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역사
1. 이탈리아와 로마 제국의 번영
이탈리아의 역사적인 세력 구도와 인구 변화 등의 내용은 이탈리아/인구 참조.
이탈리아는 선사 시대부터 지중해성 기후와 비옥한 땅을 바탕으로 많은 인구를 보유하고 있었다. 여러 부족들이 포 강을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이탈리아라는 이름은 이탈리아 반도의 중부에 살던 고대 이탈리아 부족인 오스키 족의 왕 비탈리우(Vitaliu)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후 로마 제국이 사비니 족, 삼니움 족 등 이탈리아 반도의 여러 부족들을 통칭하여 이탈리아인이라 표현하였다.
최초로 북이탈리아의 패권을 잡은 것은 에트루리아였다. 이들은 북쪽으로는 포 강, 남쪽으로는 로마가 있는 라티움까지 영역을 확장했다. 남이탈리아는 나폴리(네오 폴리스), 폼페이, 시칠리아(시켈리아)가 있는 그리스의 식민지였다. 에트루리아는 카르타고와 연합해서 그리스를 견제했다가[1] 로마의 반란으로 왕정이 무너지면서 도시 공화국들의 동맹 연합 체제로 바뀌었다.
이후 이탈리아는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유럽 전체를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던 로마 제국의 중심지가 되었다.
2. 이탈리아의 분화와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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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제국이 이탈리아에서 없어지고 나서 이탈리아는 크게 북부 이탈리아, 중부 이탈리아, 남부 이탈리아로 나누어진다. 초기 주요 세력은 동고트 왕국, 동로마 제국, 랑고바르드 왕국, 프랑크 왕국, 이탈리아 왕국, 신성 로마 제국 등이 있었고 나중에는 지역마다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하기 시작한다.
이탈리아는 서로마가 무너진 이후에 오랜 기간에 걸쳐 고트족, 랑고바르드족 같은 수많은 이민족들이 침입했다. 특히 게르만 지역과 가장 가까웠던 북부 이탈리아가 가장 많은 공격을 받았다. 중부 이탈리아와 남부 이탈리아는 유스티니아누스 1세 휘하의 명장 벨리사리우스와 나르세스의 활약으로 어느 정도 질서를 되찾았으나, 북부 이탈리아에서의 혼란은 여전하였다. 북이탈리아도 동로마가 점령했으나 얼마 되지 않아 후퇴했다. 동로마의 영토였던 베네치아에는 베네치아 공화국이 세워졌다.
이후 프랑크 왕국이 세력을 키워서 북부 이탈리아도 안정을 되찾았다. 프랑크 왕국이 셋으로 분열되고 이탈리아에 해당하는 중프랑크 왕국은 로타링기아를 서프랑크, 동프랑크에 넘겨주고 나서 이탈리아 왕국이 되고, 나중에는 독일 왕국과 합쳐져서 신성 로마 제국이 되었다.
북부 이탈리아는 기존의 이탈리아 지역과 이민족 지역들이 난립한 가운데 알프스 산맥이라는 지리적인 차단 요소, 신성 로마 황제와 교황 사이의 갈등 덕분에 여러 도시들이 독자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다. 이들은 자유 도시, 공국, 공화국 등 각자의 실정에 맞는 다양한 형태로 발전하였으며, 유럽의 금융과 무역을 지배하는 막강한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이들 도시 국가 중 가장 유명한 국가는 지중해의 지배자 베네치아 공화국이다. 베네치아 공화국은 이탈리아의 다른 국가들과는 달리 신성 로마 제국과는 완전히 독립된 상태였다. 베네치아 공화국 외에도 밀라노 공국, 시에나 공화국, 피렌체 공화국, 제노바 공화국, 사보이아 공국 등의 국가들이 막대한 부와 강력한 세력을 가졌다. 제노바 공화국은 한때 지중해 무역에서 베네치아 공화국의 경쟁 국가로 성장하기도 하였다.
북부 이탈리아의 국가들은 유럽에서 가장 부유했고, 로마 제국의 중심지였던 지역들이라 각종 문화적 유산이 풍부하게 남아있어서 선진적인 종교, 사상, 철학의 도입이 활발하였고 르네상스의 발원지가 되었다.
이런 국가들은 시대가 변화하면서 영향력이 감소하기 시작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으나 핵심적인 원인은 통합적인 세력 구축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이탈리아 반도의 국가들에 비해 주변의 강대국들은 세력을 합쳐 나갔다는 것이다. 게르만 족이 이탈리아를 지배하는 과정에서 여러 도시들이 인종적, 문화적으로 극심한 분열을 겪었으며, 이후로도 교황과 황제의 세력 다툼 속에 있었기 때문에 이탈리아는 통합이 이루어지기 어려웠다. 이탈리아는 동고트 왕국, 동로마 제국, 랑고바르드 왕국, 프랑크 왕국, 이탈리아 왕국, 신성 로마 제국으로 이어지는 지배층의 교체 기간이 오래되어서 하나로 통합하지 않았다. 서로 대립을 반복한 이탈리아는 주변 국가들에 미치는 영향력이 거의 없어지는 상황까지 나아간다.
이렇게 분열된 채로 이탈리아 안에서 대립하는 사이에 주변의 강대국들이 밀려들기 시작하였으며, 이탈리아의 많은 인재들은 보다 더 큰 국가인 프랑스, 독일, 스페인 등의 지역으로 다 빠져나갔다. 나중에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카를 5세의 적극적인 합병 정책으로 대부분의 국가들이 합스부르크 가문에 복속하게 되었으며, 이탈리아 반도의 나머지 지역들도 프랑스 등의 가문들이 지배자로 들어서면서 독자적인 영향력이 없어졌고 베네치아 공화국이나 교황령의 영향권에 있는 일부 지역들 정도만 어느 정도의 독자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2]
이후에는 많은 도시 국가들이 합스부르크 가문과 대립한 프랑스 등의 세력을 이용해서 이러한 상태를 벗어나려고 시도하곤 하였다. 30년 전쟁이 일어났을 때는 혼란이 심해졌는데, 일부 국가는 독일 편, 일부 국가는 프랑스 편에서 다른 국가의 영토에서 자기들끼리 싸우는 상황이 일어나기도 했다.
나폴레옹 전쟁을 일으킨 유럽의 강국 프랑스가 쳐들어와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향을 받고 있던 국가들을 점령하고 북부 이탈리아를 하나로 합친 국가를 세웠지만, 나폴레옹의 몰락 이후에는 합스부르크 가문 등의 세력에 의해 재편되어 구성하는 국가는 많이 줄어들었지만 다시 분열 상태에 놓이게 된다.
중부 이탈리아의 일부는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정벌 이후 동로마 제국의 땅이었으나, 동로마로부터 거리가 있었기 때문에 동로마에서 파견한 총독 이외에 로마 공국(Duchy of Rome)의 대공, 교황 등이 지배했다. 로마 주교인 교황과 로마 공(Dux)이 병존하며 통치했지만, 교황의 권위가 날로 강해지면서 로마 공은 물론 라벤나의 총독까지 위협했고, 여기에 성상파괴운동을 레오 3세, 콘스탄티노스 5세 등 이사우리아 왕조의 황제들이 강제하자 반 제국 감정이 일반시민, 사회지도층 모두에게 강해졌다. 성상파괴운동 이전에도 발칸반도의 상당부분이 슬라브인 및 불가리아에게, 이탈리아의 상당부분이 롬바르드에게 넘어감으로써 동로마령 이탈리아와 콘스탄티노플 본국 사이의 교통 통신이 불편해져서 안 그래도 조금씩 조금씩 커져가는 가운데 더 확대되었던 언어 문화적 차이에 성상파괴운동은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이외에도 분명히 옛 본국이고 발상지였는데 그 때 와서는 지방 속주 취급 받던 것과 (콘스탄스 2세 참조), 유스티니아누스 탈환 이후로 본래 이탈리아의 귀족들이 독과점해오던 교황직 및 고위 사제직에 그리스어권 출신의 비중이 늘어남으로써 그들이 본인들의 파이를 침해받았다고 느낀 것도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여하튼 당시 교황이던 자카리아는 프랑크 왕국의 피핀 3세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화답한 피핀 3세가 중부 이탈리아를 공격해서 라벤나를 점령하여 교황에게 바친다. 교황 자카리아는 마지막 동로마 제국 출신 교황이 되었다. 원래 라벤나는 동로마 제국의 총독부가 있던 곳이며[3] 동로마 제국은 라벤나 총독부를 통해 교황을 통제했는데 이 사건으로 동로마 제국은 중부 이탈리아의 지배권을 상실했다. 중부 이탈리아와 유럽의 새로운 지배자인 프랑크 왕이 교황에게 인정받게 되었으며, 이러한 과정 중에 동로마 제국령 중부 이탈리아는 교황령이 되었다.
그렇지만 교황은 가문으로 세습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지위가 불안정하였고, 대놓고 직접적으로 세력을 동원하여 영토 확장 전쟁을 벌이는 일도 불가능했다.[4] 그래서 처음에는 중부 이탈리아의 교황령 대부분이 실질적으로는 귀족들의 영지인 상태로 형식적으로만 교황의 통치를 받았다. 다만 교황들이 자신들의 지위를 이용해서 강력한 세력이 크는 것을 막았기 때문에 중부 이탈리아에서 교황과 견줄 만한 세력이 성장하지는 못했다.
오랜 세월에 걸쳐 교황들은 여러 수단을 써서 중부 이탈리아를 지배했으며, 중부 이탈리아는 교황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로마와 볼로냐를 비롯해서 많은 지역이 교황령의 영향 아래에서 발전했다.
교황령은 다른 지역으로 통합할 수 있는 명분을 가지고 성립한 것이 아니어서 이탈리아가 통합되는 일에 가장 큰 방해가 되었다. 교황은 많은 권위를 가졌고 주변 세력의 도움을 받았지만 일정 수준을 넘어선 성장은 방해를 받았다. 게다가 교황은 국경을 넘어 전세계의 가톨릭 신자에게 직접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교황령은 주변 국가들과의 이해 관계도 있었다. 이런 사람이 지배하는 지역이 통일 이탈리아라는 (강력할 것으로 예상되는) 국가에 종속된다는 것은 프랑스, 오스트리아 등 가톨릭 국가 입장에서는 단순히 세력 구도 이상의 의미가 있었고 이탈리아의 완전한 통일을 막는 명분이 되기도 했다. 같은 이유로 교황령은 완전한 의미의 세속 국가로 변하기는 어려웠다.
중부 이탈리아는 이런 상황 때문에 이탈리아 통일 전쟁이 벌어졌을 때도 주변 국가를 포섭해야만 했다. 교황들은 어떻게든 프랑스를 이용해서 대항하는 것이 전부였고 다른 수단은 없었다. 결국 교황령이었던 중부 이탈리아는 이탈리아 왕국에 점령되었으며, 교황에게 남은 것은 바티칸 시국이 전부가 되었다.
남부 이탈리아는 시칠리아 왕국과 나폴리 왕국이 지배했다. 서로마가 멸망하고 북부 이탈리아와 중부 이탈리아는 프랑크 왕국의 영토가 되었지만 남부 이탈리아는 바이킹족이나 이슬람 국가가 침공해 국가가 세워지기도 하였다. 남부 이탈리아는 대략적으로 세 시기로 분류할 수 있어서 동로마 제국이 지배하던 시기, 동로마 제국을 공격하기 위해 교황의 지지를 받아 진출한 서유럽 국가들이 지배하던 시기, 동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서유럽 국가들이 서로 지배하던 시기로 나눌 수 있다.
먼저 유스티니아누스의 서로마 지역 점령 시기에는 대체적으로 동로마 제국의 영토였다. 그렇지만 동로마 제국의 상황에 따라 온갖 일을 겪어야 했다. 시칠리아는 과거부터 유명한 곡창 지대였고 이탈리아로 향하는 관문이어서 이슬람 세력의 주요 목표가 되었다. 바리 에미르국이 시칠리아에 진출하여 동로마와 시칠리아를 양분한 채로 한동안 지배자로 군림하기도 했다. 이슬람뿐만 아니라 동로마 내부에서도 남부 이탈리아와 시칠리아를 근거지로 하는 반란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이후에는 기존의 세력이 아닌 노르만인들이 등장하여 이 지역의 지배자가 되었다. 로마로 온 스칸디나비아인의 후예 전사들이 용병으로 활동하던 중 로베르 기스카르(Robert Guiscard)[5] 가 남부 이탈리아에서 노르만인들을 규합하여 교황의 지지를 받고 남부 이탈리아와 시칠리아에 공국을 세우게 된다. 기스카르는 궁극적으로 동로마 제국을 공격하겠다는 목표를 세운다. 이전까지는 이슬람이 유럽으로 진출하기 위해 남부 이탈리아를 노렸지만, 기스카르가 등장하고 나서는 노르만이 동로마로 진출하기 위해 남부 이탈리아를 지배했다. 이후 남부 이탈리아를 차지한 거의 모든 국가들은 동로마의 황제가 되기 위해 동로마를 노리게 된다.
기스카르는 동로마 정벌에 들어가기 직전에 병사한다. 기스카르의 일족들이 남부 이탈리아와 시칠리아의 왕위에 오르면서 시칠리아 왕국이 탄생하였고, 이들 시칠리아 왕들의 목표는 여전히 동로마였다. 시칠리아의 왕 중에서 직접적으로 이러한 목표를 이룬 사람은 없었지만, 노르만인들은 이후 십자군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고, 예루살렘이나 안티오키아 등지에 왕국, 공국 등을 세우며 동로마를 위협했다.[6]
이후 노르만인들의 왕위가 단절되었는데 마침 혼인으로 인연이 있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가문인 호엔슈타우펜 가문에서 시칠리아 왕위를 차지한다. 독일 황제들 역시 동로마의 제위를 노려 동로마와 좋은 관계는 아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프리드리히 2세와 콘라트 4세의 사망으로 호엔슈타우펜 가문이 단절된다. 프리드리히 2세의 사생아 출신인 만프레디가 국왕에 올랐지만 신성 로마 제국의 세력을 약화시킬 기회를 잡은 교황청은 프랑스에 남부 이탈리아를 넘기기로 결정하고 루이 9세의 동생인 앙주 백작 샤를을 지원해서 만프레디를 격파하여 시칠리아의 왕 카를로 1세로 등극시킨다. 카를로 1세 역시 동로마를 계속 공격하려고 하였다.
이후 동로마 제국의 황제였던 미카일 8세가 외교와 정치 공작 등을 통해 만프레디의 딸과 결혼해서 호엔슈타우펜 왕가의 계승권을 갖고 있던 아라곤 왕 페드로 3세와 연합해서 시칠리아의 민중 봉기를 일으켜 카를로 1세를 쫓아내 버린다.(시칠리아의 만종) 페드로 3세는 시칠리아 왕위를 차지했고 동로마는 군사도 동원하지 않고 시칠리아와의 적대 관계를 없애 버렸다.
이 사건으로 카를로 1세는 시칠리아에서 쫓겨나 남부 이탈리아만 지배하게 되었으며, 시칠리아 섬을 점령하기 위해 교황은 조카인 프랑스의 왕과 연합해서 아라곤 십자군까지 일으켰지만 패배하였다. 시칠리아의 지배자라는 명분 등을 위해 카를로 1세와 그의 후예들은 시칠리아를 지배하지는 않았지만 자신들의 왕국을 시칠리아 왕국으로 자처했다. 이렇게 시칠리아가 없는 시칠리아 왕국은 다른 국가들은 왕국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편의상 수도의 이름을 따서 나폴리 왕국이라고 불렀다.
시칠리아는 페드로 3세가 시칠리아의 왕이 된 뒤 아라곤, 스페인의 지배를 받았고, 아라곤은 시칠리아에서 지중해 동쪽으로의 진출을 노렸다. 나폴리 왕국은 왕위 계승 때문에 내분이 일어나, 이후 기회를 노리던 아라곤이 정복했다. 아라곤은 지중해 진출 대신 카스티야 왕국과 동군연합을 이루면서 스페인을 형성하고 신대륙 진출에 관심을 가졌다.
스페인은 남부 이탈리아와 시칠리아를 통합시키기 않고 지배자는 같지만, 서로 다른 총독 관할[7] 로 분리된 채로 동군연합을 형성하고 있다가 이탈리아 통일 전쟁 이전에는 양시칠리아 왕국으로 통합되었다.
이렇게 지배자들이 계속 바뀌어서 남부 이탈리아는 이슬람 문화, 그리스 문화, 노르만 프랑스 문화가 합쳐지게 되었다. 남부 이탈리아와 시칠리아는 서로 유사한 세력의 지배를 받았고 지리적으로 근접했지만, 북부 이탈리아와 중부 이탈리아는 상당히 다른 지역이었다.
3. 이탈리아 왕국의 성립과 해체
나중에는 북부 이탈리아는 대부분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았고 남부 이탈리아도 모두 스페인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결국 사르데냐 왕국과 교황령을 제외한 이탈리아는 모두 오스트리아와 스페인의 영향 아래에 있던 상태였다. 그래도 이탈리아는 유럽의 다른 지역과 다른 동질성을 가지고 있었다. 이탈리아를 합쳐야 한다는 여론이 커졌고, 사르데냐 왕국의 주도로 교황령을 포함한 대부분의 국가들이 합쳐져서 통일을 이루었다.(이탈리아 왕국) 주세페 가리발디가 활약한 시기가 이 시기였다.
당시 오스트리아의 개입을 막기 위해 나폴레옹 3세와 연합해서 롬바르디아 지역에서 오스트리아를 몰아냈는데, 이탈리아가 통일되지 않도록 견제하기 위해서 나폴레옹 3세가 프랑스군을 후퇴시키고 오스트리아와 종전해서 더 진군하지 못했고 이 사건으로 사르데냐 왕국의 재상이었던 카보우르는 사임을 선언했다.[8] 프랑스와 다시 동맹하기 위해 사르데냐 왕국은 토스카나와 에밀리아로마냐를 합병할 때 사보이, 니스 지역을 프랑스가 넘겨주었다. 이후에는 티롤, 베네치아, 이스트리아, 달마티아 지역을 점령하기 위해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독일과 동맹을 맺었다. 동맹 직후에 일어난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 참여하여 베네치아를 획득했으며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때문에 프랑스가 철수한 상황에서 교황령을 합병하여 이탈리아가 통일된다. 원래부터 이탈리아는 인구가 많은 지역이었지만 인구 증가가 느려지기도 했고 서로 합쳐져 있지도 않아서 영향력이 많지 않았는데 이탈리아가 통일을 끝낸 1870년 이탈리아의 인구는 27,900,000명으로 이미 주변의 강대국 수준의 인구를 확보해서 영향력이 커졌다.
통일 이후 이탈리아는 리비아, 소말리아 등을 합병하고 티롤, 이스트리아, 달마티아 지역 등을 지배하려고 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독일 제국과 더불어 삼국 동맹을 형성했지만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전쟁을 일으키는 데에 사전 협의가 없었다는 명목으로 중립을 유지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런던 조약을 통해 아직 오스트리아가 다스리는 이탈리아 지역을 대가로 협상국으로 전쟁에 참여하게 되고 승전국이 되어서 북부 티롤, 달마티아 지역을 제외한 지배하려고 했던 모든 영토를 획득했다. 이 시기에 대체적인 이탈리아 왕국의 영역이 확정되었다. 이러한 이탈리아의 대외 정책을 신성한 이기주의(Sacred Egoism)라고 하는데, 전쟁 당시 총리였던 살란디노의 연설에서 처음 등장한 말이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이던 1910년 이탈리아의 인구는 37,200,000명으로 주변의 강대국과 비교해도 부족하지 않았고 산업력도 엄청나지는 않아도 무시할 수 없을 정도였기 때문에 이러한 정책에 대한 지원이 있을 수 있었다.
이후 파시즘이 생겨나서 영국 스파이 일을 하던 베니토 무솔리니가 국가 파시스트당을 창설하고, 로마 제국의 부활을 외치며 국가의 영도자(일 두체)가 되어서 정권을 잡는다. 알바니아를 합병하는 등 정복 전쟁을 하다가 에티오피아를 침공하고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켰다. 무솔리니는 전쟁 도중 축출되어 감옥에 갇혔다가 독일군의 구조로 살아나고 다시 게릴라 부대에게 붙잡혀 처형당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의 패배로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얻은 이스트리아 지역은 트리에스테 자유 지구로 재편되었고, 리비아도 영국과 프랑스가 분할 점령했다가 독자적인 국가를 형성시켜버린다.
당시 국왕이었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무솔리니의 전횡을 조장했고, 독일군이 이탈리아에서 계속 전쟁을 벌이는 상황에서도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 국민들의 비난을 받고 퇴위했고 움베르토 2세가 즉위했다. 그러나 그것으로 왕정에 대한 비난 여론을 없애지 못해서 결국 공화정과 왕정 중 하나를 선택하는 개헌 국민투표를 실시하고 공화제 찬성파가 과반수를 득표하여 공화제를 채택하기로 하고, 움베르토 2세국왕을 비롯한 이탈리아의 왕실 일가는 이탈리아에서 추방되어 포르투갈과 스위스, 미국 등지로 망명했다.[9] 이후 제헌 의회가 선출되고 제헌이 이루어져 이탈리아는 공화국이 되었다.[10] 공화국이 된 이탈리아는 여전히 주변의 강대국에게 영향력을 인정받았고 인구도 1950년 47,100,000명으로 그동안 꾸준하게 증가해 왔어서 기본적인 역량은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후에도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
4. 현대 이탈리아의 성립
이후 이탈리아는 지속적으로 성장했고 정치 혼란,[11] 둔화된 성장, 지역에 따른 심각한 빈부 격차, 범죄 - 특히 마피아 문제 등이 있지만 세계 순위권의 산업을 가진 국가로 발전해서 여전히 많은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허나 이탈리아 경제 침체와 고질적인 정치권의 부정부패로 국가 성장력이 많이 떨어진 상태에서 2020년 코로나 19 확산 사태라는 최악의 위기를 맞아 현재 진행 중이다. 특히 이탈리아는 지난 2019년부터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추진 중인 일대일로에 참여할 의사를 표명한바 일찍이 토스카나주 프라토에 중국인 노동자들이 정착하여 거주하고 있었는데 2020년 1월 우한에 거주하다 온 자국인이 확진 판정되자 중국 착발 항공기를 중단시키는 강수에도 불구 확산세 방어에 실패 결국 동년 5월에 와서는 21만여 명의 누적 확진자와 28000여명의 누적 사망자를 발생시키는 결과를 불렀다.
[1] 그리스의 패권이 무너지기 전까지는 로마 연합 체제도 카르타고와 연합했다.[2] 카를 5세는 자신의 첫 영지였던 부르고뉴를 북이탈리아와 맞바꿀 정도로 이탈리아에 대한 집착이 강했고, 경쟁자인 프랑스를 누르고 유럽을 평정하다시피 했기 때문에 상대가 되지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도 이탈리아의 국가들은 주변 국가를 이용하면서 서로 대립했다.[3] 이탈리아의 동해안이라 발칸 반도의 로마 본국과 왕래가 쉬웠다.[4] 교황의 사주로 특정 국가가 다른 국가에 전쟁을 일으키는 일은 많았다. 그래도 이런 식으로 일을 벌이는 게 직접 쳐들어가는 것보다는 힘들었다.[5] 이 이름은 프랑스식인데, 대부분의 서적에서는 프랑스식 이름으로 주로 기술된다. 이탈리아식으로는 로베르토 귀스카르도(Roberto il Guiscardo)다.[6] 결국 중근동에 진출한 십자군들은 베네치아 공화국과 협력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해서 동로마 제국의 몰락에 일조했다.[7] 밀라노 총독과 시칠리아 총독[8] 얼마 지나지 않아서 카보우르는 다시 재상에 임명되었다.[9] 왕가는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2002년에 입국 금지령이 해제되어 이탈리아 귀국이 허용되었으며, 구 왕가의 일족들 대부분은 현 공화국 정부를 이탈리아의 정식 정부로 인정하고 이탈리아로 돌아와서 공화국 국민이 되었다.[10] 실제로 이탈리아는 왕국 시절에도 왕정에 반대하는 공화주의 운동이 꽤 있었으며 이탈리아 통일 운동의 주역이었던 정치가 주세페 마치니 역시 공화주의자였다.[11] 과거 납탄 시대에는 정부군, 좌익 단체, 우익 단체가 무장 교전을 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