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스트포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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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United States Military Academy(USMA)
미국의 육군사관학교로 미국 뉴욕주 웨스트포인트에 위치하고 있다. 그냥 '''웨스트포인트(West Point)'''라고 해도 통한다.
2. 상세
별개로 미국해군사관학교는 메릴랜드의 아나폴리스, 미국공군사관학교는 콜로라도 주의 콜로라도 스프링스, 해안경비대사관학교는 코네티컷 주의 뉴런던, 미국상선단사관학교[1] 는 뉴욕의 킹스포인트에 소재한다. 학부 과정인 이들 사관학교와 달리 대학원 과정인 USUHS(Uniformed Services University of the Health Sciences)도 존재하는데, 육/해(+해병+해경)/공, 연방공공보건서비스부대와 협력관계인 군의관/간호장교/보건과학 분야 사관학교로, 이쪽은 일본 방위의과대학교와 비슷한 컨셉이다.
3. 역사
1802년 설립되었으나 원형은 1778년 대륙군의 육군 주둔지에서 비롯됐다. 초창기엔 미군이 제대로 된 상비군이 아니라 필요할 때 소집되는 예비군의 형태인지라 웨스트포인트 출신들도 진급 제대로 못 하고 딴 일 하고 그러느라 바빴다. 그러다가 남북전쟁을 거치면서 미 육해군이 점점 기틀을 잡아가고 미국이 경제대국으로 성장하면서 장교 육성이 중요해지면서 점차 발전해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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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7년엔 최초의 아프리카계 미국인 장교가 임관했다. 헨리 플리퍼(Henry O. Flipper) 공병[2]소위로 노예 출신이었으나 해방된 뒤에 애틀랜타 대학교에 다녔고 1학년때 하원의원 제임스 프리먼의 눈에 띄어 웨스트포인트에 입학하였다. 소위로 임관 후, 육사 졸업생의 최소 복무기간인 5년간만 복무 후 중위 진급을 못 하고 소위로 전역했다. 그는 버펄로 솔저의 지휘관이기도 했다. 전역 후에는 특기를 살려 토목 기술자로 일했고, 알버트 폴 상원의원의 보좌관으로 일하다 1940년에 사망, 매우 장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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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0년대의 육군사관생도.
남북전쟁 이후 미국의 남부 주들을 통합하고 아프리카계 미국인을 통합하는 문제 외에도 웨스트포인트는 hazing, 신고식 등의 가혹행위로 골머리를 앓았다. 그 전에는 가혹행위가 존재하지 않았으나 남북전쟁에 참전했던 자들이 신입으로 들어오면서 생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00년에 육사생도가 가혹행위로 사망하는 사고가 일어나자 그제서야 사회에서 견제가 들어갔다. 당시 의회가 청문회를 했는데 이때 증언을 한 사람 중엔 더글러스 맥아더 (당시)생도도 있다. 맥아더 장군은 이 때 당시 사관학교 내 가혹행위에 대해 침묵을 지켰다. 타산적인 이유에서인지, 정말로 명예를 지키고자 한 것인지는 각자의 판단에 맡긴다.[3] 이로 인해 가해자를 두둔한 혐의로 퇴교당할 뻔했으나, 다른 맥아더 생도의 동기가 대신 증언해 위기를 넘겼다. 이 때의 경험 탓인지, 훗날 육사 교장으로 돌아온 맥아더 장군은 재직 중 육사 내 생도간 가혹행위 일소에 굉장히 노력해 상당수 근절시켰다.
1911년 입학해 1915년 졸업한 별들의 기수도 유명하다. 제1차 세계대전 때는 급격히 팽창한 육군 규모에 따라 장교를 속성으로 양성하기 위해 교육과정을 2년으로 줄이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대폭 사관생도의 수를 늘리기도 했고 1943년엔 6개월 빨리 임관시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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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에는 처음으로 여성 생도를 받아들였으며 15%를 여성으로 받아들이도록 했다. 이들은 1980년에 임관했다.
4. 학교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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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19세기에 시작된지라 고풍스러운 건물이 많다. 해사와 육사는 스포츠에서 주로 라이벌이다. 한국에서도 육사, 해사, 공사끼리 스포츠 시합(3사체전) 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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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관생도들의 점심시간. 생도식당이 여섯 군데 있다고 한다. 생도 수가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 생도 수의 5배인 4,000명이 넘으므로 한 개의 식당에 수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보통 군사학 학사와 다른 학사를 따는 건 한국의 사관학교와 다를 게 없다. 사실 한국의 육군사관학교 제도 자체가 미 육사 제도를 많이 본뜨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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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하는 생도들이 모자를 던지고 있다.
사관생도의 비중이 백인들이 압도적으로 높다. 실제 미국 인구 비율과 비교해도 높은 편. 또한 아시아계도 실제 미국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중보다 굉장히 많이 입학한다. 한국계 미국인도 1년에 보통 10명 이상이 임관한다.[4] 다만 이 비율은 병으로 가면 바뀐다. 병 총원의 20%가 아프리카계 미국인이다.
임관반지이다. 대략 1,200명 정도가 입학해서 1,000명 가까이가 임관한다.
5. 스포츠
이 학교는 대체로 프로 선수들보다 체육 지도자들을 많이 길러내는 편이다. (특히 풋볼에서)
5.1. 미식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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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의 감독 얼 "레드" 블레익 (1941~1958 재임. 1989년 작고.) - 내셔널 챔피언 3회 (1944~46). 로빈 올즈의 풋볼 재능을 알아보고 다트머스 대학교 감독으로서 전액장학금을 제시했다가 웨스트포인트로 가버렸지만 올즈의 재능을 높이 산 육사 교장이 직접 블레익 감독을 모셔왔던 일화가 유명하다. 이 감독이 재직하던 시기에 1944-1946년 3년 연속 우승을 기록했었다.
한때 미국해군사관학교와 팽팽한 전적을 유지해 왔지만, 2000년대 들어 해사에 밀리고 있다.
육사 출신 선수 중 NFL에서 가장 오래 뛴 선수는 1946년부터 1952년까지 뉴욕 자이언츠에서 뛰었던 텍스 쿨터 한 명 뿐이라고 한다.
여담이지만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前 대통령도 학창 시절에 미식축구 활동을 한 바 있다.
5.2. 아이스하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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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대 감독 잭 라일리 (1950~1986 재임. 2016년 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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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롭 라일리 (1986~2004 재임. 현재 생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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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자 브라이언 라일리 (2004~ 현재 재임중.) - AHA 컨퍼런스 정규시즌 우승 (2008)
아이스하키 쪽에서는 특이한 점이 하나 있는데, 3대 세습(...)을 했다.
과거 콜로라도 애벌랜치의 주전 라이트 윙이었던 댄 히노트가 대표적인 동문이다.
6. 동문(졸업년도)
미 육군의 역사적인 명장들 대부분이 웨스트포인트를 졸업하였다. 또한 육군 항공대가 독립한 뒤 생길 예정이었던 미국공군사관학교가 6.25 전쟁 휴전 이후에나 생길 정도로 늦게 설립되었기 때문에 군적상 육군을 거치지 않고 공군으로 임관한 장교들이 50년대 전후로 꽤 많았다. 생도들 사이에서도 공군이 간지 때문에라도 호응이 괜찮은 편이었지만 조종사 훈련에서 탈락하면 개쪽이 되기 때문에[5] 더 많은 진급 기회가 보장되는 육군에서 역으로 인력난을 겪는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당시에는 미국해군사관학교에서도 제독들의 반란으로 꽁기꽁기한 공군에다 일정 수의 생도를 임관시켰을 정도로 공군이 인력난에 시달렸는데, 이 때문에 90년대 초반까지 육사 출신이 공군의 주요 장군 보직을 차지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공사는 그런 육사의 포스에 밀린데다 여러 명문대학 학군단/OTS 출신의 러시와도 경쟁하느라 상당히 오랫동안 공군참모총장을 배출하지 못했다. 현직인 마크 웰시 장군이 겨우 '''4'''번째 공사 출신 참모총장이며 아직까지 공사 출신 합참의장이 없어놓으니 말 다했다(...) 또한 이들 중에서 엘리트 테스트 파일럿이 꽤 배출되었고, 이들은 MIT, 칼텍 등 유수의 명문 대학원에서 공학 학위를 취득, 1960년대 스푸트니크 쇼크와 유리 가가린의 우주 비행으로 전미가 열폭하며 촉발된 사상 초유의 문 레이스에서 크게 기여했다. 아폴로 계획에서 달에 착륙한 주요 미션들은 15호를 제외하면 모두 해군 출신자들이 사령관을 맡았으나, 제미니 계획에서 미국인으로서 최초의 EVA를 수행했으나 아폴로 1호 화재참사로 순직한 에드 화이트, 최초로 달 궤도에 진입했던 아폴로 8호의 사령관 프랭크 보먼, 아폴로 11호의 버즈 올드린과 마이클 콜린스, 최초로 월면차를 운전한 아폴로 15호 사령관 데이비드 스콧 등의 여러 웨스트포인트 출신자들이 족적을 남겼다. 다만 이들은 육사 졸업했다 뿐이지 모두 공군이어서 육군 입장에서는 못내 떨떠름했지만, 이후에는 육군에서도 여러 우주 비행사들이 배출되었다.
이렇게 세계대전 시절부터 어쩔 수 없는 필요에 의해서라도 군종간 교류가 활발히 이뤄진 역사가 있는지라 오늘날에도 사관학교 교류 프로그램에서 삘을 받은 용자들이 타군으로 임관하는[6] 사례가 가끔씩 나온다. 물론 공군 초창기 같은 사례를 제외하면 기본적으로 쪽수가 적은지라 역사에 큰 이름을 남긴 이는 드물지만, 가끔씩 이렇게 전군한 인원 중에서 사관학교 훈육관, 교관이 나오기도 한다. 문제는 이게 육사 출신 해군 장교가 육사에 파견되는게 아니라 해사에서 훈육관을 하는 식이라, 육해전에서 유독 쓴웃음을 짓는 육사 훈육관이 있었는데 알고보니 해사 나왔다더라(...) 등의 아스트랄한 일화도 있다.
또한 스포츠에서도 나름대로 끗발이 있다. 프로에서는 군복무 때문에 별로 두각을 드러내지 못했지만, NCAA 등의 대학 스포츠로 한정하면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급 선수들이 매우 많고 전역한 뒤 지도자 생활을 하며 명장의 반열에 오른 이들도 있다. 듀크 대학교와 드림팀을 이끈 마이크 슈셉스키가 대표적. 이따금씩 그런 전설들이 장군을 달기도 하는데, 조지 S. 패튼은 소싯적에 근대 5종으로 1912년 올림픽에 나가서 메달권에 근접한 바 있고, 트리플 에이스 로빈 올즈 준장은 비행기 조종 대신 풋볼로 먹고 살아도 되겠다며 스카웃 제의가 빗발치기도 했다. 미국 여러 대학들이 각자 갖고 있는 고유의 스포츠팀 이름은 '''Army Black Knights'''. 올림픽 같은 국제대회에 미국이나 미국 자치령 국가대표로 출전하고 메달도 따오는 경우가 가끔씩 나온다. 1972년부터는 사령관배 풋볼 시리즈(Commander-in-Chief's Trophy)를 매년 해사, 공사와 개최하고 있는데, 어째 공사 해사가 십수회씩 우승한 것과 달리 육사는 꼴랑 6회 우승으로 심하게 뒤쳐지는 편이다. 지못미.
- 로버트 리(1829년)[7]
- 에드거 앨런 포: 퇴학당했다
- 율리시스 그랜트(1843년)
- 더글러스 맥아더(1903년)
- 레슬리 맥네어(1904년)
- 헨리 아놀드(1907년)
- 조지 S. 패튼(1909년)[8]
- 월튼 워커(1912년)
- 드와이트 아이젠하워(1915년)
- 오마 브래들리(1915년)
- 맥스웰 테일러(1922년)
- 크레이튼 에이브럼스(1936년)
- 에드워드 머피(1940년): 머피의 법칙이란 말을 처음으로 사용한 사람
- 로빈 올즈(1943년)
- 샘 워커(1946년)[9]
- 존 위컴(1950년)
- 프랭크 보먼(1950년)
- 버즈 올드린(1951년)
- 마이클 콜린스(1952년)
- 데이비드 스콧(1954년)
- 노먼 슈워츠코프 주니어(1956년)[10]
- 도널드 쿠티나(1957년)
- 에릭 신세키(1965년)
- 존 미어샤이머(1970년). 미국의 현실주의 국제정치학자. 단, 군복무는 육군이 아닌 공군에서 했다.
- 존 아비자이드(1973년)
- 데이비드 퍼트레이어스(1974년)
- 마틴 뎀프시(1974년)
- 로이드 오스틴(1975년)
- 레이먼드 오디어노(1976년)
- 스탠리 매크리스털(1976년)
- 커티스 스캐퍼로티(1978년)
- 빈센트 브룩스(1980년): 아프리카계 미국인으론 최초로 여단장생도를 지냈다. 前 주한미군사령관 겸 주한유엔군사령관, 한미연합사령부 사령관이다. 형인 리오 브룩스도 1979년 졸업자로 준장을 지냈다.
- 로버트 에이브럼스(1982년): 현 주한미군사령관 및 한미연합군사령관
- H.R. 맥마스터(1984년)
- 마이크 폼페이오(1986년): 현 미국 국무장관, 전 CIA 국장
- 존 오(1993년)[11]
- 대니얼 최(1999년): 커밍아웃한 게이로 이라크전에 참전했고 전역 후에 인권운동을 하고 있다.
7. 기타
- 대한민국 육군과 달리 미국 육사는 육군 장성을 독점하지 못 한다. 미군의 경우 장관급 장교의 수나 비율이 한국보다 훨씬 많은데다가 미군에는 사병을 장교로 임관시키는 사관후보생 코스도 꽤 있다. 그러나 임관대비 비율로 본다면 육사가 학군보다 훨씬 많으며 대장이나 중장 같은 최고위 장성은 사관학교가 가장 많다. 학군이나 사후생 출신들은 보통 준장이나 소장에서 끝난다.[12]
- 입학하려면 타 사관학교와 마찬가지로 연방상원의원이나 연방하원의원 또는 부통령[13] 등의 의회추천서가 필요하다. 다만 8년이상 군복무를 수행중인 군인을 부모[14] 로 둔 사람, 전사자나 상이군인의 자식, 명예 훈장 수상자의 자식, 현역 군인[15] , ROTC과정을 수행중인 사람은 의회추천서가 필요없다.
- 한국인으로서 미육사 생도과정을 경험할 수 있는 방법은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한 뒤 해외 위탁교육에 지원해서 선발되는것이다. 다만, 4년 주기로 3명을 뽑으므로 기수가 맞아야 지원할 수 있는 기회가 오며 위탁교육을 갈 수 있는 국가들 중 미국이 제일 인기가 높은편이라 사관학교 내에서도 최고로 우수한 생도들끼리 경쟁을 해야하기때문에 뽑히기는 매우 힘든편이다.[16] 또한 어디까지나 위탁교육을 받는것이므로 졸업뒤에는 미합중국 육군 이 아닌 대한민국 육군 에서 임관하게된다. 한국 사관학교 포함 생도생활을 1년 더 한걸 감안하는지 중위로 임관이 된다.
- 최초의 유색인종 생도는 1873년 입교한 헨리 플리퍼(Henry Ossian Flipper)로 조지아 주에서 실제로 노예였다가 남북전쟁의 결과로 자유민이 된 사람이었다. 최초의 아시아인 생도는 윙푹 정(Wing Fook Jung)으로 중국계이며 1936년 입교다.
- 외국의 국가 원수가 방문했을때 몇가지 특례를 주는 관행이 있다. 보통은 육사생들에게 퍼레이드를 요청하거나, 육사생들에게 연설을 하는데, 박정희 전 대통령이 웨스트포인트를 방문했을 때, 학칙위반자에 대한 징계철회를 요구했다. 그래서 그 후에 기피지였던 한국에 근무를 자처하는 일이 늘어났다고 한다.
[1] United States Merchant Marine Academy. 1943년 설립된 미국의 상선사관 양성학교이다. 사관학교로 구분되는데, 컨셉 자체는 해양대학교가 해군사관학교와 해경사관학교의 영향을 받은 꼴이다.[2] 당시 미 육군에서 공병은 졸업성적이 상위권인 이들이 들어가는, 매우 출세하기 좋은 병과였다.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도 공병이다.[3] 사족으로 애니메이션 위인 임페리얼클래스 맥아더이라는 위인전에선 가해자 고발에 침묵하는 행위를 두고 인간으로서의 도리(...) 지키는 이락는 헛소리를 씨부린다.[4] 현재 웨스트포인트 생도를 자녀들로 뒀거나 웨스트포인트 출신 생도를 자녀로 둔 학부모들의 모임인 웨스트포인트 한인 학부모회가 활동중으로 웨스트포인트에 입학을 희망하는 학부모들에게 입학에 필요한 여러가지 도움을 주고 있다. 추천서 받는 것부터 복수국적 문제 등 여러가지가 걸린다면 찾아보자. 특히 복수국적문제는 아이들도 모르고 부모도 무신경했다간 신원조회에서 잘못 걸려서 위증 크리가 떠서 입학무효화에 패가망신까지 당할 수 있으므로 더욱 신경써야 한다.[5] 마이클 콜린스의 회고에 의하면 처음에 공군을 선택한 뒤 시력검사에서 처음에 영 좋지 않은 결과를 받고 좌절했으나 안과 전문의의 조언으로 단기간에 시력 좋게 하는 안구 운동을 반복해서 겨우 시력검사를 뚫었다고 한다. 실제로 시력이나 여러 요인으로 非조종 공군 소위가 된 졸업자들은 결국 육군으로 임관한 동기들보다 훨씬 부진한 진급속도와 기록을 남기는데 그쳤다. [6] 다만 해경은 정말 드물다. 육/해/공 사관학교에서는 가끔씩 보이지만 해경은 국방부와 아예 다른 소속인지라(국방부에서 키워줬는데 국토안보부로 가면 곤란하니까) 많이 복잡한 편.[7] 율리시스 그랜트가 그를 예우한 것은 14년이나 선배인 점도 한 몫 했다.[8] 아들도 1946년 졸업생이다.[9] 월튼 워커의 아들이다. 미 육군 역대 최초의 부자 4성 장군.[10] 아버지 노먼 슈워츠코프 1세도 웨스트포인트 1917년 졸업생으로서 육군 소장까지 지냈다. [11] 한국계 출신 미군 군의관. 임관 후 뉴욕 메디컬 스쿨을 마친 후 군의관으로 복무. 군의관항목 참조.[12] 이는 장성급일지라도 실무가 주 업무인 준장이나 소장과 관리형이 주 업무인 중장과 대장의 위치가 달라서이다.[13] 미국 부통령은 연방상원의장을 겸직한다.[14] 신분 불문, 양부모여도 상관없다.[15] 부대장의 허가서 필요. 8년 이하 복무한 현역 군인의 자녀도 의회추천서를 부대장의 추천서로 대신할 수 있다고 한다.[16] 모 기수에서는 미국 3년거주 경험 생도와 수석입학 생도가 지원하니 다른 생도들이 다 물러났다는 일화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