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호/선수 경력/롯데/1기

 




1. 개요
2. 데뷔 전부터 2005년까지
3. 2006 시즌
4. 2007 시즌
5. 2008 시즌
6. 2009 시즌
7.1. 2011 시즌 연봉협상


1. 개요


이대호의 롯데 자이언츠 1기 시절을 다룬 문서.

2. 데뷔 전부터 2005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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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날씬했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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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6월 21일 부산에서 태어났다. 3살 때 부친이 세상을 떠났고, 모친은 재가하는 바람에 친할머니 밑에서 자랐다. 지금의 이대호를 보면 참으로 개천에서 용이 난 경우라고 볼 수 있다.[1][2]
야구는 수영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시작하였다. 수영초 3학년 때 어느 날 갑자기 야구 유니폼 입고 들어온 키 작은 전학생이 왔는데, 그 전학생이 이대호의 모습을 보고 놀랐는 지 방과 후에 감독한테 "우리 반에 고등학생이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얼른 데리고 오라는 감독 지시에 이대호가 야구를 처음 시작하게 된 것이다.[3] 지금 그 전학생은 풀타임 메이저리거가 되었고, 이대호도 KBO 리그를 대표하는 슬러거가 되었으니 이대호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볼 수 있겠다.[4]
위의 사진에 나와 있듯이 본래는 투수 출신이다. 경남고 시절 대한민국 U-18 야구 국가대표팀에 소집되어 2000년 캐나다 에드먼턴에서 열린 세계청소년 야구대회추신수, 김태균, 정근우 등과 함께 출전, 결승전에서 연장 13회까지 가는 접전 끝에 우승을 차지하는데 일조했다. 참고로 저 선수들은 모두 절친한 친구 관계이며[5], 추신수, 정근우는 이대호와 같은 부산 출신이다.[6]
경고 졸업 후 2001년 롯데 자이언츠2차 1순위 지명을 받아 입단했다. 그 해 롯데의 1차 지명은 추신수가 받았지만, 추신수미국으로 건너가 마이너리그를 거친 후 2005년에 메이저리거가 되었다. 추신수미국행에 대해서는 당시 롯데 자이언츠 구단의 섭섭한 대우 및 턱없이 낮게 부른 계약금 때문에 여러가지 실망이 겹쳐 내린 선택이라고 하는 설도 있으나, 당시 롯데 자이언츠가 그렇게 막장은 아니었으며 시애틀 매리너스의 계약금이 훨씬 많았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자세한 것은 추신수 문서 참조.
당시 롯데 앞에는 신생 팀 SK 와이번스가 2차 1순위 우선지명권 3장을 들고 있었는데, 이대호를 거르고 택한 선수가 투수 김희걸, 조형식[7], 내야수 김동건. 이들 중 1군에서 많이 뛴 선수는 투수 김희걸뿐이다. 근데 김희걸삼성 라이온즈로 이적한 후에도 두꺼운 선수층에 밀려서 1군서 패전처리나 했었으니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롯데 자이언츠투수로 지명받아 입단했으나 덩치에 비해 구속이 그렇게 빠르지 않았고, 결정적으로 스프링캠프에서 어깨와 팔꿈치 통증으로 구속이 더 떨어지게 되자 타자로 전향했다. 당시 우용득 2군 감독이 이대호의 재능을 알아보고 적극적으로 타자 전향을 추진했다고 한다.[8] 김명성 감독은 이대호를 투수로 기용할 것이라며 처음에는 타자 전향을 반대했지만 이후 다른 코치들도 이대호의 유연한 타격 폼과 비거리에 홀딱 반해 이대호의 타자 전향을 줄기차게 요청했고, 결국 김명성 감독이 승인해서 타자로 전향하기로 했다. 김명성 감독 모르게 타격 훈련을 해왔던 이대호도 무척 기뻐했다고. #관련기사
입단 첫 해에는 타자 전향 훈련을 받으며 2군에서 주로 하위 타선에 배치되었다. 그러다가 시즌 막바지인 2001년 9월 18일, 펠릭스 호세마산 삼성전에서 소위 '참교육#s-2'이란 유행어로도 알려진 "헤이! 영쑤! 돈 두댓!"사건을 저지르며 잔여경기 출장 정지 처분을 받아 시즌을 마감했고, 이에 우용득 감독 대행이 호세를 1군에서 말소한 후 이대호를 1군으로 처음 불러들였다. 고로 이대호는 호세 때문에 1군에 데뷔하게 된 것이고, 둘 다 롯데 자이언츠 역사의 한 획을 쓴 거포라는 점에서 기묘한 인연이다.
참교육 사건이 터진 다음 날인 2001년 9월 19일 1군에 처음 등록됐고, 4번 타자로 첫 데뷔를 했다. 그러나 신인 1년차가 무슨 힘이 있겠는가. 결국 2001년 1군 6경기에 출장하여 8타수 4안타 1타점에 그쳤다. 당연히 같은 해 입단하여 신인왕을 먹은 동갑내기 우타자 김태균에 비해 초라한 성적일 수밖에 없었다.
이듬해인 2002년에 기회가 찾아왔다. 정식 감독으로 승격한 우용득이 이대호를 붙박이 4번 타자로 기용하겠다고 선언한 것. 이 해 최다패 타이기록(97패)을 뒤집어쓸 정도로 롯데의 전력이 허약했던 탓도 있었겠지만[9], 그럼에도 1군 경험이 거의 없는 사실상의 신인에게 4번 타자를 맡긴다는 것 자체가 이대호의 자질을 일찌감치 보여준 예라고 할 수 있다. 개막전부터 4번 타자로 기용된 이대호는 시즌 개막 후 한달간 홈런은 1개에 그쳤지만, 타율은 놀랍게도 3할대 중반을 기록하며 시즌 초반에는 투수 김진우 및 조용준 등과 함게 신인왕 후보로 언급되기도 했다. 5월 10일 현대전에서 끝내기 쓰리런 홈런을 치며 기세를 올리기도 했지만, 신인들이 늘 그렇듯 시즌 중반으로 접어들며 타율이 떨어지고 선구안에 문제를 드러내며 2군으로 내려갔다.
가뜩이나 팀이 영 좋지 못했던 상황에서 그에게 본격적인 결정타를 가한 사건이 발생했는데, 2002년 시즌 중 자신을 적극적으로 밀어 줘던 우용득 감독이 성적 부진으로 경질당한 것. 시즌 중반 15연패를 당하며 팀 성적이 나락으로 추락하자, 결국 정식 감독 취임 후 반년만에 옷을 벗게 된 것. 후임 감독으로 부임한 백인천은 이대호가 좋은 타자가 되기 위해서는 살을 빼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이를 위해 그에게 지시한 것이 '''쪼그려뛰기'''[10] 및 '''사직 야구장 스탠드를 오리걸음으로 오르내리기'''. 이런 무식한 훈련을 수행'''당'''한 이대호는 '''당연히''' 무릎 부상을 당했고, 그 후 계속 재활 치료를 해야 했다. 이 때 부상으로 운동량이 떨어지고 실의에 빠진 이대호는 과 야식, [11]으로 세월을 보내 지금과 같이 30kg 정도 체중이 불었다 한다. 여기에는 자신과 같은 부류인 최준석과 열심히 야식을 먹은 것도 컸다고.[12] 그래도 2002년에는 1군 74경기에 출장하여 타율 .278에 8홈런 32타점을 기록해 신인 2년차 + 타자전향 2년차 치고 나쁘지 않았다. 당시 2001년에 26홈런을 때려 낸 조경환2002년에 삼진 머신이 되어 버린 후 7월에 박남섭 등을 상대로 SK 와이번스트레이드되었고, 용병이라고 데려온 제로니모 베로아는 끔찍하게 삽을 퍼다가 그 해 4월 30일웨이버 공시되면서 방출당하는 등 롯데의 공격진 상황이 영 좋지 않았다.
그러나 2003년에는 무릎 부상 때문에 1군 54경기에 그치며 타율 .243 4홈런 13타점으로 홈런과 타점이 반토막났다. 그럼에도 유망주로서의 가치는 떨어지지 않았고, 오프 시즌에 몇몇 구단이 이대호를 탐내기도 했다. 양상문 감독이 취임한 2004년부터 본격적으로 두각을 드러낸 이대호는 풀 타임 출전을 하면서 점차 타격이 성장세를 그리게 되면서 타율은 낮았지만 파워가 살아나기 시작했다. 2004년 .248 20홈런 68타점을, 2005년엔 .266 21홈런 80타점을 기록하며 조금씩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문제는 병살머신이어서 치면 무조건 병살, 홈런 정도여서 교타력에서는 좋은 모습을 보여 주진 못했다. 그래서 밑에처럼 무한까임을 당하게 되어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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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2004년[13] 당시 갈매기 마당의 모습. 페레즈, 박기혁 등 추억의 이름들이 보인다.
faet(?!).박정태

이 시기 이대호는 어느 머리 큰 포수만큼이나 갈마 아재들에게 미친 듯이 까였다. 저 때까지만해도 그냥 힘만 좋은, 얻어걸리는 타자 수준에서 머무는가 싶었다.

3. 2006 시즌


실력이 만개한 것은 강병철#s-1 감독 산하의 2006년. 당시 이대호는 불어난 체중을 빼기 위해 양산시에 있는 통도사에 들어가 식이요법과 운동에 매진했다. 매일 산을 타면서 정신수양도 하고 살도 뺐다. 어느 정도였냐 하면, 강 감독의 취임식에도 참석하지 못해서 오히려 강 감독이 이대호를 만나러 그 절로 찾아갔던 일화가 있을 정도였다고.
15kg가량 감량하고 돌아온 이대호는 선구안이 비약적으로 개선되면서[14] 타율, 타점, 홈런#s-1 세 부문에서 1위를 차지하였다. 1984년 삼성 라이온즈 소속의 이만수가 세운 이후 22년 만의 트리플 크라운#s-2.1. 이때서부터 한국 프로야구를 대표하는 강타자로 인정받게 된다. 그러나 이 시기에는 괴물 신인 투수였던 '''류현진'''도 트리플 크라운을 석권했던 터라 MVP는 류현진에게 뺏기게 된다. 여기에 30대도 아니고 20대 홈런왕이라고 까인 건 덤. 2006년은 프로야구 사상 최악의 투고타저였던 해로서, 이대호의 홈런이 26개로 역대 최저 2위의 기록이었던 반면 류현진의 평균자책점이 2.23이었고 18승과 탈삼진 1위를 먹었던 터라….
게다가 류현진을 앞세운 한화는 한국시리즈에 진출해 준우승을 거두었다. 이에 반해 이대호는 팀이 7위였던 탓에 류현진에 비해 관심이 덜했기 때문에 류현진에 MVP를 넘겨야 했다. 이 때문에 투수 트리플 크라운보다 더 어렵다는 평이 많은 타자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하고도 상당히 저평가를 받았다. 그나마 1루수 KBO 골든글러브 부문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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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해 늦여름에 2006 도하 아시안 게임 야구 국가대표로 선발되어 출전하지만 타율 0.409에 10타점(당시 국대 총 타점의 1/4)을 기록하였음에도 불구, 대한민국이 '''도하 참사'''로 불릴 정도로 졸전한 탓에 묻혀버리게 되고 이대호는 점차 병역 압박을 받게 된다. 다행히 이 병역 문제는 2008 베이징 올림픽 금메달로 해결했다.

4. 2007 시즌


시즌 요약 짤
4월 21일 현대 유니콘스 전에서는 정민태를 상대로 사직 야구장 첫 장외 홈런을 기록했다.
2007년에는 2006년의 대활약 때문에 볼넷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 삼진 수는 2006년과 같은 55개인데 볼넷은 전년도보다 42개나 증가하여 97개가 되었다. 2007년에도 홈런, 장타율, 출루율 등의 주요 지표가 모두 성장세를 보이며 1루수 골든글러브 2연패[15]. 당시 이대호 한 명만 거르면 나머지를 편안하게 갈 수 있던 롯데 타선에는 '''이대호와 여덟 난장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2006년만 해도 홈런 2위인 펠릭스 호세라도 있어서 이 정도는 아니었다. 대신 타선의 밸런스 자체는 정수근[16], 강민호[17], 박현승, 이승화 등이 분발했던 2007년이 오히려 좀 더 나았긴 했다. 이 와중에 5월 22일 경기에서 연예인 야구 수비를 선보이며 패배의 빌미를 제공하기도 했다.
롯데 자이언츠의 팬에게 있어서는 손민한과 함께 8888577이라는 암흑기에 롯데를 견인한 두 쌍두마차[18]이자, 롯데 타선의 상징에 가까운 존재'''였'''다. 실제로 이대호가 부진하면 롯데 타선이 전반적으로 무게감이 크게 떨어지는 경향이 있었다.

5. 2008 시즌


2008년에는 초반 타점머신으로 잠깐 군림하였으나, 여름에 들어서자 타격 감각이 급격히 떨어지는 현상을 보이며 '역시 봄데였다'는 가설에 힘을 실어주는 행보를 보였다. 결국 4월 초 1위를 달리던 롯데 자이언츠는 올림픽 브레이크 직전 잠시 5위로까지 추락. 2007년에 비해 크게 불어난 체중과[19] 당시 홈런과 장타율에서 리그 선두를 달리던 김태균과 포지션이 겹치는 문제 등으로 올림픽 대표 선발에 여러 잡음이 있기도 했다.
그러나 올림픽 직전 올스타전에서 기적적으로 타격 감각을 회복한 이대호는 2008 베이징 올림픽/야구 경기에서 홈런 3개, 10타점, 0.360의 타율을 기록하였고, 특히 장타율이 0.760에 달하는 등 큰 활약을 보여주며 한국 야구팀을 준결승으로 이끌었다. 준결승까지 극도의 부진을 보이던 이승엽의 상태를 고려해 봤을 때 이대호의 활약이 아니었으면 준결승 가기도 쉽지 않았을 것이지만 준결승과 결승에서의 이승엽의 결정적인 홈런으로 인해 묻힌 감이 있다. 사실 올림픽을 비롯한 각종 국가대표 성적에서 이대호가 이승엽보다 홈런은 적었지만 타율은 월등히 좋았다. 안습. 아무튼 여차저차해서 금메달을 따면서 병역 혜택까지 받게 되었다.
2008년 롯데의 8888577을 끝내며 데뷔 최초로 포스트 시즌을 경험하지만, 경험 부족을 드러내며 4위 팀 삼성 라이온즈에게 3연패를 당해 탈락하고 만다. 펜스 직격 안타를 치고 2루에서 '''새색시 슬라이딩'''을 보여주며 아웃되어 팬들의 속을 뒤집어 놓기도 했다.
2008 시즌은 타율 0.301, 18홈런, 94타점(리그 3위), OPS 0.879(리그 7위)를 기록했다.

6. 2009 시즌


2009 WBC에 출전하여 타율 0.278 5타점 ops 0.829를 기록했다.
시즌에선 3루 수비의 여파인지 4월 10일 기준으로 타율 0.105 0홈런에 그치며 엄청난 타격 부진을 보여주고 있다.[20] 거기다 이대홀 또는 이대호 터널이라 불리울만큼 말도 안 되는 3루 수비를 보여주어 대부분의 롯데팬들은 뒷목을 잡은 채 2009 시즌을 포기한 상태.[21] 4월 26일 LG 전에는 시즌 5호이자 개인 통산 131호 홈런을 터뜨리며, 마해영을 넘어 롯데 프랜차이즈 최다 홈런 신기록을 달성했다. 29일 기준으로 타율 .270 5홈런 12타점으로 여전히 아쉬운 모습.
그러다 5월 중순부터 타격감을 회복하기 시작하더니 6월 중순엔 타율 3할을 잠시 회복하였다가 손바닥 부상으로 다시 2할 8푼대로 떨어졌다. 5월 19일 두산 베어스 전에서는 시즌 10호 홈런을 터뜨리며 6년 연속 두 자릿수 홈런을 달성했다.
2009년 6월 30일 LG 트윈스와의 경기에서 이대형의 다이빙캐치 실패와 2루수의 송구 실책으로 인해 '자기가 치고 자기가 홈에 들어오는 플레이'를 보여 주었다. [22] 이제는 '이대호 홈스틸하는 소리 하네' 또는 '이대호 도루왕하는 소리 하네'를 사용해야 할 듯. 야갤 등지에서는 '''인사이드 파크 모텔'''이라는 별칭이 붙었다.
2009년 7월 25일에 열린 올스타전 홈런 더비에서는 결승에서 최희섭과 맞붙어 홈런 5개를 기록하며 우승했다. 또한 그와 함께 최장거리 홈런 부문도 수상. 결승전에선 5개 모두 장외홈런을 날리는 괴력을 보여주었다. 여담으로 홈런더비 예선에서 이대호의 장외로 날아간 홈런 타구 중 하나가 당일 무등경기장에 왔던 천하무적 야구단의 김창렬의 차 뒷유리에 적중했다.
2009 시즌은 타율 0.293, 홈런 28(리그 4위), 타점 100(리그 3위), OPS 0.908(리그 11위)를 기록했다.
리그 최상위권 타자의 성적임에도 불구하고, 팀 전통(?)에 따라 2010년 연봉이 삭감될 예정이라고. 이에 이대호는 팀 자율훈련 불참을 선언하기에 이른다. 결국엔 6% 인상된 3억 9천만원에 계약했다.

7. 2010 시즌



KBO 리그를 거쳐간 타자들 중 역대급으로 손꼽히는 이대호의 '''커리어하이 시즌.''' 타격 7관왕, 9경기 연속 홈런, 이 모든 기록이 '''2010년 단 한 시즌에 나온 기록'''이다.

7.1. 2011 시즌 연봉협상


2010 시즌에 타격 7관왕과 9경기 연속 홈런이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2개나 달성하면서 연봉의 대폭적인 인상이 기대되었고 본인도 상당한 인상을 바라는 듯 했지만 롯데 구단 프런트 어디 안 갔다. 그래서 이대호 본인은 7억 원을 요구 했으나 롯데 측은 6억 3천만 원을 제시했는데, 사실 그전까지 5억대를 제시하다가 연봉 조정신청 구단 측에서 갑자기 액수를 바꾸었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결국 2011년 1월 10일 이대호 선수 본인이 연봉 조정 신청을 KBO에 제출했다. #기사1 #기사2
당시까지 연봉 조정 1번 밖에 없었다는 것과 이대호 본인의 2010시즌 활약이 유례가 없다는 점에서 이후 추이가 주목되었다.
그리고 끝내 2011년 1월 20일 약 4시간이 넘는 장기간 회의 끝에 6억 3천만 원으로 연봉이 결정되었다. 팀내 최다 실책(12개)[23], 4위에 그친 팀 성적[24], 선수단과의 형평성을 고려하여 이러한 결정을 내렸다고 한다. 관련기사
연봉조정위 내에서의 의견 갈림은 3(롯데):2(이대호). 조정위원들은 양측의 자료가 빈약함을 이야기 했는데, 선수협에 의해 공개된 이대호의 제출 자료는 실제로 상당히 빈약한 내용이었다. 롯데팬 커뮤니티에서 만든 것보다도 퀄리티가 낮을 정도. 성적에 관해서는 사실상 기본 스탯 제시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는데, 이번 연봉조정위의 판정의 핵심은 '연봉 고과선정'의 정당성이었다.
그런데 이것도 후폭풍이 나오는 것이 애초에 선수 본인은 자신의 연봉고과 산출에 대한 근거를 전혀 알 수가 없다. 연봉 협상 때도 자신의 대략적인 연봉고과 순위만 알 수 있는 상황에서 제대로 된 자료를 제출하라고 하는 것 자체가 난센스. 조직과 개인이 정보 만을 가지고 싸우라고 하는 제도 자체가 문제라고 비판하는 목소리가 많다.
그 때문인지 대리인 제도 즉, 에이전트에 대해 기사가 나왔다. 야구 관중수는 600만을 넘기는데 KBO 운영은 아직도 제자리 걸음이었으니….
선수 승률 5%…부각되는 대리인 제도
'연봉조정 패배' 이대호, 뒤에 보라스가 있었다면…
추신수와 연봉조정신청 집중분석
이번 패배에 대해 이대호는 '''누구도 연봉 조정 신청할 수 없을 것 같다'''라고 말했다. # 선수측 승률이 상식 이하로 떨어지는 현 연봉조정 제도의 문제점을 그대로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타격 7관왕'''이 진 마당에 이길 선수가 있을리가 없지 않은가.
이번 연봉조정에서 롯데가 승리해서 7,000만 원을 아낄 수 있었지만 내년 FA에서 이대호가 롯데에 대한 의리를 지켜야 할 이유가 확 줄어듬에 따라서 국내 잔류시에도 이대호의 선택폭이 늘어났다고 볼 수 있었다. 팀내 프랜차이즈 스타이자 2010 한국 최고의 타자를 이런 식으로 대우해 놓고도 의리 운운하기는 어려울 테니. 눈앞의 7,000만 원만 바라보는 근시안적인 팀 운용을 꼬집는 목소리가 끊이지 않았으며, 이를 단적으로 정리하는 기사도 있었다.참 롯데스럽다.
이에 롯데팬들은 격분하였고, 롯데 팬 중 나름대로 네임드인 블로거 lezhin이 이대호 연봉 정상화 운동을 시작하였다. 문제제기 모금시작
같은 해 옆나라 일본에서도 비슷한 연봉 조정 신청이 있었다.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의 투수 와쿠이 히데아키의 연봉조정신청이 그것인데, 일본쪽 조정위원회는, 구단제시(현상유지)2억 엔과 선수 제시 2억 7천만엔을 놓고 2억 5300만 엔이라는 자체적인 사정결과로 중간점을 찾아줬다. 게다가 이쪽은 이대호같이 각종 기록을 갈아치운 것도 아니고, 14승 8패 방어율 3점대 후반이라는, 후반기 들어 급격히 무너져서 연봉고과가 떨어진 선수임에도 불구하고 순수하게 성적과 타구단의 연봉고과대우를 비교해서 객관적인 사정으로 절충해줬다는 점에서 한국 연봉 조정과는 사뭇 달랐다. 또한 조용준 용인발전센터 책임연구원은 <한국프로야구 연봉조정제도의 경제학적 균형에 관한 연구>에서 이대호의 2011 시즌 적정 연봉은 10억 890만 원이라고 주장했다. 조 연구원은 이대호와 비슷한 성적을 낸 2003년 이승엽의 연봉 6억 3000만 원과 그동안의 물가상승률, 여기에 프로야구의 규모 확대를 프로야구 중계권료 상승분으로 파악해 이대호의 적정 연봉을 계산했는데, 물가상승률과 프로야구 중계권료 상승분 등을 고려해 이승엽의 2003년 연봉 6억 3000만 원은 2011 시즌 이대호와 비교할 때 10억 890만 원이 된다는 분석이었다. 관련글
결국 이 후폭풍은 상당해서, FA할 때에도 롯데에 남겠다던 이대호의 뜻이 결국은 바뀌고 말았다. 이대호 "롯데 떠날 수도 있다"

8. 2011 시즌





[1] 이 때문에 이대호는 어머니에게 감정이 좋지 않고, 할머니를 진심으로 따라 할머니에게 보은하겠다는 생각을 가졌지만 할머니는 이대호가 고2 때 돌아가셨다. 프로 입단 후 몇 년이 지났을 때 모친이 같이 살자고 연락했지만 이대호는 거절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는 형 이차호가 뒷바라지를 해줬다.[2] 2019 시즌 후 유소년 야구선수들 대상 강의에서 밝힌 바로는 중학생 시절 선배의 괴롭힘 때문에 할머니를 보러간다며 1시간 반 넘게 걸어서 집까지 간 적도 있다고 한다.[3] 처음에는 거절을 많이 했는데, 당시에 이대호의 집이 가난한 것이 가장 컸다. 결국 친척들이 지원해 준 덕에 야구를 할 수 있었다고 한다.[4] 추신수가 없었다면 야구선수가 될 수 없었기에 추신수는 이대호에게 은인이라 할 수 있고 2016년 이대호가 메이저리그에 진출하면서 재회하게 된다. 그리고 5년 뒤 추신수도 KBO 리그에 입성함에 따라 고국에서 재회하게 됐다.[5] 박찬호, 임선동, 조성민#s-1 등이 함께 나타났던 92학번 황금 세대를 잇는 세대라고 할 수 있다.[6] 이 때 부산에서 1982년생 동기생들이 대거 등장해 프로야구 선수로 성장했다. 추신수(부산중-부산고), 이대호(대동중-경남고), 정근우(동성중-부산고), 채태인(대동중-부산상고), 김경언(개성중-경남상고), 김백만(개성중-부산고), 장기영(대동중-경남고), 이승화(부산중-부산상고), 송산(대천중-경남상고), 김덕윤(대신중-경남상고), 백승룡(사직중-경남상고)이 그 주인공들이다. 추신수, 이대호, 이승화는 부산 수영초등학교 동기다.[7] 2001년부터 2007년까지 1군에서 단 25경기만 뛰었던 선수. 2군을 전전하다 2007년 11월 5일 위재영, 강혁 등과 함께 방출되었다.[8] 이승엽을 타자로 전향하게 한 사람 역시 우용득이다.[9] 물론 여기엔 백인천이 시즌 중반 감독 취임 후 사실상의 시즌 포기 형태로 잔여경기를 치른 탓도 있다.[10] 현대 의학의 연구 결과 쪼그려뛰기는 무릎 관절에 부담만 되고 운동 효과는 좋지 않다는 것이 밝혀졌다. 물론 칼로리를 소모시키는 운동량은 상당하지만 다양한 운동수행 능력을 발달시키는 효과는 미미한 반면, 그 효과 이상으로 무릎 관절에 심각한 악영향을 끼쳐 부상을 유발하기 때문에 선수에게나 일반인에게나 좋은 훈련 방법이 아니다. 기합 문서 참조. 오리걸음도 마찬가지.[11] 당시 KBS 2TV 일요일은 즐거워공포의 쿵쿵따 코너가 절정의 인기를 구가하던 시절이었다. 본인은 쿵쿵따를 즐겨 봤다고 무릎팍도사에서 술회하였다. 이에 당시 쿵쿵따 MC였던 강호동은 바로 쿵쿵따 대전을 시전했으나, 이대호에게 곧바로 발렸다... 기보다는 이대호 → 호랑이 → 이상해 → 해질녘 콤보로 당한 걸로 보아 적당히 토스해 줬다고 보는 게 맞을 듯. 하여튼 이상해 → 해질녘 콤보를 본인도 언급한 걸로 보면 확실히 쿵쿵따를 열렬히 보긴 본 모양이다.[12] 후일 KBS 다큐멘터리에 나온 바에 의하면 동래구 모처에 자신의 친형 이차호와 최준석이랑 해서 셋이 같이 살았다고 한다. '''문제는 그 방에 있는 더블 침대 하나에 이대호와 최준석이 같이 누워 잤다는 것'''! 박명환야구 tv 야구썰전에서 이인구가 언급하기로는, 최준석 역시 이대호와 똑같이 당했던 것으로 드러났다.[13] 조성환이 시즌 초 부상을 당해서 나가리된 것은 2004년 4월 24일 손목 부상으로 시즌 아웃된 게 유일하다. 그리고 그 해 9월에....[14] 2004~2005년에도 BB/K 비율이 소숫점 후반대로 나쁜 편은 아니었다.[15] 그리고 이것 때문에 김태균은 '김두표'라는 별명이 또 하나 추가되었다.[16] 술 관련 사고에서 복귀하여 준수한 테이블 세터 역할을 해 줬다.[17] 주전 포수로 뛰며 14홈런을 때리며 가능성을 보여 줬다.[18] 2012년부터는 둘 다 롯데에 없는 상태였다. 손민한은 방출, 이대호는 일본 진출. 그러다 2016년 미국진출 뒤 2017년에 이대호는 롯데로 복귀했다.[19] 선수 본인의 관리 실패도 있지만, 겨울 동안 올림픽 야구 예선 경기에 출장하느라 훈련이 부족했던 면도 있을 듯하다.[20] 2008년에도 올림픽 브레이크 이전, 이후 둘 다 계속 처음에는 잘하다 꾸준히 내려갔다[21] 실제로 꼴찌를 잠시 찍음.[22] 사실 2루수 송구 실책은 실책이라기보다 송구가 이대호에게 맞아 굴절된 것으로 불운에 의한 것이었다. 공식적으로는 3루타로 기록됨. 에러 끼면 인정 못 받는다.[23] 애초에 포지션 경쟁에서 밀렸던 것이 아닌 팀의 전력운용 차원이란 것 때문에 3루수를 봤기에 실책이 많은 것.[24] 애초에 롯데는 상위권 전력이 아니었는데 구단의 기대치는 높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