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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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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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남서부에 위치한 국가. 콩고민주공화국, 잠비아, 나미비아와 접하고 있으며, 본토에서 떨어진 월경지 카빈다(Cabinda) 주를 통해 콩고 공화국과도 접하고 있다. 국토면적은 124만 6,700㎢로 세계에서 23번째로 넓으며, 인구는 3064만여 명(2018년 기준)이다. 수도는 루안다(Luanda).
2. 상징
2.1. 국호
앙골라의 국명은 16세기 앙골라 일대에 있던 은동고(Ndongo) 왕국의 국왕 칭호인 응골라(Ngola)에서 유래했다. 포르투갈 항해사들이 이를 지명으로 생각하고 붙인 것이다.
2.2. 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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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 이래 채택하고 있는 국기. 빨강은 독립 투쟁, 검정은 아프리카, 노랑은 국부(國富)를 의미하여, 톱니바퀴는 공업과 노동자, 마체테는 농업과 농민, 별은 단결과 진보를 의미하는 데 별과 톱니바퀴, 마체테의 모습이 낫과 망치와 많이 닮았다. 이는 공산 앙골라의 집권당이었던 앙골라인민해방운동(MPLA)의 당기를 바탕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무리한 도전 오프닝에 크게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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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제안된 국기 시안(試案). 다만 제안만 되고 채택은 되지 않았다.
2.3. 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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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국가
3. 언어
공용어는 포르투갈어이다. 앙골라의 포르투갈어는 유럽 쪽 포르투갈어에 가까운 편이고 일부 차이가 있다. 그리고 앙골라 내에서 니제르콩고어족에 속하는 토착 언어들이 사용되기도 한다. 카빈다에선 프랑스어가 쓰이고 있다. 앙골라는 포르투갈어 사용국 공동체의 정회원국이다. 소수의 헤레로어 화자가 일부 존재한다.
4. 역사
4.1. 포르투갈 식민지(15세기 ~ 19세기)
1483년 포르투갈의 항해사 디오고 캉(Diego Cão)이 앙골라 북부 해안에 도착하여 콩고 왕국[3] 을 방문하면서 처음 유럽에 알려졌다. 당시 앙골라 지역에는 은동가 왕국을 포함한 몇 개의 부족 왕국들이 있었으며, 한동안 이러한 체제를 유지하였다. 본격적인 포르투갈의 진출은 1540년대 선교 활동을 하면서 이루어졌으며, 1575년 포르투갈은 군대를 이끌고 앙골라를 침공하여 해안가를 중심으로 정착하였다. 앙골라의 대서양 연안 도시들 대부분은 이런 목적으로 포르투갈인들이 개척한 것으로, 수도인 루안다는 물론 벵겔라, 루방고, 그리고 본토에서 떨어져 있는 카빈다 모두 마찬가지.
이 시기까지 포르투갈에게 앙골라는 그렇게 중요한 지역은 아니었다. 주로 인도 무역을 할 때 지나가는 거점 지역으로 활용되거나, 포르투갈의 브라질 식민지 개척에 필요한 노예 인력의 공급지로 이용되었다. 앙골라 영토가 지금은 넓어보이지만 그 중에서 대서양과 인접한 연안 지역의 몇몇 항구만이 원래 포르투갈의 관심사였다. 그러던 것이 당시 포르투갈이 콩고를 먼저 발견했다며 식민지 영유권을 주장하였는데, 19세기에 이미 포르투갈은 열강 중에서 위세가 많이 떨어진 상태라 무시당하고, 벨기에가 식민지로 삼아버려 놓치는 일이 일어났다. 게다가 바다 반대편에서는 포르투갈의 중요 식민지였던 브라질이 독립하면서, 이에 포르투갈은 아직 가지고 있는 영향권이라도 잘 써먹어보자는 심정으로 본격적으로 앙골라 식민지화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다. 이에 따라 내륙 진출이 이루어지고, 이후 열강들 간에 체결된 일련의 조약을 통하여 오늘날의 앙골라 국경선이 확정되었다.
포르투갈의 기본적인 식민지 정책은 동화와 강제 노역이었다. 이에 따라 포르투갈어를 배우고 기독교로 개종한 이와 그렇지 않은 이를 철저하게 차별하여 대우했으며, 식민지 농업과 다이아몬드 광산 개발을 위하여 무수히 많은 앙골라인들이 '계약노동'이라는 이름으로 강제 동원되었다. 하지만 막상 포르투갈어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진 것도 아니었다. 애초에 당대 본국인 포르투갈도 20세기 중반에도 식민 열강답지 않게 문맹률이 40%를 한창 넘나들었을 정도로 교육에 대한 투자가 미비했기 때문에, 앙골라 교육에 대한 투자가 제대로 이루어질 리는 만무했다. 그래서 1950년대 당시에 앙골라의 문맹률이 98%에 달했다. 포르투갈어는 물론이고 ABCD를 외우는 사람조차 소수 계층에 불과했다. 당연히 앙골라인들의 불만과 지속적인 봉기를 낳았다.
4.2. 앙골라 독립전쟁(1956년 ~ 1975년)
20세기 초 범아프리카 운동이 대두되면서 독립운동의 물결이 조금씩 일기 시작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독립운동이 본격화되었다. 1956년 앙골라인민해방운동(MPLA)이 조직되고, 1958년에는 앙골라인민연합(UPA)이 창설되었다. 1961년 이들 단체의 무장독립투쟁에서부터 앙골라 독립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앙골라 독립에는 소련, 중국, 쿠바를 비롯한 공산권의 지원이 활발하였다. 당시 소련은 공산 혁명과 관련하여 식민지 해방을 중요시 여겼기 때문에 정책적으로 지원했다. 특히 냉전 시기 세력 확장을 위하여 아프리카 식민지 독립에 많은 지원을 하였다. 한편 중국의 경우에는 소련과의 대립, 제3세계 주도권을 둘러싸고 활발하게 해외 원조를 하고 있었다. 한편 소련과 쿠바가 앙골라인민해방운동(MPLA)을 지원하자 소련의 라이벌인 미국과 서방세계는 우파 성향의 앙골라인민연합(UPA)과 그 후신인 앙골라민족해방전선(FNLA)을 지원하며, 이들은 경쟁 관계 속에서 포르투갈이라는 상대를 두고 포르투갈군과 전쟁을 벌였다.
그러던 와중에 1974년 포르투갈 제2공화국 독재 정권이 카네이션 혁명으로 붕괴되고, 혁명 후 들어선 포르투갈 신정부가 식민지의 독립을 인정하면서, 1975년 앙골라는 독립을 쟁취하게 된다. 하지만 독립의 기쁨도 잠시, 앙골라는 독립전쟁을 이끌었던 독립군 단체들과의 내전에 휘말리게 된다.
여담으로 앙골라 독립 직후, 앙골라 거주 포르투갈인들이 대부분이 아니라 거의 모두 앙골라를 떠나 본국 포르투갈로 떠나게 되었다. 이렇게 된 이유는 신변 위협으로 앙골라 독립 이후에 앙골라인민해방운동 등 앙골라의 독립 운동 세력들이 포르투갈인들부터 백인들을 사실상 적으로 간주하고 이들에게 재산을 강탈하고 나아가 목숨까지 위협했기 때문이었다. 현지 주민 얘기에 따르면 독립 직후에 신정부 흑인들은 포르투갈 출신 자본가들에게 "자산을 대부분 놓고 나가라"는 협박을 하면서 언제까지 안 나가면 목숨을 보장 못해준다고 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거의 모든 포르투갈인들이 쫓겨나듯이 앙골라를 떠나고, 남아서 저항한 사람들은 대부분 사라졌으며, 남아 있는 사람들은 부모 한쪽이 흑인으로 혼혈 정도만이 겨우 살아 남을 수 있었다고 한다.[4]
4.3. 앙골라 내전(1975년 ~ 2002년)
앙골라를 피바다로 만들어 버린 이 내전은 당시 앙골라에 있던 세 부족의 갈등, 냉전 시기 이데올로기 문제, 그리고 앙골라의 자원을 둘러싼 열강들의 개입에서 비롯된다. 최초에는 당시 독립전쟁을 이끌었던 주요 독립군 단체인 앙골라인민해방운동(MPLA),[5] 앙골라민족해방전선(FNLA),[6] 앙골라전면독립연맹(UNITA)[7] 들의 인물들이 골고루 섞인 내각을 구성하고자 하였으나 실패하게 된다. 앙골라의 45%에 달하는 사람들이 UNITA를 지지하였기 때문에, UNITA는 선거를 통한 정당제를 통한 내각 구성을 추진하였다. 하지만 FNLA와 MPLA는 이에 반발하였으며, 특히 이들은 UNITA보다 군사적인 힘이 강하였기에 무력을 통한 정권 탈취를 꿈꾸게 된다.
결국 MPLA는 군사력으로 주도권을 잡고 공산정권인 앙골라 인민 공화국을 수립하였다. 이에 반발하여 UNITA와 FNLA가 임시적으로 동맹을 맺고 별개의 정부를 구성하게 되었고, 중국과 미국, 남아공은 이 정부를 지원하였다. 덕분에 당시 미국과 중국은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을 펴는 남아공과 결탁했다면서 아프리카 각 국의 엄청난 비난을 받았었다. 반면 소련과 쿠바는 본격적으로 MPLA를 지원하기 시작하였다.
군사적 힘이 열세였던 UNITA는 남아프리카 공화국군의 앙골라 주둔을 추진하였고, 이에 남아공군은 앙골라 보호와 나미비아 독립투쟁단체를 토벌하기 위한 목적으로 앙골라에 주둔하면서 내전에 깊숙이 개입한다. 이에 반발하여 쿠바 역시도 대거 군사 개입을 하였으며, 내전 중에 쿠바군과 남아공군이 직접 충돌하기도 하였다. 이로써 내전은 국제화되고 냉전의 대리전 양상을 띠게 되었다.
내전은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치열하게 전개된다. 그러던 1978년에 FNLA가 MPLA와의 평화 협정을 맺고 전쟁을 중단하면서 전쟁의 양상은 MPLA와 UNITA의 2파전이 된다. 20여년 간의 독립 전쟁 이후 10년 넘게 지속된 내전으로 인하여 수많은 민간인 희생자를 낳았고 국토는 황폐해졌다.
이러한 내전은 냉전이 종식되면서 종식될 '''뻔''' 했다. 1988년 쿠바와 남아공은 협정을 통하여 앙골라에서 철수하고, 이를 감시하기 위하여 유엔 평화유지군이 파병되었다. 그리고 MPLA 정부는 일당제가 아니라 복수정당제를 인정하기에 이르렀고, 1991년 미국, 소련, 포르투갈의 중재 하에 MPLA와 UNITA는 1차 평화 협정을 체결하였다. 이로써 선거와 정전을 감시하기 위한 유엔 평화유지군이 재차 파병되었다. 그리고 1992년 앙골라 공화국의 신헌법이 제정되고, 선거가 이루어진다. 당시 대선은 MPLA의 승리로 끝났는데, UNITA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다시 내전을 일으킨다.
앙골라 내전이 1975년 이래 끝나지 않았던 이유는 정부(MPLA)와 UNITA가 앙골라의 풍부한 지하 자원을 각각 장악하여 경제력이 괜찮았기 때문이다.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앙골라는 산유국이며, 다이아몬드 산출량도 높다(다이아몬드 생산량 세계 4위). 특히 석유는 매장량이 100억 배럴+a로 추정되어 세계 석유산업계가 군침을 삼키고 있다.
또 다른 결정적인 요인은 부족간 대립이다. UNITA는 오빔분두족이 주도하며 MPLA는 다른 유력 부족이 이끌고 있다. 이처럼 양대 부족이 각각의 이념 및 자원 대결을 펼치면서 내전은 끝나지 않고 계속되었던 것이다. 그 결과 150만 명이 사망하고 1993~94년 사이에는 하루 평균 1천 명이 희생되는 악순환이 이어졌다.
4.4. 내전 종식과 그 이후 (2002년~)
이런 상황은 2002년에야 겨우 해결의 실마리가 열려서, UNITA의 리더였던 조나스 사빔비(Jonas Malheiro Savimbi)[8] 가 전사하면서 UNITA 세력이 약화, 정부와 UNITA는 정전 각서를 교환했고 가까스로 국가는 안정되고 있다. 그러나 2010년 독립을 주장하는 카빈다 지역에서 토고 축구대표팀이 테러를 당하는 등, 국가 치안은 여전히 불안하다.
앙골라 내전으로 인한 사망자는 360만 명에 이르는데, 국토의 대다수에 지뢰가 남아 있어서 지금도 다수의 사상자를 내고 있으며, 앙골라는 세계 최악의 대인 지뢰 피해국이라는 오명을 가지고 있다.
이후 상황이 다소 안정화된 이후로 조제 에두아르두 두스 산투스가 집권을 이어나갔다. 일단 경제 성장은 이룩했지만 이념 따윈 내팽개치고 국민들을 위한 복지나 교육, 의료 문제보다 제 잇속 챙기기에 몰두하는 부패한 인물이라는 평을 들었으며, 1979년에 첫 집권한 이래 2000년대 안정화 이후로도 계속 집권을 이어나가고 있다. 이 사람은 로버트 무가베보다 더 오래 집권 중이지만 1975년부터 집권 중인 카메룬의 폴 비야, 비록 미승인국이지만 모하메드 압델 라지즈가 1976년부터 집권 중인 서사하라 같이 더 장기집권 중인 나라도 있다(모두 아프리카 나라이다). 덤으로 나이도 같은 테오도로 오비앙 응게마 음바소고(둘 다 1942년생)가 똑같이 1979년부터 집권 중인 적도 기니도 있는데, 음바소고가 한 달 더 집권을 빨리하여 산투스보다 더 오래 집권 중이다.
내전 이후 앙골라 경제가 급성장하고 있는 가운데, 역시 산투스와 그 측근을 중심으로 부정부패 문제가 심각한 상황이다. 앙골라 전체 국부의 30%를 대통령 일가가 소유하고 있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 그의 딸인 이사벨 두스 산투스는 앙골라 국내는 물론 과거 식민지 종주국인 포르투갈 및 유럽 내에서 여러 회사를 소유하고 있고, 아프리카 대륙 내 유일한 여성 억만장자로 알려져 있다. 최근에는 부정부패로 체포되어 포르투갈에서 조사받고 있는 정부 각료 문제로 양국간 정상회담이 취소되는 등 외교 분위기가 험악해진 상황이다.
2017년 8월 24일에 있었던 선거에서 여당인 앙골라인민해방운동이 승리했고 후보인 조앙 마누엘 곤살베스 로렌수가 대통령으로 9월 26일에 취임했다. #, #
산투스 퇴임 이후로 로렌스 대통령의 주도하에서 개혁이 이루워지고 있다. 우선 유가 하락으로 앙골라의 고도 경제성장기가 마감되고 침체기에 접어들었기 때문에 이러한 개혁이 불가피한 측면도 있지만, 2017년 총선에서 지지율 하락이 확인된 이상, 로렌수 대통령 입장에서 지지가 산투스를 냅둬봐야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앙골라 법원은 산투스 전 대통령의 딸인 이사벨 두스 산투스의 은행 계좌 등 자산을 동결하는 명령을 내렸다. # 아프리카에서 가장 부유한 여성으로 알려진 이사벨 두스 산투스는 부정축재와 부패로 얼룩진 것으로 드러났다. #
2019년 앙골라 대법원은 식민 잔재인 반동성애법이 위헌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2021년 앙골라는 동성간 연애 관계를 비범죄화함과 동시에 성적 지향·성 정체성을 바탕으로 한 고용 차별 금지 및 성소수자에 대한 증오범죄 처벌 법안을 통과시켰다. #
5. 경제
5.1. 풍부한 지하 자원과 빈부 격차
석유와 다이아몬드 외에도 막대한 양의 철광석과 석탄이 매장되어 있으며, 국토 대부분은 사바나이다. 앙골라에는 추정으로는 약 100억 배럴이 넘은 석유를 가지고 있으며, 다이아몬드 생산량이 세계 4위에 이를 정도로 매장량이 많다.
'''아프리카 최대 산유국'''이자 OPEC 가입국. '''아프리카 제7의 경제대국'''(나이지리아, 이집트, 남아공, 알제리, 모로코, 수단 순).
더욱이 경제 성장은 연 10%를 넘는 매우 빠른 성장을 보이고 있다. 2014년에는 1인당 GDP가 5,400달러'''였'''고 PPP로는 7,489달러'''였'''는데, 이게 5년전에는 3,100달러였다. 하지만 1인당 GNI (국'''민'''총소득으로 국'''내'''총생산인 GDP와는 다르다)는 4800달러 정도로 소폭 내려간다.
그런데 현실은 시궁창이다. 이유는 어마어마한 양극화 때문. 2007년 당시 앙골라 인구의 70%는 하루 2달러 미만의 수입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이게 현재까지도 달라지지 않았다(...) # 이유는 석유 수입의 다수가 횡령으로 낭비되거나 과시용 사업에 투입되고, 정작 필요한 복지(의료 제도, 교육)나 마이크로크레디트, 공공주택 건설 같은 부분에 별로 예산이 돌아가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에 산토스 대통령을 비롯한 윗대가리도 워낙 썩어 있다 보니 앙골라 당국도 이를 시정할 생각이 별로 없기 때문. 그런데 정작 지니계수는 0.5를 안 넘는다.[9] 그나마 2017년 총선 이후 산토스가 퇴임한 이후로 변화의 조짐이 나타나고 있기는 하다.
거기다가 2014년 하반기부터 셰일 혁명으로 저유가가 산유국들을 덮치면서 2015년부터 지금까지 마이너스 성장을 지속하고 있다. 애초에 석유 제외하고는 별 산업이 없는 나라이기 때문에 피해가 막심한 편. 2018년 1인당 GDP는 $3,621으로 폭락하였다.
이러한 상황이라 1인당 PPP GDP는 세계 113위인데, 인간개발지수(HDI)는 세계 148위로 35계단이나 낮다. 인간개발지수는 GDP만으로는 국민들의 생활 수준을 판단하는데 한계가 많기 때문에 교육 연수와 평균 수명을 고려한 지표인데, 1인당 GNI 4812달러, 예상교육연수 10.2년, 실제 평균 교육 연수 4.7년, 평균수명 51.5세로 나온 최종 점수가 0.508. 참고로 1인당 GNI가 1684달러로 앙골라의 1/3 수준인 가나의 인간개발지수는 세계 135위, 나머지 세 지표는 각각 11.4년, 7년, 64.6세인 것과 비교해 볼 때 앙골라는 소득 수준에 비해 교육 및 의료 등 시설이 열악함을 알 수 있다. 2016년 WHO 조사 기준, 평균수명이 세계에서 2번째로 짧다.
위키피디아와 페이스북이 해적판 영화나 드라마, 노래 등을 전파하는 온상이 되고 있어서 은근히 골치를 썩고 있다고 한다(...) 이유는 페이스북과 위키피디아가 앙골라 현지 통신사와 제휴해서 무료 인터넷 서비스를 도입시켜 놓은 것 때문이다. 앙골라에서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사람이 많아 인터넷 사용을 하기 힘든 사람이 많기에 무료 서비스가 환영받았기는 했지만, 문제는 이 무료 서비스라는 것이 "교육적인 목적"이라는 명목 하에 페이스북이나 위키피디아 같은 일부 사이트만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것이었다. 정석적인 이용에 질린(?) 네티즌들이 당초 취지와는 다르게 영상 공유를 하려고 페이스북과 위키피디아에 영상을 올려놓는 경우가 많아졌고, 결과적으로 해적판 영상 천지가 되어버린 것이다(...) #
상술한 것처럼 산유국이기도 하고 비싼 물가까지 겹쳐서 루안다는 아프리카의 두바이라고도 불린다. 2014년 기준으로 전세계에서 가장 높은 땅값을 차지한 곳이 앙골라의 수도 루안다이며, 실제로도 30~40곳에서 대형 건물이 지어지고 있는 곳기도 하다. 다만 절대 다수의 루안다 시민들은 루안다의 막대한 물가를 힘들어하는 빈민층으로 극소수의 졸부들 혹은 중국인들 같은 외국인들이나 향유하고 있을 뿐이라고 한다. 중심가의 월세가 소득 수준에 비하면 엄청난 수준인데, 그래서 빈집들이 많다. 물론 빈민층들은 그런 집에서 살 능력이 없어서 판자촌에서 산다고. 루안다에는 100m가 넘는 빌딩이 여러 개 있으며 현대적인 건물이 세워지고 있다. 이게 다 오일 머니 덕분인데 이 건물들은 200미터를 넘지는 않지만 한국 기준으로도 근사하다.
5.2. 중국인의 경제 장악
2002년 50년 간의 긴 내전이 끝나자마자 내전 기간 동안 앙골라 산업체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중국 자본이 내전이 끝이 나자 이때다 싶어 대거 유입되어 앙골라 자국의 도매시장을 싹 다 장악해 버렸다. 거기에다 중국이 앙골라에 투자를 하면서 중국인 노동자들이 대거 앙골라로도 진출했다. # 이 여파로 수도인 루안다에 고층 빌딩과 마천루가 건설되고, 루안다 근처의 위성 도시와 타 지방의 도시가 대거 팽창하기도 했다.[10] 하지만 이런 순기능도 있지만 후술하다시피 골치 아픈 악영향도 있었다. 2012년 조사 결과에 따르면 앙골라 전역의 각 도시에 약 25만명의 중국인이 있다고 한다. 하도 중국인이 많아서 대도시 곳곳에 중국인 찾기가 어렵지 않으며, 노동 비자 발급 절차가 까다로워졌다. 그런데 이마저도 괜히 날강도라고 불릴 정도로 선량한 이들이 아니라서, 불법으로 위조해서 '앙골라 내무부 산하 이민국' 직원만 아시아인들 상대로 용돈벌이(반쯤 털어먹기)에 좋아라 하고 있다. 여기에 중국 정부가 2004년 10월 정부개발원조(ODA) 명목으로 융자한 20억 달러는 '''앙골라가 날마다 석유 1만 배럴씩 17년 동안 중국에 제공하는 조건'''으로 지원되었는데, 이 20억 달러 규모의 프로젝트를 중국 국영 기업이 수주하고 설비, 자재, 심지어 하급 건설 인부 같은 노동자마저도 몽땅 중국에서 가져다 써서 정작 지원 대상인 앙골라에는 한 푼도 돌아가지 못했다. '앙골라 프로젝트'라고 할 정도로 중국 정부가 많은 투자를 하여서 특히 사회 인프라 공사를 많이 했다. 하지만 송전탑에서 민가의 전봇대로 전기를 이동시키는 송전선이 너무 얇아서 중간에 끊어져 동네 전체에 정전이 나는 경우도 흔하고, 현지의 부실공사와 부패까지 겹쳐서 중국계 기업에서 깔아 놓은 고속도로는 1년이 아니라 거의 매월 아스팔트 바닥이 주저앉아서 구멍이 나며, 건물의 경우 외부는 그럴싸한데 안에 들어가면 아무것도 없고 콘크리트 바닥에 벽돌로 개판이라 현지인들은 불만이 많다. 원자바오 전 총리가 2006년 직접 방문했을 정도로 중국의 관심이 지대하지만, 이런 식으로 중국 정부와 중국인들이 돈과 자원을 중심으로 마찰이 빈번하여 충돌을 벌이고 있기 때문에, 가뜩이나 생계가 막막한 중하층민을 중심으로 중국인에 대한 적개심이 커지고 있다. 결국 반정부 시위까지 벌어지고, 일부 반정부 세력이 이런 시위대를 통하여 지금 정부를 뒤엎자고 하는 탓에 겁 먹은 정부가 "'''이게 죄다 칭총[11] 탓'''"이라고 책임을 떠넘기면서 혐중이 깊어졌다. 중국-아프리카 관계 참고.
거기에 중국을 중심으로 대규모 곡물 농장이 늘어나는 것도 문제. 대대로 작게 농사를 짓고 살아가던 이들에게 한 푼 보상도 없이 땅을 빼앗아 정부가 준 탓에 여론이 폭발했다. 실제로 이렇게 땅을 빼앗긴 어느 앙골라 민중 한 사람이 광분하여 분풀이로 중국인 농장 직원을 낫으로 찔러 죽인 뒤, 경찰에 체포되어 수감된 적이 있다. 그리고 수천여 명 앙골라 토착민들이 그가 수감된 교도소 앞에 모여서 그의 석방을 부르짖기도 했다. 원래 공산주의 국가이기 때문에 땅의 소유는 전부 국가이며, 땅을 사더라도 장기 임대권을 구입하는 것이지 자신의 소유가 되는 것이 아니다. 또한, 누구 땅인지 몰라서 한 땅에 주인 10명도 나타나서 싸우기도 하는데, 덕분에 한인 중에 사기당한 사람이 많다. 그래서 정부 입장에서는 정부의 땅을 중국 업체에게 임대를 해준 것이라서 그 나라 법적으로 합법인 조치이다. 물론 이게 도덕적으로 옳은지는 알아서 판단하자. 장기 임대권 계약이 만료된 이들이면 모를까, 앙골라 정부의 논리대로라면 나리타 공항의 철거민들도 동정의 여지 없는 폭력배에 불과하게 되니까.
2015년 초부터 시작된 단기 오일 쇼크로 인해 물가가 폭등, 이에 치안은 더욱 악화되었으며 특히 중국인을 대상으로 한 범죄가 증가하였다. 특히 2015년 5월 한달은 주당 평균 3명의 중국인이 현금을 노리는 토착민에게 총격을 받아 사망하는 상황이 빈번했다.
5.3. 빈약한 제조업
앙골라를 비롯한 대부분 아프리카 국가들이 가진 고질적인 문제로써, 빈약한 제조업으로 인해서 전자나 기계 제품 가격이 무시무시하게 비싸다. 예를 들어 한국산 자동차 부품이 현지에 오면 10배가 된다. 덕분에 싸구려 중국 제품을 포함해서 그나마 좀 괜찮은 브라질과 남아공에서 오는 제품이 시장에 많은데, 이마저도 없어서 못 쓴다. 그래도 2013년부터 대형 마트가 생기면서 물류 유통이 활발해지면서 상품이 많아졌다.
원래는 식민지 시절 포르투갈에서 대규모로 투자를 하여서 충분한 인프라와 제조 설비가 있어 오히려 농업에 집중하던 본국보다 경제 사정이 나았을 정도였다. 하지만 독립 직후 독립을 주도한 흑인들을 중심으로 반강제적인 백인 추방으로 기술자와 관리자들 대부분이 공백 상태가 되고, 여기에 치명타로 내전으로 모든 것이 파괴되고 황폐화되었다. 현지인들의 얘기에 의하면 독립하자마자 백인들에게 비공식적으로 언제까지 안 떠나면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고 살해 위협을 가하였고, 이를 주도한 집단이 백인들이 남겨놓은 재산을 챙겼다고 한다. 이것이 내전 발발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농업의 경우 피해가 더욱 심각해서 앙골라에서만 서식하는 고유 종자마저 전부 내전으로 사라졌다.
5.4. 부패한 경찰과 노동비자
앙골라에서 가장 무섭고 위협적인 사람들은 폭력 조직이 아니라 다름 아닌 그 폭력 조직을 잡아야 하는 경찰들이라고 한결 같이 증언한다. 푸른색 제복을 입은 일반 경찰들도 있지만, 현지인들도 욕하는 가장 악질 집단이 있다면 'BET'라고 불리는 '고속도로 교통 경찰들'로써, 외국인을 비롯해서 현지인에게도 악명을 떨치고 있다. 기본적으로 이들은 앙골라 시외 혹은 수도 외곽의 도로와 인근 국가와 앙골라의 주 경계선에서 강력한 권한을 가지고 있어서, 물류업을 하는 현지인들은 이들에 대해 얘기할 때 불편한 마음을 감추지 않는다. 외국인은 이들에게는 아주 좋은 보너스 수당 제공자로써 웬만해서는 총을 쏘지는 않지만, 총으로 위협해서 보너스를 뜯어 가는데 눈을 불 키고 다닌다. 만약에 경찰이 총을 쏘았다면 본인이 아무런 죄가 없어도 당사자는 최대한 빨리 앙골라를 떠나는 것을 추천한다. 자신이 죄가 없다며 항의하는 순간 분명히 그 즉시 총을 맞을 것이다.
만약이 아니라 시내를 다닐 때에는 필수적으로 여권을 가지고 다녀야 하며, 여권에는 앙골라 입국 비자가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 비자에는 일반 비자와 노동 비자가 있는데 일반 비자는 단기간 약 1~2개월 정도로 여행이나 단기간 출장용인데, 현지어를 못하면 이것도 의심한다면서 꼬투리로 잡는다. 그러면서 강제 기부를 강요한다. 안 하면 본인이 아무런 문제가 없더라도 그 경찰과 인내심 싸움으로 최소한 2시간, 최대 반나절까지 시간 허비를 감수해야 한다. 하지만 경찰과의 강제 기부 협상이 늦으면 늦을수록 이들에게 주어야 할 강제 기부액은 늘어난다.
노동비자가 있으면 최대 2년간 법적으로 앙골라 내에서 경제 활동과 거주가 가능하다. 하지만 경찰들에게는 강제기부자로 보일 뿐이다. 특히 주 경계선을 넘어다닐 때마다 검문소가 있는데, 이를 무시하고 그냥 넘어가면 매우 골치 아픈 것은 둘째치고 목숨까지 위험하다. 노동비자가 있더라도 경계선을 넘어다닐 때마다 돈을 비롯해서 음료수나 과자, 공산품 등 각종 물품들의 기부를 강요한다. 거부할 경우에는 구금하거나 체포해서 강제적으로 차량 점검을 실시한다. 만약 차량이 주행 중 고장이 난다면, 한국처럼 도로공사 직원이 고쳐주거나 하는 일은 꿈도 꾸지 말아야 한다. 이들은 아무리 차가 고장이 나도 고쳐주는 것이 아니라 앙골라 교통법규에 명시된 물품, 예비 타이어 및 자신의 교통법규를 강요한다. 그래서 설사 차량이 고장나도 그들에게선 아무런 도움을 받을 수 없다. 사설 견인차를 부르는 게 최선일 뿐...
만약에 비자가 있어도 여권을 미소지하거나 비자 유효 기한이 넘긴 여권 등으로 체포되면 경찰서 유치장에서 하룻밤이 아니라 무기한 구치소 생활을 각오해야 한다. 보석금을 내거나 하면 일단 국가에서 강제 추방당하는데, 이 과정에서 우리나라와 같이 인권 보호를 받으면서 나갈 수 있다는 생각은 버리는 것이 좋다.
한 앙골라 국적의 사설 운전 기사의 증언에 따르면 운전 면허증을 보여주지 않아 이들에게서 100달러를 이미 갈취된 상황에서 유효한 운전 면허증을 경찰에게 보여주었는데, 이 운전 면허증은 위조되었다고 난리를 치면서, 결국 운전자에게서 100달러를 다시 갈취해 갔다는 증언까지 있다. 이것도 재수가 안 좋으면 일어나는 일이며, 장기간 앙골라에 거주한 체류자는 갈취 금액이 대략 10~50달러로 줄어든다. 그러나 초행자의 경우에는 최대 500달러까지 갈취당한다고 한다. 이 경우에는 경찰들도 땡 잡은 날이라고 매우 싱글벙글하여 전화번호를 요구하고 사는 지역까지 물어보며, 만약 이들에게 사는 지역을 가르쳐 준다면 그 지역 경찰들을 매일같이 볼 수 있는 상황이 열린 것을 본 적이 있다. 면허증의 경우에도 앙골라 정부에서는 통용되지 않는 국내에서 발급된 국제 운전 면허증, 앙골라 정부가 인정하고 있는 아프리카 공인 면허증 전부 소용이 없다. 오로지 자국 면허증을 요구하기에 기부할 생각이 없다면 끝까지 버티는 수밖에 없다. 이 분야에서 최강자가 있으니 바로 중국인들로써, 이들의 인내심은 가끔 경의를 표할 만큼 독한 놈들로써 경찰과 하루 동안 대치해서 벗어난 중국인 트럭 운전자도 본 적이 있다.
앙골라를 여행한 한 외국인에 의하면, 여행을 마치고 귀국하는 날에 택시를 타고 공항으로 가는 도로에서 부패경찰이 택시 운전 기사와 차에 탄 그에게 불시 검문을 하며 시비를 걸어와서 결국 운전기사가 마지 못해 50달러를 경찰에 주게 되었다고 한다. 앙골라의 국제 공항은 한국의 오래된 고속버스 터미널 같이 매우 작고 협소하며, 사람들이 끓어 넘쳐 위생도 저질인 데다, 앙골라 운전자들 대부분 교통 신호에 대한 인식이 거의 없기에 경찰들에겐 아주 좋은 먹잇감이다. 또한 공항을 다니는 사람은 그만큼 경제력이 있는 사람이기에 공항 주변에는 경찰들이 항상 있다고 보는 것이 좋다. 앙골라를 다니는 사람들은 매일 돈을 가지고 다녀야 하고 조심해야 하는 곳이 앙골라라고 증언한다.
반면에 중국은 앙골라에서 다수의 건설 현장과 프로젝트 등을 진행하면서 노동비자가 타 외국인에 비해서 쉽게 나오나 좋은 대우를 받지 못한다. 또한 경찰 단속에 걸려도 대부분의 외국인들은 그냥 약간 돈을 주고 끝내나, 중국인 건설용 덤프 트럭이나 대형 차량 운행자는 뇌물 요구를 무시하고 순순히 경찰서로 들어간다. 그렇게 하루이틀 정도 있으면 중국 대사관에서 나와서 이들을 풀어준다. 하지만 중국인들은 일이 있지 않는 한 급하게 움직이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중국 노동자들은 앙골라로 오기 전에 최소 3년짜리 계약을 맺고서 와서 일을 하는데, 만약에 기간을 다 채우지 못할 경우에 엄청난 위약금을 물게 된다. 그래서 이들은 노동 기간 중에 억류 기간이 포함되기 때문에 이를 반기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이에 많은 운전자들은 경찰을 피해 이리저리 도망다니며, 만약 붙잡히면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서라도 돈을 뜯어 간다고 한다. 앙골라에 일주일 이상 거주하면 4회 이상은 이런 돈을 뜯겨간다고 해서, 앙골라에서 공무원들은 아주 직업이 좋다고 한다. 이것도 운이 좋은 편으로써 차를 타고 다니면 최소 1회/일 경찰과의 협상을 경험해야 할 것이며, 수도 루안다나 주 경계선을 넘어 다닐 경우에는 1시간마다 만날 수도 있다. 장소가 어디든 다양한 방법으로 국민들에게 뒷돈을 챙길 수 있어서 그렇다고 한다. 자료.
노동비자를 발급 받으려면 우선 서울 한남동에 있는 앙골라 대사관에서 길어야 1개월 정도의 일반 비자를 발급 받고서 앙골라에 가서 노동비자를 신청해야 한다. 하지만 이 때부터가 시작이다. 앙골라 내무부에 노동비자를 신청해도 쉽게 나오지 않는다. 물론 급행비가 있지만 2014년 당시만 해도 급행비가 최소 2만 달러에 이르기도 했다. 그러나 나온다는 보장은 없었다. 그래서 상당수의 한국인들은 현지 경찰에 막대한 뇌물을 뜯겼다. 이렇게 된 것이 진짜 중국인들 덕분으로, 중국인들 상당수가 노동비자 기한이 지나도 현지에 머물면서 현지인들의 일자리를 차지하면서 이에 앙골라 정부는 전체 노동비자 발급량을 줄인 것이다.
6. 스포츠
축구와 농구가 인기가 많다. 농구의 경우 올림픽이나 세계급 메이저 대회에서는 동네북 신세를 면하지 못하고 있지만, 그래도 아프리카 내에서는 강력하다고 할 수 있는데, 아프리카 선수권 대회(FIBA Africa Championship)만 봐도 1989년을 시작으로 11번 우승하며 최다 우승국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2011 마다가스카르 대회에서 튀니지에 패해 7회 연속 우승은 좌절됐지만, 2013 코트디부아르 대회에서는 이집트를 17점 차로 이기며 통산 11번째 우승을 거두었다. 이 다음으로 이집트와 세네갈이 5번 우승으로 뒤를 잇고 있다.
2000년대 이후로는 더 이상은 동네북 신세라는 말도 들어맞지 않게 되었다. 2002년 미국에서 열린 농구 월드컵에서 처음으로 2라운드에 진출한 데 이어 2006년 일본에서 열린 월드컵에서는 개최국 일본을 87-62로 뭉갰으며, 뉴질랜드를 상대로는 95-73으로 압승했다. 덕 노비츠키가 분전한 독일과 연장전 끝에 103-108 패, 우승국 스페인에 83-93으로 분전할 정도로 솜씨를 뽐내며 사상 최고 성적인 10위를 기록했다.
축구 월드컵은 2006 독일 월드컵이 유일한 출전이며, 멕시코 - 포르투갈 - 이란과 맞붙어 2무 1패를 기록했다. 자세한 것은 앙골라 축구 국가대표팀 문서 참고.
2010년 터키에서 열린 농구 월드컵 대회에서는 요르단을 이기며 역시 16강에 진출하여 3회 연속 월드컵 2라운드 진출을 이룩했다.
2014년 월드컵에서도 출전하여 한국을 상대로 80대 69로 승리를 거두는 등의 성적을 올렸으나, 최종 순위 17위를 기록하며 16강 진출에는 실패했다. 당시 한국 언론에서는 1994년 대회 당시의 13-14위 결승전에서 75대 71로 이겼던 것을 언급하며 자국의 승리를 점쳤으나, 상술했듯이 2000년 이후에는 사정이 달라진 점을 무시한 분석이었다.
2019년 중국에서 개최했던 월드컵에도 역시나 본선에 나왔으며, 최종 순위는 27위를 기록하였다. 조별예선에서 필리핀을 상대로 승리를 거뒀지만 세르비아, 이탈리아에게, 순위 결정전에선 이란, 튀니지에게 패배를 당하였다.
2012 런던 올림픽에서는 여자 농구가 본선에 진출했고, 남자 농구는 최종 예선 8강까지 진출했지만, 러시아에 65:80으로 패하며 탈락했다.
앙골라 내전을 피해 대한민국에 난민으로 정착한 아버지를 따라 온 풍기 사무엘이 2021년에 K리그1의 포항 스틸러스에 입단한다.
7. 외교
8. 여담
2011년 미스 유니버스 라일라 로페즈를 포함, 국제 미인대회에서 아주 괜찮은 성적을 보여준다. 국제대회 참가 기간이 고작 10여 년인데 한 명의 미스 유니버스와 3명의 탑 16위 진출, 미스 월드 대회에서 3명의 세미파이널의 성과를 거두었다. 이들이 백인 취향에 맞는 비욘세풍의 백인 얼굴에 검은 피부의 마른 여성인지라 뚱뚱한 여성이 선호되는 자국에서는 이해를 못하기는 한다. 물론 빈부격차가 심한 앙골라의 특성 상 미인대회에서 상위권을 확보하면 말 그대로 출세길이 열리는 건 맞고, 앙골라인들도 세대별로 취향이 갈리기는 마찬가지라서 여기도 도시나 젊은층으로 갈수록 서구풍 몸매를 선호하는 사람들이 상당히 있기는 하다.
과거 내전의 영향으로 지뢰가 많이 매설되어 있다. 아프가니스탄, 비무장지대 등과 함께 손꼽히는 지뢰 매설량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포르투갈어가 통하다보니 포르투갈에서 앙골라로 인력 유출도 상당하다. 의사 변호사 기술자 등 전문지식은 있는데 포르투갈의 경제가 나빠지면 가버리는 것.
화폐 개혁을 하여서 액수 단위는 다양하게 있는데(10, 50, 100, 1000, 2000, 5000 콴자) 대개 1달러에 100 콴자를 유지하고 있다. 그런데 팁 단위는 1,000 콴자(10 달러, 한국 돈으로 약 10,000원 이상)를 요구하는 현지인이 많다.
2013년 말에 앙골라가 이슬람을 금지했다는 소문이 돌았으나, 앙골라 정부는 부정했다. 그리고 이에 대해 항의 시위가 산발적으로 있었다. 2015년에 정말로 금지령이 내려졌다고 뉴스 등에 보도되었다.
신정환이 룰라 1집을 마치고 군입대하여 육군 제203특공여단에 배치되었는데, 정훈병으로 상대적으로 널널하게 보내다가 파병에 자원했는데 유엔 평화유지군 소속으로 이 앙골라에서 군 생활을 했다. 파병은 100% 지원으로 심사를 거치고, 파병을 가서도 위험한 상황에서의 임무 수행과 강도 높은 훈련을 요구하므로, 이 당시 여론도 신정환의 파병 소식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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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탈기어 솔리드 V 더 팬텀 페인의 배경 중 하나로 이 나라의 자이르와의 국경지대가 등장한다. 작중 배경이 내전이 진행되던 시대인 1984년인지라 UNITA를 지원하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계열의 용병들이 적으로 등장한다. MPLA도 직접 등장은 없지만 일단 다이아몬드 독스의 고객으로서 등장하기도 한다. 게임이 미완성작에 가까운지라 전작처럼 MPLA 소속 병력과 UNITA의 용병들이 서로 교전한다든지 하는 부분은 없는 것이 아쉬운 점이다.
[1] 콩고어, 초퀘어, 움분두어, 킴분두어, 강겔라어, 콰냐마어[권위주의] 3.66점[2] 영어 위키피디아 및 CIA 월드 팩트북 통계.[3] 콩고 왕국의 수도인 음반자콩고는 앙골라 북서쪽에 있었고, 2017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4] 사실 이는 앙골라 뿐만 아니라 아프리카의 다른 포르투갈 식민지였던 기니비사우와 모잠비크에서 살던 포르투갈인들 역시 비슷했다.[5] 음분두족이 지지하는 공산 계열의 독립 단체.[6] 앙골라인민연합(UPA)의 후신으로, 바콩고족 중심의 우익적 성향 단체. 독립전쟁 시기 때부터 자신들이 유일한 앙골라의 독립 단체라고 주장하며 다른 독립 단체를 공격하기도 했다.[7] 앙골라인민연합(UPA)의 지나친 종족주의에 반발하여 분리된 독립 단체.[8] 앙골라 내전 당시에 미국과 서방 국가로부터 막대한 지원을 받고서 수도 루안다를 빼고 앙골라 전역을 장악할 정도로 세력이 강했다. 하지만 루안다 점령을 앞두고 미국과 서방 국가와 맺은 밀약을 깨고 앙골라 자원 독점을 선언한다. 이 때 무려 친소 정권이고 상당수 중요 인물이 소련에서 유학을 다녀오거나 군사 훈련을 받은 인사로 구성된 MPLA 정권에서 미국으로 특사를 보내서 밀약을 맺으면서 미국과 서방 국가들은 MPLA를 밀어주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전세가 완전히 뒤집힌다.[9] 이는 고령화가 심할수록 지니계수도 올라가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앙골라를 비롯한 대부분의 아프리카 국가들은 인구 증가율이 1~3%를 넘는다.[10] 2000년대 초만 해도 수도인 루안다를 제외한 타 지방의 도시는 변변찮은 진입로도 없었고, 도시의 크기도 거의 다 나우루의 절반만큼인 병아리 눈물만한 크기였다. 하지만 중국 자본이 투입 되며, 지방 도시와 수도를 연결하는 고속도로와 국도도 건설되었고, 중소 지방 도시에는 맥도날드가 입점하고 공항도 건설되었다.[11] 앙골라 현지에서는 '시네쉬(포르투갈어)'로 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