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토 마사유키

 

1. 加藤 将之
1.1. 주요 출연작
1.1.1. 애니메이션
1.1.2. WEB 애니
1.1.3. OVA/극장판
1.1.4. 게임
1.1.5. 기타
2. 加藤 正之
2.1. 주요 출연작
3. 加藤 正幸
3.1. 개요
3.2. 경력


1. 加藤 将之


[image]
'''프로필'''
'''이름'''
'''카토 마사유키'''
加藤 将之(かとう まさゆき)
'''직업'''
성우, 나레이터
'''출신지'''
일본 도쿄
'''생년월일'''
1972년 9월 23일 (51세)
'''신장'''
163cm[1]
'''혈액형'''
A형
'''결혼 여부'''
기혼[2]
'''소속사'''
켄 프로덕션
'''성우 활동 시기'''
2001년 ~ 현재
'''소개링크'''

일본남성 성우.
NOBU라지 7화에 따르면 무려 만 29세(!!!)에 성우 데뷔를 하였다.[3] 성우 데뷔 이전에는 평범한 샐러리맨이였는데, 25세 때 우연한 계기로 연기를 배우게 되었고 우여곡절 끝에 성우로 데뷔하였다고 한다.
무명 생활이 상당히 길었는데 2014년 즈음부터 여성향 NL에서 그의 신들린 연기력으로 입소문이 퍼지기 시작하였다(...).
근래 가장 알려진 배역은 오버로드데미우르고스역. 평소에도 원작소설의 팬이여서 열정을 가지고 원작의 캐릭터를 분석, 독파 후 훌륭한 열연을 들려주었다. 데미우르고스 특유의 기품있고 우아하며 나자릭 구성원 한정이지만 지극히 자상하고 어느 때나 침착한, 그러나 아인즈와 관련된 일에는 격하게 반응하기도 하는 모습을 고스란히 재현해내는데 성공했다. 팬들의 반응도 '내가 상상했던 데미우르고스의 목소리 그대로다' 라는 등 상당히 호의적이다.
여러 애니에서 다양한 조연, 악역을 맡으며 지적이고 냉정한 캐릭터도 맡지만 간혹 허당이나 어리숙한 역에도 조예가 깊다.
성우 토리우미 코스케와 음색이 비슷하다. 본인의 경우 차가운 악역에 특화된 음색. 선배 성우 타케모토 에이지와 음색이 꽤나 비슷하다.
동년배로는 호시 소이치로, 세키 토모카즈, 박로미, 스와베 준이치가 있다. 한편 2001년 데뷔 동기로는 시모노 히로, 오노 다이스케, 토요나가 토시유키가 있다. 그런데 마에노 토모아키, 이리노 미유, 하타노 와타루보다 후배인게 함정(...).
친한 데뷔동기 성우 중에 호시노 타카노리가 있는데, 이 분은 191cm의 매우 크고 아름다운 덩치라 163cm인 아담한 본인과 훌륭한 콤비를 만든다.
인도어파[4]가 많은 성우들 중에선 눈에 띄는 마라톤이라는 취미를 갖고 있다. 언젠가는 마라톤 대회에 나가려고 아프리카(!!!)까지 가서 뛴 적이 있었다고...

1.1. 주요 출연작



1.1.1. 애니메이션



1.1.2. WEB 애니



1.1.3. OVA/극장판



1.1.4. 게임



1.1.5. 기타



2. 加藤 正之


[image]
마찬가지로 일본의 남성 성우이며, 1932년 후쿠오카에서 태어나 와세다대학을 졸업한 뒤, 성우 겸 배우 생활을 하다 1993년 후두암으로 인해 사망한다.

2.1. 주요 출연작



3. 加藤 正幸


[image]
'''이름'''
加藤正幸
'''로마자'''
Masayuki Katō
'''생년월일'''
쇼와 21년
1946년 8월 19일
'''출신'''
일본 도쿄 도
'''직책'''
니혼 팔콤 회장 및 '''창립자'''

3.1. 개요


니혼 팔콤의 창립자이자 前 대표[5], 現 회장, 그리고 대주주이기도 하다. 니혼 팔콤 홀딩스가 창립자 카토 마사유키의 지주회사인 점을 고려하면 사실상 니혼 팔콤을 대부분을 소유한 사람.
1981년 3월, 팔콤을 창업하고 나서부터 지금까지 게속해서 개발에 관여하고 있는 엄청난 사람이다. 즉, 밀레니엄 팰콘과 당시 컴퓨터 회사들의 인기 접미사였던 'com'을 결합한 팔콤의 이름을 제작한 사람도 이 사람.
엔딩 크레딧에 의하면 이름을 처음 올린 게임은 '''드래곤 슬레이어'''. 키야 요시오의 원안을 같이 협력해서 제작했다. 이후, 1985년에 나온 드래곤 슬레이어 2: 재너두부터는 프로듀서로서 이름을 올렸으며 놀랍게도 '''2011년'''에 나온 벽의 궤적까지 프로듀서 직을 끝까지 맡고 있었다. 거의 '''26년'''동안 프로듀서 직을 자처해 맡고 있었던 것. 그 뒤, 나유타의 궤적에서부터 프로듀서직을 현 대표인 콘도 토시히로에게 건내주고 자신은 뒤로 물러났다. 다만, 아직도 크리에이티브 프로듀서 같은 직책으로 이름을 올리고 있는 것을 보면 맡은 역할은 더욱 축소되었지만 개발에 어느 정도 손을 대는 모양.
엔딩 크레딧에 언급되지 않았지만 상당수의 게임에 디렉터로 이름을 올린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1986년에 나온 태양의 신전 아스테카 2에서 디렉터로 명시되어 있으며 바다의 함가쯔바이에서도 디렉터로 이름을 올렸기 때문. 단, 1991년 ~ 1998년 사이에는 디렉터를 맡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6] 이 때는 키야 요시오를 필두로 하야카와 타다시, 후지이 다이스케 등 다양한 디렉터들이 팔콤에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 이를 생각해보면 제일 오래된 디렉터로 생각해도 될 정도로 카토 마사유키가 팔콤의 80년대부터 90년대까지 이끌어 온 것.
2001년에는 디렉터, 코디네이트, 슈퍼바이저 등을 맡아온 직원, 야마자키 신지를 회사의 상장 분리를 하면서 게임 부문의 '''대표이사'''로 선정한 바가 있다. 이외, 쿠사노 타카유키, 이시카와 미에코를 각각 이사진으로 승격 시켰다. 실제 이 둘은 이사직을 맡게 된 지 1년 후인 2002년~2003년부터 각각 디렉터 및 코디네이트를 이어받은 바 있다. 물론 카토 마사유키는 회사의 창립자로서 대주주 및 회장직을 맡았다.
2006년에서 2007년에는 대표이사를 잘 맡아왔던 야마자키 신지가 갑작스럽게 안은 병으로 인해 퇴사할 수 밖에 없었던 상황이었기에 카토가 직접 야마자키에게 퇴직을 권유하였고 야마자키는 당시 부장이었던 콘도 토시히로를 차기 대표이사로 발탁했다. 이후는 지금의 팔콤의 이미지로 존재하고 있다.
대주주이자 창립자이기 때문에 니혼 팔콤의 대부분의 경영 및 개발엔 카토 마사유키가 끼어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규모를 키우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여기까지 망하지 않고 성장할 수 있게 만든 일등공신. 현재는 가끔 인터뷰에도 나와 팔콤의 창립 과정에 관한 인터뷰를 하기도 한다.

3.2. 경력



[1] 같은 남성성우 요시노 히로유키와 동일하다. 요시노가 키가 아담한 느낌의 음색인 반면 카토 마사유키는 오히려 키가 큰 느낌의 음색이여서 맡은 캐릭터들이 키가 거의 다 크다.[2] 결혼을 하였다고 2014년 12월 26일 본인이 밝혔다.[3] 한국은 남자 한정 군복무가 전제되므로 때문에 최소 25살 이상의 연령의 성우가 많은 것도 이상할 것도 없지만, 일본의 경우는 그런 게 없어서 이른 나이에 데뷔를 하거나 아역배우 경험자가 성우가 되는 경우가 많아 비교적 평균 데뷔 연령이 낮다는 걸 생각하면 실로 충공깽일 수도 있다. 한국으로 치면 실질적으로 40대에 성우 데뷔를 한 거나 다름 없는 셈이다.[4] 아웃도어파의 반대말. 집 안이나 실내에서 휴식을 취하는 것을 좋아하는 성향을 뜻한다.[5] 2001년 이전, 팔콤의 상장 분리 이전이다.[6] 물론 1987년, 1988년에도 디렉터를 맡지 않았는데 이 때는 전설이라 불리우는 이스 1, 이스 2의 디렉터를 담당한 하시모토 마사야가 있었기 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