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성씨)

 


1. 대한민국의 성씨
1.1. 奇
1.1.1. 역사
1.2. 상세한 가문사
1.2.1. 실존 인물
1.3. 箕
1.4. 한자 미상
1.5. 기씨를 예명으로 쓰는 인물
2. 기자기자조선의 왕들을 조상으로 삼는 성씨 목록


1. 대한민국의 성씨



1.1. 奇


청주 한씨, 태원 선우씨 등과 함께 삼한갑족(三韓甲族)으로 불리는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성씨들 중 하나.
행주(현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를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 유명한 인물로는 원나라 혜종황후 기씨, 기황후의 오빠인 부원배 기철, 성리학자 기대승 등이 있다. 청주 한씨, 태원 선우씨와 동본이라고 한다.
본관이 행주라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고려시대부터 조선 중기까지는 수도권을 기반으로 분포해 있었으나, 중종(조선) 대에 관직에 진출해 있던 13세조 기준이 스승이었던 조광조기묘사화에 연루되어 교살당하면서 원래 그리 많지 않던 일족의 대부분이 지방, 특히 처가나 외가 쪽의 인척관계를 통해 지방으로 피난을 가게 된다. 전라도로 피신했던 기준의 형 기진의 아들인 기대승이 다시 가문을 일으켜세워 번성하게 되었기에 현재의 지역별 분포를 보면 광주광역시장성군에 압도적으로 많다.[1] 경상도로 이동한 집단도 있어 경주시에도 집성촌이 있다. 인구는 2015년 기준 27,379명.

1.1.1. 역사


《행주기씨보(幸州奇氏譜)》와 《청주한씨세보(淸州韓氏世譜》에 따르면 시조는 기자조선(箕子朝鮮)을 창건했던 상나라의 왕족 기자(箕子)의 48대손 '''기우성'''(奇友誠)이다. 고조선의 마지막 왕이자 마한(馬韓)의 초대 왕이었던 기자의 40대손 준왕(準王)의 후손인 기자의 47대손 마한 8대 원왕(元王) 훈(勳)에게는 아들로 우성(友誠), 우평(友平), 우량(友諒)의 3형제가 있었는데 우성은 백제로 가 행주 기씨(幸州 奇氏), 우평은 고구려로 가 태원 선우씨(太原 鮮于氏), 우량은 신라로 가 청주 한씨(淸州 韓氏)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다만 족보가 대체로 그렇듯이 사료와의 교차검증은 부실하다. 기자 동래설에 대해 자세한 건 기자 항목 참조.
선조(조선)영의정을 지낸 기자헌(奇自獻)의 동생이었던 기윤헌(奇允獻)의 집에 선계의 기록이 있었는데, 이괄의 난 때 소실되었다고 한다. 1688년(조선 숙종 24년) 족보를 개편할 때 이곡(李穀)이 지은 기황후(奇皇后)의 아버지 영안왕(榮安王) 기자오(奇子敖)의 행장(行狀)을 따라서 고려 인종 때 정2품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를 지낸 '''기자오의 5대조이자 기우성의 65대손 기순우(奇純祐)'''를 1세조로 기록하게 되었다.[2]
그러니까 정리하면 시조 기우성은 기자조선 건국자 기자의 48대손이고, 1세조로 모시고 있는 기순우는 기우성의 65대손이다.

1.2. 상세한 가문사


1세조 기순우의 아들인 2세조는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 기수전(奇守全)이며 3세조는 4형제로 기윤위(奇允偉), 기윤숙(奇允肅), 기필선(奇弼善), 기필준(奇弼俊)이 있었는데 이중 기윤위와 기윤숙이 고종(고려) 때 장군(將軍)으로서 이장대(李將大)의 난을 평정하고 여진족의 침입을 각각 격퇴하였다. 명종(고려) 때는 부원수(副元帥) 기탁성(奇卓誠)이 조위총(趙位寵)의 난을, 충렬왕 때는 기자오가 나얀(乃顔)의 난을 평정하였다.[3] 기자오의 딸은 1333년 원나라공녀로 끌려갔다가 1334년(충숙왕 복위 3년) 14세 때 원혜종의 후궁이 되어 40년(충혜왕 복위 1년) 제2황후로 책봉되면서 보현숙성황후 기씨(普顯淑聖皇后 奇氏), 줄여서 기황후가 되었다. 두산백과
고려사 등의 기록을 되짚어보면 기씨가 역사에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건 기탁성(奇卓誠)이라는 인물에서부터이다. 기탁성은 모습이 단아하고 궁술과 마술(馬術)에 능하여 의종(고려) 대에 하급 장교였던 교위(校尉)가 되었는데 말타기와 격구(擊毬)를 즐겨하는 의종의 눈에 들어 견룡(牽龍)이 되어 왕의 곁에 있게 되었다. 견룡이란 고려시대에 궁궐을 숙직하며 지키던 숙위군(宿衛軍)으로서 말단의 무관직이었으나 국왕과 가까이 할 수 있어 권문세가의 자제들이 자리를 다투는 자리였다고 한다. 즉 기탁성은 의종의 근위대가 된 것이다. 후에는 위장군(衛將軍)의 자리에까지 올랐다가 정중부무신정변에 가담하여 정중부를 중심으로 한 무신정권의 권신이 되었다. 기탁성은 명종(고려) 대에 무신정권에 반대하여 일어난 서경유수 조위총의 난을 진압하는 데 부원수로 참전하기도 했으며 이때 후에 무신정권의 집권자가 되는 최충헌을 발탁하여 그의 출세길을 열어주었다.
즉 정리해보면 기탁성 이전의 기씨는 크게 별다른 기록이 없다는 점이나 기탁성이 무신으로 커리어를 시작했다는 점으로 미루어볼 때 군반씨족 등의 하급귀족 정도에 해당하는 위치였던 걸로 보이나 기탁성이 라인을 잘 타 출세하자 기윤위, 기윤숙, 기필선, 기필준 등의 후손들도 관직에 올라 권세를 이어갔던 걸로 보인다. 그런데 이렇게 높은 관직에 올랐던 중요한 인물임에도 정작 세계나 가족관계, 비슷한 시대의 인물로 보이는 1세조 기순우나 2세조 기수전과의 관계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드라마 무인시대에서도 주요인물로 등장하였다.
원혜종의 황후인 기황후의 오빠였던 기철(奇轍)은 3세조 4형제 중 기윤숙의 현손(7세조)으로 원간섭기의 권문세족을 대표하는 인물로서 큰 권세를 누렸지만 성격이 포악하여 횡포를 부리다 몽골의 영향을 배제하는 배원(排元) 정책을 펴던 공민왕이 일으킨 병신정변에 의해 궁궐에서 연회를 즐기던 도중 측근 권겸(權謙)과 함께 철퇴에 맞아 죽었다. 당시 고려에 있던 기철의 형제와 아내와 자식들도 한꺼번에 몰살당했으며 측근들까지 죄다 숙청당했다. 그의 악명이 얼마나 높았는지 시신은 저잣거리에 버려졌고 흥분한 백성들이 칼로 난도질해 심하게 훼손되었다고 한다.
물론 모든 기씨가 기철 일파에 붙었던 것은 아니었고 공민왕의 심복이었던 신돈의 측근으로 활동하였던 기현(奇顯)과 기중수(奇仲脩) 부자도 있었다. 만약 저때 모든 기씨가 기철 일파와 함께하다 몰살당했다면 후삼국시대의 환(桓)씨처럼 아예 후손이 남지 못했을 것이다. 기현은 신돈에게 자택도 내줄 정도로 극렬 지지자였으나 신돈이 몰락할 때 다른 측근들과 함께 제거당했다. 기중수는 기현의 아들이었으며 역시 신돈의 몰락 때 함께 죽었다. 조선 전기의 청백리로 유명한 청파(靑坡) 기건(奇虔)이 바로 기현의 후손인데 황해도 연안군수(延安郡守)로 있을 때 주민들이 붕어잡이로 고충을 겪는 걸 보고 부임 3년 동안 한 번도 붕어를 먹지 않았다고 한다. 그 후 제주목사로 부임했는데 주민들이 전복따기로 괴로워하는 것을 보고 똑같이 전복을 한 번도 먹지 않았다고 한다.
기철의 아들인 기사인테무르(奇賽因帖木兒, 8세조)는 원나라 말기 요동성을 근거지로 한 군벌이었는데 공민왕이 아버지 기철을 죽이자 고려와 대립하였으나 제1차 요동정벌 때 고려의 원정군에게 진압당하여 몽골로 달아났다. 즉 요동 공손씨 정권과 유사한 요동 기씨 정권(...)이 짧으나마 존속한 적이 있다.
이외에도 기황후는 덕흥군 왕혜(王譓)를 고려의 왕으로, 조카인 기삼보노(奇三寶奴)를 고려의 세자로 삼기 위해 원나라의 군대로 고려를 침공하나, 패배하고 만다. 기삼보노가 기철의 아들이었는지는 불명이다.
조선 중기의 인물인 12세조 기찬(奇禶)은[4] 3세조 4형제 중 기필선의 후손으로 성종(조선) 대의 문신이며 13세조에 해당하는 아들 5형제로 파평 윤씨 소생인 기형(奇逈), 기원(奇遠)과 안동 권씨 소생인 기괄(奇适), 기진(奇進), 기준(奇遵)이 있었다. 기씨 중에서는 기철이 유명하지만 위에서 말했다시피 기철의 후손은 기사인테무르의 후손이 중국이나 몽골에 남아있다면 모를까 한국에서는 아예 끊겼고 현재 남아있는 기씨는 거의 대부분이 기묘사화 이후로 전국에 각각 흩어졌던 위 13세조 5형제의 후손이다.
기원의 후손 중에는 성리학자로 이름을 드러낸 호남의 은덕군자(隱德君子) 금강(錦江) 기효간(奇孝諫)과 송암(松巖) 기정익(奇挺翼)이 있으며, 조선 후기 성리학의 6대가로 일컬어지며 노사학파(蘆沙學派)에 일조한 기정진(奇正鎭)도 있다. 그가 강학하던 전라남도 장성군 진원면의 정사(精舍)인 담대헌(澹對軒)은 1924년 후손들이 중수하여 고산서원(高山書院)이라는 편액을 걸었다.
기진의 아들 중에는 성리학자로서 퇴계 이황과의 사단칠정논변으로 유명한 인물인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 14세조)이 있었다.
기준의 아들 중에는 기대승의 사촌형인 문신 가구(可久) 기대항(奇大恒)이 있었다. 기대항은 기묘사화로 인해 교살당한 기묘명현 기준의 아들이었기에 사림파의 동정을 사서 빠른 출세를 하였다. 높은 관직에 오른 뒤에는 명종(조선)의 교시를 받아 심의겸 등과 함께 당시 권세를 누리던 외척 이량 일파의 탄핵을 진두지휘하여 그를 몰락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이에 사림들을 보호한 공이 있다 하여 정견(貞堅)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허나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관찰사수령 시절에는 횡포를 많이 부려 백성들이 원망하였다는 기록이 있는 등 민간의 평은 영 좋지 못하다.
예전 기씨들이 기재되어 있던 고문서를 보면 윗부분이 설 립(立)으로 씌여있던 '竒'로 표기된 것이 많았으나 현대에는 윗부분이 큰 대(大)로 표기되어있는 '奇'를 사용한다. 둘 다 기씨를 뜻하므로 다른 성씨가 아님을 유념하자.
본관인 고양시덕양산 행주산성에는 기감천(奇甘川)이라는 우물이 있는데 행주 기씨의 시조가 태어난 곳이라는 전승이 내려온다. 기감천을 설명하는 팻말에는 옛날에 기씨가 그 일대에서 거주했었으며 기황후도 어릴 적에는 그 근처에서 살았다는 일설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역사상의 기록과의 비교를 통해 추정해볼 때 행주 기씨는 아무리 늦어도 호족들이 할거하던 후삼국시대에서 고려 초중기에는 이미 덕양산과 행주산성을 근거지로 삼았던 중소호족이었던 걸로 보인다.

1.2.1. 실존 인물


기자의 48대손 기우성의 후손(65대손, 즉 기자의 113대손) 중 하나인 기순우를 1세조로 하여 현재 26세손 우(宇), 27세손 도(度), 28세손 노(老), 29세손 호(鎬)가 많이 쓰인다.

1.3. 箕


기자의 후예라 일컬어진다. 행주를 본원으로 한다. 위의 기씨도 기자의 후손이라 일컬어지고 본원도 행주로 같고 최근의 인구조사 때 처음 나타난 성씨라 한자를 오기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있다. 1930년 인구조사 때에 3가구(경북 포항, 강원 인제, 평남의 덕천 등에 1 가구씩)가 나타났다. 1960년 조사에서는 인구가 134명으로 성별순위 258성 중 185위, 1975년도 조사에서는 249성 중 180위였다.

1.4. 한자 미상



1.5. 기씨를 예명으로 쓰는 인물


  • 기은세: 배우[5]
  • 기태영: 배우[6]

2. 기자기자조선의 왕들을 조상으로 삼는 성씨 목록



[1] 대표적으로 기성용이 있다.[2] 사실 기순우의 위에 한 명이 있는데 바로 그의 아버지인 기문유(奇文儒)이다.[3] 나얀은 몽골 제국의 시조인 칭기즈 칸의 동생 테무게 옷치긴의 후손으로 원나라를 세운 쿠빌라이 칸과 대립하다 몰락했다.[4] 넷상에는 기찬홍(奇禶弘)이라는 표기도 있으나 만가보에는 존재하지 않으며 동생인 기서(奇緖)도 외자 이름인 걸로 보아 오기인 것으로 보인다.[5] 본명은 변유미.[6] 본명은 김용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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