서 동군 김성근 감독은 발목에 골절상을 입은 박정권 대신 양준혁을 현역 마지막 올스타전에 초대하게 된다. 김성근 감독의 팀인 SK에도 이미 은퇴를 선언하며 맹활약을 펼치던 김재현이 있었으나 양준혁이 발탁된 배경에는 올스타전 장소가 대구라는 점을 감안한듯 하다. 그리고 애초에 1루수 포지션에 지명타자 후보였던 김재현을 넣는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그리고 벌어진 홈런레이스에선 무홈런으로 체면을 구겻으나 본 경기에서는 8-3으로 뒤지고 있던 7회말 1사 1, 2루 상황에서 김현수의 대타로 들어와 금민철의 공을 잡아당겨 우익수 뒤 스리런 홈런을 작렬하며 역전의 발판을 마련한다. 이 홈런은 '''올스타전 최고령 홈런기록'''이다.[25] 뒤이어 홍성흔가르시아까지 연속 홈런을 작렬하면서 거짓말같이 동점을 만들어냈다. 뒤이은 8회초 수비에서는 좌익수로 들어와 녹슬지 않은 수비실력까지 보여주었다. 오오 양신 오오.. 그리고 양준혁은 김성근 감독에게 고맙다고 하며, 김성근도 양준혁에 대한 대인배적인 태도로 은혜를 얻었다고 한다. 실제로 김성근은 2008 올스타전에서도 마해영에 대한 배려로 출전 시킨 적이 있었다. 이 일화로 김성근은 삼성팬들에게 찬사를 받았다.[26]
결국 9회 말 황재균의 끝내기 안타로 2010 올스타전은 9:8 동군의 역전승으로 막을 내리게 된다.
양준혁은 그 날 인터뷰에서 그답지 않게 목이 메인 듯 "대구팬들 앞에서...좋은 모습을 보여줘서 뜻깊은 하루였다. 감사라고 해야할까...이렇게 응원해주셔서 선수로서 얼마나 행복했는지 알 수 있었다" 라고 소감을 밝혔다.
양준혁의 2010시즌 월별 기록은 다음과 같다.
3월: 3경기 14타석 타율 .000 출루율 .214 장타율 .000
4월: 18경기 54타석 타율 .419 출루율 .519 장타율 .581 (1홈런)
5월: 18경기 58타석 타율 .217 출루율 .379 장타율 .239
6월: 16경기 37타석 타율 .161 출루율 .297 장타율 .161 (주전 탈락)
7월: 5경기 5타석 타율 .250 출루율 .200 장타율 .500
8월: 출전 없음.
9월: 4경기 7타석 타율 .000 출루율 .000 장타율 .000
'''하지만 그가 이미 7월 18일에 구단에 은퇴 의사를 통보한 상태였다는 걸 안 사람은 별로 없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2.4.5. 은퇴


마지막 올스타전 홈런을 친 바로 다음다음 날인 2010년 7월 26일, 삼성 라이온즈 구단에서는 보도자료를 통해 양준혁의 올시즌 종료 후 은퇴를 공식 발표하였다. 체력적인 문제는 없지만 팀의 리빌딩을 위해 후배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주기 위함이라는것이 본인이 밝힌 사유. 최형우, 채태인, 박석민의 "3인방"이 주축으로 자리잡고 조영훈, 조동찬 등이 급성장하면서 심각한 포지션 적체가 발생한 상태였다. 삼성에선 향후 본인이 정할 진로에 대해 협조하기로 하고, 9월 홈경기 중 한경기를 은퇴경기로 정하기로 하였다. 또한 26일자로 엔트리 말소되었다.
송진우에 이어, 프로야구의 전설은 이제 더 이상 그라운드가 아닌 역사의 한 페이지에서만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당시 스포츠채널이었던 MBC ESPN (現 MBC SPORTS+)의 프로야구 하이라이트 프로그램인 '베이스볼 투나잇 야' 에서 역대 양준혁 선수생활 시절 중 최고의 순간 또는 재미있는 순간 TOP 10을 7월 26일 방송 마지막에 내보냈었다. #
한편, 일부 사람들은 삼성이 양준혁의 은퇴식을 대충 치를지도 모른다고 불안해 하기도 했다. 무노조경영으로 유명한 삼성은 노조에 대응될 수 있는 선수협을 싫어하는데, 양준혁은 바로 그 선수협 창립멤버 중 하나다. 삼성의 프랜차이즈이건만 그 선수협 하나 때문에 양준혁은 삼성, 아니 고향인 대구에 있는 팀에 다시 돌아오지 못할 뻔한 적도 있었다.(김응룡 사장이 양준혁은 꼭 데려올 기세로 협상에 임해서 망정이지….) ...'''하지만 그건 쓸데없는 걱정.''' 위 항목에 서술한대로 2002년 이후의 양준혁은 구단 쪽 인사나 마찬가지였다.
실제로 삼성은 "가장 오래 된 연인의 품에서 은퇴하고 싶었다"라고 한 양준혁의 정에 부응하듯 한국 프로야구 사상 가장 성대한 은퇴식을 약속했다. 그 말대로 삼성 라이온즈는 9회 끝나고 치러진 양준혁의 은퇴식을 성심을 다해 치렀다. 사용한 폭죽 양만 해도 어마어마한 수준이었다.
은퇴경기는 9월 19일 일요일 대구 홈경기로 치러졌다. 1주일 전인 12일 오전 11시부터 예매가 시작되었는데 프로야구 예매 대행사이트인 티켓링크 서버가 '''1분만에 터졌다.''' 이 사이 홈 방향인 3루 지정석 및 테이블석은 전부 매진되었고, 일반석마저 20분 경 모두 매진. 암표는 2만원에서 출발하여 10만원이 넘어갈 정도로 가격이 폭등.
[image]
현장예매분 3000장 역시 그것을 구하기 위해 토요일 오전부터 텐트치는 사람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경기 시작은 오후 5시였으니 장장 하루를 넘도록 기다린 것.
그런데 정작 2시가 되어 입장을 시작했을 때, 3루측, 즉 홈 응원석쪽을 먼저 열었는데 새치기 때문에 주먹다짐(…)이 일어났고, 스탭은 결국 3루 입장을 봉쇄하고 1루를 먼저 열어버렸다. 하지만 이날 경기엔 SK팬은 극소수에 불과했고, 1루로 입장한 사람들이 전력질주로 3루로 가는 바람에 3시에나 다시 3루가 열린 후에는 이미 3루 내야는 거의 차 있었다. 결국 '''텐트치고 이틀 기다린 사람들이 외야에 앉았다.''' 안습.
은퇴식을 치른 후에 등번호 10번을 영구결번 처리하였다. 같은 10번에 '''장효조'''라는 엄청난 타자가 있었기 때문에 조금 힘들수도 있다는 예측도 있었으나, 뉴욕 양키즈에서 등번호 8번을 달았던 요기 베라와 빌 디키라는 두 명의 선수를 영구결번으로 처리하는 사례가 있어서 가능할수도 있다는 반박도 있었다. 결국 양준혁 쪽으로 영구 결번이 되었는데, 통산 타율을 제외하고는 기록상에서 양준혁이 장효조에 비해 월등히 앞서기 때문이다.(그 통산 타율도 양준혁이 '''2위'''이다….) 또 다른 요인으로 보자면 양준혁이 10번을 17년(삼성에서 15년, 해태에서 1년, LG에서 1년이다. 2000년에는 57번을 단 적이 있음.)넘게 달았는데 장효조는 6년을 달았기 때문이다. 설령 영구결번이 안 됐다 해도, 송진우 못지않은 기록을 남긴 레전드에다가, 장효조와 함께 삼성 타선을 상징하는 좌타 강타자로 상징된 그 이미지 때문에 달고 싶어도 더 이상 10번을 단 선수는 보기 힘들 었을 듯 하다.
이 날의 은퇴식은 KBO역사상 최고의 규모였다고 평가된다. 1위싸움 중이었던 SK와 삼성의 사정때문에 후배 투수가 치기 좋은 공을 던져주는 등의 모습은 볼 수 없었으나, 최고의 타자이므로 최선을 다해 던져서 3삼진을 잡겠다는 경기전 인터뷰대로 3삼진을 잡은 김광현의 투구는 매우 인상적이었으며, 마지막타선에서 9회 송은범을 상대로 2루수 땅볼을 친 후 1루까지 전력질주하는 모습은 그의 삶의 궤적과 맞물려 팬들에게 영원히 회자될 모습이었다. 양준혁에게 존경받는 인물로 꼽힌 바 있는 SK 당시 김성근 감독은 "홈런 하나 치게 해 주고 싶었는데 중요한 경기라서 그럴 수 없어 미안하다"고 경기 후 인터뷰.

2.4.5.1. 2010년 9월 19일 은퇴전 (對 SK전)

은퇴경기 상대 팀이 SK이기 때문에 1위자리 수성/공략을 위한 양팀의 공방전 또한 엄청나게 치열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경기 전날 SK의 정규시즌 우승까지 매직넘버가 4이고 양팀의 게임차가 3인 상황에서, 양 팀간 올 시즌 전적은 9승 9패 동률이었다. 시즌 후반 SK의 총체적 부진과 삼성의 괜찮은 대진운이 엇갈리고 있는 상황에서 SK가 승리할 경우 매직넘버는 1로 줄어들게 되고 게임차는 5로 벌어지며 사실상 우승을 확정짓게 된다. 반대로 삼성이 승리하면 게임차는 1로 줄어들고 만에 하나 삼성이 SK를 따라잡아 시즌 최종성적에서 동률을 이루었을 경우 상대전적 우선으로 순위가 정해지는데, 이에 따라 일요일 경기 승리 팀은 한국시리즈 직행에 어느 정도 유리한 고지에 오르게 된다. 선 감독이 순위 싸움에 욕심은 없다고 하지만 선발투수를 올시즌 SK전 평균자책이 0점대인 차우찬으로 결정한 것을 보면 사실상 양준혁 은퇴경기 축하와는 별개로 절대 경기를 놓치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나'''… 1:0으로 뒤진 상황에서 현재 구위가 시망이라는 평이 많은 윤성환을 올리자 야갤, 엠팍 등이 전부 뒤집어졌다. 결국 이호준에게 홈런을 얻어맞고 0:3으로 팀은 패배.
당일 선발 투수로 내정된 김광현은 은퇴 경기 며칠 전부터 "신인 시절 첫 홈런을 양준혁 선배님께 맞았다. 선배님의 은퇴 경기라도 최선을 다해 던지는 모습을 보여주겠다. 그것이 은퇴하시는 선배에 대한 예의인 것 같다. 삼진 3개를 잡는 것을 목표로 하겠다" 는 취지의 발언을 했고, 이에 양준혁도 "고맙다." 라는 취지의 발언으로 은퇴경기에 대한 기대감을 고조시켰다.김광현의 회고
KBS SPORTS에서 중계를 하면서 이닝이 끝날 때마다 양준혁에 대한 화면을 조금씩 보여주는 방식을 썼다. 현장에 가지 못한 팬들에게는 아쉬운 대로 만족할 수 밖에.
경기에 앞서 양준혁의 아버지인 양철식 옹이 시구를, 양준혁이 시타를 했다. 연세가 일흔 다섯인 어르신이 던진 공이 홈플레이트까지 제대로 꺾여 들어가자 관중이나 해설자들이나 모두 깜짝 놀라는 눈치였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
양준혁은 1루수로 선발출장해 5회초에는 우익수로 이동했고, 마지막 9회초에 좌익수 포지션을 지켰다. 경기 전까지 김광현과의 통산 전적은 14타수 2안타 1홈런. 이 1홈런은 김광현의 데뷔전에서 쳐낸 것이다. 은퇴 경기까지 김광현과 함께라니 참 묘한 인연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1회말 첫번째 타석에서 헛스윙 삼진, 4회말 두번째 타석도 헛스윙 삼진. 7회말 세번째 타석도 헛스윙 삼진. 하일성 曰 : 김광현이 약속을 지켰네요. 허허허...

9회말 네번째 타석에서는 마무리로 등판한 송은범을 상대로 2루 땅볼을 기록한다. 타석에 들어서는 순간, 아마도 홈런을 쳤을때 터트렸어야 할 폭죽이 갑자기 터져버렸다. 뜬금없는 폭죽에 그저 안습. 그 때 야갤에선 선동열 감독이 불을 붙였을 거란 개드립이 흥했다.
양준혁이 폭풍안타를 치며 건재함을 과시하길 바랬던 팬들이 벙쪄버릴 정도의 결과. 하지만 2루 땅볼을 치고 '''있는 힘껏 1루를 향해 뛰어간''' 그의 모습, 마지막까지 '''"항상 1루로 열심히 뛰었던 선수로 기억되고 싶다. 난 한번도 1루까지 걸어간 적이 없다"'''는 말을 마지막 경기까지 지켰던 그의 모습은 모든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도 남을 순간이었다. #
5회가 종료되고 거행된 은퇴식 1부에선 상패나 기념액자 등을 전달받았다. 상대 감독이자 자신이 은사로 꼽는 김성근 감독과 포옹, 자신과 마찬가지로 올시즌 종료 후 은퇴를 선언한 SK 주장 김재현에게서 꽃다발도 받았다. 이 때 3루 관중들은 이만수를 외쳤지만 이만수는 은퇴식 내내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대구 팬들의 아쉬움이 담겨있는 장면. 하지만 경기 시작 전에 양준혁이 1루로 찾아가서 이만수에게 인사했고, 이만수와 양준혁이 포옹하는 훈훈한 장면이 연출되었다. 대구 지역 인사들이 꽃다발과 금일봉 등을 '''줄을 서서''' 건넸다. 하일성 해설은 해설하다 말고 나가서 전 KBO총장 자격으로 꽃다발을 건네기도 했다.
[image]
경기가 끝나고 은퇴식 2부가 이루어졌는데, 비가 오고 있음에도 관객들은 양준혁을 연호하며 1시간이 넘는 은퇴식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은퇴식 마지막에 양준혁 한 사람에게만 핀조명이 비춰지는 채로 걸어서 구장을 한바퀴 도는 순서때에는 거의 모든 관중들이 휴대폰을 비춰서 흔들어 휴대폰 은하수가 펼쳐지기도 했다. 양준혁 선수는 끝내 눈물을 보이기도 하였다.
"이제 저에게 주신 사랑을 후배 선수들에게, 아니 대한민국 모든 프로야구 선수들에게 전해주기 바란다"고 밝힌 양준혁 선수가 마지막으로 관중들에게 큰 절을 올리고 유니폼을 반납하고, 양준혁의 백넘버가 새겨진 유니폼을 입은 삼성 선수들이 헹가래를 치면서 은퇴식은 막을 내렸다.
당일 경기중 비가 조금 오다가 말았는데, 경기가 '''끝남과 동시에''' 비가 다시 조금씩 내리기 시작하여 은퇴식 내내 잔잔한 이슬비를 뿌리다가, 은퇴식을 '''마침과 동시에''' 거센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모든 사람들이 경기장을 빠져나가자 '''거짓말처럼''' 다시 비가 잦아들었다...
정말 의미심장한 일이 아닐 수 없다.
[image]
이 사진으로 2010 골든글러브 골든포토상을 받는다. 은퇴 마지막까지 상을 받았다.
최훈이 양준혁의 은퇴시기에 맞춰 그의 일대기를 그린 만화를 올렸다.
당시 양준혁을 진심으로 좋아했던 팬들이 많았는지 선동열을 두고두고 까거나, 2~3년이 지난 후에도 은퇴를 철회하고 현역 복귀를 원한다는 의견이 심심찮게 보였다.

3. 기록의 사나이


2002, 2005년, 2008년을 제외하고 타율 3할을 기록했고,[27][28] 9년 연속 3할 타율을 쳐내 장성호, 손아섭과 함께 공동 2위 기록을 보유하고 있으며[29] 데뷔 이후로부터 16년 연속 100안타, 15년 연속 10홈런[30]이라는 역사를 써나갔다. 한국 프로야구에서 최초로 개인통산 2000안타를 이루어낸 선수이다. 다만 본인은 안타기록보다 자신의 선구안의 증명인 볼넷기록을 더 좋아한다고 한다.
은퇴 시점에서 개인 통산 '''최다 안타, 최다 타석, 최다 홈런, 최다 사사구, 최다 2루타, 최다 루타, 최다 장타, 최다 득점, 최다 타점, 최다 출장, 최다 타수에 1위로 랭크'''되어 있었다. 이후 홈런, 2루타, 타점, 장타 등의 기록은 더 괴물인 후배에게 빼앗기긴 했지만 그마저도 은퇴하고 3년이 지난 시점부터였다. 통산 최다 안타 기록[31]도 보유 하고 있었으나 LG 트윈스 박용택이 2018년 6월 23일 잠실 롯데전에서 2319번째 안타를 침으로서 최다 안타 기록도 빼앗겼고, 2019년 5월 21일 8808번째 타석에 들어서면서 최다 타석 기록도 빼앗겼다. 사사구에서 김태균이 맹렬한 기세로 올라오고 있지만 은퇴 6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불멸의 기록으로 남아 있다. 이것만 해도 넘사벽인데 역대 최고령 기록 부분에 들어가면 정말 기록이 한도 끝도 없게 된다. 비율 스텟도 우수해서 은퇴 선수를 기준으로 했을 때 개인 '''통산 타율 2위'''(.316)[32][33], '''장타율 4위'''[34]를 기록하고 있으며, 더해서 '''도루 19위'''까지 기록하고 있다.
양준혁에게 안타까운 면모가 있다면 바로 한 시대를 지배한 이미지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그의 통산 기록은 아주 훌륭하며, 비록 이승엽에게 몇개 종전된 기록이 있더라도 훌륭한 기록이다. 허나, 꾸준함을 대표하는 면모가 있듯이 그에 비해 한 시즌에 한해선 어마어마한 임팩트를 남기지 못했다. 그나마 데뷔 첫 해 타격왕과 홈런 타점 각 2위를 차지하며 시즌 내내 괴물신인으로 화제가 되었을 때가 가장 임팩트가 있었다랄까, 훌륭한 통산 기록에 비해 단 한 차례도 홈런왕을 해보지 못했고, 2000년대 들어선 KBO 역대 최고의 거포로 평가받는 이승엽에 묻혀 1인자의 이미지가 드물다. 아직까지도 논란이 되는 이종범과의 기록 비교에선 보통 꾸준함이 대표되는 양준혁이 좋은 평가를 받는 반면, 폭발적인 면모에 있어선 이종범에게 밀린다는 평. 물론 이종범은 일본시절의 추락과 커리어 후반 급속한 노쇠화로 인해 현 시점에서는 별 의미없는 주장이지만. 또한 KBO의 대표적인 천재 호타준족과도 비교되기도 하며 양준혁을 까내리기도 하는데, 박재홍과 양준혁의 주루 능력은 대동소이하며 둘다 도루 성공율이 60%초반(...)이기 때문에 호타준족이라는 측면에서 둘은 유의미한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보는 시각에 따라 클래식 스탯이 이종범, 박재홍이 양준혁보다 화려했다고 해도 2차 세부 스탯을 파고들면 양준혁이 둘에게 부족함이 없다.[35][36]
수비 포지션 뿐 아니라 타격 포지션과 역할 역시 크게 달랐기 때문에[37] 쉽게 비교하기는 어렵지만 간단하게 말해서 업적은 양준혁이 뛰어나고[38], 임팩트는 이종범[39]이 뛰어나다고 정리할 수 있다. 그 외에도 평생 한 번도 하기 힘든 사이클링 히트를 두 차례나 기록한 선수이다.
전형적인 OPS형 타자로서 컨택능력과 장타력을 겸비했으며 선구안도 대단히 좋아서 출루율도 매우 높다. 볼넷 대 삼진 비율을 측정하는 BB/K의 수치가 통산 '''1.4'''이며 '''단 한 시즌을 빼고 모조리 1.0을 넘었다.''' 보통 타자들의 평균적인 BB/K가 0.6~0.7수준이라는 것을 유념할 것. 타격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했던 06시즌 이대호의 BB/K가 0.71, 10시즌에도 0.70이라는 것을 보면 이는 거의 사기 수준. 사족으로 1.0 못 넘은 그 한 시즌도 0.7.[40]
양준혁은 야구인들 중에서도 볼넷의 가치를 매우 높게 치는 사람인데 실제로 은퇴직후 각종 인터뷰 등에서 자신이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타이틀로 최다 볼넷 타이틀을 언급하기도 했으며 2019년 기준 그가 세웠던 9개의 타이틀 기록 중 8개의 기록이 깨졌으나 아직까지 최다 볼넷 기록만큼은 깨지지 않았다. 해설위원 활동을 시작하면서 "주자가 없는 상황에는 1루타보다 볼넷이 더 효과적이다. 상대투수와 수비진에게 가하는 스트레스가 볼넷이 더 크기 때문이다. 구단에서 타자에게 보너스를 줄때 볼넷에는 1루타보다 더 큰 가중치를 줘야 한다."라는 말을 한 적도 있다. 이렇게 양준혁은 기본적으로 선구안과 타격기술이 매우 뛰어난 교타자라고 할 수 있으나 근본적으로 신체적인 힘이 뛰어나서 제대로 맞으면 타구를 까마득하게 날려버릴 수 있다. 말하자면 교타형 장타자. 이러한 형태의 타자의 계보는 양준혁 이후 김동주를 거쳐 김태균과 이대호로 이어지고 있다. [41] 그로 인해 슬럼프가 쉽게 오지 않아 불혹을 넘긴 나이에도 타격에선 그 존재감과 꾸준함을 드러내, 현역 말기에도 삼성 라이온즈에서 양준혁을 빼면 타순이 안 짜여질 정도였다.
머슴스타일의 외모와 주루방식, '방망이를 거꾸로 잡아도 3할은 친다' 라는 명성 때문에 가려져있지만 도루기록도 꽤 된다. 2007년에 38세의 나이에 기존의 이종범을 넘어 역대 최고령 20-20에 가입하였다. 2위 기록이 2003년에 수립된 이종범의 33세이다. 다리가 빠르다기보다는 타이밍을 잘 포착하는 편이다. 다만 도루 성공률은 심하게 떨어지는 편. 통산 도루가 193개로 꽤나 많지만 통산 도루실패 또한 113개(..)로 매우 많다. [42] 흔히 도루성공률이 65% 이하이면 경기에 별 도움 안 되는 민폐 도루라고 여겨지는데 양준혁의 통산 도루성공률은 61.8%.. 20-20을 기록한 4시즌 중 2007년 1시즌을 제외하고 도루성공률 7할 이상을 기록한 시즌이 없다.. [43] 그냥 '도루가 가능할 정도의 느리지 않은 발을 가졌다..' 정도로 여기면 될 듯. '''참고로 2015년까지 삼성에서 개인통산 도루 1위였다.''' 이는 기존 삼성에서의 1번 타자였던 류중일, 강동우, 박한이 이 셋의 개인통산 도루가 양준혁을 못 넘는다는 소리이다. 강동우야 뭐 부상 때문에 그라운드에 돌아온 게 기적이었고, 그래서 참작이야 가능하다지만, '''오랜 시간을 1번 주전으로 뛰었던 류중일과 박한이의 통산 도루가 클린업 타순이었던 양준혁을 넘지 못한다는 것은 대단히 심각한 일이다.''' 이후 김상수와 박해민 등이 무섭게 치고 올라오며 이 명예인지 불명예인지 모를 기록은 깨졌다.
대부분의 타격 관련 기록을 갖고 있었고 타석에 들어설 때마다 기록제조의 순간임에도 불구하고, '''아이러니하게 홈런왕을 차지해 본 적은 한 번도 없다.'''. 또한 '''시즌 MVP나 한국 시리즈 MVP 수상도 전무'''. 그것 때문에 본인 스스로가 2인자라고 여긴다지만[44], 홈런왕과 도루왕을 제외한 다른 부분에서는 1위를 차지한 적이 수도 없이 많다. 인생에서 단 한번만 기회가 올 수 밖에 없는 신인왕을 무려 이종범을 이기고 차지했으며, 특히 타격왕은 4회나 차지하여 장효조와 더불어 이 부문 공동 1위이다.
프로야구 10000호 홈런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으나 송지만이 홈런을 치고 누의 공과를 하는 바람에 '''9999''' 홈런이 되어버려서 펠릭스 호세에게 돌아갔다.

[1] 당시에 입단 동기로 신인왕 경쟁자가 이종범, 박충식, 구대성, 이상훈이었다.[2] 신인왕+홈런왕이라면 1996년의 박재홍이 있다. 이 둘은 프로야구가 생긴지 40년가까이 지난 지금까지도 누가 최강의 신인타자였나 다툼을 할 만 하다.[3] 여담으로 류현진은 KBO 역사상 유일무이한 신인왕+MVP를 가져갔다. [4] 만약 양준혁이 1992년에 정상적으로 쌍방울에 입단했다면 이 둘이 같은 유니폼을 입고 사진을 찍었을 것이다.[5] 삼성 구단 역사상 최초의 신인왕 수상이었다. 그 전까지 삼성은 당시 KBO 리그에 소속된 8개 구단들 가운데 유일하게 신인왕을 배출하지 못했는데, 양준혁이 1993시즌 신인왕을 수상하면서 비로소 삼성도 신인왕 배출 구단으로 기록되었다.[6] 물론 과거에도 삼성 소속으로 신인왕을 노릴만한 선수들은 많았다. 첫 사례인 1983년 장효조는 타격 1위를 차지했지만 이미 유명해서 신인으로 간주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OB 박종훈에 밀렸고, 1987년 류중일은 같은해 22경기 연속 안타를 기록하여 주목받은 빙그레 이정훈에게 신인왕을 내주었다. 1989년에는 강기웅이 타율 2위를 기록하며 맹활약했지만, 신인 최다승인 19승을 올린 태평양 박정현에게 졌다. 이듬해인 1990년에는 이태일이 노히트노런을 포함하여 10승 이상을 기록했지만, 팀을 정규리그 1위로 이끈 LG 포수 김동수에 밀렸다.[7] 역시 삼성 출신이었던 장효조가 프로에 데뷔했던 1983년 이후 10년만에, 신인 선수가 타율 1위를 기록한 것이었다.[8] 대신 그해 신인왕 경쟁자 중 하나였던 해태 이종범 이 한국시리즈 MVP를 차지하면서 연말 스포트라이트의 중심에 섰다.[9] 이 해 양준혁은 타율, 출루율, 장타율에서 모두 1위를 차지하고 홈런 2위 타점에서 단 1개가 부족한 2위를 기록한 가장 압도적인 타자였으나, 그해 홈런-타점왕을 앞세운 김성래가 MVP를 차지했다. 당시만 해도 신인에게 MVP까지 둘 다 안겨주는 것은 지나치다는 인식이 강했던 점도 작용했다. 이같은 인식 때문에 1996년 박재홍 역시 데뷔 첫해부터 30-30 클럽을 기록하는 등의 독보적인 활약을 펼치고도 투수4관왕을 기록한 구대성에게 MVP를 내주었다. 이처럼 신인에게 한 해에 MVP와 신인왕 둘 다 줄 수 없다는 인식은 2006년 류현진이 KBO 사상 최초로 이 둘을 싹쓸이하면서 비로소 깨졌다.[10] 다음 해에 95-117-95로 다시 줄인다.[11] 타율, 안타, 득점, sWAR에서는 아쉽게 2위를 기록했다.[12] 임창용은 당시만 해도 선동열에 이어 해태의 마무리를 맡아 최연소 구원왕을 차지했으며 잠수함 투수로 보기 드문 '''150km/h''' 강속구를 던지고 있었다. 거기에 20대 초반에 아시안게임에 나가 병역 문제까지 해결된 상황이어서 더욱더 가치가 치솟던 상황이었다.[13] 황두성의 경우는 해태 실무자의 실수로 트레이드된 사례다. 원래 해태가 원했던 선수는 정현욱이었는데 '덩치 크고 밥 잘먹는 투수'라고 전달해서 고의적이였는지 실수였는지 황두성을 보낸 것. 물론 해태는 황급히 정정하려 했으나 이미 짐싸고 입단식까지 한 상황. 무른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상황인지라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결국 황두성은 해태 이적 후 성적 부진으로 3년만에 퇴출을 당한다.[14] 유난히 지독했던 군기와 서열, 리그에서도 손꼽히는 부실한 모기업과 지원 등... 그러거나 말거나 돈도 없는 구단이 양준혁의 연봉 1억 4천이나 주면 끝난거다. 아니, 양준혁은 전년도 활약으로 따지면 연봉 상승 대상자 였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트레이드 왔으며 구단에서는 동결을 하자고 오히려 애걸복걸 했었다.[15] 손혁도 위 문단에 쓰인 해태의 분위기때문에 트레이드를 거부하다가 임의탈퇴까지 갔다.[16] 여기서 홈런과 타점은 제외. 홈런은 15개가 최다였고 타점은 2년 연속으로 92타점을 기록했다.[17] 아마 3할로 추정.[18] 종전 기록은 2000년 홍현우(LG)와 김기태(삼성)의 4년 총 18억. 이후 2003년 시즌을 마치고 마해영이 28억, 진필중이 30억, 정수근이 40억 6000만원을 받으며 기록이 다시 경신된다.[19] 다만 이 당시에도 삼성 구단은 양준혁이 선수협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영입을 껄끄러워 했는데 해태 시절에 같이 한 바 있던 김응용 감독이 우승을 위해선 좌타자를 보강해야 한다는 이유로 강력히 요청하는 바람에 위에 상기한 대로 옵션을 여러가지 걸어서 계약했다고 한다.[20] 그와중에 이승엽이 뒷담으로 김응용 감독을 비난하다가 양준혁의 레이더에 걸려서 많이 얻어 맞았다고 한다.[21] LG 시절에도 잠깐 1루수를 보았다.[22] 이 최고령 타이틀은 10년 후에 라뱅이 경신한다.[23] 무릎팍도사에서 내걸었던 공약이다.[24] 실제로는 잔디에 스파이크가 걸려서 그냥 뒷걸음질을 쳤다.[25] 은퇴 후에 인터뷰 등에서 이 홈런을 언급하며 사실 선수생활을 마무리하는 순간은 바로 이 올스타전 경기라는 식으로 이야기 하였다. 안그래도 상징성있는 올스타전인데다 삼성의 홈인 대구구장에서 경기 했으니... 그래서인지 후술할 올스타전 인터뷰에서도 어딘가 작별인사와도 같은 말을 했던 듯 하다.[26] 과거 김성근이 삼성 감독을 맡았을 때 삼성 팬들은 김성근식 야구를 싫어하였고, 김성근이 물러난 후 3년 연속 포스트시즌 탈락 등 암흑기가 오는 등 김성근과 삼성 팬들 관계는 그닥 좋지 못하다.[27] 사실 1994년의 타율은 2할9푼9리7모로 삼할에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사사오입으로 인해 기록상 3할로 간주한다.[28] 2007년까지 팀의 우승 또는 본인의 3할타율이라는 진기한 기록을 수립했다.[29] 1위는 10년 연속 3할의 박용택[30] 2008년에 8홈런을 치면서 끊겼는데, 2009년에 다시 11홈런을 쳤다.[31] 2318개[32] 1위는 장효조 (.331). 현역 선수들 중엔 김현수, 김태균 등이 양준혁 앞으로 갔다 뒤로 갔다를 반복 중이다.[33] 현재 손아섭이 현역 포함 통산 타율 2위이다[34] 이승엽, 심정수, 데이비스에 이은 기록. 현역 선수 중에는 최형우, 박병호, 김태균이 근소하게 앞서는 가운데 나머지 선수는 약간 차이가 있는 편.[35] 팬의 시선에 따라 좋게 평가하는 선수가 달라질 수는 있겠지만 '누가 더 좋은 선수인가'는 결국 마지막에 남긴 기록이 말해준다. 가령 이종범의 93-97시즌은 양준혁의 5시즌을 능가할 뿐 아니라 KBO 역사에 남을 퍼포먼스를 보였지만 이종범이 5년동안만 선수생활을 한 것은 아니다. 물론 이종범은 5년 반짝 타자는 아니었고, 일본 복귀 후 몇 번의 부상이 있었으나 2005년까지 꾸준히 리그 최상위권의 테이블세터의 기록을 남겼다. 02,03,05시즌에는 sWAR이 양준혁을 앞서기도 했으나 나머지 해에서는 양준혁이 이종범의 sWAR을 앞선다.[36] 양준혁의 통산 wRC+는 160인데, 장타력을 극적으로 향상시키면서 로하스와 함께 리그를 폭격하고 있다는 이정후가 2020시즌 절반정도를 지나면서 기록하고 있는 wRC+가 162이다. 2020 전반기 이정후 정도의 타격을 18년동안 보여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37] 양준혁은 클린업에 배치되는 ops형 타자로 장타, 홈런이나 출루를 목표로 득점을 취하는 타자이지, 이종범처럼 테이블세터로 나와 빠른발을 이용하며 도루를 하거나 타격을 하며 홈런이 따라오는 선수는 아니다.[38] 양준혁 통산 KBO 타자 WAR 1위, 이종범 타자 4위[39] 144경기 환산시 단일시즌 타자 WAR 1위[40] 굳이 따지자면 통산 1.75라는 괴물같은 수치의 장효조가 있지만 양준혁은 300개가 넘는 홈런을 기록하면서 세운 기록이라는 점....[41] 넷 다 곰같은 체구를 바탕으로 제대로만 맞히면 비거리 150m의 초대형 홈런도 때릴 정도면서도 동시에 매우 정교한 타격을 보여준다.[42] 참고로 통산 도루실패가 113개로 같은 이종범의 통산 도루는 510개. 다만 이종범의 경우 도루성공율이 무려 81.9%로 300도루 이상자 중 유일한 도루 성공율 80%기록자로, 도루수에 비해 도루실패가 놀라울 정도로 적다.[43] 이와 비슷한 스타일의 선수로 박재홍이 있다. 이 분은 30-30을 3시즌이나 기록하였고 크보 유일의 250-250을 달성한 호타준족이지만 통산 도루성공률은 고작 64%..[44] 그래서 무릎팍도사 출연시 고민이 '2인자의 설움을 말할 곳이 없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