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갈량/논란

 




1. 개요
2. 제갈량의 군재는 어느 정도인가?
3. 권신 제갈량?
3.1. 제갈량은 권신으로서 올바르지 못한가?
4. 인사정책에 실수가 있었는가?
4.1. 법정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했다?
5. 융중대를 제때 수정하지 못했나?
6. 기타 논란거리
7. 관련 문서


1. 개요


정사 삼국지가 한국에 보급된 이래 많은 삼국지의 인물들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제갈량도 예외는 아니다.
또한 제갈량이 받은 무향후는 현후인가, 향후인가도 논쟁거리 중 하나다. 태향후 마초와 서향후 장비에게서도 나타나는 논쟁.

2. 제갈량의 군재는 어느 정도인가?


정사 삼국지의 저자 진수는 제갈량에게 군의 통솔과 전쟁 준비에는 능했으나 (변칙적인) 기책이 부족하여 이기지 못했다[1]라는 평을 하였다. 정확히 말하면 이렇다. 진무제에게 올린 표문에서는 '이 때문에 용병을 멈추지 않고 여러 차례 그의 무력을 과시했습니다. 그러나 제갈량의 재능은 군대를 통치하는 데는 뛰어났지만, 기책은 (그보다) 떨어졌으며, 백성들을 다스리는 재간이 장군으로서의 재략보다 뛰어났습니다.'라고 했고 제갈량 전 말미에서는 '해마다 군사를 움직여 나갔으나 끝내 공을 이루지 못했으니 응변의 장략은 다스리는 재주에 미치지 못하였던 것 같다.'고 했다.[2]
예를 들어 정사를 보면 연의에서 제갈량의 최초의 전공인 박망파 전투도 실은 제갈량이 관여한 바 없으며[3] 화용도 매복은 아예 창조된 내용이다. 또한 한중전 때도 연의에서는 제갈량이 거의 모든 계책에 관여하고 유비는 고개만 끄덕인 것으로 나오지만, 정사에서 제갈량은 후방에 머물며 군량을 조달하는 임무를 맡았다. 따라서 제갈량의 북벌에서 그의 군사적 능력에 대한 논란은 상당히 좋은 떡밥 중 하나다.
정사의 저자 진수가 제갈량의 약점으로 임기응변에 능하지 못하다고 했는데, 이는 부대를 운용하는 전술적 능력은 뛰어났으나, 변칙을 쓰는 것이 부족했다는 것이다. 손자병법 병세편에 '''전쟁을 하는 자는 정병으로 맞서서 기병으로 이긴다. 기책을 잘 운용하는 자는 천지처럼 작전이 궁색해지지 않고 강물처럼 고갈되지 않는다.'''[4]라는 구절이 있듯, 중국에서는 정석과 기책의 조합을 병법의 극의로 보았다. 군을 다스리고 통제하는 부분은 훌륭했으나 강력해진 군대를 전략적으로 활용하는 면모가 떨어진다는 것.
실제로도 제갈량은 소위 '완벽한 계획'에 집착하느라 약간의 변수만 생겨도 그대로 전체 계획이 파탄나는 적이 많았다. 예를 들어 1차 북벌만 해도, 3군이 모반하는 천운의 기회에서 적의 헛점을 찌르는 완벽한 타이밍을 잡았음에도 마속이 가정에서 장합에게 박살나는 동안 근처에 있으면서 구원군조차 보내지 않았다. 결국 제갈량의 군세는 전력을 분산시켰다 각지에서 패퇴당하고 후퇴하였으며, 이 와중에도 위연의 장안 공격을 '현실성 없다'는 이유로 반려하는 등의 정치적 모략에 치중하는 모습을 보인다.
물론 위연의 장안 공격이 도박적인 작전이었음은 분명하나, 당장 공세가 돈좌되어 막힐 지경이었음을 고려하면 소수의 별동대로 장안을 공격하는 게 그렇게 고려하지 못할 사항은 아니다.[5]
혹자는 마속이 이렇게 실패할 줄 누가 알았겠느냐고 한다만, 위연이나 오의같은 탑클래스의 장수를 냅두고 구태여 유비가 능력에 의심을 제기했던 마속을 쓴 것은 온전히 제갈량의 책임이다. 그 후 책임을 마속에게 지우고 죽여버렸다. 이는 습착치가 말했듯 마속이 인재면 죽여버렸으니 지혜롭지 않은 것이고, 마속이 능력이 없었으면 그걸 알아보지 못한 것이니, 제갈량의 책임이 아니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거시적 계획을 수립하는 전략이나 각개 부대를 효과적으로 운용하는 전술의 측면에서는 당대에 이미 높은 평가를 받았다. 당장 제갈량전의 평가만 해도 "진영이 잘 정돈되고 상벌이 분명하고 호령이 엄숙하다."고 기록되어 있고 진양추(晉陽秋)에 "제갈량은 군사를 교묘하게 통솔하였고, 군령도 엄명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며, 세설신어에는 "제갈량이 위수(渭水) 변경에 진을 치자 관중(關中)이 발칵 뒤집혔다."라고 적고 있다. 이는 당시 사람들이 제갈량의 군사적 능력을 높이 평가했음을 보여준다.[6]
원자에는 제갈량의 군대에 노고와 비용이 들며 꾸미기를 좋아하고, 이르는 곳마다 영루, 우물과 부엌, 측간, 울타리, 장새(障塞)를 세워 이를 법도로 삼고, 한 달을 행군해도 떠날 때는 처음 도착했을 때처럼 해놓았다고 했다.[7]이는 그가 부대관리를 잘했고 군대에서 쓰이는 물건들을 통해 부대의 사기진작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또 임기응변은 떨어진다는 점에선 반론도 있는데 제갈량은 연의에서 보여준 것과 같은 화공계나 반간계 같은 것은 정사에서 잘 쓰지 않았지만 부대 기동을 통한 기만이나 기습, 복병을 이용한 매복전술을 상당히 잘 사용하였다. 1차 북벌, 3차 북벌은 기습이었고 1, 5차 북벌에서도 위나라의 허를 찌르는 기만전술을 사용하였다.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군정가로서는 촉한 레벨에서는 뛰어난 수준이었다고 보이지만, 군략가 측면에서 보면 어렵게 짜낸 병력을 들고 공세에 돌입한 순간, 자신이 짠 '완벽한 계획'에서 뒤틀리는 것을 지나치게 기피했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 2차 북벌의 진창성 전투인데, 5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단 1천명이 지키는 진창성을 뚫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는 제갈량이 공성계로 진창성을 방어하는 학소를 설득해 피해없이 성을 획득한다는 자신의 구상에 지나치게 집착하여 수십 일을 허비해 결국 구원군이 올 때까지 함락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좀 더 자세히 파고들자면, 제갈량은 대전략적인 측면에서는 자신이 먼저 군을 이끌고 북상하여 선공을 걸되, 전투의 개시는 위군의 선공을 기다리는 형태로 전쟁을 치르곤 했다. 정리하자면, 일단 국경을 넘어 옹, 양으로 침투하여 위군이 싫어도 움직일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 놓은 뒤, 전투를 벌이기에 최적의 입지를 갖춘 지역이 선정되면 그 곳까지 위군을 끌어다 놓고 싸움을 벌이는 식이라고 할 수 있다. 첫 북벌에서는 전투고 뭐고 아예 적의 주력이었던 조진군을 기곡으로 끌어다 박았고, 나머지 북벌에서도 대부분 이런 방식으로 위군과 싸우기를 즐겼다.
물론 이것이 성과를 거두었냐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이런 방식으로 위군과 싸워 얻은 게 무엇인가? 교전비가 위군보다 높게 나왔는가? 막대한 영토를 얻고 물자와 병참을 회복했는가? 촉한과 위와의 싸움은 근본적으로 약자가 강자에게 도전하는 만큼 이런 식의 소모전은 망국의 지름길이다. 위나라는 다른 주에서 충분히 물자와 인력을 뽑아와 단시간에 복구할 수 있으나 촉한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근 20만 가까이를 동원했던 1차 북벌 이후 북벌 병력은 계속해서 줄어가는데, 이는 제갈량의 북벌이 얼마나 촉한의 국력을 갉아먹었는지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이렇게 촉한의 병력과 물자를 갈아가며 위군과 싸운 결과 무엇을 얻었는가? 전술적인 승리를 몇 번 거뒀다고 그것이 뛰어난 군재를 증명하지 못함은 북아프리카 전역이 증명한다. 촉한과 위 사이에는 지엽적인 전술적 승리 몇 번으로는 뒤엎을 수 없는 차이가 있었는데, 나라를 쥐어짜가며 나온 북벌이 거둔 성과는 위나라가 거주민을 쓸어가 텅텅 빈 무도, 음평 2군을 손에 넣는 데 불과했을 뿐이다. 그 와중 장합이 남정까지 들어와 촉한의 명운을 뒤흔든 적도 있었으며, 흥세의 역에서 왕평이 기적적으로 적을 물리치지 않았다면 거기서 촉한이라는 나라가 절단났을 수도 있을만큼 제갈량의 북벌이 촉한에 끼친 피해는 지대한 수준이었다.
특히 당시 위나라 제일의 전략가인 사마의가 4차 북벌 시 노성 전투에서 패한 이후 촉군에 대한 전략을 견벽거수(見壁擧守: 벽을 맞대고 수비만 함)로 수정했다는 점은 제갈량의 전략의 한계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제갈량에게는 근본적으로 상대가 수세로 나섰을 경우의 대응책이 전무했기 때문이다. 강대한 국력을 지닌 국가가 자신의 국력을 믿고 소모전으로 나서는 것은 전략의 왕도라고 할 수 있으며, 이것을 겁쟁이나 부끄러운 일로 매도하는 것은 전쟁사에 대해 무지한 자나 할 수 있는 소리다. 당장 2차 포에니 전쟁의 로마 또한 한니발 상대로 비슷한 대책을 취했다. 차라리 로마는 한니발에 대해 남부 이탈리아의 손해를 감당해가면서도 그런 결단을 한 것이지만, 사마의가 견벽거수를 취했을 경우 위가 무슨 대단한 피해를 입는다는 것인가? 이런 사마의에 대해 제갈량은 여자 옷이나 보내며 조롱하면서도 정작 사마의를 공세로 끌어내지도 못한 채 결국 오장원에서 숨을 거두고 만다.
토크멘터리 전쟁사에서는 진수의 삼국지를 기반으로 제갈량을 군사행정의 천재라고 평가를 내렸다. 덧붙여 임용한 박사는 제갈량을 당시 중국에선 흔치 않게 로마군식 운영을 한 사람으로 평가했다.
한편 간서치로 유명한 이덕무원준의 저서 원자의 구절을 인용하여 '임기응변은 공명의 장기가 아니었다고 하는 것은 대체로 진수의 여론(餘論)을 주워모은 것으로 공명을 모르는 자의 말이다'라고 진수와 원준을 쌍으로 까는 평을 내렸는데 이는 위에 내용을 정면에서 반박하는 평가이다, 즉 제갈량의 임기응변은 깔 사항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실, 정공법과 기책, 둘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손자병법에도 이런말이 있다. 병법의 다섯요소는 첫째가 국토의 크기, 둘째가 생산량, 셋째가 병력수, 넷째가 전력의 우열, 다섯째가 승리라 하였는데[8] 이 중에서 1, 2, 3 전부 다 촉한이 위에 비해 불리하였다.
제갈량은 전장에서 , 조진, 장합, 학소, 사마의, 곽회로 이어지는 위의 엘리트 라인을 상대로 심리전을 일삼았지만 장합을 속이면 사마의가 속지 않고 사마의를 속이면 곽회가 속지 않는등 노답 상황이 몇 번씩이고 펼쳐졌다. 이것이 바로 제갈량의 전략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요약하자면 제갈량은 군정가로서는 훌륭한 수준이었을지 모르나 전략가로서는 자신이 초기에 세운 계획에 병적으로 집착했으며, 여기에 발목이 잡혀 5번에 이르는 북벌 동안 계속 실패를 거듭했고 국력을 갉아먹었다고 할 수 있다.

3. 권신 제갈량?


제갈량이 권신이었다는 주장이 있다.[9] 이들은 제갈량이 관우유봉을 죽게 놔둘 정도로 소극적이며, 유비 사후 제갈량의 권력은 이미 2대 황제인 후주 유선보다 높다고 주장하였다.[10] 하지만 화용도의 전개는 삼국지연의에 나온 픽션이고, 유봉의 죽음에 적극적으로 나선 것은 사실과 부합하지만 관우를 죽게 내버려뒀다는 것은 고우영 삼국지에서 나온 픽션이다. 실제로는 제갈량이 유비군의 인사정책에 개입할때 관우의 성정에 부합하지 않으면 걱정하고 오히려 관우를 따로 챙겨야 한다고 할 정도로 한 수 접어주는 관계였다고 봐야 한다. 또 유봉의 처리는 유비와 제갈량이 서로 논의하여 이루어진 것이었다. 따라서 이것은 '소설 삼국지'에 나오는 제갈량에 대한 평가일 뿐이다.
정작 정사에서는 제갈량이 "확실히" 권력욕을 가졌다는 기록이 제대로 없다. 이에 대해 일각에서는 제갈량이 자신의 권력욕 때문에 이엄의 실각을 자행했다고 하는데, 이엄의 경우는 본인이 잘못을 확실하게 저질렀고, 이에 많은 문무백관들이 공동으로 탄핵연명장을 올려 실각하게 된 것이라 제갈량이 권력욕 때문에 이엄을 실각시켰다고 할 수 없다. 게다가 서진의 시조인 사마염이 제갈량 같은 인재를 갈망했을 정도고 당시 사마염이 제갈량을 높이 평가했던 점을 보면 당대에는 권신의 이미지가 그다지 짙지는 않은 듯하다. 이로부터 백여년 뒤 동진의 재상 사안 역시 어린 황제를 잘 보필하여 끝까지 충심을 다한 인물로 제갈량을 지목했다.
또한 관우와 장비가 죽고 나서 유비가 제갈량에 내린 벼슬을 보면 놀라운 점이 많다. 황제가 된 뒤, 승상, 녹상서사[11], 가절에 임명하고 장비가 죽은 뒤에는 사례교위까지 겸임하고 유언으로는 상국의 지위를 내리기까지 한다. 권력을 장악한 신하는 예로부터 많았지만 창업자가 이토록 신하에게 권력을 몰아준 적은 드물고 그 권력을 받은 자가 권력을 사유화하지 않고 함부로 쓰지 않은 경우는 더더욱 드물다. 확실히 유비/유선 - 제갈량의 관계는 단순한 군주와 신하와의 관계는 아니었다. 유비가 죽으면서 했다는 유언도 단순히 제갈량을 시험하려 했던 것이 아니라 유선이 부족할 경우 황제를 다른 사람으로 교체할 수 있는 명분 or 이렇게 많은 권한을 받은 제갈량이 역적으로 몰릴 위험을 제거해 놓았다는 관측도 있다. 그렇다고 해도 제갈량 역시 충심을 다해서 유선을 보필했다.
제갈량은 조조와 유사한 점이 있다. 이를테면 관직으로 보자면, 조조는 무평후(武平侯), 승상(丞相), 영기주목(領冀州牧)이고 제갈량은 무향후(武鄕侯)[12], 승상(丞相), 영익주목(領益州牧)이었다. 촉한은 익주 하나의 주밖에 없었으므로 한 국가를 좌지우지하는 실질적인 권한은 제갈량이 컸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제갈량은 만고의 충신으로 평가받지만 조조는 역적으로 취급받는다. 조조는 <술지령(述志令)>를 내려서 자신은 황위를 찬탈할 마음이 없었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반면 제갈량은 그의 생전은 물론이고 후세에도 그의 충성을 의심하지 않았다. 제갈량 사후에 제갈량은 권신이라며 깐 이막조차도 이막이 제갈량의 사후에 "미필회반반지심(未必懷反叛之心)"이라고 하여 옛 권신들의 예를 들어 '그런 이들이 꼭 반심을 가진것은 아니지만'이라고 제갈량의 반심없음은 인정한다. 한황실에 충성하는 그 어떤 사람도 그를 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위로는 제왕부터 아래로 여염의 백성들까지 그를 충성의 전범으로 본 것이다.
제갈량이 권신이면서도 충신인 이유를 기술해보자.
첫째, 제갈량은 일찍이 이엄구석을 받을 것을 권하자 자신의 뜻은 조위를 멸하고 한실을 부흥시키는데 있는데 어찌 이해하지 못하느냐면서 그를 책망한 적이 있었다. 이는 한실을 완전히 부흥시키기 이전까지 일체의 개인적인 특별대우를 받지 않겠다는 의사의 천명으로 이엄의 입을 막을 뿐만 아니라, 제갈량에 대해 안심하지 못하는 다른 모든 사람들의 여론을 잠재웠으며 황권을 존중하였다.
둘째, 제갈량은 친족세력을 기르지 않았다. 자신에 충성하는 세력도 기르지 않았다. 왕망의 찬탈이던, 조위의 찬탈이건, 아니면 이후 사마씨의 찬탈이건 간에, 찬위 이전에 이들 권신은 모두 죽어라 자신의 친족세력을 길렀다. 조위를 보면, 조조가 권력을 장악한 시기에, 조비, 조식, 조인, 조홍, 조진 여기에 조씨 가문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하후씨 집안이 있다. 조씨의 친족세력은 조야에 널리 퍼져 있었다. 이와 반대로 제갈량의 친족세력은 아주 약했다. 제갈량의 아들이 비교적 어렸던 원인을 제외하고도, 더욱 중요한 것은 제갈량이 적극적으로 이런 일을 한 적이 없다. 제갈량의 가족들은 위, 촉, 오 삼국에서 모두 고관을 지냈으며 자제도 아주 많았다. 그러나, 제갈량은 친족세력을 불러 자신의 세력을 키우지 않았다. 그저 자신이 후사가 없자 형에게서 양자 한명을 데리고 왔을뿐이며, 그 양자인 제갈교도 솔선수범하여 국가의 일을 맡다가 요절하기까지 했다. 이렇듯 제갈량의 친족은 정치적으로 다른 권신세력에 비하면 세력이 없는거나 마찬가지고[13] 경제적으로도 실력이 안 된다.[14] 제갈량이 죽었을때 집안에는 뽕나무 800그루가 있었고 메마른 전답 15경이 있었는데 그 외에 다른 재산이 없었다. 아예 자신의 가족이 충분한 경제력을 축적하지 못하게 했던 것이다.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황권을 넘보지 않았던 그의 처신이라고 할 수 있다.
셋째, 제갈량은 인재선발 측면에서 한나라 황실에 충성했다. 황권을 농락하는 권신이라면 그 권력의 장애는 황제에게 직접 충성하는 사람들에게서 온다. 대신들이 황제에 충성할수록 이런 월권행위는 더 어려워진다. 그래서 황권을 농락하려는 권신은 충신을 좋아하지 않는다. 조조는 찬위를 위하여, "재주만 있으면 등용한다(유재시거)"는 원칙을 세웠다. 나의 정부는 충신보다는 능신이 필요하다고 말한 것이다. 나중에 사마씨는 더욱 그러했다. 그래서 나중 사람들이 "진소정신(晋少貞臣, 진나라에는 곧은 신하가 적다)" 하는 말을 하게 된다. 이와 반대로 제갈량이 사람을 쓰는 첫번째 기준은 한실에 충성하느냐였다. 제갈량이 발탁하고 중용한 사람들을 보면 하나같이 한실에 충성심이 가득하다. 그는 "고기가 물을 잃으면 죽고, 사람이 충성을 잃으면 흉하게 된다. 훌륭한 장수는 그것을 지켜 뜻을 세우고 이름을 드러낸다."라고 했으며 또한 "귀하게 대우해도 오만하지 않고, 일을 맡겨두어도 마음대로 하지 않고, 도와주어도 감추려 하지 않고, 그만두게 하여도 두려워하지 않으니 이런 까닭에 훌륭한 장수의 움직임은 마치 오염되지 않은 백옥과 같다."고 했다. 예를 들어 강유는 촉한이 이미 멸망했는데도, 여전히 복국을 생각한다. 그는 위나라의 정촉군 총사인 종회가 할거하려는 야심을 품고 있는 것을 보고 종회에게 위나라 장수를 모두 죽이도록 권하고 그 기회를 틈타 촉한을 부흥시켜려 했다. 결과적으로는 성공하지 못하고 성도의 난을 부르고 말았지만 자치통감의 음주자인 호삼성은 그를 이렇게 평가했다. "강유의 마음은 시종 한나라를 위한 것이니 천년동안 붉게 빛나는구나." 제갈량에게 야심이 있었다면 그가 이렇게 한황실에 충성스러운 대신을 기용했겠는가? 그것이 자신의 적을 만드는 꼴이 아닌가?
넷째, 제갈량은 부하, 후손을 교육할 때 명리(名利)에 담백하고, 원대한 이상을 가지라고 한다. 즉, 정충보국(精忠報國)을 얘기한다. 제갈량은 계속하여 예의와 충신(忠信)을 부하들에게 강조했다. 그리고 명확하게 '충'을 촉한의 군규(軍規)에 넣었다. 부하들에게 나라를 위하여 순국할 것을 요구했다. 외인들에게 그러했을 뿐 아니라, 자신의 후손에 대해서도 그렇게 요구했다. 제갈량은 자신의 외조카에게 이렇게 말할 바 있다. "모름지기 뜻은 높고 멀리 세워야 한다. 선현을 본받고 정욕을 끊어라." 숭고한 이상을 추구하기를 요구한다. 아들에게 남긴 <계자서(誡子書)>를 보면, "비담박무이명지(非淡泊無以明志), 비녕정무이치원(非寧靜無以致遠)". 즉 명리에 담백하지 않고, 몸과 마음을 고요하게 하지 않으면, 자신의 원대한 이상추구를 견지할 수 없다는 말이다. 이말은 정말 의미심장하다. 제갈량 일생의 거울이기도 하다. 황권은 공명이록의 최고점이나 바로 제갈량은 그 점에서 '담백'한 것이다. 그가 추구하는 것은 원대한 이상이다. 조위를 격멸하고, 한실을 부흥시키는 것이다. 그렇게 천하대치(天下大治)를 이루는 것이다. 그의 가르침을 이어받은 촉한은 위로는 장상공경에서 아래로는 보통사병까지 대부분이 충성심이 강했다. 촉한이 멸망했을때, 촉군의 장사들은 비분에 스스로 칼을 뽑아서 목숨을 거두거나 분노를 이기지 못해 칼을 땅바닥에 내려친 자들이 많았다. 제갈량의 아들 제갈첨, 손자 제갈상은 더더욱 정충보국의 모범이다. 등애의 병사들이 면죽성 아래로 밀려올 때, 등애는 제갈첨에게 투항을 권하는 서신을 보낸다. 만일 그가 투항하면, 다름아닌 제갈씨 가문의 고향인 낭야의 왕으로 추천해 주겠다는 것이다. 당시 제갈첨의 형세는 전략적으로 극히 불리했다. 정예군은 전방에 묶여 있었고, 제갈첨의 수중에는 군대도 많지 않았으니 투항하는 것도 선택지가 있었다. 그러나 제갈첨은 노하여 사신을 죽이고 등애와 전투를 벌여 순국한다. 제갈상은 원래 도망가서 목숨을 건질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부자가 국가의 중한 은혜를 입었는데, 일찍이 황호를 참하지 못하여, 나라가 기울어 패했으니, 살아서 무엇하겠는가?" 그리고 위군에 뛰어들어 순국한다. 이것이야말로 나라에 충성을 다한 사람이 교육해낼 수 있는 자손들인 것이다.
다섯째, 제갈량의 수하들은 아무도 그에게 찬탈하라고 권하지 않았다. 제갈량의 심복 중에서 아무도 제갈량에게 대우를 추가하도록 권하지 않았다. 유일하게 한 번 권한 것이 바로 몇 안 되는 적대적인 인사였던 이엄이었다. 반면 조조건, 손권이건, 아니면 유비이건 간에 그의 수하들은 계속하여 자신의 주군에게 권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유일한 해석으로 제갈량의 수하들은 제갈량이 찬탈할 마음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제갈량에게 찬탈할 마음이 있었다고 하는 사람들은 주로 현대인들이다. 설마 그들이 장완, 비의, 동윤, 장예, 강유, 위연, 양의 등등 제갈량과 아침, 저녁으로 함께 했던 사람들보다 제갈량의 마음을 더욱 잘 안다고 할 수 있단 말인가?
여섯째, 당시에는 확실히 제갈량의 권력독점에 불만을 가진 사람이 있었다. 다만 아무도 제갈량이 야심을 가졌다고 직언하지는 않았다. 더더군다나 공개적으로 반란을 일으키지도 않았다. 주공은 유언비어를 두려워했다고 하였다. 즉 주공이 집권하던 시기에도 유언비어가 많이 떠돌았다. 그러나 제갈량의 집권시기에는 유언비어가 나오지 않았다. 이막이 제갈량의 사후에 제갈량이 "신장강병(身杖强兵), 낭고호시(狼顧虎視)" 하다고 하였으나 이것은 제갈량의 권신화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도 "미필회반반지심(未必懷反叛之心)"이라고 인정한다. 제갈량의 집권기간동안, 정변, 반란은 거의 없었으며, 더욱이 공개적으로 반제갈량의 기치를 내건 반란 역시 한번도 없었다. 조조의 집권시기와 사마씨의 찬탈시기 전을 보면, 중앙정부는 내부정변이 계속되었고, 지방에서도 여러번 반란이 일어났다. 결국 윗문단과 똑같은 말이다. 후인들이 당시의 사람들보다 제갈량의 마음을 더 잘 이해한다고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일곱째, 제갈량의 정치이념에 대한 것이다. 제갈량은 허군실상(虛君實相)을 추구하지 않았으며 출사표에서도 군주의 정치참여를 독려하였다. 제갈량은 정치가로서 항상 이상을 추구했다. 그의 모든 거동은 한실부흥, 천하평정에 있었다. 그것을 위해 당대 촉한의 인물들 가운데 가장 뛰어났던 제갈량에게 권력이 집중되었던 것이며 이는 선제인 유비부터가 제갈량에게 전권을 실어주면서 일어났던 일이다. 전황제와 현황제 모두 제갈량을 믿고 권력을 맡겼다는 점에서 알 수 있고 또한 그의 주변과 후대인들이 인정했듯이 제갈량은 오로지 그 이상을 추구하기 위해, 출사표의 그 유명한 구절인 "국궁진력 사이후이(鞠躬盡力 死而後已)"를 위해서만 권력을 사용했던 것이다.

3.1. 제갈량은 권신으로서 올바르지 못한가?


제갈량에 대해 그가 권신이라고 주장하는 글에서는 그가 칭고(稱孤)를 했다고 하여 참람된 발언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는 후한말-삼국시대의 호칭 문화에 대한 몰이해에서 나온 것으로 조조, 원소, 원술, 유비, 손책, 손권, 사마의, 사마소 등의 제후급 직책을 받은 인물들은 자신을 칭할때 고(孤)의 명칭을 썼다. 심지어 일개 태수인 화흠도 스스로를 '고'라고 칭했다.(우번전)

우번: 가만이 듣자하니 명부(상대를 높이는 말)와 더불어 왕부군(회계태수였던 왕랑을 뜻함)은 중주에서 이름 나 있어서 나라 안에서 으뜸으로 여겼으며, (저는) 비록 동쪽 변방에 있지만 항상 우러러보았습니다.

화흠: 나(孤)는 왕회계에 비할바가 못 되오.

우번: 살펴보지 않았지만 예장의 정병들이, 회계와 비교하여 어떠합니까?

화흠: 비교할 바가 못 되오.

이 문장은 우번이 예장태수로 있던 화흠을 투항시키기 위해서 나온 문답 중 일부로 즉 나(孤, 화흠)이 왕회계(회계태수 왕랑)보다 못하다는 용례이다. 여기서 알 수 있는 사실은 독립군벌도 아니고, 조정에서 임명되어 내려온 태수조차도 고(孤)를 쓴다는 것이다.

유우: 경이 어찌 감히 이 같은 말을 꺼내시오! 충효의 도(道)를 다 이루지도 못했소. (더구나) 나(孤)는 나라의 은혜를 받은 몸으로 천하가 요란하여 아직 목숨을 다해 나라의 수치를 제거하지도 못했으니 여러 주군(州郡)의 열의지사(烈義之士)들이 서쪽에서 육력(勠力,협력)해 어린 주인을 도와 영접하기를 바라오. 그런데 도리어 망령되이 역모를 꾸미고 충신(忠臣)을 더럽히려 하오!

유우조차도 자신을 칭하는데 고(孤)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고(孤)가 참칭의 증거라는데 한실의 충신인 유우나 조정의 명을 받은 일개군의 태수조차도 자신을 밑의 사람에게 자칭할때 고(孤)를 쓰는것이다. 동한 말년에서는, '고'라고 쓰는 것이 상당히 널리 쓰였다는 얘기다.
실제로 제갈량이 고(孤)를 쓴 건 정사 본전에는 없고 초주전 촉기 주석과 계한보신찬에 붙은 익부기부잡기 주석에만 달려 있는데 둘 다 모두 자신보다 낮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게 쓴 것으로 문제는 없다. 그는 황제에게 올리는 표문은 일관되게 신(臣)이라 하고 있고, 사사로운 서신은 '오(吾)'라고 하고 있고, 교의 경우에는 '오' 혹은 '량(亮)'이라고 했다. 애시당초 제갈량과 관련된 모든 기록에서 고라는 자칭은 두번 밖에 쓰지도 않았다. 거기다가 원래 고(孤)는 제후급 인사들의 자칭인데[15] 제갈량은 당시 승상(상국)에 익주목이었다. 그러므로 더 논할 필요가 없는 썩은 떡밥이다.[16]
아예 제갈량은 칭고를 한 적이 없다는 얘기도 있다. 우선 첫번째로 나오는 것이 익부기구잡기로 대개 삼국시기 진술(陳術)이 쓴 책으로 여겨진다. 삼국지 이선전을 살펴보면 진술은 익부기구전(益部耆舊傳)과 지(志)를 지었는데 이중에서 지(志)가 잡지(雜志)부분, 즉 익부기구잡기(益部耆舊雜記)일 것이라 추측하고 있다.

한중군 사람 진술의 자는 신백으로 또한 박학하고 견문이 많았는데 석문(釋問) 7편과 익부기구전 및 지를 지었다. 관위는 세 군의 태수를 역임했다.

촉서 이선

익부는 후한 건무년간 이래로 촉군 사람 정백읍, 태위 조언신, 한중군 사람 진신백, 축원령, 광한군 사람 왕문표 등은 모두 박학하고 견문이 많아 파군과 촉군의 기구전(耆舊傳)을 지었는데 진수는 (서술한) 역년(歷年)이(經) 길지 않다 여기고 이에 파군과 한중군을 합하여 익부기구전 10편을 지었다.

화양국지 후현지(後賢志)

이 여러 기구전들은 진수의 익부기구전이 나오면서 점차 사라졌다.
익부기구잡기에 나오는 제갈량의 유언과 후계자 선정 이야기를 읽다보면 자연스레 연상되는 이야기가 있다. 사기 고조본기와 한서 고제기를 보면 임종을 맞이하는 한고조에게 고황후 여씨가 어떤 이를 상국으로 임명해야 하는지 묻는 대화가 나온다.

폐하께서 백년을 사신 뒤에 소상국이 죽으면 누구로 하여금 이를 대신하게 해야 합니까?

조참이 괜찮을거요

그 다음은요?

왕릉이 괜찮소. 그러나 왕릉은 우직하니 진평이 보조한다면 괜찮을 것이오. 진평은 지모가 있지만 홀로 감당해내기 어려울 게요. 주발은 침착하고 꾸밈이 적소. 유씨를 안정시킬 사람은 주발일 것이니 태위를 맡기시오.

여후가 다시 그 다음을 묻자 (고조가 대답했다)

이후는 그대가 알 바 아니오.

이렇게 한고조의 유언은 마무리 된다.
익부기구잡기의 얘기도 비슷하다. 제갈량의 병이 위독한 것을 알고 국가의 중대사 자문하기 위해 제갈량에게 파견한 사람이 며칠을 이야기하면서도 후계자를 묻지 않았으며, 떠난 지 며칠이 지나서야 질문이 생각나서 급히 말을 달려 돌아온다. 와병 중이던 제갈량은 스스로를 고(孤)라고 칭하며 마치 이복이 올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 질문하기도 전에 대답을 던진다. 다시 후계자를 묻자 비의를 거론하고 그 이후에 대해서는 알 바 없다는 듯이 침묵한다. 익부기구잡기 스스로가 증언하듯이 '치밀하고(精識) 과감하면서도 날카로웠으며(果銳) 정무(政務)를 처리하는데 민첩'했던 이복은 여기서 허둥대며 코믹하기까지 한 역할로서 곧 임종을 맞이할 제갈량이 미래를 꿰뚫듯 대답하는 모습과 대비된다. 사실 이쯤에서 이 이야기를 쓴 작자는 '오(吾)'보다는 '고(孤)'정도는 써주어야 더욱 위엄이 난다고 생각한 것 같다. 이 마지막 장면은 한고조의 유언과 오버 랩 되면서 끝이 난다.
익부기구전잡기에 나오는 제갈량과 이복의 대화는 사기 고조본기, 한서 고제기와 비슷한 내러티브 구조로 이러한 까닭에 호삼성(胡三省)[17]의 자치통감 주석과 원나라 때 이름난 학자인 학경(郝經)이 쓴 속후한서에는 이 대목에서 모두 한고조의 유언을 거론하고 있다. 일부에서 한고조의 유언이 한문제 즉위 즈음에 나왔으리라 여기는 이유와 마찬가지로 아마도 익부기구잡기의 이 후계자 선정 이야기는 제갈량이 지목한 장완이 정권을 잡고 비의가 연이어 집권한 이후, 혹은 이들 사후에 고조본기를 본떠 민간에서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다시 삼국지와 화양국지에 기록된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자.

은밀히 후주에게 표문을 올려 말하기를 "신이 만약 불행하게 되면 뒷일은 마땅히 장완에게 맡기소서" 하였다.

촉서 장완

제갈량이 살아있을 때, 양의는 성품이 조급하고 편협하였으므로 장완에게 (뒤를 잇게 할) 뜻이 있음을 (후주에게) 은밀히 말하였다.

촉서 양의

당초, 제갈량이 은밀히 후주에게 표문을 올리기를 "양의의 성품이 조급하고 편협하니 만약 신이 불행하게 되면 장완으로 신을 대신하게 하소서" 하였다.

화양국지 유후주지

이렇듯 장완전과 양의전을 살펴보면 제갈량이 은밀히 표문을 올렸다고 했으니 굳이 익부기구잡기의 내용에서 신뢰할만한 부분을 가려내라 한다면 '후주가 이복을 보내 제갈량에게 자문을 하게 했고 며칠간의 자문 끝에 제갈량의 밀지를 후주에게 전달한 사람은 이복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정도밖에는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삼국지 비의전에는 이러한 제갈량으로부터의 사전에 예비된 계승 분위기가 보이지 않을뿐더러 비교적 이른 시기의 기록들을 접했을 상거 역시 진수의 서술을 정리하는 선에서 끝낸 것을 보면 후계자 임명과 관련한 이복의 에피소드를 신뢰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화양국지 말미의 익양녕삼주선한이래사녀목록(益梁寧三州先漢以來士女目錄)을 살펴보면 "과감하고 예리한(果銳) 전감군(前監軍) 장군사마(將軍司馬) 이복(李福) 자는 손덕(孫德)"이라 쓰고 '(이복에 대해서는) 제갈고사(諸葛故事)와 촉서(蜀書)에 보인다' 주석했는데 상거는 여기에서도 익부기구잡기를 거론하지 않았다. 제갈고사는 현재 예문류취 권60에 1조가 남아있는데 고사란 지금의 훈령, 조례 또는 판례와 비슷한 의미이다.
또 이번엔 그 다음 기록인 촉기의 기록을 보자.

초주가 제갈량을 처음 만났을 때 좌우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초주를 보고) 비웃었다. (초주가) 나간 후에 유사(有司)가 비웃은 사람들의 죄를 묻고자 하였다. 제갈량이 말하기를 "고(孤)도 (웃음을) 참지 못하였는데 하물며 좌우에 있는 사람들이야 (어찌 참을 수 있었겠는가?)" 하였다.

촉기(蜀記)

손성의 촉기에는 제갈량의 1인칭 대명사가 모두 '오(吾)'로 되어 있으므로 삼국지 초주전 배주에 인용된 이 촉기는 왕은의 촉기로 추측할수 있다. 예문류취 권19, 태평어람 권391, 책부원구 권835, 사문류취 권21에도 거의 같은 문장이 실려 있다. 초주는 사후 서진시기인 후세에 당시 익주자사가 초상화를 그려 기릴 정도로 학자로서 존경을 받았지만 양희전에도 나오듯이 이미 당대부터 시류에 맞는 재능이 없다고 하여 그를 중시하는 사람이 별로 없었고, 초주의 항복론을 받아들여 항복한 유선을 비판한 왕숭과 초주를 대놓고 경멸한 손착과 손성의 평어에서 보이듯 한편으로는 경멸을 받았다. 그의 제자였던 진수 역시 장화의 비호에도 불구하고 끊임없는 모함과 실패를 여러 번 맛보았고.
제갈량은 익부기구잡기에서 '고(孤)'를 통해 신격화된 이미지로, 촉기에서는 볼품없는 초주와 극한으로 대조되는 '고(孤)'로서 등장한다. 아마도 고(孤)라는 인신(人臣)의 극한호칭이야말로 대비를 위한 장치가 아닐까? 왕은의 촉기 외에 다른 사서에는 전혀 보이지 않는 이유 또한 같지 않을까? 제갈량이 예언한대로 비의가 죽고 난 뒤 점차 쇠망해갈 촉한과 제갈량을 등장시켜 후에 항복을 권하고 살아남을 초주를 비웃는 모습은 모두 그 시대의 인식이 투영된 일면이 아닐런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사료에서 칭신을 제외하고 제갈량이 스스로를 가리키는 용어는 크게 두 가지 방식으로 나뉜다.
  • 대내적으로는 '吾'를 기본으로 '亮'이라는 이름을 병용한다.
  • 대외적으로는 '亮'을 기본으로 '僕'이라는 겸양사를 병용한다.
제갈량의 기록에 있어서 1차 사료에 해당하는 제갈량집(서간문 포함)을 살펴보면 '吾'와 '亮', 오나라의 대신인 보즐과 육손에게 쓴 서간에서 '僕' 등이 나타나는데 유비의 사망을 기점으로 전후 그 어느 곳에도 '孤'를 쓴 흔적이 없다. 태평어람 권249에 남아있는 승상부 연속(掾屬)들에게 내린 교령과 이를 바탕으로 쓴 동화전(董和傳)조차 자신의 이름인 '亮'을 써서 자신을 낮추었다. 이렇듯 진수가 서술한 문장에도 모두 공통적으로 '吾'와 '亮'이라는 자칭이 나타난다. 즉 제갈량의 칭고를 했다는 기록은 의외로 그 기반이 부실한 것을 알 수 있고 대내외적으로 공식적인 표현이 나오는 1차 사료를 종합하고 또 진수와 상거의 자료들을 종합하면 이 자료들에서 제갈량은 '고(孤)'라고 칭하지 않았다. 따라서 제갈량은 고라는 자칭을 썼을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것을 할 수 있다.
사실 위에서 내세운 가설이 틀렸고 익부기구잡기와 촉기가 옳은 기록을 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 하나만은 확실하다. 한나라는 고사(故事)라는 형식을 통해 법제의 구멍을 보완하여 빠진 정령을 반복 시행했고 촉한 역시 제갈량의 고사가 존재할 정도로 또 다른 기준점을 세웠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사서에서 '고(孤)'의 사용은 당시 그러한 제갈량의 지위와 인기도를 보여줌과 동시에, 촉한이라는 국가를 신분, 출신 지역 관계 없이 하나로 묶은 그의 존재감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당장 원전을 쓴 진술과 왕은부터 시작해서 그것을 인용한 후대의 배송지, 사마광, 학경, 그리고 그외 제갈량의 말과 문장을 인용한 수많은 학자들에 이르기까지 제갈량이 '고(孤)'를 충분히 쓸만한 자격이 되고 그것을 사서에 나타낼때 문제가 없었다고 판단한 것과 같다는 것이다. 제갈량이라는 거물의 크기는 그 정도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가 있다.
십석(十錫) 드립도 그렇다, 당장 이엄과의 편지도 왕위에 오르고 구석을 권하는 말에 이엄을 꾸짖고 한실부흥을 하면 모두가 큰 상을 받고 실제 존재하지도 않는 십명(十命), 열개라도 받을수 있을것이라 거절하는 편지인데 그걸 가지고 제갈량이 십석 드립을 쳤다느니 하는것이다. 제갈량은 이렇게 말했다.

나(吾)[18]

와 족하는 서로 안지 오래 되었는데, 어찌 서로 더는 이해하지 못하단 말이오! 족하는 신하의 길을 고집할 필요 없이 나라의 영광을 위해 마땅히 아무것도 하지않는 것은 안된다고 나한테 가르치려 들고 있소. 나(吾)는 본래 동쪽의 낮은 선비로, 선제께서 틀리게 쓰셔서 이미 신하로서 극에 달한 지위에 있고 많은 녹(백억)을 받고 있음에도 지금 적을 토벌하는데 효력이 없어 자신을 알아주심에 보답하지 못했는데 제, 진(주나라를 도운 제후인 옛 제나라, 진나라)과 같이 귀하고 큰 자리에 앉는 것은 의가 아니오. 만약 위를 토벌하여 조예를 처단해 황제께서 옛 도읍으로 돌아가시면, 더불어 여러분(諸子) 모두가 높아지고(與諸子並升), 비록 십명(十命)이라도 받을 수 있는데(雖十命可受), 하물며 아홉이랴(況於九邪)!

이는 북벌이 성공하면 참여한 제군 모두가 높아진다고 역설함과 동시에 십명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고로, 큰 공로로 받는 상에 대한 비유인 것이니 이엄에게 분명히 한실부흥의 의지를 보이고 왕위에 대한 거절을 위해서 이런 말을 한 것이다. 제갈량의 논지는 이미 시작할때 다 나왔다. 어디 칭왕 및 구석이란 단어를 꺼내냐는 꾸짖음인 것이다. 십명을 논하는것도 논공행상에 있어 자신만이 대상이 아니라 하고 있고 다른 신하 제군 모두가 모두가 귀하고 현달한 자리에 더불어 높아지고 십명(큰상)을 받는 것이라고 단정한다. 그가 나타내고자 하는 것은 구석에 대한 무시 내지는 멸시에 가까운 것이다. 십명은 제갈량이 가정한 상상 속의 개념으로서 신하로서의 최고 영예를 상징한다. 한실을 부흥하면 비록 극상의 영예라도 받을 수 있는데 하물며 구석 따위이랴! 즉, 신하로서 최대의 영예까지는 받겠으나 구석같이 천자의 권력을 찬탈하는 상징은 받지 않겠다는 의지천명이다.
애당초 제갈량은 유비로부터 왕이 아니라 황제가 되어도 좋다고 유명을 받기까지 했고 그것을 거부하고 고굉지력[19]을 다한 사람이다. 그걸 눈앞에서 보고 유비로부터 '내가 이 사람에게 이런 권한을 부여한 것을 기억해라'는 메시지를 받은 사람인 이엄이 그 권한을 부여받은 사람인 제갈량더러 구석과 왕을 받으라고 논하는것은 교묘한 말로 제갈량을 시험하는 음험한 의도이다. 심지어 저 답이엄서(答李嚴書)는 진수의 제갈량집을 인용한 주석에서 나온것으로, 아마도 이엄이 4차 북벌 이후 제갈량에게 누명을 씌울때 공개된 편지들 가운데 하나일 것이지만, 결국 촉한의 중신들은 두 탁고대신 가운데 제갈량의 편에 섰고 이후에도 그의 충성에 대해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었다.
참고로 십명(十命)은 제갈량이 말할 당시에는 없는 것에 대한 비유였지만 지금은 공훈이 탁월, 뛰어나다는 것을 비유하여 최고의 상을 의미한다. 임금이 권신에게 하사한 아홉 가지 기물을 구석이라고 하고, 구석 외에 하나의 물건를 더하는 것. 십명을 칭하는 것은 임금이 신하들에게 주는 최고의 상이자 특수한 영예이다. 살피건데, 고대에 십명의 제도는 전혀 없었으니, 이는 곧 가정된 말이다. 이에 대해서는 한전(漢典)의 설명도 있다. 실제로 제갈량 이전이나 이후에도 찬탈하려는 권신들은 구석을 받았으면 받았지 십명을 운운하진 않았다. 즉 이것 역시 썩은 떡밥이라고 할 것이다.
제갈량이 남중 정벌 이후 부월, 호분 60인, 고취(취주악대) 1부, 곡개(曲蓋, 대가 굽은 일산) 하나, 우보(羽葆, 새깃으로 장식된 일산)을 받았다고 구석의 일부를 받았네, 황제의 권한을 넘어서 찬탈을 하네 운운하는 작자들도 있다. 그러나 그가 받았던 것은 부월, 호분 등 구석의 일부 일 뿐이고, 그나마도 부월은 원래부터 원정을 나가는 장군에게도 주어지는 물건이었다. 향후 있을 북벌을 위해선 필연적인 권리였던 것이다. 거기다가 제갈량이 받은 호분은 60인으로 원래 구석을 받은 자들이 3백인을 하사 받았다는 걸 생각하면 1/5밖에 안 돼서 그나마도 한계가 명확한 것이었다. 이것은 황제가 공로를 치하하기 위해서 주는 물건들, 그러니 하사품의 역할을 한 것이다. 또 제갈량은 찬탈자들이 받는 검리상전(劍履上殿),[20] 입조불추(入朝不趨),[21] 알찬불명(謁讚不名)[22]을 받지 않았다. 반면 조위에선 탁고지신으로 조진, 조상, 사마의가 이 권리를 하사받았는데 사마의야 뭐 그렇다치고(...)[23] 조진, 조상[24]이 황위를 찬탈하려 했다는 얘기는 없다. 하물며 그런 권리가 없던 제갈량에 이르러서야! 즉 이것 역시 푹 썩은 떡밥이라고 할 것이다.

4. 인사정책에 실수가 있었는가?


제갈량은 사람을 씀에 있어 신상필벌을 명확하게 하였으나 비록 단점이 있더라도 장점이 있는 관리의 장점을 아껴서 사용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장완이 일을 태만히 해 유비의 노여움을 사 처벌당할뻔 했을때 제갈량이 "장완은 국가의 그릇이지, 백리를 다스릴 인재가 아닙니다. 그의 정무 처리는 백성들을 안정시키는 것을 근본으로 하고 있으며 겉모습을 장식하는 것을 우선시하지 않습니다. 원컨대 주공께서는 다시 살펴 주십시오." 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듯 그는 어떤 사람이 장점을 가지고 있으면 단점이 있더라도 그 재주를 살려 아껴서 쓰려는 모습을 자주 보여주었다. 또한 당시 젊은 인재들이었던 비의동윤, 강유를 아껴 파격적인 대우를 해주기도 했다.
유선이 즉위하자 익주목이 된 제갈량은 성도 남쪽에 높은 대를 쌓아 각지의 선비들을 초청했고, 몸소 익주 출신의 선비들을 방문하여 그들을 등용했다. 그전에도 익주 출신 선비 양홍하지를 적시적소에 잘 쓴 것 때문에 서쪽 익주 사람들은 모두 제갈량이 당대 인물의 능력을 전부 발휘할 수 있도록 기용한 것에 감복했다. 제갈량의 영향과 용인 아래에서 그의 뒤를 잇는 촉한의 군신들은 청렴하고 검소하게 지냈다. 그의 뒤를 이은 비의강유 모두 검소한 인물이었다.
비록 법정과 의견은 다른 편이었으나 그의 사람대함에 있어 야박한 태도를 감싸주고 그의 지모를 중용하였고[25] 위연과 양의의 갈등에서도 그 두명의 재주가 아까워 어떻게든 둘을 화해시키려고 했던 점만 봐도 그러하였다. 또 재상의 지위에 올라서도 손수 인재들을 찾아다니며 덕망과 재주가 있는 사람들을 관리로 기용했다는 점에서 인재를 대하는 그의 태도를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발굴된 인재들은 제갈량 사후에도 국력이 부족한 촉을 단단하게 지탱하였다.[26] 그러나 유비도 걱정한 마속 같은 최악의 실패 사례도 있으며 이렇게 최대한 다독이다가 결국엔 북벌에 차질을 빚게 만든 이엄의 예, 결국 그 성격을 고치지 못하고 제갈량 사후 반목하여 서로 파멸한 위연과 양의의 사례도 있듯, 제갈량의 인사에도 분명 실책은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익주 1개주로 국가를 운영해야 했던 촉한과 제갈량의 상황을 고려하면 이런 인사는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었다. 형주를 상실하기 이전 상황을 생각해봐도 유비는 모든걸 털리고 번구에서 웅거하던 시절에서 익주를 영유하기까지 고작 6년밖에 걸리지 않았고, 그렇게 급속도로 확장된 조직을 지탱하기 위해서는 그야말로 고양이 발이라도 빌려야 할 상황이었다. 형주 상실과 이릉대전 이후로는 뭐 말 할 것도 없다. 마속 인선만 해도 가정에 배치할 지휘관급 인사를 도저히 찾을 수가 없어 어쩔 수 없었던 측면도 있었는 지 모른다.

4.1. 법정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했다?


유비익주를 차지한 후 법정은 터럭만한 일의 은혜는 반드시 갚고 한편으로는 터럭만큼의 원한도 갚아 몇 사람에겐 살상도 저질렀다. 한 사람이 제갈량에게 "촉군태수 법정이 종횡하니 장군께서 좀 주공께 아뢰어, 위엄과 복으로써 그를 제발 좀 억누르게 하십시오."라고 제갈량에게 건의했다. 제갈량이 이때 이러한 요청을 법정의 공이 많아 제지할 수 없다는 식으로 말하고 그를 제지하지 않는데 이를 가지고 제갈량을 비판하는 의견이 있다. 바로 제갈량이 신상필벌이 분명했음에도 법정에게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후대의 역사가 손성도 비판한 사항이다.
그러나 이는 다음과 같은 측면에서 반박될 수 있다. 제갈량이 촉 정권에서 높은 지위에 있다라는 사실과 더불어 제갈량은 당시 고굉으로서 유비 휘하 법정과 동등한 권한이 있었다. 법정이 물의를 빚었으면 첫째로는 법정의 일이고 둘째로는 유비의 일이며 나머지는 더 언급할 이유가 있을까? 제갈량이 유비의 눈과 귀로 세간 정황을 다 보고 해야 하지는 않았을터이고 유비 역시 법정의 일을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제갈량의 간언으로 간신히 살아난 장완의 예도 있지만 장완은 당시 유비의 눈밖에 난 일개 현령에 불과했고 유비가 제갈량의 말을 듣지 않으면 그걸로 끝이었다. 장완이 죄를 지어서 벌을 주는데 제갈량이 말을 해서 벌을 감하는 실질적인 능력이 있었다면 법정의 경우 장완과 달리 유비가 매우 신임하고 있었기에 그와 정확히 동등한 능력을 지녔을 뿐인 제갈량 입장에선 법정의 비위를 밝히고 탄핵하는 힘이 아니라 유비가 법정의 공을 크게 치하하고 선물을 내릴 때에나 조언하는 정도에 불과하다. 무엇보다도 유비 시절 제갈량이 법정과 함께 촉과를 만들었다는 사실이나 유비가 제갈량을 후방지원으로 나두고 법정을 책사로 한중에 데려갔다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그 권한과 위엄이 법정이 제갈량보다 작은게 아니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법정 역시 자치통감에 나오듯이 제갈량이 엄격하게 법을 집행하는데 있어서 함부로 제갈량의 권한을 침해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법정 사후 사실상 한 국가의 전권을 쥔 '승상'으로서 제갈량과, 유비 생전 아직 잘해야 일개 신하에 불과했던 제갈량이, 과연 법정을 상대로 뭔가 영향력을 발휘할 '힘'이 있었는지를 우선 따질 여부일 것이다. 유비 생전 제갈량은 딱히 법정보다 지위상으로나 촉한 내부 영향력 상으로나 우위에 있었다는 여부가 확인되지 않으며, 이는 승상으로서 사실상 한 국가의 국정을 책임진 직위에 오른 제갈량과 다르다. 당장 당시 같은 보정대신 이엄의 건을 처리한 것만 봐도 유비 사후의 일이며, 이조차도 제갈량은 단독으로 처리한게 아니라 촉한 조정대신들 전체의 힘을 빌려서 처리해야만 했다. 근데 유비 생전 딱히 법정보다 뭔가 대단한 위세가 없던 일개 신하 제갈량이 뭘 할 수 있었을까? 건의 정도야 유비에 할 수 있었겠으나, 그렇다고 유비가 법정을 처리한다는 보장도 없으며 외려 당시 유비 자신이 법정을 귀중히 쓰던 형국이었다.
유비가 살아있을때는 유봉 사사건의 경우에도 제갈량은 유비에게 조언을 했을 뿐이지 유봉을 직접 죽일 수는 없었다. 결국 최종 결제를 내린 것은 유비다. 제갈량이 건의했다고 해서 법정도 그러리라는 보장이 있을까? 거기에 법정이 유비의 신임을 잃었다는 기록이나 근거가 있나? 적어도 유봉과 달리 사서상 법정이 유비의 신뢰를 잃었다는 기록은 없다. 그 점을 우선 논할 일이다.
"일을 엄정히 처리한다"는 사서의 언급은 결국 그만한 힘이 있어야 개혁이든 일처리든 한다는 말이다. 당장 주변의 위태로움을 제대로 읽지 못하고 강경한 태도로 이각과 곽사를 몰아붙이다 왕윤이 어떤 최후를 맞이했는가? 뭘 하려면 당연히 그에 수반되는 힘과 권력이 있어야지, 일개 신하가 주군인 유비의 의중을 거스르면서 단독으로 일을 막 처리하면 전제군주제국가에서 그건 잘해야 항명이고 최악이면 반역이다. 사서에서 소위 충신으로 언급된 신하들도 보면, 거진 대부분이 최소 군주에게 충분한 신임이나 권한을 얻고 개혁을 진행한다. 제갈량이 굳이 유비의 뜻을 거스르면서 그럼 단독으로 뭘 해야 할까? 당장 원숭환이 (좋은 의도긴 했지만)멋대로 모문룡을 처리했다 어떤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는지 역사는 말해주고 있는데 제갈량이 왜 그런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가, 게다가 군주의 의중을 거스르고 신임을 받는 익주의 거물을 함부로 처리하면 그건 충성이 아니라 반역에 가깝다.
요약하면 당시 법정은 제갈량과 최소 동등한 정도 위치였고, 익주에 훨씬 오래 근무한지라 외려 익주인들에겐 훨씬 신망이 높은 상태였다. 여기에 법정이 저런 짓들을 저지른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익주 모든 신하들의 신망을 잃었다는 근거는 없고, 익주 백성들의 눈밖에 났다는 말은 더더욱 없다. 제갈량이 뭘 하고 싶어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심지어 법정은 유비가 기반을 닦는데 아주 혁혁한 군공까지 세우며, 제갈량과 비슷한 신임과 총애를 유비에게 얻은 상태였다.
그러니 요지는 사건 자체는 법치주의 관점에서 도덕적으로 제갈량이 비판을 받을 여지는 있으나, 시대적, 상황적 요건을 고려하지 않고 마치 제갈량이 조치할수 있는건을 사사로이 묵살시켰다식의 비판은 적절치 않다는 것이다. 고중세 전제군주제 국가에서 잘해야 동등한 직위의 대신을, 심지어 그 대신이 내가 섬기는 군주의 총애도 받고 건국에 엄청난 군공도 세웠다면, 똑같은 신하가 함부로 사사로이 고발할 위치가 아니었다. 설령 유비에게 제갈량이 말해봐야, 유비가 그 건의를 수용할지도 의문이고 외려 당시 법정을 총애하던 유비가 적극적 조치를 취해줄지도 의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해봐야 법정이 제갈량에게 원망만 품게 될 공산이 컸다. 법정과 제갈량은 서로 숭상하는 바는 같지 않았으나 법정의 지모를 높게 여겨 제갈량이 공적인 도의로 서로 따랐고 제갈량은 늘 법정의 지모와 권술을 높게 여겼다는 기록도 있다. 즉 제갈량이라고 법정을 무조건 좋게 보지는 않았으나 법정의 능력과 공적인 사항 때문에 존중했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법정의 경우 입촉의 일등공신이기에 이를 우대할 필요가 있어 거기에 너네도 우리한테 이렇게 큰 공을 세우면 우대받는다고 어필할 요소거리며 또한 알아서 욕받이가 되며 세력을 꾸리지 못한 아싸이므로 새로운 지배세력인 유비측의 입장에선 굳이 벌을 줄 필요가 이유가 없었다고 보는게 합리적일 것이다.

5. 융중대를 제때 수정하지 못했나?


여명협 교수의 제갈량 평전에서는 융중대가 당시 급변하는 상황에 맞추어 수정/보완을 거치지 않은 것이 아쉽다고 지적하였다. 익양대치로 손오와의 갈등이 표면상에 올라온 상황에서 형주에 더 힘을 싣는 방향으로 전략을 보완하여 유비에게 헌책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평전에서 제갈근이 익양대치 전에 촉에 사신으로 왔을때 제갈량, 제갈근이 이에 대한 논의나 (유비에게) 얘기를 분명 했을거라고 추측한다.
그러나 당시 유비군은 익주 문제로 매우 바쁜 상황이었고, 익주 평정 이후에는 한중의 일로 인력과 재정이 부족한 상황에서도 익양대치 당시 관우에게 군사를 지원하였으며 또한 상용을 점령하고 유봉과 맹달을 주둔시켜 유사시 지원할 수 있도록 하였다. 한중보다 형주를 우선해야 했다는 반론이 있을 수 있으나, 한중평정은 융중대에 꼭 필요한 것이었으므로 옳지 않은 지적이다. 한중은 유비군에게는 가장 중요한 대 위나라 방어거점이었고, 한중이 평정되지 않아 익양 대치 때에 급히 오와 협정을 맺고 한중으로 달려간 것과는 달리, 한중을 점령한 이후에는 이릉 대전의 궤멸적인 패배 이후에도 촉은 위의 위협에서부터는 비교적 자유로웠다. 따라서 한중과 익주평정에 총력을 기울여야 했던 사정상 제갈량의 탓을 할 수는 없다.
또한 관우의 인사에 관해서는 형주를 수비하는 임무로 관우 이상의 인재는 유비군에게는 존재하지 않았다, 관우를 대신해서 다른 상장을 배치하기엔 충성심, 군대를 통솔하는 능력, 수군을 잘 다루는 능력으로 관우만한 사람이 없었다. 외교의 부분에서 관우가 실수한 점이 없지 않으나[27] 실제로 관우는 형주 방어를 잘 해냈고, 관우가 형주를 잃게 된 것은 손유동맹의 공적인 위를 공략하고 있을 때 촉오동맹의 중요성을 강조하던 오나라의 도독 노숙이 217년에 죽은 이후, 여몽과 손권이 노골적으로 형주 나머지 부분을 차지하려고 눈에 불을 켜는 상황에서 오에서 뒤통수를 친 것과, 유봉과 맹달이 사사로운 갈등으로 관우를 구원하지 못하는 등의 예상하기 어려웠던 변수의 개입이 있었던 것 때문이지, 용인의 실책이라고는 볼 수 없다.

6. 기타 논란거리


제갈량이 유비를 부추겨 유장을 뒤통수 치게 만들었다는 비판이 있다. 그리고 이는 명백히 유비와 제갈량의 도덕적 과오가 맞다.
그러나 이 상황은 유장의 부하들이던 장송, 법정, 맹달 등이 먼저 와서 유비에게 익주를 갖다 바치는 상황이었다. 또 도덕성을 매우 중시여기는 사가인 진수가 '유장이 영웅감이 아니라서 땅을 잃은 것이니 자연스러운 이치다' 정도로 평한 걸 보면 의외로 당대 사람들 사이에선 그리 큰 도덕적 흠집으로 인식되지 않았던 것 같다. 실제로 당대에 유비가 이것으로 비판받은 점은 없다.
이걸 보면 유장이 개인적인 인성은 좋았을 망정 난세의 군웅으로는 극히 함량미달이었다는 것은 당대에도 널리 퍼진 평가였던 듯 하다. 하긴, 명색이 후한 최대의 주인 익주를 갖고 있으면서, 거기에 법정, 이엄, 황권, 장송, 맹달, 오의, 오반 등 인재풀 또한 충분히 뛰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고작 한중군 하나 차지하고 있던, 거기에 오두미도의 교주로서 장로 개인의 카리스마를 제외하면 별 다른 인재풀도 없던 장로 세력한테 쩔쩔매다 유비군을 불러들일 정도였으니(...).
유비와 함께 멀쩡히 살아있던 헌제에게 시호를 올려 죽은 사람으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도덕적 비판이 존재한다. 그런데 헌제가 조비에게 살해당했다는 유언비어는 꽤 퍼져 나간 듯 하다. 당장 위나라 신하였던 소칙이나 조식도 헌제가 선양후에 해를 당한지 알고 소복을 입고 곡을 했다. 오나라 쪽에서도 헌제를 죽은 사람 취급하는 기록이 있을 정도. 그러니까 알면서도 죽은 사람 취급했는지 아닌지는 확실하지 않다. 어쨌든 헌제가 조비에게 살해당했다는 풍문 자체는 유비 세력에게는 아주 좋은 명분이 될 수 있었다.
유비의 칭제를 막지 않은 것은 잘못이라는 의견도 있는데 지도자와 국가를 동일시해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동진의 습착치나 정사에 주석을 단 배송지는 유협이 조비에게 선양함으로서 한의 사직이 끊겼는데 이를 막을 수 있는 유비가 황제가 되는 것으로 한이 끊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리는 것은 최선이라고 보았다.
유선이 제갈량 사후에 촉나라 백성들과 이민족들, 신하들이 길가나 들판 등지에서 사사로이 제갈량을 제사 지냈는데 이 때문에 제갈량을 모시는 사당을 짓다고 건의를 했지만 유선은 당장 짓지는 않고 그의 사후 30여년 뒤에 사당을 지었다. 이를 근거로 유선이 제갈량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서 일부러 사당 건설을 몇년간 질질 끌었다는 주장이 일각에서 있기는 하지만, 제갈량 사후 그를 욕하는 이막을 유선이 화를 내며 처단한 바도 있으니[28] 제갈량과 유선이 대립했다고 하기에는 앞뒤가 맞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제갈량은 유선의 안정적인 후계 계승을 위해 유봉을 제거했고, 유선의 친어머니인 감부인을 소열황후로 높이고 유비와 같이 모셔야 한다고 하여 이를 관철시켰다. 자신의 안전한 제위계승을 위한 사전작업을 도맡아 해준 사람인데 유선의 입장에선 이런걸 싫어할 이유가 없었을 터이다. 유선이 제갈량을 좋아하는 것과 별개로 사당을 통해 제갈량이 신격화되어 살아있는 자신의 권위를 흔드는 일이 싫었을 지도 모른다.[29]
다음은 정말 정말 기타 논란거리.
  • 제갈근과 제갈량의 관계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제갈현이 예장태수로 부임할때 같이 따라간 사람은 제갈량, 제갈균 및 누이 2명이고 제갈근은 빠졌다. 무슨 일이 있을길래 제갈근은 혼자 강동에 멀리 피해서 계모를 모시고 살았을까? 그리고 제갈근이 동오에서 안정된 생활을 할때 왜 숙부 제갈현을 잃은 형제들을 부르지 않았을까? 나중에 제갈근과 제갈량은 서로 만나더라도 공적인 태도를 유지했다, 두 형제간의 관계는 생각보다 서먹했을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제갈량이 가장 많이 편지를 보낸 사람 중 한명이 형 제갈근이라는 점에서 또 그렇게 보긴 어려운 면도 있다.
  • 제갈량은 친구들을 등용하지 않았다?
위나라에서는 순욱이 여러 인재를 피라미드 형식으로 영천호족 파벌을 형성하며 서로 추천했고 오나라에서도 장소, 주유, 노숙, 제갈근 등이 서로 추천했다. 유비 역시 호협을 사귀는 걸 좋아했고 촉한은 유비 개인을 중심으로 조직된 단체였다. 그런데 제갈량은 달랐다. 서서, 석광원, 맹공위 등은 위나라에서 관직을 지냈고 최주평도 임용되지 못했고 석도, 맹건도 드러나지 않았다.[30] 제갈량의 사람쓰는 원칙이 붕당을 형성하지 않았던 것일까? 위나라에서 순욱을 조금이라도 알면 조그마한 관직을 얻을수 있고 이건 오나라의 주유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제갈량을 사사로이 알아도 관직을 얻을 수는 없었다.
제갈량은 황승언의 딸과 결혼하면서 당시 형주 최대의 권문세가이자 자사 유표의 처가였던 채씨 집안와 인척 관계를 맺었다. 그의 두 누나도 각각 형주의 명문가 괴씨와 방씨 집안에 시집을 갔다. 이에 제갈량이 처가와 사돈댁 덕으로 권문세족에 빌붙으려 한 게 아니냐고 의혹의 눈길을 보내는 사람들이 있는데.... 실상 제갈량은 인척관계를 이용해 부귀를 구한 적도 관직을 구한 적도 없었다. 그가 형주 명문가의 인척으로 편입되면서 형주의 여러 명사들과 교류하게 될 수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어디까지나 그뿐, 그는 포의의 농부로서 스스로 농사를 지어 생계를 이으며 은사나 선비들과 사귀었다. 제갈씨 집안이 형주의 여러 명문 호족들과 인척 관계를 맺었지만 그들 중 상당수가 위나라에 사관했고[31][32] 방통은 원래 주유 밑에서 관직 생활을 하다가 제갈량보다 늦게 유비에게 출사했다. 이러한 점을 보아 제갈량이 권문세가의 정치적 이익을 노리고 황부인과 결혼한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다만 그 결혼을 통해 형주의 명사들과 학문적인 교류를 할 기회를 얻었으며, 황부인 본인도 현명하고 재주가 많은 사람이었다고 하니, 그 결혼을 통해 얻게 될 '지적이고 인간적인 교류의 기회'를 원했던 것이라고는 볼 수 있겠다.
  • 제갈량의 학문적 바탕은 무엇일까?
양한시대에는 경학이 발전했고 고문에 대한 논쟁도 많았다. 제갈량은 어려서부터 여기저기 떠돌이 신세였으므로 집안배경의 지원을 받지는 못했다. 유비는 처음에 대학자 노식에게 배웠고 서주에서도 진기, 정현 같은 학자들과 교류가 있었다. 조조는 어렸을때부터 독서를 즐겨했고 시서에 능했고 부도 짓는등 문학적 소양이 충분했다. 손권도 어렸을때부터 학문에 정진했다. 그러나 제갈량은 어려서 조실부모하고 숙부에게 의지하다가 그 숙부마저 일찍 죽는 등, 고문을 구해 원문을 공부하거나 금문을 구해 춘추필법을 사용해 가르침과 주석을 얻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형주에 가서는 상황이 좀 나아지지만 그래도 스스로 농사지어 먹고 사는 가난한 서생임은 변하지 않았다.
그런데 보면 유선을 가르칠때 제갈량은 한서, 한비자, 관자육도, 예기 등 다양한 제자백가 서적들과 역사책을 제왕학으로서 가르칠 수 있었고 한서에 대해선 관련 서적을 쓴 적도 있다. 융증대를 얘기하거나 유기에서 계책을 말할때, 손권에게 가서 강노지말을 유세할때, 유비에게 왕을 칭하고 황제를 칭하며 존호를 받으라 권할때, 정의를 써 위나라의 대신들을 꾸짖고 오나라와의 동맹을 유지하자는 절맹호의를 쓸 때 등 제갈량은 대량의 역사전례를 인용하고 있다. 그가 아는 시대는 일찍이 춘추전국시대를 넘어섰고 견식이 넓고 여러 방면에 걸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제갈량의 학문은 여러범위에 폭넓게 걸쳐 있던 것으로 보이며 여러 학파의 장점을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제갈량은 어떻게 이런 학문을 쌓을 수 있었던 것일까? 그 뒷편에는 제갈량의 선천적 재능 외에도 피나는 노력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앞서 언급한 황부인과의 결혼도 이런 지적인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제갈량의 의도가 있을지도 모른다.
또한 그 당시 형주가 "교육의 장소" 임을 생각해볼 필요도 있다. 유표의 정책으로 형주에는 꽤나 많은 학자들이 모여살았고 그로 인해 양양과 멀지 않은 융중에서 살면서 그런 스승들 접할 수 있었을 것이다. 특히나 제갈량 상위 항목에 나와있는 제갈량의 인맥이 크게 도움이 되었을 것인데, 제갈량의 큰 누이는 형주 최고 명문 가문인 채씨 가문에 시집을 갔고, 둘째 누이는 형주에서 이름 나는 선비인 방덕공의 아들과 결혼을 했다. 그리고 본인도 위의 언급처럼 양양의 명사인 황승언의 딸인 황부인과 결혼했다. 그렇기에 제갈량이 공부에 대한 의욕만 있다면 얼마든지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은 형주에 와서는 충분히 조성되었을 것이다. 또한 스승인 사마휘 역시 뛰어난 선생으로 알려져 있었으니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은 잘 갖춰진 셈. 물론 이것은 제갈량이 형주 정착한 이후에 일어난 일임으로 그 전에는 뛰어난 잠재력을 가진 천재였다가 형주에 거착하며 그 환경이 주어져 지식까지 갖추어졌다고 볼 수 있는 근거가 많다.
  • 제갈량과 천명 사상
초려대, 정의, 음부경주서(이쪽은 대부분 위서라고 보는 편이지만)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제갈량의 시각은 천명의 불변성과 비불변성을 따지기 보다는 오히려 천명, 즉 정치와 윤리도덕에 영향을 미치는 객관적인 법칙으로서의 하늘의 존재 자체에 대한 회의에 가깝다. 어째서 제갈량이 이런 형이상학적인 논의를 거부하고 현실적인 입장을 취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7. 관련 문서




[1] 익숙한 스타크래프트로 치면 운영은 잘 하지만 날빌을 못 쓴다 정도로 이해하면 좋다.[2] 진수가 제갈량을 이렇게 비판적으로 평해놓고는 군사적인 평가에서 제갈량을 행여 높게 쳤다가 사마의를 욕보인 것으로 여길까봐 사마염에게 계속 용서를 구했다.[3] 이전전에 의하면 박망파 전투는 203년에 발생한 여양 전투 직후에 발생한 것으로 나온다. 그러니 삼고초려로부터 무려 5년 전의 일이다.[4] 凡戰者, 以正合, 以奇勝. 故善出奇者, 無窮如天地, 不竭如江河[5] 당장 그것을 뿌리친 제갈량 본인은 무슨 대단한 대안이 있어 그것을 거부했단 말인가? 그렇다고 제갈량이 촉군 최고의 양장이었던 위연을 어디 다른데로 돌려 유효활용한 것도 아니다. 가정 방면에 마속 대신 위연이 갔다면 과연 그렇게 허무하게 털렸을까? 결국 그 전역동안 위연은 허송세월하며 북벌의 실패를 방관해야 했다.[6] 물론 세설신어는 정식기록이 아니라, 일종의 가십거리 모음집이라는 것은 감안해야 한다.[7] 이 말은 원준의 저서 원자에 나오는 말인데 후에 이를 조선시대 때 이덕무가 인용하여 다시 평가하기를 원준은 제갈량을 모르는 사람이나 다름없다고 하였다[8] 兵法一曰度, 二曰量, 三曰數, 四曰稱, 五曰勝. 地生度, 度生量, 量生數, 數生稱, 稱生勝.[9] 대표적으로 이문열과 김경한.[10] 위략에는 유선 벤허설을 인용하면서 유선이 아는 것이 없어 정치는 제갈량에게 맡기고 제사를 자기가 맡았다고는 하나, 위략의 유선 벤허설은 완전히 잘못된 기사이므로 신뢰도가 없다.[11] 다만 제갈량에게 후사를 맡기고 복수전을 감행한 것은 다각도로 살펴볼 필요는 있다. 출병 전에 제갈량을 녹상서사에 임명하는데 전권을 주었다 풀이됨으로 '너 말 쌩까고 갈테니까 내가 지면 너 맘대로 해라'라는 제갈량을 비롯한 출정 반대파에게 내리는 일종의 정치적 거래(딜)로 볼 수도 있을 것 같다.[12] 다만 이것은 사후에 받은 것이다.[13] 제갈첨이 후일 아버지의 후광에 힘입어 높은 자리까지 순조롭게 승진했지만 기본적인 권력은 모두 황제 유선이 가지고 있었으며 황제 유선의 권력 앞에 제갈첨은 침묵할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제갈첨은 유선의 사위로 황제의 인척이기까지 했으므로 근본적으로는 황제 유선의 권한과 권위 하에 있었다.[14] 예컨데 조조의 본가는 아버지 조숭부터가 엄청난 재물을 가지고 있었고 조홍은 당대 최고의 부자로 유명했다. 사마씨도 사마염이 황제가 되자 온갖 방법으로 재물을 자신의 가문에 축적시켰다. 그 와중에 석숭왕개돈지랄 일화 같은, 국가 막장·멸망 테크의 전조가 보이고 있었다.[15] 노필이 말하길, 고(孤)는 황제 전용이 아니다. 두예가 이르길, 고(孤)는 춘추시대의 제후가 쓰는 겸칭이다.[16] 이미 진시황때부터 황제는 1인칭으로 고(孤)가 아니라 짐(朕)을 사용했다.[17] 호삼성의 경우 한고조의 경우와 다르고 단지 비의를 이을 대상이 없던 것 뿐이라고 해석하고 있지만.[18] 실제로 원문에서 '吾'라고 쓰고 있다.[19] 股肱之力, 고굉지력은 다리와 팔, 즉 사지 온 몸의 힘을 뜻하는 말로 자신이 가진 모든 역량이라는 의미로 쓰인다. 어떤 일을 함에 가진 힘을 남김없이 다한다는 의미의 전심전력(全心全力)과 같이 온 몸을 다 바쳐 헌신한다는 의미로 쓸 수 있다.[20] 칼을 차고 전상에 올라갈 수 있다. 원래는 당연히 무기 소지 자체가 안 된다.[21] 황제의 어전에 입조할 때 종종걸음으로 걷지 않아도 된다.[22] 입조 때 환관이 관직과 이름을 말하지 않고도 입조할 수 있다.[23] 사마의조차도 고평릉 사변 이전에 받은 것으로 권력을 찬탈하고 받은 게 아니다.[24] 조상의 경우 고평릉 사변 당시 본인의 태도도 그렇고 누명을 쓴 것이라는 설이 대세.[25] 유비 입촉 후 법정이 잘난 채 하면서 타인을 하대하자 사람들이 제갈량에게 법정 좀 어찌 해줘라라고 요구했는데 제갈량은 그 동안 법정이 힘들게 살았을텐데 이 정도는 봐주는 것이 어떠겠느냐고 말했다. 연의에서는 추가적으로 이를 들은 법정이 스스로가 부끄러워 다시는 그런 행동을 안했다고 하는 내용이 추가되었다.[26] 엄밀히 말하면 그는 인성과 능력을 고려해 관료의 성격이나 능력에 따라 알맞는 적재적소에 인재를 배치하려고 노력했다 할 수 있다. 당장 출사표에서 '곽유지비의, 시랑 동윤 등은 모두 선량하고 진실하오며 뜻과 생각이 고르고 순박하여 선황제께서 발탁하시어 폐하께 남기셨사오니, 아둔한 신이 생각하건대 궁중의 크고 작은 일은 모두 그들에게 물어보신 이후에 시행하시면 필히 허술한 곳을 보완하는 데 크게 이로울 것이옵니다. 장군 상총은 성품과 행실이 맑고 치우침이 없으며 군사에 밝으니 쓰시도록 하십시오'라고 했던 것처럼 아직 미숙한 군주 주위에 능력과 인성이 되는 인사들을 배치해 보좌를 담당케 했다는 점을 봐도 그렇다. 특히 동윤 같은 경우엔 내부기강을 잡는데 있어서 탁월한 인재 선정이었다.[27] 제갈량의 외교정책은 동화손권, 즉 항상 동오와 친선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확고부동한 2인자 관우가 죽고 관우의 복수를 위해 출정했던 유비가 이릉대전으로 실패하자 제갈량은 촉한의 전권을 가지게 되었고 동오와의 관계 개선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28] 그냥 처단이 아니라 아예 사형에 처해버렸다. 유선이 비록 무능의 아이콘으로 통할지언정, 사람됨 자체는 딱히 모난 데 없이 유순한 위인이었는데, 그런 사람이 노발대발하며 죽여버릴 정도였으니(....)[29] 이미 죽은 신하를 견제한다는 말은 옳지 않다. 제갈량이 누구인가? 한나라를 위해 두 번의 출사표를 내고 싸웠으며, 죽어서 그만둘 때까지 유비의 은혜를 잊지 않았던 자이고 유비가 자신의 아들을, 나라를 맡겼던 탁고대신이었다. 그 은혜를 생각하면 사당을 짓고 제갈량 같은 자가 앞으로도 나오도록 장려해야 하는데 자신의 권위 때문에 황제가 밍기적거리니, 이러면 누가 몸소 충성하여 제 한몸 바치겠는가?[30] 단 이중 서서를 잡지 못한걸 제갈량 탓하는 것은 제갈량 입장에서 굉장히 억울하다. 연의에서야 서서의 후임으로 제갈량이 군사된 것이지만 실제 정사에서 보면 서서와 제갈량은 모든 촉빠들이 꿈꾸던 제갈량-서서 체제로 유비를 섬긴적이 있다. 아니 더 자세히 살펴보면 제갈량이 등용된 자체가 서서의 추천으로 있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서서가 유비와 제갈량을 떠나게 된 것은 효자로 알려진 서서 본인의 의지였으며 효를 중시했던 그 시절은 그 누구도 서서를 비난하지 않았다.[31] 괴씨, 채씨 집안 사람들은 상당수가 위나라로 갔다. 괴씨 집안은 제갈량의 큰누나가 시집간 가문. 그리고 제갈량의 작은누나와 결혼한 방산민도 위나라로 출사했다.[32] 물론 촉한에 사관한 형주 호족도 많다. 촉서에 인용된 양양기를 보면 양양의 호족들 가운데 습씨, 마씨, 나씨, 곽씨, 양씨 일족 등이 촉한에 많이 출사했다. 방씨 집안에서는 방통 외에도 방희라는 인물이 촉한에 사관한 것이 확인된다. 일각에서는 양양 인근의 남양 출신인 황충이 제갈량의 처가인 황씨 집안 사람이라고 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