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중학교(서울)
'''대한민국의 중앙에서 세계의 중심으로'''
- 중앙학교 개교 100주년 타이틀
'''웅원(雄遠) · 용견(勇堅) · 성신(誠信)'''
- 중앙학교 교지
1. 개요
'''중앙중학교(中央中學校, Choongang Middle School)'''는 서울특별시 종로구에 있는 일반계 중학교이자 남녀공학#s-4.2 중학교이다. 원래는 중앙고등학교가 중앙중학교에 속해 있었으나, 1950년 학제 개편으로 독립해나가며 현재와 같은 3년제 중학교가 되었다.[1]
2. 학교상징
2.1. 교표
중앙학교의 교표는 20세기 초의 대부분의 로고가 그러하듯 "中"자와 "央"자를 결합하여 만든 것이다. 제작 시기는 불명이다.
중앙학교의 모표는 중앙학교의 수난의 역사와도 일맥상통한다. 이 무궁화 모표는 1910년 11월에 제정되었으며, 교가의 가사와 같이 무궁화 복판에 중앙학교의 ‘中’자를 넣었다. 그러나 이를 탐탁치 못하게 여긴 조선총독부에 의하여 1938년 12월부터는 종로경찰서의 압수로 무궁화 모표를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잠시 1년 동안 무궁화 대신 선으로 연결한 육각형 모표를, 1939년부터는 무궁화를 대신한 월계관 모표를 사용하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1945년 해방 이후 무궁화 모표로 환원하여 오늘날까지 사용해오고 있다. 원래 "中"자를 새겨넣은 중앙학교의 모표는 중앙학교인 두 학교(중앙중학교, 중앙고등학교)가 위의 교표와 같이 함께 사용하였으나 현재는 중앙고등학교는 '''髙'''자를 새겨넣은 모표를 따로 사용하고 있다. [2]
2.2. 교목, 교화, 교지(校旨), 건학이념
중앙중학교의 교목(校木)은 '''잣나무'''이다. 잣나무는 늘푸른 상록수로서 강인한 한국인의 기상을 나타내고 굳건한 민족정신을 의미하는 나무이다.
그리고 중앙중학교의 교화(校花)는 '''무궁화'''이다. 무궁화는 대한민국의 국화#s-2로서 한민족의 상징이자 민족교육의 상징인 꽃이다.
중앙중학교의 교지(校旨)는 학교의 교육지침인 교지(敎旨)이자 학교의 이념인 교훈(校訓)인 지표로써, 웅원(雄遠), 용견(勇堅), 성신(誠信)이다. 이는 높은 이상을 가진 세계인, 강건함과 용기를 지닌 한국인, 성실함과 봉사정신을 가진 민주시민을 육성하겠다는 인촌 김성수와 애국지사들의 의지가 담긴 것이며, 이 교지는 인촌 김성수 선생이 중앙학교 인수 당시 제정하여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다만 학교 일부에서 교지의 한자 표기를 '敎旨'라고 하는 경우가 종종 보이는데 이는 틀린 것으로 우리 학교의 '교육' 지침뿐만 아니라 '학교 이념'을 밝히기 위한 지표이기 때문에 '敎旨'와 '校訓'의 합성어인 '校旨'라고 하는 것이 옳은 표기이다.[3]
중앙중학교의 건학이념은 '교육구국(敎育救國), 교육입국(敎育立國), 교육흥국(敎育興國)'이다. 이는 학교의 설립 배경과도 연관되어 있는데, 국권침탈기에 국민계몽을 하고자 하였던 당대 교육가들의 이상에 의하여 교육으로 나라를 구하고, 교육으로 나라를 다시 세우며, 교육으로 나라를 흥하게 하겠다는 의지가 담긴 이념이다.
2.3. 교가
작사한 사람은 육당 최남선[6] . 중앙고등학교 본관 앞에 교가가 새겨진 비석이 있다.'''1절'''
흘러흘러 흘러서 쉬임이 없고
솟아솟아 솟아서 그-지 없는
흰 뫼와 한가람은 무궁화 복판
거기 솟은 우리집 이름도 중앙
'''2절'''
건아야 모였도다 열세길로서
이룸으로 가는 배 예와서 타니
건너는 언덕 각각 다다를 때면
퍼지리라 골고루 예서 얻은 빛
'''3절'''
높거라 너의 이상 굳거라 의지
맘과 일은 온전히 지성이거라
가르침과 배움이 오직이로다
이리하야 이루라 넓고 깊어 큼
'''4절'''
거름거름 덕성을 닦아 올림은
하늘 뚫고 말려는 저 뫼와 같이
가지가지 슬기를 열어느림은
바다에가 그치는 저 가람처럼
Moderato(보통 빠르게)는 과거 교가를 부를 때의 빠르기로 추정되며, 현재는 2분음표 기준=130으로 더 빠른 박자로 노래를 부른다. Allegro(빠르게) 정도로 생각하면 될 듯하다.
1절의 '흰 뫼'는 북악산을, '한가람'은 한강을 의미한다. '무궁화 복판'이라는 구절이 있다는 이유로 일제가 교가를 금지한 적이 있었다.
2절에서 '열세 길'은 중앙학교 창립 당시 전국 각지에서 모인 학생들을 상징하여 전국 13도를 나타낸 것이다. 참고로 '예'는 '여기', '이곳'이라고 해석하면 된다.
3절의 '높거라 너의 이상'은 중앙중학교의 교지(校旨) 중 웅원(雄遠)을, '굳거라 의지'는 용견(勇堅)을, '맘과 일은 온전히 지성이거라'는 성신(誠信)을 의미한다.
3. 역사
3.1. 개교기 (기호학교 ~ 중앙학교)
開校期, 1908년 ~ 1916년
1908년 6월 1일, 애국계몽을 위한 교육단체인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에서 '''기호학교(畿湖學校)'''를 설립하기로 결정하였다. 이후 6월 20일 교원 양성을 목표로 하는 사범교육과정의 '''특별과'''와 20세 이상 한문에 능통한 성인을 대상으로 하는 중등교육과정의 '''본과'''로 구분되어 기호학교가 개교하였다.[7] 1908년 입학한 95명의 학생들은 9월에 모집한 후학기(後學期) 학생들을 포함하여 200여 명에 달하게 되었다. 교육과정은 지리·역사·산수·법학·경제·음악·체조 등으로 하였으며 특별과는 1년 6개월로, 본과는 3년으로 수업연한을 정하였다. 이 기호학교의 자리는 오늘날의 국군서울지구병원으로써 소격동의 대한제국 육군위생원 건물이었으나 1908년 12월 5일 후학기 학생들로 인원이 초과되자 당시 초대 윤효정 교장의 뒤를 이은 방승봉 교장이 화동(花洞) 교사로 이전하게 되었다.[8]
기호흥학회는 기호학교를 통해서 기호지방뿐만 아니라 전국 각지의 학교들과 밀접한 교류를 통해 교육을 통한 애국계몽과 근대화를 추진하였고, 특히 충청도의 다수 향교, 학교들과 교류가 이뤄졌다. 그러나 1910년 경술국치로 망국이 되면서 기호흥학회 역시 다른 애국계몽운동 단체들과 함께 조선총독부로부터 '''해산''' 처분을 당하였다. 이러한 총독부의 결정 이후 기호흥학회는 1910년 9월 11일에 의욕적으로 유길준과 그가 이끌던 흥사단이 창립한 '''융희학교(隆熙學校)'''를 흡수·통합하였고 이는 지금의 '''중앙중·고등학교'''의 시초가 되었다.
이어 1910년 11월 22일, 기호흥학회가 전국 각지의 지방 학회와 통합하여 새로이 중앙학회(中央學會)를 창립하였으며 교명 역시 '''사립중앙학교(私立中央學校)'''로 바꾸게 되었다. '중앙'이라는 이름은 여기에서 유래된 것으로, 다른 지역의 수많은 '중앙'중학교, '중앙'고등학교들과 달리 서울에 있는 중앙중학교에 지역 이름이 붙지 않는 이유이며, 이름에 걸맞게 학생 역시 전국 13도에서 골고루 지원받았다. 더불어 중앙고등학교 야구부도 이 때 창단되어 100년이 넘도록 재창단 없이 이어지고 있으며, 육당 최남선이 작사한 '''교가'''도 1914년 7월 24일 만들어지게 되었다.
하지만 총독부는 끊임없이 민족 교육을 방해하고, 계몽운동을 막기 위해 '사립학교 인가제' 등 갖은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였다. 특히 1911년에는 조선교육령의 공포를 통해 적극적으로 민족사학의 육성을 방해하고자 하였다. 중앙학교 역시 ''''사립학교규칙'''' 등의 적용으로 운영이 크게 어려워졌다. 이에 따라 중앙학회의 회장이었던 김윤식[9] 은 학교를 안정적으로 인수하여 경영할 사람을 찾아다녔고, 그 끝에 만난 사람이 바로 '''김성수'''였다.
김성수는 원래 조선총독부의 허가를 얻어 백산학교(白山學校)라는 다른 학교를 세우고자 하였으나, 당시 민족 사학의 세력 확장을 우려하던 총독부의 강경한 거부로 결국 실패하였다. 그런 김성수에게 김윤식이 제안한 '중앙학교 인수'는 상당히 솔깃한 이야기였다. 그래서 김성수는 전라북도 부안군의 재력가인 양부(養父) '''원파 김기중''' 선생에게 중앙학교의 인수를 위한 자금 지원을 요청하였다.
생부(生父)인 김경중과 거의 대부분의 가족들은 크게 반발하였으나, 김기중만이 그의 편을 들어주며 인수를 돕고자 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1915년 4월 27일''', 24살이라는 젊은 나이의 김성수가 김기중·김경중 두 아버지의 지원을 받아 '''중앙학교'''를 인수하게 되었다. 이 인수를 통해서 많은 것들이 변하게 되었다. 고향의 많은 땅을 팔고 김기중으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으며 김성수는 지금의 중앙학교 자리인 '''계동''' 1번지 땅 '''4,000여 평'''을 사서 학교를 건설하게 되었다.
사실 김성수의 계동으로의 이전은 '고등보통학교령'이라는 일제의 교육방침에 대응하기 위함이기도 했다. 이 법령에 따라서 모든 고등보통학교는 총독부의 인가를 받고, '4개년'으로 운영되어야 한다는 것이 골자였는데 이는 턱없이 작은 화동 교사에는 4개 학년의 학생들을 수용하기에 벅찬 규정이었다. 그래서 김성수는 하루 빨리 넓은 부지로 새롭게 건물을 지어 학교를 이전하고자 한 것이다.[10]
3.2. 발전기 (중앙학교 ~ 사립중앙고등보통학교)
發展期, 1917년 ~ 1937년
숱한 수난의 역사 끝에 1917년 6월 1일 중앙학교는 계동의 현재 위치로 이전하였고 11월 20일에는 본관의 낙성식을 열었다. 새 학교시설은 당대 차별받던 조선인 학생들로 하여금 자긍심을 느끼게 해줬고, 이렇게 새로운 학교에는 권덕규[12] , 고희동, 변영태 등 상당한 수준의 교원들까지 모이면서 사실상 '''제2의 개교'''를 하게 되었다.
김성수는 새로운 시설과 탄탄한 교사진에 걸맞은 학교의 '''교지'''[13] 를 창안·제정하였는데 이것이 오늘날의 '''웅원·용견·성신'''이다. 이후 김성수는 교장 취임으로부터 1년 만에 자신의 직위를 내려놓고 송진우를 교장으로, 최두선을 학감으로 하며 평교사로 돌아갔다. 당시의 교장들은 거의 대부분이 계동 인근에 거주하였는데 송진우 교장은 오늘날의 마을버스 종로 01의 '빨래터' 정류장 바로 옆[14] 옆에 살았고, 김성수 교장은 학교에서 매우 가까운 오늘날의 대동세무고 바로 옆에 살았다. 이는 이들이 중앙학교에 매우 성실히 교육활동을 하고자 하였던 것을 알려주고 있다.
한편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가며 민족자결주의가 등장하였고 일본에서는 도쿄의 유학생들을 주축으로 독립운동을 위한 거사 계획이 이루어진다. 거사의 과정에서 유학생들 중 한 사람인 송계백이 2.8 독립 선언서의 초안을 가지고 현상윤 선생에게 찾아온다. 이를 본 현상윤은 송진우와 자신의 친구인 최남선에게 보여줬고, 이어 보성고보 교장인 최린, 천도교 지도자였던 손병희 등에게도 그 소식을 알린다. 마침내 중앙학교의 숙직실에서 긴급한 논의가 이뤄졌고, 이들의 계획은 3.1 운동으로 이어지게 된다.[15]
3.1 운동 참여로 위상이 오른 중앙학교는 총독부의 숱한 감시 아래에서 온전하지는 못하였으나, 끈질긴 노력 끝에 1921년 4월 1일, 조선총독부로부터 '고등보통학교' 인가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드디어 '''사립중앙고등보통학교'''로 개칭하고, 진정한 '중등교육기관'으로써 거듭나게 되었다.
1922년 10월 5일, 중앙고보 교사이던 '조철호' 선생이 중앙고보의 학생들을 중심으로 하여 '''대한민국 최초의 보이스카우트'''인 '조선소년군 경성 제1호대'를 창설하였다. 조선소년군은 이후 1924년 '소년척후단 조선총연맹' 이 결성되며 전국조직으로 확대되었다. 조철호 선생이 스카우트를 창설한 자리는 현재의 중앙중학교 자리로써 학교 내에 한국스카우트발상지비가 설치되어 있다.
1926년에는 순종황제의 장례식이 있었다. 가뜩이나 3.1 운동의 종결 이후 억압받던 민중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울분을 표출할 수 있는 때였다. 그리고 마침내 순종황제의 인산일(영결식)에 '''중앙고보 학생인 이선호, 권오설 군''' 등이 주도하여 격문을 뿌리고 거대한 시위를 촉발하게 되는데, 이 시위가 바로 '''6.10 만세 운동'''이다. 이렇게 많은 중앙고보는 3.1 운동과 6.10 만세 운동이라는 거대한 두 독립운동에 모두 적극적으로 참여한 거의 유일한 학교이다.
1927년 3월 20일, 중앙고등보통학교의 교지(校誌)인 '''<계우(桂友)>'''가 창간되었다. 이 교지는 권덕규 선생을 필두로 하여 중앙고등보통학교 동창회에서 발행한 '''교우지(校友誌)'''로써, 2008년까지는 중앙고등학교와 중·고등학교 통합 교지로 발간되다가 개교 100주년을 전후로 2009년부터는 중앙고등학교의 동아리인 '''문예교지부'''에 의하여 속간되고 있다.
1929년 2월 19일, 김기중, 김경중, 김성수, 김연수[16] , 김재수[17] , 박용희, 장현식을 설립자로 하는 '''재단법인 중앙학원'''이 설립되었다. 중앙학회로부터 인수된 지 약 14년 만에 공식적인 법인 산하의 학교가 되는 순간이었다.
1934년 12월 13일, 이렇게 순탄할 것만 같던 중앙고보에 거대한 화재가 발생하였다. 바로 중앙고보의 상징과도 같던 '''본관'''이 원인불명의 화재로 완전히 전소한 것이다. 그러나 중앙고보 학생들은 끝없는 학업을 정진하며 지속적인 독립운동을 펼쳤다. 이후 1930년대는 중앙고보의 '''투쟁기'''라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로 엄청난 수의 항쟁을 벌인다. 그 중 대표적인 것에는 1935년 3월 25일에 있던 '''독서회 항쟁'''과 1944년 1월 20일부터 전개된 '''학병거부 운동''' 등이 있다. 당대의 수많은 중앙고보의 사건들을 다룬 신문기사들
3.3. 웅비기 (중앙중학교)
雄飛期, 1938년 ~ 2001년
1940년대가 되어가자 일제는 전시총동원 체제로 돌입하였고, 이에 따라 점차 더 강력히 사학을 압박하던 총독부는 '''중학교'''로 중등교육기관을 단일화시켜버린다. 그래서 1938년 4월 1일, 5년제의 '''중앙중학교'''로 재탄생하게 된다. 1939년에는 무궁화가 새겨진 모표·교표를 강제로 폐지하였고, 교가 역시 민족의 상징인 무궁화가 들어갔다는 이유로 금지당한다.(지식백과 자료) 이는 위기에 몰린 일제가 민족말살통치를 시행하면서 빚어진 참극이다. 1940년, 폐지당한 무궁화 모표를 대신하여 '''월계관''' 모표가 제정되었다. 5년의 기간 동안 중앙중의 대다수의 인물들은 일제에 맞서 독립운동에 뛰어들거나 사회에서 자리 잡으며 중앙중학교의 위상을 드높였다.
마침내 1945년 8.15 광복이 이뤄졌고, 직후에 중앙학교의 상징이던 무궁화 모표가 회복되었다. 그리고 1946년, ''''조선임시과도정부교육령''''에 의하여 '''6년제 중학교'''로 전환되었다. 1950년 6.25 전쟁 직전 ''''대한교육법''''에 의해서 4월에는 중학교가, 5월에는 고등학교가 분리되며 오늘날의 중앙중·고등학교의 편제가 완성되었다.
6.25 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튼튼하게 살아남은 중앙중학교는 이후 수준 높은 학업실력을 보이며 크게 성장하게 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일제에 맞선 투쟁정신이 죽은 것은 아니었는데, 1960년 4.19 혁명에는 중앙중학교와 중앙고등학교 학생 '''3천여 명'''이 참가하기도 하였다.
이후 중앙중학교는 정몽준, 홍성흔 등의 인재들을 배출하며 뛰어난 중학교로 성장하게 된다.
3.4. 도약기 (현재)
跳躍期, 2002년 ~
중앙중학교는 21세기의 새 시대를 맞아 새롭게 도약하고 있다. 2002년 3월 5일 준공된 新 교사는 미래형 교육에 알맞도록 설계되었으며, 새로운 교사의 준공과 함께 중앙중학교는 남자중학교에서 남녀공학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2005년 12월 23일에는 현재 중앙고등학교와 함께 사용하는 '''100주년 기념관'''을 착공하였고, 2008년 6월 20일에는 개교 100주년을 맞이하였다.
3.5. 역사 연표
- 1908년
6월 20일 기호학교(畿湖學校)가 개교하였다. 1909년 9월 10일에는 융희학교가 개교하였으며 이 두 학교는 중앙학교의 시초가 되었다.
- 1910년
11월 22일 기호학회와 전국 각지의 학회가 통합하여 중앙학회가 되었고, 교명도 중앙학교가 되었다. 중앙고등학교 야구부가 창설되었다.
- 1914년
최남선이 중앙학교의 교가를 작사하였다.
- 1915년
자금난에 시달리던 중앙학교를 인촌 김성수가 인수하였다.
- 1917년
인촌 김성수가 중앙학교를 지금의 위치(서울특별시 종로구 계동 1번지)로 이전하였으며, 중앙학교 교지(校旨)로 '웅원(雄遠), 용견(勇堅), 성신(誠信)'을 창안·제정하였다
- 1919년
3.1 운동에 자금을 지원하였고, 중앙학교의 숙직실에서 3.1 운동의 계획이 비밀리에 이루어져 독립운동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 1921년
학교 이름을 사립중앙고등보통학교(약칭 중앙고보)로 개칭하고 조선총독부로부터 고등학교 인가를 받았다.
- 1922년
중앙고등보통학교의 교사 조철호 선생이 학생을 중심으로 조선소년군(현재 보이스카우트)을 창설하였다.
- 1926년
이선호, 권오설 등의 학생이 순종황제의 인산일에 독립만세의 격문을 뿌리며 6.10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 1934년
구 본관 건물이 화재로 소실되었다. 지금의 중앙고등학교 본관 건물은 1937년 다시 지은 건물이다.
- 1935년
일제의 탄압에 맞서 독서회 항쟁을 벌였으며 이어서 1940년에는 중앙학교 5인 독서회 사건을, 1944년에는 학병거부 운동을 벌였다.
- 1939년
일제가 중앙학교의 무궁화 모표를 강제로 폐지함을 통보하였고 1940년, 무궁화를 대신하여 월계관을 모표로 제정하였다. 그러나 1945년 광복 직후 무궁화 모표를 회복하게 되었다.
- 1960년
중앙중학교와 중앙고등학교 학생 3천여 명이 4.19 혁명에 참가하였다.
- 1968년
인촌기념도서관이 준공되었다.[18]
- 2002년
새로운 교사가 신축되었다. 남녀공학으로 전환되었다.
- 2006년
100주년 기념관으로 '일민 체육관' 과 '일민 정보과학관' 이 준공되었다.
- 2008년
개교 100주년을 맞이하였다.
4. 학교법인 고려중앙학원
학교법인 고려중앙학원 문서 참고.
중앙중학교의 학교법인은 고려대학교, 고려사이버대학교, 중앙고등학교, 고대 사대부고와 같은 '''학교법인 고려중앙학원'''이다. 1929년 2월, 인촌 김성수를 중심으로 김기중, 김경중, 박용희, 장현식, 김연수, 김재수 등 7인이 '''재단법인 중앙학원'''을 창립하였고, 중앙학교를 재단 하에 두었다. 이후 1932년 4월 '''재단법인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하였으며 광복 직후 '''고려대학교'''로 변경하여 설립 인가를 받았다. 1964년 사립학교법 제정으로 재단법인을 '''학교법인'''으로, 법인명을 '''고려중앙학원'''으로 변경하였고 이것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역대 이사장은 인촌 김성수, 이활, 김상만, 김용식, 채문식, 김병관, 현승종, 김정배[19] , 김재호이며, 보다시피 상당히 사회저명인사가 많다. 특기할 점은 인촌 김성수가 창립한 이래 이사장직이 인촌 김성수와 그 자손들로 4대째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중간중간에 전직 국무총리나 외교부장관, 국회의장 등 다양한 이사장들이 있지만 현재 이사장까지 법인이 승계되었다.
5. 시설
중앙중학교 건물 사진 1 2 3
2002년 3월에 준공한 신교사는 국내 최고 수준의 시설을 자랑한다. 과거 학급 당 실내면적 50평에서 현재는 111평으로 교육 공간을 2.2배 넓혔다.
신축교사는 15개의 교실과 Home Base 등으로 이루어진 본관과, 컴퓨터실, 두 개의 과학실, 가사실, 미술실,다목적기능관,교과실, 밖에있는 건물에 있던 도서실이 본관쪽으로 들어왔다. 밖은 인촌관으로 사무실,음악실 등으로 구성된 특별 활동관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시설을 기반으로 디지털 교육의 산실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러한 첨단 교육시설 건립에 필요한 막대한 시설경비는 정부의 보조 없이 전액 학교법인 고려중앙학원에서 출자하였다.
6. 중앙교우회
'''중앙교우회 홈페이지'''
중앙교우회(中央校友會, Choong Ang Alumni Association)는 1954년 창립된 중앙중학교와 중앙고등학교의 졸업생들의 모임이다. 중앙학교는 다른 학교들과는 달리 단순히 '동문'이라고 하지 않고 '''교우(校友)'''라고 하는데 이는 끈끈한 우정과 단합력을 보여주는 말이다. 중앙교우회는 학교법인 고려중앙학원, 중앙중학교, 중앙고등학교와 돈독한 관계를 맺으며 다양한 사업들을 진행하고 있는데 특히 장학 사업의 경우 교우들의 후원 아래에 매우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중앙교우회는 이외에도 2008년 개교 100주년 기념 사업 등을 주도하여 진행해왔으며, 매 기수별로 활발히 교우회를 만들어 각 기수별로도, 지역별로도 자주 모이고 있다. 이는 인촌 김성수가 인수·경영한 학교들의 공통점인데, 고려대학교 역시 고려대학교 교우회가 만들어져 활발한 친목 활동이 이뤄지고 있다.
7. 출신 인물
7.1. 정치인
7.2. 체육인
- 홍성흔 : 체육인. 前 두산 베어스 선수, 前 롯데 자이언츠 선수. 前 롯데 자이언츠 주장
- 이숭용 : 체육인. 前 태평양 돌핀스, 현대 유니콘스, 넥센 히어로즈 선수
- 김재호 : 체육인. 두산 베어스 선수.
7.3. 가수
7.4. 방송인
8. 교통편
'''중앙'''이라는 이름처럼 서울의 중심부에 위치해 있어서 접근이 상당히 용이하다.
- 학교 앞 정류소의 두 버스(종로01, 종로02)의 경우 각각 정문과 후문에서 정차한다.
- 종로01과 종로02는 안국역 2번 출구로 나오면 바로 탈 수 있다. 주의점은 두 버스 모두 배차간격이 매우 크며, 종로01은 매우 작아서 아침 시간대에는 가축수송이 이루어진다.[20]
- 사실 위에 서술된 버스 이외에도 안국역 또는 창덕궁에서 정차하는 모든 버스가 해당된다. 하차 후 안국역 3번 출구 방향 현대빌딩 왼쪽의 큰 골목으로 약 800m 정도 직진하면 갈 수 있다.
- 승용차로 올 때 안국역 사거리가 좌회전 금지여서 경복궁 방면에서는 낙원상가 쪽으로 갔다가 유턴하여 안국선원 쪽 골목으로, 서울대병원 방면에서는 안국역 사거리에서 우회전하여 안국선원 쪽 골목으로 들어오면 된다. 학교 바로 앞 현대빌딩까지 뻗어있는 도로는 사람이 많고 좁아서 사실상 보행전용도로처럼 되어 있다.
9. 기타
원래는 남학교였으나, 2002년에 남녀공학으로 전환했다. 이에 따라 2001년부터 신축공사에 들어가 당시 중앙중학교 재학생들은 현 고려사이버대학교 자리에 위치한 컨테이너박스 교실을 1년간 이용했다. 그 후 2002년에 완공된 신축 건물로 입주했다. 1999, 2000년도에 중앙중학교에 입학한 학생들은 구 교사, 컨테이너, 신교사를 모두 이용하였다.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대전광역시 대덕구, 울산광역시 남구에 같은 이름의 중학교가 있다.
10. 둘러보기
[1] 그렇지만 독립 이후에도 오랫동안 교지도 공동 발간하고 행사도 같이 했기 때문에 중앙고등학교의 거의 대부분의 역사와 상징은 중앙중학교와 공유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 들어서는 중앙고등학교가 자율형 사립고등학교로 지정되고, 남자중학교였던 중앙중학교가 남녀공학으로 전환되면서 이질감이 더욱 뚜렷해지고 있다. 거기다가 중앙중학교 교사(校舍)는 2002년에 준공하여 고풍스러운 중앙고등학교와 크게 차이가 난다.[2] 이렇게 된 사유는 현재 확인할 수 없으나, '''中'''자가 자칫 '''중학교'''의 '중'자로 보일 수 있어 바뀐 것으로 추정되며, 중앙고등학교 '''신관'''에는 건립 당시의 "中"자 모표가 그려져 있어 적어도 그 당시에는 원래의 중앙학교 모표가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3] 당장 20세기에 발간된 학교 교지 <계우>에도 '''인촌 김성수 선생'''의 글씨로 '校旨'라고 쓰여있다. 그렇지만 이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최근 들어 '敎旨'로 쓰는 경우가 많아져 안타까울 따름이다. 참고로 <계우>는 현재 중앙고등학교에서 발간되고 있다.[4] 한국인 최초로 도쿄 우에노(上野) 음악학교 본과에서 피아노를 전공한 사람이다.[5] 작사 당시는 아직 친일행위를 하며 변절하기 이전이다. 참고로 휘문고등학교 교가도 작사해서 두 학교의 교가는 상당히 느낌이 비슷하다. 작사가가 같은 것 말고도 원래 휘문고등학교가 현대 계동사옥 자리에 있어서 그렇기도 하다.[6] 인촌 김성수와 마찬가지로 1940년대 이후 친일행적으로 논란이 되고 있다.[7] 2007년까지는 6월 1일이 기호학교 설립안 가결일이기 때문에 '개교기념일'로 정하였으나, 2008년 개교 100주년 기념식 때부터 6월 20일로 복원하기로 결정하여 6월 20일로 바뀌게 되었다.[8] 이 화동 교사는 김성수 계열 법인들(동아일보, 학교법인 고려중앙학원 등)에게는 큰 의미가 있는 곳으로 기호학교와 중앙학교가 사용하다가 김성수의 중앙학교 인수 직후 학교가 계동으로 이전되면서 자리가 비었다. 그래서 1920년에 창간된 동아일보가 이곳을 사옥으로 썼다. 위치는 이곳. 로드뷰에서 앞면이 안 보이는 작은 비석이 기념 표석이다. 그런데 잘 보면 고등학교 평준화 정책 시행 이전 중앙고의 가장 큰 라이벌이었던 경기고등학교 구 교사의 바로 앞이다! 물론 중앙고가 한참 전에 이전하여서 크게 상관은 없지만 참 오묘하다.[9] 역시 인촌 김성수와 마찬가지로 친일 행위가 있었으나 이 사람은 3·1 운동에 이용직과 함께 참여하여 친일반민족행위자 목록 등지에서는 제외되었다.[10] 실제로 김성수를 도왔고, 후에 동아일보 사장과 중앙고등보통학교 교장을 맡기도 했던 송진우는 학생들의 등교에 불편하고 학교 발전에 지장이 있다며 불평을 하긴 했으나 김성수는 '나중에 이 앞에 집들이 들어서면 괜찮다'며 강행하였다. [11] 이 당시 김성수는 교주(校主)로써 오늘날의 이사장 역할을, 최두선과 송진우는 각각 학감과 교원을 하다가 둘 다 교장을 역임하며, 현상윤은 중앙고보 승격 직후 교장이 되었다. 네 사람 모두 한국 현대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는 점에서 여러모로 대단한 사진이다.[12] 중앙학교의 교사이자 국어학자로, 조선어연구회의 창립을 주시경과 함께 주도하였고, 한글맞춤법통일안 제정과 <조선어큰사전> 등의 편찬에 참가하였다.[13] 다른 학교의 교훈으로 봐도 무방하다.[14] 원서동 빌라의 주차장 기둥에 까맣게 붙어있는 표지판만이 남아있다.[15] 이 때 천도교 측에서는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는데, 이들이 운영하여 3.1 운동에 참여하게 된 학교가 바로 보성고등학교와 보성전문학교이다. 어쩌면 고려대학교가 되는 보성전문학교와의 연결점은 이 때부터 시작된 것일 수도 있다.[16] 김성수의 동생이며 삼양그룹의 창립자다.[17] 김기중의 친아들[18] 2017년 리모델링이 진행 중이고, 이후 다양하게 활용할 예정이다. 기존 도서관은 원파도서관으로 이전하였다.[19] 제13대 국사편찬위원장[20] 사실 이는 종로 02번도 마찬가지이다. 크기는 종로02번이 더크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