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르비아/역사

 


1. 개요
2. 5세기 ~ 1459, 중세
2.2. 라쉬카
2.2.1. 기독교화(정교회): 9세기
2.2.2. 동로마 제국에 편입, 917
2.3. 두클랴
2.3.1. 불가리아의 속국에서 왕국으로, 1077
2.3.2. 콘스탄틴 보딘의 세르비아계 공국 통합후, 몰락(1081 ~ 1099)
2.4. 부칸에 의한 라쉬카의 부활(부카노비치 왕가)(1091 ~ 1112) → 세르비아의 시작
2.4.1. 우로쉬 1세(1112 ~ 1145): 동로마 견재
2.5. 스테판 네마냐: 실질적인 독립 → 세르비아 왕국(1217 ~ 1346)
2.6. 세르비아 제국(1346 ~ 1371)
2.7. 세르비아 공국(1372 ~ 1459): 혼란기와 오스만 제국의 침략
3. 1459 ~ 1817, 오스만 제국의 지배
4. 1817 ~ 1882, 세르비아 공국의 부활
5. 1882 ~ 1918, 세르비아 왕국
8. 티토 치하
11. 역대 국가수반
11.1. 역대 국왕



1. 개요


세르비아역사를 다루는 문서.

2. 5세기 ~ 1459, 중세


현재는 슬라브계 국가들로 꽉 차있는 발칸 반도지만, 실제 슬라브인은 기원후 5세기에나 최초로 발칸 반도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이전에는 로마화된 일리리아인이나 켈트인이 거주하고 있었다.
세르비아인을 포함한 슬라브인들의 원래 고향은 지금의 동유럽 일대이다. 그들의 고향의 정확한 위치는 고고학적 증거가 별로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폴란드 일대, 우크라이나 일대 등 여러 가설이 존재하나 아무튼 로마 제국 국경 너머의 게르마니아보다 더 멀리 떨어져 있었다는 사실은 확실하다. 4~5세기 경 이웃의 게르만족이 쇠락해 가는 로마 제국 하의 서유럽으로 대거 이주하자 슬라브인들은 이웃이 떠난 바로 그 자리로 이주하기 시작했고 계속해서 서쪽으로 이동하다 6세기 경에 동로마 제국 국경인 다뉴브 강에 다다르게 된다. 다뉴브 강 남쪽의 주인인 동로마가 동고트 왕국, 반달 왕국 및 사산 왕조와 싸우느라 정신이 없는 사이 이들은 슬금슬금 다뉴브 강을 넘어 로마인들의 땅인 발칸 반도를 습격하였고 이들의 행보는 시간이 가면서 대담해져 원주민인 로마인들을 몰아내고 습격 대상인 발칸 반도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2.1. 슬라브족의 이동: 558년 ~


깔짝대긴 했어도 동로마가 어느 정도 통제 가능한 수준이었던 슬라브인들의 이주는 580년대부터는 통제가 불가능할 정도로 대규모로 변화한다. 슬라브인 중에는 서쪽으로 떠난 슬라브인 외에도 원래 살던 곳인 동유럽에 잔류한 이들도 있었는데 동로마 당국은 제국 영내로 들어 온 슬라브인들을 '스클라비니(Σκλάβηνοι)', 동유럽에 잔재한 슬라브인들을 '안테(Áνται)'라고 불렀는데 이 안테들 역시 동로마 영내로 이주하기 시작한 것이다.
원인은 바로 558년 볼가 강 유역에 거주하던 유목민족인 아바르인들이 서진하여 '안테'가 주로 거주하는 우크라이나 지역을 공격한 것인데 안테는 결국 아바르에게 패배하였으나 아바르인들은 안테를 동맹으로 받아들여 같이 서진하였고 아바르-슬라브 연합군이 580년 경부터 동로마를 공격하기 시작하면서 공격 와중에 안테 역시 발칸 반도에 정착하였다.
슬라브인들의 대규모 침공 당시 이를 통제해야 할 동로마는 흑사병-사산 왕조와의 전쟁-이슬람 제국과의 전쟁이라는 연속 재앙 크리를 맞아아 한동안 나라의 존망이 위태로웠음은 물론[1], 주 관심사도 동쪽 전선에 몰려 있어서, 서쪽 전선에서 저그처럼 내려오는 이들을 막아낼 능력이 없었다. 결국 슬라브인들이 밀려온 지역의 로마인들은 아직까지 동로마의 행정력이 미치는 몇몇 거점들로 도망치거나 들어오기 힘든 험한 산지나 섬에 숨어살거나 아니면 그대로 잔류해 슬라브인들과 통혼하면서 자연스럽게 슬라브인에 동화되었다. 당시 동로마 제국에서는 인두세 문제로 출산율이 낮았지만, 동유럽에서 이주해온 슬라브인들은 척박한 동유럽에서는 사망률이 높았던 이유로 출산율이 매우 높은 편이었고, 이로 인해 슬라브인들이 인구가 급증하면서 결국 현지의 로마인들이 슬라브인들에게 동화되어 버리고 만다.
원주민 중 로마의 영향(라틴어, 그리스어)과 슬라브의 영향 모두를 피하고 그 이전의 원 일리리아어를 유지해온 집단이 바로 알바니아인이다. 그래서 알바니아어가 주변 다른 인도유럽계 언어와 비슷한 점이 거의 없이 어족상으로 독자적인 언어인 이유다.
이렇게 해서 발칸 반도는 8세기 초 정신을 차린 동로마가 회복한 그리스 일대를 제외하면 슬라브인들의 세상이 되었는데 스클라비니는 주로 오늘날의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세르비아 일대에 정착하고 안테는 주로 오늘날의 불가리아 일대에 정착하였다. 그리하여 스클라비니는 크로아티아인, 보스니아인, 세르비아인 등의 조상, 안테는 불가리아인의 조상이 되었다.
[image]
'''9세기 세르비아 공국들. 오른쪽의 회색 영역은 세르비아(Србија) 혹은 라쉬카(Рашка), 왼쪽은 북쪽부터 순서대로 파가니야(Паганија), 자후믈례(Захумље), 트라부니야(Травунија), 두클랴(Дукља)'''.

2.2. 라쉬카


스클라비니, 즉 세르비아인들은 정착한 곳에서 라쉬카(Рашка)라는 국가를 이뤘으며, 아드리아 해안지방에도 세르비아계 공국들이 들어서 크로아티아 남부에 파가니야(Паганија), 보스니아 서부에 자후믈례(Захумље), 헤르체고비나 서부에 트라부니야(Травунија), 몬테네그로에 두클랴(Дукља)가 있었다. 이 다섯국가 중 세르비아인들이 가장 많이 거주하던 곳은 라쉬카였으며,[2] 해안의 세르비아계 공국들에는 로마인들이 남아 세르비아인 지배자들에게 공물을 바쳤다. 이 중 세르비아 역사에서 중요한 국가는 라쉬카와 두클랴다.
라쉬카와 두클랴 중 먼저 구체적인 기록이 등장하는 건 라쉬카인데, 라쉬카는 세르비아인들이 처음 자리를 잡았을 때 세르비아인들의 지도자였던 사람의 후손이 다스리고 있었다. 라쉬카의 군주로서 최초로 언급되는 사람은 비쉐슬라브(Вишеслав)[3]이며, 그 후손인 블라스티미르(Властимир, 재위 830~851) 대에 이르러서야 구체적인 역사가 기록된다. 블라스티미르는 제1차 불가리아 제국의 프레시안 1세(Пресиан I, 재위 836–852)와 3년간 전쟁을 했으며, 트라부니야의 통치자의 아들에게 자신의 딸을 시집보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2.2.1. 기독교화(정교회): 9세기


세르비아의 기독교화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콘스탄티누스 7세(Constantinus VI, 905~959, 재위 913~959)의 기록에 의하면 이미 헤라클리우스 재위기에 발칸 반도로 이주해온 세르비아인들에게 세례를 주었다고 한다. 하지만 본격적인 기독교화는 9세기에나 이루어졌는데, 먼저 두클랴가 로마 교황의 도움으로 기독교로 개종하였고, 라쉬카는 블라스티미르의 아들인 무티미르(Мутимир, 재위 850~891)대에 기독교로 개종했는데, 무티미르는 동·서 양 교회 중 어느 쪽에 설지 고민하다 불가리아의 예에 따라 동쪽의 콘스탄티노플 교회에 귀의하였다. 그의 아들에게는 세르비아 역사상 처음으로 스테판(Стефан)이라는 기독교식 이름이 붙여졌다.

2.2.2. 동로마 제국에 편입, 917


라쉬카는 차슬라브 클로니미로비치(Часлав Клонимировић, 재위 927?-960?)의 재위기에 영토를 대대적으로 확장하는데, 그는 이미 페타르 고이니코비치(Петар Гојниковић, 재위 892~917)에 의해 이미 병합되어있던 파가니야를 제외한 세르비아계 공국들을 모두 통합했다. 하지만 그는 마자르족(헝가리 대공국)과의 전투에서 포로로 잡혀 손발이 묶힌 채로 강물에 내던져져 익사한다. 그가 죽은 후 얼마 안되어 라쉬카는 동로마 제국으로 편입되었다.

2.3. 두클랴



2.3.1. 불가리아의 속국에서 왕국으로, 1077


세르비아의 주도권을 쥐고 있던 라쉬카가 동로마 제국에 정복당해 테마로 편입되자, 세르비아의 주도권은 두클랴가 쥐게 된다. 두클랴는 요반 블라디미르(Јован Владимир, 재위 1000?~1016) 재위기에만 해도 불가리아의 속국이었지만, 스테판 보이슬라브(Стефан Војислав, 재위 1018~1043) 때는 동로마 제국을 격파하고 영토를 자후믈례와 트라부니야, 포드고리아까지 확장하고, 미하일로 보이슬라블례비치(Михаило Војислављевић, 재위 1050~1081)의 재위기였던 1077년에는 교황에게 왕으로 인정받아 두클랴를 공국에서 왕국으로 승격시켰다. 두클랴의 왕국승격은 후대의 네마니치 왕가의 군주들이 세르비아가 예전부터 왕국이었음을 주장할 때 그것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
[image]
'''스테판 보이슬라브 재위기의 두클랴'''.

2.3.2. 콘스탄틴 보딘의 세르비아계 공국 통합후, 몰락(1081 ~ 1099)


두클랴는 콘스탄틴 보딘(Константин Бодин, 재위 1081~1099)의 재위 하에서 세르비아계 공국들을 모두 통합하지만, 그의 사후 두클랴는 권력다툼으로 몰락한다.

2.4. 부칸에 의한 라쉬카의 부활(부카노비치 왕가)(1091 ~ 1112) → 세르비아의 시작


두클랴가 몰락한 후 보딘에 의해 라쉬카의 영주로 임명되었던 부칸(Вукан, 재위 1091~1112)에 의해 다시 라쉬카가 부상하게 되는데, 부칸을 시조로 하는 이 왕가를 부카노비치 왕가(Вукановићи)라고 한다. 이 왕가의 치세를 기점으로 라쉬카라는 명칭보다 세르비아라는 명칭이 많이 쓰이기 시작한다. 부칸은 두클랴에 영향력을 확대하고, 코소보로의 진출을 시도하는 등, 세르비아의 영토확장을 꾀했다.

2.4.1. 우로쉬 1세(1112 ~ 1145): 동로마 견재


그의 조카인 우로쉬 1세(Урош I, 재위 1112~1145)때에는 헝가리 왕국과 인척관계에 기반한 동맹을 맺고 동로마 제국을 견제하기도 했다. 부카노비치 왕가는 데사 부카노비치(Деса Вукановић, 1162~1165)가 동로마에 의해 세르비아의 군주 자리에서 폐위되었고, 동로마 제국은 그 자리에 티호미르 자비도비치(Тихомир Завидовић)를 임명했다. 티호미르는 1168년 라쉬카 동부를 다스리고 있던 자신의 동생이자 네마니치 왕가(Немањићи)의 시조인 스테판 네마냐(Стефан Немања, 재위 1166~1196)에 의해 살해당한다.

2.5. 스테판 네마냐: 실질적인 독립 → 세르비아 왕국(1217 ~ 1346)


세르비아는 스테판 네마냐 재위기에 동로마에게서 실질적으로 독립을 쟁취했다. 네마냐의 뒤를 이은 스테판 네마니치(Стефан Немањић, 재위 1196~1228)대에는 1217년에는 교황에게서 받은 왕관으로 대관식을 치름으로써 공국에서 왕국으로 승격되고, 2년뒤인 1219년에는 네마니치의 동생이었던 성 사바(Свети Сава, 1174~1236)에 의해 세르비아 독립교회가 설립된다.
이후, 네마니치 왕조 휘하에서 번영하여 이어지는 스테판 두샨 대의 세르비아 제국의 초석을 놓는다. 라틴 제국 성립(1204) 이후 패권자가 사라진 남부 발칸에서 세력을 대폭 넓히며 제2차 불가리아 제국과 에페이로스 공국을 격파했고, 1261년에 복구된 동로마 제국과도 싸워 1300년경이 되면 현 마케도니아알바니아 지역 대부분을 점령한다.

2.6. 세르비아 제국(1346 ~ 1371)


그러다가 14세기 중반, 스테판 두샨 대왕의 통치로 최전성기를 맞이한다. 두샨 대왕은 스스로 세르비아 제국을 선포하며 차르를 칭해 동로마 제국과 맞먹는 황제국임을 선언할 정도였다. 세르비아의 민족주의자들이 가장 그리워하는 시대가 바로 이 시대였지만, 이 영광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스테판 두샨이 1355년에 급사하면서 상황은 돌변하기 시작하는데, 우선 그의 치세에 세르비아는 영토를 급속도로 확장하고 제국을 칭하게 되었지만 황제가 급서하는 바람에 제국의 내정이 안정되지를 못했다. 이는 고대 마케도니아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죽은 뒤 마케도니아 제국이 무슨 꼴을 당했는가를 떠올리면 이해하기 쉽다. 그나마 스테판 두샨에게는 당시 20세였던 아들 스테판 우로시 5세가 있었으나, 성인이 되었는데도 모후와 궁정 관료들에게 매달리는 등 통치자로서는 영 아니었던 것이 치명타
실제로 스테판 두샨('두샨' 은 별칭이고, 원래 이름은 스테판 우로시 4세다)은 '강인한 왕(the Mighty)' 이라는 별명을 받은 한편, 스테판 우로시 5세가 받은 별명은 '약한 왕(the Week)'이었다. 결국 스테판 우로시 5세 시대에 제국은 사분오열되기 시작했고, 1371년에 그가 후계자 없이 죽자 세르비아는 그대로 전국시대로 돌입하였다.

2.7. 세르비아 공국(1372 ~ 1459): 혼란기와 오스만 제국의 침략


그후 가장 강력한 지방 귀족이던 라자르 흐레벨랴노비치(Lazar Hrebeljanović)가 등장하여 세르비아 공국을 창건. 세르비아의 재통합을 내걸고 세력을 넓혔지만, 하필이면 이 때 발칸 반도를 동쪽에서부터 먹어치우고 있던 나라가 바로 오스만 제국. 이에 맞서 라자르는 두 번의 전투에서 승리하기는 했지만 1389년 코소보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에게 패배하고, 자기 자신도 전사하고 만다.[4]
그리고 라자르 흐레벨랴노비치의 아들로 뒤를 이은 공작 스테판 라자레비치(Stefan Lazarević)를 비롯한 세르비아의 지방 귀족들은 오스만 제국의 힘을 인정하고 신하국이 되었지만, 스테판은 이후 세르비아의 귀족들을 대표하는 맹주로서 상황을 보아 가며 헝가리와 오스만 제국 사이의 사이를 교대로 오가며 나름대로 경제, 문화적인 부흥을 이룩했다. 특히 헝가리는 오스만 제국과 자국 사이의 완충지대로서 세르비아를 생각하고 있었기에 신하국이 되는 조건으로 영토도 일부 할양해 주고 경제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탓에, 문서상으로는 신하국이었지만 사실상 동맹국에 가까운 관계였다.
이때 헝가리가 세르비아에게 내어준 도시 가운데 하나가 바로 오늘날 세르비아의 수도인 베오그라드. 당시 베오그라드는 헝가리 남부에서 가장 중요한 요새 가운데 하나로, 스테판은 이 도시를 받자 세르비아의 수도로 정했다. 다만 그가 사망하자 다시 헝가리에게 돌아갔으며, 오스만 제국의 쉴레이만 1세가 1521년에 정복하게 된다.
하지만 스테판 라자레비치의 뒤를 이은 친척 주라지 브란코비치(Đurađ Branković)가 1456년에 죽고 그 아들들 사이에 계승분쟁이 일어나자, 그러지 않아도 헝가리와 오스만 제국이라는 두 강국의 사이를 오가며 줄타기를 하고 있던 세르비아 공국은 급속도로 몰락의 길을 걷는다. 심지어 세르비아 제국에 속했다가 독립한 나라인 보스니아 왕이 계승분쟁에 끼어들더니, 주군으로 삼고 있던 헝가리에게 '제 아들을 세르비아 공작으로 만들게요. 그럼 세르비아랑 보스니아가 합쳐져서, 이교도에 맞서 더 강력한 완충국이 될 거임. OK?' 라고 제안까지 했고. 헝가리의 마차시 1세가 그걸 기꺼이 받아들이기까지.
결국 1459년에 이르러 세르비아는 오스만 제국에 의해 완전히 멸망하고[5], 이후 4백년 가까이 지배를 받게 된다.

3. 1459 ~ 1817, 오스만 제국의 지배


오스만 제국 지배기 정교회를 믿는 세르비아인들은 룸 밀레트에 소속되었다. 오스만 지배기 동안 정교회가 아닌 보고밀파 보스니아 교회에 속해 있던 이웃 보슈냐크인들이 17세기 이슬람으로 개종하였다. 세르비아인들은 이슬람으로 개종하지 않고 정교회 신앙을 유지했으나 이들의 생활 풍속에도 알레비파 수피 이슬람으로부터 많은 터부가 유입되었다. 흥미롭게도 오늘날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은 소콜루 메흐메트 파샤를 보슈냐크인이 아닌 세르비아인 위인으로 가르친다. 다만 굳이 이슬람으로 개종하지 않은 경우라도 세르비아 지주 계층은 오스만 제국 군대 등에서 근무하는 경우가 많았다.
세르비아인 민족주의자들은 이 시기를 암흑 시대로 묘사하며 심지어 세르비아 관광청에서는 “오스만 제국에서는 5백년 가까이 세르비아를 식민 지배하면서 세르비아 엘리트 계층을 뿌리뽑고, 이슬람 국가로서 세르비아인 기독교도들을 농노로 다루고 모욕하며 착취했다.”라는 다소 격앙된 말투로 이 시기를 설명한다.
세르비아 측 주장이 엄밀히 말하면 틀린 것도 아니다. 오스만 제국에서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지배를 받으면서 세르비아 개발이 가속화된 점도 있다. 다만 오스만 제국은 굳이 기독교인만 탄압한 건 아니고 아랍인들도 견제 차원에서 종종 잔혹하게 탄압했으며, 오스만 제국은 카자르 왕조처럼 막장 수준으로 농민들을 굶기고 억압하던 나라는 아니었다. 오늘날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이 과장하는 것과는 다르게 세르비아를 여행했던 서유럽인들은 보슈냐크인알바니아인들이 세르비아 정교도들하고 대체적으로 친했다는 기록을 남겼던 바 있다. 한마디로 세르비아의 오스만 제국 지배 시기에 대한 부정과 청산 노력은 세르비아판 탈아입구 사관이라 볼 수 있다.

4. 1817 ~ 1882, 세르비아 공국의 부활


19세기부터 세르비아의 민족운동이 격렬해지면서 1817년 세르비아 공으로서 형식적인 오스만 제국의 속국으로서 자치권을 인정받았고, 1878년 '제6차 러시아-튀르크 전쟁'에서 러시아가 승리하면서 완전한 독립국이 되었다.

5. 1882 ~ 1918, 세르비아 왕국


독립 이후 마케도니아를 둘러싸고 주변국과 갈등이 지속되어 1878년 완전 독립 이후로도 두차례나 발칸 전쟁을 벌였으며 완전 독립과 함께 보스니아를 점령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마찰을 빚으면서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연출한다. 이 과정에서 친 오스트리아 성향이던 세르비아 2대 왕인 알렉산다르 오브레노비치가 비밀결사인 '검은 손'에 의해 1903년 암살되고 세르비아 민족주의 성향의 카라조르제비치 가문에게 왕권이 넘어간다.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를 방문한 오스트리아-헝가리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부부가 '검은 손'의 가브릴로 프린치프에게 암살되면서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세르비아 왕국'에 선전포고하며 세르비아 침공이 발발 그렇게 제1차 세계 대전을 불러왔다.세르비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침략에 끈질기게 저항했지만, 1915년 불가리아 왕국이 동맹국 측에 참전했다. 결국 세르비아는 1915년 말 양국에 의해 점령되었다.


6. 유고슬라비아 왕국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자 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몬테네그로 등을 강제 합병하여 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세르비아 왕국이라는 긴 이름의 국가가 되었으나 1926년부터 유고슬라비아 왕국으로 변경되었다. 그러나 워낙 단일국가로 묶여본 적이 없는 민족 집단들을 강제 합병해 억지로 묶은 나라들이라 내부적으로 민족, 지역간 분란이 심화되었고[6] 권력을 세르비아인이 독식하더니 나중에는 아예 국왕 알렉산다르 1세에 의해 의회가 뒤집히고 전제 왕정이 돼버리면서 분란은 커졌다. 불만에 차있던 크로아티아인들은 이탈리아, 마케도니아인들과 불가리아의 후원을 받으며 테러를 일으키기 시작했고 1934년에는 알렉산다르 1세가 테러에 의해 사망하고 11세의 페타르 2세가 즉위하는 등 혼란상이 이어졌고 결국 제2차 세계 대전이 터지고 말았다.

7. 제2차 세계 대전


그리스를 쳤다가 피박을 쓴 베니토 무솔리니를 돕기 위해 아돌프 히틀러가 발칸 반도에 관심을 가지고 있을 무렵, 섭정 파블레 왕자[7]는 페타르 2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941년 3월 25일 추축국삼국 동맹 조약 가입을 선언했다.[8] 이에 페타르 2세는 군부의 친영파를 결집하여 협정 조인 이틀만인 27일 쿠데타를 일으키고 친정을 시작했는데, 독일이 싫다기보다는 파블레의 전횡에 불만이 있었던 만큼 추축국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는 하지 않았다. 그러나 친영파의 집권에 당황&분노한 독일[9]은 종전의 '마리타 작전'을 수정하여 알바니아 전선을 지원할게 아니라 유고슬라비아를 그대로 돌파해 그리스 국경까지 닿을 생각을 품게 되었고, 4월 6일 '''선전포고도 없이''' 베오그라드를 잿더미로 만들며 침공을 시작했다. 일단 전쟁이 터지고 나자 크로아티아인들은 상전인 세르비아인들의 뒷통수를 치고[10] 독일군에 가담했으며, 불가침 조약을 맺었던 헝가리군은 간단히 조약을 파기하고 남진해왔다. 동시에 불가리아에서 건너온 독일군과 불가리아군이 그리스를 침공하면서 유고슬라비아는 완전히 포위되었고, 유고슬라비아 정부는 간신히 탈출해 망명정부를 세웠고 10일만에 나라를 내주었다. 지금의 세르비아 영토에는 독일의 군정청세르비아 군정청과 군정청 내에 자치 정부로 잠깐동안 인민위원 정부가 들어섰다가 세르비아 구국정부로 바뀐다. 문제는 그 다음. 유고 각지에서 반독 빨치산들이 들고 일어났다. 그런데 이 빨치산들이 왕당파, 공화파, 공산당 등 아주 가지가지였고, 무엇보다 '''서로 잡아먹으려 들었다'''.
특히 유고에서 가장 세력이 컸던 게릴라 조직 '체트니치(Четници)'를 이끌던 드라자 미하일로비치는 연합군의 지원까지 받았지만, 반공 왕당파로 언젠가 연합군의 탱크가 베를린 의사당 정문을 까부수고 들어가 유고 왕정이 부활할 날만 기다리며 독일군을 공격하기 보다는 당시 세르비아인 50만 가량을 잔혹하게 학살한 크로아티아의 우스타샤 정권(Ustaša)과 이에 맞서 싸우던 빨치산 공격에 열을 올렸으며 20만 가량의 크로아티아인과 무슬림을 학살했다. 체트니치의 공격에 질린 티토의 호소와 킴 필비 등 정보 기관에 암약하고 있던 간첩들의 공작으로 인해 1944년 연합군은 지원을 끊어버리고 망명 유고슬라비아 정부도 체트니치와의 관계를 끊어버렸다. 실제로 체트니치 조직 중에서 동료들의 뒷통수를 치고 독일군에 포섭된 경우가 상당히 많았던 것 또한 주요했다.
어쨌든 체트니치 대신 선택받은 티토의 빨치산이 전후 주도권을 쥐고 전후에는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으로 재탄생했다. 이 때 세르비아 사회주의 공화국이 유고 연방 내 구성체로 성립되면서 현재의 세르비아 국경(코소보 제외)이 대략 형성된다. 유고 연방은 일단 공산주의를 선택하고 있었지만, 소련의 간섭을 배제하고 다른 제3세계 국가들처럼 중립, 독자노선을 걸었으며 이로 인해 소련과 마찰이 심했다.

8. 티토 치하


티토 정부는 빨치산 시대의 경험을 토대로 소련이 침략해올 경우를 대비하여 범 국민적인 방어체계를 만들었다. 이 방어체계는 청소년 이상의 모든 국민이 각각의 게릴라 부대에 소속되며, 국민 개개인은 독자적인 저항권을 지니고 있어서 '''정부가 함락되어 항복 명령을 내린다고 해도 정부의 명령을 무시하고''' 침략자에 항전을 계속할 권리를 부여받고 있었다. 물론 '''전국민이 정규군'''으로 처리되어 제네바 협약까지 적용된다. 당연히 각지에 무기를 잔뜩 챙겨두고 훈련도 열심히 했다. '''그 덕분에 티토의 죽음 이후 내전이 벌어졌을 때, 아주 열심히 싸울 수 있었다.'''
[image]
본디 티토는 세르비아인이 아닌 크로아티아인이었고,[11] 거기다 빨치산 활동을 한 전적이 있었으므로,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지고 지도력과 통제력을 유지하며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티토 사후 통제력을 상실한 유고 연방은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등의 민족주의 선동을 막지 못하고 붕괴, 세르비아계인 몬테네그로 사회주의 공화국을 제외한 전 연방 구성국들이 독립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문제는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에 퍼져 있던 세르비아인들이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로부터 재독립을 하려고 들었던 것으로, 이를 진압하려는 신생 크로아티아/보스니아와 세르비아인들을 후원하는 베오그라드 정권 사이의 내전이 발발하였다. 사태가 심각해지면서 인종청소와 포로 학살, 그리고 두브로브니크 포격으로 인해 대두된 동정적 감정이 서구의 개입을 불러왔으며, 베오그라드 정권은 크로아티아 동부와 중부, 보스니아 등지의 세르비아인들을 모두 내팽개치고[12] 세르비아-몬테네그로(신 유고연방)로 국가를 개편하였다.

9. 유고 내전


그러나, 권좌에 오른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대통령은 대 세르비아주의를 포기하지 않고, 정적 살해와 코소보 전쟁이 발생하면서 1999년 신 유고연방은 NATO군의 공습을 받기 시작했다. 결국 신 유고연방군이 코소보에서 철수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으나 이듬해 세르비아 내 반정부 시위대가 세르비아 국영 RTS[13]방송국을 점거하는 일명 '''불도저 혁명'''이 일어나고[14] 전범으로 기소되면서 정권까지 교체되었다. 2006년 5월 21일에는 몬테네그로가 분리독립투표를 의결함으로서 신 유고연방이 해체되어,[15] 세르비아는 '''내륙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16] 이런 가운데 2006년 3월 밀로셰비치는 교도소 안에서 죽었는데 죽기 전 몬테네그로마저도 독립한다는 정보를 듣곤 죽기 얼마전까지 "세계가 내 조국을 조각내는구나..." 라고 중얼거렸다고 한다. 하지만 유고 내 구성국들의 연쇄독립에는 세르비아 민족주의를 자극하고 비인도적인 행위를 적극적으로 행하며 각 국가들의 증오와 대립을 초래한 밀로셰비치의 책임도 큰 편이다. 코소보를 비롯하여 어느 정도 타협할 수도 있던 사안에[17] 제노사이드를 저질러 잃어버린 게 한두개가 아니다. [18]

10. 코소보 전쟁 이후


세르비아의 정치적 혼란과 부정부패,경제난이 극심해져 2003년엔 세르비아 마피아가 현직 총리 조란 진지치를 암살할 정도로 혼란이 심했다.
한편 몬테네그로가 독립하자 알바니아계 주민들이 다수를 차지하던 '''코소보''' 역시 세르비아로부터 강력하게 독립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오랜 유고 연방 국가들의 분열로 위축되다시피한 세르비아는 더 이상의 분리 독립은 용납될 수 없다며 자신들의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코소보라도 부여잡고자 코소보의 독립을 강력하게 반대하였고 코소보의 독립을 막고자 각종 압력과 회유책을 동원하며 코소보를 압박했다.[19]
이에 마르티 아티사리 핀란드 대통령과 유럽연합, 국제연합 등이 코소보 지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여러 평화 협상과 세르비아와 코소보 간 화해를 중재, 주선해보기도 했지만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코소보의 지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협상이 실패를 거듭하자 결국 2008년 2월 코소보는 일방적으로 세르비아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
이에 세르비아는 코소보의 이러한 일방적 독립 선언을 무효라며 코소보를 정식 주권 국가로 승인하지 않았고 코소보가 독립하자 세르비아 전역에서 코소보의 일방적인 독립을 규탄하는 독립 반대 시위가 벌어졌으나[20] 독립한 즉시 미국영국, 프랑스 등 서방 국가들이 '''코소보'''를 정식 주권 국가로 승인해버렸다. 우리나라 또한 비록 미수교국이긴 하나, 코소보의 독립을 인정해 주었다. 그러나 수단, 아르헨티나, 중국, 스페인, 인도네시아, 슬로바키아, 러시아, 그리스, 인도, 이라크, 모로코 등 대다수의 국가들이 코소보를 정식 독립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있어, 코소보는 현재 그 지위가 상당히 애매한 미승인 국가로 남아있는 상태다.
역사적으로 침략과 전쟁으로 수없이 많은 피를 흘렸고 현재에도 전범의 처리문제와 지속되는 민족 분쟁, 종교 분쟁으로[21] 한동안 EU 가입자격조차 얻지 못하고 있었으며. UN 가입 역시 유고슬라비아 내전이 한창이던 1992년 UN 안전보장이사국의 유고 제재 결의에 따라 회원국 자격을 박탈당했으나 2000년 밀로셰비치 대통령이 물러나면서 신 유고 연방의 국호를 달고 다시 가입했다. 반면 몬테네그로는 독립 이후 EU 가입의 청신호가 켜진 상태. 그러나 이런 국내외적 악조건 상황속에서도 세르비아는 현실적으로 EU 회원국 가입을 희망하고 있으며 2009년 12월 세르비아는 EU에 가입 신청서를 제출하는데 성공했다. 더욱이 루마니아, 헝가리, 불가리아, 크로아티아, 마케도니아, 몬테네그로 등 세르비아 주변의 이웃한 나라들이 EU에 가입했거나 EU 가입을 추구하면서 세르비아 내부에서도 지금 당장이라도 EU에 가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날로 커져가고 있는 실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세르비아의 EU 가입은 별다른 성과를 내질 못하고 있다. 허약한 자국의 경제력도 그렇고 EU의 기준에 맞게 고쳐져야 할 법률이나 제도 등이 상당부분 개선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겨우 얻어진 건 EU 회원 후보국 지위 뿐. 일부에서는 아예 헝가리, 폴란드, 체코, 슬로베니아처럼 국민투표를 통해 EU 가입을 이뤄냈듯이 세르비아도 이들 나라처럼 EU 가입 문제를 국민투표로 해결지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헌데 실제 국민투표를 해서 세르비아 국민 과반수가 EU 가입에 찬성한다 해도 EU에서 회원국 가입 승인해줄지는 글쎄...[22]
2019년 3월 17일에 뉴욕타임스는 세르비아에서 언론 자유와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를 요구하는 시위가 발생했다고 보도했다.#
2020년 6월 21일에 세르비아는 코로나19가 퍼진 상황에서 총선이 진행됐다.# 총선에서 알렉산다르 부치치 대통령이 이끄는 여당이 승리했다.#
2020년 6월 22일에 미로슬라프 라이차크 EU 특사는 알렉산다르 부치치 대통령을 면담한 뒤 가진 기자회견에서 세르비아와 코소보 평화협상을 유럽 연합이 중재한다고 밝혔다.#
1년 8개월만에 세르비아와 코소보는 EU의 중재로 평화협상을 시작했다.#

11. 역대 국가수반



11.1. 역대 국왕


출처 : https://en.wikipedia.org/wiki/Prince_of_Serbia
대수
왕조
이름
재위
'''1'''
오브레노비치 왕가
밀로쉬 오브레노비치
1817년 ~ 1839년
'''2'''
오브레노비치 왕가
밀란 오브레노비치
1839년 ~ 1839년
'''3'''
오브레노비치 왕가
미하일로 오브레노비치
1839년 ~ 1842년
'''4'''
카라조르제비치 왕가
알렉산다르 카라조르제비치
1842년 ~ 1858년
'''5'''
오브레노비치 왕가
밀로쉬 오브레노비치
1858년 ~ 1860년(복위)
'''6'''
오브레노비치 왕가
미하일로 오브레노비치
1860년 ~ 1868년(복위)
'''7'''
오브레노비치 왕가
밀란 1세
1868년 ~ 1889년
'''8'''
오브레노비치 왕가
알렉산다르 오브레노비치
1889년 ~ 1903년
'''9'''
카라조르제비치 왕가
페타르 1세
1903년 ~ 1918년
유고슬라비아 왕국에 병합되던 시절
대수
왕조
이름
재위
'''9'''
카라조르제비치 왕가
페타르 1세
1918년 ~ 1921년
'''10'''
카라조르제비치 왕가
알렉산다르 1세
1921년 ~ 1934년
'''11'''
카라조르제비치 왕가
페타르 2세
1934년 ~ 1945년
[1] 식자층 및 문자 기록이 땅을 대거 뺏기고 연이어 페르시아, 이슬람과의 사투를 벌였던 7,8세기에 확 줄어든다.[2] 그래서 보통 세르비아를 지칭할 때는 라쉬카를 지칭했다.[3] 이름만 언급되어있다. 그를 이었다는 라도슬라브(Радослав), 프로시고이(Просигој)도 마찬가지.[4] 사실 코소보 전투 자체는 말이 패배이지 무승부에 가깝다. 당시 오스만의 술탄이었던 무라트 1세도 전사했고, 오스만 제국은 코소보에서 입은 피해를 복구하기 위해 아나톨리아 반도에 주둔하고 있던 병사들까지 일부 빼내 와야 했을 정도. 하지만 코소보 전투 한번에 모든 것을 걸고 싸웠던 세르비아에게는 '다른 곳에 주둔한 병사들' 따위가 있을 리 없었고, 그대로 굴복하고 만다.[5] 당시는 보스니아 왕의 생각대로 보스니아 왕자가 세르비아 공작을 겸하고 있었는데, 세르비아인들은 이미 나라는 망했어요라고 인식하고 있었던데다 오스만 제국은 종교적으로는 관대했던 반면 보스니아와 헝가리는 세르비아 정교회를 믿는 세르비아인들을 가톨릭으로 개종시키려 하고 있었기에 저항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6] 사실 세르비아, (북)마케도니아, 크로아티아, 몬테네그로, 보스니아 등 구 유고 출신 국가들은 민족 혈통상으로는 슬라브족이 맞다. 허나 지역마다 문화와 종교가 다른 지라 이질감이 심하였다. 애초에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모든 지역이 언어적, 혈통적으로 동일한 민족구성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는데 슬로베니아 지역이나 마케도니아 지역은 남슬라브 계통의 민족이긴 하지만 언어 자체가 달랐고 헝가리인이나 알바니아인, 터키인 같이 혈통적으로도 완전히 다른 민족들이 소수 거주하고 있었다.[7] 이전 버전에선 친독파라고 서술 되었는데 2차대전의 마이너 리그에선 친영파지만 사방이 추축국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추축국에 가입했다고 한다.[8] 독일의 히틀러 정권이 1930년대부터 꾸준히 유고슬라비아에 대해서 특혜적인 대우를 해준데다가, 말이 추축국 가입이지 실상은 '''독일의 전쟁에 가담하지 않아도 된다는 특혜적이고 실질적인 중립 보장을 얻어냈었다.'''[9] 사실 그동안 엄청나게 유고슬라비아에 투자했는데도 뺨을 맞았으니 열받지 않으면 그게 이상한 법. 그것도 쿠데타가 성공했다고 베오그라드의 시민들이 독일의 국기와 외교관을 모독하기까지 했으니, 속좁은 히틀러가 뭔 생각을 했을지는 보지 않아도...[10] 크로아티아 온건파 세력이 섭정과 줄다리기를 한 끝에 1940년에 광범위한 자치권을 얻어내 '크로아티아 바노비나'를 설립했지만, 이탈리아의 입김을 받은 강경 파시스트 세력들이 반란을 일으킨 것.[11] 정확하게는 크로아티아계 아버지와 슬로베니아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이다.[12] 밀로셰비치가 생각이 없어서 내팽개친게 아니다. 크라이나-세르비아 공화국스릅스카 공화국은 세르비아의 '''미수복지구'''일 뿐이지 국가가 아니라는 입장을 세르비아 본국이 고수했기 때문이다.[13] Radio-televizija Srbije/Радио-телевизија Србије[14] 많은 사람들이 모르는 사실이지만 이 당시 세르비아인들이 모두 밀로셰비치 정권에 호의적이기만 했던건 아니었고 대세르비아 주의를 내세운 결과가 세르비아 이미지의 추락과 경제악화라는 결과로 이어지면서 밀로셰비치에 대한 지지가 급속히 약화되었다.[15] 사실 세르비아는 몬테네그로가 분리독립을 추진하려고 하자 국명을 유고슬라비아에서 세르비아-몬테네그로로 바꾸고 국방, 외교를 제외한 폭넓은 자치권을 몬테네그로에게 제시하는 등 몬테네그로를 설득시키려고 했으나 별 소용은 없었다.[16] 때문에 세르비아는 불가리아, 루마니아 등 흑해를 접한 다른 동유럽 이웃국가로부터 항구도시들을 아예 빌려 해상무역을 하고 있다.[17] 사실 코소보 전쟁의 경우 코소보의 알바니아계 주민들에게 부여된 자치권을 밀로셰비치가 박탈하면서 코소보 내 알바니아계 주민들의 분노가 확산된 면도 없지 않았다.[18] 보스니아 내전은 이 중 가장 악랄한 악행이라고 볼 수 있다.[19] 당시 세르비아는 코소보의 분리 독립을 막기 위해 코소보 측이 독립을 포기하는 대신 자치 허용과 더불어 세르비아 중앙정부의 국회 의석 절반을 코소보의 알바니아계 출신들에게 양분하겠다는 제안도 내걸었으나 코소보의 알바니아계가 독립하겠다는 입장을 고집하는 바람에 실패했다.[20] 말이 좋아 반대 시위였지, 사실상 폭동이었다. 코소보 독립을 승인한 미국 대사관을 공격했으며, 미국 국기를 불태우기까지 했다. 관련 기사[21] 그런데 이런 민족 분쟁들이나 종교 분쟁들은 세르비아 말고도 다른 동유럽 나라들에서도 다 대부분 겪었다. 세르비아의 옆나라이자 한국에서는 요구르트와 장수국가로 유명한 불가리아도 과거 터키계와 이슬람교를 믿는 자국 내 슬라브인들을 민족,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탄압하거나 군경을 동원해 유혈진압한 전례가 있었고 헝가리도 루마니아와 슬로바키아에 살고 있는 헝가리인 문제로 루마니아, 슬로바키아와 갈등을 빚었으며 구소련권 국가인 몰도바우크라이나도 1991년 소련 붕괴 이후 민족, 지역간 대립과 갈등이 전쟁과 지역감정으로 폭발한 적이 있었다.[22] 사실 세르비아는 폴란드와 헝가리, 체코와는 사정이 다르다. 일단 이 나라들의 경우 최소 EU 가입을 위한 EU측과 협상이 완료된 상태에서 EU 가입을 묻는 국민투표를 실시하였고 덕분에 EU 가입이 수월했다. 허나 세르비아의 경우 뒤늦게 EU에 가입신청서를 냈고 가입 협상도 겨우 시작한 상태다. 이런 상태에서 세르비아가 자국민들을 상대로 EU 가입을 묻는 국민투표를 실시하여 설사 찬성표가 많이 나온다고 해도 EU에서 회원국 가입을 받아줄지는 의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