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범근호/1998 FIFA 월드컵 프랑스
차범근호의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에서의 기록을 정리한 문서.
1. 월드컵 본선 조 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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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편성 결과 멕시코, 네덜란드, 벨기에와 E조에 편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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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편성 후의 MBC 뉴스 화면...
조 편성 이전에도 언론의 희망적인 설레발이 있었다. 1998년 당시 대한민국 대표팀의 FIFA 랭킹은 20~21위로 역사상 최고였을 때였고, 멕시코는 4위였으며, 대한민국을 5:0으로 눌렀던 네덜란드조차도 25위로 우리나라보다도 낮았다. E조 피파 랭킹 순으로 보면 우리나라가 조에서 2위였기 때문에 언론은 아마 그 점을 염두해 두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나 94년 조 편성은 각 팀들을 FIFA 랭킹과 월드컵 전적 등을 종합해서 1그룹부터 4그룹으로 나눈 후 각 그룹별로 한 팀씩 조 추첨을 하는 방식이었는데, 이 방법을 98년 월드컵에서도 그대로 쓸 경우 월드컵 4회 연속 진출의 나름 경험있는 팀이니만큼 우리도 3그룹 정도로 들어가서 해볼만한 팀인 4그룹 팀과 맞붙어 이기면 되지 않겠느냐는 이야기... 다만 98년 월드컵의 포트는 최상위 시드 8팀을 제외하고는 대륙별 안배로 결정되었다.
문제는 그게 아니더라도 당시 월드컵에 첫 출전한 네 팀을 제외하고 나머지 28개 팀 중에서 우리보다 월드컵 성적이 안 좋은 팀은 이란 하나밖에 없었다는 것.... 어차피 실력대로 포트를 나눴다고 해도 4그룹에 들어갈 가능성이 높았지만 그 당시 언론의 설레발이라는 게 그런 식이었다. 하지만 언론이 설레발을 칠 수 있었던 것은 언론 자체에 해외 축구에 해박한 인물이 거의 없었고[1] 일반인들 중에서도 해외 축구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리고 어쨌던 조 편성의 결과는 저랬다.
사실 압도적인 성적의 예선 통과로 인한 분위기와는 별개로 당시 국가대표팀과 관련된 모든 상황은 월드컵 본선에서의 긍정적인 결과와는 거리가 매우 멀었다. 당시 세계 축구계와 도박사들은 한국의 1차전 상대가 죽음의 조에 속하더라도 16강은 꾸준히 가는 멕시코인데다 2차전 상대는 무려 당시 최강 공격팀 네덜란드였던 터라[2] 두 경기에서 승점을 딸 가능성이 부족해 보였기에 한국의 16강 가능성을 7~20% 정도로 보고 있었으며 3패나 1무 2패가 보통의 예상이었다. 다만 이것 또한 결과적으로 맞았지만 그 내용 자체는 한국 축구팀을 정확히 파악해서 그것을 기반으로 한 확실한 근거를 가지고 한 말은 아니었다. 우리가 해외 축구를 접하기 어려운 만큼 90년대 후반에 유럽 또한 유럽대로 아시아의 축구에 관심도 없었고 볼 환경도 없었다. 다만 아시아 국가들의 참패 및 유럽 축구가 세계 축구계의 최중심에 서서 선도하고 있다는 사실은 알았기 때문에 아시아의 듣보잡 나라인 대한민국을 높게 쳐줄리가 없었다. 그때는 그랬다. 서로가 서로를 모르고 월드컵에서나 몇번 마주치며 상대 나라의 축구를 봐야하는 그런 시기였다.
조 편성을 감안할 때 16강은 어려움을 넘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당장 팀 각각의 면모만 보아도, E조 톱시드 팀 네덜란드는 이전부터 월드컵 준우승만 2회에 일단 월드컵에 나오면 조별리그 통과는 쉽게 했다. 1994 월드컵까지는 16, 24개 팀으로 진행되다 보니 월드컵에 개근한 브라질 그리고 독일과 이탈리아를 제외하면 우승 후보급이라도 꾸준히 월드컵에 출전하기 어려웠다. 거기에 당시 스쿼드조차 과거, 미래를 통틀어도 나오기가 어려울 정도로 역대 최고 수준의 레전드급 선수들이 즐비한 최강팀 중 하나였다. 보통 유로 88 우승을 이루어낸 오렌지 삼총사 시절 다음 가는 최고 수준의 멤버 구성으로 꼽힌다. 이미 94~96년에 유럽 정상에 우뚝 섰던 아약스 멤버들이 엔트리에 대다수 포진되었고 그때 당시 20대 초중반이었던 멤버들이 98년 즈음엔 유럽의 빅클럽에서 맹활약 하고 있었던 때이다. 그들의 구심점 역할을 하던 프랑크 레이카르트가 은퇴했다고 하지만 그 자리는 전성기를 맞이하던 데니스 베르캄프가 리더 역할을 했고 수비의 구심점엔 야프 스탐이 있었다. 실제로 거스 히딩크 감독이 4강이라는 준수한 성적을 내고도 사임할 수밖에 없던 것이 '이런 스쿼드로 4강은 기대 이하 수준의 성적이다'라는 여론이 있었다고 한다. 쉽게 표현하자면 현재 이란이 독일, 포르투갈, 칠레와 같은 조가 되었거나 현재 일본이 아르헨티나, 프랑스, 가나와 같은 조가 된 셈이다.
E조 2시드 팀 벨기에 역시 당시에는 FIFA 랭킹이 40위권에 가까운 조에서도 최하위였으나 오랜 월드컵 참여 경력과 더불어 1986 FIFA 월드컵 멕시코에서 4강에 진출한 것을 비롯하여 16강 진출도 여러 번 이뤄낸 무시 못할 다크호스였으며, 이 두 팀에게 프랑스는 홈 그라운드나 마찬가지였다. 특히 이점이 당시 한국 축구계와 언론의 가장 큰 오판 중 하나였는데, 네덜란드와 벨기에의 라이벌 의식 & 바로 옆에 있어서 몰려든 사실상 적진 원정이나 다름없던 무시무시한 원정의 공포가 국가대표의 경기력을 뚝 떨어뜨렸다. 실제 당시 선수들의 인터뷰를 보면 네덜란드전 때 관중석이 '''오렌지색'''으로 도배되어 있는 것을 보고 시작하기도 전에 완벽히 기가 죽었다고 한다.
E조 4시드 팀 멕시코는 당시 FIFA 랭킹 10위권을 다투는 북중미의 강호로 월드컵만 나오면 일단 16강은 가는 국가였다. 당시 북중미 축구에서는 멕시코가 최강이고, 미국이 멕시코를 추격하는 추세였다. 당시 한국에서는 멕시코가 유독 저평가되어서 1승의 제물이라고 보도되곤 했는데, 그 이유는 이 당시 멕시코 선수들이 해외 진출을 거의 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더불어 비유럽 리그에 관한 정보도 부족하니 멕시코 리그도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고. 이렇게 유독 멕시코 국대가 우리나라에서 저평가당하는 현상은 멕시코 선수들의 해외 진출 증가와 인터넷의 발달로 멕시코 리그를 포함, 멕시코의 전력을 제대로 평가할 수 있게 되면서 사라졌다. 그러면서 대한민국이 그 동안 월드컵에서 상대했던 팀들이 아르헨티나, 이탈리아, 우루과이, 스페인, 독일 등 '''멕시코보다 뛰어났으면 뛰어났지 절대 떨어지지 않는 강팀들'''이라는 점도 멕시코를 깔보는 원인의 한 축이 되었다.
문제는 멕시코가 각 조에서 시드 먹을 수준의 팀들과 비교하면야 그렇겠지만, 조별리그에 있어서는 86년의 불가리아나 90년의 우루과이나 벨기에, 혹은 94년의 볼리비아 같이 우리가 1승 제물로 여겼던 팀들보다 절대 약하다고 볼 수 없거나 더 강한 팀이었다는 게 문제... 사실 저 때도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사실이어서 축구 좀 아는 사람들은 미국과 같은 조가 된 이란이나 자메이카가 같은 조가 된 일본을 많이 부러워했다. 게다가 당시 멕시코 국대는 캄포스, 블랑코, 에르난데스 등 전성기를 구가하던 스쿼드였다. 이런 살인적인 수준의 강호 사이에서 대한민국은 그저 아시아에서 월드컵 흥행에 구색이나 맞추러 나오는 최약체 팀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고, 따라서 대부분의 외신들 평에서 한국은 16강 진출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
그런 와중에 조 추첨 당시 국내 언론들은 "멕시코는 중남미 팀 특유의 잘 흥분하는 국민성 때문에 경기를 순간 말아먹는 스타일의 팀으로 정신력이 강한 우리나라 축구팀에게는 해 볼 만한 상대이며, 네덜란드는 다인종 팀 구성 때문에 팀 케미스트리가 약하다"는 평을 했는데 이는 틀린 말은 아니었다. 멕시코는 팀의 전력이나 특성상 강호와의 평가전에 자주 불려다니는 나름 인기팀이었는데, 확실히 기복이 심한 경기력이 단점이었고, 네덜란드도 당시 대표팀에 인종 갈등이 있기는 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팀 내부 문제가 약점으로 작용하는 것이 멕시코나 네덜란드가 브라질, 프랑스 등과 경기를 할 때에 해당되는 것이지 당시 몇 수 아래인 대한민국과 경기를 할 때는 해당되지 않았다는 것. 더불어 당시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은 스타 플레이어들의 기강을 잡는 데 능숙한 '''거스 히딩크'''였다.
국내 언론은 벨기에는 1980년대의 강팀일 뿐 지금은 약세라는 평을 내리며 셋 중에 한 경기 이기고 두 경기 정도 비기면 괜찮겠다는 망상을 쏟아냈다. 문제는 딱 저 정도 평으로 끝났다는 것... 벨기에 전력을 제대로 분석한 기사도 별로 없었다. 사실 분석을 할 수 있는 사람 자체가 한국에는 거의 없었다. 멕시코는 1승 제물이라면서 엄청나게 관심을 쏟았고, 네덜란드는 시드 배정 팀이라는 이유로 나름의 관심이 있었으나 벨기에는 정말로 아웃 오브 안중이었던 것. 사실 외국 언론과 항시 접하는 한국 언론들이 정말로 경쟁국들을 저렇게 판단하고 그런 평가를 했을 리는 없고, 가망이 없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 해외 축구에 무지했던 당시 대중을 기만해댔던 것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우리나라 기자들과 전문가들이 직접 여러 경기를 보고 평하는 것보다는 외국 언론의 평을 보고 정리하는 수준이었고, 당연히 출처가 되는 언론이 속한 국가들이 영국, 독일, 프랑스 등 축구 강국이니 이들 언론의 분석만 보고 분석을 한다면 해볼 만 하다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기도 했다. 그리고 해 보기도 전에 사람들에게 '설레발 자제염..' 하는 문화가 지금보다 훨씬 없기도 했고.. 사실 축구협회나 축구 관계자들에겐 더욱 부담인 게 1996년에 2002 한일 월드컵 공동개최가 이뤄지면서 한일 양국 정상이 이런 이야기가 오갔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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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한일월드컵 공동개최 발표 당시 김영삼 대통령과 하시모토 류타로 총리 두 정상은 서로의 공동개최를 축하하며 한일 양국 두 나라가 2002년 월드컵 결승전까지 올라가 멋진 맞대결을 펼치자는 덕담이 오가긴 했다..김대통령.하시모토 일본 총리, 월드컵 공동 개최 입장 표명김 대통령 하시모토 월드컵 결승전서 만나 멋진 맞대결 펼치자
본선 경기 이전까지는 세계 축구와 한국과 아시아 축구의 냉정한 현실을 인식하고 있던 극히 일부를 제외하면 그나마 '''"해 볼만 하다.", "차범근 감독이 있기 때문에 그를 믿는다."'''라는 풍조가 강했다. 바로 이전 1994 미국 월드컵에서 당시 같은 조였던 스페인, 독일, 볼리비아라는 국가들의 면면은 일단 겉보기로는 1998 월드컵보다 오히려 더 어려워 보이는데, 한국은 이들을 상대로 2무 1패를 거뒀고 경기 내용까지 따지면 아깝게 16강 진출에 실패했다고 볼 수도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1994 월드컵은 본선 진출팀이 24팀이어서 조 3위를 해도 2/3의 확률로 16강에 진출하는데 반해, 1998 월드컵부터는 32개팀으로 늘어났기 때문에 16강에 진출하려면 반드시 최소 조 2위는 해야 한다. 한마디로 월드컵에 진출하기는 쉬워졌지만 본선에서 16강에 진출하기는 이전보다 훨씬 어려워진 것이다. 따라서 예전 월드컵 때처럼 1승으로는 부족하고, 두 팀을 제쳐야 16강에 들어갈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당시 언론에서 그런 것들을 제대로 설명하지 않았다. 위에서도 말했듯이 16강을 위해선 멕시코만으로는 부족하고 벨기에도 제쳐야 했는데, 벨기에에 대해서 제대로 분석하기는 커녕 관심조차 없었던 것이 언론들의 태도였고, 거의 멕시코를 이기면 16강 간다는 식의 기사들만 열심히 써대고 있었다. 한국이 해 볼만 하다는 설레발이야 백번 양보해서 경기 전부터 괜히 기를 꺾을 필요 없으니 그런 거라고 쳐도, 단순 계산만 해 봐도 알 수 있는 일들을 제대로 설명하지 않은 것이야말로 당시 월드컵을 대하는 언론의 태도가 얼마나 안일했는지를 알 수 있는 사건들이었다.
스포츠 전문 채널조차 제대로 없는 환경이었고 스포츠 채널에서도 해외 축구는 거의 보기 어려운 상황이었던 데다 신문사마다 스포츠 기자라는 양반들도 많아봐야 대여섯 명으로 대한민국의 모든 스포츠를 훑는 실정이었다. 게다가 야구도 박찬호의 메이저리그 진출을 통해 세계 야구계에 대한 분석이 가능한 사람은 대한민국 자체에 서너 명쯤은 있었다. 거기에 농구나 배구도 있으니 한 기자당 한 스포츠를 맡아도 모자랄 판에 한 기자가 여러 종목의 기사를 만들고 있는 처참한 상황이었다. 제대로 된 축구 전문가는 유럽으로 유학을 다녀왔거나 정말 극도록 관심이 많은 아주 극소수의 사람들 빼고는 없었다. 사실상 스포츠 전문기자나 축구 해설위원이라고 하더라도 모두가 유럽 축구라고 해봤자 국가대표전 몇 경기 구해서 본 수준의 무지한 그야말로 전국민이 정저지와라는 아주 심각한 상황에서 벌어진 심각한 착각이었다. 그야말로 축구에 있어서 만큼 개화기 이전의 조선과 별반 다를 게 없는 한국의 상태였다.[3]
해외 팀에 대한 정보도 크게 부족했는데, 이를테면 월드컵 예선 직후 벌어진 킹스컵에서 나온 덴마크팀이 어느 수준의 팀인지에 대해서도 전혀 파악하지 못한 채로 경기에 임했는데, 훗날에서야 이 팀이 A대표팀이 아니라는 걸 알았을 정도.
월드컵 대비에 얼마나 역량을 쏟아부을 수 있는지도 문제였는데, IMF 사태 직후였던 당시 분위기상 그것도 불가능했다. 평가전 상대나 전지훈련지 등도 역시 지금 생각해본다면 어이가 없을 정도로 질이 낮았다. 그리고 IMF 직후라 외화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해외 전지훈련 중에 벌인 경기들은 국내 중계가 전혀 되지 않았다. 이것도 지금 생각하면 상상할 수 없는 일... ~~
다만 이 모든 게 당시에는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그저 본선에서는 어떻게든 16강에 갈 거라고 믿는 사람들이 많았었다. 다시 말하지만 워낙 압도적인 모습을 보이면서 아시아를 통과한 것이 처음이었던 것인데, 운빨이 따랐던 것에 대한 분석이 전혀 되지 않았고 오로지 실력으로 생각했다.
뭐 사실 월드컵 조 편성이야 어떻게 되든 어렵지만… 당시 차범근 감독은 이런 조 편성을 두고 언론들이 "16강 할 수 있다!"고 다들 설레발치는 것에 대단히 서운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16강이 현실적으로 어려운 목표라는 것 또한 차범근 본인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지만... 당시 분위기상 도저히 그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고 훗날 이 당시를 회고하기도 했다. 그래서 실제로 차범근은 본선 대회를 위해 선수단을 이끌고 출국하기 전 '국민 여러분께 반드시 16강의 성과를 안겨드리겠다'는 식으로 인터뷰를 할 수밖에 없었다.
정보랄 것이 부족한 당시 대중들은 저런 희망에 가득한 거짓 부렁들에 어울려 춤추며 정말 말도 안 되는 기대를 대표팀에 거는 촌극이 벌어졌다. 실제로 당시 우리나라 국민들 중 대다수가 네덜란드의 전력이 우승 후보감이라는 부분도 제대로 알지 못하고 각종 언론 설레발에 속아 투혼만 발휘하면 이길 수 있는 '우리나라보다 조금 강한 상대'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실로 해외 축구에 대한 무지의 극치로, 네덜란드전 대패 이후 국민들 인터뷰를 지금 다시 돌려보면 눈도 못 뜨게 창피한 수준. 물론 이 부분은 언론에서 해외 축구에 대한 정보 자체를 제대로 알리지 않았던 것이나 축구협회에서 제대로 된 대책도 세우지 않고 압도적인 예선 성적을 자축하기만 했던 탓이 크다. 근데 조금 나아지긴 했지만 이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당장 2006년 스위스전이나 2014년 브라질 월드컵 8강 드립(...)만 봐도.[4]
그나마 유일하게 '''"월드컵 16강? 꿈 같은 소리 집어쳐!"'''라고 쓴소리를 한 언론이 딱 하나 있었는데, 바로 주간지인 시사저널이었다. 시사저널은 월드컵이 열리기 직전 기사를 통해 상대들을 몰라도 너무 몰라 네덜란드와 벨기에를 허접으로 본다면서 당시 여론 및 언론 보도를 비난했다. 시사저널에서 예상한 한국팀의 경기 결과는 그야말로 경악스러운 선견지명을 보여 줬다. 당대 유일하게 제정신이 박힌 언론이었다.
당시 월드컵 전, 시사저널 홀로 이렇게 이게 한국 축구 수준이라고 매섭게 따지며 현실을 알라고 일침을 가하는 기사를 올려서 당시 많은 비난을 들었으나 알다시피 벨기에와 멕시코가 서로 맞바뀐 것을 빼고는 거의 들어맞았기에 경기가 끝나고 나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월드컵이 끝나고 시사저널 독자란에 "어쩜 그렇게 예언 수준으로 잘 예측했느냐?"라는 글을 올렸는데 시사저널 측은 '''"그게 한국 국대 축구 실력이거든요."'''라고 응답했다. 참고로 이렇게 보도한 시사저널은 당시 온갖 비난과 항의 전화를 받았으나 이후 많은 독자들이 공포스러울 정도로 잘 예측했다고 놀라움에 빠진 반응을 보였다."네덜란드에겐 한 0:4로 지며, 벨기에에겐 1~2점차로 지고 멕시코와 죽어라 경기를 해서 겨우 비긴다. 16강? 1승? 천만에, '''1무 2패가 한국 축구의 수준이다.'''"
시사저널 독자란에 '''예언 수준'''으로 잘 예측했다며 놀라워했는데, '''정작 월드컵을 앞둔 역술인들 예언도 형편없이 빗나갔다'''. 그나마 한 역술인만이 멕시코전 3대1 패배 결과를 맞춰 크게 화제가 되어 후속기사가 실렸는데, '''네덜란드를 무려 한국이 2대1, 3대1로 승리하고 벨기에에게 패한다'''는 예언으로 다 틀렸다. 우승국은 '우승 후보 1순위' 브라질을 꼽아 틀렸는데, 역술인들의 예언은 당시 한국 언론의 대세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게 눈에 띄기에 가장 확률이 높은 팀에 배팅하고 그럴 듯한 해석을 껴맞춘 게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 수 있을 정도다. 가만 보면 펠레의 저주가 억울할 법도 한데, 사실 '''한국 언론이나 역술인이나 펠레 못지 않게 빗나간다는 것이다.''' 다만 펠레의 발언은 워낙 영향력이 강하고 또 각국 기자들이 자국 팀에 대해 물어보다보니 '립 서비스' 수준의 덕담을 해주고 그게 대서특필되어 틀리면 다 뒤집어쓰게 되는 면도 있다. 한국 언론도 말이 씨가 된다고 욕먹을까봐, 일부러 국민들에게 듣고 싶은 말 들려줘야 장사가 잘되니까 립서비스 차원에서 띄워주는데, 정작 자신들이 하늘 높이 붕 띄워놓은 차범근을 지하 뚫을 정도까지 내팽개쳐버리며 성난 군중에게 희생양으로 던지고 자신들의 책임은 쏙 빠져나간다. 희망고문을 부추겼던 건 한국 언론이고, 그나마 시사저널만이 양심적으로 분석했었다.
한국이 아닌 다른 팀으로 현재 국대 전력을 기준으로 본 상태에서 조 편성을 하면 마치 독일(당시의 네덜란드)-스페인(당시의 벨기에)-콜롬비아(당시의 멕시코)-온두라스(당시의 한국) 같은 조 편성에서 1998년 월드컵 당시 한국은 지금의 파나마 수준의 포지션이다. 이런 조 편성에서 온두라스가 16강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얼마나 되는지 생각해 보자. 당시가 지금처럼 인터넷이 발달된 시대였다면 축구에 조금이라도 관심있는 사람들이 개소리라며 일축했을 가능성도 높지만, 이 때는 인터넷은 커녕 1가구 1컴퓨터가 정착된 시절도 아니었다. 심지어 케이블 채널도 가입된 사람들 소수만 즐기는 문화였다. KBS, MBC만 나오고 SBS는 서울 및 경기 지역에만 확실하게 나오고 나머지는 지역민방이 있거나 없었던 아주 열악했던 시절이라 누가 뭘 안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다만 위에서 말한 대로 설레발의 이유가 중 '해외 축구에 대한 무지' 가 차지하는 비중은 어느 정도 과장이 있다. 당시 언론에서도 네덜란드를 소개하면서 월드컵 2회 준우승팀이라는 이야기를 빼먹지는 않았고, 승산도 높게 보지 않았다. 다만 멕시코전을 3-1로 지고도 네덜란드를 잘하면 비긴다는 개소리를 했다는 게 문제였을 뿐이다.[5] 애초에도 멕시코, 벨기에가 타겟이었지 네덜란드를 타겟으로 삼지는 않았다. 다만 2000년대 후반, 2010년, 2020년대의 눈으로 보면 그 당시 네덜란드에 한국이 대패를 당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그렇다 해도 0-2, 0-3 패배를 예상한 언론들이 많았으니 '''해외 축구에 대한 무지'''가 과장은 있을지언정 없는 일은 절대 아니라는 점이다.
사실 월드컵 당시의 역대급 설레발의 이유로 무지 만큼이나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게 '우리 나라 대표팀은 정신력이 뛰어나서 실전에 강하니 그걸로 경기력의 열세는 극복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2010년대 현 시점에서 도저히 이해가 안 가겠지만 당시 스포츠계는 정말 이런 시대착오적 생각들이 판을 쳤고 해외 스포츠에 대해 몰라도 정말 몰랐다. 애초에 수치화할 수 없는 정신력을 전력 분석에 변수로 넣으며 "태극 전사들이 앞서는 부분"이라고 계산에 넣는 것 자체가 말도 안되는 소리다. 대부분의 세계적인 선수들은 초인적인 정신력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물론 2002년 월드컵처럼 정말 죽어라 뛰는 한국 선수들이 객관적 기량에서 앞서는 월드 스타들을 압살한 경우도 있긴 하지만, 그건 기본기와 피지컬이 받춰줘서 어느 정도 기량이 올라왔을 때 얘기다. 98년처럼 피지컬이고 기술이고 뭐고 아무 것도 세계적인 수준이 안 되는데 무조건 정신력 운운하는 건 웃기는 얘기.
94년 월드컵 예선에서 고전하고도 94년 월드컵 본선에서 스페인이나 독일 등의 강호와 대등하게 싸웠던 기억들에 더해서 94년 월드컵 예선보다 더 압도적인 경기력과 결과로 예선을 통과한 98년 월드컵 예선의 모습이 겹치면서 축구를 좀 알던 사람들도, 그리고 평가전 등을 보면서 크게 기대하기 어려운 경기력을 봐 왔던 사람들조차도 '우리나라 축구 특유의 정신력이라면 본선에서는 어떻게 되겠지'라는 생각을 떨치지 못했던 것이다. 멕시코는 흥분을 잘 하는 팀이다 보니, 정신력이 강한 우리가 평정심만 유지한다면 이기는 게 가능하다고 분석하는 기사들이 많았고, 네덜란드전 전반 0-2의 열세에도 '선수들이 후반에 죽어라 뛰면 동점은 만들 것이다' 라고 기대하면서 경기를 계속 시청하는 사람들도 많았는데 이 사람들에게서 1994 월드컵의 스페인전, 독일전의 기억이 큰 영향을 끼쳤음을 부인하기는 힘들 것이다. 사실 1994년 월드컵에서의 선전도 단순히 정신력 때문만은 아니었다. 당시 한국의 경기가 열린 곳이 그 중에서 특히 1, 3차전이 열린 댈러스가 그 시기에 살인적인 더위를 보이는 지역이었던 터라, 그것을 간파한 김호 감독이 체력 훈련에 매진한 덕이 오히려 더 컸다. 3차전에서 상대했던 독일만 하더라도 노장들이 주축이어서 후반전엔 거의 걸어다니다시피 할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멕시코에게 역전패당하고, 네덜란드 전 후반전에 대패를 앞두며 노골적으로 뛰기 싫어하는 선수들의 모습을 보고, 벨기에와 죽어라 경기해서 무승부로 탈락하고, 토너먼트 진출한 팀들의 넘사벽의 경기 모습을 보면서 '정신력으로 버티기에는 우리가 정말 실력이 부족했구나' 라는걸 절감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기도 했다. 실제로 실력을 정신력으로 커버하자는 드립이 98년 월드컵 직후로는 크게 줄어들었고, 정신력 드립에 대한 자성론도 많이 나왔으며, 운동선수들의 진정한 정신력에 대한 논의도 활발해졌다. 98 월드컵 이전에는 그저 처절하게 죽어라 뛰는 게 정신력이라고 생각했다면, 그 이후 실력이 바탕이 된 정신력이라던가, 진정한 정신력은 어떤 상대를 만나더라도 무시하거나 기 죽지 않고 자기 실력을 제대로 보여주는 것이라는 썰이라던가 등등.. 히딩크의 '한국 선수들은 기술보다 정신력이 문제다'라는 발언도 저 연장선상이었다. 결국 참패의 경험이 약이 된 측면도 있었다. 정신력 드립은 한일 월드컵 4강의 주역 안정환이 홍명보호의 참패 이후 '''실력이 먼저 된 다음 정신력이다. 실력이 안 되는데 무슨 정신력 타령이나''' 하며 종결.
2. 최종 엔트리
괄호 안은 당시 소속팀이다.
- 감독: 차범근(경질 후 김평석 대행)
- GK: 김병지(울산), 서동명(상무)
- DF: 이임생(부천), 최영일(부산), 이민성(부산), 이상헌(안양), 김태영(전남), 장형석(울산), 장대일(천안), 홍명보(벨마레 히라츠카;일본)
- MF: 최성용(상무), 유상철(울산), 김도근(전남), 노정윤(NAC 브레다;네덜란드), 고종수(수원), 이상윤(천안), 하석주(세레소 오사카;일본)
- FW: 김도훈(비셀 고베;일본), 최용수(상무), 서정원(RC 스트라스부르;프랑스), 황선홍(포항), 이동국(포항)
그러나 이렇게 월드컵 첫 16강 진출을 기대하는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에 큰 암운이 드리워졌으니 그것은 황선홍의 부상이었다. 본선을 앞두고 벌였던 중국과의 평가전에서 황선홍이 문전으로 쇄도하다가 중국 골키퍼 장진과 충돌, 공중에서 옆으로 한 바퀴 회전 후 떨어져서 큰 부상을 당해 출전이 불가하게 되어버린다. 2006 독일 월드컵 직전 전성기를 달리던 이동국이 부상당해 사상 첫 원정 16강 진출이 2010년으로 미뤄진 것과 같은 맥락. 그런데 사실 알고 보면 차범근이 상당히 박한 대우를 받았던 것이, 이 평가전은 '''출국 하루 전에 있었는데, 중국과 평가전을 치른다는 것 자체를 차범근은 반대했으나 축협이 강행했던 것이다.''' 그렇게 치른 평가전에서 황선홍이 부상당했고, 이미 엔트리 제출이 끝난 상태였기 때문에 누군가를 새로 발탁해서 넣을 수도 없었던 상황.[7]
당시 차범근 감독은 황선홍이 부상당하기 전까지 그에게 깊은 신뢰감을 표시하였고, "황선홍은 대표팀 전력의 절반 이상", "유럽 수비수들에게 통할 선수는 황선홍 정도"라는 이야기를 공공연하게 할 정도였기에 심대한 타격이었다. 단, 황선홍'''뿐'''이란 표현을 썼는지는 확실치 않다.
당시 대표팀에서 황선홍이 차지하는 비중에 대해서는 다소 논란이 있다. 사실, 황선홍은 한국이 피크였던 아시아 예선전에서는 엔트리에도 없었고 예선이 끝난 이후에 팀을 재편하며 합류했지만 그 시기도 늦었다. 때문에 당시로선 팀 전체의 전력을 논할 정도로 유력한 선수는 아니었다는 의견도 있다. 월드컵 직전에도 공격수는 단연 예선에서 폭풍 활약을 했던 최용수에게 시선이 모아져 있었다. 그러나 통산 커리어에서는 물론 최용수의 전성기 시절 기량을 비교하더라도 황선홍과 비교하기는 힘든 것이 사실이다. 어쨋거나 황선홍의 부상이 대표팀에 악재가 된 것은 사실이다.
1994년 월드컵에서 황선홍의 삽질이 일반 국민에게 워낙 크게 각인되어 있는 터라 1998년 당시에도 황선홍에 대한 인식과 이미지는 별로 좋지 않았다. 황선홍이 중국 전에서 부상을 당했을 때도 언론이든 국민 여론은 아쉽지만 별 상관 없다 수준. 되려 황선홍을 1994년 이후로 좋게 보고 있지 않은 일부에선 차라리 잘되었다 소리까지 나오던 판국이다. 황선홍이 없다 하더라도 지역예선 때 최용수를 받쳐줬던 김도훈이 좋은 플레이를 했던지라 큰 걱정을 하지 않았던 것. K리그의 팬이 아닌 국대 축구만 보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리그에서 황선홍이 보인 활약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황선홍의 부상을 언론이 걸고 넘어진 건 월드컵 본선에서 참패한 이후로 패배의 원인을 이것저것 가져다 붙이다가 그 와중에 황선홍의 부재가 팀에 타격이 컸다는 식으로 지나치게 확대 해석을 했다는 의견도 있다.
여하튼 확실한 공격 자원이던 황선홍이 낙마하고, 에이스인 최용수와 서정원[8] 은 제 컨디션이 아니었으며 본선 첫 경기에서 한국의 월드컵 본선 사상 처음으로 선취골을 넣었던 하석주가 바로 가린샤 클럽에 가입해버렸다는 불운이 있었다. 대표팀의 새로운 바람이라고 불렸던 '팽이' 이상윤은 프랑스에 도착한 대표팀의 연습 중에 김태영의 강력한 슈팅에 헤드샷을 당하고 그 상태로 멕시코전을 치렀고, 아시아 최종예선에서 상대 측면을 갈아엎던 모습을 멕시코 전에서 기대한 축구 팬들이 경악할 정도로 말그대로 정줄을 놓았는데 후에 이상윤 본인이 매체에서 회상하길 과장 살짝 보태서 본인은 머리를 가격당하고 나서 정신을 차려보니 멕시코전이 끝났다고... 진짜로 정줄을 놓은 상태로 경기를 뛴 거다.
3. 멕시코전 (1998/06/13 17:30, 리옹 스타드 드 제를랑) 1:3 패배
'''하'''나 넣고
'''석'''점이나
'''주'''다니 - 경기 후 한 PC통신 유저가 축구 게시판에 하석주 이름으로 지은 3행시.
'''영웅에서 악역으로''' - 경기 다음날 KBS1 스포츠뉴스 헤드라인 문구.
'''심판의 석연치 않은 판정이라는 지적도 있지만, 하석주의 퇴장은 세계 축구의 흐름을 파악하지 못한 한국 축구의 거칠고 투박한 플레이를 다시금 돌아보게 합니다.''' - 위 뉴스 보도 당시 이성훈 기자의 멘트.
'''일순간에 영웅에서 죄인에 역적 신세로 전락한 하석주 선수. 이대로 프랑스를 통한의 무대로 남겨둘 것인지 주목됩니다.''' - MBC 기자 리포트 중에서.
'''서정원 선수가 아직 회복이 안 되어서 기대보다는 못 미쳤지만, 최성용 선수의 부상도 오늘 경기에서 간접적으로 나타났다고 생각한다.''' - 차범근(경기 이후 가졌던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대한민국 월드컵 역사상 최초이자 유일한 역전패''''''그 때까지로서는 김도훈 선수가 유일한 희망이었기에 김도훈 선수에게 기대를 걸었다. 최용수 선수의 경우, 체력이 약해서 기용했을 필요가 없었다.''' - 차범근(경기 후 가졌던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대한민국 월드컵 역사상 가장 높은 시청률(79.2%)을 기록한 경기'''
[9][10]
시작은 좋았다. 한국은 전반 28분경 하석주의 프리킥이 점프한 멕시코 수비수 다비노의 머리를 맞고 굴절되며 들어가 선제점을 얻는다. 이 골은 한국이 월드컵 본선에 출전한 이래 최초로 넣어본 선제골이었다. '''이 때까지만 해도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은 사상 처음으로 월드컵 무대에서 이기고 있었다.''' 그러나 골에 대한 기쁨이 가시기도 전에 하석주는 3분만에 거친 백태클로 레드 카드를 받고 퇴장을 당하고, 그렇게 수적 열세에 몰리게 된 한국은 경기 주도권을 멕시코에 완전히 빼앗기게 된다. 그나마 전반전은 김병지의 선방 덕에 1:0으로 앞선 채 마쳤지만, 후반 5분만에 교체 투입된 펠라에스에게 코너킥 상황에서 동점골을 내주고 말았고, 이후 각각 29분과 39분에 멕시코의 스트라이커 루이스 에르난데스에게 2골 더 허용하여, 1:3으로 참담한 역전패를 당하고 말았다.
이 당시 하석주에게 내려진 레드 카드 판정을 놓고 말이 많았는데, 아무리 백태클에 대한 제재를 강화하겠다는 언질이 있었더라도 상대 선수가 크게 다치지도 않은 상황에서 방금 전에 프리킥 골을 성공시킨 선수를 퇴장시킨 것은 누가 봐도 뻔한 편파 판정이라는 주장이었다. 또한, 차범근 감독의 부인이 언론 인터뷰를 통해 그 당시 FIFA 부회장이었던 정몽준이 이 경기를 보고 있었다면 기껏해야 경고에 그쳤을 것이라는 식의 말을 하면서 축구협회와 차범근의 갈등은 극에 달한다. FIFA 부회장이면서 자국 선수들의 경기를 관전하지 않았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부분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실 이 레드 카드는 편파 판정이라기보단 재수없게 걸려든 시범 케이스라고 보는 게 더 맞다. 하석주 이후로 독일-크로아티아 8강전에서 독일의 뵈른스 선수도 크로아티아의 다보르 슈케르 선수에게 백태클을 시도하다가 걸려 레드카드를 받고 즉시 퇴장당하고 독일은 크로아티아에 0:3으로 완패를 당하는 최악의 치욕을 당했다. 물론 뵈른스의 태클은 하석주와는 달리 크로아티아 공격수 슈케르가 루즈볼을 잡기 위해 뛰어드는 것을 막기 위해 발을 높게 들어 넘어뜨린 것으로 완벽한 백태클을 시전했던 하석주와는 상황이 다르다. 사실 마르코 반 바스텐과 같은 발롱도르를 3회나 탄 위대한 선수가 부상으로 은퇴 기로에 서 있던 94년 월드컵부터 백태클에 대한 규제는 있었다. 정확한 용어는 tackle behind로 실제 구글에서 검색해보면 마르코 반 바스텐과 함께 자동완성 될 정도. 이런 룰에 대한 충분한 숙지가 없었던 것도 문제였다. 해외 축구에 어두웠던 한국 언론에도 월드컵을 앞두고 몇 번씩 나오긴 했었으니 경기를 직접 뛰는 선수가 흥분해서 이 사실을 잊고 태클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선수 본인의 크나큰 문제였다.
프랑스 월드컵은 백태클에 대한 규정이 상당히 강화된 첫 대회였는데, 실제로 보면 태클이 들어갈 때 멕시코의 당시 미드필더였던 라몬 라미네스 선수가 하석주의 태클이 들어오는 타이밍에 슬쩍 뒤로 돌았기 때문에 고의성이 있었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다만 태클 자체는 거칠었기 때문에 충분히 카드는 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고, 실제로 차범근은 이를 두고 "옐로카드로 끝날 정도라 생각했는데 퇴장을 당해서 당황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하석주의 선취골이 나오기 전인 전반 20분 이미 이민성이 퇴장을 줘도 할 말없는 명백한 백태클을 경고 카드만 내밀며 다신 백태클을 하지 말라는 주의를 주었음에도 경각심을 갖지 못하고 같은 파울을 또다시 범한 점은 선수들로서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고 할 수 있다.
사족을 달자면 이 당시에 주심은 이후 유로 2000에서 포르투갈과 프랑스의 준결승에서도 논란의 명장면을 만들어 낼 정도로 쓸데없는 사명감에 새로 바뀐 규정을 1000% 그대로 대입하는 심판이었다. 향후 심판의 논란의 근거가 될 주관적인 기준을 줄이고자 객관적이고도 깐깐하진 세부 기준이 생기기 전까진 전적으로 주심 내키는 대로였는데, 경고까진 줄만 하지만 퇴장까진 아닌 상황에서 무작정 레드 카드 뽑아내는 기인이었다. 이 심판은 유로 2000에서 크로스를 필사적으로 저지한 포르투갈 수비수 사비에르의 핸드볼이 고의성을 육안으로 확인하기 애매했음에도 다이렉트 퇴장과 페널티킥 선언을 했다. 지단의 골든골 이후 항의하는 포르투갈의 선수들 전부에 경기가 끝났음에도 레드 카드를 남발했다.
하지만 차범근 감독의 선수 기용에도 의문점이 있었다. 예선에서 좋은 활약을 펼쳤으며 아시아 예선 득점왕이자 팀의 주축인 최용수를 내보내지 않았던 점,[11] 골대 윗그물에 맞는 위협적인 중거리슛을 날리며 펄펄 날아 다니던 고종수를 갑자기 교체한 점,[12] 경기 전 몸풀기에서 김태영이 찬 볼에 관자놀이를 정통으로 맞아 기절한 뒤 간신히 깨어나 제정신이 아니었던 이상윤을 풀타임으로 뛰게 한 점[13] 그리고 원톱으로 출전한 김도훈은 다리에 쥐가 나서 벤치 근처로 달려와서 침을 맞아 피를 빼고 들어가는 등 전반적으로 문제점을 드러냈다. 즉, 10 대 11로 불리한 경기를 하긴 했지만 퇴장만 아니었으면 문제가 없었다고 할만한 경기 운영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차범근호가 지역 예선에서 준수한 성적을 거둘 때는 칭찬하고 띄워주기에 바빴던 언론들은 본선 경기에서 패배하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비난 일색으로 돌아섰고 차범근은 국민영웅, '연구하는 감독 차붐'에서 하루 아침에 패장, '생각없는 감독'으로 비난받는 처지가 되었다. 경질 원인은 대한축구협회와의 불협화음과 감독으로서의 역량 부족 등이 거론되었는데, 이런저런 상황으로 미루어 볼 때 축구협회와의 불협화음이 문제가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실, 차범근의 언론 대응도 그다지 좋지 못했는데 1차전 패배의 원인으로 퇴장 판정 탓만 한 것. 특히 앞서 언급한 부인의 쉴드는 납득이 가는 면이 분명 있는 소리였으나, 되려 '자신의 잘못은 생각도 않고 남 탓만 하는 감독' 이미지를 키우며 역풍을 불러왔다. 조선일보 광수생각에서도 이 부분을 비난했다.
경기 후 비판의 도마에 오르며 여론의 십자포화를 맞은 (반쯤 마녀사냥에 가까웠다) 하석주는 경기 이후 두문불출하며 연락도 끊고 칩거 상태에 들어가게 되었다. 한국 축구 사상 최초로 월드컵 본선 선제골을 기록한 주인공으로서 구국의 영웅이 될 뻔했다가 2분만에 '''망국의 죄인이자 역적'''으로 급변한 충격과 후유증이 컸던 것으로도 알려졌다. 다음 경기인 네덜란드전에는 퇴장 페널티로 출전조차 하지 못했고.
멕시코의 콰우테모크 블랑코는 볼을 양다리 사이에 끼워 잡더니 펄쩍 개구리 점프를 하며 볼을 수비수 뒤로 던져넣는 돌파를 수차례 시전했다. 한국 수비는 그걸 못막고 번번히 뚫렸다. MBC 아나운서 송재익은 "아~ '''저 짓'''을 또하는군요!"라고 중계했다. 이 개구리 점프는 일명 '''쿠아테미나''', 피파온라인 게임에선 블랑코 바운스라고 부른다. 즉, 블랑코 특유의 기술인 것.
이후 한국과 멕시코는 2001년 컨페더레이션스컵에서 재격돌했는데, 한국은 이 경기에서 멕시코를 2:1로 이기며 월드컵에서의 패배를 설욕했다. 이 경기에서도 블랑코는 개구리 점프를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한국 선수들에게 공을 빼앗겼다. 이 때 홈팀인 한국 관중석에선 비웃음이 흘러나왔고, 당시 경기를 중계하던 해설진은 통쾌하다는 듯 '이제는 안 통하죠!' 라는 멘트를 던지기도 했다. 또한 2006년 일본에서 열린 FIFA 클럽 월드컵에서도 전북 현대와 멕시코의 클럽 아메리카와의 경기에서도 시도했지만 최진철의 수비에 막혔다. 이후 한국은 멕시코에 16년 동안 무패 행진을 이어갔으나 2014년 1월 평가전에서 0:4 대패를 당하며 이 기록이 깨졌다. 2018 러시아 월드컵 조추첨에서 한국과 멕시코가 편성됨으로서, 1998년 월드컵 이후 20년만에 다시 한번 월드컵에서 격돌하게 되었다. 결과는 멕시코의 2:1 승.
이경규가 간다 월드컵 특집 촬영차 이 경기를 직관한 이경규는 나중에 녹화본을 보았을 때, "내내 욕만 하고 있더라."는 이야기를 후에 털어놓기도 했다. 결국 방송에 나간 분량보다 방송에 못 나간 분량이 더 많다고.
한편, 같은 조에 속했던 네덜란드와 벨기에는 '''0:0 무승부'''를 기록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서 한국팀의 16강 진출은 더욱 어려워지게 되었다. 다음 경기에서도 패배한다면 무조건 탈락이 확정되기 때문이다. 벨기에의 심리전에 말려들어 득점없이 비긴 네덜란드는 선수들이 "한국전을 기다리는데 좀이 쑤신다.", "남은 한국전·멕시코전 반드시 승리하겠다"고 할만큼 독이 오를대로 오른 상태였다. 더구나 월드컵 출전국을 대상으로 한 평가전에서 5골을 넣는 가공한 득점력을 자주 보여주며 언제든 5골을 넣을 수 있음을 보여준 네덜란드의 다음 상대는 한국이었다.
4. 네덜란드전 (1998/06/20 21:00, 마르세유 스타드 벨로드롬): 0:5 패배
차범근호/네덜란드전 문서 참고.
5. 벨기에전 (1998/06/25 16:00, 파리 파르크 데 프랭스): 1:1 무승부
[image]
'''이것이야말로 축구! 이것이야말로 월드컵!''' - 이 경기를 중계한 일본 아나운서
- 시민
MBC 스포츠 하이라이트 영상.
김평석 코치가 감독 대행을 맡고 파리에서 열린 벨기에전은 후반전에 유상철이 동점 골을 넣으며 1:1 무승부로 끝났다. 그리고 차범근은 대한민국 월드컵 역사상 대회 도중 경질된 유일한 감독으로 흑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대부분 아무리 졸전을 해도, 월드컵이 다 끝난 이후 감독을 짜르거나 감독이 알아서 사임하곤 하기 때문이다. 대회 도중 해임한다고 얻을 것도 없고, 애초에 한국은 월드컵 1승도 못 해본 나라로써 축구 강국들과는 정서가 다른데, 마치 16강에 당연히 가는 나라가 탈락한 것처럼 한심한 조치를 취했던 것이다. 아마도 앞서 치른 네덜란드전에서의 0 : 5 대패로 인한 충격 때문에 경질시킨 것으로 추측되며, 이런 사례는 국제적으로도 드문 편. 차범근 이외의 경우들로는 동일 대회의 사우디아라비아 축구 국가대표팀의 감독이었던 카를루스 아우베르투 파헤이라, 튀니지 축구 국가대표팀의 감독이었던 헨리크 카스페르작 정도였다.
네덜란드전 대패로 조별예선 광탈이 확정된 데다가 감독까지 잘린 가운데 맞이하게 된 벨기에전에 대한 국민들의 기대는 그야말로 땅에 떨어져 있었다. 만약 여기서도 패한다면 전체 32개국 중 32위 즉, 꼴찌를 하게 되는 것은 물론, 8년 전 1990 FIFA 월드컵 이탈리아에서의 조별리그 3전 전패 광탈의 재림을 맞게 되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대표팀 선수들은 단 1승이라도 국민들에게 선사하고자 했다.[15]
벨기에 또한 최소 3골 차 이상으로 이겨야 하는 입장이었다. 이긴다 해도 2골 차 이하일 경우 멕시코가 네덜란드와 비기면 다득점에서 밀리는 상황. 그나마 다행이라면 멕시코전에서 경고도 없이 퇴장을 당했던 하석주가 1경기 출전 불가로 징계가 완화되어 벨기에전 출장이 가능해졌다는 것. FIFA에서 '''고의성이 없고 심판의 미숙함도 있다고 판단되어''' 완화된 것이다.
경기 당일 공개된 대표팀 포메이션은 최용수를 원톱으로, 서정원, 하석주, 김도근, 이민성, 최성용, 유상철이 미드필드를, 홍명보, 이상헌, 김태영이 수비를 담당하고 김병지가 골문을 지키는 3-6-1 포메이션으로, 노장 선수들이 많아 발이 느린 벨기에를 상대로 속공으로 선제골을 따내겠다는 한 마디로 닥공 모드였다.
이러한 배경 속에 벌어진 E조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는 그야말로 혈투라 불려도 손색없을 경기가 되었고, 이 경기의 결과는 1:1 무승부. 후에 이 경기는 1998 월드컵 최고의 명승부 중 하나로 꼽히기도 하며, 또한 대한민국 축구 명승부를 거론할 때 반드시 언급되는 경기가 되었다. 경기 내용은 한국 대표팀이 강팀을 만나면 늘 그랬듯, 먼저 골을 먹고 나중에 따라잡는 경기가 됐다. 전반 7분에 코너킥 혼전 상황에서 흘러나온 공이 당시 PSV 소속으로 뛰고 있던 닐리스의 강력한 슈팅으로 선취골을 내줬지만, 대표팀은 계속된 벨기에의 파상공세를 온몸을 던져 막아내면서[16] 간간이 역습 찬스를 만들어 나갔다. 당시 국가대표팀의 중앙 수비수 이임생은 고종수와 함께 후반전이 시작되기 전에 최성용과 김도근과 교체되어 후반전에 투입됐지만, 이마가 깨져 피가 나던 상황에도 교체 카드를 다 써서 붕대를 감고 다시 운동장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피가 철철 나는 와중에 빠른 투입을 위해 붕대를 빨리 감으라고 의료진을 재촉하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혀 이 경기의 감동은 점점 커지게 됐다. 이 붕대 임팩트의 감동이 꽤 컸기 때문인지, 이임생은 프랑스 월드컵을 마감한 후 나름 스타 반열에 오르기도 했다.[17]
또한 이날 경기에서는 수비수 이상헌의 활약도 눈부셨다.[18] 또 다른 선수들도 벨기에의 공격을 말 그대로 육탄방어하고, 이 중 김태영은 다리에 쥐가 났음에도 교체 선수가 없어 침을 맞고 다시 투입되어 뛰는 장면을 보이는 등 이 경기를 생중계로 보는 국민들에게 큰 감동과 울림을 주기에 충분한 경기였다.
벨기에에 끌려가던 후반 26분, 마침내 하석주가 중원 왼쪽에서 얻은 프리킥을 유상철이 골 에어리어 오른쪽에서 발을 대 득점했다. 이는 유상철의 월드컵 데뷔 골이다. 이후 전 대회 때의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처럼 나이 많은 선수들이 여러 명 있는 벨기에 팀이 후반 들어서 급속히 체력이 소진된 한계를 보였는데, 이 대회에서의 벨기에는 2차전 멕시코전에서도 2-0으로 여유 있게 이기다가 후반에 1명이 퇴장당한 데다 체력 저하를 드러내며 2골을 내주며 비긴 적이 있었다. 당시 벨기에 대표팀의 평균 연령은 29.2세였고, 한국과의 경기에서 주전 골키퍼의 부상으로 대신 나온 골키퍼의 나이는 무려 36세였고, 역시 같은 경기에서 교체로 투입 되어 뛰었던 주장의 나이는 무려 37세, 선발 출장한 수비수들 중에서도 34세, 35세의 선수들이었다. 1986년 멕시코 월드컵 때부터 대표팀에서 활약한, 당시에도 이미 노장 취급이었던 베테랑 엔조 시포는 당시 32세로 이들보다도 젊은 편에 속할 정도였다. 게다가 프랑스의 날씨는 유럽에서도 더운 편에 속해서 체력 저하가 더 심했다.
이렇게 경기의 주도권을 잡은 대표팀은 여러 차례 벨기에의 골문을 두들겼지만, 후반 29분 33초에 있었던 고종수의 왼발 드라이브 슛이 정말 한끗 차이로 크로스바를 넘어가고[19] 최용수가 문전에서 2차례[20][21] 나 크로스바 위로 넘어가는 헤딩슛을 날리며 안타깝게 찬스를 무산시켜 끝내 이기지 못하고 1:1 무승부를 기록하게 된다. 최용수의 골 결정력이 참 아쉬웠던 경기였는데, 후반 30분, 32분에 있었던 결정적인 헤딩 슛 두 개를 크로스바 위로 날려버리기도 했고, 후반 35분 15초에 중원에서 홍명보의 스루패스를 받아 단독 돌파로 골키퍼와 일대일로 맞서는 상황에서 골대 옆으로 빗나가는 왼발 슛을 날리며 찬스를 놓치기도 했다.[22]
여러모로 한국 입장에서는 참으로 처절한 경기였다. 열세의 전력으로도 3패 탈락 및 대회 최하위만큼은 반드시 면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그야말로 죽을 힘을 다해 열심히 뛰었다. 앞서 언급한 이임생의 붕대 투혼은 물론, 중앙 수비수였던 김태영도 무릎 부상 때문에 경기 중 수시로 그라운드에 드러누워 무릎을 감싸며 고통을 참아가며 뛰어야 했다. 그럼에도 교체 카드가 없는 상황에서 경기가 끝날 때까지 점프를 하며 공을 커트해내는 투혼을 보여주었다. 경기 막판에는 '''한 골'''이 절실한 벨기에 선수들이 전원 공격으로 슈팅을 무지막지하게 때렸는데 그때마다 한국 선수들이 그라운드에 온몸을 던지며 슛을 어떻게든 막아내는 장면이 압권이었다. 후반 종료를 앞둔 추가 시간 때는 벨기에 선수들이 이판사판으로 미들진까지 생략하고 모 아니면 도 식으로 골키퍼까지 공격에 가담하여 미친듯이 공세를 퍼부었고[23] , '''1승'''을 갈망하던 한국도 이에 질세라 공만 잡으면 벨기에 진영으로 돌진하는 그야말로 처절한 혈투를 양팀이 보여 주었다. 하지만 그대로 경기는 끝나고 말았다.
한국 선수들은 이길 수도 있었던 경기를 이기지 못하고 무승부로 그쳤다는 생각에 허탈감과 아쉬움을 금치 못하며 대성통곡을 했고, 벨기에 선수들도 이미 16강 탈락 확정에다 감독까지 경질된 한국을 만만히 보았다가 이기지도 못하고 3무로 동반 탈락되었다는 사실에 단체로 통곡해 동병상련을 겪었다. 그런데 이듬해에 있었던 친선 경기에서 마음에 앙금이 아직 남았는지 한국 선수들을 상대로 폭력을 휘둘렀다. 벨기에 축구의 레전드 엔조 시포는 벤치에 앉아 쓸쓸하게 자신의 국가대표 경력의 끝을 지켜봐야 했다. 당시 벨기에 감독 레겐은 경기 종료 휘슬 소리가 들리자마자 곧바로 라커룸으로 들어갔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경기를 뛰었던 홍명보와 마르크 빌모츠는 16년 뒤 각자 모국의 국대 감독으로 2014년 브라질 월드컵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 그리고 이번에는 벨기에가 이기며 빌모츠는 16년 전 무승부로 인한 탈락 설욕을 하고 자국을 8강까지 진출시킨 반면, 홍명보는 16년 전 차범근호와 같은 1무 2패를 거두며 국대 감독에서 물러나야 했다.
그러나 같은 1무 2패라고 해도 그 내용은 전혀 다르다. 차범근호는 2득점 9실점, 홍명보호는 3득점 6실점이다. 일단 기록으로만 보면 홍명보호의 기록이 더 좋아 보이지만... 경기 내용 면에서는 오히려 홍명보호가 더 나쁘다. 차범근은 멕시코, 네덜란드, 벨기에와 싸우다가 이렇게 된 거지만 홍명보는 러시아, 알제리, 벨기에와 싸우다 1무 2패를 한 것이다. 2014 벨기에가 1998 벨기에보다 강하긴 하지만 1998 네덜란드보다는 약하고 1998 멕시코, 벨기에가 2014 러시아, 알제리보다는 강력하다. 게다가 1998년 월드컵은 프랑스에서 열렸다. 사실상 홈 버프를 받은 국가가 두 팀이나 있었던 1998년에 비해 2014년 월드컵은 남미에서 열렸고, 러시아, 알제리, 벨기에 모두 원정 핸디캡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도 브라질 월드컵이 프랑스 월드컵보다 낫다는 말도 있는데, 그러면 만일 2014년에 러시아 및 알제리 대신 멕시코 및 네덜란드와 같은 조에 들어갔으면 어땠을까? 오초아의 미친 선방에 힘입어 브라질 안방에서 열린 브라질과의 경기에서 실점없이 무재배를 거둔 멕시코, 직전 월드컵 우승팀인 스페인을 5:1로 완전히 뭉개버린 네덜란드가 같은 조에 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게다가 1998 월드컵 조 편성은 2002 멤버들을 전부 다 불러와도 통과하기 힘든 수준이라는 게 중론이다.
멕시코전과 네덜란드전에서 대량 실점을 한 탓에 만약 이 경기에서도 패배를 했더라면 이 대회에서 3전 전패를 기록한 일본과 미국에도 골득실이 밀려 전체 꼴등을 찍을 뻔도 했으나, 다행히 유상철의 골로 무승부를 거두어 위기를 모면했다. 그리고 이 경기의 1실점까지 합쳐 총 9실점으로 똑같이 9실점을 기록한 나이지리아[24] , 자메이카[25] 와 함께 대회 실점 공동 1등을 기록하는 굴욕을 남기게 될 뻔했으나, 조별리그부터 실점을 착실히 쌓아 총 7실점으로 결승에 진출한 브라질이 프랑스한테 0:3으로 거하게 털리는 바람에 한 골 차이로 세 팀의 실점 공동 1등은 면했다. 더 자세한 내용을 보고 싶으면 이 곳을 참조. [26]
한편, 같은 조에 속했던 네덜란드와 멕시코는 2:2로 '''또다시 무승부'''를 기록하게 되었다. 결국 이 조에서는 '''한국 빼고 다 비겼는데''', 그 중에서 '''유일하게 한국을 이기지 못한 벨기에만 탈락'''했다. 하지만, 한국은 벨기에를 상대로 열세나 다름없는 전력으로도 충분히 선전한 것이었다. 2018 러시아 월드컵에서도 같은 조에 편성된 독일, 멕시코, 스웨덴도 한국과 무승부를 거두면 16강 탈락이라는 카더라가 도는 것도 1998 프랑스 월드컵의 영향이 매우 큰데, 당장 2010 남아공 월드컵과 2014 브라질 월드컵만 봐도 알 수 있다. 남아공 월드컵에서는 한국을 잡은 아르헨티나가 16강에 진출했으며 무승부를 기록한 나이지리아와 패배를 한 그리스는 16강에서 탈락했다. 그리고 브라질 월드컵은 한국을 이긴 알제리와 벨기에는 16강에 진출했지만, 무승부를 기록한 러시아는 결국 16강에서 탈락했다.[27]
아무튼 이로써 한국의 프랑스 월드컵 본선 최종 성적은 1무 2패.
[1] 일단 유럽과 우리나라의 시차 및 아주 발달하지 않은 방송 환경 등으로 해외 축구를 접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한준희가 해외 축구의 도사가 된 것 또한 우리나라에서 배운 게 아니라 유학을 하면서 전세계 모든 방송을 틀어주는 일본이나 미국에서 배운 것이다.[2] 당시에는 대륙별 안배로 시드를 배정했기 때문에 1시드 네덜란드, 2시드 벨기에, 3시드 대한민국, 4시드 멕시코 순이었다. 1시드팀은 2-3-4 시드 순으로 붙고, 4시드팀은 3-2-1 시드 순으로 붙고 2시드 팀은 1-4-3, 3시드 팀은 4-1-2 순으로 붙는데 결국 3시드였던 우리나라에게 중요한 1차전은 멕시코, 목숨 걸고 싸워야 하는 2차전은 네덜란드가 되었던 것이다. 또한 4시드로 배정된 멕시코는 한국, 벨기에를 먼저 만나고 같은 조 최강 네덜란드는 가장 마지막에 만나는 행운을 누렸다.[3] 다만 쓰지만 약이 된 월드컵이었다고 볼수 있다. 월드컵 이후 해외 축구를 보면서 선진축구를 배워야 한다는 인식이 퍼졌고, 그런 이유로 마르세유의 비극으로 느끼게 된 유럽이라는 벽, 그리고 그 유럽에서 열리는 미니 월드컵이라는 평가를 받던 유로 2000은 정말 놀랍게도 예선부터 주요 경기 대부분을 공중파에서 생중계하기도 했다. 또한 유럽대항전 뿐만 아닌 월드컵 스타들이 뛰는 해외 축구리그에 대한 관심들이 높아지기 시작한건 덤이고, 유럽 주요 리그 경기와 챔스 등이 공중파와 케이블 스포츠 채널에서 생중계되기 시작했다. [4] 다만, 이는 2002년 4강의 성과로 인해 눈이 터무니 없이 더 높아진 영향이 크다.[5] 물론 가능성은 거의 없었지만 이미 1패를 안은 상황에서 네덜란드에게 최소 비기지도 못한다면 탈락이 확정되는 절박한 상황이었기에 네덜란드를 상대로 어쩔 수 없이 반드시 무승부 이상을 목표로 임할 수 밖에 없었다.[6] 이 두 사람은 과거에도 그랬지만 현재에도 명선수는 명감독이 될 수 없다의 대표적인 반대 사례로 평가받을 정도로 감독으로서도 각각 서독 축구 국가대표팀과 FC 바르셀로나에게 큰 영광을 가져다 준 명장으로 기억된다. 두 사람의 대표적인 업적으로는 베켄바워는 1990 FIFA 월드컵 이탈리아에서 조국 서독에게 통산 세 번째 월드컵 우승을 안겨주었고, 크루이프는 1991-92시즌 유러피언컵에서 바르셀로나에게 구단 사상 첫 유러피언컵 우승을 안겨주었다.[7] 최근 대회에서는 본선 조별리그 첫 경기 하루 전까지는 부상자에 한해 예비 엔트리 내에서 얼마든지 교체가 가능했지만 당시에는 한 번 제출한 엔트리 변경은 불가능했다.[8] 2002년 월드컵에 엔트리에 못 들어서 많이들 의아해했지만 히딩크호 때도 포지션의 중복 등 전술에 맞지 않는다 하여 2001년 컨페더레이션컵 이전부터 대표팀에 뽑히지 못했다.[9] 동영상에 나온 멕시코 응원단이 염원했던 그대로 멕시코가 실제로 딱 3:1로 승리하였다. [10] 20년이 지난 후에도 유사한 장면이 나온다. 40초부터 #[11] 공식적인 이유는 연습 중에 당한 부상 때문이었다. 이후 최용수는 네덜란드전에서는 여론에 떠밀려 출전은 했지만 팀 전체 조직력이 붕괴된 속에 아무런 활약을 못했고, 마지막 벨기에전에서도 세 번의 결정적인 찬스를 날려먹는 등 매우 부진했다.[12] 이후 고종수와 차범근은 은근히 사이가 좋지 않은 듯한 모습을 자주 보였다. 대표적으로 차범근이 2004년 수원의 감독으로 오자 고종수는 방황하다가 수원을 떠났다.[13] 물론 이는 이상윤 본인의 책임도 있다. 경기를 빠졌어야 정상인 상황에서 월드컵 출전에 대한 미련 때문에 차마 팀 닥터에게 사실을 말하지 못하고 경기를 그냥 뛴 것. 이상윤 자신도 이를 매우 후회했다고 한다.[14] 1분 00초.[15] 이미 네덜란드전에서 0:5 라는 어마어마한 점수차로 패했기 때문에, 마지막 벨기에전에서 0:1 패배라도 당했을 경우 같은 3패를 당한 일본 및 미국보다도 골 득실차에서 완전히 밀리게 된다.[16] 사실 이 경기가 명 경기로 거론되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벨기에의 슛이 날아오면 한국은 그야말로 처절하게 온몸을 던지며 막아냈다.[17] 나중에는 K리그 소속 팀에서 이임생 캐릭터를 붕대 감은 모습으로 캐리커쳐를 만들어 홍보했다. 참고로 벨기에전은 이임생의 처음이자 마지막 월드컵 경기이기도 하다. 다만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에는 이임생 본인이 스스로 합류를 거부해서 결국 히딩크호의 최종 엔트리에 들지 않았다.[18] 이상헌은 당시 국가대표팀에서도 존재감이 상대적으로 작은 선수였는데, 반삭발을 한 강렬한 이미지와 투혼 넘치는 육탄 방어로 노지심이란 별명을 얻었다. 훗날 인터뷰에서 이상헌은 이 경기를 치르고 나서야 '그래도 비행기는 타고 귀국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고 밝혔다.[19] 위에 있는 MBC 스포츠 하이라이트 영상의 10분 9초에 나온다.[20] 각각 후반 30분 2초와 후반 32분 29초.[21] 위에 있는 MBC 스포츠 하이라이트 영상에서는 각각 10분 18초와 10분 52초에 나온다.[22] 최용수는 왼쪽에서 돌파하는 상황이었고 바로 오른쪽에 수비수가 붙어왔으며, 골키퍼는 이미 각을 좁히고 골문을 지키고 있었다. 단순히 일대일로 맞섰다고 하기엔 득점하기 쉽지는 않은 포지션이었지만 세계 정상급 공격수라면 충분히 득점이 가능한 찬스였다.[23] 이때까지는 아직 타구장에서 멕시코가 네덜란드에 지고 있어서, 벨기에는 한국을 이기기만 하면 16강이 가능했다. 멕시코의 동점골이 나온 건 이 경기 종료 직후이다.[24] 조별예선 스페인전 2실점, 파라과이 3실점, 덴마크 4실점.[25] 크로아티아전 3실점, 아르헨티나 5실점, 일본전 1실점.[26] 그 전까지는 카메룬과 호주가 9실점으로 대회 실점 공동 1등을 기록하고 있었는데, 브라질의 그 대패로 인해 두 골 차이로 두 팀의 실점 공동 1등을 면했으며, 이어 3위 결정전에서도 네덜란드한테 0:3으로 또다시 완패함으로써 최종적으로 5골 차이로 더 벌어져 버렸다.[27] 다만 실제 2018년 러시아 월드컵은 예상과 달리 '''독일이 한국한테 역사에 남을만한 삽질을 하는 바람에''' 조금 다른 상황이 되었다. 물론 여기도 한국을 이긴 스웨덴과 멕시코가 16강에 진출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