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연시인데 연애를 할 수 없는 건에 대하여/설정
1. 개요
미연시인데 연애를 할 수 없는 건에 대하여의 설정을 정리한 문서.
2. 국가
2.1. 기독교(친교회통합) 진영
2.1.1. 로마 제국(동로마 제국)
[image]
현재 로마 황실의 계보. 출처[4]
'''시련을 딛고 다시 일어선 2천년 제국'''
수도는 다들 알다시피 콘스탄티노폴리스, 그 외의 직할령 주요 도시들로 메셈브리아, 셀림브리아[5] , 레데스토스[6] , 칼케돈 등이 있다. 비 직할령 주요도시엔 테살로니키[7] , 미스트라, 파트라스, 아테네, 테베, 라리사, 디라키온, 크루여, 요안니나, 아르타, 프리슈티나[8] , 바르나, 벨리코 타르노보, 소피아, '''아드리아노폴리스''', 니케아, 니코메디아, 스미르나, 이코니온, 트라페준타, 안티오크, 아미소스, 카이로, 알렉산드리아, 다마스쿠스, 예루살렘, 알레포, 트리폴리, 베이루트, 니코시아, 이라클리온 등이 있다.
초반엔 처참하기 그지없는 상황으로, 주인공인 드라가시스, 마누일 2세, 루카스 노타라스 같은 현실주의자들도 있지만 요안니스 8세, 테오도로스 같은 주전파들도 있어 무시무시한 적 앞에서 뭉쳐도 모자랄 판에 내분을 겪었다. 이후 오스만의 침입으로 콘스탄티노플이 함락 위기에 몰렸으나 주인공의 분투로 겨우 구원받았고, 그 때문에 주전파와 반주인공파의 기세가 꺾이고 수도 또한 모레아를 지지하는 쪽으로 선회한다. 이로써 위기가 잠시 가라앉은 듯하나, 오스만이 지난 전쟁에서 주인공이 매우 치명적인 숙적이라는것을 확실하게 인지하게 되어 그를 무너뜨리기 위해 치밀한 준비를 하기 시작하면서 다시 위기가 몰려온다. 결국 1428~29년의 공세로 과거 마누일 2세가 수복한 트라키아 지방을 대부분 상실하고,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을 지키기 위해 막대한 연공을 바치고 요안니스 8세가 무라트 2세의 앞에서 무릎을 꿇는 등의 굴욕적 대우를 당한다.
과거 마케도니아 왕조 및 콤니노스 왕조 시기엔 테마 제도로 대표되는 지방관제를 채택해 중앙집권을 이룩했던 것과 달리, 4차 십자군과 오스만의 부상, 스테판 두샨의 통수 등을 겪으며 제국이 분열되고 라틴계를 중심으로 한 지방 영주들에 의한 봉건화가 이뤄지면서 친왕제가 자리잡았다. 14세기 동안 수 차례의 내전과 반란을 겪으면서 어떻게든 지방의 유력귀족들에게서 통치권한을 회수해 황족 중심으로 영토가 돌아가게 만들긴 했는데, 이 과정에서 기회를 틈탄 사방의 적들에 의해 니케아 제국 시절 제국 부활의 기반이 되어준 아나톨리아 서부 전체와, 라틴 제국과 테살리아 왕국 등을 패버리고 확보한 발칸 반도의 영토를 대부분 날려먹었다.
시작 시점으로 제국에는 셀림브리아 전제국, 테살로니카 전제국, 모레아 전제국, 모넴바시아 전제국, 레온타리온 전제국 총 5개의 전제국이 존재하며, 이들은 각각 주인공, 안드로니코스, 테오도로스, 디미트리오스, 토마스의 분봉령이었다. 이후 전개에서 주인공과 테오도로스가 분봉령을 교환함과 동시에 모넴바시아와 레온타리온은 모레아에 통합되었고, 셀림브리아는 수도인 셀림브리아의 함락으로 상실했으며, 테살로니카는 베네치아와의 조약을 통해 넘겨주면서 원래의 전제국은 단 하나로 줄어들었다. 하지만 주인공의 활약으로 1세기 이상의 세월만에 이피로스 전제국이 재건 후 모레아와 통합되고 이후 2차 대 오스만 전쟁에서 스칸데르베그를 왕으로 세운 알바니아가, 그리고 3차 최종 결전 중 세르비아 전제국이 속국이 되면서 이렇게 제국 내 전제국은 2개가 되었다. 이와 함께 시작부터 공동황제로서 천년고도를 지켜왔던 요안니스 8세가 전쟁이 끝나자마자 황위에서 물러나면서, 주인공이 제국의 단독 황제로 군림하게 된다.
이후 여러 전쟁을 거친 끝에 그리스와 발칸 일대에서 오스만을 몰아내어 반세기만에 천년고도의 안전을 확보했을 뿐만 아니라 아나톨리아 전역에서 맘루크와 오스만 연합군을 상대로 대승리를 일궈내고 서남부 해안가를 모조리 수복해버리는 기적 같은 수준의 대업적을 일궈낸다. 주인공 사후에도 제국은 사바피 왕조의 흥기를 이끌어 맘루크 왕조와 대치하게 만들고 그사이 수복한 아나톨리아 영역의 안정과 무슬림 국가들끼리의 상잔, 부족간 전쟁에 이슬람이라는 종교에 실망하거나 칼리프가 있는 맘루크를 불신하여 제국으로 귀화하는 투르크 유민들의 로마화를 꾀한다. 작중에서 칼리프의 이름으로 아나톨리아 서부 해안가를 제국의 영토로 인정한다는 조약에 의해 제국 내 무슬림들은 결국 시간이 지나면서 기독교로 대부분 개종하거나 신앙을 지키더라도 강한 세속주의 성향을 띄게 된다. 또한 티무르의 침공과 오스만의 징발로 황폐화되어 있던 아나톨리아 내륙 고원을 차츰 수복해나간다.
18세기경 맘루크를 완전 병합하여 동서로마분열 당시의 동로마 제국의 영토를 모두 수복했다. 이때 이슬람의 성지인 메카까지 정복했는데(!!!)페르시아와의 전쟁을 피하기 위해 메카가 있는 곳은 괴뢰국을 세워 대리 통치한다. 그후 현대에 이르러선 2700년 역사를 가진 유일한 '''제국'''이다. 현 제국의 황실, 의회, 봉신국들의 정통성과 권위 모두 주인공의 권위에서 나왔기 때문에 황실 폐지라는 말은 제국 내에서 반역자 취급 받으며 절대 나올 수 없다. 주인공의 유지는 사후에도 제국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가지며 현대까지 계속되고 있다.
2.1.1.1. 모레아 전제국
수도는 미스트라. 그 외의 직할령 주요도시엔 파트라스, 글라렌차, 코린토스, 라리사, 아테네, 테베, 테살로니키 등이 있다.
사실상의 내지 취급인 속국으로 [10] 과 알바니아 왕국을 거느리고 있다.
주인공의 초월적인 행정능력과 미래의 지식 활용을 통해 전근대라는 한계 내에서의 극한 수준의 발전을 이뤄냈고, 추산 인구에 비해 어마어마한 규모의 상비군을 예산[11] 이나 인력 동원에 별 무리가 가지 않는 상태로 유지[12] 하고 있다. 거기에 발칸 각지에서 전란을 피해 도망쳐온 난민들을 성공적으로 정착시켜 벌써 10만 명 이상의 인구를 꽁으로 늘렸다.
작중 초반부터 완전히 쇠락해 잿더미가 되기 직전의 상태인 제국에서 유일하게 희망의 불씨가 남아있는 곳으로 묘사되었고, 이는 주인공에 의해 불사조와도 같은 거대한 희망의 불길로 타오르게 되었다. 당장에 작중 초반 단 500명의 병력을 동원하는 데에도 버거워했던 모레아는 17년의 세월이 지나면서 본국에서 8천, 이피로스에서 2천의 중보병 전력을 동원할 수 있었고, 이외에도 알바니아에서 4천, 기타 다양한 병력들을 규합했을 시 2만 명에 달하는 대병력을 동원할 수 있게 되었다. 스타팅 시점에서 모레아가 포텐셜은 있지만 주어진 시간이 너무나도 촉박해 '''미래를 팔아 현재를 대비해야 하는''' 상황이었다면, 지금은 완전히 상황이 뒤바뀌어 '''현재에 어느 정도 피해를 입더라도 이를 복구하고 미래를 도모할 수 있는''' 상황에 놓였다. 그리고 이 희망은 3차 전쟁에서의 대승리와 함께 갈리폴리 최남단을 제외한 전 발칸에서의 오스만 축출이라는 결과로 돌아온다. 주인공 사후 모레아 친왕은 후계자에게 주는 작위가 된다.
2.1.1.2. 알바니아 왕국
이 시기엔 단일국가로 존재하지 않고, 여러 공국 및 제후국으로 쪼개져있던 상황이다. 이들 소국들은 대부분 정교회 및 가톨릭을 믿고 있긴 했지만 그와는 별개로 생존을 위해 오스만의 봉신을 자처한 상황이며, 이들 중 영향력이 큰 축에 속하고 기독교인들의 대표 또한 겸하는 크루여, 데바르, 지온 곶(=스칸데르베그 곶)의 통치자 카스트리오티 가문도 어쨌든간에 일개 영주에 불과한 상황. 단, 실제 역사에서 지온 카스트리오티가 2천 명의 기병 병력을 운용했다는 기록이 있는 만큼 통합되었을 때의 포텐셜 자체가 낮은 지방은 아니다. 디라키온이나 슈코더르 같이 나름 괜찮은 항만도시들을 보유하기도 했고.
작중에서도 이런 역사적 사실이 듬뿍 반영되어서, 스칸데르베그 휘하의 병력 500명 이외에도 영주들이 자체적으로 모은 병력 2천 명을 세르비아 원정군 소집에 파견한다. 보통 원정군을 편성할 때 지방 영주들의 병력을 싹싹 다 긁어서 모으진 않고 많아봤자 3분의 1 정도에 불과하다는 점을 생각해봤을 때, 지역 영주들이 힘을 모으면 빠듯하게라도 5천 명 정도의 병력을 운용할 수 있다는 점은 확인된 셈. 이는 실제로 219화에서 알바니아인들이 중보병을 다수 보유한 대규모 병력[15] 을 구성해 봉기했다는 점과, 이 병력이 스칸데르베그의 전술에 의해 큰 피해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222~223화에서 3천 명의 스칸데르베그 휘하 병력을 기습이라곤 하지만 순식간에 거의 피해 없이 쓸어버릴 정도의 규모를 갖췄음을 통해 밝혀진다. 대략 230화 시점에서 작가와의 질의응답으로 정확히 확인한 바에 따르면, 실제로 알바니아가 현 시점에서 자체적으로 운용 가능한 병력은 약 5~6천 명 정도라고 한다.
이런 포텐셜을 갖추고 있기에 스칸데르베그 휘하에서 십자군에 저항한다면 분명 성가시기 그지없는 상대일 테지만, 중요한 것은 이들이 모조리 오스만에 반기를 들고 일어났다는 것이다. 병력 규모만이 아니라 지리적으로도 십자군의 해상 수송을 원활하게 해주고 동시에 오스만령 마케도니아를 압박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주인공측에게는 천군만마나 다름없는 아군인 셈. 그리고 이후 전개에서 저항조차 없이 완전히 모레아령이 되었으며 3차 오스만 전쟁이후에는 제르지에게 알바니아 국왕 겸 디라키온 총독위가 주어진다.
알비니아라는 국가와 알바니아 민족이라는 개념을 형성하는데 주인공이 지대하게 영향을 끼쳤기 때문에 이후로도 제국의 든든한 혈맹 내지 충실한 종속국으로 남는다.
2.1.1.3. 세르비아 전제국
수도는 스메데레보[16] , 그 외의 주요도시로는 니슈, 바르, 라스, 페치 등이 있다.
로마 제국 북서쪽에 있던 국가로, 원래 테오도로스와 소피야를 이어 혼인동맹을 맺으려 했으나 소피야의 요청으로 대상을 콘스탄티노스로 바꾸었다. 그 뒤 요안니스 8세의 충동질로 군을 일으켜 오스만 술탄국과 싸우나 처참하게 패한 후 헝가리의 지원으로 살아남고, 그 결과 헝가리의 보호국으로 전락한다. 최신회차 기준으로 오스만에게 중앙군 1만 명의 절반 정도인 4천 명이 갈려나가는 등[17] 죽어가고 있기에 십자군이 유일한 희망이다. 그나마 후녀디가 합류하여 수도 방어에 성공하고 십자군도 내려오면서 그나마 버틸 수 있는 희망이 생기는 듯 했'었'다.
세르비아의 공위가 외국인이나 다름없는 주라지에게 넘어가면서 귀족들의 의견이 영 좋지 않은 걸로 보이며, 심지어 주인공을 찾아온 유대인 첩보원이 전한 보고에 따르면, 반대 세력의 대부분이 스테판의 외동딸인 소피아 공주와 그 후견인, 즉 '''드라가시스 황제'''의 통치를 바라고 있다는 상황이라고 한다. 물론 그 소식을 들었을 때 황제 본인도 탈출과 모레아군 합류가 우선이라 그냥 넘기고 지나가긴 했지만, 알바니아 전역을 복속하고 모레아군의 전권을 재인수함에 따라 문제가 다시 부상한다.
결국, 무라트 2세의 설득으로 주라지는 십자군을 통수치고 오스만에 붙어 군주 자리를 지키지만, 교황청을 중심으로 기독교 국가들의 어그로를 엄청나게 끌었으며[18] 십자군이 실패로 끝나 멸망이 아닌 이전과 같은 이중봉신으로 남긴 하였으나, 은광이 위치한 코소보가 사실상 오스만 땅으로 넘어갔으며 남부를 중심으로 드라가시스 황제와 소피야를 지지하는 수많은 지방 귀족들과의 관계가 파탄이 났다. 오스만이 코소보 접경지역에 남겨둔 3천명의 주둔군만 없어도 내전이 일어날 가능성이 크다.[19]
아울러 이전 전쟁 때 십자군을 통수친 전례도 있었던 만큼 명목상의 종주국 헝가리[20] 를 포함한 거의 모든 기독교 국가들과의 관계도 나락인지라 완전한 외교적 고립에 처했으며, 교회통합이 성공하고 모든 유럽 국가들이 이를 따랐음에도 왈라키아와 함께 오스만의 편을 들어 통합을 반대하는 괴뢰국 신세에서 벗어나지 못하다가 3차 오스만전이 발발함과 동시에 왈라키아가 황폐화되고 알바니아군의 급습으로 군사적으로 고립되자 모레아 측이 내건 4개의 조건[21] 을 생존을 위해[22] 필사적으로 수락하면서 한순간에 모레아, 그리고 제국의 속국으로 들어간다. 주인공과 소피아 공주 사이에서 세르비아의 계승권을 가진 안드레아스가 태어나자 세르비아 병합을 원하던 의회를 주인공이 직접 설득하여 대내외의 안정을 위해 주라지의 아들인 라자르를 세르비아의 왕으로 삼겠다는 약조를 지키고 세르비아는 제국에 신뢰를 보낸다.
2.1.2. 신성 로마 제국
당대 유럽 제일의 국력을 가진 국가이지만, 특유의 선거군주정 및 봉건제 시스템 때문에 제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 시기의 신성 로마 제국은 대공위시대를 거쳐 제위가 룩셈부르크 가문의 주도에서 합스부르크 가문의 독점체제로 점차 옮겨오고 있었지만, 정치적 분열을 수습하는 동안 영국, 프랑스, 스페인, 폴란드-리투아니아 등이 흥성하고 오스만의 위협이 심화되면서 그 입지가 쪼그라드는 면모 또한 있었다.
작중에서 등장하는 황제 지기스문트와 알브레히트 2세는 이러한 변화를 가장 잘 드러내주는 인물들로, 두 황제의 치세를 통해 룩셈부르크 가문의 단절 및 합스부르크 가문의 전성기의 시작이 일어났음은 물론이고 헝가리와 보헤미아가 합스부르크 왕조의 확고한 통치 하에 놓이는 시점도 둘의 재위기간이다.
이 세계관에서 가장 큰 수혜를 입은 나라 중 하나로, 헝가리의 절반 이상을 오스만에게 빼앗기는 일도 사라졌고, 보스니아와 왈라키아 또한 주인공과의 밀약을 통해 확고히 영향권 하에 둔다. 또한, 교회통합에 있어서 모레아 - 제국과 함께 양대 축으로 기능하면서 교황령에 대한 영향력도 계속 유지한다.
다만 맘루크 전쟁 당시 북이탈리아를 놓고 프랑스, 밀라노와 지속적으로 충돌했고 결국 북이탈리아 경쟁에서도 밀려, 북이탈리아 제후국들을 잃게 되었고, 거기다 후냐디를 내세운 헝가리의 독립으로 국력이 조금 약화된다. 이에 신롬 황제는 제후국들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한 것으로 추정되며, 프랑스에게 밀리는 교황령을 지원하여 '''로마 교황의 수호자'''라는 칭호를 가져 현실 스페인 제국 위상에 서는 식으로 대처한다. 또한 신성 로마 제국 파멸의 계기인 30년 전쟁이 제후국들간의 내전이 아닌 프랑스 vs 신성 로마 제국 양 파전 양상으로 변질되었기에, 실제 역사에 비하면 그래도 제국은 유지하는 데 성공하였고, 이 제국은 20세기 초, 대전쟁 직전까지도 살아남아 최소한 독일 영토 대부분과 오스트리아, 그리고 보헤미아를 여전히 지배하고 있음이 밝혀진다. 다만 서로마 제국의 후계자라는 명예는 18세기 말 동로마 제국의 패권국화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내려놓은 것으로 보인다.
2.1.2.1. 헝가리 왕국
수도는 부더[27] , 그 외의 주요 도시로 에스테르곰과 포조니, 난도르페헤르바르[28] , 페치 등이 존재한다.
작중 초반엔 보헤미아의 국왕 겸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였던 실존인물인 지기스문트 폰 룩셈부르크가 왕위를 차지하고 있으며,[29] 지기스문트 왕의 형인 보헤미아 왕 바츨라프가 프라하 창문 투척사건으로 충격을 받아 1419년 급사한 이후부터 보헤미아와는 세트로 묶여서 10년 가까이 후스 전쟁을 치룬다. 당시 헝가리는 기독교 진영 내에서 동유럽은 물론 유럽 전체에서도 손꼽힐 수준의 강대국이었지만, 왈라키아와 이슬람 세력과의 잦은 충돌과 1241년 몽골의 침공으로 급감한 인구, 간간히 발생하는 대규모 역병으로 신흥 강자인 오스만과 국력을 비교했을 때 대체로 열세에 놓인다. 다만 소설 내의 전개대로라면 주인공이 오스만의 팽창을 최대한 저지할 것이고, 헝가리의 영웅인 후녀디 야노시 또한 실제보다 10년 빨리 군사적 재능을 꽃피워 활동에 나섰기 때문에 바르나 십자군 같은 뻘짓이 똑같이 일어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교황이 선포한 두 차례의 십자군에도 당당한 주력국으로 자리매김한다.
첫 번째 십자군인 세르비아 십자군 당시 북방의 십자군이 오스만의 군세의 절반 수준이었고, 거기다 세르비아까지 탈퇴+배신하면서 수적 열세에 시달렸으며, 결국 유일한 희망이었던 모레아-구호기사단의 남방 십자군과 합류하지 못한 채 야전에 돌입했다가 군이 50% 정도의 심각한 손실을 입으면서 물러난다. 물론 후냐디+잔 다르크의 활약으로 오스만군을 갈아버려 오스만 측도 막심한 피해를 입긴 했지만 십자군의 잔존 병력도 얼마 안 남았기에 결국 오스만의 요구대로 불평등한 휴전조약을 맺고 십자군을 해산한다. 물론 이번 전쟁을 통해서 후녀디라는 특급 인재 발굴과 드래곤 기사단의 결성이 이루어지긴 했지만, 트란실바니아 상실 등 많은 걸 잃었으며, 이에 화병이 났는지 지기스문트 황제가 실제 역사보다 4년 일찍 병사하고 합스부르크 가문의 알브레히트 2세가 제위에 올라 수 년간 반토막난 헝가리군의 재건, 국가 통합에만 전념한다.
이후 지기스문트의 고명대신이 되어 헝가리 통치의 전권을 위임받은 후녀디가 1만 명의 트란실바니아 유민들로 이뤄진 흑군을 창설하고, 두 번째 십자군에 참전하면서 상황은 뒤바뀐다. 뛰어난 장비 및 훈련도와 광기에 가까운 복수심으로 무장한 흑군은 손실을 거의 입지 않고 1~2달 정도의 시간만을 투자해 트란실바니아 전체를 탈환하고 왈라키아를 털어버리는 등 현실에서 보였던 뭔가 나사 빠진 면모를 없애버린다[30] .
드라가시스 사후에는 신롬에 의해 끌려다니는 전쟁에 지쳐 후녀디를 왕으로 옹립하여 신성로마제국에서 분리되려 하고 이 과정에서 폴란드와 제국까지 끌어들여 동유럽 전쟁의 중심지가 되고 만다. 그리고 후녀디 왕가는 유지 되면서 제국의 혈맹을 유지하며 친제국 행보를 보이며 신성로마제국과 폴란드를 견제하지만 경제 기반이 뜯겨나가 검은 군대를 유지하기 힘들어 골골대고 있다고 한다.[31]
2.1.3. 프랑스 왕국
수도는 파리, 그 외의 주요도시는 랭스, 투르, 툴루즈, 부르주, 리옹 등이 있다. 보르도나 칼레는 잉글랜드에, 낭트와 렌은 브르타뉴 공국에, 디종은 부르고뉴 공국에 속했고 알자스-로렌과 사보이 등은 전부 신성로마제국에 들어가있었기 때문에 현대의 프랑스와는 사뭇 다른 영토를 보유했다.
시대상으로는 영국과 백년전쟁이 한창 진행되던 상황에서 잔 다르크의 활약으로 숨을 돌린 뒤 다시금 반격을 가하던 시기였다. 이 시점에서 가장 주요한 사건은 잔 다르크가 포로로 잡혔다는 것이고, 잔 다르크의 도움 하에 정식으로 즉위하는 데에 성공한 샤를 7세는 원 역사대로 그녀를 구하는 것과 때마침 선포된 십자군에 대해 회의적이었으나, 십자군을 선포한 교황에게 압박을 당하고 자기 딴에도 잔 다르크와 그들의 일파를 모조리 십자군에 참가시켜 동방으로 보내 본국에서의 영향력을 쪼그라들게 만들 기회로 여겨, 잔 다르크 세력의 대표주자인 질 드 레가 막대한 몸값을 전부 내는 조건으로 잔 다르크를 구출하는 데에 동참하는 동시에 그녀를 발칸 반도로 보내려 한다. 사실 샤를 7세는 수백 년간 봉건제로 인해 쪼그라들어있던 프랑스의 중앙 통치력을 재건하기 위해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고자 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았기에 그를 마냥 욕할 수만은 없는 상황이고, 질 드레가 몸값을 지불하도록 유도한 이유도 전후 복구를 위한 예산 한 푼이 아쉬운 상황에서 그 막대한 비용을 잔 다르크 한 명에게만 쏟아부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것 보면 나름 괜찮은 군주인 셈. 하지만 샤를보다도 안 좋은 상황에서 잉글랜드보다도 막강한 오스만을 물리치고 백성들에게 희망으로 굳게 자리 잡아 있는 주인공 콘스탄티노스 드라가시스와 비교되어 보이는 것 또한 어쩔 수가 없다.
이후 오스만과의 3차전을 앞둔 시점에서 라이벌인 잉글랜드와 함께 재등장한다. 과거 마누일 2세가 호소한 끝에 약조받은 자금지원을 잉글랜드가 일부나마 지킨 것과 달리 프랑스는 그런 약속을 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굳이 십자군을 지원할 이유가 없었지만, 대신 교회 통합의 전면적 지지를 천명해 주인공에게 뜻밖의 쾌거를 안겨준다.
이후에는 북이탈리아를 놓고 신성 로마제국과 지속적인 대립을 이어갔고 거기에 아비뇽 교황을 지지하며 로마 교황청 또한 척을 지며 이에 분노한 로마 제국과 아라곤과도 대립각을 세우게 되고 결국 1차 세계대전에서 제국과 정면 대결을 펼치며 완전히 적이 된다.
2.1.4. 교황령
교회 세력이다보니 현대의 바티칸 시국과 마찬가지일 것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이 시기엔 엄연히 영토를 가진 주권국가였다. 사실 중부 이탈리아 전체를 차지하고 있던 걸 생각해보면 영토를 가졌다는 것으로 놀랄 일은 아니긴 하지만.
수도는 당연히 로마이며, 그 중에서도 성 베드로 대성당과 시스티나 경당이 각각 교황의 주권 행사의 중심지와 콘클라베의 개최지로 핵심적인 역할을 맡는다. 다만, 이 시기에는 현대의 성 베드로 대성당 및 시스티나 경당이 착공조차 들어가지 않았을 뿐더러, 시스티나 경당의 경우 아예 마조레 경당이라는 다른 이름으로 존재했던 시기라 우리가 생각하는 그 열쇠 모양 광장과 거대한 바로크식 성당하고는 건물 자체가 다르다.
그 외의 주요 도시는 옛 동로마 제국 이탈리아 총독부가 위치했고 서로마의 수도로 기능했던 라벤나, 아비뇽 유수가 벌어진 이후 프랑스 혁명 이전까지 주요 도시로 기능했던 월경지 아비뇽 등이 있다.
세르비아 십자군의 활동 과정에서 추기경단의 결정 하에 파문을 먹은 주인공은 역으로 디미트리오스 배후의 가브리엘레 추기경의 영향력을 떨쳐내고 십자군에서 탈퇴해 그와 맞먹는 군사력을 보유하게 되고, 헝가리는 체사리니 추기경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주인공과 손을 잡으려 시도하면서 권위가 떡락한다. 이를 만회하기 위해 신임 교황인 에우제니오 4세[33] 는 모레아의 힘을 빌려 다시 한 번 대오스만 십자군을 결성하려 하고, 반면 추기경단은 레콩키스타를 거의 마무리하고 전성기에 들어선 아라곤 왕국과 손을 잡을 것을 제안한다. 아라곤 왕국이 나폴리 전쟁에서 에우제니오 4세의 지원 요청을 받은 주인공에게 패배한 뒤엔 교회통합에 반대하는 추기경단의 입지가 약화되었고, 이 틈을 타 교황이 동서 교회 통합과 십자군의 선포, 드래곤 기사단의 상시 십자군화까지 실행하는 등 적극적인 행보를 이어간다.[34]
2.1.5. 왈라키아 공국
수도는 전통적 요새도시인 트르고비슈테이고, 이후 수도가 되는 부쿠레슈티의 경우 블라드 가시공이 1459년 건축한 요새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에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그 외엔 도나우 강변에 위치한 요새도시 세베린, 로마 제국이 모이시아 속주에 건설한 군단병 주둔지에서 시작한 요새도시 실리스트라, 동부 구릉지대의 중심 요새이자 상업도시로 번창한 부저우, 루마니아의 최초의 수도인 컴풀룬그 등의 주요 도시가 있다. 왜 죄다 도시들이 요새인지 궁금해할 수 있는데, 애초에 이 동네는 쿠만족, 몽골, 페체네그족, 마자르 등이 틈만 나면 약탈해대던 동네라 도시 전체를 성벽으로 감싸지 않으면 무력하게 털리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오랜 기간 동안 요새화 된 도시들을 블라드 가시공을 비롯한 여러 왈라키아의 군주들이 오스만 제국을 100년 이상 엿 먹이는 데에 요긴하게 써먹은 건 덤.
이 시기의 왈라키아는 명군 미르체아 1세의 죽음 이후 완전히 혼란의 소용돌이에 빠져든 상태였다. 미르체아 1세가 죽은 1418년 이후 1431년까지의 13년 동안 군주가 5번 바뀌었고, 이는 대부분 미르체아 1세 대공의 자식들 [35] 과 후예들, 대공의 형의 아들 단 2세와 그 후예 가문인 다네스티 가문의 왕위 분쟁에 의해 일어났다.
현시점까지는 오스만의 사드라잠 찬다를르 할릴의 지시라던지, 모레아의 드라가시스 황제의 첩보 보고 등으로만 행적이 정해지는데, 오스만의 계략으로 십자군 직전까지 헝가리와 싸우다 헝가리 황제의 포기로 트란실바니아의 대부분을 할양받아 영토가 두 배 정도 커진다. 그러나 얼마 안 되어 왈라키아에 주둔 중이었던 오스만 군의 군사정변으로 라두 2세가 피살당하고 단 2세가 옹위되면서 [36] 확실한 오스만의 보호국으로 전락한다.
그리고 최근 3차 대 오스만 전쟁이 시작되면서 왈라키아에 대한 후냐디와 1만의 검은 군대의 고속 행군 및 초토화 공격으로 불과 '''1주일도 안되어 트란실바니아를 (사실상) 상실'''당한 것도 모자라 바로 왈라키아 본토 도시들까지 공격받고 페허가 되어간다. 단 2세는 무리한 야전보다 청야 전술을 사용하면서 요새 안에서 농성을 하려고 하나, 검은 군대의 만행으로 전후 왈라키아가 무인지대가 될지도 모르는 절망적인 상황이 되자 결국 지방 영주들이 단 2세를 죽이고 십자군이 지지하는 블라드 2세를 새 공작으로 세워 검은 군대을 철수시킨다. 이후 생존을 위해 십자군에 가입하고 물자 수송을 지원하며 전쟁이 끝난 이후에는 제국의 관직을 청하며 봉신화를 자처한다.
드라가시스 사후 6년 뒤 블라드 2세가 암살 당하며 블라드 수도공과 미르체아 2세간에 내전이 발발하는데 이 과정에서 헬레네와 이바니아가 그야말로 맹활약을 하며 미르체아 2세가 승리하게 된다. 이후 헝가리 왕위 계승전쟁에서 제국이 헝가리의 국왕이 된 후냐디의 원병에 응하며 대신 왈라키아의 종주권을 가져와 왈라키아는 헝가리의 영향력을 떨쳐버리고 제국의 봉신국으로 자리잡는다. 이후 미르체아 2세는 제국에 의지하며 황폐화된 왈라키아를 재건하기 위해 힘쓴다.
2.1.6. 트라페준타 제국
수도는 트라페준타(또는 트레비존드). 그 외의 주요도시로는 아미소스 정도가 있다.
4차 십자군 당시 로마 제국의 적통을 이어 건국된 세 망명국가 중 하나로, 전성기 시절엔 핵펀치로 라틴 제국과 테살로니카 등을 줘패버리고 발칸 서부 대부분을 수복했던 에피로스나 콘스탄티노플을 수복하고 제국을 재건한 니케아에 비해 시작부터 끝까지 미약했지만, 정작 셋 중에서 제일 오래 살아남았고[37] 정통성 자체도 가장 뛰어났다.
이사키오스 2세 이후의 모든 로마 황제들은 자기가 콤니노스 왕조의 혈통을 진하게 이은 진짜배기 황제라고 자칭했지만, 그 정통성 면에선 아예 1대 황제 알렉시오스가 콤니노스 황조의 정식 일원이었던 안드로니코스 1세의 손자였던 만큼 콤니노스 왕조 직계에 가까운 분가인 트라페준타의 콤니노스 망명자들을 이길 수 없었다. 트라페준타 사람들도 그걸 알았는지, 1대 황제인 알렉시오스부터가 자기 성씨에 대(메가스)를 붙여서 '메가스 콤니노스'로 개명을 시전했다. 작중에서 안드로니코스의 입을 빌려 표현됐듯이 주인공과 팔레올로고스 왕조의 최대 아킬레스건은 '찬탈자'라는 오명이고, 이를 벗기 위해 힘을 빌릴 수 있을 만한 곳은 교회 세력 말고는 이곳밖에 없는 상황이다.
만약 기적적으로 오스만을 발칸에서 축출하고 원안과 달리 아나톨리아 수복에 착수한다면[38] 동맹이자 파트너로 나올 가능성이 매우 높다.
현재 트라페준타 전체의 인구는 대략 20~25만 명, 수도인 트라페준타의 인구는 1만 명을 좀 넘는 수준에 전국의 병력을 긁어모아도 2000여 명 정도라 모레아나 세르비아, 심지어 알바니아 영주들에 비해서도 크게 밀리지만, 오스만의 배후에 위치해있고 주변의 백양조나 티무르와 우호적 외교관계를 맺은 상황이라는 점이 나중에 주인공에게 도움이 될 만하다.
비단 아나톨리아 수복이 아니더라도 원 역사에서 요안니스 8세의 황후가 트라페준타 제국 출신의 마리아인 만큼 등장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1451년에 당시 부인이 없던 콘스탄티노스 11세의 신붓감을 찾기 위해 스프란체스가 사신으로 트라페준타를 찾았음으로 접촉은 가능하니 말이다. 물론 여기서는 혼인 제의가 아닌 동맹 제의겠지만. 특히 최신화 기준으로 오스만에 있는 앙겔로스와 콤니노스 세력이 새롭게 대두하면서 앞으로의 정세에서 이들의 중요성이 더욱 커졌다. 오스만에 있는 세력들은 방계인 반면 앞서 말했듯이 트라페준타 제국의 콤니노스 가문은 당당한 직계이기 때문.[39] 제국이건 오스만이건 정통성을 위해서는 끌어들어야 할 국가가 바로 트라페준타 제국이라는 것.
이곳에 올라온 국가들 중에서는 가장 오랫동안 언급이 없었으나 356화에서 드라가시스 황제를 알현하기 위해 사절을 보냈다고 하면서 드디어 최초로 언급되었다. 토마스와 트라페준타의 공주의 결혼 동맹을 위해 파견된 사절[40] 은 위에서 언급된 것처럼 자신들이 강력한 정통성을 갖고 있다는 점을 잘 알아서 이를 최대한 이용해 제국과 대등한 동맹을 맺으려 하나, 콤니노스라는 옛 왕조의 정통성보다는 드라가시스라는 새 이름의 상징성에 주목하고 있던 토마스가 축객령을 내려버리면서 시작부터 냉랭한 관계가 형성된다.
결국 맘루크 전쟁 중 흑양조와 백양조에 의해 위축 되다가 드라가시스 황제 사후 제국에 병합된다. 다만 이때도 정신을 못 차렸었는지 또다시 토마스에게 혼담을 제의했다가 보다 못한 토마스의 압박으로 합병되었다 하니 그저 안습할 뿐.
2.1.7. 아라곤 왕국
카스티야-레온 왕국에 의해 의도치 않게 이베리아 반도의 만년 콩라인이 된 왕국. 하지만 경제력이나 군사력 면에서 높은 포텐셜을 보유했던 카탈루냐 지방을 전란에 노출되지 않은 채 고스란히 들고 있었고, 레콩키스타가 마무리될 무렵 수 차례의 내전으로 나라꼴이 말이 아니게 된 카스티야는 내버려두고 동쪽으로 확장을 꾀해 시칠리아, 나폴리, 사르데냐 등을 장악하고 승천 직전에 놓인 배경이 있다.
이러한 업적은 예식왕 페드로 4세부터 시작해 그 아들인 사냥꾼왕 후안 1세, 손자 공정왕 페르난도 1세, 그리고 증손자인 현왕 알리폰소 5세[43] 에 이르기까지 명군들이 줄줄이 사탕 수준으로 왕위에 오르면서 정복사업과 내실 다지기의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은 덕분으로, 대략 100년 좀 안 되는 기간 동안 발레아레스 제도, 루시용, 시칠리아, 나폴리, 사르데냐 등등 여러 영토를 정복하면서 동시에 초기 르네상스를 향한 발판 또한 마련하는 데에 성공했다.
참고로 실제 역사에서도 이 정도 능력을 보여준 아라곤은 이 소설 내에선 버프를 먹어서 더 강력해졌다. 정확히는 모레아-베네치아-제노바-교황령의 이해관계가 얽힌 북이탈리아 정세에서 주인공의 의도치 않은 선택 때문에 밀라노가 베네치아와 교황령을 적대하는 쪽으로 돌아서서 그렇게 된 건데, 원래라면 알폰소 5세의 나폴리를 꿀꺽하려는 야욕을 20년 가까이 막아내야 했던 제노바-밀라노-교황령 연합이 중간에 파토나버리면서 알폰소 5세의 나폴리 입성이 대략 5년 이상 빨라졌고, 그 와중에 입은 군사적 및 경제적 손실도 크게 줄어들었다. 대오스만 십자군의 처참한 실패로 인해 교황령 입장에선 비교적 신흥세력인 아라곤의 입김이 강해진 건 덤.
원 역사에선 스칸데르베그의 뒤를 봐주면서 오스만의 유럽 진출을 저지하는 최전선에서 활동했던 아라곤이지만, 주인공이 급부상함과 동시에 아테네와 네에파트레 쪽에 그나마 남아있던 아라곤의 잔재[44] 를 갖고 어떻게든 알박기를 해보려고 시도하면서 주인공과 모레아 입장에선 오스만만큼은 아니어도 중간보스 포지션의 충분히 버거운 상대다. 특히나 15세기 기준 인구가 수백만 명이나 되어 기초 국력에서 큰 격차가 있는 만큼 더더욱.
하지만 1만 명 정도의 대규모 병력을 동원했음에도 불구하고, 하필 상대가 주인공과 후녀디였던지라 수 년의 시간만 소모하고, 병력은 병력대로 잃으면서 나폴리에 대한 권한도 상실하고 지중해를 아우르는 제국의 건설이 불가능해졌다. 이베리아 반도, 시칠리아, 코르시카와 사르데냐를 제외한 어떠한 영토도 가질 수 없게 제한당하면서 더이상의 확장은 꿈도 꾸기 힘들고, 무엇보다도 수십 년 뒤 아라곤이 카스티야에게 먹힐 예정이기 때문.
그래도 아라곤의 왕 알리폰소 5세는 여기서 좌절하지 않고 베네치아와 동맹을 맺고 제국을 해상에서 계속 견제했다. 그러나 제국과 협력 관계였던 제노바의 필사적인 저지와 3차 대오스만 전쟁이 십자군의 승리로 끝나면서 다시 한번 불리한 처지에 놓이자 아예 이탈리아랑 그리스가 아닌 북아프리카로 방향을 돌리고 오스만의 중재를 통해 한번 싸웠던 제국과 손을 잡고 동맹을 구축한다. 그러면서 알리폰소는 이탈리아에 대한 분노를 제노바쪽으로 돌리며 그와 동시에 모레아에서 철수하던 베네치아 함대를 공격하는 등 친제국 행보를 보이고 있다.[45]
이후 교황청에게 나폴리의 정당한 권리를 인정 받고 아비뇽 교황을 지지하는 프랑스와 대립 노선을 타며 제국과의 동맹을 유지하며 친제국 행보를 유지하고, 이베리아 동군연합도 이루어지지 않는 등의 행적을 보인다.
2.1.8. 폴란드 왕국
동유럽 전통의 강호. 1385년 폴란드 왕가와 리투아니아 왕가가 결합해 두 나라 간의 동군연합이 결성되었고, 동쪽으로는 킵차크 칸국의 급격한 쇠퇴를 틈타 모스크바 대공국과 함께 대초원지대[47] 를 갈라먹고 서쪽으로는 튜튼 기사단국을 그룬발트 전투에서 탈탈 털어버리고 16세기의 전성기로 향하는 기틀을 마련한다.
현 국왕은 브와디스와프 3세로, 바르나 전투에서 닥돌하면서 다 이긴 전쟁을 한순간에 말아먹은 그 사람 맞다. 최후의 십자군 외전에선 주인공의 동맹군으로, 이슬람의 검 외전에선 주인공과 대결하지만, 본편에선 1437년 십자군에서 몰다비아-왈라키아 접경지대에 배치해 달라는 요청만 받아들였을 뿐, 그 이상 종군하지 않으면서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브와디스와프가 주인공의 업적에 열광하는 모습으로 잠깐 얼굴을 비칠 예정. 최신화에서 후녀디가 지원을 요청하는 사절을 보냈고 실제 군대 5천을 파견하며 역시 참전 확정
다만 기껏 다 잡아놓은 튜튼 기사단에게 재기의 기회를 줄 수도 있다는 이유를 들이대는 셰임들의 격렬한 반대 끝에 브와디스와프의 친정은 좌절되고 5,000명의 병력을 보내주는 것과 몰다비아 공국에 추가 지원을 요청해 주는 것으로 대신한다. 제국으로 지원온 폴란드군은 오히려 공명심에 취하여 돌격 일변도인 자신들의 왕이 친정오지 않은 것을 다행이라 여기는 분위기이다.
드라가시스 사후에는 러시아 공국들과 튜튼 기사단을 밀어 붙이며 승승장구하다 헝가리 귀족들의 책략으로 헝가리에도 개입하나 결국 제국의 원병 파견으로 확장에 제동이 걸려 전성기가 끝나 버린다.
2.2. 기독교(반교회통합) 진영
2.2.1. 베네치아 공화국
작중에서 가장 먼저 등장하는 외부 세력으로 급한 불을 끄면 서로 죽빵을 날릴 사이라고 주인공이 초반부터 언급했기에 적대는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초반에는 그리스 내부에 가장 막강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세력이자 한창 크고 있던 오스만 해군을 견재할 유일한 세력이라 주인공도 모레아의 이권을 보장해주거나 테살로니카를 넘겨주는 등 어떻게든 협력관계로 가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여기서는 교회 통합 반대파로 나왔지만, 아라곤의 야욕이 덮쳐올 때는 주인공을 돕기 위해 교회 통합을 적극 지지했다.
그러나 대 아라곤 전쟁이 종결된 뒤부터 서서히 드라가시스를 견재하기 시작했고 3차 대오스만 전쟁이 시작되고 나서는 완전히 돌아서고 말았다. 주인공에게 패배를 안기기 위해 파문을 각오하고 본토 방어를 포기하면서까지 병력을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꼬라박았지만 의외로 잘 저항했던 모레아 민병대와 당시 제국과 협력 관계였던 제노바의 필사적인 저지로 쩔쩔 매는 사이 드라가시스가 대승을 거둬버렸고, 결국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식민지를 포기하고 돌아섰다가 아라곤에게 기습당해 함대의 절반을 잃는 참패를 맛보고 신뢰보다 국익이라는 국가 신조 탓에 신실한 동맹도 못 찾은 채 두들겨 맞으면서 과거의 행적에 대한 대가를 치르고 있다. 결국 크레타를 제외한 그리스의 모든 영토[49] 를 제국에게, 달마티아를 신성 로마 제국 정확히는 헝가리에 바치면서 사실상 신성 로마 제국의 봉신국이 된다. 그 뒤로도 베네치아인만 왔다치면 바로 그곳으로 달려와 두들겨 패버리는 제국인들 때문에[50] 콘스탄티노플에는 발도 못 들이고 제노바인들에게 물건을 위탁 판매시킬 정도로 제국에서의 세력은 완전히 위축되었으며 맘루크의 침공으로 그나마 남은 크레타조차도 회수될 처지에 놓였다.
실제로 드라가시스 사후에는 동방 무역도 제국과 라구사에 밀려 일개 도시 수준으로 전락하고 만다.
2.2.2. 제노바 공화국
베네치아에 밀린 지중해 해상 세력의 콩라인이지만 그래도 결코 만만치 않던 세력답게 오스만이건 제국이건 베네치아에 대응하기 위한 협력 관계를 구축할때 반드시 나왔던 세력이다.
첫 등장은 1차 오스만 전쟁 당시 토마스에게 용병 3천명을 딸려 주며 제국을 도운 것이었고 그 뒤 이 3천명의 용병이 평화협정의 조건으로 무라트와 소 무스타파의 내전에 무라트의 편으로 참전하며 오스만과의 관계를 구축해 2차 대오스만 전쟁에서는 오스만의 편을 들어 베네치아에게 넘어갔던 테살로니카를 함락시키는 활약을 하지만 이 테살로니카를 다시 제국에 반환하며 다시 제국과 협력관계를 맺는다.
그러나 드라가시스는 제국의 재건을 위해서는 이들 역시 쫓아내야 한다 생각하고 있으며 에게해의 패권을 노리는 제노바 역시 완전히 제국을 신뢰하지 않아 당시 이야기가 나온 교회 통합을 반대하며 아라곤을 끌어들여 제국을 견재하려 한다. 그러나 다시 베네치아와 손을 잡은 드라가시스가 나폴리 전쟁에서 아라곤을 격파하고 제노바를 흡수하려는 밀라노에 힘을 실어주며 궁지에 몰리자 마침 베네치아의 견재를 받던 드라가시스와 다시 협력 관계를 맺은 뒤 3차 대오스만 전쟁에서도 아예 본토를 공격하는 베네치아 함대를 막아내는 등 협력관계는 최신화까지 유지중. 3차 오스만 전쟁이 제국의 승리로 끝나며 베네치아가 몰락의 길을 걷자 에게 해를 차지할 기회를 얻지만 타이밍에 맞춰 아라곤의 은밀한 지원에 힘입은 밀라노의 진격으로 본토가 위기에 처하는 바람에 재미도 보지 못하고 그리스를 떠났다. 그나마 베네치아와 비교해 제국에 협력을 많이 한 덕에 장사는 잘 하고 있지만[52] 맘루크의 침공을 명분으로 식민지 회수를 노리는 주인공과 서서히 제국 상권으로 진출하는 라구사와 피렌체에 의해[53] 미래는 그다지 밝지 않다.
실제로 드라가시스 사후로도 흑해 무역으로 나름 벌어먹고 살다 그마저도 제국의 트라페준타 병합으로 위축되며 서서히 몰락하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 치더라도 아예 일개 도시 수준으로 전락해버린 베네치아에 비하면 훨씬 낫긴 하지만 말이다.[54]
2.2.3. 모스크바 대공국
당대 정교회 국가들의 콩라인. 명군 드미트리 돈스코이 하에서 잠깐이나마 독립을 쟁취하고, 수 년 뒤 티무르가 군세를 이끌고 킵차크 칸국을 박살내면서 거의 완전한 독립을 이루었다. 하지만 돈스코이의 아들이자 폴란드-리투아니아와의 동맹을 통해 모스크바의 영토를 몇 배로 늘린 정복군주 바실리 1세가 죽자, 그 아들인 바실리 2세와 동생인 유리가 11년에 걸친 내전인 '''대봉건전쟁'''을 벌이면서 나라가 박살나다시피 한 상황.[57]
많은 독자들이 현실에서 모스크바 대공국이 어려운 상황에 처한 콘스탄티노플에 하기아 소피아를 수리하라며 많은 재물을 선물하는[58] 등의 태도를 보인 점 때문에 추후 우군으로 등장할 것이라고 점찍었지만, 작가가 모스크바가 교회통합에 반발해 따로 떨어져나갈 것이라고 언급하면서 독립교회인 러시아 정교회를 세우고 최악의 경우 제국과 적대할 수도 있다는 것이 암시되었다.
그리고 첫등장에서 이 사실을 규탄하며 러시아 정교회의 독립을 선언했는데 거리가 있는지라 주인공도 신경쓰지 않는 분위기고 결정적으로 폴란드와 튜튼 기사단에게 기회가 되리라 언급하며 교회 독립의 결정이 모스크바 공국에 최악의 한 수가 되리라는 암시가 걸린다. 즉, 원역사보다도 더 큰 위기가 찾아올 전망. 이주교 공의회를 받아들인 폴란드와 튜튼 기사단이 이단인 모스크바 공국을 침공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이후에는 폴란드와 대립하다 폴란드가 헝가리 계승전쟁으로 약해진 틈을 타 다른 공국들과 느슨한 연맹체를 구성하며 덴마크, 스웨덴과의 북방 연합 왕국 수립을 노리고 있다고 한다.
2.3. 이슬람 진영
2.3.1. 오스만 술탄국[59]
[image]
현재 오스만 술탄국 왕실의 계보.
수도는 에디르네와 부르사. 이 시기엔 의외로 주요 도시라 할 만한 도시들이 적었는데, 당장에 동로마 제국 성립 이후 무려 1천 년간 아나톨리아 내륙의 중심도시였던 이코니온부터가 아직 카라만 술탄국의 영토였던 시기이다. 그래도 , 이즈미르, 이즈니크, 앙카라, 시바스 등등 수백 년 이상의 전통을 가진 유서깊은 도시들을 다수 점유하고 있다.
작중의 '''최종 보스 포지션의 국가였으나 작품 후반부에서 맘루크에게 최종 보스 자리를 넘겨주었다.''' 주인공은 오스만 제국의 역대 '''명군'''들과 연달아 맞서야 할 팔자였으나 스토리상 두 명만 상대하며 그 중 가장 커다란 적수였던 한 명을 기어이 이겨버렸고 한 명도 아직 완전한 성장이 이루어지기 전에 이겨버렸다.
다만 주인공이 있기에 강하기는 강하겠지만 원래 역사만큼의 막강함은 유지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고 예상했고 실제로 주인공에 의해 원역사보다도 거의 5백년 빨리 멸망해버렸다. 예를 들어 182화 시점에서 맘루크 왕조의 아나톨리아 통일 견제[61] 라든지, 세르비아 십자군과 같은 서방 국가들과의 대전쟁들이 이에 해당된다. 물론 '''운명을 거스르는 것에 대한 시련'''이라며 사드라잠 찬다를르 할릴이라던가 이스하크 파샤, 투라한과 같은 네임드 명장, 명재상, 심지어 제국을 배신하고 오스만에 투신한 '''전 제국 출신 관료들'''까지 연속으로 강림한데다 무라트 2세도 대대적인 '''군제, 행정 개혁'''을 시행하면서 안그래도 강력한 오스만에다 버프를 들이부어 주인공이 꽃길을 한동안 못걷게 만들고 있기도 했다.
허나 주인공 버프를 받은 로마를 이기기 힘들었는지, 처음에는 어느정도 밀어붙이다 결국엔 영토를 조금씩 상실하는 손해를 받게 되는데, 1차 전쟁에는 테살리아를 비롯한 남부 그리스 영유권 상실, 2차 전쟁에는 알바니아와 마케도니아 남부까지 포함한 그리스의 대부분을 잃더니만, 최종 3차 전쟁에는 12살 위의 사내아이까지 전부 끌어모아 7만이나 되는 대군을 무리하게 편성했음에도, 지난 세르비아 십자군을 통해 복속시킨 세르비아와 왈라키아를 허무하게 잃은 것 뿐만 아니라 불가리아 남부 지방에서 벌인 결전에 절반에 못 미치는 십자군에게 완벽하게 패배하면서 결국 갈리폴리 반도 최남단 요새를 제외한 '''루멜리아(오스만령 발칸 반도)를 제국에게 할양'''하는 수치[62] 를 당하게 된다.
이 때문에 즉위 이후 주인공을 꺾으려는 열의에 가득했던 라이벌 무라트 2세는 실의에 빠져 국정을 내버리고 잠적했으며, 사드라잠 찬다를르 할릴 파샤는 그 와중에 계승 내전을 방지하겠다는 명분으로 술탄의 두 아들을 죽음으로 몰아버리고 패전 당시 겨우 5살밖에 안되는 메흐메트 2세를 차기 후계자로 옹위하는 등 왕권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재상과 토후들에게 휘둘리는 질서가 구축되기도 했었다. 허나 이런 구도는 맘루크 전쟁 도중 오스만 해군이 괴멸되는 참패 소식이 나오자마자 메흐메트 2세가 예니체리를 이끌고 친위 쿠데타를 벌여 할릴 파샤와 재상파 관료들, 그리고 자신의 어린 친족들까지 모조리 숙청하고 정권을 장악하면서 무너지게 된다.
이후 얼마 안되는 시간 동안 메흐메트 2세는 작중 초반 어린 나이로 활약했던 주인공처럼 뛰어난 능력을 바탕으로 토후들을 단결시키고 제국을 필두로 한 십자군에 맞서 최대한 분전했지만, 결국 포케아 평원에서 토마스에게 전사한다. 이 때 아직 16살에 불과했던 메흐메트 2세에게 후계가 있을리 없었고 자연스럽게 오스만 술탄국은 여러 개의 독립 토후국들로 분열되어 버린다.
2.3.2. 맘루크 왕조
오스만의 몰락으로 인한 주인공과 싸울 만한 당대 최강 이슬람 국가라는 타이틀과 90% 진행된 스토리 진행량으로 인해 작품 후반부에서 부각된 '''진 최종보스 포지션의 국가'''. 수도는 카이로, 그 외의 주요 도시엔 알레포, 다마스커스, 하마, 말라티아, 타라불루스, 알렉산드리아, 야파, 베이루트 등이 있다.
15세기 초 당시엔 당대 최강의 이슬람 국가였으며, 동시에 이슬람 수니파 칼리프를 보유한 국가이기도 했다. 아직 몽골군이나 티무르군하고도 비빌 수 있던 막강한 정예부대인 맘루크 노예병이 타락하기 이전이기도 하고, 사리프 무하마드와 아쉬라프 바르스바이의 통치로 최후의 불꽃을 화려하게 내뿜던 시절이기 때문에 강력한 국력을 유지하고 있다. 어느 정도냐면, 수적 열세에서도 소 무스타파의 반란군을 싸그리 정리해버리고 카라만을 침공하려던 무라트 2세가 맘루크의 개입이 암묵적으로 드러나자 별 말 못하고 바로 깨갱할 정도. 괜히 셀림 1세가 맘루크를 한방에 컷해버린 것으로 역대급 군재로 평가받는 게 아니다.
이 시기엔 오스만과 상당히 사이가 좋았지만, 로마 제국에게 지원을 해줬던 역사적 배경도 있고 베네치아와 향신료 무역 관련해서 굉장히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다못해 국가 단위 전략적 제휴관계를 맺었으며, 오스만이 탐내던 아나톨리아 남부 소국들에 독립보장을 걸어두기도 하는 등 단순한 우방 관계라기엔 껄끄러운 관계에 놓여있다. 실제로 작중에서도 주인공과 술탄 바르스바이의 이해관계가 딱 맞아떨어져 함께 오스만을 엿먹이는 모습을 보여준다. 다만 최근 들어 아쉬라프 바르스바이의 병세가 악화되고 티무르 제국의 공세가 강화되며 위축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다행히도 티무르 제국의 공세는 막아내지만 아쉬라프의 병사로 더욱 위축될 위기에 놓였으나 오스만이 발칸에서 축출되고 티무르 제국도 내부 변고가 생긴데다 흑양조, 백양조의 봉기로 힘을 잃으며 아직까지는 당대 최강 이슬람 국가의 포지션은 유지하고 있다.
그리고 카라만이 오스만-에레트나-둘카디르 동맹에 박살나고 베네치아의 몰락을 알게 된 1440년에는 지중해의 재해권을 장악하기 위해 움직이려 하면서 진짜 최종보스로서의 움직임을 보였고 결국 1446년 로도스를 침공하며 제국과의 전쟁을 시작하게 되면서 오스만을 넘어선 진 최종보스의 위엄을 보이지만 정작 최종 결전이었던 포케아 전투에서 동맹 오스만군이 괴멸하면서 전쟁에서 패배하게 된다. 그나마 타격은 맘루크 함대가 괴멸되고, 포케아 전투에 참전했던 맘루크 기병대 일부가 포로로 잡히는 정도로 오스만의 운명에 비하면 가벼운 정도였지만, 종전 협상 조건 때문에 아나톨리아 서부의 일들에 대해 완전히 손을 떼게 된다. 그 뒤로 발흥한 사파비 왕조, 제국과 중동 삼국지를 구성하며 대립했다. 조지아와 동맹을 맺고 전쟁에는 끼어들지 않은 제국보다는 직접적으로 맘루크를 침공하는 페르시아의 사파비 왕조와 수백년동안 전쟁과 휴전을 반복하다 국력이 쇠퇴하더니 결국 18세기 후반 제국에 완전히 병합된다.
속국으로 카라만 술탄국과 킬리키아 지방의 잡 소국들[63] , 칸다르 토후국[64] 등을 거느리고 있다.
3. 참고 자료
3.1. 지도
3.2. 시대 및 인물 배경 설명
작품설정란의 3번/4번 게시글에 대략적인 배경 설명이 되어 있다. 읽을 때 참고하면 좋을 듯. 시대적 배경은 15세기 초로, 후스 전쟁의 영웅인 얀 지슈카와 헝가리의 영웅 후녀디 야노시, 알바니아의 스칸데르베그, 왈라키아의 블라드 3세의 생존 시기는 물론 십자군 전쟁과 잔 다르크의 생존 시기인 백년 전쟁과도 겹친다.
본래 저 시대의 제국과 비교하면 진짜 괄목할 만한 성과인데, 우선 1418년 남부 그리스를 전부 수복했고, 1421년엔 원래라면 1443~4년 바르나 십자군과 공조한 모레아 친왕 콘스탄티노스 11세가 수복했던 강역보다 더 넓은 수준의 영토를 훨씬 빨리 수복했으며 이후 주인공의 활약을 명분으로 삼은 주전파가 설치다가 제국을 말아먹을 뻔한 걸 주인공이 간신히 하드캐리해서 살려내고 1422년의 전쟁을 통해 중부 그리스, 테살리아 지방도 완전히 제국의 영역으로 만들었다.[69] 이제 본격적으로 제국은 원 역사와 확실히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사실 여기서 언급된 인물들 가운데 주인공 콘스탄티노스 11세에게 가장 도움이 될 인물은 헝가리의 후녀디 야노시와 알바니아의 스칸데르베그, 두 사람은 주인공과 거의 동년배인데다가[70] 실제로 동시기에 오스만 제국에 대항한 인물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다만 본작에선 콘스탄티노스 11세가 본래 역사보다 몇십 년은 더 이른 청년기에 그리스 남부 영토를 수복하는데, 실제로 저 둘이 본격적으로 오스만에 대항하기 시작하는 시기는 1440년대 중반쯤으로 20여 년도 넘게 기다려야 한다. 거기에 스칸데르베그는 이때 오스만에 충성하면서 수도 에디르네에서 한참 교육을 받고 있을 시기라 오히려 조만간 주인공의 적으로 나타날 가능성도 충분히 존재한다. 결과적으로 스칸데르베그는 오스만령 알바니아에서 적으로 처음 조우하게 되었고, 이후 전향한다. 한편 188화에선 후녀디 야노시가 오스만의 만행[71] 에 이를 갈며 등장한다.
어쩌면 잔 다르크도 주인공 편에 합류할지도 모른다. 잔 다르크는 1411~1412년생인데 작중 초반 주요 사건인 펠로폰네소스 반도 통일전쟁, 아테네 공국, 이피로스 공국 수복과 무라트 2세와의 전쟁은 1415~1421년경의 사건으로 설정되어 있고, 전쟁이 모두 끝나고 중부 그리스를 제국이 얻은 건 1423년의 일이다. 잔 다르크는 1428년부터 활동해 1431년에 화형당했고, 주인공(1405년생)보다 6~7세 정도 연하이며 1420년대 초 기준 곧 병으로 세상을 떠나는 얀 지슈카(1424년 병사)나 아예 태어나지도 않은 블라드 3세(1431년 생)에 비하면 활동시기가 작중 전개와 거의 같은 시기이다. 결국 샤를 7세를 교황청이 압박하여 프랑스를 대 오스만 십자군에 참전시키는게 결정되었으나 포로로 잡혀있었기에 어떻게 될지 모를 상황에서 질 드레가 몸값을 내고 잔 다르크를 구출해 십자군에 파견하면서 주인공과 처음 조우하지만, 두 세력의 목적[72] 이 달랐기에 합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작가도 따로 잔 다르크의 히로인화는 없는 걸로 결정했다는 코멘트를 남기며 더 이상의 등장은 교회 통합건 당시 잠깐 얼굴을 비춘 걸 빼곤 없었다.
다만 작가도 제국을 도울 인물을 새로 찾겠다는 이야기를 했고, 작가가 제국의 지원을 받게 된 블라드 2세를 왈라키아에서 등장시키면서[73] 그의 아들인 블라드 3세 또한 8년 뒤 주인공 측에 공식 합류했다.
그 외에도 제노바령 섬들 중 일부는 주스티니아니 가문이 지배하고 있는 상태인대, 조반니 주스티니아니는 실제 역사에서 자기 재산을 긁어모아다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에 참전할 목적으로 용병단을 가장한 실질적 의용군을 만든 인물이다. 콘스탄티노스 11세는 주스티니아니를 제국의 프로토스트라토르(대장군)로 임명하고 콘스탄티노플 수비군 지휘를 맡겼는대,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은 그 혼자서 캐리한 것과 다름없을 정도로 활약했다. 막판에 치명상을 입고 후송되는 바람에 일이 틀어져 버렸지만. 작중에서 주스티니아니 가문이 나온 적은 없지만, 거기에서 모티브를 얻은 인물인 제노바의 주스티아니 제독이 등장해 오스만 1차전의 결정적인 순간과 3차 오스만 전쟁 당시 베네치아의 모레아 침공때 주인공을 돕는 등의 활약을 했다.
[1] 이 때는 아직 메흐메트 2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복하고 파디샤와 룸 카이세리를 칭하기 전이기 때문에 오스만 "제국"보다는 "술탄국"이 적절하다.[2] 정확히는 팔레올로고스 시기부터 쓰였다. 그 전의 로마 제국에는 국기라는 것이 없었다. 독수리와 카이 로(☧) 등이 상징으로 쓰이긴 했지만 그것이 국기는 아니었다.[3] 공화정 수립부터 따지면 기원전 509년, 제정수립으로 할 경우 기원전 27년, 동서대분열이 일어난 년도를 기준으로 했을 경우엔 서기 395년. 애초에 고대 로마에서 쭉 이어지는 연속성 때문에 어떠한 년도가 건국 시점이라고 정확히 찝어서 정하기가 힘들다.[4] 요안니스 5세 시기의 내전으로 가득한 혼란한 정국으로 인하여 황제 순서가 헷갈릴 수 있는데, 요약하면 안드로니코스 3세-요안니스 5세-요안니스 6세-요안니스 5세-안드로니코스 4세-요안니스 5세-요안니스 7세-요안니스 5세-마누일 2세-요안니스 8세다. 자세한 설명은 요안니스 5세 항목 참고.[5] 원래 역사에서는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당시 수도가 함락당하는 와중에도 건재할 정도로 강력한 방어력을 자랑했던 난공불락의 요새였지만, 작중 초반 테오도로스의 닥돌 트롤링으로 방위력을 싸그리 잃은 뒤 무라트 2세의 공세에 허무하게 함락되었다가 3차 오스만 전쟁의 승리로 다시 제국의 품으로 돌아왔다.[6] 마찬가지로 테오도로스의 트롤링으로 인해 허무하게 함락되었다가 3차 오스만 전쟁의 승리로 다시 수복했다.[7] 베네치아 공화국에게 양도되었다가 갑작스러운 제5차 베네치아-제노바 전쟁으로 제노바에게 잠시 함락된 뒤 제노바의 에게 해 무역 보장을 조건으로 제국에게 반환 한다.[8] 주인공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 세르비아의 구원의 조건으로 세르비아의 완전한 봉신화와 군 흡수, 코소보 양도 등을 받아내면서 겸사겸사 확보되었다.[9] 원래는 칸타쿠지노스 가문의 문장이지만, 팔레올로고스가 모레아를 장악한 후에도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10] 253화에서 최후의 결전을 위해 합병을 하고 이피로스 군 2천여명을 모레아군에 편입시키는 결정를 취한다.[11] 다만 황제의 첫 모레아 순방 때 지방 민회들이 세율을 '''50%''' 가량 물고 있다고 호소하는 것 보면 슬슬 불만이 생기는 듯하다.[12] 전근대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인구는 대략 20~30만 명을 유지했고, 그에 비해 모레아 본토에서만 뽑아낸 상비군만 해도 대략 '''1만 명'''으로 '''인구 대비 상비병력 비율이 30만 명 기준으로 잡아도 약 3.3퍼센트, 프리드리히 대왕 즉위 초의 프로이센의 상비병력 비율을 약간 상회하는 수준이다.''' [13] 일단은 카스트리오티 가문의 문장과 동일할 것으로 추정된다.[14] 아르바논 공국의 성립을 기준으로 했을 경우에 해당. 만약 왕국 선포를 기준으로 한다면 1272년, 카스트리오티 공국의 수립을 기준으로 한다면 1389년이 된다.[15] 이때 당시 스칸데르베그가 보유한 병력은 약 4천 명으로, 딱히 수적 열세 얘기가 안 나오고 스칸데르베그가 적은 피해만으로 이들을 섬멸했다는 내용이 나왔음을 보면 적어도 동수에 해당하다고 생각 가능하다.[16] 원래 수도인 베오그라드는 1284년 세르비아 국왕 스테판 드라구틴이 장인 어른인 헝가리 국왕 이슈트반 4세에게서 증여받은 봉토에다 세운 도시인데 작중에서 주라지가 살아남기 위해 주인공과의 약조 하에 헝가리에게 반환한다.[17] 물론 이렇게 갈아버린 건 다름 아닌 주인공이다. 생존을 위해서 어쩔순 없었다지만 사위의 국가인 만큼 심한 배신감을 느낄 것이다.[18] 게다가, 이쪽은 반강제로 오스만에 종군한 주인공과는 다르게 말 그대로 배교+십자군 통수 행위라서 쉴드를 쳐줄 나라가 없다.[19] 크킹 식으로 바라보면 봉신 병력을 한동안 이용하여 관계도가 기본적으로 패널티 붙은 상태에서 '''배교자''', '''동맹 파기''' 등으로 나락까지 떨어져 있다고 보면 된다.[20] 명목상으로 그렇지 사실상 오스만의 속국이며, 이 때문에 이미 머리 끝까지 화가 치밀어오른 헝가리는 주라지를 조지기 위해 침공 계획을 세운다. 다행히 이는 황제와 후녀디의 합의를 통해 무마되긴 했지만.[21] 코소보 및 제타 지방의 할양, 베오그라드의 헝가리 귀속, 충성 서약, 주라지의 양위. 조건에는 포함되어있지 않지만, 군통수권도 완전히 넘겨주었다.[22] 조건을 수락하지 않을시 검은 군대의 복수심에 그대로 노출되어 전멸할 확률이 매우 높았다. 기독교 세계에서 배교자이자 십자군의 뒤통수를 쳐서 누구도 도와주지 않는 고립무원의 처지고, 3차 오스만 전쟁이 끝난 후에도 제국의 속국이 아니었다면 바로 침공당해 멸망했을 것이다.[23] 샤를마뉴가 프랑크 왕국을 세운 시점을 기준으로 하면 800년.[24] 라틴어론 Sacrum Imperium Romanum. 중세 및 르네상스 시기엔 이쪽이 더 많이 쓰였다.[25] 대체적으론 이 시기의 신롬 수도는 대관식이 치러지는 아헨, 또는 황제가 거주하면서 후스 전쟁을 진두지휘하던 프라하로 여긴다.[26] 기존의 아르파드 왕가가 단절되고 외국에서 왕을 수입해와서 왕통을 이어나가기 시작한 공위시대 이후를 기점으로 했을 경우 1301년.[27] 지금의 수도 부다페스트는 1873년 다뉴브 강 서안의 부더와 우안의 페슈트가 합쳐져서 탄생한 도시이다. 원래 수도는 페슈트였는데 1361년 벨러 4세가 부더로 수도를 옮겼다.[28] 원래 헝가리령이었으나 1284년부터 세르비아령이었는데 1427년 주라지 브란코비치가 헝가리에게 반환했다.[29] 다만, 지기스문트는 신성 로마 제국의 제위를 1433년부터 겸했기 때문에 1420년대에는 헝가리 왕위(1387~1437), 보헤미아 왕위(1419~1437) 둘만 정식 작위이다.[30] 작중에서 '나사 빠졌다' 라고 했다면 완전히 잘못된 것인데, 일단 검은 군대는 '트란실바니아 유민들' 이 아니라 非헝가리인을 주축으로 한 상비 용병대였으며(나중에는 헝가리인도 받기는 했다) 마차시 1세 사후 헝가리 왕실이 용병료를 내지 못하자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지 마차시 1세 생전까지만 해도 헝가리군의 주력으로서 막강한 전투력을 자랑했다.[31] 그 신성로마제국도 티롤의 금광덕에 간신히 유지한 검은 군대이니 그보다 작은 규모의 헝가리가 검은 군대를 잘 유지할 수 있을리 없다.[32] 일반적으로 교황령의 국기가 베드로의 열쇠에서 따온 깃발인 것으로 아는 사람들이 많을 텐데, 성 베드로의 열쇠는 교황령의 '국기'가 아닌 '국장'에 해당하고 백황기 또한 '일단은' 근대에 사용한 것이다. 이 시기의 교황령 국기는 적황기였고 이는 현재 로마 시의 상징이기도 하다.[33] 위의 가브리엘레 추기경과 동일인물. 모레아군을 따라 코소보까지 종군하면서 개과천선해 교회 통합을 꾀하는 주인공의 강력한 우군이 되어준다.[34] 주인공에 대한 호의와 함께 두 제국을 통해 교황의 지위를 안정화시키고, 권위를 높이는 것도 가능해 일석이조다.[35] 미하이 1세, 라두 2세, 알렉산드루 알데어, 블라드 2세.[36] 실제 역사에서는 반대로 단 2세가 피살당하고 라두 2세도 훨씬 전에 전사한 걸로 추정된다. 작가 본인도 사람을 잘못 봤다고 인정했다.[37] 물론 전체적으로 본다면 원역사에서 가장 오래살아남은 로마계 국가는 테오도로 공국이다. 트라페준타가 멸망하고도 14년을 더 버텼으니...[38] 특히 서부 해안가 지역. 내륙 지역은 상실한지 이미 400년 가까이 지났고 이미 튀르크 족이 터전으로 잡은지 오래였지만, 서부 해안가 지역은 완전히 상실한지 작중시점으로 고작 100년도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니케아, 니코메디아, 푸르사를 위시한 매우 오랜 전통과 역사를 지닌 도시들이 분포하고 있으며, 현 제국의 사실상 모체라 할 수 있는 니케아 제국의 발흥지라는,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이기도 하고 거기에 매우 풍요로운 지역이라 경제적으로도 수복할 만한 가치가 차고 넘친다. 거기에 소아시아 서부 해안가 지역을 완전히 장악하면 자동으로 튀르크족으로부터 에게 해와 콘스탄티노플의 안전도 보장되기에 안보적 가치도 충분하다. 즉 명분도, 이득도 충분하다.[39] 이게 무슨 뜻이냐면 트라페준타 제국이 로마 제국 지지를 선택한다면 오스만 내부의 제국 세력의 정통성 주장 행위는 그냥 방계의 발악으로 치부되어 완전히 끝장난다. 안 그래도 제국 내 드라가시스 지지자들이 엄청나니 지금 주장해도 니들도 말아먹었고 팔레올로고스는 이름을 버리긴 했어도 후손인 드라가시스 폐하께서 그 똥 치우고 있잖아라고 하면 힘들어지는데 직계가문까지 '''직계인 우리는 드라가시스 지지하는데 왜 방계인 니네가 나대니?'''라고 한다면.... 거기다 직계 입장에서 철천지 원수인 앙겔로이 파샤 측은...[40] 실제 역사에서도 요안니스 8세와 트라페준타의 안나 사이에서 결혼동맹이 체결되었고, 콘스탄티노스 11세 또한 아내를 사별한 이후 재혼 상대를 트라페준타와 조지아에서 찾으려 한 바 있다.[41] 건국년도가 애매한 케이스인데, 산초 대왕 사후 나바라가 분할상속되면서 생겨난 아라곤 왕국(Kingdom of Aragon)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건국년도가 1035년이지만 정작 그 아라곤이 일반적으로 지칭하는 아라곤 왕국, 정확히는 아라곤 연합왕국(Crown of Aragon) 내에선 카탈루냐 지방을 장악하고 있던 바르셀로나 백작령에 경제력 면에서 밀려 2군급 역할을 맡게 되었다. 영국이라는 단어가 잉글랜드 왕국과 그레이트브리튼 연합왕국이라는 뜻을 둘 다 갖지만 일반적으론 후자를 지칭하는 것과 같은 케이스.[42] 위쪽은 아라곤 연합왕국, 아래쪽은 아라곤 왕국을 지칭[43] 스페인 표준어 기준으론 알폰소 5세[44] 위의 지도에는 중부 그리스에 아라곤 영토가 남아있는 걸로 나오지만, 실제로는 카탈루냐 용병대가 그리스에서 축출된 후안 1세 시절에 영토가 날아가고 명목상 작위만 남은 상황.[45] 제국이 드라가시스 이후 서지중해로 진출하는 걸 막고 교황청과 총대주교와 밀접한 드라가시스를 회유하여 통치 제한을 풀기 위해서다.[46] 야기에우워 왕가가 성립하면서 리투아니아와 합쳐진 시점을 기준으로 하면 1385년.[47] 현재의 우크라이나. 킵차크 칸국 건국 이전에는 러시아의 뿌리나 다름없는 키예프 루스가 존재했다.[48] 베네치아 방언으론 Serenìsima Repùblica Vèneta.[49] 코로니(코론), 메소니(모돈), 나플리오(나폴리 디 로마니아), 키클라데스 제도(낙소스 공국), 케르키라(코르푸), 프레베자, 키티라(체리고) 등[50] 재판한다 해도 배상금 더 줄 테니 더 패버린다고...[51] 리구리아 방언으론 Repúbrica de Zêna.[52] 베네치아인들은 콘스탄티노플에 들어왔다치면 바로 두들겨 맞는데 비해 제노바인들은 콘스탄티노플에서 잘만 장사를 하고 있다. 베네치아인들도 제노바인들에게 위탁 판매를 하니 나름 이득은 본다는 소리.[53] 라구사는 조계지를 만들지 않고 공정한 거래로 신용을 얻었고 피렌체는 플로린이 두카트와 공동 교역 화폐가 되며 영향력이 올랐다.[54] 이는 베네치아는 이전의 행보로 인해 제국과의 무역관계가 완전히 파탄나버렸지만 제노바는 다행히 제국과의 관계가 파탄 수준은 아니라 제국과 무역관계는 잘 이어나가고 있기 때문이다.[55] 모스크바 대공국과 그 후계국인 루스 차르국이 쌍두독수리 깃발을 사용하기 시작한 건 제국이 멸망하고 20년 정도가 지난 1472년부터였다.[56] 킵차크 칸국의 지배를 몰아낸 시점을 기준으로 하면 1380년.[57] 그 뒤로도 카잔 칸국과의 전쟁에서 패하며 바실리 2세는 장님이 되는 등 고난이 이어진다. 그것이 끊어진건 이반 3세가 즉위한 뒤의 이야기.[58] 근데 정작 이 재물은 대부분 콘스탄티노플의 성벽을 비롯한 방어시설을 재건하는 데에 쓰였다.[59] 이 때는 아직 메흐메트 2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복하고 파디샤와 룸 카이세리를 칭하기 전이기 때문에 오스만 "제국"보다는 "술탄국"이 적절하다.[60] 이 시기 오스만은 완전한 중앙집권화를 이뤄내지 못했고, 이 문제가 해결되는 건 메흐메트 2세가 즉위하고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키면서 더이상 토후들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어진 이후이다. 실제로도 작중에서 오스만군의 3분의 1 이상을 아나톨리아의 토후들이 차지하고, 비록 무라트에게 충성을 다하긴 하지만 어쨌든 봉건귀족에 해당하는 이스하크, 투라한 등이 등장한다.[61] 유로파 식으로 하면 카라만 공국이나 잔다르 공국을 비롯한 아나톨리아의 튀르크계 공국들을 맘루크가 독립보장을 건 상태이다.[62] 오스만이 처음 유럽으로 진출한 1354년 3월 이래로 84주년 만이었다.[63] 원래는 소 아르메니아 왕국이 위치해있던 동네지만, 몽골 제국 전성기 시절 몽골의 앞잡이를 자처해 셀주크를 비롯한 레반트 전역의 튀르크계 국가들을 족치고 다니다가 바이바르스의 심기를 거슬러서 무려 수십 년에 걸쳐 전토를 유린당하고 어마어마한 인구가 학살 및 노예화당한 뒤 끝내 1375년 멸망했다. 맘루크 왕조는 소 아르메니아의 멸망 이후 영토를 산산조각내서 튀르크 부족들이나 기독교계 영주들이 다스리게 했으며, 이들 중 그나마 강성한 세력을 가졌던 게 바로 킬리키아 북동부의 튀르크 국가인 둘카디르 공국이다.[64] Candar/Jandar, 칸다르/찬다르/잔다르/잔다를르 등으로 불리지만, 정작 진짜배기 이름은 이스펜디야르 토후이다. 사실 속국까진 아니고 조공국에 가깝다.[65] 유저의 소속이 소속이라 그런지 eu4 지역 구분을 그대로 따랐다.(게임 내에선 프로빈스 구분)[66] 1422년의 전쟁을 통해 여기서 테살로니키가 베네치아령으로 넘어가고 그 대신 제국은 라리사 주변의 중부 그리스 평야지대를 확보했다.[67] 무라트 2세가 콘스탄티노플 쪽을 공격하기 직전을 기준으로 한 판도이기 때문에, 셀림브리아 등 콘스탄티노플 외의 로마 제국령 트라키아가 여전히 존재한다.[68] 카라만 술탄국과 칸다르 토후국을 제외한 아나톨리아 토후국들이 전부 오스만에 복속되었고, 이 둘은 이후 맘루크가 혼란에 빠지자 오스만 쪽에 붙는다. 그 외에 메셈브리아를 제외한 마누일 2세 시절 트라키아 수복지들을 전부 상실했고, 알바니아는 스칸데르베그를 바지사장으로 내세운 주인공에 의해 통합되었다. 또한 1432년에 제2차 대오스만 전쟁이 종결되면서 제국은 마케도니아 대부분과 제타 지방을 확보했고, 베네치아는 낙소스와 크레타를 제외한 에게 해의 모든 영토를 제노바에게 빼앗겼다. 마지막으로 1433년에 접어들면서 팔레올로기 파샤가 신흥 세력으로서 잔존 마케도니아와 오스만령 트라키아의 통치를 맡는다. 참조[69] 다만, 이 과정에서 제국에서 2번째로 큰 도시인 테살로니키가 베네치아에 넘어가는데 어차피 이건 현실에서도 방위비 문제로 1423년 일어났던 일이다.[70] 스칸데르베그는 콘스탄티노스 11세와 똑같은 1405년생, 후녀디 야노시는 그 다음해인 1406년생.[71] 오스만의 사주를 받은 왈라키아가 트란실바니아 지방을 초토화시켰다.[72] 프랑스는 무사 귀환, 모레아는 추기경의 무사 귀환[73] 원 역사에서 블라드 2세는 콘스탄티노플에서 융숭한 대접을 받았지만, 이내 자신의 왈라키아 공위 회복에 도움이 되지 못할 것으로 보이는 제국의 모습에 실망하고 1432년 헝가리로 떠났다. 하지만 소설 내에서 1432년은 주인공이 오스만에게 맞서 대승을 거둔 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