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국민당

 

'''통일국민당'''
(창준위)

'''통일국민당'''

신민당
새한당
(창준위)
새한국당
(개별 합류)
민주당
(개별 합류)


[image]
'''통일국민당'''
'''공식명칭'''
통일국민당(統一國民黨)
'''약칭'''
국민당, 통일당
'''창당일'''
1992년 1월 3일 (창당)
'''해산일'''
1994년 7월 8일 (신정치개혁당과 합당)
'''통합 정당'''
(1992년 2월 12일 흡수 합당)
'''해산 전 총재'''
김동길
'''의석 수'''
'''12석 / 299석''' 해산 직전
'''이념'''
자유보수주의
보수자유주의
국민자유주의
경제적 자유주의
'''스펙트럼'''
중도우파
'''중앙당사'''
서울특별시 종로구 세종대로 163 (세종로)
'''당 색'''
연두색 (#22B14C)
청록색 (#3CB371)
1. 개요
2. 강령과 정책
3. 역사
3.1. 창당과 총선 돌풍
3.3. 대선 후
4. 이야깃거리
4.2. '현대' 정당
4.3. 의외의 정책들
5. 의의
6. 역대 총재
7. 역대 선거결과
8. 여담
9.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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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92년에 정주영이 창당했던 대한민국의 정당이다. 약칭은 '''국민당'''.

2. 강령과 정책


강령

(1) 자유민주주의를 근간으로 삼아 공정하고 진취적인 방향으로 국정을 혁신한다.

(2) 상호보완적 남북경제교류에 의한 신뢰구축과 민족 동질성 회복으로 통일을 주도한다.

(3) UN헌장 정신으로 국제사회에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세계평화에 능동적으로 기여한다.

(4) 자유시장 경제체제를 유지발전시켜 견실한 경제성장을 추구하며 국민복지의 향상으로 경제정의를 실현한다.

(5) 법질서를 준수하고 근면과 정직을 존중하는 사회민생이 안정된 복지사회를 이룩한다.

(6) 도덕성과 책임의식을 고양하는 교육으로 시민공동체 의식을 배양하며 과학기술 교육을 강화하여 21세기에 대비한다.

(7) 평등한 사회구조의 정착으로 여성의 사회참여 기회를 확대하여 국가발전에 적극공헌하게 한다.

(8) 모든 생명의 근원인 자연을 보호하고 쾌적한 생활환경을 조성함으로써 국민생활의 질을 높인다.

기본정책

(1) 정치 : 닫힌 정치에서 열린 정치로

(2) 통일 : 정권유지를 위한 남북관계의 악용 반대

(3) 외교 안보 : 한민족 경제생활권 확보를 위한 외교 노력

(4) 경제 : 정부관여 최소화로 활력있는 국민경제

(5) 사회 문화 복지 : 서로 돕는 인간 존중 사회

(6) 교육 과학 : 정직하고 진취적인 인간형성

(7) 여성 : 국가발전에 여성의 참여를

(8) 환경 : 쾌적한 환경으로 행복한 삶을


3. 역사



3.1. 창당과 총선 돌풍


현대그룹의 창업주인 정주영제14대 대통령 선거 출마를 결심함에 따라 1992년 1월 창당준비위원회가 구성되었고, 같은 해 2월 김동길이 창당을 추진하던 새한당을 흡수하여 정식으로 창당되었다.
상징 동물은 호랑이였다. 정주영이 현대의 오너로 한창 뛰어다닐 때 사내에서 호랑이로 통했던 점이 영향을 끼쳤던 걸로 생각된다.[1] 당시 민자당의 상징 동물은 , 민주당은 토끼와 거북이였다. 슬로건은 '''"경제 대통령, 통일 대통령"'''. 결과적으로는 토끼, 거북이, 호랑이 같은 정치인이 아닌 곰 정치인이 선택된 꼴이 되었다.
창당 한 달만에 1992년 3월 제14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지역구 24명, 전국구 7명 등 31명의 당선자를 내면서 단번에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했다. 당시 정치권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3.2. 14대 대선


정주영은 이를 바탕으로 제14대 대통령 선거에 통일국민당 후보로 출마하였다. 1992년 가을에는 민주자유당 내에서 반 김영삼 계열이었던 김복동, 박철언, 이종찬, 장경우 등 민정계 인사 일부가 민주자유당을 탈당하여 통일국민당에 입당하는 등 기세를 올렸다.
그러나 투표 결과 '''천만 명'''의 당원을 가지고도 400만도 안되는 16.3%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김영삼, 김대중에 이어 3위에 그쳤다. 정주영은 울산에서도 현대 표가 거의 나오지 않은 것을 보고[2] 가히 당황했다고. 게다가 선거 며칠 앞두고 터진 초원복집 사건의 역풍을 맞아 보수층이 전부 김영삼으로 결집하는 바람에 현대 일가(임직원 + 가족)의 표만 받고 중도층 표만 받으면 이길거라고 생각했지만 그의 착각에 불과했던 것이다.
초원복집 사건이 최대 반향을 일으킨 부산광역시, 경상남도에서는 6~10%대 득표율을 올려 대패했고[3] 대구광역시, 경상북도, 강원도에서마저 김영삼에 이어 2위를 기록하는 데 그쳤다. 참고로 이 선거는 언론사와 전문업체의 과학적 여론조사가 없던 마지막 선거이기도 했다.[4][5]

3.3. 대선 후


대선 이후 정주영은 잠시 선거 조작을 주장했으나 김대중이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이에 동참하지 않아 물건너갔다.[6] 현대그룹 계열사들이 세무조사를 받고 대통령선거법 위반,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 위반 등의 혐의로 정주영에 대한 수사가 진행되자, 정주영은 1993년 2월 국회의원직을 사퇴하고 자신이 제공한 통일국민당 당사마저 폐쇄해 버렸다. 그 바람에 한동안 광화문 현대빌딩(현 현대해상빌딩) 앞에 천막을 치고 있었는데, 이 때문에 '''헌정사상 최초로 천막 당사를 차린 정당'''이라는 기록을 갖게 되었다.
이후 소속 국회의원들이 잇따라 탈당해 민주자유당에 입당하거나 정계 은퇴를 선언하면서 군소정당으로 전락하였으며, 잔류파는 1994년 박찬종신정치개혁당과 합당하여 신민당을 창당하였다가[7] 1995년 6월 1일에 김종필자유민주연합에 흡수되어 소멸되었다.

4. 이야깃거리



4.1. 원조 제3지대 정당


초기에는 경제 권력층에게 정치 권력까지 주는 게 맞느냐는 비판이 많았으나, "정치 자금을 한번에 '''100억원''' 낸 적도 있다"라고 폭로하면서 현대가 오히려 정경유착의 피해자라는 시선도 생기고 당시로는 굉장히 진보적이고 참신한 정책들, 비정치권 명망가들 영입으로 돌풍이 불기 시작했다.
국민당은 3당 합당 이후의 양당이자 계파 싸움이 치열하던 민자당민주당 사이에서 공천 탈락한 인사들을 대거 입당[8][9]시켜 反YS, 非DJ 정서가 컸던 TK 지역, 강원도, 캐스팅 보트 역할을 할 충청 지역 등을 파고드는데 성공했다.
또한 경제 정책은 뒷전이고 당파 싸움만 계속 일삼는다는 이미지의 민자당이 아닌 새로운 보수 정당을 원하는 일부 보수, 중도성향 및 부동층 유권자들에게도 인기가 있었으며, 특히 중산층 이상 부유층에게도 민자당 대신 대안이 되었다. 실제로 총선과 대선에서 강남3구를 비롯한 고가 아파트, 특히 40평대 이상 대형 평수 아파트가 위치한 부촌에서 높은 득표율을 올렸다. 특히 재벌출신이라 보기 힘들 정도로 파격적인 공약, 즉 재벌 해체라는 공약을 대표적으로 내세웠다.[10] 또한 3김에 신물나던 젊은 유권자 상당수의 지지를 얻었다.[11] 물론 민중당이나 신정당이 조직력에서나 화제성 면에서 크게 밀렸다는 점이 크게 작용한 것이지만 그럼에도 40대 이상 유권자층에서 지지율이 낮게 나왔던 것을 보면 무시할 수 없는 대목이다. 서울 부유층 지역 국민당에 몰표.
그리고 최불암[12], 강부자, 이주일 같은 인지도 높은 연예인들을 영입하기도 했다.

4.2. '현대' 정당


현대그룹의 막강한 자금력과 촘촘한 조직책을 이용하여 대선을 앞두고는 당원 '''천만명''' 이상을 달성 하는 등 의욕적으로 선거에 임했으며 특히 현대차, 현대중공업 공장이 있는 울산 동구 일대를 비롯, 당시 현대전자 공장이 있던 이천시 일부에서는 사원들의 위장 전입을 시킨 의혹이 터지기도 했다.[13] 현대 계열사 임직원들을 대거 동원하여 유권자들에게 금품 제공 및 당원 가입을 유도한 사례는 매우 흔하게 나왔으며 심지어 초원복집 사건 당시 녹취록에서도 나왔다. 그만큼 집권 여당에게도 정주영과 국민당이 나름대로 위협적인 존재였다는 반증이었을 정도. 당초 정주영의 정계 진출에 회의적 시각을 보내던 많은 현대그룹 임원들도 총선의 성공 뒤에는 나중에는 적극적으로 동참하였다.

4.3. 의외의 정책들


재벌 회장 치고는 놀라운 공세적인 통일 정책[14]과 반값 아파트 등의 파격적인 정책, 여성표 획득을 위한 여성 정책을 동시에 강조하고 있었다.
아래는 당시 통일국민당이 내건 정책이다.
시사저널이 주최한 대통령후보 초청 토론회에서 정주영 회장이 국가보안법 폐지 공약에 대한 질문을 받고서는 "현 헌법에 사상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는만큼 종북 행위를 하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 공산당도 합법화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가 조중동과 민자당으로부터 매카시즘성 공격을 당하기도 했다.
이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무상급식은커녕 급식을 하는 학교가 적었던 시절로, 이때는 보수 진영은 물론이고 진보 진영에서조차도 무상급식 논의가 나오기 전이었다. 이 얘기가 나온 지 6년 뒤인 국민의 정부 시절부터 급식이 전면 실시됐다. 또한, 학교 급식에는 국내 농축수산물을 반드시 써야한다라는 논의 정도가 나왔다. 그만큼 시대를 앞서나갔던 기발한 공약이었던 것. 시간 차는 있지만 영국 제외한 서유럽은 20세기 중후반에 이미 교육과 의료는 절대평등한 공공재여야만 한다는 사상이 퍼져 진작에 했었지만 유럽도 개념이 완전히 잡히기 전이었다. 참고로 '무상급식'은 '베푼다'는 성격이 강하지만 '무료급식'은 당연한 '권리'라는 성격을 지닌다.
당수가 한국 재벌의 아이콘인 정주영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파격 그 자체였다.
  • 여성부 설립 및 여성할당제 실시
  • 금연 공약
당시는 서유럽이나 북유럽의 선진국 국민들도 일반인이건 엘리트건 레스토랑에 가면 스테이크 먹고 나서 옆에 재떨이 놓고 실내에서 담배 피우면서 대화하던 시기다. 90년대 중반부터 EC 협의로 실내금연 개념이 퍼져나갔고, 한국은 2000년대 중반부터야 퍼져나갔다.
일부 공약들은 십여 년 후의 진보정당보다도 훨씬 공세적이고 파격적이다. 그래서 2004년 여름 전당대회에서 NL주사파들이 민주노동당을 장악하고 나서 연방제 통일 같은 뻘짓에만 매달리자 당내외에서 재벌 회장보다도 못한 '''무늬만 진보 정당'''이라는 비아냥이 속출했다.
그러나 당의 강령과 정책을 보면 알겠지만 강령에서는 민자당에서는 복지경제의 실현을 추구했고 민주당은 자유경제 체제를 보장하지만 부의 공정한 분배와 중소기업 우선발전을 통한 정의로운 경제질서 확립을 추구한 것에 비해서 대놓고 자유시장경제를 명시한 점이나 경제정책에서는 더욱 노골적으로 시장경제에 대해서 정부관여를 최소화했다는 점으로 봤을 때 대기업 총수 출신으로서 경제분야에서는 명확하게 보수적이었다는 점을 알 수가 있다.

5. 의의


1990년 3당 합당으로 재편된 한국 정치는 보수적인 영남민주자유당과 그 후신, 개혁적인 호남민주당계 정당과 그 후신의 대결구도로 펼쳐지는데 그 사이의 제3(보수, 충청)정당으로서 이전의 민주공화당 - 한국국민당 - 신민주공화당자유민주연합 - (국민중심당) - 자유선진당 사이의 맥을 잇는 공화계 정당이라고 볼 수 있다. 또 그의 아들인 정몽준국민통합21도 그 후신이라고 볼 수도 있다. [15]
다만 통일국민당이 얻은 지역구 24/237석 가운데 충청도에서 얻은 것이 6석이라는 점[16]에서 충청 정당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하지만 호남과 부산, 대전에서 한 석도 얻지 못했고 서울, 경기, 영남에서의 지지가 저조했다는 점을 볼 때 그나마 표를 받은 쪽이 충청, 강원인 것도 사실이다.[17] 그래서 상대적으로 정주영의 지지 기반은 강원도였으나, 역시 1위에는 실패했다. 또 부산 지역에서는 비DJ-민주화 세력들이 다수 합류했다가 모두 낙선하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괜히 통일국민당이 관권 선거와 지역 구도를 무너뜨리려고 폭로했다가 역관광을 당했던[18] '''우리가 남이가''' 폭로 사건(초원복집 사건)으로 유명하다. 이 당의 존재 의의는 이 마법의 언어를 발굴한(?) 것에 있다고 봐야 할지도.(...)

6. 역대 총재




7. 역대 선거결과


  •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총선거 31/299 17.4%
- 역대 지역 기반이 없는 신생 정당으로서는 가장 큰 성공을 거둔 정당이다.[19]
  • 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 정주영 16.3% 낙선

8. 여담


  •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로 정당이 직접 나서서 스트립(...)를 개최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1992년 11월 28일 충청남도 대천시(현 보령시)에서 열린 전당대회 때, 정주영의 대선 지지 연설을 하려던 김용환 의원이 나오기 전 유흥업소 여직원을 동원하여 스트립 댄스를 보여주다가, 특정 부위를 남겨 놓고 벗으려 할 때 유세를 듣던 청중이 그것을 제지하였다.(...) 물론, 통일국민당 측은 선거법 위반으로 처벌을 받았다.

9. 관련 문서





[1] 지방 공장이나 건설 현장에 정주영이 순시 차 방문하면 직원들은 '''"호랑이가 떴다!"'''며 긴장했다고 한다.[2] 울산시 동구에서는 46%를 얻어 1위였으나, 그 외 지역에서는 모두 김영삼에 뒤진 2위였다. 울산 시가지만을 기준으로 하면 약 30%, 울산군(현 울주군)을 포함하면 약 28%를 득표.[3] 부산에서는 박찬종 후보에게도 밀려 4위를 기록했다.[4] 하지만 당시에도 여론조사 개념이 없던 건 아니라서 한국갤럽에서 13대 대선 예측 결과(다만 당시엔 예측조사 공표 자체가 선거법 위반인 관계로 발표는 일본 방송을 통해서 했다. 현재와 같이 예측조사를 발표하기 시작한 건 1995년 지방선거 때부터의 일) 1988년 총선을 앞두고 여러 언론사에서 공동으로 여론조사를 발표하기도 했으며 그 외에도 전화 조사를 통해 여론조사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민주화된 지 얼마 안되었던 시기이다 보니 한계점은 있었다.[5] 물론 안기부와 집권당은 1987년 대통령 선거부터 해외 전문가들을 불러 내부 여론조사를 하고 있었다. 이때 이들로부터 조사기법을 전수받아 초보적 수준에서 독자적인 여론조사를 시작한 게 현재 새누리당 산하 여의도 연구원의 여론조사팀이다.[6] 당시 김대중의 비서였던 장성민의 회고로는 선거 바로 다음날 새벽에 정주영이 직접 김대중의 동교동 집으로 찾아와서 선거 조작을 주장하면서 선거 무효화 투쟁을 제안했다고 한다. 하지만 구체적인 물증은 없다는 정주영의 이야기에 김대중은 바로 거절하고 정계은퇴 결심을 굳혔다고.[7] 이 과정에서 '''각목 난투극'''이 벌어지는 촌극을 빚기도 했다.[8] YS가 당권을 잡은 후 벌어진 선거여서 YS의 민주계 반대 세력인 민정계, 공화계 사람들이 대거 입당했다.[9] 김한길 같은 인물은 원래 민주당 인사였지만 공천 탈락 후 이곳에 입당해 선거에 출마했다가 떨어진 전적이 있다. 김동길의 경우도 197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진보, 개혁인사였지만 정주영과 손을 잡은 이후에는 성향이 바뀐다.[10] 사실 재벌 해체라고 해도 본격적인 부의 재분배나 경제민주화같은 내용이 아니었던 걸 감안하면 정책들이 중산층이나 부유층의 이익과 상충된다고 보긴 힘들 것이다.[11] 주로 구 통일민주당 성향의 유권자 상당수. 김영삼이 민정당, 공화당과 연합한 것에 실망했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김대중을 뽑기에는 1987년 대선의 기억 때문에 반감이 남아 있던 유권자층이었다.[12] 최영한이라는 본명으로 출마[13] 그밖에 현대 사원이 몰려사는 곳도 통일국민당 지지세가 높았다. 현대 본사 및 정주영 회장의 자택이 있던 서울 종로구 일대, 사원아파트와 현대 임원들이 모여 사는 지역인 압구정동, 개포동, 광장동 등에서도 압도적인 지지를 보내줬다.[14] 물론 1989년에 북한에 방북했던 일이나 1990년대말 금강산 관광 사업, 소떼 방북 등의 대북사업을 펼친 걸 보면 전혀 놀라운 일은 아니다.[15] 참고로 정몽준은 13~17대 의원을 모두 울산광역시 동구(울산)에서 지냈는데, (18대 지역구는 서울 동작구) 14대 의원만 통일국민당으로 출마하고 다른 경우는 대부분 무소속이었다. (13대 때는 민주자유당 창당과 함께 입당, 14대 대선 이후 통일국민당이 와해되자 재입당한 뒤 신한국당 창당과 함께 탈당했다. 17대 때 자신이 창당한 국민통합21의 의원이었고 말기에 한나라당에 입당했으며 지금의 새누리당 의원.) 반면 현대건설의 어느 사장은 이후 "경제와 정치는 다르다"면서 국민당을 뿌리치고 민자당으로 출마해서 당선이 되었고 이후 서울시장이 되더니... 그렇다. 이후의 가카시다.[16] 충남 4/14석, 충북 2/9석 - 참고로 경기도 5/31석, 강원 4/14석[17] 물론 보수층이나 영남 지역 등에서는 2위 정당이었다.[18] 영남과 전국 보수층의 YS 지지 표가 결집했다.[19] 열린우리당을 들 수도 있겠으나 제3세력이었던 국민당과 달리 여당이었고 탄핵 사태로 인해 후광을 받은 점도 고려해야 한다. 또한 20대 총선에서 국민의당이 38석, 26.7%(제2당)으로 앞섰으나 국민당과 달리 지역 기반이 확고했다는 차이가 있으며, 국민의 당의 전신 격인 안철수의 진심캠프나 새정치연합을 고려하면 완전한 신생 정당이라고 보기는 어렵다는 비판도 가능하다. 그리고 같은 20대 총선에서 123석, 25.5%(지역구 1당, 비례 제3당)을 얻은 더불어민주당은 지역 기반이 없긴 하지만(사실 지역 기반을 국민의당에게 뺏겼다.) 신생 정당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