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인식
1. 명칭
미국을 비롯한 해외에서 부르는 'Korean War'의 번역된 명칭인 '''한국 전쟁''' 역시 국내에서 널리 사용된다. 위키백과에서는 이 명칭을 쓰고 있다. 한국 전쟁이란 명칭을 사용하는 데에는 대한민국(ROK) 역사상 본토에서 치른 사실상 유일한 전쟁이라는 점, (표면적으로는) 두 'Korea' 간의 전쟁이었다는 점,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학술적 명칭이라는 점 등의 이유가 존재한다. 반대측에서는 자국에서 일어난 전쟁을 외국식으로 불러야 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반박한다. 그러나 현재 학술적으로는 '한국 전쟁' 이라는 표현이 "6.25 전쟁"보다 상대적으로 많이 쓰이는 것으로 보인다.
6.25 전쟁은 한국 전쟁 발발일을 강조하여 북한의 남침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이라는 시각도 존재한다. 서방에서는 가끔씩 Korean war말고도 The forgotten war(잊힌 전쟁)이라고도 불린다. 2차 세계대전 이후 현재까지 가장 많은 미군 사상자가 난 전쟁인데도 불구하고, 베트남 전쟁과 이라크 전쟁에 묻혀 그리 알려진 전쟁이 아니기 때문. 물론 단순히 이런 이유만 있는 것은 아니다.
6.25 사변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사변'은 선전포고 없이 다른 나라를 공격하는 것이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육이오 전쟁'과 '한국 전쟁'으로 올라와 있다. 옛날에는 남북전쟁이라고 불리기도 했지만 단어 자체가 1860년대 미국의 내전을 지칭하는 단어로 인식되는 경향이 강해서인지 요즘은 잘 안 쓰이는 추세.
북한에서는 '''조국해방전쟁'''이라 부른다. 그들의 사관에서는 미국과 '남조선 괴뢰'의 '북침'을 막고 인민군이 오히려 남부를 역습해 미제의 압제에 고통받는 남조선 인민을 해방시켰다고 인식하기 때문이다. 프로파간다가 가득한 표현이라 한국에서는 이 표현이 통용되지 않는다.
한국의 우익단체 중에서도 극히 일부에서는 아예 북한의 정통성이 없음을 보다 강조하는 표현으로 '''김일성의 난'''이라는 표현을 쓴다. 더 나아가서는 김일성 가짜설에 의거해 '''김성주의 난'''이라고도 한다. 1950년이 경인(庚寅)년임에 착안하여 경인년에 공산당이 일으킨 난이라는 뜻으로 '''경인공란(庚寅共亂)'''이라고 하기도 한다. 물론 학술적으로 전혀 적절하지 못한 표현이며, 학술 영역 외에서도 보편적으로 사용되지 않는 표현이다.
해외에서야 한국이나 조선이나 모두 'Korea' 로 칭해지니 상관없지만, 대한민국을 제외한 한자문화권에서는 남북한을 어우르는 명칭이 조선(朝鮮)이다. 중국/베트남/일본에서는 '한(韓)'은 오직 남한이라는 나라에 한정되는 개념에만 사용한다.[1] 대한민국은 '대한' 이라는 명칭을 밀지만, 북한은 스스로를 '조선'으로 밀고 있으며, 중국이나 일본 입장에선 수백년 동안 존속한 '조선' 이라는 국가와 그 지명이 더 익숙하고, 한국이라는 나라는 2차대전 후 자유주의를 표방하여 서방세계 진영에 선 현대적 국가로서 탄생한 국가이기 때문에 비하가 아니라, 그들에게는 '조선'이라는 이름이 훨씬 익숙하다. 따라서 한국에선 '한국 전쟁'이나 '6.25 전쟁' 이라고 부르지만, 다른 한자문화권 국가들에선 이 전쟁을 '''조선 전쟁(朝鮮戰爭)'''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다. 다만 광동어에서는 조선전쟁이 아닌 '''한전(韓戰)'''이라고 부른다.
중국측에서는 현재 보통 중립적으로 '''조선전쟁(朝鲜战争)'''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항미원조전쟁(抗美援朝战争)'''이라는 표현도 사용되는데, 미국에 대항해서 북조선(북한)을 도와준 전쟁이라는 뜻. 이런 6.25 전쟁에 대한 중국의 인식이 한국과의 국교 수립 이후 문제가 되자 중국에서는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발발하여 중국군이 개입하기 이전까지는 '조선전쟁', 중국군이 개입하기 시작한 1950년 10월 말부터 종전까지를 '항미원조전쟁'으로 구별해서 불러야 한다는 학설이 주장되기 시작했다. 즉 6.25 전쟁의 개전 당시인 조선전쟁은 남북한 간의 내전에 불과하나, 미군을 주축으로 한 UN군의 진격으로 한만 국경에까지 도달하는 등 중국이 위협받기 시작하자 중국을 지키기 위해 북한을 도와 참전한 전쟁인 항미원조전쟁은 구별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항미원조전쟁의 개념을 완전히 부정하면 당시 중국군은 침략군이 되어버리며, 그렇다고 계속해서 밀고 나가자니 한국과의 외교 마찰이 발생하는 모순을 피하기 위해 만들어낸 개념이다. 중국은 해방 직후부터 조선인민군의 창설에 개입해왔다. 조선족 출신 사단을 파견하여 군정대학을 만들고 인민군을 육성했다. 6.25 개전 초기엔 조선족 사단이 인민군 안에 편성되어 남침하였고 중공군 개입 당시에도 그 길잡이가 되었다. 현재도 조선족 학교나 단체에서는 그것을 항미원조라고 가르치고 매년 기념행사를 갖는다.
일본에서도 '조선전쟁(朝鮮戦争, ちょうせんせんそう)'으로 부르며, 베트남에서도 '조선전쟁(Chiến tranh Triều Tiên, 戰爭朝鮮)'으로 부르고, 대만/홍콩과 같은 중화권에서도 '조선전쟁(朝鮮戰爭)'으로 부른다.
1.1. 내전이다
한국과 북한은 서로를 정식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자기측 중앙정부에 반하는 반국가단체로 여긴다.
대한민국 헌법에 의하면 북한과 조선로동당은 대한민국의 국토인 한반도를 참절하고 대한민국 정부에 맞서 '정부'를 참칭하는 반국가적 단체이자 반군이므로, 국가보안법에 의거하여 한국 전쟁은 김일성이 일으킨 내란, 김일성은 반란수괴범, 김일성의 부하와 조선로동당원 및 조선인민군은 목적수행범으로 규정할 수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한국 전쟁이 내전이라 언급했다가 일부 학계의 비판을 받은 바 있다. 당시는 외국인들에게 대한민국이 어려운 상황들을 많이 겪었지만 세계적인 국가로 성장했다는 이야기를 하며 '내전도 겪고...'라고 발언한 것이라 6.25 전쟁에 대한 정의나 가치관을 드러낸 것이라고는 보기 어렵다는 반론도 있다.
남북이 생각하는 서로의 지위가 자국내 반역단체이기에 중국군과 UN군의 참전이 없었다면 서로서로 내전으로 규정하고 넘어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1.2. 국제전이다
남북한이 각각 국가라는 관점에 의하면, 남북한이 서로를 어떻게 바라보든간에 국제적으로 남북한이 모두 국가로 인정받고 있기 때문에 6.25 전쟁은 국제전이라고 볼 수 있다. 유엔군이 38선 이북으로 북진하려 할 때 반대가 컸지만 무시하고 강행한 바 있다.
실제로 이승만 전 대통령은 평양 '수복' 이후 대한민국 대통령이 아닌 개인자격으로 평양을 방문해서 연설했다고 한다. 비록 헌법상 북한지역은 대한민국의 영토이지만 국제적으로는 인정되지 않기 때문에 개인자격으로 방문할 수 밖에 없었고, 이승만도 이를 잘 알았기에 '유엔과 협의해서 대한민국이 북한 지역에 대한 통치를 보장받도록 할 것'이라고 밝혔다.
다만 인용된 자료만 가지고는 당시 북한 지역이 국제적으로 대한민국의 영토로 인정되지 않았다고 볼 충분한 근거가 되기에는 다소 부족한 면이 있다. 또한 실리주의자인 이승만대통령의 성향으로 봤을 때, 개인 자격 방문은 자격 여부에 개의치 않고 가장 빠르게 평양을 방문할 방법이었기 때문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도 없다. 즉 개인 자격 방문이라는 것이 북한 지역이 국제적으로 대한민국의 영토가 아니어서 그럴 수 밖에 없었다고 보는 것은 근거가 다소 미약한 편이라는 것.
한편으로는 북한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더라도 6.25 전쟁의 성격을 국가 대 국가의 전쟁으로도 볼 수 있다. 김일성을 그저 소련, 중국의 꼭두각시로 본다면 김일성을 앞잡이로 한 소련, 중국의 한국에 대한 침략이므로 명백한 국제전이라는 것이다. 중공군 50만 대군이 한국을 침략했으므로 한국 vs 중국 전쟁으로 볼수도 있다. 또한 다국적군인 유엔군의 참전을 근거로 해도 국제전이 된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2. 북침이 아닌 남침이다
2013년 6월에 뜬금없이 고교생들의 6.25 전쟁 인식이 논란이 되었다. 서울신문이 한 여론조사 기관에 의뢰해서 고교생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고교생의 69%가 6.25 전쟁을 북침이라고 생각한다고 응답한다는 기사가 나왔고 이는 국민들에게 충격을 일으켰다. 박근혜 대통령은 이 기사를 인용하면서 역사왜곡 문제를 바로잡겠다고 발언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실제 이 기사와 여론조사 설문을 분석해보니 '''오해하기 쉽게 만든 설문'''이었다고 한다. "6.25 전쟁을 남침이라 생각하는가 북침이라 생각하는가"라고 단순하게 물어본 것이 화근이라는 지적이 많다.
위에 4.2문서에도 써있지만 6.25전쟁 얘기가 나올때 "남침이냐 북침이냐" 라는 얘기가 십중팔구나오는데 이 문제는 사실 대부분 6.25 전쟁을 잘 아느냐 모르냐와 관계없이 한문 특유의 난해한 문법으로 인한 착각에서 비롯된 경우가 많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6.25 전쟁은 북한이 남한을 침략하면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누구나 안다. 다만 한자어의 어감 문제로 북한이 쳐들어왔다는 것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으면서도 북침이라고 잘못 말하는 경우가 많다. 남침과 북침을 헷갈리는 것이 6.25전쟁을 누가 일으켰는지 헷갈리는 것이 아니라 한자를 잘 아느냐 모르느냐의 여부 때문에 헷갈리는 것.'''남침'''
「명사」
북쪽에서 남쪽을 침략함.
¶ 북한의 남침 야욕/북쪽의 남침에 대비하다/1950년 6월 25일, 마침내 북한 공산군은 38선을 넘어서 남침을 감행하였다.
'''북침'''
「명사」
남쪽에서 북쪽을 침략함.
¶ 한국 전쟁이 남한의 북침으로 시작됐다고 잘못 기술한 책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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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을 보면, 남침은 '''북쪽에서 남쪽을 침범함.'''으로 북침은 '''남쪽에서 북쪽으로 침략함.'''으로 정의하고 있다. 따라서 6.25 전쟁은 '''남침'''으로 보는 것이 옳다.
사실 이 단어가 매우 헷갈리는 이유는 일상 생활에서 남침, 북침과 비슷한 형식의 한자어가 쓰이는 경우가 거의 없는데다가 상황에 따라 방위의 품사가 주어가 되기도 하고 부사가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 방위가 주어로 쓰인 경우
예: 외침(外侵) 등
주어가 무엇인지 불분명하기 때문에 주어가 된다.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방위가 방향의 시작점을 가리키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다. '외침'(← 외세의 침략, 바깥으로부터의 침략), '북풍'(← 북쪽으로부터 부는 바람)이 대표적인 예.
- 방위가 부사로 쓰인 경우
예: 북벌(北伐), 남하(南下), 동진(東進) 등
실제로 한 고등학교 교사가 학생들에게 물어보니 북침의 뜻을 북한'''이''' 침략한 것으로 아는 학생들이 많았다고 한다.[2] 2004년 보훈처의 여론조사에서도 학생들의 겨우 0.7% ~~한해 수능보는 학생이 60만명에 12개의 학년이다. 0.7% 약 5천명만이 남한이 북침했다로 응답했고 거의 대다수는 북한의 남침이라고 올바로 파악하고 있었으며, 전교조에서 보훈처가 진행한 여론조사와 같은 질문으로 서울지역 중고생 1499명에게 설문조사한 결과에서도 89.4%가 6.25 전쟁은 북한이 일으킨거라고(남침) 응답했다.맥락상 주어가 무엇인지 분명하다는 특징이 있다. '효종 시기의 북벌론'이나 '제갈량의 북벌'에서의 '북벌' 등에서는 기준이 되는 주체가 '자국(혹은 자기 자신)'으로 명확하다. 이 때의 '북'은 부사어로 풀이하며 '북쪽으로 정벌함'이라는 뜻이 된다. 방위가 들어간 다른 한자어인 '남하, 북상, 동진, 서정' 역시 '남쪽으로 내려감', '북쪽으로 올라감', '동쪽으로 나아감', '서쪽으로 정벌함'으로 해석한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이 해석을 기준으로 삼은 것으로 '남침'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침략했다'라는 의미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엄밀하게 따지면 6.25 전쟁에서는 행위의 주체가 '북한'과 '남한' 둘이기 때문에 행위의 주어가 불분명하다. 이런 맥락 때문에 과거 중국 문헌에서는 방위를 주어로 해석하는 서술이 자주 보인다. 물론 춘추전국시대처럼 여러 나라가 대립하는 구도가 아닌 남한과 북한만이 대립하는 6.25의 특성상, 남쪽으로 내려갈 주체는 '북한'밖에 없으며 북쪽으로 올라갈 주체 역시 '남한'밖에 없으므로 주어가 분명하다고 볼 수 있으나, 앞선 '북벌'의 예처럼 애초에 이렇게 주어가 생략된 용어는 주체가 '자국'임을 전제로 깔고 있다. 즉 대한민국 국민이 '남침'이라는 단어 자체에서 받는 인상은 남한이 남쪽으로 침략했다(주어가 생략됐다고 봤을 경우) 혹은 남한이 북쪽으로 침략했다(南을 주어로 봤을 경우) 둘 중 하나이기 때문에 '북침'이 옳다고 잘못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면 문법적으로 6.25전쟁에 대해 남침, 북침이란 용어는 의미상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쉬운 좋지 못한 용어이다. 굳이 주어를 명확하게 살린 한문식 문장으로 표현하면 北侵南이 되므로 주어가 분명하다는 관점에서 용어를 지정하자면 '남침'이 아니라 침남이라고 쓰는 것이 맞는다.
그러나 엄밀하게 따지면 6.25 전쟁에서는 행위의 주체가 '북한'과 '남한' 둘이기 때문에 행위의 주어가 불분명하다. 이런 맥락 때문에 과거 중국 문헌에서는 방위를 주어로 해석하는 서술이 자주 보인다. 물론 춘추전국시대처럼 여러 나라가 대립하는 구도가 아닌 남한과 북한만이 대립하는 6.25의 특성상, 남쪽으로 내려갈 주체는 '북한'밖에 없으며 북쪽으로 올라갈 주체 역시 '남한'밖에 없으므로 주어가 분명하다고 볼 수 있으나, 앞선 '북벌'의 예처럼 애초에 이렇게 주어가 생략된 용어는 주체가 '자국'임을 전제로 깔고 있다. 즉 대한민국 국민이 '남침'이라는 단어 자체에서 받는 인상은 남한이 남쪽으로 침략했다(주어가 생략됐다고 봤을 경우) 혹은 남한이 북쪽으로 침략했다(南을 주어로 봤을 경우) 둘 중 하나이기 때문에 '북침'이 옳다고 잘못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면 문법적으로 6.25전쟁에 대해 남침, 북침이란 용어는 의미상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쉬운 좋지 못한 용어이다. 굳이 주어를 명확하게 살린 한문식 문장으로 표현하면 北侵南이 되므로 주어가 분명하다는 관점에서 용어를 지정하자면 '남침'이 아니라 침남이라고 쓰는 것이 맞는다.
결국 이젠 한문이 영 쓰이질 않는 현실을 고려해 국방부에서 교육용 용어를 '남침' 에서 '''북한의 남침'''으로 좀 더 명확하게 들리도록 수정했다.
이 때문에 국한문 혼용을 옹호하는 학자들이 학생들의 한문교육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에 국한문 혼용 반대론자들은 한문이고 한자어고 간에 그냥 간단히 '북한이 남한을 침략했다.' 혹은 북한의 남침이라고 한국어 문법에 맞게 적으면 문제가 없었을 것이라며 반대했다. 사실 국한문측 주장이 오류인 게, 이미 위에서 말했듯이 이건 애시당초 한자어 발음의 동음이의성의 문제가 아니라 한자어 문법 자체의 문제에 의한 혼동이기 때문에 남침이든 南侵이든 언제든지 혼동이 생길 수 있는 문제다.
이해를 돕기위해 ‘똥침’을 예로 설명[3] 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은데 언뜻 그럴싸해 보이지만 전혀 틀린 설명이다. 두 단어는 애초에 한자부터가 다르다. 북침/남침의 ‘침’은 侵이고, ‘똥침’의 ‘침’은 針인데다 전자는 동사[4] 로 쓰였고 후자는 명사[5] 로 쓰였다. 연상법을 이용한 쉬운 암기법이긴 하지만 이런 잘못된 설명은 원리를 이해하는 데에 방해가 되며 북침/남침 문제는 한자어의 문법상 오래전부터 논란이 많았던 용어[6] 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똥침이라는 단어는 혼동되거나 암기할때 연상을 목적으로만 사용하고 그 이상의 목적으로는 사용하지 말자.
3. 주한UN군의 참전과 국제적 인식
당사국인 대한민국과 북한에 더해, 전투병을 파병한 참전국의 숫자로 보면 남한 측에서는 미국 이외에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 그리스, 터키, 필리핀, 태국, 콜롬비아, 에티오피아,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캐나다,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구성된 UN군 16개국+ 북한 측에 붙은 중국과 비공식적으로 개입한 소련의 총 17개국.'''자유와 평화를 위해 싸운 유엔 참전 용사들의 숭고한 희생을 대한민국은 영원히 기억할 것입니다.'''
'''(We will remember the noble sacrifice of the soldiers who joined the UN forces to fight for the freedom and peace.)'''
''' - 전쟁기념관 내 전시관 글귀.'''
의료지원부대를 파병한 국가는 스웨덴, 인도, 덴마크, 노르웨이, 이탈리아, 체코슬로바키아 6개국이다. 여기서 이탈리아는 UN에도 가입하지 못한 상황에서 적십자 소속의 의료지원팀을 꾸려 파견했으며 체코슬로바키아는 북한측으로 파병했다.
그 외에 물자 지원과 전투, 물자 협력국을 포함, 대한민국을 지원한 국가는 '''총 67개국'''이다.
6.25 전쟁은 한편으로 '''역사상 가장 많은 국가가 단 한 나라(대한민국)를 돕고자 지원한 것으로 기록된 전쟁'''이며 이에 따라 기네스북에 오른 전쟁이기도 하다. 당시 대한민국에 병력, 물자, 전후복구를 지원한 나라는 자그마치 67개국으로, 당시 세계 국가들 중 73%에 달한다. 이 중에는 아이티, 인도네시아처럼 별다른 이해관계가 없었거나 경제력이 낙후된 국가들조차 포함될 정도다. 특히 영국이나 프랑스 등은 이전에 제2차 세계 대전까지 타국의 침공을 당했던 경험도 있었기 때문에 이들 국가들은 그 때의 참상을 기억하면서 참전하였다고 한다.
또한 가장 오랫동안 평화협정 없이 휴전이 지속된 전쟁으로도 기록되었고, 지금도 하루하루 그 기록을 계속 경신중이다.
6.25 전쟁에 대해 많은 국가가 한국 편을 들어 개입할 수 있었던 명분은 냉전 논리뿐만 아니라 북한이 뚜렷한 이유도 없이 선전포고도 안 하고 기습한 것이었다. 물론 선전포고는 없어도 전쟁 수행이 가능하기는 하나 국제법 위반이라는 사실은 불변이다. 2차대전의 악몽이 가시지 않은 통에 비인도적, 비신사적으로 전쟁을 일으켰으니 당연히 세계의 시선이 곱지 않을 수밖에 없었던 것.관련 기사 전쟁 당시의 후속처리와 후유증을 처리하는데 정신이 없었는데 김일성이 분위기 파악도 못하고 자기의 야심만 채우려고 하는통에 더 골치 아프게 만든 것이었다.
소련은 비밀리에 참전해 북한을 도왔다. 중국인민지원군으로 위장하기 위해 슬라브계 백인이 아닌 몽골계 혈통의 소련인들로 선발하였고 중국어 및 조선어 학습을 받았지만 치열한 교전 중에 낯선 외국어를 쓰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기 때문에 스탈린에게 간절하게 부탁해서 승낙을 받아 실제 작전 중에는 그냥 러시아어로 교신했다고 한다.
물론 그 전에도 긴급상황시 '''러시아어'''로 된 무선통신이 들리는 경우를 UN군이 보고했으나, 소련군이 참전했다는 사실이 외부로 알려지면 제3차 세계 대전이 일어날까 두려웠기 때문에 해당 보고를 받은 상부 및 지도자층을 포함해서 다 모르는 척했다고 한다. 사실 소련도 공군력 딸리는 북한과 중국을 지원하긴 해야겠는데 대놓고 지원하면 자기들이 귀찮아지니까 비밀스럽게 진행했다. 한마디로 말해 양쪽이 서로 알고도 모른 척 한 셈. 아무리 위장을 한다 해도 조종사는 소련인이고 격추되는 일도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그 당시에도 자유 진영이 이 계획을 알게 된다. 이른바 북한 전투기를 격추시켰더니 조종사가 소련군 백인.[7] 이들은 공식적으로는 중공군으로 처리되어 포로 대우를 받았으며, 송환거부포로 소수를 제외한 대부분의 중공군은 그대로 송환되었기 때문에 이들 역시 전쟁 이후 중국을 거쳐 소련으로 갔을 것으로 보인다.
이 사실은 자유 진영과 공산 진영, 특히 소련 모두 전쟁에 개입하면서도 제3차 세계 대전으로 확전될 것을 우려해 최대한 한반도의 영토와 사람 내에서 모든것들이 다 해결되도록 은폐했으며 더불어 이 전쟁이 한반도 외부로 퍼지지 않도록 힘을 썼다. 그래서 소련은 소련 붕괴전까지 자신들의 전쟁 개입을 부인했으며 실제로 휴전협정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한편 일본은 한반도 근해의 소해 업무에 투입되는 방식으로 참전하였다.
참전국의 숫자만 따지면 위에서도 밝혔듯이 세계 73%의 국가가 대한민국을 지원했으며 북한측에도 막대한 소련의 병기와 중국의 전투병이 지원되었다. UN군의 절대 다수(90% 정도)가 미군이었으나 67개국의 지원국 가운데에는 꼭 병력 지원만 한 나라만 있었던 게 아니라 물자와 의료진, 기술자를 지원한 나라도 역시 매우 많았기 때문에 단순히 병력만으로 지원국을 규정하는 것은 편협한 시각이라고 할 수 있다.
유엔군으로 참전한 일부 국가의 경우, 이들 나라가 미국과의 특별한 관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한국을 지원했다던가, 2차대전 직후 미국 눈치를 안 볼 국가가 없다면서 이들 국가가 유엔군으로 참전한 이유를 단순히 미국 눈치를 보고 미국에게 잘 보이기 위한 것이라고 정의하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8] 미국의 유럽 참전 국가들은 나토 창설 멤버이기 때문에 참전했다고 치더라도 태국, 에티오피아, 호주, 뉴질랜드, 캐나다, 터키, 남아공은 미국의 뜻과는 별개로 참전한 것이다. 또 15개국 군대가 독자적인 작전을 수행한 게 아니라 미군에 배속되어 전투를 했다고도 하는데 이 또한 사실이 아니다. 미군을 포함한 모든 병력은 '''유엔군 소속'''이었고 그 수장이 미군 출신인 더글러스 맥아더였을 뿐이다. 다국적 연합군에서 지휘관이 한국군 출신이라고 다국적군이 한국군은 아니듯이 말이다.
사실 UN군의 지휘권이 미군 장성에게 돌아간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한국군이 1950년 7월 초 북한군의 공격을 막고 있는 동안 유엔의 '한국 군사원조 결의'에 따라 미국의 육, 해, 공군이 참전했고, 이어 영국의 해군과 호주의 해, 공군, 뉴질랜드 해군도 전선에 투입됐으며, 이외에도 다수의 유엔 회원국이 참전을 준비하고 있어서 이들에 대한 지휘 통제 문제가 대두됐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트리그브 리 유엔 사무총장은 7월 3일 6.25전쟁의 가장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미국이 유엔군을 지휘하도록 제의했다. 결국 대한민국 방위를 위한 회원국들의 군사행동에 통일성을 유지하고자, 안전보장이사회는 7월 7일 미국이 작성하고 영국과 프랑스가 제안한 '유엔군사령부 설치'를 의결함으로써 유엔군을 지휘하는 통합군사령부가 출범하게 됐다.
이 결의안의 주요 골자는 '안전보장이사회를 대신해 한국에서 침략자 북한과의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권한을 미국의 대통령에게 위임하고, 유엔 회원국들이 파견한 군대를 미국의 통일된 지휘하에 둔다'는 것이다. 유엔 사무총장은 초대 유엔군사령관에 미 극동군사령관인 맥아더 장군을 임명하고, 그에게 "미국의 작전 임무는 국제 정치상 어디까지나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지원하에 이루어진다"는 지침을 전달했다. 유엔 회원국 중 대부분의 국가가 지지하는 가운데 결성된 유엔군은 한국에 대한 직접적인 책임을 갖고 있으며, 파견 병력 규모와 지원능력 면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미국에 의해 좌우될 수 밖에 없었다. 미국 이외의 국가의 참전은 주로 미국의 국무부와 트리그브 리 유엔 사무총장의 협의하에 이루어졌다. (출처: <6.25전쟁 프랑스군 참전사> - 국가보훈처 편저, 2004년)
이와 같이 UN군의 혼란스러운 지휘체계를 안정시키기 위해 UN 안보리와 회원국들이 미군 장성에게 UN군 지휘권을 양도한 것일 뿐이다.
이 전쟁을 보는 시각에는,
- 미국으로 대표되는 자유주의 진영과 소련으로 대표되는 사회주의 진영을 각각 남북이 대리자의 역할로 전쟁했다는 대리전으로 보는 시각.
- 남북의 국내전으로 보는 시각. 단, 이 시각의 경우 남쪽이든 북쪽이든 각각 처음부터 미국과 소련, 중국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왔다. 당장 북한이 초기공세 때 쓴 T-34 전차를 과연 어디서 구했을까? 미국과 중국은 자신들의 '정규군'을 보냈었던 만큼, 서로 UN군이니 의용군이니 하는 그럴싸한 대외적 명분을 내거는 수를 쓰긴 했지만 이렇게 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 마지막으로 대리전이 아니라 자유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 자체가 맞부딪힌 세계전으로 보는 시각이 있다.[9] 당장 1951년 UN군이 북쪽으로 북상할 때쯤 맥아더가 트루먼 대통령과의 마찰이 생겼는데, 맥아더가 중국(정확히는 만주 지역)에 핵폭탄을 사용해서라도 전쟁을 유리하게 이끌어야 한다고 주장하자 트루먼은 전쟁의 확대를 우려해서 1951년 4월 11일 맥아더를 해임시킨 바 있다. 이러한 전쟁의 성격으로 인해 6.25 전쟁은 냉전 시대 세계 각지에서 벌어진 대리전의 시초로 평가된다.
4. 유엔과 국제 세계의 시각 및 활동
6.25 전쟁은 사실상 거의 '''유일하게 유엔군이 전쟁의 한 쪽 당사자로 참전한''' 전쟁이다.
유엔이 성립한 후 개입한 전쟁이나 국제분쟁에서 유엔은 거의 예외 없이 '''평화유지군,''' 즉 양측의 성격이 어쨌건 간에 서로를 중재시키고 양측을 대신해 치안을 수호하는 '중재자' 역으로 참여한 반면, 6.25 전쟁에서만큼은 유엔군이 UN 깃발을 달고 북한 및 러시아군,중공군을 상대로 전투를 수행하였다. 이것은 본 전쟁이 최초이자 거의 마지막이며 이후 벌어진 전쟁에서 유엔군이 한쪽을 위해서만 유엔 명의로 참전한 적은 없다. 베트남 전쟁, 걸프 전쟁, 이라크 전쟁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걸프 전쟁'이나 '리비아 내전'처럼 '안전보장이사회 승인'을 얻은 전쟁이라 하더라도 거기에 참여한 각 나라 군대들은 각자의 명의로 참전하였다.[10]
물론 어느 한쪽이 평화유지군을 먼저 공격한다면 그에 대한 방어전이야 수행하지만 본 전쟁처럼 유엔군이 선공을 당한 것이 아님에도 한쪽만을 위해 적극적으로 참전한것은 분명 의의가 있다. 그래도 시리아 내전을 계기로 자국민에게 잔혹한 정권을 국제 사회의 힘으로 응징하기 위해 다시 결성될 필요성이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으나, 본 전쟁과 내전은 그 성격이 서로 극명히 다른 데다 무엇보다 양쪽이 다 악으로 변질되었기 때문에 앞으로도 오랜 기간 유엔군이 한쪽을 위해 싸워줄 일은 없어 보인다.
5. 미국의 '잊힌 전쟁'(The Forgotten War)
미국에서는 이 전쟁을 'Korean War' 외에도 '잊힌 전쟁(The Forgotten War)', '알려지지 않은 전쟁(The Unknown War)'이라고 흔히 부르며, 한국 전쟁을 다룬 다큐멘터리들은 대체로 이런 제목들이 붙는다. 단어가 문학적이기 때문에 형식을 갖춘 문서의 경우가 아니면 오히려 이 쪽이 더 흔하게 보인다. 이는 제2차 세계 대전과 베트남 전쟁 사이에 발생한 데다가, 규모가 상대적으로 작고(그러나 전사자 수는 수만명에 육박한다. 그만큼 2차대전과 월남전쟁의 스케일이 크긴 했다), 미국 입장에서는 전쟁의 성과가 그닥 좋지 않았으며, 세월이 오래 흘렀기 때문이다. 잊혀진 전쟁 문서 참조.
동 제목의 6.25 전쟁을 소재로 한 게임도 있다. 당시 미국 대통령 해리 S. 트루먼의 이름을 따 'Truman's War(트루먼 전쟁)'라고도 부른다.
또한, 미국은 6.25 전쟁 참전 당시 트루먼 대통령이 제대로 된 전쟁(War, Total War)이 아니라 ''''Police Action''''이라고 발표했다는 것도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트루먼이 이렇게 불렀던 것은 대놓고 선전포고 때리며 전쟁이라고 부르기에는 3차 세계대전이 두려웠던 것도 있고, Police Action은 유엔헌장 42조와 53조에 합법적인 행위로 규정되어 미국의 참전이 국제법적으로 적법한 행동이었다는 걸 주장하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물론 이건 정치적 이유에서의 분류였고, 6.25 전쟁의 규모나 미국이 투입한 병력을 보면 'Police Action'이라는 말은 그다지 적합하다고 보기 어렵다.
6. 중국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6.25를 한국보다는 북한을 구원하기 위하여 미국과 싸운 전쟁으로 인식하고 있다. 중국에서 6.25 전쟁을 부르는 명칭 중 하나가 '항미원조'인데 임진왜란의 중국 명칭이 "항왜(일)원조전쟁"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중국의 관점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11] 임진왜란이 일본의 침공을 받은 조선을 도와 준 것이라면 6.25는 미국의 침공을 받은 "조선"을 도와준 것인 셈. 중국 학교에서도 이렇게 가르치는데, 옛날엔 북침론도 같이 가르쳤지만 남침의 증거가 워낙 명백하다 보니 지금은 누가 시비걸었는지는 쏙 빼놓고 미국과의 교전만 부각시키는 듯.
한국전쟁을 다룬 중국의 매체도 별로 없는 실정인데, 중국의 어떤 군인을 주인공으로 하는 중국영화 집결호에서도 국공내전과 중일전쟁에 비해 한국전쟁의 비중은 낮다.
마오쩌둥의 장남 마오안잉이 이 전쟁에 참전했다가 전사했다. 당시 중공군 총사령관 펑더화이는 혹시라도 마오안잉에게 위해가 가해질까봐 전선으로 보내지 않고 평안북도 창성군(현 동창군) 대유동에 있는 중국인민지원군 사령부에서 러시아어 통역관으로 근무하도록 했는데, '''미군 전투기의 폭격으로 전사했다.''' 마오쩌둥은 아들을 전사한 북한 땅에 안장하라고 지시해 마오안잉은 지금도 평안남도 회창군에 있는 중공군 열사능원에 묻혀있다. 이 묘는 중화인민공화국과 북한의 혈맹관계를 상징하는 정치적 도구 시체팔이로 이용되고 있다.
중국 입장에서 보면, 참전과정부터가 UN에게 중국이란 국가가 참전한게 아니란 변명을 하기 위해 중국의 군대가 아닌 민병대란 명목으로 참전한 점도 있었으며 냉전 이후엔 경제적으로 한국이 매우 중요한 국가이기 때문에 서로 싸운 한국전쟁을 적극적으로 재조명하지는 않았으나, 2020년 들어서는 미중 패권 경쟁 속에서 중국 측이 한국 전쟁과 관련하여 슬슬 불을 지피고 있는 중이다.# 중국 측에서는 이 '항미원조전쟁'을 중국이 "미 제국주의의 침략"에 맞서 승리한 전쟁으로 기록, 다큐멘터리까지 대대적으로 홍보하며 미국과 맞서 싸웠다며 자국의 위상을 제고하고 국민들의 애국주의를 끌어올리려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국제적으로 한국전쟁을 중국이 의외로 잘 싸웠다는 기존의 평을 넘어 중국의 승리로 보는 인식은 반미 진영 일부 외에 없다시피하고, 중국도 사실 한국전쟁에서 20만명이라는 어마어마한 인명피해를 내었다. 중국은 '미 제국주의의 침략을 막고 한반도의 평화를 수호했다'라거나 '한국의 "내전"에 미국이 개입하여 자신들도 개입했다'는 식으로 소련과 중국의 지원을 받은 북한이 먼저 침공했다는 점을 숨기고 있다.
그와중에 2020년엔 BTS의 발언을 두고 '자신들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았다'는 적반하장 프로파간다를 시전하는 중이다.# 그후에 전세계 아미들에게 비난을 받아 글삭하고 튀는 졸렬한 모습도 보였다.
2020년 11월 8일 항미원조 주제곡 '''<열혈금조>'''가 나왔으며 11월 9일에는 뮤직비디오도 떴다. 영상 현재는 내려간 상태.
7. 대만(중화민국)
중화민국의 경우에는 자유진영의 일원이자 당시 엄연한 UN 상임이사국으로써 장제스가 중공에 대항하여 한국을 도와 파병을 제안하기도 한만큼 중공과는 달리 한국전쟁이 북한이 대한민국을 남침하여 남한에 정당성이 있음이 분명한 정의의 전쟁이라는 개념이 확고하게 자리잡고 있다.
8. 일본
일본은 미국에 의해 한국에 물자를 지원하고 일부 부대가 파견되어 기뢰제거 등의 임무를 수행하는 역할을 맡았다.[12]
일본에서도 역시 타국가와 비슷하게 크게 주목받는 전쟁은 아니지만, 그래도 바로 옆나라에서 대규모 전쟁이 일어났기 때문에 일본인들 대부분이 어느정도는 안다. 대충 중국과 북한이 남한을 공격하고 미군과 UN이 남한을 위해 참전한 전쟁 정도로 여긴다.
일본에서는 6.25 전쟁을 '''조선전쟁(朝鮮戦争)'''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조선과는 다르다. 이는 '한반도'에 대한 일본 명칭이 조선반도(朝鮮半島)이기 때문이며, 시대적인 명칭으로 조선을 가리킬 때에는 이씨조선(李氏朝鮮)이나 조선왕조라 부른다.
9. 유럽 지성계의 반응
6.25 전쟁은 (비록 명분상이지만) 공산집단이 아무런 명분도 없는 침략 전쟁을 일으켰다는 점에서 불과 몇 년 전까지 나치의 침략과 광기를 겪었던 유럽의 좌파 지식인들에게 적잖은 충격을 주었다. 때문에 6.25 전쟁을 놓고 좌우간에, 혹은 좌파 내부간에 적잖은 논란이 일어나게 되는데, 물론 좌파 일각에서도 북한의 침략 행위를 비판하는 시각도 존재했지만, 대체로 남한과 미국의 도발에 대한 북한의 자위적 전쟁이라며 옹호하는 분위기가 우세했다. 말하자면 북한은 가만히 있는데, 남한과 미국이 자꾸 집적거리니 북한이 자위권을 발동한 것이라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그리고 당시 좌파에 우호적인 분위기 속에서 많은 지식인들이 이러한 주장에 낚였는데, 그 중에는 시대의 지성으로 불리는 장 폴 사르트르도 있었다.
이러한 시각은 한국에 대한 유럽 지성인들의 무지도 한몫했지만, 파시즘의 피해자이자 파시즘 타도에 적지 않은 기여를 한 소련[13] 에 대한 우호적인 분위기도 한몫 했다. 그러니까 북한의 침략 행위를 사실대로 비판하면 그 북한을 탄생시킨 소련에 대해 비판을 가하는 셈이 되는 것이다. 결국 사르트르는 북한의 침략을 비난하는 모리스 메를로퐁티와 대판 싸우고 결별하게 되는데, 북한의 현 상황을 놓고 본다면 결과적으로 메를로퐁티의 판단이 옳았다.
이 당시 북한 정권은 어쨋든 각종 좌파, 공산 세력의 연합 정권이었고, 레지스탕스 문서에 나와 있듯이 프랑스를 비롯하여 서유럽 각지에서는 자국의 반파시스트, 반나치 투쟁의 중심에 공산주의 세력이 있었기에 공산권에게 진 빚이 있다고 느낀 사람들이 많았다. 그리고 유럽 지성의 대가들이 그러했던 만큼, 냉전기에 유럽에 유학한 국내의 지식인들(대략 386 운동권 세대까지의 연배가 해당된다) 중에도 이 영향을 받아 1990년대~2010년대까지 그것을 되풀이한 사람들이 있다.
10. 당시 한국군에 대한 인식
6.25 전쟁 당시 한국군에 대해서는 무능하고 형편없는 군대였다는 인식이 강하다. 전쟁 발발 단 3일만에 수도가 함락되거나 대부분의 전투는 미군이 치렀다는 등의 이미지가 있는 것.
하지만 실제 전쟁 수행을 보면 한국군은 모든 면에서 무능하지도 않았고, 모든 면에서 유능하지도 않았다는 중립적인 평가를 내릴 수 있다.
대한민국 국군이 무능하다고 평가하기 어려운 이유는 전쟁 초기 국군이 보여준 장병들의 희생정신과 전투력 때문이다. 예를들어 1950년 6월에 있었던 김포반도 전투의 경우에는 사령관 도주, 사령관대리가 자살하는 등 지휘부가 무너진 상황에서도 전선을 유지했다. 당시 긴급히 마련된 시흥사령부도 영등포 축선방어에만 신경을 세웠기 때문에 김포지구를 컨트롤할 수 없었다. 김포지구는 장병들의 힘으로 지켜낸 것이다. 국방부에서도 '''장병들의 감투정신과 희생정신이 가이 경이적이라고 평가'''된다[14] 고 언급한다. 또한 전쟁초기에 전방에 배치된 국군 부대의 연대장 및 사단장 등 지휘관들은 6월 25일 새벽을 기해 북한군의 전면남침이 그렇게 감행되리라고 판단하지는 못했으나, '''초기 전투에서 그들이 보여준 지휘력은, 군 수뇌부가 직접 관여한 의정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비교적 우수한 편이었다.'''[15] 라고 평가하였으며, '''초기 전투과정에서 나타난 일선 지휘자들의 지휘는 필사적이었고 헌신적이었다.'''[16] 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거기에 낙동강 전선에서 다부동 전투도 전쟁 초반인 1950년 8월에 있었던 일이다. 이처럼 전쟁 초기 국군장병이 희생정신은 정말로 경이적인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국군이 우수했다고 하기도 좀 문제가 있는데 한국군의 방위 준비태세는 '''전쟁을 수행하기에는 모든 면에서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전시내각이나 전쟁지도부에 대한 편성 및 운용계획이 전혀 수립되어 있지 않았고 그 결과 전쟁 상황을 고려한 국가차원의 통합방위계획이나 이를 기초로 한 국가차의 동원 및 전쟁연습은 정부수립 이후 한 번도 시행되지 못했다. 한국군 방어계획의 수립[17] 이 전쟁발발 3개월 전에 작성된 관계로 예하부대 지휘관 및 참모들이 이를 이해하고 부대에 적용할 시간적 여유가 거의 없었고, 방어시설을 마련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거기에 육군총참모장의 임무 및 지휘 폭이 너무 광범위했다. 육군총참모장은 전쟁 발발 후 국무회의 비상회의, 비상국회, 군 원로회의, 군 수뇌회의, 국방수뇌회의 등 정부, 국회, 국방부회의 참석, 전황을 파악하기 위한 전선 지도방문, 그리고 전국에 산재해 있는 8개 사단에 대한 직접 지휘 등 한 사람이 감당하기에는 그 임무가 너무 많고 부담이 컸다. 그렇기 때문에 육군총참모장은 자신의 고유임무인 전선 산황을 분석하고 거기에 맞는 지휘 결심을 하여 전선의 각 부대에 지시해야 될 적시적절한 지휘 조치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 거기에 전쟁 불과 1개월 전에 단행된 군 수뇌부에 대한 대폭 인한[18] , 주요 지휘관의 교육파견, 전쟁 전야 재경부대 지휘관 및 참모들의 장교구락부 개관 축하 회식 및 부대별 평균 1/3에 달하는 장병들의 외출, 외박, 휴가조치, 그리고 38도선 방어임무를 담당하고 있는 전방 사단 연대급 부대에 대한 전후방 교체는 가장 중요한 개전 초동단계에서 신속히 조치되어야 될 사항들이 지연되거나 무시됨으로써 초전 효율적인 즉응태세에 막대한 혼선을 불러왔다. 공비토벌로 인한 효과적인 교육훈련 미실시, 정확한 대북정도를 알고있으면서도 적의 정확한 남침 의도 및 시기를 제대로 판단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어렇게 수집한 정보를 안일하게 대처한 군 수뇌부의 판단 능력 결여가 전쟁을 불러왔다. 즉 전쟁 직전까지 국군이 안고 있는 제도 및 운영상의 모든 결함 및 문제점이 전쟁 발발 당일 한꺼번에 총체적으로 나타났던 것이다.[19]
거기에 가장 심각한 것은 전시에 통합적으로 관리할 조직이나 능력이 없었다는 점이다. 특히 전쟁으로 인한 병력육성이 필요한데 당시 국군의 병력육성프로그램은 개차반이었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 사례가 1951년 초에 있었던 국민방위군 사건이다. 그리고 이러한 신병교육시스템의 부재로 인해 분명 김포반도에서 그렇게 치열하게 버텼던 국군이 1951년에는 중공군이 나타나기만 하면 도망갔다.[20]
대부분의 전투를 미군이 치렀다는 인식은 틀렸다. 유엔군의 지원이 전쟁 수행에 필수불가결했음은 분명하지만, 한국군이 연합군의 대다수였음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21] 한국군이 유엔군의 도움 없이 전쟁을 계속할 수 없었다면, 유엔군 역시 한국군 없이는 전쟁을 수행할 수 없었다. 한국군은 유엔군의 일원으로서 다부동 전투, 영천 전투, 용문산 전투, 금성 전투 등 수많은 격전을 치렀고, 이 중에는 전략적으로 결정적이었던 전투가 충분히 많다. 한국군은 다부동 전투에서 북한군의 작전적 주공을 저지하는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고, 평양 전투에서는 반격의 선봉을 맡았으며, 용문산 전투에서는 중공군의 공격을 멋지게 받아쳐 역습의 실마리를 만들어냈다. 물론 사창리 전투나 현리 전투처럼 처참한 패전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길어지는 전쟁에서 쌓인 실전경험과 고지쟁탈전 와중에도 밴플리트 장군의 주도로 후방에서 실시된 대대적인 교육훈련 프로그램 덕분에 한국군은 시간이 지날수록 강해졌다. 이를 입증하는 것이 한국전쟁 최후의 대규모 전투인 금성 전투다. 금성 전투에서 한국군은 수적으로 압도적인 중공군의 전력을 다한 맹공격을 받았지만, 이전처럼 쉽게 무너져 패주하는 대신 끈질기게 싸우면서 철수하다 중공군이 한계에 달하자 다시 반격으로 전환할 정도로 성장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물론 실전경험 외에도 미국의 물적, 기술적 지원[22] 역시 큰 기여를 했다. 베트남 전쟁에 한국군이 참전하게 된 이유 중 하나도 이런 한국전쟁으로 단련된 한국군의 실력을 미국이 긍정적으로 평가한 것에 있다.[23]
한국군은 한국전쟁 과정에서 신생국 군대의 한계를 넘지 못하고 지리멸렬한 모습을 여러번 노출한 것은 사실이며, 국군의 전쟁준비가 최악이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모습에만 천착해 한국군이 전쟁 전 기간에 걸쳐 수행한 결정적인 역할과 지속적으로 성장하는 모습을 외면한다면 한국군과 한국전쟁을 정확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1] 다만 중화민국(대만)의 경우 과거 장개석 정부의 반공정책에 따라 韓을 많이 쓰며, 홍콩은 대만의 영향을 받아 Korea의 뜻으로 한(韓)도 섞어 쓴다. 예를 들어 대만과 홍콩에서는 북한을 뉴스에서도 北韓이라고 칭하는 경우가 많다.국부천대 이전인 1947년의 중화민국에서 제작된 지도에서도 한국이 韓國으로 표시되어있다. [2] 사실 한문 자체가 좀 문법이 나이롱이라 문장성분이나 실질형태소들의 관계가 뚜렷하지 못하다. 남침 역시 맥락에 따라 남측에서의 침공, 남측으로의 침공 모두 될 수있다.[3] 항문을 공격하니 '똥침' → 남한이 공격당했으니 '남침'과 같은 방식.[4] 정확히 말하자면 ‘-하다’ 따위를 붙여서 용언으로 쓸 수 있는 경우. 물론 侵을 쓰는 단어가 모두 용언으로 활용되는 건 아니다. 앞선 ‘외침(外侵)’의 경우 ‘외침을 당하다’와 같은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명사로 쓰이는 경우 역시 엄연히 있다.[5] ‘침을 놓다’와 같은 표현에서 유래한 단어로 ‘바늘’의 뜻이다. 참고로 이 표현의 침은 ‘鍼’이지만 針과 鍼은 이형동자이다.[6] 교착어로서 형식 형태소가 발달한 한국어와 고립어로서 형식 형태소가 미약한 중국어권 사이의 언어적 충돌에서 기인한다. 고대 중국어(한문)는 문법적으로 완성되지 않은 채로 천 년 넘도록 지속되어 왔다. 그것을 메우는 역할을 한 것은 해석상 '''관습'''에 의한 것으로 지금도 삼국시대나 고려시대 한국 문헌들을 둘러싸고 해석 논란이 끊이지 않는 이유다.[7] 사실 6.25 전쟁은 하늘에서 제트기가 제트기를 격추시킨 최초의 전쟁이다.[8] 일부의 경우는 여기에 부합했다. 후술 언급한 국가들 중 터키는 실제로 끊임없이 히틀러의 참전요구를 거절만 하면서 중립만 유지하다가 이미 대세가 기울대로 기운 1945년 3월에야 연합국에 붙었기 때문에 미국의 우방임을 적극 어필해야할 입장이었다. 서방국가와 친한 이웃 그리스와 사이가 나쁘기도 했고, 소련이 카프카스에 진출하면서 안보적 위협이 커지기도 하였고 말이다. 에티오피아는 이탈리아에 정복되었다가 독립한 신생국 입장이라 국제사회에서 입지확보 기회가 필요했으며 태국은 비록 자의는 아니었으나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군이 통과가능하도록 국경을 열어줬던 사실상의 협력국이라는 약점이 있었다.[9] 그래서 몇몇 사람은 이 전쟁을 제 3차 세계대전으로 보기도 한다.[10] 1990년대에 딱 한 번 UN군 창설 논의가 있었다. 유고슬라비아 전쟁 때에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내에 크라이나-세르비아 공화국, 스릅스카 공화국이라는 괴뢰국을 세워서 크로아티아인, 보슈냐크인을 대량 학살하던 세르비아를 상대로 다시 한 번 UN군이 다시 창설될 뻔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안건은 러시아 보리스 옐친이 안전보장이사회에 출석하여 거부권을 행사, 무산됐다. 그리고 UN군 창설이 무산되자 라도반 카라지치 스릅스카 공화국 대통령은 UN 평화유지군 병력을 납치한 후 자기네 차량에 매달고 다니다가 '''결국 죽여버리는''' 쇼까지 벌였다![11] 중국 단동에는 중공군의 일대기를 기록하고 당시 사용했던 무기 등을 전시한 항미원조기념관이라는 곳이 있다.[12] #[13] 실은 그 시기 스탈린의 소련은 그 자체가 대단한 전체주의 국가였지만, 원래 사회주의사상이 낯설지 않은 서유럽 대륙국가들은 2차대전기 연합군이었던 소련의 역할만 생각해 미화해 착각했다(영국은 더했지만 세계대전이 끝난 뒤 소련 스파이 스캔들이 대대적으로 터지면서 분위기가 바뀐다). 마치 동구권 신생국 중에 독립을 도와준 조지 부시의 동상을 세워 기리는 나라가 있듯이.[14] 6.25전쟁사(3)한강선 방어와 초기 지연작전, p.228[15] 6.25전쟁(2) p.97[16] 6.25전쟁(2) pp.97-98[17] 한국군의 방어계획은 1950년 3월 25일 한국군 방어계획인 육군본부 작전명령 제38호를 확정하고 이를 국군방어계획을 하달하여 시행토록 하였다. 국군방어계획은 적의 주공이 철원-의정부-서울 척선에 지향될 것으로 판단하고 의정부 지구에 방어중점을 두고 방어지대를 편성하였다. 방어목표는 이 지역으로 공격해 오는 적의 주공을 진지전방에서 격파하여 38도선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38도선 확보를 위한 국군 방어계획의 기본개념은 다음 3가지로 구분하여 계획하였다. 첫째, 옹진지구의 육군 부대는 적의 공격시 인천으로 철수하는 것이었다. 둘째 개성지구의 육군 부대는 적의 공격을 받으면 지연전을 실시하면서 설정된 임진강 남안의 방어선으로 철수하고, 기타 다른 부대는 계속 지연전을 실시하도록 계획하였다. 셋째, 후방지역 예비사단은 적의 공격시 역습부대로 운용되도록 계획되었다. 후방지역의 경계는 경찰과 청년방위대 등으로 후방경계부대를 편성하여 관할 지역내의 해공군 부대와 협조하여 후방지역작전을 수행하도록 계획하였다. 그러나 38도선에서 적의 공격을 저지하지 못할 경우에는 남한 지역의 큰 강을 지용하여 지연전을 전개한다는 계획을 수립하였다. 6.25전쟁사(1) 전쟁의 배경과 원인 pp.641-642[18] 채병덕의 큰 실수라 지적되는 이것도 사실 너무 과도한 비판이기도 하다. 채병덕조차도 '''1950년 4월 10일에 임명되었다.'''[19] 6.25전쟁사(2) pp.783-784[20] 재미있는 것은 북한군도 이러한 병력동원능력이 부재하여 1951년 이후에는 중공군이 주력이었다는 점이다.[21] 반대로 공산진영의 경우 참전한 장병 수로 보았을 때 주력은 대체로 중공군이었다.[22] 현지 유학이나 특수 훈련 과정 등등. 이종찬 장군도 미국 유학을 다녀왔으며, 전두환, 차지철 같은 이들도 레인저 스쿨에서 훈련받은 경력이 있다. 이런 국군의 교육 훈련 지원 분야에서 크게 활약한 사람이 제임스 밴 플리트 장군이다.[23] 당장 그 채명신 장군만 하더라도 한국전쟁에서 유격전 노하우를 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