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부정적 평가/정치

 




1. 개요
2. 영호남 지역감정 조장
3. 정권차원의 부정부패
3.2. 부패 기업과의 결탁
3.6. 개인 비리, 부정축재(不正蓄財)
3.6.1. 스위스 계좌의 비밀예금 논란
3.6.2. 청와대 사금고의 수 억원
3.6.3. 거액의 비자금 조성
3.7. 사병 급여 삭감 및 동결
3.8. 박근혜, 최태민의 국정농단 묵인
4. 독재 행각
6. 전쟁 피난촌 강제 철거
7.1. 박영복 금융사기 사건
7.2. 율산그룹 부도사태
7.3. 대학 재단 비리와 입시부정
7.5. 정치자금 수수와 로비
8. 관련 문서


1. 개요


제5~9대 대한민국 대통령 박정희에 대한 부정적 평가 중 국내 정치 관련 내용을 작성하는 문서. 문서가 너무 길어져 분리되었다.
독재 정권의 특성상 '''공포 정치가 공공연'''했고, 국가의 '''민주주의를 심각하게 저해'''하였다. 정치권 내부의 절충주의 세력을 제압해 한국 사회 중도화의 기회를 상당히 날려먹는 한편 방향을 불문하고 위험하게 치우치지 않을 중용틀을 유지할 가능성에도 장애를 초래하였다.

2. 영호남 지역감정 조장


영호남 지역갈등은 기본적으로 박정희가 남로당 경력을 공격해오는 윤보선에 맞서 자신의 강력한 지지세력을 결집하기 위한 용도로 시작되었다.[1] 실제로, 영남의 지역성에 호소하는 전략이 1963년도 대선부터 나왔고 그 이후 꾸준히 등장하였다. 이는 1963년 대선에서 박정희를 지지하였던 호남이 1971년 대선에서 적대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 이에 야권 인사들 또한 지역주의 전략을 펼쳐 강력한 지역기반을 갖추어 갔다.
2007년 국가정보원 과거사 진상규명위는 보고서를 통해 박정희 정권 당시 펼쳐진 지역차별 선전이 중앙정보부의 공작이라고 결론내렸다. #

2.1. 제5대 대통령 선거


1963년 대선에 윤보선은 박정희의 남로당 경력과 관련된 공세에 집중하였다. 반면 박정희는 영남지역주의에 호소하는 수법을 썼다. 정확히는 영남 이외의 지역에서는 '구악 일소'를 강조한 반면, 영남 지역에서는 지역성에 호소하는 차별화 전략을 구사하였다.[2]
동시에 박정희 주변에는 같은 고향 태생인 경북·경북고(前 대구고등보통학교) 출신 정치인들이 대거 몰려들었으며 인사에 갖은 혜택을 받았다. 엄민영, 김성곤, 백남억, 이효상, 박준규 등이 모두 대구고보 출신이었다.[3]
차별화 전략의 일환으로 노골적인 선동 역시 맥을 같이했다. 제5대 대통령 선거 실시 예정이었던 같은 해 9월 19일, 대구고보 수성천변 유세에서 찬조연설로 나온 이효상은 "이 고장은 신라의 찬란한 문화를 자랑하는 고장이건만, 그 긍지를 잇는 이 고장의 임금은 여태껏 하나도 없었다. 박정희 후보는 신라 임금의 자랑스러운 후손이며 이제 대통령으로 뽑아 이 고장 사람으로 천년만년의 임금님으로 모시자"고 선동했다. 이 선동은 청중들의 환호와 박수갈채를 받았다. #[4]
10월 9일 박정희가 경상도를 방문했을 당시에도 찬조연설자가 "경상도 사람 좀 대통령으로 뽑아보자"고 '''특정 지역 출신의 지지를 호소'''하였다. #
그러나 이 같은 지역감정 조장에도 선거 사상 가장 근소한 15만여 표의 차이로 박정희는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리고 서울, 경기도, 강원도, 충청도 등 중부 이북에서는 모두 패배하였으며, 서울에서는 2:1로 대패했다. 곧 박정희는 영호남에서만 승리를 거두었다. 영남에서의 표 차이는 66만 표였으며, 호남에선 박정희 117만 4천표, 윤보선 82만 4천표로 35만표 차이가 났다.[5] 결국 5대 대선 결과를 보면, 호남에서의 승리가 결정적이었으며 이 때까지만 해도 호남을 배제하는 적대적 지역주의가 전면에 나오지는 않았다. 그러나..

2.2. 제7대 대통령 선거


1971년 4.27 대선은 특히 영남지역주의가 강하게 드러난 선거였다. 박정희는 경북에서 92만표(박 133만표, 김 41만표) 경남에서 58만표(박 89만표, 김 31만표)를 이겼는데, 영남 지역 승리는 전체 승리 득표 94만표보다 56만표나 더 많은 것이었다. 반면 김대중은 박정희를 전북에서 23만표(박 30만표, 김 53만표), 전남에서 40만표(박 47만표, 김 87만표) 그리고 서울에서 39만표(박 80만표, 김 119만표)를 이겼다. 박정희는 이미 1967년 대선에서 윤보선에 비해 영남표만 1백 36만 표를 앞섰는데, 전국적으로 박정희가 이긴 116만표보다 20만표나 웃도는 것이었다.[6][7]
공화당 국회의장인 이효상은 "경상도 대통령을 뽑지 않으면 우리 영남인은 개밥 도토리 신세가 된다."는 발언을 하며 박정희의 지지를 호소하였다. ##2 박정희는 대통령이자 공화당 총재로서, 지역감정을 조장하는 여당·측근 정치인들을 비호하였다. 당시에 공화당은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면 경상도에 피바람이 분다”며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기까지 했다.#[8] 그밖에도 공화당 정치인들은 영남 지역 유세에서 다음과 같은 발언들을 쏟아냈다.

"박 대통령은 경상도 대통령 아이가."

"문둥이가 문둥이 안 찍으면 어쩔 끼고?"

'''"경상도 사람 쳐놓고 박 후보 안 찍는 사람은 미친 사람이야!"'''

"1천만 명에 가까운 경상도가 주도하고 단결하면 선거 조금도 질 염려가 없다."

"경상도에서는 쌀밥에 뉘 섞이듯 야당 표가 나오면 곤란하니 여당 표로 통일하자."

"우리 지역이 단합하여 몰표를 밀어주지 않으면 저편에서 쏟아져 나올 상대방의 몰표를 당해낼 수 없다."[9]

[10][11]

중앙정보부 역시 "김대중 후보가 정권을 잡으면 경상도 전역에 피의 보복이 있을 거다"라는 공포심을 자극하는 터무니없는 발언을 공공연하게 하고 다녔다. 아울러 "우리가 똘똘 몽쳐주지 않으면 우리는 망한다. 서울이고 경기도전라도고 우리 표를 빼낼 곳이 없다. 우리가 몰표를 던짐으로써 우리의 지도자, 우리 조국의 기수를 건져내야 한다."라고 부추겼다. 그러면서 경상도 지역의 공무원들에겐 "김대중이가 만약 정권을 잡으면 모조리 모가지가 날아갈 것"이라고 부추겼다. 아울러 공화당원과 경찰, 중앙정보부 요원과 조직폭력배들은 서울에서 영남 지역으로 내려온 참관인들에게 "이 전라도 놈(김대중 후보를 지칭) 앞장이들아, 모두 꺼져버려라!"라고 스피커를 동원해 대대적으로 협박하고는 공명선거 감시단 참관인들을 모조리 쫒아버리곤 했다.##2#3#4
이 때문에 영남 지역에는 참관인들이 아예 투표소에 들어올 수가 없었다. 영남 지역 야당 인사들은 "이 선거는 경상도전라도의 싸움인데 당신은 왜 전라도놈 앞잡이 노릇을 하고 다니느냐? 정 그렇게 하고 싶으면 이 마을에서 없어져라!"는 폭언을 들으며 구타, 협박을 당하였다. 혹은 술과 밥과 돈으로 매수하여, 투표 당일 야관 참관인으로 참석 못하게끔 방해하였다.[12]
심지어 중앙정보부는 영남 지역에서 '호남에서 영남 물건을 사지 않기로 하였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 선거 막바지에 대구시에선 "호남인들이여 단결하라", "백제권 대동 단결" 같은 유인물이 호남향우회 명의로 나돌아다녔다. "럭키약을 사지 말자"는 유인물도 유권자들의 집에 대량 살포되었다. "호남에서는 영남인의 물건을 사지 않기로 했다", "전라도에서는 김대중이 발 씻는 물까지 마신다"라는 흑색선전도 난무했다. 부산에서도 "호남 후보에게 몰표를 주자", "호남인이여 단결하라", "때는 왔다. 전라도 사람은 뭉쳐라"라는 구호가 전봇대에 나붙고 여기저기 떠돌아다녔다.[13]
중앙정보부는 김대중의 자택에서 폭발물을 터트린 뒤, 당시 김대중의 '선거전략 귀재'로 불렸던 엄창록을 연행하여 회유하였는데#, 김대중의 측근 권노갑은 "현지 여론이 하루 아침에 들끓기 시작하는데 시간이 없어 손쓸 겨를도 없었다. 아 이게 자취를 감춘 엄창록의 수작이라고 단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라고 말했다.[14]
이 같은 여당의 지역감정 조장 전략을 동아일보 1971년 5월 1일자 칼럼을 통해 "메뚜기 이마만도 못한 곳에서 이렇듯 민족분열을 꾀하는 자는 과연 누구인가! 아무리 정치가 좋고 대통령이 자리가 탐난다 할지라도, 민족을 분열하여 가면서까지 일신의 부귀와 영달을 누려야만 할 것인가?"라고 박정희를 강력히 비판하였다.[15]
사실 이정도면 호남은 현재의 PK지역처럼 민주당계정당 지지세가 조금 많은정도였을것이다. 하지만 영호남을 완전히 갈라놓은 사건 때문에 현재의 정치구도가 만들어진것이다.

3. 정권차원의 부정부패


박정희 정권이 깨끗한 줄 아는 인식이 국내외를 불문하고 상당했'''었'''고, 심지어 박정희 자신이 꽁보리밥으로 끼니를 해결했다는 무근거 낭설까지 나돌았'''었'''지만, 그것은 당대 국제사회에 박정희 정부를 능가하는 했기 때문이다. 박정희 본인도 부정부패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신세다. 박정희가 정권을 잡았을 때도 김종필, 김형욱, 이후락[16], 차지철을 비롯한 측근들이 부정부패에 말려들었고, 삼성그룹 사카린 밀수 사건 등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정경유착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이것 때문에 김두한이 국회 오물 투척사건을 일으켰다.#

3.1. 4대 의혹 사건


제5공화국을 능가하는 비리가 쏟아진 사건이다. 새나라자동차 사건, 워커힐 사건, 증권파동(주가조작), 빠찡코 사건을 묶어서 중앙정보부 '''4대 의혹 사건'''으로 부른다. 군사반란을 일으킨 직후에 민심을 잡고, 반란 명분을 굳히는 집권 초기부터 '''당시 기준으로 수백억원 대''' 부정부패가 터졌다. 지금으로 치면 조 단위가 훨씬 넘는 부정부패가 터졌다는 뜻이다.
5공 때 부정축재의 당사자로 지목되어 정계에서 은퇴한 이후락은 "떡(정치자금)을 만지다보면 떡고물(부스러기 돈)이 묻는 것 아니냐"고 해명하여 박정희 정부의 부정부패 실태를 폭로했다.
이 4대 의혹 사건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워커힐 사건'''이다. 불법적으로 정권을 찬탈한 박정희 대통령은 정치 공작을 위한 정치 자금 마련이 시급해지자, 정치 자금원을 마련하기 위한 수단 중 하나로 '''무의미한 건설 사업을 벌여 공사비를 착복'''할 계획을 짠다.
박정희 정권은 주한미군이 휴가 때가 되면 휴양지를 찾아 일본으로 여행하는 것에 주목했다. 당시 한국에는 이렇다할 윤락시설이 없었기 때문에 미군들은 한국에 남아 돈을 쓰는 대신 일본 등 해외로 나가 달러를 소비하였다. 미군은 미군 나름대로 비용이 많이 들었고, 한국 정부도 정부 나름대로 미군의 달러가 자국에서 소비되지 못하고 해외에서 소비되는 것에 못마땅해했다.
이에 따라 박정희 정부는 외화벌이의 명분을 내세워 윤락시설을 구상한다. 윤락시설의 이름은 한국군 운전병의 실수로 죽은 미 8군 사령관 월튼 워커 중장의 이름을 따서 쉐라톤 그랜드 워커힐 호텔로 정했다.
1962년 봄, 군사정권의 워커힐 건설 계획이 알려지자 일본의 유력 주간지들은 일제히 “한국의 군사정권이 미군 장병을 끌어들이기 위해 술과 여자와 도박판 위주의 위락시설을 짓고 있다”고 보도하였다. 미국 언론도 같은 해 10월, “이 시설은 매춘굴, 카지노, 미인 호스티스 등을 갖추고 있다”고 보도했으며, 이에 미국 부인단체가 유엔군 사령부와 한국 정부에 강력 항의하기도 했다. '''그러나 워커힐은 원래 목적인 미군 장병 유치엔 실패해 적자경영을 면치 못하며, 그 대신 박정희 대통령이 애용한다.'''
당시 동아일보는 "워커힐이라는 것이 뭔데 그 수지를 맞추어 주기 위해서 국민 도덕 의식의 마비도 불사하겠다는 것인가. 국민의 도덕 의식을 마비시켜야 이루어지는 그런 근대화나 건설을 국민은 아무도 바라고 있지 않다.", "우리가 세계에서 첫째가는 후진국이라 해도 위정자가 첫째로 해야 할 일은 국민의 도덕의식을 수호하는 것"이란 논평을 내놓았고, 뉴욕타임즈 역시 "군사정권의 시대착오적인 계산으로 애꿎은 국고만 소모됐다"는 혹평을 내놓았다.
이렇게 시작부터 윤리적 문제가 대두되었던 워커힐은 1961년 9월부터 착공에 들어가 11개월만인 62년 12월 26일 완공되었으며, 당초 계획대로 중앙정보부는 건설비 명목으로 책정한 5억 3천 600만원 중 2억 5천여만원(현재가 약 10조원)을 착복했다.# 참고로 1963년도 한 해 국가 예산이 768억원이었다. '''윤락업소를 짓는데 연간 국가 예산의 0.6%인 5억원의 거액을 투입'''한 것인데, 오늘날 가치로 환산하면 350조[17]의 0.6%인 20조원을 투입한 셈이다.[18]
증권파동(주가조작)의 내막도 다음과 같다. 중앙정보부는 한전주식을 허위거래하여 주가상승을 유도하여 액면가 45전 주식이 54원으로 만든 후에 시세차익을 얻어 당시 국가예산의 10%에 가까운 20억환을 챙긴다. 그에 반해 일반투자자는 투자실패로 자살에 이를 정도로 집안이 망하는 사람이 속출했다.
이것을 기획한 김종필의 발언을 요약하자면 '투기꾼들이 모이는 증권시장을 통해 공작자금을 마련하는 과거 2차대전 때의 다른 나라의 사례를 참조해서 정치자금을 조달했다.'는 것인데 나중에 김형욱에 의해 폭로되기를 박정희에게 일부 상납되고 민주공화당 창당자금, 야당 교란 등의 공작자금으로 쓰였다고 한다. [19] 이 사건으로 한국의 주식시장은 10년 정도가 정상화되지 못해 경제발전에 악영향을 끼친 것으로 학자들이 평가한다. ##2#3#4

3.2. 부패 기업과의 결탁


박정희 정권에서의 정경유착은 상상을 초월했다. 당시 한국의 주요 기업들은 근대화, 산업화란 명목 아래 집권 명분이 필요했던 독재 정권과 결탁하여 정치 자금을 제공하고 사업에서 갖은 특혜를 제공받았다. 오늘날 한국에서 지탄받는 재벌 세습 문제, 공금 횡령 및 비자금 조성·분식회계·주가조작·세금포탈 등의 각종 비리와 노동착취, 노조탄압은 박정희 정권을 거치면서 크게 커졌다.
박정희 대통령은 '정부 지불 보증(외자도입법 제31조)'으로 국내 기업이 해외에서 차관을 빌려올 수 있도록 해주는 대가로 삼성그룹 이병철 회장에게서 수억원의 돈을 뇌물로 받았다.[20][21]
정부 지불 보증으로 외국에서 차관을 도입해온 기업들은 한진그룹, 현대그룹, 한일합섬, 한국화약, 조선공사, 선경, 쌍용그룹, 효성그룹, 신진자동차, 럭키, 코오롱그룹, 신동아, 삼성그룹, 기아산업, 대농, 태광그룹, 대한통운, 금호그룹 등 무수히 많으며, 이들 기업이 해외에서 빌려온 차관은 1억 5천만달러 이상으로 모두 정부 지불 보증, 즉 국가예산을 담보로 빌려온 자산이다.
1975년 코리아게이트미국이 발칵 뒤집혔을 때 의회 청문회에서 걸프 회장은 “1971년 김성곤으로부터 선거자금 1천만달러를 요구받고 협상해 4백만달러를 지급했다”고 증언했으며, 걸프의 해외 정치헌금 중 80%가 한국에 주어졌다는 불미스런 기록이 남아 있다.#
전두환은 2017년 4월 3일에 출간한 회고록에서, "박정희 시절 대기업에게 돈을 걷어 마음대로 쓰는 것이 정치계 관행이었다"고 비판하였으며, 특히 "박종규 전 청와대 경호실장에게서 '주요 대기업으로부터 매달 40억 원의 정치자금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밝혔다. 당시 청와대에서는 비서실장과 경호실장이, 여당인 공화당에서는 사무총장과 재정위원장이 각각 나눠 정치자금을 거뒀다고 주장했다. [22]#
박태균 서울대학교 국제대학원 부교수는 "박정희 정권과 기업의 결탁이, 한국 경제 타락의 주범으로 지목받은 거대한 재벌의 기초를 마련했다"고 비판하였다.#

3.3. 삼분 폭리사건


국민 생활과 경제 필수품이었던 설탕, 밀가루, 시멘트를 생산하는 이른바 삼분재벌이 가격조작과 세금포탈 등을 통해 엄청난 폭리를 취하도록 눈감아준 대가로 박정희 정권이 거액의 정치자금을 챙긴 사건. '''자기들 말마따나 굶어 죽어가던 국민들의 고혈을 짜내는 걸 막아야 할 판에 모른 척 해줬다'''는 점에서 엄청나게 비판받는 이유가 되었다.#
설탕은 현재의 CJ그룹제일제당(당시 삼성 계열사), 밀가루는 대한제분(당시 동아그룹). 시멘트는 동양 시멘트와 대한양회(당시 개풍그룹)이 중심이 되어 '''담합'''해 정부 고시가격의 5배가 넘는 폭리를 취했으며, 이같은 불공정 행위에 참여한 기업의 숫자는 총 19개로 알려져 있다.[23]
1964년 1월 15일 야당 원내교섭단체인 삼민회 대표 박순천 의원이 국회에서 폭로함으로써 일반에 알려졌고, 진상규명에 적극적으로 나선 민주당 유창렬 의원과 삼성재벌 간의 싸움으로 번졌다. 민주당 측에서는 2월 5일 국회 제10차 본회의에 <특별국정감사 실시에 관한 결의안>을 상정했으나 공화당의 반대로 폐기되었다.
설탕, 밀가루, 시멘트가 모두 국민의 실생활과 긴밀한 관련을 맺고 있는 품목에다가, 1962년의 흉작으로 식량난이 심각한 상황에서 일어났던 만큼, 전 국민의 분노를 샀다. 민정, 민주당 등 야당은 "삼분 재벌들이 불법으로 취득한 부당 이득이 50~60억 원 선이며, 이 중 약 20억 원이 여당의 선거자금으로 흘러 들어갔다"고 주장하였다.
특히 민정당 대변인 김영삼은 “삼분업자들이 약 51억 원을 부정 폭리했으며, 부정 폭리금 중 약 20억 원이 2번에 걸친 선거에서 공화당의 선거자금으로 유용되었다.”고 말했다.##2

3.4. 부정선거



"이번 선거에서 박정희가 당선되면 총통제가 실시될 것이다." - 김대중

"이번이 마지막이다. 다시는 국민에게 표를 달라고 하지 않겠다." - 박정희

박정희 정권은 1971년 열린 '''제7대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 최소 국가예산의 약 10%에 해당하는 600~700억 원을 살포'''하였는데, 이에 대해서 김종필은 600억을, 71년 당시 강창성 중앙정보부 보안차장보는 700억 원이라고 증언했다. 개표과정에서 야당 참관인이 쫓겨나기도 하는 등 온갖 부정을 동원했음에도 불구하고 95만 표 차이로 간신히 김대중 후보를 따돌렸다. '김대중이 투표에서 이기고 개표에서 졌다'는 말도 나돌았다. ##2#3#4#5
지역감정을 본격적으로 조장한 것도 1971년 대선부터다. 야당 유권자를 투표인 명부에서 누락시키고 친여 유권자는 중복 등재시키는 조작은 물론, 투표 당일에는 릴레이 대리투표와 공개투표 등 불법이 난무했다. 10월 유신 이후의 선거는 국회가 해산되고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단일 후보만 출보해서 만장일치로 투표하는 형식이었으며, 유신 이전의 선거 역시 지역감정 조장·금품 살포·후보 협박과 매수가 만연했다.
10월 유신 국민투표는 계엄하에 치러진 터라 언론통제를 비롯한, 반대가 묵살되는 등 비민주적으로 진행되었지만 공포와 조작으로 일관되어 통과되었다고 평하기에는 무리다. 불과 1년 전에 제7대 대통령 선거당시 "40대 기수론"이라는 신선한 구호로 김대중에게 45%득표를 준 국민이었다. 이해에 휴전선 방위를 담당하는 주한미군 2만명이 철수하는 등 안보위기가 고조되었던 시기였기에 정부의 선전에 공감하였다고 볼 여지가 있다. 하여간 유엔 산하기구인 "언커크"는 투표 참관단을 구성하였으며 참관단들은 평화적 분위기에서 질서정연 하게 실시했다고 밝혔다.
[image]
'''1972년 국민투표'''
<color=#373a3c> '''찬성'''
'''91.5%'''
'''반대'''
7.7%
[image]

1972년 11월 21일 실시한 국민투표
에서 국회의원 선거권자 과반수의 투표
와 투표자 과반수의 찬성으로 확정된
헌법개정을 국무회의의 심의를 거쳐 이
에 공포한다.

대통령 박정희

1972년 12월 27일

1968년 총선에는 공개투표·대리투표·올빼미표·무더기표·환표 등 온갖 신조어가 등장했으며 그 결과 부정선거에 항의한 학생들의 규탄시위가 일어났다. ##2#3 6월 8일 실시된 선거에서 광범위한 부정이 저질러졌으며, 대통령부터 일선의 공무원에 이르기까지 국가 기관과 공무원이 총동원되어 여당의 선거운동을 지원했다. 여수벌교는 공개투표, 부산은 대리투표, 의성·공주·보성은 환표(표 바꿔치기), 대전은 무더기 투표 등 전국의 개표장에서는 부정 투·개표 사건이 발생했다.
야당의 투쟁을 시작으로 대학가를 비롯한 전국 각지의 학생들이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투쟁에 돌입했다. 6월 9일 연세대 학생들의 총선규탄성토대회를 시작으로, 6월 15일 전국 21개 고교와 5개 대학이 시위와 단식 투쟁에 들어가자 정부는 휴교령을 내리며 학생 시위를 탄압했다. 신민당이 6월 18일 ‘부정선거 규탄 국민 궐기대회’를 안국동 로타리에서 강행하자 경찰이 봉쇄함으로써 경찰과 시위대 간의 충돌이 발생했다.
이 대회에서는 “총선거 무효와 재선거 실시”, “박정희 대통령의 사과와 부정 책임자 엄단”, “부정선거 가담 공화당 후보 및 공무원 처단”, “전국의 선거보복 중단과 관계자 엄단”, “검찰의 전면적인 수사, 학생과 시민에 대한 탄압 중단과 국민이 납득할 수 있는 부정선거 처리” 등의 5개 항을 결의했다.
신민당 전국 지부에서는 단식투쟁, 선거소송 투쟁을 지속하고, 6월 21일 서울대·고려대·연세대·성균관대·건국대 등 학생 대표들이 모여 ‘부정부패일소 전학생투쟁위원회’ 를 결성하고 ‘부정선거 규탄 성토대회’를 열었으며, 그 후로도 6월 내내 부정선거 규탄투쟁을 계속했다. 부정선거 규탄시위가 계속되자, 6명의 공화당 의원들이 당에서 제명되었으며, 부정선거 관련 공무원들이 파면되었다. 뒤이어 여야 대표 김종필유진오의 협상 끝에 11월 20일 ‘합의의정서’에 서명함으로써, 11월 27일 야당 의원들은 국회의원 등록을 마치고, 29일 등원함으로 6개월간의 야당 의원 등원 거부와 부정선거 규탄·투쟁은 막을 내렸다.
결국 박정희는 10월 유신을 선포하고 대통령 직선제를 간선제로 바꿔버렸으며, 경쟁자였던 김대중은 감옥생활과 해외 망명지를 전전해야 했다. 박정희에 대해 비판적인 사람들 사이에서' 정권 차원의 부정부패에 쓸 돈을 경제 발전에 투입했었더라도 국가 경제가 훨씬 좋아졌을 것' 이란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3.5. 코리아게이트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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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아게이트 주범 박동선의 기자회견 장면
미국 의회에서 증언하기 이전 선서하는 박동선의 모습
1970년대 미국지미 카터 행정부는 박정희 정권의 독재 정치를 극렬하게 비판하며 "주한미군을 철수할 것"이라 압박하였다. 이에 박정희는 국민세금으로 '''중앙정보부'''와 '''통일교'''를 동원하여 미국 정치인들과 한국 교민에게 뇌물, 매수, 회유, 협박 등의 각종 불법수단을 자행해 자신의 정권에 유리한 여론을 조성하고, 의회를 매수하여 미군 철수 시도를 무마하려고 시도했다. 이를 코리아게이트라 하며, 한미관계가 최악으로 치닫는 원인이 되었다. ##2#3
1975년 6월 미국의 인권청문회에 나온 이재현 전 중앙정보부 요원의 증원을 시작으로[24][25] 그 다음 해인 1976년 10월에는 미국 언론 워싱턴 포스트가 "박정희의 지시로 재미 한국인 사업가 박동선과 중정 요원들이 미국의 국회의원과 공직자들에게 1970년대 들어 매년 50만달러에서 1백만달러에 이르는 현금을 포함한 뇌물을 뿌렸다"고 보도하였다. "미국이 청와대를 도청하면서 알아낸 사실"이라고도 덧붙였다. ##2#3#4
이 보도 이후 미국에서는 프레이저 위원회[26]가 설립되었고 진상 조사에 나섰다. 1977년 11월 29일에 위원회가 작성한 447쪽에 달하는 보고서에는, 중앙정보부가 당시 남한 정부의 정책에 유리하도록 음지와 양지 양면에서 미국 단체들을 조종하려고 한 계획이 적혀 있었다. 이것을 프레이저 보고서라 한다. # 심지어는" 박정희가 백악관 내부에 정보망을 심고 미국 의회 및 언론매체, 성직자, 교육자들을 회유하려 시도했다"는 내용도 담겨 있었다.
또한 통일교의 문선명에 관한 내용이 81쪽이나 적혀 있었으며, 위원회는 '''중정이 통일교 신도들을 미국 의회 사무실에 자원봉사자로 취직시켜 통일교를 미국 내 정치공작 수단으로 사용'''하려고 한 정황을 포착했는데, 중정과 통일교가 한국문화자유재단(Korean Cultural Freedom Foundation)이라는 비영리 단체를 조직해 남한 입장을 대변하는 선전 수단으로 활용했다는 내용이다. 이미 코리아게이트 사건이 터지기 한참 전인 1963년 2월에 CIA는 "박정희와 통일교가 긴밀한 유착관계에 있다"고 확신하였고, "한국문화자유재단과 자유아시아방송 등은 중앙정보부가 만든 것"이라는 결론을 내놓았다. ##2#3
거기에 워터게이트 사건 당시 통일교리처드 닉슨을 지지하는 활동을 편 것과 중정이 관계가 있는지 여부도 조사했다. ##2
프레이저 보고서에는 "박정희가 정권 정당화를 위해 미국의 대학교에 돈을 뿌리려는 계획을 세웠으며, 그뿐 아니라 재미 한국인들에게 박정희 정부의 방침에 반대하지 않을 것을 요구하며 괴롭히고 협박했다"는 정황도 적혀 있다. ##2

3.6. 개인 비리, 부정축재(不正蓄財)



3.6.1. 스위스 계좌의 비밀예금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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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방미자금 20만 달러가 입금됐다는 서정귀 명의의 스위스 유이언뱅크 626,965,60D 계좌
서독으로부터 받은 경제 차관과 베트남 전쟁 지원금을 개인 계좌로 빼돌렸다는 의혹이 있다.
코리아게이트 사건(박동선 사건) 당시 박동선이 청와대스위스 취리히 소재의 은행을 통해 자신에게 19만 달러를 건냈다고 미 의회에서 증언해 박정희 비자금 운용 의혹을 불러일으켰으며,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의 아들인 이동훈도 당시 청문회에서 "아버지가 스위스 계좌에 대통령의 돈을 예치한다"고 발언하였다. ##2#3 박정희 생전 차관 기업 로비에 대한 폭로 기사를 쓴 신동아 기자는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문을 당했다고 주장하였다. #
프레이저 보고서에서는 "박정희 정부가 해외에 비밀계좌를 만들어서 거기서 상당한 액수의 돈을 빼돌렸다. 1년에 65억원 정도의 정치자금을 모았을 것이다."라고 다루었으며 ##2, 박정희 정부의 비자금 조성 방법 및 스위스 계좌에 대해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 2014년 완역돼 국내에 출간된 번역본에도 이 같은 내용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
이후락, 김형욱중앙정보부장 등 이른바 ‘중정’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자금 관리 체계와 민주공화당 자금 관리 담당이었던 김성곤 전 의원은 수표를, 김형욱은 현금을 모으고, 이후락은 스위스에 은밀한 정부자금을 예치하고 관리했다는 것이 내용의 요지다. 또, "박정희가 비자금을 조성할 수 있었던 것은 서독에서 빌린 차관과 월남전에서 얻은 지원금 등 덕분"이라고 설명돼 있다. #
심지어 해당 보고서에는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군인들에게 주기로 했던 급여를 박정희 정권이 국고에서 착복하여 비자금으로 빼돌렸다"고도 적혀 있다. #

3.6.2. 청와대 사금고의 수 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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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1991년 5월 31일자 관련보도
12.12 군사반란 공판 때 전두환은 "박정희 시해사건 수사 중 청와대 사금고가 발견돼 열어보니 9억여 원이 들어 있었다. 이 중 6억원은 유족 대표인 박근혜에게 전달했다. 2억 원은 정승화 당시 육군참모총장에게, 5천만 원은 노재현 당시 국방장관에게 전달한 뒤 나머지 1억 원은 합동수사부 수사비로 썼다."고 진술했다. 전두환은 2017년 출간한 회고록에서 재차 이 내용을 언급했다. #


2012년 대선 당시 박근혜에게 '박정희 9억원'에 대해 질문하는 이정희
제5공화국(드라마) 재현 장면
박근혜 역시 상속세나 증여세 없이 출처가 불분명한 돈을 받았음을 인정했다. # 당시 20대였던 박근혜는 이 돈이 "아버지에 대한 전두환의 배려이며, 경황이 없어서 받은 것이었다."라고 변명했다.
그 때 6억원이면 2015년 기준 300억원 가치로 대치 은마아파트 33채를 살 수 있는 거액이다. 박근혜는 대선토론에서 이정희에게 이 질문을 받은 뒤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약속하였으나 그런 일은 없었다. # 일각에서는 "박정희 사후 금고에 있던 돈이 박근혜를 거쳐 최태민에게 갔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2
그밖에 김계원 전 비서실장도 "박정희가 대기업들에게 정치 자금을 꾸준히 받아 왔으며, 청와대 사금고에 부정축재한 재산을 모아 놨다"고 회고록에 적은 바 있다.[27] #3

3.6.3. 거액의 비자금 조성



정리하면 '''박정희는 헌정사상 가장 많은 액수의 비자금을 조성했다.''' 특히 상당수는 경제 발전 명목으로 외국에서 받은 돈이었고, 미국 정부에서 대한민국 정부에 지급한 베트남 전쟁 당시 참전한 군인들의 보상금(급여+전사보상금+ 수당 등)을 횡령한 돈이었다. 이 돈에 대해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박근혜가 탄핵소추로 직무정지를 당하던 시점에 버락 오바마 당시 미국 대통령에게 요청해서 미국대한민국에 보상해준 베트남 전쟁 참전 보상금 장부를 열람하여 사본을 떠오면서 확인했으며 스위스 정부 측에 요청해서 최태민 등 여러 사람의 명의로 된 계좌를 확인하여 박정희 비자금을 적발했다.
추가로 원래 이승만 정부 당시 일병(현재의 이등병)부터 이등중사(현재의 병장)까지 사병 계층의 급여는, 병장 기준 120환으로 1,200환인 준장의 10분의 1에 해당되는 액수였으나 박정희는 경제개발비라는 명목하에 사병의 급여를 삭감하고 집권기간 내내 그 돈을 계속 횡령해 비자금을 조성했다. 그 결과 월급 기준 이승만 정권과 현재의 병장 : 준장의 급여는 다음과 같다.#

이승만 정권
현재(2020)
병장
120환
540,800원
준장
1,200환
8,172,500원
비율
1:10
1:'''15'''
병장과 준장의 월급 비교표.
특별한 급여인상 없이 이승만 정권 시절의 비율만 지켰더라면, 병장 월급이 '''82만원 상당'''이라는 얘기가 된다.
그 동안 사생활만큼은 깨끗했다고 알려져왔던 박정희는, 이 비자금이 적발됨으로 인하여 '''차라리 전두환노태우가 훨씬 양심적인 사람들'''이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지독한 인간임이 드러났다. 2010년대까지 대한민국 국군 사병 급여가 이렇게 시궁창이었던 원인이 바로 박정희였던 것이다. 적어도 전두환 비자금은 평화의 댐 하나만 해먹은 돈이었으나, 박정희 비자금은 절대 건드리면 안 되는 '''사병들의 핏값을 횡령한 것'''이었다. 실제로도 전 세계에서 사병 급여로 생계유지가 불가능한 나라는 대한민국 국군이 유일하다.
또한 박정희는 외국 기업에 취직한 노동자들의 수당을 최소한만 지급하고, 나머지는 전부 경제개발비라는 명목하에 착취하여 그 돈 역시 비자금 조성에 포함했다. 그리고 박정희는 이 비자금의 일부를 선거에서 사용하여 김대중 신민당 후보를 부정선거로 이기는 데 사용했으며, 각종 공작금(김대중 납치 사건 등)에 활용했다.

3.7. 사병 급여 삭감 및 동결


비록 이승만 정권 시절 역시 박정희 정권 못지 않은 철저한 징병제를 실시했으나, 적어도 이승만 정권에서는 병 급여를 제대로 지급했다. 비록 많이 주진 못하더라도 전 계급이 다 비슷하게 지급되었으므로 비교적 공평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박정희는 '''장교 급여만을 인상하고 병 급여는 동결 내지는 삭감'''했다. ##2
성공회대학교 한홍구 교수는 "병장 급여 정도만으로도 생계 유지가 가능했었는데, 급여가 깎인 건 순전히 박정희의 지시"였다고 비판했다. ##2
특히 박정희가 '''병역의 의무라는 핑계'''로 일반 병들에 대한 처우를 아무렇게나 마구잡이로 한 것이다. 명목상으로는 "경제개발에 사용할 비용을 차출한다"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박정희가 착복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문서의 스위스 은행 관련 내용이 이를 뒷받침해준다. 그리고 전술한 베트남 전쟁 참전용사에 대한 급여를 착복해 비자금을 조성한 문제도 이와 아무 연관성이 없지는 않다. #3 따라서 "사병의 가혹한 처우를 조장했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다. 문재인 대통령이 특전부대에 가게 된 배경에서 알 수 있듯이, 박정희는 병역의 의무를 '''형벌''' 용도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3.8. 박근혜, 최태민의 국정농단 묵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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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국정농단의 핵심에 있는 최태민 일가가 집중 조명받음에 따라 박정희최태민과의 관계도 주목받게 되었다. 최태민은 유신 시절인 1975년에 박정희의 차녀[28]인 박근혜에게 접근해 선교단, 십자군, 봉사단 등 사이비종교적 색체가 짙은 온갖 단체를 만들고 기업들에게 거액의 돈을 뜯어 내어 재산을 모으는 한편, 청와대에 무단 출입하기도 했다. 최태민박정희 군사정권에서 승승장구하여 부정축재를 벌였다. ##2
박정희박근혜와 함께 최태민과 만났으며, 이 같은 사실을 알고 있었다. 박정희는 처음엔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게 "최태민에 대해서 조사해 보라"고 지시하면서 처음에는 최태민의 존재를 못마땅하게 여겼던 것으로 보이나, '''최태민이 자신의 친딸과 가깝다는 이유로''' 막지 않았다. ##2#3[29]

“저와 새마음운동(새마을운동이 아님)을 하던 최(태민) 고문은 시기를 받았다. 투서가 들어오니까 당시 김재규 중정부장이 조사를 시켰다. 아버지(박정희)는 내사 기록을 읽어보고 '''저를 배석시킨 가운데 친국(직접조사)을 한 뒤 없었던 일로 돌린 적이 있다.''' 최 고문에 대해 떠도는 항간의 루머를 믿지 않아주시기 바란다.” ㅡ 1990년 <가정조선> 인터뷰, 박근혜

심지어 최태민이 설립한 대한구국십자군의 경우, 박정희박근혜에게 최태민을 소개받고 '''반유신 운동에 앞장서고 있던 기독교계를 견제하기 위해 최태민을 지원'''하기까지 했다. 또한 김재규는 "박정희가 구국여성봉사단 총재로 박근혜를 임명했다"고 증언했다.[30] 이후 최태민이 권력에 점점 다가가고 본인 세력을 주술에 가까운 종교행위로 변질시키자, 그 이후 더 이상 만나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차지철 비서실장 등에게 최태민의 부정에 대해 수시로 보고를 받게 되자 김재규, 박근혜, 최태민 등의 관계자를 불러 직접 심문하고 대한민국 검찰청에 수사를 지시하기도 하였으나, 딸인 박근혜의 눈물어린 설득으로 마음을 바꾼 듯 박정희는 최태민 일가 사건을 '''묵인해버렸다.''' ##2

“피고인(김재규)은 1975년 5월 구국여성봉사단 총재로 있는 최태민이라는 자가 사이비 목사이며 자칭 태자마마라고 하고 사기횡령 등의 비위사실이 있는데다 여자들과의 추문도 있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이런 일을 아무도 문제 삼는 사람이 없어서 대통령에게 보고하였더니 박 대통령은 '''"정보부에서 그런 것까지 하냐?"''' 하면서 반문하길래 피고인으로서는 처음에 대통령의 태도를 보고 놀랐습니다.

대통령은 큰딸인 박근혜에게 그 사실을 알렸으나 근혜가 '그렇지 않다'고 부인하여 대통령이 직접 조사하겠다고 하였는데, 그 조사 후에 최태민이란 자를 총재직에서 물러나게는 했으나 그후 알고 보니 근혜가 총재가 되고 그 배후에서 여전히 최태민이 여성봉사단을 조종하면서 이권개입을 하는 등 부당한 짓을 하는데도, 박 대통령은 김 피고인의 ‘큰 영애도 구국여성봉사단에서 손떼는 게 좋습니다. 회계장부도 똑똑히 하게 해야 합니다’란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던 일도 있어서, 대통령 주변의 비위에 대하여 아무도 문제 삼지 못하고 또 대통령 자신이 그에 대한 판단을 그르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김재규의 항소이유서에도 "박정희가 최태민의 부정을 수수방관했다"는 내용이 있다. 김재규가 보고서를 제출했을 때 "요즘 중앙정보부에선 이런 일도 하냐"라고 오히려 역정을 내었다는 것이다. 차지철도 최태민을 옹호하며 김재규의 말을 따르는 사람은 없어, 10.26 사태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는 주장이다. '''결과적으로 박근혜 전 대통령 취임 이후 최순실의 국정농단의 원인을 제공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하지만 아직도 박정희를 숭배하는 이글루스 등지의 보수 우익 성향 네티즌들은 "박정희는 최태민의 전횡이나 박근혜가 최태민에게 홀려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알았다면 진즉에 박근혜와 최태민을 처형했을 것이다. 박정희는 역시 위대한 영웅이다..."라는 식으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꼬리 자르기를 하고 있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당연히 말이 안 되는 소리다. 가만히 앉아서 한 나라의 모든 정보를 다 보고 받는 입장에 있는 박정희가 눈이 멀고 귀가 먹지 않은 다음에야, 최태민이나 박근혜가 무슨 일을 하는지 몰랐을 수가 없다(...)

4. 독재 행각


"나는 그때[31]

결정적으로 박정희의 정권욕에 넌덜머리가 났다. 나는 한 개인으로서 말 못할 갈등에 빠졌다. 결국 8년 전 내가 이 나라 구국의 지도자로 믿고 5.16 혁명을 성취, 보필해오던 박정희는, 장기집권을 위해선 무엇이든 불사하겠다는 독재자이자 탐욕스런 정치 동물로 변하고 말았던 것이다. 아니, 그는 애당초 권력 장악만을 목표로 한 야심가에 불과했는지도 몰랐다." -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 회고록

유신 체제 당시 박정희는 행정, 입법, 사법부를 모두 장악하면서 삼권분립을 무너뜨렸고, 무제한의 연임허용과 허수아비통일주체국민회의의 간선으로 종신집권을 가능하게 하였을뿐만 아니라, 전국의 모든 법관을 직접 임명함으로써 사법권의 독립을 빼앗았다. ##2 그래서 국민은 대통령선거권을 빼앗기고, 박정희는 헌법 효력까지 정지시킬 수 있는 긴급조치권을 이용해 언제든지 체제를 비판하는 행위를 금지·처벌할 수 있었기 때문에 국민의 기본권 자체를 말살하였다.
5.16 정변 세력에 의해 추대된 장도영에 따르면, 쿠데타 이후 민정이양을 두고 '''박정희는 무기한을 주장'''했다고 하는데, 미국이 정권 인정의 대가로 기한 명시를 주장함으로써 좌절되었다. 이 증언에 따르면, 박정희는 처음부터 장기집권을 염두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32]
또한, 박정희에게 긍정적인 사람조차 박정희를 비판하는 부분은, 바로 3선 개헌 이후 박정희의 지나친 권력욕이다. 박정희가 3번째로 대통령이 되기 이전에도 많은 문제점이 있었지만, 민주적 절차가 이루어졌으며, 박정희가 좋은 대통령이라는 인식이 그나마 지식인들 사이에 있었다.
그러나 박정희는 3선 개헌으로 기어이 정권을 다시 차지하려 들었고, 1972년에는 10월 유신을 선포했다. 이때부터 박정희는 독재자로 뒤바뀌었다. 실제로 인민혁명당 사건이나 간첩조작을 비롯한 범죄는, 3선 개헌 이후부터 터졌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박정희가 3선 개헌을 하지 않고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났거나 또는 3번까지만 대통령 직무를 수행하고 물러났다면, 훨씬 더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4.1. 집권논리의 한계


'''"4.19 혁명 이후의 사회혼란 수습, 북한의 위협 방어를 위해 혁명을 일으켰다"'''고 변명했지만, 북한과 가장 가까운 도시주둔해 있는 해병여단을 동원해 반란을 일으켜서 아군에게 총부리를 돌리게 하는 혼란을 일으켰다는 점[33], 이승만 정부 때부터 반공이 국시였다는 점, 냉전이란 세계정세에서 한국일본과 함께 미국과 긴밀한 관계에 놓여있었고 '''무엇보다도 장면 내각이 대표적인 친미정권이었다'''는 점에서 이러한 주장은 명백한 거짓말이다.
6.25 전쟁 이래 줄곧 한국에 주둔해온 주한미군과 1957년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의 승인 아래 노태우 정부까지 30년가량 대한민국에 배치된 핵무기도 장식이 아니었다.[34]
10월 유신 당시 친위 쿠데타 계획을 대한민국의 우방국인 미국이 아니라 적국인 '''북한'''에 먼저 알리는 등, '''반공은 사실상 집권을 위한 명분이었을 뿐이었다.''' 이 점은 1970년대 이후 남북한 모두에서 독재들이 종신집권을 준비하면서 보다 명확해진다. # 유신이란 이름도 일본 근대화를 이룬 메이지 유신에서 따온 것으로서, 박정희 정권의 친일평향성을 잘 드러내는 단어라고 할 수 있다.

4.1.1. 4.19 혁명정신의 부정


1960년 일어난 4.19 혁명은 '''독재 정권 타도를 내걸고 일어난 민주화 운동'''이었다. 따라서, 4.19 혁명으로 독재정권이 무너지고 민주정권이 들어선 시점에서 박정희에 대한 옹호는 무색할 뿐이다.
박정희는 쿠데타 명분 중 하나로 "혁명 이후의 혼란 수습"을 내세웠다. 하지만 독재정권은 개인·소수를 중심으로 한 절대권력체제이므로, 지속될수록 정권의 무능화·부정부패·사회 불안이 초래되는 것이 역사적으로 당연하다.
분명히 4.19 이후 집권한 장면 내각에 대해 민심이 절대적으로 우호적이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당초 박정희는 4.19 혁명 1주기인 1961년 4월 16일에 쿠데타를 계획하였으나, 그날 민심은 평온했기 때문에 지연되었다. 사회 혼란이 그토록 심하지 않았다는 반증인 셈이다.
또한, 장장 10년이 넘게 걸친 이승만의 독재가 끝난 이후 후유증을 추스리는 데에는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는데, 이것이 가시기도 전에 정변을 일으켜 독재체제를 재수립하였으므로 시대를 역행했다는 점에서 대한민국 사회를 퇴보시켰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다. 안정적인 민주사회 성립을 위한 기회를 날려먹은 것이다. 실제로, 제2공화국에서 추진하던 한국전쟁 당시의 전쟁범죄 진상 규명 작업[35]과 지방자치제도, 사법부선출제, 경찰의 정치적 중립화 등은 1987년 6월 항쟁 이후에야 정상화·재논의되었다.
즉, '''5.16 군사정변은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4.19 혁명정신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군사정변 이후에도 4.19를 의거로 격하'''한 이유가 됐다. ##2 4.19(독재 타도)와 5.16(민주 정부 전복과 독재 정권 수립)은 양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3#4#5

4.2. 사유재산 강탈


박정희는 '''강제로 정부에 헌납받은 재산을 사유화'''했다. 명목상 "부패한 기업인으로부터 헌납받은 것"이라고는 하지만, 헌납은 엄연히 정부에 했는데 이 재산들을 박정희와 관계 있는 재단의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대표적으로 정수장학회영남대학교가 있다.
김지태는 자신이 설립한 부산문화방송과 부산일보 등의 지분을 장학사업을 위해 부일장학회에 출자한 상태였는데 부정축재법 위반 등 혐의로 중앙정보부에 구속되면서 정부에 부산일보, 한국문화방송, 부산문화방송 등 부일장학회를 넘기게 된다. 강제로 재산을 헌납받은 것도 문제이지만, 헌납된 재산의 대부분은 국고에 이전되지 않고 5.16 장학회로 불법적으로 이전되었다. 5.16 장학회는 김진태가 재산을 불법적으로 헌납한 뒤 닷새 뒤에 설립되었으며, 이후 박정희육영수의 이름을 한 글자 씩 딴 '정수장학회'로 개명되었다.
또한 박정희 정권은 정권에 우호적이지 않은 지식인들을 정리할 목적으로 대학정비사업을 추진하였다. 여기에 휘말린 대구대학의 운영자였던 독립운동가 최준은 삼성그룹 이맹희 회장에게 대학을 넘겼고, 삼성 사카린 밀수사건 때 삼성은 대구대학을 정부에 넘겼는데, 이 또한 국고로 귀속되지 않고 다른 헌납대학인 청구대와 합쳐 영남대가 되었다. 이맹희 회장의 회고록 222페이지에서 "70년대 초반, 삼성은 대구시의 대구대학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후락 씨가 어느 날 '대구대학을 정부에 넘기라'고 요구를 해왔다."고 적혀 있어서 삼성은 정부헌납을 한 것이라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들 대학은 사유화가 되었다.
박정희는 제3차 5개년 개발계획의 하나로 산지개발을 지시, 설악관광주식회사의 대표 겸 민주공화당 국회의원 한병기는 "1970년 1월 13일 설악산 케이블카 사업이 완공된다"고 밝혔다. 이후 이 사업은 상당한 의혹을 받고 있는데, 설악산이라는 국립공원에 단독으로 케이블카를 대통령으로부터 아무런 제약 없이 허락받았기 때문이다. 이후 한병기가 박정희의 장녀인 박재옥의 남편이라는 사실이 더 큰 파장을 일으켰고, 한병기 일가의 '사업 대물림' 때문에 현재까지도 논란이 되고 있다. 2015년 기준 45년간 설악산 케이블카를 독점하여, 자녀들에게 대물림되고 있다는 사실이다.[36]#
경기도 용인에 위치한 한국민속촌도 잡음을 일으키고 있다. 민속촌 설립자 김정웅의 진정서를 바탕으로, 2012년도 야권은 "해당 사업은 박정희 집권 당시 강탈된 재산"이라고 주장했다. (주)기흥관광개발을 설립한 김정웅은 민속촌 완공 이듬해인 1975년경 문화재보호법 위반혐의로 구속됐고, 이에 후속 공사가 중단되면서 자재 대금으로 발행한 수표가 부도나 버렸다. 경영위기에 허우적거리던 찰나, 박정희의 처조카사위[37]로 소개한 정영삼이 동업을 제안했다. 1976년 지분 50%를 1억원에 넘기는 것을 허했으나 이후 정염삼의 태도는 돌변, '나머지 주식을 양도하라'고 재구속을 운운하며 협박했다는게 김정웅의 주장이다. 결국 나머지 지분 50%를 1억원에 넘겼고 소유권, 운영권은 정영삼이 차지했다. 현재 민속촌의 소유는 (주)조원관광진흥이 갖고 있고 이 지분은 정영삼 일가가 나눠가졌다. 이 회사 자산만 858억원이며, 정씨 일가가 소유한 타 7개의 기업의 자산은 2011년 기준 4,529억원에 달한다.#
또 하나는 홍익대학교 재단이다. 이 재단의 소유자는 독립운동가 출신 이흥수 홍익대 초대 이사장로부터 사들인 이도영 일가다. 재단 퇴진운동으로 인해 1961년 이사장 자리에 물러나있던 이도영은 1963년에 다시 복직하는데, 이때 박정희 일가와의 인척관계가 도와주지 않았나라는 의혹이 존재한다. 최민희 의원실에 의하면, 이도영의 차남 이석훈 재단 전 이사는 육영수 여사의 오빠인 육인수의 딸 육해화와 결혼했다. 육인수 또한 재단 이사를 지냈다고 한다. 이들 또한 홍익대 재단 이사장직을 내리물림하고 있다.#
이들 모두의 공통점은, 박정희 정권 당시에 사업을 벌였고 인척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창업자들이 사업을 누구에게 이전할지는 본인의 마음이지만, 당시 대통령과의 관계를 내세워 이익을 취한 사업자들에겐 재산을 반환받아야 한다는 비판이 있다.

4.3. 공포 정치와 민주주의 파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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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공화국 시절의 인권을 논하는 것은 우리 역사의 가장 아픈 부분을 건드리는 것이나 다름없다. 박정희 군사정권경제발전과 국가안보를 위해서는 개인의 자유는 일정부분 유보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정부의 정책에 반대하거나 비판하는 것은 곧 국가안보를 해치는 것이라고 하여 강력히 처벌'''하였다."

"반공법[38]

, 국가보안법[39] 등 각종 반인권적 악법과 긴급조치란 초법적 조치를 통해 권력이 임의의 기준으로 반대파를 탄압했다. 국민의 인권을 보호해야 할 사법부마저 정권의 꼭두각시 노릇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는 철저히 유린되었고, 근로기준법은 있으나 마나 하여 노동자들은 최저임금도 보장받지 못하는 환경에서 살인적인 중노동에 시달렸다." - 민주화기념사업회

박정희 정부는 정권 후반기로 갈수록, 한국형 파시즘민주주의 훼손, 인권탄압, 언론 탄압, 매카시즘이 매우 심했다는 평이 보편적이다. 대통령을 비판하는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정치와 관련이 없어 보이는 사람도 조금만 의심되면 빨갱이로 몰아가기가 일쑤였으며 물고문, 전기고문, 통닭고문, 성고문 등 온갖 악랄한 고문 방식을 동원해 탄압하고 국민을 간첩으로 둔갑시켜 사회적인 매장을 하는 일까지 일어났다. 심지어 피해자의 가족도 불고지죄로 줄줄이 잡혀가 곤혹을 치루고 연좌제가 적용돼 국가의 적으로 몰려 차별을 당했다. ##2#3#4 이렇다 보니 이원복 교수 견해처럼 국민들 간에 서로를 믿지 못하고, 자신의 견해를 쉽사리 못 꺼내는 이중성이 생기기도 했으며, 현재까지도 한국인들은 그 후유증을 고치지 못하고 있다.[40]
게다가 박정희는 반공을 빌미로 불법적으로 '''10월 유신을 선포'''하여 본색을 드러내 종신독재로 나아갔으며 다음과 같은 악행을 저질렀다. 아이러니하게도 박정희가 정권유지용 수단으로 활용한 극단적 반공주의는, 윤보선과의 대선 경쟁 당시 과거 남로당 경력 때문에 공격당하는 빌미가 되었다. 또한 막걸리, 고무신 선거라는 말이 등장할 만큼 부정선거도 심각하였다.
1982년 부미방 사건 관련자였던 문부식 시인도 저서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서>에서 박정희가 남긴 '조국 근대화'란 국가주의 이데올로기는 국민들의 자율적 반성과 성찰능력을 빼앗아 그 이데올로기에 순응하는 '수신형 인간'으로 만들어버려 국가폭력에 대해 암묵적 지지를 하도록 했고, 이러한 광기는 전두환 체제에서도 이어졌다는 식으로 견해를 제시했다.

4.3.1. 간첩 조작


우선 '''인민혁명당 사건''', '''민청학련 사건''', '''동백림 사건''', '''울릉도 간첩사건''', '''미법도 간첩사건''', '''심문규 간첩사건'''[41], '''이수근 간첩사건'''[42], '''11.22 사건'''[43], '''문인간첩단 사건''', '''형제 간첩사건''', '''삼척 고정간첩단 사건'''[44], '''유럽간첩단 사건'''[45], '''NH회 학원침투 간첩사건''', '''남조선해방전략당 사건'''[46] 등의 수많은 간첩조작사건[47]사법살인을 일으켜 무고한 사람들을 해친 뒤 공안정국을 조성하였다. 이렇게 박정희 정권이 권력유지를 위해 행한 추악한 범죄 행각은 '''시간이 흘러 진상이 밝혀지면서 피해자들이 전부 무죄판결을 받았으나, 제대로 된 보상을 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라 더욱 안타깝기만 하다.''' #
간첩 식별 요령으로 "새벽에 등산복 차림으로 나타나거나 갑자기 생활수준이 높아진 자, 정부에 불만이 많은 자를 보면 신고하라"는 허무맹랑한 내용이 적힌 전단을 배포한 경우도 있었다. 한국전쟁이 만들어 낸 (일반 시민도 언제나 간첩으로 몰릴 수 있었던) 한국 특유의 반공 정신이 과도했던 시대임을 잘 보여주는 경우였다.
박정희 정권 시절 억울하게 간첩 조작을 당한 사람들의 기구한 운명은 지금까지 계속해서 밝혀지고 있다. 2018년 7월 11일에는 박정희 정권 시절 소도둑을 신고했다가 간첩으로 몰려 징역살이를 한 농부가 무죄 판결을 받았다. #

4.3.1.1. 고려대 NH회 사건

유신체제 이후 첫 대학 공안 건은 고려대학교에서 일어났다. 1973년 4~5월에 중앙정보부와 서울시경은 고려대학교 학생들을 강제연행하여 "NH회란 조직을 중심으로 사회주의 봉기를 일으키려 했다"는 혐의를 세워 유죄 판결을 내렸다. #
피해자들은 이명박 정부 시절 2013년 12월 법원에 재심을 청구했다. 피해자들은 "이 사건은 서울시경 대공분실, 중앙정보부가 조작한 사건이며 수사 과정에서 불법체포ㆍ감금 및 폭행ㆍ가혹행위가 있었다"고 주장했고, 재판부는 "함씨 등은 불법 구금된 상태에서 변호인 접견도 금지된 채 임의성 없는 심리상태로 자백 진술을 했다”며 “이런 진술이 기재된 피의자 신문조서 등은 위법 수집 증거로 증거 능력이 없다"고 피해자들의 손을 들어줬다.
특히 재판부는 또 억울하게 옥살이한 사람들에게 사죄의 뜻도 전했다. 재판부는 '''"권위주의 통치 시대에 나라 미래를 생각하며 토론하고 질곡의 역사를 개선해보려던 젊은 지성인들이 위법ㆍ부당한 공권력 행사로 심대한 고통을 입고 지금껏 그 고통 속에서 살아왔다"며 "국가가 범한 과오에 대해 진정으로 용서를 구한다”'''고 말했다. ##2

4.3.2. 국민 탄압


"한국 국적을 가지고 '''출국을 시도한 사람''', 직장을 이탈했거나 유언비어를 날조 또는 유포한 사람, '''옥외집회를 한 것으로 여겨진 사람''', '''저녁 7시부터 새벽 5시 사이에 집 밖에 있는 사람'''은 '''대한민국 법원의 영장없이 체포되어 극형에 처한다.'''" -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 설립된 군사혁명위원회 포고령 제1호

'''정인숙 살해사건'''과 같이 유력한 권력자와 친분이 있던 민간인이 암살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김상진 할복 사건전태일 분신사건 등 노동자들과 대학생들이 박정희 정권을 규탄하며 자살하기도 하였으며 많은 이들이 민주화 운동을 전개하다 정권의 손아귀에 의문의 죽음을 당하였다.
대표적인 인물로 '''심오석'''[48], '''현승효'''[49], '''양상석'''[50] 등이 있다.[51][52][53] 1970년에는 4.19 혁명 등 사회 운동에 앞장선 '''이상배''' 선생이 고문당하고 나중에 고문후유증으로 숨지는가 하면, 1971년 총선에서 선관위 직원으로 근무한 '''김창수'''가 여권 관계자와 경찰에 의해 살해당하는 일이 일어났다.[54] 1974년에는 '''박융서''', '''최석기'''가, 1976년에는 '''손윤규''' 등 좌파 성향을 가졌단 이유로 오랜 세월 투옥된 비전향 장기수들이 '사상전향과정'에서 악랄한 고문을 받아 죽기도 했다. 유신헌법 찬반투표 당시 부정행위를 보고한 선거관리위원이 강제로 해임 및 정신병원에 입원 당하는 일도 일어났다. #
1976~1978년 노동조합을 통해 근로환경을 개선하려던 동일방직 노동자를 탄압한 동일방직 똥물 사건도 중앙정보부의 개입이 있었다. 1978년에는 노동자들과 연대하여 반정부투쟁을 벌이던 청주신학대생 '''정법영'''이 중앙정보부의 감시를 받다가 의문사하였다. # 국민 고문과 납치, 살해가 횡행하던 시절이었으며, 박정희의 친위조직인 중앙정보부가 자행한 '''최종길 교수 살해사건'''도 대표적인 사건이다. 심지어 최종길의 막내동생은 중정에서 근무하였는데도 이런 일이 일어났다. ##2
군사정변 직후인 1961년 5월 24일에는 '''대낮에 춤을 춘 남녀들을 옥내외집회금지령을 근거로 체포해서 징역형을 선고'''하였다. "국가 재건에 총력을 기울여야 할 사람들이 대낮에 춤을 춘 것은 용서할 수 없다"는 황당한 이유에서였다. # 심지어 유교행사를 진행하는 이들을 공산주의자로 오인하여 체포해서 감옥에 처넣는 일도 일어났다. #2
이러한 끔찍한 일들은 독재정권 치하에서 묻혀 있다가 민주화 이후 참여정부 시절 대대적으로 과거사 진상규명에 나서면서 수면 위로 드러났으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또 과거사 진상규명 작업 역시 한나라당대한민국 국방부, 국정원 등 관료들의 방해로 좌절되면서 잊혀만 가는 실정이다. 상황이 이러하니 유족들은 입을 모아 "절대로 용서하지 못한다"는 입장이다. #

4.3.2.1. 국가재건최고회의 설립

박정희는 군사혁명위원회를 설립하여 1962년 12월 31일까지 전국의 모든 정치활동을 일체 금지했고, 포고령을 내려 정기 간행물 1,200여 종을 모두 폐간, 중앙정보부를 설립한 다음, 인신 구속 등에 관한 임시 특례법(인신 구속 특례법)을 통과시켜 법관의 영장도 필요없고 형사소송법을 따를 필요없이 반혁명으로 의심되면 어떤 국민도 마음대로 구속, 압수, 수색할 수 있게 만들어 국민들을 총칼로 짓밟기 시작했다. 군사혁명위원회는 이후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명된 뒤, 공화당 창당과 박정희 대통령 만들기에 이용되다 해산된다.

4.3.2.2. 대한청소년개척단

박정희 정권은 제3공화국 초기에 부랑아, 윤락여성 등을 모아 '대한청소년개척단'을 결성하고 서산시에서 개척 사업을 벌이고 있다고 선전하였다. 그러나 실상은 평범한 시민들도 개척단에 많이 끌려갔으며, 이들은 온갖 가혹행위를 당하며 혹사당해야 했다. 더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

4.3.2.3. 국민교육헌장

정권을 찬양하는 국민교육헌장을 억지로 학생들에게 외우도록 강요했고, 하지 못하면 두들겨 팼다. 끔찍한 것은 이 국민교육헌장의 모티브가 일제강점기교육칙어였다는 점이다.

4.3.2.4. 부마민주항쟁


부마항쟁에 공수부대를 투입한 박정희
유신 정권 말기인 1979년에는 증세, 물가 폭등, 저임금 정책으로 민생고가 가중되면서 부마민주항쟁이 일어나자 군경을 투입해 강경 진압하여 수많은 부상자를 냈다. 이 민주화 운동에는 1만여 명이 넘는 시민이 참여하였으며 1,058명이 체포되었고 125명이 구금되었다.

4.3.2.5. 6.3 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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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폐개혁 실패로 인한 경제적 손실과 공화당 창당자금이 필요했던 박정희 정권은 1961년 대통령 방일을 시작으로 한국인에게 용서받지 못할 짓을 저지른 일본과 섣불리 국교정상화에 나섰다. 정권 실세 중 한 명인 김재규와 일본 정치인 오히라 마사요시가 식민지배 피해자들에게는 비밀리에 만나 한일회담을 논의했다. 박정희 정권은 일본의 식민지배 피해 보상을 '''독립 축하금'''이자 '''차관''' 형식으로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는데, 그 결과 국민들의 정권 퇴진 요구가 일어났다.

4.3.2.6. 한일협정 반대투쟁

국민적 저항에도 불구하고 다음 해 한일협정을 추진한 박정희 정권은 또 다시 반대 여론에 직면했다. 1965년 1월 18일, 6.3항쟁으로 중단되었던 한일회담이 속개되었고 2월 20일 한일기본조약이 가조인되면서 한일협정 비준반대투쟁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박정희 정권은 위수령을 발동하고 군인들을 동원해 유혈진압함으로써 곤봉에 대학생 김중배가 맞아죽는 참사가 일어났다. 문서 참조.

4.3.2.7. 광주대단지사건

서울시의 무허가 주민들을 허허벌판으로 내쫓았는데 시민들이 격노하여 봉기를 일으킨 사건이다. 당시 진압경찰이 투입이 되었으나 기본적인 의식주를 보장받지 못해 분노한 시민들에게는 상대도 안됐다. 이 일을 계기로 박정희 정권에선 시위에 관해서 지나친 탄압 강경책을 유지하고 강화하게 된다. 적잖은 충격을 준 전태일 열사 분신 사건과 같이 큰 충격을 남겼지만, '''희한하리만치 지명도가 낮다. 박정희 정권을 싫어하는 교사도 몰라서 못 가르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자세한 건 해당항목 참조.

4.3.2.8. 남산 부활절 연합예배 사건

민주화를 요구한 소수의 기독교인들을 내란음모자들로 몰아 처벌한 사건이다. 문서 참조.

4.3.2.9. 민주회복국민회의 탄압

긴급조치 1·4호 발동과 민청학련 사건으로 사라진 듯 했던 반유신투쟁은 1974년 가을에 다시 시작되었다. 대학생들의 구속을 각오한 투쟁에 이어 천주교개신교까지 반유신 대열에 합류하였고, 언론인, 문인들도 가세하였다. 언론인들의 운동과 종교계의 인권운동 등 각계 운동의 고조는 필연적으로 연합운동의 체계적 전개를 요청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974년 11월 27일 재야 각계 인사 71명이 서명한 '''민주회복국민회의'''가 발족되었다. 민주회복국민회의는 "범국민단체로서 비정치단체이며 그 활동은 정치활동이 아닌 국민운동"으로 그 성격을 규정하고 '자주, 평화, 양심'을 행동강령으로, '민주회복'을 목표로 설정하였다. 민주회복 국민회의는 민주수호협의회 등 이전의 연합운동체와는 달리 상당한 조직적 운동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박정희 정권은 민주회복국민회의의 활동초기부터 그 관련자들을 탄압하였다. 정권은 탄압의 일차적인 대상을 교수들로 삼았으며, 1974년 11월 30일 국민선언에 서명한 김병걸 교수를 권고사직시키고, 12월 9일에는 백낙청 교수를 파면하였다. 1975년 1월 4일 김종필 국무총리가 “일부 인사들의 민주회복운동은 결과적으로 김일성이 바라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방치하여 둘 수 없다”고 경고한 데 이어 탄압과 비방의 강도를 높여갔다. 1975년 1월 13일 사무국장이었던 홍성우 변호사 등 3명을 연행하는가 하면, 1월 17일에는 대표위원 중 한 사람인 이병린 변호사를 간통죄를 걸어 구속하는 등 와해공작에 들어갔다. 3월 22일에는 운영위원인 한승헌 변호사가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었다. ##2

4.3.2.10. 크리스찬 아카데미 사건

1965년 5월 7일 한국기독교장로회 소속 강원용 목사가 창립한 ‘한국 크리스찬 아카데미’[55]는 교회단체가 페미니즘, 에큐메니컬 운동, 민주화 운동에 나선 사례다.
크리스찬 아카데미는 10월 유신 이후 사회 변화를 위해서 현장에서의 실천을 중시했다. 한국 크리스찬 아카데미는 강원용이 제창한 ‘인간화’ 개념을 통해 비인간화를 구조화하는 지나친 비민주적 조직화 및 관료제화에 배태된 비정성을 비판하고, 집합행동만이 비인간화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중간집단(매개체)의 형성과 연대를 대안으로 제시했다.
그런데 유신 시기 농민, 노동, 여성운동 등 각 부문의 사회운동이 활성화되자 박정희 정권은 크리스찬 아카데미를 배후세력으로 규정하고 중간간부 격인 중간집단교육 프로그램의 간사들을 대거 체포했다.
1979년 3월 9일 여성사회분과 간사 한명숙의 연행을 시작으로 농촌사회분과 간사 이우재, 황한식, 장상환, 산업사회분과 간사 김세균, 신인령 등과 더불어 정창렬이 구속되었으며, 유명묵, 박현채, 양정규, 신혜수, 크리스찬 아카데미 원장인 강원용 목사가 연행되어 조사를 받았다. 중앙정보부는 이 사건을 불온사상을 유포한 불법 지하 용공서클 사건으로 규정했으나, 항소심에서 용공서클 혐의는 무죄로 판명되었다. ##2

4.3.2.11. 비상고등군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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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체제에서는 군사재판에 민간인들까지 끌고 갔다. 서슬 퍼런 유신체제에서 민중들의 생존권 요구와 민주화를 열망하는 학생, 지식인, 재야의 투쟁은 봇물처럼 터져 나왔는데,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이를 제압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자 박정희 정권은 계엄령과 긴급조치라는 초법적인 조치들을 발동하여 이것을 막아내려 했다.
계엄령 하에서 비상고등군사재판을 받고 있는 피고인들이 나란히 일어서 있는 모습은 유신시대에 흔히 있는 일들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일제강점기에서 독립운동가로 활동하던 함석헌장준하까지 유신체제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재판정에 세웠다.

4.3.3. 무자비한 정적 탄압


"자유당 때는 최인규나 곽영주가 발포명령을 하여 사형을 당했지만 '''내가 직접 발포명령을 하면 대통령인 나를 누가 사형시키겠느냐?'''" - 박정희, 10.26 사태 직전 김재규로부터 부마민주항쟁에 대한 보고를 받고 ##2#3

"적군에 포로가 돼도 장군을 이렇게 대하지 않는다." - 이세규 전 장군, 10월 유신에 협력하라는 고문을 받으며 #

박정희는 정적에게도 잔혹한 탄압을 일삼았다. 정치깡패를 동원하여 폭행하거나, 정권에 반대하는 의원을 강제로 제명했다. 게다가 이때 신민당을 어용 야당으로 전락시켜버리기까지 했다.
그 직후 차지철 경호실장이 말한 킬링필드 발언이 더 유명하지만, 시위대 사살을 처음 언급한 것은 분명히 박정희였고, 차지철은 어찌보면 아부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1971년에는 국회에서 자신의 측근인 내무장관 오치성을 내쫓자는 결론이 나자, “이것들이 나한테 덤비는 거야!”라고 대노하면서, 중앙정보부에게 "주동한 국회의원을 싹 잡으라"고 지시한다. 그리고 국회의원 20여명을 불법으로 체포해서 고문하는 악행을 저질렀다. 이때 쌍용그룹의 창업주인 김성곤은 콧수염이 뽑히는 수모를 겪고#, 결국 화병으로 숨진다. #2 정보부에 끌려가 온갖 고문을 당한 의원 중에는 여당인 민주공화당 의원은 물론 5.16 군사정변에 참여한 사람도 있었다. 이게 바로 10.2 항명 파동이다.
10월 유신 선포 직후에는 야당 의원들이 자신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군대를 동원해 체포하여 물고문을 일삼았다. 이 과정에서 사람을 처럼 봉에 손발을 묽어놓고 고문하였다 하여 '''통닭고문'''이란 신조어가 등장했다. ##2#3
6.25 전쟁에 참전해 전공을 세운 '''이세규''' 장군은 1969년 3선 개헌 당시 "박 대통령이 후계자에게 자리를 넘겨주고 물러나면 국민의 존경을 받을 것"이라고 반대 의사를 밝혔다가 진급이 취소되었으며, 이후 신민당에 입당하였다. 그리고 유신 체제에 협력할 것을 강요받으면서 7차례 고문을 당했다. #
여기서 박정희는 놀라울 만큼 상대방에게 잔혹하고 폭압적이었다. 물고문과 통닭고문 뿐만 아니라 전기고문, 성고문, 폭행, 수면고문 등 일제강점기 시절 순사들이 독립운동가를 고문할 때 쓰던 온갖 악랄한 방식이 동원되었던 것이다. 1965년 6월 9일에는 민중당 박한상 의원이, 1971년에는 유신개헌에 반대하던 민중당 유옥우 의원이 몽둥이와 주먹으로 테러를 당해 얼굴이 찢어지는 수난을 당했다. 김영삼 질산 테러 사건, 신민당 전당대회 각목 난동 사건, 김영삼 총재 의원직 제명 파동, 김대중 납치사건, 윤보선 암살미수를 비롯한 온갖 사건을 일으켰다.
1976년 3월 1일 명동성당에서 있었던 3.1 민주구국선언 사건도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탄압하여 많은 이들이 감옥생활을 하였다. 1969년 3선 개헌 당시에는 반대하는 민주공화당 국회의원들을 협박하였다. 같은 해에 터진 국민복지회 사건은 김종필계의 공화당 의원들이 '여당 얀의 야당'을 자임하며 만든 조직으로, 당 의장인 김종필을 1971년 선거에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출마시키려다 박정희에게 발각된 사건을 말한다.
이때문에 김종필을 포함한 공화당 의원들은 공직에서 사퇴하거나 제명당하는 불이익을 받았으며, 김용태의 경우 3선 개헌에 반대했다는 괘심죄가 적용돼 복지회 사건과 얽혀 중정에 끌려가 고문당했다. # 고문 기술자로 유명한 '''이근안'''이 악명을 떨친 시기도 이 때부터다. 당시 이근안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활동하며 김근태 등 정권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잡아다가 요도에 볼펜심 꼽기, 관절 빼기 등의 악랄한 고문을 자행하였다. 그 보답으로 1979년 성실 근무로 청룡봉사상과 근정훈장 등을 받았다. #
또한 헌법에서 '임의성 없는 자백의 증거능력을 부정'하는 조항을 삭제하여, 고문을 합법적으로 할 수 있게 개정하는 불법까지 저질렀다.[56]

4.3.3.1. 김영삼 총재 의원직 제명 파동

박정희 정권에 실망한 국민들로 인해 당시 야당인 신민당이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유리해지자[57] 신민당 총재 김영삼을 국회에서 제명해버린 사건이다. 박정희 정권이 국민적 지지를 얻지 못했다는 대표적인 사건이다.

4.3.3.2. 김영삼 질산 테러 사건

김대중 납치사건에서 사람만 김대중에서 김영삼으로 바뀐 사건. 박정희는 중앙정보부를 시켜서 김영삼을 미행하게 했고 김영삼이 탄 자가용에 정체 불명의 비닐봉지를 투척했다.

4.3.3.3. 신민당 전당대회 각목 난동 사건

한마디로 이철승을 꼬득인 뒤 그 이철승으로 하여금 조직폭력배 두목인 김태촌에게 시켜서 김영삼을 패러 간 사건이다. 다행히 김영삼은 창문으로 뛰어내려 겨우 도망치는 데 성공했다.

4.3.3.4. 김대중 납치사건

해외에서 반유신운동을 펼치던 김대중을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납치해 동해에 수장시키려 시도한 사건이다. 일본 경시청과 미국 CIA의 개입으로 무산되었다. #

4.3.3.5. 혁명재판

4.19 혁명 이후 활약한 통일민주운동가들을 잡아들였다. 그중에는 민족주의자로 유명한 조용수도 있었다.

4.3.4. 긴급조치



1970년대에는 긴급조치를 선포하여 3.1 민주구국선언 사건 등 독재정권에 항거하는 움직임을 원천봉쇄하였다. 노동조합 결성을 막고 노동권 탄압,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하는 긴급조치를 시행하면서 박정희는 집회, 결사, 양심, 언론, 인신의 자유를 극도로 제한하였다. 박정희는 자신에 대한 비판을 용납치 않았다. 박정희를 비판하는 시민들은 긴급조치 위반으로 기소돼 유죄 판결을 받았다. #
유신체제로부터 30년이 흐른 뒤 진실화해위가 긴급조치로 기소된 589건의 재판을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282건이 '''음주 대화나 수업 도중 박정희나 유신체제를 비판'''한 경우에 해당돼 가장 많았고 191건(32%)은 '''유신반대ㆍ긴급조치 해제 촉구시위ㆍ유인물 제작'''과 같은 학생운동 관련 사건이다.
85건은 '''반유신 재야운동ㆍ정치활동''', 29건은 국내재산 해외반출ㆍ공무원범죄 등, 2건은 간첩사건으로 파악됐다. 긴급조치로 인해 처벌받은 공식적인 피해자 수는 1140명이다. ##2#3#4

4.3.4.1. 민청학련 사건

학생들의 반독재 유신투쟁을 억제하기 위해 긴급조치 4호를 공표하고 무자비하게 민주화운동을 탄압하였으며, 이 사건은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이어져 무고한 시민들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며 세계적인 비난을 받았다. 뉴욕타임즈 등 외신들은 박정희 정권의 비인간적인 면모를 비판하며, 미국에 "원조를 중단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4.3.5. 언론탄압



언론탄압도 말그대로 악독했다. 굴욕적 한일협정으로 일어난 6.3 항쟁으로 궁지에 몰리자, 박정희 정권은 이 사태를 보도하여 비판하는 4대 신문인 경향신문, 동아일보, 조선일보, 매일신문을 탄압하고자 언론윤리위원회법을 제정하여 시행하려고 했다. 언론사들이 반발하자 공무원들에게 이 신문들을 구독하지 말 것을 지시하였고, "신문용지 배정과 융자 등을 금지하겠다"고 압박하였다. 이 사건을 '''언론 파동'''이라 한다.
1970년대에는 정권에 비판적인 동아일보와 협력관계에 있던 회사들과 경영진을 매수하며 거부할 경우 협박까지 하면서, 백지 광고 사태와 언론인 대량 해고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언론사를 상대로 한 압력뿐 아니라 개별 기자들에 대해서도 폭력과 테러를 서슴지 않았는데, 한일협정 반대시위가 절정을 이루던 1965년 청와대 출입기자로 박정희 정부에 비판적인 최영철 동아일보 정치부장을 테러하는 등, 많은 기자들이 중앙정보부 요원이나 특수부대원들에게 구타당하였다.
KBS, CBS의 중파 송출망을 통한 미국 VOA 한국어 방송의 국내 재송출도 중단시켰는데, 이는 외국 라디오 방송의 국내 재송출에 대한 폐쇄주의적 기조로 현재까지도 이어져오고 있다.

4.4. 사법 파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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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부를 장악하고 정권에 불리한 판결을 내린 판사들을 불법으로 잡아들이고 탄압했다. 문서를 참조하라.

4.5. 사법살인


민주주의의 꽃이라 불리는 삼권분립 원칙은 완전히 무너졌으며, 국회사법부는 정권의 시녀 역할을 했다. 사법부의 경우 사법 파동 과정에서 독립성을 지키기 위한 일선 판사들의 저항이 있었으나 폭력으로 억압하면서 무산되었고 박정희 정권이 죄 없는 사람들을 죽이는 것을 막지 못했다. 특히 인혁당 재건위 사건의 경우 '''사형선고 18시간 뒤에 사형이 집행되면서''' 세계적으로 "한국 정부가 사법살인을 했다"는 비난을 받았으며, 고문 사실을 감추고자 주검마저 빼돌려 강제로 화장을 시켰다. 게다가 정권 초기에 열린 혁명재판에서 반공주의자인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을 친북주의자로 몰아세워 억울하게 죽이기까지 했다.

4.5.1. 인민혁명당 사건


대표적인 사례로는 인민혁명당 사건이 있다. 너무나도 유명해서 따로 항목이 분리됐다. 인민혁명당 사건 문서 참조. 자주 헷갈리는 사항이지만 '''민주민족혁명당 사건과는 관계 없다.''' 스위스 제네바에 본부를 둔 ‘국제법학자회’는 인민혁명당 사건 피해자들이 살해당한 1975년 4월 9일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선포했다.# 피해자를 변호하는 변호인이 변론 도중 구속되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났다.

4.6. 과거사 은폐


1960년 4.19 혁명으로 제1공화국이 붕괴하면서 집권한 장면 내각은 과거사 진상규명 작업에 나섰지만, 5.16 군사정변으로 무너졌다.
이후 집권한 박정희 정권은 미군정기(제주 4.3 사건)와 6.25 전쟁 기간의 민간인 학살사건(거창 양민 학살사건, 보도연맹 학살사건 등)에 대한 '''유족들의 진상조사 요구를 묵살하고 탄압한 것은 물론 연좌제를 적용하여 고통받게 만들었다.'''
박정희는 이전의 조사 내용 및 자료를 모두 소각하라는 지시를 내리고 유가족 대표들을 국가보안법과 특수범죄처벌법[58]으로 처벌하였다. 민간인 학살 사건의 피해자들은 모두 '공산주의자'로 몰렸으며, 정권은 생존자들을 요시찰 대상으로 지목하여 사회활동에 갖은 불이익을 주었다.
한국전쟁 유족회, 조용수, 사회대중당, 교원노조 등의 단체나 개인이 '이적행위'를 했다고 조작하여 혁명재판 과정에서 죽이거나 징역을 내렸다. 4.3 사건을 다룬 소설인 <순이 삼촌>의 경우 박정희 정권에서 금서로 지정됐고, 작가현기영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였다. ##2#3#4
특수범죄처벌법의 피해자들은 법이 제정되기도 전에 잡혀왔는데, 이 소급법의 제정은 "행위시의 법률에 의하여 범죄를 구성하지 아니하는 행위로 처벌하면 안 된다"는 헌법을 무시한 처사였다. # 심지어 입법기관인 국회에서 만든 것도 아니었으며, 국가재건최고회의란 초헌법 기구를 만들어 제멋대로 만든 법이었다. 당시 김용국(재판장·심판관), 박용채(법무사·심판관), 심훈종, 이택돈, 최문기 등의 판사들은 특수처벌법으로 기소된 6.25 유족회 간부들에게 사형과 무기 등의 징역형을 선고했는데, 그 판결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보련원(국민보도연맹원-기자 주) 및 국가보안법 기미결수의 피살은 '''불법에 의한 것이라 할지라도 반공을 국시로 하는 대한민국의 충실한 국민이라고 할 수 없을진대''' … 유족회의 성격과 그 활동결과에 대하여 북한괴뢰가 간접침략의 한 방안으로서 기대하는 그들의 동조자의 확대 및 조직강화 그 사상선전에 동조하는 행위라는 것을 인식할 수 있음에…"

한마디로 판결의 요지는 '''"국가가 민간인을 학살한 것은 불법이 맞다. 그러나 그 불법학살의 진상을 밝혀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북한에 동조하는 행위다."'''라는 뜻이다. 유족들에게 적용한 죄목은 특수범죄처벌법 제6조 '특수반국가 행위'였는데, 이 조항은 "정당, 사회단체의 주요 간부의 지위에 있는 자로서 국가보안법 제1조에 규정된 반국가단체의 이익이 된다는 정을 알면서 그 단체나 구성원의 활동을 찬양 고무, 동조하거나 또는 기타의 방법으로 그 목적 수행을 위한 행위를 한 자는 사형, 무기 또는 10년 이상의 징역에 처한다"고 되어 있었다.
혁명재판 과정에서 대구의 '''이원식'''(대구유족회 대표위원)은 사형, 마산의 '''노현섭'''(전국유족회장·마산유족회장)과 대구·경북의 '''권중락'''(경북유족회 총무)·'''이삼근'''(성주유족회장)은 징역 15년형을 선고받았다. 김해 진영읍의 '''김영욱'''(금창유족회 장의위원장)은 7년, 부산 동래유족회의 '''송철순'''·'''김세룡'''은 5년을 받았다. # 동래유족회의 판결문도 황당하기는 마찬가지다.

"6·25 동란 시에 대한민국 군경에 의해 작전상 처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좌익분자가 아니라는 근거없는 망언과 재판절차없는 사형집행이 부당하다는, 당시의 전국을 망각한 편견에 사로잡혀… 군관민의 이간을 책동하면 결국 반공체제가 균열되어 간접침략을 획책하는 북한괴뢰집단의 이익이 된다는 점을 알면서도 … 국가의 안위 따위는 일절 불원하는 비국민적 사상의 불온분자이므로 피고인 김세룡, 동 송철순에게 각 징역 5년에 처한다."

'재판절차 없는 사형집행이 부당하다'는 게 '편견'이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학살된 민간인들을 가리켜 "반공을 국시로 하는 대한민국의 충실한 국민이라고 할 수 없을진대 애국적이고 조국과 민족의 자주독립을 염원한 존재였다고 할 수 없다"고 표현하면서 좌익분자라고 매도하고 있다. 사실상 인민재판이다.
심지어는 '''유족들이 암매장 유골을 찾아내 조성한 합동묘까지 파헤쳐, 유골을 빼돌렸다.''' 말 그대로 부관참시를 일으켰다. ##2

4.7. 하나회 육성


물론 박정희 본인도 전두환이 자신의 사후 쿠데타를 일으켜 독재자가 된 후 광주에서 학살을 저지르리란 걸 예지하진 못했겠지만, 일단 '결과적으로는' 그의 행동이 전두환을 독재자로 만들어준데 기여한 셈이 되었다.
박정희는 5.16 군사 쿠데타 당시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의 쿠데타 지지 시위를 주도한 전두환에게 1963년 국가재건최고회의 비서관과 중정 인사과장이란 파격적인 승진을 단행했다. 이때 전두환의 계급은 고작 대위, 나이는 30살이었다. 이후에도 전두환을 총애해 이 자가 만든 하나회를 옹호해주고, 베트남 전쟁 땐 다른 부하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9사단 29연대 연대장으로 훈장을 수여해줬다. 그리고 전두환은 1973년 육사 11기중 최초로 준장이 된 후, 1979년에는 요직인 보안사령관이 된다. 그리고 박정희 사후에는 '''박정희가 지원해준 하나회 세력을 기반으로 삼아 신군부를 결성해''' 12.12 군사반란을 일으켜 '''또 다른 군사독재자가 된다.'''

4.8. 측근들의 전횡


차지철을 비롯한 박정희의 여러 측근들이 국가 예산을 빼돌리고, 정부 기관에게 월권을 일삼았다. 김형욱, 이후락, 박종규, 심지어 제일 온건하다고 알려진 김종필조차 박정희 정권 밑에서 막대한 재산을 긁어모았다.
전두환은 "특히 차지철의 전횡이 매우 심각했다. 만약 김재규가 '차지철을 제거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거사했다면, 군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라고 회고록에서 주장했다. #

5. 친일반민족행위자 등용



만주군 복무 경력이 있던 박정희는 동문지기라 할 수 있는 친일파들을 적극적으로 등용하였다. 이들은 5.16 군사정변한일협정 등 박정희 정권의 주요 사건에 큰 활약을 했다. 간도 특설대백선엽화신백화점 박흥식, 일제 침략 전쟁을 옹호한 김은호, 김기창, 이상범, 대법원장 민복기 등이 대표적인 예다. 한국 정부의 친일파 등용은 해방 이후에 계속되었으나, 박정희 집권 기간에는 무려 206명의 친일파에게 훈장이 수여되었다.[59]
이승만 집권 시기에는 친일파에 대한 서훈이 주로 일제 경찰과 군인 출신에 집중된 반면, 박정희 집권 시기에는 교육, 사법, 경제, 문화 등 전 분야로 확대된 것도 특징이다. 서훈 내역을 연도별로 살펴보면 친일파들에게 대한민국 훈장을 준 시기는 5.16 정변 직후인 1962년과 1963년에 집중됐고, 1970년에도 많았다. ##2#3#4#5
박근혜 정부 시기 KBS는 이 같은 내용을 특집으로 보도하려고 하였으나, 정권의 압력을 받은 보도본부 측의 압력으로 불방되었다. ##2#3 2017년 박근혜 최순실 게이트박근혜 탄핵 이후 야권의 대권 주자들 사이에서도 관련 내용이 발언된 바 있다. #
사실 박정희친일파를 등용한 것은, '''일단 본인부터 친일파'''였기 때문에 필연적이었다. 본인이 친일파이다 보니 친일파를 숙청하게 되면 그 친일파 대상자에 본인도 포함되기 때문에, 친일파와는 운명공동체가 된 것이다.

6. 전쟁 피난촌 강제 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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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개발로 인한 철거 반대 시위 중 경찰에 끌려가는 성북구 철거민
해방 이후 서울은 아직 현대적 도시의 면모가 갖춰지지 않은데다가, 6.25 전쟁으로 그마저 폐허로 변하였기 때문에 체계적인 도시계획에 따른 개발을 추진할 여력이 없이 마구잡이로 집들이 지어지고 넘쳐나는 인구를 감당하지 못해 주거시설은 매우 열악했다.
더구나 전쟁 당시 월남한 주민들은 생활의 근거지를 마련하지 못해 국공유지 등에 무허가로 대규모 집단을 이루어 정착하기 시작했다. 용산구 남산자락에 위치한 해방촌이 대표적인 월남 피난민 마을 중 하나이다. #
그런데 박정희 정권이 도시 재개발을 위해 무허가촌을 철거하고 주민들을 대책 없이 추방하려 하자 그곳에 거주하던 주민들은 강력히 저항할 수 밖에 없었다. 철거에 항의하여 공화당사에 모여 있는 해방촌 주민들이 애처로운 모습으로 어떤 사람에게 말을 하고 있고, 철거 반대 시위를 벌이던 성북구 재개발지역 주민이 경찰에 사지가 들려 끌려나가고 있는 모습이 당시의 사정을 말해주고 있다. #2#3#4

7. 부정부패



7.1. 박영복 금융사기 사건


박정희 정권은 기업과 정부와의 정경유착과 사기 행위가 정점에 이르렀던 시절로서 많은 사회 정치적 비리가 발생한 시절이었다. 대표적으로 1974년에 일어난 박영복 금융사기 사건이 있다. 1974년 2월에, 4억 8천만 원의 은행 돈을 사취한 초대형 금융사기사건이 터졌다. #
금록통상주식회사의 대표였던 박영복이 범인으로 체포되었는데, 조사 결과 중소기업은행과 서울은행에서 공문서를 위조하여 사기 대출을 받은 액수는 74억 원으로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당시 이 액수는 천문학적인 수치였다. 이 사건을 추궁하기 위해 국회에서는 재무위가 열리고 본회의 대정부질문에서 여야 국회의원들이 남덕우 재무장관 등 관계 장관들에게 책임을 추궁하는 등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켰다.
선원으로 일하던 박영복은 선원을 그만두고 수출실적이 있는 무역회사를 인수하거나 유령회사를 만드는 등 18개나 되는 회사를 소유하고, 사채를 빌려 은행에 신용을 쌓은 뒤 공문서를 위조하여 천문학적 금액을 대출 받아 사취하여, ‘금융사기의 원조’라는 별명을 가졌다. ##2

7.2. 율산그룹 부도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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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산그룹 부정사건으로 구속되어 구형공판에서 지친 채 쓰러져 있는 신선호
유신 말기를 장식했던 대형 금융부정사건의 주체인 율산그룹은 ‘율산신화’라는 말을 만들어낼 만큼 극적으로 성장한 회사이다. 1974년 9월 20대들이 율산실업이라는 오퍼상(판매 알선업자)으로 시작한 회사는 불과 4년여의 짧은 기간에 계열사 18개를 거느리고 종업원이 8천명이나 되는 재벌로 탈바꿈한다.
당시 수출입국을 경제발전의 모토로 삼던 박정희 정권의 정책에 부응하여 한국기업들의 손길이 미치지 않던 중동시장에 진출하여 엄청난 돈을 벌었다. 기존의 대형 회사인 신진알미늄을 인수하고, 율산건설을 창업하는 등 거침없이 뻗어가던 율산그룹이 회장인 신선호가 괴한들에게 납치되는 등 여러 의혹사건에 휘말리면서 결국 부도 사태를 맞게 된다. 아직도 정확한 사건의 진실이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일설에 의하면 ‘재벌들의 견제’라거나 ‘정치권의 음모’로 희생되었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2

7.3. 대학 재단 비리와 입시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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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입시문제 비리 사건과 관련된 공범 15명에 징역선고가 떨어지는 모습
당시에는 촌지가 횡행하고 재벌과 부잣집 자녀들의 성적을 조작하는 입시부정 행위가 만연했다. # 화룡점정은 1973년 6월 고려대 입시부정 사건이었다.

7.4.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특혜분양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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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청 주차장이 조사를 받기 위해 타고 온 불법임대자들의 고급 자가용으로 붐비고 있는 모습
1978년에 현대그룹 계열사인 주식회사 한국도시개발(현대산업개발)이 무주택 사원용으로 압구정동에 건설한 현대아파트를 정관계 고위인사들과 법조계, 언론계 인사들이 특혜분양을 받은 사건이 들통나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켰다. 시공사인 한국도시개발은 952가구를 사원용으로 분양하기로 하고 1,512가구를 지었다. 그러나 실제로 사원용으로 분양된 가구는 291가구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장차관을 비롯한 고위인사들과 국회의원, 회사 간부들과 간부의 친인척들에 분양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
이 사건으로 당시 한국도시개발 사장이던 '''정몽구''' 현 현대기아차 회장을 비롯하여 서울시 부시장, 주택은행 임원 등 사건에 연루된 사람 5명이 구속되었으나 정 사장은 선고유예로 풀려나는 등 솜방망이 처벌에 그쳤다. 결국 박정희 정권의 정경유착 사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건의 하나로 기록되고 있다. #2#3

7.5. 정치자금 수수와 로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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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정권은 대기업에서 매달 40억씩 걷었다."''' - 전두환

정치자금법과 선거법이 개정되어 현재는 개인이나 경제단체가 일정액 이상의 정치자금을 개별적으로 정당이나 정치인에게 제공할 수 없도록 되어 있다. 하지만 70년대에는 기업들이 비밀리에 바자금을 조성하여 여당이나 대통령, 혹은 유력한 정치인에게 거액의 정치자금을 제공한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 되어 버렸다. ##2
집권 여당에게 잘 보이기 위해 기업들은 여당에 막대한 정치자금을 지정 기탁하였고, 야당에게는 형식적으로 약간의 정치자금만을 제공하였다. 따라서 여당과 야당의 정치자금 모금액은 엄청난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일부 대기업들은 비자금을 조성하여 정치인과 관료들에게 뇌물로 바치고 있지만 예전 같지는 않은 게 사실이다. #
위의 사진은 전경련이 모금한 정치자금을 중앙선관위에 전달하는 모습이다. 한 마디로 돈 없는 사람들은 정치를 못했다. 특히, 재벌들의 경제단체인 전경련은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 만들어졌다. 실로 정경유착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사진이었다. ##2

7.6. 사카린 밀수 사건


박정희 정권은 경제개발을 위해 재벌들에게 엄청난 특혜를 제공했다. 삼성은 정부의 특혜를 받아 성장한 대표적인 재벌이다. 1965년 삼성은 정부의 지급보증으로 일본에서 상업차관을 들여와, 울산에 세계 최대 규모의 요소비료 공장인 한국비료를 건설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한국비료가 건축자재로 위장해 일본으로부터 사카린 55톤을 밀수하여 시중에 판매하다 발각된 사건이 발생했다.
결국 이 사건으로 여론이 악화되고 정치문제로 비화하자 이병철은 한비 주식의 51%를 국가에 헌납하고, 이 사건과 관련하여 삼성을 옹호하는 데 앞장섰던 계열사인 중앙일보로부터 손을 뗀다는 등의 약속을 하고 사태를 수습했다. 이 사건은 전형적인 정경유착의 사례이며, 재벌의 언론사 소유의 부작용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
여담으로 이 일로 인해 김두한 국회의원이 국회에 대변을 던지는 이른바 국회 오물 투척 사건을 일으키게 된다.

8. 관련 문서


[1] 박상훈 <지역균열의 구조와 행태>, 한국정치연구원 편 "박정희를 넘어서 : 박정희와 그 시대에 대한 비판적 연구"(푸른솔 1998, 223쪽)[2] 박상훈 <지역균열의 구조와 행태>, 한국정치연구원 편 "박정희를 넘어서 : 박정희와 그 시대에 대한 비판적 연구"(푸른솔 1998, 223쪽)[3] 조갑제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5:김종필의 풍운>(조선일보사 1998, 284~285쪽)[4] 이상우 <지역감정에 좌우된 대통령 선거:한국 대통령 선거의 결정 요인>, 월간조선 엮음 "비록 한국의 대통령:월간조선 1993년 신년호 별책부록"(조선일보사 1992, 327쪽) ; 광주매일 정사 5.18 특별취재반 <정사 5.18 상>(사회평론 1995, 27쪽)[5] 이상우 <지역감정에 좌우된 대통령 선거:한국 대통령 선거의 결정 요인>, 월간조선 엮음 "비록 한국의 대통령 : 월간조선 1993년 신년호 별책부록"(조선일보사 1992, 328쪽)[6] 박정희에 대한 경상도 몰표는 63년부터 조금씩 보이더니 67년 대선에서 완연히 나타나게 된다. 71년은 경상도 몰표가 완성된다. 그에 비해 전라도의 몰표는 87년에서야 나타나게 된다.[7] 김충식 <정치공작사령부 남산의 부장들>(동아일보사 1992, 319~320쪽)[8] 김충식 <정치공작사령부 남산의 부장들>(동아일보사 1992, 305쪽)[9] 이상우 <박정권 18년:그 권력의 내막>(동아일보사 1986, 343쪽)[10] 이동형 <영원한 라이벌 김대중 VS 김영삼>, 2011[11] 김교식 <다큐멘터리 드라마, 박정희>, 2012[12] 김옥두 <고난과 한길에도 희망은 있다>(인동 1999, 86~87쪽)[13] 김충식 <정치공작사령부 남산의 부장들>(동아일보사 1992, 267쪽) ; 이상우 <박정권 18년:그 권력의 내막>(동아일보사 1986, 344쪽)[14] 김충식 위의 책 267쪽[15] 김옥두 <고난과 한길에도 희망은 있다>(인동 1999, 89쪽에서 재인용)[16] 자신의 부정부패 의혹을 추궁받자 "떡을 두 손으로 주무르다 보면 떡고물이 자연스레 손에 묻는 거 아니냐?"라면서 오히려 부패 의혹을 정당화했다.[17] 2014년도 국가 예산[18] 한국 현대사 산책 1960년대편 2 : 4·19 혁명에서 3선 개헌까지 [19] 조갑제 :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5권, 김형욱 회고록[20] 한국 현대사 산책 1960년대편 3 : 4·19 혁명에서 3선 개헌까지, 강준만 저[21] 중앙정보부 전 감찰실장 '방준모'가 이에 대해 증언하였다.[22] "청와대와 당이 매년 거둔 총액은 알 수 없지만, 현대그룹재벌한테서 5억 원 등 주요 대기업으로부터 매달 40억 원씩 정치자금을 모았고 이와 별도로 대통령 비서실장이 1년에 40억~50억 원의 정치자금을 거뒀을 것이라는 (박 전 실장의) 이야기였다"고 소개했다.[23] 당시 설탕은 분식장려로 인해 수요가 증가하고 있었으나 국내 제당업자는 둘뿐이었다. 이중 삼성계의 제일제당이 약 60%를 차지했고, 당시 금액으로 15억을 소비자들로부터 빼앗아 갔다.[24] "한국중앙정보부가 단지 미국 내에서 반한파(反韓派)에 대한 인권탄압만 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 내에서 반박정희 여론과 활동을 무마하기 위해 대규모 회유, 매수, 협박, 공작을 벌이고 있다"고 밝혔다.[25] 문창극, 《한미갈등의 해부》, 나남, 1994, 250쪽[26] 정식 명칭은 국제관계위원회 산하 국제기구소위원회(Subcommittee on International Organizations of the Committee on International Relations)[27] "나는 정치 성금 대상 기업을 엄선하고 그 기업주를 청와대 신관에서 만나 기업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판공비와 기밀비 중 일부를 민주주의의 필요악적 비용인 정치 자금으로 도와줄 것을 요청하면서 '일체 반대 급부는 없다'는 점을 명확히 했다. 성금은 최고 1억 원, 최하 1,000만 원 범위 내에서 각 기업의 사정에 따라 자율적으로 정해달라고 부탁했다. 내가 부탁한 스물 대여섯 기업주들은 모두 기꺼이 승낙하고 협조를 확약해 주었다."[28] 박정희의 장녀는 첫 아내 김호남에게서 낳은 박재옥. 박근혜는 차녀, 박근령은 3녀.[29] 그런데 최태민의 아들인 최재순 씨가 말하길 '''"박정희 대통령과 아버지는 일제강점기 때부터 친분이 있었다"고 한다.(!!?)'''[30] "본인이 결행한 10.26 혁명의 동기 가운데 간접적이기는 하지만 중요한 것 한 가지는, 총재 최태민, 명예총재 박근혜 양으로 되어 있는 구국여성봉사단 문제이며, 본인은 최 목사의 부정행위를 상세히 조사해 박 대통령에게 보고했지만 박 대통령은 근혜 양을 그 단체에서 손 떼게 하기는커녕, 오히려 근혜 양을 총재로, 최태민 목사를 명예총재로 하여 자리 바꿔치기 했다."[31] 박정희가 3번째 대통령이 되려고 했을 때[32] 장도영, "나는 역사의 죄인인가." 한국정치문제연구소편, 『政風3: 누가 역사의 증인인가!』 창민사, 1986[33] 미국 정부는 중립적, 소극적 입장을 취했으나, 미 국방부주한미군사령부는 적극적 진압을 원했다. 6.25 전쟁 이후 호시탐탐 적화통일을 노리던 북한에겐 한국군의 군 체계에 혼란이 왔을 때가 바로 호기였기 때문이다.[34] 어니스트존 미사일, 280mm 장거리포 등의 투사체에 탑재하는 식으로 핵무장이 추진되었으며 이후 꾸준히 늘어나 72년도에는 700여개 이상의 핵탄두가 한국에 있었다.[35] 경상도 일대에서 자행된 보도연맹 학살사건[36] 아들 한태준, 한태현은 '설악케이블카(주)'의 대주주이다.[37] 육영수 여사의 큰언니 육인순의 사위, 박근혜 제19대 대통령의 이종사촌 형부[38] 공산주의 사상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처벌[39] 자의적으로 법의 기준을 적용하여 정부를 비판하는 사람을 처벌[40] 참고 자료: <21세기 먼나라 이웃나라> 우리나라편 - '한국인의 성격은 어떻게 형성되었나?' 파트.[41] 심문규란 사람을 억지로 북파공작원으로 파견해 놓고 구조하지도 않은 뒤, 그의 6살 난 아들을 후계자로 키우려고 했던 기막힌 사건이다. 그동안 북한에서 간첩 훈련을 받은 아버지는 귀국하자마자 모든 사실을 자백했지만 이중간첩으로 몰려 수감됐고, 5.16 쿠데타 직후 사형당했다. 이 진상은 40년 뒤인 2006년에 밝혀진다. # 정확히 말하면 이승만 정부와 박정희 정부의 합작품이다.[42] 증거 1, 증거 2, 증거 3[43] 증거[44] 강원도 삼척시에 사는 일가족과 마을 주민들이 간첩으로 몰려 2명이 사형당하고 나머지 10명이 무기징역 및 실형을 받았다.[45] 이 일로 박노수 케임브리지 교수와 김규남 민주공화당 의원이 사형당했다.[46] 대학교에서 민주화운동을 전개하던 교수를 잡아들여 사형시키고 관련자들을 중형에 처하였다.[47] 위에 열거한 사건 모두 제6공화국 시절 무죄판결을 받았다.[48] 1976년 대학생으로 유신반대투쟁 중 정부관계자에게 끌려간 뒤 의문사하였다.[49] 1976년 대학생으로 유신반대 투쟁 도중 강제로 군입대를 당한 뒤 의문사하였다.[50] 1971년 3선 개헌에 반대활동하며 국회의원 선거 입후보 선거운동을 하다 의문사하였다.[51] #[52] #2[53] #3[54] 당시 김창수는 전남 목포시에서 일했으며, 투표용지가 100장이 부족한 것을 확인하고 이를 신고했다. 담당자의 단순한 사무착오였으나, 문제는 총선에서 여당인 공화당이 선거에 지자 이것을 빌미로 부정선거 소송을 제기했고, 경찰 등 수사기관이 김씨를 회유하고 협박하여 거짓 자백을 받아낸 뒤 서울행 야간열차에서 살해하였다.[55] 이 단체의 전신은 1959년 강원용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에 걸친 인문사회과학자 및 신학자들과 함께 창설한 ‘기독교사회문제연구소’이다.[56] 헌법 제12조 2항 '모든 국민은 고문을 받지 아니하며, 형사상 자기에게 불리한 진술을 강요당하지 아니한다.'이 있었으나 민주화 이전에는 그냥 장식이었다.[57] 당시 득표율은 신민당 32.8%, 민주공화당 31.7%, 민주통일당 7%, 무소속 22%이었다.[58] 1961년 6월 22일 제정[59] 전임인 이승만 정권은 162건, 전두환 정부 28건, 노태우 정부 22건, 김대중 정부 7건, 노무현 정부에서 2건이 수여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