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종속

 


'''도서명'''
The Subjection of Women(英)
여성의 종속(韓)
'''발행일'''
1869년(원서)
2006년(역서)
'''저자'''
존 스튜어트 밀
(John S. Mill)
서병훈 역
'''출판사'''
Longmans, Green, Reader, & Dyer(원서)
책세상문고(역서)
'''ISBN'''
9788970135502
#Amazon
1. 소개 및 출간 배경
2. 목차 및 주요 내용
2.1. 챕터별 내용 정리
2.2. 여성은 열등하지 않다
2.3. 여성의 종속 = 노예제 = 전제군주제
2.4. 여성의 자유는 남성에게도 유익하다
3. 의의 및 논쟁
4. 둘러보기

"역사를 통틀어 여성이 처한 현실적 입장을 가장 조리 있고도 유창하게 서술한 저서다. 또한 빅토리아 시대 여성의 법적 종속, 여성을 나약하게 만드는 교육, 여성의 숨통을 죄는 '아내다운 복종' 이라는 윤리를 효과적으로 공격하는 저서다. 《여성의 종속》 은 밀의 《자유론》 에 버금가는 강력한 주장을 담고 있으며, 노예제나 농노에 대한 다른 글만큼이나 뛰어난 자제력으로 인본주의적 분노를 보여주고 있다."

-

- 케이트 밀렛(K.Millett), 《성 정치학》, p.191

"우리는 경험을 통해 역사가 언제나 여성의 사회적 위치를 향상시키는 조치와 더불어 한 단계씩 발전했고, … 여성의 전반적인 지위가 올라가느냐 내려가느냐를 따져보는 것이, '''한 민족 또는 한 시대의 문명 발전 정도를 측정하는 가장 확실하고 정확한 기준'''이 된다고 믿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

- p.47 (일부 구문은 나무위키에서 자체 강조)


1. 소개 및 출간 배경


본서는 '''남성의 우월함과 여성의 열등함으로 나누어서 종속적 관계를 아름다운 의존관계라고 찬양하던 빅토리아 시대 사람들의 통념에 도전하는 책'''이다. 구체적으로, 이 당시의 사람들은 여성이 열등하다는 주장을 펼칠 때 "그 열등함은 자연의 섭리이다", "여성들이 열등한 처지에 만족하고 있다", "여성들은 여성다운 것을 더 잘 한다" 등의 주장들을 펼치곤 했는데, 저자 존 스튜어트 밀은 이와 같은 당대의 통념이 남성들만의 근거 없는 뇌피셜(…)이라고 주장했다. 이 반론을 위해서 저자는 크게 결혼생활과 사회생활에 포커스를 맞추어 논의하고, 마지막으로 이것이 남성들에게도 도움이 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윤진숙(2014)[1] 및 역자에 따르면, 본서는 근대 서구 페미니즘 이론사의 출발점에 있다고 하며, 실제로 본서의 가치는 '''리버럴 페미니즘의 기수와도 같다'''는 데에 있다. 물론 본서가 저술되던 시대에는 페미니즘(feminism)이라는 개념이 제대로 정립되지도 않았던 시절이었겠지만, 본서가 페미니즘의 주요 고전들 중 하나로 당당히 이름을 올리고 있는 것을 보면, 이후 백 년이 훌쩍 넘는 시간 동안 페미니즘 사상의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역자를 포함하여 많은 이들은 본서가 메리 울스톤크래프트(M.Wollstonecraft)의 저서 《여성의 권리 옹호》(1792)의 뒤를 잇는다고 평가하고 있다. 사실 현대 페미니즘의 많은 조류들이 리버럴 페미니즘을 비판하고 서로 대립하는 관계 속에서 발전해 왔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본서는 리버럴 페미니즘의 핵심 사상을 대표하여 여전히 많은 평가와 비판이 이루어져 왔다.
당시 영국의 시대상은 '''빅토리아 시대'''라고 한 마디로 정리될 수 있는 성적 보수주의금욕주의, 그럼에도 불구하고 뒤로는 즐길 것 다 즐기는 특유의 위선적인 면모가 동시에 존재하는 사회였다. 오늘날까지도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매너 있는 영국 신사들" 의 이미지와는 달리, 이 시대의 섹슈얼리티는 '''모순적이고 아이러니한 면'''이 존재하고 있었다. 겉으로는 귀부인들에 대해 간쓸개 다 빼놓고 헌신할 것처럼 맹세하는 신사들의 등 뒤에는, 그런 '귀부인' 이 끝내 되지 못한 수많은 '탈락자' 여성들이 있었다. 특히 아무리 정숙하고 우아하고 고매한 영애였을지라도, 한순간의 인간적인 충동을 못 이기고 짝사랑하는 옆집 소년과 낭만적인 밀회를 즐기다가 들키면 그 길로 집에서 쫓겨났다. 쫓겨난 "전직 숙녀" 들이 갈 곳은 달리 없었다. 긍지를 버리지 못한 일부는 수치심에 못 이겨 템즈 강에 몸을 던지고, 구차하게나마 살고 싶었던 일부는 매음굴에 들어가서 낮에는 젠틀한 신사인 척했던 남성들에게 밤마다 몸을 팔면서 생계를 이어야 했다. 런던 뒷골목의 수많은 '창녀' 들을 숨긴 채, 넓은 드레스를 입고 연회장에 나타나는 '귀부인' 들을 칭송하던 것이 그때의 삶이었다.[2] #참고자료
특히 이 당시의 기사도적인 문화는 많은 후대의 페미니스트들과 역사학자들에게 비판 받아 왔다. 그것이 실질적으로 여성들의 현실적 삶과 사회적 지위에 어떤 도움도 되지 못했던 체면치레라는 것이 케이트 밀렛(K.Millett)의 《성 정치학》 에서도 지적되고 있다. 물론 이때의 기사도적인 문화라는 것은 그 이전 시기에 기사들이 귀부인을 모시던 예의범절의 가이드라인에서 은유한 것인데, 모든 남성은 마땅히 모든 여성을 잘 모셔야 한다는 생각이 사회적 규범으로 자리잡아 있었다. 이게 왜 문제가 되는가 싶을 수 있는데, 이 당시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남성이 여성보다 우월함을 당연한 사실로 받아들인 상태에서 기사도를 주장한 것이었다. 다시 말해, '''"열등한 여성이 우월한 남성에게 의존하는 것을 보라, 얼마나 아름다운가! 우월한 남성이 열등한 여성을 돌보고 챙겨주는 것을 보라, 얼마나 조화로운가!"''' 의 메시지가 널리 퍼져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본서를 포함하여 많은 페미니즘 서적들은, 여성의 열등함을 전제로 하여 여성에게 봉사하는 것이 결코 바람직한 것이 아님을 입증해 내야 했다.
저자는 저 유명한 철학자존 스튜어트 밀(J.S.Mill)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여성에 관련된 행적만 요약하여 언급하기로 한다. 그는 1865년에서 1868년 사이의 기간에 정계에서 활동하였는데, 여성의 참정권을 지지하고 지역구 이기주의를 배격하는 등의 활동을 했지만, 이후 재선되지 못하고 낙선하고 말았다. 그는 당시 기준으로 너무나도 진보적이어서,[3] 실제로 여성 참정권이 인정된 세계 최초의 사례는 뉴질랜드(1893)였고, 그의 조국 영국에서는 1928년이 되어서야 인정되었다. 이런 급진성에도 불구하고 밀은 여러 면에서 시대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비판도 받고 있어서, 그의 철학에서 "자격을 갖춘 자" 를 너무 강조하는 바람에 까이기도 많이 까인다. 대표적으로 《대의정부론》(Considerations on Representative Government)에서는 엘리트주의적 성격도 엿보이며, 《자유론》(On Liberty) 에서는 제국주의적인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했다고 비판을 받기도 할 정도. #참고자료
그런데 한편으로, 밀은 사생활에 있어서는 '''자타가 공인하는 애처가'''였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아내 해리엇 테일러(H.Taylor)에 대해 "나보다 더 뛰어난 사상가", "내 생애의 영광이며 으뜸가는 축복" 이라고 칭찬했다.[4] 그의 대표작 《자유론》 을 제외한 모든 저서들이 아내의 사상의 영향을 크게 받았고, 아내의 퇴고 및 검수를 거쳤을 정도로 둘의 사상이 동일했다고 한다. 부부 서로가 서로를 사상적으로 가르쳤던 이 관계는 본서 4장에서도 반영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본서 역시 아내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5] '''밀은 아내 및 이복딸과 여성의 삶에 대해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면서 많은 것을 전해듣게 되었고, 그 이야기들을 토대로 하여 아내의 사후에 본서를 펴냈다.'''[6] 밀 정도 되는 사상가라면 자신의 지성과 전문성을 앞세워서 맨스플레인(?)을 했을 법도 한데, 아내를 통해서 "종속된 여성의 비참한 삶" 이 무엇인지를 기꺼이 들으려 했던 것이다.
한편 밀과 아내의 관계에 대해 역자가 소개하는 뒷이야기가 있는데, 이에 따르면 밀은 '''대단한 순정파'''였던 것으로 보인다. 밀은 그의 나이 24세, 해리엇이 22세일 때 처음 만났는데, 이때 이미 해리엇은 존 테일러(J.Taylor)라는 남성과 결혼하여 자녀가 셋이나 있는 4년차 유부녀였다. 그런데 해리엇 부부는 오히려 아내가 남편보다 지적으로 더욱 월등했고, 이 때문에 해리엇은 오히려 총각인 밀과 말이 더 잘 통했다. 해리엇은 남들의 시선에 신경쓰지 않는 쿨한 성격이었지만, 밀은 서로의 위신을 염려하여 자신이 45세(…)가 될 때까지 각별히 처신했다. 그리고 남편 존이 암으로 사망하고서도 다시 2년이 지난 후에야, 이 반백이 가까워진 노총각돌싱이 된 해리엇과 비로소 남몰래 예식을 올렸다. 그나마도 밀은 이 결혼에 반대하는 가족과 연을 끊어야 했다고. 그러나 그 기다린 세월이 무색하게도, 결혼 후 7년 반 만에 아내 테일러는 프랑스 여행 중에 갑자기 병사하고 말았다. 안습. 일편단심 민들레(…)였던 밀은 아내가 세상을 떠난 이역 만리인 프랑스 아비뇽을 떠나지 못했고, 그곳에 움막을 짓고 셋째 이복딸 헬렌과 함께 오붓하게 지내면서 그녀를 계속 친딸처럼 각별히 대했다. 그리고 그 자신도 아내가 묻힌 곳에 함께 묻혔다.

2. 목차 및 주요 내용


  • 1장
  • 2장
  • 3장
  • 4장
이게 끝이다(…). 동일한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네 건의 에세이가 별도의 소제목 없이 한데 묶여있는 구조이기 때문. 그렇다 하더라도, 각각의 장마다 존재하는 중심 내용을 따로 요약하여 소제목을 자체적으로 만들어볼 수 있을 것이다.
본서는 굉장히 얇은 두께의 책이고, 철학서라고 보기에는 의외로 술술 읽힌다. 역자는 해제에서 만연체가 너무 심하다고 비판했지만, 번역의 품질이 원체 좋아서 쭉 읽어나가는 데에는 큰 무리가 없다. 무엇보다도, 본서에서는 쟁점의 핵심을 꼬집는 듯한 '명문장' 이 많이 발견된다. 의욕 있는 독자라면 (그리고 빌린 책이 아니라면) 형광펜을 들고 여기저기 그을 준비를 하고서 읽는 것도 좋을 것이다.
책의 전체 내용을 세줄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여성은 남성보다 열등한 존재가 아니며, 설령 무언가에서 뒤처진다 해도 그것은 본성적인 것이 아니다.
  • 결혼생활 및 사회생활을 여성을 남성에게 일방적으로 종속시키려는 도구로 사용하는 것은 노예제 및 전제군주제와 같거나, 더 열악하다.
  • 여성들에게 자유를 보장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남성들과 인류 문명 전체에 있어서도 유익한 지향점이다.

2.1. 챕터별 내용 정리


각 챕터의 내용들을 각각 세 문장으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각 장마다 중심 내용은 괄호 속에 간략히 정리하였다. 책에서 전반적으로 논의하고자 하는 내용들은 하단에 간략히 정리할 것이다. 먼저 당대 사람들이 갖고 있었던 사고방식에 반하여, 저자가 여성이 열등하다고 볼 수 없음을 어떻게 주장하는지 살펴보고, 그 다음으로 여성이 종속되어 있는 상태가 마치 노예제나 전제군주제와 다를 바가 없거나 심지어 더 심한 상태라는 주장을 확인한다. 마지막으로는 종속된 여성들에게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 어째서 남성들과 인류 문명 그 자체에게도 유익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지에 대해 소개한다.
  • 1. (여성의 종속은 노예제나 전제군주제와 같은 구시대의 소산이다)
남성이 여성의 자유를 제약하고 종속시키는 사회구조는, 그것이 마치 자연스럽고 자발적인 섭리인 것처럼 간주되어 왔다. 남성들은 여성의 본성에 대해 알고 있다고 착각하지만, 실제로 여성들은 억지로 종속적인 역할을 감내해 왔을 뿐이다. 노예제나 신분제 등 다른 차별들이 혁파되었듯이, 여성의 종속도 혁파되어야 하며, 이것이 인류 진보의 방향에 합치된다.
  • 2. (기존의 결혼제도는 노예제나 전제군주제보다 나을 것이 없거나 더 심하다)
결혼생활에서 모든 남편들이 그들의 아내에게 폭군이 되는 건 아니지만, 현실적으로 여성들의 처지를 개선할 필요성은 존재한다. 가정에서의 의사결정권과 역할분담은 지배와 복종의 관계가 아니라, 대등한 시민 사이의 합리적이고 유연한 합의의 관계여야 한다. 평등한 부부관계는 인간이 나아갈 도덕률의 지향점이며, 이를 대중화하는 데에는 의식 있는 상류층 자유주의자들의 역할이 필수적이다.
  • 3. (여성들이 자신의 재능을 활용하여 사회활동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여성들은 정치를 포함한 직업활동에서도 평등을 누려야 하지만, 총명한 여성들은 불합리한 각종 제약들로 인해 자신의 재능을 펼치지 못한다. 사회는 여성들의 직업활동을 막는 근거로 여성의 본성적 열등함을 주장하지만, 실상 이 열등함들은 사회역사적 배경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다. 여성들이 이런 제약에 대해서 직접 저항하고 항의하지 않는 것은, 현실의 삶에 불만이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피억압자의 특징일 뿐이다.
  • 4. (남녀 간의 평등은 남성들에게도 결과적으로 도움이 된다)
여성을 종속에서 해방시키는 것은 남성에게 여러 도움을 주어, 그들에게 평등의식을 길러주고 자기계발을 촉진할 수 있게 한다. 또한 인간 문명 역시, 여성들이 종속에서 해방될 때 그 진보를 이끄는 정신적 힘이 두 배가 되어 만인에게 혜택을 줄 수 있게 된다. 무엇보다도, 자유는 인간의 본성에서 매우 중요한 것이기에, 여성들의 자유가 억압받는 것에 대해 더 많은 사회적 관심이 필요하다.

2.2. 여성은 열등하지 않다


저자는 많은 남성들이 여성의 본성적인 열등함에 대해 이해하고 있다고 믿는 것이 실상은 불완전한 것이라고 말한다. 저자에 따르면, "사람이 많다고 정확하게 답을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p.56)이다. 저자는 오늘날 알려진 본성에 대한 정보들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며, 인간이 상황 속에 있다는 점은 고려하지 않은 채로 그것이 무조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자연적인 속성이라는 잘못된 생각의 영향을 받았다고 말한다. 즉, 사람들이 집단 간에 어떤 차이를 보이면, '''그것이 환경적이고 상황적인 원인에서가 아니라 본성적이고 천성적인 원인 때문이라고 여긴다.'''[7] 그 때문에 저자는 남녀 간에 실존하는 차이가 있더라도 이걸 바탕으로 여성의 타고난 열등함이 입증될 수 없다고 말한다.
이쯤에서 저자가 1장에서 제시한 예시를 각색해 보자. 여기 두 곡식 종자 바구니가 있다. 한쪽에는 '남성' 이라고 적혀 있고, 반대쪽에는 '여성' 이라고 적혀 있다. 이 두 바구니에 담긴 종자가 각각 생산량이 같을지 다를지, 다르다면 얼마나 다를지를 알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물론 두 곡식 종자들을 심어서 경작해 보고 그 산출을 비교해 보면 될 일이다. 그런데, 저자가 보기에 지금까지 인류는 남녀의 능력의 차이를 전혀 제대로 판단하지 못했다. 지금까지의 인류는 '남성' 곡식 종자는 전부 햇빛 잘 들고 알맞은 물과 풍부한 양분을 섭취하는 땅에서 길렀고, '여성' 곡식 종자는 전부 추운 바깥에 팽개쳐 두거나 얼음이 뒤덮이도록 일부러 방치했다는 것이다. 그 결과 '남성' 종자들은 생기가 넘쳐 싹이 잘 돋고 빠르게 자라고, '여성' 종자들은 시들시들 느리게 성장하다 말라 비틀어져 죽는 것을 보고는, 인류는 '여성' 종자는 영 못써먹을 종자라는 결론을 얻었다. 심지어, 그 종자들을 옮겨 심을 생각은 하지 않고, 열등한 종자에게는 그 눈보라 치는 땅에서 자라는 게 더 어울린다는 비합리적인 생각을 꾸준히 주입해 왔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문제는 단순하게 볼 수 있다. '''여성들에게 남성과 똑같은 환경을 제공해 주면 끝나는 것이다.'''
저자는 여성의 열등함을 입증하는 성차를 주장하려면, "평균적으로 여성은 남성보다 이 일에 무능하다" 거나, "이런 일을 할 만한 여성의 수가 남성보다 부족하다" 와 같은 식의 논리가 아니라, "아예 여성은 이 일 자체를 할 수 없고, 가장 뛰어난 여성도 가장 못난 남성보다 못하다" 고 말해야 한다고 3장에서 언급한다. 그리고 그런 논리만이 여성에게 무엇을 금지하는 정책과 제도를 만들 근거로서 정당화된다고 본다. 하지만 저자가 보기에, 가장 어리석고 비열한 남성조차 가장 많은 수익을 거둘 수 있는 사업에 뛰어드는 데 아무런 제한이 없는데, 가장 뛰어나고 총명한 여성에게는 그런 기회가 허용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당시 가장 엄격한 금녀의 영역인 정치 역시, '''여성들은 참정권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공무담임권까지도 허용되어야 한다.'''[8] 공직에 들어가기 위해 어차피 공개적인 경쟁을 거치고, 거기서 승리하기만 했다면 그것만으로도 그 여성은 자신의 적격성을 입증한 셈이다. 무능한 부적격자가 공직에 들어간다면 그건 '''부적격자이기 때문에''' 비난받아야 하지, 여성이기 때문이라며 비난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유능한 여성들이 제 재능을 펼치지 못하도록 금지하는 것은, 한 마디로 "인류의 절반에게 족쇄를 채우는"(p.106) 것과 다름없는 것이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사례를 들어 "여성의 열등함" 을 주장해 왔다. 이를 하단에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여성들은 남성들보다 더 감정적이어서 일을 그르치기 십상이다?"
저자는 신경과민의 문제는 여성들을 직업전선에서 금지시킬 이유가 되지 못한다고 본다. 어차피 사람을 온실 속 화초처럼 기르면 남녀를 불문하고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또한 열정적인 흥분과 몰입이 요구되는 일부 직종에서는 감정적인 성미가 유용할 수 있다. 설령 이런 성미가 여성들에게 더 흔하다고 하더라도, 감정적이고 과민한 남성들도 분명히 존재하지만, 이들은 우리 사회에서 배제되지 않지 않은가? 백번 양보해서 이런 성미가 업무에 지장을 초래한다고 가정하더라도, 인간은 훈련과 교육을 통해서 공과 사를 충분히 구분할 줄 아는 존재이다.[9] 또한 감정적인 성미가 정말로 일을 그르치는가에 대해서도 생각할 만한데, 예컨대 그리스인들은 다혈질적이고 프랑스인들은 감정적이라는 통념이 있지만, 실제로 인류 문명의 가장 찬란한 것들 중 몇몇은 이들이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결국, 감정적인 성미는 직업활동에서 '무조건 금지' 시키고 남성에게 경제적으로 종속시켜야 할 근거가 못 된다.
  • "여성들은 한 가지 일에 유독 집중하지 못한다?"
저자는 어떤 하나에 몰두해서 다른 모든 것에 관심을 잃는 것에 비하면 오히려 나은 것이 아니냐고 반문한다. 다시 말해, 인간의 정신이 특정한 일에만 배타적으로 빠져드는 것이 인간 능력의 발전에 그렇게나 중요하냐는 것이다. 이런 경향이 물론 어떤 부문에서의 발전은 이끌겠지만, 다른 부문에서의 발전은 저해할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저자는 실무적인 일을 할 때에는 이쪽과 저쪽을 오가며 종합적으로 처리하는 사람, 즉 "제너럴리스트" 가 소위 "스페셜리스트" 보다 더 귀중한 인재라고 말한다. 여기서 저자는 모든 여성들이 제너럴리스트의 자질이 있다고 말하기보다는, 여성들이 사회적으로 교육을 받으면서 '소소한 많은 것들을 동시에' 다룰 일을 자주 접하는 방식으로 제너럴리스트로 길러졌다고 설명한다.
  • "여성들의 는 남성의 뇌보다 더 작기 때문에 열등하다?"
저자는 무턱대고 뇌의 크기와 인간다움 내지 지성을 연결시키려는 생각을 경계한다. 물론 여성의 몸집(체질량)은 남성보다 더 작기 때문에 여성의 뇌가 더 작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고래나 코끼리가 인간보다 영리한가? 신체 건장하고 우람한 남성이 왜소한 남성보다 더 지적인가? 저자는 이런 주장이 사람들 간의 개인차를 고려하지 않은 데다[10] 뇌가 "오직" 그 크기에만 비례해서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것도 납득하기 어려운 논리라고 말한다. 무엇보다, 어떤 신체기관의 성능을 평가하기 위해 우리가 도대체 언제부터 그 '활동성' 이 아닌 그 '크기' 를 기준으로 생각했느냐는 것이다. 예컨대, 간이 크면 간의 기능이 더 뛰어난가? 심장이 클수록 혈액순환 능력이 좋고 심박도 안정적인가? 큰 뇌를 비효율적으로 사용하는 것보다, 작은 뇌를 더 효율적으로 쓰는 것이 오히려 좋을 수 있지 않은가? 본서가 저술되고 나서 시간이 흘러, 현대에는 남녀의 뇌 크기 차이가 3~4온스 정도 존재함이 알려져 있지만, 현대의 신경과학자들은 뇌 피질의 규모 자체보다는 피질 속의 시냅스(synapse), 즉 뉴런들이 어떻게 서로 연결되어 있는가가 그 기능에 있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참고(스미소니언 매거진)
  • "여성들은 자신들이 활동하던 인문학예술에서조차 업적을 남기지 못했다?"
우선, 저자는 여성들이 이런 주제에서 가장 많이 활동해 온 국가인 영국프랑스에서조차, 인문학에서 여성들이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펼칠 기회가 주어진 건 3세대도 채 되지 않았다고 전제한다. 저자는 여성들이 유독 업적을 남기지 못했던 이유로, "여성들은 새로운 학파나 해석, 기법 등으로 창의성을 인정받은 사례가 없다" 는 점을 든다. 이를 섣불리 여성의 열등함으로 몰아가기 전에,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존재한다. ① 새로운 것을 창조하려면 반드시 기존의 선배들의 지식에 정통하는 과정이 필요하지만, 여성들은 그만큼 체계적인 교육을 받지 못했다. ② 설령 여성들이 새로운 것을 창조할지라도, 그것의 가치를 알아볼 수 있는 사람들남편이나 주변 친구들로 한정되었기에 제대로 빛을 보지 못했다. ③ 남성들이 그 가치를 알아보더라도, 대부분은 검증되고 현실화되는 과정에서 남성의 것으로 둔갑하여 알려지게 된다. ④ 천재적인 예술가들과 작가들도 자기만의 색깔과 작품세계를 완성하려면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여성들에게는 그만한 시간이 없었다. ⑤ 여성들은 예술이나 글쓰기를 밥벌이 수단으로는 여기지 않지만, 남성들은 그것들을 "일생을 걸어봄직한 멋진 도전 대상"(p.141)이라고 생각한다.[11] ⑥ 마지막으로, 여성들은 가족과 집안살림, 사교활동, 예의범절, 편지, 화술, 접객, 옷차림 등에 신경을 쓸 것을 강요받아서 자신만의 세계에 대해 시간을 쓸 여지가 없었다.
  • "여성들은 남성에게 지배당하는 열등한 모습이 더 자연스럽다?"
1장에서 저자는, 남성들이 노예제전제군주제만큼은 부자연스러운 착취라는 점을 쉽게 간파하면서도 유독 여성에 대한 지배만큼은 자연의 섭리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고 비판한다. 저자는 이에 대해 "자연스럽다는 말은 갖다 붙이기 나름이다. 힘의 법칙을 고집하는 사람들도, 달리 할 말이 없으니까 그저 그것이 가장 자연에 부합된다는 말만 거듭하고 있는 것이다"(p.32)라고 대답한다. 모든 지배의 사례에 있어서 지배하는 입장에서 보면 그것만큼 자연스러워 보이는 것이 없으며, 한때 인류는 가장 통찰력이 있었던 선각자조차 노예제가 부자연스러운 것이라는 생각 자체를 하지 못했던 때가 있었다는 것이다.[12] 33페이지에서 저자의 언급에 따르면, 자연스럽다는 말은 정말로 그것이 자연적인 조건에 맞게 살아간다기보다는, 그 당시의 일반적인 문화적 관습에 합치된다는 말과 같다. 자체적으로 예를 들자면 현대사회에서 남성이 치마를 입는 것은 자연스럽지 못한 모습으로 보이겠지만, 고대 로마에서 남성이 치마를 입는 것은 전혀 흠잡을 데 없이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비쳐졌을 것이다. 저자의 다른 예를 들자면, 당시 영국에서는 여성의 강인하고 튼튼한 모습이 부자연스럽게 여겨졌지만, 고대의 저 스파르타에서는 문제될 것이 없는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이상의 여러 논쟁을 통해서 저자는 여성이 남성보다 열등하다고 볼 근거가 없으며, 개인이 자신의 역량을 펼치는 데 있어서 남성을 대하는 것과 여성을 대하는 것은 동일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마지막으로 특기할 만한 반론으로는, '''"그렇지만 여성들 본인부터가 자신들이 열등하다고 자발적으로 동의하지 않는가?"''' 를 들 수 있다. 1장에서 저자는 이에 대해, 남성들이 여성들에게 철저히 가르친 결과라고 말한다. 노예제 같은 다른 사례와는 달리, 유독 여성의 종속에서 남성은 여성에게 '''진심어린 복종'''을 원했으며, 위협이나 협박을 활용하길 꺼렸다는 것이다. 그 대신, 교육을 통해서 "남성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이 바로 이상적인 여성의 길" 이라는 생각에 여성들이 동의할 수 있도록 사회화했다는 것이다.
특히 저자는 '''약자들이 의외로 불평등에 대해 민감하지 않다'''는 점을 지적한다. 신분제 역시, 평민들 중 일부를 의회에 참가시키려 했던 것은 오히려 귀족들이었으며, 평민들은 당시 그저 세금을 많이 거두지 말기를, 왕실 관리들이 포악하게 대하지 말아 주기를 기대했을 뿐이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정말 민란 수준이 아니었던 이상) 자신들이 저 "왕후장상" 들과 대등하게 존재할 수 있으리라고는 믿지 않았다. 결국 어떤 억압의 체제건 간에 중요한 것은 당사자들의 항의(?)가 아니라 선각자들의 역할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서, 저자는 이런 여성들조차 이제는 점점 더 종속된 처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깨어나고 있다고 말하면서 미국의 참정권 운동을 예로 들고 있다. 여성들이 종속에서 벗어나게 될 때가 머지않았다는 것이다.

2.3. 여성의 종속 = 노예제 = 전제군주제


그런데 사실 본서의 전제에는 조금 생소한 면이 있다. '''여성들은 실제로 지배당하고 있는 게 맞는가?''' 적어도 현대사회라면 (본서의 저술 시점이 1869년이라는 사실은 고려해야 하겠지만) 문명도 진보하고 인간도 발전했으니, 게다가 그 중에서도 세계에서 가장 발전한 축에 드는 사회인 대영제국이니, 무슨 정글처럼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고 착취하고 있는 현상이 아직도 지속되고 있겠느냐는 것이다. 적어도 오늘날 우리는 표면적으로라도 그것에 반대하며, 그런 식으로 타인의 자유를 제약할 때에도 최소한 공익과 같은 대의명분을 내걸어야 한다. 강자의 힘과 권력에 의해 약자들이 휘어잡히는 것은 원시 사회의 원칙이 아니었느냐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성이 종속되어 있다는 주장은 미개한 사회에나 해당될 만한 주장이 아닐까?
이에 대해, 저자는 인류 역사의 오랜 시간을 함께해 온 몇몇 강자 지배의 원칙의 사례로서 '''노예제전제군주제'''를 들고 있다. 물론 공화정기독교의 출현으로 인해[13] 어느 정도 그 해악이 약해지긴 했지만, 그래도 본서 저술 시점으로부터 불과 40여 년 정도 전까지만 하더라도 영국에는 노예시장에서 인간을 사고파는 것이 가능했을 만큼, '''인류 역사에서 가장 공인된 원칙들 중 하나가 바로 이 강자 지배의 원칙'''이라고 말한다. 어찌나 그것이 강한지, 강자가 약자를 괴롭히는 것만큼은 인류는 끊어낼 수가 없었다. 심지어, 금식금욕주의성지순례 등 온갖 극단적인 것들을 귀족들과 유력자들에게 강요할 수 있었던 기독교조차, "사람들을 서로 덜 싸우게 하거나, 노예에 대해, 그리고 가능하다면 자치도시의 시민들에 대해 덜 잔인하게 대하도록 할 수는 없었다"(p.26)는 것이다.
그런데 1장의 서두에서 저자는 유독 여성의 종속에는 이상한 점이 있다고 말한다. 우선, 사람들이 어째서 제도를 만드는지부터 생각해 보자. 어떤 제도를 만들 때에는, 일반적으로는 그것이 바람직함이 확인되었으니까, 적어도 과거 한때에는 바람직했으니까 만들게 되곤 한다. 하지만 '''여성의 종속은 전혀 그런 식으로 확립되지 않았다.''' 단 한 번도 대안적 삶의 방식이 시도된 적이 없었고,[14] 현재의 여성의 종속이 어떤 심사숙고를 거친 끝에 "그래, 여성은 남성에게 종속되는 게 가장 좋다!" 식으로 정한 것도 아니고, 사상의 고양이나 질서에 기여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여성의 종속은 인류에게 법과 정치가 있기 이전부터 존재하다가, 법과 정치의 출현과 함께 정당한 지배로 변환되었다는 것이다. 여성이 지금껏 종속될 수 있었던 유일한 이유는 단지 지금까지 그것이 살아남았기 때문일 뿐이라고 지적한다. 저자는 '''이런 판국에 어떻게 여성의 종속이 좋다고 확신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어떻게 해야 인류 전체에 가장 큰 이익이 되는지이며, 다른 무언가를 경험해보지 않은 마당에 "오랫동안 경험해 보니 이게 좋더라" 라는 식의 판단을 내릴 수는 없는 것이다. 물론 현재의 제도만으로도 여기까지 발전했다는 장점은 알 수 있지만, 다른 제도를 통해서 더 빠르게 진보했을지는 모르는 일이기 때문.
하지만 저자는 본서 저술 4년 전에 감격적인 순간을 목격한다. '''미국에서 흑인 노예들이 해방된 것이다.'''(1865년) 유럽에서도, 비록 군사독재(military despotism)라는 형태로서 아직도 변형된 상태로 잔존하고 있기는 하지만, 적어도 전제군주제는 오늘날 몰아치는 자유주의의 거센 반격을 받고 있다.[15] 이 모든 것들이 더 나은 방향으로 인류 문명이 발전해 간다는 역사의 거대한 흐름을 보여주고 있으며, 저자에게는 평등으로의 진보가 인류의 필연적인 지향점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 여기서 예외가 되는 케이스가 있다. '''바로 여성의 종속이다.''' 유독 여성의 종속만큼은 전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노예도 해방되고 왕가도 힘을 잃어 가는 현 시점에, 아내를 발 밑에 두는 남편들의 권력만큼은 아직도 굳건하다는 것이다.[16] 저자는 이에 대해, 여성들이 남성의 매우 가까운 곁에서 상시 감시를 받으며, 어떤 방법으로도 상대방을 압도할 힘과 권력을 획득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17]
여기서 저자가 여성의 종속을 바라보는 관점이 잘 드러난다. '''노예제도, 전제군주제도, 여성의 종속도 셋 모두 과거의 소산이다. 앞의 두 가지는 이미 무너졌는데, 여성의 종속만큼은 아직도 무너지지 않았다.''' 셋 다 강자 지배의 원칙을 통해 인류의 역사를 관통해 왔지만, 노예제나 전제군주제는 결국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으되, 여성의 종속은 아직도 멀쩡히 버티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종속된 여성, 즉 "아내" 라는 이름의 여성들은 백성만도 못하고 노예보다 비참한 삶을 살아간다.'''[18] 여성의 종속은 노예제나 전제군주제보다 더 가혹한 제도라는 것이다. 저자의 예를 들면, 고대 로마에서도 로마법상 노예들은 자기 재산을 소유할 수 있었지만, 영국에서 아내들은 재산권상속권이 보장되지 않았다. 덤으로, 어떤 노예도 누군가의 아내만큼이나 한 사람 곁에서 그렇게 길고 힘들게 종살이를 하지는 않았다고. 또한 아내들은 언제 어느 때든지 남성의 성적 욕망에 봉사해야 하며, 자녀들을 낳더라도 그들에 대한 법적 보호자 신분을 부여받지 못하여, 남편들은 아내가 자녀들과 만나거나 연락하지 못하게 할 수도 있었다고 한다. 사실상 "폭군의 곁에서 평생 시중을 드는 무지렁이 백성", "먼 옛날 노예만도 못한 종살이를 평생 하는 비천한 노예" 인 셈이다.
이에 대해서도 다양한 예상 반론들이 2장에서 준비되어 있다. 저자는 이들 하나하나를 세심하게 반론한다.
  • "현실의 많은 남성들이 그렇게 폭군처럼 괴롭히는 건 아니지 않은가?"
이에 대해 저자는 가능한 최악의 상황을 고려해서 법과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고 제안한다. 물론 저자 역시 "다행스럽게도 많은 남성이 폭군과 같은 충동과 성향을 차단해 주거나, 아니면 최소한 완화시켜 주는 감정과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다"(p.71)는 점을 긍정한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이런 긴밀한 개인적 감정은 다른 어떤 곳에서보다도 제일 잔악한 제도 속에서 가장 강렬하게 표출되었다"(p.73)고 지적한다.[19] 또한 어떠한 억압적인 관계이든지, 그것의 옹호자들은 가능한 가장 최상의 시나리오를 가지고 옹호하게 마련이다.[20] 하지만 사실 우리는 그것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악한 자가 권력을 잡았을 때를 염려해야 하며, 이상적 기대는 그만두고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저자는 야수와 같은 남성은 어느 사회에나 있는데, 우리 사회에는 그런 남성들이 희생자를 낚아채는 것을 막을 방법이 없으며, 꼭 그 정도가 아니더라도 '밖에서는 존경을 받지만 안에서는 아내를 지긋지긋하게 고통스럽게 하는' 남편들을 막을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촉구한다.
  • "하지만 여성들도 때로는 바가지를 긁거나 잔소리를 하는 권력이 있고, 또 효과적이지 않은가?"
저자는 그런 행동이 득보다 실이 많으며, 사실은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과는 무관하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아내들은 그런 최소한의 바가지조차 아예 바가지나 잔소리를 할 수 없을 정도로 폭압적인 남편에게는 하지 못하고, 어느 정도 친절하고 마음씨 고운 남편에게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심지어 이런 바가지나 잔소리의 결과로서, 그런 좋은 남성들마저 폭군으로 만들 수 있다고 비관한다. 무엇보다도, 아내의 바가지와 잔소리는 아내 자신의 권리와는 무관한 것을 주제로 할 뿐이지,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데는 실패한다. 그나마 이런 전략이 권력과 무관한 집안 대소사에 효과를 본다 하더라도, 이는 아내의 권리 때문이라기보다는, 부부 사이의 친밀감과 자녀에 대한 공동의 이해관계, 남편이 생각하는 아내의 중요성, 그리고 주변 사람들의 영향 때문이라고 보아야 한다고.
저자는 이런 주장에 대해 한 마디로 잘라 말한다. "여성에 대해 극단적인 반감을 가진 완고한 사람"(p.86)의 생각이라고. 심지어 오늘날에는 (물론 19세기 얘기다) 정말 진지하게 대화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도 이런 주장만큼은 하지 않는다고 한다. 저자에 따르면, 이는 남성과 여성 모두에 대해 잘못된 주장이다. 남성들이 자신의 권력을 내려놓는 희생적인 존재라고 하자면, "여성들은 남성들보다 더 희생적이다" 라는 기존 우리 사회의 통념은 대체 무엇인가? 게다가, 철학과 종교와 사상들이 남성에게 권력을 몰아주는 사회체제를 입을 모아 정당화하는데, 남성들이 어째서 권력을 양보하겠는가? 물론 저자도 어떤 여성들은 한없이 권력을 요구하는 몰염치한 모습을 보일 수 있음을 인정한다. 하지만 그런 경우에는 어차피 처음부터 결혼이 어울릴 사람이 아니었으며, 아예 둘이 갈라서는 게 해답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일부 남편들이 '개인적으로' 권력을 어느 정도 나누어줄 때, 어느 정도가 적정선인지에 대해 사회적으로 합의된 기준이 없기 때문일 수 있다고 한다. 결국 이런 기준이 없는 이유 자체는 여성이 종속된 지위에 있기 때문이라는 것.
  • "하지만 아내들이 가계부를 담당함으로써 경제권을 갖지 않는가?"
이 주장에 대해서는 저자가 간략하게 다루고 있기는 하나,[21] 저자의 말을 바로 빌리자면, "기껏해야, (재산의) 정당한 소유자인 자신이 자유롭게 사용하지 못하는 대신, 남편도 함부로 재산을 탕진하지 못하게만 할 수 있을 뿐이다"(p.67). 그리고 만일 남편이 아내를 폭행해서 경제권을 손에 넣는다 해도, 지금처럼 여성을 종속시키는 제도로는 이 상황에 개입할 명분도 없고, 그 아내를 법적으로 구제하고 보호할 방법도 없다.
  • "하지만 이혼을 하면 쉽게 끝날 일이 아닌가?"
물론 이혼은 자유로운 하나의 방법이다. 70페이지를 보면, 만일 여성이 종속된 지위로서 평생을 곁에서 섬겨야 할 남성을 골라야 한다면, 자유롭게 이혼을 하면서 자신이 정말 잘 섬길 수 있는 남성을 찾도록 하는 것이 오히려 이치에 합당한 방식이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러나 저자는 이것이 쉽지만은 않다고 한다. 이혼 판결을 받으면 종속에서 벗어날 수는 있으나, 소송비용이 너무 비싸서 일부 상류계급 사람들에게나 가능하고, 그나마도 요즘은 이혼이 너무 쉬워졌다고 세간에서 불평이 나온다는 것. 저자는 무엇보다도, 여성이 종속된 신분이라는 사실 자체가 이혼에 있어 유효한 사유로 인정받을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회의적이다.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평등한 결혼생활은 인간의 본성에 부합한다'''는 점이다. 인류는 발전과 함께 점차 지배로부터 보호로, 그리고 평등으로 나아가고 있으며, 사회가 조금 소란스러워지더라도 이것이 인간 도덕률의 지향점이라고 보아야 한다. 인간이 지향할 사회는 공감을 바탕으로 하는 평등한 결사체여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가정에서 공감적 평등을 먼저 가르치고, 이를 사회 수준으로 확대시켜야 한다. 이를 위해 저자는 최우선적으로, 평등한 시민권의 가치에 동조하는 자유주의적인 영국상류층 기혼자들을 설득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이들조차 결혼의 본질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았다면 저자의 논리에 공감하기 힘들 것이라고. 반대로 저자는 하층계급의 계몽 및 각성에 대해서는 회의적인데, 그 이유로 하층계급의 남성들은 아내를 학대하고 경멸하는 자신의 권력에 더더욱 집착하며, 자신이 그런 권력을 행사함으로써 일종의 '소유의 느낌' 을 증폭시키고 쾌락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일견 엘리트주의적인 관점은 "자격이 있는 자" 의 책무를 강조했던 사상가인 밀의 전반적인 관점과도 비슷하게 보인다.

2.4. 여성의 자유는 남성에게도 유익하다


저자는 4장에서 여성에게 자유를 주는 것이 결과적으로는 남성들에게도 유익한 것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인간 삶에서 행복을 누릴 수 있게 해 주는 정말 중요한 것을 고르라고 한다면, 그것은 각자가 자기 하고 싶은 일을 추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이지만, 여성들만큼은 "이 중요한 행복의 요소를 매우 불완전하게 향유하고 있거나 아니면 그것에 대한 접근이 아예 봉쇄되고 있다"(이상 p.191)고 말한다. 하지만 애초에, (먼 훗날의 또 다른 어느 영국인처럼) "이것은 여러분 남성들에게도 필요한 이야기입니다!" 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사실 안 해도 되는 말'''이라는 게 저자의 생각이다. 여성에게 자유를 줄까 말까를 놓고 갑론을박하는 것은 현실의 비참함을 무시하는 것이고, 현실이 비참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생각이 모자라고 솔직하지 못한 사람들"(p.155)이기 때문이라고. 즉 남성에게 이득이 되든 되지 않든, 여성들의 삶이 도탄에 빠져 있다면 앞뒤 제쳐놓고 그 여성들을 수렁에서 건져내야 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태여 이 이야기를 이어가야 한다면, 저자는 몇 가지 이점을 들 수 있다고 한다. '''첫째로, 여성에게 자유를 주는 것은 남성들을 성격파탄자로 만드는 강자 지배의 원칙을 정의평등의 원칙으로 바꿀 수 있다.''' 저자는 지금의 남녀관계는 모든 이기주의와 자기숭배에 자양분을 공급하여, 남성들은 여성이 총명하든 아니든 간에 자신에게 마땅히 복종해야 한다고 교육받으며, 자신보다 못해 보이는 타인에게 늘 군림하는 태도를 지니게 되고, 자기 뜻대로 안 될 때는 그 아랫사람에게 화풀이를 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특권에 대해서 대단한 긍지를 느끼지만, 실상 이는 노력해서 얻은 특권이 아니라 그저 우연히 얻게 된 유리한 위치에서 생기는 결과에 대한 긍지에 지나지 않기에 문제가 된다. 흔히 선전되는 것처럼 현대 문명이 진실로 "출신이 아니라 능력이 모든 권력과 권위의 유일한 원천"(p.161)이라면, 인간이 마땅히 나아가야 할 길은 남녀간의 평등한 관계라는 것이다.
'''둘째로, 여성에게 자유를 주는 것은 인간 문명을 발전시키는 정신적 힘을 두 배로 늘릴 수 있고, 그 혜택을 남성들도 누릴 수 있다.''' 탁월한 능력으로 일을 처리할 수 있는 유능한 인구집단의 절반을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사장시키는 것은 엄청난 사회적 손실이다. 설령 그 유능한 여성들의 진출로 인해서 남성들의 일자리가 위협받게 된다고 하더라도, "저 여자들이 우리 일자리를 빼앗아간다!" 면서 길길이 뛸 필요가 없다. 어차피 여성과 남성이 대등하게 경쟁하는 과정에서 상호간에 나타나게 될 지적 자극 역시 하나의 혜택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런 경쟁이 부재하기 때문에 남성들의 재능이 제대로 개화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22] 만일 유능한 여성들이 사회에 영향력을 끼치게 된다면, 그 영향력을 받은 남성들 역시 전보다 더 질적으로 우수한 사회적 제도와 시스템 덕분에 자신의 재능을 더욱 마음껏 끌어올릴 수 있게 된다. 특히, 나약하고 못난 남성들일지라도 총명한 여성들이 만들어 놓은 사회적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며, 그런 여성들의 도움을 받아 자신을 계발할 기회가 될 수 있다.
'''셋째로, 아내에게 자유를 주는 것은 남편들에게 있어 기쁨과 자기발전의 계기가 될 수 있다.''' 저자에 따르면, 기존에는 다양한 일상적 의사결정에 있어서 부부 간에 의견충돌이 발생할 경우 주로 여성 쪽에서 자신의 의견을 포기하는 방식으로 해소되어 왔는데, 이렇게 하면 비록 남성들에게는 좋을지 몰라도 진정한 일체감을 느낄 수는 없게 된다. 남녀에게 서로 다른 교육을 시키는 한, 양쪽의 선호나 흥미, 가치관이 손쓸 수 없을 정도로 확대되는 것은 사실이므로, 남녀를 평등하게 할 경우 양측은 진정 유유상종의 원리에 따라 "친한 사람은 비슷한 걸 좋아한다" 는 일반적인 대인관계의 원리를 적용받을 수 있게 될 것이며, 남은 차이도 부부가 통제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흔히 "금슬 좋은 부부는 서로 닮는다" 고 하듯이, 평등한 부부관계에서는 한쪽만 갖고 있던 흥미와 취미에 대해 상대방도 관심을 갖게 되고, 마침내 그것에 함께 흥미를 붙이게 되어서 서로의 취향과 성격이 닮아갈 것이라는 얘기다. 남편이 아무리 위대한 사상가일지라도 그 아내가 지적으로 떨어지고 어떤 깊이 있는 철학과 정신을 담아낼 수 없다면 결국 남편은 자신의 인생이 아내 때문에 발목이 잡히고, 고통 받다 못해 지적으로 퇴행해 버릴 것이라고 한다.[23] 반대로, 남편과 아내가 평등한 결혼 생활에서는 '''서로의 차이가 발전적으로 수용'''되고, '''서로가 서로의 한계를 도와주고 격려'''하며, 지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끊임없는 상호 자극을 주어 끝없이 발전'''해 갈 수 있다.
밀이 4장에서 내비쳤던 바 부창부수(夫唱婦隨)와 부창부수(婦唱夫隨)가 대등하게 존재하는 '''이상적인 결혼생활'''은 그 자신의 결혼생활도 일정 부분 연상케 하는데, 이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높은 수준의 능력과 소질을 비슷하게 갖추고 그 생각과 지향하는 목표가 똑같은 두 사람이, 상대방에 대해 일정 정도 비교 우위를 지닌 까닭에 서로를 바라보면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특혜를 누릴 뿐 아니라, 자기 발전 과정에서 한편으로는 지도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지도받는 즐거움도 만끽할 수 있다면, 나는 이들의 결혼 생활이 어떤 모습을 띨 것인가에 대해 따로 설명하지 않을 것이다. … '''그 무엇과도 비길 수 없는 강한 신념으로 말하거니와, 이것, 이것이야말로, 이상적인 결혼의 모습이 아닐 수 없다.'''"

-

- pp.182-183 (일부 구문은 나무위키에서 자체 강조)

마지막으로 철학자로서 밀은, '''무엇보다도 자유는 인간의 본성에서 의식주의 문제 다음으로 중요한 것'''이라고 말한다. 남성들은 흔히 소년 시절의 여러 보호와 제약에서 벗어나 비로소 성인이 되던 때 "무거운 짐을 내려놓을 때 신체적으로 느끼던"(p.186) 안도감을 경험하곤 하는데, 저자에 따르면 여성들도 똑같은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저자는 남성들이 자신들의 자결권과 자율성을 (비록 상대방이 아무리 호의로 가득하다 할지라도) 포기하기 싫어하는 것처럼, 여성들 역시 똑같은 기분을 경험한다고 강조한다. 인간은 자신의 능력을 자유롭게 자신이 원하는 대로 발휘할 때에도 행복을 경험할 수 있으며, 여기에는 여성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라는 것이다.[24] 그런데 남성의 자유를 제약하는 요소들이 대개 부모의 학력수준, 경험의 부족, 기회의 부족, 또는 불운 등에 지나지 않는다면, 여성의 자유를 제약하는 요소들은 '''실정법과 그 관습이라는 제도적 차원'''에서 부과되고 있다는 것이 문제이다.
결국, 저자는 남녀관계를 통찰해 볼 때 우리가 얻게 되는 교훈으로서, '''"인간 스스로의 질투와 편견 때문에 다른 사람을 차별하는 것과 같은 새로운 죄악을 저질러서는 안 된다"'''(p.192)는 것을 알 수 있다고 정리한다. 이것은 저자가 본서에서 여성의 종속에 대해 도출한 사실상의 최종적인 결론이라고 볼 수 있다.

3. 의의 및 논쟁


박의경(2009)[25]의 문헌에 따르면, 근대의 도래와 함께 자유, 평등, 권리에 대한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목소리에서 여성의 목소리를 찾기란 쉽지 않은 것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박의경(2009)은 그것이 여성을 남성에게 종속시키는 사회계약론자들의 전제를 포함하고 있으며, 근대적 기획 자체가 몰성적인 것이었다고 분석한다. 그리고 이에 대항하여 계몽사상의 영향을 받은 자유주의자들이 여성의 권리를 주장한 사례로 본서를 들고 있다. 이 문헌에 따르면, 이 시기의 페미니즘은 일차적으로 '''여성의 정치적 참여'''를 주장하는 데에 초점을 맞추었다고 할 수 있다.
메리 셰인리(M.L.Shanley)나 나디아 어비나티(N.Urbinati), 줄리아 안나스(J.Annas) 등의 여러 후대 연구자들은 밀의 사상이 '''결혼의 민주화'''를 위해서 필요한 것이 바로 상호적 우정과 협력관계라고 보았으며,[26] 특히 기존에는 정치적 분석의 영역이 아니라고 여겨졌던 주제를 대상으로 '''권력관계가 작동하는 정치적 영역'''으로서 분석했다는 데 의의가 있다고 평가한다. 무엇보다도, 당대 사람들이 젠더에 대해서 막연히 자연의 섭리로 알고 있던 불평등한 관계가 단지 뭇 사람들의 확인되지 않은 통념에 불과하며, 자유평등이라는 서구의 선험적 가치에 비추어 본다면 정당화될 수 없는 선호에 불과하다고 비판하였다는 가치를 갖는다.
역자가 해제에서 지적하듯이, 2장의 마지막에서 특히 수전 오킨(S.M.Okin)과 같은 여성주의 철학자들 및 정책입안자들에게서 많은 비판이 가해진다. 밀은 본서에서 여성들이 결혼 후에도 직장생활을 지속할 경우, 기존에 떠안고 있던 가사노동과 돌봄노동에 더하여 이중적인 노동을 하게 됨을 통찰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 남성들의 육아 분담과 역할을 강조할 것을 간과함으로써, 오히려 여성들이 '''가사노동까지 떠안기 힘들 것 같으면 경제적인 역할을 담당하지 말라'''는 정반대의 결론으로 이어졌다. 이는 여성들의 사회적 참여를 강조하는 3장의 내용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현대에는 남성 생계부양자 모델(male-breadwinner model)이라는 개념이 제시되어, 이것이 가정 내 권력의 차이를 형성 및 유지시키고 있으며, 이로 인해 남성과 여성 모두가 고통 받게 된다는 점을 논의하고 있다. 따라서 가정 내의 경제권에 관련해서는 더 최신의 아이디어로 업데이트가 필요하다.
임정아(2015)[27]의 문헌에서도 이에 대한 학자들의 고민을 엿볼 수 있다. 이 문헌에 따르면 본서는 여성의 종속이 쟁점으로 부각되는 맥락이 결혼 문제라고 말하면서, 규범적 원칙으로서 공리주의가 아닌 자유를 들고 있다고 말한다. 즉 여성을 종속시키는 것이 "복지 일반이라는 공리주의 원칙을 만족시킬 수 있다고 하더라도, 자유에 대한 억압을 정당화할 수 없다"(p.77). 하지만 역자의 지적처럼, 여성에게 육아를 맡기는 것이 정당화될 수 있다는 2장의 결론은 이와 상충되는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이 문헌에서는 밀이 당대의 독자들에게 지나치게 급진적이고 과격한 인상을 주지 않으려 했다는 옹호 의견을 수록함과 함께, '''동반자적 우정에 입각한 평등한 결혼관계에서 아내 쪽이 육아를 맡기로 자유롭게 최종 결정을 내렸다면 그것은 본서의 대전제와 상충되지 않는다'''는 자체적인 해석을 시도한다. 본서는 우정이야말로 가장 완벽하고 평등한 대인관계의 양식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이는 부부간에는 우정이 성립할 수 없다고 여겼던 전근대 철학자들의 관념에서 벗어난다는 것이다. 특히 본서의 포커스는 여성의 직업선택의 자유 및 법적 지위 이상으로 '''윤리적 의무로서의 남녀 간의 우정'''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관점은 위에서 소개했던 바 임정아(2012)가 자신의 각주 28번에서 일찍이 명기했던 것을 고려해야 한다. 여성 문제에 대해 밀과 테일러는 부부가 의견을 서로 같이 했지만, 테일러가 강경하고 비타협적이며 급진적 진보주의자의 관점을 반영한 반면, 밀은 '''예상 독자층의 반응과 설득 여부'''를 예상하면서 자신의 글이 가져올 정치적 효과성을 극대화하는 데 신경을 썼다는 것이다. 즉 빅토리아 시대 신사들을 안심시키고 납득시키기 위해 밀은 어느 정도 '톤 다운' 을 할 필요가 있었고, 그나마도 원고는 1861년에 완성되었지만 이때에는 시기상 좋지 않다고 여겼는지 출판을 8년이나 미루었다는 것이다.[28] 그렇기 때문에, 2장 말미의 특정 문단을 가지고 본서가 갖는 가치 자체를 폄하할 수 없다. 본서의 핵심 논증이 잘못된 근거나 추론으로 뒷받침되고 있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4. 둘러보기



[1] 윤진숙 (2014).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주의 이론과 여성의 권리. 서울법학, 22(1), 233-256.[2] 그래서 빅토리아 시대를 회고하거나 창작물에서 묘사할 때에는 그 시대 특유의 성적인 위선과 이중잣대가 흔히 포함되곤 한다고.[3] 사실 지역구 이기주의를 배격하는 정강에 있어서라면 요즘 기준으로 봐도 진보적이다. 그는 지역 주민들이 정치 활동을 해 달라고 하도 부탁하는 통에 "제가 정치를 하면 우리 지역의 이익을 위해서 뛸 생각이 없습니다" 라고 편지를 써서 돌리기까지 했을 정도였고, 정말로 그렇게 했다(…). 낙선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았을 정도의, 아니 오히려 한 번이라도 믿고 뽑아준 것 자체가 기적이 아닐까 싶을 정도의, 참으로 철학자다운(?) 정치관이 아닐 수 없다.[4] 단, 이에 대해서는 밀이 원래 늘 칭찬에 관대한 사람이기 때문이라는 얘기도 있다.[5] 아내 역시 본서와 유사한 내용을 담은 에세이인 《여성의 참정권 부여》(The Enfranchisement of Women)를 자체적으로 쓰기도 했다.[6] 김혜미 (2009). 진보를 꿈꾼 현명한 회의주의자--해리엇 테일러 밀. 새가정, 56(609), 30-33.[7] 저자는 이와 관련하여 외국인에 대한 고정관념도 예시로 들고 있다. 즉, 아일랜드인은 천성적으로 게으르고, 터키인들보다 그리스인들이 천성적으로 더 교활하다는 식의 생각이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심리학에서 이것은 근본적 귀인 오류(FAE; fundamental attribution error)라고도 불린다.[8] 이와 관련하여 저자는 "자신을 지배할 사람을 뽑는 데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허용된 자기 보호의 수단"(p.107)이라고 주장하면서, 실제로 엘리자베스 1세빅토리아 여왕, 예카테리나 2세, (성경 사사기의 인물) 드보라, 잔 다르크 등, 나라를 다스리거나 군을 통솔하는 것과 같은 금녀의 영역에서 큰 성취를 거둔 사례가 있음을 지적한다.[9] 여기서 저자는 '감정적으로 흔들리면서도 한편으로는 의로운 판결을 결연하게 내리는 재판관' 의 사례를 들고 있다.[10] 저자에 따르면, 저자가 본서를 작성하던 시점에 뇌의 최대 크기로 알려진 세계 기록은 여성의 것이었다고 한다.[11] 이 점에서 저자의 생각은 《소모되는 남자》 의 내용을 포괄하고 있다.[12] 이와 관련하여 저자는 여러 종류의 예를 드는데, 중세 신분제 사회에서도 봉건 귀족들과 농노들 양쪽 모두가, 그리고 시간이 지난 뒤 시민(burgess)들도, 귀한 사람과 천한 사람이 평등하게 권력을 공유한다는 아이디어에 대해서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또한 요즘에도 외국 사람들은 영국이 여왕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그것이 매우 부자연스럽다고 생각하여 크게 놀란다지만, 영국인들은 정작 그것에 대해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심지어 저자가 본서를 저술하던 시점에도, 미국 남부 농장주들은 노예제에 대해 조금도 부자연스럽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13] 참고로 본서는 기독교에 대해 굉장히 호의적이며, 저자는 기독교가 진보적인 정신의 안식처라고 여겼다. 기독교의 정신이 서구사회에 약자의 권리와 강자의 도덕적 의무감이라는 최소한의 인식을 심어주었다는 것이다.[14] 예컨대 남성우월주의 사회, 여성우월주의 사회, 양성평등 사회, 혼합형 사회, 기타 등등을 전부 시도해 보고 나서, "우리가 해봐서 아는데, 각각을 비교해 보니 여성을 종속시킨 사회가 가장 효율적이다!" 라고 정한 결과가 아니라는 것이다.[15] 본서에서 언급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이나, 1848년 혁명빈 체제의 붕괴로부터 저자가 어떤 가능성을 보았을지도 모른다.[16] 저자는 4장에서도 남편과 아내의 관계는 군주와 신하의 관계와 동일하다고 주장하며, 그 이유로서 신하(아내)가 군주(남편)보다 총명하든 아니든 간에 군주는 세습된 정통성을 통해 탁월함을 보장 받고, 신하는 무조건 군주에게 복종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17] 이와 관련하여 저자는 다시 군주제의 비유를 들어, 어째서 여성의 종속은 유독 강한 저항을 받고 잘 혁파되지 못하는지를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오늘날 여성이 기존 질서에 저항하는 것이, 마치 왕의 전권에 저항하는 것처럼 받아들여지는 유일한 경우라고 하겠다."(p.150) 즉 저자에 따르면, 페미니즘은 남성들에게는 마치 반역죄처럼 받아들여진다는 것이다.[18] 저자에 따르면, "실질적으로 결혼 제도야말로 우리 법체계 안에서 발견되는 유일한 노예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p.156)[19] 저자가 다시 예시화하는 로마 시대를 비교하자면, 당시 기록을 보면 노예들이 주인을 배신하라는 고문에도 끝내 영웅적인 죽음을 맞이하는 내용이 자주 등장하며, 노예제 사회에서 주인과 노예 사이에 강력한 유대관계가 존재하는 것은 전혀 드문 일이 아니었다고 한다. (저자는 언급하지 않았으나, 심지어 구약성서에서도 종이 주인을 진심으로 존경하여 자유로워지기를 거부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율법이 나온다.) 하지만 그런 "훈훈한" 미담이 있다고 해서 우리가 노예제를 옹호해야 하느냐 하면 그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유독 여성의 종속만큼은 "선량한 지배자" 들이 있다는 이유로 옹호되어야 하느냐는 반문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20] 당장 정치철학계에 수천 년 동안 묵은 떡밥 중 하나가, 철인과 같은 이상적인 독재자가 나타나서 절대적인 권력을 갖는다면, 사람들은 그 탁월하고 자상한 권력자에게 자신들의 주권을 양보하고 싶은 매력을 느끼곤 하며, 이 경우라면 민주정보다는 낫지 않느냐는 것이다.[21] 이와 관련하여, 국내의 사회학자 오찬호 씨가 자신의 저서인 《그 남자는 왜 이상해졌을까?》 에서도 이 반론을 다룬 바 있다.[22] 이는 저자가 언급하지 않았던 먼 미래의 제도인 여성 할당제에 대해서도 서로 충돌하는 부분이다. 저자의 생각은 리버럴 페미니즘 중에서도 가장 고전적인 관점으로, 저 유명한 크리스티나 호프 서머스의 관점과 상통한다. 그리고 이에 대한 가장 대표적인 비판이 바로 "현실적으로 지금 당장의 상황에서, 극소수 상류층 여성들 말고 경쟁력이 있는 여성이 얼마나 되겠느냐" 이다. 그리고 이 인식에서 연결되는 게 바로 여성 할당제다.[23] 이에 대해, 본서의 역자는 저자가 자신의 경험을 반영하였을 것이라고 말한다. 저자의 아버지는 자신의 지적 수준을 전혀 따라갈 수 없었던 아내(저자의 어머니)로 인해 매우 괴로워했고, 어린 밀은 아버지가 늘 어머니를 멍청하다고 욕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자랐다는 것.[24] 물론 어떤 여성들은 육아를 희망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저자에 따르면, 그나마 자녀의 육아라는 것도 결국에는 자녀들을 성인으로 키워낸 후에는 끝나게 되며, 그 이후에는 그 어떤 전념해야 할 일도 없어지게 되어, 이들이 며느리나 딸의 호의에 기대어 살아가는 동안 겪는 모멸감은 형용할 수 없이 심각하다고 말한다.[25] 박의경 (2009). 근대정치사상과 인권 그리고 여성. 한국정치외교사논총, 30(2), 127-151.[26] 임정아 (2012). 다문화사회와 밀(J. S. Mill)의 여성주의--『여성의 종속』을 중심으로. 동서철학연구, 66, 295-314.[27] 임정아 (2015). 밀의 『여성의 종속』에서 우정 개념을 매개로 한 여성주의와 다문화주의의 양립가능성 검토. 범한철학, 76, 65-90.[28] 그러나 이런 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의 전기 작가 마이클 패케(M.J.Packe)는 본서에 대해 "밀이 이제껏 쓴 책 중에서 가장 많은 적개심을 불러일으킨 책" 이라고 정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