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갈량/생애
1. 출생
서주(徐州) 낭야국(琅邪國) 양도현(陽都縣)(현 산둥성 린이시 이난현) 출신으로 다른 제갈가문도 이곳에서 태어났다. 형제로는 7살 연상의 형 제갈근,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누나 2명, 동생 제갈균이 있다. 기록을 분석하면 제갈근은 친형제고 제갈균은 이복형제라고 추정할 수 있는 정황이 존재하나, 상반되는 기록 또한 있어서 확실히는 알 수 없다.
사서에 따르면 한에서 사예교위를 지낸 제갈풍의 후손으로 부친 제갈규는 한 말기 연주 태산군에서 군승을 지냈고 제갈량이 어릴 때 사망했다. 이에 숙부 제갈현이 제갈량 형제들을 도맡았다.
제갈현이 예장 태수로 부임하게 되자 그를 따라갔지만 부득이하게 쫓겨나서 형주 군벌 유표에게 의탁하게 된다. 하지만 이 시기 서주에서 서주 대학살이라는 참상이 벌어진 탓에 수많은 서주 호족들이 형주로 도주한 걸 생각한다면 제갈 가문이 서주를 떠난 건 이러한 상황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1]
이 때 형 제갈근은 제갈현을 따르지 않고 양주로 이주하는데, 이것이 둘의 인생을 가르게 된다.
2. 청년기
형주 군벌 유표는 군사적으로는 뛰어나지 않았지만 내정에 뛰어나 형주를 안정적으로 다스려서 수많은 명사들과 학자들이 양성되었던 곳으로, 제갈량 또한 그러한 안정 속에서 학문을 갈고닦을 수 있었다. 또 제갈량의 누이들이 형주 대호족들과 혼인하게 되면서 형주 호족들과 인맥을 쌓게 된다.
제갈현이 죽은 뒤 청년이 된 제갈량은 몸소 밭이랑에서 농사지었으며, 양보음(梁父吟)이라는 노래를 부르기 좋아했다.
제갈량이 불렀다는 양보음은 자세히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image]
[2][3]
제갈량은 신장 8척에 매우 빼어난 외모를 지니고 기재를 가져 영웅의 그릇이었다고 한다. 늘 자신을 제나라의 재상 관중과, 연나라의 악의에 비교했으나 당시 사람들은 이를 수긍하지 않았다.[4] 오직 친한 벗으로 지내던 기주 박릉군 출신의 최주평, 예주 영천군 출신의 서서(자 원직)만이 참으로 그러하다고 인정했다.
젊은 시절 공부한 방법이 당시로선 특이한 편이었다. 당시 제갈량의 벗들인 석도, 서서, 맹건 등의 선비들은 글자 하나하나를 정독해가며 세세한 구절까지 이해하려고 노력한 반면에 제갈량은 책 전체의 내용을 파악하는데 더 신경썼다고 하는데, 이 구절을 보고만 특이하다는 논조로 해석하기보다는 앞날을 길게 내다보고 장구한 계책을 준비하는 제갈량의 거시적 안목에 대한 칭찬의 논조로 봐야 한다는 의견이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 구절은 거시적 안목보다는 책을 읽는 자세의 차이를 설명해주는 구절이라는 의견이 있다. 즉 훈고학적으로, 책상물림 학자처럼 책을 읽는 게 아니라 (평시엔 이런 학자적 엄밀성이 더 중요시되겠지만) 당시 난세에 맞는 바로바로 세상을 위해 쓸 수 있는 실천적 안목, 경세가적 자세가 중요하며 제갈량은 그런 유형의 사람이었음을 강조하는 의미로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의견이다. 책을 구절 하나하나 엄밀히 읽지 않고 큰 맥락으로 책 전체를 이해하는 것을 거시적 안목이라 볼 수는 없으며 거시적 안목이란 말은 이때 쓰이는 용어가 아니고 책읽는 방법의 차이 지식을 대하는 태도의 차이일 뿐이라는 것.
나관중도 제갈량의 이런 학문적 태도가 인상깊었는지 연의에서 동오의 명사들과의 설전에서도 '''나는 경전 한자 한자마다 걸고 넘어지는 치졸한 사람 아니다'''는 식의 언급을 집어넣는다.
위략에 따르면 이 당시 제갈량은 매일 새벽부터 밤까지 차분하고 침착하게 무릎을 끌어안고 앉아 크게 읊조리며 세 사람에게 말했다,
세 사람이 제갈량 자신은 어떠한지 묻자 다만 웃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경(卿) 세 사람이 벼슬하면 가히 자사나 군수에까지 오를 것이오.
맹공위가 고향을 그리워하여 북쪽으로 돌아가려 하자 제갈량이 말하길,
배송지는 이런 평가를 했다.중원에는 사대부가 많은데, 어찌 필히 고향에서 현달하려 하시오!
진장문은 진군, 사마중달은 사마의. 진군은 재상이고 사마의는 대장군이니 배송지는 제갈량이 스스로 관중과 악의에 비긴 것을 비추어서 재상으로는 진군도 그 상대가 되지 않고, 장군으로서는 사마의도 그에 미치지 못할 것이라고 제갈량을 극찬하고 있다.<위략>의 이 말은 제갈량이 맹공위를 위한 계책이라 함에서는 가하며, 만약 겸하여 자기 자신을 위해 하는 말이라 하면 그의 진심을 통달하지 못한 것이다. 노자는 '남을 아는 것이 지혜라면,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은 밝음'이라 했으니, 무릇 현달한 이들은 이 두가지를 마땅히 겸하는 것이다. 제갈량의 감식으로 어찌 자신을 헤아리지 못하였겠는가? 무릇 무릎을 세우고 읊조리며 때를 기다릴 제 그의 뜻이 말에 나타나고 그 의지와 기개가 드러났으니, 이는 처음부터 정하여졌던 것이다. 만약 중화를 거닐며 그 뛰어난 재주를 펼쳤더라면, 아무리 선비가 많다 한들 어찌 가리고 막혔겠는가! 위씨에 몸을 맡겨 그 재주와 기상을 펼쳤더라면 실로 진장문이나 사마중달도 감히 대등히 겨루지 못하였을 것이거늘, 하물며 나머지 선비들은 말해 무엇하겠는가!
공업을 이루고 도를 행하지 못함을 근심하지 않으며, 비록 뜻이 우주처럼 넓었으나 끝내 북쪽을 향하지 않은 것은, 권어(權禦)가 이미 옮겨가고 한조가 장차 기울어지려 하므로 바야흐로 종실의 인걸을 도와 미약해진 것을 흥하게 하고, 끊어진 것을 잇고, 이겨서 다시 회복하는 것을 자신의 소임으로 여겼기 때문이리라. 어찌 궁벽한 변경에서의 구구한 이익 때문이겠는가! 이는 사마상여가 말한바 ‘봉황새와 대붕이 이미 멀리 날고 있는데, 사냥꾼은 여전히 늪과 못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한미한 가문의 출신인 서서조차도 어사중승 중랑장이라는 비교적 요직을 맡았고, 석도나 맹건 또한 주의 자사 정도는 했었더랬다. 적어도 조비 이전에는 재주로 인재를 뽑고 쓰겠다는 조조의 천명은, 또한 '적어도' 조조가 스스로 뽑거나 빼낸 인재들에 대해서는 유효했던 셈이다. 또한 배송지의 평이 비교적 틀림이 없었던 것은, 그 당대에도 제갈량의 재능에 대한 평은 드높았고, 거두어 쓰려는 사람들이 없지 않았으며, 심지어 조조의 시대에도 조조 스스로가 직접 제갈량의 고향 물건인 정향을 보내며 은근히 그에게 귀순을 권유한 것으로 추정되는 사실이 있다는 것을 통해 어느 정도 짐작이 가능하다. 그리고, 제갈량이 자기에게 매겨질 값이나 재면서 자신이 가장 비싸게 팔릴 장소를 찾는 인물이 아니었음은, 그가 후일 촉의 재상이자 대장군으로서 국궁진력하여 나라를 위해 싸우다 쓰러졌음을 통해 알 수 있다.
문(文)의 재능에 있어서도 이러할진대, 가뜩이나 실력주의가 관철되는 무(武)에 대해서는 말이 더 필요가 없다. 하물며, 그 적이 된 입장에서도 '만 사람을 대적할 만한 용맹이 삼군을 뒤덮는 천하의 영웅들'이 라고 극찬될 인물들이라면 말해 무엇하겠는가.
그러나, 관우, 장비, 조운 등을 찬할 때, 사람들이 그 재능만을 보고 찬하지는 않을 것이다. 세 사람 모두, 유비가 툭하면 땅 뺏기고 의지할 곳 없이 돌아다니는 처지가 되었음에도 끝까지 충의를 잃지 않았고, 관우의 경우는 조조에 의해 장군에 임명되고 제후의 반열에까지 오른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약속된 영예와 벼슬을 뒤로 하고 조조나 원소에 비하면 하잘것없는 존재인 유비에게로 돌아갔다. 조조나 원소 아래서는 중히 쓰이지 못할까 두려워해 자신들의 존재가 부각될 유비에게 갔다는 말은, 이런 경우를 생각해보면 앞뒤도 맞지 않을 뿐더러, 유비 집단의 중심축이 되었던 사상을 망각한 발상이 아닐까.
3. 유비에게 거두어지다
양양기에 따르면 수경선생 사마휘는 유비를 만난 자리에서 유비가 그에게 현 정세에 대해 질문하자 "이를 아는 건 시무를 아는 준걸 뿐이며 와룡(=복룡)과 봉추인 제갈량과 방통이 바로 그들이다."라고 대답하며 은근히 제갈량과 방통을 높인다.
207년 유표의 객장으로 형주 남양군 신야현에 주둔하고 있었던 유비는 사관을 요청한 서서를 만나보고 중하게 기용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서서가 제갈량을 와룡이라며 추천한 것을 듣게 되었다. 유비는 서서에게 제갈량을 데리고 와 달라고 요청했지만 서서는 유비 본인이 스스로 몸을 낮추어 만나야만 한다고 간언했다. 이에 유비가 제갈량의 초려를 세 번 방문하여 마침내 제갈량을 만나 한실부흥의 계책을 듣고 등용하니 이를 후세에 삼고초려라고 한다. 이때 제갈량이 권한 전략을 융중대, 혹은 초려대라고 하는데 이 자체도 명문으로 칭송받고 있다.
한실(漢室)이 무너지고 간신이 천명을 훔쳐 주상께서 몽진 길에 오르게 되었소. 나는 스스로의 덕과 역량을 헤아리지 못하고 천하에 대의를 펴고자 했으나 지모가 얕고 부족해 실패하고 좌절하다 오늘에 이르렀소. 그러나 뜻은 여전히 버리지 않았으니, 장차 어찌 해야 할지 알려 주시겠소?
유비의 질문
이를 유비가 옳은 말이라고 칭송하며 두 사람은 군신관계가 된다. 정사에서는 그냥 세 번만 만났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단순히 그렇게 묘사하면 소설로서는 재미가 없으므로 연의에선 이 삼고초려 에피소드가 각색된다. 어쨌든 추처낭중의 꼴로 제갈량은 유비와 인연을 맺게 되고, 정식으로 등용되어 유비의 든든한 심복 중 하나가 된다. 이때 제갈량이 받은 지위는 군사중랑장으로 공식적으로 좌장군 지위인 유비가 제갈량에게 좌장군부의 사무를 총괄하는 자리를 맡겼다고 할 수 있다. 이제 막 입사한 젊은이에게 중요한 자리를 줄 만큼 유비가 많은 기대를 했음을 파악 가능하다.동탁이 나타난 후에 호걸들이 아울러 일어나 주(州)를 타넘고 군(郡)을 연결한 자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습니다. 조조는 원소에 비하면 명성은 미약하고 그 군사는 적었으나 마침내 원소를 이겨 약자에서 강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천시(天時) 만이 아니라 또한 사람의 꾀에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조조는 이미 백만 무리를 가졌고 천자를 끼고 제후에게 호령하니(협천자이령제후, 挾天子而令諸侯) 이는 진실로 그와 창끝으로 싸워 다툴 수 없습니다. 손권은 강동을 점거하여 차지한지 이미 3대를 거쳤으며, 나라가 험준한 곳에 있고 백성이 귀부하며 어질고 능력 있는자가 그를 위하여 쓰이니 이로써 그와 더불어 도와줄 사람으로 삼아야지 도모해서는 안됩니다.
형주는 북쪽으로 한수, 면수에 의지해있고 이로움은 남해(南海)까지 다하며, 동쪽으로 오회로 이어지고 서쪽으로 파와 촉과 통하니 이는 전쟁하기에 적당한 나라이며 그곳의 주군은 지킬 능력이 없어, 이것은 거의 하늘이 장군에게 보탬이 되어 준 것이니 장군은 취할 뜻이 있으십니까?
익주는 험준한 요새이고 비옥한 들판이 1천리이며 천부의 토지입니다. 고조께서 이에 의지해 황제의 업적을 이루셨습니다. 유장은 어리석고 약하며, 장로는 북쪽에 있으면서, 민은국부(民殷國富, 백성은 넉넉하고 나라는 부유함)하나 백성들을 불쌍히 여겨 구휼함을 모르니, 지혜롭고 능력 있는 선비들은 개명한 주군을 얻으려고 생각합니다.
장군께서는 황실의 후예이며 신의는 사해에 드러났으니, 영웅들을 총괄하여 관할하며 현인 그리워하는 것을 목마른 사람이 물 찾듯 하십니다. 만약 형주, 익주를 타넘어 차지해 그 험함에 기대고, 서쪽으로 여러 융족들과 화친하고 남쪽으로 이월(夷越)을 어루만지며, 화목하고 밖으로는 손권과 우호관계를 맺으며 안으로는 정치를 닦으면서, 천하에 변고가 있을 때 한명의 상장(上將)에게 명해 형주의 군사를 이끌고 완(宛), 낙양으로 향하게 하고 장군께서는 몸소 익주의 군사를 거느리고 진천(秦川, 진령산맥 북쪽의 위수(渭水)유역 평원 지대. 지난날 이곳이 진(秦)나라에 속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출병하신다면, 대나무 그릇에 담은 밥과 호리병의 국으로 장군을 영접하지 않을 백성이 감히 누가 있겠습니까? 실로 이처럼 한다면 가히 패업(霸業)이 이루어지고 한실(漢室)이 흥할 것입니다.
제갈량, 융중대(隆中對), 초려대(草廬對)
유비와 제갈량과의 정이 날로 깊어져 관우, 장비 등이 불쾌한 기색을 보이자 유비가 “내가 공명을 얻은 것은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것과 같다. 원컨대, 제군은 이에 관해 다시 말하지 말라.”라고 다독이자 불평을 멈췄다. 이것이 고사성어 수어지교의 유래다. 비록 불평을 멈췄다고는 하나 불만은 그대로 내재해 있었다고 봐야 할 것이, 유비와 관우·장비의 사이는 일반적인 군신관계를 넘어선 것이었고 이러한 끈끈한 커넥션에 아무런 실적 없이 쑥 밀고 들어온 제갈량에 대한 관·장의 감정은 한바탕 웃음으로 날려버릴 성질의 것은 아니었다고 보는 게 인지상정이다. 그래서인지 제갈량이 이들을 교류할 때 조심했다는 흔적이 보이는데 마초가 어떤 사람인지 묻는 관우의 서신에 '맹기(마초)는 익덕(장비)와 선봉을 다툴만한 인물이나 명성에 있어서는 관공만 못하다'라고 답신을 한다든지 황충을 사방장군으로 삼을 때 마초, 장비는 공을 봤지만 관우는 보지 못했으니 납득하지 못할 것이라고 진언하기도 한다. 장비는 본디 사대부를 공경했으므로 제갈량의 뛰어난 책략을 보면서 제갈량에 대한 불만은 금방 풀렸을 것으로 보이지만 관우는 성정이 그렇지 않았으므로 제갈량이 특별히 신경 썼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일단 관우의 경우 제갈량의 서신을 받자 아이처럼 매우 좋아하며 주변 사람들에게 서신을 보여주며 기뻐한 걸로 보아 제갈량을 내심 인정했던 걸로 보인다. 자기가 좋아하지 않는 아들뻘되는 사람이 칭찬한다고 기뻐할 정도로 관우가 줏대없는 인물도 아닐 터이다.
유표는 채부인의 말을 받아들여 작은 아들인 유종을 사랑하고 유기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 유기는 제갈량에게 겨우겨우 졸라서 계책을 듣게 되었다. 제갈량의 계책은 안에 있지 말고 밖에 있는게 안전하다는 것이었고 때마침 황조가 죽자 유기는 밖으로 나가 강하태수가 되었다.
이때 갑자기 유표가 죽고, 유종은 조조에게 항복했다. 당황한 유비는 번성에서 이 일을 듣고 군사들을 이끌고 남쪽으로 피난했는데 제갈량도 동행하였다. 이때 서서도 함께 뒤따랐는데 조조가 추격해 격파하고 서서의 모친을 붙잡으니 서서가 어쩔 수 없이 유비에게 작별을 고하고 조조에게로 떠났다. 이후 유비가 강하태수 유기가 머무는 하구에 도착하자 제갈량이 손권과 동맹할 것을 주장하였고 마침 손권도 유비와 동맹할 목적으로 유비에게 노숙을 보냈으므로 제갈량은 노숙과 함께 동오로 떠나 같이 손권을 설득하였다.[5] 결국 유비와 손권은 동맹을 맺어 조조와 싸우길 결의하였다. 이후 유비는 손권과 동맹하여 적벽대전에서 조조를 크게 무찔렀다. 유비는 이때 형남 4군을 취했고, 제갈량을 군사중랑장으로 삼아 영릉, 계양, 장사 3군을 감독하며 부세를 거두어 군대의 무기와 양식을 채우게 했다.[6]
이후 유비가 익주에 들어서자 유비가 떠난 형주를 관우와 함께 다스리면서 후방을 지켰고, 손부인이 유선을 데리고 동오로 떠나는 것을 막았다. 유비가 가맹관에서 유장을 공격하니, 유비가 익주를 공략할 때 장비, 조운과 더불어 형주에서 원군을 이끌고 와 동쪽에서부터 익주 땅을 평정해 나갔다. 제갈량은 장비, 조운 등과 함께 군사들을 이끌고 장강을 거슬러 올라가며 군현들을 나누어 평정하고[7] , 유비와 함께 성도를 포위했다. 성도가 평정되자 유비는 제갈량을 군사장군으로 삼고 자신의 벼슬인 좌장군부의 일을 대행(서좌장군부사, 署左將軍府事)하게 했다. 이후 유비가 밖으로 출병하면 제갈량은 늘 성도를 진수하며 식량과 병사를 대었다.[8] 후한 멸망 직후에 제갈량의 제안[9] 으로 유비는 황제에 오르며 제갈량은 승상에 임명된다. 이때 당시부터 녹상서사, 가절도 겸했고 장비가 죽은 이후엔 사례교위도 겸했는데, 즉, 제갈량이 내외조를 모두 장악한 형태가 된다. 유선 대에 이렇게 되는 것은 유선의 나이가 어리고, 유비의 유훈이기도 했다는 점에서 이해할 만하나[10] , 건국 군주의 시대에 이렇게 한 것은 자칫하면 건국과 동시에 권신이 나타나고 황제의 위치가 위태로워지는 사태가 벌어질 수 있기 때문에 상당히 위험한 행보로 볼 수 있다. 즉위 석 달만에 친정한 것으로 보아, 온전히 전시를 상정한 행보였던 것으로 풀이된다.
정사 삼국지의 주석자 배송지는 믿을 수 없다고는 하면서도 이 부분부터 제갈량의 일화인 곽충의 오사를 기재하는데, 일사는 자치통감에도 실려 제갈량의 법치에 대한 정설로 여겨지며 촉과 문서에서 설명하고 있고, 다른 세가지 이야기는 제갈량의 북벌 문서에서 설명하고 있으므로 여기서는 곽충 이사만 게재한다.
어느날 조조가 자객을 보내 유비를 만나게 했는데 유비가 이 사람과 위나라를 정벌하는 것애 대해서 얘기를 나누다 보니 유비의 생각과 들어 맞았었다고 한다. 자객이 유비를 공격할 기회를 노리는사이 제갈량이 들어왔는데 자객이 심히 놀라 측간으로 가고 제갈량은 그가 보통인물이 아님을 알았다고 한다. 유비가 그대를 보좌할 뛰어난 선비를 얻었다고 하자 제갈량이 탄식하길 '안색을 보니 시선을 아래로 깔고 눈길을 피했는데 간사한 형상과 사악한 마음이 들어나니 조조의 자객입니다'라고 했고 그를 추격했으나 이미 달아났다고 했다. 배송지는 유비가 사람보는 눈이 있는데 이런 뛰어난 인물이라면 자객이 될 리도 없고 제갈량에 견줄 정도면 이름이 남았어야 할 것이나 그렇지 않다며 이 일화를 부정하였다. 다만 항장들을 가까히하다가 곽순에 의해 암살된 비의의 일화도 있고 유비 스스로도 유평의 문객에게 암살 시도를 당하기도 했으니 이것만으로 부정하기엔 근거가 부족하지 않겠냐는 얘기도 있다. 어쨌거나 이는 제갈량의 신통한 사람 보는 식견을 보여주는 일화이다.
이릉대전 이후 유비는 병이 깊어지자 성도에 있던 제갈량을 불러 뒷일을 부탁했다. 제갈량에게 말하니, “그대의 재능이 조비의 열 배에 달하니 필시 나라를 안정시키고 끝내 대사를 완성할 수 있을 것이오. 만약 내 아들이 보좌할만 하면 보좌하시고, 그가 재능 있는 인물이 아니면 그대가 스스로 취하도록 하시오.” 제갈량이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신이 감히 신하로서의 헌신을 다하고 충정의 절에 힘쓸 것이니, 죽기로 계속할 것입니다.” 유비는 또 유선에게 말했다, “너는 승상과 함께 일을 처리하고 승상을 이 아비처럼 섬겨라.” 또한 마속을 중용해서는 안 된다는 말도 남긴다.
여담으로 계한보신찬에 따르면 유비가 사망할 당시 유언으로 제갈량을 재상의 지위에 올렸다고 하는데, 제갈량은 오래 전부터 승상이었고 유비가 황제에 즉위한 이후 녹상서사도 겸했으므로 이때 받은 직위는 승상보다 높고 친왕과 동격인 상국으로 보인다. 진수의 삼국지 촉서 제갈량전에도 제갈량은 상국의 지위에 올랐다고 했으니 제갈량의 최종 직위는 상국으로 추정된다. 상국에 오른 후한 말~서진시대의 인물로 동탁, 사마소, 사마륜이 있는데, 이들의 공통점은 황제의 권력을 능가한 권신이고 이 중 둘은 직접 찬탈까지 했다는 점이다. 상국은 국정 전권을 다룰 수 있으므로 마음만 먹으면 찬탈이 가능한 정도이며, 구석을 받고 상국에 오르는 건 사실상 제위 찬탈 예비 단계다. 유비가 이 자리를 제갈량에게 주면서 "내 아들이 못 써먹겠으면 그대가 취하시오"란 말을 한 건 결국 "니가 하고 싶으면 찬탈해버려라"라는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 하지만 제갈량은 아래에 나오듯이, 황태자 유선을 죽을 때까지 충심으로 모셨으며 밤낮으로 보필하다 결국 쇠하여 쓰러진다. 또한 제갈량은 전설의 관직인 상국의 지위를 받았음에도 죽을 때까지 승상으로 자칭했다.
4. 촉한의 국력을 강화시키다
이릉대전의 대패가 촉한에 안긴 손실과 상처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새삼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전쟁이 종결된 직후 위나라의 황제 조비는 유비가 없는 촉한을 사실상 없는 나라로 치부하며 동쪽의 손권에게로 공세를 집중했다.
조비의 이런 인식은 당시 사람들에게는 결코 이상할 것이 없는 시각이었다. 최대 8만에 달하는 병력과 전국에 널리 명성을 떨치던 건국 황제 유비와 관우, 장비의 사망[11] , 그리고 반란 세력의 거병. 태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신생 국가가 감당하기에는 지나치게 거친 시련이 아닐 수가 없다. 지도력이 검증되지 않은 후계자 유선이 황제 지위를 계승한 223년, 사태를 수습할 모든 책무는 무향후에 봉해진 승상 제갈량의 어깨 위에 놓이게 되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위나라에서 촉한이 약해진 틈을 타 당장 촉한을 멸망시켜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지만 조비가 손권이 자기를 속였다는 이유로 제위기간 동안 동오에만 남정을 하고 모두 패배하는 삽질을 하면서 촉한은 침략받지 않고 시간벌이를 할 수 있었다. 한창 나라 복구하는 도중에 위에서 계속 공격을 퍼부었다면 더 골치아팠을 것이다.
자세한 것은 제갈량/업적 참고.
5. 남만 정벌
[image]
제갈량의 남중정벌도
촉한의 정사(政事)는 대소를 막론하고 모두 제갈량에 의해 결정되었다. 남중(南中)의 여러 군(郡)이 아울러 반란을 일으켰는데, 당시 월수의 수족 고정과 익주의 대호족 옹개, 맹획 등이 남중 사람들을 거짓말로 선동하여 모반을 일으켰다. 이에 월수군을 다스릴 수 없어 월수태수 공록을 안정현에서 근무케 했다. 제갈량이 보낸 촉군 사람 종사 상기가 군 주부를 잡아 심문을 하자 가뜩이나 불손한 태도를 보인 장가태수 주포가 상기를 죽이고 반란을 일으키니 제갈량은 이제 막 대상(大喪)을 당했으므로 곧바로 군사를 일으키지 않았다. 일단 제갈량은 오나라에 사신을 보내 동맹을 성사시켰는데 제갈량의 남정은 기본적으로는 남중 반란의 복속이었으나, 그 배후에 있던 오나라의 도발과, 혹시나 모를 침공을 막기 위한 성격도 강했음을 보여준다.
다행스럽게도 남중 4군 중 가장 크고 인구도 많은 군인 영창군에서는 여개와 왕항 등의 해당 지역 관리들이 반란에 찬동하지 않았다. 거기다가 익주의 옹개와 월수의 고정은 애초에 촉한 조정에서 임명을 한 태수도 아니고 장가의 주포 역시 제갈량이 한 인선이 아니었으니, 이 사건은 중앙 조정의 인선 문제라기 보단 다른 것에서 문제를 찾아야 했다. 근본적으로 남중 반란은 토착 우두머리들인 주모자들이 현지 주민들을 거짓말로 선동하고 있다는게 가장 큰 문제였고, 그렇기에 제갈량은 선동으로 인해 등을 돌린 현지 주민들의 마음을 촉한 정부가 다시 얻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한편, 유비가 죽기 전 아들, 제갈량, 이엄으로 권력을 나누었고 유비는 자신의 병사들을 조운에게 맡긴 상황에서, 죽으면서 이엄에게 군권을 맡겼다. 당시 이엄이 중호군/통내외군사로 조운보다 위에 있으나, 영안은 유비의 패잔병과 조운의 남은 병사들이 주둔하고 있었다. 이는 오정벌에 나선 군대, 유비가 거느린 촉의 총 병권 중 온전한 후방 병력은 온전히 조운이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제갈량은 남중 정벌을 위해, 조운을 중호군으로 임명하여 군권을 분배하는 작업을 했고, 남쪽을 정벌하는 위치인 정남장군으로 임명하고 원정을 갔을 것이다.
건흥 3년인 225년 봄에 제갈량은 군사들을 이끌고 남쪽을 정벌한다. 안상으로부터 수로로 월수로 들어갔으며 마충을 장가로 이회는 익주로 보내고 건위태수 왕사를 익주태수로 삼았다. 고정은 모우로부터 정책, 비수에 이르기까지 망루를 많이 세워두었는데 제갈량은 고정의 군대가 모이길 기다려 그들이 모이자 한꺼번에 토벌하여 비수에 이르렀다. 제갈량은 고정을 참하고 마충은 장가군을 격파하고 이회는 남중의 이족을 격파했다. 한편 고정의 부곡이 옹개를 살해하자 맹획이 이어받았다. 5월에 제갈량은 노수를 건너 익주를 정벌하고 맹획을 일곱번 잡아 일곱번 놓아주었고 그를 복종시켰다. 이를 정리하면 제갈량은 반란의 핵심이 옹개에 있음을 알고 옹개의 본거지인 익주군을 포위하기 위해 군을 세개로 나뉘어 주력군은 자신이 이끌어 반란의 선봉이라 할수 있는 고정을 격파하고 영창을 안정시킨뒤 익주로 향하고 이회는 자신의 고향쪽으로 우회 진격해 남쪽으로 반강까지 갔으며, 동쪽으로 장가와 연접해 익주군 남쪽으로 쳐들어가 옹개의 배후를 차단한 것이다. 마충은 동군을 이끌고 장가로 가서 옹개의 지원세력을 말소하고 선정을 펼쳐 그곳을 안정시킨다.
가을에 마침내 4군을 평정해 익주군을 건녕군으로 고쳐 이회를 태수로 하고 안한장군과 교주자사를 더하고 미현으로 치소를 옮겼다.[12] 또 건녕, 월수[13] 를 나누어 운남[14] 을 설치하고 여개를 태수로 삼고 건녕, 장가를 나누어 흥고군을 설치했고 마충을 장가태수로 삼았다. 남중의 경졸(강병), 청강 만여 가를 촉으로 옮겨 5부로 삼아 당할 자가 없는 정예로 육성하고 이를 비군(飛軍)이라고 이름했다. 연약한 자들은 현지 호족의 부곡으로 삼고 오부도위를 설치하였으며 이를 오자(五子)라 하여 남쪽 사람들이 이를 사성오자라 했다. 이민족들이 대호족과 부호를 따르지 않았는데 금과 비단을 내어 이들의 부곡으로 삼도록 권하고 부곡을 많이 얻은 이들은 관직을 세습시켜 주었다. 이에 이민족들이 재화를 탐하여 촉한에 점점 복속하였고 이족과 한족이 어우러져 부곡을 이루었다.
제갈량은 남중의 준걸 건녕의 찬습, 주제의 맹염 및 맹획을 거두어 관속으로 삼았다. 찬습은 관직이 영군에 이르렀고 맹염은 보한장군, 맹획은 어사중승에 이르렀다. 남중의 금, 은, 단, 칠, 밭가는 소, 전마가 군국의 비용으로 생산되어 촉한을 부유하게 했으며 도독은 항상 신중한 이들을 기용하였다. 이 공으로 제갈량은 부월(鈇鉞) 1구(具), 호분(虎賁, 숙위군) 60인, 고취(鼓吹, 취주악대) 1부, 곡개(曲蓋, 대가 굽은 일산) 하나, 우보(羽葆, 새깃으로 장식된 일산)을 하사받았다.
남만왕 맹획과 관련되어 내려오는 유명한 칠종칠금의 고사만 보더라도 이민족에게 강경책과 회유책을 적절하게 사용하여 굴복시키고, 이후 교화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한 것으로 보여진다. 정사 배송지 주(한진춘추)에도 이름이 기록된 맹획은 정3품 어사중승으로 이는 감찰직 중 가장 높은 자리이며, 맹획의 일가붙이 쯤으로 추정되는 맹염은 호보감(금군 보병사령관, 오늘날로 치면 대통령 경호실 차장 격)이 되어 5차 북벌에 참가하기도 했다. 이와 같이 당시 삼국 중에서도 제갈량의 이민족 정책은 가장 성공한 정책으로 평가받는다. 제갈량은 인사를 배치할 때 지방 관리는 익주파를 기용했는데, 비슷하게 남중 일대에도 관리는 이회, 맹획과 같이 그 지역에 영향력 있는 사람을 기용해서 불만을 최소한으로 줄인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남중의 경우, 완전한 이민족이라고 보긴 어렵다. 애시당초 이 일대는 전-후한시대부터 제국의 화폐를 조달하는 광산이 위치해 있었고, 철과 소금, 비단 산업으로 중원의 부자들조차 버로우할 만큼 갑부들이 창궐했던 곳이다. 한 말엽에 무정부 상태가 몇십 년 이어지면서 엉망이 된 거지, 무슨 연의 묘사처럼 미개척 밀림지대에 우가우가 이민족들이 뛰노는 이런 곳은 아니었다는 것. 당장 이민족이라고 말 나오는 남쪽 인물들은 고정과 유주 정도다. 제갈량 본인도 당시 기준으로는 깨어있는 사람에 해당되며(물론 기본적으로 당시 사람의 사고방식을 지금 기준으로 판단할 순 없는 일이다), 남만의 이민족들의 마음을 얻어야 한다는 점을 파악하고 있었고 이는 마속과의 대화에서도 드러난다.
정리하면 남중은 국경의 끝자락에 위치하고 있는데다 현재 중국에서도 가장 많은 이민족이 분포되어 있을 정도의 지역이었다. 한의 영토였지만 후한말 중앙정부가 붕괴되고 유언-유장-유비-유선으로 군벌 및 지방정권이 수립되면서 일시적으로 지배권이 흔들리고 동오의 공작이 곁들여져 호족 및 이민족이 결탁해 반란이 일어난 것. 내항도독을 처음 보냈던 유비 시절부터도 고정이 반란을 일으켜 신도현을 포위하거나 건안 말년 호족 옹개가 손권에게 투항해 익주 태수 정앙을 죽이고 손권과 내통해 후임 태수였던 장예를 사로잡아 동오로 보냈던게 대표적인 예.제갈량이 남쪽으로 떠나며 마속이 전송하자 계책을 물었는데 "남중은 멀고 험하여 그를 믿고 반역하니 지금 격파해도 바로 다시 반역할 것입니다. 지금 승상께서 나라의 힘을 모두 기울여 북벌하고 강적을 맡으시니, 저들은 관리들이 텅 비는것을 알고, 신속히 반역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만약 저들을 다 없애는것은 어진 자의 마음이 아니며, 또 그렇게 할 수도 없습니다. 무릇 군사를 다루는 도는 마음을 공격하는 것을 상책으로 삼고 성을 공격하는 것을 하책으로 삼으며, 마음으로 싸우는 것을 상책으로 치고 병사로 싸우는 것을 하책으로 여기니, 원컨대 승상께서는 저들의 마음을 복종시키십시오." 마속은 이렇게 말했고 제갈량이 그 계책을 받아들여, 맹획을 사면하고 남방을 복종시켰다.
또한 남정 이후에도 반란은 일어났는데, 제갈량은 남정에서 다시 반촉 운동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기대한 게 아니라 옹개로 대표되는 대규모의 반촉 무력시위를 억제하는 게 목적이라고 보여진다. 이릉대전에서 패배하고 유비가 병상에 누워있는 동안, 대규모의 무력 항쟁이 있었다. 그리고 제갈량의 기대대로 그가 살아있는 동안 북벌에 사용되어야 할 중앙군을 동원해야 할 정도의 대규모의 반촉 움직임은 일어나지 않았고 반란도 지방관 수준에서 해결된다. 한진춘추에 따르면 이때 제갈량은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고 한다.
이렇듯 제갈량은 고정, 주포, 옹개, 맹획등의 큰 반란을 진압하여 남중을 평정하고, 모든 곳에 현지 군장들을 임용하여 현지인에게 주로 통치를 맡기고 군사를 물렸을 때, 이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에게 '지금 나는 군사를 남기지 않아 운량할 필요를 없애고, 기강을 대략적으로만 정해 이인과 한인들이 대체로 편안케 하려 하오'라고 말했는데 제갈량은 복종시키거나 회유한 이민족들의 마음을 얻고 자질구레하게 지속된 소규모 반란을 각지의 행정관들이 진압하는 가운데 촉한의 행정력, 영향력을 점차 넓히고 남중을 개발, 이를 통해 남만의 풍부한 물자를 얻어 촉한과 남만 모두에게 이득이 되는 정책을 펼쳤다고 할 수 있다.이에 전지(滇池- 익주 익주군 전지현)에 도착했다. 남중이 평정되자 모든 곳에 그 거수(渠率=渠帥. 현지 군장)들을 임용했다. 어떤 이가 제갈량에게 간언하자 제갈량이 말했다,
만약 외인(外人-남중 바깥의 사람, 즉 중국인)을 남겨두면 응당 군사도 남겨야 하는데, 군사를 남기면 먹을 것이 없으니 이것이 첫 번째 어려움이요. 게다가 이인(夷人)들이 이제 막 상하고 격파되어 그 부형(父兄)들이 죽었는데, 외인들이 남아 있으면서 군사가 없으면 필시 재앙과 우환이 생길 것이니 이것이 두 번째 어려움이요. 또한 이인들이 누차 폐살(廢殺)하는 죄를 지어 스스로 자신의 죄가 중함을 꺼림칙해 하는데, 만약 외인을 남겨두면 끝내 서로 믿지 못할 것이니 이것이 세 번째 어려움이오. 지금 나는 군사를 남기지 않아 운량(運糧)할 필요를 없애고, 강기(綱紀-기강, 법령)를 대략적으로만 정해 이인과 한인들이 대체로 편안케 하려 하오.
한진춘추
남중정벌 이후, 내항도독이었던 이회는 후에 인품이 공정하고 정직하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형벌을 세우고 반란의 규모도 유비 사후 건흥 연간에 있었던 대규모 반란과는 달리 현지 사령관이 진압할 수 있는 수준 정도가 되었다. 이회는 만(蠻)과 복(濮)을 광범위하게 개척하여 충실하게 남중의 물자를 제공하였고 국가의 수입을 증가시켰다. 특히 이 지역은 한나라 시절부터 농사가 보급되기 전에는 가축을 키우던 곳으로 그중에서도 말의 주요 산지로 유명해 삼국시대에도 오나라가 촉한의 말을 수입했고 후일 당송 시절에도 말을 수출한 지역이었으니 북벌에서 조위의 기병대에 맞설 전마(戰馬)의 보급이 촉한의 북벌에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라는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제갈량 스스로가 남만정벌 이후 출사표에서 '지금 남쪽을 정벌하여 인마와 무기, 갑옷의 풍족'을 언급하고 있으니 제갈량의 남만 정벌은 여러모로 촉한에 이득을 가져다 주었다고 할 수 있다.
제갈량 시대 후기부터 이후 시대까지는 마충, 장억. 이들 이후 시대에는 장표, 염우, 곽익 등의 인물들이 이런 기조를 이어받아 남만지방을 경영하였다. 특히 233년에는 유주의 반란을 계기로 주로 온화한 통치를 펼친 마충을 파견하여 단숨에 진압하고 내항도독부를 유비가 221년에 이회를 내항도독에 임명하고 주둔시켰던 장가군 평이현에서 이민족이 주로 살던 남쪽 건녕군의 치소 미현으로 이전해 만족 주민들이 거주하는 사이에 두었다. 평이현에 도독부가 있었던 것이 옹개가 일으킨 반란의 여파였던 것을 생각하면 이민족들을 신뢰한다는 제스쳐로 볼 수 있으며 이민족과 더욱 밀접한 관계를 맺고 남중을 통치하는데 있어 좀 더 신뢰감 있는 긴밀한 관계를 설정했다라고 볼 수 있을것이다. 마충이 투입되고 이민족 통치가 이전보다 밀접해진 이후에는 장억이 월수군을 수복하는 등 제갈량의 남중정벌 이후에 산발적인 반란이 일어나던 남방이 완전히 안정된다. 어쨌거나 이들은 이민족들에게 사후 비까지 세워지는 등 인심을 얻었다. 심지어 촉한멸망전 때도 항복 직전 촉한에서 방책으로 성도에서 농성할 것인지, 아니면 오나라나 남만으로 피난할 것인지를 검토하였는데 이는 황제와 조정이 피난할 장소로 남중을 꼽을 정도로 민심을 잘 다스렸음을 추측할 수 있다.
이러한 지방관들의 선정을 통한 현지 민심 장악력은 현지인이나 후대왕조들도 이 지역에서 추앙받고 오래 일한 촉한 남중 지방관들의 후손을 이 지역의 통치자로 추대하거나 임명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예컨데 촉한의 마지막 내항도독 곽익부터가 촉한의 구신이었지만 계속해서 위, 진에 이어 남중을 다스렸고 나중에는 그 손자인 곽표(藿彪)도 진에 이어 이후 익주에 들어선 파저족의 성한 정권 하에서 촉한의 내항도독 격인 영주자사로서 남중을 통치했다. 거기다 마충의 손자인 마의(馬義)도 남중과 관련해서 등장하는데 서기 303년에 서진의 남중 지역인 영주에서 남중의 호족인 모선과 이민족 우릉승이 연합하여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때 마의를 새로운 영주자사로 추대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북벌 당시 10만 이상의 동원력을 보여주면서 상시 전시태세를 유지한게 촉한인데 약탈만으로 그걸 유지했다면 남만은 하루가 멀다하고 옹개급의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을 것이며 이로 인해 촉은 223년부터 225년 사이 때처럼 절대 북벌을 감행하지 못했을 것이다. 제갈량이 남중 정벌을 벌인 이유가 후방안정 때문이다. 장억, 마충전의 기술을 보면 반란을 진압하는 것도 주로 기책과 기만술을 통해서였으며 한번 반란을 진압하면 그 지역을 온화한 통치로 다스려 남중 백성들의 마음을 얻는데 주력했고, 또 그들의 마음을 얻는데 성공했다. 또 장익이 반란을 맞았을 때 무조건 두들겨패는게 아니라 중앙의 지시를 기다린 정황이 있다. 남중의 민심이 최악이라 강력한 주둔군을 두었다면 이들의 열전에서 보이는 행동은 이치에 전혀 맞질 않는다. 이는 촉한의 남중에 대한 방침이 무조건 두드려 패는게 아니며 유화책과 강경책을 고루 사용하는 정책이라는 근거가 될 수 있다.
또한 애초에 남만 원정의 성질을 생각해보면 그다지 대단한 세력이나 결속력도 없었던 현지 호족들과 남만 세력들보다는 그 배후에서 반란을 부추기고 있던 오가 파고들 여지를 제거하는 게 더 중요한 전쟁이기도 했다. 전쟁 기간도 상당히 짧았고 전후 처리 방식도 반란 세력 중 일부를 제거하고 나머지는 회유해 그대로 현지의 자치권을 인정하고 충성 서약과 정기적인 공물 뿐인 간접 지배[15] 로 끝낸 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촉은 그냥 반기를 든 세력 중 대표적인 일부만 본보기로 처리하고 오의 영향력을 제거하는데 그쳤을 뿐이다. 그런 지역에서 과도한 수탈은 우스운 얘기라고 할 수 있다.
촉한의 관리들이 제갈량에 의해 여기로 파견되었을때 그들은 당시 가장 앞선 농경기술을 가져와 남중 사람들에게 집짓기, 벼농사, 밭갈이 소 사용, 누에치기, 방적등을 가르치고 화전농의 원시적 생산방식을 변화시켰다. 윈난성 푸얼시는, 보이차의 가장 주요한 산지 중 하나이다. 제갈량이 이곳에서 찻잎 재배를 대대적으로 확대하여 후에야 보이차가 나왔다고 전해진다. 오늘날, 보이차는 이미 중국인들의 가장 일상적인 생활 다과 중의 하나이다. 제갈량을 기리기 위해 다른 지역과 달리 이곳 사람들은 제갈량을 차의 조상으로 받든다. 제갈량에 관한 이런 종류의 미담은 광대한 남서지방에 많이 존재한다. 이에 제갈량의 개혁은 남중을 개혁하였으며 농업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또한 찻잎은 또한 일정한 경제적 이익을 가져다 주어 백성들을 즐겁게 할 수 있다고 하겠다.
6. 제갈량의 북벌
제갈량은 출사표를 올리고 북벌에 나선다. 북벌의 동기에 대해서는 그냥 '위를 멸망시키기 위해서'라고 출사표 등에 나오는데 제갈량의 전략/전술이나 진태전의 구절을 볼 때 사실은 옹주/양주를 점령하여 촉을 더 강하게 만드는 것이 제갈량의 목표였다는 설이 있다. 자세한 내용은 제갈량의 북벌과 추풍오장원 문서 참고.
어림에 따르면 제갈무후(제갈량)가 사마선왕(사마의)과 위수 가에서 장차 싸웠는데, 선왕은 융복(戎服)을 입고 일에 임하며, 사람을 보내 무후(제갈량)를 살피게 하였다. 과연 무후는 흰 수레를 타고, 갈건(葛巾)을 쓰며, 백우선(白羽扇)을 쥐고 삼군(三軍)을 지휘하니, 중군(眾軍)이 모두 그에 따라 나아가고 멈추고 하였다. 선왕(사마의)이 듣고 감탄하여 말했다.여러 신하들의 의견은 왕경이 도주해버린 후라 성을 굳게 지킬 수 없으므로, 강유가 만일 양주로 가는 길을 끊어 사군의 백성과 만족을 겸병하여 관농의 요충지를 점거한다면 왕경의 군사를 전멸시키고, 농우를 멸망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응당 대군이 사방으로 모이는 것을 기다린 후에 강유를 공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대장군 사마문왕이 말했다. "옛날 제갈량은 항상 이런 뜻을 품고 있었지만, 끝까지 실현시킬 수 없었소. 이처럼 큰 사업과 계책은 강유에게 맡길만한 일이 아니오."
가히 명사라 이를 만하도다!
7. 오장원에 지는 별
제갈량은 오장원에서 사망한다. 향년 54세. 다음은 당초에 유선에게 올린 유언이다.
죽은 뒤에 보니 그 말과 같았다.성도에 뽕나무 8백 그루가 있고 메마른 땅 열다섯 경(頃)[16]
이 있으니 자제들이 입고 먹기에는 스스로 넉넉합니다.[17] 신이 밖에서 임무를 받들 때는 따로 조달할 것 없이 제 한 몸의 먹고 입는 것은 모두 관부에 의지했으므로 따로 생활의 방도를 차리게 하여 적은 양을 보태지는 않았습니다. 신이 죽었을 때 안으로 여분의 비단이나 밖으로 남은 재산이 있어 폐하를 저버리는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사마의의 추격도 강유의 기지로 뿌리치고 퇴각과정에서 있었던 위연의 반란도 왕평이 진압한 상황에서 무사히 제갈량의 유해와 북벌군이 성도로 돌아오자 황제 유선은 나라 전체에 대사면령을 내리고 크게 애도하면서 장례식을 준비했다. 유선은 다음과 같은 조칙을 내리며 슬퍼한다.
이후 그에게 승상(丞相) 무향후(武鄕侯)[18] 의 인수와 충무후(忠武侯)의 시호를 내렸다."생각건대 그대의 천성은 문무를 겸비하고 밝은 지혜를 갖췄으며, 독실하고 성실하여 탁고의 유조를 받아 몸소 짐을 보필하니, 끊어진 것을 잇고 쇠미한 자를 흥하게 하며 난세를 평정할 뜻이 있었다. 이에 육사(六師)를 정돈해 정벌하지 않은 해가 없었고, 신무(神武)를 혁혁하게 빛내어 위엄을 천하에 떨쳐 계한(季漢,촉한)에 큰 공을 세웠으니 이윤(伊尹)과 주공(周公)의 큰 공훈과 나란하도다. 어찌 하늘이 보살피지 않아 대사가 거의 이루어지려는 찰나에 병을 만나 죽게 되었는가! 짐은 상심하고 서러워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다. 무릇 덕을 존중해 공의 순서를 세우고 행적을 기록해 시호를 명하니, 이로써 장래에 빛나게 하고 책에 기재하여 쇠하지 않게 하려 한다. 아, 슬프도다. 아, 슬프도다!"
이후 촉한은 곧장 조정의 재편에 들어갔다. 생전에 제갈량이 미리 예고했던 대로 장완이 중요한 업무를 맡아보게 되었다. 상서령(尙書令)에 도호(都護), 익주자사(益州刺史)로 승진한 장완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대장군(大將軍) 녹상서사(錄尙書事)로 승진하며 촉한의 전체적인 군사와 정사를 총괄하는 중책을 맡게 되었다. 그 외에 좌장군 오의가 거기장군(車騎將軍)으로 승진하여 한중의 수비를 맡았고, 사마의의 추격을 무사히 저지했던 강유는 우감군(右監軍) 보한장군(輔漢將軍)이 되어 군부의 요직에 올랐다. 또한 비의는 후군사(後軍師)의 직책을 맡았으나 얼마 후 대장군 녹상서사로 올라간 장완을 대신하여 상서령에 임명되었다.
제갈량이 엄격한 통치를 펼쳤음에도 그 동안 그를 원망한 백성들은 없었으며, 오히려 제갈량이 사망했을 땐 백성들이 사당을 지어달라고 부탁했지만 유선이 듣질 않자 길거리에서 제사를 올리고 융이(즉, 주변 이민족 부족들)마저 들판에서 제사를 올려, 결국 한중 면양에 제갈량의 사당을 짓게 했다는 구절이 양양기에 기록되어 있다.[19] 공권력이 오히려 공식적인 추모 행위를 무시했음에도 민간에서 촉한이 망할 때까지 30여년이나 백성들과 이민족들에게 자발적인 경애와 존경을 받았다는 것은, 제갈량의 정치가 촉한 백성들을 위한 정치였으며 그 덕의 민중의 자생적인 지지를 이끌어냈다는 걸 보여주는 상징적인 일화라고 할 수 있다. 이 민간 단위의 자발적인 경애와 존경은 이로부터 수십여년 후 서진-성한에서도 이어졌고, 수백년 후 당나라의 서적 만서나 손초의 각무후비음에도 기록되어 있으며, 명나라 시기의 유기의 전설에서도 드러나고, 현재까지도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이런 존경은 사대부들도 마찬가지로 면양의 이 사당은 후일 위나라의 종회가 촉한의 한중을 공격했을 때도 참배했다고 한다. 게다가 남만에도 제갈량을 기린 장소가 많으며 심지어 제갈량이 물을 떴다는 우물도 있다.
여기서 유선이 사당을 짓지 못하게 했다고 해서 유선이 제갈량을 부정적으로 여긴 것은 당연히 아니다. 유선 역시 제갈량을 진심으로 높이 평가하고 존중했다. 제갈량이 사망한 직후 이막은 그를 비방하며 제갈량이 사망했으니 이는 경축해야 할 일이라고 주장하자 유선은 극도로 분노하며 그를 감금한 뒤 곧 처형했다. 유선이 비록 현대에 이르기까지 암군으로 까일지언정 최소한 인품 자체는 유순한 사람이었고, 촉한의 풍습도 혹형이 거의 없어 온건한 편이었는데, 그 유선이 제갈량을 비방했다는 이유로 노발대발하며 사형에 처해버렸다는 건 그가 제갈량을 매우 의지하고 고평가했다는 증거다. 다만, 제갈량의 위상이 황제인 유선 자신을 능가할 정도로 높아서 그에 대한 열렬한 추모가 황권을 침해할 우려가 있을 정도였기에, 황제 입장에서는 그에 대한 개인적인 호감과 별개로 적절히 견제를 할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한편 죄를 지어 유배갔던 이엄은 제갈량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이제 자신이 속죄할 기회는 영영 사라졌다고 탄식하다 병에 걸려 죽었다. 마찬가지로 시종 거만한 언행을 일삼다 파직당해 쫓겨났던 요립은 눈물을 흘리며 자신이 더 이상 복직될 길은 없게 됐다고 슬퍼했다.
한진춘추, 양양기의 저자 습착치는 이런 제갈량의 죽음을 두고 다음과 같이 평했다.
옛날 관중(管仲)은 백씨(伯氏)가 가진 병지(騈地)의 식읍 300호를 빼앗았으나, 죽을 때까지도 원망하는 말이 있지 않았으므로 이는 성인께서도 어려운 일이라 여겼다. 제갈량은 요립으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게 하였고, 이엄(=이평)은 죽게 되었으니 어찌 단지 원망하는 말을 하지 않은 것에 그치겠는가?
무릇 물이란 지극히 평평한 것이므로 사악한 사람조차도 그곳에서 모범을 찾고, 거울이란 아주 밝게 비추는 것이므로 추한 사람도 화내기를 잊는다. 물과 거울이 사물을 끝까지 다 드러내지만 그에 대하여 원망하지 않는 까닭은 그것에 사사로운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물과 거울에 사사로움이 없기 때문에 비방을 면제받는 것이니, 하물며 대인과 군자가 즐겁게 살려는 마음을 품고 긍휼히 여겨 용서하는 덕을 보이며, 법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는 곳에만 사용하고, 형벌도 그들이 스스로 범하였던 죄에만 주어지고, 작위를 줄 때 사사로움을 품지 않으며, 주살하였다고 해도 노여움에서 한 것이 아니니, 천하에 복종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있겠는가?"
8. 묘소
제갈량의 무덤은 오래 전 유비가 조조의 장수 하후연을 참살하고 대승을 거두었던 정군산에 있는데, 생전에 제갈량이 미리 유언을 남겨 정해둔 바라고 한다. 제갈량은 무덤의 크기를 관이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만 만들고, 자신의 시신은 평복으로 염하되 따로 부장품을 넣지 말라고 당부했다.
오늘날에도 혹자들은 정군산 밑에 그가 묻인 무후묘가 따로 있음에도, 정군산 전체를 제갈량의 무덤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1700여 년이 지난 지금에도 남아 있어 전체적으로 작고 아담한 분위기다. 이곳 안내원은 "무후묘가 1700년이 넘도록 훼손되지 않은 것은 다른 무덤과는 달리 매장품이 없어 도굴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이 곳에는 수령 1700년된 측백나무로 무후묘를 지키고 있는데, 묘지 안에는 여기저기에 오래된 측백나무가 자리를 잡고 서 있다. 제갈량이 54세에 죽어 당시 54그루를 심었는데, 그 중 22그루가 아직도 살아 무덤을 지키고 있다. 이 나무들은 값어치를 매길 수 없을 만큼 중국인들에게는 귀한 국보로 통한다.
제갈량의 무덤에는 봉분 옆에 황과수(黃果樹)라는 큰 나무가 자라고 있다. 이 나무는 제갈량의 아내인 황부인을 상징한다. 거의 전쟁터에 살다시피 한 제갈량과 황부인은 전생에서 부부의 정을 깊이 나눌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황부인은 못다 한 부부의 정을 다하기 위해 죽어서 남편의 무덤 옆에 나무로 다시 태어났다는 이야기가 내려온다. 이곳 사람들은 곤경에 빠지거나 힘든 시기를 보낼 때 '지혜의 화신'으로 불리는 제갈량의 묘를 찾아 방법을 강구한다고 한다.
인근 면현 무후사는 중국 전국 각지에 위치한 2천 개가 넘는 제갈량 사당 중 유일하게 촉한 당대에 황제(유선)가 조서를 내려 만든 사당이다. 그런 의미로 ‘천하제일무후사’라고도 불린다. 무후사는 성도에 있는 것이 가장 크고 화려하지만, 면현의 무후사는 그보다 50여년 먼저 지어졌다. 현존하는 무후사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사당은 대문(大門), 이문(二門), 악루(樂樓), 사정(祠亭), 대전(大殿) 등으로 이뤄져 있다. 대전(大殿) 안에는 제갈량의 앉은 상이 안치돼 있고, 좌상의 양측에는 관우의 아들 관흥(關興)과 장비의 아들 장포(張苞)의 입상이 있다. 관흥과 장포의 동상은 무후묘에도 있는 것인데, 이곳에 있는 동상들의 손에 든 칼과 창이 더 크다. 집 밖에서 제갈량을 수호하고 있음을 의미한다고.
무후사에도 수령 1700년 된 측백나무가 제갈량이 만든 팔진도의 원리에 따라 64그루가 심어졌다고 한다. 현재는 16그루만이 살아 무후사를 지키고 있다. 사당 안쪽으로 들어가면 청나라 옹정제가 내린 '한승상제갈무향충무후사(漢丞相諸葛武鄕忠武侯祠)'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그 아래 '충심이 하늘을 찌르다'라는 의미의 청 가경제의 ‘충관운소(忠貫雲宵)'라는 편액이 있다. 이곳에 가면 무후사의 방문 후기를 볼 수 있으니 관심이 있으면 클릭해보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