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논란

 




1. 정치에 대한 평가
1.1. 성완종 사면
1.2. 코드인사 논란
1.2.1. 옹호론
1.2.2. 부정론
1.3. 정부조직 비대화
1.3.1. 긍정론
1.3.2. 부정론
1.4. 극단적인 대결정치
1.4.1. 긍정론
1.4.2. 부정론
1.5. 지역주의 타파를 위한 노력
1.5.1. 긍정론
1.5.2. 부정론
2. 사회·문화에 대한 평가
2.2. 국민참여재판제도 도입
2.4. 인권 개선
2.8. 권위주의 타파
2.8.1. 긍정론
2.8.2. 부정론
2.9.1. 부정론
2.9.2. 긍정론
2.10. 언론과의 갈등
2.10.1. 기자실 통폐합
2.11. 인터넷 실명제 도입 논란
2.12. 황우석 사건 태도 논란
3. 안보·국방에 대한 평가
3.1. NLL협상과 공동어로수역 논란
3.2. 군복무 단축 관련 행보
3.3. 전문하사 제도 도입
3.4. 해외 파병
4. 경제에 대한 평가
4.1. 국민소득 2만달러 달성
4.2. 부동산 정책
4.4. 법정계량단위 개정
5. 개인적 논란


1. 정치에 대한 평가



1.1. 성완종 사면


참여정부는 2005년, 2007년 '''2번에''' 걸쳐 성완종 경남기업 회장을 특별사면 시켜주었는데, 한 정부에서 비리 기업인을 2번에 걸쳐 사면시켜준 일은 이례적이라서 논란이 일었다. 게다가 성완종은 사면받은 이후에도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사기·횡령과 자본시장법 위반 혐의로 영장 실질심사를 앞두고 자살하여, 사회에 큰 충격과 파문을 주었다. 자세한 내용은 경남기업 회장 자살 사건 참조.
이에 노무현 측은 1차는 김종필, 2차는 이명박 측의 요청에 따른 것이라고 주장하나 이명박 측은 이를 부인했다. 하지만 '''어쨌든간에 성완종을 사면시켜준 당사자는 일단 노무현이다.''' 누가 부탁한다고 따를 의무는 없는 것이며 부탁에 응했다고 그 책임이 지워지는건 아니다. 오히려 어째서 이명박 측의 요청에 순순히 응했을까 하는 의구심만 일으킬 뿐이다. 기사 이를 두고 2017년 대선후보 TV토론에서 홍준표 자유한국당 후보는 이 사건을 두고 “문 후보는 왜 성완종을 두 번이나 사면을 해줬느냐” “맨입으로 해줬나”고 공격을 했다. 이에 대해 문재인 후보는 “그만하자”고 대응했다.
조선일보 보도에 따르면 "노무현 정부 때 성완종 전 회장에 대해 두 차례 특별 사면이 이뤄진 것은 맞으나, 그 배경에 대해선 자민련·한나라당·이명박 당시 인수위 등의 요청에 따라 사면 대상에 대한 ‘여야 균형’을 이룬 것이란 설명이 일반적으로 많다."고 한다. 성 전 회장이 사면 직후 이명박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민간자문위원으로 합류했던 사실도 이를 어느 정도 뒷받침한다고 볼 수도 있다.(#)

1.2. 코드인사 논란



1.2.1. 옹호론


우선, 코드 인사, 부실한 인사 검증, 낙하산 및 보은인사 문제는 서로 다른 문제이기 때문에 분리해서 볼 필요가 있다.
코드 인사 문제로 논의를 집중해 보자면, 우선 함께 일할 사람들을 가치관이나 성향이 맞는 사람들로 선택하는 것은 어느 정권이든 피할 수 없다. 예를 들어 국정철학을 공유하는 인사를 임명했다고 하면 큰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이를 코드인사라고 부르면 잘못한 일처럼 보인다. [1] 나쁜 코드인사와 좋은 코드인사를 구분하기 어려움을 방증하는 동아일보 기사 그렇기 때문에 코드인사라는 비판은 일관성을 갖기가 힘든 측면이 있다. 보수언론들이 정권에 따라 코드 인사 비판의 강도가 다름을 지적하는 미디어오늘 기사
그럼에도 코드 인사가 비판을 받는 경우는
1) 코드 자체가 보편적인 사람들의 코드와 너무 동떨어져 있는 경우
2) 지나치게 같은 코드로 구성된 사람들로만 일을 해서 여러 관점과 의견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
3) 코드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어떤 사람들을 적대시하거나 불이익을 주는 경우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을 것이다.
우선 1번의 대한 반론은 사람마다 판단이 다를 수밖에 없으므로 생략해도 될 것이다.
2번의 경우에 대해서, 참여정권이 다른 정권보다 심했는지에 대한 근거는 부족하다. 오히려 노무현은 이후의 보수 정권 대통령들과 비교하여 자기와 다른 코드의 사람들의 의견에 관심을 갖고 경청하려고 한 편이라는 평가도 존재한다. 그 사례로서 노무현은 특별한 인연도 없었고 코드가 맞는 편이라고도 볼 수 없었던 김우식 전 연세대총장에게 1년 6개월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대통령을 수행하는 비서실장직을 맡긴 바가 있다. 김 전 총장의 인터뷰에 따르면 노 대통령은 김 전 총장 자신을 포함해서 자기와 코드가 다른 관점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자 노력했고 뜻에 맡지 않는 의견이라고 해도 묵살하지 않았다.[2] 국무총리 고건이나 외교부장관 반기문의 경우도 코드인사라고 보긴 어려울 것이다. 또한 위원회 등을 구성함에 있어서도 반대 의견을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을 배제하지 않고 참여시키는 경향이 이후 정권보다 더 강했고, 오히려 진보세력은 노무현이 지나치게 보수 인사를 포용하려고 한다는 것을 비판하기도 했다. 교육정책자문위원회 구성 사례 노무현의 보수인사 임용에 대해 비판하는 프레시안 기사
3번의 경우 노무현 전 대통령이 생각이나 가치관에 차이가 있다고 해서 그것만 갖고 누군가를 적대시하거나 불이익을 준 사례들은 찾기 어렵다. 생각이 다른 부분을 에둘러 말하지 않고 분명하게 드러내고 비판하는 것과, 생각이 다르다고 상대방의 인격 전체를 부정적으로 평가하거나 불이익을 주려고 하는 것은 서로 구분이 되어야 한다.

1.2.2. 부정론


노무현의 인사 채택권, 또는 당시 빗대어 불리우던 코드인사, 또는 보은인사로, 흔히 말해 참여정부 속에 그들만의 참여라는 대표적인 표방어이다.
코드인사를 둘러싼 의견 대립은 세 가지이다:
  • 코드인사 자체의 정당성에 대한 찬반
  • 대통령 인사권 행사방식
  • 코드 인사의 효율성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는 불가능하지만 장단점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코드인사에 의존할 경우, 같은 생각을 공유하고 호흡을 맞춰 국정을 효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다는 장점이다. 그러나 반면으로, 하나의 코드에 맞출 경우, 편향된 시각이 팽배해지고, 객관적인 판단이 어려워진다는 것. 다양한 의견을 수렴할 필요성이 중요해지는 상황에 그런 인물이 요원해진다는 비판이다. 코드인사는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것이나, 노무현은 지나치게 코드인사를 고집함으로 인해 국정운영의 효율성을 크게 저해했을 뿐만 아니라, 인사관리 결정에 대한 질문들을 과격하고 의혹을 증폭시킬 수 있는 답변으로 반응해 국민의 신뢰도 악화시켰다. 심지어 인사정책에 가장 큰 수혜자였던 고건 전 총리는 이런 발언을 남겼다:

"정책을 결정해 수행하는 과정에서 국민들과의 의사소통이 부족했고 협조를 얻으려는 노력이 부족했다. 참여정부의 독선과 국민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무능, 두가지에 원인이 있는 것 같다."

"참여정부 초기에는 인사시스템이 잘 작동됐다고 생각한다. 근래에 와서 시스템 인사가 안 되는 것 같다"

'-지지율 급락 원인에 대해, 2006년 12월 27일 <한국경제신문> 인터뷰에서'

이를 가장 상징적으로 보이던 것이 386세대 중심의 비서들을 배치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취임 초부터 수없이 많은 구조개편과 재조정으로 유례없던 국정운영 시스템으로 선보였고, 행정부처의 통제라는 비서실 기능을 정책조정이라 바꿔 부르던 게 그것. 정책실장과 수석 임명, 국가안보보좌관과 국가안전보장회의 사무처를 설치하여 외교-안보-국방과 관련된 분야를 청와대에 보완하였다. 비서실 강화에도 불구하고 각각 업무추진에 불협화음을 일으켰으며, 새로이 설치된 정책실은 불필요한 위원회와 기능확대에도 불구, 국가정책의 우선순위와 방향을 선보이는 데 실패하였다.더 많은 능력과 권력을 선발된 인사들에게 주어졌는데도, 그 능력을 최대한 활용하지 못하였다는 의견.
청와대와 총리실은 그 특성 ‘코드’에 부합되는 대거 채워지곤 했다. 특히 노 대통령과 직•간접적으로 연관돼 있는 영남출신 인사들이 중요 요직을 비롯, 상당 부분을 독차지했다는 의견. 자세한 사항은 일요시사 495호 참조.
한편 노무현은 취임 전 행정부 고위직 임명과정에서 인사청문회를 확대⋅개최하여 국무총리를 비롯한 국정원장, 검찰총장, 국세청장, 경찰청장 등을 국회의 인사청문회 개최후 임명하였다. 그러나 국회 인사청문회는 국정원장, 검찰총장 등에 대한 대통령의 임명동의를 거부할 수 있는 권한이 없어 형식적인 청문회로 전락하고 말았다는 사례가 존재한다. [3]
정부의 인사시스템 논란은 2006년 초 이기준 교육부총리 인선과정에서 직격탄을 맞았다. 인사검증의 부실논란이 큰 화제가 되었기 때문. 이후 이헌재 경제부총리의 위장전입 사실이 드러나 또다시 논란에 불을 붙혔다. 하지만 정작 정부는 ‘적재적소‘ 원칙보다, 차기 선거를 대비한다는 측면을 고려한다며, 낙하산 등과 같은 점철된 인사를 단행하였으며, 결국 이철 전 의원과 이해성 전 비서관을 각각 철도공사와 조폐공사 사장에 임명하면서 비난여론이 한층 가열되었다. 이런 야기된 문제들은 현대 대한민국에서 빈번하게 일어나는 사례로, 비전문가로 판단되어지는 대통령의 측근들과 여권인사들이 내각과 정부 산하 공기업, 유관단체 기관장 등 핵심요직에 임명됨으로써 ‘경영효율성’이 저하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 결과적으로 국민세금을 불필요한 부분에 추가적으로 소비될 수밖에 없다는 우려가 보였다. 집권 3년째를 맞으면서 알려진 숫자만도 1백여 명에 이를 정도라고 알려질 정도로 인사시스템의 난맥상에 대한 비판이 주류였다. 청와대도 더 이상 인사와 관련, 정치적 인선이었음을 부정하지 않았으나 지역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고육책이라며 변명으로 일관했다.
뉴스메이커가 노무현 정부의 인사 전반을 둘러본 결과, 참여정부가 ''과거에 비해 '낙하산 인사'는 없다'''라고 강조를 무색하게 만들 만큼 많다고 한다. [4]
옹호하는 사람들은 말한다. 기득권 세력 등과 같은 내부의 적이 숱한 비난과 여론 조성으로 대통령을 끌어내리려고 애썼다는 것.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확실하진 않지만 코드 인사에 대한 국민적 반감도 만만치 않았다. 대표적인 사건이 전효숙 전 헌법재판소장 사퇴 사유. 대통령의 인사권 행사의 절차상 문제도 있었고, 전효숙 전재판관의 임기도중 사퇴가 헌재의 독립성과 권위를 침해하는 것이라는 큰 파장을 일으켰고, 또 국회 임명동의절차에 대한 야당의 물리적 방해 또한 그에 못지않은 중대한 문제였음에도 불구하고 다수의 국민이 전효숙 전재판관에 대한 헌재소장 지명철회를 지지한 것은 코드 인사에 대한 불신 내지 반감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옛날부터 흔히 높으신 분들이 끼리끼리 해먹는데 이골이 난 한국인은 민주화가 진전된 이후 특정 세력에 의한 권력 독점은 용납하지 않으며, 이에 대한 경계심은 무척 크다. 노무현과 그의 세력이 말하길, 이는 효율적인 정부를 위함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설령 그들이 진정으로 그런 마음가짐으로 인사를 선별했다한들, 제3자가 보기엔 권력 집중의 전초기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노무현은 비판과 우려를 수용하고 국민들을 안심시켜야 할 의무가 있었으나, 그에 대한 소통이 많이 부족했을 뿐더러, 국가의 수장의 품위와 맞지 않는 과도한 발언들로 인해 비판이 거세진 것이었다. 고대신문 장영수 법학과 교수 칼럼 인용
이른바 "회전문 인사"도 문제였다. 각종 논란과 구설수로 해임된 공직자를 직위만 해제하고 다른 보직에 돌려막기처럼 앉히는 문제가 두드러졌는데, 청와대는 "순환보직만큼 좋은 인사방식 어디 있냐?"며 두둔하기에 급급했다. 실례로 2004년에 임명된 이백만 국정홍보처 차장은 국정브리핑에 "박정희는 고교 교장, 노무현은 대학 총장"이라는 낯 간지러운 칼럼을 올려 이른바 盧비어천가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내며 국민들의 조롱거리가 됐다. 그러다가 2006년 2월 청와대 홍보수석[5]으로 승진했으나 여기서도 야당과 언론에 대한 비판과 훈수를 두며 빈축을 사더니 유진룡 문화관광부 차관에게 인사청탁[6]을 하는 등 의혹이 불거지며 참여정부의 지지율을 깎아먹는데 큰 역할을 한다. 급기야는 2006년 11월 "지금 집 사면 낭패"라는 발언으로 가뜩이나 치솟던 집값에 스트레스를 받던 민심에 기름을 부었는데, 막상 본인은 강남의 아파트 2채를 사고 팔아 20억의 시세차익을 올렸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참여정부의 도덕성은 완전히 시궁창으로 둔갑하고 만다. 이 대형사고로 결국 사퇴하긴 했으나 별다른 문책은 없었는데 2007년 3월에는 다시 청와대 홍보특보로 내정되기에 이른다(...) 당시 한나라당을 비롯한 야당은 아예 비판 자체를 포기했고 집권 여당인 열린우리당도 노무현 대통령을 슬슬 버리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천정배 의원은 "침몰하는 타이타닉에서 뛰어내려야 한다"는 발언까지 했다.[7] 이백만은 이후 2012년 19대 총선에서 통합진보당에 입당해 서울 도봉 갑 지역구 후보로 출마하려 했으나 야권후보 단일화 경선에서 패해 중도 하차했고 이후 노무현 시민학교 교장을 지냈다.

1.3. 정부조직 비대화



1.3.1. 긍정론


이 부분은 정치적 성향에 따라 긍정과 부정이 달라질 수 있다. 보수 진영에서는 작은 정부와 민영화를 지향하지만, 진보 진영에서는 정부의 역할과 공공역할의 확대를 주장한다. 공무원 수 증가 자체가 문제라기보다는 공무원들이 그만큼의 역할을 하고 있고 정부가 효과적으로 운영되는가가 더 중요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 다른 조건이 같을 때 정부규모가 클수록, 정부권한이 많을수록 부패규모 역시 커진다. 모든 공무원이 청백리일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에 아무리 처벌의 강도를 높여도[8] 규모와 부패는 비례할 수밖에 없다.

1.3.2. 부정론


노무현의 인사정책은 결론적으로, ▲노 정부 출범 이후 공무원 수가 2만5000여 명 증가했으며 장·차관직도 20여 개 늘었다. ▲이에 따라 지난 1년간 정부의 인건비 예산이 1조5000억 원 늘었다.▲국민의 세금 부담은 매년 증가하고 있다. ▲반면 그 결과물인 정부 행정 효율성은 2005년에 비해 16단계 추락했다(스위스 기관 조사). ▲노 정부 출범 이후 정부 산하기관에 정치인 출신 134명, 관료 출신 148명이 임용됐다.[9]
정부살림의 방대로 인해 세금부담을 국민에게 더욱 지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 2002년 말 공무원수는 56만 명의 규모였으나 2004년에는 2만 7000명 정도 증가로, 김대중 정부가 5년간 조정을 통해 줄인 인원의 8배를 2년 만에 늘려놓았다. 당연히 인건비는 늘었고, 2005년 세출내역에 따르면 대략 16조에서 2006년엔 18조로, 약 9.2% 증가했다. 공무원 수의 증가는 인건비-사업비 증가를 불러, 결국적으로 국민의 세금증가를 불러일으킨다. 공무원 일자리는 민간에 비해 파생수요 효과가 낮아 경제적으로 고용 감소와 경제 위축을 초래한다. 더구나 정부 구조조정을 중단함으로, 민영화가 중단이 되었다. 출저[10] 국가경영연구원에 따른 민영화 사례의 요인들을 나열했다.

1.4. 극단적인 대결정치



1.4.1. 긍정론


노무현 정부가 그 이전 또는 그 이후의 보수 정부에 비하여 더 대결적이었는가는 보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다를 수 있다. 예를 들어 야당이었던 당시 한나라당이 국민의 전폭적 지지를 받지 못하는 사학법 이슈를 갖고 장외투쟁을 할 때도 노무현 대통령은 야당에게 길을 틔워주기 위해 여당 원내대표에게 양보를 권고한 사례가 있다.[11] 또한 생각을 그대로 솔직하게 드러내는 스타일이 많은 논란과 갈등을 일으킨 점은 있으나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해 보려는 노력도 많이 있었다. 특히 사회적 갈등이 일어나는 사안에 대하여 기득권을 쥐고 있는 상대에 대해서는 권력이나 여론을 등에 업고 힘으로 해결하기보다는 합의점을 찾고자 하는 노력을 기울이는 측면이 있었다 그리고 당시 기득권층과 보수언론의 격렬한 공격이 갈등을 더 키운 측면이 있다. 예를 들어 검찰조직의 반발을 일으켰던 검찰 개혁의 예처럼 기득권에 위협이 되는 개혁은 갈등과 대립의 원인이 되며, 갈등의 심화 자체가 실패라고 할 수는 없다. 오바마 대통령의 의료보험 개혁이 공화당과 그 지지자들의 반발을 일으키고 공산주의자니 무슬림이니 하고 비판을 받는다고 해서 그것이 오바마 대통령의 결함이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는 것과 같다. 그러한 갈등을 풀어나가는 과정에 있어서도 노무현 정권은 평검사와의 대화를 추진했던 것처럼 대화와 토론과 타협의 방식을 취하고자 노력했다. 그럼에도 보수언론은 자신들의 이념이나 관점과 어긋나는 부분에 대하여 맹공격을 퍼부었고 대립과 갈등의 리더십이라는 이미지를 강화했다.

1.4.2. 부정론


청와대와 야당, 또는 여야 간에 갈등과 대립이 심각하였다. 물론 집권여당과 야당이 통합과 상생의 정치를 하지 못한 것은 비단 노무현 정부 시기만의 문제점은 아니다. 하지만 노무현 정부 시기부터 정치적 갈등이 심화되는 국면에 접어들게 된다. 적어도 이전 정부인 김대중 정부에서는 열린우리당보다 훨씬 적은 의석을 갖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야당을 자극하거나 지나치게 공격하는 모습은 자제해왔다. 특히 대통령 개인이 야권 전체를 향해서 날선 공격과 비난을 하는 일은 매우 드물었다. 오히려 김대중 정부에서는 구여권층 인사들을 중용하고 또 보수정당의 일원인 자민련을 구슬러서 정국을 이끌어가고자 하였다. 민주주의 정치가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대립하는 여러 사안들과 이해관계의 충돌들에 대해서 갈등을 조정하면서 합의의 정치를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할 때, 노무현 정부는 사회대통합과 합의의 정치의 측면에서 대단히 실패하고 말았다.
또한 정몽헌, 안상영, 박태영, 남상국 등 노무현 정권 때 벌어진 수사로 자살한 사람이 한 둘이 아니었으며, 노무현의 대결 정치는 탄핵으로 까지 번지며 노무현은 '적을 많이 만드는 스타일'이라는 평가까지 나오게 하였다.

1.5. 지역주의 타파를 위한 노력



1.5.1. 긍정론


3김시대가 이룩해놓은 지역주의 타파를 위해 열심히 뛰었다. 3당 합당에 반대하지 않았으면 여당 소속으로 출마해 의원직 유지가 훨씬 쉬웠을 것이다. 하지만 3당 합당에 반대한 후 야당 소속으로 떨어질 것이 뻔한 부산에 여러 번 출마해 줄줄이 낙선했다. 특히, 종로 재보선에서 당선됐지만 다시 부산으로 가는 모습에 ''''바보''''라는 별명이 생겼을 정도니.
하지만 그의 노력은 PK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만큼은 어느정도 통했다. 16대 대선 때는 15대 대선김대중 후보가 받은 득표율의 2배 정도를 받았으며 (경남 27%, 부산 30%, 울산 30%), 18대 대선 땐 그의 후계자라 할 수 있는 문재인 후보가 대구경북에서는 고작 10%대 후반을 받은 데 비하여 부울경에서 무려 36-40%를 받았다. 마침내 19대 대선때는 문재인 후보가 홍준표 후보를 앞섰다.
물론 이것을 가지고 "노무현이 완전히 지역주의를 없앴다"는 평가를 내릴 수는 없다. 아직도 부울경 지역은 보수성향의 우세지역으로 민주 및 진보 세력에겐 여전히 출마 시 상당한 험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인 스스로 지역주의를 없애겠다고 끊임없이 도전한 노력만큼은 긍정적으로 평가 할만 하다. 또한 2000년대와 2010년대로 넘어오면서 낙동강 벨트 등의 지역에서 여야의 접전 양상이 생기는 점등은 사실 노무현의 노력에서부터 출발한 것임이 맞는다.

1.5.2. 부정론


노무현이 선거에 참여한 2000년 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그 당시 민주당계가 주로 호남에서 지지층이 많았고 PK에서는 3당 합당 이후 민주당계가 지지를 극단적으로 얻기힘들었던 곳에서 2000년 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재선 가능성이 높았던 서울 종로구가 아닌 민주당에 전신인 새천년민주당으로 민주당계열로써 낙선될 가능성이 매우 높은 부산을 지역주의 타파라는 명분으로 내려가 선거운동을 한 등 이러한 노력등이 노무현 자신의 고향인 부울경 지방에서 노력하여 지지를 얻었다는 이야기지 지역주의 타파를 위해 노력했으나 지역주의를 완전히 타파했다고 보기는 힘들다.[12] 노무현대통령이 2002년 16대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되어 2003년 취임한 이후 2004년 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열린우리당이 과반수에 당선이 됐으며, 영남권에선 한나라당에게 패했지만, 그래도 부산경남권에서 30%~40%를 얻어서 선전했고[13], 심지어 김해시 갑/을,사하구 을,울산 울주군에서는 당선하기도 했다.[14] 하지만 노무현 임기내내 치뤄진 선거에서 완전히 지역구도가 타파되는 것은 실패했고, 2006년 호남에서는 오히려 노무현이 지지율이 떨어져 2006년 5월 31일 도지사 시장 군수를 뽑는 제4회 지방선거에서 광주, 전남에서 민주당계열인 새천년민주당에 후신인 민주당에게 열린우리당이 패배한다. 이 지방선거는 호남을 포함한 전국에서 당시 집권정당인 열린우리당은 완전히 참패하였다.[15][16] 그가 지역타파를 위해 노력했다고는 하지만 실제로 대통령이 되어서는 지역주의 타파를 위해 개혁을 했다고 할만한것이없다. 다만 지역주의 타파는 법이나 제도적인것으로 하는게 아니라 문화적으로 역사적으로 사회적으로 하는것이라는 면에서는 노력했다고 볼 수있으며 문화적인 요소는 학문적인 정의로써도 실제적으로도 몇달안에 3~4년만에 빠르게 바뀌는것이 아닌데다 실제로 노력한것도 사실이다.[17] 사회적인 좋지않은 관행 적폐같은 이런 요소는 법에 엄밀함에따라 법이 엄밀하다면 없어질것이고 법이 엄밀하지 못하다면 사안에 따라 다르지만[18] 남아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호남권에서 지지세가 약해졌던 건 사실이기에, 만약 19대 총선/18대 대선/20대 총선에서의 부산경남권 선전이 노무현 덕분이라면, 20대 총선 때의 국민의당의 출연, 제4회 전국지방선거에서의 광주/전남 상실도 노무현 탓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2. 사회·문화에 대한 평가



2.1. 개인회생제도 도입


개인회생제도란 파산에 직면한 봉급생활자나 소규모 자영업자, 전문직 종사자 등 꾸준한 수입이 있는 사람들이 '''5년동안 빚을 성실히 갚으면 나머지 빚을 탕감'''받는 제도이며 2004년 9월부터 시행되었다. 곧, 이 제도는 파산선고로 인해 개인들이 직장에서 퇴출당하는 등의 사회적 및 경제적 불이익을 당하지 않도록 해주는 것이다. 또한 개인회생제도는 협약된 금융기관이 아니거나 사채는 조정 대상이 되지 않는 개인워크아웃(신용회복)과 달리 모든 채무에 대해 '''포괄적으로 구제'''한다는 차이점이 있고 전체채무도 3억 원[19]으로 제한된 개인워크아웃에 비해 사채 사업대출 등 '''채무종류와 무관한 구제'''를 해준다.
설명에서 보듯이 이 제도는 '''경제적 위기를 맞은 이들에게 회생할 기회를 준다'''는 점, 이 외에도 개인파산선고를 낮추어서 '''국가경제에 이득이 된다'''는 점이나 '''추심 및 압류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의 해방''', '''개인파산과 달리 재산을 소유가능하다'''는 등의 장점들이 있다.
그러나 나머지 빚이 탕감되기에 '''채무자의 도덕적 해이가 사회에 만연할 지도 모른다'''는 가능성, '''신용불량자에게 관대한 사회적 분위기가 조장'''될 수 있다는 위험성, '''개인회생을 신청하면 신용대출, 신용카드를 사용할 수 없다는 점''' 등의 단점들도 있다.
개인회생제도에 관한 참고기사

2.2. 국민참여재판제도 도입


노무현은 임기 당시에 국민들이 예전부터 사법불신이 심함을 알고 있었고 이러한 불신을 해소할 방법을 모색하였다. 이를 위해서 '''국민들이 재판과정에 감시자로 참여하는 방법을 고안'''해냈으며, 이것이 바로 국민참여재판제도이다. 이 제도는 노무현 임기 말기, 구체적으로 말하면 2008년 1월 1일부터 이 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우리나라에 아직 제도가 완전히 정착되지 않았다는것과는 별개로, 배심제 역시 문제점이 많기 때문에 역사가 오래된 미국에서도 논란이 많은 제도다.

2.3. 제주도 해군 기지 건설 논란


여기에 적기에는 너무 길기에 적지 않았다. 따라서 해당 항목을 참조하도록 하자.
참고로 이 논란을 이명박과 박근혜 탓으로만 돌리는 이들도 있는데 엄연히 '''노무현 정권 후반기인 2007년 5월에 확정된 사안'''[20]이고 같은 해 6월 노무현 정권이 강정마을을 해군기지 후보지로 확정했다. 그리고 이명박과 박근혜는 이 사안을 '''원안 그대로 추진'''한 것이다.

2.4. 인권 개선


노무현은 대통령 선거 공약을 통해 5대 차별의 해소를 역설한 바 있다. 5대 차별이란 여러 차별 가운데서 하루빨리 고쳐야할 것으로서 '''성별, 학벌, 장애, 비정규직,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차별을 가리킨다. 노무현 취임 이후 참여정부는 이를 12대 국정과제 중 하나인 국민통합과 양성평등의 구현 정책으로 실천하였다. 이 과정에서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차별은 외국인 및 이민자에 대한 차별로 확대되었고 저출산∙고령화 사회의 도래를 염두에 두어 연령에 대한 차별이 포함되어 2004년 6대 차별 시정[21]으로 구체화되었다. 노무현은 이를 위한 정책개발 기구로서 대통령 자문 빈부격차∙차별시정위원회[22]를 설치하고 차별시정기구를 일원화하는 데 주력하였다.
이 기구는 차별금지법과 장애인차별금지법과제정 추진에 큰 역할을 맡았다. 차별금지법은 빈부격차∙차별시정위원회를 중심으로 2006년 6월부터 제정 준비에 들어갔다. 나아가 2007년 6월에는 빈부격차∙차별시정위원회와 법무부∙노동부 등 관계부처를 아우르는 차별금지법 제정 추진기획단이 운영되었다. 2007년 7월에는 차별금지법 제정 추진 업무가 법무부로 이관되었다. 법무부는 차별금지법(안)에 대한 관계부처 협의를 거쳐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한 공청회를 개최한 후, 2007년 10월 2일‘차별금지법(안)’을 입법예고하였다. 차별금지법 제정 추진기획단은 국가인권위원회의 차별금지법 제정 권고안을 토대로 조정안을 마련하였다. 여러 법률 조항에 분산되어있는 차별금지 규정을 한데 모아 기본법으로 구성함은 물론 차별 금지와 처벌 및 시정 방법을 체계화하고 불합리한 차별로 인한 피해자에 대한 구제조치를 규정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차별 금지 사유의 하나인 ‘성적 지향’을 둘러싸고 종교계와 학부모단체 등에서 반발이 있었으며, 입법 과정 중 회기가 만료되어 폐기되었다. 장애인 차별금지법은 국회 보건복지위원회와 법제사법위원회를 거쳐 2007년 3월 6일 제265회 임시회 본회의에 상정된‘장애인차별금지법 상임위 대안’이 재석의원 197명 중 196명의 찬성(기권 1명)으로 통과됨으로써 제정되었다.
2006년 8월 빈부격차∙차별시정위원회와 장애인 관련 단체 및 정부부처로 구성된 장애인차별금지법 민관공동기획단의 설치로 본격적인 제정 작업에 들어갔고 2006년 12월 11일 국무조정실과 빈부격차∙차별시정위원회는 관계부처회의 개최를 통해 정부최종 2개 안이 마련되었다. 제1안은‘시정기구일원화-시정권고안’, 제2안은‘시정기구 일원화-시정권한 이원화안’이었다. 차별금지법 제정 작업이 지체되면서 가장 심한 고용상 차별을 당하고 있는 장애인의 문제를 시급히 해결해야 한다는 장애인 당사자의 목소리가 반영되어 장애인차별금지법을 별도로 제정하는 것으로 합의되었다. 장애인 차별금지법은 장애인에 대한 개인적∙의학적 모델의 기존 시각을 사회적 모델로 선진화하는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고 또한 법 제정 과정에서 장애인 관련단체를 비롯한 시민사회와 정부 간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는 협치의 모범적 선례를 남겼다는 점에서 높게 평가받는다. 이외에 차별시정기구 일원화로 국가인권위원회의 업무가 조정, 남녀차별 및 구제에 관한 법률폐지, 남녀차별개선위원회의 남녀차별 시정 업무가 국가인권위원회로 이전, 국가인권위원회법, 남녀고용평등법 개정 등이 긍정적으로 평가받았다.[23]
대표적인 인권 사각지대인 군대의 인권개선은 소잃고 외양간 고치는 식이었다. 최초의 사병출신 대통령이었지만 사병 봉급 인상과 군복무 기간 축소와 같은 이전 정권들이 해오던 수준의 개선에 머물러있다가 2005년에 논산 육군훈련소 인분 사건530GP 사건이 일어나고 나서야 대대적으로 병영부조리 개혁을 시작하였다. 하지만 탁상행정과 형식적인 병영문화 혁신의 상징인 웃음벨이 보여주듯이 한계가 있었고 이러한 비극은 다음 정부에서 다시 반복되게 된다. 군필이면서 노동운동에 참여한 인권변호사로써 집회시위 현장에서의 일어나는 과잉진압의 근본 원인을 모를리가 없었으나 점차 인원을 줄여 완전 폐지하고 직원 기동대를 창설하여 대신하게 하는 정책만을 만들었을 뿐 부대내 구타 가혹행위에 대한 개혁과 대책은 미흡하였고 이러한 문제에서 기인한 전의경 진압부대들의 폭력성은 결국 2005년 여의도 농민 집회에서 2명의 농민이 진압과정에서 사망하는 비극적인 결과를 낳았으며 그제서야 군대와 마찬가지로 사후약방문식의 개선이 시작되었다.

2.5. 의학전문대학원


항목을 참조. 참고로 의학전문대학원 제도를 만든 건 김대중 임기 당시의 일이고 신입생을 처음으로 받기 시작한 건 노무현 임기 당시의 일이다.
결과적으로 실패한 정책이 되어서 대부분 의대체제로 돌아갔다.

2.6. 성매매 특별법


2010년대에 들어와서는 한국에서 인신매매를 당해서 성매매 여성이 되는 여성들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과거 7~80년대 즈음에는 여고생이나 여대생을 납치해서 성매매 업계로 넘기는 사건이 굉장히 많았고 취업 사기, 채무 등으로 인해 여성들이 성매매 업계로 팔려가는 경우도 굉장히 많았다. 다음이 그 예시들이다. ### 그러다가 2004년 군산 화재 참사를 기점으로 성매매 피해 여성들의 참혹한 실태가 드러나면서 성매매 문제의 심각성과 성매매 여성의 보호 필요성이 드러났다. 그리하여 기존에 있었던 '윤락행위등방지법'을 대체할 새로운 성매매 규제 법안의 필요성이 대두되어 여야 의원의 대다수 찬성으로 통과하여 국회에서 성매매 특별법이 제정되었으며, 2004년 9월 23일부터 이 법이 본격 시행되었다. 이 법이 시행되고 나서부터 미아리 텍사스, 청량리 588과 같은 성매매 밀집지역에 대한 단속이 강화되고 '''성매매 업소 역시 크게 줄었다.'''
그러나 회의적인 시각들 역시도 제법 존재한다. 성매매 업소가 크게 준 것은 분명한 사실이나 다른 업소로 위장을 한다거나(키스방과 같은 유사 성매매 업소) 인터넷을 이용한 변종 성매매, 심지어는 성매매가 주택가로 침투하는 등 성매매의 음성화(陰性化)가 심각해졌다는 것이다. 또한 일본, 미국 등으로 소위 '원정'을 나간 성매매 여성들로 인해서 '국제적인 망신만 초래했다'는 시니컬한 평가들도 있다. 실제로 미국 국무부에서 2007년 발행한 한국 인권 보고서에서도 '''성매매 특별법이 집창촌과 성매매 산업을 어느 정도 쇠퇴시킨 것은 사실'''이지만 앞서 언급한 '''원정 성매매와 유사 성매매 업소에 대한 대응은 부족하다'''고 평했다. 보다시피 이 사안은 평가가 분명하게 갈리니 판단은 각자 알아서 하자.

2.7. 혁신도시


혁신도시란 노무현 정부 당시 공공기관의 지방 이전에 따른 지방균형발전을 추구하기 위해 추진한 계획도시 사업이다. 그러나 해당 항목에 들어가서 알 수 있듯, 논란이 제법 있다.

2.8. 권위주의 타파



2.8.1. 긍정론


[image]
[image]

"권위주의를 타파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정경유착을 깨고 보수언론의 권력을 줄이려 했다. 노 전 대통령은 너무나 인간적인, 그래서 결점 있는 지도자였다. (그의 사망은) 한국 대통령 역사상 가장 불행하고 비극적인 사건이다." '''LA타임스'''

"노 전 대통령은 한국 정치의 고질적인 재벌과 정치의 유착을 끊고 남북평화 체제 구축과 민주주의를 성숙시키는 공적을 남겼다." 홍콩, '''사우스차이나 모닝포스트'''

노무현 대통령은 탈권위주의를 온몸으로 실천했다. 국가정보원, 국군기무사령부의 장 과의 독대를 일체 거부하였으며, 이는 현재 대한민국 정부 가운데 유일무이한 노무현 정부의 업적이다.
역대 대통령 가운데 처음으로 퇴임 후 '낙향'의 길을 선택한 점도 후한 점수를 받는다.
직접 농사일을 거들고, 허름한 점퍼 차림으로 동네 구멍가게에서 담배를 피우는 노 전 대통령의 소탈한 모습에서는 '권위의 상징' 대신 '인간 노무현'으로서의 면모가 돋보였다는 평가다. 그런 노 전 대통령을 두고 네티즌들은 '노간지'라는 애칭으로 화답했다. [24]
이 외에도 군 장병들의 불필요한 삽질성 준비를 방지하기 위해 군 부대 시찰을 자제하기도 하였고 간혹 병사가 무한한(?) 단계를 뛰어넘고 직속상관 최정점인 국군통수권자에게 장난섞이고 친근하게 대하더라도[25] 결코 혼내지 않고 일일이 다 받아준 것도 인간 노무현으로서 매우 높은 점수를 받을 만한 사항.
[image]
노 대통령의 재임 기간 동안 많은 국민들은 노무현의 친서민적 이미지를 대통령의 거의 전부로 평가했으며, 이후에 노무현 정신, 노무현 시대정신과 같은 단어가 나오는 데 기여하였다. 또한 대통령 관련 설문조사에서 1위 또는 2위를 하는 데 적잖이 영향을 미쳤다. ##2#3#4#5 그리고 이명박 정부의 표적 수사로 노 대통령이 투신했다는 분석이 나오자 MB 정부에 대한 여론이 급격하게 악화되는 원인이 됐다.
그리고 참여정부의 탈권위성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정책 중 하나로 고려때부터 내려온 가부장제[26]와의 이별을 고한 정책.
호주제에 관련된 논란은 1950년부터 꾸준히 있어 왔지만, 권위주의 통치 시스템이 만연하던 군부는 물론이거니와 민주 정부들도 접근하길 꺼리는 장기 미제 상태였다. 호주제가 가족의 주인인 호주(남자)에게 구성원을 종속시켜 개인의 자율성을 탄압하고, 남녀 차별을 당연시하는 위헌적이고 반민주적인 제도라는 것에 대한 사회적인 합의는 이미 이루어진 상황이었지만, 아직까지도 전근대 권위문화에서 벗어나지 못한 일부 계층의 표심을 잃을까봐 다들 쉬쉬해왔던 것. 하지만...
'''12대 국정과제 중 하나로 양성평등을 내세운 참여정부는 호주제 폐지에 박차를 가했다.''' 인수위 시절부터 호주제 폐지 의지를 노골적으로 피력하던 참여정부는 강금실 법무부장관[27]을 임명, 두 차례에 걸쳐 국회에 법안을 제출하고 헌법재판소에서 위헌 판결을 받아내기에 이른다.
역대 대통령 중 가장 기득권의 동향에 좌우되지 않는 노무현의 소신과 추진력이 업적으로 승화된 것이다.

2.8.2. 부정론


단순히 노무현이 권위적이지 않다는 것과, 귄위주의를 타파했다는 건 엄연히 별개의 문제다.
노무현이 보여준 탈권위적 일화들은 기껏해야 노무현이 '''권위적이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지, 그것을 갖고 마치 '''권위주의를 타파했다(=탈권위주의를 실현했다)'''는 식으로 해석하는 건 상당히 과장된 것이다.
거기다 대통령이 권위적이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는 게 반드시 좋은것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애초에 권위라는 것 자체가 무조건 나쁜 것만은 아니다.[28] 대통령은 엄연히 행정부를 지휘, 통제하는 자리인 만큼 어느 정도의 권위는 필수다. 노무현은 친숙한 말을 많이 사용하였고, 이전 대통령들과 다른 행동을 보였다. 하지만 이것은 줄곧 막말 논란으로 번졌으며, 아무리 그래도 '''"한 나라의 수장인데 너무 격을 낮춰 행동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와 비판도 쏟아져 나왔다.[29] 뒤에 보면 자세히 나오는 내용이긴 하지만, 노무현 대통령의 권위적이지 않은 행동은 너무 도가 지나친 경우도 많다.
노무현을 오히려 권위주의적이라고 생각하는 의견도 있다. 아래에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청와대 기자실 폐쇄처럼 노무현도 권위주의적인 모습을 보여준 적이 있었는데, 그 당시 몇몇언론인들은 노무현을 독재정부에 비유할 정도였다.기사 그의 보수적인 경제정책과 그에 반발하는 노동자들에 강경하게 대처하는 등, 권위적인 정책도 많았다. 노무현이 탈권위적이라는 것은 보고 싶은 것만 본 결과라는 것이다. 게다가 자기 체면 구겼다는 이유로 수백 명의 밥줄을 끊어버리는 사람이 권위주의적이지 않다는 말은 어불성설이다.[30]
그러나 기자실 폐쇄건은 사실과 다르다. 이건 백분토론에 노무현 본인이 나와 설명한 바가 있는데, 기자실 폐쇄가 아니라 기자단 해체라고 선을 그었다. 당시 청와대 출입기자는 기자단이라는 거대이권단체에 소속된 소수의 언론권력만이 들어올 수 있었다. 이에 대해 기존의 기자단을 폐쇄하고 기자 출입은 소자본의 신문들까지 확대해 투명성을 공고하게 하겠다는 것이 노무현의 방침이었다. 또한 일견 오해를 할 수 있는데, 기자실이 폐쇄된 것은 대통령과 언론과의 의사소통구조를 끊겠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폐쇄된 의사소통구조를 청산한다는 데 있다. 그 증거로, 기자실이 폐쇄된 이후에도 기자들은 더 활발하게 청와대에 출입하면서 기사를 작성해 내보냈다.
브리핑룸이 기자실과 달리 정부의 말이나 받아적는다는 주장에는 근거가 없다. 브리핑룸을 통해서 기자들은 대변인과 정부 수석들과 접촉하면서 그날그날 일어난 중대 문제에 대해 비판을 쏟아내기 바빴다. 쉽게 말해서, 정말 언론이 불러주는 거나 받아쓰는 집단으로 전락해버렸다면, 그렇게 엄청난 비난을 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노무현 정부 시기의 언론들의 정부에 대한 집중포화는 민주화 이전에는 물론이고, 민주화가 된 1987년 이후에도 일어나기 힘든 일이었다.
언론접촉금지령은 기자들이 공무원들의 사무실을 업무에 방해될 정도로 들락날락했기 때문에 문제점이 지적된 것을 수정한 것이었고, 공무원은 정치적으로 중립을 유지할 의무가 있기 때문에 민감한 사안에 대해 계속 유도심문을 해오는 언론에 대해 방지하고자 함이었다. 금지령이 있고 나서도 기자들이 공무원들을 쫓아다니면서 정부를 비난할 수 있는 건수를 캐내어 기사화한 사례도 적지 않다. 게다가 이런 취지의 접촉 금지령이 이후 정권까지 계승되었다는 점을 보면, 이것이 노무현 정부가 한 일이기 때문에 언론에서 무차별적으로 비판한 사례 중 하나에 든다고 보여진다. 실제로 언론 탄압이라고 그렇게 비난하던 언론들도 이후 정권에서는 그냥 무덤덤하게 넘어가는 편이었다. 또한 공무원의 언론접촉금지령 자체도 부정적으로 볼 만한 것이 아니라는 게 이번 세월호 인양 지연에 대한 SBS오보 사건으로 드러났는데, 해당 사안에 대해 잘 모르는 공무원 개인의 의견이 마치 정부 전체의 의견인 것처럼 기사화되는 폐단을 방지하는 효과가 있다.
게다가 당시 오마이, 한겨레, 경향신문은 그렇게 마이너 언론이 아니었고[31], 노무현 정부의 정책에 대한 비난을 쏟아내는 데 동참했다. 조선일보의 '품위' 논란에 끼어드는 것은 물론, 대통령에 대해 비난하는 정도가 이명박 정부 때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자극적이었다. 일례로 노무현 정부 시기 언론에 사실관계 정정을 요청한 건수가 굉장히 많다는 것을 보면, 당시에 객관적인 사실과는 별도로 정부에 대해 무차별적 비난을 쏟아내던 언론이 많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2.9. 대추리 사태



2.9.1. 부정론


[image]
비판하는 측은 당시 대추리는 보상조차 마무리되어 있지 않은 상태라서 군 시설이라고 볼 수 없었기에 '''민간인 재산에 마음대로 철조망 치고 군병력을 투입한 셈이라고 비판한다'''
기사 당시상황 일각에서는 이를 두고 최소한 계엄령이나 위수령을 선포한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과 비교하려는 경우도 있는데, 대추리 사태 당시에는 이러한 절차마저 거치지 않고 그냥 군을 동원했다는 점에서 더욱 심각한 문제라고 비판한다.
하지만 대추리는 대부분의 지역주민이 보상을 받고 이주했으며, 공식적으로 법원의 행정집행 허가를 받고 법원의 집달관을 동행한 상태에서 영장을 집행하여 철거 작업을 완료하고 군사지역으로 확정된 상태이기 때문에 애초에 광역시도단위 혹은 전국과 같은 광범위한 지역을 대상으로 하는 계엄령이나 위수령을 선포할 필요가 없었다. 또한 과거의 계엄령 및 위수령은 군대 투입 자체가 잘못됐다기 보다는 군사 쿠데타나 친위 쿠데타 수단으로 활용됐기 때문에 비판받는 것이라 성격이 다르다.
대부분의(면적기준으로) 부재지주들이 보상을 받았을 뿐, 자영농과 소작농들은 보상거부가 다수였다. 게다가 그 당시 보상을 받은 면적을 기준으로 한다면 70%대에 불과했다. 70%대면 대부분 아니냐고? 당시 법적으로 재개발/재건축 실시요건이 찬성80% 이상이었다.
[image]
비판하는 측에서 당시 시위진압에 군인을 투입한 증거라고 제시하는 사진인데, 시위 진압하는 군인이라고 보기에는 방석모, 방석복, 진압 방패와 같은 진압 장비도 전혀 갖춰지지 않았다. 원래 무장병력을 투입하려고 계획했기 때문에 방석모 같은 시위진압장비는 챙기지도 않았다는 법원판결이 있다. 물론 사람패는 용도의 진압봉만은 착실히 챙겨갔다. http://shindonga.donga.com/Print?cid=108782
애초에 군에는 그런 시위진압장비도 없다. 518 때 군을 민간인시위 진압에 투입했다가 발생한 사태가 워낙 충격적이어서, 이후 전 세계적으로 민간인시위에 군을 투입하여 진압하는 것은 금기시되어있다. 물론 막장국가들은 그런 것 없다. 쓸 일도 없고 써서도 안 되는 장비가 군에 있을 리가.... 아래 부분에도 서술되어 있지만 국방부가 이미 마을 주민들로부터 매입했다. 공시지가로 공탁만 걸어놓고 저러는 게 매입이라면 국가는 말 그대로 날강도로 취급해도 할 말이 없다.
[image]
5월 5일 첫 번째 사진과 같은 상황에서 충돌이 빚어져 피해가 발생하자 국방부는 5월 8일부터 경찰로부터 진압방패를 빌려서 시위진압 장비를 지참하고 경계를 설 것이라고 밝혔다.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121734.html

2.9.2. 긍정론


[image]
[image]
엄연히 군 부지로 확정된 상황이라면 법적으로 여기 허가없이 들어온 민간인을 퇴거시키고, 이 과정에서 불응한 이들은 무력을 사용해 쫓아내는 것 자체는 불법이 아니다. 군부대 부지 밖으로 쫓아낸 이후엔 군인에게 위해를 가하거나 하지 않을 경우 경찰에 맡겨야 한다.

군 당국이 군인을 공세적으로 시위진압에 투입했다기보다는, 시위대가 군 부지 안으로 들어오는 과정에서 마주친 군인들이 막았다는 반론도 존재한다. '''시위대는 반대쪽 철조망을 절단기로 잘라내며 평택 K-6 미군기지(캠프 험프리스)라고 주장하는 부지에 진입을 시도했고, 이 과정에서 경찰 저지선이 뚫렸으며, 철조망 안으로 들어온 시위대가 군인들과 마주쳐서 충돌을 빚기도 했다'''고 한다.# 당시 국방부는 경찰 저지선이 뚫리면서 군과 시위대가 직접 접촉한 문제가 발생했다면서 경찰 병력 일부를 철조망 내부에도 배치하는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조선일보 등 보수언론은 정부가 일부 구속자를 석방한 것을 두고 공권력이 약화될 수 있다고 우려를 표명하거나, 군 당국이 군 부지에 배치된 공병들에게 '''"시위대에 맞대응하지 말라"'''고 지시를 내렸다면서 비판했다.[#

2.10. 언론과의 갈등


노무현은 헌정 이래 '''가장 언론과 대립이 심했던 대통령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조선일보와는 정치 초년병 시절부터 엄청난 악연에 시달려 대통령 된 이후에도 내내 긴장과 대립 관계를 유지했다. 참고로 타이틀인 언론과의 전쟁은 당시 노무현 상임고문이 언론사에 대한 세금조사도 불사하는 언론과의 싸움도 불사해야한다며 한 말이었다. 하지만 원래 언론사도 민간 기업체이니 예외없이 세무조사를 받아야 한다.
사실 노무현이 가진 언론에 대한 저항감은 꽤 뿌리 깊은데, 그 시작은 한창 5공 청문회에서 일약 스타덤에 오르던 당시부터였다. 청문회 스타로 알려진 직후에는 조선일보가 유일하게 당시 노무현 의원을 대권주자로 까지 언급할 정도로 사이가 나쁘지 않았으나, 당시 여당과 대립각이 심해지자 조선일보는 정치인 노무현을 소개하는 우종창 기자의 기사에서 그의 취미생활인 요트 운전을 언급[32] 했고 부산 요트클럽회장이라는 팩트에 맞지 않은 정보를 기사에 실었으며 전체적으로 그 기사 자체가 '알만한 사람은 다 안다'라는 추측 루머 서술로서 정확성을 가진 기사가 아니었다. 이에 노무현은 언론과 척지면 좋을게 없다는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33] 조선일보에 소송을 걸었고 1심에서 승소했다. 어찌됐건 유구하게 이어질 언론과의 전쟁사에서 그 첫번째 전투는 승리로 장식한 셈이지만 그는 이를 계기로 정치 인생 내내 언론과의 전쟁에 시달리게 된다.
특히 해양수산부 장관 시절에는 조선일보를 두고 '''수구세력 대공세의 선봉''', '''독재권력과의 야합과 특혜를 통해 쌓아올린 기득권 세력'''이라 강력히 성토했는데, 여기서부터 보수언론과는 개혁될 때 까지 포기할 수 없는 대립구도가 형성되었으며 이때 손석희 교수가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언론의 강한 횡포에 대해 '노무현 죽이기'라며 방송을 내보낸 적이 있다. 대통령이 되기 이전부터 언론개혁을 외치는 노무현에 대한 조선일보 등의 '노무현 죽이기'시도는 있었으며 꽤나 원색적으로 진행되었기에 맨 아래의 관련 서적과 더불어 당시에도 타 방송에서 다룰 정도였다. 영상에서의 내용은 조선일보가 비판은 커녕 아예 전혀 다뤄주지조차 않는 보복에 대해서 다루었다. 지명도가 중요한 정치인이나 연예인은 안티팬보다 무서운 것이 수면 아래로 가라앉아 잊혀지는 것이다.

이에따라 유독 참여정부 당시에는 오보가 많았고 대통령 시절에는 1년 차에만 무려 247건의 언론 중재 신청을 했는데, 이는 1981년부터 2003년까지 전정권을 통틀어 이루어진 언론 중재요청의 절반에 해당하는 수치다.[34] 한편 임기 말에는 기자실을 통폐합해 공무원과 기자들 간의 직접적인 접촉을 막고 이를 미국식 브리핑으로 대체하는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기자실과 담당자 간의 유착을 막기 위한 것이라 하였으나, 앞서 "기자실에 죽치고 앉아 기자들이 죽치고 앉아 담합하는 구조에 대해 지시하라."라는 거친 발언을 한 것이 알려져 악감정을 사기도 했다. 당시 언론에서 문제삼은 부분은 청와대가 주장하던것처럼 기자실폐쇄가 아니었다. 공무원들에 대한 언론접촉금지령이 문제였고, 이는 노무현이 스스로 주장하던 발로 뛰어서 취재하라는 명분이 기만적이었다는 증거이다. 게다가 말할것도 없이 국민의 알 권리를 심각하게 훼손하는 처사이다.[35]
물론 보수 언론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다. 노무현 대통령의 단점인 거친 언행을 문제 삼아 사사건건 기사화시켰고 후보시절에는 그를 태운 차량이 딱지를 떼 벌금을 물었다는 것까지 크게 보도했다. 대통령 시절에는 당연한 수순이었겠지만 노무현은 내로라하는 보수 논객들의 공세에 시달려야 했고 '노무현은 정신병자'라는 도를 지나친 원색적인 인격모독까지 포함되어 있었다.[36] 심지어 조선일보 등은 바다이야기 사건에 연루된 청와대 전 행정관이 영부인 권양숙의''' 20촌'''(사실상 남남)이라는 점을 문제삼는 기사를 비롯[37], 무리수를 동원해가며 노무현을 깎아내리는데 총력전을 펼쳤다. 이 과정에서 조중동 등의 언론은 노골적인 기자실 통폐합과 관련해서는 '노무현 언론 탄압 백서'를 발간한 뒤, 국제 언론인 협회(IPI)에 기자실 통페합을 철회해달라는 요구가 담긴 서한을 보냈으며 IPI는 노무현 정부에게 취재봉쇄 철회를 당부하는 서한을 보냈다. 사망 직전에는 피아제 시계와 같은 자극적인 소재와[38] '겉으로는 착한척 하면서 뒤가 이렇게나 구렸다.' 식의 칼럼을 통해 노무현을 공격했고, 방송은 아예 대놓고 노무현이 서울로 조사받으러 가는 차량에 헬리캠을 붙여 생중계하기도 했다. 전두환, 노태우 외 전직 대통령들이 한번도 받아보지 못한 대접이었다.
언론과의 전쟁을 선포한 노무현에 대한 평가는 상당히 엇갈리는 편이다. 우선 언론에 대해서는, '''국민 대다수 모두 그 병폐를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펜을 쥔 채로 '''필요 이상의 권력을 휘두르는데다''' 각종 기득권과 결탁한 '''부정이 만연'''하며 정치인들과의 사적만남을 통해 ''''말 잘들으면 잘 써주고 안 들으면 조진다.'식의 폭력적인 실력행사'''까지 일삼아 온게 명백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처럼 한쪽 성향의 언론이 시장 전체를 지배하는 기형적인 구조 속에서 보수언론의 권력은 가히 무소불위라 해도 무방했다. 때문에 노무현처럼 주류에 반발하는 흐름을 견지한 정치인은 필연적으로 부딫힐 수밖에 없었고 노무현이 언론에 가진 피해의식도 일견 이해받을만한 구석이 있다. 또한 다소 과격하긴 해도 언론을 향해 시도한 노무현의 견제 시도는 지지자들의 표현처럼 언론개혁으로 평가받을 여지도 온존한다.
하지만 듣기 싫은 소리 하는 '''언론을 틀어막는 것이 과연 개혁적인 것인가'''에 대한 회의 역시 든다. '''보수 정권에서의 진보 언론탄압은 반민주적인 파쇼적 행태로 규정하면서 진보 정권에서의 보수 언론을 탄압하는 것은 개혁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이중잣대의 전형이다.''' 경박한 언행을 사사건건 보도한 부분에 대해서는 노무현 본인과 지지자들은 항상 짜깁기를 주장했지만, 같은 개혁세력의 대통령이었던 김대중 대통령은 점잖고 신사적인 언행을 견지해 언행에 관한 시시비비는 인생을 통틀어 손에 꼽을 정도였다. 꼭 반박해야 할 일이 생기면 가능한 정제된 언어로 특유의 논리력과 언변으로 상대를 완벽하게 데꿀멍시켰다. 즉, 진보 개혁세력이라 하여 피해의식과 투쟁심리를 기본으로 깐 상태에서 막말을 할 필요는 없다는 좋은 예시를 바로 전임 대통령이 보여줬음에도 불구하고 과격한 대립을 보여주었다는 것은 정책실행에 있어서의 실책적인 부분이다. 또한 노무현은 최초로 공무원을 댓글부대로 동원한 바가 있기도 하다.기사 국정홍보처에서 내려보낸 공문 가이드라인까지 제시해가며 정권 차원에서 언론과의 전쟁을 위해 공무원을 동원했다는 점에서 문제의 여지는 남아있다.
보수 언론을 무조건 악의 축으로 몰아간 태도도 비판받아 마땅하다. 정치인생 내내 소위 조중동을 친일-독재-수구의 이미지로 엮어 공세를 펼쳤는데, 사실 그 세 신문사가 각각 일제와 독재정권에 협력한 흑역사가 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 반대로 해당주체들과 싸웠던 신문들이기도 하다.[39] 시대에 따라 가변성을 띄어온 주체에 부정적인 단편을 끄집어내 그 것을 곧 정체성으로 귀결시킨 시도는 해당 언론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고까운 일. 노무현 스스로가 언론과의 관계를 틀어지게 한 장본인이기도 한 것이다.[40]
정리하자면 노무현이 언론을 향해 쏟아낸 일련의 견제 시도는 대통령에게도 예외없는 '''싫은 소리 듣고 싶지 않은 인간의 본능'''과 언론의 발호에 제동을 걸어보려는 '''개혁의지'''가 복잡하게 결부되어 일어난 일들이다. '''즉 힘겨루기이기도 하면서 정의의 문제였다.''' 이에 대해 객관적인 시선을 견지하지 않고 진영논리에 휩쓸려 '언론을 짓밟으려 한 빅 브라더식 통치'나 '언론의 핍박에 저항한 숭고하기 이를 데 없는 순교'로 규정하는 것은 전자 후자 모두에 문제가 있으며, 민주 사회에서 중요한 견제 세력의 한 축을 담당하는 언론이 그 기능을 잘 수행하면서 그 힘에 취해 무소불위의 권력이 되어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선 개인 스스로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하는지, 지도자는 필연적으로 따라붙는 비판세력을 어떻게 다뤄야할 지 진지하게 성찰해봐야할 것이다.
이에 대해서 다룬 서적으로 <노무현 죽이기>, <노무현 살리기>와 <야만의 언론>, <노무현은 왜 조선일보와 싸우는가> 등이 있으며 <슬기로운 해법>이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도 있다.
보수 언론과는 완전히 척을 졌었지만 진보신문과도 항상 관계가 원만했던건 아니었다. 기자실 통폐합 때 진보신문인 한겨례과 경향신문이 크게 반발했으며, 오마이 뉴스와 미디어오늘도 이에 동참했고, 심지어 구 독재정권과 결부시키는 묘사도 나타났다. 참조,참조,"노무현 시대는 자유민주주의 위기 상황".
또한 이들 신문은 비리수사와 관련하여 노무현 전 대통령이 사망하기 직전까지 사설로 비판을 가하기도 했다. 참조, 참조, 참조 심지어 한겨레21의 경우 사망 직전까지의 내용과 사망 후 내용이 '''같은 주간지 맞나?''' 라는 의문이 들 정도로 판이하게 다르다. 1000호 특집 특대호에서 알 수 있다.
이 때문에 친노친문 지지자들은 비판적 지지와 기계적 중립이라는 구실로 보수언론과 같이 노무현을 흔들었다며 진보언론을 보수언론보다 더 싫어한다. 보수언론은 적어도 자기 고객인 보수층을 대놓고 배신하거나 얕보지는 않았는데, 진보언론은 자기 고객인 친노친문 지지자들도 자기 아래로 보는 선민의식으로 얕보고 있다는 것. 물론 보수언론은 애초에 적이라서 그다지 기대도 하지 않는다. 한나라당과 언론의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다 프레임 때문에 한나라당이 정권을 잡더니 노무현은 자살 직전까지 좌우 가리지 않고 잘만 때리던 언론이라는 놈들은 이명박근혜 정권의 폐단이 더 심한 상황에서 자발적 또는 언론장악을 당하면서 이명박근혜 정권을 옹호 또는 홍보를 하거나, 진보언론은 보수 정권의 정책 비판 기사와 정책 홍보 광고를 같이 내는 모순을 보이고 있다고 분노한다. 이들 주류언론에 대한 불신이 팟캐스트 같은 비주류 언론을 흥행 시키고 스스로 자료를 찾아 팩트체크를 하면서, 지지자들이 먼저 나서서 언론과의 전쟁을 벌이는 것이다.

2.10.1. 기자실 통폐합



2007년 참여정부는 정부 부처내 37개 기자실을 중앙과 과천, 대전청사 3곳으로 통폐합하는 ‘취재 지원 시스템 선진화 방안’을 발표했다. 기존 기자실 기자들의 사무실 방문 취재와 공무원에 대한 접촉 취재도 엄격히 제한시켰다. 브리핑으로는 접하기 힘든 정보나 공개를 꺼리는 정보를 확인하기 어려워졌던 것이다. #
당시 민주신당과 민주당 등 민주당계 야당 내에서도 비판론이 제기되었다. 특히 민주당은 성명을 통해 "노무현 정부는 중앙부처 기자실을 없애고 대관령 목장만한 합동 브리핑룸으로 대체하는 이른바 '취재지원 선진화 방안'을 내놓고 전향적 개편이라고 강변하나, 이는 노 대통령의 언론에 대한 막가파식 보복폭행이고 언론과의 전쟁을 선포한 것"이라며 "언론을 통제하면서 독재를 했던 5공 시절의 언론정책으로 회귀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주장했다. # 민주신당은 언론의 취재 활동의 자유는 철저하게 보장돼야 한다고 밝히면서 정부가 일방적으로 기자실 통폐합을 강행한다면 예비비의 추가 지출을 중지하도록 결의하는 것도 검토하겠다고 하였다. #
언론단체들은 당연히 언론 탄압이라며 강력히 반발했다. 언론학자와 언론단체, 시민단체들은 기자실 통폐합 방안은 언론계의 여론 수렴 등 충분한 검토와 논의를 거치지 않은 데다 언론의 중요한 역할인 정부에 대한 감시와 비판기능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우려를 제기했다. # 국제언론인협회도 서한을 통해 “한국 정부가 도입한 취재지원시스템 선진화 방안이 공공 관심사에 대한 언론의 정보 접근을 심각하게 제한할 수 있다고 믿는다”고 밝혔다.#
결국 정권이 바뀌자마자 통폐합 추진했던 정부 부처 기자실들이 다시 복구되었고 # 기자실 통폐합 조치를 강행한 국정홍보처가 되려 폐지되고 만다. #
KBS 저널리즘 토크쇼 J에서 정준희 교수는 참여정부의 기자실 통폐합 조치를 기존 기자실 기자들이 가진 취재 특권의 붕괴를 위한 언론 개혁시도라고 주장했다. #

2.11. 인터넷 실명제 도입 논란


당시의 여당이었던 열린우리당은 한나라당과 같이 인터넷 실명제를 추진하였다.
이 여파로 인해 16개 인터넷언론사와 시민사회단체들은 2007년에 '인터넷선거실명제폐지공동대책위'를 구성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인터넷실명제를 "선거시기 실명제는 정부가 사회구성원의 정치적 의사표현을 일일이 감시하는 반민주적인 제도이며, 헌법에서 보장하는 표현의 자유 및 통신비밀의 자유, 그리고 프라이버시 등 정보인권을 심각하게 침해하는 악법"이라고 주장하며 참여정부를 강하게 비판하였다.
정부에서는 이러한 인터넷 실명제를 2006년 제4차 지방선거를 즈음하여 인터넷 언론사 사이트에 한시적으로 실명제를 적용시킨 뒤 2007년에 정보통신망법으로 시행되었지만 2012년에 결국 위헌판정으로 없어져버렸다. 결과적으로 실명을 써도 '''악플과 악성게시물이 줄어드는 효과가 딱히 없었다.'''[41][42] 오히려 이 제도를 악용, 멀쩡한 사람들의 신상을 빼돌려 괴롭히는 사례가 많았다. 게다가 인터넷 사이트는 실명제에 반대하지 않는 이상 반드시 주민등록번호를 저장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 때문에 '''인터넷 사이트들은 더욱 많은 해킹 시도'''를 받게 되었다. 결국 이에 따라 수많은 개인정보 유출사태가 발생하였고, 마침내 전국민의 70%가 피해를 입은 SK컴즈 개인정보 유출 사건이 터지면서 인터넷 실명제의 존재가 간접적으로 위협받게 되었고, 앞서 말했듯이 인터넷 실명제는 위헌판정으로 훗날 폐지에 이르게 되었다. 기사 그래도 이걸 도입한다고 국고가 심각하게 낭비되거나 하는 문제점은 발생하지 않았다. 다만 개별기업의 돈이 들었고 '''개인정보가 공용정보가 되었을 뿐.'''

2.12. 황우석 사건 태도 논란


황우석 사건에서의 태도가 논란의 대상이 된 적이 있다. 2005년 11월 27일, 청와대 홈페이지에 "PD수첩이 황당한 취재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심지어 협박과 위협도 한다고 한다.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라는 글을 올리면서 PD수첩의 줄기세포에 진위에 대한 취재에 대해 부정적인 언급을 했으며, 이후 줄기세포가 가짜로 판명된 후에도 "자, 이걸로 정리를 하자."라는 말로 상황을 무마시키려 했다는 비판이 있다. #1 이후 2006년 12월 28일에는 황우석 사건을 통해 대통령에게 제대로 보고하지 않은 책임을 지고 같은 해 1월에 물러난 박기영 전 대통령 정보과학기술 보좌관이 정책기획위원으로 발탁되었는데, "박 전 보좌관이 정책기획위원을 맡을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도덕적 문제를 일으켰다고 판단하지는 않는다."라고 발언을 해 논란이 되기도 하였다.#2
그러나, 노무현 전 대통령이 올린 글의 전문을 보면 당시 PD수첩을 일방적으로 질타하는 여론의 흐름에 우려를 나타내기도 하였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PD수첩에 대한 몰매여론과 광고취소로 이어지는 여론의 흐름에 '''"심했다는 생각이 든다"'''며 "항의 글, 전화쯤이야 있을 수 있고 그 정도는 기자와 언론사의 양심과 용기로 버티면 되지만 '''광고가 취소되는 지경에 이르면 도를 넘은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또한 "저항을 용서하지 않는 사회적 공포가 형성된 것이고 이는 많은 기자들로 하여금 취재와 보도에 주눅 들게 하는 금기로 작용할지 모른다"고 우려하기도 하였다.#

3. 안보·국방에 대한 평가



3.1. NLL협상과 공동어로수역 논란


NLL 대화록 논란/해석논란북방한계선 관련 나무위키 문서 참조.
2007년 노무현 대통령전까지 단 한 번도 대한민국에서는 북한 측과 NLL과 관련된 대화를 나누지 않았으나 노무현 정부 때 처음으로 북한 측과 논의가 시작되었다. 2006년 4차 남북장성급회담에서 북한이 NLL 논의를 제의했다. 국군에서는 남북기본합의서에 명시되어 있는 불가침조항을 북한이 우선 이행할 것을 요구했다.
그런데 노무현은 2006년 6월16일 계룡대 특강에서“현재 남북한 간 신뢰의 장애요소이자 위기의 원인이 되고 있는 NLL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합리적 공존의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며 NLL 협상론을 제기했다. 이후 2007년 7월19일 안보정책조정회의에서 김장수 국방부 장관은 이재정 통일부장관에게“군사문제인 북방한계선에 대해 다른 부처가 앞서가는 발언을 하지 마라 달라”라고 요구했고, 이를 청와대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인 청와대 측에서 후임자를 물색하는 움직임까지 일어났다. 이재정 통일부장관, 홍익표 통일부 장관정책보좌관, 서주석 청와대 안보수석비서관,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 등 참여정부 외교안보 인사들 역시 정상회담 직전까지 NLL은 영토선이 아니므로 얼마든지 북한과 협상할 수 있다는 여론을 조성하는데 총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국방부 역시도 입장을 선회하여 NLL대화를 이어가게 된다. 이것은 역대 정부의 NLL정책과는 달라진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추진된 것이 '''공동어로수역'''설정이다. 물론 공동어로수역안은 역대 정부마다 논의는 있었던 사안이다. 그런데 문제는 '''등거리'''가 아니라 '''등면적'''으로 공동어로수역을 설정한다는 것이다. 노무현 정부 이전에 제시되었던 공동어로수역 방안은 '''등거리'''를 기준으로 설정한다는 것이다. 이 경우 NLL기준으로 남측이 조금 더 같은 면적으로 올라갈 수 있도록 설정하고, 북측이 같은 면적으로 남측 해안에 내려올 수 있도록 하는 것인데, 너무 북한 영토와 가까워진다는 점에서 북측이 거절했다. 그래서 노무현 정부는 NLL선 기준으로 같은 거리의 면적을 공동어로수역으로 설정을 검토한다, 그러나 등면적 공동수역이 설정될 경우, 북측 선박이 우리나라 인천 주변까지 내려올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뜨거운 감자로 남아있다.[43]
이러한 논의가 오고 가고 있던 중에 공동어로수역 설정이 곧 "NLL 폐기 내지 NLL 무력화 아니냐"하는 논란이 2007년 당시부터 고조되었다. 2007년 10월 24일 서울 시청앞에서 열린 UN 창설 62주년 기념 '대한민국 사수 10.24 국민대회'에서 "실질 효력이 있는 NLL을 부정하는 대통령의 발언으로 인해 NLL 재설정 논란을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큰 만큼 대통령은 문제 발언을 취소하고 국민 앞에 사과함이 마땅하다"는 주장이 나왔다.[44]강재섭 한나라당 대표 역시도 10월12일 국회에서 열린 전국위원회에서 “노 대통령의 발언은 정말 충격적이었다”며 NLL은 1953년 정전협정을 맺고 휴전선과 똑같이 남과 북이 서로 나눠서 실효적 지배를 해오며 사실상 남과 북의 경계선으로 인정해 온 것인데, 이 문제를 노 대통령이 자꾸 얘기해서 긁어 부스럼을 만들고 있다. 대체 어느 나라 대통령인지 지극히 의심스럽다”고 비판[45]했다.[46]
당시 노무현 정부와 북한 정권 '''비공개적'''으로 논의가 되고 있는 남북공동어로수역은, 7차 남북장성급군사회담에서 높으신 분들이 남북회담 중 남북공동어로수역의 범위에 대해서 비공개적으로 토론을 진행하기로 했음에도 불구하고, 북한 측 장교가 프로젝터로 통해 이 결과를 회담 중 공개하려고 하자 남측 장교가 이를 몸으로 막는 촌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출처
그리고 이 무렵 김장수 국방부 장관청와대와 NLL 관련 갈등이 고조되자 해군에 NLL 침묵령을 내리기도 했고, “내 이름을 걸고 NLL을 지키겠다”고 보도가 나오자 국방부가 아닌 청와대에서 이를 정정하는 해프닝도 벌어졌다. 한나라당은 아예 11월8일자로 “노 정권은 국방부장관의 NLL관(觀)을 사수하라!!”는 성명서를 내 김장수 장관을 지원하기도 했다. 회담 직전까지 김장수 장관은“NLL은 반드시 사수한다”는 입장을 언론에 공개한 반면, 청와대는 입장을 전혀 내놓지 않았다.
당시 김장수 장관의 태도에 대해 문재인 대통령 비서실장은 “이명박 정부에 의해 10.4선언이 부정된 이후 (서해) NLL(북방한계선)에서 긴장이 최고조에 달했다”고 비판하며, 10.4선언 핵심 중 하나인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 설치와 관련해“당시 (김장수)국방부장관이 회담에 임하는 태도가 대단히 경직됐다고 생각했다”고 지적했다. 이것은 청와대와 김장수 장관의 NLL 관련 입장이 크게 달랐음을 암시하는 것이다.출처
물론 남북공동어로수역 문제는 정권 막바지에 논의되었던 사안이었고 이후 정권교체가 이루어지면서 더 이상 진전되지 못하고 끝나버렸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야당의 반발과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헌법상으로 영토선이든 아니든지 간에 실질적으로 우리의 북방한계선으로 인식하고 지배하고 있는 구역에 대한 논의를 국민적 합의 없이 일방적으로 북한과 논의했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특히 영토, 안보와 관련한 민감한 문제였기 때문에 야당과의 논의와 대화, 그리고 국민에 대해서 충분히 논의에 대한 사실을 알리고 공론화를 거쳐가는 과정이 필요로 했던 부분인데, 국민적 소통이나 논의 없이 북한과 은밀하게 진행되었기 때문에 더욱 더 논란의 불씨를 지피기 쉬운 측면도 없지 않았다.
다만 이런 비판에 대해 결국 실행에 옮겨지지 않은 정책이고 북한에 국민의 동의를 얻지 않은 무언가를 약속한 바는 없었다는 변호를 할 수 있다. 북한과 협상을 시작하기 전부터 공론화를 했었어야 하느냐, 어느 정도 협상이 진행된 이후에 국민 동의를 얻는 절차를 밟아야 했는가 하는 판단에 이견이 있을 수 있다.
2013년 갤럽 여론조사(출처)에 따르면 NLL 대화록 내용으로 볼 때 노무현이 남한의 대통령으로서 할 만한 말을 했다고 하는 의견이 48%로 일방적으로 북한을 편들었다고 하는 24%의 의견을 넘어선다. 이는 노무현 정권이 NLL과 관련해서 추진한 정책에 대한 국민 평가가 다양하다는 것을 말해 준다.
다만 이 여론 조사 역시 국민 여론을 정확하게 반영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우선 여론조사 결과는 시시각각 변화하는데, 인용된 여론조사는 NLL 대화록 공개 파문 직후에 조사된 내용으로 노무현 정부가 해당 정책을 추진하던 시기와 시간 차이가 존재한다. 또한 NLL 대화록 자체에 대한 의견을 묻고 있어 NLL 협상 및 공동어로수역 추진에 관한 여론 지표로서 적당한지도 의문이다. 2013년 이후 남북관계가 더 악화되었기 때문에 현재는 부정적 평가가 더 높아졌을 수 있다. 어떤 관점에서든 여론조사결과 만으로는 정책에 대한 평가에 충분한 근거가 된다고 보기 어렵다.

이 이슈를 전문적으로 다루고 있는 나무위키 문서들(본 항목 상단의 링크 참조)에서 좀 더 다양한 관점과 정보들을 참조할 수 있다.
2016년 한강 어귀와 NLL내 중국 어선의 조업이 지속적으로 문제가 되자, 박근혜 정부는 해경 기동전단을 구성 불법 조업중인 중국 어선을 나포하는 등 단속을 벌였다. 중국 어선의 남한내 수산자원을 갈취함이 문제가 되자 새누리당 김성태의원은 노무현 정부에서 협의한 남북공동어로수역을 협상을 해야 한다고 의견을 제시하였다#. 이에 대하여 김관진 국가안보실장은 "공동어로수역은 NLL 무력화 의도가 있다"며 난색을 표했다.#

한편, 국회 정보위원회 현안 보고 국정원은 북한이 3000만 달러에 자국내 어업권을 중국에 팔았다고 보고하였다.# 이들 중국 어선은 북한 내 조업을 하다가 남한으로 월경하여 조업을 하고 기동전단과 같은 해경 단속선이 뜨면 북한으로 도주하는 것으로 알려져 서해5도 어민들의 불만이 표출되고 있다.

3.2. 군복무 단축 관련 행보


비록 완전히 이루어지지는 않았으나, 노무현은 임기 당시에 단계적으로 군복무 기간을 줄여나가서 2014년에는 육군은 1년 6개월, 해군은 1년 8개월, 공군은 1년 9개월동안 군복무를 하게 하려고 노력하였다. 이 외에도, 여성들이 '희망자에 한해서' 사회복무 기회를 주는 방안 역시도 검토하였다. 이처럼 남성들의 군 복무에 대한 부담은 크게 줄여주고 여성들은 자신들이 원할 시에 사회복무를 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 주는 등 노무현은 병역제도 개선에 크게 힘썼다. 참조기사 1 참조기사 2
사실 군복무 단축 자체는 그동안 여러 정부에서 추진한 일이기 때문에 단축 자체는 딱히 특별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노무현은 역대 정권 중에서 군복무기간을 '''역대 최대로 단축시키는 행보를 보였다.''' 그래서 이 항목이 따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노무현의 군복무 단축 관련 행보가 마냥 좋다고만 해석하는 건 조금 무리가 있다. 왜냐하면 과거 박정희, 전두환 정부 시절은 병역자원이 몹시 많은 시기였지만[47] 노무현 정부 시절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실제로 2000년대 들어 남자가 부족한데 복무기간은 줄어드니 군 병력의 숫자를 유지하기 위해 현역판정률이 90%에 진입하게 되었다. 또한 출산율은 2001년에 초저출산 국가가 된후 2017년까지 10년이 넘는 기간동안 올라오지 못하고 있다. 비슷한 시기의 김대중정부도 이걸 감안해 군복무를 2개월 단축하는 것에 그쳤지만 노무현정부는 6개월이나 단축한다고 했으니 당연히 논란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국방개혁으로 양보다 질로 승부한다고는 했지만 국방개혁이 제대로 되었는지에 대해서도 평가가 엇갈리고 있다. 곧 노무현이 군복무 단축으로 남성들의 부담을 줄여준 건 분명히 맞지만 출생아가 계속 줄어든다는 시대적인 상황에 비추어 보았을 때는 무조건 잘했다고 보기 힘들다는 의견들도 꽤 존재하는 것이다. 물론 위에서 말했던, '희망자에 한해서' 여성들도 사회복무 기회를 주는 걸 검토한 건 잘했다고 보는게 맞을 것이다.

3.3. 전문하사 제도 도입


전문하사라는 이름의 유급지원병이라는 부분적 모병제를 도입하였고 이를 통하여 부사관 확충이라는 명제하에 저출산에 맞추어 저출산과 군복무기간 감축에 대응한 병력 수급과 전문군으로서의 역할에 맞는 인력을 확보하려고 했다. 민간부사관으로 사실상 아무것도 경험없는 부사관보다는 병생활을 경험한 이후 부사관으로 이어서 복무하는 부사관의 비율이 증가한다는 것은 그만큼 군대가 정예해진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사실상의 '''비정규직 부사관'''이라는 평가를 벗어나기 어려운 것도 이 제도였다. 3년 복무라는 기본이지만 사실상 2년에 가까운 21개월은 병사생활을 그대로 하다가 약 13~14개월 정도만 하사 계급장 달고 활동하는 것인데 1년 복무연장으로 전문군이라고 하기에는 애매모호한 형태였다. 게다가 앞서 설명된대로 복무기간 3년이라고 하지만 복무기간의 2/3이 일반 병사 대우를 받으면서 월급도 일반 병사 대우 그대로이니 지원자도 적은데다가 홍보도 적은 편이었다.기사링크
목적 취지는 좋고 지금도 그 부분적 역할의 인력수급이 되고 있으나 전문하사 임관이후 대부분 1~2년밖에 하지 않는 형식이라 사실상의 비정규직이나 다름없고 일반 4년 단기부사관으로 전환 신청 때 밀리는 경향까지 있다. 이는 실제로 부사관 지원을 홍보할때 부사관 모병관이 이야기 할정도로 전문하사 자체 제도의 순기능만 생각했지 역기능은 전혀 생각하지 않는 상황이고 이것이 지금까지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기사 링크
만약 3년으로 제한을 두지 않고 전역지원서를 제출하지 않는 한 계속 군대에 남아도 된다는 조건이었으면 훨씬 좋은 제도가 될 수도 있었다. 드디어 2019년부터 제도가 개선되어 일반 부사관과 거의 차이가 없어지고 장기 지원시에 가산점이 부여된다.# 이후 최대 48개월까지 하사로 복무할수 있게 되었다. 다만 이것때문에 군특성화고등학교 출신 전문하사들은 실질적인 월급이 삭감되어 이건 이쪽대로 논란이 되었다.

3.4. 해외 파병


이라크 파병은 한미 FTA와 함께 소위 자신의 지지세력들의 지지를 잃은 대표적인 정책이었다. 국민의 정부 말기와 참여정부 중기는 한국 역사상 전례가 없을 정도로 반미여론이 거세던 때였고, 노무현의 대통령 당선 역시 이 흐름과 무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기 스스로도 그걸 이용했다. 우선 파병 그 자체에 대한 찬반의 근거는 각각 다음과 같다.
보수 세력과 일부 중도 개혁 세력을 주축으로 한 찬성 측의 근거는 한미동맹 체제 강화, 세계 패권을 주도하는 초강대국이자 우방인 미국의 파병 제안을 현실적으로 거절하기 어렵다는 현실론이 주를 이뤘고, 이에 각을 세운 진보적 노선의 반대 측의 근거는 정치이념주의에 입각한 반미주의와 함께 더러운 침략 전쟁에 힘을 보태는 것은 정의롭지 못하다는 명분론[48]과 무고한 한국군의 희생 등을 들었다.
국내 외 반전 여론에도 불구하고, 노무현은 국회가 파병안을 통과시킨 지 한달여 만에 673명의 비전투병(서희 부대 100명, 제마 부대 573명)을 파병했다. 이라크 치안 문제로 골머리를 싸매던 미국은 다시 한국에게 2차 파병을 요구하였고, 한층 강화된 반대 여론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도 긴 고민없이 파병을 결정, 자이툰 부대의 파병을 결정했다. 다만 이 당시엔 치안 악화 문제로 파병지를 고심하던 탓에 늦어졌다.
그러나 이 파병 문제에서 그나마 괜찮게 평가받는 점은, '''파병지 현지 주민들의 민심을 잃지 않는데 노력했다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자이툰 부대에는 특전사로 구성된 2개 대대와 특공대에서 차출한 1개 대대, 해병대에서 차출한 1개중대, 장갑차중대가 포함되어 있었다. 자이툰 부대는 전투병력이 포함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전투행위를 하지는 않았다. 또한 자이툰 부대 장병 도시 재건과 현지인들과의 커뮤니케이션에 적극적으로 나서 침략을 도운 국가라는 인상을 남기지 않는데 크게 기여했다.[49] 민사작전의 모델 이라크 파병부대 다만 2차 파병이 결정되자마자 벌어진 김선일 피랍 사태에서 우왕좌왕하며 테러범들에게 협상 내내 끌려다니던 모습은 비판받았다.
한편 미국의 부시 행정부 입장에서 보면 이라크 전쟁을 반대했던 유럽 국가들 대부분이 NATO의 협력에 적극적으로 개입했지만 당시 노무현 정부는 계속 밍기적밍기적 거리는 모습을 보이면서 소극적인 이미지를 보였던 탓에 한국의 대규모 파병이 결정났지만 미국은 시큰둥했다. 더욱이 파병 출정식은 좌파성향의 극렬반대시위 문제로 대내-대외 이미지 (특히 미국)에 부정적인 문제가 더 컸다.[50] 게다가 한국군의 임무가 제대로 치안유지 작전수행을 미군 및 NATO군과 협력하는 적극적 모양새가 아니기 때문에 파병에 대한 평가가 절하되기도 했다. (앞 문단과 함께 읽고 해석한다면,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았기에 이라크 내에서의 한국의 이미지가 그렇게 나쁘지 않게 되었지만 미국 및 서방에게는 많은 국가적 신뢰를 잃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파병을 결정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으로 참전하지 않은 것은 결과적으로 이라크에 파병된 한국군이 현지무장세력에 의한 피해를 전혀 입지 않는 수혜도 있었다. 만약 당시 적극적으로 친미를 하는 정권이 집권하고 있었다면 애초에 미국이 요구했던대로 모술에 파견하여 한국군 사상자가 수백명대는 넘었을 수도 있다. 모술은 사담 후세인에 대한 지지도가 높았으며 수니파의 비율이 매우 높아서 2017년 현재 IS의 본거지 역할을 하고 있을 정도이다. 단순히 한미관계만 고려해서 적극적으로 파병하지 않았다고 비판만할 문제는 아니라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이건어디까지나 한국군이 주둔지역이 쿠르드족 지역이었으니 한국군이 치안활동을 하더라도 상대적으로 격렬하게 저항하던 레드존 지역이 아니었기 때문에 확대해석하는 것은 금물이다.
이라크 전쟁은 당시에도 명분의 타당성 때문에 말이 많았고, 결국 부시 정부가 1차로 내세웠던 명분인 '''WMD(대량살상무기)가 나오지 않아''' 현재에는 명분 없는 전쟁이었다는 쪽의 해석에 무게가 실린다.[51] 나쁜 독재자 사담 후세인이 숨긴 대량살상무기를 찾고 후세인의 독재에서 이라크 국민을 해방하여 민주주의를 심어주겠다는 당찬 목적을 가지고 벌어진 이라크 전쟁에서는 부시 정부가 내세운 어떤 목적도 달성되지 못하였고, NATO 회원국, 특히 미국의 경제, 군사적 손실만 가중되었다. 오히려 탈레반, ISIL이슬람 근본주의 세력 창궐에 도화선 역할을 하여 중동 정세를 더욱 불안정하게 만들어 버렸다.
당시 노무현 정부의 선택은 친미국가로서 국군을 파병하여 미국의 체면을 살려주는 한편, 현지에서는 대민 활동 및 치안 유지 등의 비전투 임무에 전념해 이라크 사람들에게 반감을 주지 않았다. 현재에는 '너희들이 쳐들어와서 나라가 엉망이 되었다.'는 이라크 국민, 중동 사람들의 비난을 피할 수 있게 되었다. 다소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미국의 편을 들어주되, 현지의 반감을 사지 않는 한편 이후의 면죄부도 마련해 둔 좋은 판단이었다고 평가할 여지가 있다.
아프가니스탄 피랍 사태로 빛이 많이 바랬지만, 아프가니스탄 파병 또한 신이 주신 선물이라고 주민들에게 평가 받았다고 한다. 아프간 파병 동의부대, 10만명 진료 대기록 달성
노무현 임기 말에 보낸 또 하나의 파병 태양의 후예 신이 주신 특별한 선물 레바논 동명부대 "해당 지역 민심을 기반으로 움직인다"는 게릴라전의 기본을 깨뜨려 버리는 전략이라 UN 평화유지군 내에서도 인정하는 듯.
태양의 후예(드라마)의 모티브가 이라크 파병이라고 한다.[52]

4. 경제에 대한 평가



4.1. 국민소득 2만달러 달성


[image]
임기 첫해 광복절 경축사에서 10년 이내에 국민소득 2만불 시대를 달성하겠다고 공약하였고 퇴임 당시에 이미 2만달러를 돌파시켰다. 공약을 지켰다는 점에서 호평을 받는다. 그러나 7% 성장 공약은 물론 5% 성장 목표또한 달성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부정적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반면 다른 선진국들이 1만달러에서 2만달러로 진입할 때의 평균 성장률이 3.2%였던 것에 비해 2003 ~ 2006 한국의 실질 경제성장률은 4.3%로서 참여정부 당시 성장이 평균이상이었음을 두고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한다.[53][54][55] 물론 이 역시 박정희 정부의 고성장이 박정희 때문만은 아니듯 전적으로 노무현 정부의 공으로 해석할 수는 없다. 한편, 참여정부 경제정책중 부의 분배에 관해선 실패했다는 평가하는 경향이 크다. # 또한 노무현 정부 5년간 연평균 대미 달러 환율은 22.0%가 하락하였다는 점을 고려할때, 노무현 정부 기간의 달러 환산 1인당 국민소득 증가는 22.0%가 환율 하락 요인이었다는 점또한 고려해야 할 것이다.국민실질총소득의 연평균 증가율에 대해서도 평가가 엇갈린다. 2002년 말의 국민실질총소득(GNI)는 971조 6870억원, 2007년 말의 그것은 1154조 2460억원으로 CAGR을 계산하면 노무현 5년간 물가, 환율변동을 배제한 국민실질총소득의 연평균 증가율은 약 3.5%에 불과하였다.
김대중 정부, 김영상 정부 시절 연평균 실질국민소득 증가율이 모두 7%씩[56]이었고, 1998년의 급격한 하락과 이에 따른 반등 요인이 큰 1999년의 급격한 상승을 제외하면 이전 정부인 국민의정부의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6%[57]였다. 물론 고도 성장 시기와 노무현 정부의 시기를 직접적으로 비교하는 것은 무리가 따른다. 그러나 연평균 3.5%의 실질소득 증가율은 국민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였다고 볼 수 있다. 당장 전 정권이었던 김대중 정권때에 비교해도 반토막이다. 단 5년사이에 고성장시대에서 저성장시대로 바뀌었다고 주장하면 스스로도 이상하지 않나. 심지어 노무현정권때는 골디락스 경제라고 불리던 세계경제 호황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성장률이 세계평균 이하로 낮아진 결과, 2002년 11위였던 대한민국 경제규모는 2007년 13위로 떨어진다. [58]

4.2. 부동산 정책


참여정부 정책보고서에 따르면 참여정부는, 첫째, 부동산시장의 투명성 및 조세 형평성 제고, 둘째, 주택공급의 지속적인 확대, 셋째, 투기수요 억제와 개발이익 환수, 넷째, 서민 주거복지 확충 이상 4원칙을 일관되게 추진하였다고 한다.[59] 2008년 전문가를 대상으로 실시한 심층설문 조사에 따르면, 이에 대해서 전문가들은 참여정부가 부동시장의 투명성과 조세 형평성에 대한 개선, 서민 주거복지 분야에서 큰 진전을 이루었다고 평가하였다.[60]
규제 완화, 양도세 완화, 분양가 상한제 폐지 등 참여정부에 반하는 방향을 주장한 한양대교수 '''이창부'''가 참여정부는 "효울성보다는 형평성을 선택하였다"고 평하였듯[61], 특히 부동산 시장의 투명성과 조세 형평성 관해서는 호평이 많다. 이 중 실거래가 신고제 및 등기부 기재 도입은 관행처럼 내려오던 이중 계약서 관행을 근절시켰다는 점에서 금융실명제에 버금가는 역사적 사건으로 평가되기도 한다.[62] 실제로, 토지의 공공성 광화를 주장한 현 부동산연구원장 당시 국토연구원 토지주택연구실장 '''채미옥'''은 참여정부 당시를 지역균형 개발이나 투기억제 정책을 시행한 양극화 해소 정책기로 규정하며 "시장투명화 정책을 위한 실거래가 신고제도와 등기제도 도입은 참여정부 주요한 공적 중 하나였다"고 평하였다.[63] 여러가지 요인에 의해서 임기 초 시장주도형 공급관리 정책을 사용하지 못하고 3.30 대책 전까지 공공주도형 공급관리 정책으로 일관했다는 점과 수요관리또한 8.31 대책 당시 취득세와 등록세 등 거래세 인하한 것 외에 공공주도형 수요관리로 일관한 점에 한계가 있다고 평가한 세종대 교수 겸 한국도시연구소 소장 변창흠 또한 "부동산 실거래가 신고제, 실거래가의 등기부 기재, 과표현실화, 부동산 종합정보망 구축 등은 부동산 시장의 투명성에 크게 기여하였다"고 평가하며 이를 참여정부의 부동산 정책 중 가장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부분이라 한 바 있다.[64]
정부의 과도한 개입을 비판한 당시 주택산업연구원장 '''고철'''은 참여정부 당시를 두고 이전 정부에서 경기부양을 위해 부당산 시장 규제를 완화하였고 저금리로 인하여 세계적인 주택가격 상승이 있었음에도 전국적으로 집값이 상승하던 과거와 달리 전국의 집값이 차별적으로 상승하였다고 회고하며 “참여정부는 집값이 오르면 서민이 피해를 본다는 전제 아래 부동산 가격 급등의 원인을 투기로 상정하고 개발이익 분배논리에 따라 과거에 시행되지 못했던 부동산 정책을 펼치는 등 투기억제를 위한 공공의 시장개입을 확대하였다"고 평하였다.[65]
그러나 “투기적 수요를 억제하기 위한 주택가격 상승방지 정책은 주택가격 상승으로 인한 무주택서민의 아노미 현상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라 평한 전주대학교 교수 '''만규식'''이 “여전히 저소득층을 위한 국민임대주택 공급이 부족하며 모든 정책이 수도권에 집중되어있고 지방과 무관하다”고 비판한 것처럼 부정적인 평가또한 공존한다.[66]
한편, 시장 시스템 작동을 위한 거래 활성화 조치를 역설한 스피드뱅크 연구소장 '''박원갑'''은 참여정부의 일관된 정책 기조와 집값 안정화를 인정하면서도 주택정책이 실패한 까닭에 대해서는 “공급 확대보다는 수요 억제 위주 정책으로 일관한 것, 과도한 세금 규제, 정책에 대한 불신”을 지적하였다.[67]
부동산 가격 안정화에 대해서는 참여정부 출범 이전부터 진행된 소비자 경기전망지수 하락 등 2분기 연속 내수 위축 및 소비자물가의 급등, IMF 여파에 의한 기업의 신규투자 저조 및 제조업경기실사지수와 종합주가지수의 연이은 하락, 사스, 미-이라크전쟁 발발과 대북관계 악화와 같은 대외적 악재 중첩, 저금리와 세계적인 부동산 붐 등에 의해 2002년부터 부동산 시장이 과열될 조짐이 나타났고 필연적으로 오를 수 밖에 없었다는 것[68]에 대해 선제적 조치가 미흡하다는 지적이 있으나 2005년 불안정에도 불구하고 세계적인 추세에 비추어 볼 때 한국의 부동산 시장은 별로 커지지 않았으며 2007년 1.11 대책과 1.31 대책으로써 부동산 시장이 안정세로 접어들었다는 평가다. 주기적 주택가격 불안과 높은 가격 수준을 비판하면서도 참여정부의 주택정책에 대해서는 “서민 및 중산층의 주거안정과 주거복지 증진, 부동산 시장의 투명성 제고 및 선진화, 투기 억제 및 실수요 중심의 공급을 통한 시장 안정화, 주택 공급 확대를 통한 시장수급 균형 도모, 수도권 중심의 연 30만호 규모의 안정적 공급 기반을 확보한 성과가 있다”고 평한 전 국토교통부 주택토지실 실장 당시 주택정책관 '''도태호'''는 주택시장이 2007년 이후 안정세로 전환되어 앞으로 전반적인 안전세가 계속될 전망이라고 예상한 바 있다.[69]
[image]
[image]
가구소득대비 주택가격 비율 PIR과 아파트 가격에 대한 시계열그래프
집값 상승폭에 관한 시계열 그래프
보이는 바와 같이 물가 인상을 고려했을 때 부동산시장은 90년대 내내 마이너스 성장을하였고 10을 넘나들던 PIR은 급락하여 3~4대에서 머물고 있었다.[70] 이는 김대중 정부에서 경기부양을 목표로 부동산 시장 규제를 완화한 것, 경기 위축에 따른 부동산 시장에 대한 자금 유입 특히 은행의 적극적인 부동산 시장 진출, 외적인 부동산 붐과 내적인 재개발 붐에 맞물려 필연적인 부동산 인상을 야기하였다. 이에 관련하여 전문가들은 저축률 30%에 이르는 국가에서 관치금융과 같은 독재 후유증으로 인해 금융시장이 적절한 자산 증식 기회를 제공할 수 없기에 주기적으로 부동산 시장 특히 신규 아파트 시장으로 잉여 자금이 몰린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그러나 아래 그래프에서 볼 수 있듯 아시아는 금융위기 등으로 인해 결과적으로 부동산 붐을 피해갔고 한국에서의 부동산 시장 상승 역시 세계적인 추세에 비해서 물가 인상을 고려한 실제 인상폭은 실로 미미한 것이었다. 참여정부에만 한하여서도 그렇다. 한국의 부동산 시장이 안정국면에 돌입한 2007년 이전의 통계를 보더라도 2003년부터 2006년까지 영국, 이탈리아, 핀란드 등의 부동산 가격은 약 25% 상승하였고, 스웨덴, 노르웨이, 아일랜드는 약 35%, 미국은 약 40%, 프랑스, 스페인, 홍콩은 약 50%올랐다. 반면 2005년 부동산 시장 불안정을 포함한 2003년 말부터 2006년 말까지 3년간의 한국 부동산 시장 가격 인상폭은 13.8%에 그쳐 한국보다 저성장한 선진국들에 비해서도 당시의 부동산 시장 인상 수준은 낮았다.[71] 그러나 2015년 경실련이 내놓은 연구결과에 의하면 노무현정권 때 3123조원이 올라 최고치를 찍었다. 이게 얼마나 막대한 금액이냐면 2015년 전국 민유지 시가총액이 6704조원인데 노무현 정권 전에는 3500조원 미만이었다는 소리다. 이는 80% 이상 급등했다는 의미이다.# 5년간의 한강이남 집값 인상폭이 3년간의 홍콩 전역의 집값 상승 수준에 맞먹는 수준이었으니 강남 투기꾼 입장에선 실로 홍콩간 기분이었을 것이기는 하다.[* 아파트에 한정해서는 인상폭이 5년간 전국이 33.77%, 서울이 56.58%, 강남이 66.95%에 달했는데, 김대중 정권부터 신규 아파트 분양가격 규제 철폐 조치의 까닭이 크다는 점은 고려해야 겠으나 강남 3구의 아파트값 상승률은 '''강남구 79.88%''', '''서초구 79.40%''', '''송파구 82.83%'''에 달한다. # 알고보면 강남집주인들보다 전국 땅주인들의 산타클로스인 셈이다.
[image]
[image]
공공택지가 많이 확보되면서 앞으로 공공주택을 싼 값에 대량으로 공급할 수 있는 기틀이 갖춰졌다는 평가도 나온다. 노정부 5년 동안 공급된 택지는 총 2억 682만㎡로 김대중 정부 5년의 1억2615만㎡에 비해 64% 증가했다. 주택건설에 소요되는 2~3년 기간의 수요와 공급이 맞지 않은데다 주택을 구입할 현금이 많이 풀려 집값이 폭등했지만 이명박 정부에서는 안정적인 주택정책이 가능하다는 관측이다. 노무현은 12대 국정 과제 중 하나로 국민임대주택 50만호 및 수도권 5년 간 150만 호 건설을 내세운 바 있다. 이후 참여정부는 10.29 대책에서 4개 신도시를 통해 19만호를 추가하고, 장기임대주택 150만 호 공급을 추진, 8.31 대책 1주년 회의에서는 장기공공임대주택을 11만호 신규 비축하여 2017년까지 총 260만 호 장기임대주택을 공급하도록 하는 등 임기 초부터 지속적인 공급확대를 실시해 왔다. 이는 이명박 정부 5년 간의 주택공급보다 수십만 많은 규모이다.
고성수 건국대 부동산학과 교수는 "부동산시장은 일반재화와는 달리 경제학에서 볼 때 단기적으로 공급의 변화가 없는 움직임이 느린 시장이다", "공급의 확대를 통한 가격의 안정화를 정책 목표로 정한 경우에도 한정된 대통령 임기 중에는 그 효과를 거두기가 어렵다",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현재 부동산시장의 침체는 많은 부분 노무현 정부의 부동산 억제 정책 효과로 해석하고 있다. 일부 반시장적인 정책을 포함하여 주택 가격 하락을 위해 지속적으로 전 방위적으로 다양한 대책을 쏟아 부었던 노무현 정부의 정책효과가 임기 중에는 큰 성과가 없었으나 다음 정권에 이르러 빛을 발하고 있다는 얘기다."라고 세금 감면 등 각종 규제 완화 조치가 주요 내용이었던 2008년 이후 이명박 정부가 내놓은 18번의 부동산 정책과 3번의 세제조치가 주택 안정과 관련 없다 평한 바 있다. #
하지만 경실련은 이명박 정권의 보금자리 주택정책이 투기심리를 아예 꺽어버린 집값하락의 키포인트였다고 평가했다.# 실제로 문재인정권 들어서기 전까지 집값은 안정세를 보였다.
또한 한국건설산업연구원의 보고서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부분은 다음과 같다.
1. 결과적으로 성공한 집값 안정화. 2007년 특히 재건축 시장과 중대형 시장의 안정세가 뚜렷해졌다.
2. 실거래가와 시세간의 격차를 최소화.
3. 부동산의 공공재로서의 특성을 강조.
4. 기득권층의 개발이익 독점을 해소. 종부세 등으로 소득계층간 형평성을 제고.
5. 저소득층, 무주택자 문제 해결에 주력.
이러한 긍정적 평가를 종합하면, 과정에서의 부작용은 존재하였으나 결과론적으로 성공했다는 것이다.
비슷한 사례로는 박정희의 경제성장에 대한 평가가 있다. 박정희 당시의 경제성장은 과정에서의 부작용은 존재하였으나 결과적으로 성공했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또한 어쨌든 경제는 성장하고 부동산은 커질수 밖에 없음에도 박정희는 세계적 추세에 비해 고성장을, 노무현은 세계적 추세에 비해 안정화를 해냈다는 점 또한 비슷하다. 이에 관해 김병준 전 정책실장은 "부동산도 오르긴 올랐는데 당시 유동성이 워낙 크다 보니까 우리가 힘들었습니다. 사실 순서로 따지면 OECD 중요한 국가들 중 25~26개 국가를 비교해보면 우리가 적게 오른 국가로써 3번째 4번째쯤 될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지탄을 많이 받고 욕을 많이 먹었죠. 어쨌든 저희들이 책임져야 될 부분입니다. "고 한바있다.#
한편 전 한국은행 총재 박승은의 2007년 여름 한 인터뷰에서 "참여정부의 부동산 정책 성공했나"라는 질문에 "일단 단기적으로는 성공했다고 봐야 한다."고 답하며 특히 참여정부의 종부세에 대하여 "종부세 도입은 노무현 정부가 잘했다. 땅부자에 대한 응징이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인식이다. 다만 현재 종부세는 변칙이다. 재산세율을 높이는 것으로 전국민에게 적용하는 것이 원칙이다." (...) "문제점이 있기는 하지만 역대 정권이 하려도 못한 것을 노무현 정부가 잘했다고 평가하고 싶다."고 긍정적인 평가를 덧붙였다.
머니투데이가 24개 국내외 증권사 및 자산운용사를 비롯해 증권 유관기관, 증권업계 출입기자 등 총 213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한국증시를 움직이는 파워 10인에 있어서 노무현은 남다른 부동산 정책과 주식 사랑으로 시중 여유자금을 증시로 끌어오는데 결정적 할을 했다는 평으로 5위에 이름을 올리며 7명의 전문가로부터 "부동산시장의 안정을 강하게 드라이브했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기도했다. http://m.mt.co.kr/renew/view.html?no=2007061316113378985&ca=enter&dt=, #
반면 집권과 동시에 투기꾼들을 잡겠다며 집값과의 전쟁을 선포한 노무현 대통령의 부동산에 대한 전반적인 과세 및 증세를 통한 조세개혁, 규제 정책 합리화를 추진[72] 함에도 불구하고 투기꾼들을 근절하지 못했고 무지막지하게 부동산 가격이 올랐으므로 실패했다는 평도 존재한다.
일례로 당시 한나라당 최고위원 정몽준은 결과적으로 실패했다고 평한 바 있다.
이외에 한국건설산업연구원의 보고서에서 부정적으로 평가한 부분은 다음과 같다.
1. 실수요자 구매력 위축.
2. 공시가격 6억 이하의 다운계약서 성행.
3. 부동산 안정정책과 정부의 공급 확대 정채간의 모순.
4. 빈번한 후속대책.
5. 소득계층간 대립 및 갈등 구조 형성.
6. 실무의견 반영 미흡
부정적인 평가를 종합하면 지나치에 공공측면에만 정책 역량을 집중했고 시장논리에 이데올로기를 지나치게 끌여들였으며 정책 신뢰도를 크게 제고하지 못해 부작용이 컸다는 평이라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참여정부의 부동산 정책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평가가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 특히 수도권의 집값의 경우 48.26% 폭등할 정도였다 '강남불패'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전국민이 공공연한 투기 열풍에 휘말렸고 강남 집값은 일주일에 수천만원씩 매매 가격이 오르는 현상도 벌어졌다고 한다. 집 없는 서민들의 부담만 늘어난 셈. 이러한 부동산 폭등은 참여정부의 국정 지지도 하락으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
[image]
[image]
[image]
양도세 중과 정책의 경우 부동산 투기 수요를 근본적으로 차단하지 못한다는 것이 경제학계의 중론이고, 필연적으로 조세전가를 일으켜 도리어 부동산 가격 폭등을 유래할 수도 있다고 한다. 참여정부 부동산 대책의 한계점은 크게 세 가지를 꼽을 수 있다.
  • 자신이 공약한 분양가 상한제 등을 시장 논리 운운하며 거부한 것.
  • 뉴타운과 기업특구등 개발 법안들을 통과 시켜 강북과 지방에 개발지들을 무분별하게 지정한 것.
  • 김진표와 이헌재등 경제 관료 출신(모피아)들을 대거 경제 중추에 활용한 것.
참여정부는 대통령 자신이 공약한 분양원가 공개를 반 시장논리와 사회주의 운운하며 집권 후반기까지 거부했으며, 10배 남는 장사, 10배 밑지는 장사 참조[73] 영국에 뿌리를 두고 있는 뉴타운 건설법과 혁신도시, 기업도시 등 각종 지방 사업들을 벌여 공급 과잉을 초래했고, # 모피아 출신들이 내는 정책마다 꾸준히 구멍을 뚫어 주상복합아파트등을 규제에서 제외시키는 등등의 일들이 벌어졌다. # '''당시 투기꾼들은 정부의 규제안이 곧 투기에 대한 가이드라인이라고 여겼을 정도.''' 이와 같은 모순적인 행보에 의해서 갈팡질팡 우왕좌왕으로 비춰졌고, 당신 국민들의 정부에 대한 신뢰는 바닥에 수렴했다. 거기다 대통령은 임기 중 공공연히 부촌의 고유명사를 거론하며 규제를 거론했으니, 이는 해당 지역을 펌프해주는 격이었다. 집권 후반기에 와서야 종합적인 대책과 논란이 있던 정책들 정립한 것이고 그 이후엔 가격이 어느 정도 안정화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현재까지도 악영향을 끼친다는 시각도 존재한다. 부동산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참여정부의 대표적 부동산 규제에는 DTI, LTV 제한 정책이는 2008년부터 닥친 미국의 서브프라임 위기에서 한국 부동산 시장이 붕괴하지 않게 일조했다는 평가가 있다. 그러나 현실적인 이유는 미국처럼 대출채권의 증권화가 활발하게 이뤄지지 않고 부동산 부채를 각 가계가 직접 감당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반론이 있다.
또한 집값이 오를때마다 정부에서 나서서 집값을 잡겠다고 하는것도 하나의 화근이 되었다. 집값이 조정당하면 집주인들 당사자들의 집값이 떨어질것을 우려해서 집주인들이 집값을 높게 책정했기 때문이다. 즉 올리고서 조정당하면 크게 손해를 입지 않을것이라는 계산에서 이렇게 된것이다. 결국 정부는 집값을 잡지 못하였고 이렇게 올라간 집값을 떨어지지 않았다. 현재2016년에 들어와서는 떨어지는 기미를 보이고 있으나 이것은 단순히 수요와 공급의 논리상 떨어진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급측에서 요구하는 가격은 부담스러운건 사실이다. 노무현 정부가 부동산 폭등을 막지 못했다는 것으로 비판을 듣는 것은 당연한것이고, 무엇보다 임기 내내 이루어진 투기 열풍을 제지하기는 커녕 참여정부는 무기력하게 끌려다녔다.
규제정책의 성과는 전혀 없었고, 심지어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일어난 후에도 이어진다. 이명박 정부가 보금자리 주택정책을 펴면서 투기심리가 꺽이고 그 이후 문재인 정권이 들어서기 전까지 주택가격은 안정세를 보인다.
KBS에서 취재하여 제작하려다가 저지되었고 JTBC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가 2016년 1월 29일에 방영한 대한민국 훈장 수여의 실태 보도내용에 의하면 이때 실패하였다고 인정한 8.31 부동산 대책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훈장을 수여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노무현 정부를 호의적으로 평가하려 하는 입장에서도 비판을 해야 하는 사안이다.
이렇게 올라간 집값을 잡을려고 이명박정부에서는 보금자리주택정책을 추진했고, 이는 효과를 발휘해 투기심리는 가라앉고 추진중이던 재개발은 좌초되고, 재건축 아파트 가격은 폭락한다.[74]
이런 부동산 가격 상승으로 지방 - 수도권 - 서울간, 서울 안에서도 강남 - 기타지역간의 자산격차가 극심해져서, 차별의식이 본격적으로 배태되기 시작했다는 시각도 존재한다.
구구절절한 것들은 다 읽을필요 없이 경실련과 경향신문이 조사한 결과를 보자. 2015년 기준 대한민국의 사유 부동산 시가총액은 6704조원이고, 그중 3123조가 노무현정권때 올랐다. 1964~2015(51년) 사이에 오른 부동산가격의 46%는 노무현 정권 5년 사이에 올랐다는 의미이다.[75] 이 외에 추가로 참고기사가 있는데 보려면 보자.

4.3. 종합부동산세


해당 문서 참고.

4.4. 법정계량단위 개정


노무현은 2007년 미터나 제곱미터, 그램 등 '법정 단위'의 정착을 위해 2007년 '계량에 관한 법률'을 시행했다. 그리고 평, 인치, 돈, 말, 되, 근 등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고 이를 위반하면 처벌을 하는 등 법정계량단위 사용을 의무화했다. 그리고 이전에는 '이러한 개정이 일본식 단위를 개정하기 위한 조치였고, 이런 조치로 일상생활에서의 큰 혼란이 일어날 수 있다'는 '''지적'''이 적혀 있었다. 그러나 척관법 문서에서도 있듯이 '''척관법은 고대로부터 써오던 단위이다.''' 삼국지연의에서 흔히 나오는 것이 수십근의 무기를 젓가락처럼 가지고 놀았다든지, 키가 몇 척이라는 표현을 볼 수 있으며, 수많은 사서에서도 근, 평 등의 표현을 볼 수 있다. 문제는 이놈의 척관법이라는 것이 시대마다 기준이 달라서가 문제이다. 자세한 것은 문서를 참조하기 바란다. 다만, 현재 한국에서 쓰이는 척관법의 경우에는 일본영향이 없다고는 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메이지 일본시대 표준화된 척관법을 따르기 때문이다.[76]

또한 척관법은 일반인이 이해하기에 정말로 불편한 단위이다. 편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1961년에 미터법을 도입하고 꾸준한 계도를 통해 일상생활에서 척관법이 많이 사라졌으며, 척관법을 미터법으로 계산하여 평가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1평이 3.3미터제곱이라니 1근이 600g이라고 말이다. 척관법이 편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이러한 미터법에 기반한 척관법이기 때문이다. 척관법이 왜 문제냐면 이게 물체마다 기준이 다르다. 예를 들어서 '''1되의 중량이 쌀과 좁쌀은 1.6kg, 보리쌀과 흰콩.검정콩은 1.4kg, 수수와 율무는 1.5kg이다. 심지어는 같은 깨 종류이지만 참깨는 1되가 1.2kg인 반면 검정참깨는 1.0kg, 들깨는 0.9kg이다.'''# 물체마다 기준이 다른데 이게 편하겠는가? 거기에 척관법의 눈금은 정말로 큼지막 해서, 오차범위가 크다. 일상에서 볼 수 있는 예는 부동산이다. 부동산에서 방을 보러다니다 보면 이 방은 넓은 6평이라니 작은 6평이라니 하는 말을 들을 수 있는데 정말 차이가 크다. 그 이유는 평의 단위가 3.3미터제곱이기 때문이다. 참고로 5.5평이니 하는 개념은 미터법이 들어갔기에 되는 계산이다. 이렇게 기준이 다른데 이것이 일상생활에서 편하겠는가?
그렇기에 미터법을 도입하고 척관법을 폐기하자는 기사는 광복이후부터 차고 넘친다.[77] 그리고 척관법을 유지해야 한다는 주장이나 기사는 눈을 씻고 찾아볼 수가 없다. 즉 척관법 자체를 폐지하는 것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는 바이고, 사회편익을 증진하기 위해서는 미터법으로의 개정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거기에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진즉에 척관법을 미터법으로 바꾼지 오래다.
그럼에도 이 사항이 논란이 있는 문단에 있는 이유는 당시 정부에서 1961년이후 도입된 미터법이 일상생활에서 정착되지 않았기에 이를 위해서 미터법만 쓰도록 강제하고 벌금을 부여했기 때문이다. 물론 미터법이 1961년부터 도입되었기에 많은 부분에서는 미터법이 정착되었고, 척관법보다는 미터법이 보편화되었지만[78] 척관법만 써온 사람들에게 미터법만 쓰라고 하는 것은 그들을 배제한 정책이고, 사회를 1년 만에 바꾸려고 한다는 것이 문제였다.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지금 당장 1년만에 도로명주소만 쓰고 안쓰면 벌금이라고 한다면 그냥 사람들이 가만히 있겠는가? 심지어 지금 도로명 주소가 도입된지 꽤 시간이 흘렀는데도 말이다.
당연히 당시에도 큰 반발이 있었고, 척관법과 미터법을 병기하고 차츰 척관법을 폐기하는 쪽으로 가야지 무슨 1년만에 바꾸냐고 반발이 있었고, 정부에서는 이를 인정하여 미터법 강제조치를 유예하고 계도기간을 늘렸다.
물론 과태료가 미터법 정착에 도움이 된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사실 미터법은 본고장 프랑스에서도 폐지되었다 부활한 적이 있었다. 나폴레옹은 집권 초기인 1801년에는 프랑스 혁명의 유산임에도 불구하고[79] 미터법을 공식 단위로 지정하였으나 1810년대에 들어서 권력이 약해지자 미터법을 폐지하였다. 그리고 1840년 미터법이 부활했는데, 이 때 미터법이 정착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미터법을 쓰지 않을 때마다 냈던 10프랑의 벌금이었다.[80]

5. 개인적 논란



[1] 코드 인사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라는 유시민 전장관 강연 기사 [2] 김우식 전비서실장 인터뷰기사[3] 위 문장은 이강로 전주대학교 교수 보고서에 따릅니다.[4] 오히려 김대중 정부 후반기에는 DJ직계 인사를 단 한 명도 고용하지 않았다.[5] 전임자는 바로 그 말 많던 조기숙이었다. 본인도 자신의 문제를 알긴 하는지 물러나면서 "내가 떠나면 나라가 조용해질 것"이라고 발언하기도 했다(...)[6] 이때 관련된 사람이 양정철 비서관이었다.[7] 사실 참여정부와 열린우리당은 2006년 제4회 지방선거에서 이미 사형선고를 받은 상황이었다.[8] 부패방지 시스템 측면에서 상당히 선진적인 미국의 메디케이드 부정수급문제는 유명하다.[9] 출저[10] 관료주의 최고봉이라는 일본에서도 대학 법인화, 우체국 민영화를 추진함으로 경쟁국가들의 민간 활력을 높이고자하는 의도를 반대로 하고 있었던 것.[11] 문제는 이 양보를 권고한게 '''4대개혁입법 모두'''라는것이다. 심지어 국가보안법은 여야 합의된 부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예 손도 안댔다.[12] 16대 대통령 선거의 부산경남의 득표수를 보면 보면 이것이 지역주의 타파에 영향을 줬다는것을 볼 수 있다.링크[13] 통영시-고성군,의령군-함안군-합천군,밀양군-창녕군 등 시골에서도 40% 정도 얻었다. 만약 정동영의 노인 비하 발언이 없었다면 부산경남권에서 이길 가능성은 충분히 높았다. 물론 그 이후 동교동계와 친노사이의 관계는 더욱 영...[14] 대한민국 제 17대 국회의원 선거링크, 대한민국 행정구역 링크[15] 당시 지방선거는 반노무현, 반열린우리당으로 전국을 대동단결시키는 위업을 달성했다.[16] 대한민국 제 4회 지방 선거링크[17] 이는 17대 총선/19대 총선에서의 부산경남권의 비례대표 득표율 선전과 5회 지선때의 김두관 후보의 경남 진출로 증명이 된다.[18] 예를들어 성매매에 관해선 아무리 엄밀하게 한다고해도 인간에 대하여 이야기할것이기에 성매매를 인구중에 4/5가 안한다고해도 해외로가거나 은밀하게 수요가 있을수도 있을것이므로 다른방법으로 남아있을수도 있다. 여담으로 성인남녀가 합의하에 성관계를 하는것은 나쁜것이 아니다. 자유로운 성관계도 나쁜것이 아니다. 하지만 아이에 대해 책임지지 않는것은 나쁜것이다. 여성도 피임약이라는 약도있고 공인되어 사용되고 있지만 제일 인체적변화도 없고 바로 탈부착하면 사용가능한 콘돔사용을 일상화하는것이 좋으며 남성이 책임을 제대로 지는것이다.[19] 당시 기준, 현재는 최대 15억원까지 조정된다.[20] 참고로 당시에 문재인과 한명숙 역시도 이것에 찬성하는 입장이었다.[21] 여성; 모성보호, 양성평등 실현, 경제활동 장애요소 제거, 장애인; 안정적 고용과 교육권∙이동권 개선, 학벌; 지방대학 출신 고용 확대, 비정규직; 비정규직 보호입법 및 남용 규제, 외국인과 이민자; 제도적 차별 철폐 및 다문화적 사회통합 정책 실시, 연령; 연령차별금지, 능력에 따른 노동 강조, 빈부격차∙차별시정위원회, 차별시정기구일원화 방안(2004)[22] 2007년, 양극화∙민생대책위원회로 개편되었다.[23] 이상 참여정부 정책보고서 인권 관련 요약.[24] 사실 '노간지'의 시작은 아직 대통령 재직 중일 때 나왔다. 전작권 연설 당시 "미국이 호주머니 손 넣고 그러면 우리 군대 뺍니다"라고 말하면서 호주머니에 손을 넣는 시늉을 하던 동작이 사진에 찍히면서, 재미있어서 디시인사이드를 중심으로 필수요소로 쓰인 것. 이때의 노간지가 합성 소스로서의 간지라면, 퇴임 후의 '노간지'는 말 그대로 말 뜻 그 자체로 쓰인 것이다.[25] '''아버지, 안아주십시오!''', '''맞습니다 맞고요 따라해 보실 수 있겠습니까?''' 등.[26] 호주제가 일제강점기 때 들어온 제도로 아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는 잘못 알려진 사실이다. 무려 고려시대 때부터 호주제는 멀쩡히 존재했었고, 다만 일제 때는 총독부에 의해 일본식으로 조금 고쳐진 것에 불과하다.[27] 이전부터 호주제 폐지를 위해 꾸준히 노력해온 인사 중 하나. 특히 기존의 법안 제출 정도의 액션의 소극성을 지적, 여성단체들에게 유엔 인권이사회에 호주제의 문제점을 제소하는 방식을 제안하여 국제여론을 통한 사회인식 재고에 큰 기여를 했다.[28] 왜냐하면, 일단 권위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를 대략적으로 살펴보면 '남을 지휘하거나 통솔하여 따르게 하는 힘'이나 '일정한 분야에서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고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위신'이다. 반면에 권위주의는 '어떤 일에 있어 권위를 내세우거나 권위에 순종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보다시피 권위라는 단어는 '타인의 위에 군림하는 능력'을 뜻하는 중립적인 단어이고 권위주의는 부정적인 단어다. 곧 '''탈권위주의'''는 분명히 좋은 것이지만 '''탈권위'''는 단어의 의미에서 비추어 보았을 때 반드시 좋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곧 노무현이 탈권위적이었다고 해서 그것이 무조건 잘했다고 칭찬할 수 없는 것이며 권위적이었다고 해서 무조건 비판할 것도 아닌 것이다.[29] 실제로 혹자는 노무현이 대통령 재임 당시 권위적이지 않은 모습을 너무 많이 보여줘서, 사람들이 한 나라의 '''수장이나 되는 대통령이라는 사람을 자기들이 욕하고 싶다고 마음대로 욕하고 비방'''하게 되는데(실제로 노무현 역시도 재임 당시 별것도 아닌 일로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다!" 소리를 많이 들었고, 노무현 이전의 대통령들 때에는 이런 식으로 대통령을 되도 않게 무턱대고 비난하는 게 불가능했다는 걸 생각해보자.) 어느 정도 일조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30] 참고기사 그러나 기사를 보면 알겠지만, 이건 단순히 체면 구겼기 때문이라고 볼 수 없다. 원래 노무현은 철도 노조와의 타협을 통해 파업 대신 합의안을 기초로 하여 중요사안을 넘기려 했고, 실제로 정부와 철도노조는 합의안에 동의하고 파업을 하지 않기로 했다. 그러나 철도노조에서 돌연 합의를 깨고 총파업에 나선 것이다. 정부입장에선 기껏 협의체 만들어서 적극적으로 협상하고 합의안 내놓고 쌍방 동의로 일이 풀리나 싶었는데 상대방 측에서 밥상을 뒤엎은 셈. 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당시 철도청을 철도공사와 철도시설공단으로 분리하는 과정에서 철도청의 빚을 모두 철도공사에 보냈다. 협상과정에서 이 사실을 노조에는 알리지 않았고 차후에 이 사실을 알게 된 노조는 이에 반발해 파업한것이다. 이는 철도공사의 재정에 막대한 악영향을 끼치는데 2018년에도 철도사용료로 매출액의 34%를 철도시설공단에 내고 있다. 빚은 빚대로, 사용료는 사용료대로 내고 있으니...[31] 조선, 중앙, 동아에 비해서 마이너였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소자본 소규모 언론에 비해 마이너라고 하면 사실과 다르다. 이들 언론은 국민들에게 어느 정도 인지도를 가지고 있었고, 실제로 당시 '진보언론'이라고 하면 경향과 한겨레를 대표적으로 꼽기도 했다.[32] 요즘으로 치면 소위 강남좌파이미지를 환기시키기 위해 악의적으로 언급했던 것. 요트 취미에 대해서 요트라고 하면 호화로운 선상파티 같은 이미지가 있던 당시에 그런 왜곡기사를 냈는데 실제로는 영화 변호인에 나온 것처럼 작은 판때기 하나에 돛하나 달고있는 경기용 딩기였고 그것도 88올림픽 국가대표를 위해 등록했던것[33] 당시 소속당 김영삼 총재는 언론을 그렇게 다루면 안될텐데.. 라며 우려했고 결국 우려대로 정치인생 내내 언론과의 싸움에 시달리게 된다.[34] 김대중 대통령은 전 임기를 걸처 118건만을 행사했다.[35] 간단히 말해서 언론은 정부가 불러주는것만 받아적고, 취재같은것 하지 말라는 의미이다. 이 조치에 대해서는 조치 자체도 보수언론 뿐 아니라 언론 전체의 기존 창구가 가로막히는 문제이니 만큼 특정 신문이 반발하기 보다 보수,진보 매체 가리지 않고 비판했다.[36] 조선일보에 게재되었는데 '민주화 투쟁시절 당한 것은 알겠지만 지금 이렇게 정책을 고수하는 건 정신병 증세'라고 말했다. 이런 극단적 막말이 메이저 신문의 대기자가 쓴 글로 버젓히 게재된 것이다.[37] 참고로 2017년 19대 대선 과정에서는 국민의당에서 권양숙 9촌 특혜 의혹(결과적으로 사실이 아니었다)으로 문재인을 공격 하면서 이전의 권양숙 20촌 드립이 다시 주목 받았다.[38] 피아제 뇌물수수는 사실로 밝혀졌으나, 논두렁에 버렸다는 것은 거짓으로 밝혀졌다. 현재는 당시의 중수부장의 폭로로 시작해서 이 '''허위사실'''을 국정원과 경찰 어느쪽이 퍼트렸는지로 공방중인 상태(정확히 말하자면 피아제 시계를 받은 후 문제가 불거지자 논두렁이 아닌, 그냥 밖에 버렸다 진술한 것인데 논에 버렸다고 확대, 왜곡된 것이다. http://m.khan.co.kr/view.html?artid=201502250600075&code=940301)[39] 일제시절 조선 동아는 독립운동가들의 글을 실어주는 몇 안되는 민족 자본의 언론이었고, 동아일보는 잘 알려져있다시피 손기정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폐간된 적도 있다. 더군다나 동아일보 백지광고 사태때 민주화 운동가들에게 대대적인 지원을 받았다. 조중동=100% 친일, 독재는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40] 첨언하자면, 김대중 대통령은 보수언론마저도 포용의 대상으로 바라보아 그들과의 관계를 악화시키지 않기 위해 상당히 유화적인 제스처를 취했다.[41] 2010년대의 페이스북은 자율적이지만 실명제를 사용하는 SNS나 마찬가지인데, 페이스북에서도 실명을 걸고 거침없이 악플을 다는 사람들이 있는것을 보면 인터넷 실명제의 악플방지 효과에 더욱 의문이 생긴다.[42] 또한, 같은 이름을 쓰고있는 동명이인에게도 피해가 갈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43] 이에 대해서는 조금 논란의 여지가 있다. 비록 공동어로수역=군함 진입은 아니지만 북한이 합의를 제대로 지킨다는 보장도 없고, 북한의 어선 선원 상당수가 무장을 한 '''현역 군인'''이기 때문.[44] http://allinkorea.net/sub_read.html?uid=7524&section=section13&section2=|#[45] #[46] # 하지만 2016년에는 새누리당 김성태 의원은 공동어로구역 설정에 대한 긍정적 검토 의견을 펴기도 했다. 김성태 의원은 참여정부 시절 국회의원은 아니었다.[47] 출산율이 매우 높았던 걸 생각해보자.[48] 이라크 전쟁이 정의롭지 못하다는 주장은 이라크에 핵무기가 없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한층 더 강화된다.[49] 실제로 이라크에서 한국에 대한 이미지가 그리 나쁘지만은 않다.[50] 반대자들 대부분이 좌파이자 극렬 NL들이었고 이들의 사상적 마인드는 반국가적 행동의 정당화였기 때문에 대외적으로도 이들에 반대시위는 정치적으로 악영향의 부담이었다.[51] 대량살상무기의 증거를 찾지 못한 부시 정부는 결국 도중에 독재자 사담 후세인을 없애 이라크에 민주주의를 심어주자는 명분을 내세우기에 이른다.[52] 태양의 후예(드라마)의 배경이 되는 가상의 나라 우르크는 이라크.[53] 참여정부 정책 종합평가, 36쪽 등[54] 경제개발 이후 당시까지 가장 낮은 성장률이었고, 유일하게 세계평균이하이기도 했는데 어떻게 평균이상이라고 하는지 모르겠다.[55] 또한 이는 저환율로 인한 효과임을 부정할수 없다. 대한민국이 최초로 1인당 GDP가 2만 달러를 넘은 2006년 당시의 환율은 900원대 초반이었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경제성장률에 마이너스를 찍은적이 없던 2009년의 1인당 GDP는 17000달러까지 내려앉았으나 당시 환율은 1300원에 육박했기에 실질적인 경제는 성장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56] 971687/736588, 802026/569878[57] 971687/813530[58] 그러나 2005년 역대 최고 순위인 10위에 오르기도 하는 등 성장률에 관해서는 아직도 평가가 극심히 나뉘고 있는 부분이 크다.[59] 부동산시장 안정 및 주거복지 – 투명하고 공정한 시장질서와 안정적인 공급기반 확립, 2008 p.121[60] 정부 산하 실록 부동산정책 40년사 특별기획팀이 2008년 2월 ~ 3월 사이 학계, 언론계 등 관련 전문가 17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심층 설문조사[61] 새 정부의 부동산정책 로드맵 집단 및 평가, 한국 부동산학회 산하 미래부동산연구원 분과위원회 주관 p.31[62] 부동산시장 안정 및 주거복지 – 투명하고 공정한 시장질서와 안정적인 공급기반 확립, 2008 p.121[63] 새 정부의 부동산정책 로드맵 집단 및 평가, 한국 부동산학회 산하 미래부동산연구원 분과위원회 주관 P.29[64] 참여정부 부동산 정책의 이념과 형성분석 과정[65] 새 정부의 부동산정책 로드맵 집단 및 평가, 한국 부동산학회 산하 미래부동산연구원 분과위원회 주관 P.31[66] 새 정부의 부동산정책 로드맵 집단 및 평가, 한국 부동산학회 산하 미래부동산연구원 분과위원회 주관 p.32[67] 새 정부의 부동산정책 로드맵 집단 및 평가, 한국 부동산학회 산하 미래부동산연구원 분과위원회 주관 p.32[68] 참여정부 경제정책 종합평가 제1편 16쪽 참고[69] 새 정부의 부동산정책 로드맵 집단 및 평가, 한국 부동산학회 산하 미래부동산연구원 분과위원회 주관 p.32[70] PIR에 대한 일률적인 비교는 곤란하다. 2013년 발행된 국민은행의 "주요국 주택가격 비교와 시사점"이라는 보고서에 따르면 2013년 11월 현재에도 한국의 GDP 대비 부동산 가치는 436%에 달하며 미국은 114%, 국내와 여건이 비슷한 일본도 171%에 비해 크게 높고 일본의 거품이 절정에 달했던 1990년 도쿄의 PIR이 8.5였는데서울의 PIR은 2007년 12.6을 찍었다는 사실로 동등한 비교가 곤란하다는 주장도 있으나 통계 자체가 통일되지 않은 점 등 따져봐야할 여러 문제가 존재한다. 미국의 경우 LA, 뉴욕, 샌프란시스코 등 인구가 밀집한 대도시의 PIR은 9~10라는 미국 부동산중개업자협회(NAR)와 미국주택도시개발부 (HUD)협회의 자료도 있고, 참여정부시절 국정홍보처가 펴낸 ‘투기의 종말’(2006년 8월)이라는 자료에 따르면 미국처럼 중간소득으로 계산할 경우 한국 PIR은 3.1배에 불과한 것으로 조사되기도 했다. 한국주택금융공사가 2006년 대출이용자를 대상으로 조사,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 전국의 PIR은 3.8배. 국민은행이 2007년에 발표한 “주택금융수요실태조사”를 보면, 중앙(중위)가격 기준 PIR은 매우 낮은 수치임을 알려준다. 언론에 발표된 이 자료에 따르면 2007년 기준 PIR의 경우 강남은 11.6배이지만, 중앙값으로 PIR을 산출할 경우 6.3배로 떨어지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에 김영삼 정부는 부동산 문제가 해결된 줄 알고 개혁 및 제도 정비에 소홀히했다는 평이 있다.[71] 부동산시장 안정 및 주거복지 – 투명하고 공정한 시장질서와 안정적인 공급기반 확립, 2008 p.124[72] 양도세 중과, 종합 부동산세 부과, 주택거래신고 지역 지정, 분양 상한가 전면 적용 정책 등[73] 노무현은 임기말 미분양이 급증하자 미분양을 사들이라는 지시를 내렸다. 열배남는 장사는 있어도 열배 밑지는 장사는 없다?[74] 서울 각지의 재개발지구들이 사업진행이 제대로 되지 않아, 조합이 해체된 곳이 많았다. 대표적인 재건축 단지였던 은마아파트는 2002년 4억대였으나 2007년 10억대를 찍었고 2012년 7억대로 폭락했다.[75] 이는 2008~2015년 사이 부동산이 전혀 오르지 않았다고 가정해도 90% 이상의 상승률을 보였다는 소리다. 강남 3구아파트 상승률이 70~80%대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전국 부동산 상승률이 강남 3구 아파트 상승률을 뛰어넘었다는 의미이다.[76] 재미있는 것은 메이지시대 척관법은 고려시대 척관법에 영향을 받았다는 점이다. 결국 돌고도는 척관법[77] 대표적으로 2개만 가져왔다. 1959년 기사. 1962년 기사 [78] 우리는 척관법의 기준을 다 미터법으로 환산하여 파악한다. 예가 위에서 언급한 1근은 600g이다.[79] 비슷하게 혁명 당시 만들어진 프랑스 공화력은 미터법과는 달리 살아남지 못했다.[80] 김일선, 「단위로 읽는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