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KB48/역사

 



1. 개요
2. 2000년대
2.1. 2005년: 출발, 그리고 팀A의 등장
2.2. 2006년: 팀K의 등장과 메이저 데뷔
2.3. 2007년: 팀B의 등장과 첫 홍백 출장
2.4. 2008년: 고난과 시련, 자매그룹의 등장
2.5. 2009년: 도약, 총선거의 시작과 1차 조각
3. 2010년대
3.1. 2010년: AKB48의 시대
3.2. 2011년: 최전성기
3.3. 2012년: 1830m
3.4. 2013년: 새로운 시작과 안정기의 시작
3.5. 2014년: 대격변
3.6. 2015년: 그리고 10주년
3.7. 2016년: 뉴에이지
3.7.1. 고뇌의 48그룹
3.8. 2017년: 최악의 총선거
3.8.1. 2017년 한 해 평가
3.8.2. 팀8의 대거 겸임 참여
3.9. 2018년: 제3세대의 시기
4. 2020년대
4.1. 2020년: 15주년, 소속사 변경, 코로나19
4.2. 2021년


1. 개요


일본의 아이돌 그룹 AKB48의 역사를 정리한 문서.

2. 2000년대



2.1. 2005년: 출발, 그리고 팀A의 등장


2005년 7월, 아키모토 야스시의 주도로 '아키하바라48 프로젝트'가 발표되었다. 당시에는 'AKB48'이 아닌 '아키하바라48'이라는 가칭으로 불렸다. 전용 극장 부지로 돈키호테 아키하바라점 8층이 선정된 것은 한 달 후의 일이었다. 토가사키의 회고에 따르면, 아키모토로부터 처음 연락을 받았을 때 '쇼 펍(우리나라로 치면 나이트클럽 비슷한 곳)'을 만드는 줄 알고 자원했고, 실제로 기획서도 돈페리 등을 얼마로 할지에 대한 내용으로 보냈다고 한다. 사실 전용 극장 부지로 아키하바라의 돈키호테가 선정된 것도 이유가 있었는데, 당시 어떤 부동산을 들어가서 이야기를 해도 수상한 시선밖에 못 받았다고 한다. 신뢰를 얻을 수 있는 거라고는, 아키모토 야스시의 사진 뿐이었지만, 그걸 내밀어봐도 본인이 직접 오라는 말을 듣기 일쑤였다고. 한참을 돌아다니던 끝에 때마침 빈 공간이었던 돈키호테 아키하바라점 8층을 간신히 얻을 수 있었다고 한다.
1기생 오디션에 참가한 것은 7,924명이었는데, 이 중 서류 심사를 통과한 45명을 대상으로 10월 30일 최종 심사를 진행하였다.[1] 이 최종 심사를 통해 24명의 합격자가 추려졌고, 그 이후 극장 공연 시작을 목표로 가창과 안무 훈련에 돌입하였다.
11월 1일부터 훈련에 돌입했는데, 당시 훈련 지도를 맡은 것은 모닝구 무스메의 안무가로 유명한 나쓰 마유미였다. 12월 1일 극장공연 개연을 목표로 1개월간 나쓰 선생으로부터 집중 훈련을 받았다. 이 과정에서 24명 중 네 명이 탈락하였다. 탈락자 중에는 첫날 안무 연습에 지각했다는 이유로 나쓰 마유미가 직접 "제명 조치"를 한 사람도 있었다. 남은 20명은 11월 23일부터 전용 극장의 스테이지에서 실제 공연을 앞둔 연습을 이어나갔다.
12월 8일, 1기생의 첫 공연인 'PARTY가 시작된다구' 극장 공연이 초연되었다. 원래는 12월 1일에 시작할 예정이었으나, 나쓰 마유미가 이대로는 실력이 미숙하다는 이유로 일주일 미룬 것이었다.[2] 첫 공연에는 72명이 몰렸으나 극장 관계자와 연예부 기자들을 빼고 실제로 돈을 내고 들어온 관객은 7명에 불과했다. 당시 영상자료를 보면, 실제로 온 관객들은 중앙에 위치한 의자에 앉아있고, 업계 관계자들은 서있거나 카메라를 돌리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당연히 빈 자리가 훨씬 많은 상황. 공연이 끝나고 난 뒤의 멤버들은 "얼싸안고 펑펑 울었다"는 것밖에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2005년 겨울의 AKB48은 말 그대로 '지하의 아이돌'의 표본이었다. 첫 날 관객은 극장 관계자를 빼면 일곱 명 뿐이었고 그 이후로도 한동안 관객이 들어차지 않는 나날이 계속되었다. 1000엔짜리 티켓을 거리에 나가 무료로 나누어줘도 관객수가 한 자릿수인 날이 허다했고, 심지어 크리스마스 기념 공연을 선전하기 위해 거리로 나가 팜플렛도 돌려봤지만 관객이 오지 않은 날도 있었다고 한다. 이타노 토모미는 "저는 끝자리에 있었으니까 제가 서있는 자리에서는 관객이 한 분도 보이지 않았어요. 안무 중에서 손을 흔드는 동작이 있는데, 아무도 없는 자리를 향해서 손을 흔드는 게 정말 싫었어요. 언제쯤 되어야 저 자리에 관객이 앉아있고 내가 손을 흔들 수 있을까, 라는 생각만 들었던 것 같아요."라고 이때를 회상했다.
이 시기에는 모두들 고생을 많이 하였다. 멤버들은 아키하바라 거리에서 전단지를 돌리며 홍보를 하였다. 이 때 대놓고 비웃는 사람들이나, 면전에서 전단지를 버리고 가는 사람들 때문에 많이 상처를 입었다고 한다. 토가사키 토모노부 지배인 역시 길거리 홍보를 하였는데, 메이드 카페에 놀러온 학생을 붙잡고 '더 재미있는 거 소개시켜줄게'라며 극장으로 안내한 적도 있다고 한다. 너무나도 인기가 없었기 때문에,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황당한 기획도 많이 했다. 이를테면 토, 일요일 공연은 총 3회, 6시간 있었는데, 당연히 관객이 없는데도 공연을 치루는 날들이 훨씬 많았다고 한다. 또한 응원을 가장 열심히 한 팬에게 MVP라 해서 AKB티셔츠를 선물하는 이벤트를 했지만, 팬들의 항의로 불과 하루만에 중단되어버렸다고.
이때 당시만 해도 운영은 1군, 2군으로 나누어 활동하려는 생각이었기 때문에, 팬들에게서 그날그날 좋았던 멤버에 대해 앙케트를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어느날부터인가 그 앙케트에 당시 1기생 오디션에 탈락한 후 카페 점원으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던 시노다 마리코가 적혀 있었다고.
아키모토 야스시가 스토리를 만들기 위해 일부러 멤버들에게 고생을 시켰다는 의혹이 있지만, 이건 아키모토 야스시가 과거 아주 일순간 히트쳤던 때를 생각해 그의 연줄을 과대평가했기 때문에 발생한 오류다. 애초에 아키모토 야스시는 성공한 프로젝트보다 실패한 프로젝트가 더 많고, 일종의 먹튀까지 한 적이 있어서 업계 평판이 매우 안 좋았다. 오냥코 클럽의 대성공으로 만들어진 연줄은 이미 20년 가까이 지난 시점에서는 빛이 바랬고, 실제로 2000년대 당시의 방송 등을 살펴보면 아키모토 야스시의 이름을 찾아보기 힘들다. 더군다나 프로젝트 자체가 어마어마한 예산이 드는 프로젝트다 보니, 초기 AKB48은 자금 확보에도 굉장한 곤란을 겪고 있었다. 아키모토 야스시의 연줄을 통해서 어찌저찌 홍보가 되긴 했지만, 그럼에도 극장을 찾는 사람은 극히 소수에 불과했다. 지금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데, 이때는 단지 1000엔 정도 돈만 있으면 그냥 가서 표를 사고 관람할 수 있을 정도였다.[3]

2.2. 2006년: 팀K의 등장과 메이저 데뷔


1월 18일, 팬들의 투표를 받은 시노다 마리코에 대해 아키모토 야스시가 "4일 동안 12곡의 노래와 안무를 전부 외우면 무대 위에 서게 해주겠다"고 제안했다고 한다. 시노다 마리코는 아키모토의 요구조건을 달성했고, 마침내 1월 22일 정식으로 가입했다.
2월 1일, 인디즈 싱글[4] <桜の花びらたち>을 발표하였다. 이 곡은 첫 세트리스트인 'PARTY가 시작된다구'에 수록된 곡 중 팬들의 투표를 통해 결정된 것이었다.
2월 4일, 처음으로 극장 객석이 만원이 되었다. 즉, 250명의 관객이 마침내 채워진 것이었다.
2월 26일 후쿠오카를 시작으로, <桜の花びらたち>를 홍보하기 위한 전국캠페인투어를 시작했다. 3월 5일 히로시마, 3월 11일 나고야, 3월 12일 오사카, 3월 18일 가나자와, 3월 19일 타카마츠, 3월 25일 센다이, 3월 26일 삿포로까지 약 한 달에 걸친 투어였다.
한편 첫 싱글을 발표하고 얼마 안 된 시점인 2월 초, 2기생 오디션이 열렸다. 기존과는 다르게 일본통신회사 도코모와 함께 기획한 오디션으로, 핸드폰 화면과 화상연결해서 오디션을 진행하는 독특한 방식이었다. 이 오디션을 통해 최종합격한 19명의 소녀들이, 2월 26일 2기생으로서 AKB48에 합류하였다.
초기 운영은 멤버를 1군과 2군으로 나눌 예정이었다. 미디어 활동에는 1군 멤버들만이 나서고, 2군은 팬 투표에 따라 1군 멤버와 자리를 바꾸는 형식으로 멤버를 구성할 예정이었다. 때문에, 이미 팀A 결성 초기부터 스탭들은 멤버들에게 계속해서 "네 옆에 있는 아이는 네 동료가 아니다. 네 자리를 빼앗을 라이벌이다."라고 주입시켜왔다고 한다. 그러나 팀K의 등장으로 팀A 내에서도 더 이상 라이벌로서가 아니라 팀의 동료로서 뭉쳐야 한다는 의식이 생기기 시작했다.
초기 팀A와 팀K는 경쟁 관계였다. 2기생 모집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팀A에서는 이미 동요가 일어나고 있는 상태였다. "극장 데뷔한 지 아직 채 3개월도 안 지났을 때였으니까요. 새로운 멤버가 들어온다는 말을 듣고 '에? 우리가 그렇게 못하고 있는 거야?'라고 생각했어요."라고 마에다 아츠코가 회고했다. 스탭들은 팀K 멤버들이 아직 레슨을 받고 있을 때부터 멤버들에게 "너희들은 팀A의 땜빵일 뿐이다."라는 식의 발언을 계속해왔다고 한다. 이 때문에 팀K 멤버들 사이에서는 팀A에 대한 반발심이 생겨났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팀K는 그렇게 단결되어 있는 상태는 아니었다. 극장 데뷔 바로 전날에는 아키모토 사야카와 오오호리 메구미가 멱살잡이까지 하면서 싸울 정도로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는 상태였다. 3월 하순, 팀K 극장 데뷔가 일주일 정도 남았을 무렵, 팀A 멤버와 팀K 멤버는 첫 대면식을 가졌다.
4월 1일, 팀K의 첫공연이 열렸지만, 첫공연의 세트리스트는 팀A의 첫공연 세트리스트를 그대로 가져온 것이었다. 그러다보니, 팬들 사이에서도 팀A와 비교될 수밖에 없었고, 첫날 만원이었던 객석은 불과 3일만에 반토막이 나버렸다. 설상가상으로, 4월 8일 운영은 타카하시 미나미를 팀K 공연에 서프라이즈 출연시키기로 결정했다. 물론 타카하시 본인은 나가길 꺼렸지만, 운영의 막무가내에 어쩔 수 없이 딱 한 곡에만 출연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 한 곡에 등장했을 뿐임에도, 극장 안은 미나미 콜로 가득했다고 한다. 팀K 멤버들은 이날 이후 "타도 팀A, 타도 다카미나"를 기치로 똘똘 뭉치게 된다. 훗날, 오오시마 유코와 타카하시 미나미가 대담기획을 하는 자리에서 이 날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는데, 오오시마 유코는 "정말로 싫어했다. 미워했다. 하지만 그 덕분에 팀K가 그 정도로 단결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라고 털어놓았다.
6월 7일, 두 번째 인디즈 싱글 <スカート、ひらり>을 발표하였다. 이 곡으로 유명한 음악 방송인 뮤직 스테이션에 출연하였다. 당시 뮤직 스테이션 등 음악방송에서는 좀 독특한 뮤지션들을 발굴하는 기획을 하고 있는 중이었는데, 때마침 아키하바라에 웬 여자애 집단이 아이돌이랍시고 춤추고 노래한다는 것을 전해듣고는 출연을 요청한 것이었다. 물론 출연했을 때도, "아키바잡"이란 식의 조롱을 받았다.
7월 8일, 팀K 2nd 세트리스트 青春ガールズ 첫 공연이 열렸다. 이 공연은 팀K 오리지널 공연으로, 팀K의 퍼포먼스가 돋보이는 공연이었다. 특히 그 중 転がる石になれ는 오늘날까지 팀K를 대표하는 곡으로 자리잡았다.
7월 26일, 하나야시키 투어가 열렸다. 팀A, 팀K 멤버들이 팬들에게 직접 만든 주먹밥[5]을 전달하고, 버스를 타고 왕복 네 시간 거리의 놀이공원까지 가서 같이 놀고 오는 투어였다.
8월 22일, 공식 팬클럽인 '기둥의 모임'을 결성하였다. 기둥이란 전용 극장에 있는 두 개의 기둥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일부 좌석에서는 이 기둥 때문에 무대를 제대로 볼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전 문제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남겨둔 것이었는데 이후 극장의 상징이 되었다.
10월 25일, AKB48은 소니 뮤직의 서브 레이블인 데프스타 레코드와 계약을 맺고 정식으로 데뷔하였다. 첫 싱글은 <会いたかった>로, 지금은 AKB48의 대표곡 중 하나로 자리잡은 곡이다. 본래 会いたかった는 팀A 2nd 세트리스트의 대표곡으로, 당연히 이 싱글을 부를 멤버는 팀A로만 나올 거라고 팬들은 예상했다. 하지만 운영은 녹음하는 20명의 멤버 중 9명을 팀K로 채웠다. 자연히 우라노 카즈미 등 팀A 멤버 9명은 녹음에 참여조차 못하는 상황이 벌어졌고, 이 때문에 팀A 팬들과 팀K 팬들 사이의 경쟁이 더욱 가속화되었다.
11월 3일과 4일, 양일에 걸쳐 일본청년관에서 콘서트를 개최했다. 콘서트의 이름은 "퍼스트 콘서트 '만나고 싶었어! ~기둥이 없어!'였다. 11월 3일에는 팀A와 팀K가 각각 세트리스트 공연을 펼쳤고, 11월 4일에는 팀A가 팀K의 세트리스트 곡을, 팀K가 팀A의 세트리스트 곡을 부르는 독특한 방식을 취했다. 팀A, 팀K 서로 간에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을 질문하느라 교류가 오갔고, 이 때부터 멤버들 사이에 있던 경쟁의식이 조금 약화되었다. 한편 당시 운영에서는 1200석의 티켓을 모두 팔았다고 발표했지만, 실제로는 티켓이 남아서 천으로 빈 자리를 가려놨고, 물론 멤버들 역시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한다.
11월 하순, 3기생 오디션이 열렸다. 이 날 총 20명의 3기생이 합격했고, 12월 9일 아키하바라 DUX에서 열린 1주년 기념라이브 'NTT DoCoMo presents AKB48 1st Anniversary Live! 전부 모인 A, K, B 공연'에서 피로연을 가졌다. 이날이 팀B 멤버들 한 명 한 명이 처음으로 대중에게 어필한 때가 되었다. 그러나 피로연 후 힘든 레슨을 견디지 못한 3기생이 속속들이 탈락, 결국 남은 인원은 13명에 불과했다. 팀A의 세트리스트를 구성하는 멤버는 20명, 팀K의 세트리스트를 구성하는 멤버는 16명이었으므로, 이 세트리스트를 물려받게 될 팀B는 최소한 16~20명의 인원이 필요했다.
12월 8일, 1주년 기념공연을 가졌다. 팀A의 오리이 아유미가 기둥에 처음 분홍테이프를 붙인 것을 시작으로, 매년 이 날이 되면 기둥에 분홍테이프를 붙이는 의식이 계속되었다.
12월 중순. 공연을 마치고 대기실로 돌아온 팀A 멤버들에게 스탭이 팀A 멤버 중 4명이 팀B로 이동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당시 팀A의 모든 멤버들이 충격에 빠졌고, 타카하시 미나미를 본 스탭이 "타카하시, 넌 어때?"라고 물었다고 한다. 타카하시 미나미는 "뭐라고 말씀드리기 힘든데요"라고 간신히 대답했지만, 자신이 팀B로 간다는 생각에 머릿속이 하얗게 되었다고 회고한다. 12월 18일, 토가사키 토모노부 지배인이 팀A 멤버를 모아놓고 팀B로 이동할 멤버로 거론한 것은 우라노 카즈미, 히라지마 나츠미, 마스야마 카야노, 와타나베 시호였다. 우라노 카즈미는 훗날 "솔직히 '좌천'당하는 느낌이었어요"라고 털어놓는다.

2.3. 2007년: 팀B의 등장과 첫 홍백 출장


1월 25일, 팀A의 3rd 세트리스트 '누군가를 위해서'의 센슈락 공연이 열렸다. 이 날은 팀의 실질적 리더로서 팀원들을 이끌어왔던 오리이 아유미가 졸업함과 동시에, 팀B로 갈 3명의 멤버가 확정된 날이었다. 12월에 팀B로의 이동이 거론되었던 멤버 중 마스야마 카야노는 팀A에 잔류하기로 결정된 것에 따라, 우라노 카즈미, 히라지마 나츠미, 와타나베 시호가 이동하는 것으로 확정되었다.
3기생은 1기생, 2기생과는 다르게 AKB48이라는 것 자체를 이미 알고 있는 상태에서 가입하는 멤버가 많았다. 대표적으로 와타나베 마유, 카시와기 유키 등이 그러했다. 때문에 이미 AKB는 이렇다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들어왔고, 목적의식도 AKB가 되는 것, 이었기 때문에 합격하고 난 뒤의 3기생들은 엉망이었다. 탈락자가 많았던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고, 우라노 카즈미는 초기 팀B에 대해 단결력도 없고, 같은 동료의 실수를 감싸주기는커녕 들춰내려고 하고, 끈기도 없다고 호되게 야단친다.
3월, 첫 전국 투어인 <봄날의 맛보기 전국투어 ~아직이라구 AKB48~>를 개최하였다. 도쿄, 오사카, 나고야, 후쿠오카에서 공연이 열렸지만, 도쿄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에서의 공연은 오히려 빈 자리가 많을 정도였다. 2006년 중순부터 아키하바라 극장공연은 연일 만석을 기록했지만, 아키하바라를 벗어나면 AKB48의 지명도는 매우 낮았다.
4월 8일, 팀B가 극장데뷔를 했다. 이때의 세트리스트는 팀K 2nd 세트리스트 青春ガールズ를 그대로 가져다썼다.
이때를 즈음해서, AKB48 주요멤버들이 대거 참가하는 영화 '전염가'가 크랭크인했다. 팀A와 팀K의 많은 멤버들이 전국투어와 영화 촬영 등으로 바쁜 나날을 보냈고, 3월 한 달 동안 극장 공연이 3일에 불과할 정도로 극장에 나가지 못하는 나날이 반복되었다. 이런 현상은 6월까지 계속되었고, 공연이 불가능한 팀A, 팀K를 대신해 팀B가 공연을 이어가야 했다. 그러나 팀B에서조차도 부상자 속출, 컨디션 악화 등으로 빠지는 멤버들이 많아지면서 더 이상 공연을 이어갈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7월 1일,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히마와리조'라는 새로운 기획이 도입된다. 팀A와 팀K의 멤버들을 두 명씩 짝을 지어 팀1과 팀2로 나눈 다음, 팀1이 기본적으로 극장공연을 하되, 팀1에서 결원이 생기면 팀2에서 매꾸는 식이었다. 팬들의 투표가 없다뿐이지, 사실상 1군-2군 제도의 부활이었지만, 멤버들은 이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남겼다. 팀A의 마에다 아츠코, 팀K의 오오시마 유코 등은 각각 이 히마와리조 공연을 통해서 자신에게는 없는 부분을 찾게 되었다고 술회한다.
한편 5월에는 제1회 연구생 오디션이 열렸고, 9월에는 제2회 연구생 오디션이 열렸다. 통상 제1회 연구생 오디션에 합격한 아이들을 4기생, 제2회 연구생 오디션에 합격한 아이들을 5기생이라고 부른다. 연구생들은 특정 팀에 소속되는 것이 아니라, 극장공연에 결원이 생기지 않는 한, 나가지 못하고 계속 안무 연습을 해야했다. 당연히 앞길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많은 연구생들이 승격도 전에 자진사퇴하거나 셀렉션 탈락했다. 한편 연구생이 생겼다는 것은 기존에 활동하던 멤버들에게도 압박감으로 다가왔다. 스탭들은 "어차피 대역을 할 애는 얼마든지 있어"라는 식으로 멤버들을 압박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압박감을 느껴야 했던 이들은 팀B의 멤버들. 카시와기 유키는 "오리지널 공연 하나도 없이 선배들의 것을 물려받아 공연을 하던 시점이었기 때문에 너무 불안했어요"라고 말했다.
12월 중순, 일본에서 가장 이름난 연말 음악방송인 58회 홍백가합전에 출전하는 것이 확정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순전히 AKB48만의 힘으로 올라간 것이 아니었다. 당시 일본의 주류 매체들은 아키하바라의 오타쿠계 서브컬처에 주목했는데 이것을 '아키바 붐'이라고 불렀다. 이 아키바 붐을 조명하기 위해 아키하바라와 연관이 있는 가수를 부른 것이다. 홍백에 출장하게 된 AKB48에 대한 언론의 취재도 늘었지만, 기자들은 깔보는 시선으로 "아키바 욘쥬하치" "아키바의 오타쿠" 등으로 불렀다고 한다.
12월 31일, 홍백가합전에 출장하기 위해 NHK홀을 찾은 멤버들은 주위의 비웃음 섞인 시선을 인내해야 했다. "학예회", "아키바 모에 아이돌" 등으로 깔보는 소리를 들었다고 멤버들은 증언한다. 방송출연 역시 애니송 가수 나카가와 쇼코, 리아 디존과 함께 메들리 형식으로 무대를 선보였는데, AKB48이 출연한 것은 1분 남짓이었다. 보통의 가수가 최소 3분 이상 출연하는 걸 생각해보면 3분의 1 수준. 이때 AKB48이 부른 노래는 '<会いたかった>'였다.

2.4. 2008년: 고난과 시련, 자매그룹의 등장


1월 21일부터 24일까지 4일에 걸쳐 처음으로 「リクエストアワー セットリストベスト100」이 SHIBUYA AX에서 열렸다. 당시 대다수의 졸업생들까지 포함한 멤버가 출연했고, 1위곡은 <桜の花びらたち>였다.
1월 24일, AKB48의 첫 레귤러 방송인 'AKB 1시 59분!'이 첫 방송되었다. 이 방송은 개그맨 듀오인 배드보이즈(사타, 키요토)의 진행 아래 AKB48 멤버들이 주축이 되어 각종 미션이나 게임을 진행하는 팬을 위한 전용 방송이었다. 4월 7일부터는 방송 시간을 1시간 앞당겨 'AKB 0시 59분!'으로 리뉴얼하였고, 10월 1일에는 30분 더 앞당겨서 'AKBINGO!'로 새단장하였다. 이 방송은 오늘날까지 이어지며 AKB48의 주요 활동 기반으로 자리잡았다.
하지만 이런 여러 가지 활동을 하는 와중에도, 대중 인지도나 음반 판매량은 늘지 않았다.
1월 1일, <SET LIST~グレイテストソングス 2006-2007~>라는 제목의 베스트앨범을 시작으로, 1월 23일 <ロマンス、イラネ>, 2월 27일 <桜の花びらたち2008> 등 싱글을 차례차례 내었지만, 초동판매량은 채 2만 3천 장도 안 되었다. 2007년 이래 발매된 싱글 앨범들의 주간순위도 계속 6위~10위라는 어중간한 수준에 머무르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2008년은 AKB48 주력멤버의 나이가 전부 고등학교 졸업 및 졸업에 가까워지는 시기였다. 즉 교복과 졸업을 테마로 활동해온 AKB48의 한계가 점점 드러나고 있는 중이었다는 것이다. 초조함을 느꼈는지, 운영은 <桜の花びらたち2008> 싱글에 과도한 상술을 부렸다. 멤버 44명의 포스터를 랜덤으로 넣고 이 44명을 모두 모아오면 5년 후에 열릴 예정인 '봄의 제전'이라는 행사 초대권을 주겠다고 한 것이다.[6] 확률적으로 말이 안 되는 기획이었기 때문에 세간의 지탄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독점금지법에 위배된다는 이유로 법적 제재를 받았다. 결국 봄의 제전 행사는 취소되고 말았다.[7]
AKB48이 이렇다할 성과를 못 내고 있던 와중에 이런 사건이 발생하자, 결국 6월부터 소니 뮤직은 AKB48과의 음반 계약을 파기하고 말았다. 이후 AKB48 역사 최대의 암흑기가 전개되었다. 당시의 연구생이었던 미야자키 미호에 의하면 "그 때 시노부씨가 나한테 이제 다른길을 찾아보라고 했어" 라고 할 정도로 상황이 좋지 않았다.
상큼발랄한 댄스 곡에 수영복 PV까지 열심히 준비한 아홉 번째 싱글 <Baby! Baby! Baby!>을 6월 13일 발매했지만, CD가 아닌 전자 음원으로 발매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때문에 판매량조차 집계되지 않았고, 다만 팬들 사이에서 전설로 불릴 뿐이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10월 킹 레코드와 음반 발매 계약에 성공하였고, 10월 22일 열 번째 싱글인 <大声ダイヤモンド>를 발매할 수 있었다.[8] 지금과 같은 악수회 시스템은 이 싱글부터 자리를 잡았다[9]. 극장반 악수회가 도입된 덕분에 첫 주에만 5만 장을 넘겼고, 주간순위도 3위에 들었다. 게다가 곡이 괜찮았기 때문에, 팬뿐만 아니라 일부 대중에게도 팔리면서 총판은 10만 장을 넘겼다. 이로서 AKB48은 반등의 기회를 마련했다.
한편 4월 19일 히마와리조 2nd 세트리스트 공연 夢を死なせるわけにいかない이 센슈락 공연을 맞이하면서 히마와리조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약 9개월 정도 되는 짧은 기간 동안이었지만, 이 시기를 통해 성장한 멤버들이 다수 눈에 보인다.
히마와리조 공연이 끝난 바로 다음날인 4월 20일 팀A 4th 세트리스트 리바이벌 공연 ただいま恋愛中이 시작되었고, 5월 26일 밤 공연을 기점으로 통산 1천 회 공연을 끝맺었다. 5월 31일부터는 팀K 4th 세트리스트 공연 最終ベルが鳴る가 시작되었다. 10월 5일, 팀A 4th 세트리스트 리바이벌 공연 ただいま恋愛中 공연이 끝난 뒤, 오오에 토모미, 코마타니 히토미, 토지마 하나, 나카니시 리나, 나리타 리사 등 5명의 멤버가 동시에 졸업을 발표했다. 타카하시 미나미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원래 공연을 끝내고, 멤버들끼리 손을 잡고 '세-노'라는 구령에 맞추어 인사하는 룰이 있었어요. 그 날도 그렇게 공연을 끝낼 예정이었지만, 갑자기 누군가 살며시 손을 놓는 거에요. 나리타 리사였어요. '여러분! 드릴 말씀이 있어요!'라고 그녀가 외치자마자, 이번엔 오오에 토모미가, 코마타니 히토미가, 토지마 하나가, 나카니시 리사가 차례로 손을 들고 말했어요. 사실 전부터 그런 이야기가 있긴 했어요. 그래서 '세-노'라고 말하는 게 두려웠어요. '오늘 인사를 할 때 누군가가 이 손을 놓고 떠나버리는 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이들 다섯 멤버는 10월 11일 팀A 4th 세트리스트 리바이벌 공연 ただいま恋愛中 센슈락 공연을 마지막으로 극장공연에 출연하지 않게 되었고, 11월 23일 NHK홀에서 공연한 「まさか、このコンサートの音源は流出しないよね?」를 끝으로 정식 졸업했다.
한편 6월 1일, AKB48의 첫 자매그룹인 SKE48 1기생 오디션이 시작되었고, 7월 20일 22인의 최종합격자가 결정되었다. 여기에 AKB48에서 나카니시 유카가 이적하면서 총 23인의 멤버가 되었다. 이들 멤버는 8월 23일 열린 AKB48 콘서트 「ライブDVDは出るだろうけど、やっぱり生に限るぜ!AKB48夏祭り」에서 첫 선을 보였고, 극장공연은 10월 5일 팀A 1st 세트리스트인 PARTY가 시작된다구! 를 그대로 가져다가 쓴 것이었다.
야심찬 시작과는 달리, 별 기대를 못 얻고 있던 SKE48이었지만, AKB48의 팬들에게까지 충격을 준 사건이 벌어졌다. 10번째 싱글이자 일종의 전환점으로 불릴 <大声ダイヤモンド>의 센터에 SKE48의 멤버 마츠이 쥬리나가 전격 발탁된 것이었다. 당시 그녀의 나이가 11살이었을 때였지만, 아키모토 야스시는 오디션장에서 그녀를 보자마자 "원석을 발견했다"고 흥분한 상태로 타카하시 미나미에게 전화했다고 한다. 마츠이 쥬리나 센터 발탁을 계기로 SKE48이 AKB48의 팬들에게까지 널리 알려졌지만, 마츠이 쥬리나 본인에 대해서는 무수한 안티가 생기는 결과가 되고 말았다.
2007년 홍백에서 갖은 손가락질을 받았던 AKB48은 2008년 홍백에 출장해 설욕할 것을 다짐했지만, 결과적으로 홍백에 출장하는 가수 명단에 AKB48은 없었다. 아키모토 사야카는 직접 NHK 홀에 가서 닫힌 문을 보면서 각오를 다졌다고 하고, 카사이 토모미는 집에서 가족들과 함께 홍백가합전을 보면서 분함을 삭혔다고 한다.

2.5. 2009년: 도약, 총선거의 시작과 1차 조각


1월 18일부터 21일에 걸쳐, AKB48 リクエストアワーセットリストベスト100이 시부야 AX에서 개최되었다. 전년도에 이어 두번째였지만, 이때에 대한 멤버들의 코멘터리 영상을 보면 도무지 순위를 예측하지 못했다고들 한다. 1위부터 3위까지의 곡들이 전부 처음으로 권내에 오른 곡들이고, 특히 1위곡인 <初日>은 팀B의 곡이었다. 팀A도, 팀K도 아닌, 순수하게 팀B의 멤버만으로 무대에 오르는 것이 1위곡이라는 사실에 당황하는 멤버들의 모습도 보인다.
2009년은 AKB48에 있어 마지막 찬스였다, 라고 아이돌 평론가들이 이야기한다. 그도 그럴 것이, 주력멤버인 마에다 아츠코, 타카하시 미나미, 이타노 토모미 등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성인이 되는 해였기 때문이다. 교복과 졸업이라는 양대 테마를 가지고 활동해온 AKB48의 한계가 점점 보이는 듯했다.
이런 한계점이 가장 먼저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유력 멤버였던 오오시마 마이의 졸업이었다. 2월 21일, 그녀는 "4월 26일 NHK홀 콘서트를 마지막으로 정식으로 AKB48을 졸업합니다"라고 밝혔다. 데뷔초부터 당시까지 그룹의 초인기 멤버로 분류되면서, 예능감 등으로 폭넓게 활동했던 오오시마 마이의 졸업이 팬들에게 던진 충격은 매우 컸다. 그뿐 아니라, 설상가상으로 2월 27일에는 1기생부터 활동해온 멤버 카와사키 노조미도 졸업을 발표했다. 이제 시노다 마리코를 포함해도 1기생은 9명에 불과했다.
3월 4일, 11번째 싱글인 <10年桜>를 발매, 초동판매량 약 6만 6천 장에 이르는 준수한 성적을 기록했다. 특히 이 싱글의 PV에서 오오시마 유코가 임산부 역할을 연기하는 등 그동안 아이돌 그룹에서 터부시되는 연출을 해서 화제를 불러모았다.
4월 1일, 후지TV 프로듀스의 아이돌 그룹, 아이돌링구!!!와 함께 콜라보해 CD를 발매했다.
4월 26일, NHK 홀에서 콘서트 '신(神)공연 예정. ~제반 사정에 의해 신(神)공연이 될 수 없는 경우도 있으므로 이해해주세요'가 열렸다. 인디즈 싱글부터 최신 싱글에 이르기까지 3년 동안의 AKB48 역사를 쭉 둘러보는 연출로 구성되어 있었다. 또한 6월 23일 발매 예정인 <涙サプライズ!>의 첫 피로연도 이때 가졌다. 그리고 피로연이 끝나는 순간, 오오시마 마이, 카와사키 노조미, 하야노 카오루 등이 무대 위로 올라와 졸업 세레모니를 열었다. 그리고 이 날, 그 유명한 서프라이즈가 열렸다. 졸업 세레모니까지 모두 마치고 멤버들이 무대를 내려온 순간, 스크린에 VTR이 띄워진 것이다. VTR에는 토가사키 지배인이 기자회견을 하는 형식으로, "8월 26일 발매될 예정인 새 싱글을 부를 멤버를 팬들이 선택하게끔 하는, AKB48총선거를 개최하겠다"라고 발표했다.
팬들 사이의 인기를 통해 노래를 부르고 방송에 나갈 멤버들을 결정한다는 충격적인 소식은 멤버들에게 각각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이때 타카하시 미나미는 "'에? 설마, 진짜로 하는 거야?'라는 느낌이었어요. '어째서 이런 타이밍에 멤버들에게 순위를 매기려 하는 걸까'라는 생각도 했어요."라고 털어놓는다. 미네기시 미나미는 이 소식을 듣자마자 화장실로 달려가 문을 잠그고 눈물을 펑펑 쏟았다고 한다. "솔직히 21명 선발 멤버에 들 자신이 전혀 없었거든요. 그때까지 CD를 낼 때마다 선발에 들기는 했지만, 제가 선발에 뽑히는 이유도 알 수 없었고요. 저 자신은 제가 인기가 전혀 없다고 생각했었고, SKE나 연구생까지 합치면 98명이나 되는 인원 중에서 팬분들이 제게 투표해주시는 모습도 상상이 되지 않았어요. 엄청 상심해서 울고 있으려니 다카미나가 화장실까지 찾으러 와서 위로해주었어요. 그런데도 전 '어차피 넌 선발멤버에 들어가니까 그런 말 할 수 있는 거잖아'라고 괜한 화풀이를 했었어요." 당시 팀A로 막 승격된 미야자키 미호는 "저는 절대로 선발에 못 들 거라고 생각했어요. 연구생에서 정식멤버가 된 지 1년도 안 되었을 때니까요. 같은 팀의 오리지널 멤버 선배분들은 벌써 3년 반이나 활동하고 계신 거니까 팬의 수도 차원이 다르죠. 동기들에게 물어봐도 한결같이 '우리는 무리야'라고 이야기하고 있었고..."라고 털어놓았다. 이처럼 멤버들이 느낀 불안은 가지각색이었지만, 그 중에는 희망을 느낀 멤버들도 있었다. 지금껏 한 번도 선발에 들지 못했던 멤버들은 "이게 내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일지도 몰라."라고 희망을 품었다.
6월 23일, <涙サプライズ!>가 발매되었다. 이미 발매 이전부터 요미우리신문 창간 135주년 응원곡이자 요미우리 자이언츠 창설 75주년 기념 응원곡으로도 선정되었기 때문에, 대중들에게 널리 익숙한 곡이 되었다. 그 결과 처음으로 초동 10만 장을 넘게 되었고, 주간순위도 2위라는 최고기록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멤버들은 이것을 편하게 받아들일 수만은 없었다. <涙サプライズ!> 싱글 안에는 팬들이 다음 싱글을 노래할 멤버를 투표하는, 선발 투표권이 동봉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즉, 지금부터 얼마나 열심히 자기어필을 하냐에 따라 다음 싱글을 부를 수 있을지, 없을지가 결정된다는 것이었다.
6월 24일, '1회 총선거 ~신에게 맹세코 진짜입니다'의 속보결과가 발표되었다. 10위권 이내에는 그동안 선발멤버에 포함되었던 멤버들이 대부분이었지만, 11위권 이하부터는 도저히 예상할 수 없는 순위들이었다. 사토 아미나, 마스다 유카 등 지금껏 선발에 참여하지 못한 멤버들도 있었다.
7월 1일, 중간결과가 발표되었는데, 이때 주력멤버 중 22명은 파리에서 개최되는 JAPAN EXPO에 참가하기 위해 비행기를 타고 가는 중이었다. 이들 멤버들은 일부러 중간결과에 대해 보지 않으려 했다고 한다.
7월 8일, 마침내 선발총선거 결과가 아카사카 BLITZ에서 발표되었다. 객석은 만원으로 약 1천명에 달하는 팬들이 이 광경을 눈으로 직접 볼 수 있었다. 개표 전에 앞서 <涙サプライズ!> 라이브가 시작되었지만, 멤버들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전혀 없었다. 마침내 시작된 개표는 21위부터 발표되었다. 사실 1위부터 21위까지를 선발이라고 해도 이 선발 내에서도 두 부류로 나뉘었다. 1위부터 12위까지를 미디어 선발, 13위부터 21위까지는 그냥 선발이었다. 곡 선전을 위해 TV나 잡지 등에 나올 수 있는 멤버들은 따로 '미디어 선발'로 분류했기 때문에, 12위와 13위 사이의 벽은 매우 컸다. 발표는 13위까지 발표후, 22위부터 30위까지의 언더걸스 발표로 넘어갔다. 언더걸스 발표 후에 미디어 선발 발표하는 식으로 배치된 것이다. 그리고 놀랍게도 미디어 선발 첫 발표 순서인 12위에는 지금까지 한 번도 선발에 든 적이 없는 아키모토 사야카가 불리게 되었다.
1회 총선거는 정말 시기가 묘하게 맞아떨어졌다고 할 수 있다. 당시는 일본 중의원 선거가 한참일 때였다. 일본에서는 정치에 대한 관심도는 매우 낮지만, 정치와 비슷한 시스템으로 팬들이 직접 노래 부를 멤버를 결정한다는 시스템은 언론은 물론 평론가들, 더 나아가 대중의 관심을 끌었다. 여러 예술가들이 포스터와 자켓 등을 그리는 데 자원했고, 요미우리 신문사는 창간 135주년 이미지 캐릭터로 AKB48을 선정했을 정도였다. 다방면의 사람들이 AKB48에 접촉해 와, 자사의 이미지 캐릭터나 캠페인의 홍보 등을 부탁하기도 했다. 그야말로 인지도를 폭발적으로 끌어올리는 계기가 된 이벤트였던 것이다.
한편, 8월 중순 AKB48은 다시 전국투어를 기획한다. 2007년 4월 이후로 2년만이었다. 이때의 전국투어는 독특한 방식을 취했는데, 팀A는 후쿠오카, 팀K는 오사카, 팀B는 아이치 식으로, 팀별로 각각 다른 지역에서 공연을 펼치는 구성이었다. 그래서인지 투어의 명칭도 '분신술 투어'였다. 2007년 전국투어와는 달리, 2009년의 전국투어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가는 곳마다 환영을 받았고, 콘서트회장도 거의 만원이었다.
그리고 투어가 끝나고 약 일주일이 지난 8월 22일, 모든 팀이 도쿄 무도관에 모여 전체공연을 펼치게 되었다. 그리고 이 무도관에서 AKB48에 재차 지각변동이 일어났다. 'AKB 104조각축제'라는 타이틀부터가 멤버들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당시 사토 유카리는 SDN48으로 이적이 결정되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타카하시 미나미가 "조각이라는 게 대체 무슨 소리냐"라고 타이틀명을 두고 스탭과 말다툼을 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고 한다. 스탭은 타카하시 미나미를 달랬지만, "그래요, 어른들은 항상 그렇게 거짓말을 하죠"라고 말했다고 한다. 사토 유카리를 발견한 타카하시 미나미는 먼저 그녀에게 "설마 떠나는 건 아니지?"라고 물었다고 한다. 도무지 사실을 말할 수 없던 사토 유카리는 "응"이라고 거짓말을 해버렸다고.
결국 조각은 예정대로 단행되었고, 이때부터 공식적으로 '캡틴'이라는 제도가 생겼다. 팀A는 타카하시 미나미, 팀K는 아키모토 사야카, 팀B는 카시와기 유키가 각각 캡틴이 되었다. 한편 팀A에서 이타노 토모미, 미네기시 미나미가 팀K로 이동하는 등의 멤버 구성에도 변화가 생김과 동시에 노로 카요, 사토 유카리 등을 SDN48으로 이적시켜버렸다. 이 조각은 팀별의 색채를 더욱 부각시켰다는 점에서 팬들에게 호평을 사기도 한다. 이전의 각 팀들에게도 나름대로의 색채가 있었지만, 이 조각을 통해 그것이 한층 더 명확하게 부각되었다는 점 때문이었다. 또한 캡틴을 뽑은 것에 대해서도 팬들 역시 수긍하고 있다. 아무래도 많은 인원수가 있다 보니, 팀 중에서도 누군가 앞으로 나서서 이야기할 사람이 필요한 법이니까. 타카하시 미나미, 아키모토 사야카는 기존에도 각각 팀A와 팀K를 이끌어왔던 멤버였기 때문에 팬들도 수긍했지만, 카시와기 유키가 팀B의 캡틴이 된 것에 대해서는 카시와기 본인도, 그리고 팬들도 당황했다. 무대 위에서 타카하시 미나미가 어떻게든 정리 코멘트를 하고 넘어갔지만, 무대 뒤에서는 난리가 벌어졌다고 한다. 기절한 멤버, 쓰러져서 우는 멤버, 소리지르는 멤버 등등.
비록 멤버들은 엉망진창이 되었지만, 예정대로 8월 26일, 1회 총선거의 결과에 따라 선발 멤버를 배치한 싱글 <言い訳Maybe>는 8월 26일 발매되었다. 초동판매량은 이전 싱글보다 살짝 떨어진 9만 장에 그쳐 아쉬움을 남겼지만, 소녀다운 매력이 한껏 살아있는 곡과 뮤직비디오로 8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팬들 사이에서 레전드라 불리며 사랑을 받고 있다.
내각 조성 이후 10월 21일 발매한 싱글 <RIVER>의 테마인 '강'은 아키모토 야스시가 일전에 쓴 명곡 '흐르는 강물처럼'과 같은 테마를 가지고 있다. 노래의 가사에서도 멤버들에게 좌절하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라는 메시지성이 강하게 느껴진다. "네 눈 앞에 강이 흐르고 있다. 넓고 큰 강이. 어둡고 깊어도, 물살이 빠르다고 해도, 무서워하지 않아도 돼. 떨어져 있어도 강 건너편에는 물가가 있으니까." 종래 귀엽고 발랄한 아이돌의 전형적인 노래에서 갑자기 강렬한 메시지성 노래로 바뀌었기 때문에 일부 호불호가 갈리긴 했지만, 초동판매량 17만 8천 장을 기록했고 첫 주간차트 1위를 달성했다.
11월 21일, 엠넷 아시안 뮤직 어워드에 출연했는데, 마루노우치 빌딩 1층에서 공연을 하는 모습을 위성생중계하는 방식으로 무대를 선보였다. 이때 선보인 곡이 바로 <RIVER>. 한국 내의 팬덤에서는 곡 선정은 괜찮게 했다는 평을 들었다.
12월 4일, 8기생 10명이 무더기로 셀렉션 심사에서 탈락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AKS는 "8기생이 나태한 태도를 보였다."라는 것을 주요 사유로 설명했다. 실제로 8기생 멤버 중 많은 멤버가 안무연습에 지각을 하고 허가없이 블로그를 운영하는가 하면, 선배를 뒷담하는 내용들을 블로그에 올렸다가 들키는 등의 소동이 일어난 적이 있었다. 하지만 10명이 전부 그랬던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일부 팬들은 연구생이 너무 많아지니까 구실을 붙여서 해고한 거 아니냐고 반발하기도 했다.
12월 31일, 홍백가합전에 출장하는 데 성공했다. 2007년에도 홍백에 나간 적이 있지만, 순전히 그룹의 인기로 나간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RIVER>, <涙サプライズ!> 등을 불렀고, 2009년 기준 역대 최다인원 출장 기록을 남겼다. 때마침 홍백가합전이 60주년을 맞이하는 해였기 때문에, 멤버들이 모여 60이라는 문자를 만들고 "60주년 축하합니다!"라고 외치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3. 2010년대



3.1. 2010년: AKB48의 시대


운영진 측에서는 이 시기 나이가 어린 멤버들을 적극적으로 전면에 내세웠다. AKBINGO! 방송의 '에케레인저' 기획을 통해 연구생들의 이름을 알렸고, 코모리 미카는 아예 <涙サプライズ!> 싱글의 선발에 넣어주기까지 했다. 코모리를 비롯해 미야자키 미호, 오오타 아이카, 사토 스미레 등은 실제로 차세대 에이스로 각광을 받았다. 그러나 이들 모두 미디어 선발에 들지 못한 채 세월이 흘러 매력을 잃고 말았다. 대외적으로는 인기를 점점 더해가던 AKB48이었지만, 내부적으로는 기존의 인기 멤버 이외에 새로운 인기 멤버가 나타나지 않는 문제가 이어졌고 결국 이 문제는 2년 후 세대교체라는 이름으로 터지게 된다.
2010년도에도 총선거가 열림이 알려졌다. 2009년은 그들만의 리그의 느낌이었지만, 1년 사이에 많은 변화가 있었고 홍백, 악곡들의 성공으로 AKB와 총선거는 전례가 없을정도로 큰 주목을 받았다.
2010년에도 총선거는 열렸다. 이 해에 열린 2회 총선거에서는 오오시마 유코가 마에다 아츠코를 꺾고 1위에 오르는 파란이 일어났다. 이전까지도 마에다와 오오시마는 팬들 사이에서 라이벌로 여겨졌지만, 이 이후 각종 매스컴에서도 둘을 라이벌 관계로 보도하기 시작했다. 마에다와 오오시마의 라이벌 관계는 이후 AKB48이 주목을 받는 계기이자 동력이 되었다. 미디어에서 지속적으로 둘의 라이벌 관계에 대해 다루면서, 이전까지 AKB48에 관심이 없던 이들도 '마에다 아츠코'와 '오오시마 유코'라는 이름만큼은 알게 된 것이다.
총선거, 오리콘차트 1위, 홍백가합전 출전 등으로 얻은 지명도를 바탕으로 AKB48은 점점 대중들에게도 이름을 알려나갔다. 이렇게 상승세에 오르던 AKB48에게 전성기를 가져다 준 것은 2010년 발표한 <ポニーテールとシュシュ>과 <ヘビーローテーション>이었다. 이 두 장의 싱글은 모두 폭 넓은 계층으로부터 사랑을 받으며, 이전까지 오타쿠 전용 그룹으로 치부되었던 AKB48이 대중들로부터도 인정받았다는 것을 널리 알렸다. 특히 <ヘビーローテーション>는 발매 3년이 지난 2013년까지도 노래방 차트 상위권에 드는 등 국민적인 히트곡으로 자리매김했다.
10월에 발표한 싱글 <Beginner>는 <RIVER>를 이어서 격렬한 댄스와 젊은 이들에게 힘을 북돋워주는 가사를 내세웠다. 이 곡은 첫 날 판매량만 56만 장을 기록한 것을 시작으로 첫 주에 82만 7천장이나 팔아치웠다. 그 후로도 차트에 계속 진입하면서 결국 밀리언 셀러를 기록했다. 악수권 등의 상술이 있다고는 했지만, 음반 시장이 침체된 2010년대에 밀리언 셀러가 탄생한 것에는 모든 이들이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 해에 총선거에 이어서 AKB48은 새로운 이벤트를 기획하였다. 가위바위보로 선발 멤버를 뽑는 '가위바위보 대회'가 바로 그것이다. 5기생으로 그동안 무대 뒤편에서 주목을 받지 못했던 우치다 마유미가 가위바위보의 힘으로 센터에 섰다. 가위바위보 대회를 통해서 그동안 선발에 들지 못했거나 극장 한 구석에서 묵묵히 활동하던 비인기 멤버들이 선발에 많이 뽑혔다. 그러나 우치다를 비롯해서 가위바위보를 통해 선발에 든 멤버들은 인기가 그리 늘어나지 않아서, 선발 멤버로 들어간다고 해서 반드시 인기가 생기는 것은 아니라는 선례를 남기고 말았다.
전성기에 오른 AKB48에는 여전히 정규 멤버 자리가 부족하다는 문제가 남아있었다.[10] 이미 2009년부터 불거져서 8기생의 전원 사퇴라는 극단적인 사태로 번졌는데, 2010년에 와서는 오히려 문제가 더 심각해졌다. 이미 국민적 아이돌이 된 AKB48에 소속되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메리트가 되었기 때문에 그 누구도 졸업을 하지 않으려 했던 것이다. 'AKB48'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으면 하다못해 새벽 예능프로 게스트로라도 활동을 할 수 있었다. 이로 인해 가장 피해를 많이 입은 것은 8기생과 9기생이었다. 특히 9기생은 일단 승격은 했지만 팀에 속하지 못한 채 '팀 미정 정규 멤버'라는 애매한 위치에서 활동해야 했다. 정규 멤버기는 하지만 소속 팀이 없기 때문에 실질적인 취급은 연구생과 똑같았다.
여담이지만 이 시절의 성공으로 멤버들은 성공에 취하지 않았다. 워낙에 과거에 고생을 해서 언제 AKB가 급락할까봐 잠을 설쳤다고 한다. 아키모토 야스시를 비롯한 AKB멤버들은 "다음 싱글에 판매량이 급감 할 수 도 있으니 열심히 하자" 라는 마인드로 열심히 했다. 그만큼 AKB의 인기는 아닌 밤중에 홍두깨 처럼 와버린것이다.

3.2. 2011년: 최전성기


2011년 1월, 팀K 멤버 이타노 토모미가 솔로 앨범을 내면서 데뷔하였다. AKB48 멤버가 정식으로 솔로 음반을 발매한 사례는 이번이 처음이었다.[11] 평소 세련된 이미지와 화려한 패션 스타일로 여고생들의 지지를 받으면서 다른 멤버들과는 차별화된 노선을 걷던 이타노 토모미의 솔로 데뷔는 전국적으로 큰 주목을 받았다. 그녀의 첫 싱글 'Dear J'는 AKB48에서 보여주던 것과는 다른 화려한 일렉트로니카 스타일의 곡으로 호평을 받으며 총 판매량 20만 장을 돌파했다.[12]
2011년의 AKB48은 대규모 콘서트 '다카미나를 따르겠습니다'와 함께 막을 올릴 예정이었다. 그러나 때마침 일본 열도를 덮친 도호쿠 대지진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로 인해 이 콘서트는 취소되고 말았다. AKB48은 자연재해가 휩쓸고 지나간 일본에 생기를 북돋우기 위한 활동에 들어갔다. 그 일환으로 활동으로 얻은 수익과 싱글 판매 수익의 일부를 재해 복구를 위해 기부하는 '누군가를 위해서 프로젝트'를 시작하였다. 또한, 큰 피해를 입은 이와테, 미야기, 후쿠시마를 방문하여 무료 공연을 열면서 상처받은 이재민들의 마음을 달래주기도 하였다.
6월 열린 3회 총선거는 근 10년간 유례가 없을정도로 엄청난 아이돌 이벤트가 되었다. 언론과 기자들이 각 멤버들을 주목하고 AKB라는 브랜드 가치는 하늘을 찔렀다. 총선거에서 AKB의 센터 마에다 아츠코가 다시금 오오시마 유코를 꺾고 1위에 올랐다. '헤타레 아이돌' 사시하라 리노는 9위에 올랐고, 9기생 중에서 가장 먼저 푸시를 받았던 요코야마 유이는 19위로 올랐다. 2011년 총선 싱글 <フライングゲット>은 첫 날 판매량만 100만 장을 넘겼고, 노래방이나 디지털 음원 차트에서도 오랫동안 사랑받는 등 <ヘビーローテーション>에 이은 AKB48의 대표곡으로 자리매김했다.
2011년 6월, 네 번째 팀인 팀4가 만들어졌다. 정규 멤버로 승격을 했지만 자리가 없어서 '팀 미정'이라는 애매한 위치에 있던 9기생과 10기생 10명을 위해 아예 팀을 새로 만든 것이다. 멤버들은 저마다 승격하고 싶은 팀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 지지기반이 없는 새 팀에서 활동해야 한다는 사실에 대해 당황하였다. 팬들 사이에서는 기존의 팀에 들어가서 선배들에게 눌리느니 차라리 자기들만의 팀에서 활동하는 것이 좋다는 의견과, 선배가 없는 환경에서 제대로 클 수 있겠냐는 의견이 충돌하였다.
10월 10일 팀4의 극장 공연 '나의 태양'이 시작되었다. 이후 AKS에서는 '바카레아 고등학교'라는, 팀4 멤버들만이 출연하는 드라마까지 잡아주는 등 푸쉬를 끊임없이 했지만, 팀4는 이렇다할 성과를 얻지 못하고 헤매었다. 초기 팀들은 극장 공연을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유대감을 가질 수 있었지만, 팀4 멤버들은 각자 방송, 싱글, 잡지 활동 등으로 인해 흩어지면서 팀으로서 꼭 필요한 협동심을 가지지 못하였다.[13] 그런 와중에 멤버인 오오바 미나모리 안나가 스캔들을 일으키면서 팀4는 위기에 빠지지만, 시마다 하루카의 리더십 덕택에 그럭저럭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2011년 12월 23일 뮤직 스테이션 슈퍼라이브에 참가하여 출연자 중 최다인 3곡을 불렀는데, 인원수가 인원수인 만큼 카메라웍 테러와 음악방송 LED 테러를 당하고 말았다. 일본 세븐일레븐을 비롯한 7&i 홀딩스의 광고 모델로 활약하고 있다. 특히 그룹차원에서 크리스마스 케이크 판매 때는 타이업곡을 내는데, 그 위력을 강하게 발휘한다고 한다.[14]
2011년의 AKB48은 일본을 벗어나 아시아를 비롯한 세계무대를 향해 외국 진출을 모색하였다. 우선 싱가포르타이페이에 AKB48 관련 캐릭터 상품을 판매하는 점포인 'AKB48 오피셜 숍'을 개점하였다. 또한, 인도네시아JKT48, 중국SNH48 등 아시아 각지에서 활동하는 AKB48의 자매 그룹을 만들었다. 이들 자매 그룹은 현지의 여성 멤버들이 주축이 되어 활동하며, 그룹의 운영과 자금 조달은 모두 현지 연예 기획사와 스폰서 기업이 맡는 형식으로 운영되고 있는 중이다.
구글 재팬은 48 그룹과 협력해서 자사의 구글 플러스를 홍보한다는 마케팅 전략을 세웠다. 12월 8일, 'AKB48 on Google+'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48 그룹에 소속된 모든 멤버들에게 구글 플러스 계정을 만들고 팬들과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한다는 것이었다.

3.3. 2012년: 1830m


3월 23일부터 25일까지 사이타마 슈퍼 아레나에서 콘서트 '업무연락. 부탁한다, 카타야마 부장!'을 개최했다. 이 무대는 여러모로 뜻깊은 자리였다. 우선 AKB48이 데뷔 당초부터 목표로 삼았던 도쿄 돔 공연이 발표되었고[15], 부동의 센터 마에다 아츠코가 그룹을 졸업한다는 것, 그리고 4회 총선거에 출마하지 않겠다는 것을 발표했다.
4회 총선거는 오오시마 유코가 2위와 3만 6천여 표 차이로 1위를 차지했다. 마에다가 불출마를 선언한 이후 1위는 너무나 예견된 상황이었지만, 그 아래 순위에서는 혼전이 계속되었다. 카시와기 유키와타나베 마유에게 밀려 3위로 떨어졌고, 사시하라 리노는 4위로 껑충 뛰어올랐다. NMB48의 에이스 와타나베 미유키와 SKE48의 예능돌 하타 사와코가 각각 19위와 25위에 오르는 등 자매 그룹의 활약도 이어졌다. 반면 7기생들과 팀4 멤버 등 AKB48의 미래를 이어나가야 할 멤버들은 부진한 성적을 거두고 말았다.
8월에는 네 번째 정규 앨범 <1830m>을 발표했다. 1830m는 아키하바라 돈키호테 8층의 AKB48 극장으로부터 도쿄 돔까지의 직선 거리를 뜻한다. 8월 25일 열린 도쿄 돔 콘서트에서는 두번째 팀 셔플이 이루어졌다. 제3차 팀 체제는 팀4를 없애는 대신 팀4 멤버들을 팀A, 팀K, 팀B로 분산하고 팀 정원 제도를 없애는 것을 골자로 하였다. 대신 인기 여하에 따라 공연에 항상 나갈 수 있는 스탠다드 멤버 16명과 언더 멤버(스탠바이 멤버)를 가르는 '슈퍼 서브' 제도를 도입하였다.[16] 이와 함께 일부 멤버를 HKT48, JKT48, SNH48로 옮기고 SKE48, NMB48에서 겸임 멤버를 들여옴으로써 AKB48의 총 멤버는 73명이 되었다. 도쿄 돔 콘서트와 마에다 아츠코의 졸업이라는 상징적 사건을 계기로 AKB48의 제1장이 끝남과 동시에, 새로운 멤버들이 무대 전면에 서는 AKB48 제2장이 시작함을 알리는 것이었다.[17]
이 후 와타나베 마유사시하라 리노등은 이미 인기가 있었기에 적절하게 푸쉬했으나, 특징적인것은 마에다 아츠코의 졸업을 대비해서 본격적으로 다음세대의 중심인 시마자키 하루카를 광 푸쉬에 들어가게 된다.
AKB48로써의 문제는 상당한 인지도를 갖게된 1기, 2기 주역들이 더이상 어리지 않다는 점이었다. 이들은 2012년 시점에서 이미 6년 이상 활동한 멤버가 대부분이었다. AKB의 엄청난 성공으로 이들은 그룹의 바깥에서 활동할 수 있다는 희망도 생긴 시기였다. 아이돌 수명자체가 짧기 때문에 인기멤버들은 자신의 진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한다. 때문에 AKS는 향후 2~3년안에 인기멤버의 졸업을 대비해서 다음세대 육성이 필요해졌다. 10기의 카토 레나, 이리야마 안나, 11기의 카와에이 리나 등이 2012년부터는 트리오로 푸쉬를 받기도 했다.
다행스럽게 시마자키 하루카는 쟝켄대회 우승을 하고 화제를 얻게된다. 또한 연말 멧챠이케에서 소금캐릭터로 존재감을 뽐내며 상당한 인지도를 얻은것도 좋았다.
유일한 흠은 10월 31일 발매된 댄스넘버 UZA의 비평이 썩 좋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과정과는 별개로 총선거, 악수회, 극장에 사람들도 적응하면서 AKB48 자체가 슬슬 신선함 부분에서 한계가 보이던 시점이 다가왔다. 정점을 찍었던 AKB48의 신화는 2012년 가을 기점으로 조금씩 하락 곡선을 그리면서 안정기에 돌입한다.

3.4. 2013년: 새로운 시작과 안정기의 시작


1월 31일 미네기시 미나미의 스캔들이 터졌다. 대개라면 본인의 이미지에 큰 타격을 입고 그룹 측에서 근신이나 선발 제외, 연구생 강등 정도의 조치[18]를 취하는 정도로 끝났겠지만, 미네기시 본인이 '''삭발'''을 하고 눈물과 함께 사죄하는 영상이 유튜브 AKB48 공식 채널을 통해 올라오면서 전 세계인들에게 보여지게 되었고, 한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의 언론에 보도되었다.
팬들이 아닌 일반인의 입장에서는 (특히 서양 쪽에서는 더더욱) 이해하기 어려웠던 일이었던지라, AKB48 및 그룹 내의 연애금지 규정에 대해 비판적인 기사들이 각국에서 쏟아졌다. 논란이 일자 그룹 운영진 측은 문제의 영상을 삭제했고, 2013년 7월 이후 연애금지 규정은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19]
5월 6일 AKB 극장 3000번째 공연을 연구생 공연 パジャマドライブ가 장식했는데, 2005년 첫번째 공연 멤버였던 미네기시 미나미도 연구생으로 출연했고 이에 대해 토가사키 지배인은 "미네기시가 무대에 서서 이야기하는 것을 보니 극장에 이상한 기운이 흐르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고 코멘트. [20]
5월 22일 발매된 31번째 싱글 さよならクロール은 첫 주 176만여 장, 총 194만여 장을 판매하며 SPEED가 갖고 있던 여성 아이돌 단일 싱글 판매량(184만 장)과 하마사키 아유미가 갖고 있던 여성 아티스트 싱글 누계 판매량(2141만 장. 갱신 후 2185만 장) 기록을 동시에 뛰어넘었다.
6월 8일 개최된 5회 총선거에서는 사시하라 리노가 스캔들이라는 악재에도 불구하고 압도적인 1위를 차지하였다. 새로운 센터의 탄생이 맞긴 한데... 사시하라가 정통 아이돌 스타일의 멤버는 아닌데다가 92년생이라는 나이도 '차세대'로 나가기에는 다소 많은 편이라, 세대교체를 위한 운영진의 노력은 계속될 듯.
그래도 차세대 센터로 불리는 와타나베 마유가 상위권을 유지하고 있고, 마츠이 쥬리나시마자키 하루카 같은 푸쉬멤버들이 꾸준히 순위를 끌어올리고 있어 절반의 성공으로 보는 의견도 있다.
7월 20일부터 8월 25일까지 도쿄 / 나고야 / 오사카(쿄세라) / 후쿠오카 / 삿포로의 5대돔 투어 콘서트를 개최했다. 여기서 상당히 많은 변화가 발표되었는데, 우선 기존 13~14기 연구생들을 포함하며 이들과 함께 연구생 공연을 이끌어오던 미네기시 미나미를 캡틴으로 하는 신 팀4의 출범이 발표되었다. 또한 드래프트 제도가 신설되어, 11월 10일 드래프트 회의를 통해 총 20명의 드래프트생이 AKB48 및 자매그룹에 소속되게 되었다. AKB48/드래프트 항목 참조.
그리고 48그룹의 근간이 되어왔던 극장 공연이 CD 싱글 발매나 미디어 출연 등에 우선순위가 밀려 몇 년씩 묵힌 세트리스트로 때우는 일이 많아져 진부하다는 비판을 받자, 2014년 중순까지 전 팀의 새로운 오리지널 공연 공개 계획도 발표되었다. 문제는 예정된 날짜에 맞춰 공연이 시작되지 못 할 확률이 극히 높다는 점. 가장 먼저 예정되어있는(그리고 발표 이전부터 오리지널 공연을 주겠다고 공언해오던) 팀N의 신공연도 미루고 미루어진지가 반 년이 넘은 상태니 다른 팀은 말할 나위도 없을 정도.
여기에 드래프트 회의에서는 뜬금없이 2014년부터 각 극장 공연의 추첨 배율에 따라 팀간 순위를 정하는 페넌트레이스를 펼친다는 발표로 팬들과 멤버들을 어리둥절하게 했다. 극장 공연의 배율은 각 팀이 잘하고 못하고라는 내적 부분을 떠나 인기 멤버가 공연에 나오나 혹은 신공연으로 눈길을 끌 수 있는가와 같은 외적인 부문에 크게 좌우되기 때문.
2013년에는 카미7 멤버였던 1기생 시노다 마리코이타노 토모미를 비롯, 2기생 카사이 토모미, 마츠바라 나츠미, 아키모토 사야카까지 총 5명의 1~2기생이 졸업함으로써 그룹의 세대교체 흐름을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이렇게 그룹 내부에 여러 사건이 많은 와중에, 8월에 발매한 5회 총선 싱글의 표제곡 <恋するフォーチュンクッキー>가 <헤비 로테이션>과 <플라잉 겟>을 이어 국민적인 히트곡이 되었다. 밝고 경쾌한 곡에 긍정적인 미래를 그리는 가사, 남녀노소 따라하기 쉬운 춤, 그리고 총선거 1위를 차지한 사시하라 리노의 스토리 덕분에 화제가 되었다.
싱글은 초동 판매량 130만 장을 넘겼고 발매로부터 25주가 지난 시점까지 싱글 차트 50위권에 유지하면서 판매량도 150만 장을 넘기고, 또한 노래방 애창곡으로도 사랑을 받아서 오리콘 가라오케 차트 35주 연속 1위를 차지하는 인기곡이 되었다.

3.5. 2014년: 대격변


2013년의 마지막이자 2014년의 시작을 여는 NHK의 홍백가합전에서 마에다 아츠코가 떠난 이후 에이스 몫을 하고 있던 오오시마 유코가 졸업을 발표했다. 사실 나이가 나이인지라 누구든 유코가 언제든지 졸업해도 이상하진 않을 것이라고는 생각했지만 홍백이라는 자리에서 그룹을 떠나겠다는 선언을 한 것은 꽤나 쇼크였기 때문에 팬덤은 혼란 속에 빠졌다.
문제는 AKB48가 몰고온 아이돌 전국시대가 끝이나고 2013년 부터 아이돌 붐은 확실하게 꺼졌다는 점이다. 불타 올랐던 자매그룹들의 인기도 2014년부터 꺼지기 시작한다. 이러한 것의 해결책이 필요했으나 야심차게 준비한 드래프트 회의는 그야말로 대폭사하였고 즉전력은 하나도 없었다. 페넌트레이스라는 극장공연 점수 대결도 시도했으나 쥐도새도 모르게 끝이나버렸다.
2014년 1월 23일 리퀘스트 아워 2014에서는 도요타의 후원을 받아 '만날 수 있는 아이돌'에서 나아가 '만나러 가는 아이돌'이 되겠다며, 이 캐치프레이즈를 직접 실천할 팀8이 만들어진다는 발표가 나왔다. 일본 전국 47 도도부현에서 1명씩 후보자를 뽑아 이 중에서 최종 팀8을 구성한다는 것. 머나먼 여정이었지만 어쨌든 계획대로라면 초반에 기획했던 팀A, K, B, 4, 8 체제가 완성되는 셈이다. 다만 이 시기의 팀8은 이벤트성 팀으로 받아들였고 도요타와 스폰서가 끝나면 해체될거라는 인식이 많았다.
어쨌거나 기존 멤버들의 잇달은 졸업으로 그룹 전체가 흔들리고 밀리언도 깨지는 것이 아니냐며 우려가 나오는 상황에서 제대로 굴러갈 지는 의문. CM 숫자나 방송 출연횟수가 예전보다 줄어들었다며 AKB48을 때리는 언론의 보도도 조금씩 늘어났다. 대체 멤버들의 성장은 여전히 느리고 오오와다 나나, 코지마 마코등의 차세대 탑급멤버들을 더 강하게 키울 필요성이 생겼다.
점차 차오르는 위기의식 속에 운영진은 2014년 1월 26일 리퀘스트 아워 2014 2일차에서 대조각을 2월 24일에 실시한다는 서프라이즈를 발표한다. 기존의 팀 셔플이 어떠한 예고 없이 조각 당일 바로 실시한 것과 달리 '대조각'을 내걸고 본점만이 아닌 48그룹 전체를 다 섞어버리겠다는 발표는 매우 이례적이었다.
대망의 2월 24일, AKB48과 국내외 자매그룹, 심지어 노기자카46까지 포함된 대조각의 결과는 한동안 멤버들과 팬들 모두를 멘붕에 빠뜨렸다.[21]
5월 25일 AKB48 악수회 피습사건이 벌어져 차세대 주요 멤버인 카와에이 리나이리야마 안나가 부상을 입었다. 이 과정에서 악수회장에 전문 경호인력은 한 명도 없었음이 밝혀졌을 뿐만 아니라, 사건 이후 운영진의 대처 역시 적극적이지 못하고 사건의 여파를 축소 및 은폐하려는 듯한 움직임만을 보여 팬들은 운영진 측이 멤버 보호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다며 분노하였다. 이는
이 사건의 여파로 AKB48은 물론이고 자매그룹과 타 아이돌 그룹의 악수회를 비롯한 팬 대응 이벤트가 한동안 취소 및 중단되었고, 아이돌에 대한 안전 대책이 대두되었다. 결국 카와에이는 졸업을 선택, 이리야마 역시 싱글 선발을 스스로 사퇴하는 등 AKB48로서의 활동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되었다. 차세대 주요 멤버 2명이 신체적, 정신적으로 큰 피해를 입으면서 본점 AKB48에도 큰 타격이 왔다. 안 그래도 부정적 인식이 많았던 악수회에 대해서 나쁜 인식이 늘었다는 평가도 있다.
AKB48의 이미지는 사시하라, 미네기시 사건에 이어 이 사건을 기점으로 더욱 하락세를 타면서 인기가 떨어지게된다. 너무 많은 사건/사고와 스캔들이 봇물터지듯이 터지면서 이미지는 안드로메다로 사라지게된다.
6월 7일 6회 총선거에서 와타나베 마유가 최다 득표수 기록을 깨며 데뷔 첫 1위를 차지했다. 어린 나이에 데뷔하여 차세대 에이스로 주목받고, 1회 총선거부터 상위권을 놓치지 않았으나 1위와는 인연이 없었는데 감회가 남달랐을 듯. 총선거 사상 첫 2연패 가능성이 점쳐졌던 사시하라 리노는 2위로 밀리면서, 마에다 아츠코 vs 오오시마 유코를 잇는 새로운 총선거 라이벌리의 시작이 기대되었다.
그러나 와타나베 마유가 센터를 선 총선 싱글 <心のプラカード>는 바이럴 마케팅 등 다양한 마케팅 수단에도 불구하고 iTunes 차트나 레코초쿠 차트 등 곡의 인기를 나타내는 차트들에서 부진한 성적을 거두었다. 또한 인기 멤버들의 졸업으로 인해 악수회 판매량도 급격히 저하해서 팬덤의 화력을 나타내는 피지컬 싱글 판매량도 가까스로 100만 장을 넘는 등, 역대 총선거 싱글 중 최악의 성과를 내고 말았다. 이전 해 총선 싱글의 성공에 고무됐었던 것인지, 전년도와 너무 비슷한 컨셉을 밀고 나간 것이 패인으로 지적된다.
8월 18일, 19일, 20일에 도쿄돔 콘서트가 열렸다. AKB와 자매그룹이 주가 된 콘서트였다. 근데 사실 이 때 이미 AKB는 큰 하락세를 경험하고 있었다. 2013년 적자 13억엔이긴 했지만 그래도 좌석 점유율은 높은 편이었다. 하지만 2014년 돔 콘서트는 암막축제가 되어버렸다. 자리가 너무 없어서 검은천으로 뒤덮힌 것이다.[22] 전성기 인기멤버 6명이 빠진 것이 얼마나 큰 마이너스였는지 이때 비로소 깨닫게 된다. AKB48는 이미 하코오시의 상당수를 잃었고 이미지도 안좋아지고 있어서 더더욱 대처가 안되는 곤란한 상황에 빠진다.
한편 싱글 발매 정책에도 큰 변화가 있었는데, 5회 가위바위보 대회가 기존의 선발 멤버 선정이 아닌 우승자의 솔로데뷔를 걸고 진행되었고[23] 싱글 발매시기 역시 10월과 12월이 아닌 11월로 결정되면서 2010년 이후 매년 5개의 싱글을 발매해 오던 AKB48이 4년만에 싱글 수를 4개로 줄이게 되었다. 피습사건 이후 악수회가 연이어 연기되면서 싱글 발매일 기준으로 최대 6개월까지 악수회가 연기된 것과, 이와 무관하지 않을 싱글 판매량의 하락세가 주요 원인으로 보인다.
이 밖에도 파생 유닛들이 줄지어 해산을 발표한다. 2013년 12월에 해산을 발표한 와타리로카하시리타이가 베스트앨범 渡り廊下をゆっくり歩きたい을 발매하고 2월 9일 Zepp 도쿄에서 열린 해산콘서트를 마지막으로 AKB48의 파생 유닛으로는 최초로 공식적으로 해산한다.
이후 DiVA 또한 8월 13일 AKB48의 라디오 방송 올 나잇 니폰에 출연하여 공식적인 해산을 발표한다. 이후 싱글 Discovery와 정규 1집 DIVA를 발표한다. 이후 11월 30일 마쿠하리 멧세에서 열린 해산 콘서트를 마지막으로 공식적으로 해산하게 된다.
Not yet도 멤버 오오시마 유코의 졸업 발표로 인해 해산이 어느정도 예상되었다. 이후 발표를 통해 정규 앨범 Already를 발표하고 단독 라이브를 개최하는 해산의 루트를 탐에 따라 공식적으로 해체되는 것인가 예상했지만 공식적인 해산을 발표되지 않았다. 하지만 주력 멤버의 졸업에 따라 활동이 힘들어 진다는 건 어느정도 예상되는 바이다. 프렌치 키스만이 새로운 싱글 思い出せない花를 발표하며 명맥을 이어가는 중이며 노스리브스의 활동은 없었다. 공식 파생 유닛들이 줄지어 2014년 해산을 발표함에 따라 새로운 변혁이 필요한 시기임이 입증되었다.
12월 8일 AKB48 극장 9주년 기념공연에서 총감독이자 팀A의 캡틴인 타카하시 미나미가 2015년 12월 8일 극장 10주년 공연을 마지막으로 AKB48 졸업을 선언하고 차기 총감독으로 요코야마 유이를 지명하였다. 예상된 지명이었지만, 요코야마 유이 본인이 인기나 멤버들의 신망이 두터운 것을 감안하면 AKB48그룹 제2막의 마지막 퍼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듯 하다.

3.6. 2015년: 그리고 10주년


2015년 1월 23일 리퀘스트아워 3일차 공연에서 5월 10일 제2회 드래프트 회의를 개최한다고 발표하였다. 전년도의 1회 드래프트 회의 때는 연구생 기간 없이 즉시전력감을 뽑는다는 성격이었기에 팬덤의 반발도 컸으나, 2회 드래프트 회의는 48그룹 각 팀에 소속된 연구생을 뽑는다는 것으로 변화를 주었다. 1회 드래프트 때엔 실제 일본 프로야구의 드래프트 회의처럼 지명이 겹쳐 추첨을 통해 우선권 교섭[24]이라는 스토리가 있었고, 드래프트 멤버들 중에서도 각 그룹별 싱글 선발에 뽑힐 정도 활약을 보여준 것이[25] 2회 드래프트 회의의 개최에 이어졌다. 2월 8일엔 오사카 성 홀에서 열린 NMB48 아레나 투어 공연에서 연구생 전원이 승격하는 것이 발표되면서 드래프트 회의 체제로 신멤버를 뽑겠다는 운영의 의지를 엿볼 수 있었다.
2015년 2월 25일, AKB48 전용 극장의 누적 관람객 수가 100만명을 돌파했다. 100만번째로 입장한 관람객은 오사카에 거주하는 여성으로 대학교 1학년생이었다. 이 관람객은 이전까지 극장에서 공연을 관람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고. 선물로 평생 AKB48 극장 공연을 무료로 관람할 수 있는 프리패스 티켓이 주어졌다.# 2월 25일까지 AKB48 극장에서는 3,658회의 공연이 이루어졌다.
3월 25일, 26일 양일간 사이타마 슈퍼아레나에서 영멤버 전국투어 및 봄의 단독콘서트가 열렸다. 영멤버 전국투어를 통해 레전드 멤버가 없는 영멤버만의 콘서트를 열고 영멤버들의 매력발산 및 경험을 쌓게하는 차원에서 개최되었다. 영멤버 콘서트에서 '텐토무츄'의 AKB48 싱글 커플링곡 수록결정 및 '덴덴무츄'의 결성이 발표되었다. 봄의 단독콘서트에서는 콘서트 말미에 각 그룹들의 공연이 끝나고 봄의 인사이동이 발표되었다. 많은 멤버들의 팀 이동, 겸임 및 겸임해제가 발표되었으며, 특히 카와에이 리나의 졸업 발표 및 키타하라 리에의 NGT48 이적이 가장 큰 뉴스가 되었다.
6월 6일 7회 총선거에서 사시하라 리노가 종전 최다 득표수 기록을 깨며 1위에 복귀했다. 중국발 표들이 와타나베 마유 및 마츠이 쥬리나로 몰렸다는 소문이 자자했던 바 사시하라 리노의 1위 재입성이 쉽지 않으리라 예상되었으나 결과는 2위 카시와기 유키의 167,183표를 한참 넘어서는 194,049표라는 압도적 1위의 결과. 타카하시 미나미의 마지막 총선, 카시와기 유키의 NGT겸임 후 선거 등 다양한 내러티브가 있어 팬들의 화력집중이 예상되었기에 사시하라 팬들의 연령 분포 및 그에 따른 총선화력, 그리고 활동거점 후쿠오카라는 요소가 사시하라 리노의 1위 등극에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구팀B 출신이 1, 2, 3위의 굳건한 순위를 유지하며 상위권의 높은 벽을 실감케 했다. 그 외의 이야기는 총선 후 이야기 참조.
7~8월, 총 6명이 AKB48을 떠났다. 하시모토 히카리, 카와에이 리나, 코바야시 마리나, 쿠라모치 아스카, 우치다 마유미가 졸업 공연을 가졌고 키타하라 리에가 팀K 센슈락에서 송별회를 가지며 NGT48로 이적했다. 당시 센슈락과 특별공연의 준비로 인해 발표와 졸업 공연의 텀이 짧다는 아쉬움을 남기며 AKB48의 전성기를 이끌어 온 키타하라 리에와 함께 중견 멤버의 이탈이 줄지어 진행되었다. 11기 에이스로 손꼽힌 카와에이 리나의 졸업으로 11기에는 2명 만이 남게 되었다. 타카죠 아키만이 재적하고 있는 6기를 제외하고 가장 인원이 적은 깃수이며 9기 이후 뽑힌 차세대 깃수 중에는 가장 소수 인원으로 구성된 깃수가 되었다.
8월 20일, AKB48 내 파생 유닛 중 현 활동을 진행 중이던 프렌치 키스가 해체를 발표한다. 멤버인 쿠라모치 아스카의 졸업 이후 활동여부에 관심이 모였으나 동일 최초이자 최후의 앨범이 될 'French Kiss'를 발매함과 동시에 동년 11월 5일 사이타마 슈퍼 아레나에서 열리는 「French Kiss Live ~LAST KISS~」라는 이름의 해산 라이브를 개최함이 또한 발표되었다. 그룹 내 노스리브스와 Not Yet를 제외한 유닛 그룹 전체가 해산을 선택하였다.
9월 16일 AKB48 가위바위보대회가 열렸다. 우치다 마유미의 사퇴 및 시마자키 하루카의 건강악화로 인한 불참이 화제가 되었던 대회였다. 이 대회에서 후지타 나나가 우승하였고, 솔로싱글에 수록될 커플링곡 센터는 나카니시 치요리로 결정되었다.
10월 15일 극장 특별공연인 이브는 아담의 갈비뼈에서 나토리 와카나의 졸업 소식이 전해지면서 11기는 코지마 나츠키만이 남게된다. 타카죠 아키만이 남은 6기와 함께 재적 멤버가 한 명 밖에 남지 않는 상황이 벌어진다. 특히 6기의 경우에는 기본적으로 뽑은 멤버의 수가 적었지만 11기의 경우 차세대 중에서 특히 올해들어 4명이 연달아 졸업을 선택하며 현재 AKB48에 있어서 낀세대라 할 수있는 멤버들이 자신의 길을 떠나는 아쉬움을 자아냈다.
11월 18일, 神曲たち 이후 오랜만에 베스트 앨범이 발표된다. 수록곡은 Type A는 주간 차트 1위 획득 곡, Type B는 밀리언 획득 곡, 싱글 컴플리트반은 지금까지 AKB48가 인디즈부터 발매한 싱글 전 곡이 수록된다. 특이점으로는 싱글 컴플리트반에 수록되는 인디즈 싱글 桜の花びらたち, スカート、ひらり은 2015년 Best 버젼으로 함께 수록된다. 또한, 베스트 앨범에 수록되는 곡은 솔로곡 없이 듀엣곡과 팀곡, 유닛곡, 차세대 유닛 텐토무Chu!와 덴덴무Chu!의 신곡이 수록된다.
12월 6일, 과거 포토앨범 특전으로 제공되었던 AKB48 10주년 기념 이벤트가 열렸다. 입장한 관객들은 그당시 앨범을 구입한 팬들과 0과 1사이 앨범을 구입한 사람들 중 추천을 통해 선정된 팬들이었다. 그 당시 재적멤버를 기준으로 졸업멤버 및 현역멤버들이 무대를 꾸몄다.
12월 8일, AKB48 10주년 기념 극장 공연 행사가 열렸다. AKB48에 재적했던 졸업 및 현역멤버들이 총출동해서 단체곡 및 유닛곡 무대를 선보였고, 후반부에는 타카하시 미나미 총감독이 요코야마 유이에게 총감독직을 계승하는 행사를 통해 총감독직이 요코야마 유이에게 넘어갔다.

3.7. 2016년: 뉴에이지


2016년 1월 1일 간탄공연(설날공연)을 시작으로 재출발을 시작하였다.
설날 공연에 나온 멤버는 차세대로 분류되는 멤버들이 전부였다. 초등학생 멤버들 치바 에리이, 쿠보 사토네, 니시카와 레이 같은 멤버들과 고등학생 멤버들이 대거 참가하였다. 설날부터 "차세대 위주로 힘내보자!" 이런 의미였다고 보면 된다.
2016년 현재 AKB본점 상황이 만만치 않은 상황이라 요코야마 유이를 중심으로 차세대 AKB 멤버를 뭉치겠다는 의지가 강해보인다. 작년 팀A 신공연 발표도 그렇고 AKB 내부 수정을 가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에 발맞춰 AKB는 9기 이후 차세대 위주로 흘러가고 있고 당연히 선배 기수의 졸업이 발생하고 있다.
이미 이 시점에서 1기생 1대 총감독 타카하시 미나미는 졸업생으로 분류되어 사실상 AKB48 활동은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
1월~4월 사이 이와사 미사키, 이시다 하루카, 이와타 카렌 졸업발표, 우치야마 나츠키 졸업 등이 이어졌다.
1월의 대부분은 리퀘스트아워 리허설로 멤버들은 바쁘게 보냈다. 이번 리퀘스트 아워는 특이하게 진행되는데 '''AKB 단독 리퀘스트아워'''와 '''AKB48그룹 리퀘스트 아워'''로 나뉜다는 점이다.[26]
1월 16일~18일, '''AKB 단독 리퀘스트아워'''가 TDC홀에서 개최, 대상곡은 543곡, 2위는 팀8의 「47の素敵な街へ」, 1위는 「赤いピンヒールとプロフェッサー」 - 마츠이 쥬리나의 곡이 선정되었다. 쥬리나는 AKB48 겸임을 풀고 SKE48에 전념하기로 했기에 팬들이 보낸 마지막 선물이었다.
1월 21일 작년 졸업을 발표한 타카죠 아키나가오 마리야가 도쿄돔 시티홀에서 합동 졸업콘서트도 있었다. 이례적인 것으로 다른 시기에 데뷔한 두명의 멤버가 같은 콘서트에서 졸업을 한 특이한 케이스다.
6기생 타카죠 아키도 거의 모든 활동을 마무리 지어서 곧 6기생도 0명이 되어버린다. 나가오 마리야 역시도 9기생 푸쉬 멤버중에서 가장 먼저 졸업했다. 나가오가 속한 9기 역시 벌써 7년에 가까운 활동, 9기는 굉장히 대선배의 기수여서 언제 누가 졸업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다.
1월 22일~24일 '''AKB48그룹 리퀘스트 아워'''가 열렸고 「奇跡は間に合わない」가 1위를 차지하며 미야자와 사에의 졸업 기념 1위곡이 되었다.
또한 이번 리퀘스트 아워를 거치면서 미야자키 미호에 대한 광푸쉬가 시작되었다. 말그대로 뜬금 푸쉬였는데 본인도 놀랐다고 한다. 리퀘스트 아워 종합사회를 하면서 기억이 안날 정도로 바쁜 날을 보냈다.
2월 16일~28일 AKB극장에서 '''다카미나'''가 모든 공연에 나오는 '''타카하시 미나미 프로듀스 공연'''이 시작되었다.
3월 9일, 43번째 싱글 「 君はメロディー 」가 발매되었다. 공지한 대로 졸업생이 참가. MV와 뮤직스테이션에 나왔다. 곡 자체는 심플하게 잘나왔지만 대중들에겐 그다지 먹혀들지 않았다. 팬덤 내에서도 너무 무난해서 별로 느낌이 없다는 사람들이 대부분. 그래도 무난하게 초등 113만을 넘으면서 전작에 깨진 초동 100만은 다시 회복하였다.
3월 26일(토), 3월 27일(일) 동서가합전, 타카하시 미나미 졸업콘서트 등의 3개 콘서트가 열렸다. 마지막날 1기 레전드 멤버들과 오오시마 유코, 아키모토 사야카 등의 2기생 멤버들이 찾아왔다. AKB에게 있어서 중요한 두번의 사건이 끝이 난것.[27] AKB는 완전히 차세대들에게 바통이 넘어갔다.
3월 31일 2기생으로 SKE로 이적한 미야자와 사에, NMB로 이적한 우메다 아야카, AKB48 마지막 2기생 코바야시 카나 모두 졸업하였다. 모든 2기생 0명 전원 졸업. 그렇게 전설을 써온 팀K 멤버들이 극장을 떠났다.[28]
1기생 전설적인 멤버 타카하시 미나미가 4월 8일 자신의 생일을 기점으로 길고도 긴 AKB48 활동을 마무리 지었다. 무려 10년이 넘는 활동기간을 자랑했고,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모습으로 졸업, 후배들에게 본보기가 되었다. 타카하시 미나미 졸업 콘서트에서 요코야마 유이는 "지금 AKB48의 제 1장이 끝난걸 느낍니다"라는 말을 했는데 이걸 보고 5th 다큐멘터리에서 마유유와 파루루는 "대체 언제까지 제 2장, 2장 이럴껀지..?"라고 하였다.
총선거가 6월 18일 개최되는 것이 발표되었다.
4월 현재까지 상황을 보면 AKB는 완만한 하락세를 이어가고 있다. 간단히 말해서 '''인지도 있는 멤버'''가 줄어들고 있는것. 대중들이 AKB48라고 하면 기억하던 멤버들이 너무 많이 졸업하고 말았다. 판매량이나 흥행을 떠나서 AKB붐을 지지하던 것은 '인기멤버'들이었기에 그들이 떠난 자리를 쉽게 메울 수 없다. 君はメロディー에서 졸업생을 쓴것도 비슷한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팀으로 보면 AKB 팀A에 신공연 <M.T에게 받친다>가 시작되었다. 이와 동시에 차세대 히와타시 유이를 32인 선발에 넣기도 했다. 팀K는 무카이치 미온으로 대동단결. 팀B는 여전히 더블에이스 체제다. 팀4도 나름 잘 적응하고 있고 팀은 유기적으로 돌아가고 있다. (공연숫자가 문제일뿐)
2016년 6월 18일 열린 제8회 AKB48 총선거AKB48의 세대교체를 예고하였다. 팀A,K,B,4,8 중 팀4가 가장 많은 권내 숫자인 9명을 기록하며 차세대 멤버들의 약진을 보여주었다. 또한 선발멤버 중에서도 12기 이하 멤버들이 4명이나 들어가면서 세대교체에 대한 운영의 부담이 조금 덜하게 되었다. 다만 와타나베 마유가 2위를 기록하며 1위 탈환에 실패한 것은 아쉬움으로 남았다.
8월 6일, 제2회 AKB48 그룹 팀 대항 대운동회가 열렸다. 우승은 NGT48 팀 NⅢ가 차지했다.
8월 7일, 총선거 제1당 감사제가 열렸다. 오시석 제도를 도입해서 멤버가 오시석에 가서 사진이나 동영상을 찍을수 있는 시간을 마련했다.
8월 14일, 16기 오디션 개최가 발표되었다. 모집 응모 기간은 8월 22일부터 9월 4일까지이다.[29] 10월 8일 오전 9시부터 10월 13일 오후 10시까지 쇼룸에서 16기 후보생(총 69명)들이 방송한다고 한다.
10월 3일 시마자키 하루카가 졸업을 발표했다. 자신이 출연하는 『바이토루 NEXT』의 신 CM 발표 회견에서 AKB48에서 졸업 을 발표.
10월 10일 AKB48 그룹 가위바위보 대회가 개최되었다. 이번 가위바위보 대회에서는 7인 유닛 싱글에 참여할 멤버를 정하였고 가위바위보 대회 결과 센터는 타나베 미쿠로 정해졌다. 커플링곡 센터는 카와모토 사야가 되었다.
12월 8일, AKB48 극장 오픈 11주년 특별기념공연이 개최되었으며 16기 19명이 공개되어 공연하였다.
12월 18일, 악수회에서 2017년 1월 14일부터 7일간 TDC홀에서 콘서트 개최[30]가 발표되었다.
12월 26일 AKB48 극장에서 시마자키 하루카의 졸업 공연이 열렸고, 12월 31일 제67회 NHK 홍백 가합 전 '''AKB48 꿈의 홍백 선발'''에서 3위를 차지했다. 이날을 기점으로 AKB48로서의 활동을 종료.
무엇보다도 하락세에 결정타를 찍은것은 AKB48의 일본내 영향력이 급감한 시즌이라고 할 수 있다. 2015년 12월 발매된 365일의 종이비행기 하나가 오랫동안 히트해서 그렇지 그외 모든 악곡이 폭망하였다.
'''아이튠즈 2016년 차트'''
18위 365日の紙飛行機
218위 君はメロディー
285위 ハイテンション
꽤나 심각한 것으로 AKB는 과거 사카미치 그룹보다 음원 성적이 낮았던 적은 없었다. 하지만 2016년에는 음원 순위가 뒤집어진것이 현실이 됐다. 토탈세일즈에서도 밀렸다. 콘서트의 집객력은 물론이고 DVD 판매량에서도 사카미치한테 압도당하고 있다. 이미 2014년부터 콘서트의 집객은 망하고 있었기에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이다.
물론 삽질을 해서 기존의 팬덤도 엄청나게 잃은 한해였다. 翼はいらない 같이 시대에 맞지도 않는 음악으로 실망을 시키는것은 여전했다.
악곡의 폭망보다 더 무서운것은 君はメロディー에서 레전드 멤버들을 출연시켰음에도 뮤비의 조회수는 예상보다 엄청 낮았다. 결국 예토전생이라는 오명만 쓰고 본전도 못뽑은 싱글이었다. 이러한 유튜브 경향은 꽤나 심각한 것으로 팬층의 이동이 노기자카46케야키자카46로 새로운 아이돌쪽으로 이동해버려서 AKB가 잃어버린 조회수를 그 쪽에서 거의다 얻고 있는 실정. 규모만 컸지 내실은 완전히 무너진 한 해였다.

3.7.1. 고뇌의 48그룹


현재까지의 결과만 지켜봤을 때 운영진의 대부분의 계획은 다소 아쉽게 흘러가고 있다. 9기를 중심으로 한 세대교체는 시마자키 하루카의 졸업으로 틀어졌고, 이후에 시마다 하루카, 나카무라 마리코 등등 9기 멤버들 다수도 졸업을 선택하고 있는 점을 봤을때 현역이었던 9기도 완전히 졸업기수가 되버리고 있다.
거기에 10기 이후의 차세대의 대탈출도 이어지고 있다.
오오와다 나나, 니시노 미키, 오오시마 료카 같은 큰 기회를 받았던 차세대가 고등학교도 졸업하기 전에 졸업을 선택하고 있는 것이다. 오오와다 나나의 경우 AKB 입장에선 반드시 성공했어야할 멤버였지만 AKB내에서의 심한 경쟁과 자기관리 문제가 겹쳐서 예상보다 크지 못했다. 오오와다 나나니시노 미키는 심야스캔들이 발각된 이후 열받은 운영이 철저한 배제를 해버렸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졸업을 해버렸다는 게 설도 있지만 자세한 내막은 모른다. 다만 토가사키는 '차세대들의 졸업을 막고 싶지만, 그럴수 없는게 안타깝다.'라는 이야기를 트위터에 썼다.
이러한 멤버들의 상황을 이해줘야 하는것이 말이 멤버이지 320명 중에서 제대로된 대접을 받는것은 약 30~40명정도 뿐이다. 결국 이 안에 끼지 못하면 인기멤버로 가는것은 매우 어렵다. 그냥 멤버라는 직함의 AKB48라는 제국의 시민들일 뿐이다. 고리오시라는 귀족이 되지 않는 한 스스로 이러한 상황을 탈출하는것은 정말 어렵다.
뉴에이지라고 할만한 타카하시 쥬리, 무카이치 미온, 오카다 나나 같은 멤버들은 인지도가 부족하다. 이미 수많은 선배 멤버들이 AKB이미지를 갖고 있기에 이미지 소모 또한 막심하다. AKB48는 이러한 멤버들을 예전처럼 이이토모 같은 곳에 꽂아주는 능력이 없다. 예전 사시하라 리노가 성장하던 시기에는 AKB가 멤버를 오오타 프로같은곳에 이적시키고 예능에 출연하는게 가능했지만, 현세대 AKB멤버를 외부 소속사에서 찾는일은 많이 줄어들었다.
그룹 자체의 인기는 적어져서 단체CM이 0개. 새로 시작하는 프로젝트도 예전보다 규모가 많이 줄어들었다. 이것저것 프로젝트는 진행하고 있는데 아쉽게도 주목도가 떨어진다. STU48를 만들었지만 구글 트렌드로 검색을 해보면 처참한 수준의 관심도라고 할 수 있다. 반면 라이벌 그룹 사카미치는 AKB48와 완벽히 겹치는 팬층을 갖고 있기 때문에 내년엔 더욱더 모든 지표에서 하락할 것으로 보인다. 소위 말하는 코지마 하루나 같은 입문 캐릭터들도 졸업해서 꽤나 암울한 상황이다.
2016년을 4월을 기점으로 라이벌인 노기자카46가 AKB의 인기를 추월했다고 보여진다. 모든 지표에서 그렇게 보인다. 관객동원력, 구글, 트위터 키워드 검색, 사진집 판매량, CD 악수완매율, CM, 멤버 주목도 모든면에서 AKB를 바짝쫒아온 한해였다. AKB의 무리한 이벤트와 대인원 전략은 실패인 것이 라이벌의 성장 때문에 더 돋보인다. 새롭게 생긴 케야키자카46의 주목도와 멤버당 악수 판매량 역시 AKB보다 높았다.[31]
단적인 예로 SHOWROOM 팔로워숫자가 야마모토 사야카가 6만명으로 48그룹 1위인데, 이는 사카미치 그룹까지 합치면 33위가 되버린다. 시라이시 마이의 팔로워 숫자는 10만명에 육박한다. 그만큼 2017년 기준 관심도는 완전히 사카미치 쪽이 압승이다.
와타나베 마유, 사시하라 리노 등이 졸업할 가능성이 높은 2017년부턴 완전한 암흑기가 올 가능성도 있다.
아니 AKB는 세대교체에 완전히 실패하고 하코오시를 붕괴시키는 '확장정책'을 쓰다가 이도저도 아닌상황에 빠졌다. 현재로썬 완연한 하락기에 접어들었다고 봐야한다. 부진한 DVD/BD 판매량, 떨어진 사진집 판매량을 보면 대세가 완전히 사카미치로 넘어가면서 과거 모닝구처럼 기세가 꺽인 모양새다.
그 중에서 그나마 건질만한것은 AKB48 팀 8. 도요타가 전면적으로 서포트해준 이 프로젝트는 선방한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무엇보다 AKB의 현재까지의 팬층과 겹치지 않는 신규 오타쿠들이 유입되고 있는것이 긍정적이다. 운영진은 2015년까지 방치하던 팀8을 2016년부터는 대거 기용하기 시작했다. 3~4명의멤버를 AKBINGO에 고정출연으로 넣어주기도 하고 기획도 짜주는등 다음세대의 중심으로 키울려는 모양새다.

3.8. 2017년: 최악의 총선거


1월 1일, 신춘 특변공연때 1월 16일(월) TDC홀에서 13기 단독콘서트가 발표되었다.
1월 14일부터 21일까지 TDC홀에서 콘서트가 개최되었다. 14일, 15일은 Team8 콘서트, 16일은 13기 단독콘서트, 18일은 16기 단독콘서트, 19일은 무카이치 미온 솔로콘서트, 20일엔 NGT48 단독콘서트, 21일 22일 양일간 AKB48 리퀘스트아워 세트리스트 100 2017이 개최되었다.
2016년 11주년 기념공연 때 공개된 이후 16기 연구생에 대한 푸쉬가 계속되고 있는 중 상대적으로 푸쉬가 밀린다는 평을 받는 드래프트 2기생중 타카하시 키라가 졸업을 발표하면서 드래프트 2기생 팬들 사이에서 운영에 대한 성토가 이어졌다.
2016년 2월 11일 16기 연구생 공연이 시작되었다. 쇼니치 멤버는 16기생 19명 전원으로, 세트리스트는 본편 곡의 경우 팀A 세트리스트에서 곡을 따와서 짰고 앵콜 부분은 River, 퍼스트래빗, 사쿠라노하나비라타치로 되어있다. 공연 종료 후 16기 콘서트때 배포한 서약서에 멤버가 직접 도망을 찍어주고 내년 1월 18일까지 도장을 다 채우면 오시멤버와 체키회를 한다고 한다.
이러한 푸쉬가 16기로 넘어가면서 많은 멤버들이 다시 졸업하기 시작했다. 오카다 아야카, 요코시마 아에리, 나카타 치사토 등이 있다. 다만 이미 구멍이 난 자리에 운영진은 승격을 하고 있지는 않다.
3월 20일 9회 총선거가 6월 17일에 개최되는걸로 발표되었다.
4월 8일, 3기생 10주년 공연이 개최되었다. 구 팀B 멤버인 3기생과 4기생인 사에키 미카, 1기생인 히라지마 나츠미, 우라노 카즈미가 참가했으며 이날 타나베 미쿠가 졸업을 발표한다.
4월 19일, 1기생 코지마 하루나가 본인의 생일날 졸업하며 이제 남은 1기생은 미네기시 미나미뿐이다.
5월 31일 선발 총선거 투표권이 동봉된 싱글 願いごとの持ち腐れ의 발매일에 AKB48의 극장에서 선거 속보를 발표했다. 3위는 작년 1위인 사시하라 리노, 2위는 마츠이 쥬리나, 1위는 작년 권외였던 오기노 유카였다. 오기노 유카의 표수는 55061표였으며 이는 지금까지의 속보 발표에서 최다 표수를 달성하였다.
6월 16일 오키나와 토요사키 해변공원 비라선비치에서 개최될 예정이었던 총선거 발표와 전야제가 날씨 관계로 인해 중지되었다. 거센 바람과 폭우와 더불어 번개 주의보까지 내려질 예정이라 관객과 멤버의 안전을 위해 행사 중지가 결정되었다. 사전에 안내한대로 무관객으로 당일 오키나와 내의 공민관에서 선발 총선거 개표 행사를 치룰 것을 발표하였다.
6월 17일 오키나와의 도미구스쿠 시립 중앙공민관에서 선발 총선거 개표 행사가 진행되었다. 1위는 사시하라 리노, AKB48 그룹 사상 첫 3연패를 달성하였다. 이날 2위를 달성한 와타나베 마유는 팬을 향한 감사의 인사를 전하면서 졸업을 발표한다. 이로서 3기생은 카시와기 유키만이 재적하게 되었다. 선발 총선거에서 AKB48의 차세대 맴버가 세대교체에 성공하고 있다는 관측이 나왔다. 뉴에이지라고 불리는 오카다 나나, 타카하시 쥬리가 선발 10위권에 올라섰고, 무카이치 미온이 아쉽긴 하지만 언더걸스 센터 자리라도 확보한 것.
더불어 20위를 달성한 NMB48 멤버 스토 리리카가 스피치 중 결혼을 발표했다. 멤버들과 팬덤은 당연히 뒤집어졌고, 48그룹 역사상 전무후무한 '''총선거 발표회장에서 교제 및 결혼선언을 한 흑역사'''가 되었다.[32]
전반기 한가지 달라진 것은 AKB48의 모태인 극장공연을 살려보려고 이것저것 시도하고는 있다는 점이다. 2015년 부터 시작한 프로듀스 공연도 매회 다르게 하고 있다. 자매그룹 멤버들도 함께 할 정도로 극장공연에서 여러시도를 하고 있다. 심지어 연구생 공연도 독창적으로 실행하고 있다.
그런데 가장 큰 문제는 정규멤버수가 팀4를 제외한 모든팀이 부족해서 어쩔 수 없이 저런 행동에 나선 점이다. 결국 언더로써 때워야 하는 실정이다. 100만장 판매를 위해서 멤버 수는 늘렸으나 복지는 크게 후퇴해서 겉잡을 수 없이 많은 멤버들이 졸업하고 있다. 이미 본점은 멤버의 퀄리티가 유지 불가능해졌다.
그런데 최근 16기생을 뽑아놓고도 언더를 안돌리고 있다. 이는 16기를 팀8 처럼 자신들끼리 성장할 시간을 주는듯 하다. 대표적인 예로 16기생 연구생 공연에 드래프트 2기생 치바 에리이가 나가고 싶다고 했는데 운영은 NO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16기생 콘서트를 하는 등 자체 팬덤 구축에 심혈을 기울이고있다.
8월 11,12일 양일간 AKB48그룹 유닛 쟝켄대회 예선전이 열렸다. 올해 쟝켄대회는 48그룹 멤버들(졸업 발표자 제외)이 유닛을 결성해서 우승자가 메이져 대뷔를 하게 되었다. 유닛 결성때 운영의 입김이 강하게 느껴졌는데 이는 장켄대회의 결과 조작 가능성에 대한 의문을 가지게 만들었다. 올해 쟝켄대회 본선은 9월 24일 나고야에서 열릴 예정이다.
쟝켄대회는 페어리윙크 아라마키 미사키, 운죠 히로나 콤비가 우승했다.
10월 31일에는 와타나베 마유 졸업 콘서트가 열렸다. 사이타마 슈퍼아레나에서 약 1만 7천명의 팬을 모았다고 한다.[33] 평일 화요일에 시작 시간도 5시로 구려서 배정이 최악이긴했다. 아무리 락세가 왔어도 AKB는 졸콘에서 주말 공연을 한다면 대략 3만 이상은 모을 수 있는 팬덤이다. 물론 다른 빅그룹 콘서트에 비하면 AKB는 콘서트 규모가 크게 줄어든것은 부정할 수 없다.
이날 콘서트에서의 특징은 거의 AKB 단독급으로 열렸다는 점이다. SKE만 봐도 스다, 쥬리나, 료하, 유나나 네명만 나왔다. 다른 자매그룹도 별반 차이는 없다. AKB가 단독 콘서트가 사실상 없어지면서 마유 졸콘 만큼은 AKB위주로 짰다고 한다.
11월 29일, 쇼룸을 통해 내년 1월 TDC홀 콘서트 계획이 발표되었다. 팀8 선발, NGT48 단독콘, 차세대 선발 (U-17), 16기콘, 성인선발, 나카이 리카 솔로콘, 오카다 나나 솔로콘, 요코야마 유이 솔로콘, 사시하라 리노 솔로콘, 리퀘아워, STU48 단독콘, 드래프트회의의 개최가 발표되었다.
작년과 비교해서 팀8의 비중이 줄고, STU48 단독 콘서트가 새로 생겼다.
12월 8일, AKB48 극장에서 12주년 기념 극장공연이 열렸다. 팀별로 공연한 이후, 새로운 조각이 발표되었다.
12월 10일, 제7회 AKB48 홍백가합전이 열렸다. 서프라이즈로 1년 유학이라는 명목으로 멕시코 드라마에 출연할 멤버 1명을 뽑는다고 발표하였다. 이어 프로듀스48에 48그룹 멤버 전원 참가 가능하다고 발표하였다. 12월 15일부터 2018년 1월 10일까지 신청 접수를 받고 1월에 1차 오디션이 진행될 예정이다.#
12월 27일 쇼룸을 통해 MUM48 (인도 뭄바이) 결성이 발표되었다.
12월 31일 열린 NHK 홍백가합전에서는 시청자의 투표에 의한 리퀘스트 아워 기획이 열렸다. 호네호네 왈츠에 투표하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와타나베 마유의 홍백 마지막 출연을 더 빛내주려는 팬들이 더 열심히 투표한 결과 3위 오오고에 다이아몬드, 2위 365일의 종이비행기, 1위 11월의 앵클릿으로 마유 졸업곡을 마지막 순서로 부르게 되었다.

3.8.1. 2017년 한 해 평가


수많은 졸업으로 인해 AKB 전성기를 관통했던 1~7기는 딱 5명만이 남게된다.
그 많았던 AKB 초기멤버는 이제 거의 최종장에 다가왔다. 졸업 뿐 아니라 팬덤도 점점 다른 아이돌에 뺏기면서 '팬이탈 현상'은 점점 심해지고 있다. 48그룹의 다른 그룹들이 제대로 기회도 못받고 있는데 일단 지르자는 식의 STU48, NGT48 같은 그룹을 만드니 팬덤 이탈의 가속화는 빨라지고 있다.
9기 시마자키 하루카, 11기 카와에이 리나 이후에 밀어준 대부분 차세대는 대중적 인지도를 만들지 못했다. 그뿐 아니라 팬덤 내에서 조차 인정을 못받는 현실이다. 결국 2012년~2016년 AKB에서 푸쉬한 『NEXT Generation』은 예상만큼 성장하지 못한것이다. 실상 AKB48 본진은 멤버 수만 많았지 제대로된 팬몰이가 되는 멤버는 없다. 9th 샤메회만 봐도 알 수 있지만 무카이치 미온, 오카다 나나, 무라야마 유이리 정도만이 그나마 선방한편. 나머지의 성적은 실망 그자체다. 연말의 여론조사등을 보면 노기자카46는 물론 케야키자카46한테도 확실하게 밀리고 있다.
위기속에서 AKB에서 굉장히 주목받았던 차세대가 20살도 되기전에 졸업하는 일도 많아지고 있다. 오오와다 나나, 니시노 미키 같은 케이스. 드래프트 2기생으로 노력하던 타카하시 키라 같은 멤버는 2년도 안 돼서 졸업해버렸다. 이는 당연한것이 자매그룹 홍수속에서 본점 멤버는 제대로 기회도 받기 힘든게 현실이기 때문이다. 기존의 AKB에서 푸쉬받은 멤버들 이리야마 안나, 카토 레나 같은 멤버들도 괄목할만한 족적을 남기지 못하고 있다.
말만 AKB이지. 싱글에 나오지 못하는 AKB멤버가 5할이상이다. 비인기는 말만 멤버이고 점점 더 마이너 아이돌이 되어가고 있다.
팬덤은 더이상 그룹을 만들지 말고, 규모를 축소하고 내실에 치중하라고 조언하고 있지만 아키모토 야스시는 죽기전에 JPN48를 만들고 싶은것인지 계속 팬덤의 생각에 반하는 짓만 하고 있다. 당연하게도 48그룹 자체가 식어버려서 새롭게 만들어진 자매그룹은 대중들의 주목을 전혀 못받고 있다. 똑같은걸 6번째 그룹을 만들었으니 당연히 그럴수밖에 없다.
그로 인해서 AKB 본점의 입지는 나날이 줄어들고 있고, 방송도 늘어날 기미가 없어보인다. 드래프트 3기생의 퀄리티는 역대 최저레벨이고 2015년에 뽑은 드래프트 2기생 조차 AKB에선 실패했다.
'''AKB48 팀의 붕괴'''
이 해의 가장 중요한 경향은 팀제의 붕괴라고 할 수 있다.
각팀의 정원 수가 미달되었음에도 새로운 오디션을 할 수 없다. 팀B는 연구생 승격후에도 8명 수준의 멤버를 유지하고 있으니 말을 다했다.[34] 이러한 인원수의 부족을 타팀 언더로 해결 중인데, 주력 멤버를 빼고 대부분은 언더를 뛰어야할 정도였다. 무라야마 유이리, 야마베 아유, 사사키 유카리 등등 수 많은 멤버들이 땜빵을 뛰면서 겨우 유지되지만, 사실 땜빵이라고 하기도 뭐한게 팀B는 마유유, 유키링이 빠지면 그냥 9명 정도의 다른 팀 멤버들이 도와줘야지만 돌아갈 수 있다.
운영은 이러한 사태에서 팀8의 성인 멤버들을 끌어서 겸임 멤버처럼 활용하고 있다. 정식 발표를 안했을뿐 겸임 이상의 활약이다.
왜 팀이 이지경인데도 운영은 대처할 수 없는가? 그것은 간단히 말해서 본점 4개의 팀을 유지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AKB는 2016년 10월 ~ 2017년 10월까지 19명의 멤버가 졸업했다. 팀8을 빼고 이 정도 숫자다. 당장 16기가 18명인걸 감안하면 얼마나 많은 수의 멤버가 빠졌는지 알 수 있다. 무작정 연구생을 뽑을 수도 없는게 얼마나 많은 멤버가 졸업할지는 감을 못잡는다. 그리고 연구생도 얼마든지 그만둘 수 있다.[35]
사실상 4개의 팀에 멤버를 계속 충원하는것은 바보같은 짓이 된것.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물론 운영은 17기,18기 같은 멤버를 뽑아서 계속 충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일전에 정규기수를 빠르게 충원해서 이 사단이 난걸 생각하면 그것또한 쉽게 선택할 수 없다. 또한 멤버의 퀄리티가 유지될리도 만무하다. 이미 16기의 퀄리티는 지난 5년간 최악이라는 평가를 들을정도인데 더 뽑는다고 좋은 멤버가 올리도 없다. 결국 운영은 정기적인 오디션을 통한 충원을 포기하고 일단 언더를 통해서 꾸려가고 있다. 그리고 정규팀 공연은 팀당 한달에 두 세번 정도고, 실상 대부분의 공연은 특별공연이 대신 하고 있다.
이러한 팀의 상황에서 『16기를 왜 승격시키지 않냐? 왜 16기를 정식팀의 언더로 넣지 않냐?』 이런 말도 있는데, 이미 이러한 연구생 언더 시스템은 큰 실패를 맛보았다. 기수의 개성이 없어지는 연구생 언더를 자제하고 AKB운영은 팀8 처럼 16기를 독립적인 팀으로써 팀단위 활동을 시키고 있다. 따라서 당분간 16기의 언더 도움도 바랄 수 없는 상황이다.
일단 2018년 1월 3차 드래프트가 있기에, 그 때 까진 일단 이 라인업으로 버틸 예정이다. 이후 12주년 기념공연에서 조각을 단행했다.
2017년 부턴 중국쪽 노출에 특히 신경을 많이 쓰고 있다. 11월에는 중국에서 전국악수회도 있으며 맴버들은 중국의 웨이보 같은 SNS활동까지 시작하였다 또한 맴버들 트위터도 이전과 다르게 계정을 상당히 빨리 만들수 있게 바뀌었다. 그러더니 10월 26일 중국에 다시 자매그룹을 만들 예정이고 1기 오디션은 연말부터 할거라고 공지하였다.[36] 그러나 SNH48이 이미 "48"상표를 정식 등록한후 활동하고 있는 탓에 "48"상표명은 쓰지 못하여 상하이는 "AKBSH", 청두는 "AKBCD", 광저우는 "AKBGZ", 베이징은 "AKBBJ" 이런식으로 그룹명을 지을 거라고 한다.#
최근의 다운로드 성적 추세를 보면 노기자카46는 물론이고 케야키자카46에도 팬 이탈이 가속화되가고 있다. 저 쪽에는 새로운 멤버들이 이미 전국구 팬덤을 갖추면서 초인기멤버로 추앙받고 있는데, 여기서 키운 차세대 멤버들은 당장 AKB팬들한테도 큰 인정을 받지 못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상황이 반전될 여지는 없어 보인다.
냉정하게 전국구 아이돌로 보면 AKB가 최근 한 드래프트 회의는 1~3차까지 전부 실패로 봐야하고, 심지어 갈수록 신기수들에 대한 관심도는 떨어지고 있다. 드래프트 3기의 저조한 관심도는 드래프트 2기에서 픽업된 멤버들이 그다지 반응이 없기 때문이다. 막말로 그들이 사진집을 막 내버리고, TV와 방송을 도배한다면 드래프트 3기에도 좀더 건실한 인재들이 많았을 것이다. 팀8이나 이런 것들이 인기있다고 말하는건 어디까지나 팬덤 내부 얘기지. 그것이 외부로 뻗어나가지 못하고 있다. 외부 팬을 끌어당길 강력한 인재들이 필요했으나 결국 AKB48가 키운 타카하시 쥬리, 코지마 마코 등의 수십명의 멤버들은 그 기회를 전혀 못 살리고 있다. 결국엔 인재의 실패인 것이다.
48그룹도 하락세가 거듭중인데, 자매그룹도 1세대의 이야기는 끝났고 다음세대로 인기가 넘어가야 했으나 그것에 실패했다. 개성있는 멤버들도 자매그룹에 많이 있으나 이젠 더이상 48그룹의 시대가 아니기에 홍백은 고사하고 1년 세번의 싱글을 유지하는 것도 어려워지고 있다.

3.8.2. 팀8의 대거 겸임 참여


위에도 언급했지만, 2017년 시점에 이미 AKB팀은 정상이 아니었다.
같은해 10월 상황은 최악이었다.
팀A - 10명
팀K - 12명
팀B - 8명 (마유유 졸업시)
팀4 - 13명 (이이노 미야비 졸업시)
이런 상황이다보니 사실상 언더를 받지 않고는 팀을 유지할 수 없었다. 겨우겨우 연구생, 팀8 등의 언더를 받으면서 근근히 유지하던 akb 극공은 사실상 마비되었고 팀제는 유명무실해졌다. 투어따윈 기대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운영은 절대 승격시키지 않았다. 16기가 약 1년간 성장할 때 까지 기다릴 뿐이었다.
2017년 12월 8일 12주년 기념공연이 있었다.이날을 기점으로 운영은 더이상 예전의 형태를 유지할 수 없다는것을 선언하였다.
바로 팀8 43명[37]을 전원을 포함한 대규모 조각.
결국 팀8을 전팀에 겸임으로 뿌려버렸다. 그리고 그동안 자매그룹 인기멤버를 띄워주기 위한 형식적인 겸임도 다 해제 했다. 사실상 AKB의 리스타트(Restart)를 선언한 셈이다. 재능있는 16기 연구생도 승격하는등 운영은 꽤나 고심한 흔적이 보인다.
'''AKB48 5차 팀캡틴'''
팀A : 오카베 린
팀K : 코미야마 하루카
팀B : 타카하시 쥬리
팀4 : 무라야마 유이리
각각 장점이 뚜렷하고 12기,13기,15기,팀8 등 다양한 기수에서 캡틴을 선정했다.
팀구성원을 보면 팀A에 오카베 린, 오구리 유이, 무카이치 미온, 카토 레나, 이리야마 안나, 쵸 쿠레나, 타니카와 히지리, 하야사카 츠무기 등의 개성있고 인기도 받쳐주는 멤버들을 엄청 넣었다. 이 시기의 AKB가 할 수 있는 나름의 올스타.
팀K는 기존의 틀을 거의 안바꿨다. 팀8의 요코야마 유이, 나카노 이쿠미 같은 댄스 멤버를 넣었고, 타노 유카, 후지타 나나, 미네기시 미나미 같은 댄스멤버를 남겼다. 무토 토무가 동생 무토 오린과 함께 자매가 최초로 같은 팀에서 뛰는 48그룹 멤버가 되었다.
팀B는 충원이 다소 약해보이지만, 포텐셜 면에서 나쁘지 않다. 타카하시 쥬리라는 캡틴을 잘 수행하던 멤버를 승계시켰다. 또한 팀B 차세대중 유일하게 믿을만했던 후쿠오카 세이나가 남았으며 오오야 시즈카, 나카니시 치요리라는 예능멤버를 넣어서 팀 MC력을 올렸다. 쿠보 사토네, 히와타시 유이라는 드래프트 2기생 중 유일하게 권내를 달성한 멤버의 가입. 오오타 나오, 사토 시오리 같은 팀8 내에서 악수완매율이 괜찮은 멤버도 넣었으며 사사키 유카리, 이와타테 사호, 타니구치 메구같은 권내 멤버도 다수 추가되었다.
팀4는 무라야마 유이리의 캡틴이 눈에 띈다. 극장에서 노력하던 그녀를 캡틴으로 하면서 당위성 면에선 완벽하단 평가. 다만 인기가 많았던 라인이 다소 붕괴되었다. 그래도 유이리, 나아짱, 사야야 같은 구 팀4 에이스가 남아있고 오오니시 모모카, 사카구치 나기사, 나가노 세리카 같은 팀8 내에서 존재감을 발휘하는 멤버가 추가된것은 긍정적이다. 우타다 하츠카는 팀8 내에서 성장 가능성이 높은 차세대라서 팀4로 간것이 상당히 도움이 될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16기의 사실상 에이스적 존재인 야마우치 미즈키가 합류한것은 굉장히 의미가 있다.
어쨌거나 이러한 시도는 모험에 가까운것인데, 그동안 외전격으로 잘하던 팀8을 굳이 본점으로 끌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팀8 멤버가 과연 얼마나 극장에 자주 나올지도 모르는것이다. 특별공연이 다 종료될 내년 4월까지는 일단 현 체제를 유지하고 팀8 주축인 2000년생이 고교 졸업을 하는 2019년부터가 제대로된 승부의 해일 수 있다.
사실 이런 현상은 AKB의 위기속에 운영의 도전적인 선택도 이해줘야한다. 운영도 그간 이런 짓을 하기 싫었지만 팀제가 붕괴되면서 어쩔 수 없이 팀8을 끌어들이게 된 느낌이다. 향후 이것이 AKB48에 어떠한 영향을 줄지 지켜봐야할 필요는 있다. 그만큼 AKB 팬덤에 있어서 중요한 변화다.
허나, 제3회 드래프트 회의에서 AKB48에 속할 연구생들이 18명[38]이나 선발되었기에, 팀8 멤버들이 과연 제대로 팀A,K,B,4 극공에 참여할 수 있을지는 의문일 수 밖에 없다. 학생 멤버의 경우 평일에는 학교에 가야하는데다 지방과 도쿄를 오가는데 드는 교통비도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우려되는 건, 인원수를 채우려는 운영과 일이 없는 비인기 팀8 멤버간의 상호 이해관계가 어긋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운영 입장에선 멀리서 팀8 멤버들을 불러오느니 가까이서 출퇴근하는 D3 연구생들로 극장공연을 하는게 더 비용을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39]

3.9. 2018년: 제3세대의 시기


어느덧 14년차 그룹이 된 AKB48는 여전히 대내외적 네임벨류를 바탕으로 다양한 일을 하고 있다. 관심도는 떨어졌을지 몰라도 워낙에 레전드 그룹이라 유지에는 큰무리는 없어보인다. 부자가 망해도 3대가 간다고 지금의 AKB가 딱 그런 상황이다.
1월 1일 새해 첫날 공연을 무사히 마쳤다. 총감독 요코야마 유이는 "저의 꿈은 지금의 멤버들과 함께 도쿄돔에 다시 서는것"이라고 말했다. 작년 노기자카46의 레코드 대상을 보고 현역 멤버들이 느끼는 박탈감은 크다고 한다. 카시와기 유키도 실제로 현장에서 충격을 받았다고 밝혔다.
이 시기 48그룹 후배들은 팬덤을 유지시키려고 노력중이다. 총감독 요코야마 유이는 도쿄돔을 가고 싶다고 했지만 현실은 결코 녹록지 않다.
운영진은 지난 2년간 바싹 성장한 2명의 와카테 멤버 오구리 유이, 오카베 린을 다음세대 중심멤버로 활용할 모양새다. 오구리 유이의 성장세는 눈부셔서 총선거를 제외한 지표가 그룹내 10손가락 안쪽으로 들어왔다.
1월 8일, 1997년 4월 2일 ~ 1998년 4월 1일에 출생한 AKB48 그룹 멤버들이 칸다묘진에서 성인식을 했다. 미야와키 사쿠라는 자신들이 황금세대라고 불리고 싶다며 당찬 포부를 밝혔다. 토미요시 아스카는 부친의 병환으로 참석하지 못했다.[40]
12월 15일~1월 10일까지 프로듀스 48의 오디션 참가자를 받았다. 아직 몇명의 AKB48 그룹 멤버가 참가할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1월 13일에는 팀8 선발 콘서트와 NGT48 단독 콘서트가, 14일에는 U-17 선발 콘서트, 16기 단독 콘서트, 성인식 멤버 콘서트가 TDC홀에서 열렸다.
1월 19,20일 양일간 개최된 리퀘스트 아워에서는 NGT48 오타들이 전 대상악곡을 권내시키는 것도 모자라, 1위까지 차지함으로써 투표에 강한 모습을 다시 한번 보여주었다.
1월 21일에 개최된 제3회 AKB48그룹 드래프트 회의는 기존의 방식과는 달리 팬들의 투표로 드래프트 후보생을 선발한 결과 역대 최다 인수인 55명이 교섭권을 가지게 되었다. 이 방식에 대해선 상당히 의문이 많은데, 안그래도 멤버가 넘쳐나는데 멤버의 퀄리티는 더욱 내려갔다는 평가다. 『잘 뽑혔다는 드래프트 2기 조차 제대로 못쓰는 운영이 19명이나 되는 드래프트 3기를 제대로 쓸수 있을까?』 라는 현실도 있다. 드래프트 3기가 대거 가입하면서 16기의 경쟁도 암울한 상황이다.[41]
2월 23일에는 『두부 프로레슬링 The REAL 2018 WIP QUEENDOM in아이치 현 체육관 』이 아이치현에서 열렸다.[42]
3월 14일 발매하는 신곡 ジャーバージャ에서 오카다 나나가 예고한 대로 센터를 섰다. 팬덤내 유튜브 반응은 썩나쁘지 않다.
3월 10일, 1년 유학이라는 명목으로 멕시코 드라마에 출연할 멤버 1명은 이리야마 안나확정되었다. 또한 48그룹을 주제로 한 AKB48/센터 시험이 치뤄졌다. 결과는 무카이치 미온이 1등을 해서 뉴싱글 커플링 곡에서 센터를 맡을 예정이다.
3월 19일, 쇼룸에서 52nd 싱글 선발멤버 발표가 있었다. 센터는 많은 사람들이 예상했던대로 오구리 유이가 맡았다. 발표 마지막 부분에 올해 총선거 관련 정보가 일부 공개되었다. 자세한 사항은 문서를 참고하면 된다.
3월 27일, AKB48-CHINA의 연구생 두 명(마오웨이자, 류녠)이 되었다. 그리고 4월 10일에 상하이AKB48 Team SH를 만들고 1기생 모집을 시작했다. 그리고 7월 25일에 1기생 34명이 공 개되었다.
4월 1일, 신팀 공연 첫날은 팀A 6월 12일, 팀K 6월 24일, 팀B 6월 26일, 팀4 6월 6일로 공지되었다.
4월 2일, 신팀 소속으로 멤버들의 프로필이 바뀌면서 새로운 팀의 시작을 알렸다.
4월 19일, 총선거 개최 장소로 나고야돔이 확정되었다.#
4월 24일, 현팀 마지막 공연은 팀A 5월 16일, 팀K 5월 15일, 팀B 5월 28일, 팀4 5월 18일로 공지되었다.
5월 10일, 엠넷과 합작기획인 대형프로젝트 프로듀스 48이 공식으로 시작되었다. AKB48 뿐 아니라 자매그룹 에이스들도 다수 도전했다.
6월 13일, 갑자기 신팀K와 신팀B 공연 첫날이 각각 7월 6일, 9월 8일로 연기되었다.
6월 16일, 제 10회 세계선발총선거가 개최되었다. 이날 마츠이 쥬리나의 행동이 논란이 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 이와 더불어 나카이 리카의 총선거 회장에서 연애발표라던가 매년 일어나는 병크에 팬덤도 아연실색하고 있다.
6월 18일, 권내한 멤버들끼리만 출연한 'AKB48 긴급회의'가 생방송되었다. 마츠이 쥬리나는 컨디션 불량, 요코야마 유이는 다른 스케쥴로 방송에 참여하지 못했다. 기사 사전 설문 결과 full 영상 부분 자막1 부분 자막2
6월 21일, 베트남 호치민 기자 회견에서 SGO48 (베트남 사이공) 결성이 발표되었다.
7월 25일부터 신작 드라마 마지무리 학원이 시작되었다.[43]
7월 30일, TPE48은 해체, AKB48 Team TP로 다시 시작한다고 발표되었다.
8월 31일, 프로듀스 48이 종료되고 본격적으로 AKB 프로젝트가 재가동되고 있다. 졸업과 활동 휴식도 이어지고 있어서 선발 라인업에도 적지않은 변화가 예상된다.
9월 19일, 제10회 총선거 결과로 선발 멤버가 정해진 センチメンタルトレイン이 발매되었다. 센터인 마츠이 쥬리나의 휴식으로 초회한정반 및 통상반에는 쥬리나의 모습이 없는 미완성된 MV가 실렸으며, 쥬리나의 복귀이후 싱글 구입자에 한해 시리얼 번호를 입력하면 MV 완성판을 볼수 있도록 하였다.
9월 24일, 프듀 생방에 진출한 멤버들 위주로 54번째 싱글이 공개되었다. 이 후 IZ*ONE의 활동으로 2년 6개월을 쉬게된 3명의 멤버를 대신할 포지션 오디션이 시작되었다. 요미우리TV 주최로 11월 8일부터 영상이 공개되었다. 오디션 합격자는 방송으로 발표되었다.
12월 8일, AKB48 13주년 기념 극장공연에서 내년 1월에 개최되는 TDC홀 콘서트 일정이 공개되었다.
'''날짜'''
'''콘서트명'''
'''날짜'''
'''콘서트명'''
'''날짜'''
'''콘서트명'''
1/12 낮
팀A 단독콘서트
1/14 아침
팀8 큐티즈 콘서트
1/17 밤
야하기 모에카 솔로콘서트
1/12 밤
팀K 단독콘서트
1/14 낮
팀8 폭시즈 콘서트
1/18 밤
2019년 리퀘스트 아워
100~76위
1/13 아침
AKB48 연구생콘서트
1/14 밤
팀8 전원 콘서트
1/19 아침
2019년 리퀘스트 아워
75~51위
1/13 낮
팀B 단독콘서트
1/15 밤
무라야마 유이리 솔로콘서트
1/19 낮
2019년 리퀘스트 아워
50~26위
1/13 밤
팀4 단독콘서트
1/16 밤
오카베 린 솔로콘서트
1/19 밤
2019년 리퀘스트 아워
25~1위
이어서, 공연 마지막에 요코야마 유이 총감독의 차기 총감독 지명이 있었다. 차기 총감독으로 무카이치 미온이 지명되었다. 그리고 AKB48 호소이 극장지배인이 AKB48 연구생중 5명의 승격을 발표하였다.

3.10. 2019년: 지속 가능성


어느덧 15년차 그룹이 된 AKB48는 여전히 대내외적 네임벨류를 바탕으로 다양한 일을 하고 있지만 연초에 터진 야마구치 마호 자택 습격 사건으로 이미지 하락을 겪고 있다. 과거엔 레전드 그룹이었지만, 앞으로도 그룹이 계속 유지될지는 의문이다. 흔히 "부자가 망해도 3대는 간다."라고 이야기하지만 지금의 AKB48가 그럴지는 지켜볼 필요가 있다.
2019년 3월 4일, 팀 B의 캡틴 타카하시 쥬리가 졸업을 발표하고 울림엔터테인먼트 소속의 걸그룹 멤버로 새롭게 데뷔한다고 밝혔다. 이는 AKB48 그룹 역사상 최초로 프로듀스48이 아니었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4일 뒤에는 또 다른 프로듀스 48 참가자 타케우치 미유미스틱엔터테인먼트에 연습생으로 이적했다.[44]
그 이후, 2019년 3월을 끝으로 AKB48 SHOW!와 AKB48의 올나이트 닛폰이 방송종료된다는 소식이 들렸다. AKB48가 출연하는 칸무리방송[45]이 점점 사라진다는 소식에 팬들은 안타까워 하고 있다. 올 나이트 닛폰에서는 하차하게 되었지만, 대체제로 신 총감독 무카이치 미온이 메인 퍼스널리티인 신 라디오 방송을 새로 진행하게 되었다.
2019년 3월 13일, AKB48 그룹 선발총선거를 실시하지 않는다는 발표가 있었다. 2019년에만 실시하지 않는 것인지 앞으로도 총선거를 실시하지 않는지는 밝히지 않았다. 사시하라 리노미야자키 미호 등 여러 중견 멤버들의 SNS나 이야기를 보면 야마구치 마호 자택 습격 사건이 총선거 개최 중단에 큰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2019년 3월 19일, 팀A 극공에서 요코야마 유이가 3월 31일까지 총감독으로 있고, 4월 1일부터 무카이치 미온이 총감독으로 취임한다는 발표가 있었다. 타카하시 미나미의 경우 총감독 지명에서 총감독을 넘겨주기까지 1년 넘게 걸렸기에 예상하지 못했다는 반응이 있었다. 이를 두고 AKB48의 세대교체가 더 빨라지는것이 아니냐는 의견도 있다.
지난 몇 년간 실패했던 육성정책이 다시 또 반복되고 있다는 평가도 있다. 미래를 지탱해줄 것으로 믿었던 코지마 마코, 타카하시 쥬리와 같은 주 전력의 이탈이 계속 늘어나고 있고, 매력적이고 개성적이었던 팀8 멤버들의 졸업은 계속 이어지는 등의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
다행인 점은 드래프트 3기생 신예 푸쉬멤버인 야하기 모에카의 악수회 성적이 48그룹 전체에서 최상위권 수준으로 성장한 것이다. 16기생 에이스인 야마우치 미즈키도 꾸준히 인기를 모으고 있고, 최근 1년 사이 엄청난 푸쉬를 받은 팀8의 푸쉬멤버 오구리 유이는 48그룹 전체 악수회 탑급으로 성장했다. 허리 역할을 할 것으로 예측되던 멤버들이 몇 졸업했지만, 차세대 멤버들이 꾸준히 성장하고 있는 것은 몇 없는 희망적인 부분으로 꼽힌다.
한편으로는, 프로듀스 48에 출연해 인기를 모은 미야자키 미호가 채널 J의 '일본인도 모르는 일본여행 시즌4'에 출연하고, 치바 에리이 역시 Mnet의 유학소녀에 출연하면서 프듀 출신 멤버들의 한국 프로그램 출연이 본격화되고 있다.
공식적인 발표가 있지는 않았지만 4월 12일, Beginner를 끝으로 한국 음원 스트리밍 사이트에 앨범 음원의 발매가 중단되었다. 하루 전날은 야마구치 마호 자택 습격 사건의 마무리 수순으로 NGT48의 팀 해체를 선언한 날이기도 하다. 이 과정상의 여파로 보인다. 프로듀스 48로 일본 국내에서의 반등에 이어 한국으로의 외연을 확장하려는 계획은 한 사건의 처리미숙 등으로 인해 물거품처럼 사라져버린 것이다. 현재는 계획이 재개되어 57th 싱글까지 발매가 완료되었다.
2019년 4월 20일, 팀8 소속의 사토 시오리, 야마다 나나미가 극장공연에서 졸업을 발표했다. 사토 시오리의 경우엔 칸토지역 팀8 멤버 첫 졸업인데다 니가타현 대표라는 것 때문에 팬들 사이에서 더 동요가 컸다.
그리고 이틀 후인 2019년 4월 22일에는 Team 8 센터로 맴버들의 실질적인 정신적 지주였던 나카노 이쿠미쇼룸 방송을 통해 졸업을 발표했다.
2019년 5월 4일, 팀8 소속의 타니카와 히지리가 극장공연에서 졸업을 발표했다. 결성 당시부터 활동한 팀8 초기 멤버들이 줄줄이 졸업을 발표하는 상황이지만 아직 팀8 신멤버 모집 발표는 없다.
2019년 5월 16일 총감독인 무카이치 미온이 트위터를 통해 연구생들이 소속팀 이외의 극장 공연에도 출연할 수 있게 되었다는 공지를 했을 때 졸업자가 계속 생겨 팀 내 결원을 메꾸기 위한 조치라는 팬들의 의견이 현실화 되고 있다.
2019년 5월 21일, 팀A 소속의 고토 모에가 본인의 생탄제에서 졸업을 발표했다.
아직 5월 밖에 안 됐는데 일본 내의 48그룹을 통틀어 올해에만 벌써 30명 이상이 졸업을 선언했다. 특히 Team 8 멤버들이 대거 졸업을 선언하였다. 팀 8의 경우 47명이라는 많은 멤버가 한번에 그룹에 가입했기 때문에 졸업 역시 다수의 멤버가 비슷한 시기에 졸업할 수 밖에 없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아무리 시기적으로 졸업할 시기라고는 해도 반년 사이에 10명 가까이의 멤버들이 졸업을 선언한 데에는 구조적으로 문제가 있음을 보여준다. 8 멤버들 중 초창기에 푸쉬를 받았던 이쿠미마저 졸업을 발표하며 본인을 발사된 로켓에서 떨어져 나가는 부품에 비유했다.
6월 현재만 놓고 보면 당장 본점의 여름 싱글만 생각해도 평소 같으면 진작에 싱글 발매 소식이 나왔을 시기이지만 여전히 기약이 없다. 총선도 엎어진 마당이라 올해는 아예 싱글을 3개만 발매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팬덤의 의견도 있다. 여러모로 NGT48의 사건이 그룹 전체에 영향을 준 모양이라 사건을 제대로 처리하지 않는 운영에 대한 팬덤의 불만과 불신만 높아지는 상황.
7월 7일 오사카를 시작으로 4년만에 전국 투어를 진행한다. 하지만 예전처럼 팀 단위로 전국을 돌기에는 무리라고 판단했는지 투어 선발이라는 이름으로 인기 멤버 16명을 뽑아 투어를 진행하고 도쿄 근처의 수도권에서만 팀 별 콘서트를 가진다.
이러한 상황에서 7월 22일 56번째 싱글 サステナブル 발매 소식이 공개되었다. 9월 18일에 발매되고, 무대는 7월 24일 FNS 썸머에서 최초 공개한다고 밝혔다. 센터는 야하기 모에카.
サステナブル의 MV가 공개된 8월 21일, 11년간 방송된 AKB48의 칸무리 프로그램 AKBINGO!가 9월 말을 마지막으로 끝을 맺게 되었다는 발표가 있었다. 이제 TV 프로그램이라고는 시즌제로 진행되고 있는 AKB48 네모우스테레비 밖에 안 남았다. 서서히 하락세를 겪고 있는 현 상황에서 칸무리 지상파 프로그램의 폐지는 하락세를 더 가속화할 가능성이 높다. 프로그램이 폐지되는 원인은 NGT48 사건의 여파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AKB48의 인기가 예전같지 않아 화제성이 떨어져서 방송을 유지할 여력이 없다는 부분도 있다.
10월 6일부터 팀8의 신 멤버 12명이 차례대로 공개될 예정이다.
AKB48의 구세주라고도 불리며, サステナブル의 센터를 섰던 야하기 모에카가 10월 27일 졸업을 발표했다. 운영의 푸쉬를 몰아받은 모에카의 졸업으로 앞으로 AKB48 미래의 에이스를 담당할 멤버가 줄면서 앞으로 얼마나 더 AKB48가 하락세를 탈지 알 수 없게 되었다.
11월 18일, 아키하바라역 근처에 있는 AKB48 카페&숍이 12월 31일까지만 영업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와 더불어 카페 온라인쇼핑몰도 12월 31일까지만 홈페이지를 연다고 한다. AKB48 운영사측에서 카페를 폐점시키는 것이 아니라 아키하바라 역 재개발로 인해 카페가 폐점되는 것이긴 하지만 어디로 카페를 옮기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발표가 없어 팬들은 이대로 카페가 없어지는건 아닌지 걱정하고 있다.
11월 23일, 악수회장에서 내년 리퀘스트 아워 개최 발표가 있었다. 기존 100곡에서 50곡으로 발표곡이 줄은데다 투표권 목록에서 싱글 앨범 투표권이 빠지면서 2019년 AKB48 싱글 발매 곡수는 2곡으로 확정되었다.
리퀘스트 아워 발표와 더불어 내년 1월 TDC홀 콘서트 일정도 발표되었는데 AKB48 팀별 콘서트나 연령대별 콘서트는 없어지고 AKB48 단독콘서트만 열리게 되었다.
12월 8일, 14주년 기념 극장공연에서 마지막 1기생인 미네기시 미나미의 졸업 발표가 있었다. 마지막 1기생이라는 상징성이 있던 만큼, 많은 졸업한 멤버들과 팬들이 수고했다고 격려하는 글을 SNS에 많이 올려주었다. 졸업 콘서트는 2020년 4월 요코하마 아레나에서 개최될 예정이다.

4. 2020년대



4.1. 2020년: 15주년, 소속사 변경, 코로나19


1월 13일, 칸다묘진에서 48그룹 성인식 행사가 열렸다. 센터는 혼마 히나타오오모리 마호가 맡았다.
1월 19일, 20일에 TDC홀에서 AKB48 리퀘스트 아워 행사가 열렸다. 20일에 서프라이즈로 57th 싱글 발매 소식과 선발 멤버 발표가 있었다. 야마우치 미즈키가 처음으로 센터가 되었다.
1월 20일, 그동안 SKE48NMB48을 제외한 전 AKB48 그룹IZ*ONE의 일본 업무를 맡았던 주식회사 AKS가 기존 업무 중 국내 AKB48 그룹 업무를 맡을 자회사를 분리 독립시키기로 발표했다. AKB48는 4월 중으로, HKT48NGT48는 각각 3월 중으로 분리 독립한다. 또한, 2월 중으로 기존 사명을 이름을 Vernalossom으로 바꾸고 해외 9개그룹 및 IZ*ONE의 일본 업무를 포함해 신규 사업 전개에만 전념한다는 것이 AKS 홈페이지를 통해 발표되었다.
1월 21일 AKB48의 새로운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일부 멤버들의 유튜브 채널 개설을 예고, 현재 확정되어 본격적으로 활동중인 채널은 무라야마 유이리, 오카다 나나, 모기 시노부, 무카이치 미온의 4인 연합인 유우나아모기온, 카시와기 유키의 유키링 월드, 나카니시 치요리의 치요 채널, 미네기시 미나미도 졸업을 앞두고 유튜브 채널을 개설, 현재 영상을 올리고 있다. 또한 전총 감독 요코야마 유이 역시 유튜브 체널 개설 예고 영상에서 본인 역시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겠다고 하니 조만간 소식이 들릴듯. 아무튼 이 프로젝트를 시작으로 AKB48의 쇼룸 체널 뿐만이 아닌 유튜브 활동이 늘어나게 되는데 아무래도 쇼룸이라는 시스템이 일본내의 한정적인 시스템이라는 점 때문에 글로벌 팬들을 끌어들이기 위해서 시대의 흐름에 편승한 선택이라는 평이 주로 나오고 있다.
1월 30일, 2월 1일에 있을 대악수회를 연기한다는 공지가 나왔다. 사유는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때문으로 경과에 따라 이미 예정되어 있는 다른 행사들도 취소 혹은 연기 될 가능성이 크다.
2월 22일~28일까지 시부야 스트림홀에서 14주년 극공에서 보여주었던 신유닛 라이브를 진행할 예정이었으나 25일까지는 라이브가 열렸고, 26,27,28일에 진행할 예정이었던 유닛 F,G,H의 라이브는 연기되었다. 따라서 유닛라이브 이후 유닛명을 발표할 예정이었던 유닛 F,G,H의 유닛명 공개 또한 연기되었다.
2월 26일, 전세계적으로 퍼지고 있는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가 일본 내에서도 확산됨에 따라 2월 26일부터 3월 11일까지 극장공연이 중단됨을 발표하였다. AKB48 극장이 개관한 이래, 전염병으로 극장공연이 중단된 것은 처음이다.
3월 12일~15일엔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로 인해, AKB48 역사상 처음으로 무관중으로 극장공연이 개최되었다.
중계 전용 공연으로 열리는 만큼, 기존 DMM 라이브 외에도 LINE 라이브, 유튜브 라이브를 통해서도 극장공연이 중계되었다.
3월 16일~21일에도 무관중으로 극장공연이 개최되었고, 라인라이브를 제외한 DMM, 유튜브 라이브로 중계되었다.
4월 1일, AKB48의 운영회사가 AKS에서 주식회사 DH로 바뀌었다. 이미 1월에 공지된 사항이라 운영상 큰 변화는 없을 듯 싶다.
4월,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의 일본 내 확산으로 인한 긴급사태가 발령되면서 AKB48 그룹 콘서트는 모두 중지된 상황이다. 대신 운영은 "집(おうち(お家, 오우치)에서 일본을 건강하게"라는 표어 아래 OUC48이라는 프로젝트를 열어, 유튜브 화상중계 형식으로 팬들에게 컨텐츠를 제공하고 있다. 심지어는 각자의 집에서 퍼포먼스를 하면서 콘서트를 열기도 했다. 화상중계로 365일의 종이비행기를 부르는 모습[46] 평상시에는 이런 컨텐츠가 진행된다.

6월 22일, 'CDTV 라이브! 라이브!'에 AKB48 멤버 16인만 출연해 직전에 발표한 디지털 한정 기획 싱글 離れていても 첫선을 보였으며 이어 여름곡 메들리로 ポニーテールとシュシュ, Everyday、カチューシャ, 真夏のSounds good!을 했다.
8월 23일, '24시간 테레비'에서 1기 졸업생 마에다 아츠코, 다카하시 미나미, 이타노 토모미, 시노다 마리코離れていても 무대에 참여했다. 영상 마리코 트윗
소속사 변경의 영향인지는 몰라도 음악 방송에서 의외의 선곡이 나오는 경우가 많아졌다. 9월 30일 TV 도쿄 가을 음악제에서 여름 싱글인 사요나라 크롤을 불렀고, 아시아송 페스티벌에서 ファースト•ラビット를 불렀다.
11월 16일, NHK 홍백가합전에 낙선하는 일이 벌어졌다. 공식적인 낙선 사유는 '새로운 히트곡의 부재'.[47] 11년간 출전해온 홍백이었고, 지금까지의 커리어를 바탕으로 하면 출전할 역량도 충분히 갖춘 그룹이었기에 많은 48그룹의 멤버들이 SNS를 통해 이에 대한 아쉬움을 표했으며, 일본 야후 메인에 기사가 올라올 정도로 대중들 역시 충격을 받았다.
11월 23일 온라인으로 열리는 e운동회가 개최되었다.
12월 8일, 선발급 멤버 11명의 자가격리로 AKB 역사상 처음으로 당일에 극장 n주년 기념 행사가 열리지 못했다. 대신 온라인으로 기념 방송을 진행하였으며 모든 연구생들이 각자의 소속 팀으로 승격하였다.

4.2. 2021년


1월 22~24일에 TDC홀에서 팀별 콘서트와 First/Second Generation 콘서트가 열리는 것이 발표되었다. #1 #2 거리두기를 적용해 객석은 50%만 채울 예정.
1월 19일, 일본 내 발령된 긴급사태선언으로 인해 실내 콘서트장에서 공연하는 것이 불가능해지자 2021년 리퀘스트 아워를 멤버들 집에서 개최한다는 발표가 있었다. #3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 생중계 되며 개최일정은 다음과 같다.
'''일자'''
'''시간'''
'''출연 팀'''
'''비고'''
1월 22일
19:00
팀 A
'05~'07년 악곡
1월 23일
12:00
팀 K
'08~'09년 악곡
15:00
팀 B
'10~'11년 악곡
18:00
팀 4
'12~'13년 악곡
1월 24일
12:00
팀 8
'14~'15년 악곡
15:00
First generation
'16~'17년 악곡
18:00
Second generation
'18~'20년 악곡
코로나로 인한 스케줄의 정체로 싱글 발매가 2020년 봄 이후로 끊기게 되었는데, <실연, 고마워요> 이야기회 일정이 막바지에 다다르면서 팬덤의 기대감과 현기증이 더욱 커지고 있다. 게다가 지점과 사카미치 그룹 모두 싱글을 꾸준하게 내고 활동하고 있기 때문에 왜 본점만 싱글을 내고 있지 않냐는 불만이 생기고 있다. 코로나로 인해 지점과 사카미치 그룹의 음반 판매량이 대폭 감소했고, 이를 이식해 한번 활동에 비용이 크게 들어가는 AKB48은 싱글 발매가 보류되는 것이라 예상된다.

[1] 오디션 상세 - AKB48 공식 블로그[2] 이번 달도 - AKB48 공식 블로그[3] 지금은 수백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추첨으로 뽑힌 사람만이 관람할 수 있다. 어떤 오타는 무려 180여 번이나 응모했지만, 한번도 뽑힌 적이 없다고 한다.[4] 인디라고 해서 인디 록밴드 같은 게 아니라, 정식 레이블을 거치지 않는 자체 유통 음반을 말하는 것이다.[5] 이 주먹밥 속에는 멤버들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을 각각 넣었다. 예를 들어 타카하시 미나미는 초콜렛을 넣었다.[6] 오타쿠 눈물! AKB48 특전을 전부 모으면 '봄의 제전'에 초대 - 나탈리[7] AKB48 화제의 이벤트 '봄의 제전'이 갑자기 중지되다 - 나탈리[8] 데프스타는 AKB48이 경쟁사 킹 레코드에서 대박을 쳐버리면서 완전히 뒷목을 잡았고, 결국 데프스타 시절의 AKB48 음반을 묶어서 세트로 낼때 제목이 '놓쳐버린 물고기들'이었다.[9] 이전에도 악수회 자체는 있었지만, 지금처럼 체계적인 시스템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당시에는 멤버들이 한 줄로 쭉 늘어서 있었고, 팬들이 원하는 멤버한테 가서 악수하는 형식이었다. 당연히 인기멤버에게 가는 줄은 긴 반면, 비인기멤버 앞은 텅텅 비어있게 되었다. 더군다나 지금처럼 천막으로 가린 상태도 아니기 때문에, 비인기멤버들은 그저 멍하니 서서 인기멤버들이 팬들과 악수하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10] 별것 아닌것 같아도 이 문제는 후일 AKB48의 체제를 망가뜨리는 주범이 된다.[11] 오오호리 메구미가 '오오호리 메시베'라는 이름으로 '달콤한 고관절'이라는 음반을 발매한 적이 있지만, AKBINGO! 방송 내부에서 기획한 이벤트성 싱글이었다.[12] 프로듀스 48에서 마츠이 쥬리나가 등급 평가를 받을 때 부른 노래가 'Dear J'다.[13] 이것은 초기 팀B도 마찬가지였지만, 팀B는 히라지마 나츠미를 비롯한 선배들의 도움 덕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14] 일본 2위 유통그룹으로, 자회사는 이토요카도, 세이부백화점, 소고백화점. 1위는 이온.[15] AKB48 공식 블로그의 부제가 'TOKYO DOME까지의 궤적'이었다. 도쿄 돔 공연이 성사된 후에는 '1830m으로부터'로 바뀌었다.[16] 정규 멤버라고 해도 인기가 없으면 공연에 못 나가는 살벌한 체제이다. 공연에 나가야 인기를 얻는데 공연에 못 나가게 하면 그냥 제 발로 나가라고 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반면 연구생은 언제든지 나갈 수 있는 연구생 전용 공연이 있기 때문에, 비인기 정규 멤버보다는 연구생이 더 유리하게 되었다. 이 체제의 목적 자체도 기존의 중견급 비인기 멤버들을 서둘러 졸업시키고, 그 자리를 차세대 멤버들로 메꿔서 초선발급 인기멤버들이 차세대 멤버들을 양성하는 식으로 가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운영의 예상을 깨고, 중견급 비인기 멤버들이 졸업을 하지 않고 오히려 선발급 멤버들과 차세대 멤버들의 졸업러쉬가 이어지면서 세대교체가 실패로 끝나게 되었고, 이에 따라 2014년 아예 그룹멤버들을 섞어버리는 대조각을 단행한다.[17] 실제로 타카하시 미나미를 비롯한 멤버들이나 운영진, 각종 언론에서도 'AKB48 제2장'이라는 언급을 많이 했다. 2012년 홍백가합전에서 선보인 메들리의 제목도 'AKB48 홍백2012 스페셜 -제2장-'이었다.[18] 바로 다음날 연구생으로 강등되었다.[19] 2013년 7월 사시하라 리노가 TV프로그램에서 연애와 관련된 문제는 자기책임제가 되었다고 언급한다.[20] 그리고, 시간이 흘러 2019년 5000회 기념 공연에서 미네기시 미나미는 '''"저는 (3000회 공연) 그 때보다 머리카락이 20cm 길어졌어요"'''라고 셀프디스를 하기도 했다.[21] 대조각의 자세한 결과는 여기를 볼 것.[22] 콘서트 영상은 최대한 그 부분을 피하고 있지만, 현장을 다녀온 사람은 그당시 집객이 너무 안됐다는걸 다 알고 있었다.[23] 이에 따라 가위바위보 싱글 및 선발은 없어졌다.[24] S, KⅡ, N의 스토 리리카, B, S, KⅡ, E, H의 카와모토 사야[25] AKB48의 카와모토 사야, SKE48의 소다 사리나, NMB48의 스토 리리카, HKT48의 야마모토 마오[26] 아마도 본점 차세대를 위한 운영의 계획이었다고 생각된다.[27] 마에다 아츠코의 졸업과 타카하시 미나미의 졸업.[28] 사실상 마지막 공연은 2기생 10주년 공연인 4월 1일이라고 봐도 무방하다.[29] 먼저 발표한 SKE48 8기 오디션은 8월 10일부터 9월 9일까지 인걸로 보아 오디션 응모기간을 일부러 겹치게 한거라고 보여진다.[30] 14일 오구리 유이, 사카구치 나기사, 쿠라노오 나루미 솔로콘서트/ 15일 팀8 전원, east, west 3공연/ 18일 AKB48 16기 단독콘서트/ 19일 무카이치 미온 솔로콘서트/ 20일 NGT48 단독콘서트/ 21일과 22일 리퀘아워[31] 물론 이것은 노기자카가 대단한것도 있지만, AKB가 주력멤버 졸업으로 팬덤이 줄어들은게 더 크다.[32] 스토 리리카가 있던 팀의 캡틴 야마모토 사야카는 블로그를 통해 사과문을 올렸고, 팬들의 비난이 이어지면서 제9회 총선거의 모든 이슈들이 블랙홀로 빨려들어가버렸다. 언론들은 연일 보도를 해댔고, 현역 아이돌 멤버가 총선거 회장에서 결혼 발표를 해버린 것에 대해 일본 대중들의 비난 역시 쏟아졌다. 한 TV매체에서 설문조사를 한 결과, 전체 표본 9만여 명 중 7만 5천여 명이 스토 리리카의 행동에 대해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결과가 나왔다. 더군다나 총선거 다음날 나하 공항에 DAMN이라고 적힌 티셔츠를 입고 도착해 팬들과 멤버들을 우롱하는 태도라고 또다시 비난이 쏟아졌다. 언론들은 이 DAMN이라고 적힌 티셔츠를 입고 나타난 것을 의도된 행동으로 분석하고 있다. 기자회견을 통해 해당 남성과는 2015년 말부터 교제를 하고 있었으며, 2016년 말 즈음에 프로포즈를 받고 결혼을 약속했다는 것, 팬들에게 직접 말하고 싶어서 총선거 사퇴를 하지 않았다는 것, 멤버들에게 상담한 적은 없지만 운영의 높은 사람에게 상담한 적이 있다는 것, NMB48의 연애금지에 대해서는 멤버 개인의 자율에 맡기는 것으로 해석했다는 것 등을 밝혔다. 현재 48그룹은 스토 리리카를 없는 사람 취급하고 있으며, 팬덤도 그녀의 존재를 무시하고 있다. 한국의 팬덤은 스토 리리카라는 존재는 없었으며, 9회 총선거 20위 자리는 운영의 실수로 결석 처리되었다는 드립이 난무하는 중이고, 일본의 팬덤도 매한가지. 24일 악수회에 참가한 일본 팬들은 스토 리리카에게만 삼엄한 경비를 펼치고 있었고, 비판하지 못하도록 팬들을 끌어냈다고 증언하는 한편, 그런 분위기 속에서 스토 리리카의 레인은 처참할 정도로 텅 비어있었다고 말했다. 한편 본인은 결혼을 통해서 그룹을 졸업할 거라고 말했지만, 이미 그룹 내 활동을 못하는 데다가 활동에 나와도 그룹 이미지만 깎아먹는다고 판단한 운영이 철저한 배제를 하고 있으니 사실상 해고 수준의 대우를 받는 중.[33] 회장에서 마유는 1만5천이라고 했으나 작은 규모이긴하다.[34] 팀A, 팀K, 팀B, 팀4 모두 인원 부족한건 마찬가지다.[35] 이 1년동안 연구생은 3명 졸업했다.[36] 이 사실로 보아 AKB 운영은 약 1년간 중국에 다시 AKB 자매그룹을 만들 방법을 모색하고 있었던거 같으며 AKS측은 "지금의 SNH48는 공식적인 자매그룹이 아니니깐 당연히 공식자매그룹을 다시 만들것이다."라는 일종의 선전포고를 한 셈이다.[37] 졸업 예정자인 히로세 나츠키모기 카스미는 제외되었다.[38] 1명은 교섭과정에서 사퇴하였다.[39] 예상대로 언더 멤버로는 16기와 D3 연구생들이 주로 투입되고 있다.[40] 이 97~98라인은 이 시기 48그룹에서 황금세대로 불리는 라인. 인기멤버 대다수가 이 라인에 껴있다.[41] AKB48의 역사를 보면 후배기수 가입후 기존 멤버들이 버려지는게 무려 14년째 계속되고 있다. "제발 그만 뽑으라고" 팬들이 말해도 도무지 듣지않는 AKB48 운영으로 인해 드래프트 2기생, 16기는 굉장히 어려운 상황에 빠졌다.[42] 자세한 내용은 두부 프로레슬링 란에 들어가서 확인하자.[43] 주연은 오구리 유이.[44] 단, 타케우치 미유는 이미 졸업을 발표한 상태이다.[45] 한 연예인이 주역을 맡아 방송되는 방송프로그램[46] 총감독이 기획했다고 한다.[47] 다만 대중은 이를 곧이 곧대로 믿지 않는 편이다. 정황 상 야마구치 마호 자택 습격 사건과 코로나로 인한 활동 침체가 그 원인인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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