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역사
1. 고대
태국은 현재 타이족의 국가이나 타이족은 태족이 중국 윈난성 및 광시지역에서 이주해 온 민족이며 선주민은 그들과 다르다. 본디 타이족들은 중국의 기록에도 등장하는데 서기 8세기 중반 당나라가 안사의 난으로 광동지역과 광서지역이 혼란에 빠졌었는데 이때 자주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나중에 모두 진압당하고 타이족은 두 부류로 나뉘어 한무리는 윈난성 남부 십송빤나지역에 정착하고 나머지는 베트남의 디엔비엔푸(베트남 서북지역)지역을 통해 라오스로 들어가기시작했다.
한편 태국의 중북부에는 현재 미얀마 남부에 분포하는 몬족들의 왕국 드바라바티[1] , 하리푼자야[2] 등이 있었고, 동남부는 앙코르 제국을 세운 크메르족이 지배, 남부는 스리비자야가 진출하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전체적으로 보면 중부, 북부, 서부에 몬족이 분포하고, 동남쪽에 크메르족, 남부 말레이 반도 일대에 말레이족과 스리비자야의 영향이 공존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었다.
3세기경에는 남부 대부분의 지역이 부남의 영향하에 있었고, 크메르족의 앙코르 제국이 전성기를 맞자 북부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앙코르 제국의 영향권에 들어갔다. 그리고 그 무렵 타이족의 진출에 관한 증거가 보이기 시작한다. 유명한 것이라면 12세기 중반 수르야바르만 2세가 만든 앙코르 와트의 부조에 기록된 타이족 병사들이다.
태국인은 중국에서 이주한 집단과 토착 인종(말레이인, 오스트랄로이드 등)이 융합하여 탄생한 민족으로 추정된다. 중국에서 이주한 집단이 어디에서 처음으로 출발한 것이냐에 대해서는 황하 상류설, 양쯔강 상류설, 윈난성 설, 중국 강남지방 설, 토착민 설, 해양 유입설 등이 있지만, 공통적으로 동의하는 것은 중국 최남부 윈난성에서 동남아시아(인도차이나 반도)로 유입됐다는 것이다. 10세기경부터 유입의 흔적이 나타나나,[3] 본격적인 이주는 13세기 대리가 원나라에 멸망한 이후였다.[4]
윈난성지역에 남아 거주하던 타이족들은 대리국의 지배를 받으며 십송빤나와 쳉훙(중국지명으로는 징훙)지역에 살고 있었는데 대리국이 12세기 초 귀족과 왕족간의 다툼이 생긴 틈을 타 파야 쯔앙(พญาเจื่อง)이 왕을 칭하면서 징훙을 수도로 한 쳉훙왕국을 건설하기도 했다.[5]
중국에 남지않고 윈난성과 광시성을 통해 메콩강을 타고 대대적으로 남하한 타이족 일파는 9세기경 태국 북부 고산지역에 도착하여 그곳에 거주하던 와족 들을 몰아내고 시하나바티(simhanavati)왕이 나타나 치앙라이 인근 현재의 치앙센 지역에 도시국가를 건설한다. 900년 하리푼자야 왕국의 몬족이 침공하여 한동안 멸망하였으나 937년 다시 타이족은 반격을 하여 몬족을 몰아내고 치앙센을 되찾는다.
이후 1000년경 대지진이 발생하여 치앙센 도시문명은 개박살이 나버린다. 심지어 이곳의 선주민이었던 와족이 라바차카랏(lavachakaraj)이라는 왕을 중심으로 다시 남하하여 치앙센지역의 지배민족이었던 타이족을 몰아내고 와족들이 지배민족으로 다시 등장하였다.
1100년경 치앙센지역에 와족들 마저 재등장하자 이 지역의 인구가 터져 넘치게되고[6] 타이족은 인근의 치앙마이나 치앙라이지역에 란나왕국을, 또 다른 일파는 더 남하하여 지금의 수코타이 지역 짜오프라야강 유역에 포쿤왕국을 건설한다. 이나라가 바로 후술할 수코타이왕국의 전신이 되는 나라이다. [7]
비슷한시기 치앙라이와 라오스 사이에 파야오 라는 작은 도시국가가 생겨나기도 했지만 곧이어 란나왕국에게 흡수되었다.
1.1. 수코타이 왕국
13세기경에 북부 지방에서 불교 소왕국이 성립되어 당대 강국이던 크메르 제국처럼 강대한 나라를 꿈꿨으나, 1253년 쿠빌라이 칸의 몽골군에게 무자비하게 짓밟혔다. 13세기 말에 수코타이, 란나[8] 는 세력을 확장하여 수코타이의 람캄행 대왕은 태국 문자를 만들고, 란나, 파야오, 수코타이로 대표되는 타이족 3국의 동맹[9] 을 맺고 앙코르와 치열한 전쟁을 해서 지금의 태국땅에 타이족의 입지를 탄탄히 하였다. 그는 중국에 대해 사대외교를 벌여 원나라에 조공국을 자처해 베이징에 입조하기도 했다. 13세기 말 앙코르를 방문한 중국 한족 주달관은 그의 기록 진랍풍토기에서 크메르족이 섬이라고 기록된 타이족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다고 기록했다.
1.2. 란나 왕국
란나는 13세기 말쯤 태국 북동부 치앙마이일대에 세워진 나라로 란나는 원나라의 침입을 막아내었으며[10] 남쪽의 수코타이와 태국을 양분하였고 수코타이 멸망 이후에도 존속하다 버마에 정복되었다가 시암에게 멸망한다.
2. 아유타야 왕국
아유타야 왕국 항목 참조.
3. 시암
3.1. 톤부리 왕조
톤부리 왕조의 건국자는 탁신 대왕이다. 아유타야가 함락되기 직전 아유타야를 탈출한 딱씬 대왕은 시암 동남부의 짠따부리로 피신하고 그곳을 근거지로 삼아 반년 만에 아유타야를 탈환한다. 하지만 아유타야는 초토화 된 상태이고 더이상 버마군을 막기에도 적절하지 않아 수도를 현 방콕 서부인 톤부리로 했다. 톤부리-방콕은 17세기 프랑스군이 주둔했을 때 요새를 만든 곳이고, 아유타야에 비해 방어가 용이한 편이었으며, 해상으로 진출하기도 편했다. 이런 이유로 딱신 대왕은 1768년에 톤부리를 수도로 정한 후, 구-아유타야에 웅거한 제세력들을 모두 통합한다. 1769년에는 태국 중부는 물론이고, 캄보디아 서부지역까지 통일시키는 등 빠르게 뻗어나갔다.
1774년부터는 북부의 버마 세력을 공격하기 시작하여, 1776년에는 치앙마이 지역의 란나 왕국을 영구히 통합시키는 쾌거를 이뤘다.
딱신은 버마의 공격을 물리치고 아유타야를 통합하고 라오스, 캄보디아를 다시 속국해서 비엔티안 에메랄드 불상을 뺏는 등 업적을 세웠으나, 안타깝게도 말년에 정신병에 걸려 부처로 자칭하고 포악한 정치를 펼쳐 강제로 구금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중국계 혼혈로서 차별받던 짜끄리 라마 1세가 탁신을 죽이고 만든 핑계일 뿐이다. 이 반란은 딱신의 맹우이자 딱신과 함께 정복전을 펼치던 프라야 짜끄리 장군이 이끄는 반란군에 의해 정리되고[11] 그가 새로운 왕으로 즉위했다. 유폐되었던 딱신은 반란 와중에 살해당했다.
3.2. 짜끄리 왕조
짜끄리 장군이 딱신 대왕을 대신하여 시암의 국왕이 되었는데, 그가 세운 왕조가 현 태국의 왕조로 지금 왕조는 짜끄리 왕조, 라따나꼬신 왕조, 방콕 왕조 등으로 불린다. 참고로 짜끄리 왕조의 분가들은 랏짜사꾼(ราชสกุล, Ratchasakun)이라 불린다.
3.2.1. 라마 1세
라마 1세로 즉위한 차오프라야 짜끄리는 딱신의 전쟁을 이어나가고, 1782년에 수도를 톤부리 건너편인 방콕으로 이전했다.[12] 이때 구-아유타야의 폐허에서 자재를 운반하여 건설함으로써 방콕이 아유타야를 대신하는 수도를 의미를 명확히 하였다. 부모가 중국계인 것으로 차별과 멸시를 받던 차오프라야 짜끄리는 항상 국왕에 대한 배신과 쿠데타를 염두해 두었고 버마와의 전쟁에서 치열하게 싸우던 탁신 왕을 죽이고 쿠데타를 일으킨다.
라마 1세의 시기 시암의 영토는 더욱 확장되어 캄보디아와 라오스는 완벽한 속국이 되었고[13] 치앙마이를 중심으로 한 란나도 복속되어 자체적으로 영토회복을 할 수 있었으며[15] 버마와의 전쟁에서 비록 테나세림의 탈환(?)에는 실패하였지만, 이후 이어진 보도파야의 14만 4천 명 규모의 5개 방면 침공도 성공적으로 막아낼 수 있었다. 라마 1세 때의 영역은 그 이전 최대규모였던 나레쑤언 시기의 영토확장을 능가하는 것으로써, 명실상부한 동남아의 패자의 위치를 재구축 할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 태국보다 더 넓을 정도)하지만 라마 1세의 유일한 실패는 바로 대(對) 베트남 전선으로 당시 멸망당한 베트남 안남국의 살아남은 후계자 응우옌푹아인의 요청을 받아 4만여 명의 군대를 파견하였으나 베트남 떠이썬의 왕 응우옌반후에에게 대패하여 응우옌푹아인과 함께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응우옌푹아인은 방콕에서 라마 1세 밑에서 싸우다가 독자적으로 베트남으로 귀환한 후 프랑스, 라오스의 도움을 얻어 베트남을 통일하였다. 그리고 시암군이 점령하였던 하띠엔의 반환을 요청하여 평화적으로(?) 받아내었다.[16]
3.2.2. 라마 1세 사후
라마 2세, 라마 3세 시기에도 딱씬-라마 1세 시기만큼의 영토확대는 아니었으나 여전히 계속되어서 시암의 라마 3세의 사망 무렵 시암의 영토는 역대 최대를 자랑하게 되었다. 1827년 영국군이 버마를 공격한 후 시암을 공격할 것이라는 소문을 믿은 위앙 쨘의 차오 아누 왕의 공격은 순식간에 진압당해 위앙 짠은 철저히 파괴되고 라오족들은 메콩강 서쪽으로 강제이주 당했으며, 란상 왕국은 사실상 멸망했다.[17] 1836년 베트남에게 합병당했던 캄보디아의 저항운동을 지원하여 1845년 재독립시키고 캄보디아를 시암의 강한 영향력 하에 둘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두 왕은 서구 열강의 침략열기 속에서 베트남을 더욱 경계해 쓸데없는 싸움만 지속했고, 후임 라마 4세[18] 는 영국의 공세에 시달리다 치외법권과 관세 인하를 인정하는 등, 이들의 압력에 굴복하여 제국주의랑 마주했다.
3.2.3. 라마 5세 (쭐랄롱꼰 대왕)
현 국왕인 라마 10세의 증조할아버지인 라마 5세 쭐랄롱꼰 대왕은 태국과 시암 역사를 통틀어 가장 뛰어난 업적을 이루었다고 평가받는 왕이다. 해외에서는 라마 대왕이라고도 불렀다. 재임 기간 동안 태국의 현대화와 개혁정책을 패기 있기 몰아붙여 1905년에 노예제를 폐지하고, 교통망과 법체계를 선진화하는 등 빠른 속도로 근대화를 추진하여 특별히 돋보였다. 이러한 개혁적 성격은 그가 서구식 교육을 완전하게 이수한 최초의 시암 국왕이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는 처음 즉위했던 1868년에의 나이는 15세였기 때문에 초기에는 섭정을 맡겼다. 이후 성인이 된 1873년부터 섭정을 그만두고, 직접 통치를 통한 개혁적 추진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제도적으로는 추밀원과 내각평의회, 재무부를 신설했다. 물론, 이러한 개혁에 대한 귀족의 저항도 적지 않았으나, 그가 추진한 유학 장려를 마치고 돌아온 세력이 복귀하자 저항은 곧 수그러들었다. 그는 국가 제도를 비롯한 문화에 이르기까지 서구적인 개혁을 선호했다. 왕자들에게는 정부의 요직을 맡기는 동시에 유럽 파견을 통해 선진 제도와 문화를 도입했다.
지금의 두싯 지역은 1897년에 라마 5세가 만든 것으로, 유럽 풍과 태국 풍이 적절한 조화를 이뤄내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이렇게 라마 5세는 유럽에 대한 동경이 각별하여, 지식인과 왕족의 유학이 적극적으로 이뤄졌다.
라마 4세는 라마 3세가 전쟁을 선호하지 않았던 것처럼, 외세의 침입도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쪽을 택했다. 당시 위협적인 두 국가는 프랑스와 영국이었는데, 이 둘 사이에서 대나무 외교를 펼쳤다. 과거 루이 14세부터 이어져 온 프랑스와의 관계 덕분에 같은 편이라고만 생각했던 프랑스는 어느덧 가장 위협적인 국가가 되었다. 이런 프랑스로부터의 위협을 막기 위해 영국을 끌어들이는 방식으로 국가의 안전을 보장받아 1896년에 영-불 양국 간 조약에 따라 독립을 지켰다. 또 라마 5세의 개혁으로 쌀 수출국 지위까지 급부상하며 청나라 상인들이 대거 진출해 태국 경제에도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3.2.4. 대나무 외교
노란색은 오늘날의 국토로, 과거 전성기에는 사실상 인도차이나 반도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했었다.
4. 타이
4.1. 1932년 시암 혁명부터 타놈 집권까지
1910년에 라마 5세가 죽은 뒤 장남 와짜라웃이 라마 6세로 등극했지만, 당시 급변하는 국제정세에 관심을 잘 기울이지 않고 낭비만 일삼아 나라에 재정적자를 안겼고, 1925년에 후사 없이 죽자 동생 프라차티뽁이 물려받아 라마 7세로 등극했다. 그는 영국 이튼스쿨 출신에 프랑스 군사교육까지 받은 엘리트였으나 국정 수행능력은 미흡했다.
1920~30년대 대공황으로 태국 경제가 휘청이고 민족주의라는 폭풍이 일었다. 이 영향 때문에 1932년에 군부가 일으킨 이른바 '시암 혁명'을 계기로 절대왕정에서 입헌군주제로 변화하였고, 국명 역시 시암에서 타이로 바뀌었다. 이를 주도한 인물은 놀랍게도 국왕이 아닌 '피분송크람'이라는 인물이다.
쁠랙 피분송크람(이하 송크람)은 '시암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쿠데타를 주도했으며, 시암 최초의 헌법을 공포했다. 라마 7세는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군사의 통제권마저 지속적으로 잃고, 이 사건에 대해 유감을 표명했으며, 정부와 왕실은 사이가 틀어졌다가 마지못해 입헌군주국 헌법을 승인했다. 1934년에 영국으로 떠난 국왕은 1935년에 무력함 속에서 스스로 퇴위하여 1941년에 객사했다.
정부는 스위스에서 유학 중이던 어린 아난다를 라마 8세로 새로 추대했지만, 국가는 완전히 송크람의 것이 되었다. 그의 통치스타일은 독재적이었으며 출판물과 방송 등은 검열을 받았고, 민족의회는 새로 만들어졌으나 유명무실하여 그들을 견제할 세력은 아무도 없었고, 1938년 총리가 됐다.
송크람은 민족주의와 민주주의를 내세워 쿠데타를 벌였지만 민주주의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었고, 오히려 독일 제3제국과 일본 제국을 모티브로 하여 전체주의적 민족주의 국가로 만드려 했다. 명목적으로 송크람과 삐디 두 명이 정치를 이끌던 것에서 더 나아가서 완전한 독재를 원했다. 많은 사람들이 정치적으로 처형되거나 망명했다. 화교계에 대한 탄압 또한 이어졌다.
1939년에는 국호를 '시암'에서 '쁘라텟 타이(자유의 나라)'로 바꾼다. 그는 민족주의적 이념으로 타이족에 대한 단결을 강조하는 한편 화교들을 대상으로 태국인과 결혼 정책을 장려하여 정신적인 면에서 태국화시키기도 했다.
1940년에는 독일 나치에서 영감을 받아 국토의 회복 계획을 내놓으며 1941년에는 프랑스와의 전쟁까지 겪는다.[19] 1941년 12월에는 일본군이 미얀마 침략할 길을 열어달라고 태국에 요청했는데, 이는 사실상 태국을 침략하겠다는 것이었다. 이에 태국 사람들이 저항했으나 일본군에게 패퇴한 후 개전 몇 시간 만에 휴전을 요청했고, 1942년에는 일제의 강압 아래 완전히 동맹을 맺고 말았다. 결국 1942년 1월 25일 연합국에 선전포고를 마지못해 해야 했으며, 친일총리 송크람의 독재체제는 더욱 공고해졌다.
그러나 1944년 8월이 되자 일본을 패망의 길을 걷게 되고, 자유 타이 운동 같은 반일, 반 송크람 조직이 들고 일어선다. 게다가 태국이 연합국의 폭격까지 받자 송크람은 지지를 잃어 정부가 와해된다. 결국 송크람이 사임하며 새로운 총리가 임명되었고, 전쟁을 계속하다가 1945년 9월 2일 평화 선언을 발표한다. 태국의 새 정부는 반일적인 정서를 통해서, 연합국으로부터의 전쟁 책임을 회피 받을 수 있었다. 또한 그는 국토 회복 계획 중에 확장했던 국토도 모두 반환하기에 이른다.[20]
새 정부는 군주제를 부활시키면서 라마 8세가 고국에 돌아왔으나. 1946년에 그는 의문의 총기사고로 승하했다. 이에 동생 뿌미뽄이 라마 9세로 등극하여 왕위를 계승했지만 사회 혼란이 지속되어 1947년 11월에 송크람이 라마 9세를 몰아냈고, 이듬해엔 다시 총리가 됐다. 그럼에도 6.25 전쟁 등을 계기로 미국의 원조를 받아들여 경제호황을 맞고 공산화 저지선으로 변모시켜 다시 지지를 얻었으나, 오히려 미국의 원조는 부정부패를 더욱 키웠다. 미국은 송크람 정권에 민주주의를 받아들이라고 계속 촉구했지만 송크람은 부정선거 등으로 이를 씹었고, 일부 군인들이 쿠데타를 감행했으나 전부 실패했다.
그러나 1957년 9월에 사릿 타나랏이 쿠데타를 성공시켜 송크람 정권을 무너뜨렸고, 송크람과 그 부하들은 일본 등 국외로 몸을 피했다. 1963년에 사릿 타나랏 총리가 숨을 거두자, 그 자리를 동료였던 타놈 끼티까촌 장군이 물려받았다. 당시 베트남 전쟁 등으로 동남아에 공산화의 마수가 뻗쳐오자 미국 정부는 타놈에게 민주화를 요구했다. 이에 따라 1968년에 헌법을 고치고 의회도 새로 짰으나 1971년에 급작스레 비상사태를 선포하여 강력한 반공독재를 행사했다.
4.2. 1973년 민주화 운동
1968년부터 시작된 대학가 민주화 시위는 1971년 비상사태 선포 후 1973년에 가장 격화되었다. 이에 따라 휴교령이 내려지기도 하여 총격이 발생해 수많은 학생들이 희생당했다. 이런 상황으로 인해 군부 내부에선 타놈 총리 지지를 철회했고, 국왕은 이런 비참한 상황을 만든 현 정부를 탓하며 사임을 권유하자 그는 해외로 도망갔다. 이에 따라 새 민주정부 총리에 탐마삿 대학의 법학 교수인 '산냐 탐마삭'이 임명되어 새 출발의 길이 마련되는 듯했다.
4.3. 민주화를 향하여
1973년에 민간정부가 수립됐으나 어느 정당도 과반수가 안 돼 정치불안이 심해졌고, 1975년 인도차이나 공산화로 불안이 심화됐으나 정부는 제대로 힘을 쓰지 못했다. 이에 따라 1976년 쿠데타가 일어나 군부가 재집권했고, 학생운동이든 노동운동이든 공산주의로 낙인을 찍어 탐마삿 대학에서 수많은 학생들을 체포해 고문하고 죽이기에 이르렀다.'''#WhatsHappenningInThailand''' '''#태국에선무슨일이벌어지는가''' '''#ม็อบ14ตุลา''' '''#10월 14일 운동''' '''#15ตุลาไปราชประสงค์''' '''#15 언덕을 없에라'''[21]
반면 체포를 면한 학생들은 도주해 공산군으로 합류하여 군부와의 내전 단계까지 가는 듯했으나, 1983년이 되어서야 공산주의 견제는 더이상 불필요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군부가 물러간 후 민간정부가 들어서서 관광을 비롯한 새로운 분야를 개척해 나갔다. 1980년대 태국은 아시아의 네 호랑이들 처럼 급속한 산업화를 경험한다. 엔고로 일본 제조업체들이 노동력이 저렴한 태국에 집중적으로 투자하고, 태국의 수출은 급속히 증가한다. 1985년과 96년 사이 태국 경제는 세계 최고 수준인 연평균 9% 성장률을 보였다.경제 성장으로 방콕에 중산층이 늘어나 민주화 투쟁을 주도하지만, 농촌 특히 북동부 지방과의 격차는 커져 후의 정치 불안의 불씨가 된다.
1991년에 수친다 끄라쁘라윤과 순톤 콤솜퐁 등 장군들이 쿠데타를 또 일으켰는데, 수친다 역시 민주주의자라기보다 반공성향이었기 때문에 태국 사람들이 실망했다. 1992년 총선에서 수친다가 승리하자 분노한 국민들은 전 방콕 시장 잠롱 스리무앙의 지휘 하에 반군부 민주화 투쟁을 일으켰다. 이에 수친다 내각은 군경에 발포 명령을 내려 50여 명을 학살했고, 이 참상이 외신을 타고 보도되면서 군부는 더욱 궁지에 몰렸다. 이에 라마 9세가 개입하며 민주화 진영의 손을 들어 다시 민주정부가 수립됐으나, 2006년과 2014년에 두 차례 걸쳐 일어나 민주주의 정착에 쐐기를 박았다. 이런 반복은 뾰족한 수는 없는 채로 현재 진행형이다. 자세한 것은 태국/정치 참고.
위와 같은 쿠데타 위협 속에선 전 국왕 라마 9세의 효과적인 대응력, 민주주의의 성공적인 정착 덕에 국민들은 크게 동요하지 않고 상당히 평화로운 시기를 보내고 있다. 민주주의가 성숙되지 못했던 때엔 쿠데타가 일어나면 보통 그 반대세력의 정치인들은 대대적인 숙청을 당하기 일쑤인데 태국에서는 정적들에 대한 피바람이 분적이 별로 없었다. 대부분 국왕과 왕실세력의 비호하에 정적들에 대한 안전한 퇴임을 국왕이 쿠데타 세력에게 요구하기때문이고 쿠데타세력 역시 정통성과 국왕, 그리고 국민들의 눈치때문에 대부분 정적들을 망명보내는 선에서 수긍하는 편이었다.
라마 9세는 입헌군주제 하에서 절대왕정에서 처럼은 영향력을 펼치지는 못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접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영향 내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있다.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가 닥치자 지난 20년 가까이 지속된 경제성장이 갑자기 멈춰섰다. 저임금으로 투자를 유치했지만 태국 경제의 경쟁력은 여전히 낮아 90년대 중반 다국적 기업들이 급속한 산업화를 시작한 중국으로 발길을 돌리자 맥을 못 추기 시작했다. 막대한 경상수지 적자를 외채를 들여서 버티고 있던 태국은, 자산 거품의 붕괴와 해외 투기자본의 공격에 97년 7월 바트화 환율 방어를 포기하고 변동환율제를 실시한다. 바트화 가치가 폭락하고 기업과 금융기관의 연쇄 부도로 실업률이 급증한다. 한편 정계는 민주주의 도입에도 불구하고 정관유착과 부패로 국민들에게 엄청난 실망감만 안겨주었다. 이념이나 정책 차이도 없는 정당들이 난립하면서 연정은 어려워지고 내각은 임기도 채우지 못하고 교체만 되었다. 국민들의 불만은 2001년 총선에서 통신 재벌 탁신 치나왓의 압승으로 이어진다. 새로 도입한 소선거구제로 탁신의 신생 정당은 압도적인 과반수를 획득한다. 탁신은 기존의 정치인들을 포함한 엘리트들에게 무시받던 농민과 도시빈민들을 겨냥한 포퓰리즘적 정책으로 엄청난 인기를 끌지만, 부패와 족벌주의로 이권을 독점하려 하자 엘리트와 중산층들의 미움을 받는다. 2006년 쿠데타로 탁신은 해외로 망명을 가지만 선거하는 족족 탁신당이 이기는 탓에 친탁신과 반탁신의 갈등이 극에 달한다.
라마 9세가 2016년 10월 13일에 승하하면서 태국 정계도 풍파의 조짐에 휩싸이고 있다. 일단 정식 왕위계승자로 선정된 와치랄롱꼰 왕세자가 사생활도 현란하고 감정기복이 불 같은 데다 논란이 많은 탁신 친나왓 전 총리와도 친분이 있었는지라 국민들에게 인기가 좋지 않다. 정작 많은 국민들은 둘째 공주 짜크리 시린톤을 지지하는 분위기이다.
이로 인해서 10월 14일부터 태국 내에선 주로 젊은 층을 위주로 시위와 운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가 2020년 이후로 더욱 격화되었다. 또한 영화 헝거 게임 시리즈에서 등장한 세 손가락 제스쳐가 심볼인데, 이는 미국 위에 세워진 독재 국가 판엠을 무너트린 주인공 캣니스 에버딘이 국가가 권력 유지를 위해서 행하는 청년들의 배틀로얄인 헝거 게임에서 동료의 죽음을 추모하는 동시에 대중들을 이끌어내기 위해서 행한 제스쳐이기도 하다.
5. 기타
동남아시아의 국가들 중 유일하게 제국주의 시대 당시 서양 열강의 식민지가 되지 않은 국가이기도 하다.[22] 서쪽과 남쪽에서 미얀마,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브루나이를 식민화한 영국, 남쪽에서 인도네시아를 식민화한 네덜란드와 동쪽에서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를 식민화한 프랑스가 서로 부딪치지 않기 위한 완충 지대로 태국을 남겨두기로 합의한 것이기 때문에 운이 좋은 케이스라고 보기도 하나, 뮤지컬 '왕과 나'로 유명한 몽꿋 왕(라마 4세)부터 서구에 처발리기 전에 미리 자발적으로 서구 문물을 받아들여 근대적인 개혁을 추진했고, 또한 라마 5세 등의 군주들의 국제정세를 읽는 능력은 주변국에 견주어 확실히 뛰어났다.
서구 열강들에게 지나치게 강경일변도로 대응하기보다는 적당히 협상하여 영토를 할양해주고 대신 내부적인 근대적 개혁에 집중하여 내부 단속을 철저히 해 열강 세력이 태국의 내정에 간섭할 빌미를 주지 않았고 그러면서도 한 강대국에만 지나치게 의존하거나 끌어들이지 않고 여러 열강들 사이에서 외교적 줄타기와 균형감각을 유지했다. 반면 동남아시아의 다른 나라들은 태국처럼 외교적 균형을 유지하지 못하고 내부 단속에도 실패해 내부의 반대세력이나 내전에서 패한 세력이 외부의 유럽 열강 세력을 끌여들이거나 반대로 아예 지나치게 쇄국으로 나간 결과 결국 열강의 식민지가 되었다. 한 예로, 당시 과거에 몇번이고 태국의 수도를 함락할 정도로 동남아시아의 지역 강국이었던 이웃나라 미얀마는 지나치게 쇄국정책만을 고집하고 영국 식민세력에게 무력강경노선 일변도로 대응하다 결국 나라를 넘겨주고 말았다.
반대로 베트남 응우옌 왕조는 건국 과정에서 떠이선 왕조를 멸망시키기 위해 프랑스를 끌여들였다가 베트남에서 프랑스의 영향력이 확대되게 해주는 결과를 가져와 이후 프랑스가 베트남에 여러모로 개입할수 있게 되는 단초가 되었고 나중에는 결국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었다. 그 후, 호찌민과 보응우옌잡이 주도하는 독립운동 단체 베트민의 등장 이후로 강경노선으로 나가 제2차 세계대전 무렵에 일본을 상대로 싸워 내쫓고 냉전 중에는 프랑스, 미국, 중국과 싸워 독립을 쟁취했다.[23]
캄보디아는 아예 적대 강대국인 베트남과 태국을 자력으로 이길 수 있는 방법을 찾지 못하고 결국 동남아시아로 식민 진출을 노리던 프랑스에게 합병을 청해 주권을 바치고 프랑스 식민지로 합병되었다.[24] .
인도네시아는 마자파힛 제국이 멸망한 뒤 16세기 이후부터 여러 소국들로 분열되어 자기들끼리 싸우다가 내전에서 밀린 세력들이 수시로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같은 서양 세력에 도움을 청한 결과 동인도 회사의 영향력이 강해지게 만들었고 결국 동인도 회사는 인도네시아 제도에 있던 여러 소국들을 하나씩 하나씩 합병하거나 속국으로 삼아 야금야금 세력을 확대해 나가서 종국에는 인도네시아 제도 전역을 네덜란드령 동인도로 식민통치하게 되었다.[25] 아이러니하게도 한때 인도네시아를 통일했던 마자파힛 제국이 멸망한 이후 수마트라, 자바, 발리, 보르네오, 술라웨시 섬, 말루쿠 제도 등지에 각자 여러 국가와 군소 부족들로 나뉘어 있던 인도네시아 제도를 다시 통일시킨건 네덜란드령 동인도였다. 하지만 네덜란드의 식민지로 전락한 뒤에도 네덜란드의 식민지배에 맞서 디포 느고로, 수카르노 등 인도네시아 강경 민족운동 지도자들이 주도하는 독립 운동이 줄기차게 이어졌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이 패망하고 네덜란드가 다시 식민지배를 시도하려고 하자 인도네시아 독립전쟁을 일으켜[26] 네덜란드군과 싸워 이겨 식민지 독립에 성공했다.[27]
유럽 군사력의 무서움을 알고 있었던 태국 군주들은 열강들에게 무력개입의 빌미를 주지 않으려 무척 노력해서 당시 태국영토에 속했던 라오스나, 말레이시아, 캄보디아, 미얀마와 인접한 근접 지역 영토들을 조금씩 프랑스와 영국에게 떼어주는 영토 분할 전략을 구사했다. 제2차 세계대전 때는 당시 태국 군부가 일본과 동맹을 맺은 흑역사가 있으나, 정작 일본에게 별로 협조해주지도 않았고, 일부에서는 일본군과 손 잡은 걸 반발해 게릴라 활동까지 했다. 그리고 왕실 측은 이 양쪽 '둘 다' 지원했다. 패색이 짙어지자 슬그머니 태그를 풀어서 역시 연합국에게 빌미를 주지 않았다.[28]
한국전쟁에 유엔군의 일원으로 참전했다. 당연히 대한민국 정부는 휴전 후 최우선 수교대상국으로 지정, 1959년 수교했다. 당시 태국은 미국과 사이가 상당히 안 좋았는데, 한국전쟁 파병을 미국과의 관계 개선의 도구로 삼았다. 파타야의 우타파오 공항에 미합중국 공군이 주둔한다. 필리핀 주둔 미군이 철수 후 재배치된 곳이 태국이다.
6. 출처
[1] 왕국인지 문명인지 문화권인지는 불분명하다. 드라라바티란 이름도 드바라바티라고 적힌 동전이 발굴됨으로써 알 수 있었다.[2] 란나에게 멸망당함으로써 알려진 왕국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왕국의 멸망과정은 승려 도림과 개로왕의 이야기와 동일하다. 란나에서 사람을 보내 하리푼자야 왕의 친우가 되게 하고 하리푼자야 왕은 사치에 빠지고 하리푼자야는 쇠약해져서 란나의 침공을 받자 순식간에 멸망했다는 스토리다.[3] 9세기경부터 이주를 할 동기가 보인다. 9세기경 남조는 전성기를 맞아 동남아 각지를 뒤흔들었으며 이 전쟁의 여파로 동남아 북부의 민족구성이 바뀐 듯 하다. 다만 이 것은 추론의 단계이다.[4] 대리가 타이족의 왕국이었다는 말을 많이 볼 수가 있는데 대리를 세운 민족은 바이족이다. 타이족은 대리의 한 구성원 정도로 보이며 한재도 운남성 일대에 수십여 개의 소수민족들이 공존하며 살고있다. [5] 13세기 인믕왕 치세때는 타이 북부의 고산지대를 점령하여 그 영토가 현재의 루앙프라방 미얀마의 켕퉁, 베트남의 디엔비엔푸까지 이른다고 한다. 물론 이후전성기가 끝나고나서 미얀마와 남부 타이인들이 세운 아유타야와 시암 그리고 중국의 역대왕조들에게 조공을 받치며 명목상 속국신세로 지냈고 왕족들은 청나라와 장제스의 중화민국으로부터 지역의 토사,현령으로 임명되면서 어느정도 자치권을 보장받았으나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의 행정지역에 완전편입되면서 간판만 존재하던 쳉훙왕국도 중국 윈난성의 하나의 자치주로 편입되어 완전히 멸망하고 중국공산당의 탄압을 피해 왕족들은 자유진영이었던 태국으로 달아나버렸다.[6] 타이족이 떠난 치앙센지역은 계속 와족들이 약 500년동안 통치를 하지만 13세기말에서 14세기 타이계왕국인 란나왕국이 번창하자 치앙센은 일개 도시국가로서 란나에 조공셔틀이나 하면서 살다가 1558년 미얀마의 대대적인 침공을 받고 란나역시 국가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고 치앙센은 그냥 완전히 멸망해버린다.(...)[7] 포쿤왕국은 사실상 짜오프라야강 인근에 있는 도시국가들의 연맹체에 불과한 연맹왕국 단계였다고 보고있다. 그러나 이런 연맹왕국 단계의 포쿤왕국은 남부의 강력한 크메르 제국에게 차례차례 복속당하면서 크메르의 식민지가 되었다가 나중에 수코타이를 중심으로 크메르에 반기를 들어 일어나 수코타이 왕국이 탄생하게 된다.[8] 이 왕국들의 성립년도는 여러 설이 있으므로 생략한다. 각 설마다 수십 년씩 차이가 나기 때문에 책마다 다들 년도가 다르다(…).[9] 하지만 얼마 안 있어 파야오는 란나에게 멸망한다. 동맹이고 뭐시고 안습.[10] 중국과 태국이 충돌한 유일한 사례이며 그나마도 몽골인의 정복 왕조인 원나라였다.[11] 진압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얽혔다.[12] 현재 태국의 행정구역상 톤부리는 방콕에 포함되어 있다. 짜오프라야 강을 마주하고 있으며, 배를 타고 5분이면 바로 도착할 수 있는 거리이다.[13] 캄보디아와 라오스의 왕이나 왕자가 방콕에 있어야 할 정도였으니 캄보디아와 라오스를 시암의 영토로 표기하는 것이 큰 문제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14] 제후국[15] 란나가 처음 복속되었을 때 란나의 중심인 치앙마이도 란나의 땅이 아니었다. 하지만 란나의 영주 차오 까윌라는 시암에 의지한 후 독자적으로 구-란나의 땅을 수복하였다. 물론 이 과정에서 시암의 도움은 있었고, 버마의 대규모 침입 때는 차오 까윌라가 시암의 한 장군 정도의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구-란나의 회복은 시암의 지원을 받은 차오 까윌라의 독자적인 행동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이로인해 차오까윌라가 시암의 북쪽영토를 확장하는데 도움을 준 댓가로 란나왕국의 새로운 제후이자 국왕으로 임명 되었고 국명도 란나에서 "치앙마이 왕국"으로 바뀐다. 물론 시암의 영역내에 속한 괴뢰국 내지 봉신국[14] 이나 마찬가지였지만. [16] 평화적은 맞는다. 하지만 배은망덕의 느낌이 올 뿐. 라마 1세의 사후 베트남은 캄보디아의 종주권을 두고 다시 시암과 긴장관계를 가지기 시작했다.[17] 덕분에 현재 라오스에 사는 라오족은 300~400만 정도지만, 태국에 사는 라오족은 2000만 명에 육박한다. 물론 그 이전에 평화적으로 이주한 수도 상당히 많고 영토의 상실 문제도 크지만 강제이주의 여파를 결코 무시할 수 없다. 하지만 태국 인구조사 통계에는 라오족은 그냥 타이족으로 분류된다는 것. 인구 6700만에 소수(?)민족이 2000만으로 분류되는 사태를 누가 원할까.(...) 그리고 태국에 사는 라오족 또한 본토인 라오스가 워낙 가난하다 보니(...) 자기도 태국인으로 생각하고 살아간다. 태국인이지만 라오족입니다. 정도로. 그리고 애초에 라오족도 타이족과 인종적으로나 언어적으로 가깝고, 타이족과 비슷한 시기에 중국에서 내려온 민족이기도 하다.[18] 왕자 겸 승려 시절 수코타이 기념비 발견(혹은 조작) 사건을 일으킨 인물이다.[19] 결과는 썩 좋지 못해서 오히려 태국 해군이 비시 프랑스 해군에게 털렸다.[20] 태국은 당시 일본의 도움을 받아 말레이시아, 버마, 캄보디아, 라오스의 일부를 합병했다.[21] 태국 민주화 운동 해시태그[22] 많은 열강들이 아프리카, 아시아를 식민거점을 세워나갔는데 아프리카에서는 에티오피아와 라이베리아만이 식민지배를 받지 않는 나라이다. 다만 에티오피아의 경우 1936년부터 1941년까지 딱 5년동안 이탈리아의 지배를 받긴 했다.[23] 일본과 중국은 그냥 체면을 잃고 퇴각하였지만 프랑스와 미국은 베트남에게 패전했다.[24] 이 당시에 캄보디아는 워낙 몰락해서 프랑스의 식민지배를 택하는 수밖에 없었다. 자세한 건 캄보디아/역사 문서 참조[25] 수마트라 섬 북부의 아체 지역과 발리 섬의 경우 현지 세력들의 격렬한 저항 끝에 1900년대에 와서야 네덜란드에게 정복되었다.[26] 사실 네덜란드는 1940년대 말 인도네시아 독립전쟁 당시 인도네시아에 대한 식민지배 재시도가 여의치 않자 영국과 캐나다, 뉴질랜드, 오스트레일리아 등 영연방 국가들과의 관계처럼 네덜란드 국왕을 국가원수로 삼는 동군연합 체제로 인도네시아를 네덜란드에서 독립시키려는 방안을 제시했었으나 그마져도 식민지의 완전한 독립을 요구하던 인도네시아 측의 결사적인 반대로 무산되었다.[27] 정확히는 미국의 압박으로 네덜란드가 철수한 것이다.[28] 사실 영국과 프랑스, 네덜란드 등 서유럽 열강들은 일본의 항복 이후에도 태국을 적국으로 분류하고 있었지만 태국의 필사적인 노력(예를 들면 선전포고를 했는데, 그 작성문을 대사가 빼돌린다든가, 혹은 자신들은 원치 않았는데 일제가 강제로 전쟁 참전을 시켰다고 세계 여러 나라들에게 호소하기도 했다.)과 이 동네에 관심이 없었던 미국이 태국을 지지한 덕분에 일제나 나치 독일처럼 제2차 세계 대전 전범국으로 전락되는 걸 막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