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A 타이거즈/관련 기록
1. 역대 구단주
2. 역대 사장(대표이사)
1982년, 팀이 창단되고 박건배 구단주가 사장까지 겸임을 했으나 이후 강남형 사장에게 사장직을 물려주며 구단주로 한 발 물러선다. 강남형 사장 후임으로 노주관 사장이 들어왔는데, 일을 잘 한다는 평가를 받았으나, 1995 시즌이 끝난 후 선동열의 일본 이적 협상을 문제삼아 경질된다.
노주관 사장 후임으로 들어 온 마의웅 사장도 무난무난하다는 평가였으며, 정기주 사장은 해태 원년부터 단장 및 팀 내 여러 보직을 거치며 고생했으나 1997년 외환 위기 이후 무너져 가는 팀을 어떻게 손 쓸 도리도 없이 팀이 무너져 가야하는 걸 지켜봐야했고, 2001 시즌 중반 기아자동차의 해태 인수가 확정되자 인수 되기 며칠 전에 자진사임한다.
2018년 이전까지는 여타 현대자동차그룹 스포츠단과 비슷하게 기아자동차 국내 판매부문 사장이 KIA 타이거즈의 사장도 겸했다. 같은 산하 스포츠 구단인 전북 현대 모터스도 현대자동차 국내 판매부문 사장이 구단 대표이사도 겸하고, 나머지 현대자동차그룹 산하의 구단은 계열사 CEO가 구단주를 맡고 있다.
하지만 회사 업무만으로도 업무량이 막중한 회사 대표이사 입장에서 회사 산하 스포츠구단의 운영에 간섭할 여력이 되지 않는다는 문제가 있다. 이 때문에 프로야구 제10구단 관련 논란과 관련해서 이사회에 2번 연속으로 KIA 사장이 불참한 것을 놓고 억측기사가 나오기도 했는데, 사실 KBO 윈터미팅 등 오래전부터 KBO 이사회 관련해서는 한화 이글스 사장에게 결정권을 위임한 상태였다. 따라서 한화 이글스 구단의 의견 = KIA 타이거즈의 의견인 셈.
그러다가 현대자동차그룹 스포츠단의 효율성 제고를 위해 전임 구단 대표이사를 두는 것으로 변경되어 KIA 구단의 의견을 적극 반영할 것으로 보인다. 즉 전임 대표이사로서는 초대. 그 첫 타자는 바로 3대 단장이었던 허영택. 그리고 공석이 된 단장에 조계현 전 수석코치를 내정했다.
하지만 임명된 지 1년 정도가 지난 2019년 3월 말, 허영택이 물러나고 신임 대표이사인 이화원이 임명되었다.
3. 역대 단장
초대 단장은 TBC 아나운서이자 아나운서계의 대부 박종세가 맡았다. 그러나 명예직에 가까운 단장이었으며, 1982년 9월부터는 새로운 단장으로 정기주 단장이 맡게 된다. 그러나 박종세 단장은 해임되지 않으며 팀에 단장이 2명이 있는 신기한 모양새가 됐다.
정기주 단장은 해태의 초석을 다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게, “박건배 구단주가 당신을 원한다”며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김응용에게 팀을 맡아줄 것을 부탁했고, 김응용이 승낙하면서 1983 시즌부터 전설의 김응용 체제의 해태가 시작되었다.
정기주 단장 후임 자리는 노주관 단장이 맡게 되었고, 4년 간의 단장직을 거쳐 1992 시즌부터 이상국 단장이 맡게 된다. 이상국 단장은 1975년 해태제과에 입사하여 바로 판매왕에 오를 만큼 영업 수완이 뛰어난 사람이었으며, 창단과 함께 야구단으로 자리를 옮겼고 여러 요직을 거쳐 단장까지 올랐다. 프로야구 최초 억대 연봉을 시작한 선동열의 1억 5천만 원의 연봉도 그의 작품. 그러나 1995 시즌 종료 후, 선동열 일본 진출 관련 협상 문제로 모기업과 마찰 후 노주관 사장과 함께 경질되었다. 경질된 후, 2000년부터 6년 간 KBO에서 사무총장을 지낼 정도로 팀을 벗어나서도 여러 곳에서 신임이 두터웠던 사람이다. 타이거즈 OB 모임에서도 여러 선수단과 연락할 정도로 사이가 두터우며, 선동열은 일본에 보내준 이상국 단장에게 항상 감사한다는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정재공 단장은 부산 KIA 엔터프라이즈 시절의 경험을 살려 적극적으로 프런트가 현장에 개입하도록 하는 스타일이었다. 이 시기에 모기업으로부터 재정 지원을 많이 얻어내고 FA 시장에도 적극적으로 뛰어드는 등 구단 운영에 대한 열정만은 진짜라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지나친 현장 개입으로 김성한 전 감독이 알력다툼 끝에 옷을 벗는 일이 있었고 FA로 영입한 선수들이 먹튀가 되면서 평가가 급락하기 시작, 2007년에 팬들과의 충돌과 사상 최악의 성적인 팀 창단이래 최초 꼴찌를 하게 되며 퇴진 압박을 받으면서 경질되고 말았다.
김조호 단장의 경우, 정재공과는 달리 현장 개입을 최대한 자제하고 내부 행정에만 신경쓰는 스타일이라 비난의 목소리가 크지는 않은 편이다. FA 영입에 소극적인 편이지만, 현장에서 꼭 필요로 한다면 과감히 영입하고 있다. 다만 2013년 전라북도 연고지 문제[10] 로 많은 욕을 먹기도 했다. 2013년 시즌 종료 후 단장직에서 물러나면서 상근 자문직을 맡게 되었다.
기아자동차 슬로바키아 공장 관리직에 있었다가 단장으로 들어온 허영택 기아자동차 상무는 2005년 10월부터 2007년 1월까지 타이거즈 부단장으로 있었던 임직원. 선동열 감독의 2014년 시즌 이후 재신임 관련 인터뷰에서 무책임한 발언으로 KIA 팬들의 미움을 사고 있어서 부단장 시절 정재공 단장에게 안 좋은 것을 배웠다는 반응이 거셌다. 게다가 정재공 단장 밑에서 배웠다면 적극적인 트레이드 시도나 FA 영입을 시도할 만 한데, 그런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김조호 단장처럼 조용히 있다가 과감히 한 번씩 데려오는 스타일도 아니라 아무것도 안하는 이미지로 비춰지고 있어서 팬들의 불만이 많았었다. 하지만 현실은 모기업 지원 하에 인프라 개선과 육성시설 강화에 힘을 쓰면서 팀 체질 개선에 힘을 쓰고 구단 비전 목표를 세우는 등 기조를 재건하려는 시도를 했고 2017 시즌 전에는 최형우를 데려오는 등 김조호 단장이 보여준 모습과 비슷한 행보를 걸었다. 그리고 2017 정규시즌 우승으로 이끈 공로로 시즌 후 구단 대표이사로 영전했다.
전반적으로 프런트의 영향력이 작은 구단으로, 좋게 말하면 터치가 적어서 현장과의 트러블이 적은 편이고 현장에서 추구하는 자유로운 팀 운영을 보장한다. 반면 나쁘게 말하면 프런트가 현장에 관심이 없어 현장의 운영 방향이 잘못됐어도 견제를 하지 않는다. 대신 결코 뒤지지 않는 모기업의 자금력에 힘입어 팀 성적을 위해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과감한 투자를 하는 편이다. FA 영입이나 인프라 구축(광주-기아 챔피언스 필드 및 기아 챌린저스 필드 건립, 재활센터 구축) 역시 현장의 강한 요구보다는 성적 및 기량향상을 목적으로 구단 모기업의 판단에서 추진한 사업이 강하다.
4. 역대 감독
- 감독 대행 체제로 시작해서 잔여 시즌을 마무리 했으나, 결국 정식 감독이 되지 못하고 다음 감독에게 감독직을 이양한 조창수, 박흥식 감독 대행의 성적은 기록하지 않았다.
- 감독 대행 체제로 시작해서 정식 감독이 될 때까지 그 사이의 전적도 포함된 기록이다.
김응용 감독의 장기 집권으로 코치나 2군 감독들이 기를 펴지 못한다는 소문이 있지만, 실제로 김응용 감독이 코치와 2군 감독을 꽤나 돌봐주었다고 한다. 아무튼 간에 한 감독이 징하게 오래한 건 사실이다.
몇 경기만에 짤린 김동엽을 제외하곤, 우승을 11번이나 했지만 '''전부 비(非)타이거즈 출신 감독이 이뤄냈다.''' 물론 해태 시기에는 김응용의 장기집권이 있었으니 당연히 이 기간동안 해태 출신 선수가 감독이 되는일이 아예 없었기도 했지만. 오히려 해태 출신들은 김성한을 제외하곤 전부 성적이 좋지 않다. 김성한도 정규시즌 성적은 좋았지만 포스트시즌에서는 항상 무기력했고, 김성한 구타 사건을 일으키는 등 좋은 감독으로 기억되진 않는다.
또한 역대 감독 명단을 보면 타이거즈가 순혈 출신 지도자를 선호한다는 선입견과는 달리 생각보다 순혈 출신 감독 수는 적은 편이다. 물론 김응용 감독이 오래 부임한 덕분에 다른 전직 감독들의 근속년수가 적어서 그렇기는 하다. 과거 올드 팬들의 성향을 따라 과거에 쌓아 올렸던 타이거즈의 영광을 타이거즈 출신이 다시 세우길 바라는 여론이 있긴 하였으나 타이거즈 순혈 출신 지도자들의 결과물이 그다지 좋지 않게 흘러감에 따라 오히려 타이거즈 출신 지도자를 배척하려는 분위기이다. 선동열 이후 선임된 김기태 감독과 윌리엄스 감독 모두 타이거즈와 연을 맺지 않은 사람들이고, 이종범의 감독 선임 카더라가 나왔을 때 팬들이 정말 극렬하게 반대한 것도 이 때문.
5. 역대 주장
해태 시절 주장에 대한 역사는 특이한 역사가 있다. 원년부터 차례대로 김봉연-김준환-김일권으로 이어진 이후 주장직을 폐지시키고 상조회장만 남겨놓아서 공식적인 '주장'은 없으나, 군기반장이 주장 역할을 대신하게 된다.[15] 그 후 긴 시간 동안 언론에도 공식적인 주장 발표를 하지 않기도 했다.
2007 시즌부터 2010 시즌까지 4년 간 주장 교체가 많이 이루어졌다. 우선 2007 시즌은 이종범이 주장으로 선임되었으나, 시즌 중 극도의 부진으로 인해 장성호로 교체되었다.[16] 장성호는 2008 시즌까지 주장직을 이어갔으나, 조범현 감독의 지시로 김상훈으로 교체되었다. 김상훈은 2010 시즌까지 주장직을 수행하였고, 2011 시즌에는 최희섭에게 주장이 넘어갔으나 연봉협상 마찰과 스프링캠프부터 시작된 허리통증으로 인해 다시 김상훈에게 주장직이 넘어갔다.
그리고 팀의 상징인 이종범이 주장을 가장 오래 했으며[17] , 특수 포지션인 포수 김상훈도 주장을 길게 했다. 그 외에도 '''이적생 출신 최초로 주장을 맡은 이범호'''도 주장을 오래 한 편.
2020 시즌에는 양현종이 주장을 맡게 됐다. 투수가 주장을 맡게 된 것은 1998 시즌 이강철 이후 22년 만이다.
그러나 양현종이 주장 마크를 달고 예년에 비해 부진했고 메이저리그 진출 여부와 관계없이 2021 시즌에는 지난 시즌 반등에 성공한 나지완이 주장직을 맡게 되었다
6. 역대 은퇴식
- 프로야구 초창기에는 은퇴식이라는게 갖춰지지 않아서 초창기~90년대 초반에 선수생활을 마감한 김봉연, 김준환, 김종모 등 타 팀으로 트레이드 되지 않고 해태에서 현역 생활을 마무리 한 레전드 선수들도 은퇴식을 하지 못하고 바로 플레잉코치를 해야했다.[31]
7. 역대 송별식
- 조계현 단장 부임 이후로 새롭게 생긴 행사다. KBO에서는 이전에 없던 역대 최초의 시도이며, 트레이드로 이적한 선수가 광주 원정을 오게 되면 그 동안의 공로를 축하하며 간단히 기념품을 챙겨주는 행사다.
8. 역대 성적
삼성 라이온즈와 함께 KBO의 대표적인 강팀이다. 다만 리그에서 대적할 상대가 없다시피 했던 8~90년대 해태 타이거즈와는 다르게 KIA 시절에는 2009년 한국시리즈와 2017년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했으나 해태 시절에 경험해본 적이 없는 꼴찌까지도 해보는 등 전체적으로 기복이 심한 성적을 보이고 있다.
그외 사항은 KBO 리그/역대 팀 스탯 문서 참조.
9. 역대 타이틀 홀더
9.1. 타자
9.2. 투수
[47]
10. 역대 MVP 수상자
10.1. KBO MVP
2020년까지 총 6명, 9회 수상하였다.
10.2. KBO 신인상
2020년까지 총 1명 수상하였다.
10.3. KBO 한국시리즈 MVP
2020년까지 총 10명, 11회 수상하였다.
11. 포스트시즌 상대 전적
준플레이오프와 와일드카드 결정전에서는 이긴 적이 없으나 '''한국시리즈는 진 적이 없다.''' 준플레이오프 전패와 한국시리즈 전승은 KIA가 유일하다.
12. 역대 등번호 리스트
13. 역대 개인 성적
팀 역사상 최고의 통산 성적과 단일 시즌 최고의 기록을 정리한 문단이다.
13.1. 통산 성적
13.2. 단일 시즌
[1] 구단주 겸 사장. 1983 시즌이 끝나고서 해태그룹 명예회장 및 구단주로 한 발 물러선다.[2] 선동열 일본 진출 관련 협상으로 모기업과 마찰 후 이상국 단장과 같이 경질되었다.[3] 대표이사 1996년 취임, 사장 취임은 1997년 취임.[4] 1977년 현대정공 입사, 기아자동차 화성공장장(부사장) 역임[5] 1977년 현대정공 입사, 현대모비스 부사장, 현대파워텍 부사장 역임[6]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특전사 장교로 복무 후 소령 전역, 1985년 현대자동차에 입사했다. 노무, 생산, 마케팅 부서들을 거쳤다.[7] 1982년 현대자동차서비스 입사 후 현대자동차로 옮겨 현대차 인도법인장, KIA차 재경본부장을 역임했다.[8] 1988년 기아자동차 입사, 현대기아차그룹 홍보실과 기획조정실에서 근무했다.[9] 선동열 일본 진출 관련 협상으로 모기업과 마찰 후 노주관 사장과 같이 경질되었다. 그 후 1996 시즌은 단장 없이 시즌을 치렀다.[10] 1차지명이 부활하면서 지역연고 고교 5개를 선정할 수 있게 되었는데, 이 시기 타이거즈의 뿌리와도 같은 군산상고가 빠지면서 논란이 되었다. KIA에서 선정한 고등학교는 광주일고, 광주동성고, 광주진흥고, 순천효천고, 화순고. 프런트 측에서는 어떻게든 군산상고의 지명권을 지키려 했으나, 결국 군산상고는 NC 다이노스가 가져갔다.(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1차지명 권한 행사와 제2구장 홈 경기는 엄연히 별개의 사안이다.) 대신이라고 하긴 뭐하지만 KIA는 신생 야구단이 있는 전북 정읍의 인상고를 가져갔다.[11] 2004년 중도사퇴. 이후 유남호 KIA 타이거즈 2군 감독이 감독대행.[12] 2005년 정식 감독으로 2년 계약을 맺었으나 그 해 중도사퇴. 이후 서정환 KIA 타이거즈 2군 감독이 감독대행.[13] 김응용 이후로는 처음으로 '''비 해태출신''' 감독. 2008년부터 뛰라고 계약을 했으나 2007년 시즌 일정이 꼬이는 바람에 KIA 감독으로의 데뷔전을 2007년 마지막 경기로 맞이했다. 근데 본의아니게 타이거즈를 우승시킨 감독 3명 모두 비해태출신이고 해태출신 감독들은 모두 이렇다할 성적을 못냈다. 그나마 김성한이 2위 두번으로 선방했다. 자세한 내용은 KBO 슈퍼 한국시리즈#s-2 문서 참조.[14] 2019년 시즌 중 사퇴 후 박흥식 KIA 타이거즈 2군 감독이 감독대행.[15] 1988년부터 1993년까지의 공백기에 주장 역할을 맡을 만한 사람이 있었느냐고 한다면, 실력으로나 성격으로나 김성한을 1순위로 들 수 있다. 실제로 당시 해태의 군기반장으로 명성(?)이 자자했다.[16] 참고로 장성호는 타이거즈 역사상 최초의 비(非) 호남 출신 주장이다.[17] 특유의 리더십으로 국가대표에서도 주장을 여러 번 맡았다.[18] 현역으로 타이거즈에서 뛰었던 연도만 기록.[19] 유일하게 해태에서 치뤄준 은퇴식이자, 타이거즈 역사상 첫 번째로 은퇴경기로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대타로 출장하여 1타수 무안타.[20] 원래 4월 11일에 진행하려 했으나, 우천취소로 하루 미뤄졌다.[21] KIA 인수 이후 처음 열린 은퇴식이다. 경기는 접전 끝에 4: 4 무승부로 끝났다.[22] 서재응의 7이닝 1실점 호투와 신종길의 4안타에 힘입어 5: 6으로 승리하며 은퇴식을 빛냈다.[23] 구단 최초 은퇴식과 영구결번식이 동시에 진행. 선동열의 경우에는 주니치 드래곤스로 이적하자마자 영구결번이 됐다.[24] 은퇴식 날인 LG전에서, KIA 선수들이 전부 이종범 배번인 7번을 입고 뛰었다. 결과는 5: 6으로 극적인 승리를 따내며 은퇴식을 빛냈다.[25] 구단 최초 합동 은퇴식.[26] 은퇴식에서 KIA K5 앞좌석 창문을 열어놓고, 유동훈이 그 사이로 공을 던지고, 공이 그 사이로 빠져나와 김상훈이 포구를 하는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보기 그 날 경기 결과는 4: 7로 승리하며 은퇴식을 빛냈다.[27] 구단 두 번째 합동 은퇴식.[28] 2009년 한국시리즈 우승 당시 입었던 홈 유니폼을 재현한 2009 챔피언스 저지를 입고 투수들은 서재응의 등번호 26번, 타자들은 최희섭의 등번호 23번을 달고 뛰었다. 경기는 7: 8로 극적인 승리를 따내며 은퇴식을 빛냈다.[29] 전 소속팀이었던 한화 이글스와의 경기에서 은퇴식을 하길 원하여 2019 시즌 전반기 주말 한화전으로 정해졌다.[30] 은퇴식과 은퇴경기 및 개인 통산 2,001경기 출장이 같이 진행되었다. 6번타자 3루수로 선발 출장했으며, 현역 마지막 타석은 2사 만루에서 좌익수 뜬공으로 커리어를 마감했다. 은퇴식과 은퇴경기가 동시에 열린 사례는 팀 역사로 보자면 김성한에 이은 두 번째 사례.[31] 더욱이 김응용 감독의 특성 상 선수의 가치가 떨어졌다 싶으면 바로 트레이드를 해서 타 팀으로 보내버리고, 구단에 돈이 없어서 트레이드로 보낸 경우도 많아서 타이거즈에서 은퇴를 한 레전드를 보기 힘든게 이유이다.[32] 현역으로 타이거즈에서 몸담았던 연도만 기록.[33] 갑작스럽게 트레이드로 NC 다이노스로 이적한 이명기에게 2017년 우승의 공로를 예우하며 선수들은 상의 유니폼에 사인을 했고 액자로 선물했다. 박흥식 감독대행과 조계현 단장, 안치홍 주장은 꽃다발을 건네고 사진을 찍었다.[34] 주장 양현종과 맷 윌리엄스 감독이 각각 홍건희에게 꽃다발을 주며 격려 인사를 전했고, 조계현 단장은 홍건희의 KIA 시절 배번이 써진 사인 유니폼을 액자에 담아 선물했다. 한편 방출 이후 KIA에 입단한 홍상삼도 두산 선수단에게 하이파이브를 건네며 셀프 송별식을 진행(?)했다.[35] 주장 양현종과 윌리엄스 감독이 각각 문경찬, 박정수에게 꽃다발을 전달하고 문경찬과 박정수는 옛 동료인 KIA 선수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눴고 그 자리에 있던 장현식, 김태진도 옛 동료인 NC 선수들과 마지막 인사를 했다.[36] 전기리그 4위, 후기리그 4위[37] 전기리그 1위, 후기리그 4위[38] 전기리그 5위, 후기리그 3위[39] 전기리그 3위, 후기리그 3위[40] 전기리그 2위, 후기리그 2위[41] 전기리그 3위, 후기리그 2위[42] 전기리그 1위, 후기리그 1위[43] 한화 이글스와 공동 3위.[44] 3위인 롯데 자이언츠와 3경기 이상 게임차가 벌어져 당시 규정에 의해 준플레이오프가 생략되었기 때문에 4위를 기록하고도 포스트시즌에 진출하지 못했다.[45] 드림리그 4위/4팀[46] 드림리그 4위/4팀[47] 프로 원년부터 2003 시즌까지는 구원승+세이브를 합쳐서 세이브포인트로 계산하여 구원왕을 선정하였다. 93, 95 시즌의 선동열과 98 시즌의 임창용은 각 시즌 세이브 1위이며 세이브포인트 1위도 동시에 기록하여 구원왕에 올랐다.[48] 1000이닝 이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