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근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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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만 해도 함께 정권 교체하고 대통령 되자는 나름 훈훈한 용어였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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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둘의 사이는 매우 나빴으며, 당내 경선 당시 BBK와 최태민 등 서로의 치부를 거론하며 극한으로 대립했다. 그리고 둘 다 이 사유로 구속 수감되었다.[1]
1. 개요
이명박과 박근혜를 합친 말로, 민주당계 정권 10년(1998년 ~ 2008년)이 끝난 직후 2008년부터 2017년까지 이어진 보수 정권 9년(이명박~박근혜 정부, 2008년 2월 25일[2] ~2017년 3월 10일[3] )을 일컫는 말이다. 또는 황교안 권한대행 체제 기간까지 포함해 2017년 5월 10일 오전 8시 9분 이전까지로 계산하는 경우도 있다.
사실 지금 와서는 주로 진보층 네티즌들이 당시 보수정권을 비꼬는 의미에서 쓰는 경향이 강하지만 맨 위의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사실 처음 등장한 것은 2007년 17대 대통령 선거 당시 박근혜의 이명박 후보 선거유세 지원에서부터였다. '''즉, 박근혜 본인이 이명박근혜라는 말을 이때 처음 사용한 것이다.''' 참고로 대선 후보를 선출하기 위한 한나라당 경선에서 친이와 친박으로 나뉘어서 갈등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친이와 친박이 서로를 비방하는 과정에서 나온, 그 유명한 '여러분 이거 다 거짓말인 거 아시죠', '엄청난 검증의 쓰나미가 몰아닥칠 것입니다', '저거 어떻게 쥐어박고 싶었어'가 이쯤해서 나온 유행어들이었다.[4]
그러다가 진보진영에서 18대 대통령 선거 쯤부터 박근혜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이명박 정부와 차별화를 시도하는 박근혜에 대해 박근혜나 이명박이나 다를 것 없다는 뜻에서 이명박근혜라는 말을 쓰기 시작했다. 이후 박근혜 정부 당시 야권 지지층에서 정권의 삽질 행보를 비하하는 의미에서 많이 썼으며,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이후로는 언론 등에서도 제법 많이 썼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이후로는 MB503, 716503[5] 등 다른 표현도 자주 사용되고 있다.
2. 이명박 정부
국내 경제를 살리겠다는 목표로 대통령이 되었으나, 글로벌 경제위기 속에[6] 그거 수습하느라 큰 성과는 내지 못하고 넘어갔다. 그래도 금융위기 속에서 더 깊은 나락으로 빠지지는 않았고 수습은 해놨으며, 미국과 중국 등 두 양강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며, 외교적으로 강력한 한미관계를 건설했다는 점에서 박근혜 정부보다는 잘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또한 부동산 정책 성공과 취업 정비, 무역 1조 달성 등등 경제적인 면에서는 업적이 꽤 있다.
허나, '돈 많은 사람이 뒷돈 받진 않겠지.'라는 국민들의 생각으로 대통령에 선출되었지만 결국 다스 실소유주 논란 등으로 인한 부정부패가 발목을 잡았고, 정두언 등 이명박 정부에 쓴소리하던 일부 측근들에 대한 토사구팽과 더불어 국정원 댓글 부대 등 여론 조작 행위와 잘못된 국고 낭비도 했다. 또 언론 장악 시도를 위해 당시 MBC 사장이었던 엄기영에게 압박을 가해 그의 대표이사직 사퇴를 종용하였고, 엄기영이 MBC를 떠난 후 지방지사에서 떠돌던 김재철을 MBC 사장에 낙하산으로 꽂아 MBC 장기 파업 사태를 일으키기도 했다. 더불어 종합편성채널 출범을 위한 미디어법 개정 당시 한나라당이 날치기를 강행하면서 일각에서는 이전 군부독재 정권과 크게 다를 게 없다(물론 실제는 이쪽이 훨씬 더 심하지만.)는 비판을 자초하기도 했다.[7][8]
결국 그렇게 이명박 정부의 인기가 떨어지고 실제 2010년 지방선거에서도 여당이 패하자, 당시 여당의 유력 대선 후보였던 박근혜는 이명박 정부를 물려받는 선거 전략을 처음부터 버리고 같은 당 소속임에도 '''여당 내 야당 컨셉'''으로 이명박 정부를 비난하거나 대립했으며,[9] 이를 국민들에게 각인시켜 이명박 정부의 실패와 박근혜 본인을 가르려는 전략을 취했다. 허나, 이런 서로에 대한 비판들이 도가 지나친 나머지 둘의 사이는 크게 나빠졌고, 이로 인해 벌어진 것이 바로 친이계와 친박계의 지리한 당내 계파 갈등이었다.
얼마나 사이가 틀어졌으면 친이계와 친박계 둘 다 당권을 잡으면 공천 학살로 상대 세력 축출하기 바빴다. 더 웃픈 건 이게 이명박근혜 정권 9년 내내 이어졌다는 것이다. 18대 총선 당시 일부 박사모들은 공천에서 친박 학살을 주도한 친이계 후보를 떨어뜨리고자 민주당, 민노당 후보들을 지원할 정도였고, 20대 총선에서도 친박이 공천 학살을 자행하자 반대 계파에서 이른바 옥새런이라고 불리는 사건을 터뜨리며 계파 갈등의 끝을 보였다.
한편, MB 안티들 중에서는 친이계가 2007년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 때부터 최태민의 양아들인 조순제를 통해 캠프 차원에서 대를 이은 최순실-박근혜 관계의 전모와 박근혜의 무능을 이미 알고 있었음에도 이를 묵인하여 이후 박근혜 정부 탄생에 상당 부분 일조하였다고 비난하기도 한다. 사실 일정부분 책임도 있는 것이 박근혜에 대한 각종 의혹과 능력에 의구심을 가지고 가장 먼저 의혹을 제기한 것은 진보도, 야당조차도 아닌 '''이명박 본인과 친이계 정치인+지지자들'''이었다. 당장 최태민 논란도 한나라당 경선 도중 가장 먼저 제기된 것이었으며 이후 최순실 게이트가 터지자 진보 성향 언론들조차도 한나라당 경선 당시 이명박 측 캠프에서 정리했던 박근혜와 최태민을 둘러싼 논란과 의혹이 담긴 문건들을 참조할 정도였다. 당시 보수에서 박근혜를 밀어내고 이명박을 대권주자로 먼저 선택한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이후 박근혜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이들이 보수의 분열을 우려해서 크게 논란이 될 의혹들에 대해 침묵을 택했기에 18대 대선에서 박근혜에 대한 각종 의혹과 논란들이 크게 이슈가 되지 못하고 묻힐 수 있었다.
2017년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면서 국가정보원 적폐청산 TF의 조사로 이명박 정부의 민낯도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다. 물론 계엄령을 모의하다가 걸린 박근혜 체제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이거저거 한 게 많았다. 원세훈 국정원장 시절의 이명박 국정원이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를 가동시켜 진보 성향의 문화인들을 나락으로 떨어트리고 노골적인 방송 장악과 언론 탄압을 시도 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거대한 파장이 일고 있다.
또한, 정부에 반대하는 인물들을 국가 기관(국가정보원, 사이버사령부, 국군기무사령부)을 총동원해 무차별적으로 사찰한 사실이 밝혀지면서 '사찰공화국'이라는 오명에서 벗어나지 못했다.[10] 여기에 국정원 차원에서 방송장악을 계획해 KBS, MBC, SBS 등의 지상파 방송에 대대적인 '낙하산 인사'를 꽂았다는 의혹이 있다.[11]
또한, 정권 중·후반기 국가기관과 군을 총동원해 댓글 공작을 비롯한 여론조작을 벌여 제18대 대통령 선거에 개입 했다는 의혹을 받으며 박근혜 정부를 만드는 데 일조 했다는 의혹이 있다. 이 때문에 현재 정권 교체 후 원세훈 전 원장을 비롯한 수많은 국정원 간부들이 구속되었다. 또한 '박원순 제압문건' 실행 등 정권 비호를 위해 극우 단체를 지원하여 진보 야권 인사에 대한 흑색선전과 여론조작을 벌이기도 했다. 그 뿐만 아니라 국가정보원, 국세청 등 각종 국가기관이 노무현 전 대통령 수사에 개입해 언론플레이와 과잉수사를 벌였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또한, 다스 실소유주 논란, BBK 주가조작 사건, 삼성 다스 소송비 대납사건 등이 재조명되면서 개인적 비리가 다시 수면으로 드러나 더욱 궁지에 몰리고 있다.
결국 2018년 3월 22일 23시에 구속영장이 발부되어[12] 이명박은 서울 동부구치소에 수감되었다. 2020년 10월 29일에는 대법원이 징역 17년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해 사면이나 병보석이 없다면 96세까지 수감생활을 하게 되었다.
3. 박근혜 정부
박근혜의 여러 실책으로 인해 박근혜 정부가 일찍 끝난 시점에서도 국내 헌정 역사상 가장 무능한 정권으로 평가되고 있다.[13] [14] 게다가 박근혜 임기 말에 드러난 역대급 사건인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통해 청소년부터 노년층까지, 친박 및 콘크리트 지지층을 제외한 그야말로 대다수의 국민들을 분노하게 만들고 말았다. 이명박 정부는 그래도 앞서 말한 것처럼 부패와 조작, 권위주의는 부정적 평가의 대상이나 경제, 외교 분야의 정책들은 긍정적 평가도 받는 반면, 박근혜 정부는 강경 친박을 제외하고는 박근혜를 지지하고 대통령으로 뽑았던 보수 성향 국민들조차 역대 정부들 중 가장 처참하게 실패한 정권이었다고 마지못해 인정한다.
심지어 당내에서도 배신의 정치 운운하며 분열만 일으켜서, 당장 박근혜 탄핵 소추 때 '''집권 여당'''인 새누리당에서조차 박근혜에 정나미가 떨어진 절반 가량의 비박계 의원들과 일부 친박계 의원들이 박근혜의 대통령직 탄핵을 주도했을 정도였으며 헌법재판소에서도 박근혜 탄핵을 만장일치로 결정한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다. 좋게 말하자면 박근혜가 최순실을 국정농단할 정도의 관계로 가지 않고 정치적 식견과 철학이 있어 자기가 대통령 업무를 스스로 진행했거나 다른 이들과 소통하는 역량만 있었다면 대통령직에서 탄핵되지 않고, 후임 대통령에게 자리를 넘기고 비교적 정상적으로 퇴임하는 등 이토록 처참하게 몰락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다만, 이명박과 박근혜를 모두 비난하는 측에서는 꼬리 자르기 식으로 경제 불황, 일자리 문제, 비민주적 통치 행위 등의 문제점을 모두 오직 박근혜에게 뒤집어씌우지 말라고 말하기도 한다. 실제로 박근혜는 이전 정부에서 전혀 없었던 문제들을 본인이 발생하게 한 것이 결코 아니다. 전 이명박 정부에서 해결하지 못한 고질적인 문제점을 물려받아 이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고 실정을 저질러서 더욱 악화시킨 것이다. 오죽하면 박근혜가 이명박을 친형조차 관리 못하는 무능한 대통령이었다고 비난하고 자신들은 '여당 안의 야당'이라는 논리를 내세워 이명박과 자신은 다르다며 명확하게 선을 긋는 전략으로 대선에 이겨 대통령이 되었겠는가?.
허나, 다르다고 비난하기 바빴을 뿐, 결국 박근혜 정부도 비전과 능력이 없으니 당선된 이후에는 자신들이 비방해 왔던 이명박 정부 당시 불거지던 경제 침체기와 경제 성장 실패를 타개하지 못했고, 오히려 비선실세 논란이 결국 최순실 게이트로 드러나면서 이명박 정부에게 넘어가는 듯 했던(...) 범죄정부 타이틀을 다시 가져왔다.
결국 보수 성향 내에서도 잃어버린 4년이라고 하며 박근혜와 이명박이 같이 엮이는 것을 어떻게 피하고자 할 정도가 되었다.[15] 심지어 진보 성향을 띄는 사람들 중에서도 이명박을 싫어하긴 하지만 그래도 박근혜와 동급 취급을 받을 정도는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꽤 있다.[16]
당연히 같은 보수 안에서 이름난 정치인들도 박근혜 정부와 거리를 벌린 인물이 많다. 전임 대통령 이명박은 당내에서의 친이-친박 대립으로 인해 박근혜에 대해서 비판적인 태도를 유지해왔으며, 분명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올려줬음에도 야인으로 밀려나 철저하게 냉대받았다. 원조 친박이다 친이로 갈아탄 전여옥 전 의원도 박근혜의 무능함과 비정함을 오랫동안 옆에서 봐왔기에 시종일관 혹평을 내리며 박근혜 정부를 보수가 아닌 사이비 수구 정권이라고 비판할 정도였다. 19대 대선 시기 바른정당으로 갈라선 유승민의 경우 한때 박근혜 정부의 비서실장이었음에도 공천 문제나 경제 담론 등의 충돌로[17] 노골적으로 버려졌기에 당연히 박근혜를 적대하고, 김무성의 경우에도 공천 문제로 그 유명한 '옥새런' 사건을 벌이는 등 대립하다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발생 이후에는 직접적으로 불만을 드러냈다.
결국 박근혜는 반대파를 끌어안기는 커녕 아군이었던 지지기반들조차도 김해신공항 건설 결정, 성주군 THAAD 배치, 조선일보 디스 등으로[18] 차례차례 통수를 날리며 대립하다 끝내 최종 보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거의 대부분의 지지 기반을 박살낸다. 게다가 정권 교체 이후 국정원 특수활동비 청와대 상납 사건이라는 전대미문의 사태가 터지면서 박근혜 자신 뿐만 아니라 당시 정권 고위 관료들의 도덕적 해이가 극에 달했다는 사실만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결국 이 두 사건 때문에 박근혜 청와대 관료 20명 이상이 구속되거나 불구속 재판을 받는 지경에 이르고 만다.
쉽게 말해서 박근혜 정부는 집안 단속도 제대로 못한 것이다. 보수 입장에서 생각해 봐도 대통령을 배출하고 국회 의석의 절반을 넘긴 여대야소 정권을 사리사욕을 채우는 데 이용하다가 공중분해시켜 버린 것이니 이해할 수 없는 수준의 정치력을 보였다. 게다가 일반적인 측근 비리도 아니고, 국가 시스템 전체를 사유화해서 비리를 저지른 가장 질이 나쁜 경우였다. 여기에 더해 다른 인물도 아니고 보수의 주요 대권주자로 10년 넘게 정치판에서 활동하며 노회하다고 평가받던 박근혜가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런 짓거리를 저질렀으니 더 기가 막힐 노릇이다.
하지만 보수 진영 내에서는 여전히 진영논리로 인해 박근혜를 완전히 버리지 못한 경우도 있어 보수 재건에 큰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제1보수정당 내 친박 세력 뿐만 아니라 우리공화당, 친박신당 같은 소위 극우 성향 태극기 부대 정당들이 대표적이다. 물론 비박 세력을 보는 대중들의 시선도 마냥 곱진 못해서, 박근혜 정부땐 일부 인사들을 제외하고는 숨죽은 듯 살거나 심지어 편을 들기까지 하던 사람들이 박근혜가 몰락하니깐 이제 와서 자신들은 안 그랬다는 듯 깨끗한 척 큰소리치거나 정치적 신념을 번복하는 듯한 행태로 인해 상당수 중도/진보 유권자들에게는 이들 역시 그냥 박근혜-최순실의 부역자, 적폐일 뿐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따지고 보면 이들 역시 박근혜 정부 탄생에 일조했으니 부역자라는 말이 완전히 틀린 말도 아니긴 하다. 물론 본인들 입장에서는 억울한 점도 있을 터이지만 결국은 각자가 판단할 부분이다.
4. 단어 사용의 적합성에 관한 논쟁
4.1. 찬성하는 의견
4.1.1. 정책 계승
친이 성향을 띤 정치인들과[19] 보수층들은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를 보수에서 서로 떼어놓고 평가 하는 시도를 자주 하는데, 이는 헛된 희망이자 착각일 뿐이라는 의견도 있다. 왜냐하면 세부 사항들이 달라도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 둘 다 같은당 소속으로 명백하게 보수를 기반으로 하는 정권들이며, 사회문화정책도 비슷하고 대기업 지원을 통한 낙수효과 같은 경제의 기초 방향도 한결 같았기 때문이다.[20] 그렇기에 이명박을 지지했던 지지자들 또한 상당수는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뽑는데에 주저하지 않았다.
그 밖에도 이명박 정부에서 추진된 정책들과 기조는 상당 부분 박근혜 정부에 계승되어 계속 이어졌다.[21] 이를 비토하는 진보 성향 언론들에서 당시 박근혜 전 대통령을 비난한 논조 또한 비정규직 문제나 낙수 효과 디스, 반노동이나 반 경제 민주화 정책 등 이명박 전 대통령 때와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그나마 사상적 계보도에서 차이가 있다 정도지 현실 경제나 사회 문제를 대처하는 방식에서는 큰 노선 차이도 없었다는 것이다.
4.1.2. 별 다를 게 없던 당시 국민 인식
일부 친이 성향인들의 박근혜와 보수 세력 분리 시도 모습들은 날이 가면 갈수록 심해지고 있는데, 그래봤자 결국 이명박과 박근혜 모두 한나라당-새누리당 계보로 이어지는 보수 정당의 대선 주자이자 대통령이었으며, 어찌되었건 대통령이 되기 전부터 한 당에 같이 소속되어서 활동했던 정치인들이었다.
이들의 관계는 더불어민주당과 정의당처럼 비슷한 진영이지만 그래도 당은 따로 분리된 것이 아닌 애초부터 통일된 보수정당 내의 계파 갈등 사례였다. 결국 당시 대중들이 보기엔 이명박에 이어 박근혜의 집권은 한나라당-새누리당으로 이어진 보수 정당의 연임으로 비춰질 뿐이었다. 실제 법리적으로 해석해도 새누리당으로 개명할때 전신 한나라당의 비례대표들을 모두 이어받아왔기에 마찬가지. 단지 주도하는 계파가 친이계에서 친박계로 바뀐 것일 뿐인데, 일반 대중들이 보기에는 그놈이 그놈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이었다.
4.1.3. 똑같은 여당
이명박 후보를 낸 한나라당과 박근혜 후보를 낸 새누리당은 이름만 바뀌었을 뿐, 결국 같은 당으로 지역의원이나 비례대표도 고스란히 받아왔으며, 이명박도 대통령 마지막해는 새누리당 소속으로 지내며 퇴임 후에도 2017년 1월 1일에 국립묘지 참배와 동시에 새누리당 탈당을 선언하기까지는, 즉 퇴임 이후로도 2016년까지는 새누리당 평당원이었다. 결국 같은 당으로 엮인 이상 친이와 친박은 당 내부의 계파 갈등에 불과하고 공식적으로 같은 당으로 활동하면서 정권을 이어받았으면 같이 묶여서 평가하는 관점이 틀렸다고 보기는 어렵다.
4.1.4. 보수층 스스로가 연장선상으로 인정
상당수 보수 지지층과 정치인들도 이들을 9년 연임 정권이라고 생각하는 등 이명박근혜의 맥락에 동조하는 모습도 보이고 있다. 2018년 5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홍준표 당시 대표는 박근혜 전 대통령과 친박 성향인들을 대체로 비난하던 스탠스 속에서도 "9년 동안 보수정권이 살린(?) 경제" 운운하며 두 정권을 굳이 분류하지 않고 같이 묶어서 인식하는 모습을 보이며 "좌파정부가 망친 한국을 9년 동안 회복시켜 놨다"는 식으로 정치극단주의스러운 발언을 하기도 했다. 물론 박근혜가 딱히 한 것이 없다보니(...) 정치/경제 시스템이 이명박 정부 때 만든 대로 돌아가고 있기 때문이라 이렇게 말해도 박근혜 옹호가 되지 않기 때문이기는 하지만.[22]
4.1.5. 박근혜에 대한 범보수적 동정 여론
친이 성향의 정치인들과 지지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보수 전체가 박근혜 전 대통령을 완전히 버렸냐면 그것도 아니다.[23] 19대 대선에서 지지 유세를 하면서 박근혜 사면, 재조사를 약속했던 홍준표 전 지사는 탄핵 불복이냐며 각계의 무수한 비판을 받았음에도 결국 득표는 약 24%로 최종 2위를 차지했다. 반면 박근혜의 탄핵을 보수쪽에선 전면에 나서 추진했던 유승민 전 새누리당 원내대표의 지지는 홍준표에 비하면 많이 저조했다.[24] 박근혜에 대한 지지는 크게 꺾였지만, 아직도 강성 보수 쪽에서는 박근혜에 대한 동정 여론이 상당히 남아있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사실 홍준표의 경우 애초부터 박근혜에 부정적이었던 인물이라 탄핵 당해도 싸다는 입장이었으나, 보수 성향이 강한 지지 기반에서 유세시엔 박근혜의 사면, 재조사 요청을 공개적으로 받는 경우도 제법 되다보니 본인도 속으론 탄핵이 맞다고 생각하는데 지지자들은 또 추스려야 되니 '대통령이 된다면'이라는 조건을 달고 박근혜 사면을 약속하게 된 것이다. 물론 본인 스스로도 이후 될 가능성이 없던 대선이었다고 밝혔을 만큼 판세가 기울어졌다 보니 없는 지지층이라도 좀 더 모아볼 요량으로 걍 질렀다고 보는 것이 옳지만. 그 덕에 당시 홍준표를 보면 종종 논리가 꼬이는 모습도 보였다. 그리고 이때 상황도 짜증났는지 이후 친박 세력이 스물스물 기어나오자 탄핵당해 보수 망쳐놓은 세력이 어딜 기어나오느냐는 식으로 또 엿을 먹였다(...).
4.2. 반대하는 의견
박근혜 정부가 이명박 정부의 정책을 일부분 계승해서 악화시킨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박근혜 정부를 이명박 정부의 연장선으로 보거나 두 정부를 동일시해서 이명박근혜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서는 무리가 있다는 반론도 있다. 이명박 세력은 민정공화계[25] 를 기반으로 둔 친박계와 거리를 두는, 이재오 같은 민주파(상도동계+이재오계)+이상득계+당내 소장파+이명박 직계[26] 를 지지 기반으로 하는 친이계라는 성질이 상당히 다른 계파였고,[27] 결국 3당합당의 결과물로서 소속된 정당만 같을 뿐, 서로 간의 이념이나 생각은 자유민주주의부터 국가권위주의까지 상당한 차이를 보이는 세력들이었다.
4.2.1. 애초에 두 사람의 배경부터가 다르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크게 문제가 된 이유는 박근혜 본인부터가 북쪽 삼대와 맞먹는 (일종의 유사군주라고 할 수 있는) 독재자 박정희의 딸로서 특권의식을 버리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또 최태민의 딸 최순실 등 과거와 연관된 부분들이 국민들에게 군사독재 시절의 안 좋은 기억을 불러일으켰고, 충성한답시고 저지른 박사모의 행동은 오히려 박근혜에 대한 국민들의 괘씸죄만 더 키웠다.
반면, 이명박은 본인부터가 박정희 정권 당시 6.3 항쟁에 참여한 경력이 있으며, 군사독재 정권 치하에서 고위관료로 임명되어 정치를 하거나 적극 가담한 이력도 없다.[28] 저지른 비리 또한 금전적인 부분에 국한된 것으로, 탄핵감으로는 가능할지언정 그 이상의 비난거린 드물다. 고로 이명박근혜라는 개념은 범우파 진영 전체에 과거 군사독재의 망령이라는 프레임을 덮어씌우기 위한 정치공작의 성공사례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주장이다.[29]
또한, 이명박의 경우 대통령 이전에 기업인으로서 활동하기도 했으며, 그 이전에 서울시장으로서 성공적인 운영을 인정받고 대통령 자리까지 오른 바가 있다. 대통령으로서 비판점도 상당하긴 하지만 적어도 행정능력만큼은 검증이 된 것이었다. 하지만 박근혜의 경우는 박정희의 딸 혹은 퍼스트레이디를 했던 타이틀만으로 정치인이 되어 국회의원하다[30] 시기를 잘 타 대통령이 된 것이지 그 이전의 행보는 거의 검증된 것이 없었다.
4.2.2. 둘의 사이는 원래부터 앙숙이었다
이명박과 박근혜는 한나라당(새누리당) 후보로 대통령에 뽑혔지만 두 사람이 이루던 진영은 계열부터가 달랐다. 즉, 같은 보수 계열이었어도 서로가 추구하는 사고나 사상이 꽤나 상이했다. 덕분에 이명박과 박근혜가 경합하던 17대 대선 후보 경선은 19대 대선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보다 서로에 대한 모독과 인신공격이 '''훨씬 심각'''했다.[31] 19대 대선 당시 더불어민주당의 친문계와 친이재명계가 싸우는 것은 소꿉장난으로 보일 수준이었다.
이명박이 후보로 결정되고 대통령에 취임한 뒤에도 한나라당 내부는 이 경선으로 인한 앙금과 후유증 치유를 하지 못해서 친이계와 친박계는 언제나 대립했다. 이는 결국 친이계의 친박계 공천 학살, 친박계의 친이계-비박계 공천 학살로 이어졌다. 물론 대선을 앞두고 서로가 손을 잡은 모습을 보였지만, 이것은 그저 이념이 달랐는데도 정권을 잡으려고 서로 손을 내밀었던 DJP연합이나 각종 선거에 단일 후보를 낸 몇몇 단일화 연대 사례처럼 서로 현실적 이익을 취하기 위해 마지못해 손을 잡은 것일 뿐이었다.
게다가 개인적 사이로 봐도 이명박은 박근혜와 사이가 나빴고, 오히려 한나라당 내에서 대립각을 세운 손학규와 제법 가까웠다. 실제 손학규가 탈당하자 이명박은 아쉬움을 토로했던 반면 박근혜는 그저 야합 대상일 뿐이었다.[32] 심지어 이제는 옛날 이야기가 되었지만 한때는 최측근 이재오의 주선 덕분에 노회찬, 심상정과도 사이가 제법 좋았다. 그 덕에 대통령 당선 직후 이명박은 노회찬, 심상정이 민주노동당을 탈당해 진보신당을 창당했을 때와 진보신당 창당 2주년 기념일 당시 직접 축하 화환을 보내기도 했다. 물론 이후 이명박 정권의 여러 논란과 비판점 덕분에 관계가 다소 멀어지긴 했지만.
이명박과 박근혜의 악연은 사실 박정희 정부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당시 최태민은 박근혜를 이용해 기업인들에게 돈을 뜯어내고 있었고, 이 때문에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최태민을 싫어해서 마주치기도 꺼려해 당시 현대건설 사장이던 자신이 대신 돈을 갖다줬기 때문에 그 시절부터 이명박은 박근혜와 최씨 일가의 관계에 대해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18대 대선에서는 새누리당 대선 후보로 이재오를 어떻게든 올리려고 했지만 당시 판세가 기울어 박근혜가 대선 후보로 확정되자 울며 겨자 먹기로 박근혜를 지지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막판까지도 당시 제3지대 돌풍을 일으키던 안철수 후보를 알게 모르게 지원한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고,[33] 이전부터도 박근혜를 '''대통령이 되어서도 안되지만 애초에 될 수도 없는 사람'''이라고 비판한 것을 보면[34] 어지간히 박근혜에 대한 신뢰가 없었던 모양이다.
훗날, 결과적으로 보면 본인이 죽음으로 몰고간 꼴이 된 전임자로 인하여 원수지간이 되어버린 문재인을 대통령으로 만들지 않기 위해 공공기관(국정원, 국방부)을 동원한 여론조작으로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만드는 걸 도와줬지만 박근혜가 본래 이명박과 사이가 좋지 않아 훗날 박근혜는 대통령이 된 이후 친박 세력들을 이용해 친이계가 포함된 비박계의 대다수를 공천 학살을 통해 정계에서 퇴출시켜 버렸고, 이명박과 친이계 세력들은 박근혜 체제 시절 철저하게 냉대받았다. 덕분에 훗날 이명박은 박근혜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몰락하게 되자 박근혜 탄핵에 찬성하며 그녀를 비웃기도 했는데, 이것만 봐도 서로 필요할 때 이용하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사이가 안 좋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4.2.3.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의 경제 정책 차이점
경제 정책만 봐도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는 상반된 모습을 많이 보였다. 일단 공식적으로 이명박 정부는 신자유주의 정책 노선을 지향했는데, 물론 실체적 진실에 대해선 논란이 있지만 어쨌든 이명박 정부에서 실시된 정책은 적어도 외형적으로는 신자유주의적 특성을 일부 가지고 있었다.[35] 또 이명박 정부에서 삽질한 대표적인 경제 정책으로 평가받는 자원외교도 정권 안에 성과를 내려고 졸속 추진하다가 일이 망가진 경우지만 당시 미래 자원의 확보에 대한 중요성을 미루어 볼 때 한번쯤은 시도해볼만한 사업이었다. 즉, 정리하면 일단 전체적인 평가야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적어도 방향은 확실하게 잡았고 계획도 구체적이었으며,''' 그 결과가 좋은 점도 나쁜 점도 확실하게 나타났다'''.
반면, 박근혜 정부의 경제정책은 임기 내내 '''실체를 알 수 없었다.''' 박근혜 정부의 대표 경제정책인 창조경제는 개념 자체가 상당히 불분명한 가운데 자화자찬으로 바빴고, 아베노믹스에 영감을 얻었다는 초이노믹스 또한 원본이 된다는 아베노믹스와 비교해봐도 열화카피 수준으로, 정책의 취지와 구체성을 발견하기가 힘들었다. 또한, 박근혜 정부는 인기를 얻기 위한 인기영합주의 정책을 남발했다. 그 유명한 발언인 증세 없는 복지가 그 사례이다. 물론 이명박 정부 때도 국가 부채가 급증하긴 했지만 그 당시에는 글로벌 금융위기의 여파가 커서 옹호의 여지가 있는 반면에 박근혜 정부의 부채 급증은 인기영합적 정책을 세밀한 검토를 거치지 않고 추진한 까닭이 가장 컸기에 동정할만한 여지가 별로 없다.
두 정부가 체결한 대표 FTA였던 한미 FTA와 한중 FTA도 내용을 파고보면 차이가 꽤 나는데, 이명박 정부가 촛불집회 등 당시 강력한 반대 여론에도 불구하고 한미 FTA를 관철시켜[36] 결과론적으로 긍정적 측면도 인정받은 반면, 박근혜정부의 한중 FTA는 추진은 했지만 경제적인 이익을 얻긴 커녕 되레 한중 FTA 믿고 진출했던 한국 기업들이 몇년 안가 북한의 5차 핵실험과 중국 정부의 사드 보복으로 큰 손실만 입게 되었다. 그리고 이명박은 최소한 자신의 정치적 이득에 따라 한국 경제의 기둥인 수출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기업을 직접 없애지도 않았다. 경제성장률도 MB 임기 시절엔 세계금융위기에도 3%대는 유지해 꽤나 선방했던 반면, 박근혜 정부는 당시까지의 잠재성장률이었던 4~5%대로 끌어올리거나 최소한 전임 정부 시절의 수치를 유지하기는 커녕 2%대로 떨어뜨리며 상황을 악화시켰다.
4.2.4.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의 외교 정책 차이점
이명박 정부는 한미동맹 복원을 비롯한 동맹관계 강화에 역점을 뒀고, 이명박 정부 내내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수차례 정상회담을 포함해 훈훈한 모드를 유지했다. 미국의 경쟁국가인 중국과의 관계에서도 이명박의 측근이던 류우익 전 청와대 대통령실 실장을 주중 대사로 파견하는 등 나름 신경을 써 미국과 중국 양강 사이에서 경제적 실익을 얻었다. 물론 천안함 피격 사태와 연평도 포격 도발 등 북한의 대남 도발 문제에 대한 대응 수위와[37] 중국 어선의 한국 영해 불법 조업 문제 등을 놓고 양국이 갈등을 빚기도 했지만 그 외에는 한중관계 역시 비교적 큰 무리없이 무난함을 유지했다.[38]
그러나 박근혜 정부는 중국과 친하게 지내면 중국이 북한의 제재를 더 강화하여 김정은이 굴복할 것이라는 헛된 낙관론에 빠져 지나친 친중 정책을 펼치다가[39] 한미동맹이 이명박 정부 때보다 약해졌고, 심지어 이것조차도 박근혜 정부 말기이던 2016년 북한의 5차 핵실험 당시에는 북한에 대한 제재 압박 참여를 중국에 요구했다가 중국이 순망치한인 북한에 대한 과도한 제재 참여를 거부하며 박근혜 정부가 예상했던 것과는 정반대로 흘러가자, 중국 측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사드 배치를 추진하여 중국의 경제 보복과 한중관계 악화를 초래하는 등 실속은 영 챙기지 못하는 자충수를 두었다.
그리고 한일관계에 있어서도 이명박 정부는 초,중반기까진 관계를 비교적 원만하게 유지한 반면,[40] 박근혜 정부는 정치/역사 분야와 문화/사회 분야는 따로 가는 투트랙 전략을 쓰라는 전문가들의 조언에도 불구하고 이를 무시한채 아베 내각과 정상회담 한차례 하지 않는 등 일본과 대립하다가 뜬금없이 임기 중후반에 위안부 합의에 서명하여 오락가락하는 대일 정책을 보이는[41] 등의 행보로 국내외의 비판과 논란에 직면하기도 했다.
4.2.5. 두 사람의 근무 태도는 천지차이다
정치적 평가는 엇갈리지만 지지자든, 안티든 인정하는 것이 두 사람의 성실성만큼은 천지차이였다. 이명박은 대통령 재임 시기에 평일에는 항상 늦어도 새벽 5시 전에는 일어나 일할 준비를 하고 청와대로 출근하여 오후 7~8시에 퇴근하는 생활을 반복했다. 이명박의 근무 스타일을 따라 할 수밖에 없는 청와대 인력들이 견디다 못해 피로를 호소할 지경이었지만 이런 이명박의 근무 스타일은 임기가 끝날 때까지 한결같았다.[42]
'''따라서 이명박에게 부정부패 문제는 있었어도 대통령으로써의 자질, 특히 성실성이 부족했다고 볼 수는 없고, 그 성실성을 비리를 위한 수단으로서 이용했다고 문제삼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박근혜처럼 무능력했다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저 해외여행이나 다니고 청와대에서 드라마나 보며 하는 일 없이 날로 먹었다는 사실이 밝혀진 박근혜와 근무 태도를 가지고 비교하는 것은 솔직히 실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4.2.6. 기타 업적 차이
이명박은 서울시장 시절 행정력을 인정받아 대통령이 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는데, 대표적인 것이 청계천 복원과 대중교통 개편이였다. 우선 청계천 복원의 경우 과거 건설업에서 뛰었던 경력을 살려 그야말로 속전속결식으로 이뤄냈는데, 덕분에 지금의 청계천이 복원되었으니 공이라 할만하다. 물론 청계천 복원 사업의 방향성에 대한 의문과 서울시장 시절 본인 임기 내에 복원하겠다는 생각 때문에 마무리가 너무 급해 졸속 처리되었다는 비판은 있었다.
서울특별시 대중교통 개편 문제는 일각에서 비판도 받았던 청계천과 달리 초기의 시민 불편으로 인한 난맥상 정도를 빼면 딱히 문제가 없는 사업이었다.[43] 특히 서울시 교통카드 도입으로 회수권, 토큰, 승차권 등으로 교통마다 분할되어 있던 티켓을 교통카드로 통일해 서울시민들이 대중교통을 좀 더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성과를 거두었다. 참고로 서울특별시의 버스를 지금처럼 분류한 것도 이명박 시장 시절이다. 당시에는 지랄염병 버스같은 논란이 조금 일어 버스에 달린 알파벳 분류는 사라졌지만 어쨌든 버스 색을 통일해 가독성이 더 좋아지기는 했다.
이에 비해 박근혜는 본인이 주도했고 좌우 대다수가 인정하는 업적이라는 것 자체가 '''없다'''. 국회의원 시절은 물론이고 대통령 시절의 행보도 마치 박정희와 육영수 기념사업을 하려고 대통령이 된 것마냥 부모를 어떻게든 미화한 국정교과서를 만들어 나라의 혼을 바로잡겠다는 주장 하에 각급 학교에 채택하기를 강요한 행동이나 자행했을 뿐이었다.
4.2.7. 두 사람이 구속된 사유 또한 다르다
이명박은 대통령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기업인의 속성을 버리지 못하고 기업을 경영하며 터득한 모든 수법을 동원하여 부정부패를 자행했기에 뇌물수수가 주된 구속 사유이다. 정작 국정 운영 자체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반면, 박근혜도 구속 사유 중에 부정부패가 있긴 하지만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문서에서도 알 수 있듯이 '''최순실이라는 일개 민간인이 국정 전체를 농단하며 부정부패를 일삼았고 박근혜 대통령은 이를 묵인, 협조, 방기했다'''는 것이 주된 구속 사유였다. 좀 심하게 표현하자면 최순실의 국정농단만 아니었으면 임기라도 끝까지 다 마칠 수 있었다. 구속 시기도 이명박은 임기 다 채우고 한참 뒤인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에 구속되었지만, 박근혜는 임기도 다 채우지도 못하고 2017년 3월, 헌법재판소의 탄핵 판결을 받고 파면되었다.
그러나 2016년 겨울,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여파로 인해 국회에서의 탄핵안이 가결되어 박근혜의 대통령직이 정지 당했을 당시 이루어진 특검 조사 과정에서 박근혜도 최순실과 함께 대기업(삼성이나 SK, 롯데그룹)으로부터 뇌물을 받는 등, 부정부패를 손수 저지른 사실이 일부 드러났다. 게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국가정보원으로부터 특수활동비를 뇌물을 수수받았던 사실까지 드러났다. 자세한 내용은 국정원 특수활동비 청와대 상납 사건, 국가정보원 대북공작금 유용 사건 참조.
채널A의 시사 프로그램 외부자들에서 이명박근혜 프레임이 온당하냐는 것을 주제로 토론이 벌어진 바가 있었는데, 보수 패널인 전여옥과 안형환은 모두 이명박이 국정 평가에 관해서는 다소 논란이 있지만 박근혜처럼 정신 나간 행위를 한 것은 아니고, 이명박과 박근혜는 사이가 매우 나빴으며, 프레임 갈라 놓기는 위험하다고 하면서 이명박근혜 프레임은 타당하지 않다고 이명박근혜 프레임에 관한 반대 의견을 밝혔다.
연령과 형량을 따져 보면 이명박은 1941년 생으로 연령상 80, 90대가 가까워지는 고령이고, 17년을 선고받아 사면이나 병보석이 없다면 96세까지 수감생활을 해야 되지만, 박근혜는 이명박보다 나이가 적은 1952년 생에 22년을 선고받아 87세까지 수감생활을 해야 한다. 둘 다 사실상 무기징역으로 감옥에서 말년을 보내게 되었다.
5. 비슷한 표현
- 4.19-5.16 이후 약 30여년간 유지되었던 3~6공 초반 군사 정권 시기를 거론할 때 '박전노 시대'라는 표현이 진보 평론 계층에서 어느 정도 돈 적이 있었다.
- 장도리 작가인 박순찬은 이명박근혜 단어를 활용하여 이두박근과 산삼 년근에서 따와 '이명박근(근육 근(筋)&뿌리 근(根))' 드립을 치기도 했다. 2013년 10월 17일, 2017년 11월 3일
- 2018년 혜경궁 김씨 사건이 터졌을 당시에는 이재명 경기도지사 안티들이 이들을 싸잡아 이재명박근혜경궁(...)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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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년 전의 경쟁자, 사실상 예언이 된 폭로전
[1] 웃긴 것은 10년과 11년이 지나 한 명씩 구속되어 재판에 넘겨졌으며, 이명박은 징역 17년을, 박근혜는 징역 22년을 선고받았다.[2] 노무현 대통령 퇴임 및 이명박 대통령 취임일이다.[3] 박근혜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여파로 헌법재판소에 의해 대통령직에서 파면된 날이다.[4] 이명박의 BBK 주가조작 사건, 박근혜와 최태민의 부적절한 관계 등 두 세력의 수장에게 있어 가장 치명상이 될 수 있는 논란 대부분이 이 과정에서 쏟아져 나왔었다. 결국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후 이 논란의 뿌리가 드러나 두 수장을 나락으로 떨어뜨린 경우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둘이 싸우다가 둘 다 망했다는 말도 일리가 있지만 이명박 의혹의 경우 처음에는 박근혜 측에 의해 이 의혹만 제기되었었다. 그러나 이 의혹이 드러난 직후 이 의혹을 적극적으로 캐내기 시작한 정봉주와 주진우가 이명박의 의혹에 대해 적극적인 공격을 했고, 이명박은 정봉주를 고발했지만 정봉주와 주진우는 지속적으로 이런 사실을 캐냈다. 결국 사실을 캐낸 정봉주와 주진우가 알아낸 사실을 검찰 등에게 자료를 제출하면서 그 증거로 이명박 또한 구속되었다.[5] 716과 503을 합하면 1219가 된다.[6] 다만, 2008년 세계금융위기의 경우 서구권이 직격탄을 맞았지 아시아 지역은 당시 중국의 성장 등과 맞물려 피해를 상대적으로 덜 받았다고 평가받는다.[7] 이는 후술되어 있지만 군부독재 세력을 계승했다고 평가받는 친박 세력과는 다른 결의 친이계가 벌인 짓이었기에 대중들에게는 또 다른 의미의 실망감을 안겼다. 더 심각한 점은 이런 행위를 말린 (대선에서 박근혜 대신 이명박을 도운) 당내 소장파들조차 눈에 거슬렸는지 죄다 토사구팽했다는 것이다. 사실 이명박 정부의 몰락은 이때부터 시작이었다고 보는 사람들도 많다.[8] 아이러니한 것은 당시 야당(민주당계)에서 결사반대한 미디어법이 통과된 덕에 JTBC가 설립되고 JTBC는 박근혜의 몰락에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했다는 사실이다.[9] 여기서 정점을 찍은 것이 바로 세종시 문제 등 이명박의 공약 파기에 대한 비판들이었다.[10] 이에 대한 가장 유명한 사건이 PD수첩과 그것이 알고싶다에서도 나온 '''공직윤리지원관실 민간인 사찰 사건'''이다. 또한, 국가정보원·국방부 여론조작 사건 수사 과정에서 사이버사령부가 연예인과 방송인 33인의 SNS를 사찰한 사실이 드러났다. 여기에 기무사령부에서는 수사관의 민간인 불법사찰도 모자라 조선대학교 교수의 이메일을 해킹하다 걸리기까지 했다. 국정원은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를 만드는 과정에서 문화인들에 대한 광범위한 사찰을 했고 심지어는 정권에 비판적이었던 종교인 명진스님까지 불법사찰하는 짓거리를 저질렀다.[11] KBS와 MBC는 공영방송이니까 쉽게 장악했지만, SBS는 민영방송이라 완전 장악에는 실패하고 최금락 前 보도국장을 홍보수석으로, 하금열 前 사장을 비서실장으로 영입해서 간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했다.[12] 다만, 집행은 23일 0시 2분에 이루어졌다. 자세한 내용은 이명박 전 대통령 구속 사건 문서 참고.[13] 최악의 정권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최악은 상당히 주관적인 표현이라 개인의 가치관 등에 따라 의견이 다르다. 예를 들어 박정희, 전두환 정권처럼 성과 자체는 있었지만 그런 것을 떠나 권위주의적 사회 분위기에 시민들을 탄압하고 고문하던 정권이 더 최악이었다고 보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 시점까지의 현대사에서 박근혜 정부만큼 '''"한 것이 없는"''' 정부는 없었다는 평이 압도적이다. 당장 박근혜 정부가 내건 대표적인 슬로건 2개가 초기에는 경제민주화, 후기에는 창조경제였는데, 알디시피 경제민주화는 제대로 이루어진 것이 없고, 창조경제는 지금까지도 그 실체가 모호하다.[14] 하지만 문재인 정부의 계속되는 삽질로 '''최악은 아니다''' 라는 평이 생겨나기도 한다...[15] 사실 그렇다고 진짜 '잃어버린 4년'이라는 용어가 많이 쓰이는 것은 아니고, 그냥 최대한 엮이는 것을 피하고 언급하지 않으려 한다.[16] 박근혜 탄핵 이후 잔잔하게(?) 이명박을 재평가하는 부류들은 부정부패야 있었을지언정 그래도 한미동맹 강화나 2008년 경제위기에서 그럭저럭 선방하는 등 긍정적 부분도 있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심지어 문재인을 박근혜 이상으로 싫어하는 커뮤니티들에서도 적어도 박근혜를 긍정적으로 보는 경우는 거의 없다.[17] 말이 담론이나 정책의 충돌이지, 핵심은 자신에 대한 비판을 도전으로 받아들이고 철저하게 깔아뭉개는 박근혜의 특성에서 기인한 것이기도 하다.[18] 박근혜 정부 말기 접어들며 조선일보가 슬슬 정권의 부패 스캔들 의심 등 견제형 기사를 내기 시작하자, 송희영 주필 비리 논란 등을 거론하며 원조 부패 기득권 세력이 누굴 나무라느냐는 식으로 옹골찬 디스를 날렸다. 이는 당시 조선일보가 이명박과 연줄이 있다는 식으로 친박 지지자들 사이에 평이 안좋은 것도 한몫했는데, 이후 탄핵 정국에서 월간조선이 태블릿 PC 날조설 등을 옹호하며(2020년 법원 판결로 허위 보도에 대한 정정 사과문까지 냈다.) 거의 소설급 찌라시로 박근혜를 쉴드친 것을 생각해 보면 웃픈 부분이다.[19] 전여옥이 대표적이다. 박근혜 정권을 보수 정권이 아닌 사이비 정권이라는 평까지 했을 정도.[20] 실제 이명박이나 박근혜나 재벌/대기업 친화적인 정치를 했다고 알려져 있다(대기업 친화와 기업 친화는 엄연히 다른 말이다.). 또 둘 다 재산세나 상속세에 대해 부정적인 대통령이라 이명박은 일찌기 참여정부 시절 도입한 부자세를 대통령이 되자마자 폐지하기도 했다. 다만, 박근혜는 재벌 친화적이었다기보다는 재벌들 슬그머니 압박해 돈 뜯어내는 딱 군부 독재 시절 스타일이긴 했다. 이게 문제가 되어 터진 것이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시발점이 된 미르재단 문제다.[21] 사실 이 부분이야말로 진영간 인식차가 가장 큰 부분 중 하나이다. 애초에 전제 자체가 다른 것이다.[22] 보수 진영 일각에서 후임 정부인 문재인 정부의 정책을 비판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박근혜의 정책만 뒤집는 것이면 어차피 한 것도 별로 없고(...), 최순실이 개입한 것도 비전문가가 합법적 절차 없이 만든 시스템이기 때문에 뒤집어엎어도 상관이 없다. 다만, 이명박 정부의 정책은 참여정부 이후 집권한 보수 진영이 새로 짜 9년간 유지되었으며, 고로 상당수 보수 진영에서는 이명박 시스템에서 시대에 맞지 않는 것만 일부 고쳐나가면 된다고 생각하는데, 문재인 정부가 이를 몽땅 뒤엎으려는 것이 아니냐는 생각이 드니 반발하는 것이다. 물론 반대 입장에서 보면 그전 정권 정책을 상당수 뒤집어엎은 것이 이명박 정부인데 무슨 내로남불이냐 싶기도 할 것이고, 긍정적으로 보면 이런 정책에 대한 찬반 논란 자체가 민주 사회에선 당연한 토론거리지만. 진짜 문제는 그런 토론거리도 없을만큼 실체가 모호한 것이다. 실제로 상대 진영에 대한 막연한 환상을 가지고 본인들이 생각하기에 왠지 상대 정파가 했을 것 같다고 느껴지는 국가적인 실책을 뒤집어씌우다가 막상 본인들이 지지하는 정부의 정책이었다는 것이 밝혀져 조롱거리가 되는 경우가 많으며, 심지어 국회에서 국회의원들이 이런 행동을 해서 구설수에 오르는 지경이다.[23] 대다수 한국의 보수계 인사들이 탄핵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이들 중 상당수는 헌재의 탄핵 결정은 존중하지만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검찰의 탈탈 털기식 조사같은 그들 기준 정치적 보복 냄새가 나는 행위는 그만둬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던 와중에 박근혜 전 대통령을 구속 기소하기로 결정했던 검찰 측에서 일명 돈 봉투 만찬 사건이 터지면서 불만은 더 커졌는데, 유영하 변호사는 23일 박근혜 전 대통령 변론 도중 검찰의 박근혜 뇌물죄 적용을 강하게 힐난하며 검찰 측의 말대로면 돈봉투 만찬 사건 또한 명백하게 뇌물죄 및 수뢰죄가 적용됨을 언급했다. 물론 진보 진영에서는 박근혜나 검사나 둘 다 뇌물죄가 맞으니까 빨리 징역에 처하라고 한다(...). 뭐, 돈봉투 만찬 사건은 항목을 보면 알 수 있듯 조금 해프닝적인 성격도 있다.[24] 다만, 이는 유승민이 보수 최대 정당인 자유한국당을 탈당해 소수정당인 바른정당으로 출마했기 때문인 점도 크다. 결국 대선에서는 결선투표제가 도입되지 않는 이상, 사표 방지를 위해서라도 여당과 제1야당 후보의 싸움으로 귀결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 당장 당시 자유한국당에는 박근혜 대통령 탄핵에 찬성한 의원들 역시 많았기 때문에 홍준표에 간 득표가 무조건 탄핵 반대 세력이 던진 표라고 보는 것은 무리며(이는 박근혜 석방을 외치는 우리공화당계의 저조한 득표율을 봐도 알 수 있다.), 박근혜도 과거 독자정당 시도를 한 적이 있었지만 지지부진한 지지율에 소리소문없이 복당한 적이 있었다. 또한 유승민 전 대표의 경우 박근혜가 직접 '배신의 정치' 를 들먹이며 프레임을 씌워댔기 때문에 둘이 단일화했더라도 얻는 이득이 크지 않았을 거라는 시각도 있었다.[25] 군부독재 시절 이들 위주의 정당이었던 민주정의당, 신민주공화당을 가리킨다.[26] 안국포럼 등의 단체. 예를 들어 김영우와 조해진이 안국포럼 출신이었다.[27] 물론 이 중 이명박 정부에 마지막까지 남은 핵심 인사는 이재오 정도뿐이다. 정두언, 남경필 등 소장파들은 초기부터 이상득계와 반목하다 토사구팽되었고, 이상득계는 이상득이 MB 정부 기간 부패 혐의로 구속되며 몰락한다.[28] 박정희 정권 시기이던 1960, 1970년대 당시 이명박은 2, 30대의 청장년층이었다.[29] 다만, 이명박은 한나라당 대선 경선 이후 박근혜를 끌어안기 위해 박정희를 추켜세우기도 했는데, 문제는 정권을 잡고도 유지되어 박정희 성역화 사업에 과도한 혈세를 낭비한 것이 아니냐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특히 대선 경선 당시 이명박을 공개 지지했던 김영삼 입장에서는 이명박의 그런 모습은 굉장히 떨떠름했을 것이다. 사실 이는 소위 개혁보수를 표방하는 인사들 자체가 독재추종세력이 많은, 어떻게 보면 변질된 한국식 보수의 특성 때문에 이론과 현실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측면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이명박은 개혁보수와도 조금 거리가 있는 인물이었지만 친이계에는 분명 개혁보수 세력이 포함되어 있었고, 대표적인 인물 중 한 명이 진짜 자유민주주의적 보수 가치를 찾자고 주창하던 정두언 전 의원이었는데, 상기되어 있듯 이명박 정권 초기에 쓴소리하다 날아갔고 지금은 고인이 되면서 당분간은 맥이 끊겼다고 봐야 할 듯하다.[30] 심지어 국회의원 시절도 법안 제출을 잘 하지 않는 의원으로 유명했다. 즉, 이때부터 성실과는 상당히 거리가 멀었던 것이다.[31] 두 대선 모두 어떤 후보가 나가든 당선은 확정적이라는 분위기가 뿌리내린 선거였다는 점은 비슷했으므로 후보 경선 열기가 뜨거웠지만 17대 대선의 한나라당 후보 경선은 이명박, 박근혜 둘 다 우위를 평가하기 힘들 정도로 용호상박이었던 반면, 19대 대선의 민주당 후보 경선은 문재인 독주 체제가 쭉 이어져 사실 한나라당 후보 경선에 비하면 그렇게 진흙탕 싸움으로까지 번지진 않았다. 게다가 사상적으로도 친이, 친박만큼 크게 차이나지도 않았다.[32] 이명박은 박근혜 탄핵소추안이 가결됐는데도 박근혜가 탄핵 사유를 부인하자 비웃는 말투로 본인이 뭐라 하든 전 국민이 다 알고 있으니 순리에 따르면 된다고 비아냥거리기도 했다.[33] 그 덕에 안철수 후보가 MB 아바타라는 흑색선전에 시달리기도 했다.[34] 정두언, 전여옥 전 의원이 자서전에서 공통적으로 한 말이다.[35] 다만, 4대강 정비 사업 등 이명박 정부의 핵심 정책은 오히려 신자유주의보단 케인즈주의스런 관치 경제 비슷한 형태를 띄어 양쪽 진영에서 동시에 호불호가 나뉘기도 한다. 하지만 이 부분은 2007년부터 기미가 보였고 2008년에 본격적으로 터진 대침체로 인해 신자유주의의 이미지 자체에 타격을 입어 케인스주의가 다시 대두되었다는 점도 어느 정도 감안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36] 다만 한미 FTA를 처음 추진한건 MB정부가 아닌 참여정부였다. 물론 이때 노무현 대통령도 지지층들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혔는데, 이때 노 대통령은 지지층의 배신감을 이해한다며 오히려 이건 자기가 지지자들을 설득해야 할 문제라고 했다. 지지층에서 딱히 정권따라 입장을 바꾼건 아닌 셈. 혹자는 참여정부에서 유리하게 만들어놓은 한미FTA를 MB정부 들어 내용이 후퇴해 반대한다고도 했는데 뭐 각자 판단할 부분. 또 이런 반대 여론 덕분에 이를 이용해 되레 미국과의 협상에서 좀 더 몫을 챙길 수 있었다는 평도 있다.[37] 이명박 정부는 북한에 대한 강력한 군사적 응징 및 제제 강화를 주장했던 데 반해, 후진타오 정부는 북한에 대한 제재 강화 반대와 남북한 양측의 이성적 대화를 촉구했기에 이로 인해 한중간 갈등이 생기기도 했다.[38] 다만 이것은 당시 중국이 현재 시진핑 정부보다 상대적으로 덜 강경하다고 평가받았던 후진타오-원자바오 집권 시절이었던 것도 고려해야 한다. 실제 후진타오는 이명박 정부 당시 한국과의 갈등이 있을 때면 이명박의 요구사항을 어느 정도 들어주기도 했다.[39] 오죽하면 미국조차 반대하던 중국 전승절 행사에 참여했을 정도였다. 다만 러시아 전승절 행사에는 당시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으로 발생된 서방과 러시아의 갈등으로 인해 행사 참여 시 발생될 미국과의 외교관계 악화를 고려해서 불참했다.[40] 다만, 이명박도 집권 후반기에는 독도 방문과 일왕 사과 발언 등으로 당시 지지율 회복을 위해 한일관계를 파탄냈다는 비판에 직면하기도 했다.[41] 이는 미국 오바마 정부의 강권 때문이었다는 일각의 주장도 있다. 요는 박근혜는 기본적으로 박정희 사망 이후에 신군부가 집권하는 걸 방관한 미국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일본의 경우도 하도 다까끼 마사오라는 공격을 들어 어떻게든 친일이라는 딱지를 떼고 싶어했다. 그래서 미국의 반발을 무릎쓰고 친중정책을 펼쳐 전승절까지 참석한 것인데, 이는 당연히 당시 오바마 정부를 크게 실망시켜 미국이 대놓고 한일관계에서 일본 편을 드는 상황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예전부터 미국은 중국과 러시아 견제를 위해 일본의 재무장을 적극 찬성했지만 한국 때문에 대놓고 말은 못했는데, 박근혜가 대놓고 친중정책을 하자 눈치볼 것 없이 한일 간 분쟁을 해결하려고 찍어누른 결과물이 위안부 합의였다는 것이다. 다만, 이것도 주장이지 공식 문서 등으로 확인된 확실한 정설은 아니다.[42] 여담으로 이렇게 잠이 없는 사람들의 경우 정신력 문제도 있겠지만 애초에 잠을 많이 자지 않아도 되는 유전자를 가졌다는 기사도 있다.[43] 여담으로 전국구 대중교통 개편 문제를 이명박 때 한걸로 오해하는 사람도 있는데, 알다시피 당시는 민주당 정권 시절이었다. 중앙정부의 지원이 없다면 지방정부로선 한계가 있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