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코슬로바키아군/193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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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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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코슬로바키아군은 1938년 9월기준 가장 현대적이고 완비된 군대 중 하나였으며 매우 효율적인 조직과 지휘구조로 통제됐다. 1938년 5월부터 독일과 체코슬로바키아 사이의 주데텐란트 분쟁으로 인해 군대는 1938년 9월 이미 준비가 대부분 완료되었다.
체코슬로바키아군은 효율적인 고성능 무기를 대량으로 생산했고 소화기, 포병, 차량, 항공기의 경우 대부분을 국산으로 충당할 수 있었다. 주요 무기 제조업체는 Škoda Works社 (Škodovy zavody), ČKD社 (Českomoravska Kolben-Daněk), ČZ社 (Česka zbrojovka), ZB社 (Zbrojovka Brno)가 있었다.
2. 육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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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체코슬로바키아군은 17개 보병 사단, 171,000 명 규모였다. 사단의 평균규모는 빠듯하게 7,000명을 충족하는 수준이었다.[1] 하지만 5월의 위기로 체코슬로바키아군의 규모는 320,000 명으로 급증했으며 전체 총동원시 야전군은 43,474 명의 장교를 포함하여 972,747 명으로 구성되었다. 1938년 9월 23일 국가총동원 발령시 34개 보병사단, 4개 기병사단으로 구성된 1,280,000 명을 동원할 수 있었다. 1개 보병사단이 기계화되는 과정에 있었고 기병사단의 경우 프랑스의 그것과 같이 경기병과 전차여단 및 기갑여단이 기본적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4개의 저급 보병 사단을 국경요새지대에 광범위하게 배치하였다. 그들을 따라 미숙한 인원으로 구성된 138개의 대대[2] 도 같이 배치되었다. 138개의 대대는 14-15개의 보병 사단과 맞먹었다. 체코슬로바키아의 국가총동원은 단독으로 1,280,000 명의 훈련된 병사를 징집할 수 있었다. 이 숫자는 모든 예비군을 소집하지 않은 숫자인데 18살로 구성된 상비역(I. zaloha)과 특기병으로만 구성된 후비역(II. zaloha)만을 포함한 숫자로 무기의 수량이 부족했다.
2.1. 육군편제
2.1.1. 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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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9월 30일 체코슬로바키아 육군의 가용 가능한 총 사단은 46개 수준으로 21개 보병사단과 4개 기병사단이 4개 군구로 분할되어 있었고 4개 저급보병사단과 14-15개 사단과 맞멎는 규모의 국경·세관·철도경비임무를 수행하는 138개의 대대가 국경요새지대에 배치되어 있었다.
'''제1 군구 Havliček'''
지휘관 : Sergěj Vojcechovsky
참모장 : Ludvik Kašparek
사령부 : Kutna Ho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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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 군구의 주요 임무는 보헤미아 북부 전선을 방어하고, 최대한 독일군의 침공을 오래 저지한 후 남쪽으로 이동하여 수도 프라하와 플젠을 방어하는 것이었다. 9개 보병사단이 4개 군단으로 나뉘어 구성되었고 1개 예비 보병사단이 있었다.
'''제2 군구 Jirasek'''
지휘관 : Vojtěch Boris Luža
참모장 : F. Vejmelka
사령부 : Olomou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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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 군구의 주요 임무는 모라비아 북부 전선을 방어하고, 최대한 독일군의 침공을 오래 저지한 후 남쪽으로 이동하여 올로모우츠를 방어하는 것이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이지역의 대규모 국경 요새에 의존했지만 사단의 수는 크게 빈약했다. 3개의 보병사단이 2개의 군단으로 나뉘어 구성되었을 뿐이고 1개 예비 보병사단이 있었다.
'''제3 군구 Štefanik'''
지휘관 : Josef Votruba
참모장 : B. Kratochvil
사령부 : Kremn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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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 군구의 주요 임무는 슬로바키아를 방어하고 최대한 헝가리군의 침공을 오래 저지하는 것이었다. 제2 임무는 루마니아의 철도를 통해 수송되는 소비에트 연방의 지원군을 위해 동부 슬로바키아와 루테니아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4개의 보병 사단이 3개의 군단으로 나뉘어 구성되었고 2개 예비 보병사단과 1개 예비 기병사단이 있었다.
'''제4 군구 Neruda'''
지휘관 : Lev prchala
참모장 : A. Paral
사령부 : Br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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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 군구의 주요 임무는 모라비아를 방어하고 최대한 독일군의 침공을 오래 저지하는 것이었다. 4개 보병 사단과 2개 기병 사단이 3개의 군단으로 나뉘어 구성되었고 2개 예비 보병사단과 1개 예비 기병사단이 있었다.
'''중심 사령부 예비군 (Reserves of the Main Headquart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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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코슬로바키아 육군 최고 사령부 지휘하의 예비군으로 지휘관은 Ludvik Krejči 이었다. 9개 보병사단과 1개 기병사단으로 구성되었다.
2.1.2. 육군사단 조직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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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병사단'''
체코슬로바키아 육군 보병사단은 크게 3개 보병연대와 1개 포병연대, 1개 통신대대, 본부대 및 사단직할 기타부대로 나뉜다.
- 보병연대
보병연대는 3개 보병대대와 1개 예비보병대대, 직할보급중대, 직할공병중대, 직할화기중대로 구성된다.
- 보병대대
보병대대는 3개 보병중대와 대대직할 기관총중대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보병중대에는 12정의 경기관총이 배치되어있다.
기관총중대의 경우 12정의 중(重)기관총이 배치되어있다.
기관총중대의 경우 12정의 중(重)기관총이 배치되어있다.
- 공병중대
공병중대는 2개 공병(Pioneer)소대와 1개 신호(Signal)소대로 구성되어있다.
- 화기중대
화기중대는 12문의 37mm 대전차포와 12문의 81mm 박격포, 4정의 중(重)기관총을 갖추고 있다.
- 통신대대
통신대대는 1개 보급대대, 1개 유선통신중대, 1개 무선통신중대로 구성된다. 이 중 무선통신중대는 제한적인 차량화가 되어있다.
- 본부대
본부대는 1개 헌병소대와 1개 수송소대(Sfaff가 1개 유닛을 차지해서 4개인듯 싶다.) 1개 수색소대를 갖추고 있다.
이 중 헌병대와 수송대는 제한적인 차량화가 되어있다.
이 중 헌병대와 수송대는 제한적인 차량화가 되어있다.
- 사단직할 기타부대
이외에 1개 전차중대 및 1개 수색중대, 1개 공병중대, 1개 보급중대, 1개 차량화보병중대가 있다.
이중 보급중대는 제한적인 차량화가 이루어져 있다.
[image]이중 보급중대는 제한적인 차량화가 이루어져 있다.
'''기계화 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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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병 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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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병 사단 2'''
3. 공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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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프트바페에 비하면 작지만 체코슬로바키아 공군은 상당히 거대한 규모였다. 조종사들은 높은 수준의 훈련을 받은 엘리트였지만 현대식 전투기가 부족했고, 루프트바페의 항공기 수량은 절대적으로 우월했다.
루프트바페의 3,194대의 항공기중 2,850대가 녹색 작전을 위해 배치된 것에 비해, 955대의 체코슬로바키아 공군 항공기 중 880대 만이 작전수행이 가능했으며 이중 600-700대 사이의 항공기가 최전선에 배치되었고 520대가 작전수행이 가능했다. 이중 445대가 Avia B-534 전투기와 Bk-534 전투기로, B-534는 4문의 7.92mm 기관총을, Bk-534는 2문의 20mm Oerlikon 기관포를 장착했으며 최고속도 405km/h의 복엽전투기였다. 1935년 도입했으며 동시대의 연합왕국, 미합중국, 소비에트 연방보다 앞서 배치되었다. 1935년에 공개된 B-534는 성능에서 동시대 연합왕국, 미합중국, 소비에트 연방의 전투기들을 가뿐히 앞서는 뛰어난 전투기였다. 빠르고 기품있는 이 전투기는 1937년 취리히 에어쇼에서 독일의 메서슈미트 Bf109를 제외하면 따라올 전투기가 없었다. 하지만 다음 해인 1938 년 B-534는 한물간 기종으로 전락하게 된다.
체코슬로바키아 공군은 소비에트 연방에게 라이센스를 허가받아 Avia B-71 경폭격기를 60대 생산했다. 생산과정은 훌륭했으나 보수 및 유지 인력에 의해 실망스러워졌다. Avia B-71[3] 는 1930년대 중반 소련에서 생산된 가장 강력한 현대식 응력외피 구조의 폭격기였다. 60대의 항공기가 1938년 중반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운영될 수 있었다. 계획 및 생산과정에서 점점 정치상황이 위험해졌음에도 불구하고 확실하게 여유있는 과정을 거쳤다. 이 폭격기의 폭장량은 600kg에 불과하지만 최고속도 450km/h로 체코슬로바키아 공군의 전투기보다 빠른 속도로 비행할 수 있었다. 중폭격기로는 50대의 Bloch社 MB-200를 50대 보유했다. 이것의 최고속도는 285km/h에 불과하지만 폭장량이 1,200kg에 달했다.
3.1. 공군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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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코슬로바키아 공군은 국방부 제3과에 종속되었고 6개의 여단으로 구성되었다.[4] 그중에 세개1st, 2nd and 3rd는 Zemska velitelstvi letectva-ZVL[5] 로 영공방위를 담당하였고, 나머지 3개4th, 5th and 6th는 Velitelstvi letecke brigady-VLB[6] 로 독립공군여단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Vojenske letecke učiliště-VLU[7] 라는 독립훈련부대는 Prostějově에 위치했고 군사기술 및 항공기 연구소 겸 공군기술or훈련학교인[원문] Vojenskeho technickeho a leteckeho ustavu-VTLU[8] 는 Praha-Letňany외에도 세개의 공군 창고[원문] 에 위치했다.
'''III. 국방성 공군부서'''
수반 : Jaroslav Fajfr
'''III/1. 항공과'''
수반 : Alois Vicherek
프라하 위치
'''III/2. 방공과'''
수반 : Karel Hašek
'''III/3. 기술과'''
수반 : Jaroslav Kejla
'''III/4. 병참과[9] '''
수반 : Otakar Svitak
'''Bohemia Provincial Air Command'''
지휘관 : Karel Janoušek
사령부 : 프라하
'''제1 항공연대 (혼성) T. G. Masaryka'''[10]
지휘관 : Robert Ellner
부지휘관 : Jiři Dršata
주둔지 : 흐라테츠 크랄로베
제1/1 비행단 (지휘관 : Jan Kolař)
- 제1 정찰 비행대대 (흐라테츠 크랄로베 주둔, Letov Š-328 운용)
- 제61 폭격 비행대대 - Antonin Grossler (흐라테츠 크랄로베 주둔, Aero A-100 & Avia B-71 운용)
제2/1 비행단 (지휘관 : Jan Štrof)
- 제3 정찰 비행대대 - Vaclav Potěsky (밀로비체 주둔, Letov Š-328 운용)
- 제6 정찰 비행대대 (밀로비체 주둔, Letov Š-328 운용)
- 제66 폭격 비행대대 (밀로비체 주둔, Aero A-100 & Avia B-71 운용)
제3/1 비행단 (지휘관 : Vojtěch Michalec)
- 제31 전투 비행대대 - Miroslav Seidl (흐라테츠 크랄로베 주둔, Avia B-534 운용)
- 제32 전투 비행대대 - Evžen Čižek (흐라테츠 크랄로베 주둔, Avia B-534 운용)
- 제34 전투 비행대대 - Adolf Chmela (흐라테츠 크랄로베 주둔, Avia B-534 운용)
- 제2 정찰 비행대대 (타보르 주둔, Letov Š-328 운용)
- 제4 정찰 비행대대 - Jan Bilek (플젠 주둔, Letov Š-328 운용)
- 제11 정찰 비행대대 - Jan Červenka (프라하-19구 주둔, Letov Š-328 운용)
예비 비행단 (지휘관 : Josef Mezera)
- 예비 비행대대 (흐라테츠 크랄로베 주둔)
- 훈련 비행대대 (흐라테츠 크랄로베 주둔)
'''Moravia Provincial Air Command'''
지휘관 : Karel Plass
사령부 : 브르노
'''제2 항공연대 (혼성) Dr. E. Beneše'''[11]
지휘관 : Vladislav Květoň
부지휘관 : Jiři Hon
주둔지 : 올로모우츠
제1/2 비행단 (지휘관 : František Mikala)
- 제5 정찰 비행대대 (올로모우츠 주둔, Letov Š-328 운용)
- 제14 정찰 비행대대 - Alois Vašatko (올로모우츠 주둔, Š-328 운용)
- 제63 폭격 비행대대 - Vojtěch Skoba (프레쇼프 주둔, Aero A-100 & Avia B-71 운용)
제2/2 비행단
- 제7 정찰 비행대대 - Karel Lašek (비슈코브 주둔, Letov Š-328 운용)
- 제8 정찰 비행대대 - Ivan Haluzicky (비슈코브 주둔, Letov Š-328 운용)
- 제62 폭격 비행대대 (비슈코브 주둔, Aero A-100 & Avia B-71 운용)
제3/2 비행단 (지휘관 : Vaclav Liška)
- 제33 전투 비행대대 (Olomouc 주둔, Avia B-534 운용)
- 제35 전투 비행대대 - Josef Machaček (올로모우츠 주둔, Avia B-534 운용)
- 제36 전투 비행대대 - Karel Leypold (올로모우츠 주둔, Avia B-534 운용)
- 제51 전투 비행대대 Arnošt Kostohryz (올로모우츠 주둔, Avia B-534 운용)
예비 비행단 (지휘관 : František Kabelač)
- 예비 비행대대 (올로모우츠 주둔)
- 훈련 비행대대 (올로모우츠 주둔)
'''Slovakia Provincial Air Command'''
지휘관 : Jaroslav Skala
사령부 : 브라티슬라바
'''제3 항공연대 (혼성) Generala-letce M. R. Štefanika'''[12]
지휘관 : Gustav Studeny
부지휘관 : Karel Dymeš
주둔지 : 피에슈타니
기술개발 및 훈련 비행대대[원문] - Karel Holub (피에슈타니 주둔)
제1/3 비행단 (지휘관 : Vaclav Jiroušek)
- 제9 정찰 비행대대 - Otakar Sekyra (바이노리 주둔, Letov Š-328 운용)
- 제64 폭격 비행대대 - Augustin Blažek (바이노리 주둔, Aero A-100 운용)
제2/3 비행단 (지휘관 : Jan Drobny)
- 제12 정찰 비행대대 - Alois Zmatlo (스피시스키 노바 베스 주둔, Letov Š-328 운용)
- 제13 정찰 비행대대 - Robert Goldberger (스피시스키 노바 베스 주둔, Letov Š-328 운용)
- 제49 전투 비행대대 - Vaclav Kanta (스피시스키 노바 베스 주둔, Avia B-534 운용)
제3/3 비행단 (지휘관 : Vilem Kaschtofsky)
- 제37 전투 비행대대 - Alois Novotny (피에슈타니 주둔, Avia B-534 운용)
- 제38 전투 비행대대 - Velitel Vladimir Kačka (피에슈타니 주둔, Avia B-534 운용)
- 제39 전투 비행대대 - Ivan Novotny (피에슈타니 주둔, Avia B-534 운용)
- 제45 전투 비행대대 - Stanislav Fejfar (P피에슈타니 주둔, Avia B-534 운용)
제4/3 비행단 (지휘관 : Vojtěch Linet)
- 제10 정찰 비행대대 - Ladislav Bartoš (니트라 주둔, Letov Š-328 운용)
- 제15 정찰 비행대대 - Stanislav Pihert (질리나 주둔, Letov Š-328 운용)
- 제16 정찰 비행대대 - Otto Čižek (즈볼렌 주둔, Letov Š-328 운용)
예비 비행단 (지휘관 : František Kabelač)
- 예비 비행대대 - Josef Riegler (피에슈타니 주둔)
- 훈련 비행대대 - Otto Baier (피에슈타니 주둔)
''''Časlav' Command Aviation Brigade'''
지휘관 : Karel Prochazka
사령부 : 프라하
'''제4 항공연대 (전투)'''
지휘관 : Josef Berounsky
부지휘관 : Josef Heřmansky
주둔지 : 프라하-19구
제1/4 비행단 (지휘관 : Josef Hamšik)
- 제40 전투 비행대대 - Karel Sojček (프라하-19구 주둔, Avia B-534 운용)
- 제41 전투 비행대대 - Miloš Hajek (프라하-19구 주둔, Avia B-534 운용)
- 제42 전투 비행대대 - Jaroslav Svitek (프라하-19구 주둔, Avia B-534 운용)
제2/4 비행단 (지휘관 : Alois Snašel)
- 제43 전투 비행대대 - Alois Zmatlo (프라하-19구 주둔, Avia B-534 운용)
- 제44 전투 비행대대 - František Novak (프라하-19구 주둔, Avia B-534 운용)
- 제50 전투 비행대대 Jaroslav Polma (프라하-19구 주둔, Avia B-534 운용)
제3/4 비행단 (지휘관 : Alexander Hess)
- 제46 전투 비행대대 - Ladislav Bartoš (파두비체 주둔, Avia B-534 운용)
- 제47 전투 비행대대 - Jan Pernikař (파두비체 주둔, Avia B-534 운용)
- 제48 전투 비행대대 aroslav Bily (파두비체 주둔, Avia B-534 운용)
예비 비행단 (지휘관 : František Jan Čech)
- 예비 비행대대 - Vaclav Formanek (프라하-19구 주둔)
- 훈련 비행대대 - Dmitri Tjunikov (프라하-19구 주둔)
'''제5 항공연대 (폭격)'''
지휘관 : Vladimir Charousek
주둔지 : 브르노
기술개발 및 훈련 비행대대 - Dimitri Jarčevsky (브르노 주둔)
제1/5 비행단 (지휘관 :František Klepš)
- 제81 중폭격기 비행대대 - Vaclav Vondrak (브르노 주둔, Aero/Bloch MB-200 & Avia/Fokker F-IX 운용)
- 제82 중폭격기 비행대대 - Otto Lazar (브르노 주둔, Aero/Bloch MB-200 & Avia/Fokker F-IX 운용)
제2/5 비행단 (지휘관 : Vladimir Lansky)
- 제83 중폭격기 비행대대 - Kurt Hošek (브르노 주둔, Aero/Bloch MB-200 & Avia/Fokker F-IX 운용)
- 제84 중폭격기 비행대대 - František Nožin (브르노 주둔, Aero/Bloch MB-200 & Avia/Fokker F-IX 운용)
제3/5 비행단 (지휘관 : Karel Muller)
- 제75 경폭격기 비행대대 - Vladimir Pala (니트라 주둔, Aero Ab-101 운용)
- 제76 경폭격기 비행대대 - Miroslav Prochazka (브르노 주둔, Aero Ab-101 운용)
- 제77 경폭격기 비행대대 - Karel Doczy (브르노 주둔, Aero Ab-101 운용)
예비 비행단 (지휘관 : Rudolf Vaniček)
- 예비 비행대대 - Jan Jahoda (브르노 주둔)
- 훈련 비행대대 - Felix Mareš (브르노 주둔)
'''제6 항공연대 (폭격)'''
지휘관 : Vilem Stanovsky
부지휘관 : Jaroslav Borecky
주둔지 : 프라하-19구
기술개발 및 훈련 비행대대 - Antonin Suda (프라하-19구 주둔)
제1/6 비행단 (지휘관 : Ludvik Budin)
- 제71 경폭격기 비행대대 - Filip Doležal (프라하-19구 주둔, Avia B-71 운용)
- 제72 경폭격기 비행대대 - Emil Bušina (프라하-19구 주둔, Avia B-71 & Aero Ab-101 운용)
제2/6 비행단 (지휘관 : Jaroslav Neubauer)
- 제73 경폭격기 비행대대 - Ota Grof (흐라테츠 크랄로베 주둔, Aero Ab-101 & Avia B-71 운용)
- 제74 경폭격기 비행대대 - Vaclav Nechutny (흐라테츠 크랄로베 주둔, Aero Ab-101 & Avia B-71 운용)
제3/6 비행단 (지휘관 : Vladimir Nosek)
- 제85 중폭격기 비행대대 - Mikulaš Petrov (프라하-19구 주둔, Aero/Bloch MB-200 운용)
- 제86 중폭격기 비행대대 - Vaclav Fuksa (프라하-19구 주둔, Aero/Bloch MB-200 운용)
예비 비행단 (지휘관 : Karel Fulin)
- 예비 비행대대 - František Prokop (프라하-19구 주둔)
- 훈련 비행대대 - Bedřich Stary (피에슈타니 주둔)
'''Military Air School'''
지휘관 : Bedřich Stary
프로스테요프 위치
제1 공군 훈련처 (지휘관 : František Diviš)
- 공군사관학도 상급생 학교
- 제1 비행학교
- 제2 비행학교
제2 공군 훈련처 (지휘관 : Vojtěch Kopecky)
- 공군예비장교 학교
- 공군사관학교
- 공군장교를 위한 응용 학교[원문]
II. 항공 부서 (지휘관 : Karel Buchaček)
- 군사 기술 및 항공 연구소 (프라하-9구 위치)
- II/1 부서 - Karel Mraz
- II/2 부서 - Gustav Benesch
- II/3 부서 - Jan Žvaček [13]
(군사 기술 및 항공 연구소 산하) 항공 시험 부서[원문] (지휘관 : Karel Mareš)
- 프라하 중앙 공군 보급창 (지휘관 : Jan Pauliček)
- Praha-Kbely 제1 공군 보급창 (지휘관 : Julius Philipp)
- Olomouc 및 Prostějov 제2 공군 보급창 (지휘관 : Jan Urban)
- Nitra 제3 공군 보급창 (지휘관 : Jaroslav Jirout)
- 사진정찰부대[원문] (지휘관 : Karel Šifner, Malacky-Novy Dvor 주둔)
- radioelectric 비행센터[원문] (지휘관 : Karel Nedoma)
4. 선방어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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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헤미아-모라비아에 대해서 독일은 불리한 전략적 위치에 있었다. 그때문에 체코슬로바키아는 방어 전략을 유지할 수 있었고 그들은 프랑스의 마지노 선과 일치하는 요새 시스템을 구축하기위해 노력했다. 의심할 여지없이 그들은 최전선 지역에서 침공을 저지하고 싶어했다. 체코 무기 산업의 중심인 플젠을 중심으로, 프라하와 브르노 사이에서 적군의 진격을 저지할 수 있는 방어전략이 필요했다.
체코와 독일 국경 사이의 요새건설은 1932년 체코슬로바키아 의회에서 결정하고, 1935년부터 건축이 시작되었다. 요새는 10년-15년 사이에 건축을 끝낼 수 있었다.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체코슬로바키아 또한 국경요새 건설에 국방예산에 큰 부분을 할양했다. 1938년까지 요새 건축비로 25억 체코 코루나가 투입된 것으로 계산된다. 그러나 이 비용은 프랑스가 마지노 선 건축에 투입했던 비용의 10분의 1수준에 불과했다. 체코슬로바키아 국경 요새와 마지노 선의 범위, 깊이와 기술 장비 등은 비교할 수가 없었다. 요새 배치에 대해서 체코슬로바키아 작전참모들은 기동전(*원문 mobile operational) 교리를 포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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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5월 20일, 체코슬로바키아 국경선 요새화의 책임자로 카렐 후사렉 장군이 임명되었다. 프랑스 전문가들의 깊은 관여로 국경선 요새화의 기본 개념은 프랑스 마지노 선의 상당 부분을 닮게 되었는데, 그 구조는 주요 국경지대에 걸쳐있는 중무장형식의 요새(Heavy Object)와 경무장형식의 요새(Light Objects)로 통칭되는 Vz.36[14] , 보다 더 현대적인 Vz.37[15] 등 몇차례에 걸친 다중 방어망이었다. 중무장형식의 요새는 대포와 수기의 기관총을 갖추고 900명의 병사가 주둔하는 형태였고 박격포와 대전차포를 제외하고도 3,000문의 야포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요새화 계획이 최전방에 모두 적용된 것은 아닌데, 짙은 수풀림이 이를 방해했기 때문이다. 추가로 수도인 프라하를 지키기 위한 방어선과 플젠의 서부와 북서부 지역을 가로지르는 방어선 또한 건설되었다.
중무장요새의 건축에는 1년의 입안과정과 3~4년의 건축과정이 필요했고 1938년 가을 당시에는 20%만이 완성되었을 뿐이다. 경무장요새의 경우는 70%가 완성되었다. 계획은 1,300개의 중무장 요새와 16,000개의 경무장요새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요새들은 체코슬로바키아의 독일, 헝가리, 폴란드 국경지대에 건설되었다. 1935년부터 1938년까지 9개의 포병요새, 265개의 보병포대, 9,500개의 사격진지가 건설이 완료되고 무장상태에 있었다. 7개의 중무장 요새가 오스트리아에 대해서 남 모라비아에[16] , 11개가 슬로바키아에, 나머지 전체는 북 모라비아, 보헤미아에 건설되었다. 1,852개의 사격진지는 북 보헤미아에, 1,000개는 남 보헤미아에, 1,852개는 북 보헤미아에, 1,492개는 슬로바키아에 건설되었다.
이후, OKH[17] 는 크워츠코 전면에 위치한 무장요새에 비해 오데르 산지와 오파바 남서부 사이의 그것이 더 미약함을 알아냈다. 나호트와 리젠 산맥 양쪽의 요새만이 완성되어 있었고 실레지아 전선의 나머지 구역들도 방어하기 충분할만큼 완성되지 않았다. 예세니키 산맥과 리젠 산맥 사이에도 취약한 점이 있었다. 요새는 작센 전면-동엘베강 사이로 확장되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서쪽강에는 세곳의 요새가 위치해 있었다. 약 2km 수준의 요새선이 두개가 존재하는 것으로 추정되었다. 다만 대전차요새는 존재하지 않았다. 바이에른 근처에는 중기관총으로 무장한 어마어마한 요새가 존재하고 있었다. 이곳 또한 대전차병기는 없었다.
즐라타 코루나 요새에는 단지 극소수의 포병 및 전차 배치 거점만 존재하고 있었다. 전선의 요새화 빈도는 낮았으며 그 길이는 300미터를 넘지 못했다. 미리 선정된 전선만이 6킬로미터 수준을 유지했다. 오스트리아 국경선 전선요새와는 반대로 몇몇 시설은 미완성이었는데 이는 시간이 부족해서였다. 일부는 공사 초기 단계에 지나지 않았으며 극소수 완성된 벙커들은 콘크리트 구조물만 건설되어 있었으며 무장배치가 되지 않았다.
5. 인종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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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코슬로바키아군은 잘 훈련된 정예군대였지만 몇가지 심각한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 중 하나는 다민족국가인 체코슬로바키아의 인종구조였다. 체코인들이 중앙정부와 국가기관의 대부분의 관직을 차지하였기 때문에 체코슬로바키아는 항상 인종 간의 갈등이 있었다. 1938년 체코슬로바키아의 인구는 대략 1480만명이었다. 이중 700만명이 체코인이었고, 군에서는 단 52%만이 체코인일 뿐이었다. 22%는 독일인, 15%는 슬로바키아인, 5%는 헝가리인이었다.
체코슬로바키아에서 가장 심각한 인종 문제는 주데텐란트 독일인 문제였다.[18] 체코슬로바키아군에서 12,600명의 주데텐란트 독일인이 복무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프라하의 체코슬로바키아 정부에게 억압을 받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에 독일을 해방자로 간주, 독일과의 전쟁에서 독일에 협조할 가능성이 있었다.[19]
또다른 문제는 체코와 슬로바키아 사이에서 발생했다. 체코인의 정치적 지배로 인해 육군장교의 대부분이 체코인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주요 산업시설이 모두 체코에 위치하여 체코의 산업 독점, 군의 핵심기술 독점이 야기되었다. 오-헝 제국 공군, 기갑, 포병병과에서 1915년 슬로바키아인 장교비중은 2%에 불과했으나 체코인 장교 비중은 상당했기 때문에 이러한 불균형은 부분적으로 계승되었다. 1918년 독립후 상황은 조금 바뀌었으나 여전히 군대 내부에서 슬로바키아인의 비중의 증가율은 낮은 편이었다. 1938년 체코슬로바키아군의 슬로바키아인 '준위' 비중만 해도 4.9%(395명)에 불과했다. 이것은 상당히 심각한 상황이었고 계급이 올라갈수록 상황은 더 악화되어 전체적으로 슬로바키아인 장교비중은 3.4%(435명)에 불과했고 참모장교중 슬로바키아인 비중은 1.1%(3명)에 불과했다. 139명의 대장중 슬로바키아인은 한명에 불과했다. (Div. Gen. Rudolf Viest)
저조한 발전이긴 하지만 긍정적으로 본다면 이것은 1918년 이후 슬로바키아의 약진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겠다. 하지만 슬로바키아인들은 1938년 4개의 사단을 구성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지휘하는데 필요한 장교와 부사관을 간신히 제공할 수준이었다. 슬로바키아 상류층의 부재, 슬로바키아 중산층의 저조한 성장이 체코슬로바키아군의 슬로바키아인의 비중이 심각할 정도로 미미한 것을 입증할 정당성을 제공한다.
슬로바키아인 문제는 예비군 분야에서도 명확했다. 체코슬로바키아 예비장교의 가장 큰 공급원은 학교교사인데, 슬로바키아인 교사 또한 그 수가 크게 이미 부족하였기 때문에 학생장교를 육성하는 것에 대해 큰 지장이 있었다. 체코슬로바키아군에게 슬로바키아가 기여한 것들 중 가장 독특한 특징은 모든 산악병사단이 슬로바키아에서 구성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슬로바키아가 카르파티아 산맥을 끼고 있는 산악국가이기 때문이다.
6. 소련과의 동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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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에트 연방은 1935년 상호방위·원조조약 이래 줄곧 체코슬로바키아의 동맹국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5월의 위기 동안 이미 그들 스스로 태도에 대해서 아주 신중한 모습을 보여줬다. 주데텐란트 위기 이후 그들의 역할은 수많은 논쟁적 가설을 만들게 되었다. 영국인 역사학자 휠러 베닛[20] 은 소비에트 연방이 체코슬로바키아 정부에 대해 자신의 의무를 충분히 알고 있었다고 확신했다. 허나 Haslam에 따르면 [21] 소비에트 연방, 서구 열강, ČSR, 히틀러 사이의 참모회담이 호전성을 저하시켰기 때문에[22] 소비에트 연방이 적극적으로 개입할 필요성이 없어졌다고 한다.
소비에트 연방은 부유한 국가가 아니였다. 그들이 세계 혁명을 주장하는 트로츠키주의에서 일국사회주의를 주장하는 스탈린주의로 전환했을때, 최종 목적은 명확했다. 1925년에 스탈린은 힘을 충분히 기를 때까지 소비에트 연방이 어떠한 분쟁에도 간섭하지 않겠다는 소비에트 연방의 외교정책을 선포했다. 이러한 정책은 13년 후 주데텐란트 위기까지 변하지 않았다.
5개년 계획이 시작된후 부터 붉은 군대의 장비 수량은 두드러지게 증가하였다. 1930년에 750대의 경전차가 생산된것에 비해, 1937년에는 경전차는 물론 중中전차와 중重전차를 포함해 3,139대가 생산되었다. 1937년말에는 소비에트 연방은 12,500대의 전차를 보유했다. 붉은 군대의 평시전력은 98개 보병사단과 30개 기갑사단으로 구성된 10,157,000 명 수준이었다.
소비에트 연방은 프랑스와 체코슬로바키아와의 동맹이 매우 유용했는데,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예측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독일과 소비에트 연방의 대립을 초래했다. 프랑스와 체코슬로바키아는 독일과 국경을 맞대고 있기 때문에 이런 상황에서 직접적인 군사적 도움이 되었다. 그래서 프랑스와 소비에트 연방의 조약은 소비에트 연방을 독일이 공격했을 경우 이익을 볼 수 있는 도구였다. 독일의 체코슬로바키아 공격의 경우에서는, 동맹국 소비에트 연방이 체코슬로바키아 측으로 개입할 수 있도록 조약을 체결하려고 했다.
흔히 있는 분쟁에 소비에트 연방이 개입할 때 봉착하는 최대의 문제는 폴란드를 가로지르는 행군이었다. 이 문제는 1934년 모스크바에서 프랑스와 소비에트 연방의 관계자들이 협정 준비기간중에 토의된 바가 있었으나 해법은 찾지를 못했다. 소비에트 연방은 폴란드가 역사적인 이유 때문에 붉은군대가 폴란드 국토를 통과할 것을 절대 허락하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다. 폴란드는 소비에트 연방이 1921년에 잃게 된 영토를 소비에트 연방이 재점령할 것이라고 가정하고 있었고, 특히 독일의 1936년 라인란트 재무장과 주데텐란트 위기 직후 특히 그렇게 보고 있었다.
폴란드가 군사통행권을 주지 않을 것이 예상되자 루마니아 영토를 통과하는 것만이 소비에트 연방의 유일한 선택권이었다. 그러나 소비에트 연방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루마니아의 영유권이 인정된 베사라비아와 부코비나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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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루마니아 외무 장관 니콜라에 티툴레스쿠는 1936년에 붉은 군대의 통행권에 대한 조약을 소비에트 연방과 채결하지만 부코비나 지역만을 통과할 수 있도록 제한하였다. 그는 소비에트 연방이 비상시에 루마니아 영토를 통과하는 것에 대해 루마니아와 소비에트 연방의 영토 분쟁에 대한 이해관계를 고려하였다. 영토 분쟁에 대한 양보를 전혀 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을 위한 요건은 좋지 못했다. 소비에트 연방에서 체코슬로바키아로 가는 철도노선은 부코비나에는 단 한개의 노선밖에 없었으며, 이것은 독일이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할때 방어하기 위해 필요한 병력을 충분하게 수송하는데에는 역부족이었다.
루마니아가 소비에트 연방과 루마니아가 광범위하게 국경을 접하고 있는 베사라비아에 붉은 군대가 진입하는것을 거부하자 루마니아 영토에 붉은 군대가 진입하는 것에 대한 가치가 크게 감소하였다. 1938년 9월 24일, 제네바에서 루마니아의 외무 장관 니콜라 페트레스쿠-콤멘은 소비에트 연방의 외무부 인민위원 막심 리트비노프와 공식적인 논의를 위해 만났다. 리트비노프는 100,000 명의 붉은 군대와 750문의 야포, 350대의 전차가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전쟁 발발후 6일 이내에 루마니아를 통해 그곳으로 수송될 준비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루마니아는 10월 24일 이것이 가능한 것임을 확인시켰다.
루마니아는 폴란드 국경에서 25km 떨어진 곳에서 운영되는 소비에트 연방의 항공기가 자국 영토의 3,500 - 4,000m 고도에서 비행할 수 있음을 공표했다. 그러나 소비에트 연방은 국제연맹에게 알려진 그들의 계획을 언급하면서 루마니아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하였다.
소비에트 연방에 따르면, 그들은 250,000명에서 300,000명에 이르는 병력을 항공기와 육로를 통해 체코슬로바키아로 수송할 수 있었다. 심지어 만약 9월 25일 오후 6시부터 수송할 수 있었다면 10월 6일에 이를때까지 301,196명의 병사와 32,271개의 기관총이 항공기를 통해, 추가적으로 7만명의 병력을 철도를 통해 수송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수송 병참 준비 상태를 고려하지 않은 것 이기에 상당히 과장한 것으로 추측되었다.
체코슬로바키아를 지원하는 소비에트 연방의 또다른 방법은 항공전력을 이용한 지원이었다. 독일의 프로파간다는 프랑스-소비에트 연방 상호 원조조약[23] 채결 이후로 소비에트 연방이 체코슬로바키아로 항공운송을 하는 것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완전히 공상적인 수치는 비단 선전장관 요제프 괴벨스의 공식 프로파간다에만 적용된 것이 아니라 외교채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체코슬로바키아내에 소비에트 항공기를 위해 특별히 배정된 공군기지는 없었지만, 1938년 9월까지 소비에트 항공기의 수는 100기가 넘었다.
그러나 위기의 9월, 소비에트 연방은 체코슬로바키아 내 주둔군을 증강하기 시작했다. 1938년 9월 9일에는 650기의 소비에트 항공기가 체코슬로바키아에 주둔해 있었고 또다른 300기의 항공기가 추가로 요청되었다. 이것은 체코슬로바키아에 주둔하는 소비에트 항공기의 수가 실제로는 650대이기 보다 550대수준일 가능성이 높았고 (체코 측 자료에 의하면) 오히려 650대 이상일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소비에트는 베네시 대통령에게 체코슬로바키아가 독일과 충돌할 경우를 대비하여 추가적인 항공기를 지원배치 해주겠다는 약속을 하였다. 이것은 체코슬로바키아와 독일간의 전쟁이 발발할 경우 소비에트 연방이 자원봉사적으로 체코슬로바키아가 독일에게 점령당하게 하지 않기 위하여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루프트바페에 대한) 요격임무를 수행했을 거라고 예상할 수 있게 한다.
독일과 오스트리아 사이의 강제합병이 있고 5일이 지난 1938년 3월 17일, 소비에트 연방의 외무부 인민위원 막심 리트비노프는 소비에트 연방이 체코슬로바키아에 대한 의무를 완전하게 다하겠지만 프랑스도 똑같이 의무를 다할 경우에만 그렇게 할 것이라고 명시했다. 그리고 결정적인 최종 국면에서, 소비에트 연방은 프랑스가 약속을 이행하지 않는다면 이 문제를 국제 연맹에 제소하고, 그 결정을 따를 것이라고 했다.
베네시 대통령이 이 과정이 너무 오래 걸릴 것이라고 불평하자, 소비에트 연방 주체코슬로바키아 대사 알렉산드롭스키[24] 는 체코슬로바키아가 제네바의 국제연맹에 청원하는 것으로 소비에트 연방의 지원을 충분히 보장받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고, 베네시 대통령은 유일한 동맹국 소비에트 연방과 함께 전쟁에 돌입하는 것에 대해 반대했다. 그가 소비에트 연방과 연합하여 독일과 전쟁하는 것을 분석한 바 그 경우 체코슬로바키아는 소비에트의 위성국으로 여겨질 것이었고, 거기에 국내의 농민당과 그밖에 보수세력들같은 국내의 문제가 있었으며, 대외적으로는 서구의 자본주의 세력과 함께하는 폴란드, 헝가리에서는 나치 독일과 같은 편에서 소비에트 연방에 대항하는 필사전에 나설 것이었다.
소비에트 연방의 군사준비는 6월 26일 최고 군사 위원회에 의해 결정되어 9월 1일부로 특별 군관구로서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 서부의 두 군관구에서만 이루어졌다. 우크라이나 군관구에서 2개 야전군이 전개했다. 카메네츠 포돌스키와 비니차에 제4 기병군단과 제25 기계화군단이 전개했다. 제2구인 키예프, 체르니코프, 쉬토미르에는 제2 기병 군단과 제15, 제18 군단이 전개했다. 하지만 다른 소비에트 연방의 자료에서는 민스크 구역에도 다른 붉은 군대 병력들이 전개했다고 언급하고 있다.
7.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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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당시 체코슬로바키아군은 중부유럽에서 독일군 다음으로 가장 강력한 군대였다. 중부유럽의 2인자였던 북쪽의 폴란드군과 비교해보면 체코슬로바키아 육군과 폴란드 육군의 규모는 거의 비슷했으나 질적으로 체코슬로바키아가 압도적이었고 '''폴란드 공군의 전력은 체코슬로바키아 공군의 30% 수준에도 못미칠 정도였다.''' 총기의 경우 Vz.26, ZH-29, ZK-383을 비롯한 여러 총기들은 독일군의 총기와 동등하거나 약간 우월한 성능을 가질 정도였으며 전차의 경우는 독일군의 전차를 능가했다. 독일과의 국경지대에는 상당히 발달한 국경요새도 있었다. 프랑스 영국 소비에트 연방과 방위조약을 맺어 전시에는 독일을 쌍방향에서 압박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체코슬로바키아군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독일과의 국경지대에는 상당히 요새화가 진척되었으나 오스트리아와의 국경지대에는 그 수준이 미약했고, 슬로바키아 지역에 주둔하는 군구의 사단수가 부족해 이곳을 장악당한다면 소비에트 연방의 지원은 꿈도 꿀 수 없는 상황이 됐을 것이다. 군대 내부에는 12,000명의 주데텐란트 독일인이 근무하고 있어 전시에 큰 내부의 위협이 될 수 있었고 공군은 강력했으나 루프트바페에는 훨씬 못 미쳤다.
믿음직한 동맹인줄 알았던 영국 프랑스는 독일의 프로파간다에 선동당해 독일에게 유화정책을 펼쳤고 가장 강력한 동맹관계를 맺었던 소비에트 연방조차도 프랑스가 참전할 경우에만 개입하겠다고 밝혔으며 단독적으로 개입한다고 해도 체코 내부의 소련의 영향력이 막강해져 소련의 위성국으로 전락할 수 있던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체코슬로바키아와 독일 사이에 전쟁이 발발한다면 체코슬로바키아는 독일에게 큰 피해를 줄 수 있었을 것이다. 자세한 사항은 녹색 작전 문서를 참고하라.
7.1. IF 시나리오 : 녹색 작전이 전개되었다면? (독일 vs 체코슬로바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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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체코슬로바키아군 병기
8.1. 육군 병기
8.2. 개인 화기
8.3. 항공 장비
[1] 공군 및 기타 육군부대 복무 10,000 명 제외[2] 국경 수비대 전력으로 세관 경비, 철도 경비 등 수행[3] 소련명 Tupolev SB-2[4] 'Third Department'를 국방부 제3과로 번역.(국방부 내의 차관이나 실장의 직위를 가진 사람에게 담당하게 한것)[5] Provincial Air Command[6] Command Aviation Brigade[7] Military Air School[원문] A B C D E F G 'radioelectric Flight Centre'[8] Institute for military technology and aviation[9] 원문 'III/4. oddělení – zbroj' 중 zbroj는 'technická zbrojní a hospodářská služba letectva československé armády'의 약자로 'Technical Ordnance Service of Aviation'를 뜻함[10] 체코의 정치인, 철학자[11] 체코의 정치인[12] 슬로바키아의 정치인[13] 위에서 언급한 3개 지부를 의미[14] 프랑스형[15] 철조망, 체코 고슴도치, 대전차 참호, 자연 장애물등 장애물 시스템 포함[16] 오스트리아는 중립이었지만 만약의 경우를 고려한 것이다. 1938년의 안슐루스를 고려하면 적절한 선택이 아닐 수 없다.[17] 독일 육군 총사령부[18] 당시 체코슬로바키아 정부는 독일인들의 분리독립을 막기 위해 독일인의 공무원 채용을 금하고 있었다.[19] 위 사진은 뮌헨 협정 이후 주데텐란트에 독일군이 진군하자 독일군에게 나치식 경례를 하는 주데텐란트 독일인들이다.[20] sir John Wheeler Wheeler-Bennett (1902–1975), GCVO, CMG, OBE, FBA, FRSL was a conservative English historian of German and diplomatic history, and the official biographer of King George VI.[21] Jonathan Haslam - The Soviet Union and the Czechoslovakian Crisis of 1938[22] 뮌헨 회담은 아닌것 같고, 국제회의 정도로 보는건 무리인것 같다. 그냥 그대로 해석하는게 나을것 같다(유럽사에는 이름없는 조약들이 많다).[23] 프랑스-소련 상호원조 조약은 중부유럽에서의 위험을 줄이기 위해서 1935년 양국이 나치 독일을 포위할 목적으로 체결한 상호조약이다.[24] ttp://www.academicroom.com/article/soviet-commissariat-foreign-affairs-and-czechoslovakian-crisis-1938-new-material-soviet-archiv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