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갈량/평가
1. 개요
제갈량에 대해 평가하는 항목이다. 제갈량의 평은 역사적으로 칭찬일색이라는 느낌이 강한데, 이따금 있는 비판조차도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반박하는 느낌이 강하다. 예를 들어 습착치의 읍참마속에 대한 부정적인 평의 경우, 후에 다른 명사들인 왕세경, 홍량길, 속후한서를 지은 학경 등의 학자에게 조목조목 반박당했다. 이것만 봐도 제갈량이 역사적으로 얼마나 높은 평가를 받아왔는지 알 수 있다.
2. 특징
제갈량은 충심과 뛰어난 능력으로 이상적인 신하의 대명사로서 항상 인기인이었으며, 그 덕에 오래 전부터 매우 높은 평가를 받았다. 결론적으로 북벌을 실패하고 눈을 감았기에 그에 따라 비판 역시 없진 않았으나[1] , 당대부터 현대까지 고금의 쟁쟁한 인사들이 높게 평가하고 있다. 그만큼 삼국지에서 후반기를 책임지는 스타이면서도 여러가지 매력적인 부분이 부각되는 인물이다. 그래서 아예 제갈량 사후 제대로 집필이 되지 않은 삼국지 관련 작품도 많고, 제갈량을 기억하는 사람도 굉장히 많은 편. 삼국지의 시작(184년)부터 제갈량이 죽을때(234년)까지와, 그 뒤로 삼국지가 정말로 막을 내릴 때(280년)까지의 시간은 거의 비슷하며, 그 동안 여러가지 사건이 꽤 많이 일어난다. 그리하여 진나라 건국과 삼국시대 결말의 시발점이 되는 사마의를 모르는 사람은 있을 수 있으나, 그의 주군 유비와 함께 제갈량은 삼국지를 읽지 않은 사람도 웬만해서는 알 정도다.
현대에는 여러모로 그의 주군인 유비처럼 긍정, 부정 의견이 많이 갈리는 쪽으로도 재평가를 받는 인물이나, 그가 유비 사후 촉한의 기둥이었던 만큼 충분히 한 나라를 이끌만한 위인이라는 사실은 틀림없다. 그의 대단함은 제갈량이 등장한 뒤 유비가 어떤 위치가 되었는지, 그리고 제갈량 사후 촉한이 어떻게 되었는지만 봐도 알 수 있다.
제갈량이 역사에 남은 이유는 어쩌면 그의 경세가적, 또는 군략가적 역량이 어느 정도인가, 하는 것과 별 상관이 없는지도 모른다. 제갈량 만큼 "사대부적 낭만성"을 온전하게, 아름답게 구현한 인물은 그로부터 전무했고, 또한 후무했다는 것에 사람들이 주목하는 게, 그가 역사에 남은 이유를 찾는 바에 관한 첩경이 아닐런지.
3. 어록
촉한은 용을 얻었고, 오는 범을 얻었으며, 위는 개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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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佐奇才儒者氣象 伊呂之間管樂之上 왕을 보좌할 만한 뛰어난 재주가 있고 유학자의 기상이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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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가 쓴 근사록(近思錄) 관성현편(觀聖賢篇)에 등장하는 표현
鞠躬盡瘁 死而後已 몸을 굽혀 모든 힘을 다하며 죽은 뒤에야 그만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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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출사표 中. 제갈량의 인생을 한 문장으로 나타낸 문장이라 할 수 있다.
三代下一人 하은주 이래 최고의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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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근대 사상가 궈모뤄(郭沫若, guōmòruò)[2]
의 평[3]
내가 공명을 얻은 것은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것과 같다.
승상의 사당이 어딘지 찾으니
금관성 밖의 잣나무 숲이라네.
계단에 드리운 풀은 봄기운이 완연하고
나뭇잎 사이로는 꾀꼬리 울음 울리네.
세 번 찾아준 은혜에 천하삼분의 계책을 내고
후세의 영웅들은 옷깃을 적시네.
두보의 촉상(蜀相)
제갈공명 큰 이름 우주에 드리우고
종신이 남긴 모습 엄숙하고 청고하나니.
삼분할거의 계책을 펼쳐 놓고
만고에 하늘 높이 뜬 제일의 명예더라.
명이 다한 한나라 운세 끝내 회복 어려워
뜻을 세우고 몸 바쳐 군무에 힘쓰더라.
두보, 고적에서 회포를 읊다 제5수(詠懷古跡 其五)
뭇 영웅 벌떼처럼 일어나 세상 일 어지러운데
온갖 경륜 품고서 초가집에 누웠었네.
나라 위한 의리는 삼고초려로 높아졌고,
출사표의 위대한 계책은 칠종칠금으로 남아 있다오.
목우와 유마 누가 어찌 알았겠으랴.
백우선과 윤건은 제갈 승상만 썼다오.
일월처럼 밝은 무후의 충성심은 천고에 빛나는데,
고개 들어보니 위나라, 진나라의 옛터만 남았구나.
이제현의 제갈공명의 사당을 돌아보며
충무후(忠武)는 영명하고 고매하며, 장강가에서 위나라 군대를 격멸시킬 책략을 바쳤다. 오(吳)를 끌어들여 촉(蜀)과 연맹하도록 하고, 우리 군주를 위해 도모했다. 선제의 유명을 받아 재상이 되고, 문무(文武)를 정비하였으며, 덕행과 교화를 넓히고, 사람들을 계도하여 풍속을 바꾸었다. 현인과 어리석은 자도 마음을 경쟁하고, 모두 자신의 몸을 잊고 받든다. 영내를 안정시키고, 사방의 국경지대를 안정시켰다. 자주 적지로 들어가 그 위광을 빛나게 하고, 대국(大國)을 소모시켰는데, 멸망시킬 수 없었던 것이 안타깝다.
양희, 계한보신찬, 제갈승상을 찬함(贊諸葛丞相)
만일 그들을 조금이라도 느슨하게 두어 제갈량(諸葛亮)은 다스리는데 밝아 재상이 되고 관우(關羽)와 장비(張飛)는 삼군(三軍)을 뒤덮을 만한 용맹으로 장군이 되고, 촉나라 백성들이 이미 안정되었다면, 험준한 곳을 거점으로 하여 요충지를 지켜도 이길 수 없습니다. 지금 공격해서 취하지 않으면 나중에 반드시 근심거리가 될 것입니다.
정사 삼국지 위서 유엽전 中
유비는 웅대한 재주가 있고 제갈량은 나라를 잘 다스리며, 손권은 허실(虛實)을 알아보며 육손은 병세(兵勢)를 잘 보니, 험준한 곳에 웅거하여 요해지를 지키고 강과 호수에 배를 띄워 두고 있으니, 모두 도모하기 어렵습니다.
정사 삼국지 위서 가후전 中
유비는 관대하고 어질면서도 법도가 있으며 사람을 얻는데 사력을 다합니다. 제갈량은 다스림에 통달하고 변화를 알고 바르면서도 모략이 있으니 재상으로 삼을 만합니다. 장비, 관우는 용맹하면서도 의리가 있으니 모두 만인지적으로 장수로 삼을 만합니다. 이 세 사람은 모두 인걸(人傑)로, 유비의 지략에다 세 인걸이 그를 보좌하니 무엇을 성공하지 못하겠습니까?
정사 삼국지 촉서 선주전 주석 부자 中
지금 제갈승상은 재능이 탁월하고 걸출하여 아직 싹트지 않은 일을 깊이 볼 수 있으며, 유비의 유언을 받아 고아(유선)를 맡아 말세에 다시 일어나는 왕실을 보좌하며, 사람들을 의심하지 않고 공적을 기록하고 과실을 잊었습니다.
정사 삼국지 촉서 여개전 中
현덕이 옛날 공명을 오에 보냈는데, 내가 한번은 자유(제갈근)에게 말하길 "경과 공명은 형제이며 또한 동생이 형을 따르는 것이 의로움의 순리이니, 어찌 공명을 머무르지 않게 하겠소? 공명이 만약 여기에 머물러 경을 따른다면 내가 응당 글월을 보내 현덕 밑에서 풀어주겠으니, 그 뜻은 자연히 사람을 따르는 것일 뿐이오" 라 했더니, 자유가 내게 답하길 "아우 량이 남에게 절개를 굽히고 인질로 붙잡혀서 명분을 정하여도 의로움에는 두 마음이 없습니다. 아우가 머무르지 않는 것은 제가 (유비에게) 가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라 했으니, 그 말은 그야말로 신명(神明)스러움을 꿰뚫는 것이었소. 지금이라고 어찌 응당 이런 일이 있겠소?
손권, 제갈근전 中, 이릉대전 발발 직후 제갈근에게 참소가 돌자 그를 변호하며
제갈량은 계략을 통찰하므로 반드시 신성한 생각을 굽혀가며 펼치는 것의 마땅함을 알 것이며, 게다가 하늘에서 내려준 것과 같은 조정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제갈량의 마음을 미루어 보면, 틀림없이 의심이 없을 것입니다.
오나라의 장온, 촉한에 사신으로 파견되며
공은 천위(天威)를 지닌 분이니, 우리 남인(南人)들은 다시 배반하지 않겠습니다.
황공형(황권)은 호방한 남자입니다. 항상 앉으나 서나 그대(제갈량)를 칭찬하였는데 말을 빌려 어떤 구실을 찾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사마의, 제갈량에게 주는 편지에서
천하의 기재로다!
승상(제갈량)은 정치를 보좌할 것을 유증받아 나라는 부유하고 형벌은 공정하니, 비록 이윤의 격이 황천에 있고, 주공의 빛이 사표에 있어도 이보다 더 낫지 않을 것이다.
제갈량이 처음 죽었을 때, 도처에서 각각 사당 세울 것을 청하니, 조정에서 예질(禮秩, 예의등급과 작록품계)을 따져 의논한 뒤 이를 들어주지 않았다. 그러자 백성들은 시절(時節, 사시 절기)에 맞춰 도로 위에서 사사로이 제사를 지냈다. 간언하는 이 중에 어떤 이가 청을 들어주어 성도에 사당을 세우자고 했으나 후주는 따르지 않았다.
보병교위(步兵校尉) 습융(習隆), 중서랑(中書郎) 상충(向充) 등이 함께 표(表)를 올렸다,
신이 듣기로 주나라 사람들은 소백(召伯, 주 소공)의 덕을 기려 감당(甘棠, 팥배나무)을 베지 않았고, 월왕(越王)은 범려(範蠡)의 공을 생각해 금을 주조해 그 형상을 보존했다 합니다. 한나라가 흥한 이래 작은 선행과 덕으로도 그 형상을 그려 사당이 세워진 자가 많습니다.
하물며 제갈량의 덕은 멀고 가까운 곳에 모두 본보기가 되며 그 공훈이 계세(季世, 말년)를 덮으니, 왕실이 무너지지 않은 것은 실로 이 사람에 힘입었습니다. 그런데 증상(蒸嘗, 봄가을의 제사)을 사문(私門, 가문)에서만 지내게 하고 묘상(廟像)을 빠뜨린 채 세우지 못하게 하여, 백성들은 길거리에서 제를 올리고 융이(戎夷)들은 들판에서 제사지내게 하니, 이는 덕을 보존하고 공을 기리는 바가 아니며 옛 사람들이 술추(述追)하던 바도 아닙니다.
지금 만약 민심에 모두 따른다면 어그러져 전범에 맞지 않고, 경사(京師, 수도)에 세우면 또한 종묘(宗廟)에 가까우니, 이것이 성회(聖懷, 임금의 마음)가 꺼리는 까닭이라 생각됩니다.
어리석은 신이 생각건대, 제갈량의 묘에 가까운 면양(沔陽)에 사당을 세워 친속으로 하여금 때마다 제를 올리게 하고, 무릇 그 신하나 옛 관원으로 제사를 올리려는 자는 모두 그 사당에서만 지내도록 한정하여 사사로운 제사를 끊는 것이 정례(正禮-올바른 예법)를 존숭하는 길이라 생각합니다.
이에 비로소 그 말에 따랐다.
양양기, 습융과 상충의 상소
양호와 육항이 서로 상대할 때 사신이 오고가면 육항은 양호의 덕량을 칭찬해 악의나 제갈량도 이보다 더 훌륭할수 없다고 하였다.
진서 양호열전
진나라 초 부풍왕(扶風王) 사마준이 관중을 진수할 때,[5]
사마 고평(高平, 연주 산양군 고평현)사람 유보(劉寶), 장사 형양(滎陽, 하남윤 형양현)사람 환습(桓隰) 등 여러 관속 사대부들이 제갈량에 대해 함께 논했다. 이때 논의하는 자들 다수는, '제갈량이 잘못된 곳에 몸을 맡겨 촉 백성들을 수고롭게 했으며, 힘은 적으면서 계획만 거창했으니 자신의 덕과 역량을 헤아리지 못했다'고 비웃었다.금성(金城)사람 곽충은 '제갈량의 임기응변과 지혜, 뛰어난 지략이 관중, 안영보다 뛰어난 점이 있으나 공업(功業)을 이루지 못해 논자들이 미혹되었다'고 하며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제갈량의 관한 다섯 가지 일(이른바 곽충5사)을 조목조목 제시했다. 유보 등이 또한 다시 반박하지 못하고, 부풍왕은 개연(慨然)히 곽충의 말이 옳다고 하였다.[6]
[7]
촉기
진무제(晉武帝, 사마염)가 제갈량이 나라를 다스리던 일을 묻자 번건이 대답했다,
"잘못된 점을 들으면 반드시 고쳤고 긍지가 지나치지 않았으며, 상벌에 신의를 보이니 족히 신명(神明,천지신명)을 감동시킬 만 했습니다."
황제가 말했다,
"훌륭하구나! 만약 내가 이런 인물을 얻어 보좌케 한다면 어찌 금일의 근심이 있겠는가!"[8]
신 진수 등이 말씀 올립니다. 신이 이전에 저작랑(著作郎)으로 있을 때 시중(侍中) 영중서감(領中書監) 제북후(濟北侯) 신 순욱(荀勖), 중서령(中書令) 관내후(關內侯) 신 화교(和嶠)가 상주하여, 신으로 하여금 예전 촉 승상 제갈량의 옛일을 정리하도록 했습니다.
제갈량은 위태로운 나라를 보좌하고 험조한 곳에 의지해 복종하지 않았으나, 오히려 그의 말을 기록하고 부끄럽고 착한 말을 남겨두니, 이는 실로 대진(大晉)의 광명 지덕함이 무궁하게 끼친 것으로 자고이래로 일찍이 없었던 일입니다. 중복된 것은 삭제하고 서로 유사한 것끼리 분류해 모두 24편으로 만들었고 편명은 앞에 적은 대로입니다.
제갈량은 어려서 출중한 재주와 영패(英霸)의 기량을 갖추고, 키가 8척에 용모가 매우 훌륭하니 당시 사람들이 그를 남다르게 여겼습니다. 한나라 말 혼란을 만나 숙부 제갈현을 따라 형주로 피난 가서, 몸소 밭갈이며 문달(聞達)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이때 좌장군 유비가 제갈량이 뛰어난 기량을 갖추었다 하여 제갈량의 초려를 세 번 방문하니, 제갈량은 유비의 웅자(雄姿, 웅대한 자태)가 걸출함을 보고 마침내 해대사성(解帶寫誠, 출사하여 성심을 다함)하고 서로 두텁게 결납(結納, 결탁)했습니다.
위무제(魏武帝, 조조)가 남쪽으로 형주를 정벌하고 유종이 주(州)를 들어 투항하자, 유비는 세력을 잃고 군사는 적었으며 송곳 꽂을 땅조차 없었습니다. 제갈량은 그때 나이 27세로 기책(奇策, 기묘한 계책)을 세우니, 직접 손권에게 사자로 가서 오회(吳會)에 구원을 청했습니다. 손권은 이전부터 유비를 복앙(服仰, 탄복하고 우러름)한데다가, 또한 제갈량의 기아(奇雅, 뛰어나고 고아함)함을 보고 그를 매우 경중(敬重, 공경하고 중히 여김)하여, 곧 군사 3만을 보내 유비를 도왔습니다. 이에 유비가 힘을 얻어 무제와 교전해 그 군을 대파하고, 승세를 타 크게 이겨 강남을 모두 평정했습니다. 그 뒤 유비는 또한 서쪽으로 가서 익주를 취하고 익주가 평정된 뒤 제갈량을 군사장군(軍師將軍)으로 삼았으며, 유비가 존호를 칭하자 제갈량을 승상, 녹상서사로 삼았습니다.
유비가 죽은 뒤 그 사자(嗣子, 대를 이은 아들, 즉 유선)가 유약(幼弱)하여, 크고 작은 일은 모두 제갈량이 전담했습니다. 이에 밖으로는 동오와 연결하고 안으로는 남월을 평정하고, 법을 세우고 제도를 시행하며 융려(戎旅, 군대, 군무)를 정리하고, 기계에 능하고 교묘한 재주가 있어 이를 극도로 연구하고, 과교(科敎, 법과 교령)를 엄명히 해 상벌에 필히 믿음이 있게 하여 악은 필히 처벌되고 선은 필히 현창되니, 관원에게는 간사함이 용납되지 않고 사람들은 스스로 힘쓰며 길에 떨어진 물건이 있어도 줍지 않고, 강자가 약자를 침범하지 않고 사회기풍이 숙연해졌습니다.
당시 제갈량의 본뜻은, 나아가서는 용양호시(龍驤虎視, 용이 머리를 들고 범이 노려봄)해 사해(四海)를 포괄하고, 물러나서는 변경에 걸터앉아 우내(宇內, 천하)를 진탕(震蕩, 뒤흔듦)하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자신이 죽은 후에는 능히 중원을 짓밟고 상국(上國, 위나라)에 맞설 자가 없다고 여겼기에 이 때문에 용병을 그치지 않고 여러 번 무력을 과시했습니다. 그러나 제갈량의 재주는 치융(治戎, 군사를 다스림. 군 통수)에는 능하나 기모(奇謀, 기이한 모략)는 부족하고, 백성들을 다스리는 재간(理民之幹)이 장략(將略, 장수로서의 지략)보다 더 뛰어났습니다. 그런데 그와 대적한 이 중에는 혹 인걸(人傑)도 있었고 또한 군사 수가 부족해 적과 같지 못했으며 공격과 수비는 서로 다르므로, 이 때문에 여러 해 동안 군사를 움직였으나 능히 이기지 못했습니다.
옛날 소하(蕭何)는 한신(韓信)을 추천하고 관중(管仲)은 왕자(王子) 성보(城父)를 천거했는데, 이는 모두 자신의 장점을 헤아려볼 때 모든 것을 겸하여 가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제갈량의 기량은 정리(政理, 정치)에 능하니 또한 관중, 소하의 아필(亞匹-버금가는 짝, 동류)이라 할 만합니다. 그러나 당시 명장 중에 성보, 한신 같은 이가 없어 이 때문에 공업이 지체되고 대의를 이룰 수 없었던 것입니다. 대저 천명이 돌아가는 곳은 정해져 있어 (사람의) 지력(智力)으로 다툴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청룡 2년(234년) 봄, 제갈량은 군을 이끌고 무공(武功)으로 나와 군사를 나눠 둔전하고 오래도록 주둔할 기초를 만들었다가 그해 가을 병으로 죽으니, 일반 백성들이 그를 기리어 그 말이 입에 가득했습니다. 지금까지도 양주(梁州), 익주(益州)의 백성들은 제갈량을 찬탄하여 그 말이 아직도 귀에 남아 있으니, 비록 감당(甘棠, 시경 감당편)에서 소공(召公)을 읊고, 정나라 사람들이 자산(子産, 정나라 정치가)을 노래했다고 하나 먼 과거의 비유를 들 필요가 없습니다. 맹가(孟軻, 맹자)가 말하길,
"편안히 하는 도리로 사람을 부리면 비록 수고스러워도 원망하지 않고, 살리는 도리로 사람을 죽이면 비록 죽더라도 원망하지 않는다."
고 했으니 실로 옳은 말입니다.
의논하는 자들이 혹 의심하기를, 제갈량의 문채(文彩, 문장, 문사)가 아름답지 않고 정녕주지(丁寧周至, 여러 번 반복하며 꼼꼼함)함이 지나치다고 합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고요(咎繇, 순임금 때 명신)는 대현(大賢)이고 주공(周公)은 성인(聖人)인데, 상서(尙書, 서경)를 살펴보면 고요의 계책은 간결하고 우아하나 주공의 가르침은 번잡하고 상세합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고요는 순(舜), 우(禹)와 함께 말했고 주공은 신하들과 맹세했기 때문입니다. 제갈량과 더불어 말한 이들은 모두 뭇 평범한 이들이라 이 때문에 그 문장의 뜻이 심오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 가르침과 남긴 말은 모두 경사종물(經事綜物)하여 공정하고 성실한 마음이 그의 문묵(文墨, 문장)에 드러나 족히 그 의리(意理, 뜻과 이치)를 알 만하며 지금에도 유익한 점이 있습니다.
엎드려 생각건대, 폐하께서는 옛 성인을 힘써 본받으시고 호탕하여 꺼리는 바가 없으시니, 이 때문에 비록 적국(敵國)의 비방하는 말일지라도 모두 싣게 하고 고치거나 숨기는 바가 없어 이로써 대통(大通)의 도를 밝히셨습니다. 삼가 베껴 적어 저작국에 올렸습니다. 신 진수는 실로 두렵고도 두려워, 머리를 조아리고 또 조아립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태시(泰始) 10년(274년), 2월 1일 계사일, 평양후 상(平陽侯相) 신 진수(陳壽)가 올립니다.
제갈량은 승상이 되어 백성을 어루만지고 예법과 규칙을 나타냈으며, 관직을 간략하게 하고 권부의 제도를 느슨하게 하였으며 '''성실한 마음을 열고 공정한 정치를 실행했다.'''[10]
충의를 다하고 시대에 이익을 준 자에게는 비록 원수라도 반드시 상을 주었고, 법을 범하고 태만한 자에게는 비록 가벼운 죄를 지었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사형에 처했다. 죄를 인정하고 반성하는 마음을 갖고 있는 자에게는 무서운 죄를 지었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석방했으며, 진실을 말하지 않고 말을 교묘하게 꾸미는 자에게는 비록 가벼운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반드시 사형에 처했다. 선행을 하면 작은 일이라도 상을 주지 않은 적이 없으며, 사악한 행동을 하면 섬세한 것이라도 처벌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각종 사무에 정통하였고, 사물은 그 근원을 이해하였으며, 사람의 말에 근거하여 그의 행위를 관찰하고 허위로 가득한 사람과는 함께 있지 않았다. 그 결과, 촉나라 경내의 사람들은 모두 그를 존경하고 아꼈으며, 형법과 정치가 비록 엄격하였으나 원망하는 자가 없었다. 이것은 마음을 공평하게 쓰고 상주고 벌주는 것을 분명하게 했기 때문이다. '''제갈량은 세상을 다스리는 이치를 터득한 걸출한 인재로서 관중[11] , 소하[12] 와 비교할만하다 할 수 있다.''' (그러나 여러 해 동안 군사를 움직였으나 공을 이루지 못했으니, 응변(應變) 장략(將略)은 그의 장점이 아니었던 것 같다.)[13]
진수, 정사 삼국지, 자치통감 中
옛 모습 그대로 보고 싶어, 남은 자취 찾아 왔소이다.
그대가 남긴 일 끊어질까 염려되어, 남산의 돌들이 속삭입니다.
환온, 당어림 中, 347년 백제성 인근 팔진도 유적을 답사하고
왕경략(景略, 왕맹)은 한 시대의 영웅호걸이며 폐하(부견)께서는 그를 제갈무후와 비교하셨는데, 오직 그가 죽을때 했던 말(동진을 공격하지 말라)만은 기억하지 않으십니까?
부융(부견의 남동생)이 부견에게 간하며, 자치통감 中
조씨와 천하를 다투지 못하고, 형주를 버리고 물러나 파촉에 들어가서 유장을 유탈하고 손씨와 거짓으로 맺어 험한 땅에 몰려, 근처의 이족에게 참람하게 고하였다. 이에 책략을 내려 조타와 짝을 이루었으니, 관소(관중과 소하)의 아필이란 말은 또한 지나치지 않았는가.
최호(북위의 재상), 『위서』 모수지전 中
만약 중화(中華)를 거닐며 그 뛰어난 재주를 펼쳤다면, 중화에 선비가 많다고 하여 어찌 가리고 막혔겠는가! 위나라에 몸을 맡겨 그 기량과 재능을 펼쳤다면 실로 진장문(진군)이나 사마중달(사마의)도 능히 서로 대등하게 겨루지 못할 것인데, 하물며 그 나머지 무리들이겠는가!
배송지, 제갈량전 中, 최주평에게 제갈량이 위나라엔 뛰어난 선비가 많으니 가지 말라고 말한 부분에 주석을 달며
군사를 잘 통솔할 수 없을 때 오직 그만이 이를 통솔했고, 백성을 잘 다스릴 수 없을 때에도 오직 그만이 이를 다스렸다. 정치가 편안하지 못할 때 오직 그만이 이를 편안케 했고, 나라의 살림살이가 어려울 때 오직 그만이 이를 풍족하게 했다.
청나라 철학자 왕부지(王夫之)
애석하게도 이때 이미 인재들이 이미 위, 오 두 나라에 다 거두어졌기 때문에 얻은 사람은 비교적 적었지만, 그러나 제갈량은 일류의 인물로서 두 나라 모두 얻을 수 없었는데 유비 혼자 그를 얻을 수 있었으니 역시 성심으로 사람을 대하는 것의 효력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청나라의 학자 조익, 이십이사차기 권7
제갈량은 촉에 웅거했으되, 그의 큰 뜻은 장안까지 덮었구나.
물고기와 물이 세 번 만나 합치니 사해(四海)에 풍운이 이는구나!
제갈량이 비록 영웅과 패자의 재능(英霸之能)을 갖췄으나, 주인(유선)이 중흥(中興)의 그릇이 아니였고, 변변찮은 촉(蜀)으로 이이 폐기된 천명을 따라 강한 위를 북탄하고자 하였으며, 상국(上國, 위)과 필적하였으니, 또한 어렵지 아니하였던가.
(전략) 제갈공명은 제왕을 보좌할 만한 재주로 한실(漢室)의 적통(嫡統)을 보좌하여 한(漢)나라의 적을 토벌할 것을 맹세하고 한실을 회복하기를 기약했으나, 구구하게 한쪽 구석에 머물러 있다가 뜻을 펴지 못하고 죽었습니다.(중략) 제갈량은 신야(莘野)에서 농사짓던 이윤(伊尹)에게 은연중 부합하고, 한 번 조이고 한 번 푸는 것을 법도가 있게 하는 것은 위천(渭川)에서 낚시질하던 강태공(姜太公)과 거의 같았습니다. 게다가 뛰어난 웅지를 분주히 펼쳐 한 세상을 좌우하면서 나라를 위해 온갖 정성을 다하다가 죽고 난 뒤에야 그쳤으니, 공명(孔明)의 소양(所養)이 어떻습니까.(중략) 더구나 공명이 대업(大業)의 단서를 열지 못한 것은 천명인지라 인력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닌데야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가령 하늘이 그에게 좀 더 오래 살게만 해줬더라면 한실을 흥복(興復)시키고 한실의 대업을 열었으리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하략)
기대승, '옛 사람들의 은현(隱見, 숨었다 나타났다 함)과 지업(志業, 지망하는 사업(事業))의 서로 다른 점을 들어보라'에 대한 답안을 적은 책문(策問)[14]
당태종: 위징과 제갈량 중 누가 더 훌륭하다 보오?
잠문본: 제갈량의 재주는 재상과 장수를 겸하니 위징이 견줄 수 있는바가 아닙니다.
당태종: 위징이 인의를 이행해 짐을 보필하여 요순에 이르도록 하고자 했으니 비록 제갈량이라고 할 지라도 대등하지 못할 것이오.
옛날 주문왕은 형벌을 만들고 사면하지 않았으며 촉나라 선주(유비)는 일찍이 제갈량에게 말하기를 '나는 진원방과 정강성 간의 주선으로 다스림과 혼란에 관한 도를 갖추었소, 그러나 일찍이 사면에 대한 말은 없었소.'라고 말하였소. 그러므로 제갈량은 촉나라를 10년간 다스리면서 사면하는 일이 없었으나 촉나라는 잘 다스려졌소. 양무제는 해마다 여러 차례 대사면을 단행하였지만, 결국 나라는 멸망했소. 작은 은혜를 베푸는 사람은 큰 덕을 상하게 하오.
또 한나라와 위나라 이래 제갈량은 촉나라의 승상이 되어 또한 매우 공평하고 정직하였소. 제갈량이 일찍이 표를 올려 요립과 이엄을 남방으로 내쫒았으나, 제갈량의 부음을 들어 요립은 슬피 울며 '나는 좌임(오랑캐)이 될 것이다.'라고 했고 이엄은 병이 나서 죽었소. 그러므로 진수가 칭찬하기를 '제갈량의 정치는 성심을 열고 공평한 도리를 폈다. 충성을 다하여 시대에 유익한 자라면 비록 원수라고 할 지라도 반드시 상을 주었고 범법자나 태만한 자는 비록 친분이 있더라도 반드시 벌하였다' 하였소. 경들은 어찌 이를 흠모하여 따르지 않으려 하는 것이오? 짐은 역대의 훌륭한 제왕을 흠모하고 있으니, 경들 또한 전대의 훌륭한 재상을 본 받아야 할 것이오. 만일 이와 같이 한다면 곧, 명성과 높은 지위를 오래 지킬수 있을 것이오.
옛날 촉나라 후주는 유약하고 어리석었으며, 제나라 문선제는 미친 행동을 하고 패덕스러웠으나 나라가 다스려 질 수 있었던 것은 각기 제갈량과 양준언[15]
을 임용하고 미워하거나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이오.
당태종 이세민, 정관정요 中
"옛날 제갈량은 작은 나라의 승상에 불과했다. 그런데도 말하기를 '내 마음은 저울과 같다. 특정한 사람을 위해 제멋대로 경중을 조작할 수 없다'고 했다. 하물며 내가 지금 큰 나라를 다스리는데 있어서야 더 할 말이 있겠는가!"
당태종 이세민, 중서령 방현령이 인사의 공평을 묻는 질문에 대해
환온(桓溫)이 촉(蜀)을 정벌하였는데 제갈무후가 (생존하였을) 때 소사(小史)를 지낸 사람이 아직도 (살아) 있어 나이가 1백여 세였다. 환온이 묻기를 "제갈승상은 지금의 누구와 더불어 비교 할 만한가?" 하니 자신과 비교할 만하다 여겨 마음으로 자못 자긍(自矜)하였다. 대답하여 말하기를 "제갈공께서 계실 때에는 또한 남다름을 깨닫지 못하였사온데, 공께서 돌아가신 후부터는 그분과 비교할 만한 (사람을) 본적이 없습니다."하였다.
제갈충무기[16]
이윤과 여상(태공망)에 백중하고 천하가 그 지휘에 따른다면 소하나 조참도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분의 훌륭함 논해 보자면 이윤과 여상에 버금가네."
명나라의 재상 방효유가 지은 제갈무후찬(諸葛武侯贊)에서
"공은 상을 주되 먼 사람을 빠뜨리지 않고 벌을 주되 가까운 사람에게 아첨하지 않았다. 작위를 주면서 공로를 새우지 않고는 얻을 수 없었고, 형벌을 주면서 귀하고 세력이 있다고 하여 면제해주지 않았으니 이렇게 하였기에 현명한 사람이든지 어리석은 사람이든지 모두가 그 자신의 몸을 잊었던 것이다."
《자치통감》에 나오는데, 제갈량의 관속인 승상 장사 장예가 늘 제갈량을 칭송하던 말
과거 관중(管仲)은 백씨(伯氏)의 변읍(騈邑) 3백 호를 몰수했지만, 백씨는 평생 동안 원한의 말을 하지 않았다. 성인이라도 이렇게 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제갈량은 죽음으로써 요립에게 눈물을 흘리게 했고, 이평을 죽게 했다. 어찌 원망의 말을 하지 않은 것뿐이겠는가!
무릇 물은 완전히 평평하므로 기우는 자는 그것을 모범으로 하고, 거울은 밝게 비춰주므로 추하게 생긴 자라도 노여워하지 않는다. 물과 거울이 사물의 본질을 그대로 나타내도 원망하지 않는 이유는 그것에는 사심이 없기 때문이다. 물과 거울에 사심이 없어 비방을 면하는데, 하물며 대인 군자가 생명을 좋아하는 마음을 갖고 있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덕을 펴며, 사용하지 않을 수 없는 경우에만 법을 수행하며, 자신이 지은 죄에 형벌을 가하고, 사심에 따르지 않고 봉록과 작위를 주고, 노여워하지 않으면서 처벌한다면, 천하에서 복종하지 않는 자가 있겠는가! 제갈량은 이것에 따라 형벌을 쓸 수 있었고, 진한 이래 이러한 자는 없었다.
파촉에서는 이후에도 오랫동안 그 통치를 연모하고 그리워했다. 사후, 묘의 건립을 요구하는 소리가 곳곳에 울려 특별히 의논하여 면양에 세워졌다.
습착치, 양양기 中
무후(공명)가 죽은지 거의 500년이 된다고 하지만 지금에 이르기까지 양한(梁漢, 촉)의 백성들은 그 공적을 노래하며, 사당에 모시는 자가 있다. 그 백성들에게 사랑받음이 이 같이 오래였다.
손초, 각무후비음(刻武侯碑陰) 中
제갈공명의 학문은 그 궁극에 이른 경지를 고찰할 수 없지만 행동으로 드러난 것을 가지고 논한다면 계로의 용맹과 염구의 재예와 자공의 변설, 중궁의 천자가 될 만한 덕을 참으로 이미 겸했다. 지금 공자의 사당(문묘)에 배향 되는 사람 중 산동의 얼치기 학자나 문사나 일삼는 소인은 모두 들어갔는데도 제갈공명의 경우에는 거론하는 이가 있는 것을 듣지 못했으니 참으로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서포 김만중
진 효공(秦孝公)이 병이 들어 상군(商君, 상앙)에게 왕위를 전하려 하였는데 상군이 받지 않았다. 효공의 마음가짐이야말로 공의(公義)에 입각한 것이었는데 다만 한스러운 것은 인물이 상앙밖에는 없었던 점이었다. 한(漢) 나라 소열황제(昭烈皇帝, 유비)가 제갈공명(諸葛孔明)에게 전해주려 한 것도 대체로 이와 같은 맥락에서였다. 그러고 보면 두 임금이 자립할 수 있었던 것은 요행이 아니었던 것이다.
조선 신흠, 상촌집.
이로 인해서 당시의 평론이 장준의 충의는 대략 한(漢)나라 제갈량과 비슷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제갈량은 자기가 생존해 있는 동안 위연(魏延), 양의(楊儀)로 하여금 이의를 품지 못하게 하였으나, 장준은 오개(呉玠)로 인해 곡단(曲端)을 주살하였으며, 제갈량은 법효직(法孝直)을 포용하였으나, 장준은 이강(李綱), 조정(趙鼎)을 포용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비방까지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제갈량에게 미치지 못한 점이다.
《송사(宋史)》 361권 〈장준전(張浚傳)〉
위엄으로 국가를 고요하게 하고, 지모로 이웃을 움직이고, 북을 들고 군을 내면, 삼군의 용기가 넘치고, 군을 국경에 두면, 천 리에 티끌이 없으며, 내외의 재주를 겸한 이를 말하자면, 오직 공명(孔明)과 경략(景略, 왕맹) 뿐이었다. 그러므로 최호는 "왕맹은 부견의 관중이고, 유유는 사마덕종의 조만(曹瞞, 조조)이다.”라고 일렀고, 손성은 "공명은 소국을 훌륭하게 보필했으니, 자산의 부류다."라고 일렀다. 이 말이 적당하도다.
당나라 주경칙(朱敬則)의 수고조론(隋高祖論) 중
천자께서 내게 명해 면(沔)의 양(陽)에 이르게 하니 북소리 들으며 뭇 선철(先哲)들이 남긴 빛을 길이 생각하며 융산(隆山)에 올라 멀리 바라보니 수레앞 턱 가로나무가 제갈(諸葛)의 고향이로다.
대저 신물(神物)이 응기(應機)하고 대기(大器) 무방(無方)하나 사람에 통해 쓰러지고 막혀 대덕(大德)은 늘 한결같지 않으니, 이 때문에 골바람이 불면 추우(騶虞,상상의 동물)가 울고, 운뇌(雲雷)가 성하면 잠린(潛鱗)이 뛰어오른다.
이지(伊摯, 이윤)는 세 번 초빙함에 갈옷을 벗고 중니(中尼, 공자)는 부름을 받자 옷을 걷었고, 관중(管仲)은 명을 받자 표변(豹變)하고, 공우(貢禹)는 감격(感激)하여 회장(回莊)했다. 남다른 서생(徐生, 서서)이 보배를 들추어내어 깊이 감추어둔 와룡을 풀어 놓으니, 유씨(劉氏)가 기울어져 뒤집힐 때 가상하게도 그대가 주행(周行)했도다.
무릇 자기를 알아주는 주인이 있으면 목숨을 다하는 어진 이가 있는 법, 이에 우리 한나라를 셋으로 나눠 우리 변방에 걸터앉고, 우리에 맞서 북면하고 우리 위나라 지경으로 말달렸다. 영명하구나. 그대여! 홀로 천령(天靈)을 품으니 어찌 신(神)의 공경함이고(豈神之祗) 어찌 사람의 정(精)이겠는가? 생각 깊고 덕이 맑음이여! 다른 세상에 있어 꿈에서 만날 뿐 같은 세상에 있지 못함이 한스럽구나.
그대의 팔진(八陣)을 미루어보면 손자, 오자 때도 없던 것이고, 목우(木牛)의 기이함은 쉽게 본뜰 수 없고, 신노(神弩)의 공은 또한 미묘하구나! 천정(千井)을 가지런히 쌓으니 또한 얼마나 비요(祕要)한가! 옛날 전, 요(주문왕을 보좌한 태전泰顚과 굉요閎夭)가 명성이 있어 뒤쫓을 자 없다 하나 그 누가 그대의 뛰어나고 기묘한 주획(籌畫)만 하겠는가. 장문(臧文)이 죽고 말로써 칭찬받았으나 또한 그대와 같이 언행을 아울러 밝히지 못했다. 이오(夷吾, 관이오 즉 관중)가 술잔을 되돌리고 악의가 끝내 절의를 지키지 못했으니 어찌 그대의 명철(明哲)과 수충(守沖)에 비견되겠는가. 임종하여 맡길 때 사양함은 허유(許由, 요임금의 선양을 거부한 인물)보다 낫고, 정무를 맡아 일에 임함에 백성들의 말이 떠돌지 않았다.
형벌은 정나라보다 공정하고 교화는 노나라보다 아름다우니, 촉민들이 수치를 알게 되고 하수, 위수가 안거했도다. 고요(皋陶, 순임금의 신하)가 아니면 이윤에 비견되니 어찌 관중, 안영에 그치겠는가. 강개하고 탄식할 뿐이로다! 옛적 그대가 은거했던 이 집을 생각하면, 어질고 지혜로운 거처했던 곳으로 규곽(規廓)이 없구나. 해가 있다가도 달이 떠서 때가 되면 떨어져 저녁이 되니 누가 능히 죽지 않겠냐만 귀한 이에겐 남긴 격식이 있도다.
그대의 공훈을 생각하면 풍속을 고쳐 후세에 이르렀고, 남아있는 전범을 읊고 노래하면 게으르고 나약한 이를 장려한다. 멀고도 멀어 그 법규가 높으니, 무릇 그대와 같은 자는 가히 헤아리기 어렵다. 멀고도 멀어 그 법규가 높으니, 무릇 그대와 같은 자는 가히 헤아리기 어렵다. 그리 오래지 않은 옛적에 어그러져 만 리 길을 달리하니, 이제 내가 와서 그대를 그리며 옛 터를 바라본다. 한고조의 혼이 풍, 패로 돌아가고 태공(太公-강태공)의 5대가 주나라로 돌아가 묻혔으니 망량(罔兩)이 방불(髣彿)하여 영향(影響)이 남았기를 바라노라. 영혼이 있다면 어찌 그가 이를 알아보겠는가!"
제갈량전 주석 촉기, 진나라 영흥(永興, 304~305) 중, 진남장군 유홍이 융중(隆中)에 도착해 제갈량의 옛 집을 살펴보고 위가 둥근 비석을 세워 공덕을 현창하고, 태부연(太傅掾) 건위(犍爲) 사람 이흥(李興)에 명해 글을 짓게 했다. [17]
당시 유홍은 영가의 난으로 무너지던 진나라의 형주에 머물면서 형주를 보호하고 있었다.
"공명(孔明)은 거의 예악(禮樂)을 일으킬 수 있었다."
명도 선생 정호(程顥, 중국 북송(北宋) 중기의 유학자)[18]
"제갈공명이 죽지 않았다면 예악을 부흥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孔明無死 禮樂可興)
남송(南宋) 진량(陳亮, 1143~1194)[19]
의 〈제갈공명론(諸葛孔明論)〉
제갈량이 이르기를, ‘몸과 마음을 다하여 나라에 이바지하되 죽은 뒤에 그친다(鞠躬盡膵 死而後已)’고 하였으니, 신하된 자로는 오직 제갈량 한 사람 뿐이다.
강희제가 63세에 남긴 생시 유조
촉한의 선주(先主)는 한나라의 후손으로, 공명 같은 왕좌지재를 만나 군사를 출동하여 역적을 토벌하되 삼대[20]
처럼 군사를 동원함에 있어 도(道)가 있어 거의 한나라 왕실을 회복할 듯 하였다. 비록 하늘이 돌보지 않아 선주가 죽고 무후도 죽어 비록 공업은 끝을 맺지 못하였으나, 그 성취한 바는 참으로 컸었다.
제갈공명은 남양 땅에서 용처럼 누웠다가, 선주의 삼고를 기다린 후에 일어났으니, 이는 곧 이윤(伊尹)이 밭이랑에서 갑자기 깨달은 것과 같다. 두 차례의 출사표는 의론이 정대하여 이훈(伊訓)·열명(說命)과 함께 참고하여 볼 것이다. 그러므로 나아가고 처하는 큰 절개와 충성·대의가 삼대(三代) 이후로 유일한 사람이었으니, 그 성심을 열어 공도(公道)를 편 것은 실로 재상의 법이 될 만하였다. 비록 운수가 옮겨가 몸이 죽어서 공업을 이룩하지는 못하였으나, 그렇다고 어찌 이것 때문에 저것을 버리겠는가.
불 꺼질 듯 한나라 지킬 수 없었는데
위기에 직면하여 명 받들어 자기 한 몸 잊었네
사람을 논함에 꼭 성패를 따질 것이 아니노라
천고에 아직도 팔진도가 전해지고 있으니
君臣知遇動昭融 군신의 지우에 소융이 움직였으나
其柰劉家運已窮 유가의 운수가 다했음을 어이하리요
兩表忠誠照千古 두 표문의 충성이 천고에 비추나니
莫將成敗少英雄 성패를 가지고 영웅을 폄하하지 말라
제(齊)나라 환공(桓公)은 음악 소리와 아름다운 여색이 귀와 눈에서 떠나지 않았고, 한(漢)나라 소열(昭烈)은 군중(軍中)에 분주하여 넓적다리 살이 말안장 위에서 닳았으니, 만약 어질고 재주 있는 신하가 보좌하지 않았더라면, 환공은 어진 임금이 될 수 없었을 것이요, 소열이 조그마한 땅도 소유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환공은 관중을 등용하고 소열은 제갈량을 등용하였기 때문에 제후를 규합(糾合)하여 천하를 한 번 바로잡는 공(功)을 이루기도 하였고, 한중과 서천을 점유하여 한나라의 국운을 연장시키기도 했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관중이 성현(聖賢)의 도를 알지 못하였고, 공명(孔明)은 신불해(申不害)와 한비자(韓非子) 같은 법가(法家)의 폐습을 벗어나지 못하여 공렬(功烈)이 여기에 그치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어진 이에게 맡겨 패도를 행한 자이다.[21]
율곡 이이 동호문답(東湖問答) 중
이윤이 유신(有莘)의 들에 있을 때에 몸소 밭 갈고 도를 즐거워하여 당세에 뜻이 없는 것 같았고, 성탕이 재차 초빙하러 올 때까지도 뜻이 확고했었는데, 매우 간절하게 청하고 그 정성이 더욱 드러난 뒤에야 마음을 확 돌려 부르는 데 응하였습니다. 그래서 뜻을 같이하고 덕이 합쳐져서 하늘까지 감동시켰습니다. 수대에 걸쳐 재상을 역임하고 임금을 추방하기까지 하였으나 혐의를 받지 않았고, 진실한 덕을 끝까지 다하고 벼슬을 그만두게 되어서도 오히려 간절하게 훈계하여, 늙을수록 더욱 독실하였습니다.
제갈량은 융중(隆中) 땅에 있을 때는 무릎을 안고[抱膝] 길게 휘파람을 불면서 우주에 눈을 높이 두고 생을 마칠 생각이었으므로, 소열제가 두 번째 찾아가도 오히려 은둔(隱遁)할 생각이 견고하였습니다. 그러나 진심으로 그를 좋아하여 세 번이나 찾아가기를 게을리하지 않은 뒤에야 마음을 돌리고 몸을 바쳤습니다. 계책이 서로 부합하자 재능을 다하고 정성을 극진히 함으로써 나라가 회복하기를 기약하였습니다. 어린 임금을 도우면서부터는 정책이 자기에게서 나왔는데 누구도 이간하는 말이 없었고, 강대한 위나라도 겁을 내었으며, 거의 예악(禮樂)의 교화가 이루어졌습니다.
이 두 사람은 비록 도에는 정조(精粗)의 차이가 있고 덕에는 대소의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임금을 믿어 충성을 다한 것은 한가지이니 후세사람이 미칠 바가 아닙니다. 그러나 이 어찌 두 사람의 현명한 것만으로 그렇게 된 것이겠습니까. 실은 임금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가만히 보건대, 탕왕이 이윤을 칭찬하여 말하기를, “마침내 으뜸가는 성인을 찾아 그와 함께 온 힘을 다했다.” 하였으니, 지극히 감복한 것입니다. 소열제가 제갈량을 칭찬하여 말하기를, "나에게 공명(孔明)이 있는 것은 마치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것과 같다." 하였으니, 그가 매우 즐거워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군신이 이렇게 서로 마음이 맞으니 두 사람이 어찌 독실하게 서로 돕지 않았겠습니까.
한(漢)나라 고조(高祖)의 소하(蕭何) 와 당(唐)나라 태종(太宗)의 위징(魏徵) 과 송(宋)나라 태조(太祖)의 조보(趙普)같은 이가 어찌 이윤(伊尹) ·부열(傅說) ·여상(呂尙) ·제갈량(諸葛亮) 같은 인물들과 비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그 시대의 특출했던 자들을 얻은 데에 지나지 않습니다. 가령 이 세 임금이 그 사람을 버려두고 쓰지 않고서 반드시 이윤·부열·여상·제갈량 같은 이를 기다린 다음에야 비로소 나라를 다스리고자 하였다면, 이윤·부열·여상·제갈량 같은 이를 마침내 얻을 수가 없어 한나라 4백 년의 기업과 정관(貞觀)의 치세(治世)와 천하의 평정을 함께 시작할 자가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날의 인물은 한·당에 비하여도 훨씬 뒤떨어지는데 더구나 삼대(三代) 때와 같은 인재를 구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만약에 한 시대의 특출한 자를 취하고자 한다면 어느 시대인들 사람이 없겠습니까. 그것은 전하께서 위임을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선조 16년(1583년) 4월 1일 임자 6번째기사, 당파를 초월한 인재 등용과 폐정의 혁신을 진달한 병조 판서 이이의 상소문 중
제갈무후와 선공(宣公) 육지(陸贄)[22]
는 자신이 태평성대를 잘 이룰 만한 위치에 있었으나 필경에는 뜻을 품은 채 펴지도 못하고 죽었으니, 그것을 천(天)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당시에 만약 두 사람이 아니었다면 촉(蜀) 나라와 당(唐) 나라가 존재했을지 의문이니, 오직 이러하기 때문에 끝내 인사를 버리고 천수만 말할 수는 없는 일이다.
恢復思諸葛 중원을 회복하던 제갈량이 생각나고
長驅郭子儀 위기를 막아내던 곽자의가 그립구나
진린: 내 지난번 천문을 보니 대장별이 떨어지던데, 공이 이를 모르지 않을것인즉, 어찌 무후의 기도법을 쓰지 않는 것이오?
이순신: 내 충성이 무후만 못하고, 내 덕망이 무후만 못하고, 내 재주가 무후만 못하여 세 가지 다 무후만 못하매 무후의 기도법을 쓴다고 해도 하늘이 능히 들어주시겠소?
이충무공전서 中, 진린과의 대화에서
그러나 와룡을 위해서는 언젠가 한번 변무(辨誣)하고 싶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문로(門路)와 연원(淵源)은 비록 우리 유학의 정통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백세를 두고 사표가 될 만한 인물임에는 틀림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세상에서 그를 논하는 이들이 허다히 근본은 버리고 지말(枝末)만 따지고 정상적인 것은 소홀히 봐 버리고 괴이한 것만 믿는 통에, 그의 정대광명한 사업이 결국 풍운이나 일으키고 팔진도나 쳤던 일에 가리워져 버리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통한스러운 일입니까. 그의 계자서(戒子書) 한 편과 출사표(出師表) 두 편만 보더라도 그의 심학(心學)의 올바름과 조수(操守)의 신밀(愼密)함, 그리고 충직한 절의와 식견의 고상함이 과연 어떠합니까. 노재(魯齋)는 공명의 초려 장소(草廬長嘯)를 칭찬했는데, 담박(澹泊)과 영정(寧靜)의 교훈[23]
은 빠뜨려 버리고 도리어 이것만을 취한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위와 촉 사이의 얽히고 설킨 험준한 길, 그 길을 통해 제갈량은 때때로 많지 않은 군사를 이끌고 강적에 대항했다. 그 빛남이 마치 새벽녘의 샛별과 같으니, 오직 제갈량만이 촉을 밝게 비추었구나.
북송 왕안석(王安石)
한조가 기울고 천하가 붕괴되자 호걸들이 다투어 신기(神器)를 탐내었다. 위씨(魏氏)는 중토(中土)를 차지하고 유씨(劉氏)는 익주를 점거하니 아울러 해내에서 거병하며 당대의 패주(霸主)가 되었다. 제갈, 사마 두 재상은 이때에 이르러 명주(明主)에게 몸을 맡겨 혹 촉한에서 공을 세우고 혹 이수, 낙수에서 사책에 이름을 남겨 공을 세우고, 조비와 유비가 죽고 난 뒤 후사가 대를 잇자 각각 보필의 임무를 받아 어린 주인을 보필하며 승낙한 성심을 저버리지 않고 또한 일국의 종신(宗臣)으로 패왕(霸王)을 어질게 보좌했다. 전대를 살펴 근래의 일을 보면 두 재상의 우열은 가히 상세히 알 수 있다.
공명은 파촉에서 일어나 하나의 주(州)를 차지하고 위라는 엄청난 대국과 겨루었는데 군사와 백성들이라곤 위나라의 9분의 1밖에 되지 않았다. 공명은 농업과 군사 일, 그리고 형법 등을 잘 정비했기 때문에 수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파죽지세로 기산까지 쳐 들어가 황하와 낙수의 물로 말의 목을 축일 뜻을 품을 수 있었다. 중달은 10배나 되는 땅과 거기 있는 수많은 군졸을 기반으로 견고한 성지와 강대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자기 자신의 보전에만 급급할 뿐 적을 깨뜨리지 못하고 제갈량이 제멋대로 날뛰도록 내버려 두었다. 만약 이 사람(제갈량)이 죽지 않았다면 끝내 그 뜻을 펼치며, 해를 이어 궁리하고 바삐 다그치며 모략을 일으켰을 것이니 즉 옹주, 양주는 갑옷을 벗지 못하고 중국은 안장을 풀 수 없어 승부의 형세는 또한 이미 결정되었다 할 것이다. 지난날 자산(子産)이 정나라를 다스릴 때 제후들이 감히 군사를 내지 못했고 촉상(蜀相)이 이에 가깝다 할 수 있으니, 사마의에 비하면 또한 뛰어나지 않은가![24]
(중략)이제 중달(仲達)의 재주는 공명(孔明)보다 못하며 당시의 세력은 지난날과 다르니, 현덕이 적과 맞섰는데 공명이 어찌 출군하여 적을 도모하지 않을 수 있겠소? 옛날 악의(樂毅)는 약소한 연나라 군사로 다섯 나라의 군사를 겸하여 강국인 제나라로 장구(長驅)해 70여 성을 떨어뜨렸소. 지금 촉한의 병졸은 연나라 군보다 적지 않고, 군신간의 결속은 악의 때보다 더 신의가 있소. 게다가 우리 국가와 순치(脣齒)의 도움이 되어 동서로 상응하고 뱀처럼 머리와 꼬리가 되면 형세가 중대해져 다섯 나라의 군사에 비할 바가 아니니, 어찌 저들을 꺼리어 불가하단 것이오? 무릇 병(兵)은 기(奇)로써 승리하고 지(智)로써 적을 제압하는 것이니, 토지의 넓고 좁음이나 인마(人馬)의 많고 적음에만 편벽하게 의지해서는 안 되오. 내가 그의 치국한 형체를 보면 당시에 이미 엄숙하고 가지런했고 그 가르침이 뒤에도 남았으며, 그 말에 이르러 간절하고 진취(進取, 적극적으로 나아가서 일을 이룩함)의 뜻을 진술하여 충성스러운 계책과 충직하여 주인에 대한 의(義)가 드러나니 비록 옛날 관중, 안영이라 해도 어찌 이보다 더하겠소?
오나라 장엄(張儼), 묵기 술좌편(黙記 述佐篇) 中
어떤 이가 제갈량이 어떤 사람이냐고 물었다. 원자가 말하였다.
장비, 관우가 유비와 함께 일어나 조아 복심의 신하로 모두 무인이었고, 뒤늦게 제갈량을 얻어 이로써 좌상(보좌하는 재상)으로 삼았소. 이에 뭇 신하들이 기뻐하고 탄복했는데, 유비는 족히 믿을만하고 제갈량은 족히 중시할 만했기 때문이오.
그러다 6척의 고아를 맡아 한 나라의 정무를 총괄하고, 범용한 군주를 섬기며 전권했으나 예를 잃지 않았고, 군주의 사무를 대행했으나 국인들이 의심하지 않았으니, 이와 같은 즉 군신 백성들이 마음으로 흔쾌히 봉대했음을 알 수 있소.
법을 행함이 엄격한데도 국인들이 기쁘게 복종하고 백성을 부려 그 힘을 다하게 해도 아랫사람들이 원망하지 않았소. 그 군사들이 출입할 때는 빈객처럼 하니 행군할 때 도적질하지 않고, 꼴과 땔나무를 베는 자들은 사냥하지 않으니 마치 중국에 있는 듯 했소. 그가 용병함에는 산처럼 머물며 바람처럼 진퇴하고 군사가 출동하면 천하가 진동하니 인심이 근심하지 않았소.
제갈량이 죽은 뒤 지금까지 수십 년이 지났는데 국인들이 노래하며 그리워하여 마치 주나라 사람들이 소공을 그리워하는 듯 하오. 공자가 이르길 '웅은 가히 임금노릇할 만하다'고 헀으니 제갈량에도 이러한 점이 있었소.
또 물었다.
제갈량이 처음 농우로 출병했을 때 남안, 천수, 안정의 세 군 사람들이 배반하여 제갈량에 호응했습니다. 만약 제갈량이 급히 진격했다면 이 세 군은 중국의 소유가 아니었을 것이나 제갈량은 천천히 행군하며 진격하지 않았습니다. 얼마 뒤 관병이 농에 올라 3군을 회복하고, 제갈량은 척촌의 공도 세우지 못하고 이 기회를 잃었습니다. 어떻습니까?
원자가 말했다.
촉병이 가볍고 날랜 군사로 좋은 장수가 적었고 제갈량이 처음 출병했을 때는 중국의 강약을 알지 못했으니 이 때문에 의심을 품고 모험하지 않았던 것이오. 게다가 대거 모인 자들이 가까운 공을 탐하지 않아 진격하지 않았소.
그(물어본 자)가 말했다. '그가 의심했다는 것을 어찌 아십니까?'
원자가 말했다.
처음 나와 천천히 움직이고 둔영을 중복하고 그 뒤 항복한 뒤에도 진병하여 싸우려 하지 않았소. 제갈량은 용맹하고 싸움에 능헀으나 세 군이 배반해도 속히 이에 응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그가 의심했다는 징표요.
그(물어본 자)가 말했다. 그가 용맹하고 싸움에 능했다는 것은 어찌 아십니까?
원자가 말했다.
제갈량이 가정에 있고 전군(前軍)이 대파되었을 때 제갈량의 둔영이 수리 떨어져 있었으나 구원하지 않았소. 관병과 서로 접했으나 또한 천천히 행보하니 이는 그가 용맹했다는 것이오. 제갈량이 행군(=용병)할 때 안정하고 견중했는데, 안정하면 쉽게 움직일 수 있고 견중하면 가히 진퇴할 수 있소. 제갈량의 법령이 밝고 상벌에 신의가 있어 사졸들이 명을 받으면 험지에 뛰어들면서 몸을 돌보지 않으니, 이는 그가 싸움에 능헀다는 것이오.
그(물어본 자)가 말했다.
제갈량이 수만 군사를 이끌며 일으키고 세운 것이 수십만의 공력과 같으니 기이한 점입니다. 이르는 곳마다 영루, 우물과 부엌, 축간, 울타리, 장새를 세워 이를 법도로 삼고, 한 달을 행군해도 떠날 때는 처음 도착했을 때처럼 해놓으니 노고와 비용이 들며 꾸미기를 좋아합니다. 이는 어떻습니까?[25]
원자가 말했다. '촉인들이 경박하니 이때문에 견고히 하며 부린 것이오.'
그(물어본 자)가 말했다. '그랬다는 걸 어찌 아십니까?'
원자가 말했다. '제갈량은 실질로 다스리고 명의에 의하지 않았으며 뜻이 크고 원대해 가까운 공을 급히 취하는 것을 구하진 않았소.'
그(물어본 자)가 말했다. '제갈량은 관부, 차사, 교량, 도로를 짓기 좋아했으나 이는 급무(급한 업무)가 아닙니다. 어떻습니까?'
원자가 말했다.
소국에 현명한 인재가 적으니 이 때문에 그 존엄을 높이고자 함이오. 제갈량이 촉을 다스릴 때 경작지가 개간되고 창고는 충실해지고 기계는 날카로워지고 축적된 곡식이 넉넉해졌으나 조회는 화려하지 않고 도로 위에 술취한 사람이 없었소. 무릇 본이 세워지면 말이 다스려지고, 여력이 남은 후에야 작은 일에 미치는 것이니, 이는 그 공을 권하려 했기 때문이오.
그(물어본 자)가 말했다. '그대가 제갈량을 논하는 데는 증험이 있습니다. 제갈량의 재주로 보면 그 공이 적다고 하는데 이는 어떻습니까?'
원자가 말했다. '제갈량은 지본(근본을 중시)하는 자로 응변은 그의 장점이 아니니 이 때문에 감히 그 단점을 쓰지 않는 것이오.'
그(물어본 자)가 말했다. '그렇다면 그대가 그를 칭찬하는 건 왜입니까?'
원자가 말했다.
본래 현자란 심원한 것이니 어찌 완비함을 기준으로 책망하겠소? 무릇 능히 단점을 알고 쓰지 않는다면 이는 현자의 위대함이오. 단점을 알면 즉 장점도 아는 것이오. 무릇 전식(원래 생각)이라도 더불어 말해보고 맞지 않으면 제갈량은 쓰지 않았으니 이로써 내가 (현자로 칭하기에) 가하다고 한 것이오.
원준의 저서 원자(袁子)
진수가 제갈량을 논하며, "재주가 군을 다스리는 게 장점이었고, 기묘한 계책은 단점이었으며, 백성을 다스리는 재능이 장수의 지략보다 뛰어났습니다."라고 일렀는데, 이는 슬퍼서 나온 말이 아니다. 용병하며 기책을 내는데 능숙함은, 의당 위무제(魏武帝)만 못하다. 그러나 더불어 대적한 바는, 원소 이외에는, 모두 큰 모략이 없었고, 또한 모두 깊고 단단한 뿌리가 없었으나, 위(魏)와 같은 경우는 힘써 싸우지 않으면 이길 수 없었다. 위연의 다른 길을 통해 모두 모이는 모략은, 취하지 않음이 아까워할 만하다. 그러나 포야(褒斜), 자오(子午)는, 나오기는 쉬워도 이어지기는 어려워, 함양(咸陽) 이서가 만약 평정될 수 있어도, 위가 대군을 일으켜 이를 다투고, 농우의 여러 군이 그 뒤에 기대면, 촉이 과연 이를 지킬 수 있겠는가? 이가 제갈량이 위험을 무릅쓰지 않고자 한 이유인가?
제갈량전의 주에서 인용한 장엄(張儼)의 묵기(默記)에서 제갈량과 사마의의 우열을 논하길 : "공명은 보졸 수만을 이끌고, 기산祁山으로 멀리 달리며, 흔쾌히 하(河), 낙(洛)에서 말에게 물을 먹일 뜻이 있었다. 중달은 10배의 땅에 근거하나, 견고한 성에 근거해, 정예를 가지고, 자신을 보전하는데 힘쓸 뿐이었다. 만약 이 사람이 죽지 않고, 그의 의지를 이루었다면, 승부의 형세는 이미 결정됐을 것이다." 이는 헛소리가 아니다.
주에서 또한 한진춘추(漢晉春秋)를 인용해 말하길 : 가허, 위평이 자주 싸우길 청하며 이르길 : "공께서 촉을 호랑이와 같이 두려워하시니, 천하의 비웃음을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선왕(宣王)이 이를 괴로워했다. 상표하여 거듭 싸우길 청했다. 위위 신비(辛毗)에게 절(節)을 가지고 이를 억제하게 했다. 강유가 제갈량에게 이르길 : “신좌치(辛佐治)가 절을 가지고 이르러서, 적은 다시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제갈량이 이르길 : "그는 본래 싸울 뜻이 없었으니, 거듭 싸우길 청한 것은, 그의 무리에게 용감함을 보이려던 것일 뿐이다. 장수가 군에 있으면, 임금의 명도 받지 않는 바가 있는데, 만약 우리를 제압할 수 있다면, 어찌 천 리를 가서 싸우길 청했겠는가?" 위지 명제기(明帝紀)에서 이 해에 조서로 선왕에게 다만 보루를 단단하게 하고 수비하여 그들의 예봉을 꺾으라고 시킨 것을 특별히 적었으니, 승조(承祚)에게 진실로 깊은 뜻이 있었던 것이다.
제갈량이 손권을 논하며 그의 지력이 가지런하지 못하기에, 강(江)에 한정하여 스스로 보호한 것이라고 이르나, 제갈량은 중원을 밟고 돌아다니며, 상국(上國)에 맞먹을 수 있어서, 용병하며 그치지 않고, 자주 그의 무력을 과시했으니, 그의 재주는 진실로 때를 어기지 않았다.
여사면(呂思勉, 중국의 근대 사학자), 진한사(秦漢史)
한 나라의 정치를 섭행하고 범상한 임금을 섬기며 권병(權柄)을 오로지하였으나 예를 잃지 않았고, 임금의 일을 행하였으나 나라 사람들이 의심하지 않았다. 법 집행이 근엄하여 나라 사람들이 마음으로 기뻐하여 복종하였고 백성들의 힘을 쓰되 그들의 힘을 다하게 하였으나 아래에서 원망하지 않았다. 군사를 출동하여 적국에 갔을 때도 규율이 엄하여 행인이나 죄없는 사람들을 해치지 않기를 본국에 있을 때와 같이 하였다. 용병(用兵)할 때 중지하면 산처럼 중엄했고 진퇴할 때는 비바람과 같았으므로, 천하가 흔들려도 인심이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므로 제갈량이 죽은 지가 지금 수십 년이 지났는데도 나라 사람들은 주(周) 나라 사람들이 소공(召公)을 그리듯 노래하며 사모하고 있다. 법령(法令)이 엄명하고 상벌(賞罰)이 미더웠으므로 사졸들이 명령에 복종하여 위험(危險)한 데에 달려가도 목숨을 돌아보지 않았으므로 수 만의 군대를 거느리고도 수십 만의 군대가 이룩한 공(功)을 세웠다. 가는 곳마다 영루(營壘)를 설치할 때는 우물, 부엌, 울타리, 장색(障塞)을 모두 법대로 만들었으므로 한 달 간 있다가 떠날 때도 처음과 같았다. 게다가 촉(蜀) 사람들은 용맹하였기 때문에 오랫동안 부릴 수 있었다. 실(實)을 힘쓰고 명(名)을 힘쓰지 않았고, 뜻이 크고 바라는 것이 위대하여 관부(官府), 차사(次舍), 교량(橋梁), 도로(道路)를 잘 수리했으며, 작은 나라는 어진 인재가 적기 때문에 존엄하게 하고자 했다. 농지(農地)를 개간하고 창고를 가득채웠으며, 기계를 편리하게 수리하고 저축을 넉넉하게 했다. 따라서 조회(朝會)는 검소하게 하고 도로에는 술취한 사람이 없었다. 이와 같이 근본이 확립되었으므로 끝이 잘 다스려졌으며 여력이 있은 뒤에 작은 일에 미쳤으니 이것이 바로 그의 공을 권장하게 되는 이유이다. 제갈량은 근본을 준행한 사람이었으므로 임기응변(臨機應變)의 술책은 그의 장점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감히 자신의 단점을 사용하지 않은 것인데, 어찌 한몸에 구비하기를 요구할 수가 있겠는가?
난국(亂國)을 다스리는 데는 준엄한 법을 쓰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원자(袁子)의 의논이 공명의 뜻과 멀지 않다. 그러므로 그가 말한 바가 조리 정연하여 규도(規度)가 어제 일처럼 완연하다. 그러나 ‘임기응변은 공명의 장기가 아니었다.’ 하는 것은 대체로 진수의 여론(餘論)을 주워모은 것으로 공명을 모르는 자의 말이다."[26]
조선 이덕무, 청장관장서
제갈무후(諸葛武侯)가 이르기를, "권세와 이익만으로 교제를 하면 먼 훗날까지 가기가 어렵다. 선비가 서로를 아는 것은, 온화한 날씨라고 해서 더 꽃을 피우지도 않고 추운 날씨라고 해서 잎이 떨어지지도 않아 사시장철 시들지 않고 험난함을 겪을수록 더욱 견고해지는 것과 같다." 하였다.
삼국(三國) 중에서, 위(魏)나라는 찬시(篡弑)한 일이 있었고 오(吳)나라는 폐립(廢立)한 일이 있었던 것은, 모두 드센 신하에게 제재를 받았기 때문이다. 촉한(蜀漢)은 망하기 전에 용렬한 임금이 자리만 차지하고 있었으나 나라에 내우(內憂)가 없었으니, 소열제(昭烈帝)와 무후(武侯)의 규모가 원대했던 것이다.
조선 이유원, 임하필기 中
나는 매양 진수의 삿됨과 고루함을 한스럽게 여긴다. 그는 무후(武侯)의 경략(經略)의 차제와 사전에 조짐을 알아 환란을 미연에 방지한 것, 나라를 다스리고 사람을 등용한 것과 군대를 부리고 통제하던 요점은 모두 덮어두고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나 다행히 다른 전기(傳記)와 배송지의 주(注)에 뒤섞여 나타난 사실이 있어서 주워모았는데, 감히 말을 수식함으로써 사실을 잊게 하지는 않았다.
남송의 성리학자, 장식[27]
손권이 제갈 무후를 칭찬하기를, '진실함은 음양을 감동시키고 정성은 천지를 감동시켰다.' 하였고, 사마의는 그의 군영과 보루를 살펴보고 감탄하기를, '천하의 기재(奇才)이다.' 하였으며, 종회는 촉 땅에 들어가 그의 묘에 제사를 지내고 갔다. 무후가 적국에게 존경받고 신뢰받은 것이 이와 같았는데 하물며 자신의 나라에서이겠는가. 무후가 죽자 요립(廖立)이 눈물을 흘리고 이평(李平)이 슬퍼하다 죽은 것은 참으로 당연한 일이었다. 남만의 풍속에 북쪽 문을 모두 낮게 만들어 나갈 때에 반드시 고개를 숙여야 하니, 이것은 무후가 가르친 것이다. 항상 북쪽에 머리 숙여 복종하게 한 것인데 이것을 오랠수록 더 잘 준수하여 감히 고치지 않았으니, 그의 신성한 위엄이 지금까지도 남아 있는 것이다. 그의 신이(神異)한 자취가 남만과 촉 지방에 많이 남아 있는데 시간이 오래될수록 더욱 신이하니, 어복포(魚腹浦)에 돌로 쌓아놓은 팔진도(八陣圖)는 오랜 세월이 지나도 훼손되지 않아 마치 귀신의 돌봐 줌이 있는 듯하다. 그 외에 사만세(史萬歲)가 그의 기공비(紀功碑)를 넘어뜨린 것[28]
과 조빈(曹彬)이 그의 비석에 절한 것[29] , 숙친왕(肅親王)이 비지(祕誌)를 얻은 것 등은 그 대표적인 것들이다. 옛사람 중에도 이러한 사람이 있었는가.제갈공명이 죽자 촉(蜀)이 망했다. 허나 위(魏)의 멸망도 제갈공명의 죽음에서 연유하였으니, 이는 왜인가? 제갈공명이 죽지 않았다면 사마중달은 온 힘을 다해 서쪽을 막느라 관서 지방에서 한 발자국도 떠나지 못했을 것인데, 어느 겨를에 정권을 찬탈해 나라를 도둑질했겠는가. 설령 국권을 빼앗을 만한 힘이 있었다 하더라도 제갈공명의 공격이 두려워 감히 그러지 못했을 텐데 하물며 촉을 도모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므로 촉이 망하자 사마씨의 세력이 더욱 강해져서 위가 결국 진(晉)에 선양(禪讓)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미 촉과 위가 병합되었는데 오(吳)가 어찌 독존할 수 있었겠는가. 오에서 제갈각(諸葛恪)을 쓴 것이나 위에서 제갈탄(諸葛誕)을 쓴 것은 모두 제갈공명 때문이었다. 제갈공명이 있었던들 손준(孫峻)이 어찌 감히 제갈각을 처참하게 죽이고 사마소(司馬昭)가 어찌 감히 제갈탄을 해쳤겠는가. 그러므로 제갈공명의 죽음에 삼국(三國)의 운명이 달려 있었을 뿐 아니라 제갈씨 가문의 운명도 달려 있었으니, 이 점에 있어서는 이윤(伊尹)과 여상(呂尙, 강태공)도 그에게 미치지 못한다.
조선 성대중, 청성잡기 中
삼국(三國)이 나뉘어 있을 때 촉(蜀)나라가 가장 약하여 믿는 바는 오직 제갈공명(諸葛孔明)뿐이었습니다. 제갈공명이 죽은 뒤에는 촉나라의 형세가 아주 위태로웠으니, 그때는 바로 임금이 부지런히 정무를 돌보아야 할 때였습니다. 그런데도 후주는 자주 바깥으로 행행(行幸)하고 풍악(風樂)을 더욱 크게 베풀고 놀았습니다. 신하들은 간사스럽고 임금은 어두웠으며, 조정에는 직언을 하는 사람이 없었고, 백성들에게는 굶주린 기색이 있었습니다. 이에 주변 나라의 사신들조차도 능히 촉나라가 망할 것임을 알았는데, 그 임금은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니 망하는 것이 역시 마땅하지 않습니까.
혹자는 말하기를 “공손술(公孫述) 이후로 촉(蜀) 땅을 근거지로 삼았던 자들은 모두 중국(中國)에 의해 멸망당하였다. 이것이 어찌 비록 형세가 험고하기는 하지만 땅이 작아서가 아니겠는가.”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한(漢)나라 고조(高祖)가 촉 땅에 봉해졌을 그 당시에는 항씨(項氏)는 초(楚) 땅을 차지하고 있었고, 전씨(田氏)는 제(齊) 땅을 차지하고 있었고, 위표(魏豹)는 위(魏)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고, 진여(陳餘)는 조(趙)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고, 하열(夏說)은 대(代)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고, 영포(英布)는 구강(九江)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고, 장한(章邯)과 동예(董翳)와 사마흔(司馬欣)은 진(秦)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한(漢)나라가 차지하고 있었던 것은 단지 파촉(巴蜀) 가운데 한 귀퉁이에 불과하였습니다. 그런데도 고조는 파촉에서 일어나 삼진(三秦)을 평정하고 구강(九江)을 귀순시키고, 제(齊)와 위(魏)와 대(代)와 조(趙)를 병합하고서 마침내 항적(項籍)을 사로잡아 천하를 다 차지하였습니다. 그런데 누가 촉 지방은 땅이 작아서 천하에 횡행하기에 부족하다고 한단 말입니까.
예로부터 승패(勝敗)는 사람에게 달려 있었지 땅에 달려 있지 않았습니다. 위(魏)나라는 촉(蜀)나라에 비해 훨씬 컸는데도 제갈공명을 두려워하기를 마치 범을 두려워하듯이 하였습니다. 가령 제갈공명이 죽지 않았다면, 비록 한(漢)나라를 회복할 수는 없었을지라도 등애(鄧艾) 따위의 무리는 두려워하기에도 겨를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 능히 촉나라로 쳐들어갈 수 있었겠습니까.
이것을 가지고 논해 본다면, 승부는 사람에게 달려 있지 땅에 달려 있지 않음이 분명합니다. 이 때문에 장강(長江)의 험고함은 마찬가지인데도 손권(孫權)이 있을 때에는 능히 조조(曹操)를 패퇴시켰으며, 손호(孫皓)가 있을 때에는 왕준(王濬)에게 항복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파촉의 땅은 마찬가지인데도 한 고조 때에는 능히 항우(項羽)를 사로잡았는 데 반해 유선(劉禪)이 있을 때에는 등애에게 항복하였던 것입니다.
예로부터 창업을 한 임금으로는 크게는 한나라 고조가 천하를 통일한 것을 말하고, 작게는 손권이 할거한 것을 듭니다. 그런데 그들의 후예에 이르러서는 유선이나 손호와 같이 되지 않는 경우가 드무니, 참으로 슬픕니다. 《서경》 〈상서(商書) 태갑 상(太甲上)〉에 이르기를 “임금이 임금답지 못하면, 너의 선조를 욕되게 할 것이다.〔辟不辟 忝厥祖〕”라고 하였는데, 바로 이것을 두고 한 말입니다.
《시경》에 이르기를 “일찍 일어나고 밤늦게 자서, 너를 낳아 준 부모를 욕되게 하지 말라.〔夙興夜寐 無忝爾所生〕”라고 하였습니다.
조선 정두경[30]
, 동명집 中
제갈량은 매우 재능이 있어 서촉에서 대단히 훌륭한 정부를 성립할 수 있었고, 또한 여섯 번 기산에 거하며 북벌할 수 있었으며 오나라, 위나라와 함께 셋으로서 정족을 이루었다.
제갈량의 행동은 봉건시대 기준으로도 도덕적 기준이 매우 높다고 할 수 있다.
중국의 근대사학자 범문란(판원란,1891~1969)[31]
유일하게 제갈량이 있어, 나중에 삼국이 양한(전한, 후한)과 똑같이 후세에 빛날 수 있게 되었다.
중국의 근대사학자 전목(쳰무, 1895~1990)[32]
유비 선생이 제갈량에게 탁고를 주고 제갈량에게 스스로 정권을 인수하겠다고 공언했지만, 정말 명분이 좋아서 아무도 막을 수 없었다. 그러나 제갈량은 순풍에 돛을 단 채 황좌에 앉기는커녕 고등학교 1, 2학년 나이의 (유비의) 열일곱 살 나이 큰아들을 추대하였고, 공경스럽고 신중함을 지키며 온 힘을 다 바치다가 죽어서도 끝이 없었다. 현실정치에서 황제의 권좌는 누구의 힘이 크면 누가 위에 앉는 것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능히 윗자리에 앉을 수 있지만 윗자리에 앉지 않는 충신의사에게 그 때문에 존경심을 느낀다. 왜냐하면 편리하고 아주 쉽게 구석에서 여러 나쁜 짓을 하고, 재물과 여색이 넘치는 것은 바로 대장부가 하지 않는 정조가 있기 때문이다. 제갈량이 하지 못하는 일이 있는 것에 우리는 정례(頂禮,이마를 땅에 대고 가장 공경(恭敬)하는 뜻으로 하는 절)를 드린다.
대만의 평론가이며 반체제 인사이자 역사가인 백양(보양,1920~2008), 《백양판자치통감:18 삼국정립》에서.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제갈량의 명성을 불후의 것으로 만든 까닭은 그의 우수성보다는 그의 진정성에 있다. 그는 마음만 먹으면 촉한의 황제가 될 수 있었고, 위나라에 항복해 좋은 대우를 받을 수도 있었으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리고 고독한 투쟁의 길을 갔다. 후한 말기에서 진나라 통일에 이르는 시대는 도덕이 조소받고 힘이 곧 정의가 되던 시대였다. 동탁, 조조, 사마의, 그리고 유비는 모두 자신을 믿어준 군주를 배신하고 힘으로 권좌를 차지했다. 한나라 헌제나 유선, 손호는 편안한 여생을 보내기 위해 조상이 남겨준 나라를 저버렸다. 이런 시대에 오직 제갈량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않고, 할 수 없는 일을 하는 ‘바보’로 살다가 간 것이다. 오직 눈앞의 이익을 탐하는 혼란스러운 세상, 그 속에서의 한 조각 진실됨, 또는 진실되어 보임. 그것이야말로 비슷하게 ‘천재적인 전략가’의 이미지를 가진 태공망이나 장량이 멋지게 성공하고서도, 오히려 실패한 제갈량의 명성을 따라가지 못하는 이유가 아닐까.
네이버캐스트 인물세계사, 제갈량 편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