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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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출생과 아동기
김일성의 처 김정숙은 보로실로프[1] 근처 야영에서 김정일을 낳았다. 한때는 김정일이 비야츠코에서 태어났다는 설이 베이징에 사는 전 유격대원 리재덕의 증언에 의해 힘입은 적이 있으나 1942년 4월 18일에 작성된 야영 대원 명부에서 김정숙의 이름이 발견되면서 비야츠코에 출생설은 수정되었다.
북한에서는 김정일이 장백산 근처 밀영에서 1942년 2월 1일에 태어난 것으로 되어 있다. 어린 시절의 이름은 '유라'. 러시아식 이름 유리#s-1.3(Юрий)의 애칭이라고 한다. 그의 러시아식 이름[2] 은 '유리 이르세노비치[3] 킴'이다. 이 '유라'라는 이름은 10대 시절 내내 사용했고, 남산 고급중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진학을 앞 둔 무렵인 1960년 여름, 졸업을 앞두고[4] '이제 내 이름은 김유라가 아니라 김정일로 고쳤으니 앞으로 김정일로 불러달라' 고 급우들에게 선언했다고 한다. 한자도 처음에는 正一이라고 했다가 80년대에 다른 이복 형제들과 함께 사용하는 一자를 버리고 유일한 후계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해 김일성의 한자와 맞춘 日자를 사용해 正日로 바꿨다고 한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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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이 태어났다고 북한이 선전하는 백두산 밀영. 뒷산이 정일봉이다.
황장엽의 증언에 따르면 김일성이 어느 날 빨치산 출신들을 불러 백두산 밀영 자리를 찾아보라는 지시를 내리자 어느 누구도 찾지 못했다. 그러자 김일성이 직접 나서 경치가 좋은 곳을 찾아내 '여기가 밀영지였다' 고 지적하고 그 뒷산을 '정일봉' 이라고 이름 지어주었다. 그 뒤에 거대한 화강석 바위를 구해다가 거기에 엄청나게 큰 글자로 '정일봉' 이라고 새기고 그것을 산봉우리에 올려다 붙이는 대공사를 진행했다. 이렇게 해서 백두산 인근 삼지연시 듣보잡이었던 어느 산봉우리가 김정일의 '공식적인' 출생지가 되었다. 어이없게도 북한 당국은 김정일의 생일이 1942년 2월 16일인데 정일봉이 봉우리만 따졌을 때 높이가 216.42m라 하늘에서 산 높이까지 생일에 딱 맞게 점지해 주었다며 김정일이 하늘에서 내린 인물이라는 증거라고 열심히 주민들에게 선전했다.
해방 후 부모와 함께 수송선 편으로 귀국해 일본인의 자택을 압류해 만든 평양의 수상관저에서 단란한 생활을 보냈지만 몇 년 뒤 자신의 남동생 김만일[6] 와 수상관저 연못에서 놀다가 김만일이 익사했다고 한다. 이때 김정일이 겁을 먹고 남동생이 빠져 죽는 것을 보고만 있었는데, 나중에 김일성이 김정일을 책망할 때마다 두고두고 이때의 일을 이야기했다고 한다. 김만일이 죽은 지 한참 후(1954년)에 김일성은 다른 부인에게 또다시 아들을 얻었는데, 이름을 김평일로 지었다.
KBS의 다큐멘터리 <대기획 김정일>에선 김정일이 겁을 먹었기 때문에 동생의 익사를 보고만 있었다고 하였고, 같은 방송의 다른 다큐멘터리 <김정일, 금지된 과거>에서는 아예 김정일이 동생이 익사하는 걸 방치하는 수준이 아니라 연못에서 기어올라오는 동생을 걷어차서 자꾸만 물속에 처박았다는 주장을 소개했다. 어쨌거나 김일성은 아들이 물에 빠져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연못을 통째로 메워버렸다고 한다.
일단 북한의 공식적인 주장으론 김정일과 김만일이 놀고 있었는데 '알 수 없는 어떤 이유'로 김만일이 물에 빠졌고[7] 놀란 김정일이 허겁지겁 아버지를 불러왔으며, 놀란 김일성이 다시 자신의 주치의를 불러왔지만 이미 김만일은 숨진 후였다는 것이다. [8]
이 시기를 전후해 아버지 김일성이 김성애와 일종의 불륜 관계를 맺으면서 김정일의 생모인 김정숙을 멀리했고, 1949년에는 생모인 김정숙도 넷째를 출산하다가 사망했다. 이후 계모로 맞이한 김성애와 그의 이복 형제들과 갈등을 겪었고 계모 김성애를 절대로 어머니로 인정할 수 없던 김정일은 김일성에게 당당히 허락 받아 계모 김성애를 어머니 대신 "아주미(아주머니)"라고 불렀다고 한다.[9] 이렇게 생모와 남동생의 죽음, 계모와의 갈등을 겪으며 자랐기 때문에 자신의 유일한 혈육인 여동생 김경희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품게 된다.
2. 청소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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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는 정말 날씬해서 '''외모로만 따지면 유일한 리즈시절이던 때이다.'''
1948년 평양의 남산학교 인민반에 입학했다. 6.25 전쟁 중에는 만경대 혁명자유자녀학원에 편입했으며 그 후 6·25 전쟁 후에 1954년 삼석인민학교[10] 를 거쳐 평양 제4인민학교를 졸업했다. 평양 남산고급중학교[11] 에 입학하여 1960년에 졸업했다.
초급중학교 2학년 때 김정일은 학교 소년단 위원장에 뽑혔고, 남산고중에서는 민주청년동맹 부위원장[12] 을 지내기도 했다. 북한의 선전물에서는 당연히 그의 학업 성적이 전 과정 전 과목에서 최우등이었을 뿐만 아니라 학생들 사이에서 탁월한 지도력을 발휘했다고 적 고 있다.
하지만 前 남산고중 교원 출신 탈북자의 증언이나 김정일과 중·고등학교 생활을 함께 한 사람들의 회고를 종합해 보면, 성적은 중간 정도였다고 한다. 축구와 낚시, 사냥에 관심이 있었고 남산고중 시절 이미 오토바이를 몰고 다니는 것을 즐겼으며 학업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황장엽의 증언에 따르면 김정일은 책이나 긴 글을 읽는 것을 견디지 못했다고 한다.
김정일은 학업에 관심이 없었으나, 대부분의 아버지가 그렇듯이 아버지 김일성의 자식에 대한 교육열은 높았다. 그로 인한 황당한 일화가 있다. 김일성은 해마다 여름이 되면 평안북도 창성군 약수리에 휴가를 갔는데, 그때마다 김정일을 데리고 가서 틈나면 러시아어 회화를 가르쳐주곤 했다. 그런데 한 학기가 지나 겨울방학이 되어 김일성이 여름에 가르쳐준 러시아어를 시켜보았더니 독해, 문법은 곧잘 해냈지만, 회화에 이르러서는 김정일이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며 한마디도 알아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것이었다. 김일성이 벌컥 화를 냈다.
곧바로 교육문화성 간부들에게 '남산고중 러시아어 수업에 대한 검열 과업'이 내려졌다. 특히 남산고중 러시아어 선생들의 회화 실력이 낮은 것 같으니 자세히 알아보고 대책을 세우라는 것이었다. '러시아어 학습검열 그루빠(그룹)'가 조직되었다. 검열 결과, 남산고중 교사들의 러시아어 실력과 교수법에는 문제가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당시 남산고중 러시아어 교사들은 대부분 러시아에서 태어났거나 모스크바에 유학을 다녀온 사람들이었다. 문제는 김정일이 러시아어를 제대로 공부하지 않고 게으름을 부린데 있었다.
그러나 어찌되었건 교사 일부를 교체하는 선에서 사태를 일단락 지었다. 또 김일성은 김정일의 러시아어 교습을 위해 김일성종합대학의 교수 김현식에게 지시하여 러시아어 과외를 시켰다. 김현식의 지도로 실력을 키운 김정일은 이후 푸시킨의 시를 러시아어로 발표하는 대회를 가졌고 거기서 우레 와 같은 환호를 받았다.[13] 이 시기를 즈음해서 어린 시절 어머니 김정숙을 잃고 매우 내성적인 성격이었던 김정일이 외향적이고 밝아졌다고 한다.
공부는 별로 잘하지 못했다고는 하지만, '''러시아에 사는'''[14] 그의 중·고등학교 동창들은 '김정일이 아무 친구와도 잘 사귀었고 무엇이든지 정열적으로 하는 스타일이었다' 고 회상했다. 남산고중 때 반미 시위를 주동했고 졸업 기념 앨범 제작과 졸업 파티를 주선하는 등 또래의 교우들 사이에서 통솔력을 발휘했다고 한다.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며 영화, 무용, 음악회를 자주 관람했고 이들을 집에 불러다 가끔 연회를 열기도 했다는 증언도 있는 것으로 보아 교우 관계도 의외로 좋았던 것 같다.
3. 청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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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시절 도로 건설 현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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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대 초반의 김정일. 이때부터 벌써 배가 나왔다.
1960년 김일성의 지시로 동독 항공군관학교에 유학했지만, 규칙적인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1개월만에 하차했다고 한다. 김정은의 경우처럼, 가명을 사용하여 학적에는 남아있지 않다고 한다.[15]월간조선 2016년 4월호
베를린에서 발행하는 《타게스슈피겔(Tagesspiegel)》지도 1994년 7월 12일 이 같은 사실을 보도했다. 이 신문은 정통한 소식통을 인용, 김정일이 김일성의 명령으로 지난 60년 동독에서 잠깐 유학했지만, 사관생도로서의 엄격한 훈련을 이기지 못해 불과 1개월 만에 중도하차했다고 썼다.당시 기사 제목은 ‘의문의 인물 김정일에게 동독군은 너무 엄격했다’였다.
어쩔 수 없이 김정일은 1960년 4월 김일성종합대학 경제학부 정치경제학과에 입학, 64년 8월에 졸업했다. 김일성종합대학에서도 김정일은 학교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미모의 여학생을 수시로 농락, 임신시키는 등의 행동을 했다. 문건 내용을 그대로 옮긴다.
〈어린 학생 시절부터 나이 많은 사람에게 한 번도 경어를 써본 적이 없을 정도로 안하무인 격인 망나니 행동을 해온 김정일은 김일성 대학 시절미모의 여학생을 보기만 하면 마구 농락, 임신시키는 등 호색 문제아의 면모를 보였다. 중학생 때도 주위의 여학생 중 마음에 드는 여자는 경호원을 시켜 닥치는 대로 납치, 농락하였다.〉 北 김정일 김정은의 잔인성과 복잡 음탕한 여자관계
남산고중을 졸업한 김정일은 당시 북한 사회 지도층에게 널리 퍼져있던 소련 유학 대신에 김일성종합대학 경제학과 진학을 택했다. 대학 입학을 앞두고 아버지와 소련을 방문했을 때 모스크바 국립대학교를 둘러보면서 안내하던 소련 공산당 관계자가 김정일에게 당연하다는 말투로 "이제 동무도 곧 모스크바 국립대학교에 입학하겠지요?" 라고 묻자 "평양에도 김일성종합대학이라는 훌륭한 대학이 있어요, 나는 거기에서 공부할 겁니다." 라고 잘라 말했다고 한다. 이는 소련과 같은 강대국의 오만한 대국주의 성향에 한 방 먹이고 조국의 자존심을 지킨 사례로 북한내에서 선전되고 있다. 황장엽의 추측으로는 그가 유학을 가지 않은 것은 후계자 경쟁을 이미 미리 염두에 둔 결정일 것이라고 하지만 진실인지는 알 수 없다.
이 결정대로, 김정일은 1960년 9월 김일성종합대학 경제학부 정치경제학과에 입학해 대학 생활을 시작했다. 입학날 학교 뒤에 있는 용남산 언덕을 오르면서 즉석에서 삘 받아 지었다는 <조선아 너를 빛내리>라는 시는 북한에서 유명하며 시비도 건립되었고 노래로도 만들어졌다.#
이후 재학 중에 '10,000페이지 읽기 운동' 까지 전개하면서 장서 5만 권을 독파하고, 갖가지 논문을 저술하면서 학구열을 불태우며 천재성을 드러냈으며, 어은동 군사 훈련에서 학우들을 모범적으로 이끌었다는 건, 북한 당국의 뻥이다.
사실, 김정일은 초중고 시절과 마찬가지로 학업에 별 흥미를 보이지 않았고, 거의 매일 수업을 빼먹으며 중앙영화보급소로 나와서 영화를 보는 등, 영화에 빠져 지냈다. 심지어 중앙영화보급소에서 김정일을 위해 특별 영사실을 따로 마련해주기까지 할 정도였다.
게다가 군사훈련에서 맹활약했다는 주장도 실제로는 날조다. 당시 김정일은 2학년 말 ~ 3학년 초의 2달 동안 평양시 룡성구역 어은동 소재 군사 훈련소에서 야영 훈련 중이었는데, 김정일은 이때도 야영지를 몰래 빠져나와 영화를 보다가 김정일이 갑자기 없어진 것을 알고 한참을 찾아다니던 삼촌에게 걸려 얻어맞기도 했다고 한다. 물론 그 이후 김정일은 군대는커녕 군사 훈련도 제대로 받은 적이 없지만 그럼에도 '장군님' 으로 불리고 있고, 그가 훈련을 빼먹고 나가 버렸던 어은동 군사 훈련소는 현재 어은동 혁명사적지로 불리며 김정일을 활약을 기리는 사적지가 되어있다.
대학 시절 발표했다는 졸업 논문을 비롯한 무수한 논문들도, 자신이 쓴 것은 없고 지도 교수였던 경제학 박사 전용식이 대필해주었다고 한다.
대학 재학 중이었던 1961년 7월 22일에 김정일은 학생 당원 신분으로 조선로동당에 정식으로 입당해 정치에 첫 발을 들여놓게 되었고, 1964년 대학을 졸업한 뒤 본격적으로 정치 활동에 나서게 되었다.
4. 권력 장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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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에 아버지 김일성과 함께 찍힌 모습. 뒷쪽의 납북된 의사양반(…)처럼 보이는 안경 쓴 인물은 당시 로동당 대남비서 허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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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무를 수행 중인 김정일.
김정일은 성인이 되기 전부터 권력에 대한 욕망이 컸다. 김정일의 개인 교사 중 한 사람이었다는 황장엽의 증언에 따르면, 10대 시절에 아버지 김일성이 정치적으로 관심 있어하는 분야라는 이유로 황장엽을 데리고 소련의 농업 전람관을 직접 함께 방문해 기술적인 문제에 대해 아주 세세하게 질문했다고 한다. 17살부터는 김일성의 공식 행사에 동석하면서 김일성의 경호원들을 다른 정치 국원들 대신 자신이 직접 관리하며, 세부적인 사항까지 자신이 직접 검토하면서 과업 지시를 하고 또 보고를 받으며, 아버지의 공식적인 활동을 관리했다고 한다.
심지어 아버지를 수행할 때 자리에서 일으키고 신발을 신기고 부축해가는 쇼를 자신이 계획해 실행했다고 한다. 당시 김일성은 노친네도 아니고 40대 후반의 팔팔한 나이라 부축이나 수발 따위는 전혀 필요 없었지만, 이러한 김정일의 세세한 보살핌에 굉장히 만족스러워했다고 한다. 김정일은 김일성 우상화에도 앞장선다. 만경대 김일성 생가, 주체사상탑, 평양 개선문 건설 등을 주도했다.
10대 시절에 이미 김일성과의 부자 관계를 자신의 정적들에게 과시하고 또한 아버지의 신임을 얻기 위해 심기를 관리하는 치밀하게 계산된 행동은, 훗날까지 이어지는 이미지 메이킹이나 권모술수에 관한 탁월한 재능을 일찌감치 보여주고 있었다. 황장엽은 성인이 되기 전의 김정일의 이러한 행동을 보고 삼촌 김영주를 쫓아내고 후계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예감을 했다고 한다.
1967년 숙청된 북한 정치권 내 최후의 김일성 반대 파벌이었던 박금철을 중심으로 한 갑산파가 박금철 부부의 항일투쟁을 찬양하는 <일편단심>이라는 영화를 제작했던 것을 통해 영화계에 갑산파의 영향력이 컸다는 것을 알게 된 김일성이 "영화예술 분야에서 반당 종파분자들의 여독을 완전 청산하라" 는 지시를 내린 뒤 김정일은 영화광인 자신의 취미를 살려 24세의 나이에 당 선전선동부 문화예술과장의 자리를 맡게 되었다.
이때 자신의 지휘 하에 북한 내에서 혁명적 대작으로 꼽히는 김일성 우상화 영화를 제작하게 된다. <유격대 5형제>, <한 자위 단원의 운명>, <피바다>, <꽃 파는 처녀>, <밀림아 이야기하라>와 같은 작품이 그것이다. 특히 피바다는 직접 관람한 혁명원로들이 눈물을 흘리기도 했으며 김일성은 예술성과 사상성이 결합된 우리식 가극을 창작하였다라고 극찬했다고 한다. 이를 통해 이전까지 김일성의 유력한 후계자로 점쳐진 자신의 삼촌 김영주와 벌인 충성 경쟁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이러한 성과로 김정일은 김일성의 신임을 얻었고 당 비서국 조직 및 선전담당 비서의 자리에 올라 자신의 권력 입지를 강화하게 되었다.
1970년,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었던 김영주는 조선로동당 제5차 당대회에서 김정일에게 정치국 후보위원 자리를 주는 것을 제안했지만 김일성은 시기상조라는 이유로 이를 거부했다. 이에 김정일은 자신의 전문 분야인 예술 쪽에서 적극적인 활동을 펼치며 아버지의 눈에 들기 위해 노력했다. 1972년, 김정일은 마오쩌둥의 홍위병을 모방해 국가경제기관 종사원, 대학생, 대학교원, 공장·기업소의 기술자와 과학자 등의 직업을 가진 젊은 미혼 남녀를 대상으로 '3대혁명소조'라는 조직을 만들었다. 이 소조들은 전국 각지의 공장과 협동 농장, 행정기관, 문화예술기관, 각급 학교에서 간부들의 보수주의, 경험주의, 요령주의, 기관 본위주의, 관료주의 등의 악습을 개조하기 위한 사상 투쟁을 한다는 명분으로 곳곳에 배치되었고, 광범위한 분야에서 통제/조정/감독권을 행사하는 막강한 권한을 쥐고서 감시한 정보를 김정일 자신에게 직접 보고하도록 했다. 김정일은 이 소조 활동으로 자신이 권력의 말단에서부터 주요 기관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고 세밀하게 직접 감시, 통제할 수 있는 지휘 계통을 갖췄고 이를 기반으로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크게 확대했다. 1973년, 결국 김영주가 건강상의 이유로 2선으로 물러나자 김정일은 1973년 9월 조직선전당당비서, 조직지도부장, 선전선동부장에 임명되었고 1974년 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정치위원으로 선출되어 김씨 일가의 권력 사유화를 진두 지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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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북한 사회에서 60년대는 비교적 '''리버럴'''한 사회였다. 갑산파를 비롯한 김일성의 견제 정치세력도 존재했고 주말만 되면 북한의 젊은이들은 소련, 헝가리, 폴란드에서 나온 영화를 보며 나들이를 했고, 동유럽과 소련의 민요를 부르고 춤을 추면서 불야성의 파티를 벌였다.
하지만 김정일의 3대 혁명 이후로 서방은 물론 동구권의 문물도 외국 것이니 나쁘다는 이유로 금지되었고, 상호 감시, 보고, 비판 체계는 북한 사회를 극도로 경직되게 만들었다. 물론 꽤 자유롭던 분위기를 김정일 혼자 깽판쳐서 없앤 것은 아니고 스탈린 사후, 흐루쇼프가 스탈린을 비판하면서 탈스탈린주의를 표방한 이후로 차차 악화되던 북한-소련 관계와 해방 이후부터 슬슬 태동되던 북한의 민족주의가 나날이 강성해진 것이 이 때에 이르러 결실을 맺은 것이다. 이러한 기조는 1980년대에 가면서 일부 외국 문물을 차용하면서 사그라든다.
김정일의 권력 확대 시도로 김영주는 1980년대까지 권력에서 동떨어진 채 은둔 생활을 해야 했다. 김성애가 전국의 여성동맹사무실의 김정숙 사진을 팽개쳐버리고 자신과 김일성의 생모의 사진을 걸어놓자 격분한 김정일은 계모를 치기 위해 여동생 김경희의 남편 장성택을 시켜 김성애 일가가 부화방탕한 행동을 했는지 비밀리에 조사하라고 했다.
하지만 김일성과 사이가 돈독한 김성애를 섣불리 공격하는 일은 오히려 자신의 입지를 축소하는 일이었고, 김정일은 조용히 때를 기다렸다. 게다가 이시기에 그는 12살 어린 이복동생 김평일의 도전에 매우 고전하고 있었는데, 김평일은 키가 180cm에 달하는 장신에다가 아버지를 닮아 원로들의 호감을 샀고, 카리스마와 지도력이 대단하여 대학 재학 시절부터 온 대학생들을 자신의 수하로 휘어잡았던 인물이었다.[16] 이에 온 이북이 "다음 수령은 김평일이가 되겠다!"하고 수군거릴 정도였다.
그런데 1972년 김일성의 회갑 잔치에서 빨치산 원로들에게 김일성이 '''"내 아들이 두셋 있는데 누가 다음으로 좋겠나?"'''하고 물었다. 근데 원로들은 김평일을 점찍고 있었지만 아무도 감히 입을 열지 못했는데[17] 김일성의 바로 왼편에 앉았던 최현이 "수령님, 당연히 수령님 장손이 해야죠. 장남이 하지 누가 합니까?"라고 외치자 김일성이 "그래요? 다른 의견 없습니까?"하자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빨치산 최고 원로인 최현의 강경한 발언에 아무도 김평일을 지지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이렇게 원로는 김정일을 벌써 낙인찍고 있었다.
결국 1972년 4월 김일성은 만경대 생가를 방문하여 "우리 집안, 우리 만경대 집안의 혈통은 김정숙 혈통입니다. 김정숙 혈통만이 백두산에서 시작된 우리의 혁명위업을 대를 이어 끝까지 완수할 수 있습니다."라고 교시를 내림으로 김평일을 내치고 김정일을 후계자로 밀어주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1973년 여름, 김성애의 아들들을 나락으로 몰아내는 사건이 터진다. 김일성이 해방 직후부터 아껴두고 또 아꼈던 인민대학습당을 건설하려던 부지를 김일성이 방문했는데, 호화로운 저택이 지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 김일성이 깜짝 놀라서 "뭐이야. 이게? 누구네 집이야?"라고 묻자 저택을 지키던 보초가 "해군사령부 정치위원 당비서, 김성갑 동지의 집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이것이 곧 ''''인민대학습당 사저 신축 사건' 으로 번졌다.''' 김일성은 이것을 보면서 대노했고 "뭐이야? 김성갑이가 여기 살아? 언제부터?"라고 외치고는 김성갑을 불러서 매우 혹독하게 비판하고 질책을 했다고 한다.
그날 밤 지친 김일성이 관저로 돌아가서 아내 김성애에게 "밥이나 먹자."라고 하자, 한 성격했던 김성애는 김일성을 미안하다고 구슬려도 모자랄 판에 '''"밥이 뭐요? 낮에 자기 처남을 그렇게 핀잔주고 비판하고 남들 앞에서 그렇게 깎아내리고, 밥이 넘어가겠소?"'''라면서 바가지를 긁었고, '''"당신 가시어머니(장모님)가 그런 집에서 한 번 살면 당신이 뭐 잘못 되는 거 있어?"'''라고 소리지르면서 밥상을 뒤집어 엎어버렸다고 한다.
난데없이 뜨거운 국과 밥을 다 뒤집어 쓴 김일성은 당연히 폭발했고, 그날 밤 둘이서 미친듯이 싸웠다고 한다. 이 틈을 놓치지 않고 김정일은 김성애와 그녀의 친족들, 친지들, 그리고 김성애의 아들 김평일의 비리까지 김일성에게 낱낱이 보고했고, 다시 강도높은 검열과 사상검증을 실시했다. 그 결과로 이들 대부분은 숙청되면서 권력의 변두리로 밀려나거나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갔다고 한다.
이후에도 김성애의 권세는 유지되어 1974년 1월 1일 김일성이 당중앙위원회 책임일꾼들과 신년 기념사진을 찍기 위해 의자가 준비되었는데, 김일성을 위한 황금의자 옆에 김성애를 위한 황금의자가 나란히 놓여서, 그것을 본 김정일이 "김성애가 당간부도 아닌데 왜 황금의자를 두냐?"라고 길길이 날뛰다가 김성애가 나타나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공손하게 맞이하는 일도 있었다. 하지만, 김성애의 권력은 날이 갈수록 축소되었고 80년대엔 북한에서 "김정일의 최고 업적이 중앙여맹비서를 제친 것"이라는 농담이 돌았을 정도였다.
여러가지 정치공작의 결과, 김정일은 마침내 1974년 당중앙 위원회 제5기 전원회의에서 '유일한 후계자' 로 공식선출되었다. 이후 김영주를 철직시킨 뒤, 일가족을 량강도로 유배를 보내버렸고 특히 사저신축 사건으로 몰락한 김평일은 1979년에 유고슬라비아 주재 북한 대사관의 대사로 파견된 이래 아버지 김일성의 장례식 때를 제외하고는 계속 동유럽의 해외 대사로만 근무하며 북한 땅에 발 붙이지 못하는 야인 신세를 지금도 면치 못하고 있다. 그의 동생인 김영일도 운명은 비슷했고 그는 2000년에 사망했다. 김성애는 완전히 정치적 폐인이 된 채로 지내다가 지미 카터 방북 시에 잠깐 빛을 보곤 은거하다가 2014년 들어서 사망설이 돌고 있다. 그래도, 뭐 90세까진 살았다.
대략 1975년경에 김정일은 아버지 김일성의 판단력을 흐리게 하기 위해서 기쁨조를 만들어서 바쳤다.기쁨조 증언
처음에는 인민국 협조단에서 18명 정도를 뽑았는데, 실력보다는 예쁘기만 했으면 됐다고 한다. 북한에는 음팔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이 사람이 김일성 앞에서 노래도 하고 춤도 추고 하면서 김일성이 좋아했다고 한다. 김정일이 자기 아버지에게만 안겨주기에는 부러웠는지 예술단에서 예쁜 사람들만 뽑아 김정일 주위를 빙빙 돌게 만들었다고 한다. '''즉, 김일성도 살아있을 때 기쁨조를 신명하게 즐겼다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1976년 김정일에게도 위기가 닥친다. 그가 지휘한 판문점 도끼만행사건이 북한을 멸망의 위기로 몰고 가자 정권 내에서 김정일 반대파들이 대거 들고 일어난 것이다. 김일성은 김정일을 좌천시키고 당중앙이란 호칭도 더 쓰지 못하게 했다. 이에 신이 난 김정일의 반대파들이 앞을 다투어 김정일을 성토했는데, 사실은 이게 다 김일성과 김정일의 페이크 작전이었던 것이다. 판문점 도끼만행사건 때문에 당의 정치적 입지가 좁아진 김정일을 위해서 김일성이 짐짓 김정일을 내쳐버릴듯 쇼를 한 것이었다. 덕분에 "나 김정일 반대파요!"라고 커밍아웃을 했던 반대파들은 모조리 숙청되고 만다.
이렇게 고도의 권모술수로 자신의 정적을 모두 제거한 뒤, 1980년 조선로동당 6차 당대회에서 정치국 상무위원에 선출됐다. 이후 1983년에 열린 당 대표자회 제7기 2차 회의에서는 당 정치국 상무위원, 당 비서, 군사위원을 겸직하게 되면서 마침내 군 지도부까지 장악했고 김일성 이외에는 아무도 건드릴 수 없는 서열 2위의 권력자가 되었다.
1991년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이 된 데 이어 1992년에는 오진우와 함께 원수 계급을 받으며 마침내 군 통수권까지 완전히 장악하게 됐다. 김일성은 김정일을 거치지 않고서는 어떠한 보고도 받을 수 없게 되었다. 이 때부터 김일성은 정치적으로 장님에 귀머거리에다 꼭두각시 수준으로 전락했고 황장엽의 주장에 따르면 '최고 고문'의 역할로 사실상 밀려나게 되었다. 심지어, 김일성은 말년에 자신의 생일에 아들 김정일에게 아첨하고 송시 '광명성 찬가'를 바치기도 하는 안습한 모습까지 보여주었다.
공산주의 국가 최강독재자 스탈린과 마오쩌둥도 안 한 '''권력을 부자 세습'''하는 현대 역사상 유례없는 사례를 만들어 북한을 사회주의 국가에서 전제군주제로 바꿔버렸다.[18] 하지만, 엄밀히 말해서 북한만의 현상은 아닌 것이 3대 세습을 먼저 달성한 니카라과의 소모사 가문의 전례가 있으며 장제스, 리콴유, 아사드는 2대 세습에 성공했고 후세인, 카다피, 차우셰스쿠도 따라 하려고 했다.[19] 다만 북한은 명색이 사회주의 국가면서 저런 지거리를 해서 전세계에 충격과 공포를 선사했다.
여담이지만, 김일성과 김정일은 루마니아의 독재자 차우셰스쿠 내외의 처형 장면을 비디오로 구해오라는 명령을 내린 적이 있다고 한다. 이 비디오는, 김씨 일가와 북한의 몇몇 고위층들이 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김정일의 요리사로 유명한 후지모토 겐지도 동석했는데 김정일은 차우셰스쿠가 총에 맞아 쓰러지는 순간 하얗게 질리더니 '''"우리도 반동들을 때려잡지 않으면 저 꼴이 된다."'''고 외쳤다고 한다.
그리고, 덩샤오핑도 역시 차우셰스쿠 처형 광경을 녹화한 비디오를 입수하여 중국 지도부와 같이 보았다고 한다. 덩샤오핑은 한참 만에 중국 공산당 간부들에게 '''"어쩌다 저 꼴이 되었는가?"'''라고 물었고, 어느 한 공산당 간부가 '''"반동들을 때려잡지 않아서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하자, 덩샤오핑은 '''"틀렸다. 우리도 개혁하지 않고 인민들에게 베풀지 않으면 저렇게 된다."'''라고 대답하면서 그 간부를 데꿀멍시켰다고 한다.
결국, 덩샤오핑은 자신이 직접 주도아래 개혁개방 정책을 실시하면서 본격적으로 자본주의를 받아들이게 되었고 중국은 최고의 자본주의 시장으로 경제성장을 하게 되었다. 물론 천안문 사태를 일으킨 적이 있었지만, 그래도 차우셰스쿠와 김정일보다 덩샤오핑이 인민들에게 많이 베풀은 것은 사실이니까 거짓말은 하지 않은 셈이다. 김정일과 덩샤오핑은 처형 비디오를 보고 서로 다른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 이 반응의 차이는 두 나라의 미래를 완전히 정반대로 바꿔놓게 된다.'''
김정일과 덩샤오핑의 관련된 일화로는, 덩샤오핑이 흑묘백묘론을 주장하면서 중국의 개혁개방 정책을 실행시키자 김정일은 공산주의 혁명을 포기한 중국은 곧 나락에 빠질 것이라는 논문을 작성하여 발표하였고 논문 내용은 덩샤오핑의 개혁정책비판과 덩샤오핑을 비웃는 내용을 주로 이루었다. 그러나 20년 뒤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정책은 중국이 미국과 같이 G2 국가로 미국과 상당부분 대등한 강대국으로 성장한 것에 비해, 폐쇄적인 자력갱생을 주장한 북한은 현재 최빈국 중의 하나로 몰락하였다.
5. 북한의 핵개발
해당 문서 참조.
6. 고난의 행군
고난의 행군 해당 문서 참조.
7. 심화조 사건
심화조 사건 해당 문서 참조.
8. 남북정상회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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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정상회담 해당 문서 참조.
9.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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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쩍 수척해 버린 김정일.
21세기가 되고 나서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했는데 6개월 사이에 완전 '''해골이 될 정도'''로 살이 확 빠지기도 했다. 넘쳐나던 뱃살마저 사라지고 없어졌다. 췌장암에 걸려서 길어도 2013~14년에는 사망할 것이라는 얘기도 나오는가 하면 1년 정도 남았다는 설도 나왔다. 2009년 12월 1일 피습 사망 루머가 퍼지면서 코스피 지수와 코스닥 지수가 춤을 추기도 하였다. 이후로도 잊을 만하면 사망 소식이 터져나왔다.
실제 후지모토 겐지의 증언에 따르면 장이 들어간 장기가 모두 안 좋았다고 하며 식후에 5종류의 약을 먹었다고 한다. 김정일은 약을 먹으면서 "아, 나는 죽을 때까지 약을 먹어야 하는 거냐?" 라고 뇌까렸다고 한다.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70세로 죽었다. 더군다나 아버지 보다도 12년 일찍 죽은 셈.
정말 웃긴 것은 '장군님의 만수무강' 을 위해 '만수무강연구소' 를 건립하고 이에 많은 돈을 들인다는 건데(…), 아무리 의사가 노력해도 본인이 자기 관리를 전혀 안 한다면 건강을 지킬 수 있을 리가 없다.
훗날 밝혀지기로는 2008년 8월 15일에 이미 심각한 뇌졸중을 겪어 3달 동안 거의 자리에 누워있던 상태였다고 한다. 이와 관련해 라종일 교수는 자신의 저서인 '장성택의 길'에서 김정일이 쓰러진 상태에서 김정일의 역할을 대신했던 사람은 장성택이였다고 말하며 그가 아니였다면 북한이 매우 큰 혼란에 빠졌을 것이라 말했다. 또한 당시 북한 간부들은 북한 내의 의료진으로 김정일을 치료할 수 있다는 의견을 냈으나 장성택이 해외 의료진을 초빙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여 김정일과 예전부터 친분이 있던 프랑스의 루 박사를 초빙하여 몇차례에 걸쳐 치료하도록 시켰다. 이에 김정일은 약 80일 후 공개석상에 모습을 드러낼 정도로 회복되었다.
주성하 기자가 밝힌 내용을 보면 루 박사가 초대되었을 때 북한에서 10명의 ct 사진을 보여주었고 이에 증상이 심각하다고 보인 환자를 루 박사가 진료하겠다고 말하자 무려 7시간이 넘는 회의를 한 후 집중치료실로 루 박사를 데려갔다. 그 병상에 있던 사람은 바로 김정일로 뇌졸중으로 인해 사실상 식물인간 상태였다고 한다. 이에 루 박사는 김정일 10일 동안 치료하였고 9월과 10월에도 프랑스와 북한을 오가면서 김정일을 치료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 때 웬 젊은 사람이 김정일을 매우 극진히 보살폈는데 그가 바로 김정은이었다고 한다. 한편 김정일의 건강이 회복되고 있을 당시 국정원에서 "김정일이 칫솔질을 할 수 있을 정도로 회복되었다."라고 주장하여 논란이 된 바 있다.[20]
장성택은 김정일이 쓰러졌다는 것을 알리면 혼란이 벌어질 것을 우려해 2008년 북한 수립 60주년 9•9절 행사에 김정일이 참석할 수 없다는 사실을 비밀로 했다. 이에 행사장에 나와있던 사람들은 김정일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자 매우 당황했으며 몇시간 동안 기다리다가 김정일이 불참석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이에 9•9절 행사는 대대적으로 축소된 채로 진행되었다. 그리고 이때부터 김정일에 신변에 이상이 생겼다는 주장이 전세계적으로 확산되었다.
김정일은 치료를 받고 80일만에 공식석상에 나서기는 했지만 뇌졸중의 후유증은 매우 심각했다. 라종일은 자신이 만난 사람들은 김정일이 의식을 회복하고 외부 활동은 했지만 건강은 최악이었다고 증언하며 특히 이미 고인이 된 김일성을 마치 생존한 인물처럼 언급해 주변을 놀라게 했다고 주장했다.
뇌졸중이 발병한 뒤 병석에서 일어난 김정일은 어느 날 함흥에 있는 2·8 비날론 공장 현지지도에 나섰다. 이 공장은 월북자 출신의 화학자 이승기 박사가 김일성의 지시로 만든 공장으로 석회석을 주원료로 삼아 화학섬유 비날론을 생산했지만 섬유의 질이 떨어지고 전력을 많이 소비하는 통에 가동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던 중이였다. 하지만 비날론 공장은 김정일의 방문에 즈음해 설비를 정비하고 생산라인을 전면 가동했던 것처럼 위장시킨 상태였다. 이 때 시찰에 나선 김정일은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제품을 보고 흐뭇해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에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아연실색했고 할 말을 잃고 서로 쳐다볼 뿐이었다. 병세가 짙어지면서 김정일은 때때로 극과 극을 오갔으며, 주변을 의심하면서 이것저것 앞뒤가 맞지 않은 지시를 했다. 당시에 하태경 열린북한통신 대표는 김정일이 호위병들이 보는데도 술을 먹으면서 자주 운다는 정보를 입수했다고 말하며 "신경과 의사들에게 체크를 해보니까 (뇌졸중 후유증으로) 우울증이 있을 수 있다. 우울증이 나타나면 동반증세가 무엇이 있는가 했더니 술 담배가 그렇게 당긴다고 하더라"고 전했다. 한마디로 음주와 흡연이 뇌졸중 후유증에 따른 우울증 때문이라는 것. 또 김정일이 현지 지도나 지방 시찰에 나간 것이 2009년에 전년도에 비해 1.5배 늘었다면서 "사실은 자기 건강을 위해서 오히려 운동을 많이 해야 하니까 그것을 핑계삼아서 많이 돌아다니는 것 아니냐 이렇게 본다"고 주장했다.#'''“동무들 이 비날론을 포장하시오. 수령님께 가져다 보여드리면 얼마나 기뻐하시겠소!”'''
김정일은 이처럼 뇌줄중에서 어렵게 회복은 했지만 제대로 된 활동이 어려운 상황에 처했다. 이에 참모들은 해외에서 의료진을 초빙했다. 모두 엄격하게 비밀이 보장되는 가운데 이뤄졌으며, 중국의 한의사들을 불러들였을 당시에는 김정일 병세에 관한 정보 유출을 막고자 가케무샤(대역)도 동원됐다. 라종일 교수는 당시 상황과 관련된 증언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김정일이 뇌졸중으로부터 의식을 회복한 후 처음 당면한 문제가 후계 문제였다. 이에 김정일은 병상 곁에 근심스럽게 서 있는 사람들, 즉 황순희, 김옥 그리고 김정철, 김정은, 김여정까지 내보내고 김경희 부부만을 남게 했다. 그러고는 바로 ‘혁명의 후계자’를 누구로 해야 하는가 물었다. 김경희는 이때 이미 술과 마약 중독으로 몸과 마음이 쇠약한 상태였기에 그녀는 말없이 남편을 쳐다보았다. 장성택은 평소 김정일이 마음을 두고 있는 쪽을 알고 있었고 자신이 보기에도 해외에서 자유분방한 생활을 보내고 있는 김정남이나 유약한 김정철보다 김정은이 낫다고 생각했다. 그는 어린 김정은을 잘 보좌하면서 천천히 자신이 구상한 개혁을 추진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고 이에 장성택은 조심스럽게 말했다.“중국에서 한의사들을 불러 들였을 때에는 그를 포함해서 그와 유사한 체형의 유사 질환을 앓는 10여 명의 환자를 얼굴을 가리고 함께 진맥하도록 해서 그의 건강에 관한 정확한 정보가 중국 측에 흘러 들어가지 않도록 했다. 중국에서 온 한의사들은 기본적으로 같은 증상의 환자를 여럿 진찰했지만 그들 중 누가 김정일인지 알 수 없었다. 당연히 김정일의 건강 상태에 관한 제대로 된 정보를 챙길 수도 없었다. 사람들에 따라 증상의 경중 차이가 천차만별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김정일은 즉각적인 반응은 없었지만 얼굴에 안도와 만족스러운 표정이 드러났다고 하며, 한참 만에 김정일이 말했다.막내 아드님이 어떻겠습니까?’
그 후 김정일은 군부대나 당 중앙위원회 행사들에 김정은을 동반해 다니기 시작했다고 한다.[21]‘그래, 막내를 세웁시다. 그러나 내가 공개하라고 할 때까지 이것은 비밀로 하십시오’”
훗날 밝혀지기로는 한미 정보당국도 김정일이 오래 못살 것이라는 것을 파악하고 있었다고 한다. 여러 기사에 의하면 2008년 당시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그의 머리 부위에 대한 CT(컴퓨터단층촬영) 한미 정보당국이 자료를 입수했으며 이를 토대로 그의 여생을 3~5년으로 판단했었다고 아사히신문이 전한 적도 있다.# 당시 김정일이 쓰러진 직후 미국 중앙정보국(CIA)과 한국의 국가정보원이 그의 CT 스캔 영상을 입수, 뇌 상태를 상세히 검토한 뒤 '여생이 3~5년'이라고 판단했었다. 그 이유는 3~5년 이내 뇌졸중이 재발할 가능성이 매우 큰 것이 그 이유였으며, 김정일의 병세로 봤을 때 재발할 경우 '연명이 어렵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당시 김정일이 당뇨병을 앓아온 것도 파악됐다고 한다. 그러면서 "김정일이 2008년 11월 회복한 뒤 김정은에 대한 권력승계 작업에 매진했고 김정은에게 권력을 넘기기 위해 중국과 러시아를 잇따라 방문했지만, 권력승계를 둘러싼 스트레스가 결과적으로 수명을 단축시켰다”고 한다.
당시에 이명박 정부가 갑작스럽게 통일을 강조하며 대북 강경노선을 고수하고 북한 붕괴론을 확산시킨 데는 이 같은 정보판단이 작용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2011년 6월 21일 당시 이명박 대통령은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위원들에게 임명장을 수여하는 자리에서 '''“통일은 도둑같이 올 것”'''이라며 '''“한밤 중에 그렇게 올 것이기 때문에 항상 통일에 대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통일이 가까워졌다고 말하고 싶다, 오해를 살까 봐 말을 안 하지만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당시에는 뜬금없는 북한 붕괴론이란 지적이 많았지만, 김 전 위원장은 불과 6개월 뒤인 2011년 12월 17일 갑자기 사망하며 3~5년 안에 사망할 것이라는 2008년 한미 양국의 예측이 적중했다. 최진욱 통일연구원장은 “이명박정부는 북한의 점진적인 변화에 대해 큰 기대감이 없었기에 갑작스런 통일에 대비하자는 어젠다를 내세운 것으로 보인다. 이 과정에서 결정적인 변수는 아니더라도 김 전 위원장의 심각한 건강상태가 어느 정도는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외교안보 당국의 한 인사는 “이명박정부는 김정일 위원장이 사망하면 정권이 붕괴될 걸로 봤다”며 “하지만 예상과 달리 아들 김정은에게 권력이 이양됐다”고 말했다. #
주성하 기자는 자신의 유튜브 방송에서 밝히기를 만약 김정일이 2008년 뇌졸중이 발병했을 때 사망했다면 현재의 북한이 어떻게 됐을지는 상상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확실한 것은 김정은은 김정일의 뒤를 이어 집권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며 오히려 장성택이 김정일의 뒤를 이어 집권에 성공했거나 장성택 집권 이후 군부의 반발로 쿠데타가 일어나 군부 독재로 다시 돌아갔을 가능성도 있다고 주장했다.
2009년 들어 갈 날이 얼마 안 남았다는 설이 파다해지고 3남 김정은이 후계자로 지명었다는 설이 돌았다. 그런데 2010년 1월 9일에는 '북한 인민 생활에는 걸린 것(부족한 점)이 적지 않다' 라고 말했다고 한다. 사실 이러한 발언은 김일성의 1994년 제3차 7개년 계획 실패 선언, 1996년 김일성종합대학 연설의 '식량 부족으로 무정부상태가 되고 있다' 발언 등으로 유례가 없던 것은 아니었지만 고난의 행군을 어찌되었건 북한 내에서 공식적으로는 마무리하고 2012년 강성대국을 목표로 주장하며 '나름대로 살 만하다' 는 주장을 하던 와중에 나온 것은 상당히 의외.
아무튼 자신이 살 날이 얼마 안 남았음을 체감한 김정일은 2010년 들어서 자국 내 지지 기반이 약한 아들내미의 안정적 승계를 위해서 여기저기 발품을 팔아 껀수들을 벌어와서 그 공을 아들에게 먹여주는 식으로 뛰었다고 한다. 저리도 열심히 뛰었던 걸 보면, '저 정도 노력을 좀 더 일찍 북한 주민들을 위해 했더라면 얼마나 좋을까' 싶은 생각이 절로 들 정도.
북한의 공식 발표에 따르면 2011년 12월 17일 오전 8시 30분 사망. 전용 열차인 태양호를 타고 가다가 사망했다고 한다. 원인은 공식적으로는 '인민들을 위해 불철주야 업무를 하다가 과로로 인한 중증급성 심근경색과 심장쇼크. 실제로는 김정은 후계 체제와 전제 왕국의 유지를 확실히 하기 위한 불철주야.' 다만 건강에 치명적일 정도로 계속 여기 저기 시찰, 방문하는 등 상당히 무리한 것은 사실이다. 물론 '과로' 는 아무래도 수식어구의 느낌이 강하다. 물론 김정은 후계 체제의 불안정으로 인한 본인의 불안감 탓에 나름대로 애를 쓴 것도 있겠지만 뒤의 두 병명은 성인병으로서 전형적인 질환이다. 조선 중앙 TV 보도[22] 이는 19일에 발표되었는데 정부에서 이를 사전에 파악하지 못한 점이 질타를 받기도 했다.
다만 북한이 발표한 사망 날짜와 사망 장소는 거짓일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12월 20일 국회 정보위원회에 출석한 원세훈 국가정보원장이 "김정일 전용 열차는 평양 룡성역에 '''지난 12월 15일부터 계속 멈춰서 있었다'''" 고 진술한 것. 이는 열차로 이동하는 중에 김정일이 사망했다는 북한의 공식 발표가 거짓말이라는 것이다.
한편 전용 열차에서 죽었든 침대에서 죽었든 죽은 건 죽은 거고, 이런 정보를 굳이 대외적으로 공개해서 북한을 자극하고, 우리의 정보수집능력을 노출시킬 필요가 있냐는 비판이 일부에서 나왔다.[23]
김정일 사망 당시 서울대학교 농생명과학대학 한 여학생이 학생회관 1층에 김정일 분향소를 설치해 학내외에서 큰 논란이 됐다. 본래 이 학생은 대학 본부에 분향소 설치 허가를 받고자 했으나, 학교 측에서 허가하지 아니하여 분향소 설치를 강행했던 것이다.
한편 삼성그룹이 김정일의 사망 정보를 미리 입수했다는 주장이 제기된 적이 있다. 북한의 공식발표 2시간 뒤에 나온 통신사 뉴시스의 보도에 따르면 삼성의 한 고위 임원이 18일 저녁 몇몇 언론에 전화를 걸어와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망설이 있다. 그쪽 분위기는 어떠냐?”라고 문의 했다는 것이다. 뉴시스의 기사가 파문을 일으키자, 삼성은 "우리가 (삼성내부 고위층을) 아무리 조사해 봐도 그런 사실이 없다"면서 부인하였다. 뉴시스의 기사는 얼마 안 가 인터넷에서 삭제되었다.
현재까지 알려지기로는 북의 공식발표 이전에는 미국, 일본, 러시아 등 여타 국가도 몰랐으며, 북의 유일한 동맹국인 중국은 물론이거니와 북한 정권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조총련[24] , 금강산 관광 등 대북사업을 하고 있는 현대그룹도 사전인지를 하지 못했다고 한다. 국정원을 비롯한 대한민국의 외교안보 부처도 북의 공식발표를 통해서 알았다고 한다.
뉴시스의 기사를 사실이라고 가정해도, 삼성그룹이 명확한 사망정보를 입수했다는 주장은 오버로 보인다. 기사에 따르면 삼성 고위 임원의 태도는 '이런저런 카더라가 돌고 있는데...' 수준으로, 이런 것을 명확한 정보를 입수했다고 보긴 힘들다. 아주 사소한 동정도 비밀로 감추는 독재국가에선, 고위층의 신변에 관해서 언제나 이런 저런 추측과 확인되지 않은 소문들이 떠돌아 다니기 마련이다. 며칠만 언론보도에서 사라져도, 사고설, 중병설, 체포설, 숙청설, 식물인간설, 암살설, 사망설, 대역설...등등 온갖 카더라가 쏟아진다. 이런 모습은 과거 구소련과 중국은 물론이거니와 북한도 마찬가지여서[25] 수십년동안 김일성, 김정일 사망설이 불거진게 한두번이 아니다. 그리고 김일성 사망 오보 사건처럼 이런 설에 휩쓸려서 전세계 언론사들이 오보를 숱하게 터트렸고, CIA, SIS 같은 유수의 정보기관이 개망신당한 사례도 무수하다.
누가 보더라도 '김정일 건강에 문제가 있다'[26] 는 것을 짐작할 수 있는 상황에서, 사망설이 불거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정보기관 입장에선 증권가 찌라시처럼 이렇게 수시로 나오는 카더라에 일일히 반응할 수도 없거니와, 설사 이런 첩보를 입수했다고 하더라도 고도의 정보수집능력을 갖췄다 곧바로 연결짓기는 무리이다. 정보기관의 역할에는 어떤 소문이 퍼지면 조기에 획득하고 사실 확인을 정확하게 해내는 것도 포함된다. 당시 기준으로 삼성 직원들이 들었던 것이 설사 정확도가 높았다고 하더라도 정보는 아니다. 정보기관이 어떤 식으로 정보를 습득할 수 있는가를 생각해보면 이상한게 아니라 당연한거다. 일부에선 이 사건을 대한민국 사회에 팽배해 있는 삼성만능주의, 삼성전지전능론이 불러온 해프닝으로 보기도 한다.
9.1. 사망 이후 여파
사망 발표 직전 북한 매체에서 정오에 '특별방송'을 한다고 알렸고 이 소식은 남한에도 알려졌다. 문제는 이때까지 북한에서 큰 사건을 발표할 때마다 '중대방송'이라고 알렸는데 이번에는 '특별방송'이라고 언급했다. 이 '특별방송' 언급이 김일성 사후 이후 처음이었기 때문에 몇몇 인터넷 뉴스에서 이를 언급했고, 이에 이 특별방송이 김정일의 사망이 아닐까 추측하는 말도 돌았다. 특히 탈북자 및 북한 인민들은 '특별방송' 언급에 김정일의 사망 소식임을 짐작했다는 전언이 돌기도 했다.
김정일의 사망이 발표될 당시 이명박 대통령은 공식 일정상으로는 한일협상 중이었으나 일정을 모두 취소했다. 참고로 이 한일협상 도중에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언급되었다. 참고로 김정일의 사망 소식이 알려진 12월 19일은 이명박 대통령의 생일이기도 했다. 청와대에서는 불과 오전까지만 해도 이명박 대통령의 생일을 축하하는 훈훈한 분위기였으나 오후에는 완전히 난리가 났다고 한다.
인터넷은 대체적으로 '''"천벌을 받았다, 잘 죽었다"'''며 기뻐하는 분위기가 대세. 간간이 고인의 죽음을 슬프게 애도한다는 발언들도 나왔으나, 잔인한 독재자를 어떻게 추모하냐는 네티즌들의 거센 반발에 부딪쳐 침묵했다.
확실히 애도 발언을 하기에는 그 사이에 너무 비극적인 사건이 많았고, 북한이 보여준 행보는 지나치게 적대적이었다. 그나마 김정일이 뒤늦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최소한의 반성을 표하기라도 했으면 또 모르지만 그렇지도 않으며 죽음 역시 동정의 여지가 있는 참혹한 죽음이 아니라[27] 일반적인 자연사이기 때문에[28] 더욱 그렇다. 이 와중에 탐앤탐스의 공식 트위터에서 해당 트위터 담당자가 김정일의 명복을 빌어준다는 트윗을 올렸다가 '''회사 전체가 뒤집어져''' 사과 성명을 발표하는 해프닝이 빚어지기도 했다.
그래서 죽어 마땅했다, 잘 죽었다는 여론이 절대다수. 사실 이 인간이 한 전체적 악행은 둘째 치더라도, 2010년에 천안함 폭침이나 연평도 포격 도발 같은 일들을 저질렀으니 결코 좋게 봐줄 수 없던 셈이다. '''보수·진보를 떠나서 흥겨운 한민족의 판을 벌이는 중.''' 그리고 모처럼 양심에 거리낄 것 없이 신명나는 고인드립이 난무하고 있다.[29] 특히 탈북자들 커뮤니티의 게시판은 그야말로 축제 분위기.
한편으로는 ''''근데 이제 어떻게 됨''''이라며 불안해하는 의견과 함께 혹시 강경파가 내부 결집 차원에서 전쟁을 일으키지 않을까 하는 위기감에 불안해하기도 했으나, 다음 해인 2012년은 크게 위협적인 도발 없이 무난히 넘어갔으며 그 다음 해인 2013년 북한의 전쟁 위협도 엄포만 신나게 쳐댔을 뿐, 이에 미국의 스텔스기가 영공을 활강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도 손 놓고 있었을 뿐이었다.
김정일 사망 직후 군에서도 전군 비상경계태세, 경찰의 갑호 비상 발령 및 공무원 비상근무 제4호 발령 등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갔다. 대북정보감시태세인 워치콘을 3단계에서 2단계로, 대북방어준비태세인 데프콘을 4단계에서 전투 준비 태세인 3단계로 격상을 검토하였으나 실제 북한이 과격 행동을 일으킬 동기가 적음, 그리고 북한군에 이상 동향이 없음으로 인해 실제 격상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대신 북한의 국지도발에 대비하여 경계대기태세를 격상시켰으며 이로 인해 5분대기조 및 초소 등의 인원들이 추가적으로 근무에 투입되었다. 또한 대북정찰기 횟수를 늘려서 지속적으로 감시하고 있다. 경찰 역시 갑호비상이며 그와 함께 이명박 대통령은 공무원 비상근무령을 지시하였다.
그리고 남북 정세불안을 우려하는 여파인지 코스피가 개발살났다.
한편 다음 만화속세상의 웹툰인 스틸레인의 경우, 김정일이 죽기 전부터 '김정일의 갑작스런 죽음 이후 일어난 북한 내 쿠데타로 한반도가 전쟁 위기로 치닫는다'라는 시나리오로 연재중이었는데, 연재 도중에 실제로 김정일이 사망하게 되면서 갑자기 성지가 되었다.
사실 북한이 전쟁을 일으킨다고 하더라도 전쟁에서 승리할 역량 따위는 없다는 것은 북한 수뇌부가 다 아는 일이고 권력이 커지는 추세이기는 해도 군은 어찌되었건 당의 아래에 장악된 상태이기 때문에 돌발 상황은 당의 동의를 이끌어내야 하는 전쟁보다는 차라리 쿠데타의 확률이 더 높다.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선군 정치는 북한에서 돌아가는 시스템이 군대뿐인 탓에 '군대를 모범으로 혁명을 달성하겠다' 는 즉 ''''군대 총동원해서 나라꼴 다 잡는 데나 올인하겠다''''는 선언이기 때문. 괜히 둔전 굴리는 꼴이 나오는 게 아니다! 물론 전면적 전쟁은 말도 안 되는 도박수이지만 국지적인 무력 도발의 가능성은 충분하기 때문에 지금의 긴장 태세도 당연한 것이기도 하다.
열차에서 급사했다는 점, 자리에 누워 편하게 못 죽고 객사했다는 점이 김일성 사망 때와 같다. 타살이 아니더라도 세계구급 독재자들의 최후는 자리에서 조용히 눈을 감는 경우가 드문 듯. 권력을 자기 앞으로 유지하기 위해 상상을 초월하는 중노동을 남의 손에 맡기지 못한 채 오직 자기 앞으로만 하고 죽는 그 순간까지 계속 몰두하며 한 순간도 긴장을 늦출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당장 진시황만 봐도 하루 업무량이 상상을 초월해서 자기가 직접 처리 기준을 정해 놓았을 정도다.
장례식은 28일 평양에서 열렸고 29일까지는 애도기간. 김정은이 진행하였다. 묫자리는 다름 아닌 '''금수산태양궁전.'''
이때 북한 국민들이 대성통곡을 하는 모습이 해외와 국내 언론에 보도되면서 전세계 네티즌들의 조롱거리가 되었다. 김정일 사망 소식에 통곡하는 북한 주민들 이 영상을 가지고 북한 주민들이 슬퍼하는 원인을 다른 걸로 바꾸는 패러디 동영상이 유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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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0일 로동신문 '''컬러사진'''으로 되어있다. 잘 보면 얼굴 구도가 최대한 김일성의 사진과 똑같이 맞추어져 있다. 흔히 사용되는 김일성의 사진도 정면에서 고개를 오른쪽 위로 올려 미소 지은 채 찍은 사진이다.[30] 김일성과 김정일의 웃는 모습을 북한에선 모두 '태양상'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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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 사망선언문.[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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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만평도 나왔다(…).
김정일 사망 이후 영국 주재 북한대사관에선 탈북자들이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망을 축하드리며' 라는 고인드립성 유인물과 김정일의 영정사진을 대사관 건물에 붙이고 만세를 부르는 행사를 벌이기도 했다.# 이들은 결국 경찰에 연행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분명 '대사관 직원'으로 보이는 한 남자가 유인물을 떼어내면서 하필 '''김정일의 사진을 찢고 구겨''' 처리하는 장면[32] 이 포착되기도 했다. 링크.
2008년 김정일이 뇌졸중으로 쓰러졌을 당시 한미정보당국이 CT스캔을 입수해 여생이 3~5년이라는 것을 미리 예측한 바 있다고 한다.# 실제로 김정일은 3년 후에 사망하였다. 그리고 이 CT영상 때문에 이명박 대통령이 '북한붕괴론'을 내세우며 전략적 오판을 범했다는 분석도 있다. 이명박 대통령이 임기 중 “통일은 도둑같이 올 것”이라며 통일이 임박했다는 뉘앙스를 보인 것과 달리, 북한 체제는 김정일 사후에도 김정은이 무난하게 권력을 승계하며 체제를 유지했다는 것이다.#
9.2. 박제와 사후 우상화 작업
자기가 아버지 김일성에게 했던 짓과 똑같이 러시아에서 거금을 들여 사체보존 전문가들을 데려와서 자신을 박제로 만들었다고 한다.[33] 단, 엠버밍이지만 절대 농담이 아니라 김일성, 김정일의 사체 보존 비용을 다 합치면 '''북한 전 예산의 1%''' 정도에 달할 것으로 추측된다.
2012년 2월 3일에는 최고인민위원회 상임위원회의 정령으로 김정일훈장, 김정일상, 김정일청년영예상과 김정일소년영예상을 새로 제정한다고 발표했다. 다만 이미 제정되어 있는 김일성 이름의 상과 훈장[34] 보다는 한 단계 아래의 급수를 가질 것으로 예상된다.
2월 9일에 첫 김정일훈장~김정일소년영예상 수상자가 발표되었는데 김정일훈장 수상자에는 김정일의 여동생과 매제이자 김정은의 고모와 고모부인 김경희-장성택, 최고인민위원회 상임위원장 김영남, 내각 총리 최영림, 조선인민군 총참모장 리영호, 인민무력부장 김영춘 등 기존의 핵심 권력층 외에 김정일 사후 숙청된 것으로 알려졌던 김옥과 오극렬이 들어가 숙청설이 사실이 아님이 밝혀졌다.
생일 전날인 2월 15일에는 아버지 김일성에 이어 북한에서 2번째로 공화국 대원수 칭호를 받았고 생일을 '광명성절' 이라고 부르기 시작하면서 김일성 생일인 '태양절' 과 동급의 국경일로 만들었다. 김일성과 함께 나란히 말을 타고 있는 김정일의 동상도 만수대창작사에서 제작/공개되었고 북한 각지에 김정일 동상이 계속 세워질 예정이라고 한다. 금수산기념궁전의 경우에도 금수산태양궁전으로 호칭을 바꾸는 등 우상화 작업에 계속 박차를 가하고 있다.
3월 29일에는 최고인민위원회 상임위원회 정령으로 김정일에게 김일성훈장과 김일성상이 수여되었다. 이어 4월 11일에 소집된 조선로동당 제4차 대표자회의에서는 김정일을 '영원한 조선로동당 총비서' 로 추대해 당 총비서 자리를 사실상 영구 공석으로 만들었다. 김일성이 사후 '영원한 공화국의 주석' 으로 추대된 것과 비슷한 모양새인데 물론 후계자인 김정은도 총비서 대신 조선로동당 제1비서 자리로 추대되어 군권에 이어 당권도 공식적으로 승계했음을 선전했다.
한편 4월 13일 김정일이 사망 2달여 전 남긴 유언인 이른바 10.8 유훈의 일부가 북한전략정보서비스센터에 의해 공개되었다.
공개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상기의 대외정책분야 중 마지막 항목인 "'''김씨 가문'''에 의한 조국 통일이 종국적 목표" 에서 이제는 아예 대놓고 북한이 본인들의 왕국, 소유임을 인증했다.
그리고 그동안 김일성 동상만 세워져 있던 곳에 김일성과 김정일이 나란히 선 모습의 동상이 새로 만들어지고 있다. 2012년 한 해 북한 언론에 보도된 것만 봐도 평양 만수대언덕(4.13), 인민무력부(8.24), 강계(10.11), 김일성군사종합대학(10.29), 함흥(12.21)에 김일성과 김정일의 동상이 세워졌고, 10월 2일에는 국가안전보위부에서 김정일 단독 동상의 제막식도 거행되었다. 북한 언론이 공개한 동상 사진들을 보면 사후 나온 공식 초상을 바탕으로 소위 '야전 솜옷' 차림으로 디자인한 형태이며, 그동안 중년 이미지로 만들었던 김일성 동상도 사후 발표된 노년기의 공식 초상을 참고해 새로 제작했다.
또 금수산태양궁전에서 김정일 시신의 엠버밍 작업과 관련 시설의 확보를 위한 개축 작업이 사망 1주기를 맞아 완료되자, 그동안 일부 높으신 분들의 조문 때만 공개했던 김정일의 시신도 국내외 조문객들과 관광객들에게 공개할 예정이라고 한다.#
[1] 현 우수리스크.[2] 본명[3] '이르세노비치'는 러시아식 이름에 있는 부칭(父稱)이다. 아버지 '일성'의 러시아식 표기는 '이르센'인데 여기에 남성 접미사 '-오비치'를 붙인 호칭.[4] 북한에서는 신학기가 가을이라고 한다.[5] 그러나 한국 전통 작명법에 따르면 뼈대있는 가문일수록 임금이나 자기 직계 조상의 이름자를 일부러 피하여 이름을 짓는 것을 원칙으로 하므로, 김정일과 김정은이 자기 아버지의 이름자를 일부러 취해 쓰는 것은 전통 유교사상의 잣대로 보자면 그야말로 근본없는 개족보 가문의 행태이다.[6] 러시아 이름으로 슈라[7] 김정일의 어린 시절 친구이자 김일성의 당시 주치의의 아들인 세르게이 리는 "당시 유라(김정일)와 슈라(김만일) 둘만 거기 있었는데 대체 어쩌다가 빠졌는지는 알 수가 없다."고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8] 다만 5세, 3세 정도 되는 어린아이들을 보호자 없이 방치했을 때 정말 기상천외한 사고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는 점은 아이를 키워 본 부모라면 누구든 알고 있다. 성인이 된 김정일이 어떤 인간이었든 간에, 5세밖에 안 된 아이가 의도적으로 동생을 살해했으리라고 무리해서 악마화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9] 심지어 김정일은 김일성종합대학 졸업식날 김성애가 참석하자 졸업식장을 뛰쳐나가기까지 했다. 때문에 졸업식이 며칠 연기되었다고.[10] 김정일이 잠시 지나간 자리조차 우상화가 되는 곳이 북한인데, 이 학교에서 있었던 일 또한 우상화가 안 될 수가 없다. 2015년 2월 16일 밤에 방송된 조선중앙텔레비죤 프로그램에서는 김정일 옆 자리에 앉게 된 일흔의 노인이 김정일과 있었던 일을 추억하는데, 김정일 칭찬으로 가득하다. 점심 식사시간에 잡곡밥과 오이절임 같이 평범한 애들이 먹는 도시락을 싸왔다던지, 1954년 1월 중순에는 한 학년 아래의 여학생에게 가죽 외투를 공짜로 주었다던지... 주로 방송에서 강조하는 건 '장군님은 부자와는 달리 여느 아이들과 다름없이 평범한 옷차림에 평범한 식사 등등 다른 일반 애들과 다를 바 없는 인민학교 시절을 살았다!' 라는 것을 강조한다. 프로그램 후반부에서는 만경대 가문 출신임을 강조하면서 우상화로 넘어간다. 참고로 이 학교에서 있었던 기간은 5개월. 그리고 여담으로 바로 그 다음 프로그램은 김정일이 직접 창작했다는 음악이 나왔다. 사실 이 날은 김정일의 생일으로서, 이날 조선중앙텔레비전은 하루 종일 김정일 특집방송(…)[11] 남한의 고등학교 과정에 해당.[12] 위원장은 교사가 맡는다.[13] 여담으로 이후 김현식 교수는 미국으로 망명했다. 김현식 교수는 옛 정을 상기하며 김정일에게 개혁개방을 촉구하는 서한을 작성했지만, 서한을 다 쓰기 전에 김정일이 죽었다.[14] 객관성이 보장된다.[15] 1984년 안기부가 작성한 대외비 문건에서 언급하였다.[16] 북한 관련 프로인 이제 만나러 갑니다에 소개된 일화에 따르면 판문점 도끼만행사건이 난 후 김평일이 대학생들을 모두 모은 후 "우리 모두 전장으로 가서 승리하여 위대한 수령님을 통일의 광장으로 모시자!!"며 학생들을 독려한 후 자신이 먼저 솔선수범 자원입대했다고 한다.[17]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독재자, 군주 앞에서 후계자 문제 잘못 거론했다가 작살난 양반들 많은 걸 보면 이상한 일도 아니다.[18] 스탈린은 장남이 포로가 되자 히틀러가 파울루스 원수와 스탈린 아들을 교환하자고 했을 때 '''"이 새끼들이 미쳤나? 원수를 중위와 교환하자고?"'''라면서 거절했고, 마오쩌둥의 장남은 한국전쟁에서 목숨을 잃었다.[19] 후세인의 경우에는 차남 쿠세이 후세인을, 카다피는 차남 사이프 카다피를, 차우셰스쿠는 차남 니쿠 차우셰스쿠를 후계자로 내세웠다. 하지만 후세인과 카다피는 아들에게 물려주기 전에 미국의 공격으로 몰락하여 각각 과도정부와 혁명군에 의해 처형되었고 차우셰스쿠도 아들에게 물려주기 전에 혁명으로 축출되어 처형당했다.[20] 당시 이 발표에 김정일의 칫솔질 모습을 볼 수 있을 정도의 중요한 정보원을 위험에 빠뜨렸다는 비난 여론이 일었으나 훗날 밝혀지기로는 북한에서 프랑스로 보낸 ct사진을 한미 정보당국이 입수하여 이를 분석하였던 것이라는 것이 밝혀졌다.[21] 장성택의 길 232 페이지[22] 밑의 로동신문 사진에서 해당 보도의 전문을 볼 수 있다.[23] 대한민국 정부가 북의 김정일 전용열차를 24시간 내내 감시하고 있다는 정보를 굳이 공개해서 딱히 이득이 없기 때문이다. 북한 입장에선 업무중 산재로 포장해 놨는데, 남한 정권에서 팩트를 들이대면서 아니라고 태클거는 게 짜증날 테고, 또 자신들의 최고통치자용 전용열차가 24시간 감시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니까, 운용패턴을 전면 수정할 것이다. 사실 북한 관련 정보가 무분별하게 공개되면서, 북쪽에서 거기에 대응책을 마련하는 사례가 빈발하고 있고, 심지어 이 때문에 동맹국 정보기관들이 국정원과의 정보공유에 소극적이란 이야기까지 나온적도 있다.[24] 심지어 조총련은 당시 중앙간부들이 평양을 방문하고 있었다.[25] 2016년 들어서도 국정원이 숙청됐다고 확인해줬던 리영길 전 총참모장이 건재한게 확인되었다.[26] 60대 남성이 배불뚝이라는 것에서 누구나 성인병을 의심할 것이다. 게다가 고도비만 체형이던 사람이 몇달동안 종적을 감췄다가 완전히 반송장 같은 홀쭉이로 나타나서 팔도 제대로 못움직이는데, 굳이 의사가 아니라도 오래가긴 힘들겠네라고 추측할 수 있다.[27] 실제로 어지간히 잔혹한 악인이라도 그가 죽어가는 과정이 상상 이상으로 비참하면 동정론이 나오게 마련이다. 대표적인 예시로 반군들한테 붙잡혀서 비참하게 살해당하고, 심지어 그 시체도 고깃집에 걸려 조리돌림당한 리비아의 무아마르 카다피가 있다.[28] 좁은 의미에서 따지면 당뇨, 뇌졸중 등의 여러 합병증을 앓으며 고통받다가 뒈졌다는 점에서 병이나 사고없이 쇠약해져 편안히 죽는다는 의미의 자연사에는 속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살, 처형된 제 3세계 독재자와 비교하면 훨씬 편안한 죽음을 맞이한 건 사실이다. [29] 1994년에 김일성이 죽었을 때도 길거리에서 만세를 부르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한다.[30] 김일성 사망 때는 사망 후 며칠 지난 영결식 때에야 웃는 얼굴의 영정 사진을 선보였던 것과 달리, 김정일 사망 때는 사망 발표와 동시에 이 사진이 등장했던 정황으로 보아, 영정을 사전 제작했을 듯하다는 이야기가 있다. #[31] 조선중앙TV에 리춘히가 등장하여 사망소식을 알린 것이 바로 이 글을 읽은 것이다.[32] 이 인물은 문명신 2등 서기관이었다고 한다. 이 사건이 문제가 되어 북한 대사관 내에서 연일 심각한 회의가 있었는데, 태영호 공사의 강력한 선처 주장으로 살아났다는 증언이 있다.# [33] 다른 사회주의, 공산주의 국가들은 원하지도 않았는데 박제가 된 것과는 다르게, 김정일은 유훈대로 박제가 되었다고 한다.[34] 김일성훈장, 김일성상, 김일성청년영예상, 김일성소년영예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